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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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2
제0과추석 명절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가을에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드린 절기이지요.
한가위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308장 ---------------------- 다 같이
1.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 빛에 향기 진동하도다
2.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심히 적으니
열심 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3. 먼동 틀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4. 거둬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 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후렴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기회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합시다 아멘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18 -------------------- 인도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설 교 --------------------- 화목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어느 노부부가 사소한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감정이 상해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지요. 식사 때가 되어 할아버지에게 상은 차려 주었지만 한쪽에 앉아 말없이 바느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내가 침묵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지요. 그러다가 묘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옷장을 열고 무엇인가 열심히 찾기 시작했습니다. 또 여기저기 서랍을 뒤지면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못 본 척 했습니다. 그런데 옷장 속의 옷들과 서랍 안의 물건들까지 다 꺼내 놓으니 왜 그러는지 궁금해져 “도대체 뭘 찾는데 그래요?” 하고 퉁명스레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지 뭐야. 이제야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구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이제 화 풀어요.” 하며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이내 마음이 풀어져 “제가 잘못했어요.” 하며 다시 웃음꽃이 피어났지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그러면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두와 화평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둘째로,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의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며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고,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화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가장 사랑이 넘치고 화목해야 할 곳이지요. 모두가 조금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해 준다면 상하고 얽혔던 감정도 쉽게 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주장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섬기고 희생함으로 주 안에서 화평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가정, 학교, 직장, 사업터, 일터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가을에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드린 절기이지요.
한가위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308장 ---------------------- 다 같이
1.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 빛에 향기 진동하도다
2.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심히 적으니
열심 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3. 먼동 틀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4. 거둬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 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후렴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기회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합시다 아멘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18 -------------------- 인도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설 교 --------------------- 화목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어느 노부부가 사소한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감정이 상해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지요. 식사 때가 되어 할아버지에게 상은 차려 주었지만 한쪽에 앉아 말없이 바느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내가 침묵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지요. 그러다가 묘안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옷장을 열고 무엇인가 열심히 찾기 시작했습니다. 또 여기저기 서랍을 뒤지면서 무엇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못 본 척 했습니다. 그런데 옷장 속의 옷들과 서랍 안의 물건들까지 다 꺼내 놓으니 왜 그러는지 궁금해져 “도대체 뭘 찾는데 그래요?” 하고 퉁명스레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지 뭐야. 이제야 당신의 목소리를 찾았구려.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이제 화 풀어요.” 하며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이내 마음이 풀어져 “제가 잘못했어요.” 하며 다시 웃음꽃이 피어났지요.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그러면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두와 화평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둘째로,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의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며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고,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화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가장 사랑이 넘치고 화목해야 할 곳이지요. 모두가 조금만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배려해 준다면 상하고 얽혔던 감정도 쉽게 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를 주장하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섬기고 희생함으로 주 안에서 화평을 이루어 행복한 가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가정, 학교, 직장, 사업터, 일터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19-09-06
제36과순종
사무엘상 15:22~23
읽을말씀 : 사무엘상 15:22~23 | 외울말씀 : 사무엘상 15:22 ㅣ 참고 말씀: 로마서 10:10
교육목표 : 믿음을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는 힘이 바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은 마지못해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 명령을 기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온전히 순종하는 차원이 되면 사람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행하게 되고 어떠한 환경도 초월하게 됩니다. 참된 의인은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1. 순종은 의인이 되기 위한 관문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마음을 할례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버리라’, ‘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은 버리고 하지 않으며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들을 지켜 행하니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의에 이르는 것이지요. 즉 성결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 입술로 시인할 때 그것이 참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할 때라야 의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미워하지 말라’ 하셨으니 미움을 버리고, ‘시기하지 말라’ 하셨으니 시기하지 않으며,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으니 원수도 사랑하며 하나님 말씀을 행함으로 순종하는 만큼 의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믿어 순종이 온전히 이루어질수록 참된 의인의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2. 질서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 축복
세상에는 주종 관계나 조직 사회와 같이 순종이 잘 이루어져야 할 분야가 많습니다. 질서 안에서 얼마나 순종이 잘 되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부모는 자녀를 주 안에서 올바르고 지혜롭게 잘 자라도록 가르쳐야 하고, 자녀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빗나가지 않아야 하지요. 자녀가 부모님 말씀도 듣지 않고 늘 사고만 친다면 그 가정은 불행과 슬픔,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사회에서도 귀히 쓰임을 받는다면 부모는 더할 나위없이 기쁠 것입니다.
사제지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제자가 깍듯이 스승을 존중하며 배운 것을 바로 깨우치고, 잘 양식 삼아 활용하며 타의 모범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회사 사장 역시 잘 순종하며, 성실하고 진실하며 지혜로워서 회사 발전에 기여하는 유능한 직원을 좋아하지요. 이처럼 질서를 좇아 순종할 때 모든 것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비진리를 좇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 나가는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생명보다 귀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였을 때,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기쁘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이 무척 사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3.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반면 사울왕처럼 불순종을 거듭하여 하나님께 싫어버린 바 된 사람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그는 자기 생각 가운데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도 불순종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아말렉의 아각 왕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왔고, 기름진 양과 소는 남기고 가치 없고 천한 것만 멸하였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으로 인해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 받아 왕위가 다윗에게 넘어가고 말지요.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하며 사울왕을 엄히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15:22).
그러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자기의 생각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과는 반대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낮아져라 그러면 높아진다, 죽어져라 그러면 산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어 줘라 등의 말씀들을 보면 우리 생각과는 너무나 맞지 않지요.
이러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즉 내가 속한 가정이나 직장, 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의 마음도 맞춰 주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생각에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4. 순종하는 의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하는데 갑자기 집안에 큰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아이구, 내 집에 문제가 생겼으니 어떻게 가나?’ 하고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작정했으니 가자.’ 하고 순종하면 그 뒷일은 하나님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자기 생각이 앞서게 되면 불순종이 나올뿐더러 부부나 가족,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맞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넓은 하나님 마음을 어찌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7~8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지만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므로 순종치 않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오직 순종함으로 의인이 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지요. 사르밧 과부의 경우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가뭄이 매우 심하여 한 번 먹을 양식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것으로 자기를 위해 떡 한 조각을 만들어 오라고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약속하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합니다(왕상 17:14).
엘리야의 요청은 보통 사람이 순종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엘리야가 약속한 대로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양식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순종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생각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참된 의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믿음을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을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기쁨으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는 힘이 바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순종은 마지못해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그 명령을 기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온전히 순종하는 차원이 되면 사람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행하게 되고 어떠한 환경도 초월하게 됩니다. 참된 의인은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1. 순종은 의인이 되기 위한 관문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마음을 할례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버리라’, ‘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은 버리고 하지 않으며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들을 지켜 행하니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의에 이르는 것이지요. 즉 성결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 입술로 시인할 때 그것이 참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할 때라야 의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미워하지 말라’ 하셨으니 미움을 버리고, ‘시기하지 말라’ 하셨으니 시기하지 않으며,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으니 원수도 사랑하며 하나님 말씀을 행함으로 순종하는 만큼 의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믿어 순종이 온전히 이루어질수록 참된 의인의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2. 질서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 축복
세상에는 주종 관계나 조직 사회와 같이 순종이 잘 이루어져야 할 분야가 많습니다. 질서 안에서 얼마나 순종이 잘 되느냐에 따라 결과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부모는 자녀를 주 안에서 올바르고 지혜롭게 잘 자라도록 가르쳐야 하고, 자녀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빗나가지 않아야 하지요. 자녀가 부모님 말씀도 듣지 않고 늘 사고만 친다면 그 가정은 불행과 슬픔,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자녀가 주 안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사회에서도 귀히 쓰임을 받는다면 부모는 더할 나위없이 기쁠 것입니다.
사제지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제자가 깍듯이 스승을 존중하며 배운 것을 바로 깨우치고, 잘 양식 삼아 활용하며 타의 모범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회사 사장 역시 잘 순종하며, 성실하고 진실하며 지혜로워서 회사 발전에 기여하는 유능한 직원을 좋아하지요. 이처럼 질서를 좇아 순종할 때 모든 것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마귀가 좋아하는 비진리를 좇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 나가는 모습을 보실 때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생명보다 귀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였을 때,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기쁘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이 무척 사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3.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반면 사울왕처럼 불순종을 거듭하여 하나님께 싫어버린 바 된 사람도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그는 자기 생각 가운데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도 불순종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아말렉의 아각 왕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왔고, 기름진 양과 소는 남기고 가치 없고 천한 것만 멸하였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으로 인해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 받아 왕위가 다윗에게 넘어가고 말지요.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하며 사울왕을 엄히 책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삼상 15:22).
그러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사람이 자기의 생각 때문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 입력된 지식과는 반대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낮아져라 그러면 높아진다, 죽어져라 그러면 산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대어 줘라 등의 말씀들을 보면 우리 생각과는 너무나 맞지 않지요.
이러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에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즉 내가 속한 가정이나 직장, 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사람의 마음도 맞춰 주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생각에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행하는 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4. 순종하는 의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하는데 갑자기 집안에 큰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아이구, 내 집에 문제가 생겼으니 어떻게 가나?’ 하고 자기 생각을 동원하여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 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작정했으니 가자.’ 하고 순종하면 그 뒷일은 하나님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자기 생각이 앞서게 되면 불순종이 나올뿐더러 부부나 가족,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맞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넓은 하나님 마음을 어찌 맞출 수가 있겠습니까. 로마서 8장 7~8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지만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이므로 순종치 않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오직 순종함으로 의인이 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지요. 사르밧 과부의 경우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가뭄이 매우 심하여 한 번 먹을 양식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것으로 자기를 위해 떡 한 조각을 만들어 오라고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약속하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합니다(왕상 17:14).
엘리야의 요청은 보통 사람이 순종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르밧 과부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엘리야가 약속한 대로 가뭄이 끝나는 날까지 양식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순종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무엇이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생각을 깨뜨리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참된 의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시기 바랍니다.
2019-08-30
제35과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창세기 22:1~13
읽을말씀 : 창세기 22:1~13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19 ㅣ 참고 말씀: 에스더 4:16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상대를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눈빛이나 몸짓만 보아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설령 이해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해도 오해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신하는 경우는 친한 것 같아도 사소한 일로도 감정이 쉽게 상하고 결국 갈라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도 얼마나 진실함으로 신뢰를 쌓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1. 자신의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신뢰 관계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남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할 때도 있고, 부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만일 그 일이 악한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니 결코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일을 부탁받았을 때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도 아끼지 않고 도와주며 해결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인물로는 에스더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으로서 페르시아 왕후가 된 에스더에게 사촌 모르드개가 부탁을 합니다. 악한 하만이 자기 민족(유다)을 말살하려고 하니 왕에게 나가 간청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선뜻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왕 앞에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30일이나 되었고,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다시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하며 왕 앞에 나가기를 권면합니다. 이에 에스더는 삼일 금식을 하고 민족을 살리고자 자신이 죽을 각오로 왕 앞에 나가 결국 멸절 위기의 민족을 구합니다. 에스더가 선 가운데 자기 유익이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모르드개의 청을 들어주었기에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으며 그 결과도 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부모 없는 에스더를 딸처럼 양육했고, 에스더 역시 아버지처럼 따르며 신뢰했기에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부탁까지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중심을 소유한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 온전케 하시기 위해 시험을 하십니다. 그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목적지를 알려 주지 않고 앞으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만 명하시지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몰랐지만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도 대지 않고 지시하신 땅으로 떠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보니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은 의심없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신 약속이 무색하리만큼 그 땅에 심한 기근이 들어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믿음으로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왔건만 설상가상으로 애굽 왕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했을 법도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니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셨고, 바로왕은 즉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오히려 이 일로 아브라함은 육축과 은금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은 이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 임합니다.
3.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어드린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니 함께한 조카 롯까지 복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가축이 어찌나 많았던지 목초지와 물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지요. 이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줍니다. 그 후에도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구해 오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양육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뭇별처럼 네 자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미 자신이나 아내가 나이 많아 자식을 낳을 수 없지만 결코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기뻐하시며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되도록 후사가 생기지 않자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자녀를 얻도록 요구한 결과, 하갈과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해에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인 이삭을 100세에 얻었습니다.
어느 날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하지요.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므로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 하시며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정과 욕심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면 오직 순종했던 것입니다.
4.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이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히 11:19).
아브라함은 바로 순종하여 아침 일찍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으로 갔습니다. 모든 번제 준비를 마치고 이삭을 결박하여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다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는 것이었지요.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이때를 기다리고 대답한 건 아닐까?”라고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데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멈추라고 하시지는 않을까?”라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순종하여 칼로 내리치려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과 순종을 내보임으로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경외함을 온전히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지예정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시험을 통과할지도 다 아셨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심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시험하신 것은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원수 마귀 사단 앞에서도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신앙이 분명히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인이 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으며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상대를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눈빛이나 몸짓만 보아도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설령 이해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해도 오해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불신하는 경우는 친한 것 같아도 사소한 일로도 감정이 쉽게 상하고 결국 갈라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도 얼마나 진실함으로 신뢰를 쌓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1. 자신의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신뢰 관계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남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할 때도 있고, 부탁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만일 그 일이 악한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니 결코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일을 부탁받았을 때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도 아끼지 않고 도와주며 해결해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인물로는 에스더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으로서 페르시아 왕후가 된 에스더에게 사촌 모르드개가 부탁을 합니다. 악한 하만이 자기 민족(유다)을 말살하려고 하니 왕에게 나가 간청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선뜻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왕 앞에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30일이나 되었고,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모르드개는 다시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하며 왕 앞에 나가기를 권면합니다. 이에 에스더는 삼일 금식을 하고 민족을 살리고자 자신이 죽을 각오로 왕 앞에 나가 결국 멸절 위기의 민족을 구합니다. 에스더가 선 가운데 자기 유익이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모르드개의 청을 들어주었기에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으며 그 결과도 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부모 없는 에스더를 딸처럼 양육했고, 에스더 역시 아버지처럼 따르며 신뢰했기에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부탁까지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중심을 소유한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 온전케 하시기 위해 시험을 하십니다. 그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목적지를 알려 주지 않고 앞으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만 명하시지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몰랐지만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도 대지 않고 지시하신 땅으로 떠났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보니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은 의심없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신 약속이 무색하리만큼 그 땅에 심한 기근이 들어 이주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믿음으로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왔건만 설상가상으로 애굽 왕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했을 법도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니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셨고, 바로왕은 즉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오히려 이 일로 아브라함은 육축과 은금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은 이처럼 믿음이 있는 곳에 임합니다.
3.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어드린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니 함께한 조카 롯까지 복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가축이 어찌나 많았던지 목초지와 물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지요. 이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줍니다. 그 후에도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구해 오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양육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뭇별처럼 네 자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미 자신이나 아내가 나이 많아 자식을 낳을 수 없지만 결코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기뻐하시며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되도록 후사가 생기지 않자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자녀를 얻도록 요구한 결과, 하갈과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 해에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인 이삭을 100세에 얻었습니다.
어느 날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하지요.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므로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라의 말대로 하라 하시며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정과 욕심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면 오직 순종했던 것입니다.
4.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은 아브라함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명령이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히 11:19).
아브라함은 바로 순종하여 아침 일찍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으로 갔습니다. 모든 번제 준비를 마치고 이삭을 결박하여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다급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는 것이었지요.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이 이때를 기다리고 대답한 건 아닐까?”라고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데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멈추라고 하시지는 않을까?”라는 생각 자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에 순종하여 칼로 내리치려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과 순종을 내보임으로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경외함을 온전히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지예정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시험을 통과할지도 다 아셨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심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시험하신 것은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원수 마귀 사단 앞에서도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신앙이 분명히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인이 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으며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019-08-23
제34과네 믿은 대로 되어라
마태복음 8:13
읽을말씀 : 마태복음 8:1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8:13 ㅣ 참고 말씀: 요한일서 3:21~22
교육목표 : 주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백부장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과 환난이 왔을 때나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것 같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였기에 아무리 어렵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응답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1. 근본의 소리에 순종하는 모든 피조물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니 식물이 창조되었고,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하시니 해와 달과 별들이 창조되었습니다.
이처럼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근본의 소리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합니다. 오늘날 ‘음성 인식 장치’가 특정한 음성에만 반응하여 작동하는 것처럼, 천지 만물에도 근본의 소리가 배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도 근본의 소리를 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하신 대로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였지요. 하물며 귀가 있어 들을 수 있고 이성도 있어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발하신 근본의 소리에 즉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아 비진리인 어둠의 일들을 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사람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 지어져 하나님 말씀인 진리만 듣고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는 자유 의지 속에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봇처럼 무조건 복종하는 자녀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유 의지를 지닌 사람으로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사단의 꾐에 넘어가 불순종의 죄를 짓고 말았지요.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은 결국 죄의 종,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어 악한 영들이 사주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했습니다.
마침내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할뿐더러 죄에 죄를 더해 가며 사망, 곧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즉 속죄 제물로 죽으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근본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을 지닌 백부장의 믿음
이스라엘에 파견된 로마 군대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등 수많은 사람이 각색 질병을 치료받은 소문을 듣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베푸신 예수님에 관한 반응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자기적인 신앙의 단단한 틀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정죄하는 부류도 있었지요.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 제사장, 장로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큰 선지자 정도로만 믿고 따르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마음으로 깨닫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었습니다. 바로 백부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로마 사람인데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4. 시공을 초월한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
마태복음 8장 6절 이하를 보면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근본의 소리를 발하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백부장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나 형제, 자녀가 아닌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예수님 앞에 직접 찾아왔으니 예수님께서 어찌 감동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더구나 중풍은 의술로도 치료하기 어려운 중한 질병입니다. 몸의 일부분이 마비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질병을 앓는 기간이 오래되면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변함없이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 주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가족이라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하인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했기에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인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 간구하는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 하며 중심에서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수고롭게 자신의 집에까지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명하시면 하인이 치료받을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하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하고자 할 자세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며 그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시고 칭찬하셨습니다(마 8:10).
그리고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곧바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니 백부장의 믿음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즉시 응답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하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을 버리면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에게는 다만 말씀만으로도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면서도 예수님께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며 온전히 순종할 자세를 지녔기에 즉시 시공을 초월하여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 )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한다.
2.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신 이유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온전히 ( )했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무엇을 명해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알고 넘어갑시다!
‘백부장’
1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 군대는 군단들로 조직되었는데 각 군단은 6,000명 정원의 남자들로 구성되었고, 각 군단은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60명의 백부장과 더불어 6개의 보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백부장은 높은 보수를 받았으며 로마 사회에서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근무 연한은 20년이었지만 본인이 원하면 군대에 더 머물 수도 있었다.
교육목표 : 주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백부장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과 환난이 왔을 때나 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것 같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이는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합니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였기에 아무리 어렵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응답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1. 근본의 소리에 순종하는 모든 피조물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니 식물이 창조되었고,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하시니 해와 달과 별들이 창조되었습니다.
이처럼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근본의 소리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합니다. 오늘날 ‘음성 인식 장치’가 특정한 음성에만 반응하여 작동하는 것처럼, 천지 만물에도 근본의 소리가 배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도 근본의 소리를 발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하신 대로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였지요. 하물며 귀가 있어 들을 수 있고 이성도 있어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발하신 근본의 소리에 즉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을 받아 비진리인 어둠의 일들을 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사람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으로 지어져 하나님 말씀인 진리만 듣고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는 자유 의지 속에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봇처럼 무조건 복종하는 자녀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자유 의지를 지닌 사람으로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사단의 꾐에 넘어가 불순종의 죄를 짓고 말았지요.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은 결국 죄의 종, 곧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어 악한 영들이 사주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했습니다.
마침내 근본의 소리를 듣지 못할뿐더러 죄에 죄를 더해 가며 사망, 곧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즉 속죄 제물로 죽으셨다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근본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3. 선한 마음을 지닌 백부장의 믿음
이스라엘에 파견된 로마 군대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놀라운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귀머거리가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등 수많은 사람이 각색 질병을 치료받은 소문을 듣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놀라운 역사를 베푸신 예수님에 관한 반응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자기적인 신앙의 단단한 틀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정죄하는 부류도 있었지요.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 제사장, 장로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큰 선지자 정도로만 믿고 따르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마음으로 깨닫고 믿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었습니다. 바로 백부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로마 사람인데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4. 시공을 초월한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
마태복음 8장 6절 이하를 보면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고쳐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근본의 소리를 발하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백부장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습니다. 자신의 부모나 형제, 자녀가 아닌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예수님 앞에 직접 찾아왔으니 예수님께서 어찌 감동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더구나 중풍은 의술로도 치료하기 어려운 중한 질병입니다. 몸의 일부분이 마비되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으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요. 게다가 질병을 앓는 기간이 오래되면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변함없이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 주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가족이라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하인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했기에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인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 간구하는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 하며 중심에서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수고롭게 자신의 집에까지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명하시면 하인이 치료받을 것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하며 예수님께서 무엇을 명하셔도 순종하고자 할 자세였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며 그의 믿음을 기이히 여기시고 칭찬하셨습니다(마 8:10).
그리고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곧바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니 백부장의 믿음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즉시 응답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에 ‘하라’ 하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을 버리면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에게는 다만 말씀만으로도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면서도 예수님께 자신을 겸비하게 낮추며 온전히 순종할 자세를 지녔기에 즉시 시공을 초월하여 응답받았던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무생물을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 )로 창조되었기에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순종한다.
2. 예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해 주신 이유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온전히 ( )했기 때문이다. 백부장은 무엇을 명해도 순종할 마음이었고, 특히 하인에 대한 사랑이 진실했다.
* 금주 과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책자 19~32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알고 넘어갑시다!
‘백부장’
1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의 지휘관을 말한다.
로마 군대는 군단들로 조직되었는데 각 군단은 6,000명 정원의 남자들로 구성되었고, 각 군단은 10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 60명의 백부장과 더불어 6개의 보병대를 가지고 있었다.
백부장은 높은 보수를 받았으며 로마 사회에서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근무 연한은 20년이었지만 본인이 원하면 군대에 더 머물 수도 있었다.
2019-08-16
제33과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누가복음 18:41
읽을말씀 : 누가복음 18:41 | 외울말씀 : 예레미야 33:3 l 참고 말씀:누가복음 22:44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소원을 무엇이든지 고백하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신속히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더라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기만 한다면 아무리 크고 어려워 보이는 문제도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소리를 발하시자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자 그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자 그가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을 붙좇았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근본의 소리’라고 합니다.
‘근본의 소리’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근본의 소리로 하나님의 응답을 신속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첫째, 예수님을 중심에서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을 나타내며 말씀을 확증하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나 뛰고 문둥병이 치료되었으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귀신이 나가는 등 갖가지 질병과 연약한 사람을 고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은 널리 퍼졌고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윗의 자손에게서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는 분임을 마음 중심에서 믿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는 비록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가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처럼 마음이 선했기에 소문을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둘째,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은 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을까요? 창세기 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시조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죄가 들어오고 육의 사람으로 전락하여 땀 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기 위해서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즉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수고를 해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했고,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하였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에 맞도록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문제를 응답받고자 한다면 어떠해야겠습니까. 따라서 소경이 응답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구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소리 내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도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간절한 심정으로 공의에 맞게 구하였지요. 따라서 소경이 눈을 뜰 수 있었던 세 번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다는 점입니다. 만일 소경이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을 때 기분이 상하여 낙심해 버렸다면 결코 응답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했기에 거기에 굴하지 않고 간절히 부르짖어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하여 돌아가 버리거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변함없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넷째, 겉옷을 내버리는 순종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에 소경이 치료받았는데 마가복음 10장 46~52절을 보면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도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치료해 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그 주인공이지요.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 질러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오게 하시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왔습니다. 그가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기에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겉옷을 내버린 데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거지의 겉옷은 더럽고 역한 냄새가 나지만 자신의 몸을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재산입니다. 바디매오는 추하고 냄새나는 겉옷을 입고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예수라는 분은 매우 거룩하고 깨끗하신 분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치료해 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분임을 알았지요. 그러니 냄새나고 추한 겉옷을 입고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즉시 순종하여 내버린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성령 받기 전이었으나 선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자 가장 소중한 겉옷이라도 즉시 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겉옷은 영적으로 우리의 추하고 냄새나는 마음을 뜻합니다. 자존심, 교만 등 온갖 더러운 비진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추하고 냄새나는 모든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원한다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는 죄목을 낱낱이 회개해야 합니다. 거지 바디매오처럼 성령의 음성으로 주관해 주시는 것에 주저함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이유는 반드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술로 믿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지요. 눈먼 사람이 응답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응답을 주고자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보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니 그대로 응답이 되었지요. 이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공의에 맞게 합당한 자격을 갖추면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춰야 할까요?
① 예수님을 중심에서 ( )해야 한다.
② ( )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한다.
③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 )이 있어야 한다.
④ 겉옷을 내버리는 ( )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79~1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리고’
요단강 서쪽,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한 여리고는 요단 계곡에 위치한 성읍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어서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점령한 곳이다.
당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해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6일 동안은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고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다. 총 13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함께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소원을 무엇이든지 고백하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신속히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더라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기만 한다면 아무리 크고 어려워 보이는 문제도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1. 근본의 소리를 발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예수님
누가복음 18장 35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소리를 발하시자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이 나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자 그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자 그가 눈을 떠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을 붙좇았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말씀을 ‘근본의 소리’라고 합니다.
‘근본의 소리’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며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리를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근본의 소리로 하나님의 응답을 신속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첫째, 예수님을 중심에서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표적을 나타내며 말씀을 확증하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일어나 뛰고 문둥병이 치료되었으며, 눈먼 사람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듣고 귀신이 나가는 등 갖가지 질병과 연약한 사람을 고치신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은 널리 퍼졌고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윗의 자손에게서 구세주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고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는 분임을 마음 중심에서 믿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는 비록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예수님 앞에 나가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는 말씀처럼 마음이 선했기에 소문을 듣고 믿었던 것입니다.
둘째,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은 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었을까요? 창세기 3장 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사람의 시조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풍족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죄가 들어오고 육의 사람으로 전락하여 땀 흘려 수고해야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기 위해서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즉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부르짖어 기도하는 수고를 해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했고, 누가복음 22장 44절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 하였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에 맞도록 부르짖어 기도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문제를 응답받고자 한다면 어떠해야겠습니까. 따라서 소경이 응답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공의에 맞게 부르짖어 구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소리 내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눈먼 사람도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간절한 심정으로 공의에 맞게 구하였지요. 따라서 소경이 눈을 뜰 수 있었던 세 번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을 내보였다는 점입니다. 만일 소경이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을 때 기분이 상하여 낙심해 버렸다면 결코 응답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했기에 거기에 굴하지 않고 간절히 부르짖어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왔으면서도 사소한 일로 감정이 상하여 돌아가 버리거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변함없이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넷째, 겉옷을 내버리는 순종의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실 때에 소경이 치료받았는데 마가복음 10장 46~52절을 보면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도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치료해 주신 장면이 나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그 주인공이지요.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 질러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 간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오게 하시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왔습니다. 그가 겉옷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기에 응답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겉옷을 내버린 데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거지의 겉옷은 더럽고 역한 냄새가 나지만 자신의 몸을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재산입니다. 바디매오는 추하고 냄새나는 겉옷을 입고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예수라는 분은 매우 거룩하고 깨끗하신 분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치료해 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좋은 분임을 알았지요. 그러니 냄새나고 추한 겉옷을 입고는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즉시 순종하여 내버린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성령 받기 전이었으나 선한 양심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였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자 가장 소중한 겉옷이라도 즉시 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겉옷은 영적으로 우리의 추하고 냄새나는 마음을 뜻합니다. 자존심, 교만 등 온갖 더러운 비진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추하고 냄새나는 모든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원한다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성령께서 떠올려 주시는 죄목을 낱낱이 회개해야 합니다. 거지 바디매오처럼 성령의 음성으로 주관해 주시는 것에 주저함 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이유는 반드시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입술로 믿음을 고백할 때 비로소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지요. 눈먼 사람이 응답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응답을 주고자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보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니 그대로 응답이 되었지요. 이처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공의에 맞게 합당한 자격을 갖추면 무엇을 구하든지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근본의 소리를 발할 때 응답받으려면 어떠한 조건을 갖춰야 할까요?
① 예수님을 중심에서 ( )해야 한다.
② ( )에 맞게 부르짖어 간구해야 한다.
③ 변개하지 않는 온전한 ( )이 있어야 한다.
④ 겉옷을 내버리는 ( )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79~195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여리고’
요단강 서쪽,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한 여리고는 요단 계곡에 위치한 성읍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샘이 있어서 주민들이 정착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번째로 점령한 곳이다.
당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해 오직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6일 동안은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돌고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다. 총 13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백성들이 함께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2019-08-09
제32과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5~19
읽을말씀 : 마태복음 16:15~1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6:16 ㅣ 참고 말씀: 로마서 10:10
교육목표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부부는 평생을 같이 살면서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꼭 그걸 말로 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입술의 고백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백 번, 천 번 말로는 “사랑한다.” 해놓고 정작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 마음에 간직한 것을 상대에게 표현할 때 기쁨이 배가 되고 행복이 넘쳐납니다. 영적으로도 마음에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입술 고백의 중요성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의에 이르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왜 마음에 믿은 것을 입술로 시인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바로 입술의 고백을 통해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서 믿어지는 믿음 없이 입술로만 “믿습니다.” 하는 사람은 믿음에 대한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믿은 것을 입술로도 고백하는 사람은 행함을 통해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시며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2. 입술의 고백을 통해 물 위를 걸은 베드로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무리들을 다 떠나 보내고 홀로 남아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제자들은 건너편 벳새다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지요.
그런데 밤 4경(새벽 3시~6시)에 거센 풍랑을 만나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다 위로 누군가 유유히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자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지요.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곧바로 순종하여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믿음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마음에서 믿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한 이 고백은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중심에서 예수님을 백 퍼센트 인정하는 믿음이라면 “주여! 주는 무엇이나 하실 수 있나이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기에 “만일 주시어든” 하며 확인하는 듯한 고백을 하였지요.
3. 입술의 고백을 통해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
마침내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며 물 위를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백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메시아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지요. “미쳤다.”, “바알세불 지폈다.”, “미혹하는 자다.”,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 온갖 중상모략과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판단 정죄를 하는 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지요. 나쁜 소문도 있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힘을 드릴 수 있는 선한 고백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지요. 이때 베드로가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께 “만일 주시어든”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당당히 “주는”이라 고백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 하시며 베드로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축복과 함께 육의 공간 안에서 영의 공간의 일을 펼칠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를 통해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며, 죽은 사람이 살아날 뿐 아니라, 수천 명이 일시에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지요.
또한 베드로가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니 즉시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나타난 것은 그에게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시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을 받으려면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질병과 연약함을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그중에는 이방인도 있지만 대부분이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은 유대인이었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들의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에 질병과 연약함이 치료되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인정한다는 증거를 행함으로 나타냈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애쓴 것은 아직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예수님 앞에 나가면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응답받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면 예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를 통하여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질병이나 연약함은 물론, 아무리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조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관심조차 없는 사람에게까지 기도해 주고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였다 해도 정작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인정하여 입술로 고백했기 때문에 공의에 조금도 어그러짐 없이 축복의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중심의 깨달음에 따른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나오는 입술의 고백을 통해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라도 신속히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어떤 부부는 평생을 같이 살면서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꼭 그걸 말로 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입술의 고백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백 번, 천 번 말로는 “사랑한다.” 해놓고 정작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 마음에 간직한 것을 상대에게 표현할 때 기쁨이 배가 되고 행복이 넘쳐납니다. 영적으로도 마음에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입술 고백의 중요성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의에 이르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왜 마음에 믿은 것을 입술로 시인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바로 입술의 고백을 통해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서 믿어지는 믿음 없이 입술로만 “믿습니다.” 하는 사람은 믿음에 대한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믿은 것을 입술로도 고백하는 사람은 행함을 통해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참 믿음으로 인정하시고,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시며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2. 입술의 고백을 통해 물 위를 걸은 베드로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 무리들을 다 떠나 보내고 홀로 남아 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제자들은 건너편 벳새다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났지요.
그런데 밤 4경(새벽 3시~6시)에 거센 풍랑을 만나 제자들은 힘겹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다 위로 누군가 유유히 걸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자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지요.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베드로는 곧바로 순종하여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믿음으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마음에서 믿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한 이 고백은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중심에서 예수님을 백 퍼센트 인정하는 믿음이라면 “주여! 주는 무엇이나 하실 수 있나이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기에 “만일 주시어든” 하며 확인하는 듯한 고백을 하였지요.
3. 입술의 고백을 통해 천국 열쇠를 받은 베드로
마침내 물 위를 걷는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게 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며 물 위를 걸을 때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고백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메시아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지요. “미쳤다.”, “바알세불 지폈다.”, “미혹하는 자다.”,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 온갖 중상모략과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판단 정죄를 하는 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지요. 나쁜 소문도 있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힘을 드릴 수 있는 선한 고백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지요. 이때 베드로가 담대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전에는 예수님께 “만일 주시어든”이라 하였지만 이제는 당당히 “주는”이라 고백하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 하시며 베드로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축복과 함께 육의 공간 안에서 영의 공간의 일을 펼칠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를 통해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며, 죽은 사람이 살아날 뿐 아니라, 수천 명이 일시에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지요.
또한 베드로가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니 즉시로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나타난 것은 그에게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시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 앞에 나와 응답을 받으려면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질병과 연약함을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그중에는 이방인도 있지만 대부분이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알고 믿은 유대인이었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자신들의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에 질병과 연약함이 치료되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고 인정한다는 증거를 행함으로 나타냈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애쓴 것은 아직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예수님 앞에 나가면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응답받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 앞에 나와 믿음을 고백하면 예수님께서 발하시는 근본의 소리를 통하여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질병이나 연약함은 물론, 아무리 얽히고설킨 문제라도 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무조건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으며 관심조차 없는 사람에게까지 기도해 주고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였다 해도 정작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인정하여 입술로 고백했기 때문에 공의에 조금도 어그러짐 없이 축복의 언약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성령의 사역에 동참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중심의 깨달음에 따른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나오는 입술의 고백을 통해 모든 마음의 소원까지라도 신속히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2019-08-02
제31과믿음
히브리서 10:22
읽을말씀 : 히브리서 10:22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0:22 ㅣ 참고 말씀: 요한일서 3:21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 자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즉시 응답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거나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1.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과의 관계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여기서 ‘참마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믿음은 참마음을 이룬 만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참마음을 이룬 사람의 고백이야말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저마다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은 다릅니다. 참마음을 이루어 백 퍼센트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전히 이루지 못하여 오십 퍼센트밖에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반밖에 믿지 못하는구나.” 하실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진실함의 정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분량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믿는다’는 고백과 상대를 신뢰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린 자녀를 집에 두고 외출할 때 “얌전히 집 잘 보고 있어라. 엄마는 널 믿는다.”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정말 자녀를 믿어서 말한 것일까요? 참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몇 시까지 들어올게. 집 잘 보고 있어.” 해도 되는데 미덥지 못하니 ‘믿는다’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엄마가 깨끗이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럽히지 말고, 엄마 화장품 만지지 말아라. 가스 불은 위험하니까 켜면 안 된다.” 등 염려가 되니 당부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당부하고 외출했으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으니 “지금 뭐하니? 아무 일 없지?”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녀에게 “너를 믿는다.” 했다면 자녀를 백 퍼센트 믿는 데서 나온 진실한 고백이지요. 이처럼 얼마나 순종하고 진실한지에 따라 신뢰가 가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미덥지 못한 자녀도 있습니다.
만일 백 퍼센트 신뢰하는 자녀가 무엇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이유도 묻지 않고 바라는 대로 해 줍니다. ‘당연히 필요해서 구하겠지. 허튼 일을 할 아이가 아니니까.’ 하며 자녀에 대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구하는 대로 들어주지요.
그러나 자녀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요구가 타당할 때라야 비로소 들어줍니다. 자녀에 대한 믿음이 적을수록 부모는 자녀의 요구 사항을 몇 차례 확인하고도 들어주기를 주저하지요. 그래도 자녀가 계속해서 조르고 떼를 쓴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강청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미덥지 못한 자녀가 강청하니 마지못해 조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진리 가운데 행하여 책망받을 것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마다 주실 수 있도록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번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롬 4:19~22).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은 자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99세, 아내 사라가 89세로 이미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듬해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전혀 의심치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듬해에 아들 이삭을 낳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믿음의 시험이 남아 있었지요.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드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히 11:17~19).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잡으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창 22:12).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했으며, 믿음의 시험을 통하여 온전한 믿음을 인정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려면
당회장님의 경우, 7년간 온갖 질병으로 인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님의 전도로 성전에 가서 단지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질병을 치료받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며 각종 예배는 물론 여기저기 부흥성회를 찾아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행했습니다.
당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매일같이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등 ‘어찌하면 하나님 말씀을 더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니 즉시 끊어 버렸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해야 한다고 하니 곧바로 드렸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하라’ 하는 것은 했고, ‘지키라’ 하는 것은 지켰습니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았으며, ‘버리라’ 하는 것은 버려 나갔습니다. 만일 쉽게 버려지지 않으면 금식하며 기도해서라도 버렸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날로 더욱 견고해져 어떤 시험이 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결코 하나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니 어느새 거짓이 없는 참마음이 되어 갔습니다.
주의 종으로 부름받은 후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권능의 종이 되기 위해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시험이 올 때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모든 시험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의 역사를 바탕으로 2000년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성회를 이루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으며 계명들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변화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다. 또 ( )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소유하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43~15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였고 노년에 축복하려 했으나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게 된다.
이삭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과 함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 버릴 때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양보함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없는 진실 자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즉시 응답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거나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1.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과의 관계
히브리서 10장 22절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여기서 ‘참마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온전한 믿음은 참마음을 이룬 만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참마음을 이룬 사람의 고백이야말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이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의 고백을 하지만 저마다 그 속에 담긴 진실함은 다릅니다. 참마음을 이루어 백 퍼센트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온전히 이루지 못하여 오십 퍼센트밖에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를 반밖에 믿지 못하는구나.” 하실 수밖에 없지요. 이러한 진실함의 정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분량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믿는다’는 고백과 상대를 신뢰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어린 자녀를 집에 두고 외출할 때 “얌전히 집 잘 보고 있어라. 엄마는 널 믿는다.”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정말 자녀를 믿어서 말한 것일까요? 참으로 믿는다면 ‘믿는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몇 시까지 들어올게. 집 잘 보고 있어.” 해도 되는데 미덥지 못하니 ‘믿는다’는 말을 덧붙인 것입니다. “엄마가 깨끗이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럽히지 말고, 엄마 화장품 만지지 말아라. 가스 불은 위험하니까 켜면 안 된다.” 등 염려가 되니 당부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당부하고 외출했으면서도 믿음이 가지 않으니 “지금 뭐하니? 아무 일 없지?”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평소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녀에게 “너를 믿는다.” 했다면 자녀를 백 퍼센트 믿는 데서 나온 진실한 고백이지요. 이처럼 얼마나 순종하고 진실한지에 따라 신뢰가 가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미덥지 못한 자녀도 있습니다.
만일 백 퍼센트 신뢰하는 자녀가 무엇을 요구한다면 부모는 이유도 묻지 않고 바라는 대로 해 줍니다. ‘당연히 필요해서 구하겠지. 허튼 일을 할 아이가 아니니까.’ 하며 자녀에 대한 온전한 신뢰 속에서 구하는 대로 들어주지요.
그러나 자녀에 대한 신뢰가 온전하지 않을 경우에는 요구가 타당할 때라야 비로소 들어줍니다. 자녀에 대한 믿음이 적을수록 부모는 자녀의 요구 사항을 몇 차례 확인하고도 들어주기를 주저하지요. 그래도 자녀가 계속해서 조르고 떼를 쓴다면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강청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들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따라서 미덥지 못한 자녀가 강청하니 마지못해 조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진리 가운데 행하여 책망받을 것이 없으므로 구하는 것마다 주실 수 있도록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2.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지닌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번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롬 4:19~22).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큰 민족이 형성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은 자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99세, 아내 사라가 89세로 이미 잉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이듬해에 아들을 얻게 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약속의 말씀을 전혀 의심치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듬해에 아들 이삭을 낳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믿음의 시험이 남아 있었지요. 백 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어떻게 번제로 드렸을까요?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을 알려 주셨기 때문에 그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히 11:17~19).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잡으려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셨습니다(창 22:12).
이처럼 아브라함은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했으며, 믿음의 시험을 통하여 온전한 믿음을 인정받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3.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려면
당회장님의 경우, 7년간 온갖 질병으로 인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누님의 전도로 성전에 가서 단지 무릎을 꿇었을 뿐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질병을 치료받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집 근처 교회에 출석하며 각종 예배는 물론 여기저기 부흥성회를 찾아다니며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행했습니다.
당시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매일같이 새벽예배에 참석하는 등 ‘어찌하면 하나님 말씀을 더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었지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하니 즉시 끊어 버렸습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해야 한다고 하니 곧바로 드렸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하라’ 하는 것은 했고, ‘지키라’ 하는 것은 지켰습니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았으며, ‘버리라’ 하는 것은 버려 나갔습니다. 만일 쉽게 버려지지 않으면 금식하며 기도해서라도 버렸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날로 더욱 견고해져 어떤 시험이 오거나 어려운 일을 만나도 결코 하나님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니 어느새 거짓이 없는 참마음이 되어 갔습니다.
주의 종으로 부름받은 후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권능의 종이 되기 위해 불같이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시험이 올 때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니 모든 시험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큰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의 역사를 바탕으로 2000년도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외성회를 이루며 무수한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온전히 믿으며 계명들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변화되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이루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다. 또 ( )이란 성경 66권 말씀을 의심 없이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모두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아브라함은 어떠한 믿음을 소유하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을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43~15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이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반항하지 않았다.
그는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이삭은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였고 노년에 축복하려 했으나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주게 된다.
이삭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과 함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막아 버릴 때도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양보함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2019-07-26
제30과순종
빌립보서 2:8
읽을말씀 : 빌립보서 2:8 | 외울말씀 : 사무엘상 15:22 ㅣ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1:19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믿음의 증거를 보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지름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도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오직 하나님 뜻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한 순종을 하셨을까요?
1.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열린 인간 구원의 길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공의에 따라 사망에 이르렀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아셨기에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세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죄인 된 인류를 자기가 주관하다 지옥으로 끌고 갈 줄 알았지요.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법칙에 의해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공의의 법칙을 어기고 예수님을 죽였지요. 결국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지요(고전 2:7).
예수님은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한 섭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이 있었기에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2. 첫째 하늘의 공의에 순종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이 하나이신데도 피조물인 사람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하늘의 공의에 합당하게 사셨기 때문에 배고픔과 피곤함, 고통과 슬픔, 외로움을 다 느끼셔야 했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애써 부르짖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40일 금식 중에 원수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는 등 필요한 순간에만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도 얼마든지 멸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지만 잠잠히 핍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당하셨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순종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의의 종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롬 6:16).
3.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증거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한 대로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고 믿음으로 명하면 귀신이 나가며 시험 환난과 모든 재앙이 물러갑니다. 이처럼 공의의 법칙에 따라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순종의 행함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가져오라 할 때 과부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순종했기에 그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공의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꿈과 비전을 주실 때 얼마나 명심하여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믿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며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정도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꿈을 이뤄 주셨습니다. 불과 30살에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왕 다음가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려면
첫째, 성경 66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을 알고 순종하되, 먼저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곧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므로 순종하여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회개하고 통회자복을 하라”는 것은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법칙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우리가 땀 흘려야 소산을 먹는다는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을 알려 주지요(눅 22:44).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구할 바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구할 바를 구하되 정성과 믿음을 내보여야 하지요.
둘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주의 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개척 때 어떤 분이 암에 걸려 들것에 누운 채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앉아서 예배드리세요.” 하시자 가족이 등 뒤를 받쳐서 비스듬히 앉아 예배를 드렸지요. 그분이 일어나 앉기조차 힘든 것을 알고 있지만, 성령의 주관을 받아 명하시는 당회장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결국 치료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지만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관이 오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기도를 하라’는 주관을 받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면 회개의 영이 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헐리거나 방언의 은사를 받는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동안 응답의 축복이 오는 경우도 있지요.
누구든지 공의의 법칙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순종으로 믿음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순종만 하면 하나님 역사가 창대하게 펼쳐집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철저한 ( )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 )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 )의 종이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순종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21~1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순종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 유형 : 징계가 두려워 명령에 억지로 순종한다.
두 번째 유형 :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한다.
세 번째 유형 : 무조건 순종한다.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는다.
네 번째 유형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한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교육목표 :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믿음의 증거를 보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말씀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리는 지름길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도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오직 하나님 뜻에 따라 순종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한 순종을 하셨을까요?
1.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으로 열린 인간 구원의 길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하므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공의에 따라 사망에 이르렀고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아셨기에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세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는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없애 버리기만 하면 죄인 된 인류를 자기가 주관하다 지옥으로 끌고 갈 줄 알았지요.
예수님은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법칙에 의해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수 마귀는 공의의 법칙을 어기고 예수님을 죽였지요. 결국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만세 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지요(고전 2:7).
예수님은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어야 하나?’ 생각한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한 섭리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이 있었기에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2. 첫째 하늘의 공의에 순종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이 하나이신데도 피조물인 사람과 똑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첫째 하늘의 공의에 합당하게 사셨기 때문에 배고픔과 피곤함, 고통과 슬픔, 외로움을 다 느끼셔야 했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앞두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의 주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금식하며 애써 부르짖어 기도하신 것입니다. 40일 금식 중에 원수 마귀에게 세 차례 시험을 받았지만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물로 포도주를 만들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시는 등 필요한 순간에만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도 얼마든지 멸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지만 잠잠히 핍박을 받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당하셨지요.
그래서 히브리서 5장 8~9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순종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의의 종이 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롬 6:16).
3. 순종의 행함은 믿음의 증거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한 대로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능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고 믿음으로 명하면 귀신이 나가며 시험 환난과 모든 재앙이 물러갑니다. 이처럼 공의의 법칙에 따라 믿음대로 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순종의 행함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양식을 가져오라 할 때 과부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믿음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가 순종했기에 그 행함이 믿음의 증거가 되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공의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꿈과 비전을 주실 때 얼마나 명심하여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믿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며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13년 동안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정도를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꿈을 이뤄 주셨습니다. 불과 30살에 강대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왕 다음가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려면
첫째, 성경 66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 뜻을 알고 순종하되, 먼저 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배우는 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곧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므로 순종하여 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죄를 회개하고 통회자복을 하라”는 것은 회개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하나님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법칙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우리가 땀 흘려야 소산을 먹는다는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기도의 방법을 알려 주지요(눅 22:44).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구할 바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구할 바를 구하되 정성과 믿음을 내보여야 하지요.
둘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주의 종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개척 때 어떤 분이 암에 걸려 들것에 누운 채로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앉아서 예배드리세요.” 하시자 가족이 등 뒤를 받쳐서 비스듬히 앉아 예배를 드렸지요. 그분이 일어나 앉기조차 힘든 것을 알고 있지만, 성령의 주관을 받아 명하시는 당회장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결국 치료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믿음으로는 할 수 없지만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관이 오면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은 예배가 끝나고 기도를 하라’는 주관을 받으면 그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순종하면 회개의 영이 임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헐리거나 방언의 은사를 받는 등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동안 응답의 축복이 오는 경우도 있지요.
누구든지 공의의 법칙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순종으로 믿음의 행함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순종만 하면 하나님 역사가 창대하게 펼쳐집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오직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수님께서 철저한 ( )으로 공의의 법칙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대로 살면 더 이상 ( )의 종으로 사망을 향해 가지 않고 ( )의 종이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
2.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순종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121~137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순종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 유형 : 징계가 두려워 명령에 억지로 순종한다.
두 번째 유형 : 자기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만 순종한다.
세 번째 유형 : 무조건 순종한다.
자신이 할 수 있나 없나, 자기 생각에 맞나 틀리나를 따지지 않는다.
네 번째 유형 : 명령하시는 의도를 마음으로 깨달아 기꺼이 순종한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온전히 순종한다.
2019-07-19
제29과공의
시편 37:6
읽을말씀 : 시편 37:6 | 외울말씀 : 시편 37:6 ㅣ 참고 말씀: 갈라디아서 6:7
교육목표 :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법칙을 깨달아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응답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정확히 알고 행할 때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공의
‘공의’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법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원인에는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뿌린 대로 거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는 말이 있는데 진리 안에서는 공의의 법칙들이 더욱 확실하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공의의 법칙도 있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든가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는다’ 등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므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만 깨닫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찾아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공의를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주관자인데도 스스로 공의의 법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든 법칙이니까 나는 안 지켜도 괜찮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공의에 맞게 정확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공의의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 사단을 다 멸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 경작을 계획하면서 공의의 법칙을 정해 놓으셨고,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희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단지 “주여, 믿습니다.” 하며 대충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공의의 법칙에 따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3. 공의의 양면성
사람들은 흔히 공의는 무섭고 두려우며 징계와 형벌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가 있기 때문에 죄와 악에는 무섭고 두려운 형벌이 따르지만 반면 공의는 응답과 축복을 가져다 주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공의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지만, 빛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열쇠와 같습니다. 칼을 강도가 들었을 때에는 흉기가 되지만, 어머니가 들었을 때에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도구인 것과 같습니다.
공의의 양면성을 알면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됨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사랑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빗나가서 잘못했을 때 무조건 체벌한다거나 아니면 무조건 용서만 해 준다면 자녀를 잘못되게 만듭니다. 공의에 따라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엄하게 해야 할 때도 있고, 용서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때도 있지요.
마태복음 18장 22절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무한대 용서의 사랑을 말씀하지요. 히브리서 12장 6절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시며 참사랑에는 징계가 따른다는 공의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이는 사랑 안에서 공의가 온전케 되며 공의를 궁구하면 할수록 그 안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4. 수준이 다른 공의 차원
공의는 각각의 하늘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넷째 하늘의 차원으로 올라갈수록 공의의 차원도 더 깊고 넓어지지요. 또한 공의의 차원에 차이가 나는 것은 사랑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랑과 공의는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사랑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공의의 차원도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원리가 적용되었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시며, 용서와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얼마나 사랑을 이루었느냐에 따라 똑같은 공의라도 적용되는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의 수준이 매우 낮은 차원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지극히 높은 차원의 공의를 적용시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지요.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그들의 수준에 맞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낮은 차원의 공의의 법칙을 적용하며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주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의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차원을 보았기 때문에 용서와 긍휼이 적용되는 공의의 차원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는 얼마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영으로 일구느냐에 따라 저마다 느끼는 차원 역시 다릅니다.
5. 공의의 기본 법칙은 믿음과 순종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선과 겸비함 등 많은 응답의 법칙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법칙은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 응답받는 것이 바로 공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이러한 공의의 법칙대로 행했지요.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위해 지배국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신분을 벗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겸비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인의 병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오는 선한 마음도 있었지요. 무엇보다 그가 응답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만 나가면 어떤 병도 깨끗이 치료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대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려면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서운케 하거나, 하나님 앞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하지 못한 것 등을 회개해야 하지요. 또한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며, 혈기, 짜증, 감정, 시기, 질투, 다툼, 거짓 등 온갖 악을 품고 행한 것을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기도받을 때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대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각종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심는 등 응답받기 위해 순종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순종이 나오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즉 교만, 자존심, 틀, 생각, 이론, 세상의 자랑, 세상에 의지하려는 마음 등을 다 버려야 하지요. 이러한 하나님 공의의 법칙을 하나하나 깨달아 행함으로써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 응답과 풍성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과 그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 )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된다. ( )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 )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9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늘들’
첫째 하늘 - 우리가 살고 있는 육의 공간이다.
둘째 하늘 - 빛의 영역인 에덴과 어둠의 영역이 있는 곳이다.
셋째 하늘 -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이 있는 곳이다.
넷째 하늘 - 근본 하나님의 공간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 곳이다.
교육목표 :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법칙을 깨달아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응답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정확히 알고 행할 때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고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공의
‘공의’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법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원인에는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뿌린 대로 거둔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는 말이 있는데 진리 안에서는 공의의 법칙들이 더욱 확실하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공의의 법칙도 있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라든가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얻는다’ 등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므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만 깨닫는다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신속히 그 원인을 찾아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공의를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주관자인데도 스스로 공의의 법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든 법칙이니까 나는 안 지켜도 괜찮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오차도 없이 모든 것을 공의에 맞게 정확하게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도 공의의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 사단을 다 멸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인간 경작을 계획하면서 공의의 법칙을 정해 놓으셨고, 스스로도 어그러짐 없이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희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가는 것도 단지 “주여, 믿습니다.” 하며 대충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공의의 법칙에 따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온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3. 공의의 양면성
사람들은 흔히 공의는 무섭고 두려우며 징계와 형벌이 따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가 있기 때문에 죄와 악에는 무섭고 두려운 형벌이 따르지만 반면 공의는 응답과 축복을 가져다 주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공의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것이지만, 빛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열쇠와 같습니다. 칼을 강도가 들었을 때에는 흉기가 되지만, 어머니가 들었을 때에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도구인 것과 같습니다.
공의의 양면성을 알면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사랑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됨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사랑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빗나가서 잘못했을 때 무조건 체벌한다거나 아니면 무조건 용서만 해 준다면 자녀를 잘못되게 만듭니다. 공의에 따라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엄하게 해야 할 때도 있고, 용서와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때도 있지요.
마태복음 18장 22절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무한대 용서의 사랑을 말씀하지요. 히브리서 12장 6절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시며 참사랑에는 징계가 따른다는 공의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이는 사랑 안에서 공의가 온전케 되며 공의를 궁구하면 할수록 그 안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음을 깨우치게 됩니다.
4. 수준이 다른 공의 차원
공의는 각각의 하늘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넷째 하늘의 차원으로 올라갈수록 공의의 차원도 더 깊고 넓어지지요. 또한 공의의 차원에 차이가 나는 것은 사랑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랑과 공의는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사랑의 차원이 깊어질수록 공의의 차원도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원리가 적용되었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시며, 용서와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얼마나 사랑을 이루었느냐에 따라 똑같은 공의라도 적용되는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랑의 수준이 매우 낮은 차원이었습니다. 만일 이들에게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지극히 높은 차원의 공의를 적용시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지요.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그들의 수준에 맞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낮은 차원의 공의의 법칙을 적용하며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주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의의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원수도 사랑하는 사랑의 차원을 보았기 때문에 용서와 긍휼이 적용되는 공의의 차원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는 얼마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영으로 일구느냐에 따라 저마다 느끼는 차원 역시 다릅니다.
5. 공의의 기본 법칙은 믿음과 순종
우리가 응답받기 위해서는 선과 겸비함 등 많은 응답의 법칙이 있지만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법칙은 바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 응답받는 것이 바로 공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이러한 공의의 법칙대로 행했지요. 백부장은 하인의 병을 위해 지배국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신분을 벗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겸비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인의 병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오는 선한 마음도 있었지요. 무엇보다 그가 응답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만 나가면 어떤 병도 깨끗이 치료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그대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였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소유하려면 먼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서운케 하거나, 하나님 앞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하지 못한 것 등을 회개해야 하지요. 또한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며, 혈기, 짜증, 감정, 시기, 질투, 다툼, 거짓 등 온갖 악을 품고 행한 것을 회개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기도받을 때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대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응답받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각종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심는 등 응답받기 위해 순종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순종이 나오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즉 교만, 자존심, 틀, 생각, 이론, 세상의 자랑, 세상에 의지하려는 마음 등을 다 버려야 하지요. 이러한 하나님 공의의 법칙을 하나하나 깨달아 행함으로써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 응답과 풍성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과 그에 따라 정확하게 집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는 사랑이 있음으로 완성되고 하나님의 ( ) 역시 공의가 있음으로 완성된다. ( )가 없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며, ( )이 없는 공의 역시 참된 공의라 할 수 없다.
* 금주 과제
근본의 소리를 발하라 책자 99~116 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쳐오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하늘들’
첫째 하늘 - 우리가 살고 있는 육의 공간이다.
둘째 하늘 - 빛의 영역인 에덴과 어둠의 영역이 있는 곳이다.
셋째 하늘 -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이 있는 곳이다.
넷째 하늘 - 근본 하나님의 공간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 곳이다.
2019-07-12
제28과삼위일체 하나님
마태복음 28:19
읽을말씀 : 마태복음 28:1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28:19 ㅣ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13:13
교육목표 :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역할을 바로 알아 참된 믿음을 갖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지만 동시에 세 분의 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격인 성부 하나님, 아들의 격인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의 격인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근본은 하나이기에 ‘성 삼위일체’라 표현하지요.
이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에 대한 비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제한적인 사고와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놀라운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낳거나 지은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스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지각과 상상을 초월해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광대한 공간 안에 홀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셨습니다(요 1:1, 요일 1:5).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고,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가장 먼저 공간을 나누셨습니다. 영의 공간과 육의 몸을 입은 사람들이 살아갈 육의 공간을 나누신 것이지요. 그 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됩니다.
성경에는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행 13:33, 히 5:5), 성령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요 15:26, 갈 4:6). 마치 분신을 만들어 내듯이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을 낳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경작을 위한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근본 하나이지만 인간 경작을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역할은 다르지만 마음도, 생각도, 능력도 하나이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질서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느끼고 원하시는 것을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도 동일하게 느끼고 원하시지요. 역으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의 기쁨이나 고통을 성부 하나님께서도 그대로 느끼십니다. 그런데도 역할에 따라 성품이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으셨지만 성자 예수님은 신성적인 면이 더 강해 신(神)적 위엄과 공의가 두드러집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인성(人性)적인 면이 더 강하므로 자상하고 섬세하며 자비와 긍휼의 측면을 더 많이 갖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지만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성품이 구별될 뿐 아니라 뚜렷한 질서 가운데 각각의 역할이 다릅니다. 성부 하나님 다음이 성자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은 그 다음이 되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사랑으로 섬기십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한 사역 또한 함께 이루어 가십니다. 각각의 역할을 정확히 감당하심으로 인간의 창조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작의 섭리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과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담당하시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1) 구원의 길을 여시는 성자 예수님
성자 예수님의 역할은 구세주로서, 죄인 된 인류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이유는 영계의 법칙에 의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려면 첫째로,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며 셋째로,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하고 넷째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십자가의 도 책자 참조).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결합돼 난 것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으셨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으셨지요. 이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로 죄를 용서받게 됐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셨다면 불순종한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는 다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인간 경작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으실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 성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2)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님
인간 경작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 얻은 구원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그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의 특징은 영을 무수히 분리해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본체는 한 곳에 계실지라도 본체와 똑같은 마음과 능력을 가진 영이 무수히 분리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사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도 그 영을 분리하시지만 특별히 성령님이 사역을 하시는 데는 영으로 분리하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이처럼 분리되신 성령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구원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이끄는 개인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또한 부지런히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할 때는 애통하시며 회개해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롬 8:26). 이와 함께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과 각종 은사들을 주셔서 능히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도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3)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신 성부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라는 거대한 계획의 총감독자가 되시며, 창조주요 만물의 주관자이며 마지막 때의 심판자 역할을 하십니다.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성취해 나가는 데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은 질서 가운데 정확히 나뉘어져 있지만, 결국 세 분이 동시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8절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물은 영적으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며, 피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과 물과 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 되어 사역해 믿는 자녀들에게 구원받은 증거를 주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축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역할을 바로 알아 참된 믿음을 갖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지만 동시에 세 분의 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격인 성부 하나님, 아들의 격인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의 격인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근본은 하나이기에 ‘성 삼위일체’라 표현하지요.
이는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교리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에 대한 비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제한적인 사고와 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아는 만큼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아 놀라운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낳거나 지은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스로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지각과 상상을 초월해 시작도, 끝도 없으며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것이지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광대한 공간 안에 홀로 소리를 머금은 빛으로 계셨습니다(요 1:1, 요일 1:5).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고,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해 가장 먼저 공간을 나누셨습니다. 영의 공간과 육의 몸을 입은 사람들이 살아갈 육의 공간을 나누신 것이지요. 그 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됩니다.
성경에는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셨으며(행 13:33, 히 5:5), 성령님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요 15:26, 갈 4:6). 마치 분신을 만들어 내듯이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을 낳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경작을 위한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근본 하나이지만 인간 경작을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역할은 다르지만 마음도, 생각도, 능력도 하나이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과 질서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느끼고 원하시는 것을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도 동일하게 느끼고 원하시지요. 역으로,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의 기쁨이나 고통을 성부 하나님께서도 그대로 느끼십니다. 그런데도 역할에 따라 성품이 구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으셨지만 성자 예수님은 신성적인 면이 더 강해 신(神)적 위엄과 공의가 두드러집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인성(人性)적인 면이 더 강하므로 자상하고 섬세하며 자비와 긍휼의 측면을 더 많이 갖고 계십니다.
이처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지만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성품이 구별될 뿐 아니라 뚜렷한 질서 가운데 각각의 역할이 다릅니다. 성부 하나님 다음이 성자 예수님이시며, 성령님은 그 다음이 되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사랑으로 섬기십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위한 사역 또한 함께 이루어 가십니다. 각각의 역할을 정확히 감당하심으로 인간의 창조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작의 섭리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입니다. 과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담당하시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1) 구원의 길을 여시는 성자 예수님
성자 예수님의 역할은 구세주로서, 죄인 된 인류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시는 이유는 영계의 법칙에 의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구세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려면 첫째로,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며 셋째로,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하고 넷째로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십자가의 도 책자 참조).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 안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가 결합돼 난 것이 아니므로 원죄가 없으셨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셨기에 자범죄도 없으셨지요. 이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로 죄를 용서받게 됐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으셨다면 불순종한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는 다 지옥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인간 경작의 목적이 달성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으실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실 수 있는 성자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 없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게 하신 것입니다.
2)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님
인간 경작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성자 예수님을 통해 얻은 구원을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그 삶을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의 특징은 영을 무수히 분리해 일하신다는 점입니다. 본체는 한 곳에 계실지라도 본체와 똑같은 마음과 능력을 가진 영이 무수히 분리됨으로써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사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도 그 영을 분리하시지만 특별히 성령님이 사역을 하시는 데는 영으로 분리하시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이처럼 분리되신 성령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성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구원받을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이끄는 개인교사와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또한 부지런히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할 때는 애통하시며 회개해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롬 8:26). 이와 함께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과 각종 은사들을 주셔서 능히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도 성령님의 역할입니다.
3)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신 성부 하나님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이라는 거대한 계획의 총감독자가 되시며, 창조주요 만물의 주관자이며 마지막 때의 심판자 역할을 하십니다.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성취해 나가는 데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은 질서 가운데 정확히 나뉘어져 있지만, 결국 세 분이 동시에 이루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8절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물은 영적으로 말씀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며, 피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주님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과 물과 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 되어 사역해 믿는 자녀들에게 구원받은 증거를 주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축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속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받으며 온전한 구원에 이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