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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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2
제33과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
롬 12:2
읽을말씀 : 롬 12:2 | 외울말씀 : 롬 12:17 ㅣ 참고 말씀: 딤전 4:5
교육목표 : 절대적인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행함으로 온전한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선을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선과 악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선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지요.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업을 끝내시기 전까지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셔야 하는 화목제물의 입장이기에 스스로 선하다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선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기준이 됨을 알려 주기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만들어 놓은 양심에 비추어 “선하다.” 또는 “선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진리와 비진리를 섞어서 ‘이것이 옳다’라고 만들어 놓은 가치 판단 기준입니다. 따라서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된 마음으로, 각자의 배움이나 환경, 어떤 부모와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형성됩니다.
이러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선을 이루려면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야 합니다.
믿음에도 성장 단계가 있듯이 선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뿐 아니라 나쁜 감정 자체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오히려 감동을 주는 선과,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우선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대해 살펴겠습니다.
2.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선의 1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신을 욕하고 때리는데 맞대응하지 않고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알기에 또는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경우 한계에 이르면 결국 그 악이 표출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악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을 버리고 어찌하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3.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의 2단계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상대가 아무리 나를 미워하며 힘들게 해도 악으로 생각지 않으며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기 때문에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명백히 간음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니 율법대로 처리하거나,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말씀합니다(마 1:19). 마음에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할 때 같이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셨으니 말씀으로 자신을 조명하고 기도할 때 선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말고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 비진리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이 모습을 놓고 불같이 기도하여 버려 나가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의 불로 죄성들을 태워 주심으로 성결한 마음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그럴 때 순간의 악한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선의 2단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최소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의 2단계’를 이루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부추기는 대로 악을 행한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해도 지킴 받거나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만 이루어도 그 선이 영적인 빛으로 역사되어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에 자연히 각종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선한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랫사람의 실수로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더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며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 조금이라도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고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지요.
또 다른 예로, 다른 사람이 책망 듣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때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지는 않습니까? 혹은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실수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봅니다. 더욱이 자신이 직접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하고 일에 대한 결과도 책임지려 하겠지요.
그러니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손해 보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선을 행하는 것이 손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사랑과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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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 )이 있어도 함께 ( )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선의 2단계는 상대가 ( )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2. 양심은 왜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을까요?
3.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33~1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단계’
선의 1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선의 2단계 :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선의 3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단계이다.
선의 4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교육목표 : 절대적인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행함으로 온전한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선을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선과 악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선의 기준’을 알아야 합니다.
1. 온전한 선의 기준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자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셨지요.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신 것일까요?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지요.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상태입니다.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업을 끝내시기 전까지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셔야 하는 화목제물의 입장이기에 스스로 선하다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선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기준이 됨을 알려 주기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성장하면서 만들어 놓은 양심에 비추어 “선하다.” 또는 “선하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진리와 비진리를 섞어서 ‘이것이 옳다’라고 만들어 놓은 가치 판단 기준입니다. 따라서 양심은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된 마음으로, 각자의 배움이나 환경, 어떤 부모와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형성됩니다.
이러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만이 절대적인 선, 온전한 선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선을 이루려면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긴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워 그대로 행함으로 마음에 일구어야 합니다.
믿음에도 성장 단계가 있듯이 선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 뿐 아니라 나쁜 감정 자체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오히려 감동을 주는 선과, 생명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우선 사람들은 선하다고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선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대해 살펴겠습니다.
2. 악으로 대항치 않고 감정을 눌러 참는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도 함께 악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선의 1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자신을 욕하고 때리는데 맞대응하지 않고 잠잠히 참았다고 합시다.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알기에 또는 교양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꾹 눌러 참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선하고 온유해 보이므로 세상에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인정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눌러 참는다는 것은 여전히 그 속에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경우 한계에 이르면 결국 그 악이 표출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악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을 버리고 어찌하든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정녕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3.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는 ‘선의 2단계’
상대가 악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어야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의 2단계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에 해당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상대가 아무리 나를 미워하며 힘들게 해도 악으로 생각지 않으며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기 때문에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 동침하지도 않았는데 잉태한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명백히 간음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니 율법대로 처리하거나, 참는다 해도 평안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말씀합니다(마 1:19). 마음에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의 단계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악을 행할 때 같이 악으로 갚지는 않는다 해도 순간 마음에 감정이 일거나 요동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상대의 입장이 되어 선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해 나가면 나중에는 순간의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셨으니 말씀으로 자신을 조명하고 기도할 때 선의 차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말고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 비진리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이 모습을 놓고 불같이 기도하여 버려 나가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성령의 불로 죄성들을 태워 주심으로 성결한 마음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그럴 때 순간의 악한 감정조차도 일어나지 않는 선의 2단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최소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의 2단계’를 이루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고 시험 환난도 당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만일 원수 마귀 사단이 부추기는 대로 악을 행한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해도 지킴 받거나 축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최소한의 선만 이루어도 그 선이 영적인 빛으로 역사되어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에 자연히 각종 문제가 해결됩니다.
다음 예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선한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어떤 분야의 책임자로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랫사람의 실수로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때 “제가 더 돌아보지 못한 까닭입니다.”라며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 조금이라도 아랫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은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내 탓으로 여기고 돌아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지요.
또 다른 예로, 다른 사람이 책망 듣는 것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때 ‘나는 상관없는 일이니 다행이다.’ 하지는 않습니까? 혹은 자신도 책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마음속으로 함께 책망하고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선한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해도 ‘내가 도와줬더라면 실수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민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봅니다. 더욱이 자신이 직접 관련된 일이라면 당연히 모든 상황을 진실하게 말하고 일에 대한 결과도 책임지려 하겠지요.
그러니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때론 손해 보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선을 행하는 것이 손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사랑과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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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선의 1단계는,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 대해 마음에는 좋지 않은 ( )이 있어도 함께 ( )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선의 2단계는 상대가 ( )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않음은 물론, 마음에 어떤 불편한 ( )도 없다.
2. 양심은 왜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을까요?
3.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데 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33~1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선의 단계’
선의 1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선의 2단계 :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선의 3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단계이다.
선의 4단계 :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2016-08-05
제32과부활의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
요 20:17~18
읽을말씀 : 요 20:17~18 | 외울말씀 : 잠 8:17 l 참고 말씀: 요 12:1~8
교육목표 : 육체의 소욕을 벗고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극한 정성과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죄 사함을 받고 모든 저주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병든 몸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어 진정한 기쁨과 행복,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내보인 선과 사랑은 무엇일까요?
1.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예수님을 향한 진한 사랑과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은 아주 좋은 그릇입니다. 영적으로는 우리 몸을 상징하지요. 따라서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도 옥합을 깨뜨려야만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생각과 이론의 틀도 깨뜨려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에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당시 향유는 대체로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가 부어 드린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으로 그 값이 삼백 데나리온에 달했지요.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거의 1년 내내 일해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 금액입니다. 이러한 값비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마리아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겠습니까. 지치고 병든 몸으로 쉼 없이 일하며 먹을 것조차 아껴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 졸이며 향유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유를 드렸다는 것은 마음의 진실한 정성을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려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온다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옥합은 우리 몸을 상징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되기 전 우리의 몸은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합니다. 따라서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처럼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라야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마음 다해 섬기며 끝까지 붙좇은 진실한 사랑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마음 다해 섬기며 붙좇았습니다. 과연 마리아는 어떠한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붙좇았을까요? 마리아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이 전혀 없는 가족이라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떠했겠습니까.
영적인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상황에도 변치 않고 한결같지요. 예수님을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혹하는 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며 정죄했습니다. 백성들도 그들의 말에 미혹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지요. 십자가 처형을 언도받은 예수님은 세상 말로 이제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흉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며 기사와 표적을 베푸실 때뿐 아니라,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초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도 변함없이 붙좇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숨었지만 마리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자칫 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았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지요. 마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참되고 진실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지내는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가 시신을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에 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여인이 된 이유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께 가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당도해 보니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마리아는 누군가 시신을 가져간 줄 알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지요. 그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지만, 경황이 없는 마리아는 그들이 천사인지 사람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요 20:13).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주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부활체를 입으셨기에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요. 주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도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 그제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1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일요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심으로 구세주가 되기 위한 섭리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일을 완수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을 뵙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그래서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때가 이를 때까지 증인으로서 살 것을 당부하시면서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달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생명 다해 주님을 사랑했고 온전한 헌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큰 경기나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1위를 하면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나 마음을 써 준 사람,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우승의 기쁨을 나누지요.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즐거울 때뿐 아니라 상대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아가 가장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해도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끝까지 붙좇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하시는 이유는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엄청난 희생을 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고 참 행복을 찾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끝까지 붙좇는 진실한 사랑을 이룬 막달라 마리아를 발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셨겠습니까. 늘 가까이 두고 그 선한 향을 흠향하고 싶으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창세 이래 구원받아 천국에 간 여인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 보좌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온전한 선의 차원에 들어가면 천국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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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옥합은 영적으로 우리 ( )을 상징한다.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 )한다는 뜻이다.
2.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 )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
3.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을 뵙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25~1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달란트 vs 데나리온
최대의 무게와 화폐 단위를 나타내는 달란트는 성경에서 재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1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6천 일, 약 16년간 품삯에 해당된다. ‘1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 군인이나 품꾼의 하루 품삯의 금액이었고, 헬라의 은화 1 드라크마의 가치를 지녔다.
교육목표 : 육체의 소욕을 벗고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이루어 아버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극한 정성과 선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죄 사함을 받고 모든 저주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병든 몸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어 진정한 기쁨과 행복,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내보인 선과 사랑은 무엇일까요?
1.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예수님을 향한 진한 사랑과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은 아주 좋은 그릇입니다. 영적으로는 우리 몸을 상징하지요. 따라서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라도 옥합을 깨뜨려야만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생각과 이론의 틀도 깨뜨려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에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당시 향유는 대체로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가 부어 드린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으로 그 값이 삼백 데나리온에 달했지요.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삼백 데나리온이라면 거의 1년 내내 일해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큰 금액입니다. 이러한 값비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마리아가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겠습니까. 지치고 병든 몸으로 쉼 없이 일하며 먹을 것조차 아껴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남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 졸이며 향유를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유를 드렸다는 것은 마음의 진실한 정성을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드려 헌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야 향유가 나온다는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옥합은 우리 몸을 상징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되기 전 우리의 몸은 육체의 소욕을 좇고자 합니다. 따라서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마리아처럼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릴 때라야 순전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마음 다해 섬기며 끝까지 붙좇은 진실한 사랑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마음 다해 섬기며 붙좇았습니다. 과연 마리아는 어떠한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붙좇았을까요? 마리아는 자신에게 잘해 주는 것이 전혀 없는 가족이라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떠했겠습니까.
영적인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상황에도 변치 않고 한결같지요. 예수님을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이 이러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혹하는 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며 정죄했습니다. 백성들도 그들의 말에 미혹받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지요. 십자가 처형을 언도받은 예수님은 세상 말로 이제 별 볼 일 없게 되었습니다. 흉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며 기사와 표적을 베푸실 때뿐 아니라,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초당하시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에도 변함없이 붙좇았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워 숨었지만 마리아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자칫 해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았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지요. 마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참되고 진실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사 지내는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가 시신을 새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입구에 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기 위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3.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여인이 된 이유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이었지만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께 가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당도해 보니 무덤의 돌문이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마리아는 누군가 시신을 가져간 줄 알고 하염없이 울고 있었지요. 그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지만, 경황이 없는 마리아는 그들이 천사인지 사람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요 20:13).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주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부활체를 입으셨기에 전혀 알아보지 못했지요. 주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어도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니 그제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1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일요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심으로 구세주가 되기 위한 섭리를 이루셨습니다. 모든 일을 완수하셨으니 아버지 하나님을 뵙는 것이 우선이었지요. 그래서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때가 이를 때까지 증인으로서 살 것을 당부하시면서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주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달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뵈옵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생명 다해 주님을 사랑했고 온전한 헌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큰 경기나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1위를 하면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나 마음을 써 준 사람,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우승의 기쁨을 나누지요.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행복하고 즐거울 때뿐 아니라 상대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아가 가장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 해도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생명보다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끝까지 붙좇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을 하시는 이유는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참 자녀를 얻기 위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엄청난 희생을 하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고 참 행복을 찾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끝까지 붙좇는 진실한 사랑을 이룬 막달라 마리아를 발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셨겠습니까. 늘 가까이 두고 그 선한 향을 흠향하고 싶으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창세 이래 구원받아 천국에 간 여인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 보좌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온전한 선의 차원에 들어가면 천국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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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옥합은 영적으로 우리 ( )을 상징한다. 옥합을 깨뜨린 것은 예수님께 자신의 몸을 드려 ( )한다는 뜻이다.
2. 옥합을 깨뜨렸을 때 향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가 ( )을 벗어 버릴 때만이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
3.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나님을 뵙기 전에 마리아를 만나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25~1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달란트 vs 데나리온
최대의 무게와 화폐 단위를 나타내는 달란트는 성경에서 재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1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6천 일, 약 16년간 품삯에 해당된다. ‘1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로, 군인이나 품꾼의 하루 품삯의 금액이었고, 헬라의 은화 1 드라크마의 가치를 지녔다.
2016-07-29
제31과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막달라 마리아
눅 7:37~38
읽을말씀 : 눅 7:37~38 | 외울말씀 : 눅 7:47 ㅣ 참고 말씀: 눅 8:2
교육목표 :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족에게조차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심지어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가족을 떠나 자기 한 몸 의지해 보고자 만난 남자 역시 약한 그녀를 이용하기만 하는 악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모든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의 비참한 삶
마리아는 갈릴리 인근 막달라라는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이 흔했기 때문에, 그녀가 살던 지역의 이름을 붙여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막달라 지방은 꽤 번성한 어업의 중심지로서 대대로 우상 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전체가 어둠의 영향을 받았지요.
막달라 마리아 역시 어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는 그녀가 귀신 들렸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젖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영적으로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난 데다 몸까지 약해서 갖가지 병을 앓았습니다. 위장에 병이 생겨 제대로 먹지 못하니 신체기능이 원활하지 않아 외모까지 보기 흉해졌습니다. 피부병으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고, 몸이 쇠약하니 경수마저 끊어져 여인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늘 집에 숨어 지내야 했고,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마치 자신 때문인 것처럼 주눅이 들어 살았습니다. 게다가 부모 형제의 사랑은 커녕 심한 냉대와 업신여김까지 받으며 살았으니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가족을 힘들게 하지 않는 길이 무엇일까? 나 때문에 가족이 받는 부담을 어떻게 하면 덜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으니 그녀는 여기저기 떠돌며 거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나 자기 몸이나마 의탁해 보려 했지만 오히려 마리아를 힘들게 하며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도박에 빠져 돈을 잃고 수중의 돈이 떨어지면 그녀에게 돈을 구해 오라며 윽박지르며 때리곤 했지요. 심지어 여기저기 다니며 사기를 치다가 들통나면 전부 마리아가 시킨 일이라며 그녀 탓으로 돌렸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에게 계략을 꾸며 남편을 조종하는 탐욕스런 여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지요. 이렇게 온갖 누명을 쓰면서도 마리아는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의 허물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지요. 그러다 보니 날로 마음의 고통이 커져 갔고 몸은 더 나빠졌습니다.
마리아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큰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저주스러운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남편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몸이 약해서 잘 섬겨 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며 하루하루 삯바느질로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모함으로 준비하는 마리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지요. 그녀는 마음이 곱고 선했기 때문에 이 소문이 믿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분을 만나 뵙기를 사모했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예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어렵게 삯바느질해서 번 돈을 조금씩 모아 귀한 향유를 준비하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정성껏 준비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갔습니다. 집 앞에 이르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요. 사람들은 마리아를 보자 ‘너 같은 죄인이 올 곳이 아니다.’라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사모함이 너무나 승했기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열어 주었지요.
집 안에 들어가자 저만치 앉아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용서하고 품어 주실 것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리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너무나 고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조심스레 예수님의 뒤편으로 다가갔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난 후,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난 마리아
예수님의 발치에 이르자 마리아는 더욱 눈물이 복받쳤습니다. 태어나서 참된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품어 주실 듯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이 지금 눈앞에 계신 것입니다. 갑작스런 마리아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 의아해했습니다. 집 안에는 마리아의 흐느끼는 소리만 가득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마리아는 머리 수건을 벗은 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어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했지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누구인가?”, “왜 저러는가?”, “저는 죄인이 아닌가?”, “망측해라!” 하며 저마다 잣대를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로 샌들을 신었기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었고 물도 귀해서 제대로 씻지 못하니 발이 깨끗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가정에 초대된 손님에게는 발 씻을 물을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바리새인 시몬은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마리아는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었으며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함부로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귀히 여기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함으로 예수님을 섬기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다. 치료받겠다.”라는 믿음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조종하는 못된 여인으로 여겼으니 예수님만 아니라면 당장 그녀를 그곳에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은 자신의 마음과 진실을 알아주시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실 것이기에 상관이 없었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예수님만은 죄인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뜻한 바를 주저함 없이 행했지요. 자신의 눈물로 적신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어 드린 후,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어찌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신 후 그녀에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속병이 치료되니 이제 먹는 대로 소화가 되고 몸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지요. 뿐만 아니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보잘것없는 그녀에게 세상 어떤 사람도 주지 않은 영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태껏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했던 가장 큰 선물을 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마리아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습니다. 온 마음이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나를 버리지 않는 단 한 분, 나를 사랑하시는 단 한 분, 비참한 내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치료해 주신 분, 내 영혼까지 새롭게 하신 예수님을 생명 다해 섬기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마음 다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눅 8:2~3).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혹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질병이나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닮아감으로 질병 치료는 물론,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주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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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리아를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으며 입맞추었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17~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차이
◈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향유 부은 장소 :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
4. 가족 사항 :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는 자매 사이
◈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
2. 향유 부은 장소 : 갈릴리 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누가복음 7장
4. 가족 사항 : 우상 숭배하는 가정
교육목표 :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리게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족에게조차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심지어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가족을 떠나 자기 한 몸 의지해 보고자 만난 남자 역시 약한 그녀를 이용하기만 하는 악한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모든 질병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의 비참한 삶
마리아는 갈릴리 인근 막달라라는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이 흔했기 때문에, 그녀가 살던 지역의 이름을 붙여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막달라 지방은 꽤 번성한 어업의 중심지로서 대대로 우상 숭배가 심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전체가 어둠의 영향을 받았지요.
막달라 마리아 역시 어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는 그녀가 귀신 들렸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젖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영적으로 최악의 환경에서 태어난 데다 몸까지 약해서 갖가지 병을 앓았습니다. 위장에 병이 생겨 제대로 먹지 못하니 신체기능이 원활하지 않아 외모까지 보기 흉해졌습니다. 피부병으로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었고, 몸이 쇠약하니 경수마저 끊어져 여인으로서의 기능도 상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늘 집에 숨어 지내야 했고,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마치 자신 때문인 것처럼 주눅이 들어 살았습니다. 게다가 부모 형제의 사랑은 커녕 심한 냉대와 업신여김까지 받으며 살았으니 얼마나 비참한 삶인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가족을 힘들게 하지 않는 길이 무엇일까? 나 때문에 가족이 받는 부담을 어떻게 하면 덜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으니 그녀는 여기저기 떠돌며 거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를 만나 자기 몸이나마 의탁해 보려 했지만 오히려 마리아를 힘들게 하며 이용할 뿐이었습니다. 도박에 빠져 돈을 잃고 수중의 돈이 떨어지면 그녀에게 돈을 구해 오라며 윽박지르며 때리곤 했지요. 심지어 여기저기 다니며 사기를 치다가 들통나면 전부 마리아가 시킨 일이라며 그녀 탓으로 돌렸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에게 계략을 꾸며 남편을 조종하는 탐욕스런 여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지요. 이렇게 온갖 누명을 쓰면서도 마리아는 굳이 해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의 허물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지요. 그러다 보니 날로 마음의 고통이 커져 갔고 몸은 더 나빠졌습니다.
마리아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큰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저주스러운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남편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몸이 약해서 잘 섬겨 주지 못하는 것에 미안해하며 하루하루 삯바느질로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2.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모함으로 준비하는 마리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던 마리아에게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병든 자를 치료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지요. 그녀는 마음이 곱고 선했기 때문에 이 소문이 믿어졌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고 그분을 만나 뵙기를 사모했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예수님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어렵게 삯바느질해서 번 돈을 조금씩 모아 귀한 향유를 준비하지요.
어느 날, 마리아는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정성껏 준비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갔습니다. 집 앞에 이르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요. 사람들은 마리아를 보자 ‘너 같은 죄인이 올 곳이 아니다.’라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사모함이 너무나 승했기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길을 열어 주었지요.
집 안에 들어가자 저만치 앉아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도 용서하고 품어 주실 것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리아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너무나 고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조심스레 예수님의 뒤편으로 다가갔습니다.
3. 예수님을 만난 후,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난 마리아
예수님의 발치에 이르자 마리아는 더욱 눈물이 복받쳤습니다. 태어나서 참된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사랑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품어 주실 듯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이 지금 눈앞에 계신 것입니다. 갑작스런 마리아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 의아해했습니다. 집 안에는 마리아의 흐느끼는 소리만 가득했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마리아는 머리 수건을 벗은 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어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했지요.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누구인가?”, “왜 저러는가?”, “저는 죄인이 아닌가?”, “망측해라!” 하며 저마다 잣대를 가지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로 샌들을 신었기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었고 물도 귀해서 제대로 씻지 못하니 발이 깨끗할 리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가정에 초대된 손님에게는 발 씻을 물을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바리새인 시몬은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마리아는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었으며 그 위에 입맞추기까지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은 함부로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귀히 여기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함으로 예수님을 섬기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다. 치료받겠다.”라는 믿음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편을 조종하는 못된 여인으로 여겼으니 예수님만 아니라면 당장 그녀를 그곳에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은 자신의 마음과 진실을 알아주시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주실 것이기에 상관이 없었지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예수님만은 죄인 취급하지 않는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뜻한 바를 주저함 없이 행했지요. 자신의 눈물로 적신 예수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어 드린 후,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를 어찌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말씀하신 후 그녀에게 치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속병이 치료되니 이제 먹는 대로 소화가 되고 몸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지요. 뿐만 아니라 상처난 마음까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보잘것없는 그녀에게 세상 어떤 사람도 주지 않은 영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태껏 어느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했던 가장 큰 선물을 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마리아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습니다. 온 마음이 예수님께 향한 마리아는 ‘이 세상에서 나를 버리지 않는 단 한 분, 나를 사랑하시는 단 한 분, 비참한 내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치료해 주신 분, 내 영혼까지 새롭게 하신 예수님을 생명 다해 섬기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마음 다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눅 8:2~3).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혹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질병이나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닮아감으로 질병 치료는 물론, 인생의 각종 문제를 해결받고 주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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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리아를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마리아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으며 입맞추었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17~124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의 차이
◈ 베다니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부어드렸다.
2. 향유 부은 장소 :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
4. 가족 사항 :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는 자매 사이
◈ 막달라 마리아
1. 향유 부은 시점 :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시던 때
2. 향유 부은 장소 : 갈릴리 호수 주변 동네 바리새인 시몬의 집
3. 성경 본문 : 누가복음 7장
4. 가족 사항 : 우상 숭배하는 가정
2016-07-22
제30과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요 3:28~30
읽을말씀 : 요 3:28~30 | 외울말씀 : 눅 3:16 ㅣ 참고 말씀: 눅 1:13~17
교육목표 :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며 마지막 때에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모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에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그는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마침내는 순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키는 마음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장차 아이를 갖게 될 것을 알려 줍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3~17)
그 후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 알고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을 보면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은 받았지만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왔는지 잘 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어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킨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간 후에야 일행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시 길을 되짚어 성전에 와보니 예수님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그동안 근심하며 예수님을 찾았었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도리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대답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 대해 잘 아셨던 예수님과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돼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갔습니다. 자신이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를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런 세례 요한을 보고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그가 혹 그리스도이신가 궁금히 여깁니다(눅 3:15).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고백했습니다(눅 3:16). 그는 자신의 본분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이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도 큰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니 ‘과연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고 심히 기대하게 되었지요. “신들메”란, 신발을 묶는 끈인데, ‘세례 요한이 그것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증거하는 그분은 얼마나 높으신 분일까’를 생각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요 3:28~30).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지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마음은 순교하기까지 변함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기뻐하시며 이를 선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오직 주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지요.
직분자들이라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설령 직분이 없어도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각자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혹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전하면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여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은근히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어야 하지요.
또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까지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연연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는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이 사랑과 칭찬을 받아도 시기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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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어떠한 점을 기뻐하시며 선으로 인정해 주셨나요?
2.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 )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 )만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가랴’는 누구일까?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친척이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선한 사람이었다.
사가랴가 자기 순서대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과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으므로 벙어리가 되어 아들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기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후에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때 혀가 풀렸다.
교육목표 :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며 마지막 때에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모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에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그는 다시 이 땅에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마침내는 순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키는 마음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나타나 장차 아이를 갖게 될 것을 알려 줍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3~17)
그 후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뤘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 알고 있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을 보면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습니다. 그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은 받았지만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왔는지 잘 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열두 살 때에 있었던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어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절기를 지킨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길을 간 후에야 일행 중에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랍니다. 다시 길을 되짚어 성전에 와보니 예수님은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마리아가 그동안 근심하며 예수님을 찾았었다고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도리어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대답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에 대해 잘 아셨던 예수님과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돼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갔습니다. 자신이 주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를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쳤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이런 세례 요한을 보고 백성 중에 어떤 이들은 그가 혹 그리스도이신가 궁금히 여깁니다(눅 3:15).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고백했습니다(눅 3:16). 그는 자신의 본분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이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세례 요한도 큰 하나님의 선지자인데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니 ‘과연 그분은 어떤 분일까?’ 하고 심히 기대하게 되었지요. “신들메”란, 신발을 묶는 끈인데, ‘세례 요한이 그것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며 증거하는 그분은 얼마나 높으신 분일까’를 생각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자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몰려갔습니다. 그러자 요한의 제자들이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요 3:28~30).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지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마음은 순교하기까지 변함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기뻐하시며 이를 선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오직 주의 영광을 구하는 마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더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하지요.
직분자들이라면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설령 직분이 없어도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각자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혹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전하면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여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은근히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어야 하지요.
또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까지 내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영광을 더 크게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 연연하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랄 뿐입니다. 이는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이 사랑과 칭찬을 받아도 시기하거나 불편해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는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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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어떠한 점을 기뻐하시며 선으로 인정해 주셨나요?
2.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주의 영광만을 구했다. 우리가 세례 요한처럼 귀한 사역에 쓰임 받으려면 ( )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 )만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사가랴’는 누구일까?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동정녀 마리아와 친척이다.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선한 사람이었다.
사가랴가 자기 순서대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과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으므로 벙어리가 되어 아들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기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후에 천사의 말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때 혀가 풀렸다.
2016-07-15
제29과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엘리야
왕하 2:11~12
읽을말씀 : 왕하 2:11~12 | 외울말씀 : 눅 1:17 ㅣ 참고 말씀: 사 40:3
교육목표 : 하나님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어떠한 사명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감당하는 일꾼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매우 겸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한 마음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자신의 사명을 다한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이런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
엘리야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심으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됐고, 유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을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했지요.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런데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행함도 변합니다. 자신이 해 준 만큼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막상 어떤 일을 맡기면 자신의 성품을 핑계로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일은 성품상 맞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던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침으로 무척 사모했지요. 마침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엘리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를 통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먼저,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모습은 사람이되 짐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째가 되면 영을 보내 주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육의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잉태됨과 동시에 주어진 영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셨지요.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지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그제야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이처럼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깨끗하고 온전해야 하겠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 채로 들림 받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 일에 선택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장차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순교해야 한다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낸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요. 하지만 그 고백대로 변함없이 진실한 행함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볼 때는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장면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냈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지요. 하나님 일을 이룸에 있어 어찌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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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성경 구절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시고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다. ( )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다.
2. ( )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다.
3.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한 성경 구절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1~10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야’의 선
① 자기 의가 없고 겸비한 마음을 지녔기에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다.
②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어떠한 사명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감당하는 일꾼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매우 겸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한 마음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자신의 사명을 다한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이런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
엘리야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심으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됐고, 유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을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했지요.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런데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행함도 변합니다. 자신이 해 준 만큼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막상 어떤 일을 맡기면 자신의 성품을 핑계로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일은 성품상 맞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던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침으로 무척 사모했지요. 마침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엘리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를 통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먼저,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모습은 사람이되 짐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째가 되면 영을 보내 주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육의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잉태됨과 동시에 주어진 영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셨지요.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지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그제야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이처럼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깨끗하고 온전해야 하겠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 채로 들림 받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 일에 선택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장차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순교해야 한다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낸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요. 하지만 그 고백대로 변함없이 진실한 행함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볼 때는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장면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냈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지요. 하나님 일을 이룸에 있어 어찌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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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성경 구절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시고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다. ( )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다.
2. ( )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다.
3.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한 성경 구절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1~10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야’의 선
① 자기 의가 없고 겸비한 마음을 지녔기에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다.
②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2016-07-08
제28과하나님의 권능을 행한 엘리야
왕상 18:41~46
읽을말씀 : 왕상 18:41~46 | 외울말씀 : 잠 18:12 ㅣ 참고 말씀:왕상 18:19~24
교육목표 :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감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B.C. 9세기경 우상 숭배가 만연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방 신을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해 믿음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고, 간절한 기도로써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큰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주었으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또한 요단 강을 가르는가 하면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산 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받아 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심히 겸비하여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마음
엘리야는 원래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칫 이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됐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겸비함을 높이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변화되기 전에도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낮아지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매우 유약하고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부족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일을 어그러뜨리면 안 되는데 ….’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러한 유약함이 영적으로 변화돼야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적, 상업적 동맹을 위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적으로 결혼시킵니다. 이때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 신이 백성들에게 퍼져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컸던지 심판이 임하여 수년 동안 그 땅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합 왕에게 전하라고 엘리야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아합 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에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마지막 남은 양식인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 반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다시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에 닥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만일 엘리야가 왕 앞에 나아간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가 이러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명령대로 아합 왕을 찾아가 하나님 뜻을 분명히 전달합니다. 가뭄이 든 원인이 왕과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신이 참 신임을 밝히자는 것이었지요(왕상 18:19~24).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왕이 보는 가운데 엘리야 홀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불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자신의 유약함을 깨뜨리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고, 결국 불의 응답을 끌어내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부족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고, 하나님 뜻을 정확히 깨닫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비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구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능력을 받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린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아합 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예언한 후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의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일곱 차례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로 바다 편에서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곧 큰비가 내릴 것임을 알았고, 그 믿음대로 조금 후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45~46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찾으시지요.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 능력을 많이 담을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그릇 안에 자기가 담겨 있다면 어찌 순수한 하나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 마음이 겸비한 그릇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 능력이 더 많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신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화평을 이뤘습니다. 또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임을 깨달아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기를 쉬지 않음으로 영적인 담대함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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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엘리야는 심히 ( )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다.
2.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 )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갈멜 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인과 겨뤄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94~1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 왕들 중 악한 왕으로 유명하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바알 산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등 패역한 죄를 범하므로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 하신 대로 저주가 임했다.
교육목표 :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감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B.C. 9세기경 우상 숭배가 만연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방 신을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해 믿음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고, 간절한 기도로써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큰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주었으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또한 요단 강을 가르는가 하면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산 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받아 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심히 겸비하여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마음
엘리야는 원래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칫 이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됐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겸비함을 높이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변화되기 전에도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낮아지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매우 유약하고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부족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일을 어그러뜨리면 안 되는데 ….’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러한 유약함이 영적으로 변화돼야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적, 상업적 동맹을 위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적으로 결혼시킵니다. 이때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 신이 백성들에게 퍼져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컸던지 심판이 임하여 수년 동안 그 땅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합 왕에게 전하라고 엘리야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아합 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에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마지막 남은 양식인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 반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다시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에 닥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만일 엘리야가 왕 앞에 나아간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가 이러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명령대로 아합 왕을 찾아가 하나님 뜻을 분명히 전달합니다. 가뭄이 든 원인이 왕과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신이 참 신임을 밝히자는 것이었지요(왕상 18:19~24).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왕이 보는 가운데 엘리야 홀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불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자신의 유약함을 깨뜨리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고, 결국 불의 응답을 끌어내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부족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고, 하나님 뜻을 정확히 깨닫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비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구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능력을 받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린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아합 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예언한 후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의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일곱 차례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로 바다 편에서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곧 큰비가 내릴 것임을 알았고, 그 믿음대로 조금 후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45~46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찾으시지요.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 능력을 많이 담을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그릇 안에 자기가 담겨 있다면 어찌 순수한 하나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 마음이 겸비한 그릇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 능력이 더 많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신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화평을 이뤘습니다. 또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임을 깨달아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기를 쉬지 않음으로 영적인 담대함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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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엘리야는 심히 ( )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다.
2.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 )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갈멜 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인과 겨뤄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94~1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 왕들 중 악한 왕으로 유명하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바알 산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등 패역한 죄를 범하므로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 하신 대로 저주가 임했다.
2016-07-01
제27과맥추절을 지키라
출 23:14~18
읽을말씀 : 출 23:14~18 | 외울말씀 : 살전 5:16~18 ㅣ 참고 말씀:신 16:10
교육목표 : 성경에 기록된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맥추감사예배를 드리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약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씨앗을 심어 누렇게 익은 밀밭 풍경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훗날의 일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맥추절을 언제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바로 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맥추절은 이렇게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지요. 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으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으며, 후반기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매년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누며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맥추절을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릴 때,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따라서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맥추절을 맞아 성전에 나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맥추감사제를 드릴 때 왜 마음과 더불어 예물을 드리라고 당부하셨을까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 감사임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욱 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닌지, 은혜를 받은 순간에는 “감사합니다.” 하며 입술로만 고백하고 그 은혜를 잊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하며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 )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를 칠칠절 또는 ( )이라고도 부른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이고, ( )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2.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였을까요?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 때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제(素祭)’란?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하신 말씀대로 곡식을 곱게 갈아 드리는 제사이다. 이는 생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로서 오늘날 예배를 드릴 때 그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을 의미한다.
교육목표 : 성경에 기록된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맥추감사예배를 드리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약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씨앗을 심어 누렇게 익은 밀밭 풍경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훗날의 일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맥추절을 언제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바로 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맥추절은 이렇게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지요. 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으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으며, 후반기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매년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누며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맥추절을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릴 때,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따라서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맥추절을 맞아 성전에 나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맥추감사제를 드릴 때 왜 마음과 더불어 예물을 드리라고 당부하셨을까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 감사임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욱 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닌지, 은혜를 받은 순간에는 “감사합니다.” 하며 입술로만 고백하고 그 은혜를 잊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하며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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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 )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를 칠칠절 또는 ( )이라고도 부른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이고, ( )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2.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였을까요?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 때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제(素祭)’란?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하신 말씀대로 곡식을 곱게 갈아 드리는 제사이다. 이는 생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로서 오늘날 예배를 드릴 때 그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을 의미한다.
2016-06-24
제26과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벗이 된 아브라함
히 11:17~19
읽을말씀 : 히 11:17~19 | 외울말씀 : 롬 4:18 ㅣ 참고 말씀: 약 2:22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변함없이 끝까지 믿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하는 양순의 마음을 가졌기에 조카 롯에게 선뜻 좋은 땅을 양보할 수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했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거저 주겠다는 것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받았지요. 이 외에도 아브라함의 어떤 면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을까요?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한 순종의 행함을 나타내 보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 하실까요? 간단히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모는 말을 잘 듣는 자녀에게 “아유, 착해라. 참 착하구나!” 하며 기뻐합니다. 또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딸, 우리 아들은 착하니까 엄마 아빠 말씀대로 할 거지?” 하며 격려하기도 하지요. 심성이 착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어른들의 말씀대로 순종을 잘합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착하다. 선하다.’라고 인정해 주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도 자녀 된 우리를 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단번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항상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리라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상황이 바뀐다 하여 의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삶의 터전과 가족, 친척을 뒤로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기에 즉시 순종해 떠났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창 22:1~3).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장작을 챙겨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떠났지요.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아내 사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라가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한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하나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한 차원입니다. 아들 이삭은 약속의 씨이니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번제할 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늘 깨어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 곳곳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됐어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쁘다거나 피곤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하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결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게 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므로 무조건 순종하면 복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난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입니다.
일단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고 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집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처럼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내릴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는 마음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한 약속을 빨리 지키지 않는다고 재촉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선한 자녀는 부모를 믿고 기다립니다.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하는가 싶어 “나중에 주셔도 된다.”며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 드립니다.
부모는 형편상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 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혹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 와도 그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 뜻을 헤아려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기쁨과 감사로 보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리라 약속하셨지요. 1년, 2년, 5년, 10년이 지나도록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해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했지요.
아브라함이 99세가 됐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미 두 사람은 나이가 많은 데다 사라는 경수까지 끊어져서 잉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결코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그의 후손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었지요(롬 4:18).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그 말씀을 믿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으셨는지요?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혹여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 응답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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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이었다.
② ( )
2.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과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한 차원의 깊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3. 여러분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으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시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귀한 독자를 짐승처럼 각을 떠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의 씨다. 그러니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언약의 말씀도, 이삭을 낳아 지금까지 길러온 세월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곧바로 순종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악의 모양이나 어떤 죄가 있어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답고 진한 믿음의 향, 사랑의 향을 받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 위한 시험이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변함없이 끝까지 믿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하는 양순의 마음을 가졌기에 조카 롯에게 선뜻 좋은 땅을 양보할 수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했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거저 주겠다는 것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받았지요. 이 외에도 아브라함의 어떤 면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을까요?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한 순종의 행함을 나타내 보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 하실까요? 간단히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모는 말을 잘 듣는 자녀에게 “아유, 착해라. 참 착하구나!” 하며 기뻐합니다. 또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딸, 우리 아들은 착하니까 엄마 아빠 말씀대로 할 거지?” 하며 격려하기도 하지요. 심성이 착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어른들의 말씀대로 순종을 잘합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착하다. 선하다.’라고 인정해 주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도 자녀 된 우리를 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단번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항상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리라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상황이 바뀐다 하여 의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삶의 터전과 가족, 친척을 뒤로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기에 즉시 순종해 떠났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창 22:1~3).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장작을 챙겨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떠났지요.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아내 사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라가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한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하나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한 차원입니다. 아들 이삭은 약속의 씨이니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번제할 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늘 깨어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 곳곳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됐어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쁘다거나 피곤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하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결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게 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므로 무조건 순종하면 복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난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입니다.
일단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고 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집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처럼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내릴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는 마음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한 약속을 빨리 지키지 않는다고 재촉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선한 자녀는 부모를 믿고 기다립니다.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하는가 싶어 “나중에 주셔도 된다.”며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 드립니다.
부모는 형편상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 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혹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 와도 그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 뜻을 헤아려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기쁨과 감사로 보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리라 약속하셨지요. 1년, 2년, 5년, 10년이 지나도록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해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했지요.
아브라함이 99세가 됐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미 두 사람은 나이가 많은 데다 사라는 경수까지 끊어져서 잉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결코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그의 후손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었지요(롬 4:18).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그 말씀을 믿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으셨는지요?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혹여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 응답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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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이었다.
② ( )
2.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과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한 차원의 깊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3. 여러분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으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시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귀한 독자를 짐승처럼 각을 떠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의 씨다. 그러니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언약의 말씀도, 이삭을 낳아 지금까지 길러온 세월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곧바로 순종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악의 모양이나 어떤 죄가 있어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답고 진한 믿음의 향, 사랑의 향을 받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 위한 시험이었다.
2016-06-17
제25과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선한 아브라함
창 13:8~9
읽을말씀 : 창 13:8~9 | 외울말씀 : 약 3:17 ㅣ 참고 말씀:창 12:2
교육목표 : 진리가 풍성히 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고, 매사에 사심없이 정직하며 성실함으로 축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성경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되었기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어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된 것일까요?
1. 관용과 양순의 마음
관용과 양순은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임하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면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함이 나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삶 속에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취하도록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양보하는 장면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실 때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자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육축이 많아서 물도, 목초지도 부족하다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종종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윗사람으로서 얼마든지 먼저 좋은 땅을 취할 수 있는데도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이때 롯은 사양은커녕,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소돔 땅을 선택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롯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아무리 강권한다 해도 삼촌 아브라함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지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조금도 서운함이나 불편한 감정이 없었습니다. 상대에게 주고 더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섬긴다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리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열 개라고 합시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을 달라면 몇 개나 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각자 마음의 크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겨우 하나만 줄 사람도 있고, 다섯 개 정도까지는 줄 사람도 있겠지요. 나아가 마음이 넓어 아홉 개까지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열 개를 모두 달라 해도 줄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선하다 인정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2. 사심이 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
아브라함은 본래 넓고 큰마음인 데다 매사에 정직하고 성실했습니다. 모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완벽하게 이루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것이 곧 축복의 길이 됐지요.
이러한 점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행한다면서 사심이 있어 상대를 속이거나 불성실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 주실 것을 믿기에 늘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러했기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는 축복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사심 없이 정직하고 성실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소돔 땅에 살던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 일어난 연합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갔을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신들을 이끌고 나가 롯을 구하고 소돔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에 소돔 왕은 그에게 전리품을 취하라고 권했지만 아브라함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아브라함의 옛 이름)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아브라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니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훗날 자신이 더 부유해졌을 때 소돔 왕이 전리품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에 단호히 사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기 유익을 좇아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아브라함처럼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당장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나아가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누가 꾀지 않아도 스스로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지요(잠 28:10).
아브라함은 자신이 전리품을 가진다 해서 허물이 되지 않는데도 취하지 않았고,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창 23장).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얻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게 값을 치르지 않으면 받지 않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고 확실하게 자기 소유로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들의 마음이 변해 얼마든지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 있기에 애초에 이런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 소유의 우물을 빼앗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창 21장). 이때도 아브라함은 잘잘못을 가리며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합니다. 상대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자기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 다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결한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비멜렉은 뉘우치기보다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기에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피해를 보상받아야 할 입장인데도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고 그 후로는 우물을 넘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선의 지혜로써 무슨 일이든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하여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했지요.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선의 지혜가 있으면 더 신속하고 아름답게 이룰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상대라도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될 때, 또한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더욱 선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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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 )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다.
( )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전리품을 거절한 아브라함
소돔 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브라함에게 전리품을 주고자 하지만 거절한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사사로운 유익을 좇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거절한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변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돔 왕이 당장에는 고마워하지만 훗날 “나는 원치 않았는데 아브라함이 대가를 바라서 주었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동원된 소년들의 양식과 자신을 도운 동맹군에게 돌릴 분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취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책임 지고 수고를 보상해 주려는 배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교육목표 : 진리가 풍성히 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고, 매사에 사심없이 정직하며 성실함으로 축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성경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되었기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어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된 것일까요?
1. 관용과 양순의 마음
관용과 양순은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임하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면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함이 나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삶 속에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취하도록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양보하는 장면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실 때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자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육축이 많아서 물도, 목초지도 부족하다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종종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윗사람으로서 얼마든지 먼저 좋은 땅을 취할 수 있는데도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이때 롯은 사양은커녕,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소돔 땅을 선택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롯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아무리 강권한다 해도 삼촌 아브라함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지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조금도 서운함이나 불편한 감정이 없었습니다. 상대에게 주고 더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섬긴다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리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열 개라고 합시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을 달라면 몇 개나 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각자 마음의 크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겨우 하나만 줄 사람도 있고, 다섯 개 정도까지는 줄 사람도 있겠지요. 나아가 마음이 넓어 아홉 개까지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열 개를 모두 달라 해도 줄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선하다 인정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2. 사심이 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
아브라함은 본래 넓고 큰마음인 데다 매사에 정직하고 성실했습니다. 모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완벽하게 이루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것이 곧 축복의 길이 됐지요.
이러한 점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행한다면서 사심이 있어 상대를 속이거나 불성실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 주실 것을 믿기에 늘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러했기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는 축복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사심 없이 정직하고 성실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소돔 땅에 살던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 일어난 연합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갔을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신들을 이끌고 나가 롯을 구하고 소돔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에 소돔 왕은 그에게 전리품을 취하라고 권했지만 아브라함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아브라함의 옛 이름)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아브라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니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훗날 자신이 더 부유해졌을 때 소돔 왕이 전리품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에 단호히 사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기 유익을 좇아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아브라함처럼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당장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나아가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누가 꾀지 않아도 스스로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지요(잠 28:10).
아브라함은 자신이 전리품을 가진다 해서 허물이 되지 않는데도 취하지 않았고,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창 23장).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얻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게 값을 치르지 않으면 받지 않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고 확실하게 자기 소유로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들의 마음이 변해 얼마든지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 있기에 애초에 이런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 소유의 우물을 빼앗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창 21장). 이때도 아브라함은 잘잘못을 가리며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합니다. 상대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자기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 다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결한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비멜렉은 뉘우치기보다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기에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피해를 보상받아야 할 입장인데도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고 그 후로는 우물을 넘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선의 지혜로써 무슨 일이든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하여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했지요.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선의 지혜가 있으면 더 신속하고 아름답게 이룰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상대라도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될 때, 또한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더욱 선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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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 )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다.
( )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전리품을 거절한 아브라함
소돔 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브라함에게 전리품을 주고자 하지만 거절한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사사로운 유익을 좇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거절한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변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돔 왕이 당장에는 고마워하지만 훗날 “나는 원치 않았는데 아브라함이 대가를 바라서 주었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동원된 소년들의 양식과 자신을 도운 동맹군에게 돌릴 분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취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책임 지고 수고를 보상해 주려는 배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2016-06-10
제24과온유함과 덕으로 온 집에 충성한 모세
민 12:3~7
읽을말씀 : 민 12:3~7 | 외울말씀 : 출 32:32 l 참고 말씀:히 3:5
교육목표 : 솜털같이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모든 사람과 화평하며 자신이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충성된 일꾼이 되게 한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하는 마음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세는 어떠한 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을까요?
1.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말씀하신 대로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온유함이란 무엇일까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한 마음입니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덕이 있어서 말과 행동이 반듯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이지요.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상황이 되면 쇳소리처럼 요란하고 거친 반응이 나오지요. 단단한 쇠에다가 돌을 던지면 쇳소리가 나고, 유리에 돌을 던지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솜뭉치에는 아무리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찌른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으며, 그저 폭 감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솜털 같은 마음을 이루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화평을 이룹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믿어 주며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줍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과정에서 모세의 영적인 온유함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는 40년의 여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었습니다.
모세의 믿음과 순종으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넜지만 광야 길을 가는 동안 마실 물이 없자 이내 백성들은 불평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믿음 없는 백성을 용납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마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합니다(출 16:3).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지요.
얼마 후 르비딤이란 곳에 장막을 쳤을 때 백성은 마실 물이 없다고 또다시 모세를 원망합니다. 심지어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 하며 돌을 던질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한 뒤 지팡이로 반석을 쳐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매번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주는데도 백성들은 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한번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백성들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숭배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진노하시며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시기’를 간곡히 구했습니다(출 32:12). 이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이어서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막상 산에서 내려와 보니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등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한 사실을 안 모세는 심히 애통하며 다시금 하나님께 간구했지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은 생명책을 말합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대로 지옥불에 떨어지지요.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였지만 백성들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자기 생명을 담보로 간절한 중보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던 뜻을 돌이키십니다.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원수를 위해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온유함을 얼마나 닮았는지요? 내 자녀 하나 품지 못하여 다투지는 않습니까? 형제 자매나 부부간에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불화하지는 않는지요? 교회에서도 영혼들을 온유함으로 품는지, 나와 맞지 않다 해서 불편해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 사랑과 덕으로 품고 진리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그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을 보면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까지 잘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정 중에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40년 동안이나 이끌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오직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지요. 범죄한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한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이러한 마음 중심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며 큰 권능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하나님께 직접 율법을 받아 내렸고,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깊이 교통을 이루었습니다(민 12:8).
이처럼 하나님 앞에 충성했으니 그가 당당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늘 민망한 마음뿐이었지요.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람은 출애굽 2세대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였지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항상 민망히 여겼습니다.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무익한 종의 마음보다 더 겸비한 마음이었습니다(눅 17:10).
혹여 여러분은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힘이 든다. 사명을 놓고 싶다. 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킬 때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순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겸비한 마음을 떠올려 보며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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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한 마음이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 )이 있어서 말과 행동이 반듯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이다.
2. ( )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 그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이다. 나아가 ( )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3. 여러분은 맡은 사명을 어떠한 마음으로 감당하고 계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74~8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세의 선’
①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
② 연단받을 때 중심에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③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다.
④ 온 집에 충성했다.
교육목표 : 솜털같이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모든 사람과 화평하며 자신이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충성된 일꾼이 되게 한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하는 마음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세는 어떠한 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을까요?
1.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말씀하신 대로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온유함이란 무엇일까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한 마음입니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덕이 있어서 말과 행동이 반듯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이지요.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상황이 되면 쇳소리처럼 요란하고 거친 반응이 나오지요. 단단한 쇠에다가 돌을 던지면 쇳소리가 나고, 유리에 돌을 던지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솜뭉치에는 아무리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찌른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으며, 그저 폭 감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솜털 같은 마음을 이루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화평을 이룹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믿어 주며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줍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과정에서 모세의 영적인 온유함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는 40년의 여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었습니다.
모세의 믿음과 순종으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넜지만 광야 길을 가는 동안 마실 물이 없자 이내 백성들은 불평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믿음 없는 백성을 용납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마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합니다(출 16:3).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지요.
얼마 후 르비딤이란 곳에 장막을 쳤을 때 백성은 마실 물이 없다고 또다시 모세를 원망합니다. 심지어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 하며 돌을 던질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한 뒤 지팡이로 반석을 쳐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매번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주는데도 백성들은 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한번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백성들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숭배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진노하시며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시기’를 간곡히 구했습니다(출 32:12). 이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이어서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막상 산에서 내려와 보니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등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한 사실을 안 모세는 심히 애통하며 다시금 하나님께 간구했지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은 생명책을 말합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대로 지옥불에 떨어지지요.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였지만 백성들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자기 생명을 담보로 간절한 중보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던 뜻을 돌이키십니다.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원수를 위해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온유함을 얼마나 닮았는지요? 내 자녀 하나 품지 못하여 다투지는 않습니까? 형제 자매나 부부간에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불화하지는 않는지요? 교회에서도 영혼들을 온유함으로 품는지, 나와 맞지 않다 해서 불편해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 사랑과 덕으로 품고 진리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그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을 보면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까지 잘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정 중에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40년 동안이나 이끌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오직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지요. 범죄한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한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이러한 마음 중심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며 큰 권능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하나님께 직접 율법을 받아 내렸고,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깊이 교통을 이루었습니다(민 12:8).
이처럼 하나님 앞에 충성했으니 그가 당당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늘 민망한 마음뿐이었지요.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람은 출애굽 2세대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였지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항상 민망히 여겼습니다.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무익한 종의 마음보다 더 겸비한 마음이었습니다(눅 17:10).
혹여 여러분은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힘이 든다. 사명을 놓고 싶다. 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킬 때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순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겸비한 마음을 떠올려 보며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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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한 마음이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 )이 있어서 말과 행동이 반듯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이다.
2. ( )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 그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이다. 나아가 ( )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3. 여러분은 맡은 사명을 어떠한 마음으로 감당하고 계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74~8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세의 선’
①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
② 연단받을 때 중심에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③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다.
④ 온 집에 충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