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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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0
제20과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
히 11:1~3
읽을말씀 : 히 11:1~3 | 외울말씀 : 히 11:1 l 참고 말씀:약 2:26, 롬 10:17
교육목표 : 육적인 믿음은 구원받지 못하기에 참 믿음인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이 땅에서 보배 중에 보배요, 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기에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만약 대통령을 언제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특권을 소유한 것입니다. 이처럼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언제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는 특권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영적인 믿음과 육적인 믿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1. 육적인 믿음이란?
육적인 믿음이란 눈으로 보아 확인이 되고, 내가 아는 상식이나 지식과 일치될 때라야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지식적인 믿음, 또는 이성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무로 만든 강대상을 보고 "이것은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믿습니까?" 하면 의심 없이 "네, 믿습니다!" 대답합니다. 즉 직접 나무로 된 것을 보았고 내가 아는 지식과 일치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요.
이런 믿음은 유(有)에서 유(有) 창조, 다시 말해 있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때 믿는 믿음이므로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뇌 속에 있는 기억장치에 여러 지식을 입력시킵니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주변 환경을 통해 보고 들은 지식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사용하지요.
이처럼 입력된 지식들 중에는 진리가 아닌 비진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서 배운 지식들이 변하는 것만 보아도 온전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에 비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비진리가 진리인 줄 알고 열심히 배워 나갑니다. 진화론만 해도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웠기 때문에 그것이 맞다고 여기지요.
또한 유(有)에서 유의 창조만 배운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 상태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하면 황당해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눈에 보이지 않는 무(無) 상태에서 창조하시고,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물 위를 걸으시며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다고 나옵니다. 또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셨다고 말씀하지요. 이런 말씀들을 들으면 육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체험한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 성령을 받고 은혜가 충만할 때는 기도해서 응답도 척척 받았지요. 하지만 은혜가 떨어지고 신앙생활을 나태하게 하다 보면 의심이 찾아오고 과거에 응답받았던 것까지도 우연으로 돌려 버리지요. 그런가 하면 세상에 있을 때 입력된 지식과 이론이 주님을 영접한 후 알게 된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밖에서 다른 아이에게 맞고 들어오면 세상에서는 "너는 왜 만날 바보처럼 맞고만 들어오니? 그 애가 한 대 때리면 너는 두 대 때려 줘야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님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가르치셨지요. 이처럼 내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은 상반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육적인 믿음을 지닌 사람이 말씀대로 행하려면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니 힘들고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육적인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요, 영적인 믿음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입니다. 따라서 육적인 믿음을 신속히 영적인 믿음으로 바꾸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으며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영적인 믿음이란?
육적인 믿음과 달리 영적인 믿음은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를 믿는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나의 생각과 지식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는 믿음이지요. 또한 하나님이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는 말씀을 행하는 산 믿음을 말합니다.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아무것도 없는 무(無) 상태에서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세계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약 2천 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뢰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해결을 받고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믿음은 자기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셔야만 가능하지요. 로마서 12장 3절에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응답과 축복을 받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주여, 대통령이 되게 해 주세요." 하면 대통령이 될 것이고, 미운 사람이 있으면 "주여, 저 사람 징계해 주옵소서."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니 이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워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영적인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비진리 어둠들을 벗어 버리며 빛 가운데 행할 때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이런 믿음은 행함이 따르고 반드시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행함 있는 믿음, 산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3.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바꾸려면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계신 것과 상 주시는 이심을 믿고 계명들을 지켜 행할 뿐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입력된 비진리의 지식은 영적인 믿음을 갖는 데에 큰 방해 요소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케 하고 의심하게 하는 비진리의 지식을 뽑아 버리지 않으면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들으며 불같이 기도함으로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를 빼내고 진리로 채워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식으로만 담고 있으면 지식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는 말씀을 행함으로 옮겨서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즉 육적인 믿음에서 영적인 믿음으로 바꾸려면 그만큼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데 피아노 교본을 백 번, 천 번 읽기만 한다면 피아노를 잘 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렇게 수십 년, 수천 년이 지나도 못 칩니다. 이론은 해박할지 몰라도 실제 행함으로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주를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론을 익히고 열심히 연습해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할 때라야 영적인 믿음이 주어집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벗이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행함으로 순종하지 않았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온전히 확증시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영육 간에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여 듣고 배웠다 해도 행함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참 믿음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구원과 영생은 물론,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까지 침노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의미가 다른 하나를 고르시오.
① 육적인 믿음 ② 지식적인 믿음 ③ 이성적인 믿음 ④ 행함 있는 믿음
2.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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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이삭'은 누구일까요?
창세기 17장 17절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이 100세, 아내 사라가 90세에 낳은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이려고 했을 때도 반항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신하여 수양을 준비해 주셨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와 사이에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교육목표 : 육적인 믿음은 구원받지 못하기에 참 믿음인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이 땅에서 보배 중에 보배요, 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기에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만약 대통령을 언제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특권을 소유한 것입니다. 이처럼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언제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는 특권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영적인 믿음과 육적인 믿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1. 육적인 믿음이란?
육적인 믿음이란 눈으로 보아 확인이 되고, 내가 아는 상식이나 지식과 일치될 때라야 믿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지식적인 믿음, 또는 이성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무로 만든 강대상을 보고 "이것은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믿습니까?" 하면 의심 없이 "네, 믿습니다!" 대답합니다. 즉 직접 나무로 된 것을 보았고 내가 아는 지식과 일치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요.
이런 믿음은 유(有)에서 유(有) 창조, 다시 말해 있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때 믿는 믿음이므로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 성장하면서 뇌 속에 있는 기억장치에 여러 지식을 입력시킵니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주변 환경을 통해 보고 들은 지식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사용하지요.
이처럼 입력된 지식들 중에는 진리가 아닌 비진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서 배운 지식들이 변하는 것만 보아도 온전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에 비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비진리가 진리인 줄 알고 열심히 배워 나갑니다. 진화론만 해도 그렇습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웠기 때문에 그것이 맞다고 여기지요.
또한 유(有)에서 유의 창조만 배운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 상태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하면 황당해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눈에 보이지 않는 무(無) 상태에서 창조하시고,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물 위를 걸으시며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셨다고 나옵니다. 또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셨다고 말씀하지요. 이런 말씀들을 들으면 육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체험한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 성령을 받고 은혜가 충만할 때는 기도해서 응답도 척척 받았지요. 하지만 은혜가 떨어지고 신앙생활을 나태하게 하다 보면 의심이 찾아오고 과거에 응답받았던 것까지도 우연으로 돌려 버리지요. 그런가 하면 세상에 있을 때 입력된 지식과 이론이 주님을 영접한 후 알게 된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기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밖에서 다른 아이에게 맞고 들어오면 세상에서는 "너는 왜 만날 바보처럼 맞고만 들어오니? 그 애가 한 대 때리면 너는 두 대 때려 줘야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님은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가르치셨지요. 이처럼 내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은 상반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육적인 믿음을 지닌 사람이 말씀대로 행하려면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니 힘들고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육적인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요, 영적인 믿음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입니다. 따라서 육적인 믿음을 신속히 영적인 믿음으로 바꾸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으며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영적인 믿음이란?
육적인 믿음과 달리 영적인 믿음은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를 믿는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나의 생각과 지식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는 믿음이지요. 또한 하나님이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는 말씀을 행하는 산 믿음을 말합니다.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아무것도 없는 무(無) 상태에서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세계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약 2천 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뢰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해결을 받고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믿음은 자기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셔야만 가능하지요. 로마서 12장 3절에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응답과 축복을 받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주여, 대통령이 되게 해 주세요." 하면 대통령이 될 것이고, 미운 사람이 있으면 "주여, 저 사람 징계해 주옵소서."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니 이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워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영적인 믿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비진리 어둠들을 벗어 버리며 빛 가운데 행할 때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이런 믿음은 행함이 따르고 반드시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행함 있는 믿음, 산 믿음이라고도 합니다.
3.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바꾸려면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계신 것과 상 주시는 이심을 믿고 계명들을 지켜 행할 뿐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입력된 비진리의 지식은 영적인 믿음을 갖는 데에 큰 방해 요소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케 하고 의심하게 하는 비진리의 지식을 뽑아 버리지 않으면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보고 들으며 불같이 기도함으로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를 빼내고 진리로 채워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식으로만 담고 있으면 지식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는 말씀을 행함으로 옮겨서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즉 육적인 믿음에서 영적인 믿음으로 바꾸려면 그만큼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데 피아노 교본을 백 번, 천 번 읽기만 한다면 피아노를 잘 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렇게 수십 년, 수천 년이 지나도 못 칩니다. 이론은 해박할지 몰라도 실제 행함으로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주를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론을 익히고 열심히 연습해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할 때라야 영적인 믿음이 주어집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벗이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행함으로 순종하지 않았다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온전히 확증시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영육 간에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여 듣고 배웠다 해도 행함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참 믿음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구원과 영생은 물론,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까지 침노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의미가 다른 하나를 고르시오.
① 육적인 믿음 ② 지식적인 믿음 ③ 이성적인 믿음 ④ 행함 있는 믿음
2.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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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이삭'은 누구일까요?
창세기 17장 17절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이 100세, 아내 사라가 90세에 낳은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이려고 했을 때도 반항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신하여 수양을 준비해 주셨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와 사이에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2011-05-13
제19과빛 가운데 행할 때의 축복
요일 1:5~7
읽을말씀 : 요일 1:5~7 | 외울말씀 : 요일 1:7 l 참고 말씀:요일 5:18,신 28장, 요삼 2
교육목표 : 빛과 어둠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해도 태양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어둠은 사라지고 밝은 세상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양과 비교할 수 없이 밝은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각종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1. 빛과 어둠의 영적인 의미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말씀하셨는데 영적으로 빛이란 무엇이며, 그와 반대되는 어둠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영적으로 빛이란,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냄과 동시에 진리, 선, 사랑 자체를 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진리의 말씀들이 바로 빛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 사랑하라, 용서하라, 겸손하라, 기도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십계명을 지키라, 서원을 지키라"는 말씀들을 순종할 때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또한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버리라" 하신 것을 버리는 것도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어둠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둠이란 일반적으로 빛이 없는 깜깜한 상태를 말하는데, 영적으로는 죄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곧 불의, 불법, 악, 진리와 반대되는 비진리가 여기에 속하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즉,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시기 질투를 버리라, 탐심을 버리라, 교만을 버리라, 육신의 생각을 버리라" 하셨지요. 왜냐하면 도적질, 살인, 미움, 우상 숭배, 시기, 질투, 탐심, 교만 등이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것을 계속 행하고 버리지 않는다면 어둠에 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라, 지키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지키지 않는 것 역시 빛과 반대되는 어둠에 거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영적인 빛과 어둠 중 과연 어디에 더 속해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둠이 단 1%도 없으신 100% 온전한 빛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100% 빛 가운데 행하기를 원하시지요. 어둠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은 그것을 빌미로 시험과 환난을 가져다 줍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지요.
2.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려면
부모에게 자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자녀가 장성하여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깊은 사랑을 나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밀한 사귐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단서가 있는데 진리 즉 빛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과 짝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원수 마귀 사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자녀가 부모를 욕하고 죽이려고 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쁜 짓을 일삼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을 붙좇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요? '사귐'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편에서만 상대를 안다고 해서 사귐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구인지 압니다. 이처럼 대통령을 안다고 그분과 사귐이 있다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대통령을 잘 알아도 대통령이 나를 모르면 서로 사귀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사귐에 있어서도 그 정도가 다 다릅니다.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안부를 묻는 좀 더 가까운 관계도 있고, 아주 친밀하게 비밀도 나눌 수 있는 관계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사귐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믿으시며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 뜻대로 행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금식하며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지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그 증거들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즉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지킴과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거나 연약할 이유도 없고, 환난을 만나거나 재앙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진리인 빛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3. 어둠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해야 축복
아무리 짙은 어둠도 빛이 비취면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면 어둠의 권세가 결코 역사하지 못합니다. 내가 빛 가운데 50%를 산다면 50%의 권세가 따르고, 90%를 산다면 90%의 권세가 따르지요. 빛의 권세는 우리가 얼마나 빛 가운데 행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전등을 열 개 켰을 때의 빛은 한 개 켰을 때보다 훨씬 밝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이 강할수록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힘도 세집니다.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만큼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전에는 어둠에 있었을지라도 지금부터라도 빛 가운데 거하면 어둠에 있을 때 찾아왔던 질병과 가난 등 온갖 문제들이 떠납니다. 축복의 길이 열리며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옵니다.
이처럼 내가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빛의 권세가 따르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에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죄는 어둠에 속하기 때문에 어둠이 어둠의 세력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죄를 벗고 진리를 좇을 때라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범죄하여 어둠 가운데 있다면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빛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빛 가운데 거해야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습니다!"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줄로 아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빛 가운데 행할 때 서로 사귐이 있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으면 참 빛이신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어 시험과 환난을 겪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의 권세'가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히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하나 된 증거가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질병아 물러가라, 재앙아 물러가라, 가난아 물러가라, 시험 환난아 물러가라" 하며 기도할 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므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지요. 또한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영혼이 잘되어 만사가 형통합니다(신 28:1~14 ; 요삼 2).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철저히 어둠을 벗어버리고 더욱 밝은 빛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빛과 어둠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2.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3.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임하는 축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축복장이라고 불리는 신명기 28장 1~14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마귀'란?
악한 영들에 속한 마귀는 루시퍼와 함께 타락한 천사 중 일부로, 검은 형상에 사람처럼 이목구비와 손발이 있다. 사단의 지시를 받아 수많은 귀신을 관리하고 지시하며 비진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죄를 행하게 한다. 생각으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사단이라면 비진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마귀다.
교육목표 : 빛과 어둠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해도 태양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어둠은 사라지고 밝은 세상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양과 비교할 수 없이 밝은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각종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1. 빛과 어둠의 영적인 의미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말씀하셨는데 영적으로 빛이란 무엇이며, 그와 반대되는 어둠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영적으로 빛이란,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하신 하나님을 나타냄과 동시에 진리, 선, 사랑 자체를 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진리의 말씀들이 바로 빛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 사랑하라, 용서하라, 겸손하라, 기도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십계명을 지키라, 서원을 지키라"는 말씀들을 순종할 때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또한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버리라" 하신 것을 버리는 것도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어둠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둠이란 일반적으로 빛이 없는 깜깜한 상태를 말하는데, 영적으로는 죄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곧 불의, 불법, 악, 진리와 반대되는 비진리가 여기에 속하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즉, "도적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시기 질투를 버리라, 탐심을 버리라, 교만을 버리라, 육신의 생각을 버리라" 하셨지요. 왜냐하면 도적질, 살인, 미움, 우상 숭배, 시기, 질투, 탐심, 교만 등이 어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것을 계속 행하고 버리지 않는다면 어둠에 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라, 지키라" 하신 것을 하지 않고, 지키지 않는 것 역시 빛과 반대되는 어둠에 거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영적인 빛과 어둠 중 과연 어디에 더 속해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둠이 단 1%도 없으신 100% 온전한 빛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100% 빛 가운데 행하기를 원하시지요. 어둠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은 그것을 빌미로 시험과 환난을 가져다 줍니다. 영의 세계에서는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기 때문이지요.
2.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려면
부모에게 자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 자녀가 장성하여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깊은 사랑을 나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밀한 사귐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단서가 있는데 진리 즉 빛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과 짝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원수 마귀 사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자녀가 부모를 욕하고 죽이려고 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쁜 짓을 일삼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을 붙좇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요? '사귐'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 편에서만 상대를 안다고 해서 사귐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구인지 압니다. 이처럼 대통령을 안다고 그분과 사귐이 있다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대통령을 잘 알아도 대통령이 나를 모르면 서로 사귀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사귐에 있어서도 그 정도가 다 다릅니다.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안부를 묻는 좀 더 가까운 관계도 있고, 아주 친밀하게 비밀도 나눌 수 있는 관계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사귐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믿으시며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 뜻대로 행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금식하며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지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그 증거들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즉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지킴과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거나 연약할 이유도 없고, 환난을 만나거나 재앙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진리인 빛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3. 어둠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해야 축복
아무리 짙은 어둠도 빛이 비취면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하면 어둠의 권세가 결코 역사하지 못합니다. 내가 빛 가운데 50%를 산다면 50%의 권세가 따르고, 90%를 산다면 90%의 권세가 따르지요. 빛의 권세는 우리가 얼마나 빛 가운데 행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전등을 열 개 켰을 때의 빛은 한 개 켰을 때보다 훨씬 밝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이 강할수록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힘도 세집니다.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만큼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전에는 어둠에 있었을지라도 지금부터라도 빛 가운데 거하면 어둠에 있을 때 찾아왔던 질병과 가난 등 온갖 문제들이 떠납니다. 축복의 길이 열리며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옵니다.
이처럼 내가 빛 가운데 거하는 만큼 빛의 권세가 따르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에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죄는 어둠에 속하기 때문에 어둠이 어둠의 세력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죄를 벗고 진리를 좇을 때라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범죄하여 어둠 가운데 있다면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빛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빛 가운데 거해야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습니다!"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줄로 아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빛 가운데 행할 때 서로 사귐이 있고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둠이 있으면 참 빛이신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둠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어 시험과 환난을 겪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의 권세'가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히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과 하나 된 증거가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질병아 물러가라, 재앙아 물러가라, 가난아 물러가라, 시험 환난아 물러가라" 하며 기도할 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므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니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지요. 또한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영혼이 잘되어 만사가 형통합니다(신 28:1~14 ; 요삼 2).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철저히 어둠을 벗어버리고 더욱 밝은 빛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빛과 어둠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2.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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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임하는 축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축복장이라고 불리는 신명기 28장 1~14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마귀'란?
악한 영들에 속한 마귀는 루시퍼와 함께 타락한 천사 중 일부로, 검은 형상에 사람처럼 이목구비와 손발이 있다. 사단의 지시를 받아 수많은 귀신을 관리하고 지시하며 비진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온갖 죄를 행하게 한다. 생각으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사단이라면 비진리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마귀다.
2011-05-06
제18과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영생
요 6:53~55
읽을말씀 : 요 6:53~55 | 외울말씀 : 요 6:53 l 참고 말씀:출 12:9~10
교육목표 : 인자의 살과 피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살펴보고, 영생을 위하여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사람이 사는 동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식을 먹으며 동시에 수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음식과 물이 적절히 배합되어야 영양소가 소화, 흡수되며 불필요한 노폐물과 독소가 배출되기 때문이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알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생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인자의 살이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인자의 살이란 예수님의 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말씀하셨습니다. 즉 참된 양식인 인자의 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만 담는 것과 마음에 양식 삼는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지식으로만 담는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기억된 것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양식 삼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암송할 때도 영적인 의미를 새기고 묵상하며 삶 가운데 행함으로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신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마음에 양식 삼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고 핍박할 때 감정이 상하고 상대가 미워지며 결국 악으로 갚고 말지요.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은 사람은 이 말씀이 성경 몇 장 몇 절에 있는지는 잊어버렸다 해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저절로 사랑과 긍휼이 우러납니다. 이처럼 인자의 살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가면 진리가 마음에 채워지며 반대로 비진리가 빠져나가게 됩니다.
2. 인자의 살을 먹는 방법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 어린양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어린양에 비유하여 인자의 살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즉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출 12:9~10) 하셨지요.
먼저, '날로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된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날로 먹으면 소화도 잘 안 되고 배탈이 나기 쉽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날로 먹으면 엉뚱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했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음의 선진들이 골방에서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골방이 아닌 동산이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지요. 골방은 영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은 골방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듯이, 세상 근심 걱정이나 잡념 속에서 중언부언하지 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중심 바쳐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물에 삶아 먹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 말씀에 세상 것을 가미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면서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며 세상 지식을 인용하여 마치 진리인 양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과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며 아무리 훌륭한 사상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어떤 지식보다 뛰어나며(고전 1:25) 유일한 진리요, 영원히 변함이 없기 때문에 세상 것을 가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으라'고 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레위기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빼고 읽거나 기사와 표적은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을 빼면 결국 남는 것은 진리도, 믿음도 아니며 윤리와 도덕에 해당하는 것만 남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지키기 어려운 말씀들은 지나쳐 버리니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고 해도 믿음이 성장해 영생을 얻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생각에 맞는 특정한 부분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온전히 믿고 양식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을 통째로 불에 구워 먹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불은 성령의 불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성령의 감동함 속에 깨닫고 양식 삼으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풀지 않고 억지로 풀면 오히려 진리를 벗어나 사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벧후 3:16).
마지막으로,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燒火-불사르거나 태움)하라' 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이 권세를 잡고 있는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밤에 속하지만 때가 이르러 참 빛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게 되면 영적으로는 아침이 되지요.
이처럼 주님이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면 더 이상 마음밭을 개간하여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내가 빨리 죄악을 버리고 영으로 들어갈 걸…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상급도 많이 쌓을 걸…' 아무리 안타깝게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습니다. 따라서 고기를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부지런히 인자의 살인 하나님 말씀을 잘 양식 삼아 신부단장을 온전히 마치라는 뜻입니다.
3. 인자의 피를 마시는 것이란?
요한복음 6장 54~55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음식과 함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음식과 물을 함께 섭취해야 소화가 잘되고, 영양분이 흡수되고 노폐물은 배설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자의 살과 함께 인자의 피를 반드시 마셔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양식 삼은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실천할 때 영적인 믿음이 되고 생명이 되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2절에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단지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직접 행함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가 양식 삼은 하나님 말씀을 행하면 진리는 흡수되고 그와 반대되는 비진리는 배설되므로 검은 마음에서 하얀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가령 "미워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양식 삼아 그대로 하면 '사랑'이라는 영양분은 흡수되고 '미움'이라는 노폐물은 배설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하면 더럽고 추한 비진리의 마음은 빠져 나가고 선한 마음 곧 진리로 변화되어 갑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심히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심으로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진리로 변화시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2.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방법입니다. 괄호 안에서 맞는 것을 찾아 O표 하세요.
① 날로 먹지 말라 (ㄱ ㄴ ㄷ ㄹ)
② 물에 삶아서 먹지 말라 (ㄱ ㄴ ㄷ ㄹ)
③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으라 (ㄱ ㄴ ㄷ ㄹ)
④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 (ㄱ ㄴ ㄷ ㄹ)
ㄱ.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을 빠짐없이 양식 삼아야 한다.
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신속히 신부단장을 마쳐야 한다.
ㄷ. 하나님 말씀에 세상 것을 가미하지 말라는 뜻이다.
ㄹ. 영적인 의미를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어린양'이란?
아직 교미하지 않은 일 년 된 양을 어린양이라고 하는데 영적으로는 흠도 점도 없이 순결하신 예수님을 뜻한다. 양이 순종을 잘하고 온유하며 사람들에게 털과 고기와 젖 등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다.
교육목표 : 인자의 살과 피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살펴보고, 영생을 위하여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사람이 사는 동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식을 먹으며 동시에 수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음식과 물이 적절히 배합되어야 영양소가 소화, 흡수되며 불필요한 노폐물과 독소가 배출되기 때문이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알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생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인자의 살이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인자의 살이란 예수님의 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말씀하셨습니다. 즉 참된 양식인 인자의 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영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만 담는 것과 마음에 양식 삼는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지식으로만 담는 사람은 세월이 흐르면 기억된 것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양식 삼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암송할 때도 영적인 의미를 새기고 묵상하며 삶 가운데 행함으로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하신 말씀을 머리로만 알고 마음에 양식 삼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고 핍박할 때 감정이 상하고 상대가 미워지며 결국 악으로 갚고 말지요.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은 사람은 이 말씀이 성경 몇 장 몇 절에 있는지는 잊어버렸다 해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저절로 사랑과 긍휼이 우러납니다. 이처럼 인자의 살을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가면 진리가 마음에 채워지며 반대로 비진리가 빠져나가게 됩니다.
2. 인자의 살을 먹는 방법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 어린양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어린양에 비유하여 인자의 살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즉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출 12:9~10) 하셨지요.
먼저, '날로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된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날로 먹으면 소화도 잘 안 되고 배탈이 나기 쉽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날로 먹으면 엉뚱한 해석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예를 들어, 마태복음 6장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했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믿음의 선진들이 골방에서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골방이 아닌 동산이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지요. 골방은 영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씀은 골방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듯이, 세상 근심 걱정이나 잡념 속에서 중언부언하지 말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중심 바쳐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물에 삶아 먹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 말씀에 세상 것을 가미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면서 "어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며 세상 지식을 인용하여 마치 진리인 양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생각과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며 아무리 훌륭한 사상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어떤 지식보다 뛰어나며(고전 1:25) 유일한 진리요, 영원히 변함이 없기 때문에 세상 것을 가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으라'고 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레위기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빼고 읽거나 기사와 표적은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을 빼면 결국 남는 것은 진리도, 믿음도 아니며 윤리와 도덕에 해당하는 것만 남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지키기 어려운 말씀들은 지나쳐 버리니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고 해도 믿음이 성장해 영생을 얻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생각에 맞는 특정한 부분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온전히 믿고 양식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을 통째로 불에 구워 먹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불은 성령의 불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성령의 감동함 속에 깨닫고 양식 삼으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풀지 않고 억지로 풀면 오히려 진리를 벗어나 사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벧후 3:16).
마지막으로,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燒火-불사르거나 태움)하라' 했는데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이 권세를 잡고 있는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밤에 속하지만 때가 이르러 참 빛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게 되면 영적으로는 아침이 되지요.
이처럼 주님이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면 더 이상 마음밭을 개간하여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내가 빨리 죄악을 버리고 영으로 들어갈 걸…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상급도 많이 쌓을 걸…' 아무리 안타깝게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습니다. 따라서 고기를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말씀은,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부지런히 인자의 살인 하나님 말씀을 잘 양식 삼아 신부단장을 온전히 마치라는 뜻입니다.
3. 인자의 피를 마시는 것이란?
요한복음 6장 54~55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음식과 함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음식과 물을 함께 섭취해야 소화가 잘되고, 영양분이 흡수되고 노폐물은 배설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자의 살과 함께 인자의 피를 반드시 마셔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양식 삼은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실천할 때 영적인 믿음이 되고 생명이 되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2절에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단지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직접 행함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가 양식 삼은 하나님 말씀을 행하면 진리는 흡수되고 그와 반대되는 비진리는 배설되므로 검은 마음에서 하얀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가령 "미워하지 말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양식 삼아 그대로 하면 '사랑'이라는 영양분은 흡수되고 '미움'이라는 노폐물은 배설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하면 더럽고 추한 비진리의 마음은 빠져 나가고 선한 마음 곧 진리로 변화되어 갑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심히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심으로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진리로 변화시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신다는 말씀의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2.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방법입니다. 괄호 안에서 맞는 것을 찾아 O표 하세요.
① 날로 먹지 말라 (ㄱ ㄴ ㄷ ㄹ)
② 물에 삶아서 먹지 말라 (ㄱ ㄴ ㄷ ㄹ)
③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으라 (ㄱ ㄴ ㄷ ㄹ)
④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 (ㄱ ㄴ ㄷ ㄹ)
ㄱ.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을 빠짐없이 양식 삼아야 한다.
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신속히 신부단장을 마쳐야 한다.
ㄷ. 하나님 말씀에 세상 것을 가미하지 말라는 뜻이다.
ㄹ. 영적인 의미를 모르고 하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어린양'이란?
아직 교미하지 않은 일 년 된 양을 어린양이라고 하는데 영적으로는 흠도 점도 없이 순결하신 예수님을 뜻한다. 양이 순종을 잘하고 온유하며 사람들에게 털과 고기와 젖 등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셨다.
2011-04-29
제17과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
요 3:3~8
읽을말씀 : 요 3:3~8 | 외울말씀 : 요 3:5 ㅣ 참고 말씀:요 4:14, 행 2:38
교육목표 :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천국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부활과 천사와 종말론,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믿었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이스라엘의 지도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호되게 책망을 하시지요. 겉모습은 거룩한 체하나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여 마치 회칠한 무덤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예수님이 전파하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며 죽이고자 했습니다.
1. 선한 중심을 소유한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외식하는 그들과는 달리 선한 중심을 소유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 여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는 오늘날 법을 제정하고 재판하는 국회와 법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유대 최고 회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 사회적으로는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진 상류층 인사였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정통한 그였지만 진리에 대한 갈급함은 더 깊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이 여느 사람과는 달라 보였습니다. 선포하시는 모든 말씀이 확신에 찬 진리의 말씀이었고,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알 수 없는 권세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줄 몰랐고, 유대인의 관원으로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증오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이후,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하며 예수님을 옹호하였지요(요 7:51). 이러한 발언은 유대 관원으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잘못하면 직위를 박탈당하고 박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장사 지낸 것만 보아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요 19:39~40).
2.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영적인 대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존경의 의미를 담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걷지 못하는 자가 걷는 등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권능을 행하는 것을 보고 선한 양심 속에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시기보다는 뜻밖에도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무지한 니고데모를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지요. 니고데모는 도대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니. 아니 어떻게 사람이 두 번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의아하게 생각했지요.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영적으로 깨우치지 못하니 육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시면서 영적으로 깨우칠 수 있도록 알려 주십니다. 즉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러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말씀하신 것을 깨우치기 위해 사람의 영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이 땅의 흙으로 지어졌지만 생기 곧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이 들어가자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즉 살아 있는 영, 생령이 되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영이 살아 있을 때는 하나님과 항상 교통하며 진리를 공급받았지만, 영이 죽자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져 육체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즉 영의 지식을 공급받지 못하고 원수 마귀 사단이 비진리를 심어 주므로 세상 정욕을 좇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이 죽었다고 하니까 아담의 목숨이 끊어져 죽은 줄로 아는데, 아닙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자 진리인 영의 지식이 빠져나가고, 비진리가 들어와 영을 꼼짝 못하게 감싸므로 영이 활동을 못하고 죽은 것처럼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처럼 첫 사람 아담의 영이 죽으므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나고 어둠과 짝하다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죽은 영을 살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먼저, 사람이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마음의 할례를 받아 진리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란 영생수 곧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뜻하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14절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물은 갈증을 해소해 주고 생명을 유지하며 더러움을 씻어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인 물은 마음에 있는 추하고 더러운 악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눈앞에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으면 갈증을 해소할 수 없고, 씻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 없듯이 영생수인 하나님 말씀을 알아도 지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대로 미움, 시기, 질투, 판단, 정죄 등 비진리를 버리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더불어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사랑하고 섬기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씀들을 행해 나가면 마음 안에 진리가 채워지지요. 이렇게 비진리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인 진리로 채우면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물 곧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할 뿐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을 받을 때라야 죽은 영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성령을 우리의 마음 안에 주십니다.
성령은 마음 안에 내주하셔서 죽은 영을 살리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죄를 버리도록 도우심으로 진리의 사람,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지요. 이것을 곧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죽은 영이 살아나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 말씀에 담긴 영적인 뜻을 깨우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심겨지거나 믿음이 되지 않으니 행할 수 있는 능력도 따르지 않지요.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안다 해도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없고,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 남을 뿐 그것으로는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영적 깨달음이 오고 마음에서 믿어지며, 기도할 때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와서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죽은 영이 살아났으면 계속하여 믿음이 성장해 가야 합니다. 씨를 심었으면 열매를 따기까지 가꾸고 수고하는 것처럼 성령의 도움으로 영이 자라가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변화되어 참마음을 이루는 만큼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 믿음을 주시며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니고데모에 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다.
② 예수님을 본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신 줄 알았다.
③ 예수님을 배척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담대히 예수님을 변호하였다.
2. 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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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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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산헤드린 공회'란?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로 구성된 유대 공동체 최고 통치 기관이다. 주로 백성들의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에 관해 재판하였으며 벌금형이나 태형을 선고하고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공회의 권한이 막강했다.
교육목표 :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천국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깨닫고 구원에 이르게 한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부활과 천사와 종말론,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믿었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이스라엘의 지도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호되게 책망을 하시지요. 겉모습은 거룩한 체하나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여 마치 회칠한 무덤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예수님이 전파하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며 죽이고자 했습니다.
1. 선한 중심을 소유한 니고데모
니고데모는 외식하는 그들과는 달리 선한 중심을 소유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 여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는 오늘날 법을 제정하고 재판하는 국회와 법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유대 최고 회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의원으로, 사회적으로는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성을 가진 상류층 인사였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정통한 그였지만 진리에 대한 갈급함은 더 깊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이 여느 사람과는 달라 보였습니다. 선포하시는 모든 말씀이 확신에 찬 진리의 말씀이었고,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알 수 없는 권세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줄 몰랐고, 유대인의 관원으로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증오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 이후,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하며 예수님을 옹호하였지요(요 7:51). 이러한 발언은 유대 관원으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잘못하면 직위를 박탈당하고 박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장사 지낸 것만 보아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요 19:39~40).
2.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영적인 대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존경의 의미를 담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고,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걷지 못하는 자가 걷는 등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권능을 행하는 것을 보고 선한 양심 속에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시기보다는 뜻밖에도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무지한 니고데모를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지요. 니고데모는 도대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니. 아니 어떻게 사람이 두 번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의아하게 생각했지요.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사람이 한 번 태어나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영적으로 깨우치지 못하니 육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하시면서 영적으로 깨우칠 수 있도록 알려 주십니다. 즉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러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말씀하신 것을 깨우치기 위해 사람의 영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이 땅의 흙으로 지어졌지만 생기 곧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이 들어가자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즉 살아 있는 영, 생령이 되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대로 영이 죽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영이 살아 있을 때는 하나님과 항상 교통하며 진리를 공급받았지만, 영이 죽자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져 육체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즉 영의 지식을 공급받지 못하고 원수 마귀 사단이 비진리를 심어 주므로 세상 정욕을 좇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이 죽었다고 하니까 아담의 목숨이 끊어져 죽은 줄로 아는데, 아닙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아담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자 진리인 영의 지식이 빠져나가고, 비진리가 들어와 영을 꼼짝 못하게 감싸므로 영이 활동을 못하고 죽은 것처럼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처럼 첫 사람 아담의 영이 죽으므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도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나고 어둠과 짝하다가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죽은 영을 살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먼저, 사람이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마음의 할례를 받아 진리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물이란 영생수 곧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뜻하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 14절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물은 갈증을 해소해 주고 생명을 유지하며 더러움을 씻어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인 물은 마음에 있는 추하고 더러운 악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눈앞에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으면 갈증을 해소할 수 없고, 씻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 없듯이 영생수인 하나님 말씀을 알아도 지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대로 미움, 시기, 질투, 판단, 정죄 등 비진리를 버리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더불어 "하라, 지키라" 하신 대로 사랑하고 섬기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씀들을 행해 나가면 마음 안에 진리가 채워지지요. 이렇게 비진리를 버리고 하나님 말씀인 진리로 채우면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물 곧 하나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할 뿐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을 받을 때라야 죽은 영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성령을 우리의 마음 안에 주십니다.
성령은 마음 안에 내주하셔서 죽은 영을 살리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죄를 버리도록 도우심으로 진리의 사람,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지요. 이것을 곧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죽은 영이 살아나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 말씀에 담긴 영적인 뜻을 깨우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심겨지거나 믿음이 되지 않으니 행할 수 있는 능력도 따르지 않지요.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안다 해도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없고,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 남을 뿐 그것으로는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영적 깨달음이 오고 마음에서 믿어지며, 기도할 때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와서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죽은 영이 살아났으면 계속하여 믿음이 성장해 가야 합니다. 씨를 심었으면 열매를 따기까지 가꾸고 수고하는 것처럼 성령의 도움으로 영이 자라가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변화되어 참마음을 이루는 만큼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 믿음을 주시며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니고데모에 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다.
② 예수님을 본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신 줄 알았다.
③ 예수님을 배척하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담대히 예수님을 변호하였다.
2. 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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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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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산헤드린 공회'란?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로 구성된 유대 공동체 최고 통치 기관이다. 주로 백성들의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에 관해 재판하였으며 벌금형이나 태형을 선고하고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공회의 권한이 막강했다.
2011-04-22
제16과부활의 영적인 의미
요 11:25~26
읽을말씀 : 요 11:25~26 | 외울말씀 : 요 11:25 ㅣ 참고 말씀:살전 4:16~17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아 영원한 생명과 아름다운 천국 외에 부활이 갖는 세 가지 영적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부활절은 성도들이 서로 축하하며 영광 돌릴 만큼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성도들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부활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조만간 인간 복제가 실현될 수도 있다고 전망하였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해 가니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는 것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되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습니다. 이미 생명 활동이 멈추고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 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다시 복원되고 그 몸과 몸의 주인인 영혼이 결합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다시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올라 갈 수도 있고 7년 혼인잔치가 베풀어지는 둘째 하늘에 머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둘째 하늘 곧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지요.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본 제단을 통해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어버린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어버린 신경도 살려 주셨지요. 수많은 사람이 다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셀 수 없이 나타내셨지요. 부활은 이처럼 권능을 행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2.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오직 그에게만(즉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셨지요.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했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담은 사랑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할 수 있었고, 마침내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고 그 처소마다 영광이 다르지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지요.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도, 성령 하나님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주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지요.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면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지요(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부활의 영광은 물론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부활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 사망에 내어 주심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육을 입으실 이유도,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말씀한 대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지요.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더러운 죄를 그 아들의 피로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거기다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처소까지 마련해 주셨지요. 마치 사랑하는 자녀의 방을 정성스럽게 꾸미듯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아름다운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7년 혼인잔치가 있을 둘째 하늘은 물론, 하나님께서 계신 넷째 하늘과 천국이 있는 셋째 하늘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공간입니다. 장차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한 몸과 세마포를 입히시고 혼인잔치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와 천년왕국이 끝나면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인도하셔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게 되지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 년같이 인내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내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큰 사랑에 보답하려면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되 흔적도 없이 뽑아 버림으로 주님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를 입고 그 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입니다. 괄호 안을 채워 보세요.
첫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셋째,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우리도 부활의 소망, 영생과 천국의 소망으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4~19절 말씀에서 답을 찾아 써보세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의 차이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은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이 오시면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을 영적인 부활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죽으면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때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데 이것을 육적인 부활이라 한다.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아 영원한 생명과 아름다운 천국 외에 부활이 갖는 세 가지 영적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부활절은 성도들이 서로 축하하며 영광 돌릴 만큼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성도들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부활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조만간 인간 복제가 실현될 수도 있다고 전망하였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해 가니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는 것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되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습니다. 이미 생명 활동이 멈추고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 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다시 복원되고 그 몸과 몸의 주인인 영혼이 결합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다시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올라 갈 수도 있고 7년 혼인잔치가 베풀어지는 둘째 하늘에 머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둘째 하늘 곧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지요.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본 제단을 통해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어버린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어버린 신경도 살려 주셨지요. 수많은 사람이 다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셀 수 없이 나타내셨지요. 부활은 이처럼 권능을 행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2.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오직 그에게만(즉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셨지요.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했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담은 사랑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할 수 있었고, 마침내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고 그 처소마다 영광이 다르지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지요.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도, 성령 하나님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주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지요.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면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지요(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부활의 영광은 물론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부활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 사망에 내어 주심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육을 입으실 이유도,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말씀한 대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지요.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더러운 죄를 그 아들의 피로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거기다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처소까지 마련해 주셨지요. 마치 사랑하는 자녀의 방을 정성스럽게 꾸미듯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아름다운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7년 혼인잔치가 있을 둘째 하늘은 물론, 하나님께서 계신 넷째 하늘과 천국이 있는 셋째 하늘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공간입니다. 장차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한 몸과 세마포를 입히시고 혼인잔치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와 천년왕국이 끝나면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인도하셔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게 되지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 년같이 인내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내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큰 사랑에 보답하려면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되 흔적도 없이 뽑아 버림으로 주님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를 입고 그 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입니다. 괄호 안을 채워 보세요.
첫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셋째,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우리도 부활의 소망, 영생과 천국의 소망으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4~19절 말씀에서 답을 찾아 써보세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의 차이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은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이 오시면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을 영적인 부활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죽으면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때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데 이것을 육적인 부활이라 한다.
2011-04-15
제15과가상칠언 (3)
요 19:30, 눅 23:46
읽을말씀 : 요 19:30, 눅 23:46 | 외울말씀 : 히 10:20 ㅣ 참고 말씀:마 27:51~53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제 6, 7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십자가 처형법은 급소를 찌르지 않지만 가장 혹독하기로 유명합니다.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채 서서히 죽어가기 때문에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이 체중에 못 이겨 살이 찢어지고, 머리에는 뾰쪽한 가시가 살을 파고들어 얼굴은 온통 피로 적셔 있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계속 피를 흘리셨으니 그 고통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마침내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 채 운명하셨습니다.
제6언,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 속에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시고 인간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었기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셔서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나아가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림으로써 완전히 승리하셨지요.
또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모든 것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영적인 사랑(고전 13:4~7)과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팔복(마 5:3~10)을 이루어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충성되이 사명을 잘 감당하여 열매 맺고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게 되지요.
제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6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물과 피를 쏟았기 때문에 운명하기 직전에는 기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셨지요. 제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죄를 대속해 주는 제물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면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도 사람처럼 영과 혼과 육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었지만 영혼은 누구도 죽일 수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지요.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살전 5:23)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면 영혼은 장막인 육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육)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살아갑니다(눅 16:19~31).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영만 받으시고 혼은 받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 가서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가난, 질병 등 혼의 작용을 통해 경작받은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중심에서 감사할 수도 없지요. 이 땅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느낌과 함께 뇌세포 안에 입력하고, 그 입력한 것을 다시 떠올려 내는 모든 것들이 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고,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데다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였기에 더욱 힘써 부르짖으셨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뜻을 모두 이룬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당당히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길 수 있었지요.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요. 마태복음 27장 51~53절을 보면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소 휘장은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쳐 놓은 긴 커튼을 말합니다. 성소에는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가 죄인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일반 백성은 회막문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을 뿐 성소나 지성소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그때부터 일반 사람도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이는 곧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이 죄를 대속하는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대신 아뢰었으나 그때부터는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되었습니다. 곧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때에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합니다(히 10:19~20).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산천초목 모든 것들이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탄식하시는 소리로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끝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셨지요.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많은 무덤이 열렸지만,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삼일 만에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뒤에 그들도 무덤에서 나왔지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하였음을 증거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우쳐 온 마음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제6언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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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께서 제4언에서는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시고, 제7언에서는 "아버지" 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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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영, 혼, 육'이란?
'영'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혼'은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장치와 그 안에 기억된 지식들과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을 통틀어 말한다. '육'의 육적인 의미는 살 즉 몸을 말하고, 영적인 뜻은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어 없어지는 것과 추하고 더러운 비진리를 말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제 6, 7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십자가 처형법은 급소를 찌르지 않지만 가장 혹독하기로 유명합니다.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채 서서히 죽어가기 때문에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이 체중에 못 이겨 살이 찢어지고, 머리에는 뾰쪽한 가시가 살을 파고들어 얼굴은 온통 피로 적셔 있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계속 피를 흘리셨으니 그 고통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마침내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 채 운명하셨습니다.
제6언,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 속에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시고 인간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었기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셔서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나아가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림으로써 완전히 승리하셨지요.
또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모든 것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영적인 사랑(고전 13:4~7)과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팔복(마 5:3~10)을 이루어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충성되이 사명을 잘 감당하여 열매 맺고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게 되지요.
제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6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물과 피를 쏟았기 때문에 운명하기 직전에는 기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셨지요. 제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죄를 대속해 주는 제물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면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도 사람처럼 영과 혼과 육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었지만 영혼은 누구도 죽일 수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지요.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살전 5:23)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면 영혼은 장막인 육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육)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살아갑니다(눅 16:19~31).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영만 받으시고 혼은 받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 가서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가난, 질병 등 혼의 작용을 통해 경작받은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중심에서 감사할 수도 없지요. 이 땅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느낌과 함께 뇌세포 안에 입력하고, 그 입력한 것을 다시 떠올려 내는 모든 것들이 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고,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데다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였기에 더욱 힘써 부르짖으셨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뜻을 모두 이룬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당당히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길 수 있었지요.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요. 마태복음 27장 51~53절을 보면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소 휘장은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쳐 놓은 긴 커튼을 말합니다. 성소에는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가 죄인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일반 백성은 회막문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을 뿐 성소나 지성소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그때부터 일반 사람도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이는 곧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이 죄를 대속하는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대신 아뢰었으나 그때부터는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되었습니다. 곧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때에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합니다(히 10:19~20).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산천초목 모든 것들이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탄식하시는 소리로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끝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셨지요.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많은 무덤이 열렸지만,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삼일 만에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뒤에 그들도 무덤에서 나왔지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하였음을 증거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우쳐 온 마음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제6언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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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께서 제4언에서는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시고, 제7언에서는 "아버지" 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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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영, 혼, 육'이란?
'영'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혼'은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장치와 그 안에 기억된 지식들과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을 통틀어 말한다. '육'의 육적인 의미는 살 즉 몸을 말하고, 영적인 뜻은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어 없어지는 것과 추하고 더러운 비진리를 말한다.
2011-04-08
제14과가상칠언(2)
요 19:26~28, 마 27:46
읽을말씀 : 요 19:26~28, 마 27:46 | 외울말씀 : 마 12:50 ㅣ 참고 말씀:시 69:21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제3, 4, 5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밝히 깨달아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가상칠언 중 제3언, 제4언, 제5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온 듯하여 늘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할까 조심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고 계시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애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 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리신 것이요, 마리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출 3:14) 누군가 하나님을 낳았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빌 2:6)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유전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야만 잉태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섬기며 우상처럼 경배한다면 십계명 중 제2계명에도 어긋납니다(출 20:3~4).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철저히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리아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로하시고자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던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으니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졌을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같이 섬기라고 당부하셨지요.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자매이며 가족이라는 영적인 소속감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하신 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잔인한 로마 병정이 얼마나 혹독하게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렸는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곳곳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여섯 시간 동안 물과 피를 흘리셨으니 예수님께 무슨 힘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에게 전하는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는 소리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멸시 천대를 참으며 모든 고통을 견딘 분이 곧 운명할 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처참하게 십자가를 진 것임을 알리는 절규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계시며,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진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상태였기에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인생들을 위해 죽어 주건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영혼들을 다시 한 번 경고하시고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피조물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신지를 잘 아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질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심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간절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뜨거운 햇볕 아래 수 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서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타는 듯한 갈증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배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단순히 그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타는 듯한 갈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자녀들을 향해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즉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뜻이지요. 사람들은 그런 영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물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요 19:29~30). 이는 곧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환상을 보고 기록하였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고 온 인류의 저주와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포도주는 영적으로 피를 상징합니다.
구약 시대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림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고(히 10:10)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이 '신 포도주'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가 '새 포도주'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목마르다 호소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피를 흘림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그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드리는 것이 바로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인 뜻을 바로 알아 지금도 주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함으로 예수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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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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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사도 요한'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께 마리아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한복음과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제3, 4, 5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밝히 깨달아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가상칠언 중 제3언, 제4언, 제5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온 듯하여 늘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할까 조심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고 계시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애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 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리신 것이요, 마리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출 3:14) 누군가 하나님을 낳았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빌 2:6)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유전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야만 잉태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섬기며 우상처럼 경배한다면 십계명 중 제2계명에도 어긋납니다(출 20:3~4).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철저히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리아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로하시고자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던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으니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졌을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같이 섬기라고 당부하셨지요.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자매이며 가족이라는 영적인 소속감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하신 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잔인한 로마 병정이 얼마나 혹독하게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렸는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곳곳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여섯 시간 동안 물과 피를 흘리셨으니 예수님께 무슨 힘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에게 전하는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는 소리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멸시 천대를 참으며 모든 고통을 견딘 분이 곧 운명할 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처참하게 십자가를 진 것임을 알리는 절규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계시며,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진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상태였기에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인생들을 위해 죽어 주건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영혼들을 다시 한 번 경고하시고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피조물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신지를 잘 아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질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심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간절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뜨거운 햇볕 아래 수 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서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타는 듯한 갈증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배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단순히 그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타는 듯한 갈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자녀들을 향해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즉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뜻이지요. 사람들은 그런 영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물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요 19:29~30). 이는 곧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환상을 보고 기록하였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고 온 인류의 저주와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포도주는 영적으로 피를 상징합니다.
구약 시대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림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고(히 10:10)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이 '신 포도주'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가 '새 포도주'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목마르다 호소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피를 흘림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그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드리는 것이 바로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인 뜻을 바로 알아 지금도 주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함으로 예수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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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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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사도 요한'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께 마리아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한복음과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2011-04-01
제13과가상칠언(1)
눅 23:33~43
읽을말씀 : 눅 23:33~43 | 외울말씀 : 마 5:44 ㅣ참고 말씀:마 27:38~42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많은 사람이 임종이 가까워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가족과 친지 등 주변에 유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일곱 마디 말씀이 바로 가상칠언(架上七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려는 시점에서 남긴 가상칠언에는 어떠한 영적인 뜻이 담겨 있을까요? 그중 제1언과 2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로마 군병과 이스라엘 백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멸시하며 마치 흉악한 죄인 취급을 하였습니다. 오직 선만 행하시고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향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희롱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뜻 가운데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과 수치를 묵묵히 당하셨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들의 하는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가장 먼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단순히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롱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일컫지요.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고 엄청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주관하여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하지요.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 중 첫 번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도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사랑과 용서로 간절히 기도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골고다 언덕 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한 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으나 다른 편 강도는 오히려 예수님을 힐난하는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좌우편에 함께 있던 강도들에 대한 내용이 복음서에 따라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했고,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여 둘 다 예수님을 욕했다고 나오지요.
반면에 누가복음 23장에는 '한 편 강도가 다른 편 강도를 꾸짖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일입니다. 즉 마태, 마가, 누가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목격한 것을 기록함으로써 당시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유추해 보게 하셨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상황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십자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많은 군중들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들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 소리는 그 쪽 강도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지요.
그런데 반대편 강도도 예수님 쪽을 향해 인상을 쓰면서 말을 하는데 마치 예수님을 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책망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볼 때는 중앙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이처럼 다른 편 강도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 멀리서 그 장면만 본 마태와 마가는 두 강도가 욕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상황을 정확히 알았던 누가복음의 기자는 한 강도는 예수님을 욕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상황을 바로 분별하도록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틀리게 기록하도록 놔두신 것이 아니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 가고, 한 편 강도는 낙원에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거할 천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곳은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며, 각 처소마다 행복과 영광이 다릅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처소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만 들어가지요. 그러나 낙원은 천국에서 가장 변두리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단지 주님을 영접했을 뿐 죄를 싸워 버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낙원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 뿐,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고자 죄를 버린 것도,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상급 없는 낙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강도와 함께 낙원에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지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오늘'이란,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날 혹은 어느 특정한 날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바로 그 순간부터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 했고, 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벧전 3:19) 하셨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뒤 윗음부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윗음부로 가셔야만 했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라 할지라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양심을 좇아 살다가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구원받을 영혼들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는 기록이 나오지요(눅 16:22). 바로 이런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윗음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물론 온 인류를 위해 용서와 사랑의 간구를 올리셨고,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이 자신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윗음부에 가셔서 전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나를 핍박하고 힘들게 하는 영혼은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여기서 '저희'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 되신다.
② 한 편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구원받아 낙원에 가게 되었다.
③ 예수님은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아랫음부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지옥사자들에게 끌려가 악한 영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3일간 머무는 큰 구덩이와 같은 대기 장소를 말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많은 사람이 임종이 가까워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가족과 친지 등 주변에 유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일곱 마디 말씀이 바로 가상칠언(架上七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려는 시점에서 남긴 가상칠언에는 어떠한 영적인 뜻이 담겨 있을까요? 그중 제1언과 2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로마 군병과 이스라엘 백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멸시하며 마치 흉악한 죄인 취급을 하였습니다. 오직 선만 행하시고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향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희롱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뜻 가운데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과 수치를 묵묵히 당하셨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들의 하는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가장 먼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단순히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롱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일컫지요.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고 엄청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주관하여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하지요.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 중 첫 번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도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사랑과 용서로 간절히 기도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골고다 언덕 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한 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으나 다른 편 강도는 오히려 예수님을 힐난하는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좌우편에 함께 있던 강도들에 대한 내용이 복음서에 따라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했고,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여 둘 다 예수님을 욕했다고 나오지요.
반면에 누가복음 23장에는 '한 편 강도가 다른 편 강도를 꾸짖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일입니다. 즉 마태, 마가, 누가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목격한 것을 기록함으로써 당시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유추해 보게 하셨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상황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십자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많은 군중들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들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 소리는 그 쪽 강도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지요.
그런데 반대편 강도도 예수님 쪽을 향해 인상을 쓰면서 말을 하는데 마치 예수님을 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책망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볼 때는 중앙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이처럼 다른 편 강도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 멀리서 그 장면만 본 마태와 마가는 두 강도가 욕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상황을 정확히 알았던 누가복음의 기자는 한 강도는 예수님을 욕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상황을 바로 분별하도록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틀리게 기록하도록 놔두신 것이 아니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 가고, 한 편 강도는 낙원에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거할 천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곳은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며, 각 처소마다 행복과 영광이 다릅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처소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만 들어가지요. 그러나 낙원은 천국에서 가장 변두리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단지 주님을 영접했을 뿐 죄를 싸워 버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낙원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 뿐,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고자 죄를 버린 것도,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상급 없는 낙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강도와 함께 낙원에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지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오늘'이란,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날 혹은 어느 특정한 날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바로 그 순간부터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 했고, 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벧전 3:19) 하셨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뒤 윗음부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윗음부로 가셔야만 했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라 할지라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양심을 좇아 살다가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구원받을 영혼들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는 기록이 나오지요(눅 16:22). 바로 이런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윗음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물론 온 인류를 위해 용서와 사랑의 간구를 올리셨고,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이 자신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윗음부에 가셔서 전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나를 핍박하고 힘들게 하는 영혼은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여기서 '저희'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 되신다.
② 한 편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구원받아 낙원에 가게 되었다.
③ 예수님은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아랫음부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지옥사자들에게 끌려가 악한 영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3일간 머무는 큰 구덩이와 같은 대기 장소를 말한다.
2011-03-25
제12과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
요 19:32~36
읽을말씀 : 요 19:32~36 | 외울말씀 : 벧후 1:4 l 참고 말씀:시 34:20, 요 1:14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나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 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바로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하지요.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병사는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코자 먼저 강도들의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다리를 꺾지 않았지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린 것이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몸의 뼈까지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34편 20절에 보면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또 민수기 9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출 12:46). 여기서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비유하였지요. 그래서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 하신 대로 예수님의 뼈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3~34절을 보면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쏟게 한 것은 사람의 악함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빌 2:6~8).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사람을 부요케 하며 병든 사람, 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지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복음을 전하셨고,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혼들을 위해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갖은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줄 번연히 알면서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으니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람들의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시며 아픔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 육신을 가진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셨지요.
또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시험도 묵묵히 담당하시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가 없지요.
셋째,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 때문에 흘리신 피와 물은 흠과 티가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지요.
따라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었음을 뜻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받은바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철저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해야 하지요.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단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에 대해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우리도 주님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④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능력의 피와 물이 될 수 없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얼마나 마음에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 되는 길이다.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나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 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바로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하지요.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병사는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코자 먼저 강도들의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다리를 꺾지 않았지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린 것이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몸의 뼈까지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34편 20절에 보면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또 민수기 9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출 12:46). 여기서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비유하였지요. 그래서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 하신 대로 예수님의 뼈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3~34절을 보면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쏟게 한 것은 사람의 악함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빌 2:6~8).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사람을 부요케 하며 병든 사람, 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지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복음을 전하셨고,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혼들을 위해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갖은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줄 번연히 알면서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으니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람들의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시며 아픔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 육신을 가진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셨지요.
또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시험도 묵묵히 담당하시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가 없지요.
셋째,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 때문에 흘리신 피와 물은 흠과 티가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지요.
따라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었음을 뜻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받은바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철저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해야 하지요.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단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에 대해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우리도 주님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④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능력의 피와 물이 될 수 없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얼마나 마음에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 되는 길이다.
2011-03-18
제11과예수님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뽑게 하신 섭리
요 19:23~24
읽을말씀 : 요 19:23~24 | 외울말씀 : 요 19:23 l 참고 말씀:시 22:18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관해 이처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해 두신 것일까요? 그 해답은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겉옷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군병들이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한 깃씩 가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로마 병사들이 옷을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리지요. 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옷 조각은 남아 있으므로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을 것을 나타냅니다. 결국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백성들이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채 40년이 못 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티투스에게 함락되고 말지요. 이때 로마군은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하였지요. 그리고 아이 밴 자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팔려나갔지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그들이 입술로 낸 말이 올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언도에 대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치지요. 이 고백대로 얼마 안 되어 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A.D. 70년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 영화를 보면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벌거벗긴 채 참혹하게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들이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한 말이 엄청난 환난으로 임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이유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옷에 대해서 위에서부터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을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계승해 왔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가 부르는 유대인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는 말씀에는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함없는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고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변함없는 중심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변함없는 야곱의 중심을 혈통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1948년 5월 14일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 독립한 뒤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그들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증하였습니다.
로마 군병이 호지 않고 위에서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지요.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마태복음 24장 32~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해 답변한 내용으로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는 상태에서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워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을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연관된 것끼리 짝지어 보세요.
①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눔 ②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짬
③ 속옷을 찢지 않음 ④ 티투스 ⑤ 무화과나무
ㄱ.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말한다.
ㄴ. 이스라엘이 이방족속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 민족임을 뜻한다.
ㄷ.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큼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이다.
ㄹ.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람이다.
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 리라"고 했습니다. 그 고백대로 훗날 그들에게 어떠한 보응이 임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티투스'란 누구일까요?
A.D. 70년에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치세 중에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폼페이 시가 땅 속에 매몰되었다. 80년에는 로마의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잇달았지만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관해 이처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해 두신 것일까요? 그 해답은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겉옷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군병들이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한 깃씩 가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로마 병사들이 옷을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리지요. 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옷 조각은 남아 있으므로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을 것을 나타냅니다. 결국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백성들이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채 40년이 못 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티투스에게 함락되고 말지요. 이때 로마군은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하였지요. 그리고 아이 밴 자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팔려나갔지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그들이 입술로 낸 말이 올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언도에 대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치지요. 이 고백대로 얼마 안 되어 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A.D. 70년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 영화를 보면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벌거벗긴 채 참혹하게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들이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한 말이 엄청난 환난으로 임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이유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옷에 대해서 위에서부터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을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계승해 왔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가 부르는 유대인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는 말씀에는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함없는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고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변함없는 중심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변함없는 야곱의 중심을 혈통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1948년 5월 14일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 독립한 뒤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그들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증하였습니다.
로마 군병이 호지 않고 위에서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지요.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마태복음 24장 32~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해 답변한 내용으로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는 상태에서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워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을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연관된 것끼리 짝지어 보세요.
①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눔 ②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짬
③ 속옷을 찢지 않음 ④ 티투스 ⑤ 무화과나무
ㄱ.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말한다.
ㄴ. 이스라엘이 이방족속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 민족임을 뜻한다.
ㄷ.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큼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이다.
ㄹ.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람이다.
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 리라"고 했습니다. 그 고백대로 훗날 그들에게 어떠한 보응이 임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티투스'란 누구일까요?
A.D. 70년에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치세 중에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폼페이 시가 땅 속에 매몰되었다. 80년에는 로마의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잇달았지만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킨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