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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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9
제10과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고전 13:6
읽을말씀 : 고전 13:6 | 외울말씀 : 요 15:14 ㅣ 참고 말씀:대하 19:7, 요 14:6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불의란 무엇이며, 영적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선진 국가일수록 정직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반면 후진국일수록 부정부패와 불의가 만연하고,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불의는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개인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기뻐하시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1.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불의한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요.
가령, 부유한 친구를 보았을 때 시기, 질투가 나서 '친구는 잘 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친구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고 합시다. 이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사기를 당해서 부도가 났을 때, "잘산다고 뽐내더니 고소하다."고 하면서 쾌재를 부른다면 이것은 불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한 일에 동조하고 가담했다면 더 적극적으로 불의를 기뻐한 것이 되지요.
첫째로, 세상 사람들도 불의라고 여기는 경우
불의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불의라 여기는 '일반적인 불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 얻는 재물이나 이익을 취하고 남을 속이거나 강제적으로 빼앗는 것들이지요.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의가 전혀 없지만 세상에는 남을 속이는 등 불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역대하 19장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의 눈은 가릴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수고의 대가 외에는 바라지 않지요.
둘째로, 하나님께서 불의라고 여기시는 경우
주 안에서의 불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세상의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온갖 죄가 다 불의입니다. 불의는 마음의 악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온 죄이며, 죄 중에서도 특히 육체의 일에 해당합니다. 즉 마음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악이 다툼, 폭행, 사기, 살인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온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즉 불의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불의는 구원과 직결됩니다. 그러니 불의를 행하는 형제를 본다면 애통하며 사랑으로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나도 적당히, 좀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다.' 하며 부러워하거나 함께 동조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가 없지요.
주님은 흠과 티도 없으신 의인인데 불의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벧전 3:18).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 죄의 담을 허시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시고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지요. 이런 큰 사랑을 깨닫는다면 결코 불의를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불의를 행하지 않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15장 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말씀했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애통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의 마음을 닮아 사랑이 많은 것입니다.
2.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불의를 행치 않을 뿐 아니라 진리를 행하게 됩니다. 나아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로, '복음'을 기뻐하는 것
복음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해 사상과 철학, 학문을 탐구하며 여러 종교 교리에서 답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러한 모든 것을 불식시키고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했지요. 즉 참된 진리는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지요. 따라서 삶의 목적을 알아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복음을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널리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선, 사랑, 공의 등 진리에 속한 것을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말씀에 '섬기라, 이해하고 용서하라.' 하셨으면 기쁘게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 판단, 정죄하는 것이 너무나 싫어지지요. 그래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상대가 잘되면 함께 기뻐합니다. 시기, 질투하지 않지요.
'상대가 잘못되었으면' 하고 악한 생각을 하거나,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불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애통합니다. 또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변개하지 않는 마음, 진실함, 정직함 등 선의 마음을 좋아합니다. 선한 말과 행실을 기뻐하지요.
요한삼서 1장 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영적인 사랑을 마음에 가득 채움으로 진리에 속한 일들을 볼 때 더욱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세상과 짝한 우리가 처음부터 진리만 기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음에 어둠과 비진리가 있기에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차츰차츰 변화되어 비진리의 마음을 온전히 벗으면서 진리만 기뻐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따르지요.
예를 들어, 초신자만 보더라도 예배드리는 것이 무조건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진리의 맛을 모릅니다. 피곤해하거나 마음이 다른 데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점점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함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행함은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말씀을 듣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결되고 충성하기에 힘쓰지요. 설령 진리와 함께 백 퍼센트 기뻐하지는 못한다 해도 저마다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의를 벗고 끊임없이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사랑은 '( )한 것을 ( )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은 '( )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어떤 불미스런 일들을 기뻐하지 않고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사랑은 진리와 함께 무엇을 기뻐해야 할까요? 빈칸을 채워 보세요.
① 복음을 기뻐하는 것이다.
②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③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불의를 행하다가 멸망당한 '아간'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전리품을 숨겨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임당한 사람이다. 여호수아는 전리품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였는데 아간은 시날산(바벨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한 개를 숨긴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결국 아간은 그의 자녀들과 소유물들과 함께 돌에 맞아 불살라졌으며,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다. 그곳이 바로 아골 골짜기이다(수 7장).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불의란 무엇이며, 영적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선진 국가일수록 정직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반면 후진국일수록 부정부패와 불의가 만연하고,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불의는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개인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기뻐하시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1.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불의한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요.
가령, 부유한 친구를 보았을 때 시기, 질투가 나서 '친구는 잘 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친구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고 합시다. 이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사기를 당해서 부도가 났을 때, "잘산다고 뽐내더니 고소하다."고 하면서 쾌재를 부른다면 이것은 불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한 일에 동조하고 가담했다면 더 적극적으로 불의를 기뻐한 것이 되지요.
첫째로, 세상 사람들도 불의라고 여기는 경우
불의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불의라 여기는 '일반적인 불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 얻는 재물이나 이익을 취하고 남을 속이거나 강제적으로 빼앗는 것들이지요.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불의가 전혀 없지만 세상에는 남을 속이는 등 불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역대하 19장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의 눈은 가릴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은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수고의 대가 외에는 바라지 않지요.
둘째로, 하나님께서 불의라고 여기시는 경우
주 안에서의 불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세상의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온갖 죄가 다 불의입니다. 불의는 마음의 악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온 죄이며, 죄 중에서도 특히 육체의 일에 해당합니다. 즉 마음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악이 다툼, 폭행, 사기, 살인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온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즉 불의한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지요.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불의는 구원과 직결됩니다. 그러니 불의를 행하는 형제를 본다면 애통하며 사랑으로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나도 적당히, 좀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다.' 하며 부러워하거나 함께 동조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가 없지요.
주님은 흠과 티도 없으신 의인인데 불의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벧전 3:18).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 죄의 담을 허시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시고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지요. 이런 큰 사랑을 깨닫는다면 결코 불의를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불의를 행하지 않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15장 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말씀했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애통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의 마음을 닮아 사랑이 많은 것입니다.
2.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불의를 행치 않을 뿐 아니라 진리를 행하게 됩니다. 나아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로, '복음'을 기뻐하는 것
복음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해 사상과 철학, 학문을 탐구하며 여러 종교 교리에서 답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6절에 이러한 모든 것을 불식시키고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했지요. 즉 참된 진리는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지요. 따라서 삶의 목적을 알아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복음을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널리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선, 사랑, 공의 등 진리에 속한 것을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말씀에 '섬기라, 이해하고 용서하라.' 하셨으면 기쁘게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 판단, 정죄하는 것이 너무나 싫어지지요. 그래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상대가 잘되면 함께 기뻐합니다. 시기, 질투하지 않지요.
'상대가 잘못되었으면' 하고 악한 생각을 하거나,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불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애통합니다. 또 진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변개하지 않는 마음, 진실함, 정직함 등 선의 마음을 좋아합니다. 선한 말과 행실을 기뻐하지요.
요한삼서 1장 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영적인 사랑을 마음에 가득 채움으로 진리에 속한 일들을 볼 때 더욱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세상과 짝한 우리가 처음부터 진리만 기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음에 어둠과 비진리가 있기에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차츰차츰 변화되어 비진리의 마음을 온전히 벗으면서 진리만 기뻐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따르지요.
예를 들어, 초신자만 보더라도 예배드리는 것이 무조건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진리의 맛을 모릅니다. 피곤해하거나 마음이 다른 데 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점점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함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행함은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말씀을 듣고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성장할수록 천국에서 받을 상급을 바라보며 열심히 성결되고 충성하기에 힘쓰지요. 설령 진리와 함께 백 퍼센트 기뻐하지는 못한다 해도 저마다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의를 벗고 끊임없이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사랑은 '( )한 것을 ( )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은 '( )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어떤 불미스런 일들을 기뻐하지 않고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사랑은 진리와 함께 무엇을 기뻐해야 할까요? 빈칸을 채워 보세요.
① 복음을 기뻐하는 것이다.
②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③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인물' 알고 넘어 갑시다!
불의를 행하다가 멸망당한 '아간'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전리품을 숨겨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임당한 사람이다. 여호수아는 전리품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였는데 아간은 시날산(바벨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한 개를 숨긴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결국 아간은 그의 자녀들과 소유물들과 함께 돌에 맞아 불살라졌으며,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다. 그곳이 바로 아골 골짜기이다(수 7장).
2012-03-02
제9과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
고전 13:5
읽을말씀 : 고전 13:5 | 외울말씀 : 눅 6:45 ㅣ 참고 말씀 : 약4:12, 갈 6:7
교육목표 : 악한 것이란 무엇이며, 악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아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무슨 일이든 좋은 뜻으로, 선한 동기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한 생각을 하며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본인에게 한 말이 아닌데도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면서 작은 일에도 과민반응을 일으킵니다. 또 쉽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스스로를 주위와 격리시키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처럼 악한 생각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백해무익한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잘사는 친구를 보면 시기, 질투가 나고 괜히 뽐내는 것 같아 밉기도 하지요.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그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친다면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볼 때 하나님 뜻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키며 악한 생각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생각입니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결코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요. 내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항상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며 전하려고 하지요.
혹여 남의 험담에 귀가 솔깃해진다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헐뜯는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으며 당장 나무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사실을 알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데도 남의 말이 궁금하고 솔깃해진다면 대개 험담하고 수군수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합니다. 또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남이 잘될 때 시기,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대가 잘되고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성도가 크리스천으로서 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습니까?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안 좋게 생각합니다. 좀 더 선하다면 '왜 저런 곳에 갈까?' 의아해하다가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좋은 쪽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처음부터 악한 생각 자체가 들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듣는다 해도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지요.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으로서 판단하시기에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악입니다. 설령 상대가 잘못했을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릴 길을 생각하지요.
영적인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할 뿐 아니라 상대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른길로 가도록 진리를 알려 주고 변화되도록 감동을 줍니다. 허물 많은 사람도 사랑하기에 어찌하든 믿어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하지요. 이처럼 판단 정죄하는 생각 자체가 없어야 누구를 만나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모든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양심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은 다 악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그러면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악'은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와 같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 열매입니다. 뿌리가 있으므로 줄기와 잎, 열매가 나오듯이 죄는 악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즉 악은 땅속 깊숙이 자리 잡은 뿌리와 같이 마음 안의 '속성'입니다. 이 악이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을 하며 가시 돋친 말과 함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있는 미움이라는 악이 '욕'이나 '가시 돋친 말', '폭력'이라는 행함 곧 죄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악이 있다고 반드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교양이 있거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절제한다면 죄를 짓지는 않지요.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 속의 악까지 다 버려야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압축하면 '사랑'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죄입니다.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만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악한 것을 보고 듣지 않으면 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만일 보고 들었다면 떠올리거나 기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쉽게 통제되지가 않습니다. 악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잘 떠오르기 때문에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불같이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지요.
혹여 일부러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떠올리는 일은 없어야 하며 순간적으로 스치는 악한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악한 일에 결코 가담해서도 안 되지요. 요한이서 1장 10~11절에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말씀한 대로 철저히 악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타고난 죄성과 성장하면서 보고 들은 비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죄성과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죄성과 비진리를 버리는 데에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보다 비진리가 더 익숙하고, 비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버리기는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악은 무익한 것이요,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뿐입니다(잠 22:8).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에게 질병이 오거나 사고를 당하고 가난을 겪으며 가정불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을 미워하면서 '말씀'과 '기도'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선한 생각을 할 수 있지요. 또한 불같이 기도하면서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곱씹어볼 때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에 마음의 악을 버릴 수 있지요. 따라서 말씀과 기도로 신속히 악을 벗어버림으로 영혼이 잘되며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생각이란 무엇인지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상대가 (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② 상대를 ( ) ( )하는 생각이다.
③ 하나님 ( )에 ( )되는 모든 생각이다.
2. 죄와 악의 차이를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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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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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기록한 배경
사도 바울은 은사 문제로 시끄러운 고린도교회에 가장 큰 은사를 소개한다. 1~3절은 사랑의 필요성을, 4~7절은 사랑의 본질을, 8~13절은 사랑의 영원성을 알려 준다. 은사가 좋지만 그것이 사랑의 동기에서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영적인 사랑은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4~7절에서 제시하는 15가지 덕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육목표 : 악한 것이란 무엇이며, 악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아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무슨 일이든 좋은 뜻으로, 선한 동기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한 생각을 하며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본인에게 한 말이 아닌데도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면서 작은 일에도 과민반응을 일으킵니다. 또 쉽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스스로를 주위와 격리시키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처럼 악한 생각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백해무익한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잘사는 친구를 보면 시기, 질투가 나고 괜히 뽐내는 것 같아 밉기도 하지요.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그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친다면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볼 때 하나님 뜻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키며 악한 생각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생각입니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결코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요. 내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항상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며 전하려고 하지요.
혹여 남의 험담에 귀가 솔깃해진다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헐뜯는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으며 당장 나무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사실을 알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데도 남의 말이 궁금하고 솔깃해진다면 대개 험담하고 수군수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합니다. 또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남이 잘될 때 시기,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대가 잘되고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성도가 크리스천으로서 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습니까?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안 좋게 생각합니다. 좀 더 선하다면 '왜 저런 곳에 갈까?' 의아해하다가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좋은 쪽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처음부터 악한 생각 자체가 들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듣는다 해도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지요.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으로서 판단하시기에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악입니다. 설령 상대가 잘못했을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릴 길을 생각하지요.
영적인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할 뿐 아니라 상대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른길로 가도록 진리를 알려 주고 변화되도록 감동을 줍니다. 허물 많은 사람도 사랑하기에 어찌하든 믿어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하지요. 이처럼 판단 정죄하는 생각 자체가 없어야 누구를 만나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모든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양심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은 다 악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그러면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악'은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와 같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 열매입니다. 뿌리가 있으므로 줄기와 잎, 열매가 나오듯이 죄는 악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즉 악은 땅속 깊숙이 자리 잡은 뿌리와 같이 마음 안의 '속성'입니다. 이 악이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을 하며 가시 돋친 말과 함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있는 미움이라는 악이 '욕'이나 '가시 돋친 말', '폭력'이라는 행함 곧 죄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악이 있다고 반드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교양이 있거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절제한다면 죄를 짓지는 않지요.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 속의 악까지 다 버려야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압축하면 '사랑'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죄입니다.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만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악한 것을 보고 듣지 않으면 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만일 보고 들었다면 떠올리거나 기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쉽게 통제되지가 않습니다. 악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잘 떠오르기 때문에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불같이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지요.
혹여 일부러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떠올리는 일은 없어야 하며 순간적으로 스치는 악한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악한 일에 결코 가담해서도 안 되지요. 요한이서 1장 10~11절에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말씀한 대로 철저히 악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타고난 죄성과 성장하면서 보고 들은 비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죄성과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죄성과 비진리를 버리는 데에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보다 비진리가 더 익숙하고, 비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버리기는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악은 무익한 것이요,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뿐입니다(잠 22:8).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에게 질병이 오거나 사고를 당하고 가난을 겪으며 가정불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을 미워하면서 '말씀'과 '기도'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선한 생각을 할 수 있지요. 또한 불같이 기도하면서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곱씹어볼 때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에 마음의 악을 버릴 수 있지요. 따라서 말씀과 기도로 신속히 악을 벗어버림으로 영혼이 잘되며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생각이란 무엇인지 ( ) 안을 채워 보세요.
① 상대가 (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② 상대를 ( ) ( )하는 생각이다.
③ 하나님 ( )에 ( )되는 모든 생각이다.
2. 죄와 악의 차이를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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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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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기록한 배경
사도 바울은 은사 문제로 시끄러운 고린도교회에 가장 큰 은사를 소개한다. 1~3절은 사랑의 필요성을, 4~7절은 사랑의 본질을, 8~13절은 사랑의 영원성을 알려 준다. 은사가 좋지만 그것이 사랑의 동기에서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영적인 사랑은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4~7절에서 제시하는 15가지 덕목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2012-02-24
제8과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는 것
고전 13:5
읽을말씀 : 고전 13:5 | 외울말씀 : 약 1:20 ㅣ 참고 말씀:고전 10:31, 요 2:13~16
교육목표 :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 어떻게 다르며, 성냄과 의분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많은 사람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갔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해합니다. 반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에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인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그 땅에서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로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좋은 목초지와 물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게 되지요. 유목민에게 목초지와 물은 생존권과도 직결되는 절대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먼저 좋은 곳을 선택하여 떠나라고 하지요(창 13:9).
그러자 롯은 한 번의 사양도 없이 자기가 보기에 좋은 요단 들을 택하여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익만 구하여 떠난 롯에 대해 섭섭해하지 않고 오직 잘 살기만을 바랐습니다. 이처럼 오직 상대의 유익을 구하니 아브라함은 범사가 잘되고 형통하며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매사에 나보다 주변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이웃, 나보다 하나님, 주님, 교회가 우선이 되어야 하지요. 가정에서도 나보다 부모, 형제, 남편, 아내, 자녀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생활에 치우쳐 가정, 일터, 학교 등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금식하여 힘이 없다며 업무에 지장을 주거나 교회 일을 한다고 가족을 등한시합니다. 학생의 본분인 학업을 게을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자신은 놀거나 쉬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구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의 일에 충성했어도 온 집에 충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다했다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말씀한 대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마음에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악이 없어야 마음에 참사랑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배려합니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하고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는 맞춰 주려고 하지 않고 희생하기를 꺼려 한다면 이는 내 유익을 구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보듬어 줄 수 있어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보다 사망률이 20%가량 높다고 합니다. 습관성 분노가 일시적으로 기분을 망치게 할 뿐 아니라, 생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입니다. 화를 냄으로써 상대방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전에 자신의 상처가 더욱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심하게 화를 내는 사람의 신체는 권투선수의 강펀치를 맞는 것 같은 타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화를 참고 살면 병이 된다 하여 직장이나 가정에서 화를 폭발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쉽게 화를 내지요.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은 최악의 방법이며 심신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화를 냄으로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확대시킬 뿐이지요.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을 내도록 부추기지요. 미움과 성냄은 원수 마귀 사단의 덫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퉁명스러운 말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에 있는 미움, 불편함이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분과 성냄의 차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요 2:13~16).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이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이 혈기를 내시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이 일어서입니다.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성을 내면서도 자신은 의분이 일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에게만 맞추려고 하니 감정이 일어난 것이지요. 흔히 '감정이 상한다' 하면 성냄의 전초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성을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이 생깁니다. 참아서 순간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어도 언젠가는 폭발하지요.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온전히 뽑아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지요.
하루아침에 감정을 버리고 선과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기는 어렵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됩니다. 우선 화가 나면 기도하며 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후회하거나 부끄럼을 당하지 않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창세기 13장 9절 말씀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 )하면 나는 ( ) 하고 네가 ( )하면 나는 ( )하리라"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분냄'과 '성냄'에 관한 성경구절
약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잠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전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교육목표 :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 어떻게 다르며, 성냄과 의분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많은 사람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갔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해합니다. 반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에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인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그 땅에서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로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좋은 목초지와 물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게 되지요. 유목민에게 목초지와 물은 생존권과도 직결되는 절대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먼저 좋은 곳을 선택하여 떠나라고 하지요(창 13:9).
그러자 롯은 한 번의 사양도 없이 자기가 보기에 좋은 요단 들을 택하여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익만 구하여 떠난 롯에 대해 섭섭해하지 않고 오직 잘 살기만을 바랐습니다. 이처럼 오직 상대의 유익을 구하니 아브라함은 범사가 잘되고 형통하며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매사에 나보다 주변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이웃, 나보다 하나님, 주님, 교회가 우선이 되어야 하지요. 가정에서도 나보다 부모, 형제, 남편, 아내, 자녀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생활에 치우쳐 가정, 일터, 학교 등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금식하여 힘이 없다며 업무에 지장을 주거나 교회 일을 한다고 가족을 등한시합니다. 학생의 본분인 학업을 게을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자신은 놀거나 쉬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구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의 일에 충성했어도 온 집에 충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다했다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말씀한 대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마음에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악이 없어야 마음에 참사랑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배려합니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하고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는 맞춰 주려고 하지 않고 희생하기를 꺼려 한다면 이는 내 유익을 구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보듬어 줄 수 있어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보다 사망률이 20%가량 높다고 합니다. 습관성 분노가 일시적으로 기분을 망치게 할 뿐 아니라, 생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입니다. 화를 냄으로써 상대방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전에 자신의 상처가 더욱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심하게 화를 내는 사람의 신체는 권투선수의 강펀치를 맞는 것 같은 타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화를 참고 살면 병이 된다 하여 직장이나 가정에서 화를 폭발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쉽게 화를 내지요.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은 최악의 방법이며 심신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화를 냄으로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확대시킬 뿐이지요.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을 내도록 부추기지요. 미움과 성냄은 원수 마귀 사단의 덫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퉁명스러운 말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에 있는 미움, 불편함이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분과 성냄의 차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요 2:13~16).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이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이 혈기를 내시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이 일어서입니다.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성을 내면서도 자신은 의분이 일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자신에게만 맞추려고 하니 감정이 일어난 것이지요. 흔히 '감정이 상한다' 하면 성냄의 전초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성을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이 생깁니다. 참아서 순간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어도 언젠가는 폭발하지요.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온전히 뽑아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지요.
하루아침에 감정을 버리고 선과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기는 어렵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됩니다. 우선 화가 나면 기도하며 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하고 생각하면서 후회하거나 부끄럼을 당하지 않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창세기 13장 9절 말씀입니다. ( ) 안을 채워 보세요.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 )하면 나는 ( ) 하고 네가 ( )하면 나는 ( )하리라"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분냄'과 '성냄'에 관한 성경구절
약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잠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전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2012-02-17
제7과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
고전 13:4~5
읽을말씀 : 고전 13:4~5 | 외울말씀 : 잠 16:18 l 참고 말씀:약 4:10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과 무례한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철저히 버리게 한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1912년 4월 첫 출항을 하였습니다.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항해사는 해안 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해 버리고 나중에서야 선장에게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이 배가 빙산 따위에 눈 깜짝하겠습니까?"라고 했지요.
이때 선장은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해!"라고 명령했습니다. 얼마 못 가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탑승객 2천2백여 명 중 1천5백여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빚어졌지요.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이 생기고 자기가 옳다며 혈기를 내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데도 잘 모르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의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
교만은 크게 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고 버리기 위해 노력하면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니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寶庫)를 이룹니다. 여러분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지요. 몸가짐이 바르고 때와 장소에 맞는 언행은 상대에게 호감을 주며 분위기를 쇄신시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되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며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게 됩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간에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모르지요.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하는 것일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데 하나님 앞에 존다는 것은 큰 실례이지요. 또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윗사람과 대화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추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성전에서도 무례히 행하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도 무례를 잘 범하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다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또 약속시간에 늦는 것,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서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하지요.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더욱 말과 행실에 본이 되어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체의 결여 속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사이에 무례히 행치는 않는지 자신을 체크해 보세요.
□ 예배시간이나 다니엘철야 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한다.
□ 성전에서 드라마나 연예인, 직장, 사업터 이야기를 한다.
□ 예배시간에 지각하거나 시간에 임박해 헐레벌떡 온다.
□ 헌금봉투의 용도 외에 설교 말씀을 적거나 메모한다.
□ 축도나 주기도문이 끝나기 전에 나간다.
□ 붐비는 식당에서 새치기를 한다.
□ 친하다고 밤늦게 전화를 스스럼없이 한다.
□ 누가 안 보니까 교통법규를 어긴다.
□ 아무에게나 쉽게 반말을 한다.
□ 약속시간을 종종 어긴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는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하면 지적인 능력, 행동 능력이 결여되거나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동떨어진 감정 상태를 느낀다.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과 무례한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철저히 버리게 한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1912년 4월 첫 출항을 하였습니다.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항해사는 해안 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해 버리고 나중에서야 선장에게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이 배가 빙산 따위에 눈 깜짝하겠습니까?"라고 했지요.
이때 선장은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해!"라고 명령했습니다. 얼마 못 가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탑승객 2천2백여 명 중 1천5백여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빚어졌지요.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이 생기고 자기가 옳다며 혈기를 내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데도 잘 모르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의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
교만은 크게 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고 버리기 위해 노력하면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니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寶庫)를 이룹니다. 여러분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지요. 몸가짐이 바르고 때와 장소에 맞는 언행은 상대에게 호감을 주며 분위기를 쇄신시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되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며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게 됩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간에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모르지요.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하는 것일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데 하나님 앞에 존다는 것은 큰 실례이지요. 또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윗사람과 대화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추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성전에서도 무례히 행하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도 무례를 잘 범하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다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또 약속시간에 늦는 것,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서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하지요.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더욱 말과 행실에 본이 되어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체의 결여 속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사이에 무례히 행치는 않는지 자신을 체크해 보세요.
□ 예배시간이나 다니엘철야 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한다.
□ 성전에서 드라마나 연예인, 직장, 사업터 이야기를 한다.
□ 예배시간에 지각하거나 시간에 임박해 헐레벌떡 온다.
□ 헌금봉투의 용도 외에 설교 말씀을 적거나 메모한다.
□ 축도나 주기도문이 끝나기 전에 나간다.
□ 붐비는 식당에서 새치기를 한다.
□ 친하다고 밤늦게 전화를 스스럼없이 한다.
□ 누가 안 보니까 교통법규를 어긴다.
□ 아무에게나 쉽게 반말을 한다.
□ 약속시간을 종종 어긴다.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는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하면 지적인 능력, 행동 능력이 결여되거나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동떨어진 감정 상태를 느낀다.
2012-02-10
제6과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것
고전 13:4
읽을말씀 : 고전 13:4 | 외울말씀 : 요일 2:15~16 ㅣ 참고 말씀:욥 4:8, 잠 14:30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투기를 버려야 할 것과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한다.
시기 질투는 무서운 범죄 행위의 암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특성은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령, 옷 가게 하는 사람이 어떤 회사원이 출세하여 인정받는다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화장품 가게 하는 사람이 어느 농산물 가게가 잘된다고 질투하지 않지요.
그런데 같은 업종이나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는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납니다. 근처에 동일 업종의 음식점을 경영하는데 상대쪽이 잘되면 싫고 불안해집니다. 손님들이 그 가게로 몰리면 말리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가까운 사이나 경쟁 관계에 있을 때 시기 질투가 심해지고 여기서 더하면 투기가 나옵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시기, 질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같이 입사한 동료는 고속 승진을 하는데 자신은 아직도 말단이니 부럽기도 하고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힘이 빠지고 일할 의욕까지 상실하지요.
이렇게 시기 질투가 있으면 낙심이 됩니다.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이 모양인가?' 하고 주저앉습니다. 상대와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만 깊어지지요. 만일 영적인 사랑이 있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해 줄 것입니다. 상대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이 잘되니 낙심이 되고 힘이 빠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곧 '자기(自己)'가 살아 있다는 뜻이지요.
남보다 더 사랑과 인정받고 싶은 자아가 살아 있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시기심이 생깁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지면 악한 말과 극악한 행동으로 나오기 마련인데 이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이는 상대에게 해를 입히거나 심지어 살인하는 일까지 생깁니다.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에 구원받기가 어렵습니다(갈 5:19∼21).
사울 왕은 다윗을 투기하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적장 골리앗에게서 나라를 구한 은인이었습니다. 3미터 가까운 장신(長身)에 청동갑옷으로 무장한 블레셋 최고의 전사 골리앗이, 40일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말 한마디 못하고 좌불안석 떨고만 있었지요.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다윗이 하나님을 모욕한 적장을 물맷돌로 단번에 쓰러뜨립니다. 이스라엘은 대승리를 거두고 다윗은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되고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지요. 훗날 사울 왕은 다윗을 군대장관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시기 질투를 자극하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는 어느 날 수많은 백성이 나와 대환영을 합니다. 이때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노래를 하였지요. 이 노래를 들은 사울 왕은 심히 불쾌해하며 분개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며 그날부터 다윗을 주목합니다. 이튿날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하지요. 또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도록 음모를 꾸미고, 이스라엘 최고의 무사들을 시켜 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집요한 사울 왕의 투기는 그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그칠 수 있었습니다.
욥기 4장 8절에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말씀했고,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이 행한 악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악을 뿌린 대가로 병을 얻거나 가정과 일터에 재앙을 당하기도 하지요. 시기, 질투, 투기는 백해무익하며 영으로 들어가는 데 큰 장애물이 되기에 온전히 우리 마음에서 뽑아내야 합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한 젊은 변호사가 개업을 하였습니다. 첫 날 아침 한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려고 하자 얼른 전화기를 들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회장님 그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깔끔하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손님이 오셔서 나중에 전화드리겠습니다."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손님에게 정중히 "무슨 사건으로 오셨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때 손님이 말하기를 "전화국에서 나왔습니다. 전화선을 이어 주려고 왔는데 끊긴 전화인데도 그렇게 잘되나 보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육적인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보다 자신이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드러나 칭찬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특징은 다른 사람이 잘한 것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지기 때문에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하지요. 그러니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자기 자랑만 한다.'며 사람들이 얕보며 시기 질투하게 만들 뿐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쾌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합니다.
육의 사람들은 가문이나 명예, 권세, 고급승용차, 집이나 보석 등을 자랑합니다. 권세자나 유명인과 친분이 있으면 으쓱해지고 자랑스러워하지요. 이들은 인생의 가치를 세상적인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것들을 자랑한들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고(전 1:2~3),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 지나가 버립니다(시 103:15).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으로는 참된 가치와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사망의 길로 갈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육을 벗어 버리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나 세상을 취하고자 하는 정욕도 없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랑하라는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응답받은 것을 간증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 자랑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육 간에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립니다. 그러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 안에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처럼, 마음을 진리로 채워 나가면 육적인 자랑이나 세상적인 것은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고백한 것처럼 여러분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을 주신 주님을 더욱 높이며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시기, 질투, 육적인 자랑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은?
① 사무엘상 15:22 ② 잠언 14:30 ③ 야고보서 4:16 ④ 요한일서 2:15~16
2. 다음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시기 질투가 발전하여 극악한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투기다.
②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쾌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이다.
③ 간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사람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준다.
④ 투기가 발전하여 시기 질투가 나온다.
3. 여러분은 가까이 있는 직장 동료나 친구가 사랑받고 칭찬받을 때 중심에서 함께 기뻐해 주는 편인가요? 아니면 부럽고 낙망되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자랑해야 하는지 예레미야를 통해 가르쳐 주셨다. 예레미야 9장 23~24절에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투기를 버려야 할 것과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한다.
시기 질투는 무서운 범죄 행위의 암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특성은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령, 옷 가게 하는 사람이 어떤 회사원이 출세하여 인정받는다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화장품 가게 하는 사람이 어느 농산물 가게가 잘된다고 질투하지 않지요.
그런데 같은 업종이나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는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납니다. 근처에 동일 업종의 음식점을 경영하는데 상대쪽이 잘되면 싫고 불안해집니다. 손님들이 그 가게로 몰리면 말리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가까운 사이나 경쟁 관계에 있을 때 시기 질투가 심해지고 여기서 더하면 투기가 나옵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시기, 질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같이 입사한 동료는 고속 승진을 하는데 자신은 아직도 말단이니 부럽기도 하고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힘이 빠지고 일할 의욕까지 상실하지요.
이렇게 시기 질투가 있으면 낙심이 됩니다.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이 모양인가?' 하고 주저앉습니다. 상대와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만 깊어지지요. 만일 영적인 사랑이 있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해 줄 것입니다. 상대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이 잘되니 낙심이 되고 힘이 빠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곧 '자기(自己)'가 살아 있다는 뜻이지요.
남보다 더 사랑과 인정받고 싶은 자아가 살아 있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시기심이 생깁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지면 악한 말과 극악한 행동으로 나오기 마련인데 이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이는 상대에게 해를 입히거나 심지어 살인하는 일까지 생깁니다.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에 구원받기가 어렵습니다(갈 5:19∼21).
사울 왕은 다윗을 투기하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적장 골리앗에게서 나라를 구한 은인이었습니다. 3미터 가까운 장신(長身)에 청동갑옷으로 무장한 블레셋 최고의 전사 골리앗이, 40일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울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말 한마디 못하고 좌불안석 떨고만 있었지요.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다윗이 하나님을 모욕한 적장을 물맷돌로 단번에 쓰러뜨립니다. 이스라엘은 대승리를 거두고 다윗은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되고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지요. 훗날 사울 왕은 다윗을 군대장관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시기 질투를 자극하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는 어느 날 수많은 백성이 나와 대환영을 합니다. 이때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노래를 하였지요. 이 노래를 들은 사울 왕은 심히 불쾌해하며 분개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며 그날부터 다윗을 주목합니다. 이튿날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하지요. 또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도록 음모를 꾸미고, 이스라엘 최고의 무사들을 시켜 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집요한 사울 왕의 투기는 그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그칠 수 있었습니다.
욥기 4장 8절에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말씀했고,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이 행한 악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악을 뿌린 대가로 병을 얻거나 가정과 일터에 재앙을 당하기도 하지요. 시기, 질투, 투기는 백해무익하며 영으로 들어가는 데 큰 장애물이 되기에 온전히 우리 마음에서 뽑아내야 합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한 젊은 변호사가 개업을 하였습니다. 첫 날 아침 한 사람이 사무실에 들어오려고 하자 얼른 전화기를 들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회장님 그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깔끔하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손님이 오셔서 나중에 전화드리겠습니다."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손님에게 정중히 "무슨 사건으로 오셨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때 손님이 말하기를 "전화국에서 나왔습니다. 전화선을 이어 주려고 왔는데 끊긴 전화인데도 그렇게 잘되나 보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육적인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보다 자신이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드러나 칭찬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특징은 다른 사람이 잘한 것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지기 때문에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하지요. 그러니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자기 자랑만 한다.'며 사람들이 얕보며 시기 질투하게 만들 뿐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쾌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합니다.
육의 사람들은 가문이나 명예, 권세, 고급승용차, 집이나 보석 등을 자랑합니다. 권세자나 유명인과 친분이 있으면 으쓱해지고 자랑스러워하지요. 이들은 인생의 가치를 세상적인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것들을 자랑한들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고(전 1:2~3),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 지나가 버립니다(시 103:15).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으로는 참된 가치와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사망의 길로 갈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육을 벗어 버리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나 세상을 취하고자 하는 정욕도 없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랑하라는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응답받은 것을 간증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 자랑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육 간에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립니다. 그러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 안에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처럼, 마음을 진리로 채워 나가면 육적인 자랑이나 세상적인 것은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고백한 것처럼 여러분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을 주신 주님을 더욱 높이며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시기, 질투, 육적인 자랑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은?
① 사무엘상 15:22 ② 잠언 14:30 ③ 야고보서 4:16 ④ 요한일서 2:15~16
2. 다음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시기 질투가 발전하여 극악한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투기다.
②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쾌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이다.
③ 간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사람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준다.
④ 투기가 발전하여 시기 질투가 나온다.
3. 여러분은 가까이 있는 직장 동료나 친구가 사랑받고 칭찬받을 때 중심에서 함께 기뻐해 주는 편인가요? 아니면 부럽고 낙망되나요?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자랑해야 하는지 예레미야를 통해 가르쳐 주셨다. 예레미야 9장 23~24절에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2012-02-03
제5과사랑은 온유한 것
고전 13:4
읽을말씀 : 고전 13:4 | 외울말씀 : 마 5:5 ㅣ 참고 말씀:시 37:11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온유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심리학자 '하아로우' 교수가 젖먹이 원숭이들 앞에 두 개의 어미 원숭이 인형을 만들어 놓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한 인형은 철사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각각 우윳병을 꽂아 두었습니다.
첫날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에 있는 우유를 모두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는 한 마리도 가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인형한테만 모여들었지요. 이처럼 동물들도 차갑고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선호하듯이, 인간관계도 날카롭고 매정한 사람보다는 온유한 사람을 선호하고, 그런 사람 품에 깃들어 쉼을 가지려고 합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혀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혀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뜨거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온유하면 많은 사람이 깃들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는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습니다.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2. 온유함을 이루는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이는 소인배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나의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봐 줍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에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즉,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은 우리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만 했다 하면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는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불량하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도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화려한 옷을 잘 갖춰 입었다 해도 그 사람의 내면이 훌륭하지 못하면 화려한 외모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또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이처럼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서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온유함에 관한 성경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민수기 12:3 ② 시편 37:11 ③ 마태복음 5:5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
2. 온유함과 덕에 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②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다.
③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 넓은 땅을 상급으로 받는다.
④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한다.
3. 성경상에 온유한 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____________________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재능보다 더 중요한 '덕(德)'
덕이 있으면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맞게 행한다.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할 뿐 아니라, 언행이 반듯하며 상대에게 신뢰를 준다. 덕은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 주는 의복과 같다. 예부터 선인들은 재능보다 덕을 강조하며 "재승덕(才勝德) 하지 말고, 덕승재(德勝才) 하라." 하였다. 즉 재능이 덕보다 앞서서는 안 되고, 덕이 재능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온유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심리학자 '하아로우' 교수가 젖먹이 원숭이들 앞에 두 개의 어미 원숭이 인형을 만들어 놓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한 인형은 철사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각각 우윳병을 꽂아 두었습니다.
첫날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에 있는 우유를 모두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는 한 마리도 가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인형한테만 모여들었지요. 이처럼 동물들도 차갑고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선호하듯이, 인간관계도 날카롭고 매정한 사람보다는 온유한 사람을 선호하고, 그런 사람 품에 깃들어 쉼을 가지려고 합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혀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혀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뜨거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온유하면 많은 사람이 깃들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는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습니다.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2. 온유함을 이루는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이는 소인배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나의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봐 줍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에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즉,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은 우리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만 했다 하면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는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불량하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도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화려한 옷을 잘 갖춰 입었다 해도 그 사람의 내면이 훌륭하지 못하면 화려한 외모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또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이처럼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서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온유함에 관한 성경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민수기 12:3 ② 시편 37:11 ③ 마태복음 5:5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
2. 온유함과 덕에 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②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다.
③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 넓은 땅을 상급으로 받는다.
④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한다.
3. 성경상에 온유한 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____________________
●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재능보다 더 중요한 '덕(德)'
덕이 있으면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맞게 행한다.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할 뿐 아니라, 언행이 반듯하며 상대에게 신뢰를 준다. 덕은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 주는 의복과 같다. 예부터 선인들은 재능보다 덕을 강조하며 "재승덕(才勝德) 하지 말고, 덕승재(德勝才) 하라." 하였다. 즉 재능이 덕보다 앞서서는 안 되고, 덕이 재능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뜻이다.
2012-01-27
제4과사랑은 오래 참는 것
고전 13:4
읽을말씀 : 고전 13:4 | 외울말씀 : 마 5:44 ㅣ 참고 말씀:마 5:39~40
교육목표 :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자판기에서 커피가 다 나오기도 전에 컵을 꺼내려다가 손을 데기도 합니다. 그 잠깐의 시간을 참지 못해서이지요. 신앙생활에서도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 말씀과 위배된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금식하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죄성이 발견되면 이내 낙심하고 맙니다. 또 응답받기 위해 정성껏 예물을 심고 기도했는데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지쳐 버리지요.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개조하는 데 반드시 이루어야 할 덕목이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1. 오래 참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를 보면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데 필요한 15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과연 '사랑은 오래 참고'에 담긴 영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누군가 시기 질투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사랑스럽기는커녕 피하고 싶고 우연이라도 만나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들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할지라도 마음을 다스려 참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에 비하면 작은 범주의 사랑에 속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반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개인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2. 오래 참는 사랑의 위력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원수는 원한이 맺힐 정도로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나요? 또한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욕하고 핍박하는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나요?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시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 천대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생들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다 원수 마귀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 사랑의 힘은 위대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오래 참고 계신가요? 까닭 없이 여러분을 헐뜯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오래 참고 사랑할 수 있나요? 혹여 원수도 아닌 아내, 남편, 자녀, 믿음의 형제들에게 '참는 것이 너무 어렵다.' 하지는 않나요?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하셨지요. 얼마나 염치가 없으면 남의 속옷을 달라 하겠습니까? 이는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남이 자기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송사를 하기도 합니다. 상대가 아내, 남편, 부모, 자녀라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 사람처럼 똑같이 갚아 줘야 할까요? 아니지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선으로 대해 줘야지요.
혹여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반문할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 까닭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3.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어떤 사람은 미움, 혈기,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다가 자기 한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화병까지 얻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즉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이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애당초 원수 맺을 일이 없지요.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상대가 싫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밉지가 않지요. 반면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비진리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보아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단점이 보이고 싫은 마음이 앞섭니다. 또 자기가 거짓말을 잘하면 상대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얼마나 오래 참아 주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여쭙니다(마 18:21).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지요. '7'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즉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지요.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지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갑니다.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지요.
그렇다면 천국에도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랑은 오래 참고"에 대한 말씀의 의미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이다.
②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이다.
③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마음에 악을 발동케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④ 천국에 가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2. 여러분이 오래 참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래 참고 사랑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사랑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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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을 3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마음에 악을 버리기 위해)
둘째,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셋째,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기까지)
교육목표 :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알아본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자판기에서 커피가 다 나오기도 전에 컵을 꺼내려다가 손을 데기도 합니다. 그 잠깐의 시간을 참지 못해서이지요. 신앙생활에서도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 말씀과 위배된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금식하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죄성이 발견되면 이내 낙심하고 맙니다. 또 응답받기 위해 정성껏 예물을 심고 기도했는데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지쳐 버리지요.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개조하는 데 반드시 이루어야 할 덕목이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1. 오래 참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를 보면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데 필요한 15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과연 '사랑은 오래 참고'에 담긴 영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누군가 시기 질투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사랑스럽기는커녕 피하고 싶고 우연이라도 만나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들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할지라도 마음을 다스려 참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에 비하면 작은 범주의 사랑에 속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반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개인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2. 오래 참는 사랑의 위력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원수는 원한이 맺힐 정도로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나요? 또한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욕하고 핍박하는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나요?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시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 천대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생들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다 원수 마귀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 사랑의 힘은 위대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오래 참고 계신가요? 까닭 없이 여러분을 헐뜯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오래 참고 사랑할 수 있나요? 혹여 원수도 아닌 아내, 남편, 자녀, 믿음의 형제들에게 '참는 것이 너무 어렵다.' 하지는 않나요?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하셨지요. 얼마나 염치가 없으면 남의 속옷을 달라 하겠습니까? 이는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남이 자기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송사를 하기도 합니다. 상대가 아내, 남편, 부모, 자녀라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 사람처럼 똑같이 갚아 줘야 할까요? 아니지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선으로 대해 줘야지요.
혹여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반문할 분이 계신가요? 여러분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 까닭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3.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어떤 사람은 미움, 혈기,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다가 자기 한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화병까지 얻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즉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이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애당초 원수 맺을 일이 없지요.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상대가 싫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밉지가 않지요. 반면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비진리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보아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단점이 보이고 싫은 마음이 앞섭니다. 또 자기가 거짓말을 잘하면 상대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얼마나 오래 참아 주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여쭙니다(마 18:21).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지요. '7'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즉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지요.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지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갑니다.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지요.
그렇다면 천국에도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랑은 오래 참고"에 대한 말씀의 의미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이다.
②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이다.
③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마음에 악을 발동케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④ 천국에 가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2. 여러분이 오래 참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래 참고 사랑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사랑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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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을 3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마음에 악을 버리기 위해)
둘째,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셋째,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기까지)
2012-01-20
제3과영적인 사랑의 중요성
고전 13:1~3
읽을말씀 : 고전 13:1~3 | 외울말씀 : 골 3:23 ㅣ 참고 말씀:고린도전서 2:6~8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의 중요성과 어떻게 하면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본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만일 율법대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이 없다 할 것이고,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한다고 정죄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바닥에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을 하나하나 써내려 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목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났고 여인만 남았지요.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답게 해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묵직한 쇠나 구리는 두드려도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구리나 꽹과리가 소리를 낸다면 속이 비었거나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무조건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거슬리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아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내 의와 틀 속에 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 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것도, 죄를 버리고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요.
이처럼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영적인 사랑이 없는 사람이 구제하고 희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으니 상급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셨지요.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을 고르시오.
① 고린도전서 13:1~3 ② 골로새서 3:23~24 ③ 사도행전 13:3 ④ 누가복음 17:10
2.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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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믿음과 사랑은 비례할까요? 다르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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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계시'와 '예언'의 차이는?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되어질 일을 받은 것을 말한다. 예언은 계시받은 내용을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의 중요성과 어떻게 하면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본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만일 율법대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이 없다 할 것이고,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한다고 정죄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바닥에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을 하나하나 써내려 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목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났고 여인만 남았지요.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답게 해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묵직한 쇠나 구리는 두드려도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구리나 꽹과리가 소리를 낸다면 속이 비었거나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무조건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거슬리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아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내 의와 틀 속에 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 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것도, 죄를 버리고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요.
이처럼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영적인 사랑이 없는 사람이 구제하고 희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으니 상급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셨지요.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을 고르시오.
① 고린도전서 13:1~3 ② 골로새서 3:23~24 ③ 사도행전 13:3 ④ 누가복음 17:10
2.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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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믿음과 사랑은 비례할까요? 다르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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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계시'와 '예언'의 차이는?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되어질 일을 받은 것을 말한다. 예언은 계시받은 내용을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2012-01-13
제2과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
고전 13:4~7
읽을말씀 : 고전 13:4~7 | 외울말씀 : 고전 13:13 ㅣ 참고 말씀:삼상 18:1~4
교육목표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결과는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분명 사랑해서 결혼했을 텐데 왜 그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이란?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성경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그래서 사무엘상 18장 1~4절에 보면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가까이에 계신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그렇게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대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 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이 중심적이고 점점 부모님에게서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 간에 사랑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믿음의 형제간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의 역사가 따르고 망하기 십상이지요.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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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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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영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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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물맷돌'이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교육목표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결과는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분명 사랑해서 결혼했을 텐데 왜 그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이란?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성경에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그래서 사무엘상 18장 1~4절에 보면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가까이에 계신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그렇게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대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 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이 중심적이고 점점 부모님에게서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 간에 사랑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믿음의 형제간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의 역사가 따르고 망하기 십상이지요.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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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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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영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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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용어' 알고 넘어 갑시다!
'물맷돌'이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2012-01-06
제1과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 5:36~39
읽을말씀 : 눅 5:36~39 | 외울말씀 : 엡 4:24 l 참고 말씀:고후 5:17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으로서 주 안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을 잘 모른 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물론,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영적 의미
누가복음 5장 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합니다. 낡고 오래된 가죽은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맺힌 모든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 곧 포도나무의 열매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으로,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기 전, 율법에 매인 삶의 방식이지요.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본체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2.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차이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범죄하여 사함을 받으려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행위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구원받을 수가 있었지요.
그러면 구약의 묵은 포도주와 신약의 새 포도주의 차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냐고 반문하지요. 이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하여 변함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헤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율법에 이혼을 규정하신 것은 인간의 변질되고 악한 마음 때문이셨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음행한 사실을 남편이 알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괴롭습니다. 이러한 상황일 때 함께 삶으로 인해 더 불행해져서는 안 되겠기에 모세의 율법에는 이혼해도 가하다고 규정해 놓았지요.
따라서 묵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근본 뜻인 사랑보다는 율법적인 틀에 매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면 새 포도주를 마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3.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5장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묵은 것일수록 비싸고 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인정받지요. 세상에서 묵은 포도주를 귀히 여기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새 법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다른 규칙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에다 부수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지켰지요. 즉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 불도 피워서도 안 되고, 몇 킬로미터 이상은 여행하면 안 되며,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도 안 된다는 등 여러 규례들을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뒤로 하고 자신들이 안식일에 대해 만든 규정들을 지키며 안식일을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새 법이 옛 율법의 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에 길든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자기적인 율법의 틀에 얽매인 이들은 예수님의 새 교훈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마 23:23). 아무리 구약의 율법을 좇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기도와 금식을 드린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드러나는 행위만 옳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4.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만들려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세상 것을 취하고 남을 판단 정죄하며 미워하는 등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마음은 낡은 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욕심, 잘못된 지식과 틀 등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지요. 그럴 때라야 우리 마음이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묵은 포도주를 고집하지요. 하나님 뜻이 아닌 육신의 생각 속에 틀을 만들고 사랑보다는 율법에 매여 판단 정죄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죄악을 신속히 벗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진리와 선으로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말씀과 기도로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 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새 포도주 ■ ■ 의와 진리로 새롭게 변화된 마음
묵은 포도주 ■ ■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는 마음
새 부대 ■ ■ 구약의 율법적인 생활방식
낡은 부대 ■ ■ 주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신약'
2. 우리의 마음을 새 가죽 부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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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여기서 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며, 포도주는 죄인을 구원한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곧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실 것을 나타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를 것을 뜻한다.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으로서 주 안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을 잘 모른 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물론,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영적 의미
누가복음 5장 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합니다. 낡고 오래된 가죽은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맺힌 모든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 곧 포도나무의 열매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으로,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기 전, 율법에 매인 삶의 방식이지요.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본체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2.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차이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범죄하여 사함을 받으려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행위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구원받을 수가 있었지요.
그러면 구약의 묵은 포도주와 신약의 새 포도주의 차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냐고 반문하지요. 이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하여 변함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헤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율법에 이혼을 규정하신 것은 인간의 변질되고 악한 마음 때문이셨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음행한 사실을 남편이 알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괴롭습니다. 이러한 상황일 때 함께 삶으로 인해 더 불행해져서는 안 되겠기에 모세의 율법에는 이혼해도 가하다고 규정해 놓았지요.
따라서 묵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근본 뜻인 사랑보다는 율법적인 틀에 매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면 새 포도주를 마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3.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5장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묵은 것일수록 비싸고 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인정받지요. 세상에서 묵은 포도주를 귀히 여기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새 법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다른 규칙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에다 부수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지켰지요. 즉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 불도 피워서도 안 되고, 몇 킬로미터 이상은 여행하면 안 되며,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도 안 된다는 등 여러 규례들을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뒤로 하고 자신들이 안식일에 대해 만든 규정들을 지키며 안식일을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새 법이 옛 율법의 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에 길든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자기적인 율법의 틀에 얽매인 이들은 예수님의 새 교훈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마 23:23). 아무리 구약의 율법을 좇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기도와 금식을 드린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드러나는 행위만 옳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4.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만들려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세상 것을 취하고 남을 판단 정죄하며 미워하는 등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마음은 낡은 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욕심, 잘못된 지식과 틀 등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지요. 그럴 때라야 우리 마음이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묵은 포도주를 고집하지요. 하나님 뜻이 아닌 육신의 생각 속에 틀을 만들고 사랑보다는 율법에 매여 판단 정죄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죄악을 신속히 벗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진리와 선으로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말씀과 기도로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 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새 포도주 ■ ■ 의와 진리로 새롭게 변화된 마음
묵은 포도주 ■ ■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는 마음
새 부대 ■ ■ 구약의 율법적인 생활방식
낡은 부대 ■ ■ 주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신약'
2. 우리의 마음을 새 가죽 부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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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매주 주보에 나오는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여기서 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며, 포도주는 죄인을 구원한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곧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실 것을 나타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를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