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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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8
제48과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 9:36~42
읽을말씀 : 행 9:36~42 | 외울말씀 : 행 20:35 l 참고 말씀:고전 3:16~17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과 구제를 통해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비다는 많은 선행과 구제를 행하였기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 40절에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했지요. 이 사실이 온 욥바에 퍼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1. 많은 선행과 구제를 통해 다시 살아난 도르가
다비다라고도 하는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 큰 핍박이 가해지자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욥바에도 성도들이 정착하여 신앙의 중심지를 이루었지요.
그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으로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심지어 스데반 집사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출회를 당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극심한 핍박을 받거나 열악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르가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선을 행했습니다. 도와줄 사람 없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도르가가 죽자 평소에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담대히 나서서 그녀를 살려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하겠지만 그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큰 권능을 행하는 베드로를 청하지요.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행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비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어 살아나게 되지요.
2. 선행의 여러 가지 예들
선을 행하는 방법에는 구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늘 교회와 주의 종과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중보기도를 올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봅니다. 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도 있지요.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열심히 봉사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쌓았다고 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보답하고자 기쁨으로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간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 된 제단인 성전을 건축하는 선행을 기뻐하십니다. 학개 1장 8절을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신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지요.
이처럼 눈에 보이는 성전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우리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 감과 동시에 우리 마음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마음의 성전 역시 청결하게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세상적인 대화나 분쟁, 다툼, 불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맞이하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 마음도 깨끗이 단장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 중에는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차량을 헌물하여 성도들을 수송하는 데 큰 보탬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에 참으로 귀한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필요한 각종 기물들을 헌물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3. 구제의 대상과 올바른 구제 방법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보여 준 옷들도 많았습니다. 그 선행이 단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중심으로 도르가의 생활 자체가 되었지요. 오늘날처럼 사랑이 식어져 가는 세대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제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구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어서 구제해야 합니다.
먼저, 구제는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하신 대로 될 수 있으면 믿음의 가정에 해야 합니다(갈 6:10).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나 일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이 어려운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을 구제하되 믿음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반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하신 대로 건강하여 일할 수 있는데도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구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구제하면 더 나태하게 만들게 되므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시험 환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으니 구제할 때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돕다가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죄를 깨닫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4. 다비다가 선을 행했는데도 병이 찾아온 이유
다비다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선한 삶을 살았는데 왜 병들어 죽었을까요?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 해도 모두 건강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을 때 질병이 틈타고 고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는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도 질병이 틈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거나 불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몸을 혹사시킨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과식하거나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않으므로 생긴 위장병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니지요.
이런 경우는 자신이 생각할 때는 죄가 되지 않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역시 죄가 됩니다. 과식은 음식에 욕심을 내고 절제하지 못한 것이니 죄가 되는 것이요, 불규칙적인 식사로 인해 병이 생겼다면 자신의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한 것이니 이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비다도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자지 못하며 과다하게 몸을 쓰다가 병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선행을 한 다비다였기에 다시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행을 기뻐하시는지 나타내 주신 것이지요. 선행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칭송받을 만한 것이니 여러분도 열심히 선행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비다의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일까요?
① 브리스길라 ② 루디아 ③ 뵈뵈 ④ 도르가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이다.
②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
③ 건강한데도 게을러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구제해야 한다.
④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환난 당하는 사람을 구제해서는 안 된다.
3. 주변에 베풀 수 있는 선행을 기록한 다음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①
②
③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19~33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요나를 구하려다 큰 손해를 입은 사람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이 멸망할 것을 외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간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적국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요나는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대풍을 만난다.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랑은 더욱 심해져 모두 죽게 될 상황에 이르자 할 수 없이 풍랑의 원인인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된다. 그러자 이내 풍랑이 잠잠해진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요나를 도우려다 선원들은 긴 시간 풍랑과 싸우며 고생해야 했고, 자신들의 짐까지 바다에 던져 큰 피해를 입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과 구제를 통해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다비다는 많은 선행과 구제를 행하였기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 40절에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했지요. 이 사실이 온 욥바에 퍼지자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1. 많은 선행과 구제를 통해 다시 살아난 도르가
다비다라고도 하는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 큰 핍박이 가해지자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욥바에도 성도들이 정착하여 신앙의 중심지를 이루었지요.
그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으로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심지어 스데반 집사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출회를 당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극심한 핍박을 받거나 열악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르가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선을 행했습니다. 도와줄 사람 없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도르가가 죽자 평소에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담대히 나서서 그녀를 살려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하겠지만 그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큰 권능을 행하는 베드로를 청하지요.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행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비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어 살아나게 되지요.
2. 선행의 여러 가지 예들
선을 행하는 방법에는 구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늘 교회와 주의 종과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중보기도를 올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봅니다. 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도 있지요.
어떤 분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열심히 봉사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쌓았다고 합니다. 받은바 은혜를 보답하고자 기쁨으로 자신을 희생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간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 된 제단인 성전을 건축하는 선행을 기뻐하십니다. 학개 1장 8절을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신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지요.
이처럼 눈에 보이는 성전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우리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 감과 동시에 우리 마음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마음의 성전 역시 청결하게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세상적인 대화나 분쟁, 다툼, 불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맞이하기 전에 몸을 깨끗이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 마음도 깨끗이 단장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 중에는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차량을 헌물하여 성도들을 수송하는 데 큰 보탬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에 참으로 귀한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필요한 각종 기물들을 헌물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3. 구제의 대상과 올바른 구제 방법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보여 준 옷들도 많았습니다. 그 선행이 단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중심으로 도르가의 생활 자체가 되었지요. 오늘날처럼 사랑이 식어져 가는 세대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제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구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어서 구제해야 합니다.
먼저, 구제는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하신 대로 될 수 있으면 믿음의 가정에 해야 합니다(갈 6:10).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나 일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이 어려운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을 구제하되 믿음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반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하신 대로 건강하여 일할 수 있는데도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구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구제하면 더 나태하게 만들게 되므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시험 환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으니 구제할 때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돕다가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죄를 깨닫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4. 다비다가 선을 행했는데도 병이 찾아온 이유
다비다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선한 삶을 살았는데 왜 병들어 죽었을까요? 하나님 앞에 충성한다 해도 모두 건강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을 때 질병이 틈타고 고통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는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도 질병이 틈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거나 불규칙적인 생활을 해서 몸을 혹사시킨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과식하거나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않으므로 생긴 위장병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러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니지요.
이런 경우는 자신이 생각할 때는 죄가 되지 않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역시 죄가 됩니다. 과식은 음식에 욕심을 내고 절제하지 못한 것이니 죄가 되는 것이요, 불규칙적인 식사로 인해 병이 생겼다면 자신의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한 것이니 이것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비다도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자지 못하며 과다하게 몸을 쓰다가 병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선행을 한 다비다였기에 다시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행을 기뻐하시는지 나타내 주신 것이지요. 선행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칭송받을 만한 것이니 여러분도 열심히 선행을 쌓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비다의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일까요?
① 브리스길라 ② 루디아 ③ 뵈뵈 ④ 도르가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이다.
②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
③ 건강한데도 게을러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구제해야 한다.
④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환난 당하는 사람을 구제해서는 안 된다.
3. 주변에 베풀 수 있는 선행을 기록한 다음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①
②
③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19~33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요나를 구하려다 큰 손해를 입은 사람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이 멸망할 것을 외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도망간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적국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요나는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대풍을 만난다.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랑은 더욱 심해져 모두 죽게 될 상황에 이르자 할 수 없이 풍랑의 원인인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된다. 그러자 이내 풍랑이 잠잠해진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요나를 도우려다 선원들은 긴 시간 풍랑과 싸우며 고생해야 했고, 자신들의 짐까지 바다에 던져 큰 피해를 입었다.
2014-11-21
제47과네 소견에 선한 대로
삼상 24:4
읽을말씀 : 삼상 24:4 | 외울말씀 : 삼상 16:7 ㅣ 참고 말씀:행 13:22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 선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범사에 좇음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에는 사람 편에서는 선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선이 아닌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하면 분명히 선인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악인 것들도 많지요. 물론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은 범사에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실 정도로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다윗은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지요.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듯 했지만 왕이 된 후 점점 교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해 주셨지만 사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를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을 왕으로 지목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처음에 다윗의 맏형인 엘리압의 외모가 뛰어났기 때문에 왕으로 주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다윗을 왕으로 세우라고 명하시지요(삼상 16:7).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선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다윗의 선(善)
1)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 서로 대치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투구와 갑옷과 놋단창으로 무장하였지요. 이런 장수가 40일을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이때 전쟁터에 오게 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나가지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며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모든 백성들과 용사들도 두려워 떠는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지요.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골리앗은 칼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을 보실 때 얼마나 기쁘고 사랑스러웠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지 않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며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과 사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더 크게 돌리자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지요.
이런 사울 왕의 시기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향해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지요. 또한 다윗에게 자기 딸을 줄 테니 결혼 예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를 가져오라고 함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 죽이라 하는가 하면, 라마로 도망간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갔지요.
그런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사울 왕이 군사들과 떨어져 다윗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오지요. 이때 마음만 먹으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설령 죽인다 해도 다윗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삼상 24:4) 하지요. 즉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것은 다윗에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은 이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든, 악한 임금이든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에 죽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가만히 사울 왕의 옷자락만 베었는데 이것도 마음에 찔려 사람들에게 사울 왕을 해치지 말라고 하지요. 사울 왕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요, 다윗 자신이 왕으로 섬긴 사람이었기에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애매히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분별하여 행했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결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다윗의 선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동굴에서 나갈 때 다윗이 멀리서 사울을 부르며 땅에 엎드려 절하며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삼상 24:11)라 하지요.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 없이 쫓겨 다니면서도 아버지로 여기고 끝까지 자기의 결백한 마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다윗과 대조적이었던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24장 16절 이하를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다시 한 번 살려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동을 받아 소리 높여 울며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러나 그 감동도 잠시뿐 또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지요. 이처럼 일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아도 마음의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어느 때 사단이 역사하면 또다시 악이 발동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안의 악을 온전히 뽑아 버린 선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혹여 여러분 안에도 사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유익에 맞을 때는 무엇이든 상대에게 주고 싶다가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이내 원수를 맺거나 등을 돌린다면 사울 왕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거듭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였지요. 뿐만 아니라 그 시체를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행 13:22).
여러분도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범사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모든 축복과 응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한 이스라엘 왕은 누구일까요?
① 다윗 ② 사울 ③ 솔로몬 ④ 르호보암
2. 사무엘 선지자가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왕으로 주목했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했나요?
( )
3. 다윗이 물맷돌로 단번에 쓰러뜨린 블레셋의 장수는 누구일까요?
① 요압 ② 아브넬 ③ 골리앗 ④ 아비새
4. 다윗이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만 가지고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01~31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던 다윗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사울 왕의 추적을 당하고 있는 다윗에게 누군가 동족인 그일라가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 타작마당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 준다. 다윗은 이때 먼저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라고 여쭙는다.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블레셋을 쳐서 그일라를 구해 준다. 그런데 그일라 백성이 그 은혜를 저버리고 사울 왕에게 다윗을 넘겨주려고 한다. 이때도 다윗은 하나님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쭙는다. 이처럼 다윗은 범사에 하나님께 여쭙고 그 뜻에 순종하였다.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 선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범사에 좇음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에는 사람 편에서는 선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선이 아닌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하면 분명히 선인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악인 것들도 많지요. 물론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다윗은 범사에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실 정도로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다윗은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왕을 세워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왕으로 세운 사람이 바로 사울이었지요. 그는 처음에는 겸손한듯 했지만 왕이 된 후 점점 교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여러 차례 경고해 주셨지만 사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해 나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를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을 왕으로 지목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처음에 다윗의 맏형인 엘리압의 외모가 뛰어났기 때문에 왕으로 주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다윗을 왕으로 세우라고 명하시지요(삼상 16:7).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윗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선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다윗의 선(善)
1)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과 서로 대치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투구와 갑옷과 놋단창으로 무장하였지요. 이런 장수가 40일을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이때 전쟁터에 오게 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나가지요.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며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모든 백성들과 용사들도 두려워 떠는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지요.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골리앗은 칼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을 보실 때 얼마나 기쁘고 사랑스러웠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2)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지 않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며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윗과 사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더 크게 돌리자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지요.
이런 사울 왕의 시기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향해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지요. 또한 다윗에게 자기 딸을 줄 테니 결혼 예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를 가져오라고 함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 죽이라 하는가 하면, 라마로 도망간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갔지요.
그런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사울 왕이 군사들과 떨어져 다윗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오지요. 이때 마음만 먹으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설령 죽인다 해도 다윗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삼상 24:4) 하지요. 즉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것은 다윗에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선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은 이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든, 악한 임금이든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에 죽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가만히 사울 왕의 옷자락만 베었는데 이것도 마음에 찔려 사람들에게 사울 왕을 해치지 말라고 하지요. 사울 왕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요, 다윗 자신이 왕으로 섬긴 사람이었기에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애매히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분별하여 행했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결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다윗의 선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동굴에서 나갈 때 다윗이 멀리서 사울을 부르며 땅에 엎드려 절하며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삼상 24:11)라 하지요.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 없이 쫓겨 다니면서도 아버지로 여기고 끝까지 자기의 결백한 마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다윗과 대조적이었던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24장 16절 이하를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다시 한 번 살려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동을 받아 소리 높여 울며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러나 그 감동도 잠시뿐 또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지요. 이처럼 일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아도 마음의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어느 때 사단이 역사하면 또다시 악이 발동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안의 악을 온전히 뽑아 버린 선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혹여 여러분 안에도 사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유익에 맞을 때는 무엇이든 상대에게 주고 싶다가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이내 원수를 맺거나 등을 돌린다면 사울 왕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거듭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였지요. 뿐만 아니라 그 시체를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행 13:22).
여러분도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범사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모든 축복과 응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한 이스라엘 왕은 누구일까요?
① 다윗 ② 사울 ③ 솔로몬 ④ 르호보암
2. 사무엘 선지자가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왕으로 주목했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했나요?
( )
3. 다윗이 물맷돌로 단번에 쓰러뜨린 블레셋의 장수는 누구일까요?
① 요압 ② 아브넬 ③ 골리앗 ④ 아비새
4. 다윗이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만 가지고 골리앗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301~31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던 다윗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사울 왕의 추적을 당하고 있는 다윗에게 누군가 동족인 그일라가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 타작마당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 준다. 다윗은 이때 먼저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라고 여쭙는다.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블레셋을 쳐서 그일라를 구해 준다. 그런데 그일라 백성이 그 은혜를 저버리고 사울 왕에게 다윗을 넘겨주려고 한다. 이때도 다윗은 하나님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쭙는다. 이처럼 다윗은 범사에 하나님께 여쭙고 그 뜻에 순종하였다.
2014-11-14
제46과추수감사절
출 23:16
읽을말씀 : 출 23:16 | 외울말씀 : 시 17:8 l 참고 말씀:레 23:42~43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축복하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였지요.
성경에 보면, 수장절을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기거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미국을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풍성한 소산을 주신 것은 물론, 사건 사고 많은 이 세상에서 늘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오늘날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늘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십니다.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들이 천국(상,하)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많은 성도님이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셔서 은혜로 눈물로 이끄신 사랑하는 나의 목자.
사랑으로 애통함으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주신 분,
내 눈에 눈물이 흘러요.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눈이 부셔요.
그 찬란한 빛 내 마음을 감동시켜요. 감사해요. 나의 아버지.
감사해요. 나의 주님.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가기까지
이끄신 내 목자님 이끄신 내 목자님 감사해요.”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다.
2. 올 한 해 영육 간에 여러분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 )
3. 항상 좋은 것만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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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 갑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 불린 이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가나안 땅에서는 목축을 통해 젖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산과 나무, 꽃 등에서 꿀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가나안의 토양과 기후는 포도 재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포도즙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였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축복하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였지요.
성경에 보면, 수장절을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기거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미국을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풍성한 소산을 주신 것은 물론, 사건 사고 많은 이 세상에서 늘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오늘날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늘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십니다.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들이 천국(상,하)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많은 성도님이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셔서 은혜로 눈물로 이끄신 사랑하는 나의 목자.
사랑으로 애통함으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어 주신 분,
내 눈에 눈물이 흘러요.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눈이 부셔요.
그 찬란한 빛 내 마음을 감동시켜요. 감사해요. 나의 아버지.
감사해요. 나의 주님.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가기까지
이끄신 내 목자님 이끄신 내 목자님 감사해요.”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다.
2. 올 한 해 영육 간에 여러분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 )
3. 항상 좋은 것만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편지를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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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 갑시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 불린 이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가나안 땅에서는 목축을 통해 젖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산과 나무, 꽃 등에서 꿀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가나안의 토양과 기후는 포도 재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포도즙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였다.
2014-11-07
제45과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뿐이라
왕상 17:8~14
읽을말씀 : 왕상 17:8~14 | 외울말씀 : 마 10:41 l 참고 말씀:왕상 16:30
교육목표 :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날이 갈수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해져 갑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 간에 훈훈한 정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신의 삶에만 급급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심하지요. 자기 유익을 위해 상대가 어떤 해를 입어도 상관치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1. 죄로 인해 극심한 가뭄을 겪게 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아합 왕이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하자 백성들도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며 온갖 죄를 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고 나오지요. 이는 아합 왕이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역대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 그리고 국가적으로 왜 시험 환난이 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집안의 가장이나 기업의 머리가 바로 서지 못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지요. 국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을 내리시기 전,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에게 예언하게 하십니다. 즉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였지요. 비를 내리지 않음으로 아합 왕이 깨닫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섬겼던 풍요와 비의 신인 바알이 헛된 우상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지요.
그런데 아합 왕은 회개는커녕 하나님의 뜻을 전한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지요. 극심한 가뭄으로 그릿 시냇물까지 말라 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과부에게 “내가 내 종 엘리야를 보낼 테니 이렇게 공궤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마음을 주관하여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지요.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마음에 주관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2.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이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림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종이었지요. 그래서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하던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수백 명을 모으고 단신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단에 번제물을 놓은 후 각자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여 어떤 신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는가 하는 것으로 참 신을 가리고자 했지요. 결국 엘리야는 불의 응답을 받아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엘리야이기에 까마귀를 통해서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사르밧에 이른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합니다. 이때 순순히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향해 엘리야는 또다시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부탁하지요.
오랜 가뭄으로 물도 구하기 힘든 상황인데 음식까지 달라고 하니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감정 상해 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민망히 여기며 설명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지요.
즉 엘리야가 여인에게 구한 것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양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엘리야처럼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을 하러 갔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 그 남은 음식을 달라고 하는 자체가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만일 엘리야가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여인의 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합니다. 금덩이를 가지고 와도 곡식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가뭄 속에서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만큼 남은 곡식을 달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야의 요청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만일 자기 말대로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왜 나처럼 가난한 과부에게 양식을 달라고 청할까?’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즉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고 마음이 선한지를 알 수 있지요.
3.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마음 중심을 아셨기에 많은 사람 중에 사르밧 과부를 통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런데 아무나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의 마음이 선하고 또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에 그 믿음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축복을 받게 된 것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지요.
열왕기상 17장 15~16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였습니다. 즉 극심한 가뭄이 다할 때까지 조금도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르밧 과부의 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베풀어졌다는 점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 같은 선의 행함을 보일 만한 중심이었지만 상대가 엘리야였기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보장받는 엘리야를 여인에게 보내셨습니다.
만약 과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엘리야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상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순종이 나올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달라는 대로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가 한 쪽뿐인 콩을 다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고, 달라 하지 않아도 마음에 주관받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여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마지막 양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궤할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의 마음만으로는 축복해 주실 수 없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마음의 선을 행함으로 나타낼 때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참된 선을 이루며 그 선을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역대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악을 행했던 왕은 누구일까요?
( )
2. 사르밧 과부는 어떠한 마음을 지녔기에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마지막 남은 양식을 선지자에게 공궤할 수 있었을까요?
( )
3.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양식은 무엇이었나요?
( )
4.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는데 왜 유독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셨던 것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79~3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적인 의미의 우상’과 ‘영적인 의미의 우상’
육적인 의미의 우상이란? 형태가 없는 신을 물질적인 형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는 형상을 말한다. 나무, 돌, 쇠붙이, 금, 은 등으로 사람, 짐승, 곤충, 새, 물고기, 해, 달, 별 등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의미의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자기 욕심을 좇아 부모나 남편, 아내 혹은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영적인 우상이 된다. 또한 자기 자신을 최고로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곧 우상이다.
교육목표 :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날이 갈수록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해져 갑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 간에 훈훈한 정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자신의 삶에만 급급할 뿐 다른 사람에게는 무관심하지요. 자기 유익을 위해 상대가 어떤 해를 입어도 상관치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1. 죄로 인해 극심한 가뭄을 겪게 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아합 왕이 이방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하자 백성들도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며 온갖 죄를 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였다’고 나오지요. 이는 아합 왕이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역대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 그리고 국가적으로 왜 시험 환난이 오는가 하는 점입니다. 집안의 가장이나 기업의 머리가 바로 서지 못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지요. 국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재앙을 내리시기 전,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에게 예언하게 하십니다. 즉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였지요. 비를 내리지 않음으로 아합 왕이 깨닫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섬겼던 풍요와 비의 신인 바알이 헛된 우상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지요.
그런데 아합 왕은 회개는커녕 하나님의 뜻을 전한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아침과 저녁으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지요. 극심한 가뭄으로 그릿 시냇물까지 말라 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과부에게 “내가 내 종 엘리야를 보낼 테니 이렇게 공궤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마음을 주관하여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지요.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마음에 주관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2.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이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림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종이었지요. 그래서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하던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수백 명을 모으고 단신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단에 번제물을 놓은 후 각자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여 어떤 신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는가 하는 것으로 참 신을 가리고자 했지요. 결국 엘리야는 불의 응답을 받아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엘리야이기에 까마귀를 통해서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사르밧에 이른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합니다. 이때 순순히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향해 엘리야는 또다시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부탁하지요.
오랜 가뭄으로 물도 구하기 힘든 상황인데 음식까지 달라고 하니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감정 상해 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민망히 여기며 설명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지요.
즉 엘리야가 여인에게 구한 것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양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엘리야처럼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을 하러 갔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 그 남은 음식을 달라고 하는 자체가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만일 엘리야가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여인의 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합니다. 금덩이를 가지고 와도 곡식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가뭄 속에서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만큼 남은 곡식을 달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엘리야의 요청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만일 자기 말대로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왜 나처럼 가난한 과부에게 양식을 달라고 청할까?’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즉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고 마음이 선한지를 알 수 있지요.
3.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마음 중심을 아셨기에 많은 사람 중에 사르밧 과부를 통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런데 아무나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의 마음이 선하고 또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에 그 믿음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축복을 받게 된 것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지요.
열왕기상 17장 15~16절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였습니다. 즉 극심한 가뭄이 다할 때까지 조금도 양식을 걱정하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르밧 과부의 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베풀어졌다는 점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 같은 선의 행함을 보일 만한 중심이었지만 상대가 엘리야였기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보장받는 엘리야를 여인에게 보내셨습니다.
만약 과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엘리야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상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순종이 나올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달라는 대로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가 한 쪽뿐인 콩을 다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고, 달라 하지 않아도 마음에 주관받을 때에 그대로 순종하여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마지막 양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궤할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의 마음만으로는 축복해 주실 수 없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마음의 선을 행함으로 나타낼 때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참된 선을 이루며 그 선을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역대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악을 행했던 왕은 누구일까요?
( )
2. 사르밧 과부는 어떠한 마음을 지녔기에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마지막 남은 양식을 선지자에게 공궤할 수 있었을까요?
( )
3.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양식은 무엇이었나요?
( )
4.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는데 왜 유독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셨던 것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79~3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적인 의미의 우상’과 ‘영적인 의미의 우상’
육적인 의미의 우상이란? 형태가 없는 신을 물질적인 형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는 형상을 말한다. 나무, 돌, 쇠붙이, 금, 은 등으로 사람, 짐승, 곤충, 새, 물고기, 해, 달, 별 등의 형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의미의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자기 욕심을 좇아 부모나 남편, 아내 혹은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영적인 우상이 된다. 또한 자기 자신을 최고로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곧 우상이다.
2014-10-31
제44과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마 8:5~13
읽을말씀 : 마 8:5~13 | 외울말씀 : 약 2:26 ㅣ 참고 말씀:요 1:47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말과 행함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백부장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고백과 그에 따르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스라엘 가버나움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지요.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피지배국 백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사람의 병이 어떻게 기도한다고 치료될 수 있는가?’ 하거나 ‘나는 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온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데 어떻게 피지배국의 평민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인가?’ 하며 체면을 중시했다면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동족인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님을 판단 정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판단하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믿고 담대히 그 앞에 나왔지요. 그리고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하인의 병을 고쳐 주기를 구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시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며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백부장이 이처럼 예수님께 칭찬받을 만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소문이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이었기에 그 자체를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선이 얼마나 임해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세가 현저히 달라지지요. 설령 하나님을 몰라도 선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선이 임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선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백부장의 말과 행함 속에 나타난 선한 마음
그러면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말과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자신의 축복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 사회로 계급이 뚜렷했고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면 대부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거나 가난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인품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마음으로 대했을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백부장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문제 자체가 예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즉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응답해 주셨지요.
둘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이 선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우러러 뵐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으로 여기며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 없이 말씀하시거나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 가운데 가르침과 깨우침을 더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정확한 기한과 때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으니 백부장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기뻐하신 것은 단지 하인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는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진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나다나엘을 처음 보시고도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중심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즉 백부장의 마음속에 진실함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지요.
셋째로,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물론 위로는 천부장이 있지만 백부장이 거느린 백 명이 있는 곳으로 따로 파송받아 나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최고의 머리입니다. 이럴 때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아래에 군사가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먼저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며 예수님 앞에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여 완전히 낮춤으로 예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백부장은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이토록 낮추니 예수님께서는 감동이 되실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가 진리 가운데 살아감으로 마음이 변화되며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서는 하늘처럼 높으신 분이며 자신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며 중심에서 더욱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자신을 종의 위치로까지 낮추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백부장에게는 참된 영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도 천하 만물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니, 믿은 대로 하인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요, 참이지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 따르는 표적들로 역사해 주십니다.
본 교회에도 개척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앉은뱅이가 걷고 뛰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지요. 혹자는 “나는 믿는데도 안 돼요.”라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믿음대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2:14~26).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처럼 마음밭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믿음의 길을 변함없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혹자는 “무조건 선하게만 생각하고 믿어 주기만 한다면 속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만 믿으려 하고 듣고자 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것일 때는 속지도 않을뿐더러 성령의 주관을 받아 분별하게 됩니다. 그러니 선한 것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참되고 선한 소식, 복음을 의심치 않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한 말과 행함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백부장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 )
2. 백부장은 누구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나요? ( )
3.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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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시자 백부장은 뭐라고 대답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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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49~27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영적인 믿음’이란?
자신이 배운 지식이나 생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다 믿으며, 한 번 믿은 것은 현실과 조건에 상관없이 변개하지 않고 믿는 믿음이다. 또한 알고 있는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증거를 보이는 믿음을 말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말과 행함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백부장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고백과 그에 따르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스라엘 가버나움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지요.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피지배국 백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사람의 병이 어떻게 기도한다고 치료될 수 있는가?’ 하거나 ‘나는 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온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데 어떻게 피지배국의 평민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인가?’ 하며 체면을 중시했다면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동족인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님을 판단 정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판단하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믿고 담대히 그 앞에 나왔지요. 그리고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하인의 병을 고쳐 주기를 구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시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며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백부장이 이처럼 예수님께 칭찬받을 만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 소문이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이었기에 그 자체를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선이 얼마나 임해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세가 현저히 달라지지요. 설령 하나님을 몰라도 선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선이 임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선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백부장의 말과 행함 속에 나타난 선한 마음
그러면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말과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자신의 축복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 사회로 계급이 뚜렷했고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면 대부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거나 가난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인품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마음으로 대했을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백부장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문제 자체가 예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즉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응답해 주셨지요.
둘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이 선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우러러 뵐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으로 여기며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 없이 말씀하시거나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 가운데 가르침과 깨우침을 더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정확한 기한과 때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으니 백부장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기뻐하신 것은 단지 하인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는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진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나다나엘을 처음 보시고도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중심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즉 백부장의 마음속에 진실함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지요.
셋째로,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물론 위로는 천부장이 있지만 백부장이 거느린 백 명이 있는 곳으로 따로 파송받아 나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최고의 머리입니다. 이럴 때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아래에 군사가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먼저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며 예수님 앞에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여 완전히 낮춤으로 예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백부장은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이토록 낮추니 예수님께서는 감동이 되실 수밖에 없었지요.
우리가 진리 가운데 살아감으로 마음이 변화되며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서는 하늘처럼 높으신 분이며 자신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며 중심에서 더욱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자신을 종의 위치로까지 낮추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백부장에게는 참된 영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도 천하 만물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니, 믿은 대로 하인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요, 참이지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 따르는 표적들로 역사해 주십니다.
본 교회에도 개척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앉은뱅이가 걷고 뛰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지요. 혹자는 “나는 믿는데도 안 돼요.”라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믿음대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2:14~26).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처럼 마음밭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믿음의 길을 변함없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혹자는 “무조건 선하게만 생각하고 믿어 주기만 한다면 속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만 믿으려 하고 듣고자 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것일 때는 속지도 않을뿐더러 성령의 주관을 받아 분별하게 됩니다. 그러니 선한 것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참되고 선한 소식, 복음을 의심치 않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한 말과 행함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백부장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 )
2. 백부장은 누구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구했나요? ( )
3.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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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시자 백부장은 뭐라고 대답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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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49~27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영적인 믿음’이란?
자신이 배운 지식이나 생각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 말씀이라면 다 믿으며, 한 번 믿은 것은 현실과 조건에 상관없이 변개하지 않고 믿는 믿음이다. 또한 알고 있는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증거를 보이는 믿음을 말한다.
2014-10-24
제43과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 15:21~28
읽을말씀 : 마 15:21~28 | 외울말씀 : 잠 18:12 l 참고 말씀:막 7:24~30
교육목표 :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겸비한 마음과 믿음의 고백으로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마디 말이 상대에게 감동을 줄 때 그 열매는 상상할 수도 없이 큰 축복으로 되돌아옵니다. 선한 감동의 말은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며 행복을 안겨다 주므로, 잔칫집의 흥겨운 음악 소리보다 즐겁다 할 수 있지요. 세상에는 선한 말로 감동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악하고 미련한 말을 내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솔하고 무책임한 말로 남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그 말로 인해 자신도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면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얼마나 선한 믿음의 고백이 감동을 주며,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시당하는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머무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 지방에도 두루 퍼져 있어서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지요.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귀신이 나가고,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였는데 만나게 된 것이지요.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이 치료받겠다는 기쁨과 떨림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르는 척 외면하시니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었지요.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수로보니게 여인의 행동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여인이 모르는 남자 앞에 나설 수 없는 데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자존심이나 두려움을 생각지 않고 예수님께 간청했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인이 측은했던지 보다 못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청합니다. 제자들까지 나섰으니 예수님께서 “그럼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여인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대답해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라고 위로해 주는 것도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온 것이지 이방인인 너를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이지요.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의 부모님이 타교회 다니시는데 불치병에 걸려 치료받고자 “당회장님, 기도해 주세요.”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당회장님께서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니니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때 “아이구! 사랑이 많으신 줄 알았는데….” 하며 실망하며 포기해 버리거나, “듣던 소문과는 다르네. 세상에 내 교회, 네 교회 따질 수 있는가? 그래도 찾아온 성의가 있는데 기도해 주셔야지.” 서운해하며 돌아가 버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선한 사람은 “당회장님, 저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왔으니 기도해 주시면 나을 줄로 믿습니다.” 하며 끝까지 매달릴 것입니다. 당회장님께서 그렇게 박대하실 리도 없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정말 선한 중심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온 분이라면,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오히려 선한 말로 감동적인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런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더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2.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끝까지 겸비하게 믿음을 내보인 여인
예수님께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간청하는 여인에게 응답하셨을까요? 오히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실 은혜를 이방인에게 베푸는 것은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는 “여인아, 너는 개와 같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개는 가증한 동물로서 좋지 않은 것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 했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마 7:6) 했지요. 만일 일말의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개에 비유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이렇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돌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떠했습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손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먼저 “옳습니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부터 하고 있지요. 그런 다음 “주여 내가 개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개들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저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다시 간청하였습니다. 끝까지 겸비한 자세로 믿음을 내보인 여인의 선한 말은 예수님을 감동시켜 결국 응답을 주시기에 이릅니다. 즉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즉시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선은 무엇일까요?
3. 응답받을 수밖에 없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선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딸이 귀신 들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딸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 받는 것을 볼 때 어미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자기가 그 고통을 대신했으면 했지 딸의 고통을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예수님을 찾아와 간절히 소리 질러 소원을 아뢰었지요. 하지만 여인에게 돌아온 것은 응답이 아니라, 예수님의 침묵이셨고 그다음에는 개 취급을 당하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왜 여인에게 그처럼 매몰차게 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또 여인을 통해 참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개 취급을 받고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했다는 것은 여인이 그만큼 선했다는 것을 보여 주지요. 딸이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개 취급을 당한다 해도 상관없고, 그보다 더 낮아져도 상관이 없는 마음이었던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으로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자존심을 내세울 것이 무엇이며 부끄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에서는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서 ‘이럴 때에는 내가 이러한 겸손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 되겠다.’고 하며 그와 비슷한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그처럼 거듭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실 때는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선한 중심에 겸비한 마음이 임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이 이 여인과 같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애매한 말을 들었다 해도 감정이 나거나 다투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자신이 먼저 말로써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나에게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지혜를 동원하면 오히려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줌으로 ‘내가 참으로 잘못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일 수 있는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꼭 마음에 새겨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응답받고자 하는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 )
2.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에 비유를 당하며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에 어떠한 선한 고백을 예수님께 했을까요?
( )
3. 성경에 개는 가증한 동물로 좋지 않은 것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찾아 써 보세요.
( )
4. 만일 여러분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면 어떠한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25~24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개에게 먹게 하는 것은 최고의 모욕’
성서 시대 유대인들은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개가 먹도록 방치하는 것을 최고의 모욕과 수치로 여겼다. 북이스라엘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 이방 신들을 섬기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심히 타락하였다. 그 응징으로 이세벨은 창 밖으로 던져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말씀(왕상 21:23)하셨는데 그대로 되었다(왕하 9:30~37).
교육목표 :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겸비한 마음과 믿음의 고백으로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마디 말이 상대에게 감동을 줄 때 그 열매는 상상할 수도 없이 큰 축복으로 되돌아옵니다. 선한 감동의 말은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며 행복을 안겨다 주므로, 잔칫집의 흥겨운 음악 소리보다 즐겁다 할 수 있지요. 세상에는 선한 말로 감동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악하고 미련한 말을 내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솔하고 무책임한 말로 남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그 말로 인해 자신도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면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얼마나 선한 믿음의 고백이 감동을 주며,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시당하는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머무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 지방에도 두루 퍼져 있어서 순식간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지요.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귀신이 나가고,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하였는데 만나게 된 것이지요.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이 치료받겠다는 기쁨과 떨림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르는 척 외면하시니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었지요.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수로보니게 여인의 행동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여인이 모르는 남자 앞에 나설 수 없는 데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자존심이나 두려움을 생각지 않고 예수님께 간청했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인이 측은했던지 보다 못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청합니다. 제자들까지 나섰으니 예수님께서 “그럼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여인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대답해 주지 않아서 미안하다.”라고 위로해 주는 것도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온 것이지 이방인인 너를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이지요.
만일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의 부모님이 타교회 다니시는데 불치병에 걸려 치료받고자 “당회장님, 기도해 주세요.”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당회장님께서 “우리 교회 성도가 아니니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때 “아이구! 사랑이 많으신 줄 알았는데….” 하며 실망하며 포기해 버리거나, “듣던 소문과는 다르네. 세상에 내 교회, 네 교회 따질 수 있는가? 그래도 찾아온 성의가 있는데 기도해 주셔야지.” 서운해하며 돌아가 버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선한 사람은 “당회장님, 저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왔으니 기도해 주시면 나을 줄로 믿습니다.” 하며 끝까지 매달릴 것입니다. 당회장님께서 그렇게 박대하실 리도 없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정말 선한 중심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온 분이라면,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오히려 선한 말로 감동적인 대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런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더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2.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끝까지 겸비하게 믿음을 내보인 여인
예수님께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간청하는 여인에게 응답하셨을까요? 오히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실 은혜를 이방인에게 베푸는 것은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는 “여인아, 너는 개와 같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개는 가증한 동물로서 좋지 않은 것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 했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마 7:6) 했지요. 만일 일말의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개에 비유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이렇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돌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떠했습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며 겸손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먼저 “옳습니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부터 하고 있지요. 그런 다음 “주여 내가 개와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개들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저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다시 간청하였습니다. 끝까지 겸비한 자세로 믿음을 내보인 여인의 선한 말은 예수님을 감동시켜 결국 응답을 주시기에 이릅니다. 즉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즉시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선은 무엇일까요?
3. 응답받을 수밖에 없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선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사랑하는 딸이 귀신 들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딸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 받는 것을 볼 때 어미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자기가 그 고통을 대신했으면 했지 딸의 고통을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예수님을 찾아와 간절히 소리 질러 소원을 아뢰었지요. 하지만 여인에게 돌아온 것은 응답이 아니라, 예수님의 침묵이셨고 그다음에는 개 취급을 당하는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왜 여인에게 그처럼 매몰차게 대하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여인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또 여인을 통해 참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개 취급을 받고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겸손하게 고백했다는 것은 여인이 그만큼 선했다는 것을 보여 주지요. 딸이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개 취급을 당한다 해도 상관없고, 그보다 더 낮아져도 상관이 없는 마음이었던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참으로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있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자존심을 내세울 것이 무엇이며 부끄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중심에서는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서 ‘이럴 때에는 내가 이러한 겸손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 되겠다.’고 하며 그와 비슷한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그처럼 거듭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실 때는 결국 본색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선한 중심에 겸비한 마음이 임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이 이 여인과 같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애매한 말을 들었다 해도 감정이 나거나 다투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자신이 먼저 말로써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나에게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지혜를 동원하면 오히려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줌으로 ‘내가 참으로 잘못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일 수 있는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꼭 마음에 새겨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응답받고자 하는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 )
2.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에 비유를 당하며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에 어떠한 선한 고백을 예수님께 했을까요?
( )
3. 성경에 개는 가증한 동물로 좋지 않은 것을 비유할 때 쓰입니다. 해당되는 성경 구절을 찾아 써 보세요.
( )
4. 만일 여러분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면 어떠한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225~24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개에게 먹게 하는 것은 최고의 모욕’
성서 시대 유대인들은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개가 먹도록 방치하는 것을 최고의 모욕과 수치로 여겼다. 북이스라엘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 이방 신들을 섬기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심히 타락하였다. 그 응징으로 이세벨은 창 밖으로 던져져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말씀(왕상 21:23)하셨는데 그대로 되었다(왕하 9:30~37).
2014-10-17
제42과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읽을말씀 : 단 3:13~18 | 외울말씀 : 살전 5:16~18 ㅣ 참고 말씀:고후 11:23~27
교육목표 :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요즘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사랑한다거나,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니 나도 그 대가로 무엇을 해 준다.”는 조건부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고 희생하기보다는 “상대가 먼저 이렇게 해 주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조건이 붙는 것이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도 조건 없이 해 주면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부적인 모습은 하나님 앞에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숨을 달라 하셔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풀무불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어떤 타협이나 조건도 내세우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다니엘의 세 친구
바벨론은 B.C. 605년 남유다를 침략하여 왕족과 귀족 등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도 있었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남유다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진미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진미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습니다. 다니엘은 감독자에게 열흘 동안 채식을 할 테니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과 비교해 보라고 청합니다. 열흘 후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 아름답고 윤택하였기에 채식만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말씀대로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고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고 세 친구는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2. “우리 하나님이 능히 건져 내시겠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어느 날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모두 절하게 한 것입니다. 만일 신상에 경배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선포했지요. 그러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절을 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는 조금도 요동함 없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히 말합니다(단 3:17~18).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하였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한 것이기에 이런 시험이 온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행할 바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찌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칠 배나 더한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 나왔지요(단 3:27).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단 3:28~30). 이처럼 아무 잘못 없이 시험이 왔을 때 믿음으로 이기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셔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3. 조건부적인 신앙을 깨뜨려야
만일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가정, 일터, 사업터의 문제를 해결받기 원한다면 ‘내가 과연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온전히 말씀대로 행해 왔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행할 바를 하지 않으면서 응답이 더디다고 원망, 불평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냉철히 살펴보아야 하지요.
또한 할 바는 어느 정도 했어도 응답될 때까지 변함없이 행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즉 중도에 의심하거나 포기해 버리고, 원망과 탄식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하지요. 만약 그런 중심이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가 없지요.
더구나 “내가 응답받으면 하나님을 정말 믿겠다.”라는 조건부적인 신앙이라면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조건부적인 거짓된 믿음입니다.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을 믿고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믿지 못하고,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겠다는 것을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조건부적인 신앙과 충성에 응답해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녀의 간구와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하는 사람은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내가 설령 응답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감사하며 믿어드려야 하지요.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며, 이런 선의 마음이 있을 때 그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한 번 주님을 만난 후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순교하는 그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습니다(행 20:24).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아가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하자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지요. 목숨이 아까워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변함없는 중심으로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으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지요.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며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3~27).
여러분 중에 이러한 사도 바울보다 더한 고난을 받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감당할 때 사람에게 걸리거나 믿음이 부족하여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면 이는 변개하는 비진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조건 없는 신앙이었기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염려했지요. 이렇게 그 중심이 온전하며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의 행함을 보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행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행 19:12).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중심과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남유다 족속으로 B.C. 605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 아닌 것은?
① 다니엘 ② 사드락 ③ 아벳느고 ④ 느부갓네살
2. 거대한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을 하라고 명령했던 바벨론 왕은 누구일까요? ( )
3.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을지언정 왜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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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조건부적인 신앙은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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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99~2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4~6)
교육목표 :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요즘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사랑한다거나,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니 나도 그 대가로 무엇을 해 준다.”는 조건부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고 희생하기보다는 “상대가 먼저 이렇게 해 주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조건이 붙는 것이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도 조건 없이 해 주면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부적인 모습은 하나님 앞에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숨을 달라 하셔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참된 신앙을 소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풀무불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어떤 타협이나 조건도 내세우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다니엘의 세 친구
바벨론은 B.C. 605년 남유다를 침략하여 왕족과 귀족 등 사회 지도층 일부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도 있었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남유다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진미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의 진미로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습니다. 다니엘은 감독자에게 열흘 동안 채식을 할 테니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과 비교해 보라고 청합니다. 열흘 후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 아름답고 윤택하였기에 채식만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말씀대로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고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고 세 친구는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2. “우리 하나님이 능히 건져 내시겠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어느 날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모두 절하게 한 것입니다. 만일 신상에 경배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고 선포했지요. 그러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절을 하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는 조금도 요동함 없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호히 말합니다(단 3:17~18).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하였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한 것이기에 이런 시험이 온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행할 바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찌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구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칠 배나 더한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살아 나왔지요(단 3:27).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세 친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단 3:28~30). 이처럼 아무 잘못 없이 시험이 왔을 때 믿음으로 이기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셔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3. 조건부적인 신앙을 깨뜨려야
만일 질병을 치료받기 원하거나 가정, 일터, 사업터의 문제를 해결받기 원한다면 ‘내가 과연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온전히 말씀대로 행해 왔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행할 바를 하지 않으면서 응답이 더디다고 원망, 불평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냉철히 살펴보아야 하지요.
또한 할 바는 어느 정도 했어도 응답될 때까지 변함없이 행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즉 중도에 의심하거나 포기해 버리고, 원망과 탄식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하지요. 만약 그런 중심이라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가 없지요.
더구나 “내가 응답받으면 하나님을 정말 믿겠다.”라는 조건부적인 신앙이라면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조건부적인 거짓된 믿음입니다.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을 믿고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믿지 못하고, 응답해 주시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겠다는 것을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조건부적인 신앙과 충성에 응답해 주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녀의 간구와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응답받고자 하는 사람은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내가 설령 응답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감사하며 믿어드려야 하지요.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며, 이런 선의 마음이 있을 때 그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한 번 주님을 만난 후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순교하는 그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습니다(행 20:24).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아가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고 하자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지요. 목숨이 아까워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변함없는 중심으로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으며,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지요.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며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헐벗었습니다(고후 11:23~27).
여러분 중에 이러한 사도 바울보다 더한 고난을 받은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감당할 때 사람에게 걸리거나 믿음이 부족하여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면 이는 변개하는 비진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조건 없는 신앙이었기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염려했지요. 이렇게 그 중심이 온전하며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의 행함을 보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행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행 19:12).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중심과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남유다 족속으로 B.C. 605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 아닌 것은?
① 다니엘 ② 사드락 ③ 아벳느고 ④ 느부갓네살
2. 거대한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을 하라고 명령했던 바벨론 왕은 누구일까요? ( )
3.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을지언정 왜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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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조건부적인 신앙은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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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99~2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4~6)
2014-10-10
제41과범죄치 마옵소서
삼상 19:1~6
읽을말씀 : 삼상 19:1~6 | 외울말씀 : 살전 5:22 ㅣ 참고 말씀:삼상 20장
교육목표 :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상대가 범죄치 않도록 도와주며 진리로 이끌어 줄 수 있게 한다.
악한 아버지 사울 왕으로 인해 아들 요나단은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멸망의 길로 가는 아버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에 사울 왕이 범죄치 않도록 수시로 간언을 하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요나단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사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1. 영적인 사랑으로 범죄를 막은 요나단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 그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위치였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용사였으며 백성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할 정도로 사울 왕의 신임을 받았지요(삼상 20:2). 그런데 요나단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곧 아버지 사울 왕이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9장 1~3절을 보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다윗을 그 위험에서 도와주려는 요나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해 준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요?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고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입니다. 만일 다윗이 없었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 져서 사울 왕의 목숨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전쟁에 나가는 곳마다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했던 사울 왕이 악신으로 고통을 받을 때도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생명의 은인이자 훌륭한 신하인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다윗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지요.
어느 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왕과 군대를 맞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크게 돌리자 이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한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집에 군사를 보내 죽이라 명하기도 하며 다윗을 잡으러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니기도 하였지요.
사울 왕은 악이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마음이 선한 요나단이 사울 왕의 악에 동조할 리가 없지요. 오히려 아버지가 범죄하지 않도록 다윗을 변호하며 간언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9장 4~5절을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단호히 직언을 올리지요.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육적으로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되면 요나단이 왕위에 오를 수 없으니 차라리 다윗이 죽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분별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지요. 요나단의 말에 사울 왕은 잘못을 잠시 뉘우치는 것 같았지만 얼마 못 가 또 변개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마다 옆에서 요나단은 사울 왕이 범죄치 않도록 막았고, 이에 사울 왕은 노하여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 끝까지 선을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 요나단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 왕의 반응을 보기 위해 “다윗이 베들레헴에 가도록 자신이 허락하였다.”고 말합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감시하거나 악의를 품지 않았다면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요나단에게 심히 노하며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수치이며, 다윗은 죽어야 할 자라.” 하지요.
이에 요나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라고 다윗을 변호하며 사울 왕의 악을 깨우쳐 주지요. 그러자 사울 왕은 단창을 들어 아들 요나단을 치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고 신뢰하는 요나단이 다윗 편을 드니 분에 못 이겨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며 사울 왕이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했지요.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범죄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깊은 차원의 선(善)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람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더욱 큰 고통을 받지요. 요나단 역시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렸지만 이 역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선한 행동이었지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지요.
사울 왕처럼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고 이웃까지 피해를 입게 됩니다. 또한 몇몇 사람의 범죄로 백성 전체가 고통 받기도 하고, 머리가 범죄하면 그 피해가 더 심각해질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아니하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선(善)은 범죄를 막고 진리로 이끄는 것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힘쓰며 본이 된 성도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가족 중에 누구라도 입술에 부정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하면 권면하여 진리의 말만 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가족의 믿음이 좋았기에 일부러 죄를 짓는다거나 크게 범죄하는 일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작은 죄도 짓지 않도록 막아 주니 가족 전체가 더욱 진리로 변화되어 교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온전한 선은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러한 선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가족들에게 늘 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도록 인도했지요.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마음 상할까봐 혹은 화평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육적인 정에 가려 묵과해 버리지요. 이는 엘리 제사장과 같이 육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삼상 2~4장).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이 크게 범죄했을 때도 말로만 권면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을 때 무조건 덮어 두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견제하고 버릴 수 있도록 권면하는 것이 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 해도 끝까지 선을 행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그 마음이 선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충만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했을 때 그 악에 동조하지 않고 간언하였고 마침내는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었지요. 요나단이 죽자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다윗이 왕자 중의 하나처럼 대우해 주며, 사울 왕의 재산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처럼 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울 왕의 장남은 누구일까요?
① 기스 ② 말기수아 ③ 미갈 ④ 요나단
2. ( ) 안에 알맞은 답을 써보세요.
요나단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며 사울 왕이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 )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 )를 다하며 더욱 깊은 차원의 ( )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3. 사울 왕은 악이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할 때 요나단이 사울에게 직언한 내용입니다. 사무엘상 19:4~5을 써보세요.
( )
4. 두 아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크게 범죄했는데도 말로만 타이르다가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75~19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 제사장’
사무엘 선지자의 스승이며, 사사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다스렸다. 그러나 두 아들을 교육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불량자인 두 아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였는데도 엘리 제사장은 어떤 징계도 가하지 않고 말로써만 타이를 뿐이었다. 이로 인해 가문에 저주가 임해 두 아들이 전투에서 죽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교육목표 :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 상대가 범죄치 않도록 도와주며 진리로 이끌어 줄 수 있게 한다.
악한 아버지 사울 왕으로 인해 아들 요나단은 많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멸망의 길로 가는 아버지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에 사울 왕이 범죄치 않도록 수시로 간언을 하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은 요나단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사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1. 영적인 사랑으로 범죄를 막은 요나단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 그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위치였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용사였으며 백성들에게도 사랑을 받았습니다. 또한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할 정도로 사울 왕의 신임을 받았지요(삼상 20:2). 그런데 요나단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곧 아버지 사울 왕이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9장 1~3절을 보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다윗을 그 위험에서 도와주려는 요나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울 왕은 나라를 구해 준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것일까요?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고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입니다. 만일 다윗이 없었다면 블레셋과의 전쟁에 져서 사울 왕의 목숨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전쟁에 나가는 곳마다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했던 사울 왕이 악신으로 고통을 받을 때도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생명의 은인이자 훌륭한 신하인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다윗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지요.
어느 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왕과 군대를 맞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크게 돌리자 이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한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집에 군사를 보내 죽이라 명하기도 하며 다윗을 잡으러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니기도 하였지요.
사울 왕은 악이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마음이 선한 요나단이 사울 왕의 악에 동조할 리가 없지요. 오히려 아버지가 범죄하지 않도록 다윗을 변호하며 간언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9장 4~5절을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단호히 직언을 올리지요.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육적으로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되면 요나단이 왕위에 오를 수 없으니 차라리 다윗이 죽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분별하였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지요. 요나단의 말에 사울 왕은 잘못을 잠시 뉘우치는 것 같았지만 얼마 못 가 또 변개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마다 옆에서 요나단은 사울 왕이 범죄치 않도록 막았고, 이에 사울 왕은 노하여 요나단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 끝까지 선을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 요나단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 왕의 반응을 보기 위해 “다윗이 베들레헴에 가도록 자신이 허락하였다.”고 말합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을 감시하거나 악의를 품지 않았다면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요나단에게 심히 노하며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수치이며, 다윗은 죽어야 할 자라.” 하지요.
이에 요나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라고 다윗을 변호하며 사울 왕의 악을 깨우쳐 주지요. 그러자 사울 왕은 단창을 들어 아들 요나단을 치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고 신뢰하는 요나단이 다윗 편을 드니 분에 못 이겨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며 사울 왕이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했지요.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범죄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깊은 차원의 선(善)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람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더욱 큰 고통을 받지요. 요나단 역시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렸지만 이 역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선한 행동이었지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지요.
사울 왕처럼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고 죄를 지으면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고 이웃까지 피해를 입게 됩니다. 또한 몇몇 사람의 범죄로 백성 전체가 고통 받기도 하고, 머리가 범죄하면 그 피해가 더 심각해질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아니하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선(善)은 범죄를 막고 진리로 이끄는 것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힘쓰며 본이 된 성도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가족 중에 누구라도 입술에 부정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하면 권면하여 진리의 말만 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가족의 믿음이 좋았기에 일부러 죄를 짓는다거나 크게 범죄하는 일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작은 죄도 짓지 않도록 막아 주니 가족 전체가 더욱 진리로 변화되어 교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온전한 선은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러한 선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가족들에게 늘 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도록 인도했지요.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마음 상할까봐 혹은 화평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육적인 정에 가려 묵과해 버리지요. 이는 엘리 제사장과 같이 육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삼상 2~4장).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이 크게 범죄했을 때도 말로만 권면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을 때 무조건 덮어 두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견제하고 버릴 수 있도록 권면하는 것이 영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 해도 끝까지 선을 행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그 마음이 선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충만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했을 때 그 악에 동조하지 않고 간언하였고 마침내는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었지요. 요나단이 죽자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다윗이 왕자 중의 하나처럼 대우해 주며, 사울 왕의 재산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처럼 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울 왕의 장남은 누구일까요?
① 기스 ② 말기수아 ③ 미갈 ④ 요나단
2. ( ) 안에 알맞은 답을 써보세요.
요나단은 아무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며 사울 왕이 돌이킬 수 있도록 권면했습니다.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 )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 )를 다하며 더욱 깊은 차원의 ( )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3. 사울 왕은 악이 발동하여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할 때 요나단이 사울에게 직언한 내용입니다. 사무엘상 19:4~5을 써보세요.
( )
4. 두 아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크게 범죄했는데도 말로만 타이르다가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일까요? ( )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75~19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 제사장’
사무엘 선지자의 스승이며, 사사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다스렸다. 그러나 두 아들을 교육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불량자인 두 아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였는데도 엘리 제사장은 어떤 징계도 가하지 않고 말로써만 타이를 뿐이었다. 이로 인해 가문에 저주가 임해 두 아들이 전투에서 죽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엘리는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2014-09-26
제39과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룻 1:16~17
읽을말씀 : 룻 1:16~17 | 외울말씀 : 출 20:12 l 참고 말씀:잠 4:2
교육목표 : 자기의 도리를 다하며 변함없이 선을 행함으로 룻처럼 영육 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날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부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지켜야 할 도리마저 저버리는 일들이 많지요. 어떤 사람들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기 귀찮다고 낯선 곳에 버리는가 하면, 홀대하고 때리는 등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마저 식어버린 때에 상대가 가족도 아닌 남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대 속에서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을 찾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룻은 과연 어떠한 선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자기 도리를 좇아 행한 이방 여인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심한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주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지요.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와 룻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을 떠납니다. 가는 도중에 나오미는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에게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룻 1:8). 남편도 없이 지내야 할 며느리들을 생각하니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이에 동서인 오르바는 울면서 떠났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었기에 시어머니가 더 이상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도록 감동적인 고백을 드리지요.
룻기 1장 16~17절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단호히 고백합니다. 아무 의지할 곳 없고 소망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저버리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이지요.
만약 룻에게 자기의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시어머니가 강권하니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함이 없고 한결같았습니다.
시어머니의 고향은 낯설고 당장 먹고 살 방편도 막막합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선의 모습이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내게 유익이 오겠다!” 하며 계산하여 따지지 않고 오직 정도와 선을 좇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으로 온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할 때 몇 번 해 보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바른 도리를 좇아 변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2. 자기 도리를 다하지 못한 사람들
오늘날은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끝까지 선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성경을 보면 룻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함으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 하여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을 공경하는 것을 마땅한 도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생명의 지식을 공급해 주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렸으니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외에도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는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선한 중심이 아니었기에 사도 바울과 함께하면 많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유익을 좇아 떠나갔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기쁘고 충만하여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고백하고는 시간이 지나 은혜가 떨어지면 그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 서원을 해 놓고 막상 응답을 받은 후에는 마음이 변하여 서원을 지키지 않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 유익을 좇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는 거리가 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내 편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풀무불에 던져져 생명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중심이 되어야 온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으로 자기 도리를 다하면 축복
룻처럼 자신의 도리를 지켜 행하면 영육 간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한 여 성도님은 단칸방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일일이 수발을 들어야 했지요.
그런데도 성도님은 조금도 원망이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 선한 행함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마음을 주관하여 돌아오게 하셨고, 단칸방에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해 행복하게 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며 섬기고 낮아지면 진리로 한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가정, 일터, 사업터, 학교 등 있는 곳을 지켜 주십니다. 즉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타지 않고, 시험 환난이 물러가며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이 임하게 되지요.
그러면 룻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고, 이런 행함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이것을 변함없는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한 룻의 행함을 통해 나는 얼마나 상대의 유익을 구하였는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며 살아왔는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그렇지 못했다면 정녕 돌이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도리를 지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라야 룻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도리를 지켜 나갔습니다. 변함없이 선으로 행했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의 모양이 있다면 회개하여 돌이키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정도를 좇는 선의 단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쳐 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룻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① 암몬 ② 베들레헴 ③ 모압 ④ 이집트
2.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모심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오르바 ② 룻 ③ 에스더 ④ 아비가일
3.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룻은 비록 ( )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 )를 지켜 나갔습니다.
변함없이 ( )으로 행했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 )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4. 만일 여러분이 룻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면 홀로된 시어머니에게 자녀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21~14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압 족속’
롯의 맏딸과 롯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모압이다. 모압 족속은 요단강 동편 사해 남동쪽 해안의 고원지대에서 살았다. 모압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행로 중 하나였는데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통과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압 땅 싯딤에 있을 동안 모압 여인들에 의해 음행의 죄를 짓게 하였다.
교육목표 : 자기의 도리를 다하며 변함없이 선을 행함으로 룻처럼 영육 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날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부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지켜야 할 도리마저 저버리는 일들이 많지요. 어떤 사람들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기 귀찮다고 낯선 곳에 버리는가 하면, 홀대하고 때리는 등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마저 식어버린 때에 상대가 가족도 아닌 남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대 속에서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을 찾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룻은 과연 어떠한 선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자기 도리를 좇아 행한 이방 여인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심한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주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지요.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와 룻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을 떠납니다. 가는 도중에 나오미는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에게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룻 1:8). 남편도 없이 지내야 할 며느리들을 생각하니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이에 동서인 오르바는 울면서 떠났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었기에 시어머니가 더 이상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도록 감동적인 고백을 드리지요.
룻기 1장 16~17절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단호히 고백합니다. 아무 의지할 곳 없고 소망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저버리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이지요.
만약 룻에게 자기의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시어머니가 강권하니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함이 없고 한결같았습니다.
시어머니의 고향은 낯설고 당장 먹고 살 방편도 막막합니다.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선의 모습이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내게 유익이 오겠다!” 하며 계산하여 따지지 않고 오직 정도와 선을 좇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 땅으로 온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선한 사람은 선을 행할 때 몇 번 해 보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바른 도리를 좇아 변함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2. 자기 도리를 다하지 못한 사람들
오늘날은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끝까지 선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성경을 보면 룻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함으로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세상에서는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 하여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을 공경하는 것을 마땅한 도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생명의 지식을 공급해 주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렸으니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외에도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는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선한 중심이 아니었기에 사도 바울과 함께하면 많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유익을 좇아 떠나갔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기쁘고 충만하여 “생명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고백하고는 시간이 지나 은혜가 떨어지면 그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 서원을 해 놓고 막상 응답을 받은 후에는 마음이 변하여 서원을 지키지 않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 유익을 좇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는 거리가 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내 편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풀무불에 던져져 생명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중심이 되어야 온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으로 자기 도리를 다하면 축복
룻처럼 자신의 도리를 지켜 행하면 영육 간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한 여 성도님은 단칸방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일일이 수발을 들어야 했지요.
그런데도 성도님은 조금도 원망이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 선한 행함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마음을 주관하여 돌아오게 하셨고, 단칸방에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해 행복하게 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믿고 신뢰하며 섬기고 낮아지면 진리로 한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가정, 일터, 사업터, 학교 등 있는 곳을 지켜 주십니다. 즉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타지 않고, 시험 환난이 물러가며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이 임하게 되지요.
그러면 룻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고, 이런 행함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이것을 변함없는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입니다.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한 룻의 행함을 통해 나는 얼마나 상대의 유익을 구하였는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며 살아왔는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그렇지 못했다면 정녕 돌이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도리를 지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라야 룻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도리를 지켜 나갔습니다. 변함없이 선으로 행했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의 모양이 있다면 회개하여 돌이키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정도를 좇는 선의 단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쳐 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룻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① 암몬 ② 베들레헴 ③ 모압 ④ 이집트
2.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 정성으로 모심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오르바 ② 룻 ③ 에스더 ④ 아비가일
3.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룻은 비록 ( )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 )를 지켜 나갔습니다.
변함없이 ( )으로 행했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 )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4. 만일 여러분이 룻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면 홀로된 시어머니에게 자녀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121~14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압 족속’
롯의 맏딸과 롯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모압이다. 모압 족속은 요단강 동편 사해 남동쪽 해안의 고원지대에서 살았다. 모압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행로 중 하나였는데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이 그 땅을 통과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압 땅 싯딤에 있을 동안 모압 여인들에 의해 음행의 죄를 짓게 하였다.
2014-09-19
제38과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4
읽을말씀 : 창 12:1~4 | 외울말씀 : 민 23:19 ㅣ 참고 말씀:말 3:10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변함없는 믿음과 선한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 건강의 복, 장수의 복 등 모든 복을 누렸습니다. 또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앞일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 주셨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소유했기에 이러한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
1)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순종
창세기 1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니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히 믿어드릴 때 갖가지 문제가 해결되고,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2)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
아브라함은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축복하셨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즉 아들을 죽여서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각을 떠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지요.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 않았고,“ 이삭을 통한 약속은 어떻게 하시고요?”라는 어떤 하 소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대로 순종했지요.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함을 온전한 것으로 받으셨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 기쁨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히 11:17~19).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함이 나올 수 있었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므로 의심이나 원망, 불평하는 것을 봅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직 순종만 따르지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까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선의 모습이었고, 그 선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왔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면 이러한 축복을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은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누구나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터에 축복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말라기 3장 10절에“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며,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순종할 때 그러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믿음, 순종, 행함이 변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드린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셨고 이 믿음을 순종과 행함을 통해 나타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있지요(롬 12:2).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이삭을 위해 아내를 택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때 종은 여자가 혹여 자신을 따라오지 않으면 이삭을 하란으로 데리고 가야 할지를 묻지요.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자를 예비하여 보내 주실 것이므로 너는 가서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고 단호히 말합니다(창 24:7).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금 행해 보다가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이내 변개해 버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면 시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에 종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고백대로 종은 이삭의 아내를 순적하게 만났습니다(창 24장).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명심하여 믿어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연단을 통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지요.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고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하여 행했으며 그 말씀을 믿어드리며 행하는 것이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선을 좇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항상 선을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했을 때입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 동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윗사람이면서도 오히려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하지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합니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선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에 거할 때 소돔과 고모라가 주변 나라와 싸움에서 패하여 모든 재물과 양식까지 빼앗기게 되었지요. 그때 롯이 사로잡혀 가고 재물까지 노략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을 데리고 가서 롯을 구해 오지요.
하나님께서는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 성을 멸하실 것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때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그의 간구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해 주시지요. 아브라함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그가 사랑하는 조카를 구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선의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여러분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선한 중심으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여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받아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 )
2. 야고보서 2:23을 써 보세요.
( )
3. 유목민에게 목초지와 물은 생존권과도 직결되는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당시 요단 들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하여 목축지로서 최상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선뜻 상대에게 최상의 것을 양보할 수 있나요?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97~12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돔’
가나안의 성읍 중 하나로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져 거주한 땅이다(창 10:19, 13:12). 소돔을 다스리던 베라 왕은 조공을 바쳤던 그돌라오멜 왕을 배신하고, 주변 나라와 동맹을 맺어 전쟁을 하였지만 패배하였다. 이로 인해 소돔에 살던 롯과 그 가족이 사로잡히고 재산도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하나님이 극도로 타락한 소돔을 멸망시키려 하실 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심판을 재고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소돔은 의인 10명이 없어 유황과 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변함없는 믿음과 선한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 건강의 복, 장수의 복 등 모든 복을 누렸습니다. 또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앞일에 대해서도 미리 알려 주셨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소유했기에 이러한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1.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
1)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순종
창세기 1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니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히 믿어드릴 때 갖가지 문제가 해결되고,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2)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
아브라함은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축복하셨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즉 아들을 죽여서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각을 떠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지요.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 않았고,“ 이삭을 통한 약속은 어떻게 하시고요?”라는 어떤 하 소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대로 순종했지요.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함을 온전한 것으로 받으셨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 기쁨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히 11:17~19).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함이 나올 수 있었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므로 의심이나 원망, 불평하는 것을 봅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직 순종만 따르지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까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선의 모습이었고, 그 선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왔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면 이러한 축복을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은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누구나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터에 축복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말라기 3장 10절에“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며,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순종할 때 그러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믿음, 순종, 행함이 변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드린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셨고 이 믿음을 순종과 행함을 통해 나타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있지요(롬 12:2).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이삭을 위해 아내를 택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때 종은 여자가 혹여 자신을 따라오지 않으면 이삭을 하란으로 데리고 가야 할지를 묻지요.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자를 예비하여 보내 주실 것이므로 너는 가서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고 단호히 말합니다(창 24:7).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금 행해 보다가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이내 변개해 버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면 시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에 종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고백대로 종은 이삭의 아내를 순적하게 만났습니다(창 24장).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명심하여 믿어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연단을 통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지요.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고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하여 행했으며 그 말씀을 믿어드리며 행하는 것이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그래서 야고보서 2장 2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선을 좇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항상 선을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했을 때입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 동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윗사람이면서도 오히려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하지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합니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선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에 거할 때 소돔과 고모라가 주변 나라와 싸움에서 패하여 모든 재물과 양식까지 빼앗기게 되었지요. 그때 롯이 사로잡혀 가고 재물까지 노략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을 데리고 가서 롯을 구해 오지요.
하나님께서는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 성을 멸하실 것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때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그의 간구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해 주시지요. 아브라함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그가 사랑하는 조카를 구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선의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여러분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선한 중심으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여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받아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 )
2. 야고보서 2:23을 써 보세요.
( )
3. 유목민에게 목초지와 물은 생존권과도 직결되는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당시 요단 들은 물이 풍부하고 비옥하여 목축지로서 최상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선뜻 상대에게 최상의 것을 양보할 수 있나요?
● 금주 과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책자 97~12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돔’
가나안의 성읍 중 하나로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져 거주한 땅이다(창 10:19, 13:12). 소돔을 다스리던 베라 왕은 조공을 바쳤던 그돌라오멜 왕을 배신하고, 주변 나라와 동맹을 맺어 전쟁을 하였지만 패배하였다. 이로 인해 소돔에 살던 롯과 그 가족이 사로잡히고 재산도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도움으로 구출된다. 하나님이 극도로 타락한 소돔을 멸망시키려 하실 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심판을 재고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소돔은 의인 10명이 없어 유황과 불로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