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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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2
제2과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1
읽을말씀 : 창세기 1:1 | 외울말씀 : 창세기 2:7 l 참고 말씀: 로마서 1:20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시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창 1장),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됩니다.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롬 1:20).
영원히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얻고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어느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그러면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냅니다. 텔레비전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오장육부와 뼈와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하여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내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2.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 )를 만들어 주셨다.
여기에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저장되는데 이것이 ( )이다.
이것을 떠올리는 것이 ( )이며, 이것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 )이다.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4~3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면서 범죄함으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시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창 1장),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됩니다.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롬 1:20).
영원히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얻고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어느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그러면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냅니다. 텔레비전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오장육부와 뼈와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하여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내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2.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 )를 만들어 주셨다.
여기에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저장되는데 이것이 ( )이다.
이것을 떠올리는 것이 ( )이며, 이것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 )이다.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4~31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면서 범죄함으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2018-01-05
제1과새롭게 하소서
누가복음 5:38
읽을말씀 : 누가복음 5:38 | 외울말씀 : 에베소서 5:9 l 참고 말씀: 로마서 2:13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성결을 사모하며 주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를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새해가 되면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새롭게 마음을 결단합니다. 특히 성결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이 되리라” 고백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힘쓰며, 하루에 성경을 한 장 이상 읽고 성구를 외우며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고자 하지요. 이처럼 연초에 결심하고 고백한 것을 변개치 않으며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전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며 사람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인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이려 합니다. 진실하지 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을 속였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렇습니다(행 5장). 그들은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욕심이 틈타자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재산 중 일부를 감추고 사도들 앞에 내놓았지요.
그때 베드로가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책망합니다. 성령을 속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으며, 하나님의 종을 속이는 것 또한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 베드로를 속임으로 결국 혼이 떠나 죽고 말았지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거짓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으면서 사모하는 척하고,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외식하지요. 그러다가 남의 눈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까지 속이게 됩니다. 자신이 외식하고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충성하는 일꾼이라고 착각하지요.
이 외에도 자기 공적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 무익한 일을 추진하기도 하고, 누가 지켜볼 때는 성실하게 하고 혼자 있을 때는 불성실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충성함으로 진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를 섬기기 위해서는 내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들여 희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아무리 상대에게 많은 것을 주고 희생해 주었어도 먼저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하면 빛을 발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직원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더니 열심히 일은 하는데 표정이 딱딱하고 무뚝뚝하다면 어떻겠습니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다음에 일을 부탁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러니 아무리 일을 잘해도 “섬기며 일한다.”라고 할 수 없지요. 오히려 “무섭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자신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까지 섬김의 기준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서로 간에 얼마나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가령, 교회 안에는 여러 부서 사람들이 함께 쓰는 화장실이나 복도, 계단 등의 공용 장소가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아무리 화장실이 지저분해도 ‘내 업무가 아니니까’ 하고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치 나의 일처럼 깨끗이 청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부서 안에서도 누가 아침에 일찍 와서 책상을 닦아 주는지, 쓰레기통을 비우며 청소를 도와주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지 낱낱이 지켜보고 계시지요.
또한 자신의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업무도 아닌데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나는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많은데, 이런 사소한 일들은 업무가 적은 사람들이나 직분이 낮은 사람들이 해 줘야 하지 않나?’ 하면서 힘들어하지요.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일했다면 비록 행함으로는 섬겼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해서 결과만 내면 인정을 받지만, 교회에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행할 때 상급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받는 만큼 자기의 업무만 하면 되지만, 교회에서는 보직에 해당되는 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하나님의 일이 모두 자신의 업무입니다. 겨우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씀씀이를 넓혀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어야 하지요.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섬기고 높은 사람이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위적으로만 섬길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섬길 때 이 땅에서도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천국에서도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흘려버리지 않고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말씀했습니다. 처음부터 진리대로만 행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쉼 없이 노력해 가야 하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보시고 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다소 부족하다 할지라도 순종하여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다듬어 일꾼으로 쓰시지요.
가령, 사람들이 처음 사명을 받았을 때는 사명 감당을 위해서 반드시 성결되리라 다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직분이 높아지면서 마음의 할례에 대한 간절함이 식어지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진리를 지식으로만 알고 행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덮어 놓고 절제하므로 크게 악을 행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은 없습니다. 본인이 할 일은 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 생각하지요.
혹여 나는 이러한 모습은 있지 않나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배나 기도회에 습관적으로 참석하거나 마지못해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 상태가 지속되면 신앙이 정체되어 성령의 충만함이 식어지고, 자칫 구원받기 힘든 육체의 일까지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제단에서 겨우 구원의 문제에 연연하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지요.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으로 충만할 때는 하나님 나라에 열심히 충성 봉사합니다. 예배나 기도에 늦지 않기 위해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사모함으로 단숨에 달려오지요. 생명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달게 들으며 하나라도 깨우치고 변화되기 위해 금식하며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멈춰 있으니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고 진실한 행함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지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눅 5:38).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만들고 계시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묵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진실한 마음과 행함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창대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충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해야 한다.
② ( )이 있어야 한다.
③ ( )이 있어야 한다.
2.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혼이 떠나 죽게 되었을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6~2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들은 부부이며 예루살렘에 세워진 초대교회 신자이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이들은 땅을 팔아 일부는 감추고 나머지를 전부라고 속여 사도들 앞에 내놓는다. 결국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죄로 혼이 떠나 죽게 된다.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성결을 사모하며 주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를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새해가 되면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새롭게 마음을 결단합니다. 특히 성결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이 되리라” 고백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힘쓰며, 하루에 성경을 한 장 이상 읽고 성구를 외우며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고자 하지요. 이처럼 연초에 결심하고 고백한 것을 변개치 않으며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전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며 사람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인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이려 합니다. 진실하지 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을 속였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렇습니다(행 5장). 그들은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욕심이 틈타자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재산 중 일부를 감추고 사도들 앞에 내놓았지요.
그때 베드로가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책망합니다. 성령을 속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으며, 하나님의 종을 속이는 것 또한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 베드로를 속임으로 결국 혼이 떠나 죽고 말았지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거짓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으면서 사모하는 척하고,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외식하지요. 그러다가 남의 눈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까지 속이게 됩니다. 자신이 외식하고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충성하는 일꾼이라고 착각하지요.
이 외에도 자기 공적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 무익한 일을 추진하기도 하고, 누가 지켜볼 때는 성실하게 하고 혼자 있을 때는 불성실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충성함으로 진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를 섬기기 위해서는 내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들여 희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아무리 상대에게 많은 것을 주고 희생해 주었어도 먼저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하면 빛을 발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직원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더니 열심히 일은 하는데 표정이 딱딱하고 무뚝뚝하다면 어떻겠습니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다음에 일을 부탁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러니 아무리 일을 잘해도 “섬기며 일한다.”라고 할 수 없지요. 오히려 “무섭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으니 자신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까지 섬김의 기준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서로 간에 얼마나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가령, 교회 안에는 여러 부서 사람들이 함께 쓰는 화장실이나 복도, 계단 등의 공용 장소가 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은 아무리 화장실이 지저분해도 ‘내 업무가 아니니까’ 하고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치 나의 일처럼 깨끗이 청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부서 안에서도 누가 아침에 일찍 와서 책상을 닦아 주는지, 쓰레기통을 비우며 청소를 도와주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지 낱낱이 지켜보고 계시지요.
또한 자신의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업무도 아닌데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나는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많은데, 이런 사소한 일들은 업무가 적은 사람들이나 직분이 낮은 사람들이 해 줘야 하지 않나?’ 하면서 힘들어하지요.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일했다면 비록 행함으로는 섬겼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해서 결과만 내면 인정을 받지만, 교회에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행할 때 상급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받는 만큼 자기의 업무만 하면 되지만, 교회에서는 보직에 해당되는 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하나님의 일이 모두 자신의 업무입니다. 겨우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씀씀이를 넓혀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어야 하지요.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섬기고 높은 사람이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위적으로만 섬길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섬길 때 이 땅에서도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천국에서도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흘려버리지 않고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말씀했습니다. 처음부터 진리대로만 행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쉼 없이 노력해 가야 하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보시고 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다소 부족하다 할지라도 순종하여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다듬어 일꾼으로 쓰시지요.
가령, 사람들이 처음 사명을 받았을 때는 사명 감당을 위해서 반드시 성결되리라 다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직분이 높아지면서 마음의 할례에 대한 간절함이 식어지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진리를 지식으로만 알고 행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덮어 놓고 절제하므로 크게 악을 행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은 없습니다. 본인이 할 일은 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 생각하지요.
혹여 나는 이러한 모습은 있지 않나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배나 기도회에 습관적으로 참석하거나 마지못해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 상태가 지속되면 신앙이 정체되어 성령의 충만함이 식어지고, 자칫 구원받기 힘든 육체의 일까지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제단에서 겨우 구원의 문제에 연연하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지요.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으로 충만할 때는 하나님 나라에 열심히 충성 봉사합니다. 예배나 기도에 늦지 않기 위해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사모함으로 단숨에 달려오지요. 생명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달게 들으며 하나라도 깨우치고 변화되기 위해 금식하며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멈춰 있으니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믿음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고 진실한 행함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시지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눅 5:38).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만들고 계시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묵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진실한 마음과 행함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창대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충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해야 한다.
② ( )이 있어야 한다.
③ ( )이 있어야 한다.
2.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혼이 떠나 죽게 되었을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16~2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들은 부부이며 예루살렘에 세워진 초대교회 신자이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이들은 땅을 팔아 일부는 감추고 나머지를 전부라고 속여 사도들 앞에 내놓는다. 결국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죄로 혼이 떠나 죽게 된다.
2017-12-29
제52과팔복 (8)
마태복음 5:10~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5:10~12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10 ㅣ참고 말씀: 마가복음 10:30
교육목표 : 주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늘의 큰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핍박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핍박받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복이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만큼, 영생의 축복과 이 땅에서도 복을 받게 되는데, 핍박도 겸하여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주와 그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에 대해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지요.
1.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그러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선과 빛을 좇아 살아갈 때 받는 핍박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 말합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애매히 핍박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 것일까요? 이는 물과 기름이 하나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빛에 속합니다(요일 1:5).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주인은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엡 6:12).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빛의 자녀들을 싫어하지요.
빛이 비추이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빛이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아질수록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영역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자기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을 주관하여, 빛에 속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 주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시작하면 여러 모양으로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세상에 있을 때는 친구들과 만나면 술도 마시고 비진리의 말과 행동으로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술도 끊고 거룩하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지요.
직장에서 주일에 체육대회나 친목회가 있으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회사생활하면 승진하기 어렵다.”며 압박을 가하지요. 복음화 되지 않은 가정에서는 제사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또 남들은 적당히 속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대로 정직하게 행하니, 속이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윗사람이 있을 때는 섬기고 비위를 맞추다가도, 자리를 비우면 험담하고 자기 유익에 따라 잘 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진실히 행하고 자기의 유익에 따라 변하지 않지요.
세상에서는 이런 경우들이 핍박거리가 될 수 있지만, 지나고 보면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습니다. 즉 선과 사랑으로 승리해 가기 때문에 핍박이 물러갈 수밖에 없지요. 나아가 핍박을 이겨 나감으로 믿음이 더 장성해 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니 영육 간에 축복인 것입니다.
2) 자신의 잘못이나 지혜가 부족해서 핍박받는 경우
의를 행함으로 핍박받는 경우 외에 지혜가 부족하거나 본인의 잘못으로 핍박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온 집에 충성하지 못해서, 주변에 덕이 되지 못해 욕을 먹거나 어려움을 받는 일도 발생하지요.
가령, 여 성도님이 게을러서 집 안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고, 교회 일에 바쁘다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집 안을 돌보지 못한 것이 문제인데 정작 핍박받은 당사자는 자신이 하나님 일 때문에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도 교회 간다면서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실수를 잘하며 불성실합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전도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요. “교회 갈 시간에 자기 일이나 잘하지.”라는 소리나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면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승리하시되, 혹여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면, 신속히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이나 불법으로 인해 받는 핍박은 복이나 상급이 될 수 없지만,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믿음이 장성하여 하나님께 축복들을 크게 받아갈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과,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전자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천국이라면, 후자는 각 사람이 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은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다 세밀한 의미에서의 천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진리로 인내함으로 아이 믿음에서 청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으로 장성해 가기 때문이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속 깊이 있는 비진리까지도 발견하여 버리니, 온유함과 화평함을 이루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의를 행하여 마음을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주를 위해 받은 핍박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으로 의를 온전히 이루었다 해도 모든 핍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위해 받는 핍박’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꾼 된 사람들이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시지요.
예부터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흠도 티도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의 형벌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핍박받고 순교했던 사람들의 충성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넘치는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 주시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은 물론,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고 따르는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지요. 혹여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장차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을 바라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 ‘심령이 가난한 자가 들어가는 천국’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12~2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이란?(고전 15:41)
◈ 해의 영광 : 아비들의 믿음으로 3천층 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달의 영광 : 청년들의 믿음으로 2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 아이들의 믿음으로 1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이처럼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은 각각 큰 차이가 난다. 또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의 크기나 밝기가 다르듯이 별마다 영광이 다르다.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으므로 상급이 없고 영광이라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교육목표 : 주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늘의 큰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핍박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핍박받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복이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만큼, 영생의 축복과 이 땅에서도 복을 받게 되는데, 핍박도 겸하여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주와 그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에 대해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지요.
1.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그러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선과 빛을 좇아 살아갈 때 받는 핍박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 말합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애매히 핍박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 것일까요? 이는 물과 기름이 하나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빛에 속합니다(요일 1:5).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주인은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엡 6:12).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빛의 자녀들을 싫어하지요.
빛이 비추이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빛이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아질수록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영역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자기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을 주관하여, 빛에 속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 주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시작하면 여러 모양으로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세상에 있을 때는 친구들과 만나면 술도 마시고 비진리의 말과 행동으로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술도 끊고 거룩하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지요.
직장에서 주일에 체육대회나 친목회가 있으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회사생활하면 승진하기 어렵다.”며 압박을 가하지요. 복음화 되지 않은 가정에서는 제사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또 남들은 적당히 속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대로 정직하게 행하니, 속이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윗사람이 있을 때는 섬기고 비위를 맞추다가도, 자리를 비우면 험담하고 자기 유익에 따라 잘 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진실히 행하고 자기의 유익에 따라 변하지 않지요.
세상에서는 이런 경우들이 핍박거리가 될 수 있지만, 지나고 보면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습니다. 즉 선과 사랑으로 승리해 가기 때문에 핍박이 물러갈 수밖에 없지요. 나아가 핍박을 이겨 나감으로 믿음이 더 장성해 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니 영육 간에 축복인 것입니다.
2) 자신의 잘못이나 지혜가 부족해서 핍박받는 경우
의를 행함으로 핍박받는 경우 외에 지혜가 부족하거나 본인의 잘못으로 핍박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온 집에 충성하지 못해서, 주변에 덕이 되지 못해 욕을 먹거나 어려움을 받는 일도 발생하지요.
가령, 여 성도님이 게을러서 집 안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고, 교회 일에 바쁘다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집 안을 돌보지 못한 것이 문제인데 정작 핍박받은 당사자는 자신이 하나님 일 때문에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도 교회 간다면서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실수를 잘하며 불성실합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전도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요. “교회 갈 시간에 자기 일이나 잘하지.”라는 소리나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면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승리하시되, 혹여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면, 신속히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이나 불법으로 인해 받는 핍박은 복이나 상급이 될 수 없지만,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믿음이 장성하여 하나님께 축복들을 크게 받아갈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과,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전자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천국이라면, 후자는 각 사람이 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은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다 세밀한 의미에서의 천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진리로 인내함으로 아이 믿음에서 청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으로 장성해 가기 때문이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속 깊이 있는 비진리까지도 발견하여 버리니, 온유함과 화평함을 이루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의를 행하여 마음을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주를 위해 받은 핍박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함으로 의를 온전히 이루었다 해도 모든 핍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위해 받는 핍박’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꾼 된 사람들이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시지요.
예부터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흠도 티도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의 형벌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핍박받고 순교했던 사람들의 충성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넘치는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 주시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은 물론,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고 따르는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지요. 혹여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장차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을 바라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 ‘심령이 가난한 자가 들어가는 천국’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 금주 과제
<엿새 동안의 만나(상)> 책자 212~21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이란?(고전 15:41)
◈ 해의 영광 : 아비들의 믿음으로 3천층 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달의 영광 : 청년들의 믿음으로 2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 아이들의 믿음으로 1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이처럼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은 각각 큰 차이가 난다. 또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의 크기나 밝기가 다르듯이 별마다 영광이 다르다.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으므로 상급이 없고 영광이라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2017-12-22
제51과주님은 누구의 구주이신가
마태복음 2:1~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2:1~12 | 외울말씀 : 누가복음 2:14 l 참고 말씀: 마태복음 1:21
교육목표 :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영적인 황금, 유향, 몰약을 드릴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전 3:18). 원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으니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고 죄 가운데 짐승과 다름없이 정욕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참된 양식, 곧 영의 양식이 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습니다(요 6:51~5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이 죽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친히 영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마태복음 2장 1절 이하를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합니다. 그러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이 소식을 듣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를 찾거든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함이 아니라 죽이고자 함이었지요.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을 찾아가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박사들의 꿈에 헤롯왕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를 하시니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도 꿈을 통해 지시를 받아 온 가족이 헤롯왕을 피해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고 경배한 사람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8~20절에,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주었지요.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안나’라는 여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나이 많아 늙었는데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눅 2:36~38).
3. 세 가지 예물의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세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지요.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세 가지 예물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1) 황금의 영적 의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황금은 재물과 부귀를 뜻합니다. 그런데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신 대로 황금은 또한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는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풍족하였으나, 아담의 범죄로 그의 후손들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친히 가난한 길을 가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신 것입니다(고후 8:9).
부의 상징인 황금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셨을까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 유향의 영적 의미
유향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유향을 예물로 드린 영적 의미는 더럽고 냄새나는 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여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3) 몰약의 영적 의미
몰약은 고대로부터 방향제 및 방부제로 사용되었으며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등에 쓰이고 장사 지낼 때 시체를 썩지 않게 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 즉 변함없는 믿음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4. 성탄절의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조건 만인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문 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을 수 있지요.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듯이, 우리도 영원한 천국을 주신 주님께 귀한 예물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사모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아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가지 예물의 영적 의미를 깨달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재물과 부귀를 뜻하기도 하고,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 )을 뜻하기도 한다.
2. ( )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이것을 드리는 영적 의미는 더럽고 냄새나는 악을 버리고 ( )를 발한다는 것이다.
3. 몰약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온 인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안나 선지자’
아기 예수님이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에 들어올 때 메시아임을 알아본 나이 많은 여선지자이다. 그녀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로 결혼한 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일생을 믿음으로 살아왔기에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눅 2:36~38).
교육목표 :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영적인 황금, 유향, 몰약을 드릴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전 3:18). 원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으니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고 죄 가운데 짐승과 다름없이 정욕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참된 양식, 곧 영의 양식이 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습니다(요 6:51~5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이 죽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친히 영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마태복음 2장 1절 이하를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합니다. 그러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이 소식을 듣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를 찾거든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함이 아니라 죽이고자 함이었지요.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을 찾아가 경배하고 예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박사들의 꿈에 헤롯왕에게 가지 말라는 지시를 하시니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도 꿈을 통해 지시를 받아 온 가족이 헤롯왕을 피해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고 경배한 사람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8~20절에,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주었지요.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찬송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안나’라는 여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나이 많아 늙었는데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눅 2:36~38).
3. 세 가지 예물의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세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지요.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세 가지 예물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1) 황금의 영적 의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황금은 재물과 부귀를 뜻합니다. 그런데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신 대로 황금은 또한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는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풍족하였으나, 아담의 범죄로 그의 후손들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친히 가난한 길을 가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신 것입니다(고후 8:9).
부의 상징인 황금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셨을까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2) 유향의 영적 의미
유향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유향을 예물로 드린 영적 의미는 더럽고 냄새나는 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여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3) 몰약의 영적 의미
몰약은 고대로부터 방향제 및 방부제로 사용되었으며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등에 쓰이고 장사 지낼 때 시체를 썩지 않게 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 즉 변함없는 믿음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셨을까요?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4. 성탄절의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조건 만인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문 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을 수 있지요.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듯이, 우리도 영원한 천국을 주신 주님께 귀한 예물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을 사모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아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가지 예물의 영적 의미를 깨달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탄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재물과 부귀를 뜻하기도 하고,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 )을 뜻하기도 한다.
2. ( )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이것을 드리는 영적 의미는 더럽고 냄새나는 악을 버리고 ( )를 발한다는 것이다.
3. 몰약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온 인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생신을 축하드리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안나 선지자’
아기 예수님이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에 들어올 때 메시아임을 알아본 나이 많은 여선지자이다. 그녀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로 결혼한 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메시아를 기다리며 일생을 믿음으로 살아왔기에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눅 2:36~38).
2017-12-15
제50과팔복 (7)
마태복음 5:9
읽을말씀 : 마태복음 5: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9 l 참고 말씀: 히브리서 12:14, 로마서 6:16
교육목표 : 십자가에 달리사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함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화평’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례히 행치 않고 설령 내가 옳다 하더라도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에게 맞추어 주지요. 또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으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해 주고 맞추어 주며, 편벽됨이 없고 진리 안에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되 생명까지 내어 주는 것이 영적인 화평함이지요.
1. 자신을 희생하여 화평케 하신 예수님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온 인류를 위하여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대신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혹자는 “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이는 과거에 한 번 노예가 되면 자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노예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여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진리를 알면 악한 의도로 화평을 깨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평을 깰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맞추어 주는가를 점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반면 남편은 짜게 먹습니다. 이때 아내가 싱겁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고만 한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화평하려면 최대한 상대를 이해시키고 배려하며 조금씩 개선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는가?’, ‘내 생각이 옳고 진리이기 때문에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히 12:14).
2.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져 화평을 이루게 되지요. 그런데 죄를 사함 받았는데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질병이 있으면 치료받아 강건해지고, 물질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부요해지는 등 마음의 소원들을 응답받게 되지요.
2)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이 있으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악이 발동하므로 자신과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스스로 고통을 받기 때문에 평안할 수 없지요.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시기, 질투, 교만, 다툼, 간음 등 마음에 악이 있으면 참 평안을 누릴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니 마음이 곤고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해서 화평을 깨기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므로 화평을 깨기도 합니다. 가령,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도 본인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와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쪽을 택했으니까 하며 계획대로 추진해 갑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열심은 기특하지만 실족하고 상처받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연약한 믿음도 고려하여 화평을 좇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몇몇 사람이 뜨거워 많은 일을 이루는 것보다, 모두가 화평함 속에 적은 일을 이루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축복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는데 여기서 ‘아들’이란 단지 남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지칭합니다. 단순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납니다. 가령, 겨우 구원받을 만한 ‘자녀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아이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또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청년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아비들의 믿음’도 있지요.
따라서 ‘화평케 하는 자’란 아비들의 믿음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바로 악은 모양도 없고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이룬 하나님의 마음을 쏙 빼닮은 사랑받는 자녀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축복받으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권능도 받아 원수 마귀가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이 외에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면 빛나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참 아들로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왕정 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왕자라면 그 영화로움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하물며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꼭 닮아 그분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 영광과 존귀함은 엄청나지요.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수종을 받으며, 수많은 천국 백성에게 세세토록 칭송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웅장한 황금 보석 집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존귀와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아가게 되지요.
따라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십자가에 달리사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써보세요.
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② 자기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③ 모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2.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139~1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아비들의 믿음’(요한일서 2:14)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까지 아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근본을 알았기에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무수한 비밀을 계시 받아 모세 오경을 기록했다.
아브라함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교육목표 : 십자가에 달리사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케 하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사람과 화평함을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화평’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례히 행치 않고 설령 내가 옳다 하더라도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에게 맞추어 주지요. 또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으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해 주고 맞추어 주며, 편벽됨이 없고 진리 안에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되 생명까지 내어 주는 것이 영적인 화평함이지요.
1. 자신을 희생하여 화평케 하신 예수님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이르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온 인류를 위하여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대신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혹자는 “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이는 과거에 한 번 노예가 되면 자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노예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여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진리를 알면 악한 의도로 화평을 깨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평을 깰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맞추어 주는가를 점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반면 남편은 짜게 먹습니다. 이때 아내가 싱겁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고만 한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화평하려면 최대한 상대를 이해시키고 배려하며 조금씩 개선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는가?’, ‘내 생각이 옳고 진리이기 때문에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히 12:14).
2.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져 화평을 이루게 되지요. 그런데 죄를 사함 받았는데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질병이 있으면 치료받아 강건해지고, 물질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부요해지는 등 마음의 소원들을 응답받게 되지요.
2)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이 있으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악이 발동하므로 자신과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스스로 고통을 받기 때문에 평안할 수 없지요.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시기, 질투, 교만, 다툼, 간음 등 마음에 악이 있으면 참 평안을 누릴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니 마음이 곤고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해서 화평을 깨기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므로 화평을 깨기도 합니다. 가령,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도 본인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와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쪽을 택했으니까 하며 계획대로 추진해 갑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열심은 기특하지만 실족하고 상처받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연약한 믿음도 고려하여 화평을 좇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몇몇 사람이 뜨거워 많은 일을 이루는 것보다, 모두가 화평함 속에 적은 일을 이루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축복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는데 여기서 ‘아들’이란 단지 남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지칭합니다. 단순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납니다. 가령, 겨우 구원받을 만한 ‘자녀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아이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또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청년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아비들의 믿음’도 있지요.
따라서 ‘화평케 하는 자’란 아비들의 믿음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바로 악은 모양도 없고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이룬 하나님의 마음을 쏙 빼닮은 사랑받는 자녀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축복받으며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와 권능도 받아 원수 마귀가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이 외에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면 빛나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참 아들로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왕정 시대에 왕위를 계승할 왕자라면 그 영화로움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하물며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꼭 닮아 그분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 영광과 존귀함은 엄청나지요.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수종을 받으며, 수많은 천국 백성에게 세세토록 칭송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웅장한 황금 보석 집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존귀와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아가게 되지요.
따라서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십자가에 달리사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써보세요.
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② 자기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③ 모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2.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139~15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아비들의 믿음’(요한일서 2:14)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까지 아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근본을 알았기에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무수한 비밀을 계시 받아 모세 오경을 기록했다.
아브라함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2017-12-08
제49과팔복 (6)
마태복음 5:8
읽을말씀 : 마태복음 5:8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8 l 참고 말씀: 요한일서 3:15, 마태복음 5:28
교육목표 : 육의 행실과 마음의 죄성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뵐 수 있는 성결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청결’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맑고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죄악이 없어서 성결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악이 없고 깨끗한 마음이 될 때라야 하나님을 뵐 수 있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청결한 사람과 악독한 사람
마음이 청결하여 복을 받은 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의 이방 여인으로 자녀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겼던 효부였지요.
룻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가야 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당장 거할 집도 넉넉히 먹을 양식도 없었고, 살아갈 일이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극진히 섬겼지요.
이처럼 룻이 선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부요하고 선한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다윗 왕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악독하여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까지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에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겼지요. 즉 외식주의자들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일례로 장로의 유전 중에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부정하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장로의 유전을 범한다고 시비하지요. 이때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말씀하십니다.
즉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요. 그러니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다고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셨습니다(마 23:27). 무덤은 시체를 보관하기에 아무리 단장해도 속은 부패하여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마음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기에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까지 깨끗하고 아름답기를 원하십니다.
2. 마음의 청결을 이루려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는 물론 마음속 죄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했고(벧전 1:16),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투고 혈기 내던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낮아지고 섬기며, 미워하던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지요.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진리로 채워 가는 만큼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옷에 더러운 똥이 묻었는데 “깨끗이 빨아야지.”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옷을 빨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마음의 더러움을 발견했다면, 스스로 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청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
여기서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진리의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란 까만 비진리의 마음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우리 마음 안에는 죄를 행하고자 하는 비진리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결단해 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이 많지요. 이것들이 해로운 줄 알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능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말씀대로 행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변화될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결국 모든 죄를 벗고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습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사기 13장 22절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만 보고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였고,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죽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뵈었지요(출 20:18~19).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대면하여 보기도 하며 친히 동행하기까지 했던 것일까요? 요한삼서 1장 11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지만,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우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천국 중에서도 3천층 이상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하나님을 가까이 뵈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이나 1천층, 2천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지요. 즉 얼마큼 성결되었느냐에 따라 각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빛이 다르고, 들어가는 처소 역시 달라집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은 단순히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모든 분야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언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고전 12:9~11)을 받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육의 행실은 물론 마음의 더러움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옵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 )이 없어서 ( )된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117~1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에녹 선지자’(창세기 5:21~24)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이다. 에녹은 모나지 않고 순수하며 착한 성품을 지녔다.
하나님에 대해, 영의 세계에 대해 늘 궁구했기에 무엇을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에녹 선지자는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교통하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교육목표 : 육의 행실과 마음의 죄성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뵐 수 있는 성결한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청결’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맑고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죄악이 없어서 성결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악이 없고 깨끗한 마음이 될 때라야 하나님을 뵐 수 있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청결한 사람과 악독한 사람
마음이 청결하여 복을 받은 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의 이방 여인으로 자녀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겼던 효부였지요.
룻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가야 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당장 거할 집도 넉넉히 먹을 양식도 없었고, 살아갈 일이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극진히 섬겼지요.
이처럼 룻이 선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부요하고 선한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다윗 왕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악독하여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까지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에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겼지요. 즉 외식주의자들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일례로 장로의 유전 중에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부정하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장로의 유전을 범한다고 시비하지요. 이때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말씀하십니다.
즉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등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요. 그러니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다고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셨습니다(마 23:27). 무덤은 시체를 보관하기에 아무리 단장해도 속은 부패하여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마음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기에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까지 깨끗하고 아름답기를 원하십니다.
2. 마음의 청결을 이루려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는 물론 마음속 죄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했고(벧전 1:16),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투고 혈기 내던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낮아지고 섬기며, 미워하던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지요.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진리로 채워 가는 만큼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옷에 더러운 똥이 묻었는데 “깨끗이 빨아야지.”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옷을 빨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마음의 더러움을 발견했다면, 스스로 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청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
여기서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진리의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란 까만 비진리의 마음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우리 마음 안에는 죄를 행하고자 하는 비진리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결단해 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이 많지요. 이것들이 해로운 줄 알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능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말씀대로 행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변화될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결국 모든 죄를 벗고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습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사기 13장 22절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만 보고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였고,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죽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뵈었지요(출 20:18~19).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대면하여 보기도 하며 친히 동행하기까지 했던 것일까요? 요한삼서 1장 11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지만,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우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천국 중에서도 3천층 이상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하나님을 가까이 뵈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이나 1천층, 2천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지요. 즉 얼마큼 성결되었느냐에 따라 각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빛이 다르고, 들어가는 처소 역시 달라집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은 단순히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모든 분야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언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고전 12:9~11)을 받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육의 행실은 물론 마음의 더러움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옵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 )이 없어서 ( )된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117~1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에녹 선지자’(창세기 5:21~24)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이다. 에녹은 모나지 않고 순수하며 착한 성품을 지녔다.
하나님에 대해, 영의 세계에 대해 늘 궁구했기에 무엇을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에녹 선지자는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교통하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2017-12-01
제48과팔복 (5)
마태복음 5:7
읽을말씀 : 마태복음 5:7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7 l 참고 말씀: 히브리서 12:6
교육목표 : 선한 긍휼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축복하심 가운데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하지요.
이는 성령의 열매 중 양선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양선은 악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이런 양선의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더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입니다.
1. 한없는 용서의 긍휼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준다면 크게 관용을 베푼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하시지요. 이는 70번씩 7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완전한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용서의 긍휼에 대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6천 일, 즉 16여 년간을 꼬박 일해서 모은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는 3억 원에 해당하지요.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고 한다면 3조 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을테니 참아 달라며 사정하지요. 결국 임금이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오던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할 경우 일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 정도의 금액에 불과합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며 감옥에 가두고 말지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작은 잘못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 정죄한다면 얼마나 악한 모습이겠습니까.
혹여 자신이 상대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다 해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포용할 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해도 징계하기보다는 먼저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면할 때도 내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으므로 불편한 마음으로 찌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사랑의 권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2. 사랑을 담은 징계의 긍휼
이처럼 용서의 긍휼이 있는 반면 상황에 따라 긍휼이 징계의 형태로 나타나는 징계의 긍휼도 있습니다. 징계의 긍휼 역시 미움이나 정죄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도 따르고, 그렇게 해서라도 죄에서 돌이켜 진리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이를 바로잡는 것이 사랑이라 해서 처음부터 매를 들어 때리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자녀가 중심에서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한다면 “용서해 줄 테니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라.” 하고 따뜻하게 안아 주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가 말로는 회개한다 하면서 계속하여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마음이 아프더라도 징계의 매를 들어서라도 마음 깊이 깨우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빗나가기 전에 징계를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징계라도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이가 물건을 훔쳤을 때, 아이가 중심에서 용서를 빈다면 선한 사람은 긍휼히 여겨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신에게 손해를 입혔다며 혈기를 내고, 아이를 책망하거나 심지어 용서를 빌어도 처벌을 요구하지요. 또한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잘못을 전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이러한 징계는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긍휼이 아닐뿐더러 결코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록 상대가 잘못을 범했다 해도 그 사람의 입장과 장래를 생각하여 사랑으로 징계할 때라야 징계의 긍휼에 속하지요.
성경에는 믿음의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진리로 권고하고 징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마 18:15~17).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에게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만일 권면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이 속한 모임의 윗분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해야지요.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려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과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대로 하되 어떤 범죄라도 사람을 판단 정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랑의 긍휼을 베풀어야 우리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구제의 긍휼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구제의 긍휼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형제가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행함이 없다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약 2:15~16). 진정한 구제는 형제가 어려울 때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혹자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녀가 굶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형제에게 내 자녀와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어렵다고 무턱대고 구제하는 것은 가하지 않습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제하거나, 게을러서 놀고 돈만 있으면 도박하고 술 마시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죄를 짓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구제는 축복이 막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요.
따라서 상대가 어렵다고 해서 무조건 구제하며 긍휼을 베풀 것이 아니라, 잘 분별하여 구제하고도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4.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신 말씀대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설령 자신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 해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거나 실수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부요하고 강건한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며, 연약함을 강건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한다.
2.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101~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불순종한 요나를 도왔다가 어려움을 당한 경우’
강대국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간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요나가 탄 배는 거의 난파 지경에 이르렀다. 배에 탄 사람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혀 바다에 던져지고 만다.
그러므로 긍휼을 베푼다 해도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다면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교육목표 : 선한 긍휼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축복하심 가운데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하지요.
이는 성령의 열매 중 양선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양선은 악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이런 양선의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더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입니다.
1. 한없는 용서의 긍휼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준다면 크게 관용을 베푼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하시지요. 이는 70번씩 7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완전한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용서의 긍휼에 대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6천 일, 즉 16여 년간을 꼬박 일해서 모은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는 3억 원에 해당하지요.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고 한다면 3조 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을테니 참아 달라며 사정하지요. 결국 임금이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오던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할 경우 일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 정도의 금액에 불과합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며 감옥에 가두고 말지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작은 잘못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 정죄한다면 얼마나 악한 모습이겠습니까.
혹여 자신이 상대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다 해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포용할 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해도 징계하기보다는 먼저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면할 때도 내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으므로 불편한 마음으로 찌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사랑의 권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2. 사랑을 담은 징계의 긍휼
이처럼 용서의 긍휼이 있는 반면 상황에 따라 긍휼이 징계의 형태로 나타나는 징계의 긍휼도 있습니다. 징계의 긍휼 역시 미움이나 정죄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도 따르고, 그렇게 해서라도 죄에서 돌이켜 진리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이를 바로잡는 것이 사랑이라 해서 처음부터 매를 들어 때리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자녀가 중심에서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한다면 “용서해 줄 테니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라.” 하고 따뜻하게 안아 주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가 말로는 회개한다 하면서 계속하여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마음이 아프더라도 징계의 매를 들어서라도 마음 깊이 깨우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빗나가기 전에 징계를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징계라도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이가 물건을 훔쳤을 때, 아이가 중심에서 용서를 빈다면 선한 사람은 긍휼히 여겨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은 자신에게 손해를 입혔다며 혈기를 내고, 아이를 책망하거나 심지어 용서를 빌어도 처벌을 요구하지요. 또한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잘못을 전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이러한 징계는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긍휼이 아닐뿐더러 결코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록 상대가 잘못을 범했다 해도 그 사람의 입장과 장래를 생각하여 사랑으로 징계할 때라야 징계의 긍휼에 속하지요.
성경에는 믿음의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진리로 권고하고 징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마 18:15~17).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에게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만일 권면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이 속한 모임의 윗분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해야지요.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려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과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대로 하되 어떤 범죄라도 사람을 판단 정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랑의 긍휼을 베풀어야 우리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구제의 긍휼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구제의 긍휼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형제가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행함이 없다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약 2:15~16). 진정한 구제는 형제가 어려울 때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혹자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녀가 굶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형제에게 내 자녀와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어렵다고 무턱대고 구제하는 것은 가하지 않습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제하거나, 게을러서 놀고 돈만 있으면 도박하고 술 마시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죄를 짓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구제는 축복이 막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요.
따라서 상대가 어렵다고 해서 무조건 구제하며 긍휼을 베풀 것이 아니라, 잘 분별하여 구제하고도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4.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신 말씀대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설령 자신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 해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거나 실수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부요하고 강건한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며, 연약함을 강건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한다.
2.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101~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불순종한 요나를 도왔다가 어려움을 당한 경우’
강대국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간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요나가 탄 배는 거의 난파 지경에 이르렀다. 배에 탄 사람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혀 바다에 던져지고 만다.
그러므로 긍휼을 베푼다 해도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다면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2017-11-24
제47과팔복 (4)
마태복음 5:6
읽을말씀 : 마태복음 5:6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6 ㅣ 참고 말씀: 요한복음 6:35, 55
교육목표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 삼아 행함으로 아비의 믿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옳은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성결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굶주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가를 잘 나타내 주지요. 옛날 어르신 가운데는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므로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죽을 끓여 먹으며 겨우 연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너무 배가 고프니까 자식까지 잡아먹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왕하 6:28~29). 그런데 배고픈 것 못지않게 목마른 것도 견디기 힘듭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때 한 모금의 물만 마셔도 살 것 같지요.
하나님께서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갈급히 구하는 것처럼 의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행하라는 것이지요. 성결되기 위해,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 주님의 마음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시는지요? 혹여 ‘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말씀 들으니까 배부르고 만족스럽다.’ 하십니까?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내 것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지요. 그런 사람은 항상 먹지 못하여 배고픈 사람과 같고,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목말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55절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지요. 이 말씀은 인자 곧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영적 양식이요, 목마름을 시원케 하는 영적 음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어디서 구하며, 설령 구해 와도 어떻게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예수님의 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 곧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양식 삼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고, 시편 119편 147~148절에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하며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양식 삼는다 고백하지요.
여러분도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들은 설교 말씀을 늘 되새기며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양식 삼고 계신지요? 양식 삼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수분과 함께 섭취하지 않으면 소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진리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하여 악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할 때, 말씀이 소화되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면 체면 불구하고 허겁지겁 먹듯이, 영적인 양식과 음료를 찾은 우리는 생명이 되는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하기 위해 더 간절히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과 위배된 자신의 행동과 마음, 생각을 찾아 부족한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요.
또한 어찌하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릴까 궁구하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하게 의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지요.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행해 나갑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6절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의를 이루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성경에 ‘버리라’ 하신 것을 마음과 생각, 행함에서 버리고, ‘하지 말라’ 하신 대로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라’ 하신 말씀대로 지켜 행합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의에 주리고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을 양식 삼고 진리대로 행해 나가면 비진리가 전혀 없는 성결한 영의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이 곧 배부름의 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면 하나님을 쏙 빼닮은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큼 그분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지켜 행하는 아비의 믿음으로, 이것 역시 영적으로 배부름을 받는 자의 복된 모습입니다. 아비와 같은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고, 믿음이 쑥쑥 자라야 합니다. 육적으로도 아이가 태어나 젖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쑥쑥 자라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힘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행해 나가면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는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즉 아비의 믿음이 되어 배부름을 받은 복된 사람이 됩니다. 아비들의 신앙이 되면 만사가 형통하고 축복이 임하며, 원수 마귀 사단을 능히 이기고 지배하며 다스립니다. 또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아 순종하지요.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대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여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형통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배부름을 받는 복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시험 환난을 당할 걱정이 없습니다.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 해도 피해 가게 하시고, 어려움을 만나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부를 것이 아니라, 아직도 굶주리고 헐벗어 있는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으로 배불리 먹여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항상 풍성하고 배부른 삶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 )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 )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 )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79~9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교육목표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 삼아 행함으로 아비의 믿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옳은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성결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굶주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가를 잘 나타내 주지요. 옛날 어르신 가운데는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므로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죽을 끓여 먹으며 겨우 연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너무 배가 고프니까 자식까지 잡아먹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왕하 6:28~29). 그런데 배고픈 것 못지않게 목마른 것도 견디기 힘듭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때 한 모금의 물만 마셔도 살 것 같지요.
하나님께서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갈급히 구하는 것처럼 의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행하라는 것이지요. 성결되기 위해,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 주님의 마음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시는지요? 혹여 ‘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말씀 들으니까 배부르고 만족스럽다.’ 하십니까?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내 것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지요. 그런 사람은 항상 먹지 못하여 배고픈 사람과 같고,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목말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55절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지요. 이 말씀은 인자 곧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영적 양식이요, 목마름을 시원케 하는 영적 음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어디서 구하며, 설령 구해 와도 어떻게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예수님의 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 곧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양식 삼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고, 시편 119편 147~148절에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하며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양식 삼는다 고백하지요.
여러분도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들은 설교 말씀을 늘 되새기며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양식 삼고 계신지요? 양식 삼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수분과 함께 섭취하지 않으면 소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진리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하여 악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할 때, 말씀이 소화되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면 체면 불구하고 허겁지겁 먹듯이, 영적인 양식과 음료를 찾은 우리는 생명이 되는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하기 위해 더 간절히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과 위배된 자신의 행동과 마음, 생각을 찾아 부족한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요.
또한 어찌하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릴까 궁구하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하게 의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지요.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행해 나갑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6절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의를 이루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성경에 ‘버리라’ 하신 것을 마음과 생각, 행함에서 버리고, ‘하지 말라’ 하신 대로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라’ 하신 말씀대로 지켜 행합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의에 주리고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을 양식 삼고 진리대로 행해 나가면 비진리가 전혀 없는 성결한 영의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이 곧 배부름의 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면 하나님을 쏙 빼닮은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큼 그분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지켜 행하는 아비의 믿음으로, 이것 역시 영적으로 배부름을 받는 자의 복된 모습입니다. 아비와 같은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고, 믿음이 쑥쑥 자라야 합니다. 육적으로도 아이가 태어나 젖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쑥쑥 자라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힘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행해 나가면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는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즉 아비의 믿음이 되어 배부름을 받은 복된 사람이 됩니다. 아비들의 신앙이 되면 만사가 형통하고 축복이 임하며, 원수 마귀 사단을 능히 이기고 지배하며 다스립니다. 또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아 순종하지요.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대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여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형통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배부름을 받는 복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시험 환난을 당할 걱정이 없습니다.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 해도 피해 가게 하시고, 어려움을 만나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부를 것이 아니라, 아직도 굶주리고 헐벗어 있는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으로 배불리 먹여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항상 풍성하고 배부른 삶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 )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 )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 )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79~99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2017-11-17
제46과하나님께 감사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시편 17:8 l 참고 말씀: 레위기 23:42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은 물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지요.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질병, 사고, 재앙으로부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보호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오늘날 명명된 병만 해도 약 1억 2천 2백만 개가 넘습니다. 이중에는 세상 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합니다.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도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을 앓고 알코올, 마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와 명예, 권세도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살하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병,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셨습니다.
여 성도 한 분은 ‘양수 과소증’으로 도저히 살릴 길 없었던 태아를 기도를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양수가 거의 없는 태반 속에서 그 연약한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은 급성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던 중 통회자복을 한 후 기도를 받았는데 수술을 하지 않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십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과 사고로부터도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구는 대지진과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등 자연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지켜 주십니다.
혹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철저히 돌이키고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됩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다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 성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곡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더욱 사랑함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3.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맞아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다해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이러한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승리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은 물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지요.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질병, 사고, 재앙으로부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보호해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오늘날 명명된 병만 해도 약 1억 2천 2백만 개가 넘습니다. 이중에는 세상 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합니다.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도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을 앓고 알코올, 마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와 명예, 권세도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살하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병,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셨습니다.
여 성도 한 분은 ‘양수 과소증’으로 도저히 살릴 길 없었던 태아를 기도를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양수가 거의 없는 태반 속에서 그 연약한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은 급성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던 중 통회자복을 한 후 기도를 받았는데 수술을 하지 않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십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과 사고로부터도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구는 대지진과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등 자연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지켜 주십니다.
혹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철저히 돌이키고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됩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다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 성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곡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더욱 사랑함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3.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맞아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다해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이러한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승리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2017-11-10
제45과팔복 (3)
마태복음 5:5
읽을말씀 : 마태복음 5:5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5 l 참고 말씀: 시편 37:11
교육목표 : 온유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품음으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의약기술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토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처럼 세종대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덕으로 어진 정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깃들일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후대에까지 이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한 자에게 어떠한 복을 내려주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온유한 자란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온유’에 대해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유순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성품이 순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거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또 소극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나 친절하게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는 미움이 있고 불편하여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화가 나지만 꾹꾹 눌러 참고, 따져 묻고 싶지만 겉으론 상대에게 양보하며 부드럽게 대하면 ‘착하다. 온유하다.’ 말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온유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어떤 불편함도, 싫어함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어야 온유하다고 인정해 주시지요.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대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며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고, 내 성격과 취향에 맞지 않아도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품습니다.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며 매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는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런 온유한 마음은 ‘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솜에 단단한 물체나 돌멩이를 던지면 소리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반면 단단한 철판에 돌을 던지면 요란하고 튕겨져 나가지요. 또 유리에 돌을 던지면 “쨍!” 하고 깨져 버립니다.
온유한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입니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덕’이란 사전에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 인격이 갖추어져 남을 정복시키는 일’이라 설명합니다. 영적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다 해도 덕이 없으면 온유함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지만 행동이 거칠고 실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남들에게 답답함을 주고, 어떤 사람은 말이 많고 떠들며, 농담을 잘하여 신뢰가 떨어지지요.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말하고 있는데, 딴청하거나 경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덕이 없으므로 온유한 마음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마음에 이룬 내면적인 것이라면 덕은 외면적인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저분하고 남루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 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지요.
덕을 갖춘 온유함은 마음과 함께 말이나 행동, 모습도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신뢰와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을 치리함에 있어서도 물리적인 힘이 아닌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깃들지요. 이렇게 덕을 갖춘 온유함은 내가 선하게 행동하여 상대를 품는 것뿐만 아니라, 꽃향기에 나비와 벌이 모여들듯 많은 사람이 그 선과 사랑에 감동을 얻고 깃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온유한 마음이 되셨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내가 있는 곳에 소리가 나고 화평이 깨어지지는 않습니까? 만일 모임에 불평하고 고집스런 사람이 있어서 화평이 깨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온유한 사람이 되어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감동을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때문에 불화하고, 아내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 말고, 내가 가족에게 미소가 되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바라봐 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권면이나 지적받을 때 기쁘게 자신을 돌아보며 발전시키는 모습이십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이 말을 해도 중심에서 귀히 여기며 감사하게 받으시는지요? 이런 사람은 어린 소자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능력이 부족하여 실수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기다려 주고 계십니까? 다투지 않고, 부드럽고 잔잔하며 쓸데없는 허탄한 말도 하지 않고 꼭 필요한 진리의 말만 내고 계신지요? 온전한 온유를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걸림이 되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을뿐더러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열심히 마음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거친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떨기도 뽑아내야지요.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름도 주면서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판단, 정죄, 교만 등 비진리,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면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온유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본문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기업이란 “선대로부터 이어오는 재산과 사업 또는 기초가 되는 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이 세상에 속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의 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구원받아 천국 가면 그만이지. 개인적으로 땅을 꼭 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충성한 것만큼 개개인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교회만 왔다갔다 하고, 어떤 사람은 전도하고 충성하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애통하며 간구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생명을 잃기까지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기 다르게 충성하였는데 똑같은 집에, 똑같은 상급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어찌 ‘공평하시며 공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바로 자신을 낮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덕을 갖춰 온유함을 이룬 사람이 영혼 구원과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했으니 하늘나라에서 넓은 땅을 주어,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주시지요.
온유하여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 이르게 하였으니, 천국에서도 그들이 감사하여 함께 사랑을 나누려고 방문할 텐데, 많은 사람을 맞을 집터도 넓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음 중심에서 존경하고 깃들이는 것이 천국에서는 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낮아지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기고 희생하였지만, 하늘나라에선 ‘큰 자’의 권세를 누리며, 큰 땅을 소유하게 되지요. 이렇게 주어진 넓은 땅에 이 세상에서 충성으로, 봉사로, 헌금으로 드려진 천국 집의 재료를 가지고, 우리 주님의 지휘 아래 멋지고 아름다운 내 집이 지어집니다. 이 넓은 땅에 정원과 호수, 수영장 등 각종 시설물을 짓게 되지요. 그러나 한 번 받은 천국 땅과 상급은 천국에서 더 이상 늘릴 수도, 나누어 줄 수도, 구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사랑과 덕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많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 )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이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 )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다.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65~7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옥토’란
땅이 고르고 비옥하여 씨를 뿌리면 싹이 자라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내는 밭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와 틀에 매여 있는 단단한 길가밭과 같지 않고 부드럽다.
또 돌이나 가시떨기 즉 비진리나 육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며, 하나님 말씀에 오직 아멘과 예로 순종하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교육목표 : 온유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품음으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의약기술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토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처럼 세종대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덕으로 어진 정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깃들일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후대에까지 이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한 자에게 어떠한 복을 내려주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온유한 자란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온유’에 대해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유순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성품이 순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거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또 소극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나 친절하게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는 미움이 있고 불편하여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화가 나지만 꾹꾹 눌러 참고, 따져 묻고 싶지만 겉으론 상대에게 양보하며 부드럽게 대하면 ‘착하다. 온유하다.’ 말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온유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어떤 불편함도, 싫어함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어야 온유하다고 인정해 주시지요.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대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며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고, 내 성격과 취향에 맞지 않아도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품습니다.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며 매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는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런 온유한 마음은 ‘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솜에 단단한 물체나 돌멩이를 던지면 소리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반면 단단한 철판에 돌을 던지면 요란하고 튕겨져 나가지요. 또 유리에 돌을 던지면 “쨍!” 하고 깨져 버립니다.
온유한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입니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덕’이란 사전에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 인격이 갖추어져 남을 정복시키는 일’이라 설명합니다. 영적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다 해도 덕이 없으면 온유함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지만 행동이 거칠고 실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남들에게 답답함을 주고, 어떤 사람은 말이 많고 떠들며, 농담을 잘하여 신뢰가 떨어지지요.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말하고 있는데, 딴청하거나 경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덕이 없으므로 온유한 마음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마음에 이룬 내면적인 것이라면 덕은 외면적인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저분하고 남루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 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지요.
덕을 갖춘 온유함은 마음과 함께 말이나 행동, 모습도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신뢰와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을 치리함에 있어서도 물리적인 힘이 아닌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깃들지요. 이렇게 덕을 갖춘 온유함은 내가 선하게 행동하여 상대를 품는 것뿐만 아니라, 꽃향기에 나비와 벌이 모여들듯 많은 사람이 그 선과 사랑에 감동을 얻고 깃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온유한 마음이 되셨는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내가 있는 곳에 소리가 나고 화평이 깨어지지는 않습니까? 만일 모임에 불평하고 고집스런 사람이 있어서 화평이 깨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온유한 사람이 되어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감동을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때문에 불화하고, 아내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 말고, 내가 가족에게 미소가 되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바라봐 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권면이나 지적받을 때 기쁘게 자신을 돌아보며 발전시키는 모습이십니까? 나보다 못한 사람이 말을 해도 중심에서 귀히 여기며 감사하게 받으시는지요? 이런 사람은 어린 소자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능력이 부족하여 실수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기다려 주고 계십니까? 다투지 않고, 부드럽고 잔잔하며 쓸데없는 허탄한 말도 하지 않고 꼭 필요한 진리의 말만 내고 계신지요? 온전한 온유를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걸림이 되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을뿐더러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열심히 마음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거친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떨기도 뽑아내야지요.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름도 주면서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판단, 정죄, 교만 등 비진리,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면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온유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본문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기업이란 “선대로부터 이어오는 재산과 사업 또는 기초가 되는 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이 세상에 속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의 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구원받아 천국 가면 그만이지. 개인적으로 땅을 꼭 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충성한 것만큼 개개인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교회만 왔다갔다 하고, 어떤 사람은 전도하고 충성하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애통하며 간구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생명을 잃기까지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기 다르게 충성하였는데 똑같은 집에, 똑같은 상급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어찌 ‘공평하시며 공의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바로 자신을 낮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덕을 갖춰 온유함을 이룬 사람이 영혼 구원과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했으니 하늘나라에서 넓은 땅을 주어,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주시지요.
온유하여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 이르게 하였으니, 천국에서도 그들이 감사하여 함께 사랑을 나누려고 방문할 텐데, 많은 사람을 맞을 집터도 넓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음 중심에서 존경하고 깃들이는 것이 천국에서는 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낮아지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기고 희생하였지만, 하늘나라에선 ‘큰 자’의 권세를 누리며, 큰 땅을 소유하게 되지요. 이렇게 주어진 넓은 땅에 이 세상에서 충성으로, 봉사로, 헌금으로 드려진 천국 집의 재료를 가지고, 우리 주님의 지휘 아래 멋지고 아름다운 내 집이 지어집니다. 이 넓은 땅에 정원과 호수, 수영장 등 각종 시설물을 짓게 되지요. 그러나 한 번 받은 천국 땅과 상급은 천국에서 더 이상 늘릴 수도, 나누어 줄 수도, 구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사랑과 덕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많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 )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이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 )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다.
* 금주 과제
<참된 복을 좇는 자> 책자 65~7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옥토’란
땅이 고르고 비옥하여 씨를 뿌리면 싹이 자라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내는 밭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와 틀에 매여 있는 단단한 길가밭과 같지 않고 부드럽다.
또 돌이나 가시떨기 즉 비진리나 육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며, 하나님 말씀에 오직 아멘과 예로 순종하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