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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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3
제23과출애굽 지도자로 택함 받은 모세
히 11:24~26
읽을말씀 : 히 11:24~26 | 외울말씀 : 잠 17:3 ㅣ 참고 말씀:히 11:23
교육목표 : 모세처럼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리고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감사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출애굽이라는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이 선한 모세를 택하여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과연 모세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인정받아 출애굽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중심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순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중심에 지극한 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는 마음
요셉 때에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점점 번성하고 강대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애굽 왕 바로는 위협을 느끼고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학대합니다. 심지어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아이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때마침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온 애굽 공주가 어린 모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자신의 양자로 삼고자 하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공주에게 아이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받으면서 자기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당시 애굽은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자로 있는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 편에는 항상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노예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연락을 즐겨도 모세의 마음은 기쁘거나 즐겁지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음에 심한 번민이 있었지요.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모세에게는 애굽의 궁정에서 지내는 하루 하루가 죄악의 나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바로의 궁정을 등지고 광야로 도망쳐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이에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는 그에게 도리어 한 사람이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따집니다. 이 일로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 난 것을 안 모세는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만약 모세가 자기 안위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모른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았다면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비교적 견딜 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 궁핍함을 겪게 되면 현실적인 어려움에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여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더구나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궁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온 모세에게 있어서, 그 신분을 포기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공주의 아들로서 누리던 영화도, 호화스러운 왕궁 생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히 11:25~26).
만약 여러분이 모세의 입장이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평생을 바쳐 모은 재산이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무 망설임 없이 버릴 수 있겠는지요?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주님을 위해 모두 버릴 수 있습니다.
2.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불안한 현실과 자신의 처지에 낙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왕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자 이제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스스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슬퍼하거나 절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보내면서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지요. 이는 그가 중심에서 낮아진 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높아진 만큼 현실에 감사할 수 없고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하찮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국의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40년이라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연단의 시간을 통해 모세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에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연단을 받을 때 ‘왜 나는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려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지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출애굽 지도자로서의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그릇을 갖추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깨닫지 못한 채 불평하고 힘들어하지는 않는지요? 연단을 받을 때에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마음 중심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참된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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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① 모세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 )받는 것을 택했다.
② 모세는 ( )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 )했다.
2.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죽였던 모세가 철저히 낮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연단이 왔을 때 어떠한 마음으로 받으시나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66~7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십보라’는 누구인가?(출 2:21)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르우엘_출 2:18, 호밥_삿 4:11)의 딸이다. 미디안으로 도피한 모세와 결혼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 두 아들을 낳았다.
십보라는 곱고 상냥하며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으며, 질투심이 없는 여인이었다. 모세를 사랑하고 그의 말에 잘 순종하였으며, 남편이 선한 것만 보고 선한 것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모세는 이처럼 착하고 온유한 십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육목표 : 모세처럼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리고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감사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출애굽이라는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이 선한 모세를 택하여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과연 모세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인정받아 출애굽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중심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순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중심에 지극한 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는 마음
요셉 때에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점점 번성하고 강대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애굽 왕 바로는 위협을 느끼고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학대합니다. 심지어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아이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때마침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온 애굽 공주가 어린 모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자신의 양자로 삼고자 하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공주에게 아이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받으면서 자기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당시 애굽은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자로 있는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 편에는 항상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노예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연락을 즐겨도 모세의 마음은 기쁘거나 즐겁지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음에 심한 번민이 있었지요.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모세에게는 애굽의 궁정에서 지내는 하루 하루가 죄악의 나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바로의 궁정을 등지고 광야로 도망쳐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이에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는 그에게 도리어 한 사람이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따집니다. 이 일로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 난 것을 안 모세는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만약 모세가 자기 안위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모른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았다면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비교적 견딜 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 궁핍함을 겪게 되면 현실적인 어려움에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여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더구나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궁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온 모세에게 있어서, 그 신분을 포기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공주의 아들로서 누리던 영화도, 호화스러운 왕궁 생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히 11:25~26).
만약 여러분이 모세의 입장이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평생을 바쳐 모은 재산이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무 망설임 없이 버릴 수 있겠는지요?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주님을 위해 모두 버릴 수 있습니다.
2.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불안한 현실과 자신의 처지에 낙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왕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자 이제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스스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슬퍼하거나 절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보내면서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지요. 이는 그가 중심에서 낮아진 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높아진 만큼 현실에 감사할 수 없고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하찮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국의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40년이라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연단의 시간을 통해 모세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에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연단을 받을 때 ‘왜 나는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려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지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출애굽 지도자로서의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그릇을 갖추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깨닫지 못한 채 불평하고 힘들어하지는 않는지요? 연단을 받을 때에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마음 중심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참된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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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① 모세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 )받는 것을 택했다.
② 모세는 ( )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 )했다.
2.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죽였던 모세가 철저히 낮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연단이 왔을 때 어떠한 마음으로 받으시나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66~7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십보라’는 누구인가?(출 2:21)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르우엘_출 2:18, 호밥_삿 4:11)의 딸이다. 미디안으로 도피한 모세와 결혼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 두 아들을 낳았다.
십보라는 곱고 상냥하며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으며, 질투심이 없는 여인이었다. 모세를 사랑하고 그의 말에 잘 순종하였으며, 남편이 선한 것만 보고 선한 것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모세는 이처럼 착하고 온유한 십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16-05-27
제22과최고의 선과 사랑을 지닌 사도 바울
롬 9:1~3
읽을말씀 : 롬 9:1~3 | 외울말씀 : 고후 12:1 ㅣ 참고 말씀:고후 11:28~29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룬 사도 바울의 마음과 행함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끊임없이 탐구하는 성격으로 답을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궁구하며 고민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아가 단단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호탕한 성격도 있었지만 늘 계산과 생각이 앞섰지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 자신이 옳다 여기던 것이 참이 아님을 깨닫자 이를 단번에 깨뜨려 버렸습니다.
주님을 만나 변화된 후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 한 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았습니다. 모진 고난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해도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을 더욱 진하게 올렸습니다.
1.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도 바울
주님을 사랑하면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사랑하되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호소하셨습니다(요 19:28). 그러니 진정 주님을 사랑하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29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고 잘 나와 있지요.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하며 애통하였지요(빌 3:18). 또한 여러 지역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영혼들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빚진 자의 심정으로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심정이 로마서 9장 1~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곧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유대인 중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23:12~13).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중심에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했습니다.
누구보다 지옥의 참혹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 말하고 있지요. 이를 통해 영혼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2.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마음을 지닌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큰 권능으로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걷게 하는가 하면, 독사에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권능을 행하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겸손히 고백합니다.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닌 바울은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성결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체험했습니다. 천국의 낙원을 보았고, 영의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 그리고 천국에 대해 밝히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신령한 체험을 하고 충만하다고 해서 자랑하고자 하지 않았지요.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간직하였다가 은혜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들려주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으면 어떤 영적인 깨달음을 받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다.’ 자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선한 사람은 기도 중에 어떤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두고 ‘왜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알려 주셨을까?’ 하고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지요.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처럼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이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혔기 때문입니다.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것도 혹여 실족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되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여러 은사와 은혜가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지요.
혹여 여러분은 “내가 기도해 보니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쉽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성령의 음성과 주관, 인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마치 자신만 특별한 것처럼 들레는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결코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기에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커져만 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고, 권능도 주셔서 크게 사용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최고의 선을 이루어 마지막 때 영광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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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채워 보세요.
1.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으로 ( )을 사랑하되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 )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2. 사도 바울은 큰 ( )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 )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여 큰 권능을 내려 주셨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59~6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영적 의미
하나님 섭리 가운데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피를 다 쏟아 탈진하신 상태였기에 심한 갈증을 겪으셔야 했다. 그러나 갈증을 참지 못해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영혼들을 찾기 위한 목마름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호소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한다. 예수님의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드린다는 것은 바로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룬 사도 바울의 마음과 행함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끊임없이 탐구하는 성격으로 답을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궁구하며 고민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아가 단단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호탕한 성격도 있었지만 늘 계산과 생각이 앞섰지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 자신이 옳다 여기던 것이 참이 아님을 깨닫자 이를 단번에 깨뜨려 버렸습니다.
주님을 만나 변화된 후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 한 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았습니다. 모진 고난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해도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을 더욱 진하게 올렸습니다.
1.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도 바울
주님을 사랑하면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사랑하되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호소하셨습니다(요 19:28). 그러니 진정 주님을 사랑하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29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고 잘 나와 있지요.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하며 애통하였지요(빌 3:18). 또한 여러 지역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영혼들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빚진 자의 심정으로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심정이 로마서 9장 1~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곧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유대인 중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23:12~13).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중심에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했습니다.
누구보다 지옥의 참혹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 말하고 있지요. 이를 통해 영혼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2.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마음을 지닌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큰 권능으로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걷게 하는가 하면, 독사에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권능을 행하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겸손히 고백합니다.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닌 바울은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성결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체험했습니다. 천국의 낙원을 보았고, 영의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 그리고 천국에 대해 밝히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신령한 체험을 하고 충만하다고 해서 자랑하고자 하지 않았지요.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간직하였다가 은혜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들려주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으면 어떤 영적인 깨달음을 받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다.’ 자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선한 사람은 기도 중에 어떤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두고 ‘왜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알려 주셨을까?’ 하고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지요.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처럼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이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혔기 때문입니다.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것도 혹여 실족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되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여러 은사와 은혜가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지요.
혹여 여러분은 “내가 기도해 보니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쉽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성령의 음성과 주관, 인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마치 자신만 특별한 것처럼 들레는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결코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기에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커져만 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고, 권능도 주셔서 크게 사용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최고의 선을 이루어 마지막 때 영광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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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채워 보세요.
1.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으로 ( )을 사랑하되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 )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2. 사도 바울은 큰 ( )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 )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여 큰 권능을 내려 주셨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59~6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영적 의미
하나님 섭리 가운데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피를 다 쏟아 탈진하신 상태였기에 심한 갈증을 겪으셔야 했다. 그러나 갈증을 참지 못해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영혼들을 찾기 위한 목마름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호소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한다. 예수님의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드린다는 것은 바로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2016-05-20
제21과이방인 선교에 앞장선 사도 바울
고전 15:9~10
읽을말씀 : 고전 15:9~10 | 외울말씀 : 고전 15:10 ㅣ참고 말씀:벧전 1:7
교육목표 : 한 번 받은 은혜에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바울은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자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생명을 다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신약 성경 27권 중 14권을 기록하는 등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했지요.
1.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사도 바울
다소(터키의 타르수스) 출신인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던 그는 의가 강하여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상대를 누르고 변론하기를 즐겼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던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라는 기독교인들의 말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이 강한 데다 우월의식과 자존심도 남달리 셌습니다. 하지만 한 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치 않고 그 길을 가는 중심이었습니다. 이를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일생일대 특별한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십니다. 바로 주님께서 직접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원정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찬란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더니 빛 가운데 음성이 들렸지요. “사울(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너무 놀라 땅에 엎드린 바울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전해 듣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것을 깨달은 바울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여 이를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은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신 것은 물론, 귀한 사명까지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이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보면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끝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도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며, 과거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어떤 사람은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지만 과연 바울이 겪은 고난을 받는다면 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 할 수 없는 사소한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고 헌신했는데 막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축복이 오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혹여 마음이 슬퍼지거나,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며 자포자기하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사람에게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이 온다면 얼마나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그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감사의 고백만 나왔습니다. ‘내 생애를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도 아니요,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그리운 주님을 이제 곧 뵈올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가 모진 고난 중에나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감사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고, 결국 그는 대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변함없이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각 사람의 선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합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감사할 수 있지요.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일평생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는 큰 은혜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 받을 뻔했는데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었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사도 바울은 잠시 받는 믿음의 시련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은혜와 감사가 변치 않으며, 생명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함으로 하나님께 선하다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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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한 번도 그 ( )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다. 오직 주의 ( )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 )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감사의 고백만 나왔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잡아가두며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바울이 어떤 계기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을까요?
3.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받은 고난이 어떠했는지 고린도후서 11:23~27을 통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52~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바울 서신’이란?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을 말한다.
신약 성경 27권에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14권이 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그중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기에 옥중서신이라 한다.
교육목표 : 한 번 받은 은혜에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바울은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자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생명을 다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신약 성경 27권 중 14권을 기록하는 등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했지요.
1.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사도 바울
다소(터키의 타르수스) 출신인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던 그는 의가 강하여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상대를 누르고 변론하기를 즐겼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던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라는 기독교인들의 말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이 강한 데다 우월의식과 자존심도 남달리 셌습니다. 하지만 한 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치 않고 그 길을 가는 중심이었습니다. 이를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일생일대 특별한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십니다. 바로 주님께서 직접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원정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찬란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더니 빛 가운데 음성이 들렸지요. “사울(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너무 놀라 땅에 엎드린 바울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전해 듣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것을 깨달은 바울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여 이를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은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신 것은 물론, 귀한 사명까지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이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보면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끝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도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며, 과거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어떤 사람은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지만 과연 바울이 겪은 고난을 받는다면 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 할 수 없는 사소한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고 헌신했는데 막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축복이 오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혹여 마음이 슬퍼지거나,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며 자포자기하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사람에게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이 온다면 얼마나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그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감사의 고백만 나왔습니다. ‘내 생애를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도 아니요,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그리운 주님을 이제 곧 뵈올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가 모진 고난 중에나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감사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고, 결국 그는 대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변함없이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각 사람의 선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합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감사할 수 있지요.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일평생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는 큰 은혜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 받을 뻔했는데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었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사도 바울은 잠시 받는 믿음의 시련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은혜와 감사가 변치 않으며, 생명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함으로 하나님께 선하다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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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한 번도 그 ( )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다. 오직 주의 ( )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 )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감사의 고백만 나왔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잡아가두며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바울이 어떤 계기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을까요?
3.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받은 고난이 어떠했는지 고린도후서 11:23~27을 통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52~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바울 서신’이란?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을 말한다.
신약 성경 27권에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14권이 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그중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기에 옥중서신이라 한다.
2016-05-13
제20과페르시아 제국의 총리 다니엘
단 6:21~22
읽을말씀 : 단 6:21~22 | 외울말씀 : 잠 17:9 ㅣ 참고 말씀:단 1:17~21
교육목표 : 자신을 모함해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지닌 성도가 되게 한다.
남유다 출신 다니엘은 소년 시절에 나라가 패망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한결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타협하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다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선하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는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신임을 받아 바벨론의 모든 도를 다스렸으며(단 2:48~49), 벨사살 왕 때에는 바벨론 제국의 셋째 치리자가 되었습니다(단 5:29).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그는 페르시아 제국 다리오 왕의 인정을 받아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선에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지요.
1. 자신을 모함해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다니엘
다니엘 6장을 보면 다리오 왕은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세우고 그 위에 총리 셋을 두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그는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보다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지요.
왕은 모든 일에 흠이 없는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해 계략을 꾸밉니다. 먼저 그들은 국사에 대해 고소할 틈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흠이나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지요. 결국 악한 무리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고소할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을 찾아가 왕을 위하는 척하며 ‘이제부터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제정하게 합니다. 왕의 어인까지 찍어 누구도 번복하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준비했지요(단 6:7~9).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 전국의 박수와 술객보다 열 배나 뛰어나고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았습니다(단 1:17~21). 그러니 시기하는 무리들이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쯤은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기에 얼마든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잠잠히 있었고, 전과 다름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만일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의 계략을 왕에게 고한다면 그들이 해를 입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이었기에 왕에게 고하지 않았고 악한 무리에게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설령 자신이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그들을 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혹여 상대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 말한다면 결코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자연히 걸러지게 되지요. 이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자신이 직접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2.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선한 말로 위로하는 다니엘
하나님을 향한 다니엘의 신앙은 그를 시기하는 악한 사람들이라도 인정할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변함없이 기도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이를 이용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과연 다니엘은 예상한 대로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악한 무리는 즉시 왕에게 고소합니다. 다리오 왕은 그제야 그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한 계략임을 깨닫고, 해가 질 때까지 심히 근심합니다. 하지만 이미 어인을 찍었으니 왕이라 해도 다니엘을 구할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왕이 머뭇거리자 악한 무리는 또다시 왕에게 나아가 왕이 세운 금령과 법도는 변개치 못할 것이니 신속히 규례대로 시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으라고 명한 후,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위로합니다.
이를 통해 다니엘이 평소 왕에게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잘 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총애하는 신하를 지키지 못하고 사자 굴에 내어줘야 했기에 비통한 마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진 그날, 왕은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고 기악을 그쳤으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이튿날 새벽, 왕은 급히 사자 굴에 가서 슬피 다니엘을 부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단 6:20) 왕은 다니엘이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상식대로라면 다니엘은 이미 사자 밥이 되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웬일입니까?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는 다니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어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구절절 선한 말로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혹여 다니엘이 왕에 대한 서운함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왕은 어찌하여 간신들의 말을 듣고 저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까? 보소서, 나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에서 구하셨나이다.” 하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혹여라도 다니엘이 이렇게 말했다면 왕은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요.
그러나 다니엘은 원망과 설움이 섞인 말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왕이 얼마나 슬퍼했을지 알기에 왕의 마음을 헤아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요. 이에 새벽같이 달려온 왕에게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안심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를 전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다니엘과 같은 선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가령, 어떤 일을 진행하는데 내 의견이 수용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결과가 좋으면 괜찮은데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그럴 때 상대에게 힘을 주는 말,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겠는지요?
아니면 “그거 보십시오. 제 말대로 하지 않더니 일이 잘못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상대를 무안하게 하지는 않겠는지요? 이런 말은 상대에게 더 큰 짐을 안겨 줄 뿐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텐데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상대를 민망케 한다면 삼가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자연히 마음에서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며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해 줍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 직장에서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가 먼저 나를 선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죽음도 피해갈 수 있습니다. 혹여 어떤 시험이나 어려움이 온다 해도 그것은 더욱 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잠시 허락된 과정일 뿐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행실과 고백으로 삶에 축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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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니엘은 이른 새벽 사자 굴로 달려온 왕에게 뭐라고 고백했을까요?
2. 다니엘은 악한 자들이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고 얼마든지 왕에게 알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45~5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다리오 왕은 누구일까? (다니엘 5:31)
원래 메대와 페르시아는 북과 남으로 나누어진 나라로, 메대가 영토와 인구, 군사와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페르시아를 압도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과 메대의 공주가 결혼하면서 혼인 동맹이 맺어졌고, 그 사이에서 고레스가 태어난다. 사실 이때까지는 동맹이라 하지만 페르시아는 메대의 속국에 가까웠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고레스가 왕이 되면서부터 국력이 성장하여 마침내 메대를 정복한다. 이때 고레스는 세계 정복을 위해서는 메대의 힘이 필요했기에 메대 왕을 극진히 대우해 주며 동맹을 맺음으로 강대국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고레스는 최강국인 바벨론을 정복한 후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제국을 세운다. 그 기간은 2년 정도로 짧았다. 이때 고레스는 자신의 외삼촌이기도 한 메대 왕을 연합제국의 지도자로 세우는데 그가 바로 다니엘을 총애했던 다리오 왕이다. 남은 정복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고레스는 통치권을 다리오로부터 이양받아 2년간의 연합제국의 막을 내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펼친다.
교육목표 : 자신을 모함해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지닌 성도가 되게 한다.
남유다 출신 다니엘은 소년 시절에 나라가 패망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한결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타협하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다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선하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는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신임을 받아 바벨론의 모든 도를 다스렸으며(단 2:48~49), 벨사살 왕 때에는 바벨론 제국의 셋째 치리자가 되었습니다(단 5:29).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그는 페르시아 제국 다리오 왕의 인정을 받아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선에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지요.
1. 자신을 모함해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다니엘
다니엘 6장을 보면 다리오 왕은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세우고 그 위에 총리 셋을 두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그는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보다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지요.
왕은 모든 일에 흠이 없는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해 계략을 꾸밉니다. 먼저 그들은 국사에 대해 고소할 틈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흠이나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지요. 결국 악한 무리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고소할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을 찾아가 왕을 위하는 척하며 ‘이제부터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제정하게 합니다. 왕의 어인까지 찍어 누구도 번복하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준비했지요(단 6:7~9).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 전국의 박수와 술객보다 열 배나 뛰어나고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았습니다(단 1:17~21). 그러니 시기하는 무리들이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쯤은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기에 얼마든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잠잠히 있었고, 전과 다름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만일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의 계략을 왕에게 고한다면 그들이 해를 입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이었기에 왕에게 고하지 않았고 악한 무리에게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설령 자신이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그들을 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혹여 상대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 말한다면 결코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자연히 걸러지게 되지요. 이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자신이 직접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2.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선한 말로 위로하는 다니엘
하나님을 향한 다니엘의 신앙은 그를 시기하는 악한 사람들이라도 인정할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변함없이 기도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이를 이용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과연 다니엘은 예상한 대로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악한 무리는 즉시 왕에게 고소합니다. 다리오 왕은 그제야 그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한 계략임을 깨닫고, 해가 질 때까지 심히 근심합니다. 하지만 이미 어인을 찍었으니 왕이라 해도 다니엘을 구할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왕이 머뭇거리자 악한 무리는 또다시 왕에게 나아가 왕이 세운 금령과 법도는 변개치 못할 것이니 신속히 규례대로 시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으라고 명한 후,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위로합니다.
이를 통해 다니엘이 평소 왕에게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잘 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총애하는 신하를 지키지 못하고 사자 굴에 내어줘야 했기에 비통한 마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진 그날, 왕은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고 기악을 그쳤으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이튿날 새벽, 왕은 급히 사자 굴에 가서 슬피 다니엘을 부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단 6:20) 왕은 다니엘이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상식대로라면 다니엘은 이미 사자 밥이 되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웬일입니까?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는 다니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어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구절절 선한 말로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혹여 다니엘이 왕에 대한 서운함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왕은 어찌하여 간신들의 말을 듣고 저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까? 보소서, 나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에서 구하셨나이다.” 하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혹여라도 다니엘이 이렇게 말했다면 왕은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요.
그러나 다니엘은 원망과 설움이 섞인 말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왕이 얼마나 슬퍼했을지 알기에 왕의 마음을 헤아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요. 이에 새벽같이 달려온 왕에게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안심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를 전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다니엘과 같은 선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가령, 어떤 일을 진행하는데 내 의견이 수용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결과가 좋으면 괜찮은데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그럴 때 상대에게 힘을 주는 말,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겠는지요?
아니면 “그거 보십시오. 제 말대로 하지 않더니 일이 잘못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상대를 무안하게 하지는 않겠는지요? 이런 말은 상대에게 더 큰 짐을 안겨 줄 뿐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텐데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상대를 민망케 한다면 삼가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자연히 마음에서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며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해 줍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 직장에서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가 먼저 나를 선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죽음도 피해갈 수 있습니다. 혹여 어떤 시험이나 어려움이 온다 해도 그것은 더욱 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잠시 허락된 과정일 뿐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행실과 고백으로 삶에 축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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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니엘은 이른 새벽 사자 굴로 달려온 왕에게 뭐라고 고백했을까요?
2. 다니엘은 악한 자들이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고 얼마든지 왕에게 알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45~5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다리오 왕은 누구일까? (다니엘 5:31)
원래 메대와 페르시아는 북과 남으로 나누어진 나라로, 메대가 영토와 인구, 군사와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페르시아를 압도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과 메대의 공주가 결혼하면서 혼인 동맹이 맺어졌고, 그 사이에서 고레스가 태어난다. 사실 이때까지는 동맹이라 하지만 페르시아는 메대의 속국에 가까웠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고레스가 왕이 되면서부터 국력이 성장하여 마침내 메대를 정복한다. 이때 고레스는 세계 정복을 위해서는 메대의 힘이 필요했기에 메대 왕을 극진히 대우해 주며 동맹을 맺음으로 강대국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고레스는 최강국인 바벨론을 정복한 후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제국을 세운다. 그 기간은 2년 정도로 짧았다. 이때 고레스는 자신의 외삼촌이기도 한 메대 왕을 연합제국의 지도자로 세우는데 그가 바로 다니엘을 총애했던 다리오 왕이다. 남은 정복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고레스는 통치권을 다리오로부터 이양받아 2년간의 연합제국의 막을 내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펼친다.
2016-05-06
제19과풀무 불에서 살아난 다니엘의 세 친구
단 3:16~18
읽을말씀 : 단 3:16~18 | 외울말씀 : 신 28:1 ㅣ참고 말씀:출 20:3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철저히 싫어하고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곧고 선한 중심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그들은 소년에 불과했지만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지요. 그 결과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였으며, 온 나라의 박수와 술객보다 지혜와 총명이 열 배나 뛰어났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믿음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 극렬히 타는 풀무에서도 건져 내셨을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철저히 싫어하는 마음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로 잡아 온 남유다 왕족과 귀족 중에 총명하고 뛰어난 소년들을 데려다가 그 나라 학문과 방언을 배우게 했습니다(단 1장).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여기에 발탁돼 3년간 갈대아 학문을 배우며 왕이 지정한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우려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지정한 음식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것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감독관에게 청하여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대신 채식만 할 수 있도록 조건부 허락을 받았습니다. 일단 열흘 동안 채식만 할테니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해 보라고 하였지요. 열흘 후에 보니 그들의 얼굴이 왕의 진미를 먹은 소년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고, 다니엘에게는 특별히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하셨지요. 그 결과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혔습니다.
포로 신분으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눈에 거슬렸다가는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중심에서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생명의 위협이 와도 싫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음식을 금하신 것은 그것이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가증한 짐승들에는 좋지 않은 속성이 들어 있어 계속 섭취하면 아무래도 영향을 받습니다. 또 우상의 제물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문화에 젖어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기 쉽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니 엄히 경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오늘날 세계 평화, 종교 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이 있는데 여기에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그 말씀대로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의 선한 정도에 따라 나오는 행함이 다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 간의 질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때부터 가족이 아닌 이상 남녀 간에 단둘이 차를 타지 않도록 경계하였습니다. 육의 속성이 남아 있는 한 남녀가 단둘이 차를 타거나 밀폐된 공간에 있을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입니다.
또한 교회 각 기관이나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였지요. 잠깐 차용해 쓰고 다시 채워 넣었다 해도, 그 금액이 아무리 적다 해도 하나님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를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신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 해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과 의무감이나 억지로 지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내 입장과 처한 환경에 따라 적당히 타협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우쳐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도 철저히 싫어하는 선한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타협하지 않는 마음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음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그들은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았지요. 그런데 이들에게 엄청난 신앙의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을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단 3장). 누구든지 절을 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지요.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생명의 위협 앞에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왕은 회유와 협박으로 세 사람의 의지를 꺾어 보려고 합니다. 다시 기회를 줄 테니 금 신상 앞에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풀무 불에 던져진다 해도 우상 앞에 결단코 절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이와 더불어 그들은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을 고백합니다. 왕에게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분명하게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더욱 선한 고백이 이어집니다. 바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 주시지 않을지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이지요.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능히 건져 주실 하나님을 믿으나 그리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이 행할 바를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이만큼 자신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도리를 다했음에도 시험이 왔고, 목숨을 잃을 상황이라 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지요.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하나님 뜻 가운데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하게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을 주관하시면 그들을 풀무 불에 던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그들은 평일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풀무 불에 던져져도 변함없는 믿음의 증거를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셨습니다. 왕이 보니 뜨거운 불 속에 신의 아들과 같은 모양의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극렬히 타는 불 가운데서 나왔는데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불에 탄 냄새조차 없었지요. 느부갓네살 왕은 이들을 풀무 불에서 지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들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내 유익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간사한 마음이 있으면 막상 현실의 어려움이 닥칠 경우 믿음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철저히 싫어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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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음식을 금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회유와 협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고백을 했나요?
3. 하나님께서는 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내버려 두셨나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38~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적인 우상 숭배’와 ‘영적인 우상 숭배’
‘육적인 우상 숭배’는 나무, 돌, 쇠붙이, 금, 은붙이 등으로 사람, 짐승, 물고기, 해, 달, 별 등의 형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섬기는 것을 말한다. 부적을 의지하거나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행위도 우상 숭배이다.
‘영적인 우상 숭배’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자기 욕심을 좇아 부모, 남편, 아내,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최고로 알고 사랑하는 사람도 자신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철저히 싫어하고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곧고 선한 중심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그들은 소년에 불과했지만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지요. 그 결과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였으며, 온 나라의 박수와 술객보다 지혜와 총명이 열 배나 뛰어났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믿음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 극렬히 타는 풀무에서도 건져 내셨을까요?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철저히 싫어하는 마음
당시 바벨론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로 잡아 온 남유다 왕족과 귀족 중에 총명하고 뛰어난 소년들을 데려다가 그 나라 학문과 방언을 배우게 했습니다(단 1장).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여기에 발탁돼 3년간 갈대아 학문을 배우며 왕이 지정한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우려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왕이 지정한 음식에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것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하다’ 하신 짐승으로 만든 음식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감독관에게 청하여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대신 채식만 할 수 있도록 조건부 허락을 받았습니다. 일단 열흘 동안 채식만 할테니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들과 얼굴빛을 비교해 보라고 하였지요. 열흘 후에 보니 그들의 얼굴이 왕의 진미를 먹은 소년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고, 다니엘에게는 특별히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하셨지요. 그 결과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을 모시는 자들로 뽑혔습니다.
포로 신분으로 왕이 지정해 주는 음식을 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 눈에 거슬렸다가는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중심에서 경외하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생명의 위협이 와도 싫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음식을 금하신 것은 그것이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가증한 짐승들에는 좋지 않은 속성이 들어 있어 계속 섭취하면 아무래도 영향을 받습니다. 또 우상의 제물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문화에 젖어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기 쉽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니 엄히 경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오늘날 세계 평화, 종교 간의 화합 등을 내세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이 있는데 여기에 결코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그 말씀대로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의 선한 정도에 따라 나오는 행함이 다릅니다.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남녀 간의 질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개척 때부터 가족이 아닌 이상 남녀 간에 단둘이 차를 타지 않도록 경계하였습니다. 육의 속성이 남아 있는 한 남녀가 단둘이 차를 타거나 밀폐된 공간에 있을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입니다.
또한 교회 각 기관이나 부서의 재정을 임의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경계하였지요. 잠깐 차용해 쓰고 다시 채워 넣었다 해도, 그 금액이 아무리 적다 해도 하나님의 것에 임의로 손을 대었다면 이는 도적질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를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준행하고 계신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말씀을 준행한다 해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마음으로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과 의무감이나 억지로 지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내 입장과 처한 환경에 따라 적당히 타협한다면 이는 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우쳐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도 철저히 싫어하는 선한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 신앙을 지키기 위해 타협하지 않는 마음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음식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은 세월이 흐르고 지위가 높아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처한 환경은 온통 이방 문화로 가득했지만 그들은 곧은 중심으로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았지요. 그런데 이들에게 엄청난 신앙의 도전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절을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단 3장). 누구든지 절을 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겠다고 엄포를 놓지요.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생명의 위협 앞에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왕은 회유와 협박으로 세 사람의 의지를 꺾어 보려고 합니다. 다시 기회를 줄 테니 금 신상 앞에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풀무 불에 던져진다 해도 우상 앞에 결단코 절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이와 더불어 그들은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담대히 믿음을 고백합니다. 왕에게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분명하게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잃을지라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더욱 선한 고백이 이어집니다. 바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 주시지 않을지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이지요.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능히 건져 주실 하나님을 믿으나 그리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깊은 선 가운데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이 행할 바를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께서도 이만큼 자신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도리를 다했음에도 시험이 왔고, 목숨을 잃을 상황이라 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지요.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온전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요, 하나님 뜻 가운데 있다는 사실만으로 족하게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을 주관하시면 그들을 풀무 불에 던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그들은 평일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 불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풀무 불에 던져져도 변함없는 믿음의 증거를 보일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셨습니다. 왕이 보니 뜨거운 불 속에 신의 아들과 같은 모양의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극렬히 타는 불 가운데서 나왔는데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불에 탄 냄새조차 없었지요. 느부갓네살 왕은 이들을 풀무 불에서 지켜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들의 지위를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내 유익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간사한 마음이 있으면 막상 현실의 어려움이 닥칠 경우 믿음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철저히 싫어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이 와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선한 중심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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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우상의 제물과 가증한 음식을 금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으로부터 회유와 협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고백을 했나요?
3. 하나님께서는 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던져지도록 내버려 두셨나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38~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육적인 우상 숭배’와 ‘영적인 우상 숭배’
‘육적인 우상 숭배’는 나무, 돌, 쇠붙이, 금, 은붙이 등으로 사람, 짐승, 물고기, 해, 달, 별 등의 형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섬기는 것을 말한다. 부적을 의지하거나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행위도 우상 숭배이다.
‘영적인 우상 숭배’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자기 욕심을 좇아 부모, 남편, 아내,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최고로 알고 사랑하는 사람도 자신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
2016-04-29
제18과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
삼상 26:23
읽을말씀 : 삼상 26:23 | 외울말씀 : 삼상 16:7 ㅣ 참고 말씀:삼상 17장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다윗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말째로서 소년 시절 아버지의 양을 쳤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 선지자가 집으로 찾아옵니다. 사무엘은 용모가 빼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가장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게 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행한 소년 다윗
다윗이 아버지의 양을 칠 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족속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과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대단한 용사였습니다.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습니다. 골리앗의 위용에 눌려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마침 참전한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전장에 온 소년 다윗이 그 상황을 목격합니다. 골리앗이 모욕하는 소리를 들은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하며 자신이 맞서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사울 왕의 허락을 받은 그는 아무런 무장도 없이 물맷돌만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 담대히 외쳤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단번에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이로 인해 거인 골리앗이 쓰러지자,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충천하여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습만 보아도 주눅이 들 만큼 거대한 골리앗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만일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잠잠히 참는 자녀가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용납지 않으시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2.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까지도 선대하며 감동을 준 다윗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을 때는 사울 왕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궁에 들어가 일마다 지혜롭게 행하여 군대의 장이 되고 백성에게 사랑을 받으니 사울이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칭송하는 것을 들은 뒤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일부러 전쟁터에 내보내는가 하면,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다윗이 수금을 탈 때 단창을 던지는 등 집요하게 죽이고자 했지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쳐야 했습니다.
하루는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다윗 일행이 숨어 있는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했지만 다윗은 그의 겉옷 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만으로도 마음이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 명했습니다. 사울이 동굴에서 벗어나 멀찍이 떨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사울의 겉옷 자락을 보이며 지극히 선한 말로 그를 해칠 마음이 없음을 전했습니다.
이에 악한 사울도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하지요. 하지만 얼마 못 가 사울은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고 나라 전역을 수색합니다. 사울 일행이 하길라 산 아래 진을 쳤을 때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몰래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 보니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요.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다윗은 죽이지 말라 하며 멀찍이 떨어진 뒤에야 큰소리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은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말하고 돌아갔습니다(삼상 26장).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라도 선대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상대를 살려 보냈는데 그가 다시 나를 해치려 합니다. 이때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한 번만 봐 주고 그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해도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단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므로 형식적으로만 선대한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슬피 울며 금식했지요. 게다가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은 다윗 왕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성령 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리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후 평안해졌을 때 그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다윗이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봅니다. 마음이 동한 다윗은 그녀가 충신 우리아의 아내라는 사실을 듣고도 그녀를 불러 동침하였지요. 이 일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잉태하게 됩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를 은폐하려고 방법을 동원하다가 여의치 않자 결국 우리아를 전쟁터의 최전방에 내세워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 다윗을 호되게 책망하셨지요. 그때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죄의 대가로 엄청난 연단이 닥쳤을 때에도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어린아이가 지적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하게 받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칠 때였습니다. 시므이가 쫓아와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하지요. 다윗의 부하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지만 다윗은 만류하며 오히려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처럼 다윗은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깨우치려고 합니다.
다윗은 범죄하여 혹독한 연단을 겪었지만 선으로 잘 통과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와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리게 되었지요. 여러분도 다윗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아 온전한 선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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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다윗의 선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이름이 ( )을 당할 때에 담대히 ( )으로 행했다.
둘째, 자기를 죽이려는 ( )까지도 선대하며 감동을 주었다.
셋째, 지적받을 때 즉시 ( )하고 감사함으로 ( )을 받았다.
2.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칠 때 쫓아와 돌을 던지며 저주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30~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시므이는 어떤 사람일까?
베냐민 사람으로 사울 왕의 친척이다. 다윗 왕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가운데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말했다.
다윗의 신하들이 심히 분하여 시므이를 죽이려 하지만 다윗은 만류하며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고백한다(삼하 16:12).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솔로몬 통치 때 자신의 악행에 대한 값으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차원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온전한 선을 이루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다윗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말째로서 소년 시절 아버지의 양을 쳤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 선지자가 집으로 찾아옵니다. 사무엘은 용모가 빼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며 가장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게 하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할 때에 담대히 믿음으로 행한 소년 다윗
다윗이 아버지의 양을 칠 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족속과 엘라 골짜기에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블레셋 진영에 골리앗이란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 투구와 놋 단창과 약 57kg이나 되는 갑옷으로 무장한 대단한 용사였습니다. 이러한 골리앗이 40일 동안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소리를 치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습니다. 골리앗의 위용에 눌려 두려워 떨고만 있었습니다.
마침 참전한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전장에 온 소년 다윗이 그 상황을 목격합니다. 골리앗이 모욕하는 소리를 들은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하며 자신이 맞서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사울 왕의 허락을 받은 그는 아무런 무장도 없이 물맷돌만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나아가 담대히 외쳤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단번에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이로 인해 거인 골리앗이 쓰러지자,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충천하여 블레셋 군대를 진멸하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습만 보아도 주눅이 들 만큼 거대한 골리앗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의 행함을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만일 부모님이 애매히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잠잠히 참는 자녀가 있다면 이것이 선일까요? 이는 화평을 이루는 것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도 아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성전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용납지 않으시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막 11:15~17).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분연히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2.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까지도 선대하며 감동을 준 다윗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을 때는 사울 왕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궁에 들어가 일마다 지혜롭게 행하여 군대의 장이 되고 백성에게 사랑을 받으니 사울이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칭송하는 것을 들은 뒤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일부러 전쟁터에 내보내는가 하면,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다윗이 수금을 탈 때 단창을 던지는 등 집요하게 죽이고자 했지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쳐야 했습니다.
하루는 사울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다윗 일행이 숨어 있는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 사울이 모르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때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을 죽일 것을 권했지만 다윗은 그의 겉옷 자락만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만으로도 마음이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사울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 명했습니다. 사울이 동굴에서 벗어나 멀찍이 떨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사울의 겉옷 자락을 보이며 지극히 선한 말로 그를 해칠 마음이 없음을 전했습니다.
이에 악한 사울도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군대를 철수하지요. 하지만 얼마 못 가 사울은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3천 명을 거느리고 나라 전역을 수색합니다. 사울 일행이 하길라 산 아래 진을 쳤을 때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몰래 사울의 진영에 들어가 보니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요.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아비새가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다윗은 죽이지 말라 하며 멀찍이 떨어진 뒤에야 큰소리로 사울을 향해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하며 자신의 진심을 알렸지요. 이에 사울은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아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말하고 돌아갔습니다(삼상 26장).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두 번째 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생명을 해하려는 원수라도 선대하되, 그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고백을 했다는 점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상대를 살려 보냈는데 그가 다시 나를 해치려 합니다. 이때 다윗처럼 변함없이 선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은 중심이 선했기에 한 번만 봐 주고 그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해도 임의로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니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단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므로 형식적으로만 선대한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사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기에 선한 말로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했습니다. 나아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슬피 울며 금식했지요. 게다가 사울을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3. 지적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연단을 받은 다윗 왕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을 수 있는 중심이었지만, 성령 시대가 아니었기에 깊은 본성 속의 악까지 버리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후 평안해졌을 때 그의 본성 속에 있던 악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다윗이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봅니다. 마음이 동한 다윗은 그녀가 충신 우리아의 아내라는 사실을 듣고도 그녀를 불러 동침하였지요. 이 일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잉태하게 됩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를 은폐하려고 방법을 동원하다가 여의치 않자 결국 우리아를 전쟁터의 최전방에 내세워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 다윗을 호되게 책망하셨지요. 그때 다윗은 즉시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세 번째 선입니다. 왕이라 할지라도 지적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죄의 대가로 엄청난 연단이 닥쳤을 때에도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지적받기를 즐겨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어린아이가 지적한다 해도 그것이 진리라면 중심에서 겸비하게 받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칠 때였습니다. 시므이가 쫓아와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하지요. 다윗의 부하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지만 다윗은 만류하며 오히려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처럼 다윗은 연단이 왔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고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어려움이 오면 환경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며 연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깨우치려고 합니다.
다윗은 범죄하여 혹독한 연단을 겪었지만 선으로 잘 통과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나와 천국에서도 존귀한 자로 세세토록 영화를 누리게 되었지요. 여러분도 다윗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아 온전한 선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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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다윗의 선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이름이 ( )을 당할 때에 담대히 ( )으로 행했다.
둘째, 자기를 죽이려는 ( )까지도 선대하며 감동을 주었다.
셋째, 지적받을 때 즉시 ( )하고 감사함으로 ( )을 받았다.
2.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칠 때 쫓아와 돌을 던지며 저주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30~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시므이는 어떤 사람일까?
베냐민 사람으로 사울 왕의 친척이다. 다윗 왕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돌을 던지며 저주하는 가운데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말했다.
다윗의 신하들이 심히 분하여 시므이를 죽이려 하지만 다윗은 만류하며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고백한다(삼하 16:12).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솔로몬 통치 때 자신의 악행에 대한 값으로 죽임을 당하고 만다.
2016-04-22
제17과예수님의 계보에 오른 이방 여인 룻
룻 1:16~17
읽을말씀 : 룻 1:16~17 | 외울말씀 : 마 1:1~6 l 참고 말씀:레 25:25
교육목표 : 자신을 희생하며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다했던 룻의 선을 본받아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선한 마음에 하나님을 믿게 된 룻
모압에 살던 룻은 극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죽고 맙니다. 결국 집안에는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만 남았습니다.
과부 셋이서 의지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시어머니는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베들레헴을 향해 가던 중, 나오미는 남편과 자식이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했지요.
이때 동서 오르바는 울며 떠났지만,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고백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 거절하다가 시어머니의 강권에 동서 오르바처럼 못 이기는 척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시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룻의 고백에는 끝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굳은 의지와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신앙의 결단까지 담겨 있습니다. 원래 룻은 모압 여인이기에 결혼 전에는 이방 신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정으로 시집온 뒤에는 시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기에 하나님을 선택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지요.
2. 하나님께서 룻의 선을 인정하시는 이유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는 마음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는 우애하며 젊은이는 노인을 공경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행함을 선하다 인정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룻이 친정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해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따라간다면 낯선 땅에서 당장 먹고 살 뚜렷한 방안도 없습니다.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들었기에 룻이 생활의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남편도 자녀도 없이 타향에 홀로 남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니 시어머니도 며느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편히 살도록 강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처럼 도리를 좇는 선은 가정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어떤 분이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제게 물어오셨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먼저 상담을 요청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만일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었으며 회사에서 중책을 맡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도리이자 선입니다. 꼭 이직을 해야 한다면 그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유익을 포기하면서 도리를 좇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릅니다. 이런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에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이 하나님의 자녀 된 기본 도리임을 알고 실천해 나가지요. 이는 마음에 도리를 좇는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유통업이나 요식업 등에 종사해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운 분들 중 기도하여 환경을 바꿔 가거나, 주일을 지킬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유익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도리를 좇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도리를 좇는 사람은 십일조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니 그 증거로 총수입 중 십 분의 일을 드리라는 하나님 말씀이 힘들거나 무겁지 않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좇는 사람은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이를 통해 믿음을 성장시켜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하는 마음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다 땅으로 온 후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어려움이 닥쳐도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시어머니를 섬겼던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유다 땅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룻은 당장 양식부터 구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다행히 보리 추수 때였기에 이삭을 주워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고된 일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어머니를 공궤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성실히 일했습니다.
종일 이삭을 줍고 집에 가면 시어머니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이처럼 변함없이 도리를 좇아 행한 룻은 결국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기업 무를 자격이 있었지요(룻 2:20 \; 레 25:25). 룻은 보아스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다윗 왕의 할아버지 오벳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선한 사람도 드물지만 끝까지 도리를 다하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처음에는 자녀 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피다가도 시간이 흘러 차도가 없고 거액의 치료비까지 든다면 대부분 마음이 변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거친 말로 병든 부모에게 상처를 줍니다. 물론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를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도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입니다. 서로 이런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배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니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이 마땅한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얼마나 자녀 된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고백한 분들은 그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교회에서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룻처럼 영육 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세요.
하나님께서 룻의 행함을 선하다 인정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 )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2~2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룻의 계보
엘리멜렉_ 나오미
말론_ 룻/기룐_오르바
룻_보아스
오벳
이새
다윗
교육목표 : 자신을 희생하며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다했던 룻의 선을 본받아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선한 마음에 하나님을 믿게 된 룻
모압에 살던 룻은 극심한 흉년을 피해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모두 죽고 맙니다. 결국 집안에는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만 남았습니다.
과부 셋이서 의지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시어머니는 유다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베들레헴을 향해 가던 중, 나오미는 남편과 자식이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 것을 권했지요.
이때 동서 오르바는 울며 떠났지만,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고백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만약 룻에게 자기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인정상 한두 번 거절하다가 시어머니의 강권에 동서 오르바처럼 못 이기는 척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시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룻의 고백에는 끝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굳은 의지와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신앙의 결단까지 담겨 있습니다. 원래 룻은 모압 여인이기에 결혼 전에는 이방 신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정으로 시집온 뒤에는 시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되었기에 하나님을 선택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지요.
2. 하나님께서 룻의 선을 인정하시는 이유
1)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는 마음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는 우애하며 젊은이는 노인을 공경하는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을 갈 때 도리를 좇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리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므로 굳이 선이라 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룻의 행함을 선하다 인정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룻이 친정으로 돌아가면 일가친척이 있고, 재혼해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따라간다면 낯선 땅에서 당장 먹고 살 뚜렷한 방안도 없습니다. 더욱이 시어머니는 나이가 들었기에 룻이 생활의 모든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남편도 자녀도 없이 타향에 홀로 남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니 시어머니도 며느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편히 살도록 강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자신의 유익을 계산한 것이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처럼 도리를 좇는 선은 가정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어떤 분이 현재 근무하는 직장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제게 물어오셨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편을 택하기 전에 먼저 상담을 요청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만일 자신이 어려울 때 그 직장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능력 있는 사회인이 되었으며 회사에서 중책을 맡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이겠습니까? 받은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도리이자 선입니다. 꼭 이직을 해야 한다면 그 직장에 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현실의 유익을 포기하면서 도리를 좇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신앙 안에서도 도리를 좇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성장이 빠릅니다. 이런 사람은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에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이 하나님의 자녀 된 기본 도리임을 알고 실천해 나가지요. 이는 마음에 도리를 좇는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혹 유통업이나 요식업 등에 종사해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운 분들 중 기도하여 환경을 바꿔 가거나, 주일을 지킬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유익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도리를 좇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도리를 좇는 사람은 십일조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니 그 증거로 총수입 중 십 분의 일을 드리라는 하나님 말씀이 힘들거나 무겁지 않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좇는 사람은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물론, 신앙 안에서도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체험을 주시고 이를 통해 믿음을 성장시켜 주십니다.
2) 성실과 진실로 변함없이 도리를 행하는 마음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억지로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다 땅으로 온 후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어려움이 닥쳐도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시어머니를 섬겼던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유다 땅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룻은 당장 양식부터 구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다행히 보리 추수 때였기에 이삭을 주워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고된 일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어머니를 공궤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성실히 일했습니다.
종일 이삭을 줍고 집에 가면 시어머니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아뢰었지요. 친딸보다 더한 성심으로,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시어머니도 룻을 친딸처럼 사랑했으며 이러한 룻의 행실은 베들레헴 성읍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이처럼 변함없이 도리를 좇아 행한 룻은 결국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 성읍의 유력자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시어머니의 근족으로서 기업 무를 자격이 있었지요(룻 2:20 \; 레 25:25). 룻은 보아스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다윗 왕의 할아버지 오벳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선을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선한 사람도 드물지만 끝까지 도리를 다하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처음에는 자녀 된 도리를 좇아 병든 부모님을 보살피다가도 시간이 흘러 차도가 없고 거액의 치료비까지 든다면 대부분 마음이 변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거친 말로 병든 부모에게 상처를 줍니다. 물론 자녀들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부모를 섬기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도 서운해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것이 참사랑이며 선입니다. 서로 이런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도리를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알고 진리의 말씀을 배운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망의 길에서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니 받은바 은혜를 갚는 것이 마땅한 사람의 도리이지요. 더군다나 우리 영혼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좇아 얼마나 자녀 된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고백한 분들은 그 마음에 변함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교회에서 영적인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선한 마음으로 자신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룻처럼 영육 간에 자신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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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세요.
하나님께서 룻의 행함을 선하다 인정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자신을 희생하며 도리를 좇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 )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22~2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룻의 계보
엘리멜렉_ 나오미
말론_ 룻/기룐_오르바
룻_보아스
오벳
이새
다윗
2016-04-15
제16과사망에 이르는 죄
마 12:31~32
읽을말씀 : 마 12:31~32 | 외울말씀 : 히 10:26 l 참고 말씀:히 6:4~6
교육목표 :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에 대해 밝히 알아 구원받지 못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결코 짓지 않게 한다.
공장 폐수나 쓰레기, 농약 같은 독극물이나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된 땅은 회복되는 데에 오랜 세월이 걸리거나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마음밭도 이와 비슷합니다. 독한 폐수와 같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심히 오염되면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기가 어렵고 구원에 이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황폐한 마음밭도 소생시키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얼마나 철저히 통회자복하며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힘쓰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지요. 혹여 지난날 마음밭을 개간하지 않고 더럽혀 왔다면 철저히 통회자복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1. 구원과 상관 있는 죄는 결코 짓지 말아야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마음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거스르고 육체의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해도 반복해서 죄를 지으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용서하고 또 용서하시는 분이지만 일단 구원받았다고 해도 너무 중한 죄를 짓거나 계속 범죄하여 어느 한계선을 넘어 버리면 원수 마귀 사단이 “저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까?”라고 송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원수 마귀 사단이 영계의 법을 근거로 송사하면 이를 받아들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든 지어서는 안 되지만 특히 구원과 상관 있는 죄는 결코 짓지 말아야 합니다. 혹여 지었다면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죄라고 해서 다 같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죄 중에는 회개하면 바로 용서받을 수 있는 비교적 가벼운 죄가 있는가 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신 무거운 죄들도 있습니다.
2.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단을 비롯하여 현저한 육체의 일에 속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말씀하신 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죄’를 지었다 해도 철저히 통회자복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죄에서 돌이키면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도 이단에서 나와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처럼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아서 회개할 수 없는 죄도 있습니다. 이런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합니다. 죄가 너무 중하기 때문에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경우입니다.
요한일서 5장 16절에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용서해 달라고 구하지 말아야 할 ‘사망에 이르는 죄’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 성령 훼방, 모독, 거역의 죄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경우입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에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진리를 알면서 짐짓 즉 고의로 거듭 죄를 범하는 경우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6~27절에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성령을 훼방, 거역, 모독하는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성경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사소한 교리 차이나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이단이라고 정죄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중생, 부활, 재림, 심판, 천국 등 성경의 핵심 교리가 같다면 결코 이단이라고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나 목회자를 함부로 정죄하면 성령 훼방, 거역, 모독이 되어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마 12:31~32).
그러면 성령 훼방, 거역, 모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먼저 ‘성령 훼방’이란 하나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경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인데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므로 악으로 하나님 일에 훼방을 놓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를 이단이라 정죄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거짓 문서를 조작하여 집회를 방해하는 것 등이 이에 속합니다. 진리를 몰라서 그런 경우라면 돌이켜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지만 알면서도 시기 질투하여 악한 마음으로 훼방한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성령 거역’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음성을 거역하거나 성령의 역사를 임의로 판단 정죄하여 교단에 알리고 축출하는 등 상대를 해롭게 하는 경우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단지 사람으로만 알고 거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죄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진리를 모르거나 성령을 받기 전에 이러한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도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주님을 훼방하고 거역한다면 이는 성령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것과 같으므로 결코 용서받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모독’이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욕되게 하거나 그 신성을 모독하는 일입니다(눅 12:10). 만일 성령의 역사를 사단의 역사라고 비방하거나 반대로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욕되게 하는 죄입니다. 또한 진리를 비진리라고 거짓으로 전하거나 사실을 거짓으로 몰아붙이는 경우도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함부로 이단이라고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과거에 잘 알지 못하여 성령을 훼방하거나 거역, 모독했다면 지금이라도 철저히 통회자복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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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세요.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아 회개할 수 없는 죄도 있다.
이런 죄를 ( )라고 한다.
2. ‘사망에 이르는 죄’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 성령 ( ), 모독, 거역의 죄이다.
둘째, 주님을 다시 ( )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경우이다.
셋째, 진리를 알면서 ( ) 즉 고의로 거듭 죄를 범하는 경우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4~2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성령 훼방’과 ‘성령 거역’의 차이
성령 훼방과 성령 거역은 의미가 비슷하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의 차이점에 비유할 수 있다. 육신의 일이 아직 행하지는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비진리의 속성이라면, 육체의 일은 육신의 일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성령 훼방이 하나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성령의 역사를 막는 것이라면, 성령 거역은 이미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일을 적극적으로 궤사를 꾸며 거역하고 상대를 해롭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교육목표 :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에 대해 밝히 알아 구원받지 못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결코 짓지 않게 한다.
공장 폐수나 쓰레기, 농약 같은 독극물이나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된 땅은 회복되는 데에 오랜 세월이 걸리거나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마음밭도 이와 비슷합니다. 독한 폐수와 같은 사망에 이르는 죄에 심히 오염되면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기가 어렵고 구원에 이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황폐한 마음밭도 소생시키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얼마나 철저히 통회자복하며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힘쓰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지요. 혹여 지난날 마음밭을 개간하지 않고 더럽혀 왔다면 철저히 통회자복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1. 구원과 상관 있는 죄는 결코 짓지 말아야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마음 문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령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거스르고 육체의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육체의 일이란 행함으로 짓는 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 해도 반복해서 죄를 지으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용서하고 또 용서하시는 분이지만 일단 구원받았다고 해도 너무 중한 죄를 짓거나 계속 범죄하여 어느 한계선을 넘어 버리면 원수 마귀 사단이 “저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까?”라고 송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원수 마귀 사단이 영계의 법을 근거로 송사하면 이를 받아들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든 지어서는 안 되지만 특히 구원과 상관 있는 죄는 결코 짓지 말아야 합니다. 혹여 지었다면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죄라고 해서 다 같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죄 중에는 회개하면 바로 용서받을 수 있는 비교적 가벼운 죄가 있는가 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경고하신 무거운 죄들도 있습니다.
2.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단을 비롯하여 현저한 육체의 일에 속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말씀하신 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죄’를 지었다 해도 철저히 통회자복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죄에서 돌이키면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이라도 이단에서 나와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처럼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아서 회개할 수 없는 죄도 있습니다. 이런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합니다. 죄가 너무 중하기 때문에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경우입니다.
요한일서 5장 16절에 보면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용서해 달라고 구하지 말아야 할 ‘사망에 이르는 죄’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 성령 훼방, 모독, 거역의 죄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1~3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경우입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에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진리를 알면서 짐짓 즉 고의로 거듭 죄를 범하는 경우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6~27절에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성령을 훼방, 거역, 모독하는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성경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사소한 교리 차이나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해 이단이라고 정죄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으며 중생, 부활, 재림, 심판, 천국 등 성경의 핵심 교리가 같다면 결코 이단이라고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나 목회자를 함부로 정죄하면 성령 훼방, 거역, 모독이 되어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마 12:31~32).
그러면 성령 훼방, 거역, 모독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먼저 ‘성령 훼방’이란 하나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경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인데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므로 악으로 하나님 일에 훼방을 놓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를 이단이라 정죄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거짓 문서를 조작하여 집회를 방해하는 것 등이 이에 속합니다. 진리를 몰라서 그런 경우라면 돌이켜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지만 알면서도 시기 질투하여 악한 마음으로 훼방한다면 결코 용서받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성령 거역’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음성을 거역하거나 성령의 역사를 임의로 판단 정죄하여 교단에 알리고 축출하는 등 상대를 해롭게 하는 경우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를 거역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단지 사람으로만 알고 거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구세주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죄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이켜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진리를 모르거나 성령을 받기 전에 이러한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도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주님을 훼방하고 거역한다면 이는 성령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것과 같으므로 결코 용서받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모독’이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욕되게 하거나 그 신성을 모독하는 일입니다(눅 12:10). 만일 성령의 역사를 사단의 역사라고 비방하거나 반대로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욕되게 하는 죄입니다. 또한 진리를 비진리라고 거짓으로 전하거나 사실을 거짓으로 몰아붙이는 경우도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함부로 이단이라고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과거에 잘 알지 못하여 성령을 훼방하거나 거역, 모독했다면 지금이라도 철저히 통회자복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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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세요.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기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아 회개할 수 없는 죄도 있다.
이런 죄를 ( )라고 한다.
2. ‘사망에 이르는 죄’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 성령 ( ), 모독, 거역의 죄이다.
둘째, 주님을 다시 ( )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경우이다.
셋째, 진리를 알면서 ( ) 즉 고의로 거듭 죄를 범하는 경우이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4~2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성령 훼방’과 ‘성령 거역’의 차이
성령 훼방과 성령 거역은 의미가 비슷하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의 차이점에 비유할 수 있다. 육신의 일이 아직 행하지는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비진리의 속성이라면, 육체의 일은 육신의 일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나타난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성령 훼방이 하나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성령의 역사를 막는 것이라면, 성령 거역은 이미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일을 적극적으로 궤사를 꾸며 거역하고 상대를 해롭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2016-04-08
제15과적그리스도의 영
요일 4:1~3
읽을말씀 : 요일 4:1~3 | 외울말씀 : 요이 7 ㅣ 참고 말씀:딤전 4:1~2
교육목표 : 구원의 도를 변질시키는 적그리스도의 영에게 미혹되지 않고 진리에 굳게 서서 영들을 잘 분별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백성들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종종 어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거짓말을 지어내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기도 하고, 혹은 악한 영에 미혹되어 거짓 예언을 하기도 했지요. 거짓 선지자들을 사주했던 어둠의 영은 오늘날도 성도들을 미혹해 나갑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이 오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속한 영, 곧 성령의 가장 큰 사역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는 사역입니다. 반면에 어둠에 속한 영들은 구원의 도를 변질시켜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것에 가장 힘을 쓰지요. 그래서 이를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1. 적그리스도의 영
요한일서 4장 1~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장차 되어질 일들을 자세히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영에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속한 선한 영과, 미혹하여 멸망으로 인도하는 악한 영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악한 영인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해 알려 주면서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 주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입니다.
이는 단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자체만을 믿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육체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와 구원의 섭리 전체를 믿는다는 의미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 등을 시인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감추어 두셨다가 펼치신 십자가 구원의 섭리는, 육의 사람의 생각으로는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곧 하나님께 속한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께서 구세주 되심이 믿어집니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를 깨달아 알며 진리대로 행해 나갑니다.
반면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해 나가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부인합니다. 특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교묘히 미혹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잘 분별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한이서 7절에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일서 2장 19절에 보면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적그리스도의 영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 사로잡은 경우와 적그리스도의 영이 생각을 통해 미혹하는 경우입니다. 이들은 성령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틈타서 하나님 말씀과 정반대로 나가도록 사로잡거나 생각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미혹되도록 역사합니다.
요한일서 4장 5~6절에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 성도들을 미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과연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말씀에 비춰 합당한지 점검해 보라는 뜻입니다.
2.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려면
요한일서 3장 7절에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미혹의 영은 세상의 영으로서 믿음에서 떠나도록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진리의 말을 듣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진리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분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악한 궤계를 부리고 하나님 나라를 훼파하려고 한다면 이는 미혹의 영에게 역사를 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리의 영 곧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 마음 안에 내주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또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의 일을 알려 주십니다. 따라서 진리의 영을 받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순종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지고 확장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믿는다 하면서 교회만 왔다 갔다 할 뿐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 세상에 속한 사람들로서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며 진리의 영을 받지 못하면 미혹의 영에 이끌려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보면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16절에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말씀했지요.
만약 믿음의 형제를 중상모략하거나 수군수군하는 등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며 훼방한다면 이는 진리의 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행함이 충성스럽게 보여도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의 열매, 불법의 열매가 맺혔다면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영이 아님을 깨우쳐야 합니다.
물론 진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라 해서 다 적그리스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을 믿고 십자가 구원의 도를 시인한다면 적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고의적으로 성경 말씀을 변질시키고 성령을 정면으로 대적하여 성령 훼방, 모독, 거역을 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진리에 굳게 서서 영들을 밝히 분별하여 미혹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단에 대하여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면 자칫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며 모독하는 일이 되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영들을 정확히 분별하되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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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세요.
( ) 안에 알맞은 답을 써 보세요.
1. 우리가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 )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이다.
2. ( )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해 나가는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부인한다.
● 금주 과제
<신앙인의 기본> 책자 187~1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도 요한’
원래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급하고 불같은 성격이었지만 변화되어 ‘사랑의 사도’라 불렸다.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 현장에 늘 함께 있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도 끝까지 곁에 있었다. 베드로와 야고보 등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초대교회 지도자로 사역했다. 말년에는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섬기다가 서기 100년경 90살의 나이로 소천했다고 한다.
로마 황제 도미티안의 박해 당시에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지만 전혀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나와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 속에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하였다.
교육목표 : 구원의 도를 변질시키는 적그리스도의 영에게 미혹되지 않고 진리에 굳게 서서 영들을 잘 분별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백성들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종종 어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거짓말을 지어내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기도 하고, 혹은 악한 영에 미혹되어 거짓 예언을 하기도 했지요. 거짓 선지자들을 사주했던 어둠의 영은 오늘날도 성도들을 미혹해 나갑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이 오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속한 영, 곧 성령의 가장 큰 사역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는 사역입니다. 반면에 어둠에 속한 영들은 구원의 도를 변질시켜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것에 가장 힘을 쓰지요. 그래서 이를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합니다.
1. 적그리스도의 영
요한일서 4장 1~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장차 되어질 일들을 자세히 기록한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영에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속한 선한 영과, 미혹하여 멸망으로 인도하는 악한 영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악한 영인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해 알려 주면서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 주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입니다.
이는 단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자체만을 믿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육체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와 구원의 섭리 전체를 믿는다는 의미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 등을 시인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감추어 두셨다가 펼치신 십자가 구원의 섭리는, 육의 사람의 생각으로는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곧 하나님께 속한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께서 구세주 되심이 믿어집니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를 깨달아 알며 진리대로 행해 나갑니다.
반면에 적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해 나가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부인합니다. 특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교묘히 미혹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잘 분별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한이서 7절에 보면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일서 2장 19절에 보면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적그리스도의 영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 사로잡은 경우와 적그리스도의 영이 생각을 통해 미혹하는 경우입니다. 이들은 성령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틈타서 하나님 말씀과 정반대로 나가도록 사로잡거나 생각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미혹되도록 역사합니다.
요한일서 4장 5~6절에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 성도들을 미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과연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 말씀에 비춰 합당한지 점검해 보라는 뜻입니다.
2.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려면
요한일서 3장 7절에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미혹의 영은 세상의 영으로서 믿음에서 떠나도록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진리의 말을 듣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진리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분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악한 궤계를 부리고 하나님 나라를 훼파하려고 한다면 이는 미혹의 영에게 역사를 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리의 영 곧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 마음 안에 내주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또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의 일을 알려 주십니다. 따라서 진리의 영을 받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순종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가 이루어지고 확장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믿는다 하면서 교회만 왔다 갔다 할 뿐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 세상에 속한 사람들로서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며 진리의 영을 받지 못하면 미혹의 영에 이끌려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보면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16절에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말씀했지요.
만약 믿음의 형제를 중상모략하거나 수군수군하는 등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시기 질투하며 훼방한다면 이는 진리의 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행함이 충성스럽게 보여도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의 열매, 불법의 열매가 맺혔다면 하나님께 속한 진리의 영이 아님을 깨우쳐야 합니다.
물론 진리에서 벗어난 사람이라 해서 다 적그리스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을 믿고 십자가 구원의 도를 시인한다면 적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고의적으로 성경 말씀을 변질시키고 성령을 정면으로 대적하여 성령 훼방, 모독, 거역을 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진리에 굳게 서서 영들을 밝히 분별하여 미혹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단에 대하여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면 자칫 성령을 훼방하고 거역하며 모독하는 일이 되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영들을 정확히 분별하되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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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세요.
( ) 안에 알맞은 답을 써 보세요.
1. 우리가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 )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이다.
2. ( )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해 나가는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부인한다.
● 금주 과제
<신앙인의 기본> 책자 187~1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도 요한’
원래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급하고 불같은 성격이었지만 변화되어 ‘사랑의 사도’라 불렸다.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 현장에 늘 함께 있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도 끝까지 곁에 있었다. 베드로와 야고보 등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초대교회 지도자로 사역했다. 말년에는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섬기다가 서기 100년경 90살의 나이로 소천했다고 한다.
로마 황제 도미티안의 박해 당시에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지만 전혀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나와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통 속에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하였다.
2016-04-01
제14과이단의 특징
벧후 2:2~3
읽을말씀 : 벧후 2:2~3 | 외울말씀 : 딛 3:10 ㅣ 참고 말씀:요이 10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단의 특징에 대해 바로 알아 미혹받지 않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사소한 교리 차이를 놓고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지도 않고 신앙고백을 할 뿐 아니라, 성경의 핵심 교리가 같은데도 이단이라고 판단해 버리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과 부활과 재림, 심판을 가르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결코 이단이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단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이단의 정의 및 특징을 바로 알아 함부로 이단이라고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더 나아가 이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미혹당하는 일도 없어야 하겠습니다.
1. 이단의 특징
베드로후서 2장 2~3절에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노시스파(Gnosticism)라고도 합니다. 그노시스(Gnosis)는 ‘지식’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있으면 도덕적으로 살지 않아도 됩니다.”, “영혼과 육체는 별개의 것이므로 육체로는 죄를 지어도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지요.
당시 사람들이 볼 때에는 영지주의가 기독교 교리보다 합리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수 있으니 훨씬 편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많은 사람이 받아들였지요.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부인했습니다.
이처럼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이 외에도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이들은 대부분 호색하므로 진리의 도, 곧 하나님 말씀을 훼방합니다. 또 탐심으로 인하여 거짓말을 지어내어 자기 이익을 취해 나갑니다. 천국이 없다고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사람일 뿐 결코 하나님과 하나일 수 없다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어떻게 사람이면서 동시에 신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세 분이면서 한 분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그럴듯한 이단 사상을 만들어 내지요.
2.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
예컨대,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믿습니다. 영혼은 죽음과 함께 소멸되고 지옥이 없다 주장하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육체는 썩고 영만 부활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그릇된 신앙 때문에 병역 등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주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일명 통일교라 불리는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가 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인류 구원에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다른 구세주가 필요한데 바로 교주 자신이 구세주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여러 사업체가 있으며 성경 외에 ‘원리강론’이라는 경전을 만들어 가르칩니다.
이런 이단들은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시킬 뿐 아니라 성경 외의 경전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에게는 성경 66권 외에는 어떤 경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구속 외에는 죄 사함과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그 어떤 길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가짜 복음을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곳곳에 교회를 세웠는데 2차 전도여행 시 고린도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힘쓰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들이 모인 교회이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후에 여러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서 주 안에서 하나 되어 진리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고린도교회는 회개하였고 사도 바울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거짓 교리를 퍼뜨리면서 바울의 사도직과 가르침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그중에 고린도후서 11장을 통해서는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권면하며 책망하는 사도 바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이단 사상에 물든 사람에게 미혹받지 않으려면
1)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잘 안다 해도 함부로 그들과 변론해서는 안 됩니다
디도서 3장 10절에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한두 번 말해서 상대가 듣지 않을 때는 계속 변론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믿음이 약한 사람이 이단과 변론하다 보면 오히려 미혹될 수 있기 때문에 삼가 주의해야 합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자기들이 선택한 이론으로 세뇌를 받기 때문에 섣불리 그들과 논쟁을 벌이면 그들의 꾐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 10)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단번에 꺾어 버리겠다고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단의 공격을 받으면 우리의 경험에 의지하여 그들을 물리치려고 하지 말고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종교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던 중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을 때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담대하게 고백함으로 배에 탄 사람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사도행전 27장 23~25절에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했지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 고백입니다.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할 때, 이단의 가면을 쓰고 다가왔던 원수 마귀 사단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며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벧전 5:8). 진리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는다거나 의심하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을 떠나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영적 장수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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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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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단의 특징은 ( )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이심을 부인한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 ( ) 하나님을 부인하고 교주를 신성시한다.
2. 성경에 이단에 속한 자들을 어떻게 대처하라고 했나요?
“이단에 속한 사람을 ( )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디도서 3: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 ) 말고 ( )도 말라”(요한이서 10)
* 금주 과제
<신앙인의 기본> 책자 181~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변질된 ‘니골라’
초대교회가 급속히 왕성해지자(행 6:7), 사도들이 오직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만 몰두하기 위해 교회의 일을 치리할 만한 사람을 뽑아 집사로 세웠다(행 6:2~4).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을 선택하여 집사로 세우고 열두 사도를 대신하여 구제를 비롯한 교회의 일을 돌아보게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니골라이다.
처음에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칭찬을 들었던 니골라 집사가 나중에는 영지주의에 속한 이단 사상에 빠져들어 성도들을 미혹하고 죄를 짓게 만들었다.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단의 특징에 대해 바로 알아 미혹받지 않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사소한 교리 차이를 놓고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지도 않고 신앙고백을 할 뿐 아니라, 성경의 핵심 교리가 같은데도 이단이라고 판단해 버리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과 부활과 재림, 심판을 가르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결코 이단이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단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통해 이단의 정의 및 특징을 바로 알아 함부로 이단이라고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더 나아가 이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미혹당하는 일도 없어야 하겠습니다.
1. 이단의 특징
베드로후서 2장 2~3절에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노시스파(Gnosticism)라고도 합니다. 그노시스(Gnosis)는 ‘지식’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있으면 도덕적으로 살지 않아도 됩니다.”, “영혼과 육체는 별개의 것이므로 육체로는 죄를 지어도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지요.
당시 사람들이 볼 때에는 영지주의가 기독교 교리보다 합리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수 있으니 훨씬 편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많은 사람이 받아들였지요.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도,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부인했습니다.
이처럼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이 외에도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이들은 대부분 호색하므로 진리의 도, 곧 하나님 말씀을 훼방합니다. 또 탐심으로 인하여 거짓말을 지어내어 자기 이익을 취해 나갑니다. 천국이 없다고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사람일 뿐 결코 하나님과 하나일 수 없다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어떻게 사람이면서 동시에 신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세 분이면서 한 분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해 그럴듯한 이단 사상을 만들어 내지요.
2.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
예컨대,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믿습니다. 영혼은 죽음과 함께 소멸되고 지옥이 없다 주장하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육체는 썩고 영만 부활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그릇된 신앙 때문에 병역 등 국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주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일명 통일교라 불리는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가 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인류 구원에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다른 구세주가 필요한데 바로 교주 자신이 구세주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여러 사업체가 있으며 성경 외에 ‘원리강론’이라는 경전을 만들어 가르칩니다.
이런 이단들은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시킬 뿐 아니라 성경 외의 경전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에게는 성경 66권 외에는 어떤 경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구속 외에는 죄 사함과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그 어떤 길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가짜 복음을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곳곳에 교회를 세웠는데 2차 전도여행 시 고린도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성장할 수 있도록 힘쓰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들이 모인 교회이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후에 여러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서 주 안에서 하나 되어 진리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고린도교회는 회개하였고 사도 바울을 더욱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이 거짓 교리를 퍼뜨리면서 바울의 사도직과 가르침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그중에 고린도후서 11장을 통해서는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권면하며 책망하는 사도 바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이단 사상에 물든 사람에게 미혹받지 않으려면
1)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잘 안다 해도 함부로 그들과 변론해서는 안 됩니다
디도서 3장 10절에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한두 번 말해서 상대가 듣지 않을 때는 계속 변론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믿음이 약한 사람이 이단과 변론하다 보면 오히려 미혹될 수 있기 때문에 삼가 주의해야 합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자기들이 선택한 이론으로 세뇌를 받기 때문에 섣불리 그들과 논쟁을 벌이면 그들의 꾐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 10)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단번에 꺾어 버리겠다고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단의 공격을 받으면 우리의 경험에 의지하여 그들을 물리치려고 하지 말고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종교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던 중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을 때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담대하게 고백함으로 배에 탄 사람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사도행전 27장 23~25절에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했지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도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 고백입니다. “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할 때, 이단의 가면을 쓰고 다가왔던 원수 마귀 사단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며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벧전 5:8). 진리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는다거나 의심하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을 떠나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서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영적 장수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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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으세요.
( ) 안에 알맞은 말을 채워 보세요.
1. 이단의 특징은 ( )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이심을 부인한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 ( ) 하나님을 부인하고 교주를 신성시한다.
2. 성경에 이단에 속한 자들을 어떻게 대처하라고 했나요?
“이단에 속한 사람을 ( )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디도서 3: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 ) 말고 ( )도 말라”(요한이서 10)
* 금주 과제
<신앙인의 기본> 책자 181~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변질된 ‘니골라’
초대교회가 급속히 왕성해지자(행 6:7), 사도들이 오직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만 몰두하기 위해 교회의 일을 치리할 만한 사람을 뽑아 집사로 세웠다(행 6:2~4).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을 선택하여 집사로 세우고 열두 사도를 대신하여 구제를 비롯한 교회의 일을 돌아보게 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니골라이다.
처음에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여 칭찬을 들었던 니골라 집사가 나중에는 영지주의에 속한 이단 사상에 빠져들어 성도들을 미혹하고 죄를 짓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