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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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9
제52과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고린도전서 15:31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5:31 | 외울말씀 : 고린도후서 5:17 | 참고 말씀: 사무엘상 15:22
교육목표 :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며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이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이렇게 날마다 새로워져야만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며(고전 15:31) 신속히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진리의 사람으로 새로워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사심이 있으면 상대를 힘들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낼 수가 없지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일꾼이라면 육의 정과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특히 주의 종이라면 부모나 자녀, 육의 가족보다 맡은 양 떼들을 더 귀히 여겨야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으려면 탐심은 물론이고 자존심이나 교만도 버려야 하고, 명예욕, 권세욕도 버려야 합니다. 나를 잘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누구를 대한다 해도 태도와 안색이 달라져서도 안 되지요.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사심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핑계가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일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했다.” 하지요. 가령, 성도들에게 이러이러한 용도로 예물을 모으자 하거나 야외로 나가 어떤 모임을 하자고 합니다.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이런 일을 추진했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굳이 일을 벌이지요.
어떤 행사를 치를 때도 성도들의 입장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진행합니다. 이럴 때는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 되기 쉽지 않고 그 열매도 육의 열매가 나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고집하면서 자기 사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혹여 나는 어떤 일을 하거나 말 한마디 속에도 ‘주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내 의욕이 앞서고 내 공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아닌지, 섬김받으려는 마음은 아닌지, 내 유익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자신을 면밀히 점검하여 정결하게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2.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영의 일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 것을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말로는 영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그 마음과 생각이 육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시선이 육의 것을 향하지요.
그런데 의외로 나름대로 믿음 있다, 일꾼이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충성한다고 하는 사람 중에 중한 육체의 일을 범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도 처음부터 중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큰 죄는 아니니까.’ 하면서 작은 육의 것들을 허용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됐지요. 마음과 생각에 육을 허용하는 만큼 성령 충만함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육을 허용했기에 처음 받은 은혜가 떨어졌고, 첫사랑을 잃어버렸으며, 기도하는 게 싫어졌고, 예배드리는 것이 해이해졌으며, 자꾸 마음이 세상 것만 추구하게 되고,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게 됐지요.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쌓이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귀가 둔해지며 죄를 경계하는 마음이 무뎌져서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큰 죄까지 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 첫사랑의 뜨거움을 체험했을 때는 온 마음과 생각을 영의 일들로 채웠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잃지 않으려면 전에 취하던 작은 육의 일들도 하나하나 끊고, 여가 시간에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런 열정이 식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져 올수록 더 열정이 뜨거워져야 하지 결코 제자리걸음 한다든가 식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영의 일들입니다. ‘어찌하면 말씀을 더 무장할까, 어찌하면 더 기도할까, 어찌하면 속히 변화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까, 어찌하면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고 충만함을 줄까.’ 이런 영의 일들만 생각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잠들기 전에도 하나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을 변화시키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은혜를 끼칠 생각을 해야지요. 영의 일들만 생각하며 영의 것으로 마음을 채워 나가면 성령 충만함을 잃지 않습니다. 동행하시며 보장하시는 주님을 늘 체험하기에 허전함이나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지요. 어찌하든 변화되어 성결을 이루고 사명 감당 잘하여 많은 열매를 낼까 힘쓰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항상 영의 일만 생각해 날마다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3.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저도 가장 소중한 것을 주께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순종하는 일꾼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이 되면 온갖 육신의 생각들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아니, 이삭을 통해 후손을 번성케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그 언약의 말씀을 번복하시는가?’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 속에 충만함이 떨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원망과 서운한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자기 의와 틀과 생각에 맞을 때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심도, 육신의 생각도 버려야 하지요. 아무리 순종하겠다고 결심해도 육이 있으면 불순종이 나옵니다. 충분히 순종할 수 있는 일조차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고 이유를 대면서 불순종하지요. 그러니 자기 한계 속에서만 순종합니다.
가령 “영의 일만 생각하라.” 하면 그 순간에는 “아멘”으로 화답하고 “영의 일만 생각하게 하소서.”라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구습대로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도 차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들어 육을 취해 나가는데도 깨우치지 못하지요. 들은 말씀은 있고 기도한 것이 있어서 마음에 찔림은 되지만 “이것쯤이야. 큰 죄는 아니니까.” 하며 넘어가 버립니다.
이처럼 죄에 대해 단호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끊지 못하면 신앙이 정체되거나 퇴보할 수밖에 없고 더 정진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결여가 있어도 채울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도 없지요.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가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가장 빠른 길은 진리에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고 진리대로만 행하면 됩니다. 이렇게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주의 손을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 인도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고 인내로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공의 길을 아무리 알아도 게으름과 정욕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정작 그 길로 갈 수가 없지요. 이런 사람 중에서도 종종 극적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방탕하여 구제 불능의 삶을 살던 사람이 큰 위험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에는 하루아침에 변화되어 반듯하고 성실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공부를 전혀 안 하고 놀기만 하던 학생이 어떤 일로 충격받아 밤낮으로 공부해서 우등생이 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을 보면 주변에서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제 2024년을 맞아 옛 구습을 벗고 더욱 새롭게 변화되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당당히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날마다 새로워져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2) 영의 일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3)
2.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뜻을 써 보세요.
3. ( ) 안에 알맞은 성경 말씀을 넣어 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 )”(고린도전서 15:31)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육과 영
영적으로 ‘육’이란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며 결국 없어지는 것, 비진리, 추하고 더러운 것의 총칭이다. 반면에 ‘영’이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교육목표 :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며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이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장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이렇게 날마다 새로워져야만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며(고전 15:31) 신속히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진리의 사람으로 새로워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사심이 있으면 상대를 힘들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낼 수가 없지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일꾼이라면 육의 정과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특히 주의 종이라면 부모나 자녀, 육의 가족보다 맡은 양 떼들을 더 귀히 여겨야 하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으려면 탐심은 물론이고 자존심이나 교만도 버려야 하고, 명예욕, 권세욕도 버려야 합니다. 나를 잘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누구를 대한다 해도 태도와 안색이 달라져서도 안 되지요.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사심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핑계가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일하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했다.” 하지요. 가령, 성도들에게 이러이러한 용도로 예물을 모으자 하거나 야외로 나가 어떤 모임을 하자고 합니다. 굳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이런 일을 추진했다.” 하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굳이 일을 벌이지요.
어떤 행사를 치를 때도 성도들의 입장과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진행합니다. 이럴 때는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 되기 쉽지 않고 그 열매도 육의 열매가 나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고집하면서 자기 사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혹여 나는 어떤 일을 하거나 말 한마디 속에도 ‘주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내 의욕이 앞서고 내 공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아닌지, 섬김받으려는 마음은 아닌지, 내 유익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자신을 면밀히 점검하여 정결하게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2.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영의 일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 것을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말로는 영을 사모한다고 하면서 그 마음과 생각이 육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시선이 육의 것을 향하지요.
그런데 의외로 나름대로 믿음 있다, 일꾼이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충성한다고 하는 사람 중에 중한 육체의 일을 범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도 처음부터 중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큰 죄는 아니니까.’ 하면서 작은 육의 것들을 허용하는 데서 문제가 시작됐지요. 마음과 생각에 육을 허용하는 만큼 성령 충만함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육을 허용했기에 처음 받은 은혜가 떨어졌고, 첫사랑을 잃어버렸으며, 기도하는 게 싫어졌고, 예배드리는 것이 해이해졌으며, 자꾸 마음이 세상 것만 추구하게 되고, 세상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게 됐지요.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쌓이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귀가 둔해지며 죄를 경계하는 마음이 무뎌져서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큰 죄까지 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 첫사랑의 뜨거움을 체험했을 때는 온 마음과 생각을 영의 일들로 채웠을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잃지 않으려면 전에 취하던 작은 육의 일들도 하나하나 끊고, 여가 시간에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런 열정이 식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워져 올수록 더 열정이 뜨거워져야 하지 결코 제자리걸음 한다든가 식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항상 생각하고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영의 일들입니다. ‘어찌하면 말씀을 더 무장할까, 어찌하면 더 기도할까, 어찌하면 속히 변화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까, 어찌하면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고 충만함을 줄까.’ 이런 영의 일들만 생각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잠들기 전에도 하나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을 변화시키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은혜를 끼칠 생각을 해야지요. 영의 일들만 생각하며 영의 것으로 마음을 채워 나가면 성령 충만함을 잃지 않습니다. 동행하시며 보장하시는 주님을 늘 체험하기에 허전함이나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지요. 어찌하든 변화되어 성결을 이루고 사명 감당 잘하여 많은 열매를 낼까 힘쓰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항상 영의 일만 생각해 날마다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3. 날마다 새로워지려면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저도 가장 소중한 것을 주께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은 쉽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순종하는 일꾼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입장이 되면 온갖 육신의 생각들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아니, 이삭을 통해 후손을 번성케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그 언약의 말씀을 번복하시는가?’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 속에 충만함이 떨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원망과 서운한 마음을 품기도 합니다.
자기 의와 틀과 생각에 맞을 때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그대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심도, 육신의 생각도 버려야 하지요. 아무리 순종하겠다고 결심해도 육이 있으면 불순종이 나옵니다. 충분히 순종할 수 있는 일조차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고 이유를 대면서 불순종하지요. 그러니 자기 한계 속에서만 순종합니다.
가령 “영의 일만 생각하라.” 하면 그 순간에는 “아멘”으로 화답하고 “영의 일만 생각하게 하소서.”라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구습대로 육신의 생각을 하면서도 차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 속에 빠져들어 육을 취해 나가는데도 깨우치지 못하지요. 들은 말씀은 있고 기도한 것이 있어서 마음에 찔림은 되지만 “이것쯤이야. 큰 죄는 아니니까.” 하며 넘어가 버립니다.
이처럼 죄에 대해 단호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끊지 못하면 신앙이 정체되거나 퇴보할 수밖에 없고 더 정진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결여가 있어도 채울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도 없지요.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가고 성령의 음성을 듣는 가장 빠른 길은 진리에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유와 핑계를 대지 않고 진리대로만 행하면 됩니다. 이렇게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주의 손을 붙잡고 한걸음, 한걸음 인도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고 인내로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공의 길을 아무리 알아도 게으름과 정욕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정작 그 길로 갈 수가 없지요. 이런 사람 중에서도 종종 극적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방탕하여 구제 불능의 삶을 살던 사람이 큰 위험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에는 하루아침에 변화되어 반듯하고 성실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공부를 전혀 안 하고 놀기만 하던 학생이 어떤 일로 충격받아 밤낮으로 공부해서 우등생이 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을 보면 주변에서 “전혀 딴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이제 2024년을 맞아 옛 구습을 벗고 더욱 새롭게 변화되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당당히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날마다 새로워져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2) 영의 일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3)
2.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뜻을 써 보세요.
3. ( ) 안에 알맞은 성경 말씀을 넣어 보세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 )”(고린도전서 15:31)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육과 영
영적으로 ‘육’이란 시간이 흐르면 썩고 변질되며 결국 없어지는 것, 비진리, 추하고 더러운 것의 총칭이다. 반면에 ‘영’이란 죽거나 썩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 영원한 것으로 생명이요, 진리 자체를 말한다.
2023-12-22
제51과주님의 사랑
이사야 53:7
읽을말씀 : 이사야 53:7 | 외울말씀 : 이사야 53:7 | 참고 말씀: 요한복음 15:13
교육목표 :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리는 성탄절은 우리에게 너무나 행복하고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말씀합니다. 이 안에는 예수님께서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가장 잔혹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며 온갖 멸시와 핍박을 감내하셨습니다. 이러한 주의 사랑을 더 깊이 느끼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의 의미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공의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 된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반드시 공의의 값을 치러야 했지요. 즉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에 죄를 지으면 반드시 사망, 곧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죄인으로서 영계의 법에 따라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의 저주를 끊어 주시고자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공의의 값을 치른다는 것이 비단 십자가의 사건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부터가 그 모든 공의를 이루는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근본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동일한 영광과 권능을 가지셨지요. 그럼에도 사람의 몸에 그 신성을 가두시고 육의 공간의 한계들을 철저히 겪어 가셨습니다. 호화로운 왕궁에서 태어나 안락한 침대에 누이신 것도 아니었고,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지요. 죄인들을 살리는 ‘참된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영화를 가진 부유한 분이지만 인간의 가난을 대속하기 위해 가난하게 나셔야 했습니다. 육의 사람들처럼 굶주림과 피곤함, 슬픔과 고통도 느끼셔야 했지요. 자신이 언제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십자가의 사역을 쉽게 감당하셨을 거야.” 하지만 죄 사함의 공의를 충족시키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값을 치르며 공의를 채워 가셨습니다. 장차 임할 십자가의 고난을 잘 아셨지만, 구원의 길이 열리는 그 영광의 순간을 마음에 그리며 온 생애를 헌신하시고 종국에는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2. 사랑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사역
공의를 이룸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실 만큼 영혼들을 사랑하셨기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이었다는 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맞춰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다면 그 사랑은 육의 사랑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은 심령에 변화와 생명을 주는 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던 여인들이나 함께하는 제자들에게도 늘 자상하게만 대하신 것이 아니었지요. 때로는 사랑하는 이들을 외면하기도 하시고, 호되게 지적과 권면도 하셨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 제삼 일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지요.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하셨을까요? “역시 베드로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가야 한다.” 하시며 베드로를 칭찬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며 호되게 베드로를 꾸짖으셨지요.
왜냐하면 베드로가 사단의 주관을 받고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선한 말,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했지만 사단의 주관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 사단을 향하여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조건 감싸주고 받아주며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참으로 이로운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때로는 아픔도 느낄 수 있고 희생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감내하면서 참된 길을 알려 주고, 그 길을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상대를 기다려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으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습니다. 인생들을 너무 사랑하심으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책망과 권면의 말씀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단 받을 때도 이 사랑을 기억한다면 능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을 수 있지요. 잘하려고 했는데도 책망을 들었다 하여 힘들어하거나 지쳐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이 나를 온전하게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사랑임을 느낌으로써 진리를 마음에 새기는 기회로 삼아 나가게 됩니다.
3. 영광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 이 두 가지로 십자가의 도를 완성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얻으신 열매가 바로 영광이지요.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공의를 완성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셨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했던 자녀들을 무수히 건져 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지요.
예수님께서도 물론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10절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말씀한 대로입니다.
또한 믿음의 자녀들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물며 영, 온 영의 자녀가 나온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큰 영광을 얻으시겠습니까?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은 하나님께 능력, 권세, 권능을 받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땅에 보이는 권능의 역사는 많은 영혼이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하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 증거로 인해 믿는 이들은 원수 마귀 사단의 핍박과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지요. 이처럼 믿음을 지켜 거듭 성장시켜 나가면 결국 영으로, 온 영으로 나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마치 온 세상을 새하얗게 덮은 흰 눈과 같지요.
주님께서는 따스한 사랑으로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쌓이고 그 사랑은 마음 안의 죄를 맑게 씻어 깨끗하게 정화해 주지요.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러한 사랑을 주신 주님께 감사의 고백을 맘껏 올려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 된 영혼들을 ( )하시기 위해서 이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영계의 법칙인 “죄의 삯은 사망”이라 는 ( )의 값을 치러야 했다.
2. ( ) 안에 공통으로 들어갈 단어는 무엇일까요?
공의를 이룸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 )이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서 더 큰 ( )이 없나니” 말씀했다.
3. 여러분에게 12월 25일은 왜 특별한지 함께 은혜를 나눠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단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인 루시퍼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사단은 사람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며, 실질적인 형태는 없다.
루시퍼가 가진 어둠의 능력을 그대로 담고 있어 사람들에게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갖게 한다. 마치 공중에 수없이 퍼져 있는 전파와 같이 어둠의 능력을 공중에 퍼뜨린다.
교육목표 :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리는 성탄절은 우리에게 너무나 행복하고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말씀합니다. 이 안에는 예수님께서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가장 잔혹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며 온갖 멸시와 핍박을 감내하셨습니다. 이러한 주의 사랑을 더 깊이 느끼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의 의미를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공의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 된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반드시 공의의 값을 치러야 했지요. 즉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에 죄를 지으면 반드시 사망, 곧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죄인으로서 영계의 법에 따라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의 저주를 끊어 주시고자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공의의 값을 치른다는 것이 비단 십자가의 사건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부터가 그 모든 공의를 이루는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근본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동일한 영광과 권능을 가지셨지요. 그럼에도 사람의 몸에 그 신성을 가두시고 육의 공간의 한계들을 철저히 겪어 가셨습니다. 호화로운 왕궁에서 태어나 안락한 침대에 누이신 것도 아니었고,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지요. 죄인들을 살리는 ‘참된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영화를 가진 부유한 분이지만 인간의 가난을 대속하기 위해 가난하게 나셔야 했습니다. 육의 사람들처럼 굶주림과 피곤함, 슬픔과 고통도 느끼셔야 했지요. 자신이 언제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십자가의 사역을 쉽게 감당하셨을 거야.” 하지만 죄 사함의 공의를 충족시키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값을 치르며 공의를 채워 가셨습니다. 장차 임할 십자가의 고난을 잘 아셨지만, 구원의 길이 열리는 그 영광의 순간을 마음에 그리며 온 생애를 헌신하시고 종국에는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2. 사랑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사역
공의를 이룸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실 만큼 영혼들을 사랑하셨기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이었다는 점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맞춰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다면 그 사랑은 육의 사랑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은 심령에 변화와 생명을 주는 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던 여인들이나 함께하는 제자들에게도 늘 자상하게만 대하신 것이 아니었지요. 때로는 사랑하는 이들을 외면하기도 하시고, 호되게 지적과 권면도 하셨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 제삼 일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지요.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하셨을까요? “역시 베드로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이 길을 가야 한다.” 하시며 베드로를 칭찬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며 호되게 베드로를 꾸짖으셨지요.
왜냐하면 베드로가 사단의 주관을 받고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선한 말,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했지만 사단의 주관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 사단을 향하여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무조건 감싸주고 받아주며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참으로 이로운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때로는 아픔도 느낄 수 있고 희생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감내하면서 참된 길을 알려 주고, 그 길을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상대를 기다려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으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습니다. 인생들을 너무 사랑하심으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책망과 권면의 말씀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단 받을 때도 이 사랑을 기억한다면 능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않을 수 있지요. 잘하려고 했는데도 책망을 들었다 하여 힘들어하거나 지쳐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이 나를 온전하게 이끌어 가시는 주님의 사랑임을 느낌으로써 진리를 마음에 새기는 기회로 삼아 나가게 됩니다.
3. 영광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 이 두 가지로 십자가의 도를 완성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얻으신 열매가 바로 영광이지요.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공의를 완성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셨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했던 자녀들을 무수히 건져 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지요.
예수님께서도 물론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10절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말씀한 대로입니다.
또한 믿음의 자녀들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물며 영, 온 영의 자녀가 나온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큰 영광을 얻으시겠습니까?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은 하나님께 능력, 권세, 권능을 받아 행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땅에 보이는 권능의 역사는 많은 영혼이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하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 증거로 인해 믿는 이들은 원수 마귀 사단의 핍박과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지요. 이처럼 믿음을 지켜 거듭 성장시켜 나가면 결국 영으로, 온 영으로 나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마치 온 세상을 새하얗게 덮은 흰 눈과 같지요.
주님께서는 따스한 사랑으로 우리의 허다한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쌓이고 그 사랑은 마음 안의 죄를 맑게 씻어 깨끗하게 정화해 주지요.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러한 사랑을 주신 주님께 감사의 고백을 맘껏 올려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 된 영혼들을 ( )하시기 위해서 이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영계의 법칙인 “죄의 삯은 사망”이라 는 ( )의 값을 치러야 했다.
2. ( ) 안에 공통으로 들어갈 단어는 무엇일까요?
공의를 이룸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 )이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 서 더 큰 ( )이 없나니” 말씀했다.
3. 여러분에게 12월 25일은 왜 특별한지 함께 은혜를 나눠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단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인 루시퍼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사단은 사람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며, 실질적인 형태는 없다.
루시퍼가 가진 어둠의 능력을 그대로 담고 있어 사람들에게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갖게 한다. 마치 공중에 수없이 퍼져 있는 전파와 같이 어둠의 능력을 공중에 퍼뜨린다.
2023-12-15
제50과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면
마태복음 5:13~16
읽을말씀 : 마태복음 5:13~16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13 | 참고 말씀: 잠언 8:17
교육목표 :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아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한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시며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영적으로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밝은 빛으로 인도하려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자신을 온전히 녹여서 맛을 내듯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낮추고 진실한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빛이 되어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요?
1. 말과 행동에 온전함이 있어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타인에게 가장 먼저 비치는 부분입니다. 말과 행동이 온전해야 많은 사람 앞에 빛이 될 수 있으며 그들을 깨우쳐 줄 수 있습니다. 잠언 15장 4절에도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영적으로 ‘온량’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선한 것으로 온전한 양이 채워진 것’을 뜻하지요. 나무로 비유하면 선으로 온전히 맺혀진 잘 익은 열매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온량한 혀’란, ‘선 속에서 잘 익어 맺혀진 말을 하는 혀’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하고 말도 온전하면 누구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의 주위에는 악한 것이 사라지니 평안해지며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이는 빛이 임하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온량한 혀를 가졌다면 그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인해 전도 대상자의 마음과 생각, 환경에서 어둠이 물러갑니다. 그리하여 복음을 듣고 영생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이란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어둠은 사라지고 주위에 생명이 됩니다. ‘온량한 혀’, ‘온량한 말’이 바로 이런 빛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도 거하는 곳곳에서 온량함의 빛을 비추면 자연히 주위의 어둠은 물러가고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차츰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습니다.
반면에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패려하다는 것은 ‘말이나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고 사나운 것’을 말합니다. 정도를 넘는 부도덕한 말이나 행동, 곧 패려한 말이나 행동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전도하다가도 혹여 상대가 마음 상할 말이나 행동이 나오지 않았는지요? 절제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인해 전도의 문이 막힌다거나 많은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전도할 때뿐 아니라 평소에 자기 모습 속에서도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 입장만 강하게 고집하지는 않았는지요? 험악한 말이나 은연중에 상대를 하대(下待)하는 교만한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요? 이런 사람은 누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이 온전함으로 인하여서 많은 사람에게 칭송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다. 저 사람을 보니 나도 교회에 가고 싶다.” 또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볼 때도 “참 은혜가 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면 어떤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유익이 되는 말인지, 내가 꼭 해야 하는 말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 어떤 것을 행할 때도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행실로 나와야 하지요. 말과 행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 영의 마음이 되는 만큼 영의 말, 영의 행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감정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하며 거친 행동이 나온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기도 어렵습니다. 선한 영의 마음을 소유하여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 나온 선한 말이 상대에게도 감동을 주며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란 하나님을 만나 축복받은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가난하고 질병으로 고통받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유해지고 건강해졌습니다. 예전에는 얽히고설킨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니 형통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주님을 믿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사랑받는 증거들이 나타나야 믿지 않는 사람뿐만 아니라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굴에 우울함과 근심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받는다. 교회 다니면 행복하다.” 말할 수 없지요. 가난과 어려움에 찌들어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받는다.” 전할 수 있겠는지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랑받고 축복받은 증거들이 있어야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있으려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하신 대로 먼저는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라고 인정하실 만큼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혼이 잘된 사람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영의 사람이지요. 자기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을 정도로 진리인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무엇이든지 담대하게 구하여 응답받습니다(요일 3:21~22).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방법들이 잘 나와 있습니다. 잠언 8장 17절에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셨지요. 그러므로 계명들을 지키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여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넘쳐남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3. 서로 간에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지요. 또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셨습니다(요 13:14~15, 35).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여러분 안에 사랑이 넘치고, 사랑의 아름다운 표현 중의 하나인 서로 섬기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고 외치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를 대신해서 죽게 하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 주셨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 안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과 분쟁, 불편함이 있다면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어찌 저럴까?”라는 비난의 말을 들을 수 있지요.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서로 살펴 주고 섬기는 사랑의 관계가 잘 형성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항상 정도를 걷되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 되어야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① 말과 행동에 ( )이 있어야 한다.
② 하나님의 사랑받는 ( )가 있어야 한다.
③ 서로 간에 ( )이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성령의 소욕
성령의 소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리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욕구를 말한다(갈 5:16~17). 곧 성령으로 영을 낳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에 거하시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알려 주시고, 육체의 소욕을 좇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행하도록 이끄신다. 이렇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성령으로 영을 낳아가는 만큼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마음에 평안함과 즐거움이 임한다.
반대로 육체의 소욕을 좇으면 성령이 탄식하시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잃게 되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힘도 점점 약해진다.
교육목표 :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아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한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시며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영적으로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밝은 빛으로 인도하려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자신을 온전히 녹여서 맛을 내듯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을 낮추고 진실한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빛이 되어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요?
1. 말과 행동에 온전함이 있어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타인에게 가장 먼저 비치는 부분입니다. 말과 행동이 온전해야 많은 사람 앞에 빛이 될 수 있으며 그들을 깨우쳐 줄 수 있습니다. 잠언 15장 4절에도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영적으로 ‘온량’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선한 것으로 온전한 양이 채워진 것’을 뜻하지요. 나무로 비유하면 선으로 온전히 맺혀진 잘 익은 열매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온량한 혀’란, ‘선 속에서 잘 익어 맺혀진 말을 하는 혀’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하고 말도 온전하면 누구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의 주위에는 악한 것이 사라지니 평안해지며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이는 빛이 임하면 어둠이 물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온량한 혀를 가졌다면 그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인해 전도 대상자의 마음과 생각, 환경에서 어둠이 물러갑니다. 그리하여 복음을 듣고 영생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이란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어둠은 사라지고 주위에 생명이 됩니다. ‘온량한 혀’, ‘온량한 말’이 바로 이런 빛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도 거하는 곳곳에서 온량함의 빛을 비추면 자연히 주위의 어둠은 물러가고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차츰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습니다.
반면에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패려하다는 것은 ‘말이나 행동이 도리에 어긋나고 사나운 것’을 말합니다. 정도를 넘는 부도덕한 말이나 행동, 곧 패려한 말이나 행동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에 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전도하다가도 혹여 상대가 마음 상할 말이나 행동이 나오지 않았는지요? 절제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인해 전도의 문이 막힌다거나 많은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전도할 때뿐 아니라 평소에 자기 모습 속에서도 상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 입장만 강하게 고집하지는 않았는지요? 험악한 말이나 은연중에 상대를 하대(下待)하는 교만한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요? 이런 사람은 누구를 생명으로 인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이 온전함으로 인하여서 많은 사람에게 칭송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다. 저 사람을 보니 나도 교회에 가고 싶다.” 또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볼 때도 “참 은혜가 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면 어떤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유익이 되는 말인지, 내가 꼭 해야 하는 말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 어떤 것을 행할 때도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행실로 나와야 하지요. 말과 행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 영의 마음이 되는 만큼 영의 말, 영의 행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감정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말을 하며 거친 행동이 나온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기도 어렵습니다. 선한 영의 마음을 소유하여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 나온 선한 말이 상대에게도 감동을 주며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란 하나님을 만나 축복받은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가난하고 질병으로 고통받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유해지고 건강해졌습니다. 예전에는 얽히고설킨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니 형통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증거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이 주님을 믿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사랑받는 증거들이 나타나야 믿지 않는 사람뿐만 아니라 믿음이 적은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굴에 우울함과 근심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받는다. 교회 다니면 행복하다.” 말할 수 없지요. 가난과 어려움에 찌들어 있으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받는다.” 전할 수 있겠는지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랑받고 축복받은 증거들이 있어야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있으려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하신 대로 먼저는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라고 인정하실 만큼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영혼이 잘된 사람은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영의 사람이지요. 자기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을 정도로 진리인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무엇이든지 담대하게 구하여 응답받습니다(요일 3:21~22).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방법들이 잘 나와 있습니다. 잠언 8장 17절에도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셨지요. 그러므로 계명들을 지키며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여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넘쳐남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3. 서로 간에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지요. 또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셨습니다(요 13:14~15, 35).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이 여러분 안에 사랑이 넘치고, 사랑의 아름다운 표현 중의 하나인 서로 섬기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고 외치는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를 대신해서 죽게 하시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증거를 보여 주셨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 안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과 분쟁, 불편함이 있다면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어찌 저럴까?”라는 비난의 말을 들을 수 있지요.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서로 살펴 주고 섬기는 사랑의 관계가 잘 형성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항상 정도를 걷되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 되어야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① 말과 행동에 ( )이 있어야 한다.
② 하나님의 사랑받는 ( )가 있어야 한다.
③ 서로 간에 ( )이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성령의 소욕
성령의 소욕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리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욕구를 말한다(갈 5:16~17). 곧 성령으로 영을 낳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에 거하시며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알려 주시고, 육체의 소욕을 좇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행하도록 이끄신다. 이렇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성령으로 영을 낳아가는 만큼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마음에 평안함과 즐거움이 임한다.
반대로 육체의 소욕을 좇으면 성령이 탄식하시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잃게 되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힘도 점점 약해진다.
2023-12-08
제49과신뢰
마태복음 16:16
읽을말씀 : 마태복음 16:16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6:16 |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2:13
교육목표 :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우쳐 나감으로 주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지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다가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당시 바리새인이나 악한 사람들은 선만 행하시고 권능을 베푸시는 예수님께 “미혹하는 자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지폈다.” 하며 악한 말로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악한 자들의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선한 말만 전해 드리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당당히 고백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시며 베드로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심을 알려 주십니다. 베드로처럼 주님과 온전한 신뢰 관계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은 범사에 자기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유익을 좇아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기준이 맞을 리가 없지요. 옳은 일을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고 선한 일을 악하다고 오해하면서도 자기 생각이 틀린 줄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 호감을 느끼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인사를 잘 받아 주지 않고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이때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나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나? 오해하나? 아주 무례한 사람이네….’ 하면서 상대를 좋게 여겼던 마음이 순식간에 변합니다. 이는 자기 마음이 간사하고 변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누군가 그렇지 않을 거라고 권면해도 “내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척하면 척이야.” 하며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지요.
성경에도 보면 자신의 악으로 선한 일을 비난하다가 저주받은 다윗 왕의 첫째 부인 미갈이 나옵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올 때 너무 기뻐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미갈은 왕이 품위 없이 천한 행동을 한다며 비난했지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가까이 두게 되었으니, 다윗은 너무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만일 미갈의 마음이 선했다면 다윗과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갈은 자기 악함과 교만 속에 다윗이 행한 선을 악이라고 판단 정죄하므로 저주를 받고 말았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한 사역을 악하게만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0절 이하를 보면 18년 동안 귀신 들려 꼬부라진 채로 살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를 본 회당장은 율법을 잘 안다고 하면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지요.
회당장은 하나님 권능이 나타났다는 것도,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것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만일 회당장 자신이 치료받았다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싫어했을까요? 그만큼 사랑과 선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의와 틀에 맞춰 판단 정죄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했던 것입니다.
주님과 온전한 신뢰를 이루려면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라는 말씀처럼(고전 2:13) 영의 생각을 해야 영의 마음을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선하다고 깨닫지 못하게 하는 악을 발견하여 철저히 깨뜨려 버리고 영의 생각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야 합니다
악을 버리고 육신의 생각을 버리는 만큼 성령의 주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우칠 수 있지요. 성령은 내 마음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마음을 더럽히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를 보면,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며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전혀 서운해하지 않고 더욱 자신을 낮추며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비하게 끝까지 매달리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시며 즉시 그녀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은 이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사랑도 없으시네.”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선과 사랑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저렇게 하시는 이유가 뭘까?” 선한 마음으로 궁구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일 여인이 자존심을 내세웠다면 예수님께 서운함을 품을 수도 있고 낙심해 응답받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응답받을 믿음이 있었기에 변함없이 선한 고백으로 매달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게 하셔서 응답받을 만한 공의의 분량을 채우게 하신 것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사람은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성령으로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도 깊이가 서로 다릅니다. 성령의 역사를 좀 더 밝히 받는다면 예수님의 뜻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지요. 곧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이미 아셨기에 이러한 사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깨우침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대대로 응답받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무슨 대단한 모욕을 받은 것도 아닌데 조금만 마음 상하는 일을 겪으면 변개해 버리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도 참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해 이 여인의 겸비한 고백을 끌어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도우심 속에 선한 마음으로 궁구하면 예수님의 마음과 뜻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 선하신 뜻을 깨우쳐 나가는 만큼 예수님에 대한 신뢰도 더 깊어지지요. 가령 당회장님께서 어떤 분을 칭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칭찬을 통해 더 힘을 받고 열심히 달려가기를 원해서이지요. 또한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목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 떼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부족함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믿고 온전히 변화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면 당회장님 편에서는 그분을 위해 믿음과 사랑의 고백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심어드리는 것이지요.
성령의 역사를 받아 가는 분들은 사소한 일 하나에서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깨달아 나갑니다. 그럴수록 신뢰와 사랑이 더해지며 “나도 그 사랑을 의지하여 영의 깊은 차원으로 곧 들어가리라.”는 고백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되지요.
3. 사랑이 커지는 만큼 신뢰도 커집니다
베드로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겪은 후에는 그 사랑의 차원이 바뀌었지요. 너무나 사랑하던 스승이 더구나 선하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눈앞에서 참혹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예수님을 지켜드리기는커녕 모른다고 부인했고, 심지어 저주하는 말까지 내고 말았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어떤 책망도 없이 묵묵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지요. 이를 목도한 후 베드로의 사랑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그 사랑이 깊어진 만큼 주님에 대한 신뢰도 커졌습니다. 전에는 어린 여종 앞에서도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살기등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도 담대히 복음을 외쳤습니다.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할 때도 그 신뢰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지요. ‘정말 주님께서 부활하셨나? 왜 하나님께서 나를 안 지켜 주시지? 내가 왜 이런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뜨거운 사랑과 굳건한 신뢰 속에 영광스러운 순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처럼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고 선한 마음을 이룸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신뢰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는 참된 신뢰 관계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가 주님과 참된 신뢰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둘째,
셋째, 사랑이 커지는 만큼 신뢰도 커집니다.
2.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매정하게 개 취급하신 이유가 아닌 것은?
① 여인에게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게 하셔서 응답받을 만한 공의의 분량을 채우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② 이방 여인은 치료해 주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③ 응답받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참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미갈
미갈은 사울 왕의 둘째 딸로 다윗의 첫째 부인이다. 사울 왕은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개를 가져오는 조건으로 다윗에게 미갈과의 결혼을 제안했다(삼상 18:21~25). 이에 다윗은 양피 200개를 가져와 그녀를 아내로 얻는다. 미갈은 다윗성에 법궤가 들어오던 날 기뻐서 춤추는 다윗을 보고 업신여김으로 저주받아 석녀가 되었다(삼하 6:16~23).
교육목표 :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우쳐 나감으로 주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지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다가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당시 바리새인이나 악한 사람들은 선만 행하시고 권능을 베푸시는 예수님께 “미혹하는 자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지폈다.” 하며 악한 말로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악한 자들의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선한 말만 전해 드리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당당히 고백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시며 베드로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심을 알려 주십니다. 베드로처럼 주님과 온전한 신뢰 관계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육신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은 범사에 자기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유익을 좇아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기준이 맞을 리가 없지요. 옳은 일을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고 선한 일을 악하다고 오해하면서도 자기 생각이 틀린 줄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 호감을 느끼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인사를 잘 받아 주지 않고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이때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나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나? 오해하나? 아주 무례한 사람이네….’ 하면서 상대를 좋게 여겼던 마음이 순식간에 변합니다. 이는 자기 마음이 간사하고 변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누군가 그렇지 않을 거라고 권면해도 “내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척하면 척이야.” 하며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지요.
성경에도 보면 자신의 악으로 선한 일을 비난하다가 저주받은 다윗 왕의 첫째 부인 미갈이 나옵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올 때 너무 기뻐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미갈은 왕이 품위 없이 천한 행동을 한다며 비난했지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가까이 두게 되었으니, 다윗은 너무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만일 미갈의 마음이 선했다면 다윗과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갈은 자기 악함과 교만 속에 다윗이 행한 선을 악이라고 판단 정죄하므로 저주를 받고 말았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한 사역을 악하게만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0절 이하를 보면 18년 동안 귀신 들려 꼬부라진 채로 살던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를 본 회당장은 율법을 잘 안다고 하면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지요.
회당장은 하나님 권능이 나타났다는 것도,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것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만일 회당장 자신이 치료받았다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싫어했을까요? 그만큼 사랑과 선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의와 틀에 맞춰 판단 정죄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했던 것입니다.
주님과 온전한 신뢰를 이루려면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라는 말씀처럼(고전 2:13) 영의 생각을 해야 영의 마음을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선한 것을 선하다고 깨닫지 못하게 하는 악을 발견하여 철저히 깨뜨려 버리고 영의 생각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야 합니다
악을 버리고 육신의 생각을 버리는 만큼 성령의 주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우칠 수 있지요. 성령은 내 마음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마음을 더럽히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를 보면,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며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전혀 서운해하지 않고 더욱 자신을 낮추며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비하게 끝까지 매달리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시며 즉시 그녀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은 이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사랑도 없으시네.”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선과 사랑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저렇게 하시는 이유가 뭘까?” 선한 마음으로 궁구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만일 여인이 자존심을 내세웠다면 예수님께 서운함을 품을 수도 있고 낙심해 응답받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응답받을 믿음이 있었기에 변함없이 선한 고백으로 매달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이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게 하셔서 응답받을 만한 공의의 분량을 채우게 하신 것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사람은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성령으로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도 깊이가 서로 다릅니다. 성령의 역사를 좀 더 밝히 받는다면 예수님의 뜻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지요. 곧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이미 아셨기에 이러한 사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깨우침을 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대대로 응답받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무슨 대단한 모욕을 받은 것도 아닌데 조금만 마음 상하는 일을 겪으면 변개해 버리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도 참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해 이 여인의 겸비한 고백을 끌어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도우심 속에 선한 마음으로 궁구하면 예수님의 마음과 뜻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 선하신 뜻을 깨우쳐 나가는 만큼 예수님에 대한 신뢰도 더 깊어지지요. 가령 당회장님께서 어떤 분을 칭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칭찬을 통해 더 힘을 받고 열심히 달려가기를 원해서이지요. 또한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목자로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 떼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부족함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고 믿고 온전히 변화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면 당회장님 편에서는 그분을 위해 믿음과 사랑의 고백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심어드리는 것이지요.
성령의 역사를 받아 가는 분들은 사소한 일 하나에서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깨달아 나갑니다. 그럴수록 신뢰와 사랑이 더해지며 “나도 그 사랑을 의지하여 영의 깊은 차원으로 곧 들어가리라.”는 고백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되지요.
3. 사랑이 커지는 만큼 신뢰도 커집니다
베드로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겪은 후에는 그 사랑의 차원이 바뀌었지요. 너무나 사랑하던 스승이 더구나 선하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눈앞에서 참혹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예수님을 지켜드리기는커녕 모른다고 부인했고, 심지어 저주하는 말까지 내고 말았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어떤 책망도 없이 묵묵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지요. 이를 목도한 후 베드로의 사랑은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그 사랑이 깊어진 만큼 주님에 대한 신뢰도 커졌습니다. 전에는 어린 여종 앞에서도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살기등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도 담대히 복음을 외쳤습니다.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할 때도 그 신뢰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지요. ‘정말 주님께서 부활하셨나? 왜 하나님께서 나를 안 지켜 주시지? 내가 왜 이런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뜨거운 사랑과 굳건한 신뢰 속에 영광스러운 순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처럼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고 선한 마음을 이룸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신뢰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는 참된 신뢰 관계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가 주님과 참된 신뢰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둘째,
셋째, 사랑이 커지는 만큼 신뢰도 커집니다.
2.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매정하게 개 취급하신 이유가 아닌 것은?
① 여인에게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게 하셔서 응답받을 만한 공의의 분량을 채우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② 이방 여인은 치료해 주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③ 응답받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참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미갈
미갈은 사울 왕의 둘째 딸로 다윗의 첫째 부인이다. 사울 왕은 블레셋 사람의 양피 100개를 가져오는 조건으로 다윗에게 미갈과의 결혼을 제안했다(삼상 18:21~25). 이에 다윗은 양피 200개를 가져와 그녀를 아내로 얻는다. 미갈은 다윗성에 법궤가 들어오던 날 기뻐서 춤추는 다윗을 보고 업신여김으로 저주받아 석녀가 되었다(삼하 6:16~23).
2023-12-01
제48과네 믿은 대로 되어라
마태복음 8:13
읽을말씀 : 마태복음 8:1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8:13 | 참고 말씀: 요한일서 3:21~22
교육목표 : 주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백부장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과 환난이 왔을 때나 응답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것 같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였기에 아무리 어렵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응답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1. 근본의 소리에 순종하는 모든 피조물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니 식물이 창조되었고,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하시니 해와 달과 별들이 창조되었습니다.
이처럼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근본의 소리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합니다.
오늘날 ‘음성 인식 장치’가 특정한 음성에만 반응하여 작동하는 것처럼, 천지 만물에도 근본의 소리가 배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님께서도 근본의 소리를 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 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말씀한 대로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였지요.
하물며 귀가 있어 들을 수 있고 이성도 있어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발하신 근본의 소리에 즉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아 비진리인 어둠의 일들을 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사람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 지어져 하나님 말씀인 진리만 듣고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는 자유 의지 속에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지요. 로봇처럼 무조건 복종하는 자녀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사단의 꾐에 넘어가 불순종의 죄를 짓고 말았지요.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은 결국 죄의 종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어 악한 영들이 사주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했습니다. 그러니 근본의 소리도 듣지 못할뿐더러 죄에 죄를 더해 가며 사망 곧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즉 속죄 제물로 돌아가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근본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근본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을 지닌 백부장의 믿음
이스라엘 가버나움 지역에 파견된 로마 군대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각색 질병은 물론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등 수많은 사람이 치료받은 소문을 듣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베푸신 예수님에 관한 반응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자기적인 신앙의 단단한 틀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정죄하는 부류도 있었지요.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 제사장, 장로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큰 선지자 정도로만 믿고 따르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또 한 부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마음으로 깨닫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었습니다.
바로 백부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로마 사람인데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4. 시공을 초월한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
마태복음 8장 6절 이하를 보면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근본의 소리를 발하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백부장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습니다. 자기 부모나 형제, 자녀가 아닌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예수님 앞에 직접 찾아왔으니, 예수님께서 어찌 감동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더구나 중풍은 의술로도 치료하기 어려운 중한 질병입니다. 몸의 일부분이 마비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질병을 앓는 기간이 오래되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변함없이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 주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가족이라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하인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했기에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하며 중심에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수고롭게 자기 집에까지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명하시면 하인이 치료받을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하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할 자세였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며 그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시며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곧바로 하인이 나았지요.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니 백부장의 믿음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즉시 응답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하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을 버리면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에게는 다만 말씀만으로도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군대 지휘관이면서도 예수님께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며 온전히 순종할 자세를 지녔기에 즉시 시공을 초월해 응답받은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무생물도 근본의 소리에 순종하는데 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2. 백부장에 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하인을 중심에서 아끼고 사랑했다.
② 예수님께서 하인의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온전히 믿었다.
③ 예수님 앞에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며 온전히 순종할 자세였다.
④ 이스라엘 장교이다.
3. 예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자, 백부장이 그 즉시 시공을 초월한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백부장
1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 군대는 군단들로 조직되었는데 각 군단은 6,000명 정원의 남자들로 구성되었고, 각 군단은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60명의 백부장과 더불어 6개의 보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백부장은 높은 보수를 받았으며 로마 사회에서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근무 연한은 20년이었지만 본인이 원하면 군대에 더 머물 수도 있었다.
교육목표 : 주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백부장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과 환난이 왔을 때나 응답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것 같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곧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였기에 아무리 어렵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응답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1. 근본의 소리에 순종하는 모든 피조물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니 식물이 창조되었고,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하시니 해와 달과 별들이 창조되었습니다.
이처럼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근본의 소리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합니다.
오늘날 ‘음성 인식 장치’가 특정한 음성에만 반응하여 작동하는 것처럼, 천지 만물에도 근본의 소리가 배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님께서도 근본의 소리를 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 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말씀한 대로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였지요.
하물며 귀가 있어 들을 수 있고 이성도 있어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발하신 근본의 소리에 즉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아 비진리인 어둠의 일들을 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사람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 지어져 하나님 말씀인 진리만 듣고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는 자유 의지 속에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지요. 로봇처럼 무조건 복종하는 자녀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사단의 꾐에 넘어가 불순종의 죄를 짓고 말았지요.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은 결국 죄의 종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어 악한 영들이 사주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했습니다. 그러니 근본의 소리도 듣지 못할뿐더러 죄에 죄를 더해 가며 사망 곧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즉 속죄 제물로 돌아가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근본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근본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을 지닌 백부장의 믿음
이스라엘 가버나움 지역에 파견된 로마 군대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각색 질병은 물론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등 수많은 사람이 치료받은 소문을 듣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베푸신 예수님에 관한 반응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자기적인 신앙의 단단한 틀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정죄하는 부류도 있었지요.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 제사장, 장로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큰 선지자 정도로만 믿고 따르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또 한 부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마음으로 깨닫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었습니다.
바로 백부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로마 사람인데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4. 시공을 초월한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
마태복음 8장 6절 이하를 보면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근본의 소리를 발하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백부장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습니다. 자기 부모나 형제, 자녀가 아닌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예수님 앞에 직접 찾아왔으니, 예수님께서 어찌 감동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더구나 중풍은 의술로도 치료하기 어려운 중한 질병입니다. 몸의 일부분이 마비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질병을 앓는 기간이 오래되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변함없이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 주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가족이라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하인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했기에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하며 중심에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수고롭게 자기 집에까지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명하시면 하인이 치료받을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하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할 자세였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며 그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시며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곧바로 하인이 나았지요.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니 백부장의 믿음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즉시 응답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하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을 버리면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에게는 다만 말씀만으로도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 군대 지휘관이면서도 예수님께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며 온전히 순종할 자세를 지녔기에 즉시 시공을 초월해 응답받은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무생물도 근본의 소리에 순종하는데 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2. 백부장에 관한 설명으로 맞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하인을 중심에서 아끼고 사랑했다.
② 예수님께서 하인의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온전히 믿었다.
③ 예수님 앞에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며 온전히 순종할 자세였다.
④ 이스라엘 장교이다.
3. 예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자, 백부장이 그 즉시 시공을 초월한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백부장
1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 군대는 군단들로 조직되었는데 각 군단은 6,000명 정원의 남자들로 구성되었고, 각 군단은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60명의 백부장과 더불어 6개의 보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백부장은 높은 보수를 받았으며 로마 사회에서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근무 연한은 20년이었지만 본인이 원하면 군대에 더 머물 수도 있었다.
2023-11-24
제47과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누가복음 18:41
읽을말씀 : 누가복음 18:41 | 외울말씀 : 예레미야 33:3 | 참고 말씀: 누가복음 22:44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실 때 담대하게 소원을 고백하고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더라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기만 한다면 아무리 크고 어려워 보이는 문제도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자,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자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대답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자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을 붙좇았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은 근본의 소리입니다. 근본의 소리란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리를 뜻하지요. 이처럼 근본의 소리로 하나님 응답을 받으려면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2.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1) 마음 중심에서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을 나타내며 말씀을 확증하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나 뛰고 문둥병이 치료되었으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귀신이 나가는 등 갖가지 질병과 연약함을 고치셨지요. 이러한 소문은 널리 퍼졌고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윗의 자손에게서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는 분임을 마음 중심에서 믿었다는 것이 바로 응답받은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는 비록 눈이 멀어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가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처럼 마음이 선했기에 소문을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2)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
눈먼 사람은 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을까요? 창세기 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죄가 들어오고 육의 사람으로 전락해 땀 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기 위해서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즉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수고를 해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했으며,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에 맞도록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문제를 응답받고자 한다면 어떠해야겠습니까? 따라서 소경이 응답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구했기 때문입니다.
3)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소리 내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도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간절한 심정으로 공의에 맞게 구하였지요. 따라서 소경이 눈을 뜰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다는 점입니다.
만일 소경이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을 때 기분이 상해 낙심했다면 결코 응답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했기에 거기에 굴하지 않고 간절히 부르짖어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해 돌아가 버리거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변함없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4) 겉옷을 내버리는 순종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 소경이 치료받았는데 마가복음 10장 46~52절을 보면 여리고를 떠나실 때도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치료해 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그 주인공이지요.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 질러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오게 하시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왔지요. 그가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기에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겉옷을 내버린 데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거지의 옷은 더럽고 역한 냄새가 나지만 자신의 몸을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추하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는 도저히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께서는 매우 거룩하고 깨끗하신 분으로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치료해 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분임을 알았지요. 그러니 냄새나고 추한 옷을 입고는 그 앞에 나갈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해 겉옷을 내버린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성령 받기 전이었으나 선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자 가장 소중한 겉옷이라도 즉시 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겉옷은 영적으로 우리의 추하고 냄새나는 마음을 뜻합니다. 자존심, 교만 등 온갖 더러운 비진리의 마음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추하고 냄새나는 모든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진정 응답받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는 죄목을 낱낱이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거지 바디매오처럼 성령의 음성으로 주관해 주시는 것에 주저함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소원이 번연히 눈을 뜨는 것인 줄 아시면서도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응답받으려면 반드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술로 믿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지요.
눈먼 사람이 응답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응답을 주시고자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그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니 그대로 응답해 주셨지요.
이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공의에 맞게 합당한 자격을 갖추면 무엇을 구하든지 그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거지 바디매오의 겉옷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2. “겉옷을 내버리고”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예수님께서는 소경 바디매오의 소원이 눈 뜨는 것인 줄 아시면서도 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여리고
요단강 서쪽,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한 여리고는 요단 계곡에 위치한 성읍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어서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점령한 곳이다.
당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해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6일 동안은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고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다. 총 13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함께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수 6장).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실 때 담대하게 소원을 고백하고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더라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기만 한다면 아무리 크고 어려워 보이는 문제도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자,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자 그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대답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자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을 붙좇았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은 근본의 소리입니다. 근본의 소리란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리를 뜻하지요. 이처럼 근본의 소리로 하나님 응답을 받으려면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2.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1) 마음 중심에서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을 나타내며 말씀을 확증하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나 뛰고 문둥병이 치료되었으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귀신이 나가는 등 갖가지 질병과 연약함을 고치셨지요. 이러한 소문은 널리 퍼졌고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윗의 자손에게서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는 분임을 마음 중심에서 믿었다는 것이 바로 응답받은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는 비록 눈이 멀어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가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처럼 마음이 선했기에 소문을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2)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
눈먼 사람은 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을까요? 창세기 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죄가 들어오고 육의 사람으로 전락해 땀 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기 위해서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즉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수고를 해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했으며,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에 맞도록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문제를 응답받고자 한다면 어떠해야겠습니까? 따라서 소경이 응답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구했기 때문입니다.
3)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소리 내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도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간절한 심정으로 공의에 맞게 구하였지요. 따라서 소경이 눈을 뜰 수 있었던 세 번째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다는 점입니다.
만일 소경이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을 때 기분이 상해 낙심했다면 결코 응답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했기에 거기에 굴하지 않고 간절히 부르짖어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해 돌아가 버리거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변함없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4) 겉옷을 내버리는 순종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 소경이 치료받았는데 마가복음 10장 46~52절을 보면 여리고를 떠나실 때도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치료해 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그 주인공이지요.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 질러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오게 하시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왔지요. 그가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기에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겉옷을 내버린 데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거지의 옷은 더럽고 역한 냄새가 나지만 자신의 몸을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재산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추하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는 도저히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께서는 매우 거룩하고 깨끗하신 분으로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치료해 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분임을 알았지요. 그러니 냄새나고 추한 옷을 입고는 그 앞에 나갈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해 겉옷을 내버린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성령 받기 전이었으나 선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자 가장 소중한 겉옷이라도 즉시 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겉옷은 영적으로 우리의 추하고 냄새나는 마음을 뜻합니다. 자존심, 교만 등 온갖 더러운 비진리의 마음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추하고 냄새나는 모든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진정 응답받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는 죄목을 낱낱이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거지 바디매오처럼 성령의 음성으로 주관해 주시는 것에 주저함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소원이 번연히 눈을 뜨는 것인 줄 아시면서도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응답받으려면 반드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술로 믿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지요.
눈먼 사람이 응답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응답을 주시고자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그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니 그대로 응답해 주셨지요.
이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공의에 맞게 합당한 자격을 갖추면 무엇을 구하든지 그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거지 바디매오의 겉옷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2. “겉옷을 내버리고”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예수님께서는 소경 바디매오의 소원이 눈 뜨는 것인 줄 아시면서도 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여리고
요단강 서쪽,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한 여리고는 요단 계곡에 위치한 성읍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어서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점령한 곳이다.
당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해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6일 동안은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고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다. 총 13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함께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수 6장).
2023-11-17
제46과추수감사절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시편 17:8 | 참고 말씀: 레위기 23:42~43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우셨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뤄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축복하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 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지요.
성경에 보면 수장절을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기거합니다.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이지요.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 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풍성한 소산을 주심은 물론, 사건 사고가 많은 이 세상에서 늘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 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가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지요.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오늘날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오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늘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지요.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가 『천국』(상, 하)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많은 성도님이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 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셔서 은혜로 눈물로 이끄신 사랑하는 나의 목자.
사랑으로 애통함으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주신 분,
내 눈에 눈물이 흘러요.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눈이 부셔요.
그 찬란한 빛 내 마음을 감동시켜요. 감사해요. 나의 아버지.
감사해요. 나의 주님.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가기까지
이끄신 내 목자님 이끄신 내 목자님 감사해요.”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다.
2. 올 한 해 영육 간에 여러분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3. 항상 좋은 것만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 불린 이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가나안 땅에서는 목축을 통해 젖을, 산과 나무, 꽃 등에서 꿀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또한 토양과 기후는 포도 재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포도즙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었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역일 뿐 그 외에는 물이 넉넉하지 않고 기온 차도 심해 광야 같은 불모지가 많아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적으로 필요한 땅이다.
따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우셨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뤄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축복하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 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지요.
성경에 보면 수장절을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기거합니다.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이지요.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 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풍성한 소산을 주심은 물론, 사건 사고가 많은 이 세상에서 늘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 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가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지요.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오늘날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오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늘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지요.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가 『천국』(상, 하)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많은 성도님이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 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셔서 은혜로 눈물로 이끄신 사랑하는 나의 목자.
사랑으로 애통함으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주신 분,
내 눈에 눈물이 흘러요.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눈이 부셔요.
그 찬란한 빛 내 마음을 감동시켜요. 감사해요. 나의 아버지.
감사해요. 나의 주님.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가기까지
이끄신 내 목자님 이끄신 내 목자님 감사해요.”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다.
2. 올 한 해 영육 간에 여러분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3. 항상 좋은 것만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 불린 이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가나안 땅에서는 목축을 통해 젖을, 산과 나무, 꽃 등에서 꿀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또한 토양과 기후는 포도 재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포도즙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었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역일 뿐 그 외에는 물이 넉넉하지 않고 기온 차도 심해 광야 같은 불모지가 많아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적으로 필요한 땅이다.
따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2023-11-10
제45과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5~19
읽을말씀 : 마태복음 16:15~1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6:16 | 참고 말씀: 로마서 10:10 ; 야고보서 2:22
교육목표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부부는 평생을 같이 살면서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꼭 그걸 말로 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입술의 고백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백 번, 천 번 말로는 “사랑한다.” 해놓고 정작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 마음에 간직한 것을 상대에게 표현할 때 기쁨이 배가 되고 행복이 넘칩니다. 영적으로도 마음에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입술 고백의 중요성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의에 이르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왜 마음에 믿은 것을 입술로 시인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바로 입술의 고백을 통해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서 믿어지는 믿음 없이 입술로만 “믿습니다.” 하는 사람은 믿음에 대한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믿은 것을 입술로도 고백하는 사람은 행함을 통해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믿음으로 인정하시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시며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2. 입술의 고백을 통해 물 위를 걸은 베드로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무리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제자들은 건너편 벳새다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지요. 그런데 밤 4경(새벽 3시~6시)에 거센 풍랑을 만나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다 위로 누군가 유유히 걸어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자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곧바로 순종하여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들어 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믿음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마음에서 믿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이 고백은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중심에서 예수님을 백 퍼센트 인정하는 믿음이라면 “주여! 주는 무엇이나 하실 수 있나이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기에 “만일 주시어든” 하며 확인하는 듯한 고백을 한 것이지요.
3. 입술의 고백을 통해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마침내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며 물 위를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백을 하지요.
당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메시아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지요. “미쳤다.”, “바알세불 지폈다.”, “미혹하는 자다.”,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 온갖 중상모략과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판단 정죄하는 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이때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지요. 나쁜 소문도 있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힘을 드릴 수 있는 선한 고백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지요. 이때 베드로가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께 “만일 주시어든”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당당히 “주는”이라 고백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 하시며 베드로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축복과 함께 육의 공간 안에서 영의 공간의 일을 펼칠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를 통해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며 죽은 사람이 살아날 뿐 아니라 수천 명이 일시에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지요. 또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니 즉시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시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받으려면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질병과 연약함을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이방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은 유대인이었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들의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질병과 연약함이 치료되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인정한다는 증거를 행함으로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애쓴 것은 아직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예수님 앞에 나가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응답받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면 예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를 통해 응답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질병이나 연약함은 물론, 아무리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조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관심조차 없는 사람에게까지 기도해 주고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인정했다 해도 정작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인정해 입술로 고백했기 때문에 공의에 조금도 어그러짐 없이 축복의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중심의 깨달음에 따른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나오는 입술의 고백을 통해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라도 신속히 응답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답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뭐라고 답변했을까요?
2.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마 8:8) 예수님께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삭개오 ② 부자 청년 ③ 백부장 ④ 선한 사마리아인
3. 다음 성경 구절 중 베드로에 관한 내용이 아닌 것은?
① 마태복음 16:19 ② 마태복음 16:16 ③ 사도행전 3:6 ④ 사도행전 19:12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밤 사경
이스라엘 시간의 ‘밤 사경’은 새벽 3~6시 사이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까지의 시간을 사 등분 한다.
저녁 6~9시를 1경, 밤 9~12시를 2경, 밤 12~새벽 3시를 3경, 새벽 3~6시를 4경으로 구분한다.
교육목표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부부는 평생을 같이 살면서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꼭 그걸 말로 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입술의 고백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백 번, 천 번 말로는 “사랑한다.” 해놓고 정작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 마음에 간직한 것을 상대에게 표현할 때 기쁨이 배가 되고 행복이 넘칩니다. 영적으로도 마음에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입술 고백의 중요성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의에 이르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왜 마음에 믿은 것을 입술로 시인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바로 입술의 고백을 통해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서 믿어지는 믿음 없이 입술로만 “믿습니다.” 하는 사람은 믿음에 대한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믿은 것을 입술로도 고백하는 사람은 행함을 통해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믿음으로 인정하시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시며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2. 입술의 고백을 통해 물 위를 걸은 베드로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무리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제자들은 건너편 벳새다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지요. 그런데 밤 4경(새벽 3시~6시)에 거센 풍랑을 만나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다 위로 누군가 유유히 걸어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자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곧바로 순종하여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들어 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믿음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마음에서 믿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이 고백은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중심에서 예수님을 백 퍼센트 인정하는 믿음이라면 “주여! 주는 무엇이나 하실 수 있나이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기에 “만일 주시어든” 하며 확인하는 듯한 고백을 한 것이지요.
3. 입술의 고백을 통해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마침내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며 물 위를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백을 하지요.
당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메시아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지요. “미쳤다.”, “바알세불 지폈다.”, “미혹하는 자다.”,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 온갖 중상모략과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판단 정죄하는 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이때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지요. 나쁜 소문도 있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힘을 드릴 수 있는 선한 고백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지요. 이때 베드로가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께 “만일 주시어든”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당당히 “주는”이라 고백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 하시며 베드로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축복과 함께 육의 공간 안에서 영의 공간의 일을 펼칠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를 통해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며 죽은 사람이 살아날 뿐 아니라 수천 명이 일시에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지요. 또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니 즉시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시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받으려면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질병과 연약함을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이방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은 유대인이었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들의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질병과 연약함이 치료되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인정한다는 증거를 행함으로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애쓴 것은 아직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예수님 앞에 나가면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응답받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면 예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를 통해 응답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질병이나 연약함은 물론, 아무리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조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관심조차 없는 사람에게까지 기도해 주고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인정했다 해도 정작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인정해 입술로 고백했기 때문에 공의에 조금도 어그러짐 없이 축복의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중심의 깨달음에 따른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나오는 입술의 고백을 통해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라도 신속히 응답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답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뭐라고 답변했을까요?
2.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마 8:8) 예수님께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삭개오 ② 부자 청년 ③ 백부장 ④ 선한 사마리아인
3. 다음 성경 구절 중 베드로에 관한 내용이 아닌 것은?
① 마태복음 16:19 ② 마태복음 16:16 ③ 사도행전 3:6 ④ 사도행전 19:12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밤 사경
이스라엘 시간의 ‘밤 사경’은 새벽 3~6시 사이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6시까지의 시간을 사 등분 한다.
저녁 6~9시를 1경, 밤 9~12시를 2경, 밤 12~새벽 3시를 3경, 새벽 3~6시를 4경으로 구분한다.
2023-11-03
제44과믿음
히브리서 10:22
읽을말씀 : 히브리서 10:22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0:22 | 참고 말씀: 요한일서 3:21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게 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즉시 응답받지만 어떤 사람은 응답이 더디거나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1.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과의 관계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합니다. 여기서 ‘참마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온전한 믿음은 참마음을 이룬 만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참마음을 이룬 사람의 고백이야말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저마다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은 다릅니다. 참마음을 이루어 백 퍼센트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전히 이루지 못해 오십 퍼센트뿐인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반밖에 믿지 못하는구나.” 하실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진실함의 정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분량임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믿는다.”는 고백과 상대를 신뢰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린 자녀를 집에 두고 외출할 때 “얌전히 집 잘 보고 있어라. 엄마는 널 믿는다.” 한다면 엄마가 정말 그 자녀를 믿어서 말한 것일까요?
참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몇 시까지 들어올게. 집 잘 보고 있어.” 해도 되지요. 그런데 미덥지 못하니 “믿는다.”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엄마가 깨끗이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럽히지 말고, 엄마 화장품 만지지 말아라. 가스 불은 위험하니까 켜면 안 된다.” 등 염려가 되니 당부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당부하고 외출했으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으니 “지금 뭐하니? 아무 일 없지?”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녀에게 “너를 믿는다.” 했다면 자녀를 백 퍼센트 믿는 데서 나온 진실한 고백입니다. 이처럼 얼마나 순종하고 진실한지에 따라 신뢰가 가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미덥지 못한 자녀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 백 퍼센트 신뢰하는 자녀가 무엇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이유도 묻지 않고 바라는 대로 해 줄 것입니다. ‘당연히 필요해서 구하겠지. 허튼 일을 할 아이가 아니니까.’ 하며 자녀에 대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구하는 대로 들어 주지요.
그러나 자녀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지 않을 때는 요구가 타당할 때라야 비로소 들어 줍니다. 자녀에 대한 믿음이 적을수록 부모는 자녀의 요구 사항을 몇 차례 확인하고도 들어 주기를 주저하지요. 그래도 자녀가 계속해서 조르고 떼를 쓴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강청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들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미덥지 못한 자녀가 강청하니 마지못해서 조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진리 가운데 행하여 책망받을 것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마다 주실 수 있도록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
아브라함 선지자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한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롬 4:19~22).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은 자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99세, 아내 사라가 89세로 이미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듬해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을 알려 주셨지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전혀 의심치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이듬해에 아들 이삭을 낳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믿음의 시험이 남아 있었습니다.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드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를 번제로 드린다고 해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히 11:17~19).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해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잡으려 했지요.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창 22:12).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했으며, 믿음의 시험을 통해 온전한 믿음을 인정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려면
당회장님께서 7년간 온갖 질병으로 인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님의 전도로 성전에 가서 단지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하나님 능력으로 모든 질병을 치료받았지요. 이처럼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며 각종 예배는 물론 여기저기 부흥성회를 찾아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행했습니다.
당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매일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등 ‘어찌하면 하나님 말씀을 더 듣고 하나님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니 즉시 끊어 버렸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해야 한다고 하니 곧바로 드렸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지요.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라’ 하는 것은 했고, ‘지키라’ 하는 것은 지켰습니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았으며, ‘버리라’ 하는 것은 버려 나갔지요. 만일 쉽게 버려지지 않으면 금식하며 기도해서라도 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날로 더욱 견고해져 어떤 시험이 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결코 하나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니 어느새 거짓이 없는 참마음이 되어 갔습니다.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후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권능의 종이 되기 위해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시험이 올 때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모든 시험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지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의 역사를 바탕으로 200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 성회를 이루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도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으며 계명들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변화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참마음이란 무엇일까요?
2. 온전한 믿음이란 어떠한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이삭 ② 아브라함 ③ 야곱 ④ 사라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이삭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며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해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했고 노년에 축복하려 했으나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 가나안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창 26:2~5)을 축복받아 거부가 되었으며,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 버릴 때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양보함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게 한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은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즉시 응답받지만 어떤 사람은 응답이 더디거나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1.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과의 관계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합니다. 여기서 ‘참마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온전한 믿음은 참마음을 이룬 만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참마음을 이룬 사람의 고백이야말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저마다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은 다릅니다. 참마음을 이루어 백 퍼센트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전히 이루지 못해 오십 퍼센트뿐인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반밖에 믿지 못하는구나.” 하실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진실함의 정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분량임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믿는다.”는 고백과 상대를 신뢰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린 자녀를 집에 두고 외출할 때 “얌전히 집 잘 보고 있어라. 엄마는 널 믿는다.” 한다면 엄마가 정말 그 자녀를 믿어서 말한 것일까요?
참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몇 시까지 들어올게. 집 잘 보고 있어.” 해도 되지요. 그런데 미덥지 못하니 “믿는다.”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엄마가 깨끗이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럽히지 말고, 엄마 화장품 만지지 말아라. 가스 불은 위험하니까 켜면 안 된다.” 등 염려가 되니 당부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당부하고 외출했으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으니 “지금 뭐하니? 아무 일 없지?”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녀에게 “너를 믿는다.” 했다면 자녀를 백 퍼센트 믿는 데서 나온 진실한 고백입니다. 이처럼 얼마나 순종하고 진실한지에 따라 신뢰가 가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미덥지 못한 자녀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 백 퍼센트 신뢰하는 자녀가 무엇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이유도 묻지 않고 바라는 대로 해 줄 것입니다. ‘당연히 필요해서 구하겠지. 허튼 일을 할 아이가 아니니까.’ 하며 자녀에 대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구하는 대로 들어 주지요.
그러나 자녀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지 않을 때는 요구가 타당할 때라야 비로소 들어 줍니다. 자녀에 대한 믿음이 적을수록 부모는 자녀의 요구 사항을 몇 차례 확인하고도 들어 주기를 주저하지요. 그래도 자녀가 계속해서 조르고 떼를 쓴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강청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들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미덥지 못한 자녀가 강청하니 마지못해서 조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진리 가운데 행하여 책망받을 것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마다 주실 수 있도록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
아브라함 선지자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한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롬 4:19~22).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은 자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99세, 아내 사라가 89세로 이미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듬해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을 알려 주셨지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전혀 의심치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이듬해에 아들 이삭을 낳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믿음의 시험이 남아 있었습니다.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드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를 번제로 드린다고 해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히 11:17~19).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해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잡으려 했지요.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창 22:12).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했으며, 믿음의 시험을 통해 온전한 믿음을 인정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려면
당회장님께서 7년간 온갖 질병으로 인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님의 전도로 성전에 가서 단지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하나님 능력으로 모든 질병을 치료받았지요. 이처럼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며 각종 예배는 물론 여기저기 부흥성회를 찾아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행했습니다.
당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매일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등 ‘어찌하면 하나님 말씀을 더 듣고 하나님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니 즉시 끊어 버렸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해야 한다고 하니 곧바로 드렸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지요.
성경을 읽어가면서 ‘하라’ 하는 것은 했고, ‘지키라’ 하는 것은 지켰습니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았으며, ‘버리라’ 하는 것은 버려 나갔지요. 만일 쉽게 버려지지 않으면 금식하며 기도해서라도 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날로 더욱 견고해져 어떤 시험이 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결코 하나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니 어느새 거짓이 없는 참마음이 되어 갔습니다.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후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권능의 종이 되기 위해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시험이 올 때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모든 시험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지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의 역사를 바탕으로 200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 성회를 이루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우리도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으며 계명들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변화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참마음이란 무엇일까요?
2. 온전한 믿음이란 어떠한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이삭 ② 아브라함 ③ 야곱 ④ 사라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이삭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며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해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했고 노년에 축복하려 했으나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 가나안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창 26:2~5)을 축복받아 거부가 되었으며,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 버릴 때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양보함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2023-10-27
제43과순종
빌립보서 2:8
읽을말씀 : 빌립보서 2:8 | 외울말씀 : 사무엘상 15:22 |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1:19 ; 히브리서 5:8~9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믿음의 증거를 보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지름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도 “…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순종으로 나오셨을까요?
1.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열린 인간 구원의 길
아담은 죄인이 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공의에 따라 사망에 이르렀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이미 아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세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사주해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죄인 된 인류를 자기가 주관하다 지옥으로 끌고 갈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법칙에 의해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 사단은 공의의 법칙을 어기고 예수님을 죽였지요. 결국 예수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고전 2:7).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나?’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섭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순종이 있었기에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2. 첫째 하늘의 공의에 순종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이 하나이신데도 피조물인 사람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하늘의 공의에 합당하게 사셨기에 배고픔과 피곤함, 고통과 슬픔, 외로움을 다 느끼셔야 했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애써 부르짖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40일 금식 중에 원수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베풀 수 있었는데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는 등 필요한 순간에만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지요.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도 얼마든지 멸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지만, 잠잠히 핍박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당하셨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철저한 순종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의의 종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롬 6:16).
3.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증거
마가복음 9장 23절에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고 믿음으로 명하면 귀신이 나가며 시험 환난과 모든 재앙이 물러가지요. 공의의 법칙에 따라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순종의 행함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가져오라 할 때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 해놓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순종했기에 그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공의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과 비전을 주실 때 얼마나 명심해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믿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며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계명대로 순종하며 정도를 걸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불과 30세에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왕 다음가는 지도자가 되었지요.
4.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려면
첫째, 성경 66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을 알고 순종하되 먼저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말씀은 하나님 공의의 법칙이므로 순종해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회개하고 통회자복을 하라.”는 것은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법칙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땀 흘려야 소산을 먹는다는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을 알려 주지요(눅 22:44).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구할 바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구할 바를 구하되 정성과 믿음을 내보여야 하지요.
둘째,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주의 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개척 때 어떤 분이 암에 걸려 들것에 실려 와서 누운 채로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당회장님께서 “앉아서 예배드리세요.” 하시자 가족이 등 뒤를 받쳐서 비스듬히 앉아 예배를 드렸지요. 그분이 일어나 앉기조차 힘든 것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하지만 성령의 주관을 받아 명하신 당회장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결국 치료의 역사를 체험했지요.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지만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관이 오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기도하라.’는 주관을 받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면 회개의 영이 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헐리거나 방언의 은사를 받는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동안 응답의 축복이 오는 경우도 있지요.
누구든지 공의의 법칙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순종으로 믿음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순종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창대하게 펼쳐집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해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순종에 관한 성경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사무엘상 15:22 ② 히브리서 5:8~9
③ 고린도후서 1:19 ④ 갈라디아서 5:24
2. 하나님 뜻에 순종했던 인물과 거리가 먼 것을 고르세요.
① 베드로, 바울 ② 아브라함, 요셉 ③ 사울, 발람 ④ 사무엘, 다윗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순종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 유형 : 징계가 두려워 명령에 억지로 순종한다.
두 번째 유형 :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한다.
지시나 명령이 자기 생각에 맞을 때만 순종한다.
세 번째 유형 : 무조건 순종한다.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는다. 자기 의사 없이 무조건 아멘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무조건 떠난 순종이다.
네 번째 유형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한다.
순종할 때 이루어질 일의 결과도 대략 마음에 그려진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을 믿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믿음의 증거를 보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지름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도 “…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순종으로 나오셨을까요?
1.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열린 인간 구원의 길
아담은 죄인이 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공의에 따라 사망에 이르렀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이미 아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세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사주해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죄인 된 인류를 자기가 주관하다 지옥으로 끌고 갈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죄와 자범죄가 없기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법칙에 의해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 사단은 공의의 법칙을 어기고 예수님을 죽였지요. 결국 예수님께서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고전 2:7).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나?’ 생각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섭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순종이 있었기에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2. 첫째 하늘의 공의에 순종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이 하나이신데도 피조물인 사람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하늘의 공의에 합당하게 사셨기에 배고픔과 피곤함, 고통과 슬픔, 외로움을 다 느끼셔야 했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애써 부르짖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40일 금식 중에 원수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베풀 수 있었는데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는 등 필요한 순간에만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지요.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도 얼마든지 멸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지만, 잠잠히 핍박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당하셨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철저한 순종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의의 종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롬 6:16).
3.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증거
마가복음 9장 23절에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고 믿음으로 명하면 귀신이 나가며 시험 환난과 모든 재앙이 물러가지요. 공의의 법칙에 따라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순종의 행함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가져오라 할 때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 해놓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순종했기에 그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공의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꿈과 비전을 주실 때 얼마나 명심해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믿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며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계명대로 순종하며 정도를 걸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불과 30세에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왕 다음가는 지도자가 되었지요.
4.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려면
첫째, 성경 66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을 알고 순종하되 먼저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말씀은 하나님 공의의 법칙이므로 순종해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회개하고 통회자복을 하라.”는 것은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법칙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땀 흘려야 소산을 먹는다는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을 알려 주지요(눅 22:44).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구할 바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구할 바를 구하되 정성과 믿음을 내보여야 하지요.
둘째,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주의 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개척 때 어떤 분이 암에 걸려 들것에 실려 와서 누운 채로 예배에 참석하셨습니다. 당회장님께서 “앉아서 예배드리세요.” 하시자 가족이 등 뒤를 받쳐서 비스듬히 앉아 예배를 드렸지요. 그분이 일어나 앉기조차 힘든 것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하지만 성령의 주관을 받아 명하신 당회장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결국 치료의 역사를 체험했지요.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지만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관이 오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기도하라.’는 주관을 받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면 회개의 영이 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헐리거나 방언의 은사를 받는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동안 응답의 축복이 오는 경우도 있지요.
누구든지 공의의 법칙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순종으로 믿음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순종만 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창대하게 펼쳐집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해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순종에 관한 성경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사무엘상 15:22 ② 히브리서 5:8~9
③ 고린도후서 1:19 ④ 갈라디아서 5:24
2. 하나님 뜻에 순종했던 인물과 거리가 먼 것을 고르세요.
① 베드로, 바울 ② 아브라함, 요셉 ③ 사울, 발람 ④ 사무엘, 다윗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순종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 유형 : 징계가 두려워 명령에 억지로 순종한다.
두 번째 유형 :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한다.
지시나 명령이 자기 생각에 맞을 때만 순종한다.
세 번째 유형 : 무조건 순종한다.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는다. 자기 의사 없이 무조건 아멘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무조건 떠난 순종이다.
네 번째 유형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한다.
순종할 때 이루어질 일의 결과도 대략 마음에 그려진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을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