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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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4
제15과부활의 영적인 의미
요 14:6
읽을말씀 : 요 14:6 | 외울말씀 : 고전 15:20 l 참고 말씀: 살전 4:16~17
교육목표 : 신앙생활의 핵심요소인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부활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시종 가난한 길을 가셨고, 마침내 채찍에 맞으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무 흠도 티도 없으신 분이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었기에 온 인류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셨기에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부활과 영생, 천국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부활은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죄인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류를 건져 주셨습니다. 즉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지만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지요.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즉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당할 사망은 육의 사망, 곧 몸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몸의 죽음과 함께 영적인 사망 곧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망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참 생명을 주셨기에 영원히 죽지 않고 천국에서 세세토록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 중에도 수명이 다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했습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를 믿다가 육의 수명이 다해 장사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 살아서 주를 맞는 성도들보다 앞서 부활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하신 대로, 죽어 장사되었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해 영혼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곧 육의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2.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이 그 증거이지요. 예수님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고 영생과 천국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지요. 또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됨을 증명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셨기에 사망에 전혀 매이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아무 죄도 없으면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계획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이 되었고, 죄인인 아담에게서 난 모든 후손들 또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지극히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죄인들의 손에 내어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비록 인생들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독생자를 희생시켜 죄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실 만큼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두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나눌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천국과 영생을 주시고 참사랑을 나누기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때가 이르매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을 이루심으로 그 사랑을 분명히 나타내셨지요.
이러한 참사랑은 약 2천 년이 흐른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베풀고 계신 참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지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대로 살면, 점차 하나님의 신령한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죄에 대하여는 철저히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지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랑은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임을 확증하셨습니다.
3. 부활은 ‘참 믿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때로는 애매히 핍박을 받고, 생명의 위협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하나님께 외면당하여 철저히 혼자가 되시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에는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큰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을 믿으셨지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 안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부활을 허락하시고 천국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잠시 잠깐 머물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기에 날마다 죄를 벗으며 성결을 이루기 위해 힘씁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며, 그 충성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혹여 고난과 핍박이 올 때에도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시고, 그날에 주실 영광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새기심으로 부활의 기쁨이 샘솟아 나며, 더 확고한 믿음과 소망으로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을 침노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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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 세 가지를 써 보세요.
첫째, ( )
둘째,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한다.
셋째, ( )
2.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은 누구실까요?
3.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여 죽었을 때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표현했나요?
* 금주 과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참혹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묵상하며 한끼 이상 금식과 감사의 기도 드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부활체’란
주님의 공중 강림 때에 영혼이 썩지도 죽지도 않는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부활체”라고 하며, 이 부활체를 입고 7년 혼인 잔치를 한 후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천 년을 보내게 된다. 부활체를 입으면 부활하신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 어떤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요 20:19). 손으로 만져지기도 하고 숨을 내쉬는가 하면, 음식도 먹고 마실 수 있는데(눅 24:39, 42~43) 섭취한 음식은 즉시 분해되어 호흡과 함께 배출되므로 화장실이 필요없다.
교육목표 : 신앙생활의 핵심요소인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부활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시종 가난한 길을 가셨고, 마침내 채찍에 맞으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히 돌아가셨습니다.
아무 흠도 티도 없으신 분이 온갖 조롱과 멸시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이 있었기에 온 인류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죄도 없으셨기에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의 부활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부활과 영생, 천국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부활은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죄인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기록된 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인류를 건져 주셨습니다. 즉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저주받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지만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지요.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신 대로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압니다. 즉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당할 사망은 육의 사망, 곧 몸의 죽음만이 아닙니다. 몸의 죽음과 함께 영적인 사망 곧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망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참 생명을 주셨기에 영원히 죽지 않고 천국에서 세세토록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원받은 성도 중에도 수명이 다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했습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를 믿다가 육의 수명이 다해 장사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 살아서 주를 맞는 성도들보다 앞서 부활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하신 대로, 죽어 장사되었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해 영혼과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곧 육의 죽음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려올라가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2.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이 그 증거이지요. 예수님은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신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시고 영생과 천국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지요. 또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됨을 증명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셨기에 사망에 전혀 매이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아무 죄도 없으면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계획하신 분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은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영계의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육의 사람이 되었고, 죄인인 아담에게서 난 모든 후손들 또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만세 전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지극히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죄인들의 손에 내어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비록 인생들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독생자를 희생시켜 죄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실 만큼 인생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두신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나눌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천국과 영생을 주시고 참사랑을 나누기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때가 이르매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 고난과 부활 사건을 이루심으로 그 사랑을 분명히 나타내셨지요.
이러한 참사랑은 약 2천 년이 흐른 지금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베풀고 계신 참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 마음에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이 살아나지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대로 살면, 점차 하나님의 신령한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죄에 대하여는 철저히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지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랑은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수도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랑이 참임을 확증하셨습니다.
3. 부활은 ‘참 믿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셨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섭리를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때로는 애매히 핍박을 받고, 생명의 위협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는 하나님께 외면당하여 철저히 혼자가 되시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에는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과 함께 큰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을 믿으셨지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 안에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부활을 허락하시고 천국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잠시 잠깐 머물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기에 날마다 죄를 벗으며 성결을 이루기 위해 힘씁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며, 그 충성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혹여 고난과 핍박이 올 때에도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실 하나님을 굳게 믿으시고, 그날에 주실 영광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새기심으로 부활의 기쁨이 샘솟아 나며, 더 확고한 믿음과 소망으로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을 침노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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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에 담긴 영적인 의미 세 가지를 써 보세요.
첫째, ( )
둘째, 부활은 참사랑을 의미한다.
셋째, ( )
2.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은 누구실까요?
3.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하여 죽었을 때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표현했나요?
* 금주 과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참혹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묵상하며 한끼 이상 금식과 감사의 기도 드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부활체’란
주님의 공중 강림 때에 영혼이 썩지도 죽지도 않는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부활체”라고 하며, 이 부활체를 입고 7년 혼인 잔치를 한 후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천 년을 보내게 된다. 부활체를 입으면 부활하신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 어떤 공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요 20:19). 손으로 만져지기도 하고 숨을 내쉬는가 하면, 음식도 먹고 마실 수 있는데(눅 24:39, 42~43) 섭취한 음식은 즉시 분해되어 호흡과 함께 배출되므로 화장실이 필요없다.
2017-04-07
제14과순전
마 12:18~21
읽을말씀 : 마 12:18~21 | 외울말씀 : 마 12:20 l 참고 말씀: 욥 1:1
교육목표 :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다투거나 들레지 않는 순전한 마음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므로 누가 선한지 악한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욥의 중심을 보시고 ‘순전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욥 1:1)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순전의 영적인 의미
순전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하고 완전함’입니다. 순전한 사람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말이나 행동에 덕이 있습니다. 설령, 해로운 일을 만나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것을 선으로 수용하지요. 따라서 순전의 영적인 의미는 ‘행함으로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 불릴 정도로 물질과 명예, 자녀와 건강 등 많은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재난으로 인해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말지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욥은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으며 순전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욥이 악창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자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친구들과 변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악의 모습이 있는 욥을 하나님께서는 왜 순전하다 하셨을까요? 당시는 성령이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이므로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욥은 행위로 죄를 짓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선행을 많이 쌓았기에 ‘순전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물론 마음 안에 있는 죄성까지 온전히 버리길 원하십니다. 마음에 할례하여 본성 속의 악까지 버려야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되려면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예수님의 순전한 마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면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식물의 이파리가 상하면 아름답지 못하고 주변 경관을 해치기 때문에 잘라내거나 가지 자체를 쳐버립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꺾어 버리려고 하지요. 부부간이나 부모 자녀 간 또는 이웃 사이나 직장 동료 간, 교회 안에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원수를 맺으며 각박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상한 갈대와 같은 영혼이라 할지라도 꺾지 않고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악으로 나온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도 버리지 않고 진리로 깨우쳐 주시며 변화되기까지 인내하셨습니다. 병들고 불쌍한 영혼들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며 구원하려 하셨지요. 이처럼 순전한 사람은 악으로 가득 찬 사람도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리고자 합니다.
둘째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아야 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히 물들어 영혼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살려내고자 하셨습니다.
심지는 양초나 등잔, 석유 난로에 실이나 헝겊을 꽂아 불을 붙이는 부분입니다. 심지가 꺼져간다면 불이 곧 꺼진다는 신호이지만 아직 불씨는 남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것은 악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려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죄를 범하고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아 성령이 소멸되어 가는 경우라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오래 참음과 양선의 열매와 같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가지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 주고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멀리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며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이 있지요. 믿음이 연약하여 시험 환난에 넘어져 혼자서는 다시 교회에 나올 영적인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악으로 주변 사람을 어렵게 했다가 민망하고 부끄러워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영혼이라도 먼저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뒤처지는 사람 중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더 악을 발하기도 하고 앞서가는 사람을 시기하여 험담하는 이도 있습니다. 바로 꺼져가는 심지가 나쁜 냄새나 그을음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주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헤아려 품어 줍니다. 그러지 않고 ‘저렇게 악하니 당연히 뒤처질 수밖에 없지.’ 하며 품지 않는다면 꺼져가는 심지를 불어 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그들의 마음까지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순전한 마음입니다.
셋째로, 다투거나 들레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만나도 다투거나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하며 모함하고 죽이려 하였지만 맞서 싸우지 않으셨지요. 오직 선한 지혜로 그들을 일깨워 주고 피해야 할 자리는 피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심문받으실 때도 잠잠하셨지요.
우리가 믿음이 적을 때는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이 생기면 혈기 내고 언성을 높이기도 합니다. 다툼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품지 못한 작은 그릇이고 부딪히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자기적인 의와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악을 빨리 벗어야 하지요.
예수님은 들레지도 않고 모든 행함이 거룩하고 깨끗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기에 얼마든지 들레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히 행하시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한 일을 누가 알아주기 원하며 들레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선한 일, 좋은 일을 드러나도록 역사하십니다.
3. 순전한 사람이 받는 축복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고 양보하고 섬기며 모든 것을 선으로 행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소유가 많아져 그들의 목자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지요. 자기 유익을 좇아 더 좋은 쪽을 택한 롯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구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투거나 들레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양보하며 살았지만 손해 보기는커녕 오히려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가는 곳마다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 땅의 모든 복을 누렸으며,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전한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다투거나 들레는 일도 없이 화평하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고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선을 행하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과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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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2. 순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①
②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아야 한다.
③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83~19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오래 참음’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을 말한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면 어떠한 사람도 이해하고 품으며, 아무런 감정이 없기 때문에 용서한다든지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없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에 해당된다.
가령,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이다.
나아가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과 애통, 수고도 따르게 된다.
교육목표 :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다투거나 들레지 않는 순전한 마음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이므로 누가 선한지 악한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욥의 중심을 보시고 ‘순전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욥 1:1)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순전의 영적인 의미
순전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하고 완전함’입니다. 순전한 사람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말이나 행동에 덕이 있습니다. 설령, 해로운 일을 만나도 악으로 갚지 않고 모든 것을 선으로 수용하지요. 따라서 순전의 영적인 의미는 ‘행함으로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 불릴 정도로 물질과 명예, 자녀와 건강 등 많은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재난으로 인해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말지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욥은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으며 순전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욥이 악창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자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친구들과 변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악의 모습이 있는 욥을 하나님께서는 왜 순전하다 하셨을까요? 당시는 성령이 오시기 전인 구약 시대이므로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욥은 행위로 죄를 짓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선행을 많이 쌓았기에 ‘순전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행위는 물론 마음 안에 있는 죄성까지 온전히 버리길 원하십니다. 마음에 할례하여 본성 속의 악까지 버려야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되려면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예수님의 순전한 마음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러면 진정 순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식물의 이파리가 상하면 아름답지 못하고 주변 경관을 해치기 때문에 잘라내거나 가지 자체를 쳐버립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꺾어 버리려고 하지요. 부부간이나 부모 자녀 간 또는 이웃 사이나 직장 동료 간, 교회 안에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무시하고 외면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원수를 맺으며 각박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상한 갈대와 같은 영혼이라 할지라도 꺾지 않고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악으로 나온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도 버리지 않고 진리로 깨우쳐 주시며 변화되기까지 인내하셨습니다. 병들고 불쌍한 영혼들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며 구원하려 하셨지요. 이처럼 순전한 사람은 악으로 가득 찬 사람도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리고자 합니다.
둘째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아야 합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히 물들어 영혼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살려내고자 하셨습니다.
심지는 양초나 등잔, 석유 난로에 실이나 헝겊을 꽂아 불을 붙이는 부분입니다. 심지가 꺼져간다면 불이 곧 꺼진다는 신호이지만 아직 불씨는 남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것은 악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려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죄를 범하고 회개의 영이 오지 않아 성령이 소멸되어 가는 경우라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오래 참음과 양선의 열매와 같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가지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 주고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멀리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며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이 있지요. 믿음이 연약하여 시험 환난에 넘어져 혼자서는 다시 교회에 나올 영적인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악으로 주변 사람을 어렵게 했다가 민망하고 부끄러워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영혼이라도 먼저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뒤처지는 사람 중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더 악을 발하기도 하고 앞서가는 사람을 시기하여 험담하는 이도 있습니다. 바로 꺼져가는 심지가 나쁜 냄새나 그을음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주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헤아려 품어 줍니다. 그러지 않고 ‘저렇게 악하니 당연히 뒤처질 수밖에 없지.’ 하며 품지 않는다면 꺼져가는 심지를 불어 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그들의 마음까지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순전한 마음입니다.
셋째로, 다투거나 들레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만나도 다투거나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악한 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하며 모함하고 죽이려 하였지만 맞서 싸우지 않으셨지요. 오직 선한 지혜로 그들을 일깨워 주고 피해야 할 자리는 피하셨습니다. 또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심문받으실 때도 잠잠하셨지요.
우리가 믿음이 적을 때는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은 일이 생기면 혈기 내고 언성을 높이기도 합니다. 다툼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를 품지 못한 작은 그릇이고 부딪히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자기적인 의와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악을 빨리 벗어야 하지요.
예수님은 들레지도 않고 모든 행함이 거룩하고 깨끗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기에 얼마든지 들레고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히 행하시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한 일을 누가 알아주기 원하며 들레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선한 일, 좋은 일을 드러나도록 역사하십니다.
3. 순전한 사람이 받는 축복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고 양보하고 섬기며 모든 것을 선으로 행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소유가 많아져 그들의 목자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지요. 자기 유익을 좇아 더 좋은 쪽을 택한 롯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구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투거나 들레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양보하며 살았지만 손해 보기는커녕 오히려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가는 곳마다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이 땅의 모든 복을 누렸으며,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전한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다투거나 들레는 일도 없이 화평하고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베푸시고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선을 행하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순전한 마음으로 행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과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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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2. 순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①
②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말아야 한다.
③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83~19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오래 참음’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을 말한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면 어떠한 사람도 이해하고 품으며, 아무런 감정이 없기 때문에 용서한다든지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없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에 해당된다.
가령,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이다.
나아가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과 애통, 수고도 따르게 된다.
2017-03-31
제13과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갈 6:9
읽을말씀 : 갈 6:9 | 외울말씀 : 고전 13:4~7 l 참고 말씀: 룻 1:16~17
교육목표 :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행하여 룻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매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영계의 법칙 또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1. 끝까지 선을 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실 때에 어떤 사람이 어떻게 충성하며 어떻게 순교할지, 누가 자신을 팔 자인지 이미 그들의 마음 중심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고백했을 때도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마 26장).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계셨지만 그를 버리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든 깨닫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알려 주며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셨지요(요 6:64, 70~71). 자기를 팔거나 죽일 자인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와 동행하며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영의 마음을 이루지 못하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선을 행하다가도 열매가 보이지 않으니 ‘내가 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항상 변함없는 마음으로 끝까지 선을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며 축복하십니다.
2. 정한 마음을 소유한 룻
룻은 여호수아가 죽은 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치리하던 때에 모압에 살던 여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자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 결과 주변 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흉년이 들어 많은 어려움을 겪지요.
이때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두 아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합니다. 그런데 이주한 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지요. 과부가 된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거기 거한 지 10년쯤에 두 아들마저 죽고 맙니다.
온 가족이 기근을 피해 왔건만 집안의 모든 남자가 죽고 과부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구한 삶입니까. 이를 통해 우리가 깨우칠 점은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영적으로 하나님 품인데 나오미 가정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갔으니 이는 세상을 바라본 것이지요. 그러니 더 큰 어려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가세는 기울고 몹시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합니다. 그런데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가 마음에 걸려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지요. 아무 희망도 없이 과부로 살아야 할 며느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이에 오르바는 울며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돌아가라고 강권하자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 1:16~17)라고 단호히 말하지요.
3. 변함없이 선을 행하여 축복을 받은 룻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은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시어머니를 섬겼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삭을 주워 정성껏 시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시어머니의 말씀에도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마땅한 도리로 여기고 부지런히 섬겼습니다.
요즘은 부모를 모시는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하거나 고부간의 갈등으로 고통받는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룻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룻의 효성이 이처럼 지극했기에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 지역의 부유하고 신망을 받는 보아스도 룻에 대해 익히 알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그는 나오미 남편의 친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집안의 기업 무를 사람 중에 하나임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기업 무르기 법이 있습니다. 팔았던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회복시키거나 자녀 없이 죽은 사람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해 그의 미망인을 죽은 사람의 친척이 취하여 대를 잇게 하는 법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성읍 사람들이 다 아는 정숙한 여인임을 알고 있었기에 룻에게 기업 무를 사람의 책임을 행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기업 무를 사람으로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지만 그는 사랑이 없으므로 거절하였고, 그다음 차례인 보아스는 사랑이 있으므로 허락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의 조부 오벳입니다. 결국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룻의 마음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베들레헴에 온 이방 여인 룻이 어떻게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녀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 앞에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룻은 자기 앞날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데도 인내하며 선을 좇아 나갔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서 투기라든가 자랑하는 마음, 교만하거나 무례한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거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견뎠습니다. 룻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중심을 보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룻기 말씀을 통해 깨달을 점은 수많은 여인 중에서 룻에 대한 기록이 성경 66권 중 한 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룻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룻은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데도 나오미의 집안에 시집온 후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룻처럼 정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번 하나님을 믿었으면 변함이 없어야 하지요. 룻은 효성이 지극하며 사람의 도리를 다하여 홀로 된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자유와 젊음 등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시어머니를 붙좇아 끝까지 봉양하였으니 참으로 아름답고 정한 마음이지요. 오늘날 이러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금만 자기 생각이나 마음에 맞지 않아도 함께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룻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되면 누가 그 길을 가려 하겠습니까. 룻은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했기에 그 길이 고생임을 알면서도 마땅한 도리로 여기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이나 불행은 환경이나 조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에 달려 있지요. 룻이 대가를 바라고 선을 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변함없이 선을 행하지요.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여 간구와 기도에 응답받으며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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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이방 여인 룻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 안에 알맞은 이름을 써 보세요. (룻 4:18~22)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암미나답 → 나손 → 살몬 → ( ) → 오벳 → 이새 → ( )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73~18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업 무를 자’
기업을 되찾아 주는 사람, 기업을 구속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기업 무르기 법은 이스라엘 지파가 분배받은 기업(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이다.
기업 무를 자는 가난한 친척의 기업을 다시 사 주어야 했으며(레 25:25), 부당한 피해를 입은 친족을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민 35:12, 19, 21). 또 친족이 자녀가 없이 죽은 경우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신 25:5~6), 거절할 경우 그에 따른 대가를 받아야 했다(신 25:7~10). 기업 무를 자의 자격은 근족이어야 하며(룻 2:20), 기업 무를 능력도 있어야 했다(룻 2:1).
교육목표 :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행하여 룻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매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영계의 법칙 또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1. 끝까지 선을 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실 때에 어떤 사람이 어떻게 충성하며 어떻게 순교할지, 누가 자신을 팔 자인지 이미 그들의 마음 중심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고백했을 때도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마 26장).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계셨지만 그를 버리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든 깨닫고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알려 주며 끝까지 사랑으로 인도하셨지요(요 6:64, 70~71). 자기를 팔거나 죽일 자인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와 동행하며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면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일 것입니다.
이러한 영의 마음을 이루지 못하면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선을 행하다가도 열매가 보이지 않으니 ‘내가 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항상 변함없는 마음으로 끝까지 선을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며 축복하십니다.
2. 정한 마음을 소유한 룻
룻은 여호수아가 죽은 뒤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치리하던 때에 모압에 살던 여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가 죽자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져들고 맙니다. 그 결과 주변 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흉년이 들어 많은 어려움을 겪지요.
이때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두 아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합니다. 그런데 이주한 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지요. 과부가 된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거기 거한 지 10년쯤에 두 아들마저 죽고 맙니다.
온 가족이 기근을 피해 왔건만 집안의 모든 남자가 죽고 과부가 되었으니 얼마나 기구한 삶입니까. 이를 통해 우리가 깨우칠 점은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영적으로 하나님 품인데 나오미 가정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갔으니 이는 세상을 바라본 것이지요. 그러니 더 큰 어려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가세는 기울고 몹시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합니다. 그런데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가 마음에 걸려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지요. 아무 희망도 없이 과부로 살아야 할 며느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이에 오르바는 울며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돌아가라고 강권하자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 1:16~17)라고 단호히 말하지요.
3. 변함없이 선을 행하여 축복을 받은 룻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은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처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변함없이 시어머니를 섬겼지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삭을 주워 정성껏 시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시어머니의 말씀에도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마땅한 도리로 여기고 부지런히 섬겼습니다.
요즘은 부모를 모시는 문제로 형제간에 불화하거나 고부간의 갈등으로 고통받는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룻처럼 하나님을 믿음으로 도리를 좇는 선을 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룻의 효성이 이처럼 지극했기에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 지역의 부유하고 신망을 받는 보아스도 룻에 대해 익히 알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그는 나오미 남편의 친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기 집안의 기업 무를 사람 중에 하나임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기업 무르기 법이 있습니다. 팔았던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회복시키거나 자녀 없이 죽은 사람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해 그의 미망인을 죽은 사람의 친척이 취하여 대를 잇게 하는 법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성읍 사람들이 다 아는 정숙한 여인임을 알고 있었기에 룻에게 기업 무를 사람의 책임을 행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기업 무를 사람으로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지만 그는 사랑이 없으므로 거절하였고, 그다음 차례인 보아스는 사랑이 있으므로 허락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의 조부 오벳입니다. 결국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4.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룻의 마음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베들레헴에 온 이방 여인 룻이 어떻게 이러한 축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녀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 앞에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룻은 자기 앞날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데도 인내하며 선을 좇아 나갔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녀에게서 투기라든가 자랑하는 마음, 교만하거나 무례한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거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견뎠습니다. 룻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중심을 보시고 축복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룻기 말씀을 통해 깨달을 점은 수많은 여인 중에서 룻에 대한 기록이 성경 66권 중 한 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룻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룻은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데도 나오미의 집안에 시집온 후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룻처럼 정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번 하나님을 믿었으면 변함이 없어야 하지요. 룻은 효성이 지극하며 사람의 도리를 다하여 홀로 된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자유와 젊음 등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시어머니를 붙좇아 끝까지 봉양하였으니 참으로 아름답고 정한 마음이지요. 오늘날 이러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금만 자기 생각이나 마음에 맞지 않아도 함께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룻처럼 절망적인 상황이 되면 누가 그 길을 가려 하겠습니까. 룻은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했기에 그 길이 고생임을 알면서도 마땅한 도리로 여기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행복이나 불행은 환경이나 조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에 달려 있지요. 룻이 대가를 바라고 선을 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중심이 선한 사람은 선한 일을 할 때 몇 번 하다가 그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변함없이 선을 행하지요.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여 간구와 기도에 응답받으며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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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이방 여인 룻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 안에 알맞은 이름을 써 보세요. (룻 4:18~22)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암미나답 → 나손 → 살몬 → ( ) → 오벳 → 이새 → ( )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73~18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업 무를 자’
기업을 되찾아 주는 사람, 기업을 구속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기업 무르기 법은 이스라엘 지파가 분배받은 기업(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이다.
기업 무를 자는 가난한 친척의 기업을 다시 사 주어야 했으며(레 25:25), 부당한 피해를 입은 친족을 위해 복수할 수 있었다(민 35:12, 19, 21). 또 친족이 자녀가 없이 죽은 경우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신 25:5~6), 거절할 경우 그에 따른 대가를 받아야 했다(신 25:7~10). 기업 무를 자의 자격은 근족이어야 하며(룻 2:20), 기업 무를 능력도 있어야 했다(룻 2:1).
2017-03-24
제12과믿음의 행함
수 3:7~13
읽을말씀 : 수 3:7~13 | 외울말씀 : 막 9:23 ㅣ 참고 말씀: 히 11:1
교육목표 :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림으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늘 체험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심에서 믿는 사람은 ‘믿음’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어떤 권세나 명예나 부로도 갈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 모든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요.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믿는 이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또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였습니다. 그러니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 생활 속에 믿음대로 이루어집니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
믿음은 크게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육적인 믿음은 눈으로 보아 확인이 되고 자신의 상식이나 지식과 일치하기 때문에 믿는 믿음입니다. 가령 나무로 책상을 만드는 것을 이미 보아서 아는 사람은 누가 나무로 책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의심 없이 믿습니다. 이것은 유에서 유의 창조, 즉 있는 것에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는 것을 영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육적인 믿음과 반대되는 영적인 믿음은 무에서 유의 창조, 즉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지요.
영적인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응답과 축복을 받으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믿음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을 보면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즉 각 사람의 그릇에 따라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영적인 믿음을 주실까요?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미움, 다툼, 시기, 간음 등 비진리의 마음을 버리고 원수라도 사랑하며 계명을 준행하는 만큼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만일 스스로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응답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주여, 대통령이 되게 해 주세요. 믿습니다.” 할 것이고, 미운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을 징계하여 주옵소서.” 하면 될 것입니다. 그 기도대로 응답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영적인 믿음을 주시지 않고 진리로 변화된 만큼 마음으로부터 믿어지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받으려면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비진리의 모든 생각을 말하며, 이 생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지 않고 자꾸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쌓은 지식, 경험, 생각을 옳다 여기지만 그중에는 진리가 아닌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잘못 입력된 지식이 육신의 생각을 불러일으켜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육신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자기 지혜를 동원하므로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은 못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입력된 지식 가운데 잘못된 것은 빼내어 영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행함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무렵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해마다 보리를 거두는 그맘때면 요단강이 범람하여 언덕에 넘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말씀하십니다(수 3:8).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을 믿고 백성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하지요. 사람의 생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진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열두 제사장을 앞세운 행렬이 드디어 요단 강가에 다다랐습니다. 선두에 선 제사장들이 거세게 흘러내리는 강물에 발을 딛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던 강물이 멈추더니 멀리 있는 아담읍 변방에 물이 쌓이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 흐르던 강물이 완전히 끊어졌습니다(수 3:15~17).
이 외에도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니 쓴물이 단물이 되며,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일 등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행했을 때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3.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1)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모세가 마음속으로 ‘지팡이 든 손을 내민다고 해서 과연 홍해가 갈라질까?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의심했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겠습니까?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었기에 믿음대로 역사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영적인 믿음을 갖기까지에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라 명하셨을 때 모세는 백성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출 3~4장). 이에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있는 증거로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가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지요. 또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니 문둥병이 생겼고 다시 품에 넣으니 정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모세가 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열 재앙 등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내 주시니 그의 믿음이 온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행군을 할 수 있기까지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영적인 믿음으로 행군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체험이 없는 사람은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이나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이를 해결받기 위해 구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필요한 것들을 기도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 믿음으로 죄 사함 받는 것,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을 계발하는 것, 순종하는 것 등을 구해야 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3) 꿈과 목표를 응답받기 위한 믿음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과 목표를 세웠다면 그것을 응답받기 위해 믿음의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가령,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손 놓고 마냥 기도와 금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영혼을 갈무리하는 이들이 심방하고 전도하는 등 구체적인 행함이 따라야 하지요. 물질의 축복을 받아 선교하고 구제하기 원한다면 믿음으로 열심히 심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만히 때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은 물론, 적극적인 믿음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고 행하면 바라던 것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응답의 열매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항상 믿음의 행군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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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2. 영적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3.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하나님 말씀을 듣고 ( )해야 한다.
② 믿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 )해야 한다.
③ 꿈과 목표를 응답받기 위한 믿음의 ( )이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59~1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수아’
에브라임 지파 눈의 아들이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군대 지휘관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모세의 수종자로 함께 시내산에 올라갔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12명 중 한 사람으로 악평하는 10명의 정탐꾼과는 달리 갈렙과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임을 확신에 찬 믿음으로 고백하였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다. 가나안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였고, 110세에 죽어 자신이 기업으로 받은 땅 딤낫세라에 장사되었다(수 24:29~30).
교육목표 :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림으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늘 체험하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중심에서 믿는 사람은 ‘믿음’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고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어떤 권세나 명예나 부로도 갈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또한 믿음이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 모든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요.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신 대로 믿는 이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또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였습니다. 그러니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이 생활 속에 믿음대로 이루어집니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믿음
믿음은 크게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육적인 믿음은 눈으로 보아 확인이 되고 자신의 상식이나 지식과 일치하기 때문에 믿는 믿음입니다. 가령 나무로 책상을 만드는 것을 이미 보아서 아는 사람은 누가 나무로 책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의심 없이 믿습니다. 이것은 유에서 유의 창조, 즉 있는 것에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에 맞지 않아도 믿는 것을 영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육적인 믿음과 반대되는 영적인 믿음은 무에서 유의 창조, 즉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지요.
영적인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응답과 축복을 받으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믿음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가질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3절을 보면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하셨습니다. 즉 각 사람의 그릇에 따라 하나님께서 영적인 믿음을 나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영적인 믿음을 주실까요?
바로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미움, 다툼, 시기, 간음 등 비진리의 마음을 버리고 원수라도 사랑하며 계명을 준행하는 만큼 영적인 믿음을 주십니다. 만일 스스로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응답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주여, 대통령이 되게 해 주세요. 믿습니다.” 할 것이고, 미운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을 징계하여 주옵소서.” 하면 될 것입니다. 그 기도대로 응답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나 영적인 믿음을 주시지 않고 진리로 변화된 만큼 마음으로부터 믿어지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받으려면 육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이란 비진리의 모든 생각을 말하며, 이 생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지 않고 자꾸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쌓은 지식, 경험, 생각을 옳다 여기지만 그중에는 진리가 아닌 것이 많습니다. 이렇게 잘못 입력된 지식이 육신의 생각을 불러일으켜 영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육신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자기 지혜를 동원하므로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은 못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입력된 지식 가운데 잘못된 것은 빼내어 영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행함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무렵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해마다 보리를 거두는 그맘때면 요단강이 범람하여 언덕에 넘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말씀하십니다(수 3:8).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을 믿고 백성에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하지요. 사람의 생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진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열두 제사장을 앞세운 행렬이 드디어 요단 강가에 다다랐습니다. 선두에 선 제사장들이 거세게 흘러내리는 강물에 발을 딛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던 강물이 멈추더니 멀리 있는 아담읍 변방에 물이 쌓이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 흐르던 강물이 완전히 끊어졌습니다(수 3:15~17).
이 외에도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니 쓴물이 단물이 되며,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고, 반석을 치니 물이 나오는 일 등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행했을 때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3.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1)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모세가 마음속으로 ‘지팡이 든 손을 내민다고 해서 과연 홍해가 갈라질까? 안 되면 어떻게 하나?’ 의심했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겠습니까?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었기에 믿음대로 역사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영적인 믿음을 갖기까지에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라 명하셨을 때 모세는 백성이 자기를 믿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출 3~4장). 이에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있는 증거로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가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지요. 또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니 문둥병이 생겼고 다시 품에 넣으니 정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모세가 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열 재앙 등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나타내 주시니 그의 믿음이 온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행군을 할 수 있기까지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영적인 믿음으로 행군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체험이 없는 사람은 체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이나 문제가 있는 사람은 이를 해결받기 위해 구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필요한 것들을 기도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는 것, 믿음으로 죄 사함 받는 것,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재능을 계발하는 것, 순종하는 것 등을 구해야 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3) 꿈과 목표를 응답받기 위한 믿음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과 목표를 세웠다면 그것을 응답받기 위해 믿음의 행함을 내보여야 합니다. 가령,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손 놓고 마냥 기도와 금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영혼을 갈무리하는 이들이 심방하고 전도하는 등 구체적인 행함이 따라야 하지요. 물질의 축복을 받아 선교하고 구제하기 원한다면 믿음으로 열심히 심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만히 때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은 물론, 적극적인 믿음의 행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고 행하면 바라던 것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응답의 열매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항상 믿음의 행군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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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2. 영적인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3.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하나님 말씀을 듣고 ( )해야 한다.
② 믿음의 체험을 얻기 위해 ( )해야 한다.
③ 꿈과 목표를 응답받기 위한 믿음의 ( )이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59~16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호수아’
에브라임 지파 눈의 아들이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군대 지휘관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모세의 수종자로 함께 시내산에 올라갔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12명 중 한 사람으로 악평하는 10명의 정탐꾼과는 달리 갈렙과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임을 확신에 찬 믿음으로 고백하였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다. 가나안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였고, 110세에 죽어 자신이 기업으로 받은 땅 딤낫세라에 장사되었다(수 24:29~30).
2017-03-17
제11과감정을 제어하라
롬 12:19~21
읽을말씀 : 롬 12:19~21 | 외울말씀 : 롬 12:21 ㅣ 참고 말씀: 시 37:7~9
교육목표 :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넉넉히 선으로 악을 이겨 나가게 한다.
간혹 사람들은 감정 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므로 서로 상처를 주고, 원수를 갚기 위해 악을 행하기도 하지요. 사소한 감정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길을 내주고 하나님과 죄의 담을 만듭니다. 이처럼 감정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깨달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하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엡 4:26).
1. 감정을 제어하고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기 전에는 부모나 스승 또는 친구의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수를 직접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했지요.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니(요 5:27) 오직 우리 주님 외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재판장이 되어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수군거리지 말라, 비방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하셨지요. 그러니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서로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것은 나보다 상대를 더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되면 누구를 얕잡아 볼 수 없고 판단 정죄하거나 수군거리는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성도 중에는 자기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정죄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을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말씀합니다.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재판장이 되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교만이요, 큰 죄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심판해서도, 원수를 갚아서도 안 됩니다.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심을 믿기에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활 속에서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살다 보면 개인적으로나 형제간에, 혹은 가족 간에, 동료나 이웃 간에 감정 상할 일들이 수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당부하셨지요.
이러한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면 감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서로 이해하며 포용하려고 노력한다면 다툼, 원망, 불평, 불만,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으로 상대의 마음을 녹인다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2.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인생을 망친 사울 왕
사람이 살다 보면 큰 문제는 물론 사소한 일로도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만일 감정이 일어날 때 제어하지 않고 감정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엇보다 자신이 힘들며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 줍니다.
성경에는 시기라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인생을 망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신하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매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왕인 사울보다 더 칭송하고 사랑했지요.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용모가 준수하고,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러한 자신 외에 감히 누가 칭송을 받는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자칫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다윗이 백성의 힘을 등에 업는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질투라는 감정은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낳았고 평생 불안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합니다. 결국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다윗의 뒤를 쫓았던 사울에게 과연 평안이 있었을까요? 나라는 또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이처럼 한 사람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 자신과 가족, 나라까지도 고통받게 됩니다.
3. 감정을 제어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맡길 때 응답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선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십니다. 구약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악한 하만에 대한 심판이 그 예입니다. 바사 제국의 신하 하만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몹시 노하여 감정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물론 그의 민족까지 말살하려고 흉계를 꾸며 왕의 조서까지 받아냅니다. 이를 안 모르드개와 사촌 누이 에스더는 금식하며 이 일을 하나님께 의뢰하였습니다. 유다인으로서 바사국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가 탄원하지요. 이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직접 심판하셨습니다. 악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려고 세워 놓은 나무에 오히려 자신이 달려 죽은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롯 왕이 교회를 핍박하면서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때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겼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쇠사슬에 매인 베드로를 풀어 밖으로 이끄셨습니다. 반면 사도행전 12장 21~23절에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핍박하고 악을 행한 헤롯을 직접 심판하신 것입니다.
4.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사랑으로 이해하고 기도할 때 축복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조금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역사를 보아도 감정 싸움으로 많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지요. 부부간에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생기면 다툼으로 이어지고 심하면 별거나 이혼까지 갑니다. 형제간에도 감정 대립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원수 맺는 일도 생기지요.
그러나 모든 일에 감정으로 대하지 않고 오직 선으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상대가 감정이 나서 악을 행해도 선으로 대한다면 이런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화목하니 뼈가 상하는 고통을 받지도 않지요. 상대가 비방하고 악으로 대해도 오히려 사랑으로 이해하고 기도해 주므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가족이나 이웃 또는 일터 등에서 감정으로 부딪히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감정을 제어하고 다만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한 복을 주시고 사랑과 인정을 받게 하십니다. 혹여 누가 기분 나쁘게 하면 그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감정으로 원수 맺은 것은 없는지, 내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 재판장이 되어 남을 판단하거나 형제의 티를 빼려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시편 37편 7~9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했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길 뿐만 아니라, 감정을 제어하고 오직 사랑의 마음으로 선을 행하여 범사에 복된 길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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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세상 사람들은 원수 갚는 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친히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우리 삶 속에서 감정 상할 일이 생겼을 때 제어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3. 혹여 누가 기분 나쁘게 하면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내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상대의 티를 보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49~1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들보’란?
건물을 지을 때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가로질러서 얹는 지지대를 말한다.
오늘날 건설 현장에서 들보는 보통 목재, 쇠,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다. 예수님께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본다’(마 7:3~5)하신 말씀은 자신의 커다란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작은 허물이나 잘못만을 책잡고 나무라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김으로 넉넉히 선으로 악을 이겨 나가게 한다.
간혹 사람들은 감정 때문에 중요한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므로 서로 상처를 주고, 원수를 갚기 위해 악을 행하기도 하지요. 사소한 감정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이 훼방할 길을 내주고 하나님과 죄의 담을 만듭니다. 이처럼 감정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깨달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하신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엡 4:26).
1. 감정을 제어하고 원수를 갚지 말아야 하는 이유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가 되기 전에는 부모나 스승 또는 친구의 원수를 갚는 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수를 직접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했지요.
또한 하나님이 심판하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니(요 5:27) 오직 우리 주님 외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재판장이 되어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수군거리지 말라, 비방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하셨지요. 그러니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서로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것은 나보다 상대를 더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되면 누구를 얕잡아 볼 수 없고 판단 정죄하거나 수군거리는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성도 중에는 자기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정죄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을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말씀합니다.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재판장이 되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교만이요, 큰 죄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심판해서도, 원수를 갚아서도 안 됩니다.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심을 믿기에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활 속에서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살다 보면 개인적으로나 형제간에, 혹은 가족 간에, 동료나 이웃 간에 감정 상할 일들이 수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당부하셨지요.
이러한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면 감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서로 이해하며 포용하려고 노력한다면 다툼, 원망, 불평, 불만, 탄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으로 상대의 마음을 녹인다면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2.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인생을 망친 사울 왕
사람이 살다 보면 큰 문제는 물론 사소한 일로도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만일 감정이 일어날 때 제어하지 않고 감정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엇보다 자신이 힘들며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안겨 줍니다.
성경에는 시기라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인생을 망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신하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매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왕인 사울보다 더 칭송하고 사랑했지요.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용모가 준수하고,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러한 자신 외에 감히 누가 칭송을 받는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자칫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다윗이 백성의 힘을 등에 업는다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질투라는 감정은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낳았고 평생 불안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다윗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합니다. 결국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다윗의 뒤를 쫓았던 사울에게 과연 평안이 있었을까요? 나라는 또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이처럼 한 사람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 자신과 가족, 나라까지도 고통받게 됩니다.
3. 감정을 제어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맡길 때 응답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선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십니다. 구약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악한 하만에 대한 심판이 그 예입니다. 바사 제국의 신하 하만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보고 몹시 노하여 감정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물론 그의 민족까지 말살하려고 흉계를 꾸며 왕의 조서까지 받아냅니다. 이를 안 모르드개와 사촌 누이 에스더는 금식하며 이 일을 하나님께 의뢰하였습니다. 유다인으로서 바사국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가 탄원하지요. 이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직접 심판하셨습니다. 악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려고 세워 놓은 나무에 오히려 자신이 달려 죽은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헤롯 왕이 교회를 핍박하면서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때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겼지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쇠사슬에 매인 베드로를 풀어 밖으로 이끄셨습니다. 반면 사도행전 12장 21~23절에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핍박하고 악을 행한 헤롯을 직접 심판하신 것입니다.
4.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사랑으로 이해하고 기도할 때 축복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조금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역사를 보아도 감정 싸움으로 많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지요. 부부간에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생기면 다툼으로 이어지고 심하면 별거나 이혼까지 갑니다. 형제간에도 감정 대립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원수 맺는 일도 생기지요.
그러나 모든 일에 감정으로 대하지 않고 오직 선으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상대가 감정이 나서 악을 행해도 선으로 대한다면 이런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화목하니 뼈가 상하는 고통을 받지도 않지요. 상대가 비방하고 악으로 대해도 오히려 사랑으로 이해하고 기도해 주므로 고통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가족이나 이웃 또는 일터 등에서 감정으로 부딪히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감정을 제어하고 다만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한 복을 주시고 사랑과 인정을 받게 하십니다. 혹여 누가 기분 나쁘게 하면 그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감정으로 원수 맺은 것은 없는지, 내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 재판장이 되어 남을 판단하거나 형제의 티를 빼려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시편 37편 7~9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했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길 뿐만 아니라, 감정을 제어하고 오직 사랑의 마음으로 선을 행하여 범사에 복된 길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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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세상 사람들은 원수 갚는 것을 의로운 행동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친히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우리 삶 속에서 감정 상할 일이 생겼을 때 제어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3. 혹여 누가 기분 나쁘게 하면 얼굴을 붉히거나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내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상대의 티를 보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49~1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들보’란?
건물을 지을 때 칸과 칸 사이의 두 기둥 위를 가로질러서 얹는 지지대를 말한다.
오늘날 건설 현장에서 들보는 보통 목재, 쇠,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다. 예수님께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본다’(마 7:3~5)하신 말씀은 자신의 커다란 잘못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작은 허물이나 잘못만을 책잡고 나무라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2017-03-10
제10과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 20:20~23
읽을말씀 : 마 20:20~23 | 외울말씀 : 막 11:24 ㅣ 참고 말씀: 약 1:6~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믿음으로 구하는 것마다 무엇이든지 응답과 축복을 받아 나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여리고 마을에 구걸하는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지요.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예수님께서 그가 소경인 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서 믿음의 고백을 듣고자 하심이었지요. 이에 그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자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응답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고백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1.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기 위해서는
1)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0~21절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뇨”라고 물으시지요. 그러자 여인은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만한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믿었기에 높은 자리를 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들은 예수님의 어떠한 면을 보았기에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진실한 행하심을 보았고 또한 예수님이 베푸신 기사와 표적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으며(요 2장),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고(요 9장), 간질을 하며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막 9장). 또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속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요 11장).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기도 하시고 물 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마 14장).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영생, 곧 영원한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천국에 대해 듣고 배웠으며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세가 천국에서 얼마나 큰지도 알았고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받을 줄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나아가 두 아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도록 요청하면서 약속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답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앉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아버지 뜻대로 행하여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무엇을 구하든지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의지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갈급하여 나오는가 하면 각종 질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치료받고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도를 받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면 각자 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기를 구하는 사람도 있고 “질병을 치료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를 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사기 6장에 나오는 기드온이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직 왕이 없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약탈당하고 고통받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증거를 구합니다. 즉 “양털 한 뭉치를 땅에다 두겠으니 밤새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주위 땅은 말라 있다면 믿을 수 있겠다”라며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과연 자고 일어나 보니 양털만 젖어 있었습니다. 양털에 이슬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그는 한 번 더 하나님께 증거를 구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되게 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양털만 말라 있고 주변 땅은 이슬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상하게 기드온과 함께하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물들어갈 때 엘리야는 백성을 갈멜 산으로 모았습니다. 그리고 혈혈단신으로 수백 명의 이방 선지자와 대결합니다. 이방 선지자들은 자기가 믿는 우상에게, 엘리야는 하나님께 구하여 불로써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확정짓자 했지요.
이방 선지자들이 먼저 시작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놀며 큰소리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불렀습니다.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며 피가 흐르기까지 구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포기하고 물러난 뒤 엘리야가 기도하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아버렸습니다(왕상 18장).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역사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고백만으로도 응답받습니다. 하인의 중풍을 고치러 예수님 앞에 나온 백부장의 경우입니다. 그는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 명하기만 해도 하인이 낫겠다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마 8:8). 그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하인이 곧바로 나았습니다.
2. 구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두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6~8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했습니다.
따라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면 믿지 못하고 의심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한 사람은 시험 환난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탄식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지 못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에 순탄하게 들여보내셨다면 그들이 원망 불평했을까요? 홍해를 건넜을 때 미리암과 함께 여인들이 기뻐 춤을 춘 것처럼 기뻐하며 춤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은 그들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심을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충분한 증거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믿음을 내보일 것을 요구했을 때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 외에는 아무도 내보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내보여야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마음에 악이 있으면 의심이 생겨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신속히 응답이 주어지지 않으면 마음 안에 있던 악이 드러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반대로 의심치 않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난다 해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니 자연히 응답이 옵니다. 따라서 응답받아야 할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는지,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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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기드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신 것에 대해 표징으로 구한 것은 무엇일까요?
2.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33~1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드온의 3백 용사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이방 민족에게 침략을 받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기드온이라는 한 사람을 세우신다. 적군은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 연합하여 13만 5천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3만 2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 중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내라 하시니 2만 2천 명이 돌아가고 1만 명만 남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테스트를 하신다. 곧 그들을 물가로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할 때,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사람 3백 명만 “여호와의 용사”로 뽑게 하신다.
기드온은 3백 용사와 함께 13만 5천 명의 이방 군대를 멋지게 파했으며 달아나는 패잔병까지 추적하여 진멸시켰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는 40년 동안 나라가 태평하였다(삿 8:2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믿음으로 구하는 것마다 무엇이든지 응답과 축복을 받아 나가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여리고 마을에 구걸하는 한 거지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지요. 어느 날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예수님께서 그가 소경인 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서 믿음의 고백을 듣고자 하심이었지요. 이에 그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자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응답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고백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1.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기 위해서는
1)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0~21절을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뇨”라고 물으시지요. 그러자 여인은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만한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믿었기에 높은 자리를 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들은 예수님의 어떠한 면을 보았기에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과 진실한 행하심을 보았고 또한 예수님이 베푸신 기사와 표적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기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으며(요 2장),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고(요 9장), 간질을 하며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막 9장). 또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 속에 장사된 나사로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요 11장).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기도 하시고 물 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마 14장).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영생, 곧 영원한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천국에 대해 듣고 배웠으며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세가 천국에서 얼마나 큰지도 알았고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응답받을 줄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나아가 두 아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도록 요청하면서 약속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답변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앉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아버지 뜻대로 행하여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무엇을 구하든지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의지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갈급하여 나오는가 하면 각종 질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치료받고자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도를 받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면 각자 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기를 구하는 사람도 있고 “질병을 치료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고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를 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사기 6장에 나오는 기드온이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직 왕이 없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으로부터 약탈당하고 고통받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증거를 구합니다. 즉 “양털 한 뭉치를 땅에다 두겠으니 밤새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주위 땅은 말라 있다면 믿을 수 있겠다”라며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과연 자고 일어나 보니 양털만 젖어 있었습니다. 양털에 이슬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그는 한 번 더 하나님께 증거를 구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되게 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양털만 말라 있고 주변 땅은 이슬에 젖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상하게 기드온과 함께하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물들어갈 때 엘리야는 백성을 갈멜 산으로 모았습니다. 그리고 혈혈단신으로 수백 명의 이방 선지자와 대결합니다. 이방 선지자들은 자기가 믿는 우상에게, 엘리야는 하나님께 구하여 불로써 응답하는 신이 참 신임을 확정짓자 했지요.
이방 선지자들이 먼저 시작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놀며 큰소리로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불렀습니다.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며 피가 흐르기까지 구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포기하고 물러난 뒤 엘리야가 기도하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까지 다 핥아버렸습니다(왕상 18장).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 역사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고백만으로도 응답받습니다. 하인의 중풍을 고치러 예수님 앞에 나온 백부장의 경우입니다. 그는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 명하기만 해도 하인이 낫겠다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마 8:8). 그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하인이 곧바로 나았습니다.
2. 구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두 마음을 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6~8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했습니다.
따라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면 믿지 못하고 의심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한 사람은 시험 환난이 오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탄식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지 못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에 순탄하게 들여보내셨다면 그들이 원망 불평했을까요? 홍해를 건넜을 때 미리암과 함께 여인들이 기뻐 춤을 춘 것처럼 기뻐하며 춤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 정복은 그들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심을 믿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충분한 증거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에게 믿음을 내보일 것을 요구했을 때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 외에는 아무도 내보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않는 믿음을 내보여야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마음에 악이 있으면 의심이 생겨 믿지 못하고, 믿지 못하니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신속히 응답이 주어지지 않으면 마음 안에 있던 악이 드러나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반대로 의심치 않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난다 해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니 자연히 응답이 옵니다. 따라서 응답받아야 할 문제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범사에 기뻐하고 감사하는지,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내보이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기드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신 것에 대해 표징으로 구한 것은 무엇일까요?
2.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33~14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기드온의 3백 용사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이방 민족에게 침략을 받는다.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기드온이라는 한 사람을 세우신다. 적군은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 연합하여 13만 5천명에 달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3만 2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 중 두려워하는 자들을 돌려보내라 하시니 2만 2천 명이 돌아가고 1만 명만 남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다시 한 번 테스트를 하신다. 곧 그들을 물가로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할 때,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사람 3백 명만 “여호와의 용사”로 뽑게 하신다.
기드온은 3백 용사와 함께 13만 5천 명의 이방 군대를 멋지게 파했으며 달아나는 패잔병까지 추적하여 진멸시켰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는 40년 동안 나라가 태평하였다(삿 8:28).
2017-03-03
제9과심고 거두는 법칙
고후 9:6~8
읽을말씀 : 고후 9:6~8 | 외울말씀 : 고후 9:7 ㅣ 참고 말씀: 갈 6:7~9
교육목표 :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하여 심는 것마다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농부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씨를 뿌리고 수고하며 열심히 경작합니다. 그런데 농사 짓는 법을 몰라서 어느 때 심고 거둬들여야 하는지 모른다면 열심히 수고한다 해도 좋은 수확을 기대하기가 어렵지요. 영적으로도 심고 거두는 법칙을 잘 알아야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1)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해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심기 위해서는 먼저 밭을 개간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거친 황무지라 할지라도 열심히 땀 흘리며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단단한 밭이면 갈아엎고 거름을 주어 부드럽게 해 주고, 돌멩이가 있으면 주워 내며, 가시떨기가 있으면 뽑아 내고 정성스럽게 가꾸면 비옥한 밭으로 바뀌지요.
밭은 영적으로 우리 마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면서 이를 길가밭, 돌밭, 가시떨기밭, 좋은 밭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자신이 어느 밭에 속하는지 점검해 보면 쉽게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길가밭’입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늘 밟고 지나다니기 때문에 단단합니다. 씨앗이 이 길가에 떨어지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흙 속에 묻히지도 않기 때문에 아예 싹이 나지 않지요. 새들이 와서 그 씨앗을 먹어 버리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길가밭’은 단단하고 강퍅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이지요. 분명히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 주는데도 의심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씨를 뿌리면 싹이 나도 돌멩이 때문에 잘 성장하지 못하는 ‘돌밭’입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 지식으로는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는 마음 밭입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기에 시험 환난이 오거나 핍박을 당하면 넘어져 버리지요. 은혜를 받았을 때는 마음이 뜨거워서 아멘 하다가도 금방 사단의 역사를 받아 의심하며 배신하기도 하는 마음입니다.
그다음은, 씨를 뿌리면 싹이 나서 자라기는 하지만 가시떨기가 기운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시떨기밭’입니다. 즉 재리의 유혹이나 세상의 염려에 말씀이 막혀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마음 밭입니다. 이런 밭의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하기는 하지만 온전히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않으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령, 말씀을 듣고 믿기는 하지만 육적인 생각으로 진리를 분별하려고 하지요. 자신의 생각, 이론, 주관에다 하나님 말씀을 비춰 보아 자기에게 유익하면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씨를 뿌리면 싹이 잘 나며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수 있는 ‘좋은 밭’입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계산하지 않고 무조건 아멘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며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 앞에 다양한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밭을 개간하는 농부는 계절에 따라 밭에 다양한 씨앗을 뿌립니다. 콩, 팥, 무, 배추, 호박 등 여러 씨앗을 심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씨앗은 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며 씨앗을 심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하라’ 하신 말씀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기뻐하라, 전도하라, 사랑하라, 충성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하신 말씀대로 열심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심는 것입니다. 이렇게 씨앗을 심으면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 추수할 것을 믿고 기쁨으로 뿌리듯이, 하나님 앞에 심을 때에도 30배, 60배, 100배로 넘치게 축복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쁨으로 심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개간을 마치고 나서야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옥토를 만드는 작업과 씨 뿌리는 작업을 겸해서 해야 합니다. 아직 옥토로 다 개간하지 못했다 해서 씨를 뿌리지 않고 땅을 놀려 둘 농부는 없습니다. 어찌하든 씨를 뿌려 조금이라도 더 수확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미움, 원망, 불평 등을 버리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동시에 사랑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그럴 때 미움도 더 빨리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 밭을 개간하는 것은 하늘의 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을 개간할수록 죄를 버리고 주님의 성품을 닮으니 더 좋은 천국 처소를 얻지요. 밭을 개간했으면 이제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럴 때 열매가 나듯이 하나님 말씀 중에 ‘하라’ 하신 것을 행할 때 진리의 열매가 맺히며 그것이 상급이 됩니다.
이처럼 천국의 처소와 상급은 차이가 있습니다. 곧 개간을 통해 하나님을 닮은 만큼 좋은 처소에 들어가며 진리의 씨를 뿌려 열매를 맺는 만큼 큰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니 개간과 씨 뿌림을 겸한다면 더 좋은 천국 처소와 더 큰 상급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열매가 잘 자라도록 가꾸는 비결
농부는 밭에 씨를 심은 다음에 물과 거름을 주고 풀을 뽑고 벌레를 잡아 주며 인내와 정성으로 가꿉니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싹이 자라다가 파리해지거나 열매를 맺기 전에 병충해를 입어 죽기도 하지요. 그러니 열매가 잘 자라도록 가꿔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는 어떻게 가꿔야 할까요?
먼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잡념, 피곤, 졸음이 틈타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하며 하나님과 교통이 이뤄집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 뜻을 좇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기도와 찬송을 통해 성령의 감동과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농부가 건강하여 힘이 있어야 일을 잘 할수 있듯이 우리도 기도와 찬송을 통해 위로부터 힘을 받아야 열매를 잘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 곧 영적인 힘을 말합니다. 영적인 힘이 있어야 원수 마귀 사단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 힘을 얻기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하되 부르짖어 중심을 다한 기도를 드릴 때에 성령이 충만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농부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밭을 정성껏 가꾸지 않고 일을 게을리하게 됩니다. 흥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가꾸어야 농작물이 잘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항상 기쁘고 감사가 넘쳐야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타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힘을 얻어 응답의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내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종자마다 열매 맺는 기간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심은 것도 금방 응답받는 것도 있지만 오랜 시간 걸리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합니다(갈 6:9).
3.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농부가 씨를 심어 열매가 맺히면 심은 대로 거두는 것처럼 영계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갈 6:7). 우리가 기도를 심으면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고 영혼이 잘되어 갑니다. 열심히 충성 봉사를 하면 연약함이 떠나가고 영육 간에 강건함을 입으며, 십일조와 감사예물 등 물질로 열심히 드리면 물질 축복이 임하여 마음껏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수넴에 사는 귀부인은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정성으로 대접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여인을 위해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오래도록 아이가 없던 여인에게 아들을 잉태하는 축복을 주셨지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행한 다비다는 병들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해당되는 마음 밭을 써 보세요.
1. 하나님 말씀을 들어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고, 믿음의 확신이 없기에 시험 환난이 오거나 핍박을 당하면 넘어져 버린다.( )
2. 단단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 줘도 의심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다.( )
3. 재리의 유혹이나 세상의 염려로 인해 열매 맺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하기는 하지만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는 못한다.( )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25~1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성경 말씀을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 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행함과 예물로써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교육목표 :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하여 심는 것마다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농부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씨를 뿌리고 수고하며 열심히 경작합니다. 그런데 농사 짓는 법을 몰라서 어느 때 심고 거둬들여야 하는지 모른다면 열심히 수고한다 해도 좋은 수확을 기대하기가 어렵지요. 영적으로도 심고 거두는 법칙을 잘 알아야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면
1)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해야 합니다
농부가 씨를 심기 위해서는 먼저 밭을 개간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거친 황무지라 할지라도 열심히 땀 흘리며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단단한 밭이면 갈아엎고 거름을 주어 부드럽게 해 주고, 돌멩이가 있으면 주워 내며, 가시떨기가 있으면 뽑아 내고 정성스럽게 가꾸면 비옥한 밭으로 바뀌지요.
밭은 영적으로 우리 마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면서 이를 길가밭, 돌밭, 가시떨기밭, 좋은 밭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자신이 어느 밭에 속하는지 점검해 보면 쉽게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길가밭’입니다. 길가는 사람들이 늘 밟고 지나다니기 때문에 단단합니다. 씨앗이 이 길가에 떨어지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흙 속에 묻히지도 않기 때문에 아예 싹이 나지 않지요. 새들이 와서 그 씨앗을 먹어 버리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길가밭’은 단단하고 강퍅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이지요. 분명히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 주는데도 의심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씨를 뿌리면 싹이 나도 돌멩이 때문에 잘 성장하지 못하는 ‘돌밭’입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 지식으로는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는 마음 밭입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기에 시험 환난이 오거나 핍박을 당하면 넘어져 버리지요. 은혜를 받았을 때는 마음이 뜨거워서 아멘 하다가도 금방 사단의 역사를 받아 의심하며 배신하기도 하는 마음입니다.
그다음은, 씨를 뿌리면 싹이 나서 자라기는 하지만 가시떨기가 기운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시떨기밭’입니다. 즉 재리의 유혹이나 세상의 염려에 말씀이 막혀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마음 밭입니다. 이런 밭의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하기는 하지만 온전히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않으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령, 말씀을 듣고 믿기는 하지만 육적인 생각으로 진리를 분별하려고 하지요. 자신의 생각, 이론, 주관에다 하나님 말씀을 비춰 보아 자기에게 유익하면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씨를 뿌리면 싹이 잘 나며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수 있는 ‘좋은 밭’입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계산하지 않고 무조건 아멘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며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 앞에 다양한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밭을 개간하는 농부는 계절에 따라 밭에 다양한 씨앗을 뿌립니다. 콩, 팥, 무, 배추, 호박 등 여러 씨앗을 심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씨앗은 영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의미하며 씨앗을 심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하라’ 하신 말씀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기뻐하라, 전도하라, 사랑하라, 충성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하신 말씀대로 열심히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심는 것입니다. 이렇게 씨앗을 심으면 하나님께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농부가 씨앗을 뿌릴 때 추수할 것을 믿고 기쁨으로 뿌리듯이, 하나님 앞에 심을 때에도 30배, 60배, 100배로 넘치게 축복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기쁨으로 심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개간을 마치고 나서야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옥토를 만드는 작업과 씨 뿌리는 작업을 겸해서 해야 합니다. 아직 옥토로 다 개간하지 못했다 해서 씨를 뿌리지 않고 땅을 놀려 둘 농부는 없습니다. 어찌하든 씨를 뿌려 조금이라도 더 수확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미움, 원망, 불평 등을 버리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동시에 사랑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그럴 때 미움도 더 빨리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 밭을 개간하는 것은 하늘의 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을 개간할수록 죄를 버리고 주님의 성품을 닮으니 더 좋은 천국 처소를 얻지요. 밭을 개간했으면 이제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럴 때 열매가 나듯이 하나님 말씀 중에 ‘하라’ 하신 것을 행할 때 진리의 열매가 맺히며 그것이 상급이 됩니다.
이처럼 천국의 처소와 상급은 차이가 있습니다. 곧 개간을 통해 하나님을 닮은 만큼 좋은 처소에 들어가며 진리의 씨를 뿌려 열매를 맺는 만큼 큰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니 개간과 씨 뿌림을 겸한다면 더 좋은 천국 처소와 더 큰 상급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열매가 잘 자라도록 가꾸는 비결
농부는 밭에 씨를 심은 다음에 물과 거름을 주고 풀을 뽑고 벌레를 잡아 주며 인내와 정성으로 가꿉니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싹이 자라다가 파리해지거나 열매를 맺기 전에 병충해를 입어 죽기도 하지요. 그러니 열매가 잘 자라도록 가꿔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으로는 어떻게 가꿔야 할까요?
먼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과 뜻, 힘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잡념, 피곤, 졸음이 틈타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하며 하나님과 교통이 이뤄집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그 뜻을 좇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기도와 찬송을 통해 성령의 감동과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농부가 건강하여 힘이 있어야 일을 잘 할수 있듯이 우리도 기도와 찬송을 통해 위로부터 힘을 받아야 열매를 잘 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 곧 영적인 힘을 말합니다. 영적인 힘이 있어야 원수 마귀 사단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 힘을 얻기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하되 부르짖어 중심을 다한 기도를 드릴 때에 성령이 충만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농부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밭을 정성껏 가꾸지 않고 일을 게을리하게 됩니다. 흥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가꾸어야 농작물이 잘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항상 기쁘고 감사가 넘쳐야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타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힘을 얻어 응답의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내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종자마다 열매 맺는 기간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 앞에 심은 것도 금방 응답받는 것도 있지만 오랜 시간 걸리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씀합니다(갈 6:9).
3.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농부가 씨를 심어 열매가 맺히면 심은 대로 거두는 것처럼 영계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갈 6:7). 우리가 기도를 심으면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고 영혼이 잘되어 갑니다. 열심히 충성 봉사를 하면 연약함이 떠나가고 영육 간에 강건함을 입으며, 십일조와 감사예물 등 물질로 열심히 드리면 물질 축복이 임하여 마음껏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수넴에 사는 귀부인은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정성으로 대접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여인을 위해 간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오래도록 아이가 없던 여인에게 아들을 잉태하는 축복을 주셨지요.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행한 다비다는 병들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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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 ) 안에 해당되는 마음 밭을 써 보세요.
1. 하나님 말씀을 들어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행함이 따르지 않고, 믿음의 확신이 없기에 시험 환난이 오거나 핍박을 당하면 넘어져 버린다.( )
2. 단단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 줘도 의심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다.( )
3. 재리의 유혹이나 세상의 염려로 인해 열매 맺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믿고 행하기는 하지만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는 못한다.( )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25~1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성경 말씀을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마음에 양식 삼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과 함께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으로 기쁨과 감사, 기도와 찬양, 행함과 예물로써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2017-02-24
제8과금식과 기도의 위력
욘 3:1~10
읽을말씀 : 욘 3:1~10 | 외울말씀 : 렘 33:3 ㅣ 참고 말씀: 사 58:3~9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금식과 기도를 통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 중에는 금식과 기도가 있습니다.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1. 금식과 기도로 응답받은 니느웨 백성
강대국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시지요. 요나는 주전 785년을 전후하여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갑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요나가 탄 배는 거의 난파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혀 바다에 던져지지요. 그러자 놀랍게도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하였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통회자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십니다.
결국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대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쳤습니다. 그러자 이방 민족인 니느웨 백성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어른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께 회개했지요. 그 소문을 들은 왕 또한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니느웨 백성에게 선포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였습니다(욘 3:7~8).
이처럼 금식으로 정성을 내보이며, 악한 행실에서 떠나 힘써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릴 재앙을 거두셨지요. 그만큼 금식과 기도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큰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니느웨 백성이 왕과 함께 회개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금식하면서 부르짖어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금식은 한 끼에서 하루, 이틀, 사흘을 할 수도 있고 오 일, 칠 일 또는 그 이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금식을 못하는 사람은 한 끼 혹은 하루, 이틀 등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장기 금식은 먼저, 많은 기도를 쌓은 후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정확히 주관받아 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6~7절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조건 굶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하면서 기운이 없다며 잠만 자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금식 중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으면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금식할 때에는 오락을 금하고 사랑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사 58:3).
이러한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8~9) 약속하셨습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금식뿐 아니라 기도도 하나님께 합당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고 응답받은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습관을 좇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고(눅 22:39),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행 3:1). 청소도 매일 하면 간단히 끝낼 수 있으나 오래 묵혀 두면 먼지가 쌓이고 때가 찌들어 한참 걸립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평소에 습관을 좇아서 하면 시험 환난이 오지 않고, 설령 오더라도 가볍게 물러가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시험 환난을 당하고 나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둘째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으면 중심이 바로 서고 상대를 경외하는 마음의 표현이 됩니다. 우리가 부모님이나 대통령 앞에서도 삼가 조심하는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고(눅 22:41),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행 7:60).
셋째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렘 29:12~13, 33:3). 사도행전 4장을 보면 교회 역사상 큰 권능과 부흥이 일어났던 초대교회는 큰 핍박 속에서도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많은 기사와 표적이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을 때도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출 15:22~25).
하나님께서는 금식할 때에도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공중 권세 잡은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뚫고 하늘 보좌에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간절한 중심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충만하고 시험 환난이 물러가는 등 크고 작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 응답받은 사람들의 행함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 갈멜 산에 올라가 기도하여 비를 내리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어찌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였던지 얼굴이 무릎 사이로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온 지 70년 가까이 되어 나이가 많은데도 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며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회개하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은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고 크고 놀라운 계시를 전해 주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것과 세상 끝 날에 될 일을 알려 준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하신 대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 믿음과 직분과 위치에 맞춰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에 지나쳐서 욕심을 좇아 구한다면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또한 믿고 구한 것은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응답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하셨지요(막 11:24).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과 하늘 보좌를 울리는 기도를 통해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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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가 큰 물고기에게 삼켜 3일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통회자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일까요?
①
②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③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09~1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금식과 보호식’
금식기도는 어떤 목적을 갖고 아무 음식도 먹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보호식은 금식이 끝난 후 빠진 기를 보충하고 약해진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도록 먹는 음식을 말하며, 금식한 날짜만큼 보호식을 할 때 온전한 금식이 된다.
보호식 중에는 무리가 가거나 힘든 일은 피해야 한다. 식사는 미음이나 죽으로 하고, 반찬은 주로 채식을 하되 양념은 하지 않는다. 육류나 기름기 있는 음식, 맵거나 짜고 단 자극적인 음식, 화학조미료와 향신료는 피하는 것이 좋다.
보호식을 잘하면 붓지 않고 피부도 뽀얗게 살아나며 체중도 신속하게 회복된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금식과 기도를 통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 중에는 금식과 기도가 있습니다.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1. 금식과 기도로 응답받은 니느웨 백성
강대국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시지요. 요나는 주전 785년을 전후하여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갑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요나가 탄 배는 거의 난파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혀 바다에 던져지지요. 그러자 놀랍게도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하였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통회자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십니다.
결국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대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쳤습니다. 그러자 이방 민족인 니느웨 백성들은 금식을 선포하고, 어른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께 회개했지요. 그 소문을 들은 왕 또한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니느웨 백성에게 선포하기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였습니다(욘 3:7~8).
이처럼 금식으로 정성을 내보이며, 악한 행실에서 떠나 힘써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릴 재앙을 거두셨지요. 그만큼 금식과 기도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큰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니느웨 백성이 왕과 함께 회개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고 금식하면서 부르짖어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금식은 한 끼에서 하루, 이틀, 사흘을 할 수도 있고 오 일, 칠 일 또는 그 이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금식을 못하는 사람은 한 끼 혹은 하루, 이틀 등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장기 금식은 먼저, 많은 기도를 쌓은 후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정확히 주관받아 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6~7절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무조건 굶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하면서 기운이 없다며 잠만 자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금식 중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으면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금식할 때에는 오락을 금하고 사랑으로 기도해야 합니다(사 58:3).
이러한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8~9) 약속하셨습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금식뿐 아니라 기도도 하나님께 합당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고 응답받은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습관을 좇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고(눅 22:39),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행 3:1). 청소도 매일 하면 간단히 끝낼 수 있으나 오래 묵혀 두면 먼지가 쌓이고 때가 찌들어 한참 걸립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평소에 습관을 좇아서 하면 시험 환난이 오지 않고, 설령 오더라도 가볍게 물러가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시험 환난을 당하고 나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허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둘째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으면 중심이 바로 서고 상대를 경외하는 마음의 표현이 됩니다. 우리가 부모님이나 대통령 앞에서도 삼가 조심하는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고(눅 22:41),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행 7:60).
셋째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렘 29:12~13, 33:3). 사도행전 4장을 보면 교회 역사상 큰 권능과 부흥이 일어났던 초대교회는 큰 핍박 속에서도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많은 기사와 표적이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을 때도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출 15:22~25).
하나님께서는 금식할 때에도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공중 권세 잡은 원수 마귀 사단의 진을 뚫고 하늘 보좌에 상달되는 기도를 하려면 간절한 중심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충만하고 시험 환난이 물러가는 등 크고 작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 응답받은 사람들의 행함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 갈멜 산에 올라가 기도하여 비를 내리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어찌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였던지 얼굴이 무릎 사이로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온 지 70년 가까이 되어 나이가 많은데도 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며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회개하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장은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고 크고 놀라운 계시를 전해 주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것과 세상 끝 날에 될 일을 알려 준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눅 22:44) 하신 대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 믿음과 직분과 위치에 맞춰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에 지나쳐서 욕심을 좇아 구한다면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또한 믿고 구한 것은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응답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하셨지요(막 11:24).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과 하늘 보좌를 울리는 기도를 통해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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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가 큰 물고기에게 삼켜 3일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통회자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일까요?
①
②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다
③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09~1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금식과 보호식’
금식기도는 어떤 목적을 갖고 아무 음식도 먹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보호식은 금식이 끝난 후 빠진 기를 보충하고 약해진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도록 먹는 음식을 말하며, 금식한 날짜만큼 보호식을 할 때 온전한 금식이 된다.
보호식 중에는 무리가 가거나 힘든 일은 피해야 한다. 식사는 미음이나 죽으로 하고, 반찬은 주로 채식을 하되 양념은 하지 않는다. 육류나 기름기 있는 음식, 맵거나 짜고 단 자극적인 음식, 화학조미료와 향신료는 피하는 것이 좋다.
보호식을 잘하면 붓지 않고 피부도 뽀얗게 살아나며 체중도 신속하게 회복된다.
2017-02-17
제7과모든 것에 화목하라
잠 16:7
읽을말씀 : 잠 16:7 | 외울말씀 : 히 12:14 l 참고 말씀: 마 5:9
교육목표 : 어느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고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성격이 모가 나면 이리저리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고 서로 고통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은 남들과도 잘 어울리며 부딪히지 않고 화평하지요. 이런 사람과는 화목을 이루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자신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1. 화목의 중요성
사람들 사이에 종종 다툼이 일어나고 화목하지 못한 모습을 봅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하고 옳은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며,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이 진리입니다(요 14:6).
사람이 태어나 진리로만 가르침 받고 진리 안에 산다면 주님의 마음을 닮아 모두와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나 스승, 이웃이나 친구들로부터 배웠고 그중에는 진리가 아닌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정립한 이론이나 사고방식과 양심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화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빌 3:8) 고백한 것과 같이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을 깨뜨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하셨고,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하셨습니다. 즉 화평이 얼마나 중요하며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2. 화목하지 못할 때의 고통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서로 섬기며 사랑하면 화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 내 이론, 내 방식만이 옳다고 고집하면 화목할 수 없고 서로 고통을 받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75세 때에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10년이 넘도록 사라에게는 잉태의 소식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주지요. 하갈이 잉태하자 여 주인 사라를 멸시합니다. 이에 사라가 아브라함을 원망하며 하갈을 학대하니 그녀는 도망가 버리지요.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다시 돌아와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14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마침내 아들 이삭을 낳았지요.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사라가 참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하지요.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매우 근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지요. 비록 약속의 아들은 아니지만 이스마엘을 떠나 보내야 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처럼 사라가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결과 이러한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야곱의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입니다. 두 사람은 자매이지만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서로 투기하지요. 레아가 아들을 네 명이나 낳는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라헬은 자신의 여종을 야곱에게 첩으로 줍니다. 언니 레아도 지지 않고 자신의 여종을 첩으로 주지요.
이러한 관계가 그의 아들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게다가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알리곤 하여 형들은 그가 눈엣가시였지요. 결국 이복 형들에 의해 요셉은 타국으로 팔려가고 맙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고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화목하지 못하며 불행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진리 안에 살 때 누릴 수 있습니다.
3. 진정한 행복을 얻는 길
잠언 16장 7절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하셨으니 만일 사람과 화목하지 못해 고통받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원수까지라도 화목하게 하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유다인으로서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자기 민족이 몰살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사촌오빠 모르드개에게서 들었습니다. 아말렉 사람 하만의 간계로 모든 유다인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는 자신의 지혜를 동원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수도인 수산 성에 사는 모든 유다인과 함께 삼 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런 뒤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당시 그 나라에는 왕이 부르지 않을 때 그 앞에 나가면 죽게 되는 법이 있었습니다. 왕이 금홀(금으로 된 지팡이)을 내밀어야만 살 수 있었지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에스더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여 에스더가 매우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셨습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며 여러 차례 소원을 말하라고 했지요(에 5:3~6, 7:2). 그러나 에스더는 하만의 계략을 즉시 폭로하지 않고 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모습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니 소원대로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받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이룰 수 있습니다.
4. 모든 것에 화목하여 축복을 받으려면
그러면 우리가 진리 안에서 화목의 중요성을 깨달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모든 것에 화목하여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솔로몬처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번제 곧 예배드리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 듣는 것을 즐거워하며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순종해 나감으로 마음이 깨끗한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참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음으로 열심히 전도하며 선을 행하고 열심히 덕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행함 있는 믿음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함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는 고넬료와 다비다를 들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면서도 온 가족이 성령을 받았고, 다비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행 9~10장).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모든 것에 화목을 이루게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종들과 화목을 이루며, 믿음의 형제들과도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 자녀 간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친구 간에 그리고 직장 동료나 상사 사이 등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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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공통으로 들어갈 단어를 써 보세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 )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 )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2. 사라와 하갈, 라헬과 레아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모든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99~10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만’은 어떤 인물일까?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로 아하수에로 왕의 대신이었다.
왕이 그의 지위를 높이자 왕의 모든 신복들이 꿇어 절하는데 유다 민족인 모르드개만 거부하자 이에 분을 품고 모르드개를 포함한 유다 민족을 멸절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에 에스더는 3일 금식을 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가 하만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다.
결국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던 나무에 하만과 그의 아들들이 달려 죽게 된다.
교육목표 : 어느 누구와도 불화하지 않고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성격이 모가 나면 이리저리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고 서로 고통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은 남들과도 잘 어울리며 부딪히지 않고 화평하지요. 이런 사람과는 화목을 이루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자신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1. 화목의 중요성
사람들 사이에 종종 다툼이 일어나고 화목하지 못한 모습을 봅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하고 옳은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며,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이 진리입니다(요 14:6).
사람이 태어나 진리로만 가르침 받고 진리 안에 산다면 주님의 마음을 닮아 모두와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나 스승, 이웃이나 친구들로부터 배웠고 그중에는 진리가 아닌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정립한 이론이나 사고방식과 양심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화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빌 3:8) 고백한 것과 같이 자신이 옳다 여기는 것을 깨뜨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하셨고,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하셨습니다. 즉 화평이 얼마나 중요하며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2. 화목하지 못할 때의 고통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서로 섬기며 사랑하면 화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 내 이론, 내 방식만이 옳다고 고집하면 화목할 수 없고 서로 고통을 받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75세 때에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10년이 넘도록 사라에게는 잉태의 소식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여종 하갈을 첩으로 주지요. 하갈이 잉태하자 여 주인 사라를 멸시합니다. 이에 사라가 아브라함을 원망하며 하갈을 학대하니 그녀는 도망가 버리지요.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다시 돌아와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14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마침내 아들 이삭을 낳았지요.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본 사라가 참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하지요.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매우 근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지요. 비록 약속의 아들은 아니지만 이스마엘을 떠나 보내야 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처럼 사라가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결과 이러한 많은 고통이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야곱의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입니다. 두 사람은 자매이지만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서로 투기하지요. 레아가 아들을 네 명이나 낳는 동안 아이를 낳지 못한 라헬은 자신의 여종을 야곱에게 첩으로 줍니다. 언니 레아도 지지 않고 자신의 여종을 첩으로 주지요.
이러한 관계가 그의 아들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합니다. 게다가 요셉이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알리곤 하여 형들은 그가 눈엣가시였지요. 결국 이복 형들에 의해 요셉은 타국으로 팔려가고 맙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고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화목하지 못하며 불행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진리 안에 살 때 누릴 수 있습니다.
3. 진정한 행복을 얻는 길
잠언 16장 7절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하셨으니 만일 사람과 화목하지 못해 고통받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원수까지라도 화목하게 하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유다인으로서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자기 민족이 몰살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사촌오빠 모르드개에게서 들었습니다. 아말렉 사람 하만의 간계로 모든 유다인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는 자신의 지혜를 동원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수도인 수산 성에 사는 모든 유다인과 함께 삼 일 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런 뒤 자기 민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당시 그 나라에는 왕이 부르지 않을 때 그 앞에 나가면 죽게 되는 법이 있었습니다. 왕이 금홀(금으로 된 지팡이)을 내밀어야만 살 수 있었지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에스더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왕 앞에 나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주관하여 에스더가 매우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셨습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며 여러 차례 소원을 말하라고 했지요(에 5:3~6, 7:2). 그러나 에스더는 하만의 계략을 즉시 폭로하지 않고 왕을 위한 잔치를 베풀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모습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니 소원대로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받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이룰 수 있습니다.
4. 모든 것에 화목하여 축복을 받으려면
그러면 우리가 진리 안에서 화목의 중요성을 깨달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모든 것에 화목하여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솔로몬처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번제 곧 예배드리기를 즐겨해야 합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 듣는 것을 즐거워하며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순종해 나감으로 마음이 깨끗한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참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음으로 열심히 전도하며 선을 행하고 열심히 덕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행함 있는 믿음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함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는 고넬료와 다비다를 들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면서도 온 가족이 성령을 받았고, 다비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행 9~10장).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모든 것에 화목을 이루게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종들과 화목을 이루며, 믿음의 형제들과도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 자녀 간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이웃 간에, 친구 간에 그리고 직장 동료나 상사 사이 등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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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공통으로 들어갈 단어를 써 보세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 )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 )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2. 사라와 하갈, 라헬과 레아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모든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어떤 수고와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99~10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만’은 어떤 인물일까?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로 아하수에로 왕의 대신이었다.
왕이 그의 지위를 높이자 왕의 모든 신복들이 꿇어 절하는데 유다 민족인 모르드개만 거부하자 이에 분을 품고 모르드개를 포함한 유다 민족을 멸절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에 에스더는 3일 금식을 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가 하만의 음모가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다.
결국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던 나무에 하만과 그의 아들들이 달려 죽게 된다.
2017-02-10
제6과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왕하 5:23~27
읽을말씀 : 왕하 5:23~27 | 외울말씀 : 전 12:14 ㅣ 참고 말씀: 왕하 6:8~12
교육목표 :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 거짓됨 없이 정직하게 행함으로 하나님께 신뢰를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에 ‘감각되다’라는 것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해 바깥의 어떤 자극이 느껴지는 것이라 말합니다. 영적으로도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세상의 죄악을 보면 심령이 감각(感覺)되어 애통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책망할 것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심령이 감각되지 않아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그랬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 장군
이스라엘과 인접한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은 부귀와 명예, 권세가 있었지만 커다란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에서 사로잡아 온 여자 아이에게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면 문둥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서 스승을 끝까지 붙좇아 갑절의 영감을 얻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나아만은 포로로 잡아온 아이의 말이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허락을 받아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값비싼 의복 열 벌을 준비해 이스라엘로 떠났습니다.
드디어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사환이 나오더니 엘리사의 말씀이라며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면 깨끗이 회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기가 막혔습니다. 먼 곳에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왔건만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 말만 전하니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요.
더구나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니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아람에는 요단강보다 더 좋은 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나아만은 너무 분하였습니다. 잔뜩 부푼 기대가 일시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비참한 심경으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지요.
이에 나아만은 돌이켜 순종합니다. 종들의 말에도 귀 기울이는 그의 겸손과 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몸을 잠갔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 일곱 번 몸을 잠갔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으로 흉측했던 피부가 어린아이 살같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단강은 영적으로 구원을, 물은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말씀으로 깨끗이 씻고, 온전히 진리 가운데 살면 어떠한 병이라도 치료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 일곱은 완전수이므로 일곱 번 씻는 것은 완전하게 씻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찾아가 준비해 온 예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내 받지 않습니다.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린 나아만은 이제부터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고백한 후 떠납니다.
2. 엘리사를 속이다가 문둥병에 걸린 사환 게하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나아만이 가져 온 예물이 너무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뒤쫓아가 엘리사가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달라고 했다며 거짓말을 합니다. 이에 나아만이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자 자기 집에 감추어 두었지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네가 어디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종이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시치미를 떼지요.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感覺)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는 무서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사는 게하시의 범죄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회개할 수 있도록 “네가 어디서 오느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지요. 이처럼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게하시는 문둥병이 들어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게하시는 아무도 자기의 행동을 모르리라 여겼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심령을 감각시켜 알려 주시니 게하시가 행한 일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가인이 아무도 몰래 동생 아벨을 쳐 죽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창 4장). 그래서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에 사라가 속으로 웃은 것도 다 아셨습니다(창 18장). 당시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경수도 이미 끊어진 뒤였기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까 생각하고 웃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일도 다 아십니다(시 121:4).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도 어느 곳에서 누가 무슨 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처음 보고도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며 칭찬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중풍 환자를 고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을 듣고 서기관들이 속으로 분에 넘친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마 9장).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까지도 다 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보통 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을 밝히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엘리사는 가만히 앉아서도 아람 왕이 그 심복들과 비밀리에 어떤 작전을 의논하는지 알았습니다(왕하 6:8~12). 당시 이스라엘과 아람은 전쟁이 잦았는데 이스라엘 왕에게 그 작전을 전해 줌으로 그때마다 방비할 수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자기 측근 중에 이스라엘의 첩자가 있는 줄 생각하고 번민할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하였는데(행 5장), 막상 돈을 쥐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 얼마를 감추고 전부인 양 가져왔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한 일이지만 베드로는 알았고, 하나님을 속이려 한 아나니아를 엄히 책망하자 그 자리에서 혼이 떠나 죽었지요. 이를 알지 못하고 똑같이 거짓말을 한 삽비라 역시 죽게 됩니다. 아무리 은밀히 행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이들에 대해 성경에 기록하신 것도 성령과 주의 종을 속이면 그만큼 화가 미침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4. 정직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응답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과연 가르침대로 십일조와 감사예물을 잘 드리는지, 믿음으로 행하는지, 기도하고 순종하는지 등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십일조와 감사예물을 잘 드리고 기도도 잘하니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일 수 없습니다. 부모 형제나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하지요.
하나님을 속이는 것에는 거짓말뿐 아니라 과장하고 보태는 것과 도적질도 포함됩니다. 또한 십일조, 감사예물 등을 마음에 작정하고 하지 않는 것, 기도하는 척하는 것, 중심으로 행하지 않는 것, 기도하라는 성령의 주관에 순종하지 않는 것, 금식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 그 밖에도 많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거나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집니다.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정직한 길로 갈 수 있고, 온전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연단받을 때에는 두렵고 어려운 것 같지만 값진 연단의 시기가 있기에 결국 응답받는 형통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부모가 책망하거나 바른길로 이끄는 것이 사랑이듯이, 연단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정직한 길로 행하여 결코 하나님을 속이는 일은 없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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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바치고자 했는데 왜 혼이 떠나 죽게 되었을까요?
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사환 게하시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왜 “네가 어디서 오느냐”라고 물었을까요?
3.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문둥병을 치료받을 수 있었을까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85~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들은 부부로서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신자이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자발적으로 교회에 드렸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역시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친다고 했지만 마음이 변질되어 돈의 일부를 감추고 마치 전액인 것처럼 사도 베드로를 속인다.
이는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요, 성령을 속인 것이기에 결국 혼이 떠나 죽고 만다.
교육목표 :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 거짓됨 없이 정직하게 행함으로 하나님께 신뢰를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에 ‘감각되다’라는 것은 눈, 코, 귀, 혀, 살갗을 통해 바깥의 어떤 자극이 느껴지는 것이라 말합니다. 영적으로도 죄를 짓지 않고 선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세상의 죄악을 보면 심령이 감각(感覺)되어 애통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책망할 것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심령이 감각되지 않아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그랬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온 나아만 장군
이스라엘과 인접한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은 부귀와 명예, 권세가 있었지만 커다란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에서 사로잡아 온 여자 아이에게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면 문둥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서 스승을 끝까지 붙좇아 갑절의 영감을 얻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나아만은 포로로 잡아온 아이의 말이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나아만은 아람 왕의 허락을 받아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값비싼 의복 열 벌을 준비해 이스라엘로 떠났습니다.
드디어 나아만은 엘리사의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사환이 나오더니 엘리사의 말씀이라며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면 깨끗이 회복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기가 막혔습니다. 먼 곳에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왔건만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 말만 전하니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요.
더구나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니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아람에는 요단강보다 더 좋은 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나아만은 너무 분하였습니다. 잔뜩 부푼 기대가 일시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비참한 심경으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종들이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지요.
이에 나아만은 돌이켜 순종합니다. 종들의 말에도 귀 기울이는 그의 겸손과 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몸을 잠갔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 일곱 번 몸을 잠갔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으로 흉측했던 피부가 어린아이 살같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단강은 영적으로 구원을, 물은 하나님 말씀을 의미합니다. 즉 말씀으로 깨끗이 씻고, 온전히 진리 가운데 살면 어떠한 병이라도 치료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 일곱은 완전수이므로 일곱 번 씻는 것은 완전하게 씻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문둥병을 치료받은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찾아가 준비해 온 예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내 받지 않습니다.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린 나아만은 이제부터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고백한 후 떠납니다.
2. 엘리사를 속이다가 문둥병에 걸린 사환 게하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나아만이 가져 온 예물이 너무 탐이 났습니다. 그래서 뒤쫓아가 엘리사가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달라고 했다며 거짓말을 합니다. 이에 나아만이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자 자기 집에 감추어 두었지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네가 어디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종이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시치미를 떼지요.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感覺)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는 무서운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사는 게하시의 범죄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회개할 수 있도록 “네가 어디서 오느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지요. 이처럼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게하시는 문둥병이 들어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게하시는 아무도 자기의 행동을 모르리라 여겼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심령을 감각시켜 알려 주시니 게하시가 행한 일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가인이 아무도 몰래 동생 아벨을 쳐 죽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창 4장). 그래서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에 사라가 속으로 웃은 것도 다 아셨습니다(창 18장). 당시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경수도 이미 끊어진 뒤였기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까 생각하고 웃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 일도 다 아십니다(시 121:4).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도 어느 곳에서 누가 무슨 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7절을 보면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처음 보고도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며 칭찬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중풍 환자를 고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을 듣고 서기관들이 속으로 분에 넘친다고 생각하였습니다(마 9장). 그때 예수님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품은 생각까지도 다 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보통 사람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을 밝히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엘리사는 가만히 앉아서도 아람 왕이 그 심복들과 비밀리에 어떤 작전을 의논하는지 알았습니다(왕하 6:8~12). 당시 이스라엘과 아람은 전쟁이 잦았는데 이스라엘 왕에게 그 작전을 전해 줌으로 그때마다 방비할 수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자기 측근 중에 이스라엘의 첩자가 있는 줄 생각하고 번민할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하였는데(행 5장), 막상 돈을 쥐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 얼마를 감추고 전부인 양 가져왔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한 일이지만 베드로는 알았고, 하나님을 속이려 한 아나니아를 엄히 책망하자 그 자리에서 혼이 떠나 죽었지요. 이를 알지 못하고 똑같이 거짓말을 한 삽비라 역시 죽게 됩니다. 아무리 은밀히 행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이들에 대해 성경에 기록하신 것도 성령과 주의 종을 속이면 그만큼 화가 미침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4. 정직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응답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과연 가르침대로 십일조와 감사예물을 잘 드리는지, 믿음으로 행하는지, 기도하고 순종하는지 등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십일조와 감사예물을 잘 드리고 기도도 잘하니 신앙이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일 수 없습니다. 부모 형제나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속이는 일이 없어야 하지요.
하나님을 속이는 것에는 거짓말뿐 아니라 과장하고 보태는 것과 도적질도 포함됩니다. 또한 십일조, 감사예물 등을 마음에 작정하고 하지 않는 것, 기도하는 척하는 것, 중심으로 행하지 않는 것, 기도하라는 성령의 주관에 순종하지 않는 것, 금식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 그 밖에도 많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거나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집니다.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정직한 길로 갈 수 있고, 온전한 모습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연단받을 때에는 두렵고 어려운 것 같지만 값진 연단의 시기가 있기에 결국 응답받는 형통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부모가 책망하거나 바른길로 이끄는 것이 사랑이듯이, 연단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범사에 정직한 길로 행하여 결코 하나님을 속이는 일은 없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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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바치고자 했는데 왜 혼이 떠나 죽게 되었을까요?
2.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사환 게하시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왜 “네가 어디서 오느냐”라고 물었을까요?
3.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문둥병을 치료받을 수 있었을까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85~9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들은 부부로서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신자이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자발적으로 교회에 드렸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역시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바친다고 했지만 마음이 변질되어 돈의 일부를 감추고 마치 전액인 것처럼 사도 베드로를 속인다.
이는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요, 성령을 속인 것이기에 결국 혼이 떠나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