구역공과
TOTAL : 1473 PAGE : 99/105
2006-03-17
제11과선 (11) - 모세(1)-
히 11:24 - 26
읽을말씀 : 히 11:24 - 26 | 외울말씀 : 히 11:25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이나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하여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과연 모세는 마음 중심에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한 모세의 선(善)
애굽이 노예로 부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장 심하게 학대할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백성보다 더욱 왕성하게 번식하고 창성해지자 애굽 왕은 이를 두려워하여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모세도 이 명령에 따라 태어났을 때 죽임 당할 처지였으나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석 달간 모세를 숨겼습니다(히 11:23). 석 달이 지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모세의 어미는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지요.
마침 애굽의 공주가 강에 목욕을 하러 나왔다가 상자에 담긴 모세를 발견하고 건져내게 되었습니다. 강변에서 떠내려가는 모세를 지켜보던 누이 미리암의 소개로 모세의 친어머니 요게벳이 유모가 되었고 모세는 공주의 양자로서 왕궁에서 길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확한 하나님의 역사로 모세는 생명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양육되었지요.
당시 애굽은 앞서가는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머물러 있는 한 모세는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모세의 마음에 항상 떠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애굽 땅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항상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동족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나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만일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동족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행여 자신에게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여 모른 체하거나 그 자리를 피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잃어버릴지언정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았다면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비교적 견딜 힘이 있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 궁핍함을 겪게 되면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여 극복하기가 쉽지 않지요. 더구나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궁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온 모세가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계기로 모세는 왕궁을 뛰쳐나와 광야로 갔습니다. 화려한 왕궁 대신 집도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신세가 되어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하며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도망자의 몸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고난을 히브리서 11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받는 능욕과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한 것입니다.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善)
모세는 바로의 궁정을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양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어느 정도 생활이 정착되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서 비로소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인식하자 공허함과 적막함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들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왕궁에 있을 때와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어지는 것이 없음으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 드니 철저히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계신다' 하며 하나님이 계신 것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했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내가 갖고자 해도 가질 수가 없고 내가 움직이고자 해도 임의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우쳤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마음 중심에서 감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호흡할 수 있음도 감사했고 먹을 양식이 있음에도 감사했으며 때론 찬 이슬을 맞으며 광야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 할지라도 쉼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땅을 보며 그 땅을 바라볼 수 있음도 감사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음도 감사했으며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하여 그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정녕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자신이 취한다 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으로부터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위해 모세를 지도자로 부르실 때에 심히 자신이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고백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의 연단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 깊이에서 믿었기에 이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나는 왜 이 같은 연단을 받나? 내 연단이 심히도 혹독하니 어떻게 이 연단을 견뎌 낼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하여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무것도 아닌 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 시간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누가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다 하여 힘들어하지 않았고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기가 비워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하여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인데도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지는 않는지요.
잠언 17:3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하셨으니 연단을 받을 때에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크게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이나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하여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과연 모세는 마음 중심에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한 모세의 선(善)
애굽이 노예로 부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장 심하게 학대할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백성보다 더욱 왕성하게 번식하고 창성해지자 애굽 왕은 이를 두려워하여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모세도 이 명령에 따라 태어났을 때 죽임 당할 처지였으나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고 석 달간 모세를 숨겼습니다(히 11:23). 석 달이 지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모세의 어미는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냈지요.
마침 애굽의 공주가 강에 목욕을 하러 나왔다가 상자에 담긴 모세를 발견하고 건져내게 되었습니다. 강변에서 떠내려가는 모세를 지켜보던 누이 미리암의 소개로 모세의 친어머니 요게벳이 유모가 되었고 모세는 공주의 양자로서 왕궁에서 길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확한 하나님의 역사로 모세는 생명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양육되었지요.
당시 애굽은 앞서가는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머물러 있는 한 모세는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모세의 마음에 항상 떠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애굽 땅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항상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동족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나서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만일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동족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행여 자신에게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여 모른 체하거나 그 자리를 피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잃어버릴지언정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았다면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비교적 견딜 힘이 있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 궁핍함을 겪게 되면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여 극복하기가 쉽지 않지요. 더구나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궁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온 모세가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계기로 모세는 왕궁을 뛰쳐나와 광야로 갔습니다. 화려한 왕궁 대신 집도 없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신세가 되어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해야 하며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 지 모르는 도망자의 몸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고난을 히브리서 11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받는 능욕과 동일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한 것입니다.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善)
모세는 바로의 궁정을 나와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양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어느 정도 생활이 정착되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서 비로소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인식하자 공허함과 적막함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들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왕궁에 있을 때와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어지는 것이 없음으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마음이 드니 철저히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계신다' 하며 하나님이 계신 것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했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내가 갖고자 해도 가질 수가 없고 내가 움직이고자 해도 임의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우쳤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마음 중심에서 감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호흡할 수 있음도 감사했고 먹을 양식이 있음에도 감사했으며 때론 찬 이슬을 맞으며 광야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 할지라도 쉼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눈앞에 펼쳐진 땅을 보며 그 땅을 바라볼 수 있음도 감사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음도 감사했으며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하여 그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나왔던 것입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정녕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자신이 취한다 하여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으로부터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위해 모세를 지도자로 부르실 때에 심히 자신이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고백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의 연단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 깊이에서 믿었기에 이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나는 왜 이 같은 연단을 받나? 내 연단이 심히도 혹독하니 어떻게 이 연단을 견뎌 낼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하여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무것도 아닌 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 시간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누가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다 하여 힘들어하지 않았고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기가 비워졌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하여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인데도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지는 않는지요.
잠언 17:3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하셨으니 연단을 받을 때에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크게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10
제10과선 (10) - 사도 바울(2)-
롬 9:1-3
읽을말씀 : 롬 9:1-3 | 외울말씀 : 롬 9:3
교육목표 :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도 바울의 지극한 선에 대해 밝히 알고 온전히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불같은 성령의 사역을 이룰 수 있게 한다.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선의 분야는 한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더욱 짙은 농도로 하나님께 올려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도 바울의 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자신을 발견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사도 바울의 선(善)
1)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러므로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8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 역시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고후 11:28-29).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행할 때에 사도 바울은 얼마나 애통했던지요. 빌립보서 3:18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영혼을 사랑했기에 각처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1-3을 보면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단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를 전하는 사도 바울을 심히도 싫어하고 훼방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동맹한 사람들이 40여 명이나 되었지요(행 23:12-13).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이들이 구원받는 대신 자신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그렇게 되길 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 그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고 했으니 그의 영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 걷는가 하면 자신이 독사에게 물렸어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면서도 결코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고 모든 영광을 오직 주님께 돌렸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10에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한 마음을 지녔고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깨끗한 마음을 이뤘기에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을 많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천국도 보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얻게 될 상급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영의 것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으며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에 대해, 또한 천국과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밝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도 날로 더욱 승하게 되었고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잘 간직하며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들려 줌으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 절제할 능이 있었으므로 받지 못하고 이해 못할 사람들에게는 들려 주지 않았습니다.
2.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 오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기도 중에 영의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잘 간직하며 먼저 자신의 마음에 적용하려 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지 자신을 들레는 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마음을 지녔고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혀 있었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와 같은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입술의 말 한 마디라 할지라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주지 아니하였고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도 혹여 실족 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1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하면서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고린도후서 12:5에도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더해 주길 원하되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스스로 영의 것을 터득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모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내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던 것입니다.
혹여 여러분 중에는 "내가 기도해 보니 이렇더라" "내 마음에는 그렇게 주관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너무나 쉽게 말하지 않는지요? 물론 성령의 음성과 주관과 인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은 특별히 영으로 뛰어난 것처럼 들레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목자에게 기도받은 손수건을 얹고 기도하여 환자가 치료받은 것을 간증할 때에도 온전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는지, 아니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들레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지 않으며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진정 자신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중심에서 깨닫고 인정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더욱 담대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육으로는 연약해 보일 수 있어도 영으로는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고 능력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큰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커져만 갔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시고 권능도 주셔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백한 것처럼 사도 바울의 선을 온전히 본받아 참으로 권능 있는 일꾼으로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도 바울의 지극한 선에 대해 밝히 알고 온전히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불같은 성령의 사역을 이룰 수 있게 한다.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선의 분야는 한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더욱 짙은 농도로 하나님께 올려졌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도 바울의 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자신을 발견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사도 바울의 선(善)
1)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러므로 정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8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 역시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고후 11:28-29).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행할 때에 사도 바울은 얼마나 애통했던지요. 빌립보서 3:18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영혼을 사랑했기에 각처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1-3을 보면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단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를 전하는 사도 바울을 심히도 싫어하고 훼방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동맹한 사람들이 40여 명이나 되었지요(행 23:12-13).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이들이 구원받는 대신 자신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그렇게 되길 원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 그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고 했으니 그의 영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나 걷는가 하면 자신이 독사에게 물렸어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면서도 결코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고 모든 영광을 오직 주님께 돌렸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10에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한 마음을 지녔고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깨끗한 마음을 이뤘기에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을 많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천국도 보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얻게 될 상급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영의 것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으며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에 대해, 또한 천국과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밝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에 대한 사랑, 주님에 대한 사랑도 날로 더욱 승하게 되었고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잘 간직하며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들려 줌으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 절제할 능이 있었으므로 받지 못하고 이해 못할 사람들에게는 들려 주지 않았습니다.
2.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 오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기도 중에 영의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잘 간직하며 먼저 자신의 마음에 적용하려 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지 자신을 들레는 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면 주신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마음을 지녔고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혀 있었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와 같은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입술의 말 한 마디라 할지라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주지 아니하였고 능히 말할 수 있는 것이라도 혹여 실족 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1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하면서 고백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고린도후서 12:5에도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더해 주길 원하되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은 스스로 영의 것을 터득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모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내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던 것입니다.
혹여 여러분 중에는 "내가 기도해 보니 이렇더라" "내 마음에는 그렇게 주관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너무나 쉽게 말하지 않는지요? 물론 성령의 음성과 주관과 인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은 특별히 영으로 뛰어난 것처럼 들레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목자에게 기도받은 손수건을 얹고 기도하여 환자가 치료받은 것을 간증할 때에도 온전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는지, 아니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들레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지 않으며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진정 자신의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중심에서 깨닫고 인정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더욱 담대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육으로는 연약해 보일 수 있어도 영으로는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고 능력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큰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커져만 갔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시고 권능도 주셔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백한 것처럼 사도 바울의 선을 온전히 본받아 참으로 권능 있는 일꾼으로서 마지막 때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3-03
제9과선 (9) - 사도 바울 (1) -
고전 15:9-10
읽을말씀 : 고전 15:9-10 | 외울말씀 : 고전 15:10
교육목표 : 한번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서 귀히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엄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한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옥에 가두며 죽이기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요.
사도 바울은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곳마다 권능의 역사를 크게 베풀고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사도 바울
원래 사도 바울은 의가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다른 사람들을 누르기를 좋아하고 어떤 것에 대해 변론하기를 즐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22:3에 기록된대로 당대 최고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도무지 자기적인 의에 맞지 않았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의가 강할 뿐 아니라 한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바울에게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셨지요. 바울이 다메섹이라는 다른 도시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원정 가던 중에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전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말씀하시며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동안 눈으로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게 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은 바울의 선(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과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귀한 사명을 주셨으니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23-27에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 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끊임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결코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고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 속에 있다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고 많은 상급을 쌓게 하시며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마음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처음 믿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지만 과연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 하지만 과연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되어질 때 바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다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을 때 혹여 마음이 슬퍼지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자기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러한 마음이 들었던 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임한다면 과연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오직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었지요. '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의 마음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직접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고난을 받을 때에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곱고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한다는 의미
그러면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이요,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에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다 해도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받을 뻔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18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그러니 믿음의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심에 감사하고 주님을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므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정녕 큰 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리는 복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 바 되고 귀한 성령의 도구로 변화되어 크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한번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서 귀히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엄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한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옥에 가두며 죽이기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요.
사도 바울은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곳마다 권능의 역사를 크게 베풀고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사도 바울
원래 사도 바울은 의가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다른 사람들을 누르기를 좋아하고 어떤 것에 대해 변론하기를 즐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22:3에 기록된대로 당대 최고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도무지 자기적인 의에 맞지 않았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의가 강할 뿐 아니라 한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바울에게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셨지요. 바울이 다메섹이라는 다른 도시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원정 가던 중에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전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말씀하시며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동안 눈으로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게 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은 바울의 선(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과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귀한 사명을 주셨으니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23-27에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 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끊임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결코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고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 속에 있다 할지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고 많은 상급을 쌓게 하시며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마음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처음 믿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지만 과연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 하지만 과연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되어질 때 바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다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을 때 혹여 마음이 슬퍼지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자기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러한 마음이 들었던 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임한다면 과연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오직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었지요. '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의 마음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직접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고난을 받을 때에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곱고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한다는 의미
그러면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이요,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에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다 해도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요, 또한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받을 뻔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18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그러니 믿음의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심에 감사하고 주님을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므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정녕 큰 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리는 복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린 바 되고 귀한 성령의 도구로 변화되어 크게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2-24
제8과선 (8) - 나아만 -
눅 4:27
읽을말씀 : 눅 4:27 | 외울말씀 : 눅 4:27
교육목표 :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큰 권능을 행하는 선지자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마음이 선하여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라야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27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했습니다. 나아만의 행함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나라 곧 아람의 군대장관으로서 문둥병에 걸려 있었습니다(왕하 5:1). 그러나 문둥병은 불치병이기에 아무리 좋은 약과 유명한 의사는 물론 자신이 섬기는 신을 의존해 보아도 치료를 받지 못했지요.
이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여자아이가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말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나아만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고 나아만은 계집종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왕 다음가는 권세를 지닌 지체 높은 신분이지만 하찮은 종의 말도 흘려듣지 않을 만큼 마음이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고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전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일 나아만의 마음이 강퍅하다면 "네가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야." 하며 그 말을 무시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하고 전도할 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더욱이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든 세상에 의지해 보려고 하기 때문에 전도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2.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는 마음
나아만은 계집종이 알려 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모셔 와라' 하거나 서신을 띄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또한 열왕기하 5:5 후반절을 보면 '나아만이 곧 떠날 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지 않고 거두길 바라거나 심은 것 이상을 바라는 요행의 마음이 아니라 정녕 응답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직접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다만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기분이 상하여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했지요. 단지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는다고 하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은 자기적인 생각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엘리사 선지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말했지요(왕하 5:13).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권면의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소 그가 얼마나 선하고 겸비한 사람이었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들을 줄 알았고 그것이 옳고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넓고 큰마음을 지녔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종들이 나아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의 말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종들의 권면을 듣고 이내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지요.
영적으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는 완전수이며 요단 강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므로 '일곱 번 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아만은 세 번, 네 번 씻어도 낫지 않자 중도에 포기해 버리고 만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곱 번을 씻었고, 그 결과 문둥병을 치료받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되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지자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즉시로 문둥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왕하 5:14).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대하 20:20).
3. 받은 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변함없는 중심
누가복음 17: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한 사람만이 와서 사례하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자 할 때는 '치료받으면 생명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다.' 하고 고백하지만 막상 치료받은 후에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받은 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5:15에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했습니다. 치료받은 후에 엘리사 앞에 나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즉시로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섬기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왕하 5:17).
이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한 번 만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나아만을 택하여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갖되 더욱 행함으로 온전케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모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큰 권능을 행하는 선지자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마음이 선하여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라야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27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했습니다. 나아만의 행함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나라 곧 아람의 군대장관으로서 문둥병에 걸려 있었습니다(왕하 5:1). 그러나 문둥병은 불치병이기에 아무리 좋은 약과 유명한 의사는 물론 자신이 섬기는 신을 의존해 보아도 치료를 받지 못했지요.
이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여자아이가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말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나아만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고 나아만은 계집종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왕 다음가는 권세를 지닌 지체 높은 신분이지만 하찮은 종의 말도 흘려듣지 않을 만큼 마음이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고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전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일 나아만의 마음이 강퍅하다면 "네가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야." 하며 그 말을 무시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하고 전도할 때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더욱이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든 세상에 의지해 보려고 하기 때문에 전도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2.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는 마음
나아만은 계집종이 알려 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모셔 와라' 하거나 서신을 띄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또한 열왕기하 5:5 후반절을 보면 '나아만이 곧 떠날 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지 않고 거두길 바라거나 심은 것 이상을 바라는 요행의 마음이 아니라 정녕 응답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직접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다만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기분이 상하여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했지요. 단지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는다고 하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은 자기적인 생각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엘리사 선지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말했지요(왕하 5:13).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권면의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소 그가 얼마나 선하고 겸비한 사람이었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이라도 무시하지 않고 들을 줄 알았고 그것이 옳고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넓고 큰마음을 지녔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종들이 나아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의 말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나아만은 종들의 권면을 듣고 이내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키는 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었지요.
영적으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는 완전수이며 요단 강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므로 '일곱 번 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아만은 세 번, 네 번 씻어도 낫지 않자 중도에 포기해 버리고 만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곱 번을 씻었고, 그 결과 문둥병을 치료받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되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지자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즉시로 문둥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왕하 5:14).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대하 20:20).
3. 받은 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변함없는 중심
누가복음 17: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한 사람만이 와서 사례하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자 할 때는 '치료받으면 생명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다.' 하고 고백하지만 막상 치료받은 후에는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받은 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5:15에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했습니다. 치료받은 후에 엘리사 앞에 나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즉시로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섬기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왕하 5:17).
이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한 번 만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나아만을 택하여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갖되 더욱 행함으로 온전케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모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2-17
제7과선 (7) - 다니엘과 세 친구 (2) -
단 3:17-18, 6:21-22
읽을말씀 : 단 3:17-18, 6:21-22 | 외울말씀 : 단 3:18, 6:21-22
교육목표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보호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 타협치 않으며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참으로 선하다 인정하셨으며 더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해 주셨다 했습니다.
세상에도 자기 보기에 의로운 명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선이 결여된 '의'는 온전한 의가 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켰던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얼마나 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감동 받으셨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한 입술의 고백과 그러한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선한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다니엘의 세 친구의 선(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므로 풀무 불에 던져지는 시험을 만났습니다. 왕이 크게 진노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이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치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인정하셨는데 이어지는 고백을 보면 선의 감동이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지 않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을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또한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며 자신이 행할 바를 행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이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 상황이라 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해도 서운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고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받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족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기에 당장은 내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해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또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인도하셔도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코 변하지 않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참 선하구나!' 인정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오히려 더욱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신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 불에 던짐 받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믿음의 증거를 선 가운데 나타내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삼으시고 세 사람을 더욱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영광도 크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생각과 달리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고 심은 것 자체를 족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변함없이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이상의 크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다니엘의 선(善)
1)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다니엘은 바사 왕 다리오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세 총리 중에 머리로서 왕 다음 가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를 시기한 악한 무리들은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했으나 아무런 허물을 얻지 못하게 되자 율법을 따라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계략을 꾸몄습니다. 곧 다니엘이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이용하여 30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정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으니 왕에게 악한 무리들의 궤계를 고하여 그 계략을 분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에게 고하지도 아니하고 악한 무리들에게 대항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로 인해 자신이 큰 해를 받아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다니엘은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온전히 믿었는데, 바로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여러분이 거침없이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말들은 자연히 마음에서 걸러지게 되며,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달리 직접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이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선한 마음입니다.
2)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이미 악한 무리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은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감사하며 기도했고, 이에 악한 무리들은 즉시로 왕에게 나아가 다니엘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지요. 왕은 그제서야 그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찌하든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썼지만 악한 무리들이 재촉하니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는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말합니다. 왕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므로 이처럼 말한 것은 아니지만, 다니엘이 평소에 얼마나 왕에게 하나님에 대해 잘 심어드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은 너무나 총애하는 신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사자 굴에 던져야 하기에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왕은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고 기악을 그쳤으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날 새벽이 되자 왕은 급히 다니엘이 던져진 굴에 가서 슬피 소리를 질러 다니엘을 불러 보았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상식대로라면 다니엘은 이미 생명을 잃었을 상황이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 굴 속으로부터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는 다니엘의 음성이 울려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구구절절이 오히려 왕의 마음을 위로하며, 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선한 고백이지요. 다니엘에게는 왕에 대한 어떠한 원망도, 서운함도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왕이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슬퍼할까를 염려했지요. 그래서 새벽같이 달려온 왕에게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므로 먼저는 왕을 안심시켜 드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도 이해가 되며 상대가 조금도 민망하지 않도록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어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선대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함이 이뤄지고 천국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과 같이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므로 죽음이나 어떠한 재앙도 피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더욱 선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이 항상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보호받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 타협치 않으며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참으로 선하다 인정하셨으며 더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해 주셨다 했습니다.
세상에도 자기 보기에 의로운 명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선이 결여된 '의'는 온전한 의가 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켰던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의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얼마나 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감동 받으셨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한 입술의 고백과 그러한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선한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다니엘의 세 친구의 선(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므로 풀무 불에 던져지는 시험을 만났습니다. 왕이 크게 진노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이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치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인정하셨는데 이어지는 고백을 보면 선의 감동이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지 않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을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또한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며 자신이 행할 바를 행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이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 상황이라 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이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해도 서운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고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받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족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기에 당장은 내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해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또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인도하셔도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코 변하지 않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참 선하구나!' 인정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오히려 더욱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신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 불에 던짐 받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믿음의 증거를 선 가운데 나타내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삼으시고 세 사람을 더욱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영광도 크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생각과 달리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고 심은 것 자체를 족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변함없이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이상의 크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다니엘의 선(善)
1)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다니엘은 바사 왕 다리오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세 총리 중에 머리로서 왕 다음 가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를 시기한 악한 무리들은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했으나 아무런 허물을 얻지 못하게 되자 율법을 따라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계략을 꾸몄습니다. 곧 다니엘이 하루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이용하여 30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신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정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으니 왕에게 악한 무리들의 궤계를 고하여 그 계략을 분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에게 고하지도 아니하고 악한 무리들에게 대항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로 인해 자신이 큰 해를 받아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다니엘은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온전히 믿었는데, 바로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여러분이 거침없이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말들은 자연히 마음에서 걸러지게 되며,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달리 직접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이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선한 마음입니다.
2)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이미 악한 무리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은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감사하며 기도했고, 이에 악한 무리들은 즉시로 왕에게 나아가 다니엘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지요. 왕은 그제서야 그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제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찌하든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썼지만 악한 무리들이 재촉하니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는 명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말합니다. 왕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므로 이처럼 말한 것은 아니지만, 다니엘이 평소에 얼마나 왕에게 하나님에 대해 잘 심어드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왕은 너무나 총애하는 신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사자 굴에 던져야 하기에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왕은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고 기악을 그쳤으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날 새벽이 되자 왕은 급히 다니엘이 던져진 굴에 가서 슬피 소리를 질러 다니엘을 불러 보았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상식대로라면 다니엘은 이미 생명을 잃었을 상황이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 굴 속으로부터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는 다니엘의 음성이 울려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구구절절이 오히려 왕의 마음을 위로하며, 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선한 고백이지요. 다니엘에게는 왕에 대한 어떠한 원망도, 서운함도 없었고,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왕이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슬퍼할까를 염려했지요. 그래서 새벽같이 달려온 왕에게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므로 먼저는 왕을 안심시켜 드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도 이해가 되며 상대가 조금도 민망하지 않도록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어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선대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함이 이뤄지고 천국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과 같이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므로 죽음이나 어떠한 재앙도 피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선한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속히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더욱 선을 사모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이 항상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2-10
제6과선 (6) - 다니엘과 세 친구 (1) -
단 6:10
읽을말씀 : 단 6:10 | 외울말씀 : 단 6:10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선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원래 유다 지파의 왕족과 귀족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그 선을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결과였습니다.
신명기 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은 어떠한 것일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하는 마음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게 하고 왕의 진미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발탁되었는데 우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진미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적으로 채식을 하게 한 후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하여 보라는 것이었지요. 환관장이 다니엘의 제안대로 하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했으며 왕의 진미를 먹은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좇고자 힘쓰니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1:17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한 대로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된 신분에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들도 싫어하였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을 금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엄히 경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 홀로 경배 받기 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 종교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는데 중심이 선한 정도에 따라 행함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간의 질서에 대한 것도 육의 속성이 남아 있으면 범죄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철저히 금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관이나 각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꺼내어 쓰고 다시 채워 넣었거나 그 금액이 아무리 적었다 할지라도 일단 하나님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을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신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준행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으로, 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지키는 사람도 있지요. 만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의 신분임에도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굳이 채식을 했던 중심의 선을 본받아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의 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마음
다니엘과 세 친구가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이 섬기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짐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자 왕은 심히 분노하여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며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지요. 이를 지켜 본 왕은 너무나 놀라며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인정했고 세 사람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서 왕의 사랑을 받으니 악한 무리들이 다니엘을 모함하여 왕으로 하여금 금령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국 금령에 따라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과정을 지켜 본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다니엘을 모함한 무리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로 잡혀와 어렵고 힘든 신세가 되었을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그 나라의 높은 자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방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 절대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니엘의 세 친구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셨을까요? 또한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평소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향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참으로 인간 경작의 보람을 느끼며 너무도 크게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본교회 당회장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아시기에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었고 또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었기에 육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세상적인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담대하게 진리를 외쳤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에 가라 하실 때도 전혀 주저함이 없이 나아갔고 법적으로 복음 전파가 금지된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담대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무수한 영혼들이 치료받고 구원에 이르러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에 선을 쌓으며 신속히 최고의 선에 이르며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선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원래 유다 지파의 왕족과 귀족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그 선을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결과였습니다.
신명기 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은 어떠한 것일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하는 마음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게 하고 왕의 진미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발탁되었는데 우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진미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적으로 채식을 하게 한 후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하여 보라는 것이었지요. 환관장이 다니엘의 제안대로 하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했으며 왕의 진미를 먹은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좇고자 힘쓰니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1:17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한 대로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된 신분에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들도 싫어하였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을 금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엄히 경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 홀로 경배 받기 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 종교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는데 중심이 선한 정도에 따라 행함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간의 질서에 대한 것도 육의 속성이 남아 있으면 범죄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철저히 금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관이나 각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꺼내어 쓰고 다시 채워 넣었거나 그 금액이 아무리 적었다 할지라도 일단 하나님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을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신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준행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으로, 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지키는 사람도 있지요. 만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의 신분임에도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굳이 채식을 했던 중심의 선을 본받아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의 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마음
다니엘과 세 친구가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이 섬기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짐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자 왕은 심히 분노하여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며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지요. 이를 지켜 본 왕은 너무나 놀라며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인정했고 세 사람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서 왕의 사랑을 받으니 악한 무리들이 다니엘을 모함하여 왕으로 하여금 금령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국 금령에 따라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짐을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과정을 지켜 본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다니엘을 모함한 무리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로 잡혀와 어렵고 힘든 신세가 되었을 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그 나라의 높은 자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방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 절대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니엘의 세 친구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셨을까요? 또한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평소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향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참으로 인간 경작의 보람을 느끼며 너무도 크게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본교회 당회장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아시기에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었고 또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었기에 육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세상적인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담대하게 진리를 외쳤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에 가라 하실 때도 전혀 주저함이 없이 나아갔고 법적으로 복음 전파가 금지된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담대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무수한 영혼들이 치료받고 구원에 이르러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에 선을 쌓으며 신속히 최고의 선에 이르며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2-03
제5과선 (5) - 다윗 -
삼상 26:23
읽을말씀 : 삼상 26:23 | 외울말씀 : 삼상 26:23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선의 감동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왕이 되면서 점점 교만해져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가자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지요(삼상 16장). 사무엘 선지자는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인 엘리압을 주목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이새의 아들 중 가장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동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갔던 선(善)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대단한 용사였지요.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그들은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하며, 사울 왕에게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맨몸으로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며 물맷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니 다윗의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그대로 쓰러졌고 이스라엘 군대는 힘을 얻어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18) 하신 말씀처럼 골리앗이 전혀 두렵지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잠잠히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아니며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해 용납지 않으시고 과감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윗처럼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선대하되 감동을 주는 선(善)
다윗과 사울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여인들이 환영하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니 사울의 시기심이 발동되었습니다. 그래서 악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 주던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을 죽이려고 전쟁터에 보내기도 했으며, 집요하게 다윗을 찾아다니며 잡아 죽이고자 했지요. 그런데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다윗이 은신처로 숨어 있던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고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했지요. 그리고 자기 사람들에게도 "절대로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 명했습니다.
또한 사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울에게 지극히 겸비하고 선한 말로써 결코 왕을 해칠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자 사울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사울은 마음이 심히 악하여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울의 일행이 길가에 진을 치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다윗은 깊이 잠든 사울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청하였지요.
이에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멀찍이 가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도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말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에게도 선대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도의상 한 번은 살려 보냈는데 상대가 다시 악으로 나올 때 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선을 행하되 변함없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울을 이어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다 할지라도 '내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며 자기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도록 온전히 맡겼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사울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는 선(善)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당시는 성령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렸던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다윗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더 온전케 될 수 있도록 연단을 허락하셨는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들었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하시며 다윗을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고백합니다. 이에 나단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하며 연단이 따를 것을 알려 주었고 이후 다윗은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받지만 그 연단을 감사함으로 잘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의 분야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했으며, 주어진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 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마음이 교만한 것이요,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린 소자가 지적을 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함으로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치던 중 시므이란 사람이 자신과 그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할 때의 일입니다. 신하 중 한 명이 당장 시므이를 처치하겠다고 했으나 다윗은 이를 만류했지요(삼하 16:11-12). 다윗은 이처럼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연단을 통해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면서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욥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면서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했던 것처럼(욥 23:10)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되지요.
다윗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연단도 신속히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겪어야 했지만 선 가운데 잘 통과하니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 온전한 선을 이루시되 날마다 선한 것을 보고 듣기를 즐겨하며 선의 감동함 가운데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선의 감동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왕이 되면서 점점 교만해져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가자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지요(삼상 16장). 사무엘 선지자는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인 엘리압을 주목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이새의 아들 중 가장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동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갔던 선(善)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대단한 용사였지요.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그들은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하며, 사울 왕에게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맨몸으로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서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며 물맷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니 다윗의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그대로 쓰러졌고 이스라엘 군대는 힘을 얻어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18) 하신 말씀처럼 골리앗이 전혀 두렵지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잠잠히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아니며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해 용납지 않으시고 과감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윗처럼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선대하되 감동을 주는 선(善)
다윗과 사울이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여인들이 환영하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니 사울의 시기심이 발동되었습니다. 그래서 악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 주던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을 죽이려고 전쟁터에 보내기도 했으며, 집요하게 다윗을 찾아다니며 잡아 죽이고자 했지요. 그런데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다윗이 은신처로 숨어 있던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때에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고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했지요. 그리고 자기 사람들에게도 "절대로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 명했습니다.
또한 사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울에게 지극히 겸비하고 선한 말로써 결코 왕을 해칠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자 사울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사울은 마음이 심히 악하여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울의 일행이 길가에 진을 치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다윗은 깊이 잠든 사울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청하였지요.
이에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멀찍이 가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도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말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에게도 선대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도의상 한 번은 살려 보냈는데 상대가 다시 악으로 나올 때 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선을 행하되 변함없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울을 이어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다 할지라도 '내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며 자기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도록 온전히 맡겼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사울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는 선(善)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당시는 성령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렸던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다윗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더 온전케 될 수 있도록 연단을 허락하셨는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들었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하시며 다윗을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고백합니다. 이에 나단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하며 연단이 따를 것을 알려 주었고 이후 다윗은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받지만 그 연단을 감사함으로 잘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의 분야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했으며, 주어진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 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마음이 교만한 것이요,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린 소자가 지적을 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함으로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치던 중 시므이란 사람이 자신과 그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할 때의 일입니다. 신하 중 한 명이 당장 시므이를 처치하겠다고 했으나 다윗은 이를 만류했지요(삼하 16:11-12). 다윗은 이처럼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연단을 통해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면서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욥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면서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했던 것처럼(욥 23:10)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되지요.
다윗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연단도 신속히 통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겪어야 했지만 선 가운데 잘 통과하니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본받아 더욱 온전한 선을 이루시되 날마다 선한 것을 보고 듣기를 즐겨하며 선의 감동함 가운데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1-27
제4과선 (4) - 요나단 -
삼상 19:4-5
읽을말씀 : 삼상 19:4-5 | 외울말씀 : 삼상 19:4
교육목표 :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을 살펴봄으로 스스로 범죄치 아니할 뿐 아니라 서로를 영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맏아들인 요나단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볼 때 다윗과 요나단은 적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으며 친구를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다고 합니다(삼상 18:1, 삼하 1:26).
이것은 다윗의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요나단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던 요나단
다윗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이방 족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이들을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지요.
날이 갈수록 사울 왕의 시기심은 심해져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하게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그의 집까지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을 애매히 죽이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9:4-5을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하였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선(善)인지요.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과 같은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이니 사울 왕의 말을 거역하고 친구 다윗을 옹호하는 것은 육적으로는 불효이자 불충이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이미 하나님의 싫어하신 바가 되었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받아들여 다윗을 도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30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영광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 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일을 이뤄 가는 두 부서가 있다고 할 때, A라는 부서가 어떠한 일을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만들어진 B라는 부서가 어떤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A부서가 그동안 해 놓은 것을 잘 이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많은 일들이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때 B부서가 어떤 자료나 인력, 기술 등의 협조를 A부서에 요청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요나단이나 세례 요한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예나 칭찬을 얻지 못한다 해도 소금처럼 아무 형체도 없이 녹아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큰 악을 막기 위해 살기등등한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비록 사울이 악할지라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어찌하든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거듭 간청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왕이 그릇 행할 때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왕 앞에 나아가 바른 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들도 사망의 길로 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요?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나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윗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녕 윗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먼저는 허물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잠 17:9). 그런데 명백한 비진리를 행한 것도 아닌데, 내 의나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하며 윗분을 내 임의로 판단하여 윗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퍼트린다면 이는 마음이 얼마나 선치 못하고 사랑이 없은 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설령 윗분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로 갈지라도 윗분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으로 하여금 더욱 훼방할 거리를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건이 아니다." 하고 물러서서 방관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또한 윗분이니까 말하기 어려워서, 또는 내가 그 말을 꺼냄으로 인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묵인하고 있다면 이 또한 윗분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선일까요?
먼저는 진리를 아뢸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가 질서상 머리된 분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선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면 윗분도 마음 상하지 않으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아랫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경우, 성도님들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어떻게든 성도님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내 할 바를 다 했다.' 하지 않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지요.
또한 실질적인 사랑의 행함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섬김으로 성도들이 범죄치 않고 더 충만하게 달려 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구제를 통해 막아질 일이라면 구제를 해서 범죄를 막기도 하는데,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필요한 데만 다 쓰고 십일조를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또 죄를 범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아예 십일조까지 드릴 수 있도록 넉넉하게 구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최선을 다해 성도들이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와주어도 또 죄를 짓는 성도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다시금 마음에 품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기도하면 기가 빠질지라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거나 옳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지요.
3)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선
선한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로서의 도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버지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은 결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생사를 함께함으로 도리를 다했던 것을 바로 선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도리를 좇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라고 잘못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악함을 알았고 아버지가 범죄치 않도록 수차례 간청을 했습니다. 즉 요나단이 자녀된 입장에서 멸망 길로 가는 아버지를 자신마저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지 사울을 동조하거나 사울의 악함을 몰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범죄치 아니하며 더욱 신속히 온전한 선에 이르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의 대열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을 살펴봄으로 스스로 범죄치 아니할 뿐 아니라 서로를 영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맏아들인 요나단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볼 때 다윗과 요나단은 적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으며 친구를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다고 합니다(삼상 18:1, 삼하 1:26).
이것은 다윗의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요나단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던 요나단
다윗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이방 족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이들을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지요.
날이 갈수록 사울 왕의 시기심은 심해져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하게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그의 집까지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을 애매히 죽이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9:4-5을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하였는데 얼마나 아름다운 선(善)인지요.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과 같은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이니 사울 왕의 말을 거역하고 친구 다윗을 옹호하는 것은 육적으로는 불효이자 불충이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이미 하나님의 싫어하신 바가 되었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받아들여 다윗을 도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30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영광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 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일을 이뤄 가는 두 부서가 있다고 할 때, A라는 부서가 어떠한 일을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만들어진 B라는 부서가 어떤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A부서가 그동안 해 놓은 것을 잘 이용하면 짧은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많은 일들이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때 B부서가 어떤 자료나 인력, 기술 등의 협조를 A부서에 요청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요나단이나 세례 요한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예나 칭찬을 얻지 못한다 해도 소금처럼 아무 형체도 없이 녹아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큰 악을 막기 위해 살기등등한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비록 사울이 악할지라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어찌하든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거듭 간청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왕이 그릇 행할 때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왕 앞에 나아가 바른 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들도 사망의 길로 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요?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나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윗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녕 윗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먼저는 허물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잠 17:9). 그런데 명백한 비진리를 행한 것도 아닌데, 내 의나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하며 윗분을 내 임의로 판단하여 윗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퍼트린다면 이는 마음이 얼마나 선치 못하고 사랑이 없은 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설령 윗분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로 갈지라도 윗분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으로 하여금 더욱 훼방할 거리를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건이 아니다." 하고 물러서서 방관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또한 윗분이니까 말하기 어려워서, 또는 내가 그 말을 꺼냄으로 인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묵인하고 있다면 이 또한 윗분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선일까요?
먼저는 진리를 아뢸 수 있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가 질서상 머리된 분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선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면 윗분도 마음 상하지 않으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아랫 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의 경우, 성도님들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어떻게든 성도님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내 할 바를 다 했다.' 하지 않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지요.
또한 실질적인 사랑의 행함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섬김으로 성도들이 범죄치 않고 더 충만하게 달려 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구제를 통해 막아질 일이라면 구제를 해서 범죄를 막기도 하는데,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필요한 데만 다 쓰고 십일조를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또 죄를 범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아예 십일조까지 드릴 수 있도록 넉넉하게 구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최선을 다해 성도들이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와주어도 또 죄를 짓는 성도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다시금 마음에 품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기도하면 기가 빠질지라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거나 옳지 못한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지요.
3)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선
선한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로서의 도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버지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은 결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생사를 함께함으로 도리를 다했던 것을 바로 선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도리를 좇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라고 잘못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악함을 알았고 아버지가 범죄치 않도록 수차례 간청을 했습니다. 즉 요나단이 자녀된 입장에서 멸망 길로 가는 아버지를 자신마저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지 사울을 동조하거나 사울의 악함을 몰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범죄치 아니하며 더욱 신속히 온전한 선에 이르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의 대열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1-20
제3과선 (3) - 룻 -
룻 1:16-17
읽을말씀 : 룻 1:16-17 | 외울말씀 : 룻 1:16-17
교육목표 :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룻과 같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구약 성경 룻기를 보면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선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룻은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善)'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룻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룻이 어떠한 선의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이처럼 축복된 여인이 되었을까요?
1.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은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서 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음을 맞는 비극을 겪게 되자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 자신뿐이었지요. 이때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시어머니는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고백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 말한다 해도 시어머니가 그처럼 강권하니 동서인 오르바처럼 못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룻의 선(善)을 인정하시는 이유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어른을 존중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선함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좇아간다면 시어머니의 고향이지만 룻에게는 낯선 땅이라 당장 먹고 살 뚜렷한 방안도 없으며,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드셨기에 룻이 모든 생활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가 많은데 여러분이라면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이처럼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가끔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받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는 상담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분명히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상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음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든지, 그 직장에서 좋은 기술을 배웠기에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었다든지, 그래서 지금은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꼭 이직(移職)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내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어떠한 유익을 포기하면서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계명들을 지키게 되지요.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한 마음이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은혜의 체험을 하면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십분의 일만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선한 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이 있으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믿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자유의지 가운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후로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하루 종일 주운 이삭을 가지고 시어머니를 공궤하면서도 기쁘게 여겼고 종일 있었던 일들을 조근조근 상세히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을 아내로 삼게 되었고 룻은 영육간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룻 2:20, 레 25:25). 룻이 보아스에게서 낳은 아들 오벳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이며, 이로써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룻처럼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더구나 끝까지 온전한 선을 지키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러한 세태를 잘 나타내 주는 말이지요. 자식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핀다 해도 시간이 오래 되고, 많은 물질이 들어가면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지만 섬김을 받는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자식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이지요. 서로간에 이러한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얘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참된 사랑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생명이 다하기까지 도리를 좇는 선을 행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이므로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내 평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한 분들은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합 3:17-19).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육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혹은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만일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좇는 사람이라면 영육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룻과 같이 도리를 좇는 선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랑과 축복을 넘치게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룻과 같이 항상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구약 성경 룻기를 보면 룻이라는 이방 여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선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룻은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善)'을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룻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룻이 어떠한 선의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이처럼 축복된 여인이 되었을까요?
1.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은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서 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음을 맞는 비극을 겪게 되자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 자신뿐이었지요. 이때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시어머니는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고백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 말한다 해도 시어머니가 그처럼 강권하니 동서인 오르바처럼 못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룻의 선(善)을 인정하시는 이유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어른을 존중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선함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좇아간다면 시어머니의 고향이지만 룻에게는 낯선 땅이라 당장 먹고 살 뚜렷한 방안도 없으며,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드셨기에 룻이 모든 생활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가 많은데 여러분이라면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이처럼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은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가끔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받았는데 어떻게 할까요?"라는 상담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분명히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상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음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든지, 그 직장에서 좋은 기술을 배웠기에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었다든지, 그래서 지금은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꼭 이직(移職)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내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어떠한 유익을 포기하면서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계명들을 지키게 되지요.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한 마음이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은혜의 체험을 하면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십분의 일만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선한 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이 있으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믿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자유의지 가운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후로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처지였기에 하루 종일 주운 이삭을 가지고 시어머니를 공궤하면서도 기쁘게 여겼고 종일 있었던 일들을 조근조근 상세히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을 아내로 삼게 되었고 룻은 영육간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룻 2:20, 레 25:25). 룻이 보아스에게서 낳은 아들 오벳이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이며, 이로써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룻처럼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더구나 끝까지 온전한 선을 지키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러한 세태를 잘 나타내 주는 말이지요. 자식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핀다 해도 시간이 오래 되고, 많은 물질이 들어가면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하지만 섬김을 받는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자식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이지요. 서로간에 이러한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얘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참된 사랑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생명이 다하기까지 도리를 좇는 선을 행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이므로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내 평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한 분들은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합 3:17-19).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육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혹은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만일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좇는 사람이라면 영육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룻과 같이 도리를 좇는 선을 온전히 이루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랑과 축복을 넘치게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1-13
제2과선 (2) - 선의 단계 (2) -
롬 12:2
읽을말씀 : 롬 12:2 | 외울말씀 : 롬 12:2
교육목표 : 선의 3단계와 4단계에 대해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선의 1, 2단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의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1단계의 선, 마음에 어떠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을 넘어선 3, 4단계의 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선을 행하여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의 3단계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단지 악으로 맞서 대항치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의 단계라면, 악으로 대항치 않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의 단계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선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온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대로 육을 온전히 벗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도 온전히 임한 상태이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39-42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원수같이 대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하면 그의 마음을 녹여 화평을 이룰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의 깊은 단계에 들어갈수록 현실에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수고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마음이 선으로 채워진 사람은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그것을 힘들다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선의 2단계에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간다고 했고 또 시험이 온다 해도 그것을 선으로 통과하므로 오히려 축복을 받게 된다 했지요.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파할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악으로 나온 상대의 마음이 선한 입술의 말과 행함에 감동을 받아 악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너무나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그 상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선이란 단지 착해서 져주고 다 내어주는 연약한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도 파해 버리는 큰 위력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도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다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도 오직 지극한 섬김의 말로 왕에게 고합니다.
다니엘 6:21-22에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지요.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얼마나 왕의 심금을 울렸겠습니까. 다니엘 6:23에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즉각 징벌하고 다니엘을 영화롭게 했을 뿐 아니라, 온 나라에 다니엘의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린 것을 봅니다.
이러한 차원의 선에 이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선이 있습니다. 다니엘 역시 선의 3단계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루어 새예루살렘에서도 존귀한 자리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는지요?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했으니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 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악의 모양을 더욱 신속히 벗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 자체가 선으로 일궈져서 선한 말과 선한 행실이 나오는 것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 간다면 선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을 행하면 자연히 미움이 떠나는 것처럼, 선으로 생각하고 선으로 말하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그만큼 악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일을 동시에 하되 악이 온전히 벗어졌다면 그때가 비로소 선의 2단계입니다. 그러니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한 말이나 선한 행함이 나올 수는 있지요. 그런데 때론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섬김의 행함이 선의 2단계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입술의 말과 선한 행함이 항상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나는 상대가 악으로 나와도 마음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그에게 오히려 선한 말을 했으니 선의 3단계구나'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상대에게도 항상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그를 선대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2. 생명도 아낌없이 주는 선의 4단계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인 선의 4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바로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한 화목 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요, 의인들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선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다 흘리며 죽으시기까지 받으신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더 나아가 참으로 선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하나님의 참자녀를 얻으시고자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가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이미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군병들이 씌운 가시 면류관과 잔인한 채찍질로 인해 온몸은 피가 낭자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키보다 크고 심히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힘겹게 처형 장소인 골고다 언덕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고난 받으시는 이유는 이사야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시므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속하셨습니다. 또한 잔혹한 채찍에 맞으신 것도 우리가 모든 질병에서 나음을 입게 하려 하심이지요. 그 고통스런 가시관을 쓰신 것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속하시기 위함이요,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것은 행함으로 짓는 모든 죄를 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죄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최후에는 생명까지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예수님께서 정녕 우리에게 원하셨던 바를 꼭 이뤄드려야 하겠습니다. 바로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자녀, 마음이 참으로 선하고 온전한 영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예수님처럼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에 이른 분들이 나오는데 바로 모세 선지자를 들 수 있지요. 출애굽기 32:32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을 거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세 선지자가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걸어서 건너는 등의 많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케 해 줬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늘 불평했고, 모세를 원망했으며 심지어는 모세를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이런 백성들인데도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할 상황이 되자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도 모세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였지요. 로마서 9:3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들'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그들은 당시 심히도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이지요. 심지어 유대인 가운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 에녹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의 차원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권세와 권능도 받아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의 가장 아름다운 처소인 새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좌에 더 가까이 거하여 세세토록 큰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더욱 차원 높은 선을 사모하여 온전한 선의 단계로 신속히 들어오시기 바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선의 3단계와 4단계에 대해 알아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룸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지난 시간에는 선의 1, 2단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의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1단계의 선, 마음에 어떠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을 넘어선 3, 4단계의 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선을 행하여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의 3단계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단지 악으로 맞서 대항치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의 단계라면, 악으로 대항치 않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을 선으로 갚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의 단계라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선의 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온 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대로 육을 온전히 벗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도 온전히 임한 상태이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39-42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마음 중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원수같이 대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하면 그의 마음을 녹여 화평을 이룰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의 깊은 단계에 들어갈수록 현실에서는 자신을 희생하고 수고해야 하는 일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마음이 선으로 채워진 사람은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그것을 힘들다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선의 2단계에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간다고 했고 또 시험이 온다 해도 그것을 선으로 통과하므로 오히려 축복을 받게 된다 했지요.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파할 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악으로 나온 상대의 마음이 선한 입술의 말과 행함에 감동을 받아 악을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너무나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그 상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따라서 선이란 단지 착해서 져주고 다 내어주는 연약한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도 파해 버리는 큰 위력을 지녔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도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다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도 오직 지극한 섬김의 말로 왕에게 고합니다.
다니엘 6:21-22에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지요.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얼마나 왕의 심금을 울렸겠습니까. 다니엘 6:23에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이었더라"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즉각 징벌하고 다니엘을 영화롭게 했을 뿐 아니라, 온 나라에 다니엘의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린 것을 봅니다.
이러한 차원의 선에 이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선이 있습니다. 다니엘 역시 선의 3단계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을 이루어 새예루살렘에서도 존귀한 자리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는지요?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했으니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 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악의 모양을 더욱 신속히 벗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음 자체가 선으로 일궈져서 선한 말과 선한 행실이 나오는 것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 간다면 선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을 행하면 자연히 미움이 떠나는 것처럼, 선으로 생각하고 선으로 말하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그만큼 악도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일을 동시에 하되 악이 온전히 벗어졌다면 그때가 비로소 선의 2단계입니다. 그러니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선한 말이나 선한 행함이 나올 수는 있지요. 그런데 때론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섬김의 행함이 선의 2단계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입술의 말과 선한 행함이 항상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나는 상대가 악으로 나와도 마음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고 그에게 오히려 선한 말을 했으니 선의 3단계구나'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상대에게도 항상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그를 선대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2. 생명도 아낌없이 주는 선의 4단계
가장 높은 차원의 선인 선의 4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바로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한 화목 제물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요, 의인들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의 선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다 흘리며 죽으시기까지 받으신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죄인이었던 우리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더 나아가 참으로 선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하나님의 참자녀를 얻으시고자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가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이미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군병들이 씌운 가시 면류관과 잔인한 채찍질로 인해 온몸은 피가 낭자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키보다 크고 심히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힘겹게 처형 장소인 골고다 언덕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고난 받으시는 이유는 이사야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시므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속하셨습니다. 또한 잔혹한 채찍에 맞으신 것도 우리가 모든 질병에서 나음을 입게 하려 하심이지요. 그 고통스런 가시관을 쓰신 것은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속하시기 위함이요,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것은 행함으로 짓는 모든 죄를 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죄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최후에는 생명까지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예수님께서 정녕 우리에게 원하셨던 바를 꼭 이뤄드려야 하겠습니다. 바로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자녀, 마음이 참으로 선하고 온전한 영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예수님처럼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에 이른 분들이 나오는데 바로 모세 선지자를 들 수 있지요. 출애굽기 32:32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을 거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세 선지자가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걸어서 건너는 등의 많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케 해 줬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늘 불평했고, 모세를 원망했으며 심지어는 모세를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이런 백성들인데도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할 상황이 되자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사도 바울도 모세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였지요. 로마서 9:3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습니다.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들'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그들은 당시 심히도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이지요. 심지어 유대인 가운데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 에녹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의 차원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권세와 권능도 받아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의 가장 아름다운 처소인 새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좌에 더 가까이 거하여 세세토록 큰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더욱 차원 높은 선을 사모하여 온전한 선의 단계로 신속히 들어오시기 바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