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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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5
제12과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
요 19:32~36
읽을말씀 : 요 19:32~36 | 외울말씀 : 벧후 1:4 l 참고 말씀:시 34:20, 요 1:14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나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 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바로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하지요.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병사는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코자 먼저 강도들의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다리를 꺾지 않았지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린 것이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몸의 뼈까지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34편 20절에 보면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또 민수기 9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출 12:46). 여기서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비유하였지요. 그래서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 하신 대로 예수님의 뼈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3~34절을 보면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쏟게 한 것은 사람의 악함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빌 2:6~8).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사람을 부요케 하며 병든 사람, 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지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복음을 전하셨고,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혼들을 위해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갖은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줄 번연히 알면서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으니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람들의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시며 아픔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 육신을 가진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셨지요.
또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시험도 묵묵히 담당하시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가 없지요.
셋째,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 때문에 흘리신 피와 물은 흠과 티가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지요.
따라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었음을 뜻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받은바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철저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해야 하지요.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단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에 대해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우리도 주님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④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능력의 피와 물이 될 수 없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얼마나 마음에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 되는 길이다.
교육목표 :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나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하나님께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베푸신 섭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순간입니다. 천지 만물의 창조 이후로 가장 감동적이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섭리를 알고 마음 중심으로 믿을 때 가난이나 질병, 그 외 어떤 문제도 해결 받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와 창으로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섭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날은 안식일 바로 전날인 금요일이었습니다. 다음 날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크게 여기는 거룩한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하지요. 총독의 허락이 떨어지자 로마 병사는 확실히 죽었는지 확인코자 먼저 강도들의 다리를 꺾어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을 확인하고는 다리를 꺾지 않았지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린 것이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몸의 뼈까지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34편 20절에 보면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또 민수기 9장 12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라고 하셨지요(출 12:46). 여기서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비유하였지요. 그래서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 하신 대로 예수님의 뼈는 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33~34절을 보면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말씀합니다. 로마 병사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을 쏟게 한 것은 사람의 악함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빌 2:6~8).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기사와 표적을 베풀며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사람을 부요케 하며 병든 사람, 약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지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한 채 복음을 전하셨고, 틈만 나면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혼들을 위해 선만 행하셨는데도 유대인들에게 갖은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더구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줄 번연히 알면서도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으니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한지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사람들의 악함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요. 그래서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0절에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하였고, 마태복음 8장 24절에는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배고픔과 고통을 느끼겠느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뼈와 살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때문에 때가 되면 드시고 주무시며 아픔을 느끼셨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입니다.
둘째, 육신을 가진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온전한 분이므로 자녀들 역시 거룩하고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셨지요.
또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시험도 묵묵히 담당하시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모든 죄악을 벗고 거룩한 행실과 마음을 가져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라 연약하여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핑계 대거나 변명할 수가 없지요.
셋째,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 때문에 흘리신 피와 물은 흠과 티가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 볼 때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의 피와 물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의 물과 피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처럼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참 생명을 얻어 부활할 수 있으며 영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흘리신 물은 영생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우쳐 그대로 행하는 만큼 죄악을 벗고 진리로 채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지요.
따라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피와 물을 쏟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참 생명을 얻었음을 뜻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받은바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서는 철저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해야 하지요.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과,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결단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섭리에 대해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증거이다.
② 우리도 주님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③ 참 생명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와 물이라는 증거이다.
④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에 능력의 피와 물이 될 수 없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얼마나 마음에 믿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라틴어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 되는 길이다.
2011-03-18
제11과예수님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뽑게 하신 섭리
요 19:23~24
읽을말씀 : 요 19:23~24 | 외울말씀 : 요 19:23 l 참고 말씀:시 22:18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관해 이처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해 두신 것일까요? 그 해답은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겉옷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군병들이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한 깃씩 가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로마 병사들이 옷을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리지요. 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옷 조각은 남아 있으므로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을 것을 나타냅니다. 결국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백성들이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채 40년이 못 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티투스에게 함락되고 말지요. 이때 로마군은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하였지요. 그리고 아이 밴 자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팔려나갔지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그들이 입술로 낸 말이 올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언도에 대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치지요. 이 고백대로 얼마 안 되어 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A.D. 70년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 영화를 보면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벌거벗긴 채 참혹하게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들이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한 말이 엄청난 환난으로 임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이유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옷에 대해서 위에서부터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을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계승해 왔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가 부르는 유대인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는 말씀에는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함없는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고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변함없는 중심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변함없는 야곱의 중심을 혈통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1948년 5월 14일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 독립한 뒤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그들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증하였습니다.
로마 군병이 호지 않고 위에서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지요.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마태복음 24장 32~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해 답변한 내용으로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는 상태에서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워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을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연관된 것끼리 짝지어 보세요.
①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눔 ②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짬
③ 속옷을 찢지 않음 ④ 티투스 ⑤ 무화과나무
ㄱ.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말한다.
ㄴ. 이스라엘이 이방족속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 민족임을 뜻한다.
ㄷ.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큼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이다.
ㄹ.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람이다.
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 리라"고 했습니다. 그 고백대로 훗날 그들에게 어떠한 보응이 임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티투스'란 누구일까요?
A.D. 70년에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치세 중에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폼페이 시가 땅 속에 매몰되었다. 80년에는 로마의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잇달았지만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교육목표 :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속옷은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가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본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온몸에 심한 채찍질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채 사형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갖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나누지 않고 제비를 뽑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게 하신 섭리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보면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관해 이처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해 두신 것일까요? 그 해답은 서기 70년 이후 진행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겉옷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군병들이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한 깃씩 가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옷'은 이스라엘 또는 유대 민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로마 병사들이 옷을 네 깃으로 나눔으로써 옷의 형체가 없어져 버리지요. 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옷 조각은 남아 있으므로 나라는 없어져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남을 것을 나타냅니다. 결국 예수님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뉜 것처럼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백성들이 동서남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채 40년이 못 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티투스에게 함락되고 말지요. 이때 로마군은 성벽을 파괴하고 성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성전이 불에 타 금으로 입힌 것이 녹아내려 벽과 바닥에 스며들자 군인들은 그 금을 긁어내고자 성전의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파괴하였지요. 그리고 아이 밴 자를 칼로 가르고 젖먹이를 어미 품에서 빼앗아 죽이는 등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로마의 포로가 되고 타국의 노예로 팔려나갔지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큰 핍박과 환난을 당하게 된 데에는 그들이 입술로 낸 말이 올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언도에 대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치지요. 이 고백대로 얼마 안 되어 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A.D. 70년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 무려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약 6백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되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 영화를 보면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벌거벗긴 채 참혹하게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그들이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벌거벗겨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한 말이 엄청난 환난으로 임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짠 이유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말씀합니다. 속옷을 호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겹의 헝겊을 겹쳐 꿰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옷에 대해서 위에서부터 짠 것인지, 밑에서부터 짠 것인지 등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옷을 이처럼 세밀하게 기록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보면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며, 이스라엘의 조상은 야곱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 하지 않고 야곱이라 한 것은, 야곱에 의해 열두 지파가 형성되고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장 10~11절에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 의해 기틀이 형성되어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되고 말지요. 그 후 북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혼인하여 혼혈족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남유다는 이방 족속과 섞이지 않고 계속 순수 혈통을 계승해 왔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가 부르는 유대인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는 말씀에는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야곱에 의해 형성된 이후 지금까지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순수한 단일민족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은 섭리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 예수님의 속옷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 한 분만을 첫째로 섬겨 왔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다는 것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는 빼앗기더라도 이스라엘을 이루는 유대인의 민족정신, 즉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나라 형체가 없어진다 해도 이들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은 이방인들이 없앨 수 없음을 성경에서 예언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함없는 중심을 소유한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고 성경에 기록한 대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는 변함없는 중심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변함없는 야곱의 중심을 혈통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1948년 5월 14일 독립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또한 독립한 뒤 짧은 기간에 선진국가로 떠오르면서 그들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증하였습니다.
로마 군병이 호지 않고 위에서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을 찢을 수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독립하여 하나님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지요.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4. 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마지막 때
마태복음 24장 32~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의 징조에 대해 답변한 내용으로 여기에는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 불면 곧 겨울이 오고, 무화과나무가 연해지면 여름이 가까워 옴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망하여 없는 상태에서 다시 독립하거든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대가 얼마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독립을 보았으니 때가 가까워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깨어 기름 준비하고 신부단장을 잘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당당히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연관된 것끼리 짝지어 보세요.
①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눔 ② 속옷을 호지 않고 통으로 짬
③ 속옷을 찢지 않음 ④ 티투스 ⑤ 무화과나무
ㄱ.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여 없어질 것을 말한다.
ㄴ. 이스라엘이 이방족속과 섞이지 않은 순수 단일 민족임을 뜻한다.
ㄷ.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만큼은 찢어지지 않고 보전된다는 뜻이다.
ㄹ.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사람이다.
ㅁ.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 리라"고 했습니다. 그 고백대로 훗날 그들에게 어떠한 보응이 임했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티투스'란 누구일까요?
A.D. 70년에 유대 전쟁의 로마 최고 지휘자로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치세 중에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폼페이 시가 땅 속에 매몰되었다. 80년에는 로마의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이 잇달았지만 전 황제가 착공한 콜로세움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2011-03-11
제10과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마 27:29~30
읽을말씀 : 마 27:29~30 | 외울말씀 : 고후 10:5 l 참고 말씀: 사 53:5~6, 골 3:1~10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지금도 영국을 비롯한 군주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대관식을 거행하며 왕관을 착용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언도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에는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을 당하며 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여 결국은 먹고 맙니다. 이렇게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도록 미혹한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들지요.
그러면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이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다르기 때문에 입력된 내용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지지요. 이러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고 일어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고 하고, 반대되는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하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어찌하든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지어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유혹하지요.
우리가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만 진리를 좇아갈 수 있고 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벗어 버릴 수 있을까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사단이 주관하는 비진리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으로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어떤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여러 상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신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다음으로,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린 성결한 사람들이 받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 계 2:10).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이 외에도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천국의 좋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함으로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자 한 로마 병사가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병사는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지요.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쇠못이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어져 통증이 더욱 가중되었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하신 이유는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사람의 생각을 통해 들어온 죄악을 마음에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신 것입니다(막 9:45~47).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혈기가 나면 상대를 때리고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죄를 짓지요. 그래서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잘라 버리고 절뚝발이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써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눈을 빼내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눈으로 죄를 지으면 눈을 빼야 했고, 손으로 죄를 지으면 손을, 발로 죄를 지으면 발을 잘라야 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살인을 하거나 간음을 하면 돌로 쳐 죽였지요(신 19:19~21).
만일 십자가 고난이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손으로 죄를 지으면 손을, 발로 죄를 지으면 발을 찍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힘으로써 보혈을 흘려 손과 발로 짓는 죄를 모두 씻어 주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며 진정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때 주님의 보혈로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요일 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하며 손과 발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먼저 생각을 통해 들어오는 죄악을 마음에 심지 말고 오직 마음을 진리로 지켜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 있나요?
2. 서로 맞는 것끼리 선을 이어 보세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 ● ● 3천층
영광의 면류관 ● ● 1천층
생명의 면류관 ● ● 새 예루살렘
금 면류관 ● ● 2천층
의의 면류관 ● ● 낙원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우리가 낙원보다 좋은 천국을 침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낙원은 간신히 구원받은 영혼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가장 낮은 처소이기 때문이다. 낙원에 들어간 사람은 상급은 물론 개인 집이나 장식품, 면류관, 자신에게 속하여 시중드는 천사도 없다. 집이 없기에 복지관 같은 공공건물에서 휴식을 취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 영적 의미를 알게 한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고귀한 신분을 표시해 줍니다. 지금도 영국을 비롯한 군주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대관식을 거행하며 왕관을 착용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꼭 왕관이 아니더라도 군대에서는 장성들이 위엄과 권위를 표시하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는 학위를 받을 때 학위모를 씁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 가장 윗부분인 머리에 관을 씌우는 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길고 단단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이유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민란이 일까 두려워 십자가의 처형을 언도하고 맙니다. 이에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 억센 가시 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머리보다 작게 만들어서 예수님 머리에 눌러 씌우지요. 이때 날카로운 가시가 살을 파고드니 예수님의 얼굴에는 온통 피로 낭자했습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고통을 당하며 피 흘리도록 허락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 음성을 들어 나갈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자 곧 죄를 낳게 되었지요. 전에는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여 결국은 먹고 맙니다. 이렇게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도록 미혹한 사단은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통해 죄를 짓게 만들지요.
그러면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의 머리에는 기억장치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느낌과 함께 입력하는데, 이것을 '지식'이라고 합니다. 이 지식을 혼의 작용을 통해 되살려 내는 것이 바로 '생각'이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성장한 환경과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다르기 때문에 입력된 내용도 같지 않습니다. 똑같이 배웠어도 각자가 어떤 느낌과 함께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지지요. 이러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는 자신이 높아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남을 누르고 일어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여 준다고 하셨지요(마 23:12). 또한 사람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고 하고, 반대되는 생각을 육적인 생각이라고 하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육적인 생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어찌하든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지어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유혹하지요.
우리가 모든 이론을 깨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해야만 진리를 좇아갈 수 있고 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고후 10:5).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벗어 버릴 수 있을까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사단이 주관하는 비진리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으로 빚어지는 모든 불의, 불법, 죄악을 대속하기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생각을 통해 짓는 모든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좋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비된 면류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어떤 경기에 출전하면 참가자 전원에게 주는 참가상이 있고, 금, 은, 동메달 등 순위에 따라 주는 여러 상이 있지요. 이처럼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신 대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에게 참가상을 주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주는 상입니다.
다음으로, 죄를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벧전 5:4),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린 성결한 사람들이 받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약 1:12 ; 계 2:10). 그리고 사도 바울처럼 성결하여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명을 잘 감당한 성도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딤후 4:8). 이 외에도 금 면류관이 있는데(계 4:4), 이는 성결하고 온 집에 충성하는 믿음, 영원히 변치 않는 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얼마큼 죄를 싸워 버리며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않고 단정히 행하며(롬 13:13~14),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혼이 잘되고(갈 5:16),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만큼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어 좋은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천국의 좋은 면류관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격을 갖추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함으로 가장 좋은 면류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이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처형장에 이르자 한 로마 병사가 쇠로 된 정을 쥐고 또 다른 병사는 망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구령에 맞추어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았지요.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쇠못이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거기다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어져 통증이 더욱 가중되었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하신 이유는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사람의 생각을 통해 들어온 죄악을 마음에 심으면 손과 발을 움직여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신 것입니다(막 9:45~47).
사람들이 손과 발로 짓는 죄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혈기가 나면 상대를 때리고 폭력을 행하며, 도적질과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죄를 짓지요. 그래서 발로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느니 차라리 잘라 버리고 절뚝발이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탐심이 일어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써 간음도 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눈을 빼내 버리고 죄를 짓지 않음으로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눈으로 죄를 지으면 눈을 빼야 했고, 손으로 죄를 지으면 손을, 발로 죄를 지으면 발을 잘라야 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살인을 하거나 간음을 하면 돌로 쳐 죽였지요(신 19:19~21).
만일 십자가 고난이 없었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손으로 죄를 지으면 손을, 발로 죄를 지으면 발을 찍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힘으로써 보혈을 흘려 손과 발로 짓는 죄를 모두 씻어 주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며 진정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때 주님의 보혈로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요일 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늘 감사하며 손과 발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먼저 생각을 통해 들어오는 죄악을 마음에 심지 말고 오직 마음을 진리로 지켜 항상 승리하는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셔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말할 수 있나요?
2. 서로 맞는 것끼리 선을 이어 보세요.
썩지 아니할 면류관 ● ● 3천층
영광의 면류관 ● ● 1천층
생명의 면류관 ● ● 새 예루살렘
금 면류관 ● ● 2천층
의의 면류관 ● ● 낙원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우리가 낙원보다 좋은 천국을 침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낙원은 간신히 구원받은 영혼들이 들어가는 천국의 가장 낮은 처소이기 때문이다. 낙원에 들어간 사람은 상급은 물론 개인 집이나 장식품, 면류관, 자신에게 속하여 시중드는 천사도 없다. 집이 없기에 복지관 같은 공공건물에서 휴식을 취한다.
2011-03-04
제9과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갈 3:13~14
읽을말씀 : 갈 3:13~14 | 외울말씀 : 갈 3:13 l 참고 말씀:사 53:4~6
교육목표 :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받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한 이유를 알아본다.
십자가의 원래 의미는 참혹한 사형의 도구요 영적으로 볼 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저주의 의미가 변하여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지요. 인류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께서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데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그의 후손들 또한 죄인이 되어 저주받아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합니다(신 21:2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고자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롬 5:17~19).
레위기 17장 11~14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말씀했습니다.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없으면 죽습니다. 때문에 생명과 일체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깨끗한 피, 곧 영에 속한 피를 단번에 흘려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필요가 없으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이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 등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크게 축복받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도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9). 아브라함은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하나님 자녀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고, 모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마다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그 증표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요 1:12 ; 롬 8:16).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 됩니다(롬 8:15 ; 눅 10:20 ; 빌 3:20). 하나님의 마음이며 능력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 안에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부터 믿음을 주어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그런데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할 뿐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시험 환난과 온갖 고통을 당하며 마침내는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음으로 구원과 영생,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예수님 당시 죄인들의 처형법은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떠한 고통을 받으셨을까요?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을 박아 수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참수형을 당한다면 죽음의 고통이 순간에 끝나지만 십자가 처형은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피와 물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갈증과 탈진으로 인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기는 심한 고통을 겪으셔야 했지요.
또한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햇볕 아래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벌레들은 상처 난 부위를 물어뜯었지요. 그뿐 아니라 악한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하며 저주하였지요(마 27:39~43).
이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작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의 괴로움이나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저주를 한 몸에 담당했건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마음이 완악하여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게 될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어찌하면 보답할까 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율법의 ( )에서 ( )하기 위해서이다.
② ( )의 복을 ( )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③ 믿음으로 ( )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2.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피는 생명과 일체라 말씀합니다. 관련된 성구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레위기 17:11 ② 히브리서 9:22 ③ 레위기 17:14 ④ 요한복음 1:1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이고 중보자인 구세주의 직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는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완성형의 표현이다.
교육목표 :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사람들이 받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한 이유를 알아본다.
십자가의 원래 의미는 참혹한 사형의 도구요 영적으로 볼 때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저주의 의미가 변하여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지요. 인류의 모든 저주를 예수님께서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데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14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그의 후손들 또한 죄인이 되어 저주받아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하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합니다(신 21:2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고자 대신 저주를 받아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롬 5:17~19).
레위기 17장 11~14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말씀했습니다.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고 없으면 죽습니다. 때문에 생명과 일체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생할 수 있는 영의 생명을 얻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반드시 생명과 일체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죄와 자범죄가 없는 깨끗한 피, 곧 영에 속한 피를 단번에 흘려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온전히 죄를 용서받고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짐승을 잡아 제사드릴 필요가 없으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이 선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 건강, 장수, 물질 등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크게 축복받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도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셨을 때도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9). 아브라함은 확고한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하나님 자녀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고, 모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마다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그 증표로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요 1:12 ; 롬 8:16).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 됩니다(롬 8:15 ; 눅 10:20 ; 빌 3:20). 하나님의 마음이며 능력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시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진리 안에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부터 믿음을 주어 영생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그런데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시인할 뿐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시험 환난과 온갖 고통을 당하며 마침내는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음으로 구원과 영생,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겪으신 고통
예수님 당시 죄인들의 처형법은 칼로 죽이거나, 사자굴에 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거나, 시체와 함께 묶어 매장하는 등 잔인하고 끔찍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의 처형이 가장 가혹한 처형법이었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떠한 고통을 받으셨을까요?
십자가의 처형법은 큰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 사람을 묶어 놓고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을 박아 수 시간 매달아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참수형을 당한다면 죽음의 고통이 순간에 끝나지만 십자가 처형은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피와 물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갈증과 탈진으로 인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체중으로 인해 못 박힌 양손과 양발이 찢기는 심한 고통을 겪으셔야 했지요.
또한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온몸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뜨거운 햇볕 아래 여러 시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온 벌레들은 상처 난 부위를 물어뜯었지요. 그뿐 아니라 악한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해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모욕하며 저주하였지요(마 27:39~43).
이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작 고통스러워한 것은 육체의 괴로움이나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가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저주를 한 몸에 담당했건만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마음이 완악하여 믿지 않으므로 여전히 사망의 길로 가게 될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어찌하면 보답할까 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율법의 ( )에서 ( )하기 위해서이다.
② ( )의 복을 ( )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③ 믿음으로 ( )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2. 모든 육체에는 피가 있어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피는 생명과 일체라 말씀합니다. 관련된 성구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레위기 17:11 ② 히브리서 9:22 ③ 레위기 17:14 ④ 요한복음 1:1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자이고 중보자인 구세주의 직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는 구원할 자라는 미래형의 표현이고, 그리스도는 구원자로서 완성형의 표현이다.
2011-02-25
제8과온몸에 채찍을 맞고 피 흘리신 예수님
사 53:5~6
읽을말씀 : 사 53:5~6 | 외울말씀 : 벧전2:24ㅣ참고 말씀 : 출15:26, 레17:10~11, 히9:22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질병과 연약함과는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병사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하여
이사야 53장 5~6절에 보면 예수님이 받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즉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는데도 왜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중풍병자를 바로 치료해 주시기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지요. 그다음에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뒤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이처럼 사람이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누군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레 17:11).
2.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한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이 틈타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어떤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화가 난 부모는 "왜 너는 만날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까지 찾아가서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정당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의 도움 속에 쉽게 행할 수가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막상 자신한테 문제가 생기면 세상에 의존해 버립니다. 질병에 걸리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우선 병원부터 찾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러한 행동은 곧 믿음이 없다는 소치이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으니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습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제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 피가 죄를 속한다는 의미이지요.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그만 불순종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바로 구약 시대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기에 제사장이 대신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요.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피는 흠도 점도 없이 깨끗하여 죄를 온전히 씻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기에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온몸을 채찍에 맞아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며 어찌하든 그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써 넣으세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 )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 )을 인함이라 그가 ( )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 )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2.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제사장'이란?
제사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하며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했다. 제사장은 아론 지파에 속한 사람만 될 수 있었으며 육체적인 흠이 없어야 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았던 레위인과 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들을 주관했던 아론 자손의 제사장,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으로 나뉜다.
교육목표 :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리신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질병과 연약함과는 상관없는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로마 병사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으며 뾰족한 납덩이가 매달린 채찍으로 온몸을 내리쳤습니다. 채찍이 예수님 몸을 휘감아 잡아챌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토록 혹독한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1.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시기 위하여
이사야 53장 5~6절에 보면 예수님이 받은 고난의 섭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즉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말씀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찔리고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고 모든 질병에서 해방시키려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는데도 왜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중풍병자를 바로 치료해 주시기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죄의 문제부터 해결해 주셨지요. 그다음에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뒤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이처럼 사람이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누군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레 17:11).
2.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마태복음 8장 17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고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연약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한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면 어떤 질병이나 연약함이 틈타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밖에서 어떤 아이한테 맞고 들어왔습니다. 이때 화가 난 부모는 "왜 너는 만날 맞고만 다니니? 한 대 맞으면 너는 두 대, 세 대를 때려 줘야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때린 아이의 부모에게까지 찾아가서 따집니다. 꼭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몹시 속상해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 정당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며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화평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보시는 의와 사람이 보는 의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의 도움 속에 쉽게 행할 수가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않습니다. 설령 질병에 걸렸다 해도 치료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했는지를 발견하여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깨끗이 치료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입술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하면서 막상 자신한테 문제가 생기면 세상에 의존해 버립니다. 질병에 걸리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우선 병원부터 찾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러한 행동은 곧 믿음이 없다는 소치이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으니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없습니다(대하 16장).
3.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리신 이유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제를 드려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늘 같은 제사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온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시적인 속죄이므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주셨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를 흘림으로 피가 죄를 속한다는 의미이지요.
흠도 점도 없는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 흘리신 보혈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0장 19~20절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존재였는데 그만 불순종한 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이런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통로가 바로 구약 시대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기에 제사장이 대신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지요. 이로 인해 우리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그때마다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정결케 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모두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피는 흠도 점도 없이 깨끗하여 죄를 온전히 씻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기에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기 위해 온몸을 채찍에 맞아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며 어찌하든 그 은혜에 보답해 드리기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써 넣으세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 )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 )을 인함이라 그가 ( )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 )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2.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제사장'이란?
제사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하며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했다. 제사장은 아론 지파에 속한 사람만 될 수 있었으며 육체적인 흠이 없어야 했다.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았던 레위인과 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들을 주관했던 아론 자손의 제사장,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으로 나뉜다.
2011-02-18
제7과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고전 2:6~10
읽을말씀 : 고전 2:6~10 | 외울말씀 : 요 1:12 l 참고 말씀:창 3:14~15
교육목표 :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만세 전부터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지혜 가운데 예수님을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지요. 만약 원수 마귀가 이러한 비밀을 알았다면 아담으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권세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담의 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훼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만세 전에 감취어진 비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사람을 유혹했던 간교한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창 3:14).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하신 대로 원수 마귀는 여자의 후손 중에 자기를 상하게 할 사람이 태어날 것을 알고 그를 죽이고자 작정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원수 마귀 사단은 구약 시대부터 악한 사람을 사주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괴롭히며 핍박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는 간악한 헤롯 왕을 사주하여 베들레헴과 그 주변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였지요.
예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헤롯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마 2:13~15). 그 후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 살며 30세부터 공생애에 들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셨지요.
원수 마귀는 자기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모두 죽여서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밉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양손, 양발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원수 마귀는 철저하게 여자의 후손을 죽였다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가 감춰 있지요.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보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말씀한 대로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무 죄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의 훼방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세 전에 섭리하신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요? 나라에도 법이 있듯이 영계에도 법이 있으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영계의 법칙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그 예로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있습니다(롬 6:23). 그런데 원수 마귀는 아무런 죄도 흠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히 7:26 ; 벧전 2:22~23). 원수 마귀가 영계의 법을 어기게 된 것이지요.
이로 인해 아담이 불순종함의 죄를 범하여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가 이런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합니다.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참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법에 따라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근족으로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지요. 원죄와 자범죄가 없었기에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聖徒)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敎人)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했는데, 과연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주어지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과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 이방 민족과 혼혈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상종하지도 않을뿐더러 사마리아 땅을 밟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혹 그 땅을 거쳐 가야 할 경우에는 멀리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지요. 마침 사마리아 땅을 지나면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지역적인 특성상 이스라엘의 여행자들은 항상 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질 리 없고 설령 물이 떨어졌어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니 잠깐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신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인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이 소식을 동네 사람에게 전파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으로 참 생명과 영생을 얻고 천국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과 단순히 아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요.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합니다.
왜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두어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는지,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하셨는지 구원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요. 귤의 맛을 알려면 단순히 겉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 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막연히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가? 하는 십자가의 섭리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깨달을 때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설명과 관계가 없는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것이기에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다.
②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원죄가 없다.
③ 원수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줄 알았다.
④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다.
2.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적대시 한 이유는?
원래 사마리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가나안 정복 때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BC 721년 사마리아가 속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자 이방인들이 그 땅에 유입되면서 그들과 결혼하여 혼혈족이 되므로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적대시하게 되었다.
교육목표 :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을 만세 전부터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지혜 가운데 예수님을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지요. 만약 원수 마귀가 이러한 비밀을 알았다면 아담으로부터 넘겨받은 모든 권세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담의 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훼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만세 전에 감취어진 비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사람을 유혹했던 간교한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습니다(창 3:14). 또한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하신 대로 원수 마귀는 여자의 후손 중에 자기를 상하게 할 사람이 태어날 것을 알고 그를 죽이고자 작정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원수 마귀 사단은 구약 시대부터 악한 사람을 사주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괴롭히며 핍박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에는 간악한 헤롯 왕을 사주하여 베들레헴과 그 주변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였지요.
예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요셉에게 현몽하여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헤롯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마 2:13~15). 그 후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 살며 30세부터 공생애에 들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셨지요.
원수 마귀는 자기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을 모두 죽여서 승리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략을 꾸밉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양손, 양발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원수 마귀는 철저하게 여자의 후손을 죽였다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가 감춰 있지요.
고린도전서 2장 7~8절에 보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말씀한 대로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무 죄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고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의 훼방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성취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만세 전에 섭리하신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요? 나라에도 법이 있듯이 영계에도 법이 있으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영계의 법칙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그 예로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있습니다(롬 6:23). 그런데 원수 마귀는 아무런 죄도 흠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히 7:26 ; 벧전 2:22~23). 원수 마귀가 영계의 법을 어기게 된 것이지요.
이로 인해 아담이 불순종함의 죄를 범하여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원수 마귀가 이런 하나님의 비밀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합니다.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참 생명과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법에 따라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근족으로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지요. 원죄와 자범죄가 없었기에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이 세상의 어떤 권세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의 자녀라 할지라도 권세가 대단한데 하물며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주 만물을 치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어떠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聖徒)가 있는가 하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교인(敎人)이 있습니다. 교인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을 뿐,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에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했는데, 과연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주어지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과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 이방 민족과 혼혈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상종하지도 않을뿐더러 사마리아 땅을 밟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혹 그 땅을 거쳐 가야 할 경우에는 멀리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지요. 마침 사마리아 땅을 지나면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 지역적인 특성상 이스라엘의 여행자들은 항상 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물이 떨어질 리 없고 설령 물이 떨어졌어도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으니 잠깐 기다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하신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영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여인이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이 소식을 동네 사람에게 전파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였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으로 참 생명과 영생을 얻고 천국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과 단순히 아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요.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합니다.
왜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시고 선악과를 두어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는지,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하셨는지 구원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요. 귤의 맛을 알려면 단순히 겉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먹어 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고 막연히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가? 하는 십자가의 섭리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을 깨달을 때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설명과 관계가 없는 것을 고르시오.
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인간 구원의 길이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것이기에 철저히 비밀리에 감추어 두셨다.
②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성령으로 잉태되어 원죄가 없다.
③ 원수 마귀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줄 알았다.
④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는다.
2.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적대시 한 이유는?
원래 사마리아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가나안 정복 때 함께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BC 721년 사마리아가 속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하자 이방인들이 그 땅에 유입되면서 그들과 결혼하여 혼혈족이 되므로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적대시하게 되었다.
2011-02-11
제6과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예수 그리스도
레 25:23~25
읽을말씀 : 레 25:23~25 | 외울말씀 : 롬 5:19 ㅣ 참고 말씀:계 5:1~5
교육목표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과 구세주가 되는 자격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영계의 법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이 죄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과연 사망에 이르는 사람의 죄를 속량하여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좇아 비밀한 가운데 만세 전에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1. 토지를 사고파는 데 적용되는 토지 무르기 법칙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近族)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즉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 것이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가까운 친척)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는 '토지 무르기 법칙'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서에 어떤 경로로 토지를 팔고 사는가 하는 계약 과정을 기록하고 되돌려 받을 수 있는 토지 무르기의 내용을 기록하게 합니다. 그리고 팔고 사는 사람이 도장을 찍고 증인들을 세워서 1부는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여 성전 창고에 보관합니다. 또 다른 1부는 인봉하지 않다가 언제라도 볼 수 있게 성전 입구에 펼쳐 놓습니다. 이는 언제라도 근족이 와서 대신 토지를 무를 수 있게 하였고, 근족 중에 무를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부를 쌓아 힘이 있을 때 다시 사서 무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도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천하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주게 되었지만(눅 4:6),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영영히 팔지는 못하며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지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2.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과 예수 그리스도
이러한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는 아담의 후예가 아니고 사람의 근족이어야 하며, 무를 수 있는 힘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4절에 보면 하나님과 마귀가 계약한 책이 나옵니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마귀에게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넘겨주었지만, 무를 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그 권세를 넘겨주겠다.'는 계약서이지요.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니 그 책이 일곱 인으로 봉하여 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크게 웁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나타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뿌리 예수 그리스도가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죄를 대속해 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으면 멸망의 길을 가던 모든 인류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토지 무르기 법칙에 의하면 돈이 없어 토지를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영영히 팔지 못하기 때문에 토지를 판 사람이 다시 달라고 하면 주어야 합니다. 만일 본인이 무를 힘이 없을 때에는 근족이 대신 물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무르기 위해서는 아담의 근족이어야 하므로 토지 무를 자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요 1:14). 즉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토지 무르기 법칙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아담은 불순종한 죄가 있으므로 아담의 핏줄을 타고난 인류는 모두 원죄가 있습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으니,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면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런 사람을 찾고자 하늘 위를 보니 천사만 있고 땅 위를 살펴보니 아담의 후예인 죄인들만 있고 음부에 있는 영혼들 중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계 5:1~3).
그러면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법칙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뿌리이지만, 남녀가 결혼하여 잉태된 분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오직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예가 아닙니다(마 1:18~21).
셋째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빚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자신에게 그만한 재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처럼 죄를 대속하려면 죄를 무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입니다. 그러므로 원수 마귀에게 빼앗긴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야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 세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을까요?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에 원죄가 없습니다.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33년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셨으니 스스로 짓는 자범죄도 전혀 없으셨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온전한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므로 토지 무를 힘이 있고, 결국에는 원수 마귀가 방해하지 못하고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넷째로,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위의 세 가지가 조건이 모두 성립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일 동생이 빚을 졌는데 부자인 형이 빚을 대신 갚아 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룻기 4장 6절을 보면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합니다. 즉 토지 무를 힘이 있지만 무르지 않겠다고 하지요. 그러자 그다음 근족인 보아스가 대신 나오미의 토지를 물어 주는데, 이는 그가 사랑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부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큰 축복을 받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 없으셨다면 과연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녀로 되찾아 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시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주시며 오직 선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피조물인 사람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들을 위해 주셨으며,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뜻을 좇아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행 4:12). 이러한 사실을 밝히 깨달아 하나님 자녀 된 모든 권세를 회복함으로 구원의 확신 속에서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며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구세주의 자격에 대해 합당한 단어를 ( ) 안에 써 넣으세요.
첫째, ( )이어야 합니다.
둘째, ( )의 ( )가 아니어야 합니다.
셋째, 원수 ( )를 이길 수 있는 ( )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 ( )까지 줄 수 있는 ( )이 있어야 합니다.
2.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 것이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가까운 친척)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토지는 근본 흙으로 창조된 사람과 직접 연관성이 있다. 관련된 말씀은?
"네가 얼굴에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장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세기 3장 23절)
교육목표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과 구세주가 되는 자격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영계의 법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이 죄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과연 사망에 이르는 사람의 죄를 속량하여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좇아 비밀한 가운데 만세 전에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1. 토지를 사고파는 데 적용되는 토지 무르기 법칙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近族)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즉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 것이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가까운 친척)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는 '토지 무르기 법칙'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서에 어떤 경로로 토지를 팔고 사는가 하는 계약 과정을 기록하고 되돌려 받을 수 있는 토지 무르기의 내용을 기록하게 합니다. 그리고 팔고 사는 사람이 도장을 찍고 증인들을 세워서 1부는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여 성전 창고에 보관합니다. 또 다른 1부는 인봉하지 않다가 언제라도 볼 수 있게 성전 입구에 펼쳐 놓습니다. 이는 언제라도 근족이 와서 대신 토지를 무를 수 있게 하였고, 근족 중에 무를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부를 쌓아 힘이 있을 때 다시 사서 무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도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천하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주게 되었지만(눅 4:6),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영영히 팔지는 못하며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지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2.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과 예수 그리스도
이러한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는 아담의 후예가 아니고 사람의 근족이어야 하며, 무를 수 있는 힘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에는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4절에 보면 하나님과 마귀가 계약한 책이 나옵니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마귀에게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넘겨주었지만, 무를 힘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그 권세를 넘겨주겠다.'는 계약서이지요.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니 그 책이 일곱 인으로 봉하여 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크게 웁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나타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뿌리 예수 그리스도가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죄를 대속해 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으면 멸망의 길을 가던 모든 인류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토지 무르기 법칙에 의하면 돈이 없어 토지를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영영히 팔지 못하기 때문에 토지를 판 사람이 다시 달라고 하면 주어야 합니다. 만일 본인이 무를 힘이 없을 때에는 근족이 대신 물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무르기 위해서는 아담의 근족이어야 하므로 토지 무를 자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요 1:14). 즉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토지 무르기 법칙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아담은 불순종한 죄가 있으므로 아담의 핏줄을 타고난 인류는 모두 원죄가 있습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으니,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면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런 사람을 찾고자 하늘 위를 보니 천사만 있고 땅 위를 살펴보니 아담의 후예인 죄인들만 있고 음부에 있는 영혼들 중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계 5:1~3).
그러면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법칙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뿌리이지만, 남녀가 결혼하여 잉태된 분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오직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예가 아닙니다(마 1:18~21).
셋째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빚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자신에게 그만한 재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처럼 죄를 대속하려면 죄를 무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입니다. 그러므로 원수 마귀에게 빼앗긴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야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 세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을까요?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에 원죄가 없습니다.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33년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셨으니 스스로 짓는 자범죄도 전혀 없으셨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온전한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므로 토지 무를 힘이 있고, 결국에는 원수 마귀가 방해하지 못하고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넷째로,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위의 세 가지가 조건이 모두 성립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일 동생이 빚을 졌는데 부자인 형이 빚을 대신 갚아 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룻기 4장 6절을 보면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합니다. 즉 토지 무를 힘이 있지만 무르지 않겠다고 하지요. 그러자 그다음 근족인 보아스가 대신 나오미의 토지를 물어 주는데, 이는 그가 사랑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부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큰 축복을 받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 없으셨다면 과연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녀로 되찾아 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시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주시며 오직 선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피조물인 사람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독생자를 아낌없이 우리들을 위해 주셨으며,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뜻을 좇아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행 4:12). 이러한 사실을 밝히 깨달아 하나님 자녀 된 모든 권세를 회복함으로 구원의 확신 속에서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며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구세주의 자격에 대해 합당한 단어를 ( ) 안에 써 넣으세요.
첫째, ( )이어야 합니다.
둘째, ( )의 ( )가 아니어야 합니다.
셋째, 원수 ( )를 이길 수 있는 ( )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 ( )까지 줄 수 있는 ( )이 있어야 합니다.
2.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 것이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가까운 친척)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토지는 근본 흙으로 창조된 사람과 직접 연관성이 있다. 관련된 말씀은?
"네가 얼굴에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장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세기 3장 23절)
2011-02-03
제5과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1. 주 안에서의 '설'에 대한 이해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의 나라들에 있어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이란 한 해의 첫날을 지칭하는 말로 음력 1월 1일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묵은해를 떨쳐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 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설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우리 조상들은 설이 되면 새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가정의 평안과 건강 그 밖에 마음의 소원을 기원하며 막연히 신에게 복을 빌거나 조상에게 차례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축복과 마음의 소원의 응답은 오직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설을 맞이하여 지난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새해를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의미를 담아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2. 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
우리 민족 고유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지난 한 해 동안도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축복해 주셨으며, 새해에도 풍성한 은혜와 축복으로 함께해 주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기 원 ------------------------------------------------------ 사회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찬 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 도 ---------------------------------------------------가족 중에서
(기도 예문)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설을 맞아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각종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께서 저희 온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가 오늘 이렇게 함께 모여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했던 모습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보혈로써 사해 주옵시고, 새로운 한 해의 출발을 맞아 하나님 말씀 안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 모인 우리 가족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옵시고, 한마음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행복한 시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희 모든 가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후 시간도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설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믿고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봉독 ---------------- 에베소서 5:20~21 ------------------- 사회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설 교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설교자
(설교 예문)
먼저 에베소서 5장 20절을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킴 받고 보호받으며 살았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아버지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 기근과 전쟁, 폭설과 폭우 등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한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날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방면에서 아수라장 같은 혼란이 더해만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염려, 걱정,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천국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 해 동안도 항상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며 늘 좋은 것으로 주기를 원하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아버지 하나님께 다 함께 감사를 드립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가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지켜 주셨기에 설 명절을 맞아 이 시간 한자리에 모여 감사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설날에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도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해의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몰랐기에 그동안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 오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하지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안에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장차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모든 것에 부족됨이 없도록 넘치게 채워 주시지요. 그러니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때 더욱 기쁘게 여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롬 8:28).
감사는 어떠한 환경이라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유에서 유의 창조만 믿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영의 눈, 즉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무에서 유가 창조될 것을 믿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 환난이 와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5장 21절에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요, 섬기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헛된 자존심과 교만, 스스로 옳다고 하는 생각과 이론을 모두 버려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내게 잘해 주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윗사람이니까' 섬기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처럼 마음 중심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부모에게 효를 행하고 윗사람을 섬기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 등 선을 행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자연히 상대를 높이고 섬겨 주며 자신을 낮추는 아름다운 행실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고유 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더욱 복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먼저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하신 대로 주 안에서 서로 섬기며 상대를 위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주장, 내 의견, 내 생각만을 고집할 때는 서로 간에 불목할 수밖에 없지만,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본받아 피차 복종한다면 얼마나 화목한 가정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주 안에서 경건하며 화평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만사형통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 도 ------------------------------------------------------ 설교자
찬 송 -------------------------- 305장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교육목표 :
1. 주 안에서의 '설'에 대한 이해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의 나라들에 있어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이란 한 해의 첫날을 지칭하는 말로 음력 1월 1일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묵은해를 떨쳐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 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설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우리 조상들은 설이 되면 새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가정의 평안과 건강 그 밖에 마음의 소원을 기원하며 막연히 신에게 복을 빌거나 조상에게 차례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축복과 마음의 소원의 응답은 오직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설을 맞이하여 지난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새해를 하나님께 맡겨 드린다는 의미를 담아 행복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2. 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
우리 민족 고유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지난 한 해 동안도 항상 우리를 지키시고 축복해 주셨으며, 새해에도 풍성한 은혜와 축복으로 함께해 주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기 원 ------------------------------------------------------ 사회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찬 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 도 ---------------------------------------------------가족 중에서
(기도 예문)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설을 맞아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각종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께서 저희 온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가 오늘 이렇게 함께 모여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했던 모습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보혈로써 사해 주옵시고, 새로운 한 해의 출발을 맞아 하나님 말씀 안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 모인 우리 가족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옵시고, 한마음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행복한 시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희 모든 가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후 시간도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설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믿고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봉독 ---------------- 에베소서 5:20~21 ------------------- 사회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설 교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설교자
(설교 예문)
먼저 에베소서 5장 20절을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킴 받고 보호받으며 살았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아버지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 기근과 전쟁, 폭설과 폭우 등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가 얼마나 많은지요. 또한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날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방면에서 아수라장 같은 혼란이 더해만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염려, 걱정,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천국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 해 동안도 항상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며 늘 좋은 것으로 주기를 원하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아버지 하나님께 다 함께 감사를 드립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가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지켜 주셨기에 설 명절을 맞아 이 시간 한자리에 모여 감사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설날에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음식을 차려 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도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해의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몰랐기에 그동안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 오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하지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 안에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장차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주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모든 것에 부족됨이 없도록 넘치게 채워 주시지요. 그러니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때 더욱 기쁘게 여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롬 8:28).
감사는 어떠한 환경이라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유에서 유의 창조만 믿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영의 눈, 즉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무에서 유가 창조될 것을 믿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 환난이 와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5장 21절에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요, 섬기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헛된 자존심과 교만, 스스로 옳다고 하는 생각과 이론을 모두 버려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내게 잘해 주니까, 저 사람은 나보다 윗사람이니까' 섬기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처럼 마음 중심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부모에게 효를 행하고 윗사람을 섬기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 등 선을 행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은 자연히 상대를 높이고 섬겨 주며 자신을 낮추는 아름다운 행실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고유 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더욱 복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먼저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하신 대로 주 안에서 서로 섬기며 상대를 위해 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주장, 내 의견, 내 생각만을 고집할 때는 서로 간에 불목할 수밖에 없지만,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본받아 피차 복종한다면 얼마나 화목한 가정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주 안에서 경건하며 화평하고 서로 사랑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만사형통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 도 ------------------------------------------------------ 설교자
찬 송 -------------------------- 305장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2011-01-28
제4과선악과를 두신 이유
창 3:1~7
읽을말씀 : 창 3:1~7 | 외울말씀 : 약 1:15 ㅣ참고 말씀:창 2:17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와 왜 아담이 불순종하여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본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깊고 오묘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두어 사람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죽음을 보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선악과를 두고 사망의 길로 인도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이며 어째서 아담이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창 2:7). 생령이란 살아 있는 영이란 뜻입니다. 아담이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지식이나 지혜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뇌세포 안에 기억장치를 주셨지만 아직 보고 듣고 가르침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본능적인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즉 영의 지식이나 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곳으로 아담을 이끌어 들이시고 영의 지식을 하나하나 가르치며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지요(창 2:19).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에 관한 무한한 지식을 알려 주시며 땅을 정복하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또한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돕는 배필로 여자인 하와를 지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홀로 계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형편을 미리 헤아려 베푸신 사랑입니다.
2. 사단의 사주를 받아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동산에서 자녀 된 권세를 마음껏 누리며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금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질서를 세우시고 마음 중심에서 순종하는 자녀를 얻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결국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사단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하와를 유혹하니 결국 아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사단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말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창 2:17). 그런데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하나님 말씀을 변개하여 답변한 것입니다.
하와의 답변을 들은 뱀은 더욱 적극적으로 여자를 유혹합니다. 창세기 3장 4~5절을 보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며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하지요. 뿐만 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면서 재차 유혹합니다.
사단이 여자의 생각에 욕심을 불어넣으니 선악과가 예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창 3:6) 그만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남편에게 주니 그도 먹고 말았지요.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악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는데, 아담이 불순종하기 전에는 전혀 악이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다가 사단이 뱀을 통하여 유혹하자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에 불순종하므로 악이 들어왔습니다. 즉 생령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처음부터 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가운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악이 성립되었고, 비로소 죄가 잉태된 것입니다.
3. 죄의 삯은 사망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나오는데, 과연 사망이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어떻게 임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고 곧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을 향수하며 자녀를 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살전 5:23). 그런데 하나님 명령을 어기니 주인인 영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령이었을 때는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지만 죄 때문에 영이 죽으니 교통이 끊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이때부터 인류의 고난이 시작되어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수고하며 자녀를 낳고, 또 남편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남자는 저주받은 땅에서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었지요(창 3:16~17). 또한 인류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고, 아담의 후손들 또한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롬 5:12).
그러면 사단의 사주를 받아 하와를 미혹한 뱀은 어떠한 저주를 받았을까요?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은 영적으로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말하며(창 2:7), 뱀은 원수 마귀 사단을 뜻합니다(계 20: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므로(벧전 5:8)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의 가장 중앙에 두신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성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지요.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담은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오랜 세월이 흐르자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지요. 결국 이 땅으로 쫓겨난 후에야 눈물, 슬픔, 고통, 불행, 죽음 등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그제야 행복과 불행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지요.
자녀들이 공부하는 것이 힘들다고 학교에 보내지 않고 놀게 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장래를 위해 배우고 익히게끔 하지요. 이 땅에 인간을 두고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이러한 부모 마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두고 아담이 자유 의지에 따라 먹어도 막지 않으셨고, 인간 경작을 통해 이 땅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상대성을 체험하며 진정한 사랑과 기쁨, 감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경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상대성을 알고 참사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두시고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된 경로를 보기의 단어를 넣어 이야기해 봅시다.
(하와, 뱀, 사단, 선악과, 자유 의지, 불순종, 사망)
2.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알고 넘어 갑시다!
'자유 의지'(free will)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한다.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과 특권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와 왜 아담이 불순종하여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본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깊고 오묘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두어 사람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죽음을 보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선악과를 두고 사망의 길로 인도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이며 어째서 아담이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창 2:7). 생령이란 살아 있는 영이란 뜻입니다. 아담이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지식이나 지혜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뇌세포 안에 기억장치를 주셨지만 아직 보고 듣고 가르침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본능적인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즉 영의 지식이나 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곳으로 아담을 이끌어 들이시고 영의 지식을 하나하나 가르치며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지요(창 2:19).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에 관한 무한한 지식을 알려 주시며 땅을 정복하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또한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돕는 배필로 여자인 하와를 지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홀로 계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형편을 미리 헤아려 베푸신 사랑입니다.
2. 사단의 사주를 받아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에덴동산에서 자녀 된 권세를 마음껏 누리며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금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질서를 세우시고 마음 중심에서 순종하는 자녀를 얻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결국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사단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하와를 유혹하니 결국 아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사단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말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창 2:17). 그런데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하나님 말씀을 변개하여 답변한 것입니다.
하와의 답변을 들은 뱀은 더욱 적극적으로 여자를 유혹합니다. 창세기 3장 4~5절을 보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며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부정하지요. 뿐만 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면서 재차 유혹합니다.
사단이 여자의 생각에 욕심을 불어넣으니 선악과가 예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창 3:6) 그만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남편에게 주니 그도 먹고 말았지요.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악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하는데, 아담이 불순종하기 전에는 전혀 악이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지요.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다가 사단이 뱀을 통하여 유혹하자 하나님께서 세운 질서에 불순종하므로 악이 들어왔습니다. 즉 생령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처음부터 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가운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악이 성립되었고, 비로소 죄가 잉태된 것입니다.
3. 죄의 삯은 사망
로마서 6장 23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이 나오는데, 과연 사망이 불순종의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어떻게 임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고 곧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을 향수하며 자녀를 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이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살전 5:23). 그런데 하나님 명령을 어기니 주인인 영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령이었을 때는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지만 죄 때문에 영이 죽으니 교통이 끊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이때부터 인류의 고난이 시작되어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수고하며 자녀를 낳고, 또 남편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남자는 저주받은 땅에서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었지요(창 3:16~17). 또한 인류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고, 아담의 후손들 또한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롬 5:12).
그러면 사단의 사주를 받아 하와를 미혹한 뱀은 어떠한 저주를 받았을까요?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은 영적으로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말하며(창 2:7), 뱀은 원수 마귀 사단을 뜻합니다(계 20: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므로(벧전 5:8)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의 가장 중앙에 두신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성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지요.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상대성을 모르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담은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오랜 세월이 흐르자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말았지요. 결국 이 땅으로 쫓겨난 후에야 눈물, 슬픔, 고통, 불행, 죽음 등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그제야 행복과 불행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되었지요.
자녀들이 공부하는 것이 힘들다고 학교에 보내지 않고 놀게 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고생스럽더라도 장래를 위해 배우고 익히게끔 하지요. 이 땅에 인간을 두고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이러한 부모 마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두고 아담이 자유 의지에 따라 먹어도 막지 않으셨고, 인간 경작을 통해 이 땅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상대성을 체험하며 진정한 사랑과 기쁨, 감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경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상대성을 알고 참사랑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두시고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게 된 경로를 보기의 단어를 넣어 이야기해 봅시다.
(하와, 뱀, 사단, 선악과, 자유 의지, 불순종, 사망)
2.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알고 넘어 갑시다!
'자유 의지'(free will)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한다.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과 특권이다.
2011-01-21
제3과사람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창 1:27, 마 3:12
읽을말씀 : 창 1:27, 마 3:12 | 외울말씀 : 마 3:12 ㅣ참고 말씀:딤전 2:4
교육목표 :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를 통해 알곡은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으로 던져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로써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로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자 한 것입니다(마 13:34).
그중에는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밭의 가라지의 비유, 포도원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등 경작에 관한 비유가 많습니다. 이는 농부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를 거두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고, 때가 되면 알곡을 천국으로 들인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작하시는 이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주 공간에 홀로 계셨습니다. 지극히 아름답고 영롱한 빛 안에 맑고 청아한 소리를 머금고 온 우주공간을 다스리신 것입니다(요일 1:5, 요 1:1).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느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갖고 계시기에 홀로 누리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으신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공간을 오묘하게 분리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멈추지 않고 사람을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두 자녀가 있는데 큰아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면 작은아이는 부모님을 서운케 할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키며 사랑스럽게 매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어느 자녀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또한 가정에 로봇이 있어 밥도 짓고 청소도 하며 모든 시중을 다 들어 준다고 해서 자녀보다 로봇이 더 사랑스러울까요? 로봇이 아무리 유익하다고 해도 자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도 순종을 잘하는 천군 천사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자유 의지 가운데 즐거이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자유 의지를 주시고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며 참 자녀로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를 얻고자 이 땅에 아담과 하와라는 첫 번째 씨를 심으시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마음밭을 개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5~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만세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입니까? 잉태한 열 달 동안 여러 고통이 따르고, 해산할 때에도 큰 수고를 해야 합니다. 자녀를 먹이고 입히며 가르치기 위해 힘써 일하며 밤낮으로 수고해야 하지요. 그런데도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극진히 섬기고 효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근심할 것을 아셨지만,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나올 것을 아시기에 기꺼이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2.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는 이유는 추수 때에 많은 소산을 거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 보면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섞여 나옵니다. 이때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마친 뒤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참 자녀인 알곡은 천국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태우십니다. 그러면 알곡과 쭉정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알곡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빛의 자녀들이지요. 반면에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이 알곡이 되어 천국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깨우치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만 자유 의지 속에서 끝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가치를 잃은 쭉정이는 결국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생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원불멸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따라서 짐승처럼 아예 무 상태로 멸해 버릴 수도 없고 알곡 성도와 함께 아름다운 천국에 들이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곡 성도는 모아서 천국에 들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지만 쭉정이는 세세토록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태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천국과 함께 참혹한 지옥을 두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농부가 알곡과 쭉정이를 함께 두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온갖 악이 가득한 사람이 아름다운 천국에 함께 거한다면 죄악으로 오염될 수밖에 없으니 하나님께서 지옥을 따로 두신 것도 근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인간 경작과 백보좌 대심판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이 한 해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 경작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려 주시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베드로, 바울 등 믿음의 선진을 보내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시며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함께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종과 일꾼을 통해 끊임없이 인간을 경작하시며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는 것도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신 대로 때가 이르면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마쳐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처럼, 인간 경작의 역사가 끝나면 백보좌 대심판을 통해 알곡은 아름다운 천국으로, 쭉정이는 지옥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고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크신 사랑을 깨달아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써 보세요.
영적으로 알곡이란 ( )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 )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며, 이들은 아름다운 ( )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 )를 말합니다.
3. 다음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아는 것만 0표 해 보세요.
주님의 공중강림, 주님의 지상재림, 천년왕국, 백보좌 대심판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알고 넘어 갑시다!
'알파와 오메가'란? 문명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이다.
'처음과 나중'이란?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마무리 하신다는 뜻이다.
'시작과 끝'이란? 성령께서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교육목표 :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를 통해 알곡은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으로 던져 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로써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로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자 한 것입니다(마 13:34).
그중에는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밭의 가라지의 비유, 포도원의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등 경작에 관한 비유가 많습니다. 이는 농부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를 거두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고, 때가 되면 알곡을 천국으로 들인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작하시는 이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주 공간에 홀로 계셨습니다. 지극히 아름답고 영롱한 빛 안에 맑고 청아한 소리를 머금고 온 우주공간을 다스리신 것입니다(요일 1:5, 요 1:1).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느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갖고 계시기에 홀로 누리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으신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공간을 오묘하게 분리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멈추지 않고 사람을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두 자녀가 있는데 큰아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면 작은아이는 부모님을 서운케 할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키며 사랑스럽게 매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어느 자녀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또한 가정에 로봇이 있어 밥도 짓고 청소도 하며 모든 시중을 다 들어 준다고 해서 자녀보다 로봇이 더 사랑스러울까요? 로봇이 아무리 유익하다고 해도 자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도 순종을 잘하는 천군 천사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자유 의지 가운데 즐거이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자유 의지를 주시고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며 참 자녀로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를 얻고자 이 땅에 아담과 하와라는 첫 번째 씨를 심으시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마음밭을 개간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5~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만세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입니까? 잉태한 열 달 동안 여러 고통이 따르고, 해산할 때에도 큰 수고를 해야 합니다. 자녀를 먹이고 입히며 가르치기 위해 힘써 일하며 밤낮으로 수고해야 하지요. 그런데도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극진히 섬기고 효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근심할 것을 아셨지만,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나올 것을 아시기에 기꺼이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2.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는 이유는 추수 때에 많은 소산을 거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 보면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섞여 나옵니다. 이때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마친 뒤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참 자녀인 알곡은 천국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태우십니다. 그러면 알곡과 쭉정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알곡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즉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빛의 자녀들이지요. 반면에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이 알곡이 되어 천국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방법으로 깨우치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만 자유 의지 속에서 끝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가치를 잃은 쭉정이는 결국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생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원불멸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따라서 짐승처럼 아예 무 상태로 멸해 버릴 수도 없고 알곡 성도와 함께 아름다운 천국에 들이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곡 성도는 모아서 천국에 들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지만 쭉정이는 세세토록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태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천국과 함께 참혹한 지옥을 두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농부가 알곡과 쭉정이를 함께 두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온갖 악이 가득한 사람이 아름다운 천국에 함께 거한다면 죄악으로 오염될 수밖에 없으니 하나님께서 지옥을 따로 두신 것도 근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인간 경작과 백보좌 대심판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이 한 해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 경작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려 주시며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베드로, 바울 등 믿음의 선진을 보내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시며 놀라운 응답과 축복으로 함께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종과 일꾼을 통해 끊임없이 인간을 경작하시며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는 것도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신 대로 때가 이르면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마쳐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처럼, 인간 경작의 역사가 끝나면 백보좌 대심판을 통해 알곡은 아름다운 천국으로, 쭉정이는 지옥불에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고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크신 사랑을 깨달아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써 보세요.
영적으로 알곡이란 ( )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 )을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며, 이들은 아름다운 ( )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 )를 말합니다.
3. 다음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아는 것만 0표 해 보세요.
주님의 공중강림, 주님의 지상재림, 천년왕국, 백보좌 대심판
● 금주 과제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알고 넘어 갑시다!
'알파와 오메가'란? 문명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이다.
'처음과 나중'이란?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마무리 하신다는 뜻이다.
'시작과 끝'이란? 성령께서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