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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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5
제27과맥추절을 지키라
출애굽기 23:14~18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4~18 | 외울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6~18 ㅣ 참고 말씀: 신명기 16:10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맥추절을 지키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년 동안 광활하고 메마른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누렇게 익은 밀밭을 볼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씨를 심고 그 열매를 수확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이러한 훗날의 일들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도 전에 그곳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로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맥추절은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들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절기를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그러면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들이 절기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1)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임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게 되지요. 또한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베다니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역시 마리아에 비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늘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니십니까? 또는 은혜를 받을 때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그 은혜를 곧 잊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의 조건으로 여겨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계시는지요?
2)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맥추절을 지키게 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년 동안 광활하고 메마른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누렇게 익은 밀밭을 볼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씨를 심고 그 열매를 수확할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이러한 훗날의 일들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도 전에 그곳에 들어가면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했습니다.
맥추절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로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둔 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리 추수가 거의 끝날 무렵, 밀 추수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밀 추수가 시작될 때 새로 추수할 곡물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로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맥추절은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부릅니다. 칠칠절은 그 시점이 유월절로부터 7주 후라 붙여진 이름이고, 오순절은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있었으므로 유대 전통의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월 첫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들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것들을 찾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깊이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녀들이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절기를 맞아 모든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2.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과 영적 의미
민수기 28장 26~31절에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했습니다.
칠칠절 곧 맥추절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축제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했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첫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 떡을 소제로 드렸습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함을 뜻합니다. 나아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해져야 함을 나타내지요.
그러면 맥추절을 지키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밭에 뿌린 곡식의 첫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고 구원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3. 맥추감사제
신명기 16장 16~17절에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즉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마음의 향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왜 성도들이 절기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1)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행함으로 표현할 때 온전해지고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말씀한 대로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감사의 조건을 주셨습니다.”라고 참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신 대로 예물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감사가 마음에서 우러난 참임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게 되지요. 또한 말로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할 때보다 마음을 자신의 소중한 것에 담아 드릴 때 그 향이 더 진해집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귀한 것을 드림으로써 그 감사의 고백에 진액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사랑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마리아 가정을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말씀도 가르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으로 참 믿음과 천국 소망을 심어 주셨지요.
그래서 베다니 마리아는 가장 소중한 것, 곧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어 드렸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마리아의 행함을 못마땅히 여기는 가룟 유다에게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7~8) 하시며 장래 일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역시 마리아에 비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의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심기를 즐겨합니다. 그런데 혹여 나는 늘 하나님께 받기만 하고 드린 것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은 아니십니까? 또는 은혜를 받을 때는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하고 그 은혜를 곧 잊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니면 한결같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의 조건으로 여겨 정성 다한 예물을 드리고 계시는지요?
2)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의 조건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감사예물을 즐겨 드리는 것은 결국 밭에서 풍성한 소산을 거둔 후 또다시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수확을 많이 했어도 금년에 또 심지 않으면 내년에 거둘 수가 없습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고 감사로 심고 또 심을 때, 갈수록 더 큰 감사의 조건으로 이어집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한 대로 많이 심을수록 많이 거두는 것이 영계의 법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범사에 즐겨 감사를 표현하는 분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며 30배, 60배, 100배로 주시기 원하는 분입니다. 절기는 물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즐겨 감사를 표현하심으로 더욱 감사가 넘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2019-06-28
제26과하늘들
느헤미야 9:6
읽을말씀 : 느헤미야 9:6 | 외울말씀 : 느헤미야 9:6 ㅣ 참고 말씀: 시편 68:33
교육목표 : 모든 하늘들을 지으시고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을 내보임으로 불가능이 없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 9장 6절에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했습니다. 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 외에도 여러 하늘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과연 몇 개의 하늘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1. 여러 개의 하늘들
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두 개의 하늘까지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의 하늘과 천국 곧 영의 세계의 하늘이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하늘을 표현할 때 둘뿐 아니라 여러 개의 하늘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시편 68편 33절에는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했고, 열왕기상 8장 27절에는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말씀했지요.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후 12:2)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는 것은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과 그 이상의 하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스데반 집사는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함으로써 사람이 영안이 열리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천국이 실존하고 있음을 말해 주지요.
오늘날에는 과학자들도 하늘이 여럿임을 인정합니다. 일례로,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 교수 맥스 테그마크는 ‘평행 우주론’을 통해 우리가 사는 우주 외에도 다른 우주가 존재하는데 각각의 우주가 물리적 성격 즉 시간과 공간적인 특징이 전혀 다를 수 있다고 했지요. 이는 곧 여러 하늘이 있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입니다.
2. 지구가 속한 첫째 하늘과 에덴동산이 있는 둘째 하늘
여러 하늘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의 하늘과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의 하늘이지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우주 곧 육의 세계의 하늘이 첫째 하늘이라면 둘째 하늘부터는 영의 세계에 속합니다. 둘째 하늘에는 에덴동산이 있는 빛의 영역과 악의 영들이 존재하는 어둠의 영역이 공존합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에 대해 나오는데 그들이 거하는 곳이 바로 둘째 하늘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둘째 하늘에 속한 에덴동산의 동편을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로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3:24). 에덴동산 동편은 악한 영의 세계와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에덴동산의 경계선이기 때문입니다. 생령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과 첫째 하늘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관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첫째 하늘에 속한 지구를 오갈 수 있었지만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제약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첫째 하늘과 에덴동산이 속한 둘째 하늘의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둘째 하늘에도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사는 육의 세상과 같이 제한된 개념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람이 늙거나 죽는 일이 없고, 사물이 변질되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며 어찌 보면 정지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공간 역시 에덴동산에서는 제약 없이 무한하게 펼쳐지지요. 만약 첫째 하늘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죽지 않고 계속 태어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포화상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하늘은 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인구가 불어나도 좁아지거나 가득 찰 걱정은 없습니다.
3. 천국이 있는 셋째 하늘
셋째 하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장차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말합니다. 주의 계시와 환상을 밝히 받은 사도 바울은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하며 셋째 하늘에 속한 낙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고후 12:2~4).
각 나라마다 대통령이 사는 수도가 있는가 하면 중소 도시와 시골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도 가장자리라 할 수 있는 낙원부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처소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주님을 영접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여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되찾았는지에 따라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은 둘째 하늘보다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을 지닌 곳입니다.
그래서 첫째 하늘에 사는 사람들의 제한적 사고로는 셋째 하늘 곧 천국의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고무풍선에 바람을 불어넣기 전에는 풍선 자체의 좁은 면적과 부피가 있지만 얼마나 바람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자유자재로 풍선의 면적과 부피가 변합니다.
천국의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집을 짓는다면 일정한 면적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지을 수 있는 공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셋째 하늘의 공간에서는 면적이나 부피, 길이, 높이 등의 개념을 모두 초월하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천국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처소인 넷째 하늘
넷째 하늘은 태초의 하나님께서 공간 분리 이전에 계시던 근본의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품기만 하셔도 즉시 이루어지는 곳이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닫고 집 안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19~29).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 홀연히 갈릴리 해변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 식사하기도 하셨지요(요 21:1~14). 이렇게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오백여 명이 보는 가운데 구름 속으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물며 근본 하나님께서 계시던 넷째 하늘의 공간은 어떻겠습니까. 태초에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시면서 모든 우주 공간을 품고 다스렸듯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넷째 하늘에 계시면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등 모든 하늘을 지배하고 다스리십니다.
5.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광활하고 신비한 모든 하늘에 비하면 작은 점과 같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일생 동안 이런저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풍족한 삶을 위해 아등바등 애씁니다. 모든 하늘을 지배하고 통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이 세상의 삶이 조금도 복잡할 것이 없고 어려울 것도 없지만 첫째 하늘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개미로서는 도무지 옮길 수 없는 큰 짐이라도 사람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옮길 수 있고, 도무지 건널 수 없는 물웅덩이도 사람은 간단히 해결해 줄 수 있지요. 이같이 개미에게 어렵고 불가능한 일도 사람 편에서는 매우 쉬운 것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며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낙심되는 현실에 처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소유하여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지구가 속한 우주 곧 육의 세계 하늘이 ( ) 하늘이라면 둘째 하늘부터는 영의 세계에 속한다. 둘째 하늘에는 에덴동산이 있는 ( )의 영역과 악의 영들이 존재하는 ( )의 영역이 공존한다.
2. 셋째 하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 )을 말한다. ( ) 하늘은 태초의 하나님께서 공간을 분리하기 전에 계시던 근본 하늘을 의미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55~7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낙원’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은 천국의 처소 중 가장 낮은 곳이지만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낙원에 거하는 사람은 믿음의 1단계로 상급이나 면류관이 없으며 집도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천국집이 없다고 해서 마냥 잔디밭을 거닐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마을 회관 같은 곳이 있어 여러 사람이 함께 쉬며 사용하듯이, 낙원에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장소가 있어 그 안에서 모이고 안락하게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교육목표 : 모든 하늘들을 지으시고 천지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큰 믿음을 내보임으로 불가능이 없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 9장 6절에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했습니다. 이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 외에도 여러 하늘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과연 몇 개의 하늘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1. 여러 개의 하늘들
천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두 개의 하늘까지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의 하늘과 천국 곧 영의 세계의 하늘이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하늘을 표현할 때 둘뿐 아니라 여러 개의 하늘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시편 68편 33절에는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했고, 열왕기상 8장 27절에는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말씀했지요.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후 12:2)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는 것은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과 그 이상의 하늘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스데반 집사는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함으로써 사람이 영안이 열리면 영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천국이 실존하고 있음을 말해 주지요.
오늘날에는 과학자들도 하늘이 여럿임을 인정합니다. 일례로,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 교수 맥스 테그마크는 ‘평행 우주론’을 통해 우리가 사는 우주 외에도 다른 우주가 존재하는데 각각의 우주가 물리적 성격 즉 시간과 공간적인 특징이 전혀 다를 수 있다고 했지요. 이는 곧 여러 하늘이 있음을 뒷받침해 주는 것입니다.
2. 지구가 속한 첫째 하늘과 에덴동산이 있는 둘째 하늘
여러 하늘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의 하늘과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의 하늘이지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우주 곧 육의 세계의 하늘이 첫째 하늘이라면 둘째 하늘부터는 영의 세계에 속합니다. 둘째 하늘에는 에덴동산이 있는 빛의 영역과 악의 영들이 존재하는 어둠의 영역이 공존합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에 대해 나오는데 그들이 거하는 곳이 바로 둘째 하늘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둘째 하늘에 속한 에덴동산의 동편을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로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3:24). 에덴동산 동편은 악한 영의 세계와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에덴동산의 경계선이기 때문입니다. 생령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과 첫째 하늘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는 관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한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첫째 하늘에 속한 지구를 오갈 수 있었지만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제약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속한 첫째 하늘과 에덴동산이 속한 둘째 하늘의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둘째 하늘에도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사는 육의 세상과 같이 제한된 개념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람이 늙거나 죽는 일이 없고, 사물이 변질되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며 어찌 보면 정지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공간 역시 에덴동산에서는 제약 없이 무한하게 펼쳐지지요. 만약 첫째 하늘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죽지 않고 계속 태어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포화상태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하늘은 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인구가 불어나도 좁아지거나 가득 찰 걱정은 없습니다.
3. 천국이 있는 셋째 하늘
셋째 하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장차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말합니다. 주의 계시와 환상을 밝히 받은 사도 바울은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하며 셋째 하늘에 속한 낙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고후 12:2~4).
각 나라마다 대통령이 사는 수도가 있는가 하면 중소 도시와 시골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도 가장자리라 할 수 있는 낙원부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처소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주님을 영접하여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여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되찾았는지에 따라 들어가는 천국의 처소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은 둘째 하늘보다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을 지닌 곳입니다.
그래서 첫째 하늘에 사는 사람들의 제한적 사고로는 셋째 하늘 곧 천국의 시간과 공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고무풍선에 바람을 불어넣기 전에는 풍선 자체의 좁은 면적과 부피가 있지만 얼마나 바람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자유자재로 풍선의 면적과 부피가 변합니다.
천국의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집을 짓는다면 일정한 면적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지을 수 있는 공간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셋째 하늘의 공간에서는 면적이나 부피, 길이, 높이 등의 개념을 모두 초월하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천국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처소인 넷째 하늘
넷째 하늘은 태초의 하나님께서 공간 분리 이전에 계시던 근본의 하늘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품기만 하셔도 즉시 이루어지는 곳이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닫고 집 안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19~29).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또 홀연히 갈릴리 해변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 식사하기도 하셨지요(요 21:1~14). 이렇게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오백여 명이 보는 가운데 구름 속으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물며 근본 하나님께서 계시던 넷째 하늘의 공간은 어떻겠습니까. 태초에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시면서 모든 우주 공간을 품고 다스렸듯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넷째 하늘에 계시면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등 모든 하늘을 지배하고 다스리십니다.
5.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광활하고 신비한 모든 하늘에 비하면 작은 점과 같이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일생 동안 이런저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풍족한 삶을 위해 아등바등 애씁니다. 모든 하늘을 지배하고 통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는 이 세상의 삶이 조금도 복잡할 것이 없고 어려울 것도 없지만 첫째 하늘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개미로서는 도무지 옮길 수 없는 큰 짐이라도 사람이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옮길 수 있고, 도무지 건널 수 없는 물웅덩이도 사람은 간단히 해결해 줄 수 있지요. 이같이 개미에게 어렵고 불가능한 일도 사람 편에서는 매우 쉬운 것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며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낙심되는 현실에 처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소유하여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지구가 속한 우주 곧 육의 세계 하늘이 ( ) 하늘이라면 둘째 하늘부터는 영의 세계에 속한다. 둘째 하늘에는 에덴동산이 있는 ( )의 영역과 악의 영들이 존재하는 ( )의 영역이 공존한다.
2. 셋째 하늘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 )을 말한다. ( ) 하늘은 태초의 하나님께서 공간을 분리하기 전에 계시던 근본 하늘을 의미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55~7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낙원’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은 천국의 처소 중 가장 낮은 곳이지만 이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낙원에 거하는 사람은 믿음의 1단계로 상급이나 면류관이 없으며 집도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천국집이 없다고 해서 마냥 잔디밭을 거닐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마을 회관 같은 곳이 있어 여러 사람이 함께 쉬며 사용하듯이, 낙원에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장소가 있어 그 안에서 모이고 안락하게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2019-06-21
제25과사람의 근본
요한복음 1:1
읽을말씀 : 요한복음 1:1 | 외울말씀 : 창세기 2:7 ㅣ 참고 말씀: 로마서 1:20
교육목표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임을 깨달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깊이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성인이라고 불리는 공자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도 근본적인 해답을 찾고자 힘썼습니다.
공자는 인을 정치, 윤리사상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해탈하고자 스스로 고행의 길을 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며 참다운 지식을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근본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여 참된 진리에 이르지 못했으며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진리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우칠 때라야 비로소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사람의 근본
세상에서는 “닭이 먼저다! 달걀이 먼저다!”라고 하며 갑론을박을 하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해답이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장성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다음에 정자와 난자를 주어 잉태하게 하신 것을 보면 무엇이 먼저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사람의 근본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되어진 일이지요. 다시 말해, 아담은 어린 아이의 상태가 아니라 성인으로 지음을 받은 후 생령이 되었고 하나님을 통해 영의 지식들을 하나하나 배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진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사람은 진화된 것이 아니지요. 우리 사람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한낱 하등한 생물에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지어졌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생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육간의 모든 것이 근본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위로부터 난 신령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동물들보다 좀 더 진화된 고등동물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화의 증거로 내세우는 화석을 살펴보아도 종과 종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형태의 화석이 없으니 과학적으로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창조의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한 예로,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는 눈, 코, 입 등의 구조와 위치가 같습니다. 각종 동물도 무리의 법칙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사람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한 분에 의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 외에도 태양계 안의 모든 것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되는 사실 자체가 창조의 증거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이 진화되어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왜 이 땅에서 살아가는지 깨닫지 못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거룩한 존재임을 깨달으면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신지 바로 알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그분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내 아버지는 분명히 나를 낳아 주신 분인데….’ 하며 혈연으로 이어진 아버지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조상을 찾아 올라가면 첫 사람 아담이 나오지요. 그러니 우리의 참 아버지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임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씨인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도구로 빌려 드린 것뿐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씨와 잉태
이처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정자, 여자에게는 난자를 주고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근본 생명의 씨를 주신 것입니다. 생명의 씨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의 모든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부모의 성격이나 외모, 습관 등 모든 기(氣)가 한 군데로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태어나면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부모를 닮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능력이 있어서 자녀를 낳을 수 있다면 왜 많은 사람이 잉태하지 못해서 고통을 받겠습니까? 잉태는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영역으로서 하나님만이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병원에서 인공수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정자와 난자를 창조해서 잉태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교회뿐 아니라, 해외의 수많은 성도가 이러한 사실을 체험했지요. 결혼하여 수년이나 십여 년 이상, 또는 20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여 병원에서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아도 소용이 없던 부부들이 기도를 받은 후, 잉태하여 건강한 자녀를 낳은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일례로, 수년 전에 일본에 사는 한 부부가 부흥성회에 오셔서 제게 기도를 받은 후 질병을 치료받음은 물론 잉태의 축복까지 받았지요. 그러한 사실이 주변에 전해지면서 일본에 계시는 많은 분이 기도받기 위해 찾아오셨고, 그분들의 믿음대로 잉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도들의 요청에 의해 그곳에 지교회가 세워지기까지 했습니다.
3. 불가능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
오늘날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지만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오직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잉태뿐만이 아닙니다. 호흡이 끊어진 사람이나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며, 인간의 과학과 의학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불치병, 난치병이 깨끗이 치료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며, 불가능이 없는 권능의 역사를 펼쳐내지요.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한 대로 만물을 보아도 그 속에서 우리는 만물의 근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자 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또 믿는다면서도 성경 말씀을 백 퍼센트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48절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권능의 역사를 나타내심으로써 선포되는 말씀이 참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믿고 전적으로 의뢰할 때에 어떠한 문제나 질병도 해결됩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가 발하여질 때 눈먼 사람이 보며, 지팡이와 목발과 휠체어를 버리고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가 발하여질 때 믿고 순종함으로 모든 간구와 소원에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 )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육 간의 모든 것이 근본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 ), 여자에게는 ( )를 주고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하셨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근본 ( )를 주셨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33~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범죄하므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목표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임을 깨달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등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깊이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성인이라고 불리는 공자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도 근본적인 해답을 찾고자 힘썼습니다.
공자는 인을 정치, 윤리사상의 이상으로 하는 도덕주의를 설파하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해탈하고자 스스로 고행의 길을 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며 참다운 지식을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근본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여 참된 진리에 이르지 못했으며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진리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우칠 때라야 비로소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사람의 근본
세상에서는 “닭이 먼저다! 달걀이 먼저다!”라고 하며 갑론을박을 하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 해답이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장성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다음에 정자와 난자를 주어 잉태하게 하신 것을 보면 무엇이 먼저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사람의 근본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긴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되어진 일이지요. 다시 말해, 아담은 어린 아이의 상태가 아니라 성인으로 지음을 받은 후 생령이 되었고 하나님을 통해 영의 지식들을 하나하나 배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진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사람은 진화된 것이 아니지요. 우리 사람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한낱 하등한 생물에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지어졌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생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육간의 모든 것이 근본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위로부터 난 신령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동물들보다 좀 더 진화된 고등동물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화의 증거로 내세우는 화석을 살펴보아도 종과 종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형태의 화석이 없으니 과학적으로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창조의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한 예로, 인종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는 눈, 코, 입 등의 구조와 위치가 같습니다. 각종 동물도 무리의 법칙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사람과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한 분에 의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 외에도 태양계 안의 모든 것이 한 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운행되는 사실 자체가 창조의 증거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람이 진화되어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왜 이 땅에서 살아가는지 깨닫지 못하지요.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거룩한 존재임을 깨달으면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신지 바로 알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그분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내 아버지는 분명히 나를 낳아 주신 분인데….’ 하며 혈연으로 이어진 아버지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조상을 찾아 올라가면 첫 사람 아담이 나오지요. 그러니 우리의 참 아버지는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임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씨인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잉태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도구로 빌려 드린 것뿐입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씨와 잉태
이처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정자, 여자에게는 난자를 주고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근본 생명의 씨를 주신 것입니다. 생명의 씨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의 모든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지만, 부모의 성격이나 외모, 습관 등 모든 기(氣)가 한 군데로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태어나면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부모를 닮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능력이 있어서 자녀를 낳을 수 있다면 왜 많은 사람이 잉태하지 못해서 고통을 받겠습니까? 잉태는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 영역으로서 하나님만이 주관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병원에서 인공수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지만, 정자와 난자를 창조해서 잉태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조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교회뿐 아니라, 해외의 수많은 성도가 이러한 사실을 체험했지요. 결혼하여 수년이나 십여 년 이상, 또는 20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여 병원에서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아도 소용이 없던 부부들이 기도를 받은 후, 잉태하여 건강한 자녀를 낳은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일례로, 수년 전에 일본에 사는 한 부부가 부흥성회에 오셔서 제게 기도를 받은 후 질병을 치료받음은 물론 잉태의 축복까지 받았지요. 그러한 사실이 주변에 전해지면서 일본에 계시는 많은 분이 기도받기 위해 찾아오셨고, 그분들의 믿음대로 잉태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도들의 요청에 의해 그곳에 지교회가 세워지기까지 했습니다.
3. 불가능이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
오늘날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지만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오직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잉태뿐만이 아닙니다. 호흡이 끊어진 사람이나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며, 인간의 과학과 의학으로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불치병, 난치병이 깨끗이 치료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며, 불가능이 없는 권능의 역사를 펼쳐내지요.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말씀한 대로 만물을 보아도 그 속에서 우리는 만물의 근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자 한다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또 믿는다면서도 성경 말씀을 백 퍼센트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48절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수많은 권능의 역사를 나타내심으로써 선포되는 말씀이 참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믿고 전적으로 의뢰할 때에 어떠한 문제나 질병도 해결됩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가 발하여질 때 눈먼 사람이 보며, 지팡이와 목발과 휠체어를 버리고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가 발하여질 때 믿고 순종함으로 모든 간구와 소원에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고 ( )를 불어넣었기 때문에 영육 간의 모든 것이 근본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2.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 ), 여자에게는 ( )를 주고 자녀를 낳을 수 있게 하셨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근본 ( )를 주셨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33~50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범죄하므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2019-06-14
제24과하나님의 근본
요한복음 1:1
읽을말씀 : 요한복음 1:1 | 외울말씀 : 창세기 1:1 ㅣ 참고 말씀: 요한일서 1:5
교육목표 :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근본을 바로 알아 아비의 믿음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천지 만물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광활한 우주 공간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참 신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헛된 것을 좇아 방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참된 삶의 목적과 가치를 모르니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마치 뿌리 없는 나무같이 사람의 근본에 대해 모른 채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살아가지요.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을 알고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깨우친다면 누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사람의 본분을 좇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근본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의 하나님 곧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태초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영원 전을 의미하며, 우주 모든 공간 속에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 계실 때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주 모든 공간이란 우리가 아는 거대한 우주 공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 공간 외에 이보다 크고 넓은 공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에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유한하며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은 영원 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해도 되는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계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질적인 형상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우상을 만드는 등 늘 형상화된 신을 찾지요. 하지만 어찌 사람이 만든 우상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 신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며 인류 역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러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과연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존재하셨을까요?
어떤 이름이나 형상도 필요 없는 아름다운 빛과 소리로 존재하셨습니다. 바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시면서 모든 우주 공간을 다스리셨지요.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빛으로 모든 우주 공간을 두르고 그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으셨습니다. 그 소리가 바로 ‘말씀’입니다.
2. 인간 경작을 계획하신 근본 하나님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근본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자 한 가지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경작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고 번성하게 하셔서 그들 중에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로 나온 영혼들을 아름다운 천국으로 들여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사시려는 계획’입니다.
이처럼 인간 경작의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준비 작업을 하나하나 이루십니다. 첫 번째가 공간을 나누는 것이었지요. 본디 모든 공간이 하나였는데 인간 경작을 위해 필요에 따라 여럿으로 나누신 것입니다. 그런데 공간을 분리한 뒤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태초에 근본의 빛과 소리로 존재하시던 근본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낳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 또는 독생자라 표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5절에도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말씀했지요.
이처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근본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나오셨고 마음도, 능력도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에는 예수님에 대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셨지요.
3.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
태초에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셨던 근본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과연 어떠한 형상을 입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떤 형상을 입고 계신지도 능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씀이 단지 겉모습만 그대로 본떴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사람의 근본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진리가 충만한 영적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람은 창조될 때의 형상을 잃고 점점 죄와 악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것을 믿는다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4. 참 자녀를 얻고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형상을 입으신 후, 분리하신 공간 안에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빛과 소리로 계실 때에는 처소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형상을 입은 뒤에는 처소를 비롯하여 수종드는 천군과 천사 등 많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영의 공간 안에 우선 영의 존재들을 창조하시고, 루시퍼 배반 이후에 비로소 우리가 사는 우주 공간 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이 영의 공간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세월을 함께 지낸 뒤 마침내 육의 공간에도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드신 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있는데도 굳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참 자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참 자녀’란 하나님을 닮은 자녀로서 하나님과 참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천군과 천사는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로봇과 같이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고 섬기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사람은 자유 의지 가운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지요. 아무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해도 자녀보다 로봇을 더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진정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녀가 더 사랑스럽고 좋지요.
사람은 자유 의지 가운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면서 온갖 삶을 체험하며 오직 참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누가 시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 의지 가운데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그러면서도 변함이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마음에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인간 경작을 계획하시고, 이를 위해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본을 밝히 깨달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 자녀로 신속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란 과연 언제일까요?
2.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해도 될 텐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신 것일까요?
3. 태초에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셨던 근본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위해 어떠한 형상을 입으셨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5~2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근본의 소리’
창조주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소리이다.
시편 68편 33절에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말씀했는데, 주께서 발하시는 이 웅장한 소리가 근본의 소리이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 자체로서 이 소리가 발하여질 때 천하 모든 우주 만물이 순종하며 발해진 소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시자 그 말씀대로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는데 이때 발하셨던 하나님의 소리가 창조의 근본의 소리이다.
교육목표 :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근본을 바로 알아 아비의 믿음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자녀가 되게 한다.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천지 만물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광활한 우주 공간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참 신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헛된 것을 좇아 방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참된 삶의 목적과 가치를 모르니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마치 뿌리 없는 나무같이 사람의 근본에 대해 모른 채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살아가지요.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을 알고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깨우친다면 누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사람의 본분을 좇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의 근본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의 하나님 곧 하나님의 근본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태초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영원 전을 의미하며, 우주 모든 공간 속에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 계실 때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주 모든 공간이란 우리가 아는 거대한 우주 공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 공간 외에 이보다 크고 넓은 공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공간에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유한하며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은 영원 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해도 되는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계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질적인 형상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우상을 만드는 등 늘 형상화된 신을 찾지요. 하지만 어찌 사람이 만든 우상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는 신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며 인류 역사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러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과연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존재하셨을까요?
어떤 이름이나 형상도 필요 없는 아름다운 빛과 소리로 존재하셨습니다. 바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시면서 모든 우주 공간을 다스리셨지요. 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빛으로 모든 우주 공간을 두르고 그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으셨습니다. 그 소리가 바로 ‘말씀’입니다.
2. 인간 경작을 계획하신 근본 하나님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근본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자 한 가지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경작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고 번성하게 하셔서 그들 중에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로 나온 영혼들을 아름다운 천국으로 들여 영원토록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사시려는 계획’입니다.
이처럼 인간 경작의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준비 작업을 하나하나 이루십니다. 첫 번째가 공간을 나누는 것이었지요. 본디 모든 공간이 하나였는데 인간 경작을 위해 필요에 따라 여럿으로 나누신 것입니다. 그런데 공간을 분리한 뒤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태초에 근본의 빛과 소리로 존재하시던 근본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낳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 또는 독생자라 표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5절에도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말씀했지요.
이처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근본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나오셨고 마음도, 능력도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에는 예수님에 대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셨지요.
3.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
태초에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셨던 근본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과연 어떠한 형상을 입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며,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어떤 형상을 입고 계신지도 능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씀이 단지 겉모습만 그대로 본떴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사람의 근본 마음까지도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진리가 충만한 영적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람은 창조될 때의 형상을 잃고 점점 죄와 악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것을 믿는다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4. 참 자녀를 얻고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형상을 입으신 후, 분리하신 공간 안에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창조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빛과 소리로 계실 때에는 처소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형상을 입은 뒤에는 처소를 비롯하여 수종드는 천군과 천사 등 많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영의 공간 안에 우선 영의 존재들을 창조하시고, 루시퍼 배반 이후에 비로소 우리가 사는 우주 공간 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이 영의 공간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세월을 함께 지낸 뒤 마침내 육의 공간에도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만드신 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천군과 천사가 있는데도 굳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참 자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참 자녀’란 하나님을 닮은 자녀로서 하나님과 참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천군과 천사는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로봇과 같이 하나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고 섬기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사람은 자유 의지 가운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지요. 아무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해도 자녀보다 로봇을 더 좋아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진정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녀가 더 사랑스럽고 좋지요.
사람은 자유 의지 가운데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라면서 온갖 삶을 체험하며 오직 참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누가 시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 의지 가운데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그러면서도 변함이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마음에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인간 경작을 계획하시고, 이를 위해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본을 밝히 깨달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참 자녀로 신속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란 과연 언제일까요?
2.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해도 될 텐데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신 것일까요?
3. 태초에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고 계셨던 근본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위해 어떠한 형상을 입으셨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5~2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근본의 소리’
창조주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소리이다.
시편 68편 33절에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말씀했는데, 주께서 발하시는 이 웅장한 소리가 근본의 소리이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 자체로서 이 소리가 발하여질 때 천하 모든 우주 만물이 순종하며 발해진 소리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시자 그 말씀대로 천지 만물이 창조되었는데 이때 발하셨던 하나님의 소리가 창조의 근본의 소리이다.
2019-06-07
제23과성령이 도우시는 신앙
요한복음 14:16
읽을말씀 : 요한복음 14:16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6:7 ㅣ 참고 말씀: 사도행전 2:1~4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면 보혜사 성령을 믿고 의지함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1. 보혜사 성령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열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고별설교를 하십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십니다.
이어지는 14장에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부인,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고를 접하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3절)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자신들과 늘 함께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동고동락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지요.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16~18절).
‘보혜사’란 한자어로서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자를 써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돕는 성령을 지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어떻게 도우시는지 그 역할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가르쳐 주셨습니다(26절). 그 당시에는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할 때 보혜사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후 성도들은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초대교회에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일꾼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활발하게 전했습니다(행 2장).
2.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1)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값없이 죄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를 깨달아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 안에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보내 주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혜사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분명히 살아 계심을 방언 등 각종 은사를 통해 여러 증거로 나타내 보여 주시지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도들은 권세 있는 말씀으로 단번에 수천 명도 회개시키고, 주 예수의 이름 앞에 굴복시켰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등 성령이 실체로 존재하신다는 증거를 나타내 보였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도,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이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 안에 정말 성령이 계시나? 내가 이런 죄를 범했는데 성령이 소멸된 것은 아닌가?’라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강퍅하여 말씀을 의심하고 판단 정죄하는 길가밭의 마음이 아니라면 대부분 성령을 받습니다. 설령 죄를 지었어도 대부분의 죄는 회개하고 다시 말씀 안에 살고자 노력하면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성령이 쉽게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심을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을 신뢰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나를 도와주시는 분임을 믿고 늘 의지해야 하지요. 세상을 좇는 옛사람의 모습은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할 수 없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럴 때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면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고, 알 수 없는 것은 알게 해 주십니다.
2)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선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성경 말씀을 통해 또는 성령의 음성으로 선에 대해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데 깨우쳐 줘도 ‘나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다.’ 하며 마음 문을 닫아 버리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한 마음을 이룰 수도 없고, 믿음도 성장하지 않으니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지요.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 선, 성령의 열매 등 영의 마음을 이뤄야 할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이때 성령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최고의 선과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루는 길을 깨우쳐 주며,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길로 인도해 주시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십니까? 아니면 ‘저렇게 높은 차원의 선과 믿음의 행함은 아직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 하며 단정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항상 믿음의 눈으로 선하게 바라보십니다.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고 믿음의 선진들처럼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바라봐 주시지요. 그리고 각자 믿음의 단계에서 무엇을 깨우쳐야 하고 행해야 하는지 성령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섬세하게 성령을 통해 인도해 주시지요.
그런데 성령께서 아무리 깨우쳐 주셔도 무시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늘 깨우쳐 주심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알려 주시지요. 로마서 5장 5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셨지요. 이런 성령의 역사를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드리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거나 체험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하며 하나님 말씀을 외면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원수인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서 선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함이지요. 이렇게 계속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을 무시하면 성령이 주관하시는 선한 생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도 느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도 받을 수가 없지요.
다른 예로, 성령께서는 하나님 말씀으로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나는 예전에 이러이러한 죄를 범했으니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새 예루살렘만 바라보고 달려가면 된다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셔도 부정적인 생각을 깨뜨리지를 않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통해 선의 말씀을 들려 주실 때 오직 ‘아멘’ 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하나님의 선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면 참으로 쉽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늘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의지를 내보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다 하니까”라고 성령께만 모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보혜사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을 깨닫고 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나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진정 믿는 사람은 성령의 주관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를 사모합니다. 깨우쳐 주시는 대로 순종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복종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주관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나를 도우시는 성령을 믿는 사람은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니 할 수 있다.’ 믿고 성령을 의지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행함이 쌓이는 만큼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를 받는 것이 점점 쉬워집니다. 그러니 늘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이처럼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어떻게 행했을까?’ 하며 부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힘입어 주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의지함으로 늘 “신앙생활이 너무나 쉽고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내 안에 계신 ( )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②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 )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③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보혜사란 성도를 보호하고 돕는 ( )을 지칭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5~2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선의 단계’
◈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 선의 2단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 선의 3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있는 단계이다.
◈ 선의 4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교육목표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면 보혜사 성령을 믿고 의지함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1. 보혜사 성령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열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고별설교를 하십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하십니다.
이어지는 14장에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부인,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고를 접하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3절)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자신들과 늘 함께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동고동락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지요.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16~18절).
‘보혜사’란 한자어로서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자를 써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돕는 성령을 지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어떻게 도우시는지 그 역할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가르쳐 주셨습니다(26절). 그 당시에는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약 120명쯤 되는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할 때 보혜사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후 성도들은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고 초대교회에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일꾼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활발하게 전했습니다(행 2장).
2.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1)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값없이 죄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를 깨달아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 안에 보혜사 성령을 선물로 보내 주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보혜사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분명히 살아 계심을 방언 등 각종 은사를 통해 여러 증거로 나타내 보여 주시지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도들은 권세 있는 말씀으로 단번에 수천 명도 회개시키고, 주 예수의 이름 앞에 굴복시켰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등 성령이 실체로 존재하신다는 증거를 나타내 보였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도,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이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 안에 정말 성령이 계시나? 내가 이런 죄를 범했는데 성령이 소멸된 것은 아닌가?’라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강퍅하여 말씀을 의심하고 판단 정죄하는 길가밭의 마음이 아니라면 대부분 성령을 받습니다. 설령 죄를 지었어도 대부분의 죄는 회개하고 다시 말씀 안에 살고자 노력하면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성령이 쉽게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심을 믿을 뿐 아니라 성령을 신뢰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나를 도와주시는 분임을 믿고 늘 의지해야 하지요. 세상을 좇는 옛사람의 모습은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할 수 없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럴 때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의지하면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할 수 있고, 알 수 없는 것은 알게 해 주십니다.
2)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선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성경 말씀을 통해 또는 성령의 음성으로 선에 대해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데 깨우쳐 줘도 ‘나에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다.’ 하며 마음 문을 닫아 버리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한 마음을 이룰 수도 없고, 믿음도 성장하지 않으니 제자리걸음만 하게 되지요.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 선, 성령의 열매 등 영의 마음을 이뤄야 할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이때 성령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최고의 선과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루는 길을 깨우쳐 주며,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길로 인도해 주시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십니까? 아니면 ‘저렇게 높은 차원의 선과 믿음의 행함은 아직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 하며 단정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항상 믿음의 눈으로 선하게 바라보십니다. 최고의 선을 이룰 수 있고 믿음의 선진들처럼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바라봐 주시지요. 그리고 각자 믿음의 단계에서 무엇을 깨우쳐야 하고 행해야 하는지 성령을 통해 알려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섬세하게 성령을 통해 인도해 주시지요.
그런데 성령께서 아무리 깨우쳐 주셔도 무시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늘 깨우쳐 주심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알려 주시지요. 로마서 5장 5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셨지요. 이런 성령의 역사를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드리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거나 체험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하며 하나님 말씀을 외면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원수인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서 선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함이지요. 이렇게 계속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을 무시하면 성령이 주관하시는 선한 생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도 느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도 받을 수가 없지요.
다른 예로, 성령께서는 하나님 말씀으로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나는 예전에 이러이러한 죄를 범했으니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새 예루살렘만 바라보고 달려가면 된다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셔도 부정적인 생각을 깨뜨리지를 않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통해 선의 말씀을 들려 주실 때 오직 ‘아멘’ 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하나님의 선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면 참으로 쉽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늘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의지를 내보여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이 다 하니까”라고 성령께만 모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보혜사 성령이 깨우쳐 주시는 것을 깨닫고 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나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진정 믿는 사람은 성령의 주관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를 사모합니다. 깨우쳐 주시는 대로 순종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복종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주관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나를 도우시는 성령을 믿는 사람은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니 할 수 있다.’ 믿고 성령을 의지합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행함이 쌓이는 만큼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를 받는 것이 점점 쉬워집니다. 그러니 늘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이처럼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어떻게 행했을까?’ 하며 부러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힘입어 주 안에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의지함으로 늘 “신앙생활이 너무나 쉽고 행복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이 도우시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내 안에 계신 ( )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②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 )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③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 (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보혜사란 성도를 보호하고 돕는 ( )을 지칭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5~28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선의 단계’
◈ 선의 1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감정이 있지만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다.
◈ 선의 2단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을뿐더러 마음에 어떤 불편한 감정도 없다.
◈ 선의 3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선으로 감동을 줄 수있는 단계이다.
◈ 선의 4단계: 악으로 나오는 상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이다.
2019-05-31
제22과하나님의 섭리는 변함이 없나니
신명기 26:16~19
읽을말씀 : 신명기 26:16~19 | 외울말씀 : 신명기 26:16 ㅣ 참고 말씀: 요한복음 4:48
교육목표 :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기름 준비를 잘함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한다.
베드로후서 3장 3~4절에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하신 말씀대로 오늘날은 마지막 때를 알려 줘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태양은 뜨고 지며,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으며, 문명은 날로 발달하여 계속 이어질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는 때가 있으면 반드시 죽는 때가 오듯이 인류 역사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이 세상 모든 것도 종말을 맞습니다.
1.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과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개척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죽음이나 대통령 선거 결과 등 국내외 정세에 관한 것도 많이 알려 주셨지요. 이런 내용들을 주보에 약자로 내기도 했고 널리 알릴 수 없는 경우에는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라도 전달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는 북한이나 미국, 중국과 러시아 등과 관련하여 앞으로의 세계 정세의 흐름에 대해 주신 내용들을 설교하였지요. 예언한 내용들은 대부분 그대로 이뤄졌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앞으로 나타날 일들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 중에서 마지막 때에 관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남북 관계에 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척 당시부터 북한에 대한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북한 선교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83년도에는 마지막 때 남북 간 정상급 회담이 열리게 될 것과 그 후의 전개 과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북한이 외부 세계에 대해 문을 열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문을 닫을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잠시 북한의 문이 열릴 때 그곳에 들어가 선교할 것을 알려 주시며 그 후 남북 간에 어떤 표현이 나오면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2000년에는 남북 정상 회담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정세를 살펴볼 때 북한이 국제적인 압박에 못 이겨 개방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지요.
2) 세계 선교의 사명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수만, 수십만, 수백만 명이 모이는 해외 성회를 예비하시고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CNN을 통해 보도된 우간다 연합대성회를 시작으로 중동 선교의 문을 연 파키스탄 연합대성회, 에이즈 등 수많은 질병들이 치료된 케냐 연합대성회를 통해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필리핀 연합대성회와 중남미에 성령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온두라스 연합대성회, 세계 최대 힌두교 국가에서 연인원 3백만 명 이상이 참석한 인도 연합대성회를 통해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두바이 선교를 통해서는 본격적인 중동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지요. 그 후에도 러시아, 독일, 페루, 콩고민주공화국, 미국 뉴욕, 이스라엘, 에스토니아 해외 성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이 치료받고 권능의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마지막 때에 우리가 들어가 선교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2007년 7월 선교를 시작하여 2009년 9월까지 3년 동안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큰 결실은 기독교 단체인 크리스털 포럼이 결성되어 복음을 전파하며 부부 세미나, 청소년 캠프, 찬양 페스티벌 등 활발한 사역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의 근원지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복음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장벽을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마지막 때에 성령의 권능으로 기사와 표적, 권능을 펼치시며 복음이 전파되도록 섭리하였습니다. 마지막 때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인간 경작의 섭리가 완성될 것입니다.
3) 대성전 건축과 관련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섭리를 알려 주시면서, 주님이 오시기 전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대성전 건축 사명을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행위적으로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어도 행위적으로만 범죄하지 않으면 되었지요. 구약 시대 성전 역시 백성이 율법 가운데서 행위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고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은 행위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성전입니다.
죄를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건축한 참된 의미의 성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성전이 훼파되도록 허락하셨고 새롭고 참된 의미의 영적 성전을 다시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할례하여 거룩하고 정결한 심령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한 참 자녀들이라야 대성전을 건축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녀들의 손으로 이뤄진 대성전을 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지나온 인간 경작 과정을 회상하시며, 모든 눈물과 희생과 인내의 열매로 얻으신 참 자녀들을 떠올리며 위로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전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들을 얻은 위로의 상징이라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대성전을 이루게 하시는 이유는 마지막 때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기념비적 건축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성전은 지름이 600미터에 높이가 70미터의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온갖 아름답고 진귀한 재료로 이루어지며 구조와 장식, 문양 하나하나에 천국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담기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권능을 나타내도록 건축됩니다. 대성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느끼며 믿지 않는 사람조차 그 영광이 어떠한지 인정하며 감동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성전 건축은 마지막 때 무수한 영혼이 구원받을 방주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와 같이 죄악이 두루 퍼진 마지막 때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 영광과 권능의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 나오게 하시지요. 그러면 그들에게 많은 하나님의 증거들을 보여 주고 영계의 비밀에 대해 가르치며, 또한 하나님 뜻은 거룩한 참 자녀를 얻는 데 있음을 알려 줄 것입니다.
이처럼 대성전은 복음 전파의 마무리 작업을 위한 중추기지가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대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의 권능을 사모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도울 수 있도록 주관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 교회가 마지막 때 섭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부흥과 권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험한 산을 넘듯, 거친 풍파를 지나듯 수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고 견고한 믿음으로 연단을 통과한 성도들을 모아 세계를 이룰 그릇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믿음이 일시에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깨어서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해야 하지요. 무엇보다도 모든 죄악의 담을 헐고 변질되지 않는 뜨거운 신앙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러한 각오를 굳게 다지고 변함없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함께 마음의 소원에도 응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귀한 도구로 쓰임 받도록 영적 능력과 권세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모델로 어느 민족을 선택하셨을까요?
2.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를 얻은 위로의 상징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 주보 설교 요약과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대성전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
우리가 이 땅에서 짓게 될 대성전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다. 따라서 대성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가 완성되었다는 증표가 된다.
대성전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를 얻은 위로의 상징이 된다. 또한 4차원 영의 공간에 계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이 육의 공간에 드러내는 기념물이 된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대성전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면류관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듯이 인간 경작을 하나님의 승리로 이끈 열매이기 때문이다.
교육목표 :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기름 준비를 잘함으로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한다.
베드로후서 3장 3~4절에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하신 말씀대로 오늘날은 마지막 때를 알려 줘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태양은 뜨고 지며,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으며, 문명은 날로 발달하여 계속 이어질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는 때가 있으면 반드시 죽는 때가 오듯이 인류 역사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면 이 세상 모든 것도 종말을 맞습니다.
1.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과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개척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국내외 유명인사들의 죽음이나 대통령 선거 결과 등 국내외 정세에 관한 것도 많이 알려 주셨지요. 이런 내용들을 주보에 약자로 내기도 했고 널리 알릴 수 없는 경우에는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라도 전달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는 북한이나 미국, 중국과 러시아 등과 관련하여 앞으로의 세계 정세의 흐름에 대해 주신 내용들을 설교하였지요. 예언한 내용들은 대부분 그대로 이뤄졌고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거나 앞으로 나타날 일들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 중에서 마지막 때에 관한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남북 관계에 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척 당시부터 북한에 대한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북한 선교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83년도에는 마지막 때 남북 간 정상급 회담이 열리게 될 것과 그 후의 전개 과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북한이 외부 세계에 대해 문을 열지만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문을 닫을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잠시 북한의 문이 열릴 때 그곳에 들어가 선교할 것을 알려 주시며 그 후 남북 간에 어떤 표현이 나오면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이른 줄 알라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2000년에는 남북 정상 회담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정세를 살펴볼 때 북한이 국제적인 압박에 못 이겨 개방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지요.
2) 세계 선교의 사명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수만, 수십만, 수백만 명이 모이는 해외 성회를 예비하시고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CNN을 통해 보도된 우간다 연합대성회를 시작으로 중동 선교의 문을 연 파키스탄 연합대성회, 에이즈 등 수많은 질병들이 치료된 케냐 연합대성회를 통해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필리핀 연합대성회와 중남미에 성령의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온두라스 연합대성회, 세계 최대 힌두교 국가에서 연인원 3백만 명 이상이 참석한 인도 연합대성회를 통해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두바이 선교를 통해서는 본격적인 중동 선교의 발판이 마련되었지요. 그 후에도 러시아, 독일, 페루, 콩고민주공화국, 미국 뉴욕, 이스라엘, 에스토니아 해외 성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이 치료받고 권능의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마지막 때에 우리가 들어가 선교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2007년 7월 선교를 시작하여 2009년 9월까지 3년 동안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큰 결실은 기독교 단체인 크리스털 포럼이 결성되어 복음을 전파하며 부부 세미나, 청소년 캠프, 찬양 페스티벌 등 활발한 사역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의 근원지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복음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장벽을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마지막 때에 성령의 권능으로 기사와 표적, 권능을 펼치시며 복음이 전파되도록 섭리하였습니다. 마지막 때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그들의 마음 문이 열리고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인간 경작의 섭리가 완성될 것입니다.
3) 대성전 건축과 관련된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섭리를 알려 주시면서, 주님이 오시기 전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대성전 건축 사명을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행위적으로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악이 있어도 행위적으로만 범죄하지 않으면 되었지요. 구약 시대 성전 역시 백성이 율법 가운데서 행위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고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은 행위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성전입니다.
죄를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건축한 참된 의미의 성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성전이 훼파되도록 허락하셨고 새롭고 참된 의미의 영적 성전을 다시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할례하여 거룩하고 정결한 심령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충만한 참 자녀들이라야 대성전을 건축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녀들의 손으로 이뤄진 대성전을 보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지나온 인간 경작 과정을 회상하시며, 모든 눈물과 희생과 인내의 열매로 얻으신 참 자녀들을 떠올리며 위로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전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들을 얻은 위로의 상징이라는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대성전을 이루게 하시는 이유는 마지막 때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기념비적 건축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성전은 지름이 600미터에 높이가 70미터의 거대한 건축물입니다. 온갖 아름답고 진귀한 재료로 이루어지며 구조와 장식, 문양 하나하나에 천국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담기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권능을 나타내도록 건축됩니다. 대성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느끼며 믿지 않는 사람조차 그 영광이 어떠한지 인정하며 감동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성전 건축은 마지막 때 무수한 영혼이 구원받을 방주를 예비하는 것입니다. 노아 당시와 같이 죄악이 두루 퍼진 마지막 때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 영광과 권능의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 나오게 하시지요. 그러면 그들에게 많은 하나님의 증거들을 보여 주고 영계의 비밀에 대해 가르치며, 또한 하나님 뜻은 거룩한 참 자녀를 얻는 데 있음을 알려 줄 것입니다.
이처럼 대성전은 복음 전파의 마무리 작업을 위한 중추기지가 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대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의 권능을 사모하는 전 세계 사람들이 도울 수 있도록 주관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 교회가 마지막 때 섭리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 부흥과 권능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험한 산을 넘듯, 거친 풍파를 지나듯 수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시고 견고한 믿음으로 연단을 통과한 성도들을 모아 세계를 이룰 그릇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믿음이 일시에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깨어서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해야 하지요. 무엇보다도 모든 죄악의 담을 헐고 변질되지 않는 뜨거운 신앙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러한 각오를 굳게 다지고 변함없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함께 마음의 소원에도 응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귀한 도구로 쓰임 받도록 영적 능력과 권세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모델로 어느 민족을 선택하셨을까요?
2.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를 얻은 위로의 상징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 주보 설교 요약과 구역공과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대성전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
우리가 이 땅에서 짓게 될 대성전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다. 따라서 대성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가 완성되었다는 증표가 된다.
대성전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 경작의 기념물이며 좋은 열매를 얻은 위로의 상징이 된다. 또한 4차원 영의 공간에 계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이 육의 공간에 드러내는 기념물이 된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대성전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면류관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듯이 인간 경작을 하나님의 승리로 이끈 열매이기 때문이다.
2019-05-24
제21과기뻐 춤추며 노래하며
마가복음 7:31~37
읽을말씀 : 마가복음 7:31~37 | 외울말씀 : 에베소서 4:13 ㅣ 참고 말씀: 히브리서 13:8
교육목표 : 자신을 돌아보아 빛 가운데 행함으로 건강은 물론 범사에 형통함을 받아 기뻐 춤추며 노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온전케 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지나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막 7장).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어눌하다는 것은 말이 유창하지 못하고 떠듬떠듬하는 면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는 어렸을 때 말을 조금 배우다가 청력을 잃어 말이 어눌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쳐 주기를 청하자,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했습니다(막 7:33~35).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시자, 그대로 귀가 열려 듣고 혀가 풀려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명하기 전에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청력을 잃은 사람은 말씀을 듣지 못하니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는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나온 상태였지요. 이런 그를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어 느낌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 본체로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구하면 성경상의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히 13:8).
2. 오늘날도 나타나는 청각장애 치료 사례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난청이 치료되는 것은 물론, 태어날 때부터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듣게 된 것을 지금까지 무수히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55년 만에 또는 57년 만에 들리지 않던 귀가 열려 듣게 된 분들도 계십니다.
2000년 9월, 일본 나고야 신유대성회 때는 13명의 청각장애인들이 참석하여 귀가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국내의 청각장애인들에게도 알려져 2001년 제9회 2주연속 특별부흥성회 시에는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참석하여 치료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002년 7월, 중미 온두라스 연합대성회 때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많은 사람이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안전 총책임자로 성회를 적극 도왔던 분의 어린 딸이 들리지 않던 귀를 치료받고 너무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당시 여덟 살 난 마들린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귀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회 소식을 알게 된 아이가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지요. 아이는 당회장님의 전체를 위한 환자기도를 받은 후 들리지 않던 귀가 들렸다고 합니다. 치료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성회를 위해 마음을 다해 수고하니 하나님께서 이처럼 축복하신 것입니다.
2002년 10월에 개최된 인도 연합대성회 때도 수많은 치료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중에 제니퍼라는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긴 했지만 워낙 청력이 약해 제대로 듣지 못했지요. 제니퍼의 어머니는 날마다 딸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던 중, 인도 연합대성회 소식을 듣고 참석하였습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잘 듣지 못하는 딸을 위해 최대한 스피커 가까이에 앉았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스피커에서 멀리 떨어진 뒤쪽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니퍼가 단에서 환자를 위한 기도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보청기를 빼더니 몸짓으로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제니퍼가 기도받기 이전 병원 자료를 보면 보청기 없이는 양쪽 귀 모두 소리에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100% 청력 소실에 해당하는 경우인데 기도받은 이후의 청력 검사 결과는 30~50% 청력이 되살아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명이나 난청은 물론 태어날 때부터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치료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1)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가질 수 있는데(롬 10:17) 귀머거리 된 사람은 말씀을 듣지 못하니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어 주심으로 그 느낌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당사자가 믿음을 소유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님 당시와 달리 문명이 발달하여 청각장애자도 복음을 접할 수 있는 매체들이 많습니다. 수화나 비디오, 점자책 등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매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비록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었다 빼신 예수님께서는 이어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물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담은 행함으로서 곧 죄 사함을 베푸시기 위함이었지요.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맑은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씻어 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더러움을 씻어 내는 물 대신, 침으로써 죄 사함의 의미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먼저 자신을 진실하게 돌아보아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회개해야 응답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설령 형제가 나를 미워한다 해도 똑같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요.
셋째, 욕심을 가지고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욕심을 가지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므로 응답받을 수 없지요.
넷째, 의심하며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으니 의심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선한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심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려면 우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행함 곧 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심으면 강건한 축복을 받고 물질을 심으면 물질 축복을 받는 것을 깨달아 자신이 심지도 않고 거두려 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했으니 자신을 돌아보아 죄를 회개하고 빛 가운데 행함으로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81~1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농아와 난청
일반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아서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농아라고 한다.
농아가 되는 원인은 유전적인 것과 어머니가 풍진을 앓거나 약을 잘못 복용하여 생기는 선천적인 경우가 있다. 또 3~4세 때 뇌막염 등의 병을 앓아서 후천적으로 농아가 된 경우도 있다.
난청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막이 찢어진 것이 원인이라면 보청기를 착용하여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청신경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보청기도 소용이 없다.
소음이 심한 데서 오래 일하거나 청력이 쇠퇴하여 난청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한다.
이 외에 귀신 들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어떠한 질병이나 장애도 문제되지 않는다.
교육목표 : 자신을 돌아보아 빛 가운데 행함으로 건강은 물론 범사에 형통함을 받아 기뻐 춤추며 노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온전케 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지나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막 7장).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어눌하다는 것은 말이 유창하지 못하고 떠듬떠듬하는 면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는 어렸을 때 말을 조금 배우다가 청력을 잃어 말이 어눌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쳐 주기를 청하자,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했습니다(막 7:33~35).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시자, 그대로 귀가 열려 듣고 혀가 풀려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명하기 전에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청력을 잃은 사람은 말씀을 듣지 못하니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는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나온 상태였지요. 이런 그를 위해 예수님께서 직접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어 느낌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 본체로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구하면 성경상의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납니다(히 13:8).
2. 오늘날도 나타나는 청각장애 치료 사례들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난청이 치료되는 것은 물론, 태어날 때부터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듣게 된 것을 지금까지 무수히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55년 만에 또는 57년 만에 들리지 않던 귀가 열려 듣게 된 분들도 계십니다.
2000년 9월, 일본 나고야 신유대성회 때는 13명의 청각장애인들이 참석하여 귀가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국내의 청각장애인들에게도 알려져 2001년 제9회 2주연속 특별부흥성회 시에는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참석하여 치료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002년 7월, 중미 온두라스 연합대성회 때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던 많은 사람이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안전 총책임자로 성회를 적극 도왔던 분의 어린 딸이 들리지 않던 귀를 치료받고 너무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당시 여덟 살 난 마들린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귀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회 소식을 알게 된 아이가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지요. 아이는 당회장님의 전체를 위한 환자기도를 받은 후 들리지 않던 귀가 들렸다고 합니다. 치료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성회를 위해 마음을 다해 수고하니 하나님께서 이처럼 축복하신 것입니다.
2002년 10월에 개최된 인도 연합대성회 때도 수많은 치료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중에 제니퍼라는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긴 했지만 워낙 청력이 약해 제대로 듣지 못했지요. 제니퍼의 어머니는 날마다 딸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던 중, 인도 연합대성회 소식을 듣고 참석하였습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잘 듣지 못하는 딸을 위해 최대한 스피커 가까이에 앉았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스피커에서 멀리 떨어진 뒤쪽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니퍼가 단에서 환자를 위한 기도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보청기를 빼더니 몸짓으로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제니퍼가 기도받기 이전 병원 자료를 보면 보청기 없이는 양쪽 귀 모두 소리에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100% 청력 소실에 해당하는 경우인데 기도받은 이후의 청력 검사 결과는 30~50% 청력이 되살아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권능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명이나 난청은 물론 태어날 때부터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들이 치료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1)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가질 수 있는데(롬 10:17) 귀머거리 된 사람은 말씀을 듣지 못하니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어 주심으로 그 느낌을 통해서라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당사자가 믿음을 소유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님 당시와 달리 문명이 발달하여 청각장애자도 복음을 접할 수 있는 매체들이 많습니다. 수화나 비디오, 점자책 등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매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비록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었다 빼신 예수님께서는 이어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물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담은 행함으로서 곧 죄 사함을 베푸시기 위함이었지요.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맑은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씻어 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더러움을 씻어 내는 물 대신, 침으로써 죄 사함의 의미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먼저 자신을 진실하게 돌아보아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을 회개해야 응답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9절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둘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설령 형제가 나를 미워한다 해도 똑같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요.
셋째, 욕심을 가지고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욕심을 가지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므로 응답받을 수 없지요.
넷째, 의심하며 기도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으니 의심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계명을 지키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선한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심지 않은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려면 우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행함 곧 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몸으로 심으면 강건한 축복을 받고 물질을 심으면 물질 축복을 받는 것을 깨달아 자신이 심지도 않고 거두려 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했으니 자신을 돌아보아 죄를 회개하고 빛 가운데 행함으로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응답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81~1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농아와 난청
일반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아서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농아라고 한다.
농아가 되는 원인은 유전적인 것과 어머니가 풍진을 앓거나 약을 잘못 복용하여 생기는 선천적인 경우가 있다. 또 3~4세 때 뇌막염 등의 병을 앓아서 후천적으로 농아가 된 경우도 있다.
난청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막이 찢어진 것이 원인이라면 보청기를 착용하여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청신경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보청기도 소용이 없다.
소음이 심한 데서 오래 일하거나 청력이 쇠퇴하여 난청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한다.
이 외에 귀신 들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어떠한 질병이나 장애도 문제되지 않는다.
2019-05-17
제20과일어나 뛰고 걸으며
마가복음 2:3~12
읽을말씀 : 마가복음 2:3~12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4:12 l 참고 말씀: 출애굽기 15:26
교육목표 :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처럼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움으로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와 친구들
가버나움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중풍이 심해 남의 도움이 없이는 일어날 수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라는 분이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며 각색 병든 사람을 치료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도 그분을 만나 치료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이 소식을 듣고 친구들에게 자신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지요. 친구들 도움으로 들것에 실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은 했지만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 인파를 뚫고 예수님 앞까지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다면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며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내린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통 가옥은 집 옆으로 계단이 있어 지붕에 쉽게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지붕은 갈대나 종려나무 가지로 덮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지붕을 벗겨낼 수 있었지요. 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중풍병자는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행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겸비함으로 자신을 낮출 때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수 있습니다. 만일 중풍병자가 집 안에 누워서 “주여, 제가 움직일 수가 없어 예수님께 나가지 못하는 거 아시지요? 그러니 치료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다면 치료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치료받기 위해 요행을 바라거나 안일하게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믿음의 행함을 내보였지요.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 역시 믿음이 있었기에 중풍병자를 위해 남의 집 지붕을 뜯어 가면서까지 도와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워 놓아야
우리가 응답받고 문제 해결받으려면 눈에 보이는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짓고자 할 때 말로만 ‘아멘 믿습니다.’ 고백한다고 집이 지어지지는 않습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파고 기초석을 놓듯이, 응답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의 받침대를 보시고 영적인 믿음을 주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눈에 보여지도록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단순히 예수님 앞에 나간 것만이 아닙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믿고 겸비한 자세와 적극적인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때 “여기 중환자가 있으니 길 좀 비켜 주세요.”라고 얼마나 외쳤겠습니까.
그런데도 되지 않자 ‘안 되겠다. 다음에 기도받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 위한 최후 방법으로 지붕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 광경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가 치료만 받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지요. 치료만 된다면 집은 얼마든지 더 좋게 수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행함이 따르고, 행함은 겸비하게 낮아졌을 때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아팠을 때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아파서 교회에 못 나갑니다.’ 하지는 않았는지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다 인정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마음의 소원에도 응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치료와 응답이 임해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병을 치료받으려면 우선 죄 사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란 이 세상에 있는 질병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의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켜 행하면 어떤 질병도 틈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당부하셨지요. 이처럼 질병은 죄로 인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먼저 죄 사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간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지요. 죄를 짓던 사람이 이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거짓말하던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미워하던 사람이 미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 내 딸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바로 응답해 주실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극과 플러스극이 만날 때 불꽃이 튀고 전깃불이 들어오듯이, 우리 믿음의 받침대 위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을 주실 때라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어나 걷게 된 중풍병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자 서기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기뻐하기는커녕 속으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진 율법의 틀로 예수님을 바라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깨우쳐 준 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나갑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보장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보장하신다는 증거이지요. 그가 치료되었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까지 아낌없이 주셨지요. 장애로 그동안 불행하게 살아왔다 해도 더는 불행하게 살기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시험 환난에 놓여 있기를 원치 않으시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주기 원하시며, 장래에 소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이처럼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준비하여 구하는 대로 응답받고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눈에 보여지도록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 )를 세우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59~17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가버나움’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가버나움은 성경에 ‘본 동네’라고도 불렸다(마 9:1, 막 2:1).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이곳을 근거지로 사역하셨으며 이곳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서 근무하던 백부장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의 하인의 병을 즉시 고쳐 주셨다. 또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과 중풍병자와 많은 병자를 치료하셨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베푸셨지만 가버나움 사람들은 회개치 않으므로 소돔 땅이 이곳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는 심판을 받았다.
교육목표 :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처럼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움으로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라 할지라도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와 친구들
가버나움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중풍이 심해 남의 도움이 없이는 일어날 수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라는 분이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며 각색 병든 사람을 치료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도 그분을 만나 치료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이 소식을 듣고 친구들에게 자신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지요. 친구들 도움으로 들것에 실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은 했지만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 인파를 뚫고 예수님 앞까지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다면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며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내린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전통 가옥은 집 옆으로 계단이 있어 지붕에 쉽게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지붕은 갈대나 종려나무 가지로 덮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지붕을 벗겨낼 수 있었지요. 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중풍병자는 누구보다도 예수님 가까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행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겸비함으로 자신을 낮출 때 믿음의 행함을 내보일 수 있습니다. 만일 중풍병자가 집 안에 누워서 “주여, 제가 움직일 수가 없어 예수님께 나가지 못하는 거 아시지요? 그러니 치료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다면 치료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치료받기 위해 요행을 바라거나 안일하게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여 믿음의 행함을 내보였지요.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 역시 믿음이 있었기에 중풍병자를 위해 남의 집 지붕을 뜯어 가면서까지 도와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워 놓아야
우리가 응답받고 문제 해결받으려면 눈에 보이는 믿음의 받침대를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짓고자 할 때 말로만 ‘아멘 믿습니다.’ 고백한다고 집이 지어지지는 않습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파고 기초석을 놓듯이, 응답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의 받침대를 보시고 영적인 믿음을 주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눈에 보여지도록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믿음의 받침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단순히 예수님 앞에 나간 것만이 아닙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믿고 겸비한 자세와 적극적인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때 “여기 중환자가 있으니 길 좀 비켜 주세요.”라고 얼마나 외쳤겠습니까.
그런데도 되지 않자 ‘안 되겠다. 다음에 기도받자.’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 위한 최후 방법으로 지붕을 뜯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 광경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가 치료만 받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지요. 치료만 된다면 집은 얼마든지 더 좋게 수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행함이 따르고, 행함은 겸비하게 낮아졌을 때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아팠을 때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아파서 교회에 못 나갑니다.’ 하지는 않았는지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믿음 있다 인정해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마음의 소원에도 응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치료와 응답이 임해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병을 치료받으려면 우선 죄 사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이란 이 세상에 있는 질병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의 어떠한 질병도 틈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켜 행하면 어떤 질병도 틈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당부하셨지요. 이처럼 질병은 죄로 인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먼저 죄 사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간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으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지요. 죄를 짓던 사람이 이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거짓말하던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미워하던 사람이 미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 아들아, 내 딸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며 바로 응답해 주실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극과 플러스극이 만날 때 불꽃이 튀고 전깃불이 들어오듯이, 우리 믿음의 받침대 위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을 주실 때라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어나 걷게 된 중풍병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자 서기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기뻐하기는커녕 속으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진 율법의 틀로 예수님을 바라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요.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깨우쳐 준 후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중풍병자는 즉시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 침상을 가지고 걸어나갑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보장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보장하신다는 증거이지요. 그가 치료되었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까지 아낌없이 주셨지요. 장애로 그동안 불행하게 살아왔다 해도 더는 불행하게 살기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 시험 환난에 놓여 있기를 원치 않으시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주기 원하시며, 장래에 소망을 주기 원하십니다. 이처럼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믿음의 받침대를 준비하여 구하는 대로 응답받고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눈에 보여지도록 하나님 앞에 행하는 것이 곧 ( )를 세우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59~17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가버나움’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가버나움은 성경에 ‘본 동네’라고도 불렸다(마 9:1, 막 2:1).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이곳을 근거지로 사역하셨으며 이곳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서 근무하던 백부장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그의 하인의 병을 즉시 고쳐 주셨다. 또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과 중풍병자와 많은 병자를 치료하셨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베푸셨지만 가버나움 사람들은 회개치 않으므로 소돔 땅이 이곳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는 심판을 받았다.
2019-05-10
제19과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요한복음 9:32~33
읽을말씀 : 요한복음 9:32~33 | 외울말씀 : 요한복음 9:31 ㅣ 참고 말씀: 시편 66:18
교육목표 :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여쭙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하시지요. 그런 다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른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십니다. 이에 그가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소경이 예수님께 찾아와 “내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만나 주시고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지요. 진흙을 눈에 바르고 물로 씻으면 보게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네가 나를 놀리냐?”며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이렇게 순종했을 때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던 눈이 밝아져 세상을 또렷이 보게 되었지요.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혹여 하나님 말씀이 내 상식과 경험에 맞지 않는다 해도 소경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은혜가 임하며 소경이 눈을 뜬 것처럼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치료받은 후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거짓이 없고 선한 마음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리를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 있음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강한 틀 때문에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하고 참을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진흙을 눈에 발라 치료해 주셨다고 말해도 믿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힐문합니다. 그러자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하지요. 자신의 눈을 고쳐 줄 수 있는 분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의 부모까지 불러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됐는지 재차 확인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면 유대인들에게 출교(회당에서 쫓아낸다는 뜻. 당시 유대공동체 최고 형벌) 당할까봐 무서워 직접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다시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러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신 대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시 66:18). 더구나 죄인에게 권능을 주셔서 영광 받으실 분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경 되었던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진실을 말하였지요.
요한복음 9장 31~33절에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보통 사람 같으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시시비비하며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은 율법을 어긴 악행이라며 예수님을 책잡으려 했지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고 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소경을 눈 뜨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시 146:8) 했고,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틀과 악함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인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소경 되었던 사람은 율법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선한 양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알았습니다.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깨우친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믿고 인정할 때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은혜를 받은 후 새로운 삶을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치료받고 인생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큰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플 때는 “치료해 주시면 주만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해놓고 막상 치료받아 건강을 회복하면 자기 유익을 좇아 은혜를 저버립니다. 비록 질병의 문제는 해결받았어도 구원의 길에서 떠나 버렸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소경 되었던 사람은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선한 중심을 가졌기에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구원의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요 9:35~36).
이에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하시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며 절을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며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신앙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마음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질병을 치료해 주고 축복을 주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진정 구주로 영접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어둠의 일을 벗고 날마다 빛 가운데 행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면 어찌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약속하신 대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아무리 중한 질병이나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는 중심의 고백과 함께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질병의 치료는 물론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불통을 형통으로 바꿔 주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려면 소경 된 자처럼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 역사를 인정하며 사모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응답받을 수 있는 그릇을 얼마나 잘 준비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8편 25~26절에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하셨으니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행함으로 권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여쭙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구의 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하시지요. 그런 다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른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십니다. 이에 그가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밝아져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소경이 예수님께 찾아와 “내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한 것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만나 주시고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지요. 진흙을 눈에 바르고 물로 씻으면 보게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한다면 “네가 나를 놀리냐?”며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눈을 씻었습니다.
이렇게 순종했을 때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던 눈이 밝아져 세상을 또렷이 보게 되었지요.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혹여 하나님 말씀이 내 상식과 경험에 맞지 않는다 해도 소경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믿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 은혜가 임하며 소경이 눈을 뜬 것처럼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치료받은 후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거짓이 없고 선한 마음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리를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 있음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강한 틀 때문에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하고 참을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진흙을 눈에 발라 치료해 주셨다고 말해도 믿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라고 힐문합니다. 그러자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하지요. 자신의 눈을 고쳐 줄 수 있는 분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의 부모까지 불러 아들이 어떻게 눈을 뜨게 됐는지 재차 확인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면 유대인들에게 출교(회당에서 쫓아낸다는 뜻. 당시 유대공동체 최고 형벌) 당할까봐 무서워 직접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다시 소경 되었던 사람을 불러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신 대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시 66:18). 더구나 죄인에게 권능을 주셔서 영광 받으실 분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진실을 보아도 믿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경 되었던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진실을 말하였지요.
요한복음 9장 31~33절에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보통 사람 같으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시시비비하며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은 율법을 어긴 악행이라며 예수님을 책잡으려 했지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고 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소경을 눈 뜨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시 146:8) 했고,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사 35:5) 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틀과 악함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인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소경 되었던 사람은 율법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선한 양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알았습니다.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깨우친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믿고 인정할 때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은혜를 받은 후 새로운 삶을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치료받고 인생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큰 은혜를 입고도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아플 때는 “치료해 주시면 주만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해놓고 막상 치료받아 건강을 회복하면 자기 유익을 좇아 은혜를 저버립니다. 비록 질병의 문제는 해결받았어도 구원의 길에서 떠나 버렸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소경 되었던 사람은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선한 중심을 가졌기에 예수님을 만나 눈을 떴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구원의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는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요 9:35~36).
이에 예수님께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하시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며 절을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며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신앙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러한 마음으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질병을 치료해 주고 축복을 주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진정 구주로 영접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어둠의 일을 벗고 날마다 빛 가운데 행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면 어찌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약속하신 대로 무엇이나 응답해 주십니다. 아무리 중한 질병이나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는 중심의 고백과 함께 믿음의 행함을 내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질병의 치료는 물론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불통을 형통으로 바꿔 주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려면 소경 된 자처럼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 역사를 인정하며 사모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응답받을 수 있는 그릇을 얼마나 잘 준비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8편 25~26절에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하셨으니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행함으로 권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2019-05-03
제18과빛의 권능
요한일서 1:5
읽을말씀 : 요한일서 1:5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4:12 ㅣ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13장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이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밝히 알아서 권능을 사모하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통해 어떠한 권능의 역사들이 나타났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빛 자체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갔지요. 예수님이 명하시면 온갖 질병이 떠나고 연약한 것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나 신약 시대의 사도들, 스데반이나 빌립 집사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빛 가운데 행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아 성결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1.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권능
오늘날도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권능을 주어 영광의 도구로 사용할 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능을 받아 기사와 표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권능을 행한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시 62:11).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일까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한 사람에게 입혀 주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말씀한 대로 권능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고 쫓아낼 수 있는 권세와 함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신체의 어느 부위가 죽어 퇴화되거나 마비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권능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유의 은사와 동일하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에 나오는 병 고치는 은사 곧 신유의 은사는 주로 균에 의해 생긴 질병들의 균을 태워 치료합니다. 따라서 신체가 퇴화되었거나 신경 세포가 손상되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권능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믿음으로 기도할 때라야 치료할 수 있지요. 또한 권능은 일단 주어지면 항상 나타나는 것이지만 신유의 은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2. 빛이신 하나님의 권능 4단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면 예수님 당시와 같이 권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능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서 얼마나 영으로 일구었느냐에 따라 더 높은 권능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권능은 단계별로 영적인 빛이 다르며, 4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권능의 1단계는 성령의 불로 태우는 붉은빛의 권능입니다.
성령의 불은 온갖 병균이나 바이러스, 세균 등에 의해 생긴 갖가지 질병들을 태워서 치료합니다. 암, 폐병, 당뇨병, 백혈병, 신장병, 관절염, 심장병, 에이즈와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질병들이 권능의 1단계에서 모두 치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암 말기나 폐병 말기 같은 경우,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 선을 넘어 버리면 권능의 1단계에서는 치료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몸의 조직이 망가지고 기능을 상실한 경우는 창조의 역사로 조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므로 더 큰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 해도 환자가 얼마나 믿음을 내보이고 주변의 가족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권능의 1단계라고 해서 성령의 불로 태우는 역사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이 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이상의 역사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히 권능이 임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경우에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능의 2단계는 푸른빛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하신 대로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레이저광선과 같은 권능의 빛들이 쏟아지면서 단계별로 치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능의 2단계에서 나오는 푸른빛을 통해서는 주로 귀신 들린 사람, 사단의 역사를 받는 사람에게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둠의 세력으로 인한 자폐증, 정신이상, 노이로제, 신경쇠약 등 각종 신경성 질병도 치료되지요. 간혹 표적이 따르기도 하는데 이는 질병이나 약한 것이 귀신이나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비롯된 경우입니다.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뜻 가운데 다시 불러오거나 반대로 산 사람의 영혼을 거둘 때도 권능의 2단계에서 나타납니다.
권능의 3단계는 흰빛(무색)으로 창조의 역사가 따르는 권능입니다.
권능의 3단계에서는 흰색 또는 무색의 빛으로 역사되며 모든 종류의 표적과 함께 창조의 역사가 따릅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등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 외에도 나면서부터 기형이나 불구가 된 신체나 완전히 퇴화된 부분이 온전케 되는 것, 그리고 부스러진 뼈가 붙어서 정상이 되거나 없던 뼈가 생겨나고 끊어진 힘줄이 붙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능의 4단계는 황금빛으로 역사되는 권능의 완성 단계입니다.
권능의 4단계는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기에 천기를 움직이는 기사가 나타납니다. 무생물도 명하는 대로 순종하는 단계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케 되었습니다(마 8장). 또한 권능의 4단계는 시공을 초월하는 역사가 따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기를 간청하고 집으로 돌아가 보니 과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지요(막 7장).
이처럼 질병이 치료되고 어둠의 세력이 떠날 뿐 아니라, 표적이 나타나고 만물이 순종하는 등 권능의 1, 2, 3, 4단계에 속한 모든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3. 빛의 권능을 받아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면
먼저, 성결을 이루는 것은 물론, 최고의 선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이 속으로는 불편하고 싫으면서도 내색하지 않는다면 선한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선이 아닙니다.
설령 악한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요동이나 불편함이 없이 참고 인내한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가장 초보적인 선의 단계에 불과하지요. 참된 선은 나를 힘들게 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말과 행함이 따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는 최고의 선은 원수를 위해서라도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선을 지니셨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도 용서하시고 그들까지도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나 사도 바울도 자신을 해하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주고자 했습니다.
다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사람에 대해서도 끝까지 참아 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은 형제의 허물과 죄를 드러내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쉽게 짜증 내거나 판단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행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으니 소망 가운데 모든 시련을 이기며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사랑 등 진리를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내 주고자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빛 가운데 행하고자 힘쓰는 사람을 만나 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권능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권능의 1단계는 성령의 불로 태우는 ( )의 권능이다.
2. 권능의 2단계는 ( )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난다.
3. 권능의 3단계는 ( )으로 창조의 역사가 따르는 권능이다.
4. 권능의 4단계는 ( )으로 역사되는 권능의 완성 단계이다.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21~13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권능을 동일하게 생각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능치못할 일이 없는 믿음의 힘이다.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 있고 영광스러운 힘을 나타낸다.
영의 세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다. 따라서 권세란 성결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의 악과 비진리를 온전히 버린 성결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 권세를 받을 수 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이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밝히 알아서 권능을 사모하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통해 어떠한 권능의 역사들이 나타났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빛 자체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갔지요. 예수님이 명하시면 온갖 질병이 떠나고 연약한 것이 온전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나 신약 시대의 사도들, 스데반이나 빌립 집사를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빛 가운데 행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아 성결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1.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권능
오늘날도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권능을 주어 영광의 도구로 사용할 만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능을 받아 기사와 표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권능을 행한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시 62:11).
그러면 ‘권능’이란 무엇일까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한 사람에게 입혀 주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말씀한 대로 권능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고 쫓아낼 수 있는 권세와 함께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한 것이란,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신체의 어느 부위가 죽어 퇴화되거나 마비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권능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유의 은사와 동일하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에 나오는 병 고치는 은사 곧 신유의 은사는 주로 균에 의해 생긴 질병들의 균을 태워 치료합니다. 따라서 신체가 퇴화되었거나 신경 세포가 손상되어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는 권능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믿음으로 기도할 때라야 치료할 수 있지요. 또한 권능은 일단 주어지면 항상 나타나는 것이지만 신유의 은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2. 빛이신 하나님의 권능 4단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 13:8). 오늘날에도 누구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면 예수님 당시와 같이 권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능에도 여러 단계가 있어서 얼마나 영으로 일구었느냐에 따라 더 높은 권능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권능은 단계별로 영적인 빛이 다르며, 4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권능의 1단계는 성령의 불로 태우는 붉은빛의 권능입니다.
성령의 불은 온갖 병균이나 바이러스, 세균 등에 의해 생긴 갖가지 질병들을 태워서 치료합니다. 암, 폐병, 당뇨병, 백혈병, 신장병, 관절염, 심장병, 에이즈와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질병들이 권능의 1단계에서 모두 치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암 말기나 폐병 말기 같은 경우,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 선을 넘어 버리면 권능의 1단계에서는 치료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몸의 조직이 망가지고 기능을 상실한 경우는 창조의 역사로 조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므로 더 큰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 해도 환자가 얼마나 믿음을 내보이고 주변의 가족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믿음을 내보이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권능의 1단계라고 해서 성령의 불로 태우는 역사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이 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면 그 이상의 역사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히 권능이 임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경우에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능의 2단계는 푸른빛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하신 대로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레이저광선과 같은 권능의 빛들이 쏟아지면서 단계별로 치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능의 2단계에서 나오는 푸른빛을 통해서는 주로 귀신 들린 사람, 사단의 역사를 받는 사람에게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둠의 세력으로 인한 자폐증, 정신이상, 노이로제, 신경쇠약 등 각종 신경성 질병도 치료되지요. 간혹 표적이 따르기도 하는데 이는 질병이나 약한 것이 귀신이나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비롯된 경우입니다. 또한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뜻 가운데 다시 불러오거나 반대로 산 사람의 영혼을 거둘 때도 권능의 2단계에서 나타납니다.
권능의 3단계는 흰빛(무색)으로 창조의 역사가 따르는 권능입니다.
권능의 3단계에서는 흰색 또는 무색의 빛으로 역사되며 모든 종류의 표적과 함께 창조의 역사가 따릅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하며 들리지 않던 귀가 들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소아마비나 뇌성마비가 온전해지는 등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 외에도 나면서부터 기형이나 불구가 된 신체나 완전히 퇴화된 부분이 온전케 되는 것, 그리고 부스러진 뼈가 붙어서 정상이 되거나 없던 뼈가 생겨나고 끊어진 힘줄이 붙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권능의 4단계는 황금빛으로 역사되는 권능의 완성 단계입니다.
권능의 4단계는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기에 천기를 움직이는 기사가 나타납니다. 무생물도 명하는 대로 순종하는 단계로,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케 되었습니다(마 8장). 또한 권능의 4단계는 시공을 초월하는 역사가 따릅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기를 간청하고 집으로 돌아가 보니 과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지요(막 7장).
이처럼 질병이 치료되고 어둠의 세력이 떠날 뿐 아니라, 표적이 나타나고 만물이 순종하는 등 권능의 1, 2, 3, 4단계에 속한 모든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3. 빛의 권능을 받아 많은 영혼을 구원하려면
먼저, 성결을 이루는 것은 물론, 최고의 선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이 속으로는 불편하고 싫으면서도 내색하지 않는다면 선한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선이 아닙니다.
설령 악한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요동이나 불편함이 없이 참고 인내한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가장 초보적인 선의 단계에 불과하지요. 참된 선은 나를 힘들게 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말과 행함이 따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는 최고의 선은 원수를 위해서라도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선을 지니셨기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도 용서하시고 그들까지도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나 사도 바울도 자신을 해하고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주고자 했습니다.
다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사람에 대해서도 끝까지 참아 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은 형제의 허물과 죄를 드러내고, 마음에 맞지 않으면 쉽게 짜증 내거나 판단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는지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행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으니 소망 가운데 모든 시련을 이기며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사랑 등 진리를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증거를 나타내 주고자 권능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빛 가운데 행하고자 힘쓰는 사람을 만나 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권능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권능의 1단계는 성령의 불로 태우는 ( )의 권능이다.
2. 권능의 2단계는 ( )으로 어둠을 물리치는 역사가 나타난다.
3. 권능의 3단계는 ( )으로 창조의 역사가 따르는 권능이다.
4. 권능의 4단계는 ( )으로 역사되는 권능의 완성 단계이다.
* 금주 과제
권능 책자 121~133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권능을 동일하게 생각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능력이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능치못할 일이 없는 믿음의 힘이다.
권세란, 하나님의 정하신 엄위 있고 영광스러운 힘을 나타낸다.
영의 세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다. 따라서 권세란 성결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의 악과 비진리를 온전히 버린 성결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 권세를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