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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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3
제25과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는 것
고전 13:5
읽을말씀 : 고전 13:5 | 외울말씀 : 약 1:20 ㅣ 참고 말씀: 고전 10:31
교육목표 :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성냄을 버리고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희생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갔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합니다. 반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1) 사랑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한 아브라함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범사에 내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한 사람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올 때 조카 롯이 함께했는데, 아브라함과 함께함으로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아 가축이 심히 많아졌지요. 어찌나 많았던지 가축에게 먹일 물이 부족하여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이 깨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롯에게 땅을 택하여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목축업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풀과 물입니다. 가나안 지경은 물과 풀이 넉넉한 곳이 많지 않으니 땅을 양보한다는 것은 생존권을 양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했기에 배려한 것입니다. 이런 삼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롯은 물이 많고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해 떠납니다. 자신의 유익을 좇아 떠나는 롯을 볼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불편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카가 더 좋은 땅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하시며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변 나라 왕들의 예우를 받을 만큼 엄청난 거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으며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그러면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다 참사랑을 이루면 각 상황마다 선의 지혜가 풍성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지요. 이처럼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져서 마음껏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지 않는 이웃이나 가족에게 사랑받게 되지요.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게 되면 화평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나를 힘들게 하고 자신의 유익만 좇는 사람,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 비진리를 행하고 노상 악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지요?
그런 경우에는 피해 버리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희생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될 때 영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들며,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냄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바로 미움과 성냄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표정만 보고 ‘화가 났구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 의분과 성냄의 차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은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지요. 온유하신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고 돌변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지요.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혈기가 대단하시네? 화를 내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이지요.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는 결국 공의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분을 내신 것도 영혼들을 깨우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그만큼 성결되어 죄가 없을 때 의분 또는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2) 성내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성내는 이유는 먼저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저마다 성장한 환경이나 배움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이 다르고 교양이 다르며 판단 기준이 다른데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니 감정이 나지요. 또한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성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앞서거나 나은 위치에 있으면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요. 이 외에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냅니다.
사람들은 성내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나쁜 감정부터 일어납니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먼저 감정을 자극하고 결국 성내는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는 단계가 바로 성냄의 전초 단계입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혈기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3:16).
그러면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절제를 잘해서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력이 생겨 튕겨져 나오듯이 화를 눌러 참는 것이 순간의 위기는 모면한다 해도 언젠가는 폭발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성내지 않으려면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 )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한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 )과 ( )이다.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30~1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화가 날 때’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매우 화가 나면 백까지 세라.”는 글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날 때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찬찬히 생각해 보자. 그러면 한순간 참지 못해 후회할 일이나 부끄럼 당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인내하다 보면 나중에는 성나게 하는 감정까지 차츰 버려진다.
예전에는 10번 화내던 것이 9번, 8번 점점 줄어들어 아무리 화가 날 상황이 되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교육목표 :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성냄을 버리고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희생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갔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합니다. 반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1) 사랑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한 아브라함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범사에 내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한 사람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올 때 조카 롯이 함께했는데, 아브라함과 함께함으로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아 가축이 심히 많아졌지요. 어찌나 많았던지 가축에게 먹일 물이 부족하여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이 깨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롯에게 땅을 택하여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목축업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풀과 물입니다. 가나안 지경은 물과 풀이 넉넉한 곳이 많지 않으니 땅을 양보한다는 것은 생존권을 양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했기에 배려한 것입니다. 이런 삼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롯은 물이 많고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해 떠납니다. 자신의 유익을 좇아 떠나는 롯을 볼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불편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카가 더 좋은 땅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하시며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변 나라 왕들의 예우를 받을 만큼 엄청난 거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으며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그러면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다 참사랑을 이루면 각 상황마다 선의 지혜가 풍성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지요. 이처럼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져서 마음껏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지 않는 이웃이나 가족에게 사랑받게 되지요.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게 되면 화평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나를 힘들게 하고 자신의 유익만 좇는 사람,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 비진리를 행하고 노상 악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지요?
그런 경우에는 피해 버리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희생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될 때 영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들며,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냄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바로 미움과 성냄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표정만 보고 ‘화가 났구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 의분과 성냄의 차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은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지요. 온유하신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고 돌변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지요.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혈기가 대단하시네? 화를 내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이지요.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는 결국 공의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분을 내신 것도 영혼들을 깨우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그만큼 성결되어 죄가 없을 때 의분 또는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2) 성내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성내는 이유는 먼저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저마다 성장한 환경이나 배움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이 다르고 교양이 다르며 판단 기준이 다른데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니 감정이 나지요. 또한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성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앞서거나 나은 위치에 있으면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요. 이 외에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냅니다.
사람들은 성내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나쁜 감정부터 일어납니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먼저 감정을 자극하고 결국 성내는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는 단계가 바로 성냄의 전초 단계입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혈기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3:16).
그러면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절제를 잘해서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력이 생겨 튕겨져 나오듯이 화를 눌러 참는 것이 순간의 위기는 모면한다 해도 언젠가는 폭발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성내지 않으려면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 )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한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 )과 ( )이다.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30~14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화가 날 때’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매우 화가 나면 백까지 세라.”는 글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날 때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찬찬히 생각해 보자. 그러면 한순간 참지 못해 후회할 일이나 부끄럼 당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인내하다 보면 나중에는 성나게 하는 감정까지 차츰 버려진다.
예전에는 10번 화내던 것이 9번, 8번 점점 줄어들어 아무리 화가 날 상황이 되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2017-06-16
제24과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
고전 13:4~5
읽을말씀 : 고전 13:4~5 | 외울말씀 : 잠 16:18 ㅣ 참고 말씀: 약 4:10
교육목표 : 누구에게든지 무례히 행치 않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며 생명 다해 섬기는 최고의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은 남보다 우월하다 느끼고 쉽게 교만에 빠집니다. 또 일이 술술 풀리고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우쭐대거나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히 싫어하시는 악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서로 소통할 수 없도록 이 땅의 언어가 혼잡하게 나뉘었던 바벨탑 사건도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이 생기고 자기가 옳다며 혈기를 내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데도 잘 모르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 확신이 있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고 버리기 위해 노력하면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니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사람은 누구나 성결하기 전에는 교만해질 수 있는 속성이 있으므로 이 죄성을 뿌리째 뽑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불같은 기도로 온전히 뽑지 않으면 어느 순간 다시 나올 수 있지요. 마치 잡초를 잘라내도 뿌리가 남아 있으면 다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며, 나보다 상대를 낫게 여기고, 생명 다해 섬기는 최고의 사랑을 이루기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고 말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를 이룹니다. 이처럼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중요합니다. 바른 몸가짐과, 때와 장소에 맞는 적절한 행동은 보는 이로 하여금 좋은 인상을 심어 줍니다. 반대로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무시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줍니다. 더구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에게 무례하게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그 말이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인사법이나 대화법 등 나라나 시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예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지요.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허물없이 편하게 대한다는 것이 자칫 예의 없는 행동이 나오거나 무례한 말과 행동으로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진정 사랑이 있다면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하는 것일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데 하나님 앞에 존다는 것은 큰 실례이지요. 또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윗사람과 대화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추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도 무례를 잘 범하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습니다. 또 약속시간에 늦거나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갑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하지요. 무례함이란 결국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마음, 사랑이 없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상대를 진정 사랑하면 늘 배려하므로 무례를 범치 않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 )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 )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2.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 )하지 않는다.
100% 확신이 있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 )를 남겨둔다.
3.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경우와 사람에게 무례한 행동은 무엇인지 말해 보세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17~12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배려하는 마음’
깜깜한 밤에 한 사람이 등불을 들고 길을 가고 있었다. 마주 오던 행인이 보니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행인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앞을 보지 못하면서 왜 등불을 들고 다닙니까?”
그러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답했다. “당신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등불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배려는 사소한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다.
교육목표 : 누구에게든지 무례히 행치 않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며 생명 다해 섬기는 최고의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은 남보다 우월하다 느끼고 쉽게 교만에 빠집니다. 또 일이 술술 풀리고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우쭐대거나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히 싫어하시는 악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서로 소통할 수 없도록 이 땅의 언어가 혼잡하게 나뉘었던 바벨탑 사건도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이 생기고 자기가 옳다며 혈기를 내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데도 잘 모르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 확신이 있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고 버리기 위해 노력하면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니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사람은 누구나 성결하기 전에는 교만해질 수 있는 속성이 있으므로 이 죄성을 뿌리째 뽑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불같은 기도로 온전히 뽑지 않으면 어느 순간 다시 나올 수 있지요. 마치 잡초를 잘라내도 뿌리가 남아 있으면 다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며, 나보다 상대를 낫게 여기고, 생명 다해 섬기는 최고의 사랑을 이루기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고 말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를 이룹니다. 이처럼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중요합니다. 바른 몸가짐과, 때와 장소에 맞는 적절한 행동은 보는 이로 하여금 좋은 인상을 심어 줍니다. 반대로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무시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줍니다. 더구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에게 무례하게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그 말이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인사법이나 대화법 등 나라나 시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예절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지요.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허물없이 편하게 대한다는 것이 자칫 예의 없는 행동이 나오거나 무례한 말과 행동으로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진정 사랑이 있다면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하는 것일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데 하나님 앞에 존다는 것은 큰 실례이지요. 또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윗사람과 대화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추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에게도 무례를 잘 범하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습니다. 또 약속시간에 늦거나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갑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하지요. 무례함이란 결국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마음, 사랑이 없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상대를 진정 사랑하면 늘 배려하므로 무례를 범치 않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 )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 )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2.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 )하지 않는다.
100% 확신이 있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 )를 남겨둔다.
3.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경우와 사람에게 무례한 행동은 무엇인지 말해 보세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17~12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배려하는 마음’
깜깜한 밤에 한 사람이 등불을 들고 길을 가고 있었다. 마주 오던 행인이 보니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행인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앞을 보지 못하면서 왜 등불을 들고 다닙니까?”
그러자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답했다. “당신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 등불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배려는 사소한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다.
2017-06-09
제23과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것
고전 13:4
읽을말씀 : 고전 13:4 | 외울말씀 : 요일 2:15~16 l 참고 말씀: 잠 14:30
교육목표 :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투기하는 세상의 헛된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믿음의 형제 자매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대가 승승장구하면 부러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상대가 밉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아 행복을 짓밟고 싶어 하지요.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늘 이 모양인가?’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대부분 낙심하는 마음은 시기,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상대가 잘될 때에 낙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지요. 낙심하거나 자책하며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自己)’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자아(自我)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투기가 심해지면 상대에게 해를 가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갈 5:19∼21).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죄, 곧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투기의 유형
먼저는, 이성 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투기입니다. 이성에게 더 사랑을 받으려고 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입니다. 이들은 자매 지간이지만 남편 야곱의 사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지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었다면 상대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투기하므로 불행하였으며 자녀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으로, 상대가 나보다 나으므로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대체로 상대가 부유하고 지식이 많으며 외모나 능력 면에서 앞서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고 인정받을 때 투기가 일어납니다. 자신보다 앞서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고 헐뜯습니다. 내가 잘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경쟁자의 약점을 알리기도 하고 누명을 씌워 상사의 눈 밖에 나도록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를 따돌리거나 선생님에게 사랑받는 아이를 괴롭히는 일도 있지요. 부모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형제간에 다투며 헐뜯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형제들 간에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질서나 직분 또는 신앙이 앞서거나 열심히 충성하는 형제, 자매를 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자신과 나이나 직분이 비슷한 상대, 잘 아는 사람에 대해 많이 나타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잘못이나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괜히 불편하고 부글부글합니다. 서로를 잘 알다 보니 자신보다 별로 나은 것도 없고 이런저런 부족함도 많은데 사랑받고 인정받으니 불만스러운 것이지요. 이러한 투기는 주의 종과 성도 사이에, 혹은 교회와 교회 사이, 교단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끼리, 주님의 몸 된 교회 간에 투기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투기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입니다. 충신 다윗이 자신보다 백성들의 사랑을 더 받자 투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오랜 세월 다윗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한 대로 투기는 자신을 상하게 하니 백해무익합니다. 따라서 남보다 앞서고 싶다면 투기함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투기하는 이유는 믿음이 적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적으면 세상 부와 명예, 권세 등을 더 갖기 위해 투기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주 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가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려고 주의 일에 열심을 냅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이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보다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이러한 자랑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이웃에게 자랑한다고 합시다. 함께 기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어떻겠습니까? 대개 자존심이 상하지요. 속이 상한 나머지 괜히 자녀를 나무랍니다.
이웃을 배려하는 선한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자기 자녀가 공부를 잘해도 함부로 자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웃의 자녀도 잘하기를 바라며, 잘되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칭찬해 줄 것입니다.
자랑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찌하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영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스로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 질투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마음 안에 ‘이생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자랑하게 마련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외모를 자랑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자신이 가진 돈과 외모, 명예, 권세 등이 앞선 것입니다.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헛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자랑 중에도 선하고 좋은 자랑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7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하신 대로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주 안에서의 자랑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고 천국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예수님 덕분에 영생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립니다. 그러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생의 자랑을 버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이다.
3.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4. 요한일서 2:15~16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00~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히스기야 왕의 자랑으로 인한 여파
히스기야 왕은 한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였고 성전을 정결케 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기도로 앗수르 제국의 공격을 이겨냈고 죽을병에 걸렸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15년간이나 생명을 연장받았다. 그런데 그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이 외교 사절단을 보냈을 때 그들에게 자신의 보물과 성전의 기물들을 보여 주며 위세를 자랑한다. 결국 그 자랑 때문에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그토록 자랑하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교육목표 :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투기하는 세상의 헛된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믿음의 형제 자매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대가 승승장구하면 부러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상대가 밉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아 행복을 짓밟고 싶어 하지요.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늘 이 모양인가?’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대부분 낙심하는 마음은 시기,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상대가 잘될 때에 낙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지요. 낙심하거나 자책하며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自己)’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자아(自我)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투기가 심해지면 상대에게 해를 가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갈 5:19∼21).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죄, 곧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투기의 유형
먼저는, 이성 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투기입니다. 이성에게 더 사랑을 받으려고 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입니다. 이들은 자매 지간이지만 남편 야곱의 사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지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었다면 상대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투기하므로 불행하였으며 자녀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으로, 상대가 나보다 나으므로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대체로 상대가 부유하고 지식이 많으며 외모나 능력 면에서 앞서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고 인정받을 때 투기가 일어납니다. 자신보다 앞서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고 헐뜯습니다. 내가 잘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경쟁자의 약점을 알리기도 하고 누명을 씌워 상사의 눈 밖에 나도록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를 따돌리거나 선생님에게 사랑받는 아이를 괴롭히는 일도 있지요. 부모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형제간에 다투며 헐뜯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형제들 간에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질서나 직분 또는 신앙이 앞서거나 열심히 충성하는 형제, 자매를 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자신과 나이나 직분이 비슷한 상대, 잘 아는 사람에 대해 많이 나타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잘못이나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괜히 불편하고 부글부글합니다. 서로를 잘 알다 보니 자신보다 별로 나은 것도 없고 이런저런 부족함도 많은데 사랑받고 인정받으니 불만스러운 것이지요. 이러한 투기는 주의 종과 성도 사이에, 혹은 교회와 교회 사이, 교단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끼리, 주님의 몸 된 교회 간에 투기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투기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입니다. 충신 다윗이 자신보다 백성들의 사랑을 더 받자 투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오랜 세월 다윗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한 대로 투기는 자신을 상하게 하니 백해무익합니다. 따라서 남보다 앞서고 싶다면 투기함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투기하는 이유는 믿음이 적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적으면 세상 부와 명예, 권세 등을 더 갖기 위해 투기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주 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가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려고 주의 일에 열심을 냅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이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보다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이러한 자랑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이웃에게 자랑한다고 합시다. 함께 기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어떻겠습니까? 대개 자존심이 상하지요. 속이 상한 나머지 괜히 자녀를 나무랍니다.
이웃을 배려하는 선한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자기 자녀가 공부를 잘해도 함부로 자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웃의 자녀도 잘하기를 바라며, 잘되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칭찬해 줄 것입니다.
자랑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찌하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영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스로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 질투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마음 안에 ‘이생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자랑하게 마련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외모를 자랑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자신이 가진 돈과 외모, 명예, 권세 등이 앞선 것입니다.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헛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자랑 중에도 선하고 좋은 자랑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7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하신 대로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주 안에서의 자랑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고 천국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예수님 덕분에 영생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립니다. 그러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생의 자랑을 버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이다.
3.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4. 요한일서 2:15~16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00~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 갑시다!
히스기야 왕의 자랑으로 인한 여파
히스기야 왕은 한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였고 성전을 정결케 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기도로 앗수르 제국의 공격을 이겨냈고 죽을병에 걸렸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15년간이나 생명을 연장받았다. 그런데 그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이 외교 사절단을 보냈을 때 그들에게 자신의 보물과 성전의 기물들을 보여 주며 위세를 자랑한다. 결국 그 자랑 때문에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그토록 자랑하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2017-06-02
제22과사랑은 온유한 것
고전 13:4
읽을말씀 : 고전 13:4 | 외울말씀 : 마 5:5 l 참고 말씀: 시 37:11
교육목표 :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사랑과 덕이 있는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장차 천국에서 넓은 땅을 차지하는 권세를 소유할 수 있게 한다.
이솝 우화 가운데 해와 바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해와 바람이 길 가는 사람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를 합니다.
먼저 바람이 “저런 외투쯤이야….” 하고 자신만만해서는 나무도 뽑힐 만큼 강한 바람을 내뿜었습니다. 나그네는 거센 바람에 행여 외투가 날아갈까 봐 더 단단히 옷깃을 여몄지요. 다음으로 해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따스한 햇볕을 내뿜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더위를 느낀 나그네는 얼른 외투를 벗었습니다.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지요. 온유함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혀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혀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뜨거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는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습니다.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악이 없고 선해서 마음이 온유하더라도 그것이 내면에만 머문다면 남을 품고 다스리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합니다.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면의 덕을 겸비해야온전하고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온유한 마음에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므로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이루는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이는 소인배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봐 줍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에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즉,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은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만 했다 하면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는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불량하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화려한 옷을 잘 갖춰 입었다 해도 그 사람의 내면이 훌륭하지 못하면 화려한 외모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섬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 )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 )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2.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
이처럼 ( )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3.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 )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잘 갖추어진 ( )으로 남을 다스리며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는다.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81~9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
대인은 행동이 앞서지만 소인은 말이 앞선다.
대인은 말을 아끼고 신중히 하지만 소인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쉽게 낸다.
대인은 지적을 받았을 때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만 소인은 변명하고 불편해하며 삐친다.
대인은 마음의 고통을 받을 때 아무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혼자 묵묵히 안고 가지만 소인은 그 마음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교육목표 :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사랑과 덕이 있는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장차 천국에서 넓은 땅을 차지하는 권세를 소유할 수 있게 한다.
이솝 우화 가운데 해와 바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해와 바람이 길 가는 사람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를 합니다.
먼저 바람이 “저런 외투쯤이야….” 하고 자신만만해서는 나무도 뽑힐 만큼 강한 바람을 내뿜었습니다. 나그네는 거센 바람에 행여 외투가 날아갈까 봐 더 단단히 옷깃을 여몄지요. 다음으로 해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따스한 햇볕을 내뿜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더위를 느낀 나그네는 얼른 외투를 벗었습니다.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지요. 온유함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혀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혀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뜨거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는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습니다.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악이 없고 선해서 마음이 온유하더라도 그것이 내면에만 머문다면 남을 품고 다스리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합니다.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면의 덕을 겸비해야온전하고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온유한 마음에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므로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이루는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이는 소인배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봐 줍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에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즉,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은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만 했다 하면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는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불량하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화려한 옷을 잘 갖춰 입었다 해도 그 사람의 내면이 훌륭하지 못하면 화려한 외모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섬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 )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 )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2.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
이처럼 ( )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3.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 )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잘 갖추어진 ( )으로 남을 다스리며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는다.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81~9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
대인은 행동이 앞서지만 소인은 말이 앞선다.
대인은 말을 아끼고 신중히 하지만 소인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쉽게 낸다.
대인은 지적을 받았을 때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만 소인은 변명하고 불편해하며 삐친다.
대인은 마음의 고통을 받을 때 아무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혼자 묵묵히 안고 가지만 소인은 그 마음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2017-05-26
제21과사랑은 오래 참는 것
고전 13:4
읽을말씀 : 고전 13:4 | 외울말씀 : 마 5:44 | 참고 말씀 : 마 5:39~40
교육목표 :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끝까지 오래참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항목 중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만일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것은 영적인 사랑의 시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을 주변 사람과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상대를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오히려 내 마음에 상처로 돌아오거나 막대한 손실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사랑스럽기는커녕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하며 애매히 곤경에 빠뜨린다 해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참고 사랑해야 하지요.
영적인 사랑을 이루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래 참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혹여 참긴 참는데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왔습니까? 오래 참았는데도 환경이 달라지지 않으니 그만 낙심되었습니까? 그렇다면 환경이나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을 진리로 온전히 이루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참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비진리,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오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 중의 오래 참음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성령의 열매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보다 작은 범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요즘에는 상대가 자신의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쉽게 고소합니다. 법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 상대가 아내 혹은 남편, 혈육을 나눈 부모, 자녀인 경우도 많지요. 참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어 “바보처럼 산다”고 조롱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했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말고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참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2. 무한대의 오래 참음
어떤 사람들은 미움, 혈기 등의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내성적이어서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소위 ‘화병’이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기도 하지요. 이런 참음은 스프링을 눌러 놓았다가 손을 떼면 다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인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이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검은색 안경을 쓰면 온통 어둡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하면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어떤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싫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악하게 행동한다 해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지요.
오래 참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중보 기도를 올린 스데반 집사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셨을까요?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음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70×7, 즉 490번만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7은 영적으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무한하심을 느낄 수 있지요.
3.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오래 참음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운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화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작음을 나타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혹여 화를 냈다 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즉 오랫동안 분을 품지 말고 털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마음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가지요.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할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과연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도 당연히 오래 참을 일이 없으시지요. 그런데도 굳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고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지만,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오래 참고 사랑하면 장차 천국에서 아름다운 처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8∼9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말씀하신 대로인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 )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 )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한다.
2.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억지로 참으며 억울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64~8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오래 참음’
1. 자신이 비진리를 버리고 마음을 진리로 개조해 나가기까지의 오래 참음
2.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이해해 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화평함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
3.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 구원 등 주실 약속을 받기 위한 오래 참음
교육목표 :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끝까지 오래참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항목 중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만일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것은 영적인 사랑의 시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을 주변 사람과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상대를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오히려 내 마음에 상처로 돌아오거나 막대한 손실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사랑스럽기는커녕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하며 애매히 곤경에 빠뜨린다 해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참고 사랑해야 하지요.
영적인 사랑을 이루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래 참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혹여 참긴 참는데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왔습니까? 오래 참았는데도 환경이 달라지지 않으니 그만 낙심되었습니까? 그렇다면 환경이나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을 진리로 온전히 이루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참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비진리,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오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 중의 오래 참음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성령의 열매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보다 작은 범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요즘에는 상대가 자신의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쉽게 고소합니다. 법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 상대가 아내 혹은 남편, 혈육을 나눈 부모, 자녀인 경우도 많지요. 참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어 “바보처럼 산다”고 조롱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했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말고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참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2. 무한대의 오래 참음
어떤 사람들은 미움, 혈기 등의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내성적이어서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소위 ‘화병’이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기도 하지요. 이런 참음은 스프링을 눌러 놓았다가 손을 떼면 다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인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이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검은색 안경을 쓰면 온통 어둡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하면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어떤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싫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악하게 행동한다 해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지요.
오래 참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중보 기도를 올린 스데반 집사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셨을까요?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음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70×7, 즉 490번만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7은 영적으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무한하심을 느낄 수 있지요.
3.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오래 참음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운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화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작음을 나타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혹여 화를 냈다 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즉 오랫동안 분을 품지 말고 털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마음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가지요.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할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과연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도 당연히 오래 참을 일이 없으시지요. 그런데도 굳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고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지만,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오래 참고 사랑하면 장차 천국에서 아름다운 처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8∼9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말씀하신 대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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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 )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 )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한다.
2.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억지로 참으며 억울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64~8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오래 참음’
1. 자신이 비진리를 버리고 마음을 진리로 개조해 나가기까지의 오래 참음
2.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이해해 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화평함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
3.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 구원 등 주실 약속을 받기 위한 오래 참음
2017-05-19
제20과영적인 사랑의 중요성
고전 13:1~3
읽을말씀 : 고전 13:1~3 | 외울말씀 : 골 3:23 | 참고 말씀 : 고전 2:6~8
교육목표 : 범사에 누구를 대하든지 영적인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해 줌으로 생명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답게 해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묵직한 쇠나 구리는 두드려도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구리나 꽹과리가 소리를 낸다면 속이 비었거나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무조건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거슬리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아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을 돌아보아 내 의와 틀 속에 말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목마른 영혼을 시원케 하고 아파하는 영혼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생명의 물이요, 값진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 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큰 믿음을 가졌다고 사랑까지 큰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성령을 받은 것도,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지요.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구제는 생활하는 데 필요한 양식과 의복, 집, 물질 등을 공급해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여 영혼을 살리는 구제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할 때는 성령의 주관을 받아 상대에게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구제는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거나 사망의 길로 가게 만들지요.
가령, 술과 노름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시험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제한다면 더욱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랑으로 구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다음으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올리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에게 모든 수고를 갚아 주시고 위로하시며,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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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 )를 말한다.
2.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 )하는 것을 의미한다.
3. 믿음은 있는데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 )이 없기 때문이다.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54~6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
마가복음 12장에는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한 과부가 나온다. 그녀는 비록 두 렙돈에 불과했지만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렙돈은 당시 그리스의 가장 작은 동전 단위이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셨듯이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를 전부 드렸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 전부가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표현이다. 곧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반면 사람을 의식한 예물이나 억지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니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교육목표 : 범사에 누구를 대하든지 영적인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해 줌으로 생명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답게 해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묵직한 쇠나 구리는 두드려도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구리나 꽹과리가 소리를 낸다면 속이 비었거나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무조건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거슬리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아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을 돌아보아 내 의와 틀 속에 말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목마른 영혼을 시원케 하고 아파하는 영혼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생명의 물이요, 값진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 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큰 믿음을 가졌다고 사랑까지 큰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성령을 받은 것도,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지요.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구제는 생활하는 데 필요한 양식과 의복, 집, 물질 등을 공급해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여 영혼을 살리는 구제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할 때는 성령의 주관을 받아 상대에게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구제는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거나 사망의 길로 가게 만들지요.
가령, 술과 노름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시험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제한다면 더욱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랑으로 구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다음으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올리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에게 모든 수고를 갚아 주시고 위로하시며,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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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 )를 말한다.
2.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 )하는 것을 의미한다.
3. 믿음은 있는데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 )이 없기 때문이다.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54~6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
마가복음 12장에는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한 과부가 나온다. 그녀는 비록 두 렙돈에 불과했지만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렙돈은 당시 그리스의 가장 작은 동전 단위이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셨듯이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를 전부 드렸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 전부가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표현이다. 곧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반면 사람을 의식한 예물이나 억지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니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2017-05-12
제19과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
요한일서 4:7~8
읽을말씀 : 요한일서 4:7~8 | 외울말씀 : 이사야 49:15 | 참고말씀 : 사무엘상 18:1~4
교육목표 :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8장 1~4절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가까이에 계신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 되고 점점 부모님에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이 역사하므로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자신의 실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영적인 사랑을 얼마나 깊이 나누고 있나요?
4. 다윗은 사랑하는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자 그의 아들을 어떻게 대해 주었나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38~5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삼상 17:49).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교육목표 :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8장 1~4절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가까이에 계신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사역에 전념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 되고 점점 부모님에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이 역사하므로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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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자신의 실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영적인 사랑을 얼마나 깊이 나누고 있나요?
4. 다윗은 사랑하는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자 그의 아들을 어떻게 대해 주었나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38~5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삼상 17:49).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2017-05-05
제18과지혜롭게 살자
약 3:17~18
읽을말씀 : 약 3:17~18 | 외울말씀 : 눅 6:45 ㅣ 잠 3:14~18, 11:30
교육목표 : 마음에 성결을 이루어 위로부터 난 지혜를 받아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나가며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는 살면서 순간순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혜가 있으면 어려운 일을 피해 갈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잘 극복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일을 해도 짧은 시간에 수월하게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혜를 얻으면 부족할 것이 없고 만사형통한 것입니다.
1. 지혜의 귀중성
사전에는 지혜를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셔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기억 장치에 아무런 지식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빨며 울지요. 그러다가 자라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며 지식을 쌓아갑니다.
이러한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지혜롭다, 그렇지 못하다 말합니다. 지혜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 나아가 나라에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의 정도에 따라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며, 한 나라가 흥하거나 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말씀합니다(잠 3:14~18).
2.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
지혜는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선한 지혜는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 지혜를 쓰면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리고, 가정이 흥하며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줍니다. 반대로 악한 지혜를 쓰면 당장에는 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 전투에서 죽은 뒤 당장 다윗이 나라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옹위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을 따르는 유다 지파는 그들과 7년 반 동안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바로 그 적장인 아브넬이 항복하려고 다윗에게 왔을 때 그를 융숭히 대접하여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아브넬을 다윗의 군장 요압이 사사로운 복수심에 불타 암살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안 다윗은 진심으로 애통해하였습니다. 또 다윗에게 큰 상을 얻을까 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암살한 사람들을 오히려 사형시켰습니다. 그것은 임금을 배신한 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함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이 자진해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반면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악하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좇아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간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막힌 지혜를 말해 줍니다. 이때 후새라는 사람이 다윗의 밀명을 받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먼저 압살롬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러고는 아히도벨의 악한 모략을 깨뜨리고 다윗 일행의 생명을 구합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하 17장 14절에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하였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선이 악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않자 자결하고 맙니다. 즉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압살롬이 다윗에게 패할 것이고, 자신 역시 다윗을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한 지혜는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어리석게도 이스라엘 온 회중의 건의를 무시해 버립니다. 회중이 요청한 것은 솔로몬 왕 때 여러 가지 공사로 백성의 부담이 컸으니 그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좀 가볍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을 모셨던 노인들은 전후 사정과 백성의 마음을 잘 아는 고로 백성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건의하였지요.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친구들의 말만 듣고서 포학한 말로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지혜가 나왔고, 왕도 악하니 그들의 악한 말이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백성의 마음이 왕에게서 돌아서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지혜가 얼마나 좋은지 기생 라합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모세가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을 향해 갑니다. 그 과정에 여호수아가 정탐꾼 두 사람을 여리고 성에 보내지요(수 2장). 여리고 성에 사는 라합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소문을 알고 있었습니다.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신 것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신 사건 등을 듣고 그들의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집에 숨겨 주었고, 왕이 그들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자 지혜로운 말로 따돌려 위험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라합을 축복하여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에 그녀와 함께한 일가친척까지 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선의 지혜를 좇으면 실패를 면하며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3. 선한 지혜를 받으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선한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성결하면 모든 생각과 방법이 진리로 나옵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선한 마음에서는 선한 생각이 나오고 진리의 방법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지혜를 동원합니다. 하지만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지혜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악의 모양을 버리고 성결을 이루었을 때에 선한 지혜가 나오지요. 물론 성결하다고 무조건 지혜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성결한 마음이 되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선합니다.
가령, 어떤 심한 잘못을 범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시다. 만일 마음에 악이 있다면 감정이 앞서 책망부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버린 선한 마음이라면 미운 감정이 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한 당사자보다 더 애통해하며 그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기 원합니다.
쥐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려운 궁지에 몰린 사람이 악을 발동하지 않도록 선의 지혜를 베풀지요. 그가 선에 감동되어 더 이상 악을 발전시키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가 선 가운데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성결한 마음이 되면 성결한 방법론이 나오고 그에 필요한 지혜가 옵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 속에서 행하시므로 우리가 죄악을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만큼 성령의 음성, 인도와 주관을 받게 해 주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으니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함께 일상생활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지혜를 배워 삶에 적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선진들이 겪었던 각 사건에 대한 선의 지혜를 배워 잘 양식을 삼으면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 성령께서 떠올려 주심으로 형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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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선한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 )해야 합니다. 마음이 성결하면 모든 생각과 방법이 진리로 나옵니다.
2. 아히도벨, 르호보암, 요압은 어떠한 인물인지 말해 보세요.
3. 누가복음 6:45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8~3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후새’는 누구일까요?
다윗의 친구이자 모사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할 때 그에게 거짓 투항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물리쳐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다. 압살롬의 모사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같을 정도로 정확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군사 12,000명을 뽑아 다윗의 뒤를 바로 추격하여 그가 곤하고 약할 때 엄습하자고 한다. 반면 후새는 이미 다윗이 동굴 속에 숨었을 것이니 백성을 모아 직접 싸움터로 가자고 한다.
이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보다 후새의 모략을 택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결전의 날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의 군대를 격파하고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카락이 걸려 요압 장군에 의해 죽게 된다.
교육목표 : 마음에 성결을 이루어 위로부터 난 지혜를 받아 어떤 어려움도 잘 헤쳐나가며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는 살면서 순간순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혜가 있으면 어려운 일을 피해 갈 수 있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잘 극복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일을 해도 짧은 시간에 수월하게 열매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혜를 얻으면 부족할 것이 없고 만사형통한 것입니다.
1. 지혜의 귀중성
사전에는 지혜를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셔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는 기억 장치에 아무런 지식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빨며 울지요. 그러다가 자라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며 지식을 쌓아갑니다.
이러한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지혜롭다, 그렇지 못하다 말합니다. 지혜는 개인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 나아가 나라에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혜의 정도에 따라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며, 한 나라가 흥하거나 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말씀합니다(잠 3:14~18).
2.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
지혜는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선한 지혜는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 지혜를 쓰면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리고, 가정이 흥하며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줍니다. 반대로 악한 지혜를 쓰면 당장에는 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 전투에서 죽은 뒤 당장 다윗이 나라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옹위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을 따르는 유다 지파는 그들과 7년 반 동안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바로 그 적장인 아브넬이 항복하려고 다윗에게 왔을 때 그를 융숭히 대접하여 보냅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아브넬을 다윗의 군장 요압이 사사로운 복수심에 불타 암살하고 맙니다. 이 사실을 안 다윗은 진심으로 애통해하였습니다. 또 다윗에게 큰 상을 얻을까 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암살한 사람들을 오히려 사형시켰습니다. 그것은 임금을 배신한 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함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이 자진해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반면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악하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좇아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간 것입니다. 심지어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막힌 지혜를 말해 줍니다. 이때 후새라는 사람이 다윗의 밀명을 받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먼저 압살롬이 자신을 의심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러고는 아히도벨의 악한 모략을 깨뜨리고 다윗 일행의 생명을 구합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하 17장 14절에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하였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선이 악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않자 자결하고 맙니다. 즉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압살롬이 다윗에게 패할 것이고, 자신 역시 다윗을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악한 지혜는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손자 르호보암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어리석게도 이스라엘 온 회중의 건의를 무시해 버립니다. 회중이 요청한 것은 솔로몬 왕 때 여러 가지 공사로 백성의 부담이 컸으니 그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좀 가볍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을 모셨던 노인들은 전후 사정과 백성의 마음을 잘 아는 고로 백성이 원하는 대로 하자고 건의하였지요.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친구들의 말만 듣고서 포학한 말로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지혜가 나왔고, 왕도 악하니 그들의 악한 말이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백성의 마음이 왕에게서 돌아서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지혜가 얼마나 좋은지 기생 라합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모세가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을 향해 갑니다. 그 과정에 여호수아가 정탐꾼 두 사람을 여리고 성에 보내지요(수 2장). 여리고 성에 사는 라합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소문을 알고 있었습니다.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하신 것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신 사건 등을 듣고 그들의 하나님이 참 신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집에 숨겨 주었고, 왕이 그들을 잡으려고 사람을 보내자 지혜로운 말로 따돌려 위험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라합을 축복하여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에 그녀와 함께한 일가친척까지 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선의 지혜를 좇으면 실패를 면하며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3. 선한 지혜를 받으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선한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성결하면 모든 생각과 방법이 진리로 나옵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하신 말씀처럼 선한 마음에서는 선한 생각이 나오고 진리의 방법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지혜를 동원합니다. 하지만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지혜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악의 모양을 버리고 성결을 이루었을 때에 선한 지혜가 나오지요. 물론 성결하다고 무조건 지혜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성결한 마음이 되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선합니다.
가령, 어떤 심한 잘못을 범한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시다. 만일 마음에 악이 있다면 감정이 앞서 책망부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버린 선한 마음이라면 미운 감정이 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못한 당사자보다 더 애통해하며 그가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기 원합니다.
쥐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려운 궁지에 몰린 사람이 악을 발동하지 않도록 선의 지혜를 베풀지요. 그가 선에 감동되어 더 이상 악을 발전시키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가 선 가운데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성결한 마음이 되면 성결한 방법론이 나오고 그에 필요한 지혜가 옵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 속에서 행하시므로 우리가 죄악을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만큼 성령의 음성, 인도와 주관을 받게 해 주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잠언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셨으니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함께 일상생활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지혜를 배워 삶에 적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선진들이 겪었던 각 사건에 대한 선의 지혜를 배워 잘 양식을 삼으면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 성령께서 떠올려 주심으로 형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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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선한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 )해야 합니다. 마음이 성결하면 모든 생각과 방법이 진리로 나옵니다.
2. 아히도벨, 르호보암, 요압은 어떠한 인물인지 말해 보세요.
3. 누가복음 6:45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책자 18~3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후새’는 누구일까요?
다윗의 친구이자 모사이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할 때 그에게 거짓 투항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물리쳐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다. 압살롬의 모사 아히도벨의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같을 정도로 정확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군사 12,000명을 뽑아 다윗의 뒤를 바로 추격하여 그가 곤하고 약할 때 엄습하자고 한다. 반면 후새는 이미 다윗이 동굴 속에 숨었을 것이니 백성을 모아 직접 싸움터로 가자고 한다.
이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보다 후새의 모략을 택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결전의 날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의 군대를 격파하고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카락이 걸려 요압 장군에 의해 죽게 된다.
2017-04-28
제17과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창 31:7~13
읽을말씀 : 창 31:7~13 | 외울말씀 : 히 11:1 | 참고 말씀: 창 27:27~29, 30:43
교육목표 :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모든 삶에 형통함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과 인류의 역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행하면 형통한 길로 인도하시며 축복을 내려 주시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리 불행했던 사람도 행복해지고,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도 명쾌하게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삶을 통해 그 축복의 비결을 알아보겠습니다.
1.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은 야곱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삭의 아들로, 형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들로 다니며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성품으로 집안일을 도우니 자연히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지요. 야곱은 지혜로운 반면 간교한 성품이 있었고, 꿈과 야심이 있어서 형이 가진 장자의 축복을 자신이 받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날, 형 에서가 사냥을 하고 와서 몹시 배고파할 때 팥죽 한 그릇을 줄 테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합니다. 이에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야곱한테 팔아버리지요.
세월이 흘러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들자 죽기 전에 장자 에서를 불러 축복해 주고자 합니다. 이삭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면 축복해 주겠다고 하지요. 이것을 엿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그 축복을 받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결국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고 별미를 만들어 주어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이삭은 변장한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마음껏 축복해 줍니다(창 27:27~29).
그런데 야곱이 축복 기도를 받고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들어옵니다. 깜짝 놀란 이삭은 이미 별미를 먹고 야곱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니 더 이상 축복해 줄 것이 없다고 하지요.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방성대곡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격분한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야곱을 죽이리라 결심합니다. 이 일로 야곱은 부모 곁을 떠나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하게 됩니다.
2. 라헬을 얻고자 7년간 봉사한 야곱
처음 라반의 집에 올 때만 해도 야곱은 얼마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가 게으르고 자기만 생각했다면 대충 시간만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외삼촌의 일을 도왔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첫째 딸 레아는 안력이 부족한 반면, 둘째 딸 라헬은 곱고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사랑을 느꼈고 그녀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라반에게 7년간 봉사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단지 외삼촌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수준이었다면 이때부터는 계약에 의해 삯을 받고 일하는 품꾼과 같은 위치가 되었지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라온 야곱으로서는 품꾼 취급을 받는다는 자체가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깨뜨려 나가는 연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7년이라는 세월을 기꺼이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한 번 품은 사랑의 마음이 변치 않았고 목표한 바를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근성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맡은 사명을 감당해 내는 좋은 중심을 가졌습니다. 간교한 속성이 있음에도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아 쓰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침내 약속한 7년이 채워지자 야곱은 외삼촌에게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신혼 첫날밤에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여보낸 사람은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항의하자 라반은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하며 7일을 더 채우면 라헬도 아내로 줄 테니 7년을 더 봉사하라고 하지요. 야곱은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았지만 또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서 외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부당한 약속이라도 지켰습니다. 그리고 라반으로 인해 자신의 간교한 속성을 돌아보며 변화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지요. ‘예전에 내가 장자권을 얻고자 형과 아버지를 속였더니 이제는 내가 외삼촌으로부터 철저하게 속임을 당하는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3. 바라봄의 법칙으로 거부가 된 야곱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외삼촌이자 장인 라반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봉사의 대가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이는 제안을 합니다.
즉 외삼촌의 양 떼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 그리고 염소 중에서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품삯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것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쾌히 승낙하지요.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껍질을 벗겨 얼룩덜룩하게 만든 후 실한 가축들이 와서 물을 먹으며 교미하는 장소에 놔두었습니다. 가축들이 교미하는 순간에 그 무늬를 보게 했지요. 그리고 약한 가축들이 오면 가지를 치워 버렸습니다. 얼룩덜룩한 가지를 바라보며 물을 마신 튼실한 가축들은 교미하여 아롱지거나 점이 있거나 검은 새끼를 낳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실한 가축들은 다 야곱의 것이 되고, 약한 것들은 라반의 것이 되었지요.
야곱은 가축들에게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해 막대한 부를 쌓아갔습니다. 14년간 봉사하면서 어떻게 해야 양이 새끼를 잘 낳고 어떻게 해야 잘 자라는지 완전히 터득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대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법칙 또한 터득하여 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창 30:43).
4.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거부가 된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씀합니다. 야곱은 본격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어느 날 야곱은 외삼촌 몰래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떠납니다. 삼 일 후 라반이 알고 황급히 쫓아오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현몽하여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에 라반은 돌무더기를 쌓고 그것을 경계로 하여 서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약조를 맺은 뒤 돌아가지요.
한편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형 에서가 4백 명을 이끌고 옵니다. 외삼촌 라반과 약조했으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형 에서 앞에 나갈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지요. 야곱은 어찌하든 형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예물을 보냅니다. 어느 정도 예물이면 형의 마음을 풀 수 있을까를 계산하며 적당한 타협점을 찾고자 했지요. 그러나 자신의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그제야 자신의 지혜와 방법을 내려 놓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만 의뢰하게 되지요.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환도뼈가 위골되도록 밤새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내립니다.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가 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끝까지 깨뜨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자기적인 생각과 지혜와 틀 그리고 자기적인 방법과 이론 등이 철저히 깨어졌던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빌어 주었던 장자의 축복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니 비로소 장자의 축복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형 에서의 마음도 눈 녹듯이 녹아 버렸습니다. 야곱은 형의 환대를 받으며 고향에 돌아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과 지혜, 이론 등을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께 맡길 때에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온전히 순종하면 야곱처럼 많은 고생을 하지 않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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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야곱이 거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2.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3.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야곱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 했을 때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207~2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바라봄의 법칙’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마음에 품은 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법칙은 많은 분야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어떤 인물을 존경하며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의 장래가 달라질 수 있다.
더욱이 신앙 안에서는 누구를 바라보며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모습이 크게 달라진다. 자녀들의 신앙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부모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는 장성한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나가야 할 온전한 신앙의 대상은 바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육목표 :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모든 삶에 형통함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과 인류의 역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행하면 형통한 길로 인도하시며 축복을 내려 주시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면 아무리 불행했던 사람도 행복해지고,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도 명쾌하게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삶을 통해 그 축복의 비결을 알아보겠습니다.
1.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은 야곱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삭의 아들로, 형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들로 다니며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성품으로 집안일을 도우니 자연히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지요. 야곱은 지혜로운 반면 간교한 성품이 있었고, 꿈과 야심이 있어서 형이 가진 장자의 축복을 자신이 받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날, 형 에서가 사냥을 하고 와서 몹시 배고파할 때 팥죽 한 그릇을 줄 테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합니다. 이에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야곱한테 팔아버리지요.
세월이 흘러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들자 죽기 전에 장자 에서를 불러 축복해 주고자 합니다. 이삭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면 축복해 주겠다고 하지요. 이것을 엿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그 축복을 받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결국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고 별미를 만들어 주어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이삭은 변장한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마음껏 축복해 줍니다(창 27:27~29).
그런데 야곱이 축복 기도를 받고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에서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들어옵니다. 깜짝 놀란 이삭은 이미 별미를 먹고 야곱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니 더 이상 축복해 줄 것이 없다고 하지요.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방성대곡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격분한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야곱을 죽이리라 결심합니다. 이 일로 야곱은 부모 곁을 떠나 외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하게 됩니다.
2. 라헬을 얻고자 7년간 봉사한 야곱
처음 라반의 집에 올 때만 해도 야곱은 얼마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가 게으르고 자기만 생각했다면 대충 시간만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 외삼촌의 일을 도왔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첫째 딸 레아는 안력이 부족한 반면, 둘째 딸 라헬은 곱고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사랑을 느꼈고 그녀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라반에게 7년간 봉사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단지 외삼촌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수준이었다면 이때부터는 계약에 의해 삯을 받고 일하는 품꾼과 같은 위치가 되었지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라온 야곱으로서는 품꾼 취급을 받는다는 자체가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깨뜨려 나가는 연단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7년이라는 세월을 기꺼이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한 번 품은 사랑의 마음이 변치 않았고 목표한 바를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근성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맡은 사명을 감당해 내는 좋은 중심을 가졌습니다. 간교한 속성이 있음에도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아 쓰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침내 약속한 7년이 채워지자 야곱은 외삼촌에게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신혼 첫날밤에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여보낸 사람은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이 항의하자 라반은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하며 7일을 더 채우면 라헬도 아내로 줄 테니 7년을 더 봉사하라고 하지요. 야곱은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았지만 또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서 외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부당한 약속이라도 지켰습니다. 그리고 라반으로 인해 자신의 간교한 속성을 돌아보며 변화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지요. ‘예전에 내가 장자권을 얻고자 형과 아버지를 속였더니 이제는 내가 외삼촌으로부터 철저하게 속임을 당하는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3. 바라봄의 법칙으로 거부가 된 야곱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외삼촌이자 장인 라반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봉사의 대가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이는 제안을 합니다.
즉 외삼촌의 양 떼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 그리고 염소 중에서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품삯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양이나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 점 있는 것, 검은 것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쾌히 승낙하지요.
야곱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껍질을 벗겨 얼룩덜룩하게 만든 후 실한 가축들이 와서 물을 먹으며 교미하는 장소에 놔두었습니다. 가축들이 교미하는 순간에 그 무늬를 보게 했지요. 그리고 약한 가축들이 오면 가지를 치워 버렸습니다. 얼룩덜룩한 가지를 바라보며 물을 마신 튼실한 가축들은 교미하여 아롱지거나 점이 있거나 검은 새끼를 낳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실한 가축들은 다 야곱의 것이 되고, 약한 것들은 라반의 것이 되었지요.
야곱은 가축들에게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해 막대한 부를 쌓아갔습니다. 14년간 봉사하면서 어떻게 해야 양이 새끼를 잘 낳고 어떻게 해야 잘 자라는지 완전히 터득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대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법칙 또한 터득하여 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창 30:43).
4.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거부가 된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씀합니다. 야곱은 본격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어느 날 야곱은 외삼촌 몰래 모든 소유물을 이끌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떠납니다. 삼 일 후 라반이 알고 황급히 쫓아오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현몽하여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에 라반은 돌무더기를 쌓고 그것을 경계로 하여 서로 넘어가지 않겠다는 약조를 맺은 뒤 돌아가지요.
한편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형 에서가 4백 명을 이끌고 옵니다. 외삼촌 라반과 약조했으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형 에서 앞에 나갈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지요. 야곱은 어찌하든 형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예물을 보냅니다. 어느 정도 예물이면 형의 마음을 풀 수 있을까를 계산하며 적당한 타협점을 찾고자 했지요. 그러나 자신의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그제야 자신의 지혜와 방법을 내려 놓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만 의뢰하게 되지요.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환도뼈가 위골되도록 밤새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내립니다.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가 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이 끝까지 깨뜨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자기적인 생각과 지혜와 틀 그리고 자기적인 방법과 이론 등이 철저히 깨어졌던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빌어 주었던 장자의 축복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니 비로소 장자의 축복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형 에서의 마음도 눈 녹듯이 녹아 버렸습니다. 야곱은 형의 환대를 받으며 고향에 돌아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과 지혜, 이론 등을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께 맡길 때에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온전히 순종하면 야곱처럼 많은 고생을 하지 않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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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야곱이 거부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2.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3.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야곱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 했을 때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207~2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바라봄의 법칙’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마음에 품은 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법칙은 많은 분야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어떤 인물을 존경하며 바라보느냐에 따라 아이의 장래가 달라질 수 있다.
더욱이 신앙 안에서는 누구를 바라보며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모습이 크게 달라진다. 자녀들의 신앙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부모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는 장성한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나가야 할 온전한 신앙의 대상은 바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017-04-21
제16과순종의 축복
삼상 15:22~23
읽을말씀 : 삼상 15:22~23 | 외울말씀 : 막 9:23 ㅣ 참고 말씀: 히 11:8
교육목표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순종의 사전적 의미는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의 유형을 보면 억지로 순종하는 경우,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은 순종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만 순종하는 경우, 무조건 순종하는 경우, 마음으로 깨달아 순종하되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것에도 온전히 순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은 바로 순종할 수 없는 것에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과 맞지 않은 일을 시키면 잘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했을 때 의로 여기고 축복을 주시며, 기사와 표적이 따르도록 역사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바다가 갈라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뒤쫓아오는 애굽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성난 백성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도무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일에도 아무런 의심 없이 순종했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순종의 결과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순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우리의 관점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 이론에 기준을 두고 그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신 대로 하나님께는 한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작음을 의미합니다. 생각 속에서 한계를 깨뜨리면 능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2.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명하시면서 순종하면 어떠한 축복을 받을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창 12:1~3). 그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히 11:8). 고대 씨족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생명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가 백 세에 낳아 애지중지 키운 외아들 이삭을 짐승처럼 잡아 각을 떠서 불로 태워 번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창 22:1~2). 이때도 아브라함은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아침 일찍 두 사환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창 22:3).
사실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입니다(창 21:12). 그런데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친다면 그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해도 백 세에 얻은 자녀를 번제로 바친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이유도 대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며 죽은 자도 능히 살릴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 선하지 않은 일을 지시할 리가 없음을 온전히 믿었기에 생각을 동원하거나 염려하지 않았고 기쁨으로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르며 멈추게 하지요. 그의 믿음과 순종을 확인하고는 수풀에 걸린 숫양을 예비하였다가 제사드리게 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리기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니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창 22:16~18).
3. 순종의 복과 불순종의 고통
아브라함이 오직 믿음으로 모든 일에 순종했기 때문에 받은 축복은 참으로 컸습니다. 왕들이 그를 영접하며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지요.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항상 물이 있었고, 자녀의 복, 건강,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 되었으며 복의 근원이 되는 실로 엄청난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실 정도로 영적인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지요(창 15:13).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시며 축복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얼마나 싫어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정해진 기한까지 오지 않자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고 자기가 직접 번제를 드렸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 13:13~14) 책망하지요.
이때라도 깨닫고 돌이켰으면 좋으련만 사울은 다시 불순종의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좋은 가축들을 보니 죽이기가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라” 하셨으니 일단 좋지 않은 가축만 다 죽였고, 좋은 가축은 살려서 끌어옵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하자, 사울은 순종해서 다 죽였고 제사 드리기에 좋은 가축만 하나님을 위해서 가져온 것이라 말합니다. 심지어 백성이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 핑계를 댔지요(삼상 15:21). 물론 백성들 중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이라면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돌이킬 기회를 주셨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악신이 들려 고통받기도 했고 끝내는 전쟁 중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4. 자기 이론과 생각을 깨뜨려야 순종
사람들은 간혹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힘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아이가 집에 일찍 들어오기 원합니다. 아이가 그 말에 순종하면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으면 부모에게 근심을 안겨 줍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며 이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과 마음, 계산에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조건을 따지는 사람은 ‘이것은 가능하니까, 저것은 불가능하니까’ 하면서 이유와 핑계를 댑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순종하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했을 때 그는 자신이 원하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하시자 고민하다가 결국 순종하지 못했지요. 그가 비록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 해도 처음부터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만 순종할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한계선을 넘는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 유익을 좇아가고 말지요.
그러나 오직 순종할 자세를 가진 사람은 자기에게 해가 되는지 이익이 되는지,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닌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축복받아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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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순종의 네 가지 유형을 말해 보세요.
2. 순종하면 축복인 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어떠한 믿음으로 순종했을까요? (히브리서 11:19)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97~20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번제’란?
구약 시대 제사법 중 하나로 제물이 되는 짐승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운 냄새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이다(레 1:6~9). 희생되는 짐승은 흠이 없는 수컷에만 한하여 주로 소 · 양 · 염소 등을 드렸다. 가난한 이는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바치기도 했다(레 5:7).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 자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번제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 온전히 거하여 거룩하게 살며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교육목표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순종의 사전적 의미는 순순히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의 유형을 보면 억지로 순종하는 경우,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은 순종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만 순종하는 경우, 무조건 순종하는 경우, 마음으로 깨달아 순종하되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것에도 온전히 순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은 바로 순종할 수 없는 것에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과 맞지 않은 일을 시키면 잘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했을 때 의로 여기고 축복을 주시며, 기사와 표적이 따르도록 역사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을 때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바다가 갈라진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뒤쫓아오는 애굽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성난 백성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도무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일에도 아무런 의심 없이 순종했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마른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순종의 결과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고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순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우리의 관점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 이론에 기준을 두고 그 한계를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하신 대로 하나님께는 한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작음을 의미합니다. 생각 속에서 한계를 깨뜨리면 능히 순종할 수 있습니다.
2.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명하시면서 순종하면 어떠한 축복을 받을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창 12:1~3). 그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히 11:8). 고대 씨족 사회에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떠난다는 것은 생명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가 백 세에 낳아 애지중지 키운 외아들 이삭을 짐승처럼 잡아 각을 떠서 불로 태워 번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창 22:1~2). 이때도 아브라함은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아침 일찍 두 사환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창 22:3).
사실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입니다(창 21:12). 그런데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친다면 그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해도 백 세에 얻은 자녀를 번제로 바친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이유도 대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며 죽은 자도 능히 살릴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 선하지 않은 일을 지시할 리가 없음을 온전히 믿었기에 생각을 동원하거나 염려하지 않았고 기쁨으로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칼을 들어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부르며 멈추게 하지요. 그의 믿음과 순종을 확인하고는 수풀에 걸린 숫양을 예비하였다가 제사드리게 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리기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니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창 22:16~18).
3. 순종의 복과 불순종의 고통
아브라함이 오직 믿음으로 모든 일에 순종했기 때문에 받은 축복은 참으로 컸습니다. 왕들이 그를 영접하며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지요.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항상 물이 있었고, 자녀의 복, 건강, 장수의 복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벗이 되었으며 복의 근원이 되는 실로 엄청난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을 자상하게 설명해 주실 정도로 영적인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지요(창 15:13).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을 얼마나 기뻐하시며 축복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얼마나 싫어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해야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가 정해진 기한까지 오지 않자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고 자기가 직접 번제를 드렸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 13:13~14) 책망하지요.
이때라도 깨닫고 돌이켰으면 좋으련만 사울은 다시 불순종의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과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 좋은 가축들을 보니 죽이기가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죽이라” 하셨으니 일단 좋지 않은 가축만 다 죽였고, 좋은 가축은 살려서 끌어옵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하자, 사울은 순종해서 다 죽였고 제사 드리기에 좋은 가축만 하나님을 위해서 가져온 것이라 말합니다. 심지어 백성이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 핑계를 댔지요(삼상 15:21). 물론 백성들 중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이라면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돌이킬 기회를 주셨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악신이 들려 고통받기도 했고 끝내는 전쟁 중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4. 자기 이론과 생각을 깨뜨려야 순종
사람들은 간혹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코 힘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아이가 집에 일찍 들어오기 원합니다. 아이가 그 말에 순종하면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사랑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으면 부모에게 근심을 안겨 줍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부모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며 이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생각과 마음, 계산에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조건을 따지는 사람은 ‘이것은 가능하니까, 저것은 불가능하니까’ 하면서 이유와 핑계를 댑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면 순종하고 유익이 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했을 때 그는 자신이 원하던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하시자 고민하다가 결국 순종하지 못했지요. 그가 비록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 해도 처음부터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만 순종할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한계선을 넘는 상황에서는 결국 자기 유익을 좇아가고 말지요.
그러나 오직 순종할 자세를 가진 사람은 자기에게 해가 되는지 이익이 되는지,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닌 모든 이론과 생각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축복받아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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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적용하기
1. 순종의 네 가지 유형을 말해 보세요.
2. 순종하면 축복인 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어떠한 믿음으로 순종했을까요? (히브리서 11:19)
* 금주 과제
<내가 시행하리니> 책자 197~20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번제’란?
구약 시대 제사법 중 하나로 제물이 되는 짐승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운 냄새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이다(레 1:6~9). 희생되는 짐승은 흠이 없는 수컷에만 한하여 주로 소 · 양 · 염소 등을 드렸다. 가난한 이는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바치기도 했다(레 5:7).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 자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번제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 말씀 가운데 온전히 거하여 거룩하게 살며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