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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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9
제37과구원받기 위한 믿음의 1단계
행 2:38
읽을말씀 : 행 2:38 | 외울말씀 : 요 1:12 l 참고 말씀 : 행 19:1~2
교육목표 :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은 믿음의 1단계에서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워 행함으로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도 믿음으로 이뤄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이라야 하지요. 이러한 믿음에는 크고 작은 분량이 있으며, 각각의 특징에 따라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가 바로 믿음의 1단계입니다.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1. 주님을 영접해 구원받기 위한 믿음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죄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하여 죄를 지으며 살아가니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선하게 산다는 사람도 있지만 진리에 비춰 보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부모를 통해 물려받은 원죄가 있고, 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밝은 빛으로 방 안을 비춰 보면 미세한 먼지까지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보면 숨겨진 악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혈기, 다툼, 도적질 등 겉으로 드러난 죄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미움, 시기와 같은 것도 죄가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신 대로 죄인들은 반드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셨지요.
이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됩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구원받기 위한 믿음, 곧 믿음의 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을 말합니다.
2. 회개하고 성령 받기 위한 믿음
사도행전 19장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서 만난 몇몇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세례 요한의 세례도 받았지만 성령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욜 2:28, 행 2:17).
이 말씀이 오늘날 그대로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신 대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마음 문을 열어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마음 안에 보내 주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 받은 사람에게 보증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갓 성령을 받고 구원받은 단계를 믿음의 1단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1단계를 구원받기 위한 믿음, 성령 받기 위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막 성령을 받아 아직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죄와 싸워 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1단계에서 삶을 마감한다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강도의 믿음이 여기에 해당되지요.
3.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의 믿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예수님의 좌우편 십자가에 두 강도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눅 23:33). 이때 한 편 강도는 악한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했지만, 다른 강도는 오히려 그를 꾸짖으며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낙원에 함께 있겠다’ 하신 것은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씀한 것이지, 예수님이 낙원에 계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낙원을 포함한 모든 천국의 주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낙원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 곧 믿음의 1단계에 해당되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으로 천국의 가장 변두리에 해당하며 상급이 없습니다. 그 강도는 죽기 직전에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낙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해 성령 받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만 믿음의 1단계에 해당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여 하나님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1단계의 믿음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믿음이 좋아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육체의 일(행함으로 짓는 죄)을 행하면 믿음의 1단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성령 받은 직후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가르침 받는 대로 순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을 바라봄으로 성령 충만함을 잃으면 다시 구습을 좇아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짓기도 하지요. 이것이 지속되면 성령이 소멸되어 믿음의 1단계를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믿음의 1단계에 들어왔다면 예배와 기도회, 모임에 열심히 참석해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대로 순종함으로 신속히 믿음의 2, 3단계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 아닙니다. 그 중심이 얼마나 합당한지가 중요하지요. 비록 성령을 받고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 해도 말씀대로 행치 않고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쌓아 간다면 점점 성령이 소멸되어(살전 5:19) 결국 구원과 멀어집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했습니다. 만일 자녀가 세월이 흘러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부모는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믿음이 성장하지 않거나 퇴보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니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우며 믿음의 성장을 이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자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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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신생아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듯이,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늘나라 ( )에 이름이 기록된다.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받기 위한 믿음 곧 믿음의 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 )가 되는 믿음을 말한다.
2.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3.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는 천국의 어느 처소에 들어갈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67~17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믿음의 1단계가 들어가는 천국 처소 낙원
낙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 마련된 천국의 처소이다.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기에는 부끄럽지만 차마 지옥으로 보내기에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믿음의 단계로 보면 낙원은 간신히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영혼들이 들어가는 처소로서 하나님 보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약하며 천국의 처소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다.
교육목표 :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은 믿음의 1단계에서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워 행함으로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기도하여 응답받는 것도 믿음으로 이뤄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이라야 하지요. 이러한 믿음에는 크고 작은 분량이 있으며, 각각의 특징에 따라 크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가 바로 믿음의 1단계입니다. 어떠한 특징이 있을까요?
1. 주님을 영접해 구원받기 위한 믿음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죄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하여 죄를 지으며 살아가니 모든 사람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선하게 산다는 사람도 있지만 진리에 비춰 보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부모를 통해 물려받은 원죄가 있고, 살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크고 작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밝은 빛으로 방 안을 비춰 보면 미세한 먼지까지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보면 숨겨진 악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혈기, 다툼, 도적질 등 겉으로 드러난 죄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미움, 시기와 같은 것도 죄가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신 대로 죄인들은 반드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셨지요.
이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주십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듯이,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됩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구원받기 위한 믿음, 곧 믿음의 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을 말합니다.
2. 회개하고 성령 받기 위한 믿음
사도행전 19장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서 만난 몇몇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세례 요한의 세례도 받았지만 성령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임하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하나님의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욜 2:28, 행 2:17).
이 말씀이 오늘날 그대로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받은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신 대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마음 문을 열어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마음 안에 보내 주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 받은 사람에게 보증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갓 성령을 받고 구원받은 단계를 믿음의 1단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1단계를 구원받기 위한 믿음, 성령 받기 위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막 성령을 받아 아직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죄와 싸워 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1단계에서 삶을 마감한다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강도의 믿음이 여기에 해당되지요.
3.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의 믿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예수님의 좌우편 십자가에 두 강도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눅 23:33). 이때 한 편 강도는 악한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했지만, 다른 강도는 오히려 그를 꾸짖으며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자신의 영혼을 부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낙원에 함께 있겠다’ 하신 것은 강도가 구원받아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을 말씀한 것이지, 예수님이 낙원에 계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낙원을 포함한 모든 천국의 주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낙원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 곧 믿음의 1단계에 해당되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으로 천국의 가장 변두리에 해당하며 상급이 없습니다. 그 강도는 죽기 직전에 선한 양심을 좇아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낙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영접해 성령 받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만 믿음의 1단계에 해당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여 하나님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1단계의 믿음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믿음이 좋아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 육체의 일(행함으로 짓는 죄)을 행하면 믿음의 1단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성령 받은 직후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가르침 받는 대로 순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세상을 바라봄으로 성령 충만함을 잃으면 다시 구습을 좇아 세상과 짝하며 죄를 짓기도 하지요. 이것이 지속되면 성령이 소멸되어 믿음의 1단계를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 믿음의 1단계에 들어왔다면 예배와 기도회, 모임에 열심히 참석해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대로 순종함으로 신속히 믿음의 2, 3단계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이 아닙니다. 그 중심이 얼마나 합당한지가 중요하지요. 비록 성령을 받고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 해도 말씀대로 행치 않고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쌓아 간다면 점점 성령이 소멸되어(살전 5:19) 결국 구원과 멀어집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했습니다. 만일 자녀가 세월이 흘러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부모는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믿음이 성장하지 않거나 퇴보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니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열심히 말씀을 듣고 배우며 믿음의 성장을 이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고자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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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신생아가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하듯이,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늘나라 ( )에 이름이 기록된다.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받기 위한 믿음 곧 믿음의 1단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 )가 되는 믿음을 말한다.
2. 어떻게 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을까요?
3.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는 천국의 어느 처소에 들어갈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67~17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믿음의 1단계가 들어가는 천국 처소 낙원
낙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가운데 마련된 천국의 처소이다.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기에는 부끄럽지만 차마 지옥으로 보내기에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다. 믿음의 단계로 보면 낙원은 간신히 구원받은 믿음을 가진 영혼들이 들어가는 처소로서 하나님 보좌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약하며 천국의 처소 중 가장 낮은 단계에 속한다.
2016-09-02
제36과하나님께서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
롬 12:3
읽을말씀 : 롬 12:3 | 외울말씀 : 요일 2:12 ㅣ 참고 말씀: 고전 3:12~15
교육목표 : 믿음에는 크고 작은 분량이 있음을 알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해 나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도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여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1. 사람의 성장 과정에 비유한 믿음의 분량
요한일서 2장을 보면 믿음의 분량을 사람의 성장 과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 자녀들의 믿음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습니다(요 1:12). 이렇게 죄 사함 받아 구원받은 믿음이 ‘자녀들의 믿음’입니다(요일 2:12). 이때는 하나님 말씀을 잘 모르고 빛 가운데 살지도 못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이 단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겨우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로 초신자의 믿음에 불과합니다. 성령을 받아 거듭났다 해도 아직 말씀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과 짝하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때까지는 마음을 놓지 않고 늘 관심과 사랑으로 살펴 줘야 합니다.
2) 아이들의 믿음
‘자녀들의 믿음’이 성장하면 ‘아이들의 믿음’이 됩니다. ‘아이들의 믿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이제 막 알게 된 믿음을 말합니다(요일 2:14).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안다는 말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자녀가 젖먹이 때를 지나면 사물을 인지하고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는 부모를 안다 해도 고향, 취향, 학력, 성품 등 깊은 내용까지는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나 섭리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예배와 각종 모임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순종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으며 시험이 오면 불평하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3) 청년들의 믿음
아이가 성장하면 청년이 되듯이, 영적으로도 아이들의 믿음이 자라면 청년의 신앙에 이릅니다. 이때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압니다.
요한일서 2장 14절에 “청년들아 …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있으므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천국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자,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려 나가며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시험 환난을 만나도 요동하지 않으며 쉬지 않고 기도하여 감사함으로 이겨냅니다.
4) 아비들의 믿음
자기주장이 강하여 굽힐 줄 모르는 청년의 때를 지나 장년이 되면, 인생의 경륜이 쌓여 삶의 지혜가 보입니다. 앞뒤 상황 판단을 잘하여 매사에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알고,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고 다스릴 수 있는지도 알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비의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4절에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철없는 아이가 자기 수준에서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아비의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 아는 차원입니다.
2. 에스겔의 이상을 통해 살펴본 믿음의 분량
에스겔 47장 3~5절에는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사람의 몸에 차오르는 높이로 믿음의 분량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험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여기서 ‘물’은 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며, ‘그 사람’ 곧 손에 줄을 잡은 사람은 주의 사자를 말합니다. 그가 일천 척을 척량할 때마다 물이 발목에서부터 무릎과 허리, 그 이상으로 차오른다는 것은 믿음의 분량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발목까지 물이 찼다’는 것은 자녀의 믿음, ‘무릎까지 찼다’는 것은 아이의 믿음, ‘허리까지 찼다’는 것은 청년의 믿음을 나타내며 ‘키를 넘을 만큼 창일하다’는 것은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뜻합니다. ‘일천 척을 척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넓고 큰 마음과 한 치 오차도 없는 정확함, 모든 분야를 헤아리는 깊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믿음을 측정하실 때 어느 한 면이 아니라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정확하게 살핀다는 의미이지요.
3. 공력에 비유한 믿음의 분량
고린도전서 3장 12~13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터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믿음을 쌓아 가는데 공력, 곧 믿음의 행함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쌓았는가에 따라 각자 받을 상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금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불같은 시험의 때에도 요동이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이기며 이를 통해 더 큰 축복을 받아 갑니다. 그러나 은, 보석, 나무, 풀의 단계로 내려갈수록 시험을 이기는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면 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어떨까요? 금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불에 깨지고 부서지는 보석과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보석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평소에 충만해 보이다가도 시험이 오면 열심이 식고 충만함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 속에서도 어느 정도 보석의 형체가 보존되듯이 불같은 시험에도 그 공력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보석의 믿음은 금이나 은의 믿음보다는 못하지만 믿음의 행함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상급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무나 풀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보석보다 못한 믿음으로서 불같은 시험이 오면 승리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생명이 없는 마른 짚의 믿음은 구원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마음에는 구원받을 만한 영적인 믿음이 없는 경우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구원받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어떤 사람은 달의 영광을, 어떤 사람은 별의 영광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은 무수한 별들의 밝기가 다르듯이, 별의 영광이라도 믿음에 따라 각각의 영광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무나 풀의 믿음에 멈추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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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경에 믿음의 분량이 있음을 비유해 놓은 구절들을 찾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60~16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믿음의 단계/ 고전 3:12~15/ 고전 15:41/ 요일 2:12~14/ 겔 47:3~5
구원받지 못하는 단계/ 짚/ _ / _ / _
1단계(낙원) /풀 / _ /자녀들의 믿음/ 발목까지 물이 참
2단계(1천층)/ 나무/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아이들의 믿음/ 무릎까지 물이 참
3단계(2천층)/ 보석/ 달의 영광/ 청년들의 믿음/ 허리까지 물이 참
4단계(3천층)/ 은/ 해의 영광/ 아비들의 믿음/ 키를 넘을 만큼 물이 창일함
5단계/ (새 예루살렘)/ 금/ 해의 영광/ 아비들의 믿음/ 키를 넘을 만큼 물이 창일함
교육목표 : 믿음에는 크고 작은 분량이 있음을 알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정진해 나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심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도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여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1. 사람의 성장 과정에 비유한 믿음의 분량
요한일서 2장을 보면 믿음의 분량을 사람의 성장 과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 자녀들의 믿음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고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습니다(요 1:12). 이렇게 죄 사함 받아 구원받은 믿음이 ‘자녀들의 믿음’입니다(요일 2:12). 이때는 하나님 말씀을 잘 모르고 빛 가운데 살지도 못합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와 같이 단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겨우 구원받을 수 있는 상태로 초신자의 믿음에 불과합니다. 성령을 받아 거듭났다 해도 아직 말씀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과 짝하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때까지는 마음을 놓지 않고 늘 관심과 사랑으로 살펴 줘야 합니다.
2) 아이들의 믿음
‘자녀들의 믿음’이 성장하면 ‘아이들의 믿음’이 됩니다. ‘아이들의 믿음’은 아버지 하나님을 이제 막 알게 된 믿음을 말합니다(요일 2:14).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안다는 말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자녀가 젖먹이 때를 지나면 사물을 인지하고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는 부모를 안다 해도 고향, 취향, 학력, 성품 등 깊은 내용까지는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나 섭리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예배와 각종 모임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순종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으며 시험이 오면 불평하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3) 청년들의 믿음
아이가 성장하면 청년이 되듯이, 영적으로도 아이들의 믿음이 자라면 청년의 신앙에 이릅니다. 이때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압니다.
요한일서 2장 14절에 “청년들아 …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있으므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천국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자,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려 나가며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시험 환난을 만나도 요동하지 않으며 쉬지 않고 기도하여 감사함으로 이겨냅니다.
4) 아비들의 믿음
자기주장이 강하여 굽힐 줄 모르는 청년의 때를 지나 장년이 되면, 인생의 경륜이 쌓여 삶의 지혜가 보입니다. 앞뒤 상황 판단을 잘하여 매사에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알고,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고 다스릴 수 있는지도 알지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비의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4절에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아이의 믿음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철없는 아이가 자기 수준에서 부모를 이해하는 것이라면 아비의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 아는 차원입니다.
2. 에스겔의 이상을 통해 살펴본 믿음의 분량
에스겔 47장 3~5절에는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사람의 몸에 차오르는 높이로 믿음의 분량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험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여기서 ‘물’은 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며, ‘그 사람’ 곧 손에 줄을 잡은 사람은 주의 사자를 말합니다. 그가 일천 척을 척량할 때마다 물이 발목에서부터 무릎과 허리, 그 이상으로 차오른다는 것은 믿음의 분량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발목까지 물이 찼다’는 것은 자녀의 믿음, ‘무릎까지 찼다’는 것은 아이의 믿음, ‘허리까지 찼다’는 것은 청년의 믿음을 나타내며 ‘키를 넘을 만큼 창일하다’는 것은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뜻합니다. ‘일천 척을 척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넓고 큰 마음과 한 치 오차도 없는 정확함, 모든 분야를 헤아리는 깊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믿음을 측정하실 때 어느 한 면이 아니라 모든 분야를 종합적으로 정확하게 살핀다는 의미이지요.
3. 공력에 비유한 믿음의 분량
고린도전서 3장 12~13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터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믿음을 쌓아 가는데 공력, 곧 믿음의 행함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쌓았는가에 따라 각자 받을 상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금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불같은 시험의 때에도 요동이 없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이기며 이를 통해 더 큰 축복을 받아 갑니다. 그러나 은, 보석, 나무, 풀의 단계로 내려갈수록 시험을 이기는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면 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어떨까요? 금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보다는 못하지만, 불에 깨지고 부서지는 보석과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보석 같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평소에 충만해 보이다가도 시험이 오면 열심이 식고 충만함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불 속에서도 어느 정도 보석의 형체가 보존되듯이 불같은 시험에도 그 공력이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보석의 믿음은 금이나 은의 믿음보다는 못하지만 믿음의 행함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상급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무나 풀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보석보다 못한 믿음으로서 불같은 시험이 오면 승리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생명이 없는 마른 짚의 믿음은 구원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교회에 출석하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마음에는 구원받을 만한 영적인 믿음이 없는 경우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구원받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어떤 사람은 달의 영광을, 어떤 사람은 별의 영광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은 무수한 별들의 밝기가 다르듯이, 별의 영광이라도 믿음에 따라 각각의 영광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무나 풀의 믿음에 멈추지 말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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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경에 믿음의 분량이 있음을 비유해 놓은 구절들을 찾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60~16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믿음의 단계/ 고전 3:12~15/ 고전 15:41/ 요일 2:12~14/ 겔 47:3~5
구원받지 못하는 단계/ 짚/ _ / _ / _
1단계(낙원) /풀 / _ /자녀들의 믿음/ 발목까지 물이 참
2단계(1천층)/ 나무/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아이들의 믿음/ 무릎까지 물이 참
3단계(2천층)/ 보석/ 달의 영광/ 청년들의 믿음/ 허리까지 물이 참
4단계(3천층)/ 은/ 해의 영광/ 아비들의 믿음/ 키를 넘을 만큼 물이 창일함
5단계/ (새 예루살렘)/ 금/ 해의 영광/ 아비들의 믿음/ 키를 넘을 만큼 물이 창일함
2016-08-26
제35과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
히 11:1~3
읽을말씀 : 히 11:1~3 | 외울말씀 : 막 9:23 ㅣ 참고 말씀: 막 11:24
교육목표 :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림으로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게 한다.
믿음은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영적인 믿음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육적인 믿음입니다. 육적인 믿음은 자신의 지식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 믿음,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개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식, 생각에 맞는 부분만 믿습니다. 그러니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성경 사건들은 납득하기가 어렵지요.
이처럼 육적인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안다 해도 막상 현실에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을 내보이지 못합니다. 응답이 더디면 마음이 변하여 점차 의심이 생깁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기도의 응답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믿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하시는 영적인 믿음
1)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습니다
영적인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는 것으로서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를 믿습니다.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사실이 의심 없이 믿어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믿어지니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켜 행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대로 응답받은 줄로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재미있고 행복하지요. 이러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때 하나님께서 참 자녀라 인정하시며 응답과 축복으로 보장해 주십니다.
2)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습니다
한번 믿은 것은 현실과 조건에 상관없이 변개하지 않고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입니다. 가령, 어떤 소원을 응답받기 위해 기도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응답이 오지 않는다 해서 “왜 응답해 주시지 않나?” 하고 불평하거나 의심이 생긴다면 이는 육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약 1:6~7).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한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고 이미 응답받은 줄로 믿는 믿음이지요.
3)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행함이 따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인정하고 응답하시는 영적인 믿음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오랜 가뭄 중에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그를 공궤했습니다. 생명과도 같은 양식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기에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뭄이 끝날 때까지 떡을 구울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지요(왕상 17장). 이런 믿음이 있으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도 기도하여 응답을 받습니다. 나아가 아름답고 영화로운 천국을 소유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2.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1)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생각과 이론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입력된 세상적인 지식은 대부분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므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는 데 큰 방해 요소가 됩니다. 특히 진화론은 창조주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이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진화론처럼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의심을 가져다주는 이론과,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비진리의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나 이론이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면 철저히 무(無)로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과 이론이 옳다 고집하면 하나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지 못하니 영적인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린다 해도 영적인 믿음이 오지 않지요. 그러니 기도 응답도 받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그에 맞지 않는 생각과 이론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육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지만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그동안 쌓은 학식과 이론 등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깨뜨려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되니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권능의 사도가 될 수 있었지요. 따라서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려면 진리에 위배된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고후 10:5).
2)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며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가르침 받을 때 믿음이 자라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을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마음과 뜻도 더 밝히 알 수 있지요. 또한 에베소서 6장 17절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신 대로 내 안에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모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단, 지식으로만 쌓고 행하지 않으면 교만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3)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피아노 교본을 수백 번, 수천 번 보고 외운다 해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피아노를 치며 연습을 해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말씀을 아무리 열심히 읽고 들으며 배워도 삶에 적용하여 행치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그것이 살아 역사하여 생명이 되고, 응답과 축복으로 임하지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는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시지요.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행함이 더 온전케 되고, 불가능한 일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원망했습니다. 열두 정탐꾼 중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 드리며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고백하였지요. 반면에 열 정탐꾼은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다’고 악평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 내린 열 재앙과,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으로 건넌 일,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일 등 하나님의 역사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놀라운 일을 보고도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육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었지요.
따라서 참 믿음을 소유하려면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워서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구원과 응답,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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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 )과 ( )을 깨뜨려야 한다.
②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며 ( ) 받아야 한다.
③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 ( ) 한다.
2.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행함이 나올까요?
① 자신의 ( )이나 ( )에 맞지 않아도 믿는다.
② 어떤 상황에서도 ( ) 않는다.
③ 하나님 말씀에 ( )하는 행함이 나온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52~15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구원의 투구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한다. 전쟁에서 군인이 몸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투구를 쓰듯이 우리도 구원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붙잡고 있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생명 다해 충성할 수 있다.
성령의 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곧 영적으로 말씀을 무장한 만큼 위로부터 능력과 권세가 주어져 어두움을 능히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
교육목표 :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림으로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게 한다.
믿음은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믿는다면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영적인 믿음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육적인 믿음입니다. 육적인 믿음은 자신의 지식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 믿음,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변개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식, 생각에 맞는 부분만 믿습니다. 그러니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성경 사건들은 납득하기가 어렵지요.
이처럼 육적인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안다 해도 막상 현실에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을 내보이지 못합니다. 응답이 더디면 마음이 변하여 점차 의심이 생깁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기도의 응답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믿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하시는 영적인 믿음
1) 자신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습니다
영적인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는 것으로서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를 믿습니다.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사실이 의심 없이 믿어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믿어지니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을 지켜 행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대로 응답받은 줄로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재미있고 행복하지요. 이러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때 하나님께서 참 자녀라 인정하시며 응답과 축복으로 보장해 주십니다.
2)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습니다
한번 믿은 것은 현실과 조건에 상관없이 변개하지 않고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믿음입니다. 가령, 어떤 소원을 응답받기 위해 기도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응답이 오지 않는다 해서 “왜 응답해 주시지 않나?” 하고 불평하거나 의심이 생긴다면 이는 육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약 1:6~7).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한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고 이미 응답받은 줄로 믿는 믿음이지요.
3)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행함이 따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인정하고 응답하시는 영적인 믿음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오랜 가뭄 중에 마지막 남은 양식으로 그를 공궤했습니다. 생명과도 같은 양식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말이기에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뭄이 끝날 때까지 떡을 구울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지요(왕상 17장). 이런 믿음이 있으면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도 기도하여 응답을 받습니다. 나아가 아름답고 영화로운 천국을 소유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2.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1)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생각과 이론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입력된 세상적인 지식은 대부분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므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는 데 큰 방해 요소가 됩니다. 특히 진화론은 창조주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이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진화론처럼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의심을 가져다주는 이론과,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비진리의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배운 지식이나 이론이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면 철저히 무(無)로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과 이론이 옳다 고집하면 하나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지 못하니 영적인 믿음을 갖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예배를 드린다 해도 영적인 믿음이 오지 않지요. 그러니 기도 응답도 받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그에 맞지 않는 생각과 이론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육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지만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그동안 쌓은 학식과 이론 등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깨뜨려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되니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권능의 사도가 될 수 있었지요. 따라서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려면 진리에 위배된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고후 10:5).
2)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며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가르침 받을 때 믿음이 자라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에 말씀을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마음과 뜻도 더 밝히 알 수 있지요. 또한 에베소서 6장 17절에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신 대로 내 안에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모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단, 지식으로만 쌓고 행하지 않으면 교만해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3)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피아노 교본을 수백 번, 수천 번 보고 외운다 해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피아노를 치며 연습을 해야 하지요. 마찬가지로 말씀을 아무리 열심히 읽고 들으며 배워도 삶에 적용하여 행치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그것이 살아 역사하여 생명이 되고, 응답과 축복으로 임하지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하라, 지키라, 하지 말라, 버리라”는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시지요.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행함이 더 온전케 되고, 불가능한 일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원망했습니다. 열두 정탐꾼 중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 드리며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고백하였지요. 반면에 열 정탐꾼은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다’고 악평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 내린 열 재앙과,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으로 건넌 일,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일 등 하나님의 역사를 수없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놀라운 일을 보고도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여전히 육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었지요.
따라서 참 믿음을 소유하려면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워서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구원과 응답, 축복의 길로 인도하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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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의심을 가져오는 모든 ( )과 ( )을 깨뜨려야 한다.
②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며 ( ) 받아야 한다.
③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 ( ) 한다.
2.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행함이 나올까요?
① 자신의 ( )이나 ( )에 맞지 않아도 믿는다.
② 어떤 상황에서도 ( ) 않는다.
③ 하나님 말씀에 ( )하는 행함이 나온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52~15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구원의 투구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한다. 전쟁에서 군인이 몸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투구를 쓰듯이 우리도 구원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붙잡고 있어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생명 다해 충성할 수 있다.
성령의 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곧 영적으로 말씀을 무장한 만큼 위로부터 능력과 권세가 주어져 어두움을 능히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
2016-08-19
제34과상대를 감동시키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선
마 5:39~42
읽을말씀 : 마 5:39~42 | 외울말씀 : 롬 12:20~21 ㅣ 참고 말씀: 롬 9:3
교육목표 : 악한 상대에게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주며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죄악이 관영하여 선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만일 이러한 세대 속에서 참된 선을 행하여 많은 사람을 빛 가운데로 이끌 수 있다면 하나님께 큰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에 악한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것은 ‘1단계의 선’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하다 할 수 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선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은 마음에 어떠한 악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부터입니다. 이 단계만 이르러도 마음에 기쁨과 감사, 행복, 사랑이 가득합니다.
1.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3단계’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악으로 맞대응하지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이라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의 3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 ‘온 영’의 차원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39~42절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진정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좇기 위해서는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하면 그의 마음을 풀어 화평을 이룰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선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희생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는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이것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지요. 더욱이 영적으로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선의 2단계에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간다 했습니다.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가면 감히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분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선한 말과 행함으로 감동을 주어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이는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상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은 단지 착해서 져주고 다 내어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까지도 분쇄시키는 큰 위력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이나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악한 무리들의 궤계에 휘말려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다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에 감동적인 말로 왕에게 아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 6:21~22)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왕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즉시로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징벌하고 다니엘을 더욱 높여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 온 나라에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렸지요. 다니엘처럼 상대를 감동시키는 선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천국에서도 매우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변화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선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등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 나가면 그만큼 신속히 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적극적인 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행함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말과 행함이 항상 나옵니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어쩌다가 선한 말과 행함이 나왔다고 해서 자신을 선의 3단계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연 어떠한 상황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항상 선대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2. 악한 상대에게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
가장 차원 높은 선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입니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지요. 또한 의인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선의 차원이 이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 그 이유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예수님께서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지요(사 5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대속해 주셨지요.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자신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병정들도 십자가의 섭리를 깨달아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처럼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에 이른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번번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출 32:31~32).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늘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심지어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그럼에도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기도했습니다(롬 9:3).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당시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 외에 엘리야, 에녹과 아브라함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선의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 없고 마음에 소원을 품기만 해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위로부터 권능을 받아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서 세세토록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믿음의 선진들처럼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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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선의 3단계에서는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선한 ( )과 ( )으로 감동을 주어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난다.
2. 선의 4단계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선으로,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 )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단계이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44~15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최고의 선에 이른 에녹
원래 모난 것이 없고 순수하고 착한 성정을 지녔다. 늘 하나님에 대해 궁구하며, 영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였다. 무엇을 보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고, 영적인 것을 궁구했다.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기에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만물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느끼는데 적극적이었던 에녹의 성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큰 바탕이 되었다.
교육목표 : 악한 상대에게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주며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죄악이 관영하여 선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만일 이러한 세대 속에서 참된 선을 행하여 많은 사람을 빛 가운데로 이끌 수 있다면 하나님께 큰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응치는 않으나 마음에 악한 감정이 있어 눌러 참는 것은 ‘1단계의 선’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하다 할 수 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선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은 마음에 어떠한 악한 감정도 품지 않는 ‘2단계의 선’부터입니다. 이 단계만 이르러도 마음에 기쁨과 감사, 행복, 사랑이 가득합니다.
1.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3단계’
선의 3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도 선을 행하여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는 차원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기에 악으로 맞대응하지 않는 ‘선의 2단계’가 소극적인 선이라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선의 3단계’는 적극적인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의 3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 ‘온 영’의 차원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지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39~42절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진정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의 3단계에 들어온 것이지요.
자기의 손익을 먼저 따지지 않으며 선을 좇기 위해서는 희생도 개의치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어찌하면 그의 마음을 풀어 화평을 이룰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선이 깊어질수록 자신을 희생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을 행하는 자체가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이것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지요. 더욱이 영적으로 죄가 없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룬 만큼 영적인 빛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선의 2단계에만 들어가도 영적인 빛으로 인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므로 시험 환난이나 핍박이 물러간다 했습니다. 하물며 선의 3단계에 들어가면 감히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할 뿐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의 궤계를 분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선한 말과 행함으로 감동을 주어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이는 선을 행하는 사람의 영적인 빛이 강하여 상대에게 역사하는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가고 상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은 선에까지 그 빛이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은 단지 착해서 져주고 다 내어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치고 그 궤계까지도 분쇄시키는 큰 위력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모함한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이나 원망도 없었습니다. 왕이 악한 무리들의 궤계에 휘말려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지 않았다 해서 서운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역사로 사자 굴에서 살아났을 때에 감동적인 말로 왕에게 아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단 6:21~22)
이처럼 선한 말을 들을 때 왕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즉시로 왕은 다니엘을 해치려 했던 사람들을 징벌하고 다니엘을 더욱 높여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 온 나라에 하나님을 존중하도록 조서를 내렸지요. 다니엘처럼 상대를 감동시키는 선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해 주시고 무엇이든 마음에 품은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어 천국에서도 매우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혹여 ‘나는 아직 악도 온전히 버리지 못했는데, 언제 선의 2단계를 거쳐서 3단계에 이르나?’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 악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어도 열심히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변화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선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등 최선을 다해 선을 쌓아 나가면 그만큼 신속히 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선의 2단계에서도 때에 따라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적극적인 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에게 맞대응하지 않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의 마음을 평안케 할 수 있는 선한 말을 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는 선한 행함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선의 3단계에서는 이런 선한 말과 행함이 항상 나옵니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어쩌다가 선한 말과 행함이 나왔다고 해서 자신을 선의 3단계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연 어떠한 상황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항상 선대할 수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2. 악한 상대에게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
가장 차원 높은 선은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입니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지요. 또한 의인이나 선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선의 차원이 이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실 때 그 이유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부분 예수님께서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지요(사 5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흠 없는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단번에 대속해 주셨지요.
십자가의 고통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자신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병정들도 십자가의 섭리를 깨달아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처럼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의 4단계에 이른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번번이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출 32:31~32).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늘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심지어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고까지 했지요. 그럼에도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기도했습니다(롬 9:3).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로서 당시 사도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구원받기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 외에 엘리야, 에녹과 아브라함과 같은 분들도 최고의 선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선의 차원에 이르면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수 없고 마음에 소원을 품기만 해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위로부터 권능을 받아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서 세세토록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으로 관영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믿음의 선진들처럼 최고의 선을 이루어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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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선의 3단계에서는 악을 행하는 상대에게 선한 ( )과 ( )으로 감동을 주어 그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난다.
2. 선의 4단계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선으로,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 )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단계이다.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선의 차원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44~15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최고의 선에 이른 에녹
원래 모난 것이 없고 순수하고 착한 성정을 지녔다. 늘 하나님에 대해 궁구하며, 영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였다. 무엇을 보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고, 영적인 것을 궁구했다.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기에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만물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느끼는데 적극적이었던 에녹의 성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큰 바탕이 되었다.
2016-08-12
제33과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
롬 12:2
읽을말씀 : 롬 12:2 | 외울말씀 : 롬 12:17 ㅣ 참고 말씀: 딤전 4:5
교육목표 : 절대적인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행함으로 온전한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선을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선과 악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선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지요.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업을 끝내시기 전까지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셔야 하는 화목제물의 입장이기에 스스로 선하다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선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기준이 됨을 알려 주기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만들어 놓은 양심에 비추어 “선하다.” 또는 “선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진리와 비진리를 섞어서 ‘이것이 옳다’라고 만들어 놓은 가치 판단 기준입니다. 따라서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된 마음으로, 각자의 배움이나 환경, 어떤 부모와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형성됩니다.
이러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선을 이루려면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야 합니다.
믿음에도 성장 단계가 있듯이 선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뿐 아니라 나쁜 감정 자체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오히려 감동을 주는 선과,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우선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대해 살펴겠습니다.
2.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선의 1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신을 욕하고 때리는데 맞대응하지 않고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알기에 또는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경우 한계에 이르면 결국 그 악이 표출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악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을 버리고 어찌하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3.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의 2단계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상대가 아무리 나를 미워하며 힘들게 해도 악으로 생각지 않으며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기 때문에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명백히 간음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니 율법대로 처리하거나,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말씀합니다(마 1:19). 마음에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할 때 같이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셨으니 말씀으로 자신을 조명하고 기도할 때 선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말고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 비진리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이 모습을 놓고 불같이 기도하여 버려 나가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의 불로 죄성들을 태워 주심으로 성결한 마음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그럴 때 순간의 악한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선의 2단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최소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의 2단계’를 이루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부추기는 대로 악을 행한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해도 지킴 받거나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만 이루어도 그 선이 영적인 빛으로 역사되어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에 자연히 각종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선한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랫사람의 실수로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더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며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 조금이라도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고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지요.
또 다른 예로, 다른 사람이 책망 듣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때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지는 않습니까? 혹은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실수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봅니다. 더욱이 자신이 직접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하고 일에 대한 결과도 책임지려 하겠지요.
그러니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손해 보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선을 행하는 것이 손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사랑과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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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 )이 있어도 함께 ( )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선의 2단계는 상대가 ( )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2. 양심은 왜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을까요?
3.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33~1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단계’
선의 1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선의 2단계 :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선의 3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단계이다.
선의 4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교육목표 : 절대적인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행함으로 온전한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선을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선과 악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선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지요.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업을 끝내시기 전까지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셔야 하는 화목제물의 입장이기에 스스로 선하다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선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기준이 됨을 알려 주기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만들어 놓은 양심에 비추어 “선하다.” 또는 “선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진리와 비진리를 섞어서 ‘이것이 옳다’라고 만들어 놓은 가치 판단 기준입니다. 따라서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된 마음으로, 각자의 배움이나 환경, 어떤 부모와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형성됩니다.
이러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선을 이루려면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야 합니다.
믿음에도 성장 단계가 있듯이 선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뿐 아니라 나쁜 감정 자체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오히려 감동을 주는 선과,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우선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대해 살펴겠습니다.
2.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선의 1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신을 욕하고 때리는데 맞대응하지 않고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알기에 또는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경우 한계에 이르면 결국 그 악이 표출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악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을 버리고 어찌하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3.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의 2단계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상대가 아무리 나를 미워하며 힘들게 해도 악으로 생각지 않으며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기 때문에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명백히 간음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니 율법대로 처리하거나,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말씀합니다(마 1:19). 마음에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할 때 같이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셨으니 말씀으로 자신을 조명하고 기도할 때 선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말고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 비진리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이 모습을 놓고 불같이 기도하여 버려 나가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의 불로 죄성들을 태워 주심으로 성결한 마음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그럴 때 순간의 악한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선의 2단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최소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의 2단계’를 이루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부추기는 대로 악을 행한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해도 지킴 받거나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만 이루어도 그 선이 영적인 빛으로 역사되어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에 자연히 각종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선한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랫사람의 실수로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더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며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 조금이라도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고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지요.
또 다른 예로, 다른 사람이 책망 듣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때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지는 않습니까? 혹은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실수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봅니다. 더욱이 자신이 직접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하고 일에 대한 결과도 책임지려 하겠지요.
그러니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손해 보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선을 행하는 것이 손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사랑과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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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 )이 있어도 함께 ( )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선의 2단계는 상대가 ( )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2. 양심은 왜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을까요?
3.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33~1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단계’
선의 1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선의 2단계 :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선의 3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단계이다.
선의 4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2016-08-05
제32과부활의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
요 20:17~18
읽을말씀 : 요 20:17~18 | 외울말씀 : 잠 8:17 l 참고 말씀: 요 12:1~8
교육목표 : 육체의 소욕을 벗고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극한 정성과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죄 사함을 받고 모든 저주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병든 몸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어 진정한 기쁨과 행복,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내보인 선과 사랑은 무엇일까요?
1.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예수님을 향한 진한 사랑과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은 아주 좋은 그릇입니다. 영적으로는 우리 몸을 상징하지요. 따라서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도 옥합을 깨뜨려야만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생각과 이론의 틀도 깨뜨려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에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당시 향유는 대체로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가 부어 드린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으로 그 값이 삼백 데나리온에 달했지요.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거의 1년 내내 일해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 금액입니다. 이러한 값비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마리아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겠습니까. 지치고 병든 몸으로 쉼 없이 일하며 먹을 것조차 아껴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 졸이며 향유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유를 드렸다는 것은 마음의 진실한 정성을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려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온다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옥합은 우리 몸을 상징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되기 전 우리의 몸은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합니다. 따라서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처럼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라야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마음 다해 섬기며 끝까지 붙좇은 진실한 사랑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마음 다해 섬기며 붙좇았습니다. 과연 마리아는 어떠한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붙좇았을까요? 마리아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이 전혀 없는 가족이라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떠했겠습니까.
영적인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상황에도 변치 않고 한결같지요. 예수님을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혹하는 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며 정죄했습니다. 백성들도 그들의 말에 미혹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지요. 십자가 처형을 언도받은 예수님은 세상 말로 이제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흉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며 기사와 표적을 베푸실 때뿐 아니라,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초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도 변함없이 붙좇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숨었지만 마리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자칫 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았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지요. 마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참되고 진실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지내는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가 시신을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에 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여인이 된 이유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께 가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당도해 보니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마리아는 누군가 시신을 가져간 줄 알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지요. 그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지만, 경황이 없는 마리아는 그들이 천사인지 사람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요 20:13).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주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부활체를 입으셨기에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요. 주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도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 그제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1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일요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심으로 구세주가 되기 위한 섭리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일을 완수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을 뵙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그래서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때가 이를 때까지 증인으로서 살 것을 당부하시면서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달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생명 다해 주님을 사랑했고 온전한 헌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큰 경기나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1위를 하면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나 마음을 써 준 사람,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우승의 기쁨을 나누지요.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즐거울 때뿐 아니라 상대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아가 가장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해도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끝까지 붙좇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하시는 이유는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엄청난 희생을 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고 참 행복을 찾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끝까지 붙좇는 진실한 사랑을 이룬 막달라 마리아를 발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셨겠습니까. 늘 가까이 두고 그 선한 향을 흠향하고 싶으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창세 이래 구원받아 천국에 간 여인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 보좌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온전한 선의 차원에 들어가면 천국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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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옥합은 영적으로 우리 ( )을 상징한다.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 )한다는 뜻이다.
2.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 )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
3.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을 뵙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25~1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달란트 vs 데나리온
최대의 무게와 화폐 단위를 나타내는 달란트는 성경에서 재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1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6천 일, 약 16년간 품삯에 해당된다. ‘1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 군인이나 품꾼의 하루 품삯의 금액이었고, 헬라의 은화 1 드라크마의 가치를 지녔다.
교육목표 : 육체의 소욕을 벗고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극한 정성과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죄 사함을 받고 모든 저주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병든 몸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어 진정한 기쁨과 행복,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내보인 선과 사랑은 무엇일까요?
1.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예수님을 향한 진한 사랑과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은 아주 좋은 그릇입니다. 영적으로는 우리 몸을 상징하지요. 따라서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도 옥합을 깨뜨려야만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생각과 이론의 틀도 깨뜨려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에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당시 향유는 대체로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가 부어 드린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으로 그 값이 삼백 데나리온에 달했지요.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거의 1년 내내 일해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 금액입니다. 이러한 값비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마리아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겠습니까. 지치고 병든 몸으로 쉼 없이 일하며 먹을 것조차 아껴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 졸이며 향유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유를 드렸다는 것은 마음의 진실한 정성을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려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온다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옥합은 우리 몸을 상징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되기 전 우리의 몸은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합니다. 따라서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처럼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라야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마음 다해 섬기며 끝까지 붙좇은 진실한 사랑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마음 다해 섬기며 붙좇았습니다. 과연 마리아는 어떠한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붙좇았을까요? 마리아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이 전혀 없는 가족이라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떠했겠습니까.
영적인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상황에도 변치 않고 한결같지요. 예수님을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혹하는 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며 정죄했습니다. 백성들도 그들의 말에 미혹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지요. 십자가 처형을 언도받은 예수님은 세상 말로 이제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흉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며 기사와 표적을 베푸실 때뿐 아니라,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초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도 변함없이 붙좇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숨었지만 마리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자칫 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았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지요. 마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참되고 진실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지내는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가 시신을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에 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여인이 된 이유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께 가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당도해 보니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마리아는 누군가 시신을 가져간 줄 알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지요. 그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지만, 경황이 없는 마리아는 그들이 천사인지 사람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요 20:13).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주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부활체를 입으셨기에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요. 주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도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 그제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1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일요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심으로 구세주가 되기 위한 섭리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일을 완수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을 뵙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그래서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때가 이를 때까지 증인으로서 살 것을 당부하시면서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달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생명 다해 주님을 사랑했고 온전한 헌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큰 경기나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1위를 하면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나 마음을 써 준 사람,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우승의 기쁨을 나누지요.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즐거울 때뿐 아니라 상대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아가 가장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해도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끝까지 붙좇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하시는 이유는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엄청난 희생을 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고 참 행복을 찾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끝까지 붙좇는 진실한 사랑을 이룬 막달라 마리아를 발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셨겠습니까. 늘 가까이 두고 그 선한 향을 흠향하고 싶으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창세 이래 구원받아 천국에 간 여인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 보좌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온전한 선의 차원에 들어가면 천국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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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옥합은 영적으로 우리 ( )을 상징한다.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 )한다는 뜻이다.
2.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 )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
3.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을 뵙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25~1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달란트 vs 데나리온
최대의 무게와 화폐 단위를 나타내는 달란트는 성경에서 재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1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6천 일, 약 16년간 품삯에 해당된다. ‘1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 군인이나 품꾼의 하루 품삯의 금액이었고, 헬라의 은화 1 드라크마의 가치를 지녔다.
2016-07-29
제31과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막달라 마리아
눅 7:37~38
읽을말씀 : 눅 7:37~38 | 외울말씀 : 눅 7:47 ㅣ 참고 말씀: 눅 8:2
교육목표 :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족에게조차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심지어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가족을 떠나 자기 한 몸 의지해 보고자 만난 남자 역시 약한 그녀를 이용하기만 하는 악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모든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의 비참한 삶
마리아는 갈릴리 인근 막달라라는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이 흔했기 때문에, 그녀가 살던 지역의 이름을 붙여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막달라 지방은 꽤 번성한 어업의 중심지로서 대대로 우상 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전체가 어둠의 영향을 받았지요.
막달라 마리아 역시 어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는 그녀가 귀신 들렸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젖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영적으로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난 데다 몸까지 약해서 갖가지 병을 앓았습니다. 위장에 병이 생겨 제대로 먹지 못하니 신체기능이 원활하지 않아 외모까지 보기 흉해졌습니다. 피부병으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고, 몸이 쇠약하니 경수마저 끊어져 여인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늘 집에 숨어 지내야 했고,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마치 자신 때문인 것처럼 주눅이 들어 살았습니다. 게다가 부모 형제의 사랑은 커녕 심한 냉대와 업신여김까지 받으며 살았으니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가족을 힘들게 하지 않는 길이 무엇일까? 나 때문에 가족이 받는 부담을 어떻게 하면 덜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으니 그녀는 여기저기 떠돌며 거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나 자기 몸이나마 의탁해 보려 했지만 오히려 마리아를 힘들게 하며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도박에 빠져 돈을 잃고 수중의 돈이 떨어지면 그녀에게 돈을 구해 오라며 윽박지르며 때리곤 했지요. 심지어 여기저기 다니며 사기를 치다가 들통나면 전부 마리아가 시킨 일이라며 그녀 탓으로 돌렸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에게 계략을 꾸며 남편을 조종하는 탐욕스런 여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지요. 이렇게 온갖 누명을 쓰면서도 마리아는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의 허물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지요. 그러다 보니 날로 마음의 고통이 커져 갔고 몸은 더 나빠졌습니다.
마리아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큰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저주스러운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남편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몸이 약해서 잘 섬겨 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며 하루하루 삯바느질로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모함으로 준비하는 마리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지요. 그녀는 마음이 곱고 선했기 때문에 이 소문이 믿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분을 만나 뵙기를 사모했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예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어렵게 삯바느질해서 번 돈을 조금씩 모아 귀한 향유를 준비하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정성껏 준비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갔습니다. 집 앞에 이르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요. 사람들은 마리아를 보자 ‘너 같은 죄인이 올 곳이 아니다.’라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사모함이 너무나 승했기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열어 주었지요.
집 안에 들어가자 저만치 앉아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용서하고 품어 주실 것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리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너무나 고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조심스레 예수님의 뒤편으로 다가갔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난 후,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난 마리아
예수님의 발치에 이르자 마리아는 더욱 눈물이 복받쳤습니다. 태어나서 참된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품어 주실 듯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이 지금 눈앞에 계신 것입니다. 갑작스런 마리아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 의아해했습니다. 집 안에는 마리아의 흐느끼는 소리만 가득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마리아는 머리 수건을 벗은 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어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했지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누구인가?”, “왜 저러는가?”, “저는 죄인이 아닌가?”, “망측해라!” 하며 저마다 잣대를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로 샌들을 신었기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었고 물도 귀해서 제대로 씻지 못하니 발이 깨끗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가정에 초대된 손님에게는 발 씻을 물을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바리새인 시몬은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마리아는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었으며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함부로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귀히 여기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함으로 예수님을 섬기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다. 치료받겠다.”라는 믿음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조종하는 못된 여인으로 여겼으니 예수님만 아니라면 당장 그녀를 그곳에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은 자신의 마음과 진실을 알아주시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실 것이기에 상관이 없었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예수님만은 죄인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뜻한 바를 주저함 없이 행했지요. 자신의 눈물로 적신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어 드린 후,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어찌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신 후 그녀에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속병이 치료되니 이제 먹는 대로 소화가 되고 몸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지요. 뿐만 아니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보잘것없는 그녀에게 세상 어떤 사람도 주지 않은 영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태껏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했던 가장 큰 선물을 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마리아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습니다. 온 마음이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나를 버리지 않는 단 한 분, 나를 사랑하시는 단 한 분, 비참한 내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치료해 주신 분, 내 영혼까지 새롭게 하신 예수님을 생명 다해 섬기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마음 다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눅 8:2~3).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혹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질병이나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닮아감으로 질병 치료는 물론,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주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리아를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으며 입맞추었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17~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차이
◈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향유 부은 장소 :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
4. 가족 사항 :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는 자매 사이
◈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
2. 향유 부은 장소 : 갈릴리 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누가복음 7장
4. 가족 사항 : 우상 숭배하는 가정
교육목표 :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족에게조차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심지어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가족을 떠나 자기 한 몸 의지해 보고자 만난 남자 역시 약한 그녀를 이용하기만 하는 악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모든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의 비참한 삶
마리아는 갈릴리 인근 막달라라는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이 흔했기 때문에, 그녀가 살던 지역의 이름을 붙여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막달라 지방은 꽤 번성한 어업의 중심지로서 대대로 우상 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전체가 어둠의 영향을 받았지요.
막달라 마리아 역시 어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는 그녀가 귀신 들렸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젖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영적으로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난 데다 몸까지 약해서 갖가지 병을 앓았습니다. 위장에 병이 생겨 제대로 먹지 못하니 신체기능이 원활하지 않아 외모까지 보기 흉해졌습니다. 피부병으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고, 몸이 쇠약하니 경수마저 끊어져 여인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늘 집에 숨어 지내야 했고,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마치 자신 때문인 것처럼 주눅이 들어 살았습니다. 게다가 부모 형제의 사랑은 커녕 심한 냉대와 업신여김까지 받으며 살았으니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가족을 힘들게 하지 않는 길이 무엇일까? 나 때문에 가족이 받는 부담을 어떻게 하면 덜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으니 그녀는 여기저기 떠돌며 거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나 자기 몸이나마 의탁해 보려 했지만 오히려 마리아를 힘들게 하며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도박에 빠져 돈을 잃고 수중의 돈이 떨어지면 그녀에게 돈을 구해 오라며 윽박지르며 때리곤 했지요. 심지어 여기저기 다니며 사기를 치다가 들통나면 전부 마리아가 시킨 일이라며 그녀 탓으로 돌렸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에게 계략을 꾸며 남편을 조종하는 탐욕스런 여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지요. 이렇게 온갖 누명을 쓰면서도 마리아는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의 허물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지요. 그러다 보니 날로 마음의 고통이 커져 갔고 몸은 더 나빠졌습니다.
마리아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큰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저주스러운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남편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몸이 약해서 잘 섬겨 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며 하루하루 삯바느질로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모함으로 준비하는 마리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지요. 그녀는 마음이 곱고 선했기 때문에 이 소문이 믿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분을 만나 뵙기를 사모했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예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어렵게 삯바느질해서 번 돈을 조금씩 모아 귀한 향유를 준비하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정성껏 준비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갔습니다. 집 앞에 이르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요. 사람들은 마리아를 보자 ‘너 같은 죄인이 올 곳이 아니다.’라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사모함이 너무나 승했기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열어 주었지요.
집 안에 들어가자 저만치 앉아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용서하고 품어 주실 것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리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너무나 고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조심스레 예수님의 뒤편으로 다가갔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난 후,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난 마리아
예수님의 발치에 이르자 마리아는 더욱 눈물이 복받쳤습니다. 태어나서 참된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품어 주실 듯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이 지금 눈앞에 계신 것입니다. 갑작스런 마리아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 의아해했습니다. 집 안에는 마리아의 흐느끼는 소리만 가득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마리아는 머리 수건을 벗은 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어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했지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누구인가?”, “왜 저러는가?”, “저는 죄인이 아닌가?”, “망측해라!” 하며 저마다 잣대를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로 샌들을 신었기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었고 물도 귀해서 제대로 씻지 못하니 발이 깨끗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가정에 초대된 손님에게는 발 씻을 물을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바리새인 시몬은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마리아는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었으며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함부로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귀히 여기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함으로 예수님을 섬기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다. 치료받겠다.”라는 믿음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조종하는 못된 여인으로 여겼으니 예수님만 아니라면 당장 그녀를 그곳에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은 자신의 마음과 진실을 알아주시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실 것이기에 상관이 없었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예수님만은 죄인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뜻한 바를 주저함 없이 행했지요. 자신의 눈물로 적신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어 드린 후,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어찌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신 후 그녀에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속병이 치료되니 이제 먹는 대로 소화가 되고 몸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지요. 뿐만 아니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보잘것없는 그녀에게 세상 어떤 사람도 주지 않은 영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태껏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했던 가장 큰 선물을 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마리아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습니다. 온 마음이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나를 버리지 않는 단 한 분, 나를 사랑하시는 단 한 분, 비참한 내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치료해 주신 분, 내 영혼까지 새롭게 하신 예수님을 생명 다해 섬기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마음 다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눅 8:2~3).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혹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질병이나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닮아감으로 질병 치료는 물론,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주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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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리아를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으며 입맞추었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17~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차이
◈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향유 부은 장소 :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
4. 가족 사항 :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는 자매 사이
◈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
2. 향유 부은 장소 : 갈릴리 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누가복음 7장
4. 가족 사항 : 우상 숭배하는 가정
2016-07-22
제30과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요 3:28~30
읽을말씀 : 요 3:28~30 | 외울말씀 : 눅 3:16 ㅣ 참고 말씀: 눅 1:13~17
교육목표 :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며 마지막 때에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모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에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그는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마침내는 순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키는 마음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장차 아이를 갖게 될 것을 알려 줍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3~17)
그 후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 알고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을 보면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은 받았지만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왔는지 잘 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어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킨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간 후에야 일행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시 길을 되짚어 성전에 와보니 예수님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그동안 근심하며 예수님을 찾았었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도리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대답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 대해 잘 아셨던 예수님과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돼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갔습니다. 자신이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를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런 세례 요한을 보고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그가 혹 그리스도이신가 궁금히 여깁니다(눅 3:15).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고백했습니다(눅 3:16). 그는 자신의 본분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이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도 큰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니 ‘과연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고 심히 기대하게 되었지요. “신들메”란, 신발을 묶는 끈인데, ‘세례 요한이 그것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증거하는 그분은 얼마나 높으신 분일까’를 생각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요 3:28~30).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지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마음은 순교하기까지 변함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기뻐하시며 이를 선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오직 주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지요.
직분자들이라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설령 직분이 없어도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각자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혹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전하면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여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은근히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어야 하지요.
또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까지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연연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는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이 사랑과 칭찬을 받아도 시기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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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어떠한 점을 기뻐하시며 선으로 인정해 주셨나요?
2.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 )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 )만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가랴’는 누구일까?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친척이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선한 사람이었다.
사가랴가 자기 순서대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과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으므로 벙어리가 되어 아들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기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후에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때 혀가 풀렸다.
교육목표 :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며 마지막 때에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모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에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그는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마침내는 순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키는 마음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장차 아이를 갖게 될 것을 알려 줍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3~17)
그 후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 알고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을 보면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은 받았지만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왔는지 잘 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어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킨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간 후에야 일행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시 길을 되짚어 성전에 와보니 예수님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그동안 근심하며 예수님을 찾았었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도리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대답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 대해 잘 아셨던 예수님과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돼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갔습니다. 자신이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를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런 세례 요한을 보고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그가 혹 그리스도이신가 궁금히 여깁니다(눅 3:15).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고백했습니다(눅 3:16). 그는 자신의 본분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이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도 큰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니 ‘과연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고 심히 기대하게 되었지요. “신들메”란, 신발을 묶는 끈인데, ‘세례 요한이 그것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증거하는 그분은 얼마나 높으신 분일까’를 생각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요 3:28~30).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지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마음은 순교하기까지 변함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기뻐하시며 이를 선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오직 주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지요.
직분자들이라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설령 직분이 없어도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각자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혹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전하면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여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은근히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어야 하지요.
또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까지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연연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는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이 사랑과 칭찬을 받아도 시기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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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어떠한 점을 기뻐하시며 선으로 인정해 주셨나요?
2.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 )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 )만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가랴’는 누구일까?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친척이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선한 사람이었다.
사가랴가 자기 순서대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과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으므로 벙어리가 되어 아들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기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후에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때 혀가 풀렸다.
2016-07-15
제29과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엘리야
왕하 2:11~12
읽을말씀 : 왕하 2:11~12 | 외울말씀 : 눅 1:17 ㅣ 참고 말씀: 사 40:3
교육목표 : 하나님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어떠한 사명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감당하는 일꾼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매우 겸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한 마음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자신의 사명을 다한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이런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
엘리야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심으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됐고, 유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을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했지요.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런데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행함도 변합니다. 자신이 해 준 만큼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막상 어떤 일을 맡기면 자신의 성품을 핑계로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일은 성품상 맞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던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침으로 무척 사모했지요. 마침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엘리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를 통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먼저,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모습은 사람이되 짐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째가 되면 영을 보내 주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육의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잉태됨과 동시에 주어진 영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셨지요.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지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그제야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이처럼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깨끗하고 온전해야 하겠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 채로 들림 받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 일에 선택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장차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순교해야 한다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낸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요. 하지만 그 고백대로 변함없이 진실한 행함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볼 때는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장면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냈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지요. 하나님 일을 이룸에 있어 어찌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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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성경 구절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시고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다. ( )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다.
2. ( )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다.
3.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한 성경 구절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1~10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야’의 선
① 자기 의가 없고 겸비한 마음을 지녔기에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다.
②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어떠한 사명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감당하는 일꾼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매우 겸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한 마음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자신의 사명을 다한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이런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
엘리야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심으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됐고, 유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을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했지요.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런데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행함도 변합니다. 자신이 해 준 만큼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막상 어떤 일을 맡기면 자신의 성품을 핑계로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일은 성품상 맞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던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침으로 무척 사모했지요. 마침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엘리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를 통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먼저,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모습은 사람이되 짐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째가 되면 영을 보내 주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육의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잉태됨과 동시에 주어진 영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셨지요.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지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그제야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이처럼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깨끗하고 온전해야 하겠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 채로 들림 받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 일에 선택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장차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순교해야 한다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낸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요. 하지만 그 고백대로 변함없이 진실한 행함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볼 때는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장면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냈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지요. 하나님 일을 이룸에 있어 어찌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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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성경 구절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시고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다. ( )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다.
2. ( )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다.
3.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한 성경 구절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1~10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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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선
① 자기 의가 없고 겸비한 마음을 지녔기에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다.
②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2016-07-08
제28과하나님의 권능을 행한 엘리야
왕상 18:41~46
읽을말씀 : 왕상 18:41~46 | 외울말씀 : 잠 18:12 ㅣ 참고 말씀:왕상 18:19~24
교육목표 :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감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B.C. 9세기경 우상 숭배가 만연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방 신을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해 믿음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고, 간절한 기도로써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큰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주었으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또한 요단 강을 가르는가 하면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산 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받아 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심히 겸비하여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마음
엘리야는 원래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칫 이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됐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겸비함을 높이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변화되기 전에도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낮아지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매우 유약하고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부족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일을 어그러뜨리면 안 되는데 ….’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러한 유약함이 영적으로 변화돼야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적, 상업적 동맹을 위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적으로 결혼시킵니다. 이때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 신이 백성들에게 퍼져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컸던지 심판이 임하여 수년 동안 그 땅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합 왕에게 전하라고 엘리야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아합 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에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마지막 남은 양식인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 반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다시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에 닥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만일 엘리야가 왕 앞에 나아간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가 이러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명령대로 아합 왕을 찾아가 하나님 뜻을 분명히 전달합니다. 가뭄이 든 원인이 왕과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신이 참 신임을 밝히자는 것이었지요(왕상 18:19~24).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왕이 보는 가운데 엘리야 홀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불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자신의 유약함을 깨뜨리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고, 결국 불의 응답을 끌어내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부족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고, 하나님 뜻을 정확히 깨닫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비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구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능력을 받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린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아합 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예언한 후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의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일곱 차례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로 바다 편에서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곧 큰비가 내릴 것임을 알았고, 그 믿음대로 조금 후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45~46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찾으시지요.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 능력을 많이 담을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그릇 안에 자기가 담겨 있다면 어찌 순수한 하나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 마음이 겸비한 그릇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 능력이 더 많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신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화평을 이뤘습니다. 또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임을 깨달아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기를 쉬지 않음으로 영적인 담대함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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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엘리야는 심히 ( )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다.
2.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 )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갈멜 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인과 겨뤄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94~1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 왕들 중 악한 왕으로 유명하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바알 산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등 패역한 죄를 범하므로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 하신 대로 저주가 임했다.
교육목표 :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감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B.C. 9세기경 우상 숭배가 만연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방 신을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해 믿음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고, 간절한 기도로써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큰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주었으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또한 요단 강을 가르는가 하면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산 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받아 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심히 겸비하여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마음
엘리야는 원래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칫 이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됐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겸비함을 높이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변화되기 전에도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낮아지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매우 유약하고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부족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일을 어그러뜨리면 안 되는데 ….’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러한 유약함이 영적으로 변화돼야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적, 상업적 동맹을 위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적으로 결혼시킵니다. 이때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 신이 백성들에게 퍼져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컸던지 심판이 임하여 수년 동안 그 땅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합 왕에게 전하라고 엘리야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아합 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에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마지막 남은 양식인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 반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다시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에 닥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만일 엘리야가 왕 앞에 나아간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가 이러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명령대로 아합 왕을 찾아가 하나님 뜻을 분명히 전달합니다. 가뭄이 든 원인이 왕과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신이 참 신임을 밝히자는 것이었지요(왕상 18:19~24).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왕이 보는 가운데 엘리야 홀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불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자신의 유약함을 깨뜨리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고, 결국 불의 응답을 끌어내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부족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고, 하나님 뜻을 정확히 깨닫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비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구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능력을 받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린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아합 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예언한 후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의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일곱 차례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로 바다 편에서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곧 큰비가 내릴 것임을 알았고, 그 믿음대로 조금 후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45~46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찾으시지요.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 능력을 많이 담을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그릇 안에 자기가 담겨 있다면 어찌 순수한 하나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 마음이 겸비한 그릇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 능력이 더 많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신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화평을 이뤘습니다. 또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임을 깨달아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기를 쉬지 않음으로 영적인 담대함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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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엘리야는 심히 ( )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다.
2.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 )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갈멜 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인과 겨뤄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94~1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 왕들 중 악한 왕으로 유명하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바알 산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등 패역한 죄를 범하므로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 하신 대로 저주가 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