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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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5
제29과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한 엘리야
왕하 2:11~12
읽을말씀 : 왕하 2:11~12 | 외울말씀 : 눅 1:17 ㅣ 참고 말씀: 사 40:3
교육목표 : 하나님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어떠한 사명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감당하는 일꾼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매우 겸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한 마음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자신의 사명을 다한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이런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
엘리야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심으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됐고, 유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을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했지요.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런데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행함도 변합니다. 자신이 해 준 만큼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막상 어떤 일을 맡기면 자신의 성품을 핑계로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일은 성품상 맞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던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침으로 무척 사모했지요. 마침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엘리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를 통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먼저,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모습은 사람이되 짐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째가 되면 영을 보내 주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육의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잉태됨과 동시에 주어진 영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셨지요.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지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그제야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이처럼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깨끗하고 온전해야 하겠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 채로 들림 받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 일에 선택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장차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순교해야 한다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낸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요. 하지만 그 고백대로 변함없이 진실한 행함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볼 때는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장면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냈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지요. 하나님 일을 이룸에 있어 어찌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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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성경 구절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시고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다. ( )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다.
2. ( )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다.
3.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한 성경 구절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1~10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야’의 선
① 자기 의가 없고 겸비한 마음을 지녔기에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다.
②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불같이 기도함으로 어떠한 사명이라 할지라도 넉넉히 감당하는 일꾼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매우 겸비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의가 없어서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한 마음을 소유했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자신의 사명을 다한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이런 엘리야가 신약 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
엘리야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에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주심으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 사모하게 됐고, 유약한 자신에게 큰 권능을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됐습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순종했지요.
세상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뭐든지 해 주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런데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 마음도 행함도 변합니다. 자신이 해 준 만큼 상대에게 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엘리야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막상 어떤 일을 맡기면 자신의 성품을 핑계로 못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하고 싶지만 그 일은 성품상 맞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던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거짓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있으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면 태초부터 계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는 이 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침으로 무척 사모했지요. 마침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겠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함을 알게 됐습니다. 엘리야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하는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말씀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오직 엘리야를 통해 단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먼저, 하나의 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체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을 보내 주셔야만 합니다. 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모습은 사람이되 짐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째가 되면 영을 보내 주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셨지요. 엘리야의 영 자체가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육의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잉태됨과 동시에 주어진 영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셨지요.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미 사람의 생명의 씨가 결합된 상태에서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기를 받아 그 영향도 받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지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 17:11~12)
그제야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이처럼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깨끗하고 온전해야 하겠는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산 채로 들림 받을 만큼 깨끗하고 온전한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 일에 선택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다는 데 있습니다. 엘리야는 장차 주님이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이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고 순교해야 한다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낸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많지요. 하지만 그 고백대로 변함없이 진실한 행함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 그 사랑이 배어나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온유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볼 때는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장면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쫓아냈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시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지요. 하나님 일을 이룸에 있어 어찌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진실한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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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성경 구절을 본문에서 찾아 써 보세요.
1.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시고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성경을 통해 예언해 놓으셨다. ( )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다.
2. ( )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했다.
3.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말씀한 성경 구절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101~10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엘리야’의 선
① 자기 의가 없고 겸비한 마음을 지녔기에 어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다.
②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2016-07-08
제28과하나님의 권능을 행한 엘리야
왕상 18:41~46
읽을말씀 : 왕상 18:41~46 | 외울말씀 : 잠 18:12 ㅣ 참고 말씀:왕상 18:19~24
교육목표 :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감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B.C. 9세기경 우상 숭배가 만연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방 신을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해 믿음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고, 간절한 기도로써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큰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주었으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또한 요단 강을 가르는가 하면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산 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받아 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심히 겸비하여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마음
엘리야는 원래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칫 이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됐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겸비함을 높이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변화되기 전에도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낮아지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매우 유약하고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부족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일을 어그러뜨리면 안 되는데 ….’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러한 유약함이 영적으로 변화돼야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적, 상업적 동맹을 위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적으로 결혼시킵니다. 이때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 신이 백성들에게 퍼져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컸던지 심판이 임하여 수년 동안 그 땅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합 왕에게 전하라고 엘리야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아합 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에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마지막 남은 양식인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 반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다시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에 닥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만일 엘리야가 왕 앞에 나아간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가 이러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명령대로 아합 왕을 찾아가 하나님 뜻을 분명히 전달합니다. 가뭄이 든 원인이 왕과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신이 참 신임을 밝히자는 것이었지요(왕상 18:19~24).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왕이 보는 가운데 엘리야 홀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불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자신의 유약함을 깨뜨리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고, 결국 불의 응답을 끌어내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부족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고, 하나님 뜻을 정확히 깨닫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비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구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능력을 받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린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아합 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예언한 후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의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일곱 차례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로 바다 편에서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곧 큰비가 내릴 것임을 알았고, 그 믿음대로 조금 후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45~46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찾으시지요.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 능력을 많이 담을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그릇 안에 자기가 담겨 있다면 어찌 순수한 하나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 마음이 겸비한 그릇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 능력이 더 많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신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화평을 이뤘습니다. 또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임을 깨달아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기를 쉬지 않음으로 영적인 담대함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엘리야는 심히 ( )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다.
2.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 )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갈멜 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인과 겨뤄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94~1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 왕들 중 악한 왕으로 유명하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바알 산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등 패역한 죄를 범하므로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 하신 대로 저주가 임했다.
교육목표 :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감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영적 장수가 되게 한다.
엘리야는 B.C. 9세기경 우상 숭배가 만연한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방 신을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해 믿음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렸고, 간절한 기도로써 3년 반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큰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주었으며,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지요. 또한 요단 강을 가르는가 하면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산 채로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권능을 받아 행하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축복을 받았을까요?
1. 심히 겸비하여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마음
엘리야는 원래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칫 이 모습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으나 영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됐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겸비함을 높이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변화되기 전에도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낮아지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매우 유약하고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도 ‘부족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일을 어그러뜨리면 안 되는데 ….’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이러한 유약함이 영적으로 변화돼야 큰 선지자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엘리야가 활동했던 시대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이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적, 상업적 동맹을 위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합과 정략적으로 결혼시킵니다. 이때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 신이 백성들에게 퍼져 온 나라가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가 컸던지 심판이 임하여 수년 동안 그 땅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아합 왕에게 전하라고 엘리야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십니다. 아합 왕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합니다.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땅에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마지막 남은 양식인 떡 한 조각을 공궤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가뭄이 시작된 지 3년 반쯤 됐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다시 아합 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에 닥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만일 엘리야가 왕 앞에 나아간다면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가 이러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명령대로 아합 왕을 찾아가 하나님 뜻을 분명히 전달합니다. 가뭄이 든 원인이 왕과 백성의 우상 숭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신이 참 신임을 밝히자는 것이었지요(왕상 18:19~24).
850명의 거짓 선지자와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는 왕이 보는 가운데 엘리야 홀로 나서야 합니다. 만약 불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자신의 유약함을 깨뜨리고 담대히 행할 수 있었고, 결국 불의 응답을 끌어내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2.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부족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고, 하나님 뜻을 정확히 깨닫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비한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구했고,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능력을 받기 위해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 그리고 믿음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하면서 그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갈멜 산에서 불의 응답을 끌어내린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아합 왕에게 “큰비의 소리가 있나이다”라고 예언한 후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의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일곱 차례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로 바다 편에서 손만 한 작은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곧 큰비가 내릴 것임을 알았고, 그 믿음대로 조금 후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마차보다 빨리 달리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열왕기상 18장 45~46절에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한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굳이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실 때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전하고 그분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찾으시지요. 사람의 마음을 그릇이라 할 때 그 그릇 안에 자기가 많이 담겨 있으면 하나님 능력을 많이 담을 수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신다 해도 그릇 안에 자기가 담겨 있다면 어찌 순수한 하나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 마음이 겸비한 그릇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깨끗한 그릇이라 해도 바닥이 깊은 그릇에 많이 담기듯, 자신의 마음을 겸비하게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 능력이 더 많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신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며 화평을 이뤘습니다. 또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임을 중심에서 고백하며 항상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이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임을 깨달아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는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과 기도로 교통하기를 쉬지 않음으로 영적인 담대함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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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엘리야는 심히 ( ) 마음을 가졌기에 누구와도 부딪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이 없었다.
2. 엘리야가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항상 하나님과 ( )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갈멜 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인과 겨뤄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94~10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아합 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 왕들 중 악한 왕으로 유명하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바알 산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 등 패역한 죄를 범하므로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왕상 21:24) 하신 대로 저주가 임했다.
2016-07-01
제27과맥추절을 지키라
출 23:14~18
읽을말씀 : 출 23:14~18 | 외울말씀 : 살전 5:16~18 ㅣ 참고 말씀:신 16:10
교육목표 : 성경에 기록된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맥추감사예배를 드리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약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씨앗을 심어 누렇게 익은 밀밭 풍경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훗날의 일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맥추절을 언제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바로 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맥추절은 이렇게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지요. 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으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으며, 후반기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매년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누며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맥추절을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릴 때,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따라서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맥추절을 맞아 성전에 나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맥추감사제를 드릴 때 왜 마음과 더불어 예물을 드리라고 당부하셨을까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 감사임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욱 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닌지, 은혜를 받은 순간에는 “감사합니다.” 하며 입술로만 고백하고 그 은혜를 잊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하며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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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 )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를 칠칠절 또는 ( )이라고도 부른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이고, ( )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2.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였을까요?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 때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제(素祭)’란?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하신 말씀대로 곡식을 곱게 갈아 드리는 제사이다. 이는 생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로서 오늘날 예배를 드릴 때 그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을 의미한다.
교육목표 : 성경에 기록된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맥추감사예배를 드리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약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씨앗을 심어 누렇게 익은 밀밭 풍경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훗날의 일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맥추절을 언제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는 바로 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맥추절은 이렇게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지요. 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으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으며, 후반기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매년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누며 축복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맥추절을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릴 때, 사랑과 축복의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따라서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맥추절을 맞아 성전에 나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맥추감사제를 드릴 때 왜 마음과 더불어 예물을 드리라고 당부하셨을까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 감사임을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욱 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혹여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닌지, 은혜를 받은 순간에는 “감사합니다.” 하며 입술로만 고백하고 그 은혜를 잊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하며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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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 )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이다. 이를 칠칠절 또는 ( )이라고도 부른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이고, ( )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2.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였을까요?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 때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소제(素祭)’란?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하신 말씀대로 곡식을 곱게 갈아 드리는 제사이다. 이는 생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로서 오늘날 예배를 드릴 때 그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을 의미한다.
2016-06-24
제26과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벗이 된 아브라함
히 11:17~19
읽을말씀 : 히 11:17~19 | 외울말씀 : 롬 4:18 ㅣ 참고 말씀: 약 2:22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변함없이 끝까지 믿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하는 양순의 마음을 가졌기에 조카 롯에게 선뜻 좋은 땅을 양보할 수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했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거저 주겠다는 것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받았지요. 이 외에도 아브라함의 어떤 면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을까요?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한 순종의 행함을 나타내 보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 하실까요? 간단히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모는 말을 잘 듣는 자녀에게 “아유, 착해라. 참 착하구나!” 하며 기뻐합니다. 또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딸, 우리 아들은 착하니까 엄마 아빠 말씀대로 할 거지?” 하며 격려하기도 하지요. 심성이 착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어른들의 말씀대로 순종을 잘합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착하다. 선하다.’라고 인정해 주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도 자녀 된 우리를 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단번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항상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리라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상황이 바뀐다 하여 의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삶의 터전과 가족, 친척을 뒤로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기에 즉시 순종해 떠났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창 22:1~3).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장작을 챙겨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떠났지요.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아내 사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라가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한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하나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한 차원입니다. 아들 이삭은 약속의 씨이니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번제할 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늘 깨어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 곳곳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됐어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쁘다거나 피곤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하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결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게 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므로 무조건 순종하면 복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난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입니다.
일단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고 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집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처럼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내릴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는 마음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한 약속을 빨리 지키지 않는다고 재촉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선한 자녀는 부모를 믿고 기다립니다.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하는가 싶어 “나중에 주셔도 된다.”며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 드립니다.
부모는 형편상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 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혹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 와도 그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 뜻을 헤아려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기쁨과 감사로 보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리라 약속하셨지요. 1년, 2년, 5년, 10년이 지나도록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해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했지요.
아브라함이 99세가 됐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미 두 사람은 나이가 많은 데다 사라는 경수까지 끊어져서 잉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결코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그의 후손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었지요(롬 4:18).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그 말씀을 믿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으셨는지요?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혹여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 응답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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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이었다.
② ( )
2.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과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한 차원의 깊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3. 여러분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으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시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귀한 독자를 짐승처럼 각을 떠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의 씨다. 그러니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언약의 말씀도, 이삭을 낳아 지금까지 길러온 세월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곧바로 순종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악의 모양이나 어떤 죄가 있어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답고 진한 믿음의 향, 사랑의 향을 받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 위한 시험이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변함없이 끝까지 믿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하는 양순의 마음을 가졌기에 조카 롯에게 선뜻 좋은 땅을 양보할 수 있었지요. 뿐만 아니라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했기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거저 주겠다는 것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받았지요. 이 외에도 아브라함의 어떤 면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을까요?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온전한 순종의 행함을 나타내 보인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 말씀하셨습니다. 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 하실까요? 간단히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모는 말을 잘 듣는 자녀에게 “아유, 착해라. 참 착하구나!” 하며 기뻐합니다. 또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딸, 우리 아들은 착하니까 엄마 아빠 말씀대로 할 거지?” 하며 격려하기도 하지요. 심성이 착한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어떤 이유나 핑계를 대지 않고 어른들의 말씀대로 순종을 잘합니다. 어른들은 이러한 아이들에게 ‘착하다. 선하다.’라고 인정해 주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도 자녀 된 우리를 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단번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과연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았지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항상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리라 약속하셨을 때에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상황이 바뀐다 하여 의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하셨을 때 그는 즉시 순종합니다. 삶의 터전과 가족, 친척을 뒤로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떠났습니다. 이런저런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결코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기에 즉시 순종해 떠났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믿음의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창 22:1~3).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저 없이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장작을 챙겨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떠났지요.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아내 사라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사라가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한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하나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한 차원입니다. 아들 이삭은 약속의 씨이니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번제할 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늘 깨어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 곳곳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됐어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쁘다거나 피곤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하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결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게 풀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므로 무조건 순종하면 복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난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입니다.
일단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고 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집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처럼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내릴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는 마음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한 약속을 빨리 지키지 않는다고 재촉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선한 자녀는 부모를 믿고 기다립니다.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빨리 주시지 못하는가 싶어 “나중에 주셔도 된다.”며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 드립니다.
부모는 형편상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 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혹 자신의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 와도 그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 뜻을 헤아려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기쁨과 감사로 보낸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그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들을 주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리라 약속하셨지요. 1년, 2년, 5년, 10년이 지나도록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해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했지요.
아브라함이 99세가 됐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미 두 사람은 나이가 많은 데다 사라는 경수까지 끊어져서 잉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결코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과연 그의 믿음대로 아브라함은 백 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그의 후손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었지요(롬 4:18).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그 말씀을 믿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으셨는지요?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혹여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음으로 응답과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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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는 마음이었다.
② ( )
2.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과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한 차원의 깊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3. 여러분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으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7~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시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 세에 얻은 귀한 독자를 짐승처럼 각을 떠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의 씨다. 그러니 이삭을 번제로 바치면 언약의 말씀도, 이삭을 낳아 지금까지 길러온 세월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곧바로 순종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악의 모양이나 어떤 죄가 있어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답고 진한 믿음의 향, 사랑의 향을 받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기 위한 시험이었다.
2016-06-17
제25과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선한 아브라함
창 13:8~9
읽을말씀 : 창 13:8~9 | 외울말씀 : 약 3:17 ㅣ 참고 말씀:창 12:2
교육목표 : 진리가 풍성히 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고, 매사에 사심없이 정직하며 성실함으로 축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성경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되었기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어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된 것일까요?
1. 관용과 양순의 마음
관용과 양순은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임하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면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함이 나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삶 속에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취하도록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양보하는 장면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실 때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자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육축이 많아서 물도, 목초지도 부족하다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종종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윗사람으로서 얼마든지 먼저 좋은 땅을 취할 수 있는데도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이때 롯은 사양은커녕,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소돔 땅을 선택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롯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아무리 강권한다 해도 삼촌 아브라함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지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조금도 서운함이나 불편한 감정이 없었습니다. 상대에게 주고 더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섬긴다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리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열 개라고 합시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을 달라면 몇 개나 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각자 마음의 크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겨우 하나만 줄 사람도 있고, 다섯 개 정도까지는 줄 사람도 있겠지요. 나아가 마음이 넓어 아홉 개까지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열 개를 모두 달라 해도 줄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선하다 인정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2. 사심이 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
아브라함은 본래 넓고 큰마음인 데다 매사에 정직하고 성실했습니다. 모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완벽하게 이루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것이 곧 축복의 길이 됐지요.
이러한 점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행한다면서 사심이 있어 상대를 속이거나 불성실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 주실 것을 믿기에 늘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러했기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는 축복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사심 없이 정직하고 성실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소돔 땅에 살던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 일어난 연합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갔을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신들을 이끌고 나가 롯을 구하고 소돔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에 소돔 왕은 그에게 전리품을 취하라고 권했지만 아브라함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아브라함의 옛 이름)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아브라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니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훗날 자신이 더 부유해졌을 때 소돔 왕이 전리품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에 단호히 사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기 유익을 좇아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아브라함처럼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당장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나아가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누가 꾀지 않아도 스스로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지요(잠 28:10).
아브라함은 자신이 전리품을 가진다 해서 허물이 되지 않는데도 취하지 않았고,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창 23장).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얻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게 값을 치르지 않으면 받지 않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고 확실하게 자기 소유로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들의 마음이 변해 얼마든지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 있기에 애초에 이런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 소유의 우물을 빼앗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창 21장). 이때도 아브라함은 잘잘못을 가리며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합니다. 상대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자기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 다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결한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비멜렉은 뉘우치기보다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기에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피해를 보상받아야 할 입장인데도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고 그 후로는 우물을 넘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선의 지혜로써 무슨 일이든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하여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했지요.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선의 지혜가 있으면 더 신속하고 아름답게 이룰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상대라도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될 때, 또한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더욱 선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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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 )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다.
( )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전리품을 거절한 아브라함
소돔 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브라함에게 전리품을 주고자 하지만 거절한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사사로운 유익을 좇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거절한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변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돔 왕이 당장에는 고마워하지만 훗날 “나는 원치 않았는데 아브라함이 대가를 바라서 주었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동원된 소년들의 양식과 자신을 도운 동맹군에게 돌릴 분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취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책임 지고 수고를 보상해 주려는 배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교육목표 : 진리가 풍성히 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주고, 매사에 사심없이 정직하며 성실함으로 축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성경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어느 것 하나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의 마음과 행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되었기에 주어진 결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어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지극한 선이라 인정된 것일까요?
1. 관용과 양순의 마음
관용과 양순은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임하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러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면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함이 나옵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삶 속에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나옵니다. 바로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취하도록 아브라함이 선택권을 양보하는 장면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부터 함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실 때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았지요.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자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육축이 많아서 물도, 목초지도 부족하다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종종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윗사람으로서 얼마든지 먼저 좋은 땅을 취할 수 있는데도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이때 롯은 사양은커녕,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소돔 땅을 선택해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롯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아무리 강권한다 해도 삼촌 아브라함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그 마음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지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조금도 서운함이나 불편한 감정이 없었습니다. 상대에게 주고 더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섬긴다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권리도 기꺼이 양보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열 개라고 합시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을 달라면 몇 개나 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각자 마음의 크기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겨우 하나만 줄 사람도 있고, 다섯 개 정도까지는 줄 사람도 있겠지요. 나아가 마음이 넓어 아홉 개까지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상대가 열 개를 모두 달라 해도 줄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줄 수 있는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선하다 인정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2. 사심이 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
아브라함은 본래 넓고 큰마음인 데다 매사에 정직하고 성실했습니다. 모든 일을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완벽하게 이루고자 했지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것이 곧 축복의 길이 됐지요.
이러한 점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선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행한다면서 사심이 있어 상대를 속이거나 불성실한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 주실 것을 믿기에 늘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러했기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는 축복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사심 없이 정직하고 성실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창세기 14장에 나옵니다. 소돔 땅에 살던 조카 롯이 가나안 땅에 일어난 연합 전쟁에 휘말려 포로로 잡혀갔을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신들을 이끌고 나가 롯을 구하고 소돔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에 소돔 왕은 그에게 전리품을 취하라고 권했지만 아브라함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아브라함의 옛 이름)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아브라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니 전리품을 취한다 해도 부당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또한 훗날 자신이 더 부유해졌을 때 소돔 왕이 전리품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에 단호히 사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자기 유익을 좇아 재물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복을 받기 원한다면 아브라함처럼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당장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나아가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누가 꾀지 않아도 스스로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지요(잠 28:10).
아브라함은 자신이 전리품을 가진다 해서 허물이 되지 않는데도 취하지 않았고,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창 23장).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얻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게 값을 치르지 않으면 받지 않는 정직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고 확실하게 자기 소유로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그들의 마음이 변해 얼마든지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 있기에 애초에 이런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 소유의 우물을 빼앗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창 21장). 이때도 아브라함은 잘잘못을 가리며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합니다. 상대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자기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 다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지혜롭게 해결한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비멜렉은 뉘우치기보다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기에 참된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피해를 보상받아야 할 입장인데도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고 그 후로는 우물을 넘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선의 지혜로써 무슨 일이든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하여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했지요.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선의 지혜가 있으면 더 신속하고 아름답게 이룰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상대라도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될 때, 또한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더욱 선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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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1. ( )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다.
( )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아브라함의 선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81~8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전리품을 거절한 아브라함
소돔 왕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브라함에게 전리품을 주고자 하지만 거절한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사사로운 유익을 좇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거절한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변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돔 왕이 당장에는 고마워하지만 훗날 “나는 원치 않았는데 아브라함이 대가를 바라서 주었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동원된 소년들의 양식과 자신을 도운 동맹군에게 돌릴 분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취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책임 지고 수고를 보상해 주려는 배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2016-06-10
제24과온유함과 덕으로 온 집에 충성한 모세
민 12:3~7
읽을말씀 : 민 12:3~7 | 외울말씀 : 출 32:32 l 참고 말씀:히 3:5
교육목표 : 솜털같이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모든 사람과 화평하며 자신이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충성된 일꾼이 되게 한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하는 마음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세는 어떠한 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을까요?
1.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말씀하신 대로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온유함이란 무엇일까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한 마음입니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덕이 있어서 말과 행동이 반듯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이지요.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상황이 되면 쇳소리처럼 요란하고 거친 반응이 나오지요. 단단한 쇠에다가 돌을 던지면 쇳소리가 나고, 유리에 돌을 던지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솜뭉치에는 아무리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찌른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으며, 그저 폭 감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솜털 같은 마음을 이루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화평을 이룹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믿어 주며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줍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과정에서 모세의 영적인 온유함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는 40년의 여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었습니다.
모세의 믿음과 순종으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넜지만 광야 길을 가는 동안 마실 물이 없자 이내 백성들은 불평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믿음 없는 백성을 용납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마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합니다(출 16:3).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지요.
얼마 후 르비딤이란 곳에 장막을 쳤을 때 백성은 마실 물이 없다고 또다시 모세를 원망합니다. 심지어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 하며 돌을 던질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한 뒤 지팡이로 반석을 쳐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매번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주는데도 백성들은 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한번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백성들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숭배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진노하시며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시기’를 간곡히 구했습니다(출 32:12). 이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이어서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막상 산에서 내려와 보니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등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한 사실을 안 모세는 심히 애통하며 다시금 하나님께 간구했지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은 생명책을 말합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대로 지옥불에 떨어지지요.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였지만 백성들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자기 생명을 담보로 간절한 중보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던 뜻을 돌이키십니다.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원수를 위해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온유함을 얼마나 닮았는지요? 내 자녀 하나 품지 못하여 다투지는 않습니까? 형제 자매나 부부간에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불화하지는 않는지요? 교회에서도 영혼들을 온유함으로 품는지, 나와 맞지 않다 해서 불편해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 사랑과 덕으로 품고 진리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그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을 보면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까지 잘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정 중에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40년 동안이나 이끌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오직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지요. 범죄한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한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이러한 마음 중심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며 큰 권능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하나님께 직접 율법을 받아 내렸고,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깊이 교통을 이루었습니다(민 12:8).
이처럼 하나님 앞에 충성했으니 그가 당당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늘 민망한 마음뿐이었지요.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람은 출애굽 2세대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였지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항상 민망히 여겼습니다.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무익한 종의 마음보다 더 겸비한 마음이었습니다(눅 17:10).
혹여 여러분은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힘이 든다. 사명을 놓고 싶다. 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킬 때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순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겸비한 마음을 떠올려 보며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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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한 마음이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 )이 있어서 말과 행동이 반듯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이다.
2. ( )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 그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이다. 나아가 ( )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3. 여러분은 맡은 사명을 어떠한 마음으로 감당하고 계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74~8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세의 선’
①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
② 연단받을 때 중심에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③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다.
④ 온 집에 충성했다.
교육목표 : 솜털같이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모든 사람과 화평하며 자신이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충성된 일꾼이 되게 한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하는 마음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모세는 어떠한 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을까요?
1.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말씀하신 대로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온유함이란 무엇일까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한 마음입니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덕이 있어서 말과 행동이 반듯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이지요.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상황이 되면 쇳소리처럼 요란하고 거친 반응이 나오지요. 단단한 쇠에다가 돌을 던지면 쇳소리가 나고, 유리에 돌을 던지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솜뭉치에는 아무리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찌른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으며, 그저 폭 감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은 솜털 같은 마음을 이루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화평을 이룹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믿어 주며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줍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과정에서 모세의 영적인 온유함이 잘 드러납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는 40년의 여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었습니다.
모세의 믿음과 순종으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넜지만 광야 길을 가는 동안 마실 물이 없자 이내 백성들은 불평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믿음 없는 백성을 용납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게 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마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양식이 없다는 이유로 모세를 원망합니다(출 16:3).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지요.
얼마 후 르비딤이란 곳에 장막을 쳤을 때 백성은 마실 물이 없다고 또다시 모세를 원망합니다. 심지어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 하며 돌을 던질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한 뒤 지팡이로 반석을 쳐 물이 나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매번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 주는데도 백성들은 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한번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백성들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숭배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진노하시며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시기’를 간곡히 구했습니다(출 32:12). 이 간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이어서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막상 산에서 내려와 보니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 등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한 사실을 안 모세는 심히 애통하며 다시금 하나님께 간구했지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은 생명책을 말합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대로 지옥불에 떨어지지요.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였지만 백성들이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기에 자기 생명을 담보로 간절한 중보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던 뜻을 돌이키십니다.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원수를 위해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온유함을 얼마나 닮았는지요? 내 자녀 하나 품지 못하여 다투지는 않습니까? 형제 자매나 부부간에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불화하지는 않는지요? 교회에서도 영혼들을 온유함으로 품는지, 나와 맞지 않다 해서 불편해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 사랑과 덕으로 품고 진리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그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을 보면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까지 잘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정 중에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40년 동안이나 이끌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오직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지요. 범죄한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날까지 한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이러한 마음 중심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신뢰하며 큰 권능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하나님께 직접 율법을 받아 내렸고,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깊이 교통을 이루었습니다(민 12:8).
이처럼 하나님 앞에 충성했으니 그가 당당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늘 민망한 마음뿐이었지요.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람은 출애굽 2세대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였지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항상 민망히 여겼습니다.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무익한 종의 마음보다 더 겸비한 마음이었습니다(눅 17:10).
혹여 여러분은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겁고 힘이 든다. 사명을 놓고 싶다. 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킬 때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는 순간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겸비한 마음을 떠올려 보며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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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1.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한 마음이다.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면서도 ( )이 있어서 말과 행동이 반듯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이다.
2. ( )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 그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이다. 나아가 ( )이란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3. 여러분은 맡은 사명을 어떠한 마음으로 감당하고 계십니까?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74~8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모세의 선’
①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
② 연단받을 때 중심에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③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다.
④ 온 집에 충성했다.
2016-06-03
제23과출애굽 지도자로 택함 받은 모세
히 11:24~26
읽을말씀 : 히 11:24~26 | 외울말씀 : 잠 17:3 ㅣ 참고 말씀:히 11:23
교육목표 : 모세처럼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리고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감사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출애굽이라는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이 선한 모세를 택하여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과연 모세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인정받아 출애굽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중심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순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중심에 지극한 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는 마음
요셉 때에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점점 번성하고 강대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애굽 왕 바로는 위협을 느끼고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학대합니다. 심지어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아이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때마침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온 애굽 공주가 어린 모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자신의 양자로 삼고자 하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공주에게 아이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받으면서 자기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당시 애굽은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자로 있는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 편에는 항상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노예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연락을 즐겨도 모세의 마음은 기쁘거나 즐겁지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음에 심한 번민이 있었지요.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모세에게는 애굽의 궁정에서 지내는 하루 하루가 죄악의 나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바로의 궁정을 등지고 광야로 도망쳐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이에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는 그에게 도리어 한 사람이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따집니다. 이 일로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 난 것을 안 모세는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만약 모세가 자기 안위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모른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았다면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비교적 견딜 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 궁핍함을 겪게 되면 현실적인 어려움에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여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더구나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궁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온 모세에게 있어서, 그 신분을 포기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공주의 아들로서 누리던 영화도, 호화스러운 왕궁 생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히 11:25~26).
만약 여러분이 모세의 입장이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평생을 바쳐 모은 재산이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무 망설임 없이 버릴 수 있겠는지요?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주님을 위해 모두 버릴 수 있습니다.
2.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불안한 현실과 자신의 처지에 낙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왕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자 이제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스스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슬퍼하거나 절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보내면서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지요. 이는 그가 중심에서 낮아진 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높아진 만큼 현실에 감사할 수 없고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하찮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국의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40년이라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연단의 시간을 통해 모세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에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연단을 받을 때 ‘왜 나는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려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지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출애굽 지도자로서의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그릇을 갖추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깨닫지 못한 채 불평하고 힘들어하지는 않는지요? 연단을 받을 때에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마음 중심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참된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① 모세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 )받는 것을 택했다.
② 모세는 ( )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 )했다.
2.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죽였던 모세가 철저히 낮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연단이 왔을 때 어떠한 마음으로 받으시나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66~7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십보라’는 누구인가?(출 2:21)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르우엘_출 2:18, 호밥_삿 4:11)의 딸이다. 미디안으로 도피한 모세와 결혼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 두 아들을 낳았다.
십보라는 곱고 상냥하며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으며, 질투심이 없는 여인이었다. 모세를 사랑하고 그의 말에 잘 순종하였으며, 남편이 선한 것만 보고 선한 것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모세는 이처럼 착하고 온유한 십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육목표 : 모세처럼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리고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감사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출애굽이라는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이 선한 모세를 택하여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과연 모세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인정받아 출애굽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는 중심입니다. 하지만 믿음과 순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중심에 지극한 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는 마음
요셉 때에 기근을 피해 애굽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점점 번성하고 강대해졌습니다. 이 때문에 애굽 왕 바로는 위협을 느끼고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 학대합니다. 심지어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아이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넣어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때마침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온 애굽 공주가 어린 모세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자신의 양자로 삼고자 하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공주에게 아이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받으면서 자기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당시 애굽은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자로 있는 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 편에는 항상 친어머니로부터 들은 하나님과, 노예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연락을 즐겨도 모세의 마음은 기쁘거나 즐겁지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음에 심한 번민이 있었지요.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모세에게는 애굽의 궁정에서 지내는 하루 하루가 죄악의 나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바로의 궁정을 등지고 광야로 도망쳐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이에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는 그에게 도리어 한 사람이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따집니다. 이 일로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 난 것을 안 모세는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만약 모세가 자기 안위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모른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았다면 어려운 처지가 되어도 비교적 견딜 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유하게 자란 사람이 궁핍함을 겪게 되면 현실적인 어려움에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여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더구나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궁에서 왕자와 같은 신분으로 살아온 모세에게 있어서, 그 신분을 포기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공주의 아들로서 누리던 영화도, 호화스러운 왕궁 생활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히 11:25~26).
만약 여러분이 모세의 입장이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평생을 바쳐 모은 재산이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무 망설임 없이 버릴 수 있겠는지요?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면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주님을 위해 모두 버릴 수 있습니다.
2.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불안한 현실과 자신의 처지에 낙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왕자로서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자 이제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스스로 낮아질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슬퍼하거나 절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보내면서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지요. 이는 그가 중심에서 낮아진 마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높아진 만큼 현실에 감사할 수 없고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하찮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뭔가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국의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40년이라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연단의 시간을 통해 모세는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에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연단을 받을 때 ‘왜 나는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려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는지요?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이 무려 40년이나 되었지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출애굽 지도자로서의 큰 사명을 주셨습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그릇을 갖추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었기에 계속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깨닫지 못한 채 불평하고 힘들어하지는 않는지요? 연단을 받을 때에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마음 중심에서 모든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실 수 있는 참된 도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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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넣어 보세요.
① 모세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 )받는 것을 택했다.
② 모세는 ( )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중심에서 ( )했다.
2.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죽였던 모세가 철저히 낮아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연단이 왔을 때 어떠한 마음으로 받으시나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66~7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십보라’는 누구인가?(출 2:21)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르우엘_출 2:18, 호밥_삿 4:11)의 딸이다. 미디안으로 도피한 모세와 결혼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 두 아들을 낳았다.
십보라는 곱고 상냥하며 너그럽고 이해심이 많으며, 질투심이 없는 여인이었다. 모세를 사랑하고 그의 말에 잘 순종하였으며, 남편이 선한 것만 보고 선한 것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모세는 이처럼 착하고 온유한 십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16-05-27
제22과최고의 선과 사랑을 지닌 사도 바울
롬 9:1~3
읽을말씀 : 롬 9:1~3 | 외울말씀 : 고후 12:1 ㅣ 참고 말씀:고후 11:28~29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룬 사도 바울의 마음과 행함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끊임없이 탐구하는 성격으로 답을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궁구하며 고민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아가 단단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호탕한 성격도 있었지만 늘 계산과 생각이 앞섰지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 자신이 옳다 여기던 것이 참이 아님을 깨닫자 이를 단번에 깨뜨려 버렸습니다.
주님을 만나 변화된 후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 한 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았습니다. 모진 고난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해도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을 더욱 진하게 올렸습니다.
1.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도 바울
주님을 사랑하면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사랑하되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호소하셨습니다(요 19:28). 그러니 진정 주님을 사랑하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29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고 잘 나와 있지요.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하며 애통하였지요(빌 3:18). 또한 여러 지역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영혼들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빚진 자의 심정으로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심정이 로마서 9장 1~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곧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유대인 중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23:12~13).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중심에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했습니다.
누구보다 지옥의 참혹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 말하고 있지요. 이를 통해 영혼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2.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마음을 지닌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큰 권능으로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걷게 하는가 하면, 독사에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권능을 행하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겸손히 고백합니다.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닌 바울은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성결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체험했습니다. 천국의 낙원을 보았고, 영의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 그리고 천국에 대해 밝히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신령한 체험을 하고 충만하다고 해서 자랑하고자 하지 않았지요.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간직하였다가 은혜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들려주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으면 어떤 영적인 깨달음을 받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다.’ 자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선한 사람은 기도 중에 어떤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두고 ‘왜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알려 주셨을까?’ 하고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지요.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처럼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이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혔기 때문입니다.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것도 혹여 실족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되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여러 은사와 은혜가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지요.
혹여 여러분은 “내가 기도해 보니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쉽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성령의 음성과 주관, 인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마치 자신만 특별한 것처럼 들레는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결코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기에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커져만 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고, 권능도 주셔서 크게 사용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최고의 선을 이루어 마지막 때 영광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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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채워 보세요.
1.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으로 ( )을 사랑하되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 )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2. 사도 바울은 큰 ( )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 )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여 큰 권능을 내려 주셨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59~6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영적 의미
하나님 섭리 가운데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피를 다 쏟아 탈진하신 상태였기에 심한 갈증을 겪으셔야 했다. 그러나 갈증을 참지 못해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영혼들을 찾기 위한 목마름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호소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한다. 예수님의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드린다는 것은 바로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을 이룬 사도 바울의 마음과 행함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끊임없이 탐구하는 성격으로 답을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궁구하며 고민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아가 단단하게 형성되었습니다. 호탕한 성격도 있었지만 늘 계산과 생각이 앞섰지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 자신이 옳다 여기던 것이 참이 아님을 깨닫자 이를 단번에 깨뜨려 버렸습니다.
주님을 만나 변화된 후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 한 번 받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았습니다. 모진 고난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해도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향을 더욱 진하게 올렸습니다.
1.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도 바울
주님을 사랑하면 날이 갈수록 주님처럼 영혼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사랑하되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우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또한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시며 영혼 구원에 대한 간절한 심정을 호소하셨습니다(요 19:28). 그러니 진정 주님을 사랑하면 죄로 인해 사망을 향해 가는 영혼들을 긍휼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 사랑이 얼마나 컸던지 빌립보서 1장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고백합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모진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에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이 아니라 오직 교회와 성도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8~29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고 잘 나와 있지요.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하며 애통하였지요(빌 3:18). 또한 여러 지역의 교회를 다니면서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진리 안에 살도록 밤낮 눈물로 훈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영혼들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랑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빚진 자의 심정으로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심정이 로마서 9장 1~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여기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란 사도 바울의 육적인 일가친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곧 바울을 핍박하고 훼방했던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유대인 중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23:12~13).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을 위해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중심에서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고백했습니다.
누구보다 지옥의 참혹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 말하고 있지요. 이를 통해 영혼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2.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마음을 지닌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큰 권능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영광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큰 권능으로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걷게 하는가 하면, 독사에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권능을 행하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거나 높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겸손히 고백합니다.
이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닌 바울은 날마다 죽어지는 삶을 통해 성결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체험했습니다. 천국의 낙원을 보았고, 영의 깊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님, 그리고 천국에 대해 밝히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신령한 체험을 하고 충만하다고 해서 자랑하고자 하지 않았지요. 깊은 영의 말씀들을 마음에 간직하였다가 은혜 받을 만한 사람에게는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들려주고,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으면 어떤 영적인 깨달음을 받거나 환상을 보고, 비밀한 말씀을 들으면 자신을 들레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다.’ 자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선한 사람은 기도 중에 어떤 깨달음이 왔다면 그것을 마음에 두고 ‘왜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알려 주셨을까?’ 하고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영안이 열려 무엇을 보아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영으로 정진해 들어가려 하지요. 깊고 비밀한 영의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어찌하든 자신이 변화되고자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처럼 깊은 계시를 받으며 하나님과 깊이 교통을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마음의 바탕 위에 오래 참음과 절제의 열매가 맺혔기 때문입니다. 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것도 혹여 실족당할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절제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려 줌으로 성도들에게 소망을 주고자 하되 자신을 자랑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령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여러 은사와 은혜가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임을 늘 중심에서 인정했지요.
혹여 여러분은 “내가 기도해 보니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 쉽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성령의 음성과 주관, 인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마치 자신만 특별한 것처럼 들레는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습니다. 결코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기에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의를 철저히 깨뜨린 후에는 아무리 크고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도 늘 중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권능을 행할수록 자신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커져만 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중심을 찾아 은사도 주고, 권능도 주셔서 크게 사용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최고의 선을 이루어 마지막 때 영광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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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알맞은 말을 채워 보세요.
1.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으로 ( )을 사랑하되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 )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2. 사도 바울은 큰 ( )과 깊은 계시를 받았다 해도 모든 ( )을 온전히 주님께 돌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인정하여 큰 권능을 내려 주셨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59~6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 하신 영적 의미
하나님 섭리 가운데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피를 다 쏟아 탈진하신 상태였기에 심한 갈증을 겪으셔야 했다. 그러나 갈증을 참지 못해 “내가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피를 흘림으로 목이 마르니 내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영혼들을 찾기 위한 목마름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호소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주님의 피 값을 찾아 드려야 한다. 예수님의 피 값을 찾아 목마름을 해소해 드린다는 것은 바로 사망의 길로 가는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2016-05-20
제21과이방인 선교에 앞장선 사도 바울
고전 15:9~10
읽을말씀 : 고전 15:9~10 | 외울말씀 : 고전 15:10 ㅣ참고 말씀:벧전 1:7
교육목표 : 한 번 받은 은혜에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바울은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자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생명을 다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신약 성경 27권 중 14권을 기록하는 등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했지요.
1.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사도 바울
다소(터키의 타르수스) 출신인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던 그는 의가 강하여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상대를 누르고 변론하기를 즐겼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던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라는 기독교인들의 말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이 강한 데다 우월의식과 자존심도 남달리 셌습니다. 하지만 한 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치 않고 그 길을 가는 중심이었습니다. 이를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일생일대 특별한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십니다. 바로 주님께서 직접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원정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찬란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더니 빛 가운데 음성이 들렸지요. “사울(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너무 놀라 땅에 엎드린 바울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전해 듣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것을 깨달은 바울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여 이를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은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신 것은 물론, 귀한 사명까지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이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보면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끝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도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며, 과거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어떤 사람은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지만 과연 바울이 겪은 고난을 받는다면 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 할 수 없는 사소한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고 헌신했는데 막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축복이 오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혹여 마음이 슬퍼지거나,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며 자포자기하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사람에게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이 온다면 얼마나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그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감사의 고백만 나왔습니다. ‘내 생애를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도 아니요,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그리운 주님을 이제 곧 뵈올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가 모진 고난 중에나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감사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고, 결국 그는 대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변함없이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각 사람의 선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합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감사할 수 있지요.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일평생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는 큰 은혜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 받을 뻔했는데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었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사도 바울은 잠시 받는 믿음의 시련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은혜와 감사가 변치 않으며, 생명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함으로 하나님께 선하다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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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한 번도 그 ( )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다. 오직 주의 ( )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 )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감사의 고백만 나왔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잡아가두며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바울이 어떤 계기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을까요?
3.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받은 고난이 어떠했는지 고린도후서 11:23~27을 통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52~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바울 서신’이란?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을 말한다.
신약 성경 27권에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14권이 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그중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기에 옥중서신이라 한다.
교육목표 : 한 번 받은 은혜에 변치 않았던 사도 바울의 선을 본받아 마지막 때 성령의 도구로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바울은 신약 시대 최고의 사도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자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생명을 다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신약 성경 27권 중 14권을 기록하는 등 세계 선교의 기반을 마련했지요.
1.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개치 않는 중심을 지닌 사도 바울
다소(터키의 타르수스) 출신인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던 그는 의가 강하여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의로써 상대를 누르고 변론하기를 즐겼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던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라는 기독교인들의 말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옳다는 생각이 강한 데다 우월의식과 자존심도 남달리 셌습니다. 하지만 한 번 옳은 것을 깨우치면 변치 않고 그 길을 가는 중심이었습니다. 이를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일생일대 특별한 은혜의 체험을 허락하십니다. 바로 주님께서 직접 만나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원정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찬란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더니 빛 가운데 음성이 들렸지요. “사울(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너무 놀라 땅에 엎드린 바울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바울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통하여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전해 듣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것을 깨달은 바울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여 이를 부인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행 9:22).
2.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변치 않은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자, 마치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처럼 여겨졌습니다. 자신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신 것은 물론, 귀한 사명까지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수록 더욱 깊고 진한 감사의 고백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고난이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보면 잘 나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도록 충성하며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마음 중심에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가 끝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무리 깊은 감옥이나 파선의 위험도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채찍질로 여기며, 과거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어떤 사람은 “나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지금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지만 과연 바울이 겪은 고난을 받는다면 그처럼 중심에서 감사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난에 비하면 고난이라고 할 수 없는 사소한 어려움에도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고 헌신했는데 막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축복이 오지 않을 때는 어떻습니까? 혹여 마음이 슬퍼지거나,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며 자포자기하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사람에게 사도 바울이 겪은 고난이 온다면 얼마나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그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순교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감사의 고백만 나왔습니다. ‘내 생애를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하고 착잡한 마음이나 회한이 든 것도 아니요, 두려움으로 인한 경직된 심정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그리운 주님을 이제 곧 뵈올 수 있다는 마음에 기쁨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앞에서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사도 바울은 소망으로 가득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가 모진 고난 중에나 생명을 잃는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선했기 때문입니다.
3.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감사한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고난을 통해 자신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를 올렸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마음껏 연단하실 수 있었고, 결국 그는 대사도로서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이루셨는지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변함없이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각 사람의 선과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지극히 작은 일에도 감사합니다.
감사할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감사할 수 있지요.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고난을 받는다 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일평생 감사해도 다 갚을 수 없는 큰 은혜와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세세토록 끔찍한 지옥 불에서 고통 받을 뻔했는데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었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지요. 사도 바울은 잠시 받는 믿음의 시련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갚아 주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처럼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음으로 중심에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주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은혜와 감사가 변치 않으며, 생명 다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함으로 하나님께 선하다 인정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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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말을 써 보세요.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한 번도 그 ( )에 감사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고, 뜨거운 사랑이 식지 않았다. 오직 주의 ( )을 전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종국에는 ( )의 자리에 이를 때에도 감사의 고백만 나왔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잡아가두며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바울이 어떤 계기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을까요?
3.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받은 고난이 어떠했는지 고린도후서 11:23~27을 통해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52~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바울 서신’이란?
신약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을 말한다.
신약 성경 27권에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14권이 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가 있다. 그중에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것이기에 옥중서신이라 한다.
2016-05-13
제20과페르시아 제국의 총리 다니엘
단 6:21~22
읽을말씀 : 단 6:21~22 | 외울말씀 : 잠 17:9 ㅣ 참고 말씀:단 1:17~21
교육목표 : 자신을 모함해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지닌 성도가 되게 한다.
남유다 출신 다니엘은 소년 시절에 나라가 패망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한결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타협하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다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선하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는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신임을 받아 바벨론의 모든 도를 다스렸으며(단 2:48~49), 벨사살 왕 때에는 바벨론 제국의 셋째 치리자가 되었습니다(단 5:29).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그는 페르시아 제국 다리오 왕의 인정을 받아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선에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지요.
1. 자신을 모함해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다니엘
다니엘 6장을 보면 다리오 왕은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세우고 그 위에 총리 셋을 두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그는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보다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지요.
왕은 모든 일에 흠이 없는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해 계략을 꾸밉니다. 먼저 그들은 국사에 대해 고소할 틈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흠이나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지요. 결국 악한 무리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고소할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을 찾아가 왕을 위하는 척하며 ‘이제부터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제정하게 합니다. 왕의 어인까지 찍어 누구도 번복하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준비했지요(단 6:7~9).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 전국의 박수와 술객보다 열 배나 뛰어나고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았습니다(단 1:17~21). 그러니 시기하는 무리들이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쯤은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기에 얼마든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잠잠히 있었고, 전과 다름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만일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의 계략을 왕에게 고한다면 그들이 해를 입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이었기에 왕에게 고하지 않았고 악한 무리에게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설령 자신이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그들을 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혹여 상대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 말한다면 결코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자연히 걸러지게 되지요. 이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자신이 직접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2.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선한 말로 위로하는 다니엘
하나님을 향한 다니엘의 신앙은 그를 시기하는 악한 사람들이라도 인정할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변함없이 기도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이를 이용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과연 다니엘은 예상한 대로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악한 무리는 즉시 왕에게 고소합니다. 다리오 왕은 그제야 그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한 계략임을 깨닫고, 해가 질 때까지 심히 근심합니다. 하지만 이미 어인을 찍었으니 왕이라 해도 다니엘을 구할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왕이 머뭇거리자 악한 무리는 또다시 왕에게 나아가 왕이 세운 금령과 법도는 변개치 못할 것이니 신속히 규례대로 시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으라고 명한 후,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위로합니다.
이를 통해 다니엘이 평소 왕에게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잘 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총애하는 신하를 지키지 못하고 사자 굴에 내어줘야 했기에 비통한 마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진 그날, 왕은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고 기악을 그쳤으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이튿날 새벽, 왕은 급히 사자 굴에 가서 슬피 다니엘을 부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단 6:20) 왕은 다니엘이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상식대로라면 다니엘은 이미 사자 밥이 되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웬일입니까?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는 다니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어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구절절 선한 말로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혹여 다니엘이 왕에 대한 서운함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왕은 어찌하여 간신들의 말을 듣고 저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까? 보소서, 나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에서 구하셨나이다.” 하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혹여라도 다니엘이 이렇게 말했다면 왕은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요.
그러나 다니엘은 원망과 설움이 섞인 말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왕이 얼마나 슬퍼했을지 알기에 왕의 마음을 헤아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요. 이에 새벽같이 달려온 왕에게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안심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를 전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다니엘과 같은 선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가령, 어떤 일을 진행하는데 내 의견이 수용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결과가 좋으면 괜찮은데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그럴 때 상대에게 힘을 주는 말,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겠는지요?
아니면 “그거 보십시오. 제 말대로 하지 않더니 일이 잘못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상대를 무안하게 하지는 않겠는지요? 이런 말은 상대에게 더 큰 짐을 안겨 줄 뿐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텐데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상대를 민망케 한다면 삼가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자연히 마음에서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며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해 줍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 직장에서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가 먼저 나를 선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죽음도 피해갈 수 있습니다. 혹여 어떤 시험이나 어려움이 온다 해도 그것은 더욱 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잠시 허락된 과정일 뿐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행실과 고백으로 삶에 축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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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니엘은 이른 새벽 사자 굴로 달려온 왕에게 뭐라고 고백했을까요?
2. 다니엘은 악한 자들이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고 얼마든지 왕에게 알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45~5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다리오 왕은 누구일까? (다니엘 5:31)
원래 메대와 페르시아는 북과 남으로 나누어진 나라로, 메대가 영토와 인구, 군사와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페르시아를 압도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과 메대의 공주가 결혼하면서 혼인 동맹이 맺어졌고, 그 사이에서 고레스가 태어난다. 사실 이때까지는 동맹이라 하지만 페르시아는 메대의 속국에 가까웠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고레스가 왕이 되면서부터 국력이 성장하여 마침내 메대를 정복한다. 이때 고레스는 세계 정복을 위해서는 메대의 힘이 필요했기에 메대 왕을 극진히 대우해 주며 동맹을 맺음으로 강대국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고레스는 최강국인 바벨론을 정복한 후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제국을 세운다. 그 기간은 2년 정도로 짧았다. 이때 고레스는 자신의 외삼촌이기도 한 메대 왕을 연합제국의 지도자로 세우는데 그가 바로 다니엘을 총애했던 다리오 왕이다. 남은 정복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고레스는 통치권을 다리오로부터 이양받아 2년간의 연합제국의 막을 내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펼친다.
교육목표 : 자신을 모함해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을 지닌 성도가 되게 한다.
남유다 출신 다니엘은 소년 시절에 나라가 패망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신앙은 한결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자신도 철저히 싫어했고, 목숨을 잃을지언정 타협하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다니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선하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좇아 행하는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큰 명예와 권세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신임을 받아 바벨론의 모든 도를 다스렸으며(단 2:48~49), 벨사살 왕 때에는 바벨론 제국의 셋째 치리자가 되었습니다(단 5:29).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그는 페르시아 제국 다리오 왕의 인정을 받아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선에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지요.
1. 자신을 모함해 죽이려는 상대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다니엘
다니엘 6장을 보면 다리오 왕은 전국에 120명의 방백을 세우고 그 위에 총리 셋을 두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그는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총리들과 방백들보다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지요.
왕은 모든 일에 흠이 없는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총리들과 방백들이 다니엘을 시기해 계략을 꾸밉니다. 먼저 그들은 국사에 대해 고소할 틈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흠이나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지요. 결국 악한 무리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고소할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들은 다리오 왕을 찾아가 왕을 위하는 척하며 ‘이제부터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다’는 금령을 제정하게 합니다. 왕의 어인까지 찍어 누구도 번복하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준비했지요(단 6:7~9).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 전국의 박수와 술객보다 열 배나 뛰어나고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았습니다(단 1:17~21). 그러니 시기하는 무리들이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쯤은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기에 얼마든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잠잠히 있었고, 전과 다름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만일 자신을 모함하는 이들의 계략을 왕에게 고한다면 그들이 해를 입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마음이었기에 왕에게 고하지 않았고 악한 무리에게 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설령 자신이 생명을 잃게 될지언정 그들을 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혹여 상대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 말한다면 결코 선하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선해지는 만큼 상대에게 해가 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자연히 걸러지게 되지요. 이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입니다.
‘이 말은 지금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거나 어떤 뜻을 꼭 전달해야 할 경우에는 선한 표현으로 돌려서 말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와는 달리 자신이 직접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친분 있는 윗사람에게 상대를 염려하는 척하면서 상대의 약점이나 단점을 아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이 선하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게 됩니다(잠 17:9).
2.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선한 말로 위로하는 다니엘
하나님을 향한 다니엘의 신앙은 그를 시기하는 악한 사람들이라도 인정할 정도로 신실하고 굳건했습니다. 다니엘이 금령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변함없이 기도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이를 이용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과연 다니엘은 예상한 대로 하나님 앞에 변함없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악한 무리는 즉시 왕에게 고소합니다. 다리오 왕은 그제야 그 금령이 다니엘을 넘어뜨리기 위한 계략임을 깨닫고, 해가 질 때까지 심히 근심합니다. 하지만 이미 어인을 찍었으니 왕이라 해도 다니엘을 구할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왕이 머뭇거리자 악한 무리는 또다시 왕에게 나아가 왕이 세운 금령과 법도는 변개치 못할 것이니 신속히 규례대로 시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으라고 명한 후, 왕은 다니엘에게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위로합니다.
이를 통해 다니엘이 평소 왕에게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잘 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총애하는 신하를 지키지 못하고 사자 굴에 내어줘야 했기에 비통한 마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진 그날, 왕은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고 기악을 그쳤으며 잠도 이루지 못했지요.
이튿날 새벽, 왕은 급히 사자 굴에 가서 슬피 다니엘을 부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단 6:20) 왕은 다니엘이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상식대로라면 다니엘은 이미 사자 밥이 되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웬일입니까?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라는 다니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어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구절절 선한 말로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혹여 다니엘이 왕에 대한 서운함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나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왕은 어찌하여 간신들의 말을 듣고 저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까? 보소서, 나의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사자들의 입에서 구하셨나이다.” 하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혹여라도 다니엘이 이렇게 말했다면 왕은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요.
그러나 다니엘은 원망과 설움이 섞인 말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사자 굴에 던져진 후, 왕이 얼마나 슬퍼했을지 알기에 왕의 마음을 헤아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요. 이에 새벽같이 달려온 왕에게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안심시킨 후 하나님의 역사를 전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다니엘과 같은 선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가령, 어떤 일을 진행하는데 내 의견이 수용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결과가 좋으면 괜찮은데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그럴 때 상대에게 힘을 주는 말,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말을 할 수 있겠는지요?
아니면 “그거 보십시오. 제 말대로 하지 않더니 일이 잘못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상대를 무안하게 하지는 않겠는지요? 이런 말은 상대에게 더 큰 짐을 안겨 줄 뿐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텐데 이렇게 대놓고 말한다면 얼마나 민망하겠습니까?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상대를 민망케 한다면 삼가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자연히 마음에서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며 민망하지 않도록 배려해 줍니다. 교회 안에서나 가정, 직장에서 이처럼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긴다면 화평이 깨지거나 불목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가 먼저 나를 선대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상대를 선대한다면 가는 곳마다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선한 마음을 가진다면 악한 자가 만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죽음도 피해갈 수 있습니다. 혹여 어떤 시험이나 어려움이 온다 해도 그것은 더욱 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잠시 허락된 과정일 뿐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행실과 고백으로 삶에 축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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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니엘은 이른 새벽 사자 굴로 달려온 왕에게 뭐라고 고백했을까요?
2. 다니엘은 악한 자들이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고 얼마든지 왕에게 알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감추었던 만나 1> 책자 45~5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다리오 왕은 누구일까? (다니엘 5:31)
원래 메대와 페르시아는 북과 남으로 나누어진 나라로, 메대가 영토와 인구, 군사와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페르시아를 압도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과 메대의 공주가 결혼하면서 혼인 동맹이 맺어졌고, 그 사이에서 고레스가 태어난다. 사실 이때까지는 동맹이라 하지만 페르시아는 메대의 속국에 가까웠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고레스가 왕이 되면서부터 국력이 성장하여 마침내 메대를 정복한다. 이때 고레스는 세계 정복을 위해서는 메대의 힘이 필요했기에 메대 왕을 극진히 대우해 주며 동맹을 맺음으로 강대국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고레스는 최강국인 바벨론을 정복한 후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제국을 세운다. 그 기간은 2년 정도로 짧았다. 이때 고레스는 자신의 외삼촌이기도 한 메대 왕을 연합제국의 지도자로 세우는데 그가 바로 다니엘을 총애했던 다리오 왕이다. 남은 정복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고레스는 통치권을 다리오로부터 이양받아 2년간의 연합제국의 막을 내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