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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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3
제38과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추석은 우리 민족이 신라 시대부터 지내 온 명절로 오늘날도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에 속합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한'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추석이 되면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드는데 이 무렵에는 넓은 들판에 오곡이 무르익어 황금빛으로 물들며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기 때문에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나왔지요.
1. 추석에 대한 성경적 이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추수에 대한 감사의 절기로서 초실절(맥추감사절)과 수장절(추수감사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고유 명절인 추석을 이러한 감사의 절기로 이해하고 가족과 함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2.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은혜 가운데 풍성한 수확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시겠습니다.
묵상기도 ---------------------------------------- 다같이
기 원 -------------------------------------------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
찬 송 -------------------- 460장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기 도 ---------------------------------------- 가족 중에서
예 문)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흩어져 지내던 가족이 함께 모여 지난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각종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저희 온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가 오늘 함께 모여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지난날을 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했던 모습들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보혈로 사해 주옵시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추석 명절의 의미를 잘 알아서 더욱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게 하옵시고,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행복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희 모든 가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모든 가족들도 기억하여 주옵시고, 늘 주님의 품 안에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모든 시간도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추석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믿고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설 교 --------------------------------------------------- 설교자
기 도 --------------------------------------------------- 설교자
찬 송 --------------------------------------------------- 다같이
주기도문 ------------------------------------------------ 다같이
3. 설교 예문
본 문 : 민수기 6:24~26 (제목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지켜 주시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행복할 수 있지요.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오늘 우리 가족은 이렇게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5절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한 이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곧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환난과 재앙 많은 세상에서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평강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온 가족들을 평강 가운데 지켜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변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추석이면 으레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도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해의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을 가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동안은 진리를 몰랐기에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였으나,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서 오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형제간에 화목하고 우애 있게 지내야지요. 자녀는 부모님 생전에 효도를 다하며 온 가족이 주 하나님을 잘 섬겨 복 받는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가족은 고유 명절 추석을 맞아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2) 』듣거나 읽어 오기
교육목표 :
추석은 우리 민족이 신라 시대부터 지내 온 명절로 오늘날도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에 속합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한'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추석이 되면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드는데 이 무렵에는 넓은 들판에 오곡이 무르익어 황금빛으로 물들며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기 때문에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나왔지요.
1. 추석에 대한 성경적 이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추수에 대한 감사의 절기로서 초실절(맥추감사절)과 수장절(추수감사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고유 명절인 추석을 이러한 감사의 절기로 이해하고 가족과 함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2.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은혜 가운데 풍성한 수확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시겠습니다.
묵상기도 ---------------------------------------- 다같이
기 원 -------------------------------------------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
찬 송 -------------------- 460장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기 도 ---------------------------------------- 가족 중에서
예 문)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흩어져 지내던 가족이 함께 모여 지난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각종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저희 온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가 오늘 함께 모여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지난날을 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했던 모습들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보혈로 사해 주옵시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추석 명절의 의미를 잘 알아서 더욱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게 하옵시고,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행복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희 모든 가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모든 가족들도 기억하여 주옵시고, 늘 주님의 품 안에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모든 시간도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추석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믿고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설 교 --------------------------------------------------- 설교자
기 도 --------------------------------------------------- 설교자
찬 송 --------------------------------------------------- 다같이
주기도문 ------------------------------------------------ 다같이
3. 설교 예문
본 문 : 민수기 6:24~26 (제목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지켜 주시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행복할 수 있지요.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오늘 우리 가족은 이렇게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5절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한 이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곧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환난과 재앙 많은 세상에서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평강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온 가족들을 평강 가운데 지켜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변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추석이면 으레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도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해의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을 가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동안은 진리를 몰랐기에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였으나,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서 오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형제간에 화목하고 우애 있게 지내야지요. 자녀는 부모님 생전에 효도를 다하며 온 가족이 주 하나님을 잘 섬겨 복 받는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가족은 고유 명절 추석을 맞아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2) 』듣거나 읽어 오기
2010-09-17
제37과모세의 선(善) ①
히 11:24~26
읽을말씀 : 히 11:24~26 | 외울말씀 : 히 11:25 l 참고 말씀 : 잠 17:3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방 민족인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서 더욱 번성하고 강대해지자 위협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심한 강제 노동을 시키고 학대하였지요. 그런데도 더욱 번성하자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후손들을 멸절시키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모세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온 하수로 그 갈대상자가 떠내려 오도록 역사하셨고, 이를 발견한 공주가 모세를 불쌍히 여겨 물에서 건져내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 받으면서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또한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지요.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진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공주의 양자가 되게 하여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있는 한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 편에는 항상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애굽 땅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민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말리려 하자, 그들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하며 노를 발하였습니다. 모세는 자기 나름대로 힘과 지식을 동원하여 자기 민족을 도와주려고 하였건만 오히려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지요. 결국 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나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봐 모른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에,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강대국 왕자로서 누리던 영화도, 기름지고 호화스러운 생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26절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지요.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너무나 비참하고 불안하여 자신의 상황에 낙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왕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지요. 점점 광야 생활이 적응되어 가자 이제는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는 것이 없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모든 일은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취하고자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 지도자로 부르실 때에도 심히 자신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의 연단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서 너무나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자신감도 있고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요, 민족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연단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지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준비시키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그릇됨을 먼저 갖추게 하십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내가 왜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혹독한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하여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무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가 우러나왔지요.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큰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하여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연단을 받을 때에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모세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밑줄 친 부분에 정답을 써 넣어보세요.
① ___________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___________ 받는 것을 택했다.
② ___________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___________했다.
2. 모세가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사랑의 고백을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어리석어서 하나님에 대해 깨우치지 못했으나 이제는 정녕 지는 해를 보고도 그곳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나이다. 내가 취하고자 하여도 취하여지지 않고 갖고자 해도 가질 수 없는 이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허무한 자인데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친히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내 마음속에서 믿나이다."
● 행복하고 즐거운 추석 보내시기 바랍니다.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바로'란?
고대 애굽 왕들의 일반적인 호칭이다. 애굽어 '프로'의 음역으로 본래 '커다란 집'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점차 왕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방 민족인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서 더욱 번성하고 강대해지자 위협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심한 강제 노동을 시키고 학대하였지요. 그런데도 더욱 번성하자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후손들을 멸절시키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모세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온 하수로 그 갈대상자가 떠내려 오도록 역사하셨고, 이를 발견한 공주가 모세를 불쌍히 여겨 물에서 건져내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 받으면서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또한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지요.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진 일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공주의 양자가 되게 하여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있는 한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 편에는 항상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애굽 땅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민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말리려 하자, 그들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하며 노를 발하였습니다. 모세는 자기 나름대로 힘과 지식을 동원하여 자기 민족을 도와주려고 하였건만 오히려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지요. 결국 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나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봐 모른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에,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강대국 왕자로서 누리던 영화도, 기름지고 호화스러운 생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26절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지요.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너무나 비참하고 불안하여 자신의 상황에 낙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왕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지요. 점점 광야 생활이 적응되어 가자 이제는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는 것이 없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모든 일은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취하고자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 지도자로 부르실 때에도 심히 자신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의 연단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서 너무나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자신감도 있고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요, 민족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연단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지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준비시키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그릇됨을 먼저 갖추게 하십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내가 왜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혹독한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하여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무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가 우러나왔지요.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큰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하여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연단을 받을 때에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모세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밑줄 친 부분에 정답을 써 넣어보세요.
① ___________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___________ 받는 것을 택했다.
② ___________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___________했다.
2. 모세가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사랑의 고백을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어리석어서 하나님에 대해 깨우치지 못했으나 이제는 정녕 지는 해를 보고도 그곳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나이다. 내가 취하고자 하여도 취하여지지 않고 갖고자 해도 가질 수 없는 이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허무한 자인데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친히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내 마음속에서 믿나이다."
● 행복하고 즐거운 추석 보내시기 바랍니다.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바로'란?
고대 애굽 왕들의 일반적인 호칭이다. 애굽어 '프로'의 음역으로 본래 '커다란 집'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점차 왕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2010-09-10
제36과사도 바울의 선(善) ②
롬 9:1~3
읽을말씀 : 롬 9:1~3 | 외울말씀 : 롬 9:3 ㅣ참고 말씀:고후 12:1~5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룬 사도 바울의 마음과 행함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받을 수 있게 한다.
사도 바울은 한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습니다.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더욱 진하게 하나님께 올려졌지요. 그러니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놀라운 권능을 베풀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요, 권능을 베풀었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하였지요.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고후 11:28~29).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애통하였지요(빌 3:18).
사도 바울은 영혼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각처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로마서 9장 1~3절을 보면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였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심지어 유대인 중에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23:12~13).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지요. 이처럼 바울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 말하고 있지요. 그의 영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신약 시대 최고의 권능을 베풀었던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가 하면 독사에 물렸어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크고 놀라운 권능을 행하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아지지 않았고 오직 주님께로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겸손히 고백하지요.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닌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성결을 이루었고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도 보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얻게 될 상급도 알려 주셨지요.
결국 사도 바울은 영의 것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으며, 영의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에 대해, 또한 천국과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밝히 알았지요. 그는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잘 간직하였다가 은혜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들려줌으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3. 자신을 들레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 오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기도 중에 영의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담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고, 자신을 들레지 않습니다. 또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하지요.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와 같은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고, 능히 말할 수 있는 것도 혹여 실족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하였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되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지요.
혹여 여러분 중에는 "내가 기도해 보니 이렇더라. 내 마음에는 그렇게 주관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만 특별히 영으로 뛰어난 것처럼 들레는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목자께 기도받은 손수건으로 환자가 치료받았을 때 온전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는지, 아니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들레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요. 결코 자신의 능으로 된 것이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담대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육으로는 연약해 보일 수 있어도 영으로는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고 능력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커져만 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시고 권능도 주셔서 크게 쓰십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여러분도 최고의 선을 이루어 마지막 때 영광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사도 바울에 관한 설명입니다. 맞는 것에 0표를 해 보세요.
①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베풀었다( )
②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다( )
③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었다( )
④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던 현장에 있었다( )
⑤ 바울에 의해 쓰여진 바울 서신은 총 14권이다( )
2. 사도 바울의 선이 자신에게 얼마나 맺혀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1)』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바울 서신'이란?
바울에 의해 쓰여진 편지들을 말한다. 신약성경 27권 중에는 사도 바울에 의해 쓰여진 서신서 14권이 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그 중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기에 옥중서신이라 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룬 사도 바울의 마음과 행함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받을 수 있게 한다.
사도 바울은 한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습니다. 심한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은 더욱 진하게 하나님께 올려졌지요. 그러니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놀라운 권능을 베풀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요, 권능을 베풀었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계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 주셨지요.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하였지요.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오히려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처럼,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고후 11:28~29).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애통하였지요(빌 3:18).
사도 바울은 영혼들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각처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로마서 9장 1~3절을 보면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였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심지어 유대인 중에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23:12~13).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했지요. 이처럼 바울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보다 지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 말하고 있지요. 그의 영혼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신약 시대 최고의 권능을 베풀었던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가 하면 독사에 물렸어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크고 놀라운 권능을 행하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아지지 않았고 오직 주님께로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겸손히 고백하지요.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닌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성결을 이루었고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도 보게 해 주시고, 하늘에서 얻게 될 상급도 알려 주셨지요.
결국 사도 바울은 영의 것에 대한 사모함이 더해졌으며, 영의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에 대해, 또한 천국과 멜기세덱에 대해서도 밝히 알았지요. 그는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잘 간직하였다가 은혜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들려줌으로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3. 자신을 들레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악의 모양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깨달음이 오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기도 중에 영의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담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고, 자신을 들레지 않습니다. 또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하지요.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와 같은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도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고, 능히 말할 수 있는 것도 혹여 실족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하였지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되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지요.
혹여 여러분 중에는 "내가 기도해 보니 이렇더라. 내 마음에는 그렇게 주관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만 특별히 영으로 뛰어난 것처럼 들레는 마음에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목자께 기도받은 손수건으로 환자가 치료받았을 때 온전히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는지, 아니면 자신을 조금이라도 들레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지요. 결코 자신의 능으로 된 것이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기에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담대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육으로는 연약해 보일 수 있어도 영으로는 오히려 강하고 담대하고 능력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커져만 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시고 권능도 주셔서 크게 쓰십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여러분도 최고의 선을 이루어 마지막 때 영광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사도 바울에 관한 설명입니다. 맞는 것에 0표를 해 보세요.
①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베풀었다( )
②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았다( )
③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줄 수 있었다( )
④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던 현장에 있었다( )
⑤ 바울에 의해 쓰여진 바울 서신은 총 14권이다( )
2. 사도 바울의 선이 자신에게 얼마나 맺혀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1)』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바울 서신'이란?
바울에 의해 쓰여진 편지들을 말한다. 신약성경 27권 중에는 사도 바울에 의해 쓰여진 서신서 14권이 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그 중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기에 옥중서신이라 한다.
2010-09-03
제35과사도 바울의 선(善) ①
고전 15:9~10
읽을말씀 : 고전 15:9~10 | 외울말씀 : 고전 15:10 l 참고 말씀:고후 11:23~27
교육목표 : 한 번 받은 은혜에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한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옥에 가두며 죽이기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요.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곳마다 권능의 역사를 크게 베풀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감동시켰던 사도 바울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의가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상대를 누르기 좋아하고, 변론을 즐겨했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22장 3절에 기록된 대로 당대 최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대단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도무지 자기 의에는 맞지 않았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의가 강하지만 한 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바울에게 은혜 체험을 허락하시지요. 그가 다메섹이라는 도시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원정 가던 중에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전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시며 나타나시지요.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은 바울의 선(善)
사도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귀한 사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끝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에서도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고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고 많은 상급을 쌓게 하시며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어떤 사람들은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처음 믿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지만 과연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 하지만 과연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되어질 때 바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을 때 혹여 마음이 슬퍼지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러한 마음이 들었던 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임한다면 과연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오직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었지요.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고난을 받을 때에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곱고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한다는 의미
그러면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이요,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에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다 해도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지요.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 받을 뻔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그러니 믿음의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심에 감사하고 주님을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고, 결국 바울은 대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은혜와 감사가 변치 아니하며, 생명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회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 힌트 - 다메섹,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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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러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되어진다면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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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 에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0)』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다메섹'이란?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 회심한 곳으로 고대 수리아(아람)의 성읍이다.
교육목표 : 한 번 받은 은혜에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다소 출신으로 베냐민 지파에 속하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로서 한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여 옥에 가두며 죽이기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한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지요. 원수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는 곳마다 권능의 역사를 크게 베풀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감동시켰던 사도 바울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의가 아주 강한 사람으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상대를 누르기 좋아하고, 변론을 즐겨했던 사람입니다. 더구나 사도행전 22장 3절에 기록된 대로 당대 최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대단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이 도무지 자기 의에는 맞지 않았고, 그냥 묵인하고 지나칠 수 없었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의가 강하지만 한 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바울에게 은혜 체험을 허락하시지요. 그가 다메섹이라는 도시에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원정 가던 중에 주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예전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시며 나타나시지요.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은 바울의 선(善)
사도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귀한 사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끝없이 더욱 진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에서도 서러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았고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을 향해 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고 많은 상급을 쌓게 하시며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어떤 사람들은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처음 믿은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지만 과연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 하지만 과연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되어질 때 바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고 모든 것을 드리기까지 헌신했는데 원하는 대로 축복이 임하지 않을 때 혹여 마음이 슬퍼지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스스로 실망하여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육신의 생각으로 많은 분야에서 포기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러한 마음이 들었던 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임한다면 과연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오직 감사의 고백을 올릴 수 있었지요.
'이제 내 생애가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도 아니요, 죽음의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너무도 보고 싶었던 주님을 이제 곧 뵈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고난을 받을 때에도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곱고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한다는 의미
그러면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이요,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에 감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려움이 있다 해도 믿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지요.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 받을 뻔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그러니 믿음의 시련을 통해 더욱 온전케 하심에 감사하고 주님을 인하여 잠시 받는 고난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를 통해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고, 결국 바울은 대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 대한 은혜와 감사가 변치 아니하며, 생명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던 사도 바울이 회심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 힌트 - 다메섹,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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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러분에게 바울과 같은 고난이 허락되어진다면 중심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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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 에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10)』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다메섹'이란?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 회심한 곳으로 고대 수리아(아람)의 성읍이다.
2010-08-27
제34과나아만의 선(善)
눅 4:27
읽을말씀 : 눅 4:27 | 외울말씀 : 대하 20:20 ㅣ 참고 말씀:왕하 5장
교육목표 :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큰 권능을 행하는 선지자나 예수님과 함께한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선하여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이라야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요.
누가복음 4장 27절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말씀했지요. 나아만의 행함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선(善)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나라 곧 아람의 군대장관이었지만 문둥병에 걸려 있었습니다(왕하 5:1). 문둥병은 불치병이기에 아무리 좋은 약과 유명한 의사는 물론 자신이 섬기는 신을 의존해 보아도 치료를 받지 못했지요.
이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여자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말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나아만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고, 그는 계집종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신분이었지만 하찮은 종의 말도 흘려듣지 않을 만큼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고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전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것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일 나아만이 강퍅했다면 "네가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야!" 하며 무시해 버렸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하고 전도하면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더욱이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든 세상에 의지해 보려고 하기 때문에 전도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는 선(善)
나아만은 계집종이 알려 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모셔 와라' 하거나 서신을 띄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 나섰지요.
또한 열왕기하 5장 5절을 보면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지 않고 거두기를 바라거나 심은 것 이상을 바라는 요행이 없었습니다. 오직 응답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직접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고 전하지요.
무척 기분이 상한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하지요. 단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는다고 하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하지요.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며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기를 권유하지요(왕하 5:13). 여기서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권면의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소에 그가 얼마나 선하고 겸비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들을 줄 알았고, 그것이 옳고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넓고 큰마음을 지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상황 속에서도 종들이 나아만에게 권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권면을 듣고 이내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킨 대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지요.
영적으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는 완전수입니다. 요단강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므로 '일곱 번 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이지요. 나아만은 세 번, 네 번 씻어도 낫지 않자 중도에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 결과 문둥병을 온전히 치료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되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지자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행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즉시로 문둥병을 고쳐 주셨지요(왕하 5:14).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대하 20:20).
3.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선(善)
누가복음 17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단 한 사람만 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자 할 때는 "치료받으면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다." 약속합니다. 그런데 치료받고 응답받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마음이 변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열왕기하 5장 15절에 보면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지요. 치료받은 후에 그냥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온 모든 사람을 데리고 엘리사 앞에 나와 감사의 표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즉시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했지요.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치료받았음에도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과 짝하며 돈을, 명예를, 권세를 사랑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합니까? 그중에는 하나님을 아예 떠나 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나아만 장군이 당연히 인간의 도리를 한 것뿐인데도 오늘날은 그러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음만 가져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 17~18절에 보면 나아만이 자기를 종으로 낮추어 엘리사에게 겸손히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지요.
림몬의 당 즉 이방신 앞에서 몸을 굽히는 것도 나아만 장군은 굉장히 하나님 앞에 민망히 여기고 있지요. 자기가 이방신을 섬기거나 경배드리는 것도 아니고, 왕이 자기 손을 의지하여 본의 아니게 몸을 굽힐 수밖에 없는데 이것까지도 용서해 주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아만의 중심이 어떠한지 알 수 있지요.
나아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한 번 만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는데도 이방인인 나아만을 택하여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누가 한 번 받은바 은혜를 잊지 않는, 변개함 없는 중심을 가졌는지를 아시지요. 그래서 나아만과 같은 사람들을 택하셔서 큰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변개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한 번 받은바 은혜는 결코 잊지 않고 설령 내가 해를 받을지라도 변개하지 않은 중심이라면 하나님의 축복이 신속히 임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나아만처럼 선하고 변개함이 없는 곧은 중심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 )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 )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 )하리라" (역대하 20:20)
2. 나아만 장군에 관한 내용입니다. 맞으면 ○를 하세요.
①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
②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냈다( )
③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변함없는 중심이다( )
④ 치료받은 후 아람으로 돌아가서 림몬 신을 섬겼다( )
3. 여러분은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해도 목자가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시나요? 아니면 의심하고 어떤 결과가 나와 봐야 믿나요?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9)』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림몬'이란?
'사납게 외친다', '포효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람의 신이다.
교육목표 :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을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큰 권능을 행하는 선지자나 예수님과 함께한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선하여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이라야 나아만 장군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요.
누가복음 4장 27절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말씀했지요. 나아만의 행함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선(善)
나아만은 이스라엘과 인접한 나라 곧 아람의 군대장관이었지만 문둥병에 걸려 있었습니다(왕하 5:1). 문둥병은 불치병이기에 아무리 좋은 약과 유명한 의사는 물론 자신이 섬기는 신을 의존해 보아도 치료를 받지 못했지요.
이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여자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말했습니다. 결국 이 말은 나아만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고, 그는 계집종의 말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신분이었지만 하찮은 종의 말도 흘려듣지 않을 만큼 겸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고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전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것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일 나아만이 강퍅했다면 "네가 무엇을 안다고 참견이야!" 하며 무시해 버렸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하고 전도하면 들은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요. 더욱이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어떻게든 세상에 의지해 보려고 하기 때문에 전도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내는 선(善)
나아만은 계집종이 알려 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모셔 와라' 하거나 서신을 띄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선지자를 찾아 나섰지요.
또한 열왕기하 5장 5절을 보면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심지 않고 거두기를 바라거나 심은 것 이상을 바라는 요행이 없었습니다. 오직 응답받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예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은 병든 몸을 이끌고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직접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문둥병이 나을 것"이라고 전하지요.
무척 기분이 상한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하지요. 단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낫는다고 하니 인간의 생각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려고 하지요.
이때 나아만의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며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기를 권유하지요(왕하 5:13). 여기서 종들이 나아만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권면의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평소에 그가 얼마나 선하고 겸비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들을 줄 알았고, 그것이 옳고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넓고 큰마음을 지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상황 속에서도 종들이 나아만에게 권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권면을 듣고 이내 마음을 돌이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킨 대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지요.
영적으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는 완전수입니다. 요단강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므로 '일곱 번 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의미이지요. 나아만은 세 번, 네 번 씻어도 낫지 않자 중도에 포기해 버린 것이 아니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 결과 문둥병을 온전히 치료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되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선지자가 전하여 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행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즉시로 문둥병을 고쳐 주셨지요(왕하 5:14).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선하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대하 20:20).
3.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선(善)
누가복음 17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셨는데 단 한 사람만 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어떤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자 할 때는 "치료받으면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응답해 주시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습니다." 약속합니다. 그런데 치료받고 응답받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마음이 변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열왕기하 5장 15절에 보면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지요. 치료받은 후에 그냥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온 모든 사람을 데리고 엘리사 앞에 나와 감사의 표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즉시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했지요.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치료받았음에도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과 짝하며 돈을, 명예를, 권세를 사랑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합니까? 그중에는 하나님을 아예 떠나 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나아만 장군이 당연히 인간의 도리를 한 것뿐인데도 오늘날은 그러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음만 가져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 17~18절에 보면 나아만이 자기를 종으로 낮추어 엘리사에게 겸손히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지요.
림몬의 당 즉 이방신 앞에서 몸을 굽히는 것도 나아만 장군은 굉장히 하나님 앞에 민망히 여기고 있지요. 자기가 이방신을 섬기거나 경배드리는 것도 아니고, 왕이 자기 손을 의지하여 본의 아니게 몸을 굽힐 수밖에 없는데 이것까지도 용서해 주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아만의 중심이 어떠한지 알 수 있지요.
나아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한 번 만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는데도 이방인인 나아만을 택하여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누가 한 번 받은바 은혜를 잊지 않는, 변개함 없는 중심을 가졌는지를 아시지요. 그래서 나아만과 같은 사람들을 택하셔서 큰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 상황에 따라 변개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한 번 받은바 은혜는 결코 잊지 않고 설령 내가 해를 받을지라도 변개하지 않은 중심이라면 하나님의 축복이 신속히 임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나아만처럼 선하고 변개함이 없는 곧은 중심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 )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 )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 )하리라" (역대하 20:20)
2. 나아만 장군에 관한 내용입니다. 맞으면 ○를 하세요.
① 복되고 선한 소식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
② 복된 소식을 듣고 믿음의 증거를 행함으로 온전히 나타냈다( )
③ 받은바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갚을 줄 아는 변함없는 중심이다( )
④ 치료받은 후 아람으로 돌아가서 림몬 신을 섬겼다( )
3. 여러분은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해도 목자가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시나요? 아니면 의심하고 어떤 결과가 나와 봐야 믿나요?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9)』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림몬'이란?
'사납게 외친다', '포효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람의 신이다.
2010-08-20
제33과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2)
단 3:17~18, 6:21~22
읽을말씀 : 단 3:17~18, 6:21~22 | 외울말씀 : 단 3:18 ㅣ 참고 말씀:잠언 17:9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본받아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 타협치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참으로 선하다 인정받았으며 더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한 입술의 고백과 그들의 선한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든 후 낙성예식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의 모든 관원들을 참석하게 했습니다. 그중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도 있었지요. 왕은 누구든지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세 친구는 풀무 불에 던져질 시험 속에서도 우상 앞에 결코 절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지요.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치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인정하셨는데, 이어지는 고백을 보면 선의 감동이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지 않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져 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을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며 자신이 행할 바를 행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이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설령 목숨을 잃을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마음이었지요.
이러한 선한 마음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서운해 하거나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고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받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족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기에 당장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또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인도하셔도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코 변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참 선하구나!' 인정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오히려 더욱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시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 불에 던져 넣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신 것은 믿음의 증거를 선 가운데 나타내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삼으시고, 세 사람을 더욱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생각과 달리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고 심은 것 자체를 족하게 여기며 변함없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이상의 크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1)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다니엘은 바사 왕 다리오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세 총리 중 한 사람으로 마음이 민첩하고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지요.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하여 궁지에 몰아넣고자 합니다.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젠 다니엘이 율법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계략을 꾸몄습니다. 곧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이용하여 30일 동안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정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의 궤계를 왕에게 고하여 분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에게 고하지도 않았고 악한 무리들에게 대항하지도 않았지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예전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로 인해 해를 받아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온전히 믿어드렸지요. 바로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자연히 걸러지게 되지요.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직접 상대에게 말은 하지 않지만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말합니다. 상대를 위해 말했다고 하겠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이처럼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것이 선한 마음입니다.
2)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악한 무리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은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에 악한 무리들은 즉시 왕에게 나아가 다니엘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지요.
그제야 왕은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제정된 것임을 알고 어찌하든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왕은 너무나 총애하는 신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사자 굴에 던져야 하는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기악을 그치고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 날 새벽, 왕은 급히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을 불러 보았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 굴속에서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는 다니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지요.
구구절절 왕의 마음을 위로하며 기쁘게 하는 선한 고백이지요. 다니엘에게는 왕에 대한 어떠한 원망이나 서운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슬퍼할까를 염려했지요. 밤새 자신이 걱정되어 잠 못 이루고 새벽 일찍 달려온 왕에게 다니엘은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며 왕을 먼저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도 이해하며 조금도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말하고 행동하지요. 교회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어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선대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이 이뤄지고 천국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다니엘 3장 18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하나님께서 ( )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하였다.
② 생명의 위협이 와도 ( )을 지키기 위해 절대 )하지 않았다.
③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 )를 끼치지 않았다.
④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 )해 주었다.
3. 여러분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해가 될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말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어찌하든 선한 말로 상대가 깨우칠 수 있도록 하는 편인가요?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8)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풀무'란?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도가니, 쇠로 만들어져서 금속 등을 용해하여 제련하는 용광로를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 있었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본받아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절대 타협치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참으로 선하다 인정받았으며 더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한 입술의 고백과 그들의 선한 마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든 후 낙성예식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의 모든 관원들을 참석하게 했습니다. 그중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도 있었지요. 왕은 누구든지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세 친구는 풀무 불에 던져질 시험 속에서도 우상 앞에 결코 절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이지요.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치 않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인정하셨는데, 이어지는 고백을 보면 선의 감동이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내 주시지 않을지라도 결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져 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을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며 자신이 행할 바를 행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에게 이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설령 목숨을 잃을지라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마음이었지요.
이러한 선한 마음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서운해 하거나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심고 행한 것을 하나님께서 다 받으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족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기에 당장은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주시든지 아니 주시든지, 또한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으로 인도하셔도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코 변치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참 선하구나!' 인정하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군 풀무 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오히려 더욱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시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 불에 던져 넣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신 것은 믿음의 증거를 선 가운데 나타내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삼으시고, 세 사람을 더욱 축복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생각과 달리 어려움이 온다 해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고 심은 것 자체를 족하게 여기며 변함없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그 이상의 크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1)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다니엘은 바사 왕 다리오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세 총리 중 한 사람으로 마음이 민첩하고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지요.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하여 궁지에 몰아넣고자 합니다.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젠 다니엘이 율법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계략을 꾸몄습니다. 곧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이용하여 30일 동안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정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악한 무리들의 궤계를 왕에게 고하여 분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왕에게 고하지도 않았고 악한 무리들에게 대항하지도 않았지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면서도 예전대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로 인해 해를 받아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온전히 믿어드렸지요. 바로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마음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자연히 걸러지게 되지요.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직접 상대에게 말은 하지 않지만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말합니다. 상대를 위해 말했다고 하겠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이처럼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것이 선한 마음입니다.
2)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마음
다니엘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악한 무리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은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에 악한 무리들은 즉시 왕에게 나아가 다니엘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지요.
그제야 왕은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해 제정된 것임을 알고 어찌하든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왕은 너무나 총애하는 신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사자 굴에 던져야 하는 비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기악을 그치고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다음 날 새벽, 왕은 급히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을 불러 보았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자 굴속에서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는 다니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는 것이었지요.
구구절절 왕의 마음을 위로하며 기쁘게 하는 선한 고백이지요. 다니엘에게는 왕에 대한 어떠한 원망이나 서운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얼마나 가슴 아파하며 슬퍼할까를 염려했지요. 밤새 자신이 걱정되어 잠 못 이루고 새벽 일찍 달려온 왕에게 다니엘은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며 왕을 먼저 안심시키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도 이해하며 조금도 상대가 민망하지 않도록 말하고 행동하지요. 교회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어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선대해 주기를 바라지 말고, 자신이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이 이뤄지고 천국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다니엘 3장 18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하나님께서 ( )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하였다.
② 생명의 위협이 와도 ( )을 지키기 위해 절대 )하지 않았다.
③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 )를 끼치지 않았다.
④ 민망한 입장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 )해 주었다.
3. 여러분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해가 될 줄 알면서도 거침없이 말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어찌하든 선한 말로 상대가 깨우칠 수 있도록 하는 편인가요?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8)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풀무'란?
돌이나 진흙으로 만든 도가니, 쇠로 만들어져서 금속 등을 용해하여 제련하는 용광로를 말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 있었다.
2010-08-13
제32과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1)
단 6:10
읽을말씀 : 단 6:10 | 외울말씀 : 신 28:1 ㅣ 참고 말씀:다니엘 1:17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선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원래 유다 지파의 왕족과 귀족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그 선을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하였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데려왔습니다.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게 하고 왕의 진미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발탁되었는데 우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진미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적으로 채식을 하게 한 후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환관장이 다니엘의 제안대로 하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했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은 모든 소년들보다 더 나아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좇고자 힘쓰니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1장 17절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한 대로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 된 신분에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들도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을 금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엄히 경계하신 것은 하나님 홀로 경배받기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배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세계 평화, 종교 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결코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중심이 선한 정도에 따라 나와지는 행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 간의 질서도 육의 속성이 남아 있으면 범죄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관이나 각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꺼내어 쓰고 다시 채워 넣었거나 그 금액이 아무리 적었다 할지라도 일단 하나님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을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신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준행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으로, 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지키는 사람도 있지요.
만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의 신분임에도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굳이 채식을 했던 중심의 선을 본받아,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의 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였지요. 그런데 이들에게 신앙의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이 섬기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자 왕은 심히 분노하여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며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지요. 이를 지켜 본 왕은 너무나 놀라며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인정했고 세 사람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서 왕의 사랑을 받으니 악한 무리들이 다니엘을 모함하여 왕으로 하여금 금령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국 금령에 따라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지요. 이를 본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다니엘을 모함한 무리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을 때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그 나라의 높은 자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았습니다. 또한 이방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에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 절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셨을까요? 또한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평소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향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참으로 인간 경작의 보람을 느끼며 크게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우리 교회 당회장님께서도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었고 또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었기에 육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세상적인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담대하게 진리를 외쳤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에 가라 하실 때도 전혀 주저함이 없이 나아갔고, 법적으로 복음 전파가 금지된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담대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무수한 영혼이 치료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에 선을 쌓으며 신속히 최고의 선에 이르러 믿음의 선진들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보기에서 괄호 안에 알맞은 답을 찾아보세요.
[보기 : 룻, 오르바, 요나단, 사울, 다윗, 솔로몬, 다니엘과 세 친구]
①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
② 아버지의 범죄를 힘껏 막으면서도 자식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
③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사울 왕을 선대하며 감동을 주었다( )
④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
2.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나는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세요.
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 없다)
② 성도들끼리 돈거래를 (한다, 안 한다)
③ 이성을 보면 간음의 마음이 (있다, 없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7)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환관장'이란?
궁중에서 활동하던 내시인 환관들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선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원래 유다 지파의 왕족과 귀족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했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고 그 선을 온전히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다니엘과 세 친구의 선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들도 철저히 싫어하였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데려왔습니다.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게 하고 왕의 진미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도 발탁되었는데 우려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진미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적으로 채식을 하게 한 후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환관장이 다니엘의 제안대로 하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했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은 모든 소년들보다 더 나아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좇고자 힘쓰니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1장 17절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한 대로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 된 신분에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자신들도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을 금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엄히 경계하신 것은 하나님 홀로 경배받기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사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배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는 세계 평화, 종교 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결코 거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중심이 선한 정도에 따라 나와지는 행함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 간의 질서도 육의 속성이 남아 있으면 범죄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또한 기관이나 각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꺼내어 쓰고 다시 채워 넣었거나 그 금액이 아무리 적었다 할지라도 일단 하나님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을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신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준행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나 의무감으로, 혹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지키는 사람도 있지요.
만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다면 선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로의 신분임에도 좋은 대우를 마다하고 굳이 채식을 했던 중심의 선을 본받아,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의 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였지요. 그런데 이들에게 신앙의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먼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이 섬기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자 왕은 심히 분노하여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해를 입지 않았으며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지요. 이를 지켜 본 왕은 너무나 놀라며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인정했고 세 사람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다니엘은 다리오 왕 시대에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서 왕의 사랑을 받으니 악한 무리들이 다니엘을 모함하여 왕으로 하여금 금령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결국 금령에 따라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시므로 조금도 상하지 않았지요. 이를 본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크게 높이고 다니엘을 모함한 무리들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과 세 친구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을 때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그 나라의 높은 자가 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았습니다. 또한 이방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기에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정녕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동이 절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감동되셨을까요? 또한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평소와 같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기도할 때 그 기도의 향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참으로 인간 경작의 보람을 느끼며 크게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기에 우리 교회 당회장님께서도 하나님을 만난 이후로 오늘날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었고 또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믿었기에 육의 생명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세상적인 방법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담대하게 진리를 외쳤습니다.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에 가라 하실 때도 전혀 주저함이 없이 나아갔고, 법적으로 복음 전파가 금지된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담대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시며 무수한 영혼이 치료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에 선을 쌓으며 신속히 최고의 선에 이르러 믿음의 선진들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보기에서 괄호 안에 알맞은 답을 찾아보세요.
[보기 : 룻, 오르바, 요나단, 사울, 다윗, 솔로몬, 다니엘과 세 친구]
①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
② 아버지의 범죄를 힘껏 막으면서도 자식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
③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사울 왕을 선대하며 감동을 주었다( )
④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
2.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나는 얼마나 싫어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세요.
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 없다)
② 성도들끼리 돈거래를 (한다, 안 한다)
③ 이성을 보면 간음의 마음이 (있다, 없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7)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환관장'이란?
궁중에서 활동하던 내시인 환관들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2010-08-06
제31과다윗의 선(善)
삼상 26:23
읽을말씀 : 삼상 26:23 | 외울말씀 : 삼상 16:7 ㅣ 참고 말씀:사무엘상 24장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왕이 되면서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감으로 결국 버림을 받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지요(삼상 16장). 사무엘 선지자는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이새의 아들 중 가장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목동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과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용사였지요.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그들은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며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을 힘껏 던졌습니다. 하나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니 다윗의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그대로 쓰러졌지요.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충천하여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18) 하신 말씀처럼 골리앗이 전혀 두렵지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잠잠히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용납지 않으시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윗처럼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2.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선대하며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울은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노래하자 그때부터 다윗을 시기하며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 주던 다윗에게 단창을 던지는가 하면, 일부러 전쟁터에 내보내 죽이려 하는 등 집요하게 다윗을 찾아다니며 죽이고자 했지요.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삼상 24장). 다윗이 은신처로 숨어 있던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고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했지요. 그리고 자기 사람들에게도 "절대로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 명했습니다.
또한 사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울에게 지극히 겸비하고 선한 말로 결코 왕을 해칠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자 사울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사울은 마음이 심히 악하여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울 일행이 길가에 진을 치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다윗은 깊이 잠든 사울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청하였지요.
이에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멀찍이 가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도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말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에게도 선대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도의상 한 번은 살려 보냈는데 상대가 다시 악으로 나올 때 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선을 행하되 변함없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울을 이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할지라도 '내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며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도록 온전히 맡겼던 것입니다.
다윗은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사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성령 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리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다윗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온전한 선에 이르도록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즉 자신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막지 않으시지요.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을 호되게 책망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그 후 이 일로 혹독한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며, 주어진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린 소자가 지적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함으로 받지요.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치고 있는데 시므이란 사람이 자신과 그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아비새가 당장에 시므이를 처치하겠다고 하자 다윗은 만류하지요. 이처럼 다윗은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이를 통해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욥 23:10).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겪었지만 선으로 잘 통과하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본받아 온전한 선을 이루되, 항상 선한 것을 보고 듣기를 즐겨하며 주위에 아름다운 선의 향을 발해야 하겠습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선입니다.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쓰세요.
A. 하나님의 이름이 ( )을 당할 때에 담대히 ( )으로 나아갔다.
B.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 )하되 ( )을 주었다.
C. 지적을 받을 때 즉시 ( )하고 감사함으로 ( )을 받았다.
2.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선만 행하신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고 있는데 잠잠히 지켜보고만 있다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을까요? 위의 A, B, C 항목 중 연관된 말씀을 고르시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6) 』듣거나 읽어 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시므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로 사울 왕의 친척이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그는 사울가의 사람으로서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 다윗의 신하 아비새에게 죽을 뻔하였지만 다윗의 만류로 생명을 건졌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 것 같았으나 왕이 되면서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하셨지만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감으로 결국 버림을 받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지요(삼상 16장). 사무엘 선지자는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이새의 아들 중 가장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목동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족속 블레셋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과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용사였지요.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그들은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외치며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을 힘껏 던졌습니다. 하나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나아가니 다윗의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그대로 쓰러졌지요.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충천하여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요일 4:18) 하신 말씀처럼 골리앗이 전혀 두렵지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잠잠히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용납지 않으시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다윗처럼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 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2.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선대하며 감동을 주었습니다
사울은 전쟁터에서 돌아올 때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노래하자 그때부터 다윗을 시기하며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 주던 다윗에게 단창을 던지는가 하면, 일부러 전쟁터에 내보내 죽이려 하는 등 집요하게 다윗을 찾아다니며 죽이고자 했지요.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삼상 24장). 다윗이 은신처로 숨어 있던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고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했지요. 그리고 자기 사람들에게도 "절대로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 명했습니다.
또한 사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울에게 지극히 겸비하고 선한 말로 결코 왕을 해칠 마음이 없음을 나타내자 사울은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사울은 마음이 심히 악하여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는 등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울 일행이 길가에 진을 치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다윗은 깊이 잠든 사울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청하였지요.
이에 다윗은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멀찍이 가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도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말하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에게도 선대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도의상 한 번은 살려 보냈는데 상대가 다시 악으로 나올 때 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선을 행하되 변함없이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울을 이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할지라도 '내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며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지요.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도록 온전히 맡겼던 것입니다.
다윗은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사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했습니다. 더 나아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성령 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리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평안해졌을 때 다윗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온전한 선에 이르도록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즉 자신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막지 않으시지요.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을 호되게 책망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그 후 이 일로 혹독한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며, 주어진 연단을 감사함으로 받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린 소자가 지적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함으로 받지요.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치고 있는데 시므이란 사람이 자신과 그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아비새가 당장에 시므이를 처치하겠다고 하자 다윗은 만류하지요. 이처럼 다윗은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이를 통해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았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욥 23:10).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참으로 혹독한 연단을 겪었지만 선으로 잘 통과하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본받아 온전한 선을 이루되, 항상 선한 것을 보고 듣기를 즐겨하며 주위에 아름다운 선의 향을 발해야 하겠습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선입니다.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쓰세요.
A. 하나님의 이름이 ( )을 당할 때에 담대히 ( )으로 나아갔다.
B.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도 ( )하되 ( )을 주었다.
C. 지적을 받을 때 즉시 ( )하고 감사함으로 ( )을 받았다.
2.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선만 행하신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고 있는데 잠잠히 지켜보고만 있다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을까요? 위의 A, B, C 항목 중 연관된 말씀을 고르시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6) 』듣거나 읽어 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시므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로 사울 왕의 친척이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그는 사울가의 사람으로서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 다윗의 신하 아비새에게 죽을 뻔하였지만 다윗의 만류로 생명을 건졌다.
2010-07-30
제30과요나단의 선(善)
삼상 19:4~5
읽을말씀 : 삼상 19:4~5 | 외울말씀 : 삼상 19:4 ㅣ 참고 말씀:삼상 18:1, 삼하 1:26
교육목표 :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에 대해 알아본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볼 때 다윗과 요나단은 적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고, 그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지요(삼상 18:1, 삼하 1:26). 이것은 다윗의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요나단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은 요나단
다윗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이방 족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이들을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지요.
날이 갈수록 사울 왕의 시기심은 심해져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하게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그의 집까지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을 애매히 죽이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9장 4~5절에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인지요.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과 같은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이니 사울 왕의 말을 거역하고 친구 다윗을 옹호하는 것은 육적으로는 불효이자 불충이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이미 하나님의 싫어하신 바가 되었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받아들여 다윗을 도왔지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장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영광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일을 이뤄 가는 두 사람이 있을 때, A라는 사람이 어떠한 일을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B라는 사람이 그동안 해 놓은 것을 잘 이용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이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때 B라는 사람이 어떤 자료나 인력, 기술 등의 협조를 A라는 사람에게 요청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요나단이나 세례 요한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예나 칭찬을 얻지 못한다 해도, 소금처럼 아무 형체도 없이 녹아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큰 악을 막기 위해 살기등등한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비록 사울이 악할지라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어찌하든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거듭 간청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왕이 그릇 행할 때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왕 앞에 나아가 바른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들도 사망의 길로 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요?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나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윗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녕 윗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먼저는 허물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잠 17:9).
그런데 명백한 비진리를 행한 것도 아닌데, 내 의나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며 윗분을 내 임의로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윗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퍼트린다면 이는 마음이 얼마나 선치 못하고 사랑이 없는 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설령 윗분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로 갈지라도 윗분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으로 하여금 더욱 훼방할 거리를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건이 아니다." 하며 물러서서 방관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또한 윗분이니까 말하기 어려워서, 내가 그 말을 꺼냄으로 인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묵인하고 있다면 그것도 윗분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선일까요?
먼저는 진리를 아뢰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가 질서상 머리 된 분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선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면 윗분도 마음 상하지 않으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회장님의 예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당회장님은 성도님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르치고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내 할 바를 다 했다.' 하지 않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지요. 또한 실질적인 사랑의 행함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섬김으로 성도들이 범죄치 않고 더 충만하게 달려가도록 도와줍니다. 구제를 통해 막아질 일이라면 구제를 해서 범죄를 막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하지요.
3)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선
선한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로서의 도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버지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은 결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가 전사하였지요. 이처럼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생사를 함께함으로 도리를 다했던 것을 바로 선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도리를 좇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라고 잘못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악함을 알았고 아버지가 범죄치 않도록 수차례 간청을 했습니다. 즉 요나단은 자녀의 입장에서 멸망의 길로 가는 아버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지 사울을 동조하거나 사울의 악함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요나단처럼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최고의 선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사무엘상 19장 4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요나단의 선에 대한 내용입니다.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의리상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다.
②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인데도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따랐다.
③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사울 왕이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힘써 막았다.
④ 악한 아버지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 된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5)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블레셋'이란?
함 계통 가슬루힘의 자손이다. 이주자, 외국인이라는 뜻으로 블레셋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바로 블레셋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오랜 기간 팔레스타인 서부의 해안평야 지대의 남부에 위치해 있었던 블레셋인들은 다곤 신, 바알세붑 등 우상을 섬겼던 해양 민족이다.
교육목표 :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한 요나단의 선에 대해 알아본다.
요나단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볼 때 다윗과 요나단은 적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고, 그 사랑함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지요(삼상 18:1, 삼하 1:26). 이것은 다윗의 선함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요나단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단의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1.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은 요나단
다윗은 원래 양치는 목동이었으나 이방 족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침으로 이스라엘에서 유명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여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이들을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자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했지요.
날이 갈수록 사울 왕의 시기심은 심해져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하게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그의 집까지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다윗을 애매히 죽이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의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19장 4~5절에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간청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인지요.
2.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 요나단
1)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선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과 같은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이니 사울 왕의 말을 거역하고 친구 다윗을 옹호하는 것은 육적으로는 불효이자 불충이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이미 하나님의 싫어하신 바가 되었고 다윗이 다음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받아들여 다윗을 도왔지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요한복음 3장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의 명예와 영광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되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일을 이뤄 가는 두 사람이 있을 때, A라는 사람이 어떠한 일을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B라는 사람이 그동안 해 놓은 것을 잘 이용하면,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이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때 B라는 사람이 어떤 자료나 인력, 기술 등의 협조를 A라는 사람에게 요청한다면 얼마나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요나단이나 세례 요한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예나 칭찬을 얻지 못한다 해도, 소금처럼 아무 형체도 없이 녹아질 수 있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라는 사실입니다.
2)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선
요나단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큰 악을 막기 위해 살기등등한 아버지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비록 사울이 악할지라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어찌하든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거듭 간청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왕이 그릇 행할 때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왕 앞에 나아가 바른말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들도 사망의 길로 가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요?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나 조직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윗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정녕 윗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먼저는 허물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잠 17:9).
그런데 명백한 비진리를 행한 것도 아닌데, 내 의나 내 생각에 맞지 않는다며 윗분을 내 임의로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윗분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고 퍼트린다면 이는 마음이 얼마나 선치 못하고 사랑이 없는 행위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설령 윗분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길로 갈지라도 윗분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은 원수 마귀 사단으로 하여금 더욱 훼방할 거리를 안겨 줄 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말할 건이 아니다." 하며 물러서서 방관하는 것도 선이 아닙니다. 또한 윗분이니까 말하기 어려워서, 내가 그 말을 꺼냄으로 인해 내게 돌아올 수도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서 그냥 묵인하고 있다면 그것도 윗분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선일까요?
먼저는 진리를 아뢰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상대가 질서상 머리 된 분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선과 사랑과 섬김의 마음으로 권면한다면 윗분도 마음 상하지 않으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섬길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회장님의 예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당회장님은 성도님들이 죄를 짓지 않고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르치고 말씀을 확증하는 증거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내 할 바를 다 했다.' 하지 않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지요. 또한 실질적인 사랑의 행함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에 맞는 섬김으로 성도들이 범죄치 않고 더 충만하게 달려가도록 도와줍니다. 구제를 통해 막아질 일이라면 구제를 해서 범죄를 막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하지요.
3)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선
선한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요나단은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로서의 도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버지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은 결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사울 왕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가 전사하였지요. 이처럼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생사를 함께함으로 도리를 다했던 것을 바로 선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도리를 좇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라고 잘못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악함을 알았고 아버지가 범죄치 않도록 수차례 간청을 했습니다. 즉 요나단은 자녀의 입장에서 멸망의 길로 가는 아버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결코 아버지 사울을 동조하거나 사울의 악함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요나단처럼 사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좇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치 않도록 온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최고의 선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광과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사무엘상 19장 4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요나단의 선에 대한 내용입니다.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도 의리상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선이다.
② 차기 왕이 될 수 있는 입장인데도 하나님의 뜻을 사심 없이 따랐다.
③ 자신이 해를 받을지라도 사울 왕이 더 큰 악을 행치 않도록 힘써 막았다.
④ 악한 아버지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녀 된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5)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블레셋'이란?
함 계통 가슬루힘의 자손이다. 이주자, 외국인이라는 뜻으로 블레셋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바로 블레셋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오랜 기간 팔레스타인 서부의 해안평야 지대의 남부에 위치해 있었던 블레셋인들은 다곤 신, 바알세붑 등 우상을 섬겼던 해양 민족이다.
2010-07-23
제29과룻의 선(善)
룻 1:16~17
읽을말씀 : 룻 1:16~17 | 외울말씀 : 레 25:25 ㅣ 참고 말씀:합 3:17~19
교육목표 :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룻처럼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구약 성경 룻기에 나오는 룻이라는 여인은 참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선한 마음을 소유하여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룻은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이루었지요. 그 결과 룻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룻이 어떠한 선을 소유하였기에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1.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은 룻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 룻은 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난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죽음을 맞아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는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이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유하지요.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고백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 말한다 해도 시어머니가 그처럼 강권하니 동서인 오르바처럼 못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룻의 선(善)을 인정하시는 이유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어른을 존중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선함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좇아간다면 시어머니의 고향이지만 룻에게는 낯선 땅이라 당장 먹고 살 뚜렷한 방안도 없습니다.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드셨기에 룻이 모든 생활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요즈음은 형제간에도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불화가 많은데 여러분이라면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도리를 좇는 선은 가정에서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곳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은 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며 상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먼저 상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곳에서 좋은 기술을 배워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어 지금은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꼭 이직(移職)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내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어떠한 유익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르지요. 마음이 선한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계명들을 지키지요.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한 마음이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은혜의 체험을 하면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십분의 일만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선한 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이 있으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믿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자유 의지 가운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후로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했기에 하루 종일 주운 이삭으로 시어머니를 공궤하면서도 기뻐했고, 종일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지요(룻 2:20, 레 25:25). 룻은 보아스에게서 아들 오벳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이지요.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룻처럼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더구나 끝까지 온전한 선을 지키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러한 세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지요. 자녀 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핀다 해도 시간이 오래되고, 많은 물질이 들어가면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만 섬김을 받는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서운해 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이지요.
서로 간에 이러한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얘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참된 사랑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생명이 다하기까지 도리를 좇는 선을 행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얼마나 자녀 된 도리를 다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내 평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한 분들은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 합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달려가야 하지요(합 3:17~19).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육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혹은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만일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좇는 사람이라면 영육 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룻과 같이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레위기 25장 25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최고의 선을 이룬 룻과 관계가 없는 것을 고르시오.
①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
② 자신을 희생하며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③ 모압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다.
④ 룻은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하나님을 믿었다.
3.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셔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마음에 어떤 부담이나 불편함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할 수 있나요?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4)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
교육목표 :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룻처럼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구약 성경 룻기에 나오는 룻이라는 여인은 참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선한 마음을 소유하여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룻은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희망 없는 삶 속에서도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이루었지요. 그 결과 룻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룻이 어떠한 선을 소유하였기에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1.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은 룻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 룻은 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난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죽음을 맞아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시어머니는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자식이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유하지요.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고백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 말한다 해도 시어머니가 그처럼 강권하니 동서인 오르바처럼 못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으므로 끝까지 자신의 도리를 좇아 행하고자 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룻의 선(善)을 인정하시는 이유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나이 어린 사람은 어른을 존중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선함을 인정하시고 축복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좇아간다면 시어머니의 고향이지만 룻에게는 낯선 땅이라 당장 먹고 살 뚜렷한 방안도 없습니다.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드셨기에 룻이 모든 생활의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요즈음은 형제간에도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로 불화가 많은데 여러분이라면 어떤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도리를 좇는 선은 가정에서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곳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은 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며 상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먼저 상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곳에서 좋은 기술을 배워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어 지금은 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꼭 이직(移職)을 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내게 많은 유익을 주었던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어떠한 유익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르지요. 마음이 선한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계명들을 지키지요. 도리를 좇는 편을 택하는 선한 마음이라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은혜의 체험을 하면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이 원래는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으로 십분의 일만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선한 분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도리를 좇는 선이 있으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믿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자유 의지 가운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축복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후로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했기에 하루 종일 주운 이삭으로 시어머니를 공궤하면서도 기뻐했고, 종일 있었던 일들을 조곤조곤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지요(룻 2:20, 레 25:25). 룻은 보아스에게서 아들 오벳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이지요.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룻처럼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더구나 끝까지 온전한 선을 지키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러한 세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지요. 자녀 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핀다 해도 시간이 오래되고, 많은 물질이 들어가면 마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만 섬김을 받는 부모님의 입장에서도 서운해 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이지요.
서로 간에 이러한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얘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참된 사랑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자기 생명이 다하기까지 도리를 좇는 선을 행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우리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은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얼마나 자녀 된 도리를 다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내 평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한 분들은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 합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달려가야 하지요(합 3:17~19).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육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혹은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만일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좇는 사람이라면 영육 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하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룻과 같이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다 함께 풀어 봅시다
1. 레위기 25장 25절을 다 함께 외워 보세요.
2. 최고의 선을 이룬 룻과 관계가 없는 것을 고르시오.
①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
② 자신을 희생하며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③ 모압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다.
④ 룻은 이스라엘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하나님을 믿었다.
3.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셔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마음에 어떤 부담이나 불편함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할 수 있나요?
● 금주 과제
『2005년도 설교 선(4) 』듣거나 읽어 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 남쪽에 위치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