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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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4
제31과눈에 보이는 표증으로
행 2:22
읽을말씀 : 행 2:22 | 외울말씀 : 행 2:22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함 으로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받아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시고 많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증거로써 놀라운 표적들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도록 이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진 바 되도록 증거하는 표증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에게 어떤 사역을 맡기셨는지와 그러한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임하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세우신 표증의 사람들
사도행전 3:22을 보면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곧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악의 담으로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와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으며,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온갖 질병과 슬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사람들을 택해서 어떻게든지 다시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말라기 등 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는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비롯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그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초대 교회의 베드로와 요한,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때를 좇아 합당한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표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이 행하는 사역
1)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든 얽매이는 것들에서 자유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악의 사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히 영혼이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며 흉악의 결박에서 풀어 주셨던 것이지요. 예수님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처럼 질병이나 연약함 속에 매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했던 것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증거가 다만 죽은 후에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뿐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표증된 사람들을 보내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질병과 연약함과 온갖 괴로움에서 해방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비록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다 해도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케 되는 역사를 체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큰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증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전달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마음에도 이 사랑이 임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소유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실 수 있었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한층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9:3을 보면 사도 바울 역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는 간절한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이처럼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해 있었음으로 인해 갖가지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이런 사도 바울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님처럼 섬기고 붙좇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바로 가르칩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안에 돌아오고 싶다 해도 어떻게 하는 것이 돌아오는 것인지 그 뜻을 바로 알지 못하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쓰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길을 밝히 알고 가르쳐 줄 수 있지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을 성경이 밝히 제시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난해구절들과 수많은 비유들, 묵시로 기록된 내용들은 아무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기도와 금식으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본을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과 밝은 교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친히 풀어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의 지식으로 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누가복음 12:42에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말씀했고 갈라디아서 1:11-12을 보면 사도 바울도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4) 따르는 기사와 표적 등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온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로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을 보이심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들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합당한 그릇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지전능하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친히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들을 알려 주시지요.
예수님께서도 이런 증거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고 동시에 이러한 기사와 표적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즉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각색 질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22).
예수님 외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따르는 표적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확실히 증거했습니다(막 16:20). 예를 들면, 사도 베드로의 권능은 얼마나 놀라웠던지 그가 지나갈 때는 병든 사람을 거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힐까 바랐다고 했고(행 5:15), 또한 사도 바울은 그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갈 정도였지요(행 19:12).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표증으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통해 2천 년 전과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의 표증된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임하는 축복
마음이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을 대할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대하듯이, 주님을 대하듯이 사랑과 섬김을 다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3:20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표증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할 때 이런 행함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받으시고 여러 가지 축복들로 함께하시는 기록들이 성경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수넴 여인은 잉태치 못하던 여인이었으나 엘리사 선지자를 정성껏 섬김으로 잉태의 축복을 받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또한 그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을 때 엘리사를 모셔 오니 엘리사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아이를 살려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볼 때 물론 모든 은혜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눈에 보이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의 표증인 엘리사를 보내신 것이 여인에게는 큰 축복이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그 밖에도 전쟁에 승리하고 문둥병을 치료받으며 굶어 죽을 상황에서 음식을 얻게 되고 죽었던 자녀를 다시 찾는 등 하나님께서 보내신 표증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함께함으로 받은 축복들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함 으로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받아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시고 많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증거로써 놀라운 표적들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시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신하도록 이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진 바 되도록 증거하는 표증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에게 어떤 사역을 맡기셨는지와 그러한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임하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세우신 표증의 사람들
사도행전 3:22을 보면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곧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악의 담으로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와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으며,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온갖 질병과 슬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사람들을 택해서 어떻게든지 다시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말라기 등 많은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는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비롯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그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초대 교회의 베드로와 요한,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때를 좇아 합당한 사람들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표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이 행하는 사역
1)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든 얽매이는 것들에서 자유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악의 사슬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단순히 영혼이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며 흉악의 결박에서 풀어 주셨던 것이지요. 예수님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처럼 질병이나 연약함 속에 매여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했던 것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증거가 다만 죽은 후에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뿐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행복할 수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표증된 사람들을 보내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질병과 연약함과 온갖 괴로움에서 해방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비록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다 해도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케 되는 역사를 체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큰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증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전달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마음에도 이 사랑이 임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소유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실 수 있었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한층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9:3을 보면 사도 바울 역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는 간절한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이처럼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해 있었음으로 인해 갖가지 고난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이런 사도 바울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그를 지극히 사랑하여 주님처럼 섬기고 붙좇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바로 가르칩니다
자녀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의 품안에 돌아오고 싶다 해도 어떻게 하는 것이 돌아오는 것인지 그 뜻을 바로 알지 못하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쓰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길을 밝히 알고 가르쳐 줄 수 있지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을 성경이 밝히 제시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난해구절들과 수많은 비유들, 묵시로 기록된 내용들은 아무나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수한 기도와 금식으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본을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과 밝은 교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친히 풀어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의 지식으로 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누가복음 12:42에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말씀했고 갈라디아서 1:11-12을 보면 사도 바울도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4) 따르는 기사와 표적 등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온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로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들을 보이심으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들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합당한 그릇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전지전능하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친히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들을 알려 주시지요.
예수님께서도 이런 증거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셨고 동시에 이러한 기사와 표적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즉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각색 질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심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2:22).
예수님 외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따르는 표적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을 확실히 증거했습니다(막 16:20). 예를 들면, 사도 베드로의 권능은 얼마나 놀라웠던지 그가 지나갈 때는 병든 사람을 거리에 눕혀 놓고 베드로의 그림자라도 덮힐까 바랐다고 했고(행 5:15), 또한 사도 바울은 그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갈 정도였지요(행 19:12).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표증으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통해 2천 년 전과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의 표증된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할 때 임하는 축복
마음이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사람들을 대할 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대하듯이, 주님을 대하듯이 사랑과 섬김을 다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3:20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표증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할 때 이런 행함들을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받으시고 여러 가지 축복들로 함께하시는 기록들이 성경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수넴 여인은 잉태치 못하던 여인이었으나 엘리사 선지자를 정성껏 섬김으로 잉태의 축복을 받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또한 그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을 때 엘리사를 모셔 오니 엘리사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아이를 살려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볼 때 물론 모든 은혜의 근본은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눈에 보이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 선지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의 표증인 엘리사를 보내신 것이 여인에게는 큰 축복이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그 밖에도 전쟁에 승리하고 문둥병을 치료받으며 굶어 죽을 상황에서 음식을 얻게 되고 죽었던 자녀를 다시 찾는 등 하나님께서 보내신 표증을 신뢰하고 사랑하여 함께함으로 받은 축복들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표증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7-27
제30과하나님의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시 37:6
읽을말씀 : 시 37:6 | 외울말씀 : 시 37:6
교육목표 :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더욱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또한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진정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 주고 계시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사랑과 공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의란 선악간에 공평하게 상벌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또는 속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율법 곧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우리가 사랑만 알고 공의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또 공의만 알고 사랑을 알지 못하면 독재가 되니 참으로 가치가 없지요. 공의와 사랑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 참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며 영적인 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유일한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영계의 법칙에 따라 역사해 가십니다. 그리고 이 법칙들 중에서 우리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내용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말씀에 따라 정확하게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 나타나게 되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몇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공의의 기본 원칙을 간단히 말하자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생각, 말과 행동 하나까지도 다 포함되는데 어떠한 것이든 악한 것으로 심으면 악으로 거두고 선한 것으로 심으면 선으로 거두게 된다는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곧 죄를 심으면 사망으로 거둔다는 말씀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 따라 죄인에 대해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사망이라는 판결을 내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16:2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모든 생각과 마음에 품는 것까지도 다 감찰하시므로 정확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태복음 12:36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을 명심하여 오직 진리의 말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아시고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시며 입술에 나오는 모든 말을 듣고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는 예외가 없으며 이 땅에서든 아니면 심판날에 가서든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공의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혹 여러분 중에 "공의의 하나님은 좀 무섭습니다." 하고 말씀하실 분이 계신지요? 이는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이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기보다는 공의에 따른 징계가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무섭게만 느껴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경찰을 만나도 무서워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경찰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기 때문에 든든하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혹시 어딘가에 경찰이 있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무서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벌만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악을 행한 사람은 악을 행한 만큼 반드시 그에 대한 보응이 주어지지만 반대로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선을 행한 만큼 반드시 선과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공의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며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의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고 진리를 좇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시며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징계나 연단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느끼게 되지요. 나를 더 온전케 만들고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과 또한 이러한 공의가 있으므로 어두움에서 떠나 빛으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3:12에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허락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곧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만일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으니 징계를 통해서라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요, 축복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히 12:8).
3.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나온 다윗 왕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나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윗 왕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버리지 못한 죄성이 있어 밧세바라는 여인을 취하고 이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 남편인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 일로 인해 다윗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징계와 함께 혹독한 연단을 받게 됩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죽었고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인 다윗까지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계기로 다윗이 가지고 있던 작은 죄성까지라도 완전히 뽑아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사랑하셔서 징계와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지요. 다윗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합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부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연단과 그 결과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공의로 심판하시되 결국에는 사랑하는 자녀를 축복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느낄 수 있지요. 그러나 아버지를 반역하여 죽이고자 했던 압살롬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진리 안에 살고자 하며 설령 전에는 죄 가운데 있었다 해도 이제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는 양약이 되고 축복으로 임하지만, 반대로 죄 가운데 거하고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엄한 심판의 판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 까닭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그 결과는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니 누가 선을 행하고자 하겠으며 선을 행한다 해도 무슨 소망이 있겠는지요.
그러나 전도서 12:14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도 믿습니다. 이처럼 반드시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으면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선과 진리대로 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공의를 정오의 빛에 비유하신 이유
정오의 빛은 하루 중에 가장 밝히 비추는 빛입니다. 깊은 산 속에 있다 해도, 높은 빌딩 숲 사이에 있다 해도 중천에 떠 있는 태양에서 발하는 정오의 빛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너무나 밝히 빛나므로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으며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악에서 떠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어긴 것이지요. 악에 대해서는 악으로, 선에 대해서는 선으로 거두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볼 때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공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바르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해 모세라는 한 인물을 택하시고 40년 간의 연단을 통해 그를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장정만 해도 60만이 넘는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인도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지도자가 있어야 했지요.
실제로 광야생활 동안에 모세는 수많은 불순종과 원망, 불평을 하며 때로는 대적해 오기도 하는 백성들을 오래 참음과 기다림, 그리고 긍휼과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품어 주고 인도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참으로 자신을 닮은 모세를 보실 때 마음이 너무나 흐뭇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불평하고 원망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치 않으셨습니다. 백성 중에 고라라는 인물을 비롯하여 한 무리가 반역을 일으키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재앙으로 멸하셨지요.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해 진노하신 것은 결코 사랑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함으로 공의를 굽게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또한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교훈을 삼게 하시고 다시금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사랑으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더욱 사랑 안에 거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며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더욱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또한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진정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 주고 계시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사랑과 공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의란 선악간에 공평하게 상벌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또는 속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때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율법 곧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우리가 사랑만 알고 공의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또 공의만 알고 사랑을 알지 못하면 독재가 되니 참으로 가치가 없지요. 공의와 사랑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룰 때 참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며 영적인 세계를 포함한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유일한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영계의 법칙에 따라 역사해 가십니다. 그리고 이 법칙들 중에서 우리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내용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말씀에 따라 정확하게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 나타나게 되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몇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공의의 기본 원칙을 간단히 말하자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을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생각, 말과 행동 하나까지도 다 포함되는데 어떠한 것이든 악한 것으로 심으면 악으로 거두고 선한 것으로 심으면 선으로 거두게 된다는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곧 죄를 심으면 사망으로 거둔다는 말씀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 따라 죄인에 대해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사망이라는 판결을 내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16:2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말과 행동은 물론이고 모든 생각과 마음에 품는 것까지도 다 감찰하시므로 정확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태복음 12:36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는 말씀을 명심하여 오직 진리의 말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아시고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시며 입술에 나오는 모든 말을 듣고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는 예외가 없으며 이 땅에서든 아니면 심판날에 가서든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공의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혹 여러분 중에 "공의의 하나님은 좀 무섭습니다." 하고 말씀하실 분이 계신지요? 이는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이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기보다는 공의에 따른 징계가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무섭게만 느껴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경찰을 만나도 무서워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경찰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기 때문에 든든하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혹시 어딘가에 경찰이 있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무서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벌만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악을 행한 사람은 악을 행한 만큼 반드시 그에 대한 보응이 주어지지만 반대로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선을 행한 만큼 반드시 선과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공의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며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의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고 진리를 좇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시며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징계나 연단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느끼게 되지요. 나를 더 온전케 만들고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과 또한 이러한 공의가 있으므로 어두움에서 떠나 빛으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3:12에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허락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곧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만일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으니 징계를 통해서라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구원의 길이요, 축복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히 12:8).
3.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나온 다윗 왕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해 온전한 모습으로 나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윗 왕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 버리지 못한 죄성이 있어 밧세바라는 여인을 취하고 이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 남편인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 일로 인해 다윗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징계와 함께 혹독한 연단을 받게 됩니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죽었고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아버지인 다윗까지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계기로 다윗이 가지고 있던 작은 죄성까지라도 완전히 뽑아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사랑하셔서 징계와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이었지요. 다윗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합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전보다 더욱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부어 주셨습니다.
다윗의 연단과 그 결과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공의로 심판하시되 결국에는 사랑하는 자녀를 축복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느낄 수 있지요. 그러나 아버지를 반역하여 죽이고자 했던 압살롬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진리 안에 살고자 하며 설령 전에는 죄 가운데 있었다 해도 이제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에게는 양약이 되고 축복으로 임하지만, 반대로 죄 가운데 거하고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엄한 심판의 판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 까닭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그 결과는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니 누가 선을 행하고자 하겠으며 선을 행한다 해도 무슨 소망이 있겠는지요.
그러나 전도서 12:14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는 말씀도 믿습니다. 이처럼 반드시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으면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선과 진리대로 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공의를 정오의 빛에 비유하신 이유
정오의 빛은 하루 중에 가장 밝히 비추는 빛입니다. 깊은 산 속에 있다 해도, 높은 빌딩 숲 사이에 있다 해도 중천에 떠 있는 태양에서 발하는 정오의 빛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는 너무나 밝히 빛나므로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으며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악에서 떠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공의를 어긴 것이지요. 악에 대해서는 악으로, 선에 대해서는 선으로 거두는 하나님의 공의에서 볼 때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공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바르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기 위해 모세라는 한 인물을 택하시고 40년 간의 연단을 통해 그를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장정만 해도 60만이 넘는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가나안까지 인도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지도자가 있어야 했지요.
실제로 광야생활 동안에 모세는 수많은 불순종과 원망, 불평을 하며 때로는 대적해 오기도 하는 백성들을 오래 참음과 기다림, 그리고 긍휼과 자비와 용서의 마음으로 품어 주고 인도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참으로 자신을 닮은 모세를 보실 때 마음이 너무나 흐뭇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불평하고 원망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치 않으셨습니다. 백성 중에 고라라는 인물을 비롯하여 한 무리가 반역을 일으키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재앙으로 멸하셨지요.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해 진노하신 것은 결코 사랑이 없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함으로 공의를 굽게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시기 위함이며, 또한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교훈을 삼게 하시고 다시금 모세를 대적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사랑으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더욱 사랑 안에 거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며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7-21
제29과사랑은 율법의 완성
요일 4:9-10
읽을말씀 : 요일 4:9-10 | 외울말씀 : 요일 4:9
교육목표 :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려면
우리가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칠 때 비로소 그 깊은 사랑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는 분이시니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공의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과 공의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사랑을 깨닫게 되며 진정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관계를 잘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비롯하여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계명들이 많이 있지요. 예를 들면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죄를 버리라, 미워하지 말라' 등의 계명들을 총칭하여 율법이라 합니다.
이러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공의로운 영계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공의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즉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사망에 이르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하게 살면 생명과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2. 사랑의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것
요한일서 5:3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시며 계명들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일까요?
비유를 들어 부모는 자녀에게 "손, 발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빨간 신호등이 켜질 때는 길을 건너면 안 된다." 등 여러 가지 규칙을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들을 부모가 수시로 가르치는 이유는 자녀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킴을 받으며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아는 자녀들은 부모를 기쁘시게 하고자 항상 당부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대로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으로 말미암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근본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응답과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을 경작하는 기간 동안에는 원수 마귀가 항상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타락해 가도록 유혹합니다(요일 2:16). 이처럼 세상적인 욕심을 좇으며 범죄해 나가는 사람의 앞길에는 고난과 재앙이 임하고 결국에는 사망이 기다릴 뿐입니다(롬 6:21).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요한일서 3:21-22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하신 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축복만을 주기 원하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은 만큼 원수 마귀에게 내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만큼 질병이나 사고를 만나는 등 환난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등불을 들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등불이 있으면 넘어질 염려가 없듯이 빛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지킴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함께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4. 구원과 축복의 길을 제시하는 율법
하나님 편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에게 영계의 법칙에 따라 항상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고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실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우시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 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만큼 깨끗하고 선한 마음으로 변화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자녀로 나오게 되지요.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자신도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참된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이 땅에서 경작받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복된 길을 제시하는 사랑의 교과서인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작받는 동안 재앙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축복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시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에 이르기 원하는 마음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5.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과 한마음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본을 보이셨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을 다 지키셨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정죄하여 "너희는 율법을 어겼으니 사망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또한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 왔을 때의 일입니다(요 8장).
하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 범죄가 드러나 눈앞에 계신 예수님의 입에서 "돌로 치라"는 한 마디만 떨어지면 빗발치듯 날아드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므로 서로를 정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에 부끄러워진 유대인들은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나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6. 죄인들을 위한 십자가의 사랑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은 범죄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듣고 배워서 알고 그 처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도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할 때는 남의 눈을 피해 가며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드러나 고통과 두려움에 처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되었으니 이 여인은 얼마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범죄치 않을 것을 마음에 다지고 또 다졌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다시는 율법을 어기고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동일한 방법으로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 죄인들을 위해 온몸에 채찍을 맞고 가시관을 쓰시며 손과 발에 못박히는 고통을 다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생명을 주신 헌신, 이는 바로 인류 역사상 사랑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행할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지 않고 율법 그 자체의 잣대로만 엄격하게 측정해서 사람이 범죄하는 대로 외면해 버리셨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더욱 겸비한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7. 영의 마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해야
율법의 근본 정신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선 자체이신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율법의 외적인 형식에만 치우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다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아니라 곧장 판단과 정죄가 나왔던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 안에 담긴 참된 것을 설명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이 없이 형제를 정죄하는 율법주의를 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고통스럽게 율법을 지키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3:2-3을 보면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무엇을 행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랑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철저하게 율법의 형식을 준행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에는 아무 유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지식을 가지고 형제에게 행한 판단과 정죄로 인해 스스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는 행악자가 되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죄악을 버림으로 근본 마음 자체를 깨끗하고 변함없는 영의 마음으로 일구어야 영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계명을 완성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치려면
우리가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칠 때 비로소 그 깊은 사랑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로 다스리는 분이시니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공의를 알아야 합니다. 사랑과 공의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한 사랑을 깨닫게 되며 진정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관계를 잘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비롯하여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계명들이 많이 있지요. 예를 들면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죄를 버리라, 미워하지 말라' 등의 계명들을 총칭하여 율법이라 합니다.
이러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공의로운 영계의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공의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즉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사망에 이르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선하게 살면 생명과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2. 사랑의 증거는 계명을 지키는 것
요한일서 5:3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시며 계명들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일까요?
비유를 들어 부모는 자녀에게 "손, 발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빨간 신호등이 켜질 때는 길을 건너면 안 된다." 등 여러 가지 규칙을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들을 부모가 수시로 가르치는 이유는 자녀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병이나 사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킴을 받으며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아는 자녀들은 부모를 기쁘시게 하고자 항상 당부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대로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으로 말미암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근본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응답과 축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을 경작하는 기간 동안에는 원수 마귀가 항상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으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타락해 가도록 유혹합니다(요일 2:16). 이처럼 세상적인 욕심을 좇으며 범죄해 나가는 사람의 앞길에는 고난과 재앙이 임하고 결국에는 사망이 기다릴 뿐입니다(롬 6:21).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요한일서 3:21-22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하신 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축복만을 주기 원하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지은 만큼 원수 마귀에게 내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도 말씀대로 살지 않는 만큼 질병이나 사고를 만나는 등 환난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등불을 들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등불이 있으면 넘어질 염려가 없듯이 빛 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지킴받으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함께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4. 구원과 축복의 길을 제시하는 율법
하나님 편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에게 영계의 법칙에 따라 항상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고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실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우시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 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만큼 깨끗하고 선한 마음으로 변화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자녀로 나오게 되지요.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자신도 하나님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참된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이 땅에서 경작받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복된 길을 제시하는 사랑의 교과서인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작받는 동안 재앙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축복받을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시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천국에 이르기 원하는 마음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5.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과 한마음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본을 보이셨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율법을 다 지키셨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정죄하여 "너희는 율법을 어겼으니 사망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또한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 왔을 때의 일입니다(요 8장).
하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 범죄가 드러나 눈앞에 계신 예수님의 입에서 "돌로 치라"는 한 마디만 떨어지면 빗발치듯 날아드는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므로 서로를 정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에 부끄러워진 유대인들은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나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6. 죄인들을 위한 십자가의 사랑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은 범죄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듣고 배워서 알고 그 처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도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할 때는 남의 눈을 피해 가며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드러나 고통과 두려움에 처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예수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되었으니 이 여인은 얼마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범죄치 않을 것을 마음에 다지고 또 다졌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다시는 율법을 어기고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동일한 방법으로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 죄인들을 위해 온몸에 채찍을 맞고 가시관을 쓰시며 손과 발에 못박히는 고통을 다 받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생명을 주신 헌신, 이는 바로 인류 역사상 사랑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행할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지 않고 율법 그 자체의 잣대로만 엄격하게 측정해서 사람이 범죄하는 대로 외면해 버리셨다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더욱 겸비한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7. 영의 마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해야
율법의 근본 정신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선 자체이신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마음을 거룩하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율법의 외적인 형식에만 치우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다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랑이 아니라 곧장 판단과 정죄가 나왔던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 안에 담긴 참된 것을 설명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랑이 없이 형제를 정죄하는 율법주의를 원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고통스럽게 율법을 지키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고린도전서 13:2-3을 보면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무엇을 행하더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랑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철저하게 율법의 형식을 준행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에는 아무 유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지식을 가지고 형제에게 행한 판단과 정죄로 인해 스스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박는 행악자가 되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죄악을 버림으로 근본 마음 자체를 깨끗하고 변함없는 영의 마음으로 일구어야 영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계명을 완성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7-14
제28과사랑은 두려움이 없고
요일 4:18-19
읽을말씀 : 요일 4:18-19 | 외울말씀 : 요일 4:18
교육목표 :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요한일서 4:18을 보면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있다면 그만큼 사랑이 없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받을 형벌이 없으므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정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봄에 따뜻한 햇볕을 받아 대지에서 새싹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사랑의 싹이 돋아나고 더욱 온전한 사랑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 두려움이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두려움이 있는 이유
1) 두려움은 범죄로 인해 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류 역사에 죄가 들어오게 된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따로 창설해 주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각종 나무 실과를 먹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지요.
그런데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은 죄로 인한 수치감으로 자기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죄가 들어오니 이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전에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하나님의 음성이 죄를 짓고 나니 두려움으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게 되었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하며 고달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인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만큼 두려움이 임하게 됩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그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풀어지는 열 재앙을 보았습니다. 또 지팡이를 내어미니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역사도 체험했으며, 험난한 광야길에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받았고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자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광경이 나오는데, 그때 백성들은 다 두려워 떨며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향해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했지요.
이런 백성들과 달리 모세는 오히려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멀리 섰고 모세만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와의 사이에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바로 백성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믿지는 못했던 반면에 모세는 정녕 마음 중심에서 믿었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그만큼 악이 없고 성결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모세는 범죄한 백성들이 진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모세였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룰 수 있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3) 두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해 그만큼 알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예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욥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욥기 1:1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늘 성결케 했으며 잔칫날이면 혹시 그 자녀들이 잔치를 즐기는 중에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하여 자녀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나 욥이 이렇게 행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두려움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3:25을 보면 재앙을 만난 후에 욥이 고백하기를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하지요. 곧 축복을 넘치게 받던 중에도 욥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혹 내게 재앙을 주시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기 2:10을 보면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하여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욥은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직접 체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나 사랑을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오해하며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욥을 참된 사랑의 차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는 고백을 드리게 되지요.
예전에는 전해 들은 지식에 의해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알고 섬겼는데 이제 직접 만나고 체험하니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으니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모하면서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모든 죄가 대속되는 길이 열려 있기에 사랑이 임하는 만큼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이요,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두려움이 조금도 없는 것이지요.
2.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려면
요한일서 5:3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 66권 말씀을 지켜 행하고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고자 할 것입니다. 설령 어렵고 힘든 것이라 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해 주게 되는데,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기쁨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미운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한다는 것은 곤욕이지만 사랑하는 사람, 음성이라도 듣고 싶어 늘 사모하며 기다리던 사람과 함께한다면 하루 종일 걷는다 해도 다리가 아픈지조차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가 행복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지켜 나가는 만큼 두려움이 사라지고 진리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온전한 사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인 천국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 육의 생명이 끝난다 해도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값지고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요한일서 4:18을 보면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있다면 그만큼 사랑이 없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받을 형벌이 없으므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정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봄에 따뜻한 햇볕을 받아 대지에서 새싹이 돋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사랑의 싹이 돋아나고 더욱 온전한 사랑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 두려움이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두려움이 있는 이유
1) 두려움은 범죄로 인해 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류 역사에 죄가 들어오게 된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사람 아담은 하나님께서 따로 창설해 주신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각종 나무 실과를 먹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지요.
그런데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은 죄로 인한 수치감으로 자기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나뭇잎으로 가리고자 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죄가 들어오니 이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러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전에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하나님의 음성이 죄를 짓고 나니 두려움으로 임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담은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게 되었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하며 고달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인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만큼 두려움이 임하게 됩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그들은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베풀어지는 열 재앙을 보았습니다. 또 지팡이를 내어미니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역사도 체험했으며, 험난한 광야길에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받았고 메추라기와 만나로 먹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도 했지요.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자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광경이 나오는데, 그때 백성들은 다 두려워 떨며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향해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했지요.
이런 백성들과 달리 모세는 오히려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멀리 섰고 모세만이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까이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와의 사이에 왜 이러한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바로 백성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믿지는 못했던 반면에 모세는 정녕 마음 중심에서 믿었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그만큼 악이 없고 성결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대적했지만, 모세는 범죄한 백성들이 진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모세였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룰 수 있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도 했던 것입니다.
3) 두려움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해 그만큼 알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예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욥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욥기 1:1에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늘 성결케 했으며 잔칫날이면 혹시 그 자녀들이 잔치를 즐기는 중에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하여 자녀들의 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나 욥이 이렇게 행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두려움으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3:25을 보면 재앙을 만난 후에 욥이 고백하기를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하지요. 곧 축복을 넘치게 받던 중에도 욥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혹 내게 재앙을 주시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기 2:10을 보면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하여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욥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욥은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기는 하지만 직접 체험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나 사랑을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오해하며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욥을 참된 사랑의 차원으로 이끄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는 고백을 드리게 되지요.
예전에는 전해 들은 지식에 의해 두려움의 하나님으로 알고 섬겼는데 이제 직접 만나고 체험하니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으니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모하면서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모든 죄가 대속되는 길이 열려 있기에 사랑이 임하는 만큼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이요,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두려움이 조금도 없는 것이지요.
2.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려면
요한일서 5:3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 그의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 66권 말씀을 지켜 행하고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고자 할 것입니다. 설령 어렵고 힘든 것이라 해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해 주게 되는데,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기쁨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미운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한다는 것은 곤욕이지만 사랑하는 사람, 음성이라도 듣고 싶어 늘 사모하며 기다리던 사람과 함께한다면 하루 종일 걷는다 해도 다리가 아픈지조차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그 자체가 행복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지켜 나가는 만큼 두려움이 사라지고 진리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온전한 사랑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요. 더욱이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인 천국이 있으니 이 세상에서 육의 생명이 끝난다 해도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없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값지고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7-07
제27과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으며
벧전 4:8
읽을말씀 : 벧전 4:8 | 외울말씀 : 벧전 4:8
교육목표 :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자로서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해 줄 뿐 아니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인도함으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흔히 '허물'은 그릇된 실수나 잘못을 말하는데, 영적으로는 마음속에 있는 죄의 성질이 행함으로 드러났을 때 허물이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 실제로 도둑질을 행했다면 허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허물을 덮어 준다는 것은 단지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오래 참음으로 상대가 어떻게든 잘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며 변화될 모습을 기대하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능히 인내하며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고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한 마음을 가져 모든 사람들에게 허다한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을 베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의 허물을 보았을 때 가만히 끊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성경상의 인물로는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만약 구약의 율법대로 한다면 마리아를 돌로 쳐 죽이도록 내놓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마 1:19). 이런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천사를 통해 알려 주셨지요.
만일 여러분이 요셉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골로새서 3:13-14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말씀한 대로 믿음의 형제 사이에는 서로 다투어 허물을 드러냄으로 불의한 자가 되느니 차라리 누명을 쓰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악을 행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죄인 취급을 받고 사자굴에 던짐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었기에 왕 앞에 가서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지만 그리 하지 않고 묵묵히 공의의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나와 이방 나라의 임금과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억울하게 누명을 쓴다 할지라도 용서하고 참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이러한 사랑과 용서, 인내와 오래 참음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2.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허물을 덮어 준다는 의미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예가 나옵니다. 하루는 아버지인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것을 둘째 아들 함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두 형제에게 가서 이러한 사실을 고했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지요(창 9:23). 이처럼 그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그 허물을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낸 함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잠언 17:9을 보면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으며, 설령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마치 그것을 자신의 허물인 것처럼 민망히 여기게 됩니다.
흠과 점과 티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사람들의 허물을 지적하고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를 베푸셨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셨으며 영혼들의 아픈 곳을 싸매 주시고 죄인의 허물을 보면 덮어 주시며 돌이켜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부모나 형제, 남편이나 아내는 물론이고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모든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물을 덮어 주라 하니 무조건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옳을까요? 허물은 곧 죄요,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상대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도 덮어 놓고 모른 체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상대의 허물의 경중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사랑의 권면이나 훈계, 책망 등 알맞은 방법으로 상대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들보를 다 빼낸 사람만이 남의 티를 지적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해도 사랑을 가지고 권면이나 책망을 한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양약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의 허물을 기꺼이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참사랑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야고보서 5:19-20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진리를 떠난 사람을 그 길에서 돌아서게 한다면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길이고, 또한 그의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 했으니 이같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3. 상대가 진리로 변화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 주고 이해해 주는 차원을 넘어 모든 것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심으로 결국은 생명을 낳으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썩어질 육의 생명이 아니라 영생으로 인도받을 수 있게 하는 생명이요, 영으로 살리는 생명이지요. 또한 어두움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찬란한 빛을 비춰 주는 생명입니다.
예를 들어, 허물 많던 베드로가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끄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지요.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답변하셨습니다(요 13:36).
또한 누가복음 22:31-32에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당부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했고(요 13:37), 또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고백했지요(눅 22:33).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과는 달리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요 13:38).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지요.
만일 베드로가 거기서 주저앉고 말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하루에도 수천 명을 회개시켜 주께 돌아오게 하고 그의 그림자만 스쳐도 병든 자가 나음을 얻는 그런 권능의 사도로서의 베드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던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때 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떠올렸습니다.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셨던 말씀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당부하셨던 말씀, 그리고 그 이전에 자신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위에 네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던 말씀 등 자신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 주셨고 자신이 주를 부인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부의 말씀만 해 주신 일들에 대해 떠올렸지요. 베드로는 모든 사실을 깨달은 후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또다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말씀해 주심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데 대한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더한 죄 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는 상황에서 베드로를 구해 내셨던 것입니다. 이미 지은 죄를 사해 주는 것은 물론, 더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대의 허물을 발견했다면 먼저는 마음에서부터 가만히 끊어 버리되 때로는 지혜롭고 선한 말로 권면이나 책망을 하여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자로서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해 줄 뿐 아니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인도함으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흔히 '허물'은 그릇된 실수나 잘못을 말하는데, 영적으로는 마음속에 있는 죄의 성질이 행함으로 드러났을 때 허물이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도둑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 실제로 도둑질을 행했다면 허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허물을 덮어 준다는 것은 단지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오래 참음으로 상대가 어떻게든 잘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며 변화될 모습을 기대하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의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능히 인내하며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고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한 마음을 가져 모든 사람들에게 허다한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을 베풀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상대의 허물을 보았을 때 가만히 끊을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성경상의 인물로는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마리아가 잉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만약 구약의 율법대로 한다면 마리아를 돌로 쳐 죽이도록 내놓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마 1:19). 이런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천사를 통해 알려 주셨지요.
만일 여러분이 요셉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골로새서 3:13-14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말씀한 대로 믿음의 형제 사이에는 서로 다투어 허물을 드러냄으로 불의한 자가 되느니 차라리 누명을 쓰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악을 행한 것이 전혀 없는데도 죄인 취급을 받고 사자굴에 던짐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었기에 왕 앞에 가서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지만 그리 하지 않고 묵묵히 공의의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살아나와 이방 나라의 임금과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억울하게 누명을 쓴다 할지라도 용서하고 참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이러한 사랑과 용서, 인내와 오래 참음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2.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허물을 덮어 준다는 의미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예가 나옵니다. 하루는 아버지인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을 자고 있었는데 이것을 둘째 아들 함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두 형제에게 가서 이러한 사실을 고했습니다.
이를 전해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지요(창 9:23). 이처럼 그들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그 허물을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낸 함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잠언 17:9을 보면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으며, 설령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마치 그것을 자신의 허물인 것처럼 민망히 여기게 됩니다.
흠과 점과 티도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사람들의 허물을 지적하고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를 베푸셨고 병든 자를 치료해 주셨으며 영혼들의 아픈 곳을 싸매 주시고 죄인의 허물을 보면 덮어 주시며 돌이켜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부모나 형제, 남편이나 아내는 물론이고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모든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물을 덮어 주라 하니 무조건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옳을까요? 허물은 곧 죄요,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상대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도 덮어 놓고 모른 체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따라서 상대의 허물의 경중과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사랑의 권면이나 훈계, 책망 등 알맞은 방법으로 상대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들보를 다 빼낸 사람만이 남의 티를 지적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해도 사랑을 가지고 권면이나 책망을 한다면 그것은 상대에게 양약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의 허물을 기꺼이 덮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참사랑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야고보서 5:19-20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진리를 떠난 사람을 그 길에서 돌아서게 한다면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길이고, 또한 그의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 했으니 이같은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3. 상대가 진리로 변화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 주고 이해해 주는 차원을 넘어 모든 것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심으로 결국은 생명을 낳으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썩어질 육의 생명이 아니라 영생으로 인도받을 수 있게 하는 생명이요, 영으로 살리는 생명이지요. 또한 어두움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찬란한 빛을 비춰 주는 생명입니다.
예를 들어, 허물 많던 베드로가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기까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끄셨습니까?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지요.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답변하셨습니다(요 13:36).
또한 누가복음 22:31-32에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당부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했고(요 13:37), 또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고백했지요(눅 22:33).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과는 달리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요 13:38).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지요.
만일 베드로가 거기서 주저앉고 말았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하루에도 수천 명을 회개시켜 주께 돌아오게 하고 그의 그림자만 스쳐도 병든 자가 나음을 얻는 그런 권능의 사도로서의 베드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던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때 또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떠올렸습니다.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셨던 말씀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당부하셨던 말씀, 그리고 그 이전에 자신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위에 네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던 말씀 등 자신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해 주셨고 자신이 주를 부인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부의 말씀만 해 주신 일들에 대해 떠올렸지요. 베드로는 모든 사실을 깨달은 후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또다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말씀해 주심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데 대한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더한 죄 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는 상황에서 베드로를 구해 내셨던 것입니다. 이미 지은 죄를 사해 주는 것은 물론, 더한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인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대의 허물을 발견했다면 먼저는 마음에서부터 가만히 끊어 버리되 때로는 지혜롭고 선한 말로 권면이나 책망을 하여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사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6-30
제26과맥추절을 지키라
민 23:19
읽을말씀 : 민 23:19 | 외울말씀 : 민 23:19
교육목표 : 맥추절을 맞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열매로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출애굽기 23:16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맥추절은 일 년 중 곡물의 첫 수확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맥추절이 되면 처음 수확한 곡식과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이웃과 함께 음식을 먹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요. 오늘날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각자의 삶 속에서 수고하여 거둔 영육간의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그러면 맥추절을 맞아 상반기 동안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반기에는 더욱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100% 믿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현실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이지요.
예레미야 32:27에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와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결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리라 약속하셨다면 결코 변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개척 이후, 하나님께서 앞으로 되어질 일을 말씀하시면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장차 세계를 이룰 것"이라 하신 말씀이나 "천하만민이 하나님께 나와 영광돌리는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 말씀하실 때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본교회가 세계를 이루고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무수한 권능의 역사들을 체험해 왔고 실제로 세계를 이뤄가는 과정들이 눈앞에 드러나 보이고 있으니 의심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개척 당시는 교회 사정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십여 평의 조그만 성전에 어린아이를 포함해서 겨우 열 세 명이 모인 조그만 개척 교회입니다. 주교사도, 성가대도, 찬양팀도, 봉사대도 없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것으로 마음에 새기며 현실과 상관없이 온전히 믿어드릴 때 바로 그 믿음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니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결의 복음으로 세계를 이루며 대성전을 이루는 주역들로 쓰임받을 것을 믿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야고보서 2:22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떤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애굽 군대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요단 강물이 멈추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았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해도 또한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만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이 말라 죽어 가면서도 눈앞에 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는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주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 수많은 방법들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3:21-22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당연히 신속하게 죄악들을 벗어 버리고 뜨겁게 충성하며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라보고, 마음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내거나 감정을 품기도 하며,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충성하는 행함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비전과 축복의 약속을 주실 때 정녕 믿는다면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36:37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말씀하신 대로 먼저 구해야 합니다. 불같이 중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방법론을 주십니다.
우리는 식언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아 행하였습니다. 엄청난 재정과 희생이 필요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믿었기에 힘을 다해 이뤄온 것입니다.
만약 "여력이 있으면 준비하겠다" 하고 손을 놓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습니다" 하면서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세계를 이루는 열매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요단 강을 멈추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지만, 믿음으로 강을 밟고 건너는 행함은 사람의 몫인 것처럼, 우리를 향해 주신 말씀을 믿었기에 부지런히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왔던 것입니다.
3.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변개함이 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하시면서 단지 여리고 성 주변을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 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철벽같은 성을 돈다고 해서 성이 무너질 리도 없고 더구나 성 안에서 먼저 공격을 해 올 수도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온전히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칠 일이라는 날 수를 채우고, 칠 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아서 총 열세 바퀴를 다 돌았을 때 비로소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야고보서 1:6-7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는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치지 않았던 야곱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개함이 없을 때, 믿음과 행함으로 심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기도한 것과 반대로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낙심하고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로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해 버리면 그 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다고 해도 열매로 거둘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 명하셨을 때 출애굽해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 강을 건너며 여리고 성을 끝까지 돌아서 성을 점령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온전히 믿고 행하되 변개함이 없이 행할 때라야 축복을 받고 거둘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뢰하여 그대로 행해 나가심으로 믿음으로 심은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한 축복과 영원한 천국의 상급으로 열매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맥추절을 맞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열매로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출애굽기 23:16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맥추절은 일 년 중 곡물의 첫 수확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맥추절이 되면 처음 수확한 곡식과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이웃과 함께 음식을 먹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요. 오늘날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각자의 삶 속에서 수고하여 거둔 영육간의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 됩니다.
그러면 맥추절을 맞아 상반기 동안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반기에는 더욱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100% 믿는 믿음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현실과는 전혀 반대되는 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이지요.
예레미야 32:27에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와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결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리라 약속하셨다면 결코 변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 개척 이후, 하나님께서 앞으로 되어질 일을 말씀하시면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장차 세계를 이룰 것"이라 하신 말씀이나 "천하만민이 하나님께 나와 영광돌리는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 말씀하실 때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본교회가 세계를 이루고 대성전을 이룰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무수한 권능의 역사들을 체험해 왔고 실제로 세계를 이뤄가는 과정들이 눈앞에 드러나 보이고 있으니 의심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개척 당시는 교회 사정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십여 평의 조그만 성전에 어린아이를 포함해서 겨우 열 세 명이 모인 조그만 개척 교회입니다. 주교사도, 성가대도, 찬양팀도, 봉사대도 없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것으로 마음에 새기며 현실과 상관없이 온전히 믿어드릴 때 바로 그 믿음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니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결의 복음으로 세계를 이루며 대성전을 이루는 주역들로 쓰임받을 것을 믿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라는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야고보서 2:22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떤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모세가 기도하여 홍해를 갈랐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애굽 군대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요단 강물이 멈추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지 않았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의 약속을 주셨다 해도 또한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만이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이 말라 죽어 가면서도 눈앞에 있는 물을 마시지 않는다면 그는 물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주 안에서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릴 수 있는지 수많은 방법들을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3:21-22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당연히 신속하게 죄악들을 벗어 버리고 뜨겁게 충성하며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을 바라보고, 마음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혈기내거나 감정을 품기도 하며, 자기 유익을 위해 비진리와 타협하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충성하는 행함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비전과 축복의 약속을 주실 때 정녕 믿는다면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36:37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말씀하신 대로 먼저 구해야 합니다. 불같이 중심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방법론을 주십니다.
우리는 식언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아 행하였습니다. 엄청난 재정과 희생이 필요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믿었기에 힘을 다해 이뤄온 것입니다.
만약 "여력이 있으면 준비하겠다" 하고 손을 놓고 있거나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습니다" 하면서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이 세계를 이루는 열매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요단 강을 멈추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지만, 믿음으로 강을 밟고 건너는 행함은 사람의 몫인 것처럼, 우리를 향해 주신 말씀을 믿었기에 부지런히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왔던 것입니다.
3. 거두기까지 인내하며 변함없는 믿음과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믿고 행함으로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두게 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변개함이 없이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견고한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하시면서 단지 여리고 성 주변을 돌게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하루 한 바퀴 씩,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소리로 외치라 하셨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철벽같은 성을 돈다고 해서 성이 무너질 리도 없고 더구나 성 안에서 먼저 공격을 해 올 수도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온전히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칠 일이라는 날 수를 채우고, 칠 일째에 일곱 바퀴를 돌아서 총 열세 바퀴를 다 돌았을 때 비로소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야고보서 1:6-7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는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를 놓치지 않았던 야곱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변개함이 없을 때, 믿음과 행함으로 심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고 기도하며 행했다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으면 더 이상 구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상황이 더 어려워져서 기도한 것과 반대로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므로 낙심하고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로 지금까지 행함으로 쌓아온 것을 무너뜨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중도에 변질되어 포기해 버리면 그 전까지 아무리 열심히 심었다고 해도 열매로 거둘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 명하셨을 때 출애굽해서 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고 요단 강을 건너며 여리고 성을 끝까지 돌아서 성을 점령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온전히 믿고 행하되 변개함이 없이 행할 때라야 축복을 받고 거둘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뢰하여 그대로 행해 나가심으로 믿음으로 심은 모든 것들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한 축복과 영원한 천국의 상급으로 열매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6-23
제25과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마 18:21-22
읽을말씀 : 마 18:21-22 | 외울말씀 : 마 18:22
교육목표 :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모든 사람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감동을 줄 수 있는 복된 자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용을 베푼다고 하지만 상대의 잘못을 두세 번 정도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데 한계를 두지 않으십니다.
혹여 "구약 성경에는 이방인들을 진멸하라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찌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므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1. 무한대의 용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여쭙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크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답변하셨지요.
이 말씀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 즉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신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490번만 용서해 주셨다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무한대의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약속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면 모든 죄를 사함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며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창세기 18-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심히 중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멸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살려 줄 수 있는 조그마한 근거라도 찾고자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살피게 하셨습니다.
사랑이 풍성한 아브라함은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청하였지요. 여러 차례의 간청을 통해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 열 명의 의인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죄악으로 가득 찬 나머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살피러 온 하나님의 사자들까지 해를 가하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8:7-8에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했습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죄악에서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용서를 거듭한다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 악의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멸하실 수밖에 없으셨지요.
이와는 달리,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고 즉시 회개하여 구원받은 사례가 나옵니다. 니느웨 성의 경우, 그들의 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즉시 멸하시지 않고 요나 선지자를 보내 회개할 것을 경고케 하셨습니다. 그러자 왕을 비롯하여 온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하니 하나님께서도 기꺼이 용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에스겔 33:14-15에는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며 끝까지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렸으나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니 생명을 15년간이나 연장받았습니다. 시편 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씀하신 대로 돌이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무한한 용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
요한복음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으로 하나요, 능력으로 하나이시며, 마음으로 하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용서하시되 완전한 용서를 베푸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죽이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했을지라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셨습니다(눅 23:34). 여기서 "저희"란 당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며 희롱하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후에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할 온 인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과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빛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사랑의 간구를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60에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아 빛 가운데 행해 나가려고 하면 어두움을 주관하는 원수 마귀는 이를 싫어하여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며 핍박합니다. 또한 전도하다 보면 오히려 조롱하며 훼방을 놓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리고 영안을 열어 주셔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우리와 같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하며 대신 용서를 구하는 사랑의 간구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5:16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 곧 사함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 6:4-6에도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했습니다.
또 히브리서 10:26-27에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만큼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내게 선을 베풀고 잘 해 주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사랑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축복해 줌으로 그들도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리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용서의 사랑을 베풀며 모든 사람에게 감동과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모든 사람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감동을 줄 수 있는 복된 자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용을 베푼다고 하지만 상대의 잘못을 두세 번 정도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데 한계를 두지 않으십니다.
혹여 "구약 성경에는 이방인들을 진멸하라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찌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므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1. 무한대의 용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여쭙습니다. 상대의 잘못을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크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답변하셨지요.
이 말씀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 즉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신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490번만 용서해 주셨다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무한대의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1:7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약속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면 모든 죄를 사함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며 용서와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창세기 18-19장을 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심히 중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냥 멸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살려 줄 수 있는 조그마한 근거라도 찾고자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살피게 하셨습니다.
사랑이 풍성한 아브라함은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청하였지요. 여러 차례의 간청을 통해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 열 명의 의인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죄악으로 가득 찬 나머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살피러 온 하나님의 사자들까지 해를 가하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8:7-8에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했습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죄악에서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용서를 거듭한다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는 악의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멸하실 수밖에 없으셨지요.
이와는 달리,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고 즉시 회개하여 구원받은 사례가 나옵니다. 니느웨 성의 경우, 그들의 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즉시 멸하시지 않고 요나 선지자를 보내 회개할 것을 경고케 하셨습니다. 그러자 왕을 비롯하여 온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하니 하나님께서도 기꺼이 용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에스겔 33:14-15에는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며 끝까지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렸으나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니 생명을 15년간이나 연장받았습니다. 시편 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말씀하신 대로 돌이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무한한 용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
요한복음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으로 하나요, 능력으로 하나이시며, 마음으로 하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처럼 사람들을 용서하시되 완전한 용서를 베푸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죽이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했을지라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셨습니다(눅 23:34). 여기서 "저희"란 당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며 희롱하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후에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할 온 인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빛과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빛 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범죄한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사랑의 간구를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60에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아 빛 가운데 행해 나가려고 하면 어두움을 주관하는 원수 마귀는 이를 싫어하여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며 핍박합니다. 또한 전도하다 보면 오히려 조롱하며 훼방을 놓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하나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리고 영안을 열어 주셔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우리와 같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하며 대신 용서를 구하는 사랑의 간구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5:16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 곧 사함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말씀하셨으며, 히브리서 6:4-6에도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했습니다.
또 히브리서 10:26-27에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만큼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내게 선을 베풀고 잘 해 주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까지도 사랑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축복해 줌으로 그들도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리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중보기도를 올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용서의 사랑을 베풀며 모든 사람에게 감동과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06-06-16
제24과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 13:7
읽을말씀 : 고전 13:7 | 외울말씀 : 고전 13:7
교육목표 : 모든 분야를 진리 안에서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여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일반적으로 오래 참음이라 하면 많은 시간을 지루함 속에서 기다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영적인 오래 참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대를 생각하므로 수년을 분초와 같이 보냈다"는 고백처럼 진실한 사랑은 그리움이 컸던 만큼, 기다림의 세월이 길었던 만큼 만났을 때의 기쁨과 행복 또한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시간 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아픔이 오히려 더욱 진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향하신 사랑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며(벧후 3:8) 오래 참아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사랑의 여러 부류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의 표현이 있는데 똑같이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 사랑의 깊이와 정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진정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마음에 맞춰 주지 않으면 이내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상대가 사랑할 만한 사람일 때는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었으나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도 있지요.
심지어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상대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안겨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사람도 상대가 변심하면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육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의 범주에 결코 들어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바로 영적인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랑의 정의는 고린도전서 13:4-7에 잘 나와 있는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사랑의 정의에 얼마나 합당하게 행하는가를 정확히 측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이룬 정도에 따라 1%에서 100%까지 나눌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제 깨달아 행하기 시작한 것을 1%라 하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이른 것은 100%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계명을 다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100%에 가까운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1% 지키면 1%만큼, 20% 지키면 20%만큼, 50% 지키면 50%만큼 사랑이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룬 만큼 주어지는 은혜와 은총도 다르며 권능 또한 다르게 나타납니다(요 14:21).
2. 영적인 사랑의 기초가 되는 오래 참음
그러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영적인 사랑의 정의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100%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래 참음이 부족하여 10%만 이루고 더 이상 진전이 없다면 그 이룬 만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겠지만 그 이상의 차원에는 이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10% 이루었다면 10%만큼 하나님 앞에 사랑과 은총을 입겠지만 나머지 90%는 원수 마귀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우리 곧 피조물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래 참음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참음과 영적인 참음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참음이란 화가 날 일이 생겼을 때 억지로 화를 누르며 참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참음은 악 속에서 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참음 곧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 같은 참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악이 전혀 없으시므로 참을 일이 없으시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래 참으신다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도 선과 진리 가운데 참고 참아서 악을 없애고 악을 빼내 버리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가 되므로 참을 일이 없어지는데,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런 종류의 오래 참음인 것입니다.
3. 모세를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오래 참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택하셨고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도자로서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술과 철학, 건축과 문학 등을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행 7:22), 이는 한 민족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의 역량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지요.
그런데 모세가 40세 되었을 때 동족애에서 비롯된 의분으로 애굽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남방 미디안으로 피하여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40년 동안 양치는 목동으로서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이는 화려한 궁중생활에 비하면 너무나 비천한 생활이었습니다. 모세의 나이가 80세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종살이하는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 부르시지 않고 그 후 많은 연단의 세월이 흐른 뒤 평범한 목동으로 있을 때 부르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에도 그가 가진 외적인 조건들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충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당시 그는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임의로 사람을 죽이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때 모세를 쓰셨다면 모세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자신의 뜻대로 이루려 했을 것입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40년을 더 기다리셨습니다. 모세가 자기 의와 모든 교만을 깨뜨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지켜보며 기다리셨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말과 행사가 능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겸비한 마음으로 지극히 낮아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낮아진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장정만도 60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수많은 백성들을 친히 이끌어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는 등 이모양 저모양으로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출 15:22-26)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것을(출 16:2-3) 보면서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모세가 40일 동안을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을 기록해 주신 증거의 두 돌판을 들고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노하여 손에 든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리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승한 사랑을 이룬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께 받은 돌판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다시 금식하게 하심으로 이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실 수 있는 온전한 차원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더욱 온전해지기를 원하시기에 이처럼 인내하시며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세 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지도자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의 차원에 들어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오래 참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고린도전서 13:7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소망중에 모든 것을 믿으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되어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4 전반절에도 오래 참음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사랑을 베푸는데도 돌을 던지는 사람에 대해, 또한 내게 오는 시련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에 대해 오래 참는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다시 말해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온유하지 못한 것, 투기하는 것, 교만한 것, 무례히 행하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 성내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 불의를 기뻐하는 것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참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처럼 믿음 안에 소망을 이루고 소망 안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니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든 것을 믿는 것이 사랑일까요? 예를 들어, 육적인 사랑을 놓고 보아도 부부간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존중해 주려 할 것입니다. 설령 의심할 만한 경우에 처한다 해도 우선은 선으로 바라보며 믿어 주려 하는데, 이는 믿음 자체가 곧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상대방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사랑으로 상대를 믿어 줄 때 또한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성공을 빌어 주고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상대방도 더욱 힘을 얻어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든 분야를 진리 안에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깃들어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모든 분야를 진리 안에서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여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일반적으로 오래 참음이라 하면 많은 시간을 지루함 속에서 기다리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영적인 오래 참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대를 생각하므로 수년을 분초와 같이 보냈다"는 고백처럼 진실한 사랑은 그리움이 컸던 만큼, 기다림의 세월이 길었던 만큼 만났을 때의 기쁨과 행복 또한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다림의 시간 동안 느꼈던 외로움과 아픔이 오히려 더욱 진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향하신 사랑하심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며(벧후 3:8) 오래 참아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베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사랑의 여러 부류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의 표현이 있는데 똑같이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그 사랑의 깊이와 정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진정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마음에 맞춰 주지 않으면 이내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상대가 사랑할 만한 사람일 때는 자신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었으나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으면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도 있지요.
심지어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상대를 힘들게 하고 고통을 안겨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도록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사람도 상대가 변심하면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육적인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의 범주에 결코 들어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바로 영적인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랑의 정의는 고린도전서 13:4-7에 잘 나와 있는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사랑의 정의에 얼마나 합당하게 행하는가를 정확히 측정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이룬 정도에 따라 1%에서 100%까지 나눌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제 깨달아 행하기 시작한 것을 1%라 하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이른 것은 100%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계명을 다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 100%에 가까운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1% 지키면 1%만큼, 20% 지키면 20%만큼, 50% 지키면 50%만큼 사랑이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이룬 만큼 주어지는 은혜와 은총도 다르며 권능 또한 다르게 나타납니다(요 14:21).
2. 영적인 사랑의 기초가 되는 오래 참음
그러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영적인 사랑의 정의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을 100% 이루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래 참음이 부족하여 10%만 이루고 더 이상 진전이 없다면 그 이룬 만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겠지만 그 이상의 차원에는 이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10% 이루었다면 10%만큼 하나님 앞에 사랑과 은총을 입겠지만 나머지 90%는 원수 마귀 어둠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우리 곧 피조물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모든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래 참음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참음과 영적인 참음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참음이란 화가 날 일이 생겼을 때 억지로 화를 누르며 참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참음은 악 속에서 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참음 곧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 같은 참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악이 전혀 없으시므로 참을 일이 없으시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오래 참으신다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도 선과 진리 가운데 참고 참아서 악을 없애고 악을 빼내 버리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가 되므로 참을 일이 없어지는데,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이런 종류의 오래 참음인 것입니다.
3. 모세를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오래 참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를 택하셨고 그가 태어나자마자 지도자로서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술과 철학, 건축과 문학 등을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행 7:22), 이는 한 민족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의 역량을 키우는 밑거름이 되었지요.
그런데 모세가 40세 되었을 때 동족애에서 비롯된 의분으로 애굽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남방 미디안으로 피하여 제사장 이드로의 집에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40년 동안 양치는 목동으로서 처가살이를 하였는데, 이는 화려한 궁중생활에 비하면 너무나 비천한 생활이었습니다. 모세의 나이가 80세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 종살이하는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 부르시지 않고 그 후 많은 연단의 세월이 흐른 뒤 평범한 목동으로 있을 때 부르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에도 그가 가진 외적인 조건들은 지도자로서 자격이 충분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당시 그는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임의로 사람을 죽이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때 모세를 쓰셨다면 모세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하여 자신의 뜻대로 이루려 했을 것입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40년을 더 기다리셨습니다. 모세가 자기 의와 모든 교만을 깨뜨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지켜보며 기다리셨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말과 행사가 능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겸비한 마음으로 지극히 낮아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낮아진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장정만도 60만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수많은 백성들을 친히 이끌어 가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이 나는 등 이모양 저모양으로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출 15:22-26)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것을(출 16:2-3) 보면서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모세가 40일 동안을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을 기록해 주신 증거의 두 돌판을 들고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노하여 손에 든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리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승한 사랑을 이룬 것을 아셨지만 하나님께 받은 돌판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다시 금식하게 하심으로 이제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실 수 있는 온전한 차원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더욱 온전해지기를 원하시기에 이처럼 인내하시며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세 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지도자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4.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의 차원에 들어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오래 참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고린도전서 13:7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소망중에 모든 것을 믿으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되어 오래 참을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4 전반절에도 오래 참음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내가 사랑을 베푸는데도 돌을 던지는 사람에 대해, 또한 내게 오는 시련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에 대해 오래 참는 개인적인 입장에서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과 위배되는 것, 다시 말해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온유하지 못한 것, 투기하는 것, 교만한 것, 무례히 행하는 것,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 성내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 불의를 기뻐하는 것 등 이러한 모든 것을 참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냥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처럼 믿음 안에 소망을 이루고 소망 안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니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든 것을 믿는 것이 사랑일까요? 예를 들어, 육적인 사랑을 놓고 보아도 부부간에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서로를 믿고 신뢰하며 존중해 주려 할 것입니다. 설령 의심할 만한 경우에 처한다 해도 우선은 선으로 바라보며 믿어 주려 하는데, 이는 믿음 자체가 곧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상대방이 비록 부족할지라도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사랑으로 상대를 믿어 줄 때 또한 모든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리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의 성공을 빌어 주고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상대방도 더욱 힘을 얻어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든 분야를 진리 안에 오래 참음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깃들어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6-09
제23과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2)
요일 4:9-10
읽을말씀 : 요일 4:9-10 | 외울말씀 : 요일 4:9-10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섬김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말씀하심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 죄인 되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셨지요.
오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구원의 도를 완성하셨는지 공생애의 과정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직 선을 베풀며 온갖 고난과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첫 표적으로 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와 갈릴리 인근 지역을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가르친다는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무수한 권능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도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갖 악한 말로 비방하고 배척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12:22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싫어하던 바리새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며 비난했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하시며(마 12:25-27) 그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과 사랑 속에서 상대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고자 했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흠을 잡고자 시험하고 악한 궤계를 써서 잡고자 하였습니다.
2.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체포당하시기 하루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겨 주셨습니다(요 13:4-5). 이것은 예수님 스스로를 낮추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깨끗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겸손해야 할 것과 서로 섬겨야 할 것을 마음에 명심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이라 예언하시고 떡 한 조각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막 14:30). 이는 베드로를 책망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베드로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는 하지만 후일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이 말씀을 기억할 때에 '과연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이처럼 사랑해 주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셨구나.' 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며(요 14:1) 제자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또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말씀하셨는데 이는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몸은 비록 이 땅에 없을지라도 성령으로는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평안을 누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김과 같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환난을 이기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앞으로 자신이 당할 고통을 이기시기 위해 땅에 엎드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가복음 14:36을 보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당시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한 죽음의 공포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앞에 닥쳐온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죄는 조금도 없으신 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감당하셔야 하는 고통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히 외면당하셔야 하는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뇌의 표현으로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기 원하시는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 줍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누가복음 22:44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들을 위해 생명 다한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다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예수님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참으시고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도록 허락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죄악을 행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으니 그 사랑을 무엇으로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4.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마침내 골고다 처형장에 끌려가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피조물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심은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요, 손과 발에 못박히심은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지요. 그리고 히브리서 9:22 말씀대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으므로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달려 죽어야 하는 나무 십자가에 대신 달려 피를 다 쏟으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급소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 매달려 있어야 하므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더구나 못박힌 손과 발이 체중에 못 이겨 아래로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사막지대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피를 다 쏟으시며 고통을 받으셔야 했지요. 게다가 피 냄새를 맡은 벌레 떼까지 몰려와 피를 빨고, 십자가 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온갖 조롱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고 계셨는데, 정오 12시가 되자 갑자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더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이 당하는 고난을 함께 느끼시고 지켜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이 하늘도 빛을 잃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그러더니 운명 직전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는데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지요(막 15:34). 이는 탄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철저히 외면하시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구원의 길로 나오라는 간절한 호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28에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는 앞으로 세상에 살아갈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그들에게 왜 자신이 피 흘려 죽으셔야 했는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부탁의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죽어 가는 순간에도 자녀들 걱정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오직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또한 요한복음 19:30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눅 23:46).
이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다 헐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이루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더욱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섬김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된 주의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섬김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말씀하심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 죄인 되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셨지요.
오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며 구원의 도를 완성하셨는지 공생애의 과정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오직 선을 베풀며 온갖 고난과 배척을 당하신 예수님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첫 표적으로 하여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대와 갈릴리 인근 지역을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가르친다는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무수한 권능을 베푸시는 것을 보면서도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갖 악한 말로 비방하고 배척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12:22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싫어하던 바리새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며 비난했지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하시며(마 12:25-27) 그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과 사랑 속에서 상대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시고자 했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흠을 잡고자 시험하고 악한 궤계를 써서 잡고자 하였습니다.
2.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체포당하시기 하루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겨 주셨습니다(요 13:4-5). 이것은 예수님 스스로를 낮추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깨끗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겸손해야 할 것과 서로 섬겨야 할 것을 마음에 명심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일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이라 예언하시고 떡 한 조각을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막 14:30). 이는 베드로를 책망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베드로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는 하지만 후일에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이 말씀을 기억할 때에 '과연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이처럼 사랑해 주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셨구나.' 하며 깊은 깨달음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며(요 14:1) 제자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또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말씀하셨는데 이는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몸은 비록 이 땅에 없을지라도 성령으로는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평안을 누리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김과 같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붙잡고 환난을 이기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앞으로 자신이 당할 고통을 이기시기 위해 땅에 엎드려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마가복음 14:36을 보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당시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한 죽음의 공포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앞에 닥쳐온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죄는 조금도 없으신 분이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감당하셔야 하는 고통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히 외면당하셔야 하는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뇌의 표현으로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도의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기 원하시는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 줍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누가복음 22:44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들을 위해 생명 다한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다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예수님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시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참으시고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도록 허락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죄악을 행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으니 그 사랑을 무엇으로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4.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마침내 골고다 처형장에 끌려가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피조물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심은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요, 손과 발에 못박히심은 우리의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지요. 그리고 히브리서 9:22 말씀대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으므로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달려 죽어야 하는 나무 십자가에 대신 달려 피를 다 쏟으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급소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 매달려 있어야 하므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더구나 못박힌 손과 발이 체중에 못 이겨 아래로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사막지대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피를 다 쏟으시며 고통을 받으셔야 했지요. 게다가 피 냄새를 맡은 벌레 떼까지 몰려와 피를 빨고, 십자가 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며 온갖 조롱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고 계셨는데, 정오 12시가 되자 갑자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더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이 당하는 고난을 함께 느끼시고 지켜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이 하늘도 빛을 잃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그러더니 운명 직전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셨는데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지요(막 15:34). 이는 탄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철저히 외면하시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구원의 길로 나오라는 간절한 호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28에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이는 앞으로 세상에 살아갈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그들에게 왜 자신이 피 흘려 죽으셔야 했는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부탁의 말씀이었습니다. 마치 죽어 가는 순간에도 자녀들 걱정에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예수님께서는 오직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또한 요한복음 19:30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마치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눅 23:46).
이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이 다 헐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이루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더욱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섬김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신 주님을 본받아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된 주의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6-06-02
제22과성령강림과 초대교회
행 2:1-4, 2:37-47
읽을말씀 : 행 2:1-4, 2:37-47 | 외울말씀 : 행 2:38
교육목표 :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성령이 어떻게 강림하였으며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은 어떠하였는가를 깨달아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1. 성령강림과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4-5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친히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고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시기 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지요(행 1:8).
그래서 약 120명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지요(행 2:1-4).
이것이 성령강림의 시초로서 곧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욜 2:28-29). 그래서 사도행전 2:16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받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을 말함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각종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권능을 행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부활절 이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얻은 사람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행 19:2) 성령을 받을 때 위로부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교회의 형성과 초대교회
주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의 모임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교회의 시초이며 이를 초대교회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치리했기 때문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과 달리 초대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6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씀했으니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모이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새벽예배 등 각종 예배 및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성전에 모이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2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며,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하시며, 베드로전서 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죄악을 이길 힘이 없으므로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기도로써 영적 교통을 하게 되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게 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진리 안에 살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니 질병이 틈타지 않고 항상 강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모이기를 힘쓰면 자연히 주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좇게 되지만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 간증 및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더욱 믿음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며 항상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2:44-47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대로(마 22:37-40, 막 12:30-31)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은 영이 죽어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눈물, 고통, 슬픔, 질병,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했고, 로마서 10:13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으니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7에 보면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43을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져 기사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기 때문에(요 4:48) 예수님께서도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표적을 통하여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20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며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서로 교제하고 불같이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날마다 구원받는 수를 더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성령이 어떻게 강림하였으며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은 어떠하였는가를 깨달아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1. 성령강림과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4-5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친히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고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시기 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지요(행 1:8).
그래서 약 120명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지요(행 2:1-4).
이것이 성령강림의 시초로서 곧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욜 2:28-29). 그래서 사도행전 2:16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받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을 말함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각종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권능을 행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부활절 이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얻은 사람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며(행 19:2) 성령을 받을 때 위로부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교회의 형성과 초대교회
주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의 모임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교회의 시초이며 이를 초대교회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치리했기 때문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과 달리 초대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6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씀했으니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모이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새벽예배 등 각종 예배 및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성전에 모이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2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며,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하시며, 베드로전서 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죄악을 이길 힘이 없으므로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기도로써 영적 교통을 하게 되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게 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진리 안에 살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니 질병이 틈타지 않고 항상 강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모이기를 힘쓰면 자연히 주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좇게 되지만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 간증 및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더욱 믿음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며 항상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2:44-47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대로(마 22:37-40, 막 12:30-31)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은 영이 죽어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눈물, 고통, 슬픔, 질병,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했고, 로마서 10:13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으니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7에 보면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43을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져 기사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기 때문에(요 4:48) 예수님께서도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표적을 통하여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20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며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서로 교제하고 불같이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날마다 구원받는 수를 더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