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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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2
제16과부활의 영적인 의미
요 11:25~26
읽을말씀 : 요 11:25~26 | 외울말씀 : 요 11:25 ㅣ 참고 말씀:살전 4:16~17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아 영원한 생명과 아름다운 천국 외에 부활이 갖는 세 가지 영적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부활절은 성도들이 서로 축하하며 영광 돌릴 만큼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성도들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부활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조만간 인간 복제가 실현될 수도 있다고 전망하였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해 가니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는 것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되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습니다. 이미 생명 활동이 멈추고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 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다시 복원되고 그 몸과 몸의 주인인 영혼이 결합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다시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올라 갈 수도 있고 7년 혼인잔치가 베풀어지는 둘째 하늘에 머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둘째 하늘 곧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지요.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본 제단을 통해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어버린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어버린 신경도 살려 주셨지요. 수많은 사람이 다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셀 수 없이 나타내셨지요. 부활은 이처럼 권능을 행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2.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오직 그에게만(즉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셨지요.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했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담은 사랑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할 수 있었고, 마침내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고 그 처소마다 영광이 다르지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지요.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도, 성령 하나님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주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지요.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면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지요(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부활의 영광은 물론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부활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 사망에 내어 주심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육을 입으실 이유도,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말씀한 대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지요.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더러운 죄를 그 아들의 피로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거기다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처소까지 마련해 주셨지요. 마치 사랑하는 자녀의 방을 정성스럽게 꾸미듯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아름다운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7년 혼인잔치가 있을 둘째 하늘은 물론, 하나님께서 계신 넷째 하늘과 천국이 있는 셋째 하늘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공간입니다. 장차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한 몸과 세마포를 입히시고 혼인잔치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와 천년왕국이 끝나면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인도하셔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게 되지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 년같이 인내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내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큰 사랑에 보답하려면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되 흔적도 없이 뽑아 버림으로 주님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를 입고 그 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입니다. 괄호 안을 채워 보세요.
첫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셋째,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우리도 부활의 소망, 영생과 천국의 소망으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4~19절 말씀에서 답을 찾아 써보세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의 차이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은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이 오시면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을 영적인 부활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죽으면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때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데 이것을 육적인 부활이라 한다.
교육목표 : 부활절을 맞아 영원한 생명과 아름다운 천국 외에 부활이 갖는 세 가지 영적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부활절은 성도들이 서로 축하하며 영광 돌릴 만큼 참으로 복된 절기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성도들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부활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을 나타냅니다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조만간 인간 복제가 실현될 수도 있다고 전망하였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해 가니 사람의 삶과 죽음까지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나 최첨단 장비로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는 것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호흡이 끊어졌다가 소생되는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명하시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습니다. 이미 생명 활동이 멈추고 부패되어 소생할 수 없는 세포 하나하나를 재생시키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이보다 더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중 수명이 다해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은 성도 중에는 수백,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은 지 몇 십 년만 지나도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부패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마른 뼈도 아니고, 완전히 썩어 분해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몸의 형체가 다시 복원되고 그 몸과 몸의 주인인 영혼이 결합되지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때 다시 소생되는 몸은 공중으로 들려올라 갈 수도 있고 7년 혼인잔치가 베풀어지는 둘째 하늘에 머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즉 흙으로 지어진 몸이 둘째 하늘 곧 영의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또한 이 권능으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하심으로 신령한 부활체의 성질을 알게 하셨지요. 성도들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일임을 확실히 믿도록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본 제단을 통해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권능의 역사를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3도 화상으로 완전히 익어버린 피부도 새롭게 만드시며, 완전히 죽어버린 신경도 살려 주셨지요. 수많은 사람이 다시 보고 듣고 말하고 걷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호흡이 완전히 끊어지고 몸이 뻣뻣하게 굳은 사람도 살아났습니다. 도저히 의심할 수 없도록 분명한 증거들을 셀 수 없이 나타내셨지요. 부활은 이처럼 권능을 행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2. 부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나타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오직 그에게만(즉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의 공간에 거하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을 홀로 누리기보다 자녀들과 함께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고 아름다운 빛의 공간에 거할 수 있도록 인간을 경작하셨지요. 우선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지으시고 영의 공간 곧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온전한 영광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빛의 공간에 아담이 함께 거하며 사랑을 나누기 원하셨지요.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살 동안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풍요로운 그곳의 삶이 얼마나 값지고, 행복했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을 겪어본 뒤에야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알게 되었지요. 즉 상대성을 체험한 후에야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담은 사랑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할 수 있었고, 마침내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에덴동산과는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고 그 처소마다 영광이 다르지요.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광은 바로 새 예루살렘의 영광입니다.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에 들이기 원하시지요.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도, 성령 하나님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속량되고 주님을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설령 수명이 다해 죽어도 다시 사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이런 영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빛 곧 진리 안에 거하는 만큼 빛의 공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시지요.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도록 역사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면 어찌하든 자녀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지요(요 13:32).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거하기를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부활의 영광은 물론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부활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 사망에 내어 주심으로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은 육을 입으실 이유도, 죽음을 겪으실 이유도 없었는데,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려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지만 죄가 전혀 없기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셨지요.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말씀한 대로 '우리 몸이 죽지 않도록, 죽어도 다시 살도록' 대신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장차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을 소망하게 하셨지요. 이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더러운 죄를 그 아들의 피로 씻겨 주시고, 참으로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거기다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처소까지 마련해 주셨지요. 마치 사랑하는 자녀의 방을 정성스럽게 꾸미듯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아름다운 처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7년 혼인잔치가 있을 둘째 하늘은 물론, 하나님께서 계신 넷째 하늘과 천국이 있는 셋째 하늘은 참으로 신비롭고 영화로운 공간입니다. 장차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한 몸과 세마포를 입히시고 혼인잔치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와 천년왕국이 끝나면 정성껏 예비하신 천국의 처소로 인도하셔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게 되지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주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 년같이 인내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인내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큰 사랑에 보답하려면 더 이상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되 흔적도 없이 뽑아 버림으로 주님 강림하실 때에 가장 빛나는 부활체를 입고 그 품에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입니다. 괄호 안을 채워 보세요.
첫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 )을 나타낸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 )을 나타낸다.
셋째, 하나님의 크신 ( )을 나타낸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믿기에 우리도 부활의 소망, 영생과 천국의 소망으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4~19절 말씀에서 답을 찾아 써보세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영적인 부활과 육적인 부활'의 차이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은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여 마음에 성령이 오시면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을 영적인 부활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죽으면 주님이 공중 강림하실 때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데 이것을 육적인 부활이라 한다.
2011-04-15
제15과가상칠언 (3)
요 19:30, 눅 23:46
읽을말씀 : 요 19:30, 눅 23:46 | 외울말씀 : 히 10:20 ㅣ 참고 말씀:마 27:51~53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제 6, 7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십자가 처형법은 급소를 찌르지 않지만 가장 혹독하기로 유명합니다.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채 서서히 죽어가기 때문에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이 체중에 못 이겨 살이 찢어지고, 머리에는 뾰쪽한 가시가 살을 파고들어 얼굴은 온통 피로 적셔 있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계속 피를 흘리셨으니 그 고통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마침내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 채 운명하셨습니다.
제6언,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 속에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시고 인간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었기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셔서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나아가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림으로써 완전히 승리하셨지요.
또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모든 것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영적인 사랑(고전 13:4~7)과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팔복(마 5:3~10)을 이루어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충성되이 사명을 잘 감당하여 열매 맺고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게 되지요.
제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6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물과 피를 쏟았기 때문에 운명하기 직전에는 기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셨지요. 제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죄를 대속해 주는 제물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면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도 사람처럼 영과 혼과 육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었지만 영혼은 누구도 죽일 수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지요.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살전 5:23)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면 영혼은 장막인 육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육)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살아갑니다(눅 16:19~31).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영만 받으시고 혼은 받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 가서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가난, 질병 등 혼의 작용을 통해 경작받은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중심에서 감사할 수도 없지요. 이 땅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느낌과 함께 뇌세포 안에 입력하고, 그 입력한 것을 다시 떠올려 내는 모든 것들이 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고,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데다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였기에 더욱 힘써 부르짖으셨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뜻을 모두 이룬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당당히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길 수 있었지요.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요. 마태복음 27장 51~53절을 보면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소 휘장은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쳐 놓은 긴 커튼을 말합니다. 성소에는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가 죄인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일반 백성은 회막문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을 뿐 성소나 지성소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그때부터 일반 사람도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이는 곧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이 죄를 대속하는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대신 아뢰었으나 그때부터는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되었습니다. 곧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때에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합니다(히 10:19~20).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산천초목 모든 것들이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탄식하시는 소리로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끝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셨지요.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많은 무덤이 열렸지만,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삼일 만에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뒤에 그들도 무덤에서 나왔지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하였음을 증거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우쳐 온 마음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제6언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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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께서 제4언에서는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시고, 제7언에서는 "아버지" 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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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영, 혼, 육'이란?
'영'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혼'은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장치와 그 안에 기억된 지식들과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을 통틀어 말한다. '육'의 육적인 의미는 살 즉 몸을 말하고, 영적인 뜻은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어 없어지는 것과 추하고 더러운 비진리를 말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제 6, 7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십자가 처형법은 급소를 찌르지 않지만 가장 혹독하기로 유명합니다.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채 서서히 죽어가기 때문에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손과 발이 체중에 못 이겨 살이 찢어지고, 머리에는 뾰쪽한 가시가 살을 파고들어 얼굴은 온통 피로 적셔 있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뜨거운 햇볕 아래서 계속 피를 흘리셨으니 그 고통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지요. 마침내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 채 운명하셨습니다.
제6언,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 속에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무 죄 없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시고 인간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이루었기에 "다 이루었다" 고백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밤낮없이 진리로 가르치셨고, 죄로 인해 질병과 연약함에 매인 사람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해 쉼 없이 일하셨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사망으로 가던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셔서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나아가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림으로써 완전히 승리하셨지요.
또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좇아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구원의 섭리를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모든 것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 영적인 사랑(고전 13:4~7)과 성령의 열매(갈 5:22~23)와 팔복(마 5:3~10)을 이루어 주님의 마음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은 충성되이 사명을 잘 감당하여 열매 맺고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하게 되지요.
제7언,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6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물과 피를 쏟았기 때문에 운명하기 직전에는 기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운명하셨지요. 제4언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7언에서는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죄를 대속해 주는 제물로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지요.
그러면 구세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도 사람처럼 영과 혼과 육이 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었지만 영혼은 누구도 죽일 수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셨지요.
사람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어서(살전 5:23)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면 영혼은 장막인 육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떠난 몸(육)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구원받지 못한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살아갑니다(눅 16:19~31).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의 영만 받으시고 혼은 받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 가서 진리만 알 뿐, 이 땅에서 눈물, 슬픔, 가난, 질병 등 혼의 작용을 통해 경작받은 일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천국의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고 중심에서 감사할 수도 없지요. 이 땅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느낌과 함께 뇌세포 안에 입력하고, 그 입력한 것을 다시 떠올려 내는 모든 것들이 혼의 작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과 혼을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의 주권 아래 이루어지고,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큰 소리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다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데다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였기에 더욱 힘써 부르짖으셨지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뜻을 모두 이룬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당당히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길 수 있었지요.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요. 마태복음 27장 51~53절을 보면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다 헐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소 휘장은 성전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기 위해 쳐 놓은 긴 커튼을 말합니다. 성소에는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들이 들어가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로,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가 죄인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일반 백성은 회막문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을 뿐 성소나 지성소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후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그때부터 일반 사람도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이는 곧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이 죄를 대속하는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대신 아뢰었으나 그때부터는 우리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되었습니다. 곧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릴 수 있고, 기도할 때에도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합니다(히 10:19~20).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다'는 것은 살아 있는 산천초목 모든 것들이 움직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함을 탄식하시는 소리로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끝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 대해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셨지요.
또한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에 많은 무덤이 열렸지만,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삼일 만에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뒤에 그들도 무덤에서 나왔지요. 그런데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씀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생명을 얻어 부활하였음을 증거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우쳐 온 마음과 정성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가상칠언 제6언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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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께서 제4언에서는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시고, 제7언에서는 "아버지" 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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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영, 혼, 육'이란?
'영'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혼'은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장치와 그 안에 기억된 지식들과 그것을 떠올리는 생각의 작용을 통틀어 말한다. '육'의 육적인 의미는 살 즉 몸을 말하고, 영적인 뜻은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어 없어지는 것과 추하고 더러운 비진리를 말한다.
2011-04-08
제14과가상칠언(2)
요 19:26~28, 마 27:46
읽을말씀 : 요 19:26~28, 마 27:46 | 외울말씀 : 마 12:50 ㅣ 참고 말씀:시 69:21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제3, 4, 5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밝히 깨달아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가상칠언 중 제3언, 제4언, 제5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온 듯하여 늘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할까 조심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고 계시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애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 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리신 것이요, 마리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출 3:14) 누군가 하나님을 낳았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빌 2:6)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유전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야만 잉태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섬기며 우상처럼 경배한다면 십계명 중 제2계명에도 어긋납니다(출 20:3~4).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철저히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리아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로하시고자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던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으니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졌을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같이 섬기라고 당부하셨지요.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자매이며 가족이라는 영적인 소속감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하신 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잔인한 로마 병정이 얼마나 혹독하게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렸는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곳곳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여섯 시간 동안 물과 피를 흘리셨으니 예수님께 무슨 힘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에게 전하는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는 소리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멸시 천대를 참으며 모든 고통을 견딘 분이 곧 운명할 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처참하게 십자가를 진 것임을 알리는 절규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계시며,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진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상태였기에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인생들을 위해 죽어 주건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영혼들을 다시 한 번 경고하시고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피조물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신지를 잘 아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질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심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간절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뜨거운 햇볕 아래 수 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서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타는 듯한 갈증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배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단순히 그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타는 듯한 갈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자녀들을 향해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즉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뜻이지요. 사람들은 그런 영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물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요 19:29~30). 이는 곧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환상을 보고 기록하였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고 온 인류의 저주와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포도주는 영적으로 피를 상징합니다.
구약 시대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림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고(히 10:10)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이 '신 포도주'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가 '새 포도주'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목마르다 호소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피를 흘림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그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드리는 것이 바로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인 뜻을 바로 알아 지금도 주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함으로 예수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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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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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사도 요한'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께 마리아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한복음과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 중 제3, 4, 5언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밝히 깨달아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가상칠언 중 제3언, 제4언, 제5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면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뵈온 듯하여 늘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할까 조심하며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고 계시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 애타는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 곁에 서 있는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 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하지 않고 "여자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어머니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리신 것이요, 마리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며(출 3:14) 누군가 하나님을 낳았거나 만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빌 2:6)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더구나 마리아는 유전적으로도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야만 잉태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로 섬기며 우상처럼 경배한다면 십계명 중 제2계명에도 어긋납니다(출 20:3~4). 하나님께서는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지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철저히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19장 26~2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리아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위로하시고자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했던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으니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졌을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는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같이 섬기라고 당부하셨지요. 믿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한 형제자매이며 가족이라는 영적인 소속감을 일깨워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해도 주님을 믿지 않으면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말씀하신 대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참된 가족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습니다.
제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잔인한 로마 병정이 얼마나 혹독하게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렸는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곳곳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여섯 시간 동안 물과 피를 흘리셨으니 예수님께 무슨 힘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에게 전하는 가상칠언에는 매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 정확히 기록될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너무 고통스러워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는 소리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멸시 천대를 참으며 모든 고통을 견딘 분이 곧 운명할 즈음에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리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처참하게 십자가를 진 것임을 알리는 절규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이라 부르셨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계시며, 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진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은 상태였기에 감히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인생들을 위해 죽어 주건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영혼들을 다시 한 번 경고하시고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피조물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신지를 잘 아셨지만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질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심으로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간절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제5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은 뜨거운 햇볕 아래 수 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려서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타는 듯한 갈증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배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단순히 그러한 갈증을 참지 못해서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타는 듯한 갈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적 목마름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자녀들을 향해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즉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해 달라는 뜻이지요. 사람들은 그런 영적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자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스펀지처럼 물을 빨아들이는 물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댔습니다(요 19:29~30). 이는 곧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훨씬 이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환상을 보고 기록하였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고 온 인류의 저주와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포도주는 영적으로 피를 상징합니다.
구약 시대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림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고(히 10:10)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를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이 '신 포도주'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가 '새 포도주'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목마르다 호소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목마름은 피를 흘림으로써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고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합니다. 그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드리는 것이 바로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인 뜻을 바로 알아 지금도 주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게 함으로 예수님의 목마름을 해소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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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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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사도 요한'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 형 야고보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께 마리아를 잘 섬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요한복음과 요한1,2,3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
2011-04-01
제13과가상칠언(1)
눅 23:33~43
읽을말씀 : 눅 23:33~43 | 외울말씀 : 마 5:44 ㅣ참고 말씀:마 27:38~42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많은 사람이 임종이 가까워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가족과 친지 등 주변에 유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일곱 마디 말씀이 바로 가상칠언(架上七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려는 시점에서 남긴 가상칠언에는 어떠한 영적인 뜻이 담겨 있을까요? 그중 제1언과 2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로마 군병과 이스라엘 백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멸시하며 마치 흉악한 죄인 취급을 하였습니다. 오직 선만 행하시고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향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희롱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뜻 가운데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과 수치를 묵묵히 당하셨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들의 하는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가장 먼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단순히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롱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일컫지요.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고 엄청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주관하여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하지요.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 중 첫 번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도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사랑과 용서로 간절히 기도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골고다 언덕 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한 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으나 다른 편 강도는 오히려 예수님을 힐난하는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좌우편에 함께 있던 강도들에 대한 내용이 복음서에 따라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했고,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여 둘 다 예수님을 욕했다고 나오지요.
반면에 누가복음 23장에는 '한 편 강도가 다른 편 강도를 꾸짖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일입니다. 즉 마태, 마가, 누가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목격한 것을 기록함으로써 당시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유추해 보게 하셨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상황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십자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많은 군중들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들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 소리는 그 쪽 강도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지요.
그런데 반대편 강도도 예수님 쪽을 향해 인상을 쓰면서 말을 하는데 마치 예수님을 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책망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볼 때는 중앙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이처럼 다른 편 강도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 멀리서 그 장면만 본 마태와 마가는 두 강도가 욕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상황을 정확히 알았던 누가복음의 기자는 한 강도는 예수님을 욕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상황을 바로 분별하도록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틀리게 기록하도록 놔두신 것이 아니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 가고, 한 편 강도는 낙원에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거할 천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곳은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며, 각 처소마다 행복과 영광이 다릅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처소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만 들어가지요. 그러나 낙원은 천국에서 가장 변두리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단지 주님을 영접했을 뿐 죄를 싸워 버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낙원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 뿐,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고자 죄를 버린 것도,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상급 없는 낙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강도와 함께 낙원에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지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오늘'이란,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날 혹은 어느 특정한 날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바로 그 순간부터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 했고, 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벧전 3:19) 하셨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뒤 윗음부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윗음부로 가셔야만 했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라 할지라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양심을 좇아 살다가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구원받을 영혼들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는 기록이 나오지요(눅 16:22). 바로 이런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윗음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물론 온 인류를 위해 용서와 사랑의 간구를 올리셨고,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이 자신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윗음부에 가셔서 전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나를 핍박하고 힘들게 하는 영혼은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여기서 '저희'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 되신다.
② 한 편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구원받아 낙원에 가게 되었다.
③ 예수님은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아랫음부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지옥사자들에게 끌려가 악한 영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3일간 머무는 큰 구덩이와 같은 대기 장소를 말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인간 구원의 섭리를 이루고자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가상칠언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많은 사람이 임종이 가까워오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가족과 친지 등 주변에 유언을 남기고 떠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일곱 마디 말씀이 바로 가상칠언(架上七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길을 완성하시려는 시점에서 남긴 가상칠언에는 어떠한 영적인 뜻이 담겨 있을까요? 그중 제1언과 2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제1언,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로마 군병과 이스라엘 백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멸시하며 마치 흉악한 죄인 취급을 하였습니다. 오직 선만 행하시고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향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희롱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뜻 가운데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과 수치를 묵묵히 당하셨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본인들의 하는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도 몰랐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가장 먼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란 단순히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롱한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는 온 인류를 일컫지요.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모르고 엄청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을 주관하여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하지요.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가상칠언 중 첫 번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도 예수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오직 사랑과 용서로 간절히 기도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2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골고다 언덕 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편에 두 행악자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한 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으나 다른 편 강도는 오히려 예수님을 힐난하는 강도를 꾸짖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할 때 죄를 용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좌우편에 함께 있던 강도들에 대한 내용이 복음서에 따라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했고,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하여 둘 다 예수님을 욕했다고 나오지요.
반면에 누가복음 23장에는 '한 편 강도가 다른 편 강도를 꾸짖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이는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일입니다. 즉 마태, 마가, 누가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목격한 것을 기록함으로써 당시 상황을 더욱 실감나게 유추해 보게 하셨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상황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십자가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많은 군중들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악한 말들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욕하였습니다. 그 소리는 그 쪽 강도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지요.
그런데 반대편 강도도 예수님 쪽을 향해 인상을 쓰면서 말을 하는데 마치 예수님을 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욕한 강도를 책망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볼 때는 중앙에 계신 예수님을 향해 욕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이처럼 다른 편 강도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상황 속에 멀리서 그 장면만 본 마태와 마가는 두 강도가 욕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상황을 정확히 알았던 누가복음의 기자는 한 강도는 예수님을 욕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받았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후세 사람들이 그 상황을 바로 분별하도록 이러한 기록의 차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 틀리게 기록하도록 놔두신 것이 아니지요.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은 영혼은 천국에 가고, 한 편 강도는 낙원에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거할 천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곳은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으로 나뉘며, 각 처소마다 행복과 영광이 다릅니다.
특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가장 영화로운 처소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만 들어가지요. 그러나 낙원은 천국에서 가장 변두리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단지 주님을 영접했을 뿐 죄를 싸워 버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낙원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 뿐,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고자 죄를 버린 것도, 누구를 전도한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상급 없는 낙원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강도와 함께 낙원에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지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시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오늘'이란,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날 혹은 어느 특정한 날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한 강도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바로 그 순간부터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 했고, 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벧전 3:19) 하셨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뒤 윗음부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윗음부로 가셔야만 했을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라 할지라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한 양심을 좇아 살다가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이 결정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구원받을 영혼들이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는 기록이 나오지요(눅 16:22). 바로 이런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 윗음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물론 온 인류를 위해 용서와 사랑의 간구를 올리셨고,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이 자신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윗음부에 가셔서 전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나를 핍박하고 힘들게 하는 영혼은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여기서 '저희'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예수님은 낙원뿐 아니라 모든 천국의 주인이 되신다.
② 한 편 강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구원받아 낙원에 가게 되었다.
③ 예수님은 운명하신 뒤 곧바로 낙원으로 가셨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아랫음부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지옥사자들에게 끌려가 악한 영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3일간 머무는 큰 구덩이와 같은 대기 장소를 말한다.
2011-03-25
제12과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
요 19:32~36
읽을말씀 : 요 19:32~36 | 외울말씀 : 벧후 1:4 l 참고 말씀:시 34:20, 요 1:14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나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 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바로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하지요.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병사는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코자 먼저 강도들의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다리를 꺾지 않았지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린 것이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몸의 뼈까지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34편 20절에 보면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또 민수기 9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출 12:46). 여기서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비유하였지요. 그래서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 하신 대로 예수님의 뼈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3~34절을 보면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쏟게 한 것은 사람의 악함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빌 2:6~8).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사람을 부요케 하며 병든 사람, 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지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복음을 전하셨고,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혼들을 위해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갖은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줄 번연히 알면서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으니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람들의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시며 아픔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 육신을 가진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셨지요.
또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시험도 묵묵히 담당하시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가 없지요.
셋째,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 때문에 흘리신 피와 물은 흠과 티가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지요.
따라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었음을 뜻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받은바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철저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해야 하지요.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단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에 대해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우리도 주님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④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능력의 피와 물이 될 수 없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얼마나 마음에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 되는 길이다.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나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 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바로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하지요.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병사는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코자 먼저 강도들의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다리를 꺾지 않았지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린 것이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몸의 뼈까지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34편 20절에 보면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또 민수기 9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출 12:46). 여기서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비유하였지요. 그래서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 하신 대로 예수님의 뼈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3~34절을 보면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쏟게 한 것은 사람의 악함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빌 2:6~8).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사람을 부요케 하며 병든 사람, 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지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복음을 전하셨고,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혼들을 위해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갖은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줄 번연히 알면서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으니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람들의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시며 아픔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 육신을 가진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셨지요.
또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시험도 묵묵히 담당하시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가 없지요.
셋째,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 때문에 흘리신 피와 물은 흠과 티가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지요.
따라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었음을 뜻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받은바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철저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해야 하지요.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단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에 대해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우리도 주님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④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능력의 피와 물이 될 수 없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얼마나 마음에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 되는 길이다.
2011-03-18
제11과예수님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뽑게 하신 섭리
요 19:23~24
읽을말씀 : 요 19:23~24 | 외울말씀 : 요 19:23 l 참고 말씀:시 22:18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관해 이처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해 두신 것일까요? 그 해답은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겉옷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군병들이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한 깃씩 가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로마 병사들이 옷을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리지요. 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옷 조각은 남아 있으므로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을 것을 나타냅니다. 결국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백성들이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채 40년이 못 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티투스에게 함락되고 말지요. 이때 로마군은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하였지요. 그리고 아이 밴 자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팔려나갔지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그들이 입술로 낸 말이 올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언도에 대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치지요. 이 고백대로 얼마 안 되어 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A.D. 70년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 영화를 보면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벌거벗긴 채 참혹하게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들이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한 말이 엄청난 환난으로 임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이유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옷에 대해서 위에서부터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을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계승해 왔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가 부르는 유대인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는 말씀에는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함없는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고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변함없는 중심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변함없는 야곱의 중심을 혈통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1948년 5월 14일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 독립한 뒤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그들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증하였습니다.
로마 군병이 호지 않고 위에서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지요.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마태복음 24장 32~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해 답변한 내용으로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는 상태에서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워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을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연관된 것끼리 짝지어 보세요.
①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눔 ②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짬
③ 속옷을 찢지 않음 ④ 티투스 ⑤ 무화과나무
ㄱ.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말한다.
ㄴ. 이스라엘이 이방족속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 민족임을 뜻한다.
ㄷ.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큼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이다.
ㄹ.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람이다.
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 리라"고 했습니다. 그 고백대로 훗날 그들에게 어떠한 보응이 임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티투스'란 누구일까요?
A.D. 70년에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치세 중에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폼페이 시가 땅 속에 매몰되었다. 80년에는 로마의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잇달았지만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관해 이처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해 두신 것일까요? 그 해답은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겉옷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군병들이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한 깃씩 가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로마 병사들이 옷을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리지요. 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옷 조각은 남아 있으므로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을 것을 나타냅니다. 결국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백성들이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채 40년이 못 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티투스에게 함락되고 말지요. 이때 로마군은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하였지요. 그리고 아이 밴 자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팔려나갔지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그들이 입술로 낸 말이 올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언도에 대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치지요. 이 고백대로 얼마 안 되어 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A.D. 70년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 영화를 보면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벌거벗긴 채 참혹하게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들이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한 말이 엄청난 환난으로 임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이유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옷에 대해서 위에서부터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을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계승해 왔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가 부르는 유대인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는 말씀에는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함없는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고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변함없는 중심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변함없는 야곱의 중심을 혈통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1948년 5월 14일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 독립한 뒤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그들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증하였습니다.
로마 군병이 호지 않고 위에서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지요.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마태복음 24장 32~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해 답변한 내용으로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는 상태에서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워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을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연관된 것끼리 짝지어 보세요.
①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눔 ②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짬
③ 속옷을 찢지 않음 ④ 티투스 ⑤ 무화과나무
ㄱ.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말한다.
ㄴ. 이스라엘이 이방족속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 민족임을 뜻한다.
ㄷ.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큼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이다.
ㄹ.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람이다.
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 리라"고 했습니다. 그 고백대로 훗날 그들에게 어떠한 보응이 임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티투스'란 누구일까요?
A.D. 70년에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치세 중에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폼페이 시가 땅 속에 매몰되었다. 80년에는 로마의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잇달았지만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2011-03-11
제10과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마 27:29~30
읽을말씀 : 마 27:29~30 | 외울말씀 : 고후 10:5 l 참고 말씀: 사 53:5~6, 골 3:1~10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지금도 영국을 비롯한 군주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대관식을 거행하며 왕관을 착용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언도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에는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을 당하며 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여 결국은 먹고 맙니다. 이렇게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도록 미혹한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들지요.
그러면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이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다르기 때문에 입력된 내용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지지요. 이러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고 일어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고 하고, 반대되는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하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어찌하든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지어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유혹하지요.
우리가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만 진리를 좇아갈 수 있고 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벗어 버릴 수 있을까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사단이 주관하는 비진리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으로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어떤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여러 상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신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다음으로,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린 성결한 사람들이 받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 계 2:10).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이 외에도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천국의 좋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함으로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자 한 로마 병사가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병사는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지요.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쇠못이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어져 통증이 더욱 가중되었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하신 이유는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사람의 생각을 통해 들어온 죄악을 마음에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신 것입니다(막 9:45~47).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혈기가 나면 상대를 때리고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죄를 짓지요. 그래서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잘라 버리고 절뚝발이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써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눈을 빼내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눈으로 죄를 지으면 눈을 빼야 했고, 손으로 죄를 지으면 손을, 발로 죄를 지으면 발을 잘라야 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살인을 하거나 간음을 하면 돌로 쳐 죽였지요(신 19:19~21).
만일 십자가 고난이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손으로 죄를 지으면 손을, 발로 죄를 지으면 발을 찍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힘으로써 보혈을 흘려 손과 발로 짓는 죄를 모두 씻어 주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며 진정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때 주님의 보혈로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요일 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하며 손과 발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먼저 생각을 통해 들어오는 죄악을 마음에 심지 말고 오직 마음을 진리로 지켜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 있나요?
2. 서로 맞는 것끼리 선을 이어 보세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 ● ● 3천층
영광의 면류관 ● ● 1천층
생명의 면류관 ● ● 새 예루살렘
금 면류관 ● ● 2천층
의의 면류관 ● ● 낙원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우리가 낙원보다 좋은 천국을 침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낙원은 간신히 구원받은 영혼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가장 낮은 처소이기 때문이다. 낙원에 들어간 사람은 상급은 물론 개인 집이나 장식품, 면류관, 자신에게 속하여 시중드는 천사도 없다. 집이 없기에 복지관 같은 공공건물에서 휴식을 취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지금도 영국을 비롯한 군주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대관식을 거행하며 왕관을 착용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언도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에는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을 당하며 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여 결국은 먹고 맙니다. 이렇게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도록 미혹한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들지요.
그러면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이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다르기 때문에 입력된 내용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지지요. 이러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고 일어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고 하고, 반대되는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하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어찌하든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지어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유혹하지요.
우리가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만 진리를 좇아갈 수 있고 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벗어 버릴 수 있을까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사단이 주관하는 비진리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으로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어떤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여러 상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신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다음으로,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린 성결한 사람들이 받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 계 2:10).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이 외에도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천국의 좋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함으로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자 한 로마 병사가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병사는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지요.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쇠못이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어져 통증이 더욱 가중되었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하신 이유는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사람의 생각을 통해 들어온 죄악을 마음에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신 것입니다(막 9:45~47).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혈기가 나면 상대를 때리고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죄를 짓지요. 그래서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잘라 버리고 절뚝발이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써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눈을 빼내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눈으로 죄를 지으면 눈을 빼야 했고, 손으로 죄를 지으면 손을, 발로 죄를 지으면 발을 잘라야 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살인을 하거나 간음을 하면 돌로 쳐 죽였지요(신 19:19~21).
만일 십자가 고난이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손으로 죄를 지으면 손을, 발로 죄를 지으면 발을 찍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힘으로써 보혈을 흘려 손과 발로 짓는 죄를 모두 씻어 주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며 진정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때 주님의 보혈로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요일 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하며 손과 발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먼저 생각을 통해 들어오는 죄악을 마음에 심지 말고 오직 마음을 진리로 지켜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 있나요?
2. 서로 맞는 것끼리 선을 이어 보세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 ● ● 3천층
영광의 면류관 ● ● 1천층
생명의 면류관 ● ● 새 예루살렘
금 면류관 ● ● 2천층
의의 면류관 ● ● 낙원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우리가 낙원보다 좋은 천국을 침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낙원은 간신히 구원받은 영혼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가장 낮은 처소이기 때문이다. 낙원에 들어간 사람은 상급은 물론 개인 집이나 장식품, 면류관, 자신에게 속하여 시중드는 천사도 없다. 집이 없기에 복지관 같은 공공건물에서 휴식을 취한다.
2011-03-04
제9과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갈 3:13~14
읽을말씀 : 갈 3:13~14 | 외울말씀 : 갈 3:13 l 참고 말씀:사 53:4~6
교육목표 :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받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한 이유를 알아본다.
십자가의 원래 의미는 참혹한 사형의 도구요 영적으로 볼 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저주의 의미가 변하여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지요. 인류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께서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데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그의 후손들 또한 죄인이 되어 저주받아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합니다(신 21:2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고자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롬 5:17~19).
레위기 17장 11~14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말씀했습니다.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없으면 죽습니다. 때문에 생명과 일체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깨끗한 피, 곧 영에 속한 피를 단번에 흘려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필요가 없으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이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 등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크게 축복받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도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9). 아브라함은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하나님 자녀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고, 모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마다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그 증표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요 1:12 ; 롬 8:16).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 됩니다(롬 8:15 ; 눅 10:20 ; 빌 3:20). 하나님의 마음이며 능력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 안에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부터 믿음을 주어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그런데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할 뿐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시험 환난과 온갖 고통을 당하며 마침내는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음으로 구원과 영생,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예수님 당시 죄인들의 처형법은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떠한 고통을 받으셨을까요?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을 박아 수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참수형을 당한다면 죽음의 고통이 순간에 끝나지만 십자가 처형은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피와 물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갈증과 탈진으로 인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기는 심한 고통을 겪으셔야 했지요.
또한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햇볕 아래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벌레들은 상처 난 부위를 물어뜯었지요. 그뿐 아니라 악한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하며 저주하였지요(마 27:39~43).
이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작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의 괴로움이나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저주를 한 몸에 담당했건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마음이 완악하여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게 될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어찌하면 보답할까 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율법의 ( )에서 ( )하기 위해서이다.
② ( )의 복을 ( )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③ 믿음으로 ( )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2.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피는 생명과 일체라 말씀합니다. 관련된 성구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레위기 17:11 ② 히브리서 9:22 ③ 레위기 17:14 ④ 요한복음 1:1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이고 중보자인 구세주의 직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는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완성형의 표현이다.
교육목표 :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받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한 이유를 알아본다.
십자가의 원래 의미는 참혹한 사형의 도구요 영적으로 볼 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저주의 의미가 변하여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지요. 인류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께서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데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그의 후손들 또한 죄인이 되어 저주받아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합니다(신 21:2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고자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롬 5:17~19).
레위기 17장 11~14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말씀했습니다.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없으면 죽습니다. 때문에 생명과 일체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깨끗한 피, 곧 영에 속한 피를 단번에 흘려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필요가 없으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이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 등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크게 축복받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도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9). 아브라함은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하나님 자녀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고, 모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마다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그 증표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요 1:12 ; 롬 8:16).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 됩니다(롬 8:15 ; 눅 10:20 ; 빌 3:20). 하나님의 마음이며 능력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 안에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부터 믿음을 주어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그런데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할 뿐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시험 환난과 온갖 고통을 당하며 마침내는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음으로 구원과 영생,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예수님 당시 죄인들의 처형법은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떠한 고통을 받으셨을까요?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을 박아 수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참수형을 당한다면 죽음의 고통이 순간에 끝나지만 십자가 처형은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피와 물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갈증과 탈진으로 인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기는 심한 고통을 겪으셔야 했지요.
또한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햇볕 아래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벌레들은 상처 난 부위를 물어뜯었지요. 그뿐 아니라 악한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하며 저주하였지요(마 27:39~43).
이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작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의 괴로움이나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저주를 한 몸에 담당했건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마음이 완악하여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게 될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어찌하면 보답할까 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율법의 ( )에서 ( )하기 위해서이다.
② ( )의 복을 ( )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③ 믿음으로 ( )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2.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피는 생명과 일체라 말씀합니다. 관련된 성구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레위기 17:11 ② 히브리서 9:22 ③ 레위기 17:14 ④ 요한복음 1:1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이고 중보자인 구세주의 직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는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완성형의 표현이다.
2011-02-25
제8과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
사 53:5~6
읽을말씀 : 사 53:5~6 | 외울말씀 : 벧전2:24ㅣ참고 말씀 : 출15:26, 레17:10~11, 히9:22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질병과 연약함과는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병사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하여
이사야 53장 5~6절에 보면 예수님이 받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즉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는데도 왜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중풍병자를 바로 치료해 주시기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지요. 그다음에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뒤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이처럼 사람이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누군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레 17:11).
2.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한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이 틈타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어떤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화가 난 부모는 "왜 너는 만날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까지 찾아가서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정당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의 도움 속에 쉽게 행할 수가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막상 자신한테 문제가 생기면 세상에 의존해 버립니다. 질병에 걸리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우선 병원부터 찾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러한 행동은 곧 믿음이 없다는 소치이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으니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습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제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 피가 죄를 속한다는 의미이지요.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그만 불순종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바로 구약 시대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기에 제사장이 대신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요.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피는 흠도 점도 없이 깨끗하여 죄를 온전히 씻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기에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온몸을 채찍에 맞아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며 어찌하든 그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써 넣으세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 )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 )을 인함이라 그가 ( )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 )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2.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제사장'이란?
제사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하며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했다. 제사장은 아론 지파에 속한 사람만 될 수 있었으며 육체적인 흠이 없어야 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았던 레위인과 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들을 주관했던 아론 자손의 제사장,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으로 나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질병과 연약함과는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병사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하여
이사야 53장 5~6절에 보면 예수님이 받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즉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는데도 왜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중풍병자를 바로 치료해 주시기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지요. 그다음에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뒤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이처럼 사람이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누군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레 17:11).
2.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한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이 틈타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어떤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화가 난 부모는 "왜 너는 만날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까지 찾아가서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정당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의 도움 속에 쉽게 행할 수가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막상 자신한테 문제가 생기면 세상에 의존해 버립니다. 질병에 걸리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우선 병원부터 찾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러한 행동은 곧 믿음이 없다는 소치이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으니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습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제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 피가 죄를 속한다는 의미이지요.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그만 불순종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바로 구약 시대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기에 제사장이 대신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요.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피는 흠도 점도 없이 깨끗하여 죄를 온전히 씻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기에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온몸을 채찍에 맞아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며 어찌하든 그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써 넣으세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 )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 )을 인함이라 그가 ( )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 )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2.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제사장'이란?
제사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하며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했다. 제사장은 아론 지파에 속한 사람만 될 수 있었으며 육체적인 흠이 없어야 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았던 레위인과 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들을 주관했던 아론 자손의 제사장,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으로 나뉜다.
2011-02-18
제7과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고전 2:6~10
읽을말씀 : 고전 2:6~10 | 외울말씀 : 요 1:12 l 참고 말씀:창 3:14~15
교육목표 :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만세 전부터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지혜 가운데 예수님을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지요. 만약 원수 마귀가 이러한 비밀을 알았다면 아담으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권세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담의 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훼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만세 전에 감취어진 비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사람을 유혹했던 간교한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창 3:14).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하신 대로 원수 마귀는 여자의 후손 중에 자기를 상하게 할 사람이 태어날 것을 알고 그를 죽이고자 작정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원수 마귀 사단은 구약 시대부터 악한 사람을 사주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괴롭히며 핍박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는 간악한 헤롯 왕을 사주하여 베들레헴과 그 주변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였지요.
예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헤롯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마 2:13~15). 그 후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 살며 30세부터 공생애에 들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셨지요.
원수 마귀는 자기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모두 죽여서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밉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양손, 양발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원수 마귀는 철저하게 여자의 후손을 죽였다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가 감춰 있지요.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보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말씀한 대로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무 죄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의 훼방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세 전에 섭리하신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요? 나라에도 법이 있듯이 영계에도 법이 있으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영계의 법칙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그 예로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있습니다(롬 6:23). 그런데 원수 마귀는 아무런 죄도 흠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히 7:26 ; 벧전 2:22~23). 원수 마귀가 영계의 법을 어기게 된 것이지요.
이로 인해 아담이 불순종함의 죄를 범하여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가 이런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합니다.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참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법에 따라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근족으로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지요. 원죄와 자범죄가 없었기에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聖徒)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敎人)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했는데, 과연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주어지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과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 이방 민족과 혼혈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상종하지도 않을뿐더러 사마리아 땅을 밟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혹 그 땅을 거쳐 가야 할 경우에는 멀리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지요. 마침 사마리아 땅을 지나면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지역적인 특성상 이스라엘의 여행자들은 항상 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질 리 없고 설령 물이 떨어졌어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니 잠깐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신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인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이 소식을 동네 사람에게 전파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으로 참 생명과 영생을 얻고 천국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과 단순히 아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요.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합니다.
왜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두어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는지,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하셨는지 구원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요. 귤의 맛을 알려면 단순히 겉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 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막연히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가? 하는 십자가의 섭리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깨달을 때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설명과 관계가 없는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것이기에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다.
②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원죄가 없다.
③ 원수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줄 알았다.
④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다.
2.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적대시 한 이유는?
원래 사마리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가나안 정복 때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BC 721년 사마리아가 속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자 이방인들이 그 땅에 유입되면서 그들과 결혼하여 혼혈족이 되므로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적대시하게 되었다.
교육목표 :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만세 전부터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지혜 가운데 예수님을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지요. 만약 원수 마귀가 이러한 비밀을 알았다면 아담으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권세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담의 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훼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만세 전에 감취어진 비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사람을 유혹했던 간교한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창 3:14).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하신 대로 원수 마귀는 여자의 후손 중에 자기를 상하게 할 사람이 태어날 것을 알고 그를 죽이고자 작정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원수 마귀 사단은 구약 시대부터 악한 사람을 사주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괴롭히며 핍박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는 간악한 헤롯 왕을 사주하여 베들레헴과 그 주변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였지요.
예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헤롯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마 2:13~15). 그 후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 살며 30세부터 공생애에 들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셨지요.
원수 마귀는 자기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모두 죽여서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밉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양손, 양발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원수 마귀는 철저하게 여자의 후손을 죽였다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가 감춰 있지요.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보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말씀한 대로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무 죄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의 훼방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세 전에 섭리하신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요? 나라에도 법이 있듯이 영계에도 법이 있으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영계의 법칙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그 예로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있습니다(롬 6:23). 그런데 원수 마귀는 아무런 죄도 흠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히 7:26 ; 벧전 2:22~23). 원수 마귀가 영계의 법을 어기게 된 것이지요.
이로 인해 아담이 불순종함의 죄를 범하여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가 이런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합니다.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참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법에 따라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근족으로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지요. 원죄와 자범죄가 없었기에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聖徒)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敎人)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했는데, 과연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주어지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과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 이방 민족과 혼혈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상종하지도 않을뿐더러 사마리아 땅을 밟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혹 그 땅을 거쳐 가야 할 경우에는 멀리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지요. 마침 사마리아 땅을 지나면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지역적인 특성상 이스라엘의 여행자들은 항상 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질 리 없고 설령 물이 떨어졌어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니 잠깐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신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인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이 소식을 동네 사람에게 전파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으로 참 생명과 영생을 얻고 천국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과 단순히 아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요.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합니다.
왜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두어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는지,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하셨는지 구원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요. 귤의 맛을 알려면 단순히 겉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 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막연히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가? 하는 십자가의 섭리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깨달을 때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설명과 관계가 없는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것이기에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다.
②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원죄가 없다.
③ 원수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줄 알았다.
④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다.
2.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적대시 한 이유는?
원래 사마리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가나안 정복 때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BC 721년 사마리아가 속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자 이방인들이 그 땅에 유입되면서 그들과 결혼하여 혼혈족이 되므로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적대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