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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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제4과사랑은 오래 참는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5:39~40
교육목표 :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고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참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참사랑은 우리 편에서 가지려고 애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에서 악을 버려 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통해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를 보면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데 필요한 15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에 담긴 영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누군가 시기 질투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사랑스럽기는커녕 피하고 싶고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들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할지라도 마음을 다스려 참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에 비하면 작은 범주의 사랑에 속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음인 반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개인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2. 오래 참는 사랑의 위력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시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 천대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생들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다 원수 마귀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남이 자기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송사를 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선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3.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어떤 사람은 미움, 혈기,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다가 자기 한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화병까지 얻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즉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이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애당초 원수 맺을 일이 없지요.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상대가 싫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밉지가 않지요.
반면,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비진리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보아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단점이 보이고 싫은 마음이 앞섭니다. 또 자기가 거짓말을 잘하면 상대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얼마나 오래 참아 주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지요. ‘7’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즉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지요.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노력해야 하지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갑니다.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지요.
그렇다면 천국에도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으며, 당연히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사랑은 오래 참고”에 대한 말씀의 의미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이다.
②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이다.
③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미움, 서운함 등을 발동케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④ 천국에 가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마음의 악을 버리기 위해)
둘째,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셋째,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기까지)
교육목표 :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고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참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참사랑은 우리 편에서 가지려고 애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에서 악을 버려 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통해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를 보면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데 필요한 15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에 담긴 영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누군가 시기 질투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사랑스럽기는커녕 피하고 싶고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들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할지라도 마음을 다스려 참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에 비하면 작은 범주의 사랑에 속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음인 반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개인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2. 오래 참는 사랑의 위력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시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 천대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생들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다 원수 마귀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남이 자기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송사를 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선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3.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어떤 사람은 미움, 혈기,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다가 자기 한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화병까지 얻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즉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이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애당초 원수 맺을 일이 없지요.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상대가 싫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밉지가 않지요.
반면,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비진리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보아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단점이 보이고 싫은 마음이 앞섭니다. 또 자기가 거짓말을 잘하면 상대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얼마나 오래 참아 주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지요. ‘7’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즉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지요.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노력해야 하지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갑니다.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지요.
그렇다면 천국에도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으며, 당연히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사랑은 오래 참고”에 대한 말씀의 의미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이다.
②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이다.
③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미움, 서운함 등을 발동케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④ 천국에 가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마음의 악을 버리기 위해)
둘째,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셋째,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기까지)
2021-01-15
제3과영적인 사랑의 중요성
고린도전서 13:1~3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1~3 | 외울말씀 : 골로새서 3:23 |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2:6~8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의 중요성과, 어떻게 하면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본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만일 율법대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이 없다 할 것이고,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한다고 정죄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바닥에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을 하나하나 써 내려가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목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났고 여인만 남았지요.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을 지닌 분이십니다.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다워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상대를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대를 무조건 말씀으로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다 해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내 의와 틀 속에 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됩니다.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장차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 등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될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것도, 죄를 버리고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요.
이처럼 체험이 있을 때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24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셨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을 고르시오.
① 고린도전서 13:1~3
② 골로새서 3:23~24
③ 사도행전 13:3
④ 누가복음 17:10
2.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3. 믿음과 사랑은 비례할까요? 다르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계시’와 ‘예언’의 차이는?
계시 -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에게 성령의 감동함 속에 환상이나 음성 등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시는 것, 또는 사람으로서는 풀 수 없는 영의 일들을 풀이해 주시는 것.
예언 -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고하는 일, 또는 그런 말(벧후 1:21).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의 중요성과, 어떻게 하면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본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만일 율법대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이 없다 할 것이고,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한다고 정죄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바닥에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을 하나하나 써 내려가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목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났고 여인만 남았지요.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을 지닌 분이십니다.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다워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상대를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대를 무조건 말씀으로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다 해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내 의와 틀 속에 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됩니다.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장차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 등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될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것도, 죄를 버리고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요.
이처럼 체험이 있을 때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24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셨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을 고르시오.
① 고린도전서 13:1~3
② 골로새서 3:23~24
③ 사도행전 13:3
④ 누가복음 17:10
2.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3. 믿음과 사랑은 비례할까요? 다르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계시’와 ‘예언’의 차이는?
계시 -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에게 성령의 감동함 속에 환상이나 음성 등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시는 것, 또는 사람으로서는 풀 수 없는 영의 일들을 풀이해 주시는 것.
예언 -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고하는 일, 또는 그런 말(벧후 1:21).
2021-01-08
제2과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
고린도전서 13:4~7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7 | 외울말씀 : 고린도전서 13:13 | 참고 말씀: 사무엘상 18:1~4
교육목표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왜 그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이란?
사전을 보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은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그는 사울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당회장님은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 다해 달려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풉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대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는 데도 인색합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고 점점 부모님한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부모에게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 간에 사랑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라면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난다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형제간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서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이에 불순종할 경우 사단의 역사가 따르고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영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요?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이다.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교육목표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왜 그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이란?
사전을 보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은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그는 사울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당회장님은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 다해 달려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풉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대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는 데도 인색합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고 점점 부모님한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부모에게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 간에 사랑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라면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난다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형제간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서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이에 불순종할 경우 사단의 역사가 따르고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영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요?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이다.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2021-01-01
제1과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누가복음 5:36~39
읽을말씀 : 누가복음 5:36~39 | 외울말씀 : 에베소서 4:24 |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5:17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을 모른 채 단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물론,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영적 의미
누가복음 5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낡고 오래된 가죽은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맺은 모든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 곧 포도나무의 열매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으로,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기 전, 율법에 매인 삶의 방식이지요.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본체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2.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차이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사함 받으려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행위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구약의 묵은 포도주와 신약의 새 포도주의 차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냐고 반문하지요. 이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남녀가 변함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율법에 이혼을 규정하신 것은 인간의 변질되고 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음행한 사실을 남편이 알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괴로운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함께 삶으로 인해 더 불행해져서는 안 되겠기에 모세의 율법에는 이혼해도 가하다고 규정해 놓았지요.
따라서 묵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근본 뜻인 사랑보다는 율법적인 틀에 매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면 새 포도주를 마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3.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5장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묵을수록 비싸고 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인정받지요. 세상에서 묵은 포도주를 귀히 여기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새 법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다른 규칙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에다 부수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지켰지요. 즉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 불도 피워서도 안 되고, 몇 킬로미터 이상은 여행하면 안 되며,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도 안 된다는 등 여러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뒤로하고 자신들이 안식일에 대해 만든 규정들을 지키며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새 법이 옛 율법의 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에 길든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자기적인 율법의 틀에 얽매인 이들은 예수님의 새 교훈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마 23:23). 아무리 구약의 율법을 좇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기도와 금식을 드린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드러나는 행위만 옳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4.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만들려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세상 것을 취하고 남을 판단 정죄하며 미워하는 등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마음은 낡은 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욕심, 잘못된 지식과 틀 등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지요. 그럴 때라야 우리 마음이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묵은 포도주를 고집하지요. 하나님 뜻이 아닌 육신의 생각 속에 틀을 만들고 사랑보다는 율법에 매여 판단 정죄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죄악을 신속히 벗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진리와 선으로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말씀과 기도로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 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새 포도주 ● ● 의와 진리로 새롭게 변화된 마음
묵은 포도주 ● ●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는 마음
새 부대 ● ● 구약의 율법적인 생활방식
낡은 부대 ● ● 주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신약’
2. 우리의 마음을 새 가죽 부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여기서 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며, 포도주는 죄인을 구원한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곧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실 것을 나타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를 것을 뜻한다.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을 모른 채 단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물론,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영적 의미
누가복음 5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낡고 오래된 가죽은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맺은 모든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 곧 포도나무의 열매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으로,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기 전, 율법에 매인 삶의 방식이지요.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본체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2.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차이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사함 받으려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행위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구약의 묵은 포도주와 신약의 새 포도주의 차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냐고 반문하지요. 이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남녀가 변함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율법에 이혼을 규정하신 것은 인간의 변질되고 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음행한 사실을 남편이 알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괴로운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함께 삶으로 인해 더 불행해져서는 안 되겠기에 모세의 율법에는 이혼해도 가하다고 규정해 놓았지요.
따라서 묵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근본 뜻인 사랑보다는 율법적인 틀에 매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면 새 포도주를 마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3.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5장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묵을수록 비싸고 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인정받지요. 세상에서 묵은 포도주를 귀히 여기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새 법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다른 규칙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에다 부수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지켰지요. 즉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 불도 피워서도 안 되고, 몇 킬로미터 이상은 여행하면 안 되며,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도 안 된다는 등 여러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뒤로하고 자신들이 안식일에 대해 만든 규정들을 지키며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새 법이 옛 율법의 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에 길든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자기적인 율법의 틀에 얽매인 이들은 예수님의 새 교훈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마 23:23). 아무리 구약의 율법을 좇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기도와 금식을 드린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드러나는 행위만 옳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4.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만들려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세상 것을 취하고 남을 판단 정죄하며 미워하는 등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마음은 낡은 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욕심, 잘못된 지식과 틀 등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지요. 그럴 때라야 우리 마음이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묵은 포도주를 고집하지요. 하나님 뜻이 아닌 육신의 생각 속에 틀을 만들고 사랑보다는 율법에 매여 판단 정죄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죄악을 신속히 벗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진리와 선으로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말씀과 기도로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 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새 포도주 ● ● 의와 진리로 새롭게 변화된 마음
묵은 포도주 ● ●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는 마음
새 부대 ● ● 구약의 율법적인 생활방식
낡은 부대 ● ● 주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신약’
2. 우리의 마음을 새 가죽 부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여기서 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며, 포도주는 죄인을 구원한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곧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실 것을 나타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를 것을 뜻한다.
2020-12-25
제52과주님은 누구의 구주이신가
마태복음 2:1~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2:1~12 | 외울말씀 : 누가복음 2:1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1:21
교육목표 :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세 가지 예물인 황금, 유향, 몰약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알아본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지금부터 약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지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정욕대로 살아가는 짐승과 다름없게 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지요(전 3:18).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죄를 범한 아담의 후손은 점점 죄로 물들어 갔고 결국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람의 본분을 벗어나서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고, 이들의 참된 양식이 되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던 것입니다(눅 2:7).
또한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은 인류의 가난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요한 자로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가난한 길을 가신 것입니다(고후 8:9).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선민은 아니었지만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며 선한 양심을 좇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께 찾아가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 2:11).
육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궁도, 호화로운 저택도 아니고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보면 그곳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하늘의 선지자들과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육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고 느꼈기에 영의 행함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광 돌렸지요. 안나 선지자는 과부 된 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육신의 생각 속에서 구세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영으로 깨어 있어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줍니다.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이들은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지 못했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에 담긴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이 세 가지 예물에는 어떠한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1) 마음을 의미하는 황금
황금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합니다. 또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6:21).
따라서 황금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곧 마음을 드린다는 의미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요. 이처럼 우리가 가진 전부를 드리는 일, 할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황금을 예물로 드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 황금을 드린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황금보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장차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미하는 유향
유향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하지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착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모습이 바로 주님 앞에 유향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행함은 물론 중심을 감찰하시며 무엇보다 마음의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따라서 유향을 예물로 드림과 같이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중심이요,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중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아 범사가 형통하며 영육 간에 강건한 축복도 받습니다(요삼 1:2).
3)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하는 몰약
몰약은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부패를 막아 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는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변함없이 생명까지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번 주님을 만나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면 은혜받은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변함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함없는 마음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 변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나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되 마음의 할례를 통해 그 속의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진리로 채워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면 이것이 곧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몰약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값진 선물을 받은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 우리의 마음인 황금과, 그리스도의 향기인 유향과, 변함없는 믿음인 몰약을 선물로 드림으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하며 영적으로는 우리의 ( )을 의미한다.
2. ( )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영적으로는 ( )를 상징한다.
3. ( )은 부패를 막아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며, ( )을 의미한다.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베들레헴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곳으로 다윗왕의 출생지이기도 하다(삼상 16:1, 눅 2:4).
미가 5장 2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되어 있다.
교육목표 :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세 가지 예물인 황금, 유향, 몰약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알아본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지금부터 약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지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정욕대로 살아가는 짐승과 다름없게 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지요(전 3:18).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죄를 범한 아담의 후손은 점점 죄로 물들어 갔고 결국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람의 본분을 벗어나서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고, 이들의 참된 양식이 되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던 것입니다(눅 2:7).
또한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은 인류의 가난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요한 자로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가난한 길을 가신 것입니다(고후 8:9).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선민은 아니었지만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며 선한 양심을 좇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께 찾아가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 2:11).
육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궁도, 호화로운 저택도 아니고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보면 그곳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하늘의 선지자들과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육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고 느꼈기에 영의 행함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광 돌렸지요. 안나 선지자는 과부 된 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육신의 생각 속에서 구세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영으로 깨어 있어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줍니다.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이들은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지 못했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에 담긴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이 세 가지 예물에는 어떠한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1) 마음을 의미하는 황금
황금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합니다. 또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6:21).
따라서 황금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곧 마음을 드린다는 의미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요. 이처럼 우리가 가진 전부를 드리는 일, 할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황금을 예물로 드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 황금을 드린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황금보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장차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미하는 유향
유향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하지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착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모습이 바로 주님 앞에 유향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행함은 물론 중심을 감찰하시며 무엇보다 마음의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따라서 유향을 예물로 드림과 같이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중심이요,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중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아 범사가 형통하며 영육 간에 강건한 축복도 받습니다(요삼 1:2).
3)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하는 몰약
몰약은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부패를 막아 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는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변함없이 생명까지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번 주님을 만나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면 은혜받은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변함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함없는 마음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 변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나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되 마음의 할례를 통해 그 속의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진리로 채워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면 이것이 곧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몰약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값진 선물을 받은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 우리의 마음인 황금과, 그리스도의 향기인 유향과, 변함없는 믿음인 몰약을 선물로 드림으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하며 영적으로는 우리의 ( )을 의미한다.
2. ( )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영적으로는 ( )를 상징한다.
3. ( )은 부패를 막아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며, ( )을 의미한다.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베들레헴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곳으로 다윗왕의 출생지이기도 하다(삼상 16:1, 눅 2:4).
미가 5장 2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되어 있다.
2020-12-18
제51과준비된 자
디모데후서 2:20~21
읽을말씀 : 디모데후서 2:20~21 | 외울말씀 : 디모데후서 2:21 | 참고 말씀: 에베소서 6:12, 고린도전서 4:20
교육목표 : 말씀과 기도로 그릇을 잘 준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했습니다. 이처럼 그릇의 종류도 많고 크기도 다양한 데 주인은 어떤 것을 골라 쓰겠습니까?
일단 용도에 맞아야 하고 주인의 손에 잘 맞는 그릇이면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인의 손에 맞고 용도에 맞아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영적으로도 동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준비된 그릇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준비된 그릇이란?
영적으로 용도에 맞는 그릇이 된다는 것은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합당한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종이면 주의 종, 교사면 교사, 찬양 사역자면 찬양 사역자의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기술직이라면, 더 나은 기술들을 쌓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명이든지 가장 기본적으로는 영적인 자질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곧 말씀을 무장하고 기도를 쌓아야 하지요.
다음으로, 주인의 손에 맞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달란트가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으로 가는 것인데 자기 뜻대로 서쪽으로 간다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깨끗한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란,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기왕이면 많이 담아지는 큰 그릇이 좋고, 귀한 금그릇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하고 큰 그릇이라도 씻지 않아 더럽다면 쓸 수가 없습니다. 성결되어 깨끗한 그릇이 되는 만큼 사명 감당할 능력도 더 받을 수 있고, 순종도 더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였고,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ㅇㅣ루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마귀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힘과 능력은 죄를 버리고 성결된 만큼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성결되어 영적인 힘이 있는 일꾼들을 항상 찾으십니다.
2. 성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더딘 이유
성결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이뤄야 할 본분입니다. 특히 직분을 맡은 일꾼이라면 성결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나름대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노력한다 했는데 더디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성결되고 싶을 뿐, 낱낱이 자신을 해부하여 죄를 버리는 작업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결되게 해 주세요, 죄 버리게 해 주세요, 선한 마음을 주세요.” 하면서 막연하게 기도한다면 변화가 늦습니다. 어떤 죄가 있고 어떤 악한 마음이 있는지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입술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육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싫게 여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비슷한 상황이 와도 절대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늘 근신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하나 버려 나가면 한 달, 두 달 지날수록 모습이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는 구체적으로 발견한 것에서 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견해서 버리기로 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데, 버리는 작업을 어느 정도 하다가 맙니다.
어떤 계기로 모르고 있던 자신의 비진리를 발견한 것도 큰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 왜 그런 비진리가 자기 안에 심어졌는지 성령께서 과거를 떠올려 주시며 깨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깨우침이 올 때나 또 그것을 회개할 때는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마치 그 순간에 다 버리고 변화된 것 같지요.
그러나 한 번 회개했다고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잡초를 제거할 때 뿌리를 남겨두면 금방 다시 자랍니다. 죄성도 발견하여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근본의 죄성까지 뽑아야 하지요. 다 뽑아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자신을 점검하며 기도해 나가야 합니다. 발견되는 것이 너무 많다면 그중에 큰 뿌리부터 먼저 뽑아야 합니다. 큰 뿌리가 뽑힐 때 많은 잔뿌리도 함께 뽑혀나가지요. 자기 안에 가장 크고 버리기 어려운 것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쉽게 버려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점차 신앙이 정체되기 쉽습니다. 늘 준비하려고만 할 뿐, 막상 준비된 자로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자신에게 어떤 비진리가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진리의 마음을 진리로 포장하여 스스로도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와 틀을 깨지 못하므로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잘못한 것은 덮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일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화평을 깨는 일이 생겼지요. 내 고집과 자기주장이 상대에게 부딪힐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럴 때도 자기 틀과 의가 있으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랬으니까,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니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화평을 깨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면, 자기가 더 옳다고 해도 상대의 마음에 맞춰 줍니다. 때론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해도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요. 더구나 윗사람이 지시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으라는 명령이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비진리가 아니고 죄가 아니라면” 먼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옳기 때문에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화평을 깨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내가 너무나 이것이 하고 싶기 때문에 윗사람이 “그러지 말라” 해도 여전히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화평을 떠나서 기본적인 질서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변명만 합니다.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 화평하고 싶지만 상대에게 맞춰 줄 수는 없다” 합니다.
이는 진실한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머리로는 화평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 위해서는 화평을 깨도 할 수 없다”라는 마음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혀로만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나는 화평하려고 했다”고 스스로를 좋게만 생각하므로 신속하게 성결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성결된 사람을 찾고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발견된 모든 비진리의 뿌리까지 뽑아냄으로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준비된 그릇이란 어떤 그릇을 의미할까요?
1. ( )에 맞는 그릇이다. 이는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 )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2. 주인의 손에 맞는 그릇 곧 ( )하는 그릇이다.
3.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 )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의 향 올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그릇의 크기와 재질
그릇의 재질은 사람의 중심과 연관되며, 그릇의 크기는 진리에 속한 것을 얼마나 많이 담을 수 있는지와 상관이 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얼마나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그릇은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변화될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릇의 재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일구는 것이 더 수월하므로 믿음의 성장이 빠르다.
그러나 타고난 그릇이 작거나 재질이 좋지 않다 해도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성결을 이루어 곧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인에게 쓰임 받을 수 있고, 또 마음 씀을 넓히고 그릇을 키워 더 큰 일들을 감당해 갈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로 채우는 만큼 그릇의 재질도 바뀔 수 있다.
교육목표 : 말씀과 기도로 그릇을 잘 준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했습니다. 이처럼 그릇의 종류도 많고 크기도 다양한 데 주인은 어떤 것을 골라 쓰겠습니까?
일단 용도에 맞아야 하고 주인의 손에 잘 맞는 그릇이면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인의 손에 맞고 용도에 맞아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영적으로도 동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준비된 그릇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준비된 그릇이란?
영적으로 용도에 맞는 그릇이 된다는 것은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합당한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종이면 주의 종, 교사면 교사, 찬양 사역자면 찬양 사역자의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기술직이라면, 더 나은 기술들을 쌓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명이든지 가장 기본적으로는 영적인 자질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곧 말씀을 무장하고 기도를 쌓아야 하지요.
다음으로, 주인의 손에 맞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달란트가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으로 가는 것인데 자기 뜻대로 서쪽으로 간다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깨끗한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란,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기왕이면 많이 담아지는 큰 그릇이 좋고, 귀한 금그릇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하고 큰 그릇이라도 씻지 않아 더럽다면 쓸 수가 없습니다. 성결되어 깨끗한 그릇이 되는 만큼 사명 감당할 능력도 더 받을 수 있고, 순종도 더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였고,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ㅇㅣ루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마귀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힘과 능력은 죄를 버리고 성결된 만큼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성결되어 영적인 힘이 있는 일꾼들을 항상 찾으십니다.
2. 성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더딘 이유
성결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이뤄야 할 본분입니다. 특히 직분을 맡은 일꾼이라면 성결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나름대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노력한다 했는데 더디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성결되고 싶을 뿐, 낱낱이 자신을 해부하여 죄를 버리는 작업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결되게 해 주세요, 죄 버리게 해 주세요, 선한 마음을 주세요.” 하면서 막연하게 기도한다면 변화가 늦습니다. 어떤 죄가 있고 어떤 악한 마음이 있는지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입술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육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싫게 여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비슷한 상황이 와도 절대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늘 근신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하나 버려 나가면 한 달, 두 달 지날수록 모습이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는 구체적으로 발견한 것에서 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견해서 버리기로 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데, 버리는 작업을 어느 정도 하다가 맙니다.
어떤 계기로 모르고 있던 자신의 비진리를 발견한 것도 큰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 왜 그런 비진리가 자기 안에 심어졌는지 성령께서 과거를 떠올려 주시며 깨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깨우침이 올 때나 또 그것을 회개할 때는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마치 그 순간에 다 버리고 변화된 것 같지요.
그러나 한 번 회개했다고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잡초를 제거할 때 뿌리를 남겨두면 금방 다시 자랍니다. 죄성도 발견하여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근본의 죄성까지 뽑아야 하지요. 다 뽑아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자신을 점검하며 기도해 나가야 합니다. 발견되는 것이 너무 많다면 그중에 큰 뿌리부터 먼저 뽑아야 합니다. 큰 뿌리가 뽑힐 때 많은 잔뿌리도 함께 뽑혀나가지요. 자기 안에 가장 크고 버리기 어려운 것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쉽게 버려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점차 신앙이 정체되기 쉽습니다. 늘 준비하려고만 할 뿐, 막상 준비된 자로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자신에게 어떤 비진리가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진리의 마음을 진리로 포장하여 스스로도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와 틀을 깨지 못하므로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잘못한 것은 덮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일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화평을 깨는 일이 생겼지요. 내 고집과 자기주장이 상대에게 부딪힐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럴 때도 자기 틀과 의가 있으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랬으니까,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니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화평을 깨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면, 자기가 더 옳다고 해도 상대의 마음에 맞춰 줍니다. 때론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해도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요. 더구나 윗사람이 지시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으라는 명령이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비진리가 아니고 죄가 아니라면” 먼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옳기 때문에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화평을 깨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내가 너무나 이것이 하고 싶기 때문에 윗사람이 “그러지 말라” 해도 여전히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화평을 떠나서 기본적인 질서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변명만 합니다.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 화평하고 싶지만 상대에게 맞춰 줄 수는 없다” 합니다.
이는 진실한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머리로는 화평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 위해서는 화평을 깨도 할 수 없다”라는 마음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혀로만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나는 화평하려고 했다”고 스스로를 좋게만 생각하므로 신속하게 성결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성결된 사람을 찾고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발견된 모든 비진리의 뿌리까지 뽑아냄으로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준비된 그릇이란 어떤 그릇을 의미할까요?
1. ( )에 맞는 그릇이다. 이는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 )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2. 주인의 손에 맞는 그릇 곧 ( )하는 그릇이다.
3.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 )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의 향 올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그릇의 크기와 재질
그릇의 재질은 사람의 중심과 연관되며, 그릇의 크기는 진리에 속한 것을 얼마나 많이 담을 수 있는지와 상관이 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얼마나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그릇은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변화될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릇의 재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일구는 것이 더 수월하므로 믿음의 성장이 빠르다.
그러나 타고난 그릇이 작거나 재질이 좋지 않다 해도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성결을 이루어 곧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인에게 쓰임 받을 수 있고, 또 마음 씀을 넓히고 그릇을 키워 더 큰 일들을 감당해 갈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로 채우는 만큼 그릇의 재질도 바뀔 수 있다.
2020-12-11
제50과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누가복음 18:1~8
읽을말씀 : 누가복음 18:1~8 | 외울말씀 : 누가복음 18:1 | 참고 말씀: 마태복음 7:7~8, 갈라디아서 6:9
교육목표 :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낙망치 않고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인지 배우고 그 요령을 좇아 응답의 열매를 딸 때까지 인내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으며 응답이 더뎌도 낙망치 않고 더욱 뜨겁게 간구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어떤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찾아와 원한을 풀어 달라 하였습니다. 이 재판관은 뇌물을 바랐지만 과부는 너무 가난하여 그것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과부가 자주 찾아가 간청하였더니 얼마 동안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과부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 간청할 것을 생각하니 의롭지 못한 재판관일지라도 과부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응답의 비결을 깨닫게 하고자 이 비유를 들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 18:7) 말씀하셨습니다. 즉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그 자녀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떤 문제에 응답받고자 작정하여 금식하고 철야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어찌 신속히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50편 15절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 기도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할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셨으니 기도에 응답이 없을 리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거나, 기도 양이 부족해서, 또는 아직 때가 아니므로 응답이 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인내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이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도록 회개의 은혜를 주어 응답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의 양이 차서 받을 만한 때가 되었을 때에 응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충만함도 잃게 되니 하나님과의 교통이 점점 끊어져 결국 성령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주 대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잘 통하고 마음이 잘 맞는 것처럼, 항상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하나님 뜻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게 되니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기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어둠의 세력, 곧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엡 6:12). 그럴 때 하나님 능력과 권세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빈 들이나 산, 어디에 계시든지 기도했고 새벽이나 밤중, 어느 때든지 기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항상 기도하여 하나님 뜻대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하고 격려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므로 기도 쉬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쉬면 육신의 생각이 틈타고 하나님 뜻을 좇지 못하므로 어려운 문제가 닥치거나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요인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고,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기도하지 말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범사에 형통함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항상 기도하되 낙심치 않으면 때가 이르러 거둡니다. 만약 농부가 씨앗을 심고 조급해하며 땅을 파헤친다거나, 싹이 났어도 정성껏 가꾸며 기다리지 않는다면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 역시 응답받기까지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조국의 장래를 이상 중에 보고 세 이레, 즉 21일 동안 슬퍼하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첫날 듣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응답을 가져오는 천사를 방해하였으므로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다니엘에게 올 수 있었고 그는 천사가 깨닫게 해 주므로 그때서야 하나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단 10:12~14).
다니엘은 이상을 보고 근심하여 힘이 없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여 마침내 응답받았습니다. 이같이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울 자를 보내 응답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 응답을 가져온 천사도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십니까?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시는지요? 그는 자기가 본 이상을 깨달으려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여 좋은 떡을 먹지 않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않으며 기름을 바르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로 작정하여 기도하니 하나님은 첫날부터 듣고 응답하신 것입니다(단 10:1~12).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기도를 듣고 첫날에 응답하셨으나 그에게 응답이 오기까지는 21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루 이틀 기도해 보고 응답이 없다며 쉽게 낙심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믿음이 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듣고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는 분이십니다(렘 5:24). 그러므로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만약 응답이 없다고 낙망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므로 응답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현실을 보지 않고 항상 기도하며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장 7~8절에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하신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믿음과 인내로써 간구하여 항상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기도하지 않으면 ( )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
2.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 )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 수 있다.
3. 기도할 때 ( )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다.
4. ( ) 않고 기도하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인내와 강청하는 기도로 응답받은 사람들
① 야곱 -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하며 간절하게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② 수로보니게 여인 -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 질러 간구했는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녀가 또다시 절하며 간청해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며 응답하시지 않았다.
그래도 이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하며 강청하니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며 응답을 주셨다.
교육목표 :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낙망치 않고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인지 배우고 그 요령을 좇아 응답의 열매를 딸 때까지 인내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으며 응답이 더뎌도 낙망치 않고 더욱 뜨겁게 간구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어떤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찾아와 원한을 풀어 달라 하였습니다. 이 재판관은 뇌물을 바랐지만 과부는 너무 가난하여 그것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과부가 자주 찾아가 간청하였더니 얼마 동안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과부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 간청할 것을 생각하니 의롭지 못한 재판관일지라도 과부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응답의 비결을 깨닫게 하고자 이 비유를 들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 18:7) 말씀하셨습니다. 즉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그 자녀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떤 문제에 응답받고자 작정하여 금식하고 철야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어찌 신속히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50편 15절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 기도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할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셨으니 기도에 응답이 없을 리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거나, 기도 양이 부족해서, 또는 아직 때가 아니므로 응답이 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인내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이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도록 회개의 은혜를 주어 응답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의 양이 차서 받을 만한 때가 되었을 때에 응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충만함도 잃게 되니 하나님과의 교통이 점점 끊어져 결국 성령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주 대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잘 통하고 마음이 잘 맞는 것처럼, 항상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하나님 뜻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게 되니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기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어둠의 세력, 곧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엡 6:12). 그럴 때 하나님 능력과 권세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빈 들이나 산, 어디에 계시든지 기도했고 새벽이나 밤중, 어느 때든지 기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항상 기도하여 하나님 뜻대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하고 격려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므로 기도 쉬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쉬면 육신의 생각이 틈타고 하나님 뜻을 좇지 못하므로 어려운 문제가 닥치거나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요인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고,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기도하지 말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범사에 형통함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항상 기도하되 낙심치 않으면 때가 이르러 거둡니다. 만약 농부가 씨앗을 심고 조급해하며 땅을 파헤친다거나, 싹이 났어도 정성껏 가꾸며 기다리지 않는다면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 역시 응답받기까지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조국의 장래를 이상 중에 보고 세 이레, 즉 21일 동안 슬퍼하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첫날 듣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응답을 가져오는 천사를 방해하였으므로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다니엘에게 올 수 있었고 그는 천사가 깨닫게 해 주므로 그때서야 하나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단 10:12~14).
다니엘은 이상을 보고 근심하여 힘이 없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여 마침내 응답받았습니다. 이같이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울 자를 보내 응답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 응답을 가져온 천사도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십니까?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시는지요? 그는 자기가 본 이상을 깨달으려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여 좋은 떡을 먹지 않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않으며 기름을 바르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로 작정하여 기도하니 하나님은 첫날부터 듣고 응답하신 것입니다(단 10:1~12).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기도를 듣고 첫날에 응답하셨으나 그에게 응답이 오기까지는 21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루 이틀 기도해 보고 응답이 없다며 쉽게 낙심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믿음이 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듣고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는 분이십니다(렘 5:24). 그러므로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만약 응답이 없다고 낙망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므로 응답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현실을 보지 않고 항상 기도하며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장 7~8절에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하신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믿음과 인내로써 간구하여 항상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기도하지 않으면 ( )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
2.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 )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 수 있다.
3. 기도할 때 ( )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다.
4. ( ) 않고 기도하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인내와 강청하는 기도로 응답받은 사람들
① 야곱 -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하며 간절하게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② 수로보니게 여인 -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 질러 간구했는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녀가 또다시 절하며 간청해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며 응답하시지 않았다.
그래도 이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하며 강청하니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며 응답을 주셨다.
2020-12-04
제49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 (2)
이사야 58:6~9
읽을말씀 : 이사야 58:6~9 | 외울말씀 : 이사야 58:6 | 참고 말씀: 이사야 58:3~5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올바른 보호식을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신속히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와, 올바른 보호식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다섯째, 하나님과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만약 집안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면 온 가족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금식한 후에 능력자를 청하여 예배드리고 물리치면 즉시 귀신이 나갑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먼저 가족이 우상을 섬긴 것이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한 것 등 하나님 앞에 담이 되었던 것을 철저히 돌이킨 뒤에 한마음으로 금식해야 합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질병에 걸리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은 이유를 알아서 회개하고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금식해야 합니다. 어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담이 된 것이 있다면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기도하고 금식할 때라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통회자복하면서 어떻게든 진리로 변화하려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형제와 걸려 불편함과 미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금식을 한다면 이런 것은 회개 금식도 될 수 없습니다. 회개 금식은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겸비한 행함인데 마음에 악을 품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회개하고 온전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기 위해 기도해야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마음에서부터 미움이나 감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불같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하니 힘들어서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금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금식하면서 올려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향입니다. 즉 곡기를 끊고 생명을 다해 드리는 중심의 기도 향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하는 동안에는 할 수 있으면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며 평소보다 더 많이, 더 불같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더구나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금식에 들어가기 전에도 충분히 기도를 쌓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금식 중에는 하루에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부르짖어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장기간 곡기를 끊을 때 몸이 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금식할 때에는 기도를 통해 강건함과 능력을 받습니다. 이때 기도의 내용은 육적인 제목이나 개인적인 소원이 위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또한 교회와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요.
일곱째,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근신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3~5절에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한다면서 오락을 즐기거나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며 해를 가한다면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무익한 말이나 악한 말이 나오고 농담도 나옵니다. 금식 중에 주변 사람과 다투어 마음이 상하고 혈기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며,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 은혜를 구하는 지극히 겸비한 행함입니다. 그런 만큼 마음과 뜻과 힘, 정성 다해 하나님 뜻 가운데 행하며 정녕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금식을 드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단기 금식을 할 때에는 일상적인 집안 일이나 직장 일을 병행합니다. 온 집에 충성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만 장기 금식일 때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장기 금식하는 동안에는 몸에 무리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세상 것을 접하지 않고 온전히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며 근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근신하고 절제하면서 금식할 뿐 아니라 첫날부터 마치는 날까지 마음에 요동 없이 오직 진리 안에 서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금식, 곧 형제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드리는 금식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사 58:7).
여덟째, 금식이 끝난 후 보호식까지 잘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금식을 하면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으로 금식한다 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리는 해야 합니다. 금식을 하고 그 날짜만큼 보호식을 할 때 온전한 금식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절제의 능력이 생길 뿐 아니라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더욱 강건하며 영이 맑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건강하여 소화가 잘되니 굳이 보호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호식을 온전히 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가 연약한 사람이라도 튼튼하게 하고 사소한 질병도 그 기간에 치료해 주십니다. 아무리 금식을 잘했어도 보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만큼 기가 빠지거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호식 중에는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힘든 일을 피해야 합니다. 혹 금식한 뒤에 시험이 찾아올 수도 있으므로 금식할 때 미리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 받으셨을 때에는 보호식도 잘할 수 있도록 주관하십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은 먹지 않도록,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절제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절제하여 아름답게 드리는 보호식까지도 온전한 금식에 포함됩니다.
2. 올바른 보호식을 하려면
보호식을 할 때 과식하면 얼굴이 붓고 위에 부담이 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보통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지만 미음이나 죽으로 보호식을 할 때에는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으로 네 번에 나누어 먹는 것이 좋습니다. 육류, 계란, 빵, 음료수, 기름기가 많은 음식, 매운 것, 짠 것, 단 것, 신 것 등 자극적인 음식이나 화학조미료, 향신료는 피하고 가급적 채식을 하는 것이 좋지요.
3일 금식을 한 뒤에는 처음부터 묽은 죽을 먹어도 되지만 장기 금식을 한 후에는 위장이 아기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틀 정도는 거의 물처럼 묽은 미음을 하루에 네 차례 정도 마셔야 하며, 과일은 사과 한쪽 정도 즙을 내서 마시되 하루 네 차례 정도로 그쳐야 합니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부터는 미음을 조금씩 진하게 끓여 마시고, 점점 쌀가루나 익은 호박을 넣은 묽은 죽이나 콩나물 죽 등으로 이어 가며 양도 조금씩 늘려 갑니다.
반찬은 육류는 피하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말아야 하며, 굳이 고기를 먹고 싶다면 생선류를 조금 먹되 간은 싱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고춧잎이나 들깻잎, 무 잎, 배춧잎과 같은 야채에 멸치를 넣어 끓인 것이 좋고, 특히 들깨를 갈아 껍질을 벗겨 내고 쌀죽에 섞어 끓여 먹으면 기가 빨리 회복되고 건강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보호식을 하면 붓지도 않고 피부색도 뽀얗게 살아나며 체중도 신속하게 회복됩니다. 이처럼 금식에 이어 보호식까지 잘 마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금식이 되어 신속한 응답을 체험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과의 ( )을 헐어야 한다.
2. 불같은 ( )가 있어야 한다.
3.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 )해야 한다.
4. 금식이 끝난 후 ( )까지 잘 마쳐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금식 기도와 보호식
① 금식 기도란, 음식물을 먹지 않으며 기도하는 것,
즉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② 보호식이란, 금식 이후에 일반식을 하기 전까지 음식을 절제하여
섭취하는 식사를 말한다.
금식 기도의 종류
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기 위한 금식
② 어떤 질병이나 문제가 있어서 이를 해결받기 위한 금식
③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금식
④ 죄악을 신속하게 벗어버리기 위한 금식
⑤ 능력 받아 영광 돌리기 위한 금식
⑥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금식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올바른 보호식을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신속히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와, 올바른 보호식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다섯째, 하나님과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만약 집안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면 온 가족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금식한 후에 능력자를 청하여 예배드리고 물리치면 즉시 귀신이 나갑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먼저 가족이 우상을 섬긴 것이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한 것 등 하나님 앞에 담이 되었던 것을 철저히 돌이킨 뒤에 한마음으로 금식해야 합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질병에 걸리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은 이유를 알아서 회개하고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금식해야 합니다. 어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담이 된 것이 있다면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기도하고 금식할 때라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통회자복하면서 어떻게든 진리로 변화하려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형제와 걸려 불편함과 미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금식을 한다면 이런 것은 회개 금식도 될 수 없습니다. 회개 금식은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겸비한 행함인데 마음에 악을 품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회개하고 온전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기 위해 기도해야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마음에서부터 미움이나 감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불같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하니 힘들어서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금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금식하면서 올려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향입니다. 즉 곡기를 끊고 생명을 다해 드리는 중심의 기도 향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하는 동안에는 할 수 있으면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며 평소보다 더 많이, 더 불같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더구나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금식에 들어가기 전에도 충분히 기도를 쌓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금식 중에는 하루에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부르짖어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장기간 곡기를 끊을 때 몸이 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금식할 때에는 기도를 통해 강건함과 능력을 받습니다. 이때 기도의 내용은 육적인 제목이나 개인적인 소원이 위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또한 교회와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요.
일곱째,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근신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3~5절에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한다면서 오락을 즐기거나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며 해를 가한다면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무익한 말이나 악한 말이 나오고 농담도 나옵니다. 금식 중에 주변 사람과 다투어 마음이 상하고 혈기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며,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 은혜를 구하는 지극히 겸비한 행함입니다. 그런 만큼 마음과 뜻과 힘, 정성 다해 하나님 뜻 가운데 행하며 정녕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금식을 드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단기 금식을 할 때에는 일상적인 집안 일이나 직장 일을 병행합니다. 온 집에 충성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만 장기 금식일 때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장기 금식하는 동안에는 몸에 무리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세상 것을 접하지 않고 온전히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며 근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근신하고 절제하면서 금식할 뿐 아니라 첫날부터 마치는 날까지 마음에 요동 없이 오직 진리 안에 서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금식, 곧 형제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드리는 금식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사 58:7).
여덟째, 금식이 끝난 후 보호식까지 잘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금식을 하면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으로 금식한다 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리는 해야 합니다. 금식을 하고 그 날짜만큼 보호식을 할 때 온전한 금식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절제의 능력이 생길 뿐 아니라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더욱 강건하며 영이 맑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건강하여 소화가 잘되니 굳이 보호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호식을 온전히 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가 연약한 사람이라도 튼튼하게 하고 사소한 질병도 그 기간에 치료해 주십니다. 아무리 금식을 잘했어도 보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만큼 기가 빠지거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호식 중에는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힘든 일을 피해야 합니다. 혹 금식한 뒤에 시험이 찾아올 수도 있으므로 금식할 때 미리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 받으셨을 때에는 보호식도 잘할 수 있도록 주관하십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은 먹지 않도록,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절제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절제하여 아름답게 드리는 보호식까지도 온전한 금식에 포함됩니다.
2. 올바른 보호식을 하려면
보호식을 할 때 과식하면 얼굴이 붓고 위에 부담이 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보통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지만 미음이나 죽으로 보호식을 할 때에는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으로 네 번에 나누어 먹는 것이 좋습니다. 육류, 계란, 빵, 음료수, 기름기가 많은 음식, 매운 것, 짠 것, 단 것, 신 것 등 자극적인 음식이나 화학조미료, 향신료는 피하고 가급적 채식을 하는 것이 좋지요.
3일 금식을 한 뒤에는 처음부터 묽은 죽을 먹어도 되지만 장기 금식을 한 후에는 위장이 아기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틀 정도는 거의 물처럼 묽은 미음을 하루에 네 차례 정도 마셔야 하며, 과일은 사과 한쪽 정도 즙을 내서 마시되 하루 네 차례 정도로 그쳐야 합니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부터는 미음을 조금씩 진하게 끓여 마시고, 점점 쌀가루나 익은 호박을 넣은 묽은 죽이나 콩나물 죽 등으로 이어 가며 양도 조금씩 늘려 갑니다.
반찬은 육류는 피하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말아야 하며, 굳이 고기를 먹고 싶다면 생선류를 조금 먹되 간은 싱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고춧잎이나 들깻잎, 무 잎, 배춧잎과 같은 야채에 멸치를 넣어 끓인 것이 좋고, 특히 들깨를 갈아 껍질을 벗겨 내고 쌀죽에 섞어 끓여 먹으면 기가 빨리 회복되고 건강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보호식을 하면 붓지도 않고 피부색도 뽀얗게 살아나며 체중도 신속하게 회복됩니다. 이처럼 금식에 이어 보호식까지 잘 마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금식이 되어 신속한 응답을 체험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과의 ( )을 헐어야 한다.
2. 불같은 ( )가 있어야 한다.
3.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 )해야 한다.
4. 금식이 끝난 후 ( )까지 잘 마쳐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금식 기도와 보호식
① 금식 기도란, 음식물을 먹지 않으며 기도하는 것,
즉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② 보호식이란, 금식 이후에 일반식을 하기 전까지 음식을 절제하여
섭취하는 식사를 말한다.
금식 기도의 종류
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기 위한 금식
② 어떤 질병이나 문제가 있어서 이를 해결받기 위한 금식
③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금식
④ 죄악을 신속하게 벗어버리기 위한 금식
⑤ 능력 받아 영광 돌리기 위한 금식
⑥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금식
2020-11-27
제48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 (1)
이사야 58:6~9
읽을말씀 : 이사야 58:6~9 | 외울말씀 : 이사야 58:6 | 참고 말씀: 야고보서 4:2~3, 고린도전서 14:1
교육목표 : 금식의 위력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금식기도를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작정하여 기도하거나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금식한다 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금식을 하고도 응답이 없고 여전히 문제가 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금식을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금식기도의 위력
성경을 보면 금식기도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을 예비하였고, 모세의 40일 금식은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에스더는 3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해 민족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고 오히려 대적을 멸함으로써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 그 밖에도 죄를 범하여 멸망할 위기에서 금식을 통해 용서받기도 하는 등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 만큼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응답을 이끌어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약속하셨는데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간절히 구하는 자녀의 기도에 어찌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따라서 질병 치료를 위해 금식했다면 반드시 치료의 응답이 와야 하고, 시험 환난 때문에 금식했다면 그것이 물러가야 합니다. 축복이나 권능을 놓고 금식했다면 축복이 임하고 권능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지요.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첫째, 금식하는 기간이 목적에 맞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40일, 21일, 3일 금식 등이 나오는데 그에 합당한 금식의 제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40일 금식은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며, 개인의 유익이나 사업터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우, 구세주로서 큰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한 금식은 하나님 백성을 위해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큰 사명을 위한 것이었지요.
에스더의 경우, 자기 민족이 멸절될 위기에 처했으니 장기 금식을 해야 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민족과 더불어 단 3일을 금식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응답받을 문제가 있을 때에도 그저 불같이 기도하는 것만으로 족한 경우가 있고, 3일만 금식하거나 길어야 7일 정도면 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회개하여 돌이키면 족한 경우가 있고 금식을 해서라도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기도를 쉬었다 해서 10일이나 21일을 회개 금식 한다면 합당치 않습니다. 앞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면 되지 장기 금식을 할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일을 행한 경우라면 먼저 철저히 통회자복을 한 뒤에 회개 금식을 해야 합니다(갈 5:19~21).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로 인한 담이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에 여전히 죄를 품고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3일을 금식해도 회개하여 완전히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21일 금식을 해도 돌이키려는 마음 없이 금식만 했다면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금식하는 시기도 중요합니다.
특히 장기 금식은 반드시 성령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해야 합니다. 주의 종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자 권능을 사모하는 사람 중에는 장기 금식을 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에 따라 구하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아무리 40일, 그 이상을 드린다 해도 권능을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은사를 구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서 구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물며 권능을 받으려면 합당한 그릇을 준비한 다음에 구해야 합니다. 마음에 악이 없도록 성결한 다음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장기 금식을 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 깨끗한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뜨거움과 열심으로 금식을 작정한 것이라면 공의의 법칙에 맞지 않으므로 응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사모함이 있다 해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그릇을 준비하는 기도와 금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릇이 준비되었을 때에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금식하면 응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셋째,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질서를 좇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니 목적과 기간, 그리고 시기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정한 것이라면 목자도 동일한 주관을 받을 것이니 기꺼이 금식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이며, 그럴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상담해야 하고 또한 교회 측에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 기간에는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므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양 떼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종이 교회 측에 상의도 없이 임의로 장기 금식을 결정해 버린다면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육의 질서를 좇아 행해야 합니다. 몸도 쉬어야 할 때에는 쉬고 과식이나 폭식 등을 삼가야 하듯이 금식도 절제 없이 무리하게 할 때에는 몸을 상하게 하므로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장기 금식의 경우, 마음에 주관이 왔다 해도 먼저 건강을 잘 관리하여 충분히 준비된 상황에서, 또 영적으로도 기도를 잘 쌓은 기반 위에서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금식은 육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곡기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더구나 장기 금식은 실제로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반드시 성령의 주관 가운데 해야 하며, 또 성령의 주관을 받았다 해도 신중히, 하나님 앞에 준비된 자세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영육 간에 합당한 질서를 좇아서 드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온전한 금식이 됩니다.
넷째, 진리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했으니, 비진리의 마음으로 금식한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구할 때에도 믿음이 아니라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금식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 분야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심을 때에 응답받는 것입니다. 또 크게 심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적 축복을 주기 원하므로 때를 기다리시지요.
영적으로 여러 은사를 구한다 해도 먼저 마음에 깨끗한 그릇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안이 열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의 세계를 사모하며 마음을 정결케 하고 기도해야지, 마음의 할례는 하지 않으면서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기 위해 금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중심으로 불같이 기도하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해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금식으로 인해 몸이 상하기도 하고 오히려 금식 후에 교만해져서 사단의 역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식기도 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목으로 금식하며 바른 마음으로 구하는 것인지를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금식하는 기간이 ( )에 맞아야 한다.
2. 금식하는 ( )도 중요하다.
3.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 )를 좇아야 한다.
4. 금식 기도는 ( )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17~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에스더의 금식 기도’
바사 제국의 왕후였던 에스더는 하만이 유다 민족을 멸절시키려 하는 위기 앞에서 잠잠히 있으면 평안할 수 있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자기 민족과 함께하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3일을 금식하고 담대히 왕에게 나아갔다(에 5장).
당시 바사 제국의 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그 앞에 나아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왕이 그를 위해 금홀을 내밀면 살 수 있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걸고 금식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멸절의 위기에서 구하시고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교육목표 : 금식의 위력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금식기도를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작정하여 기도하거나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금식한다 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금식을 하고도 응답이 없고 여전히 문제가 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금식을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금식기도의 위력
성경을 보면 금식기도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을 예비하였고, 모세의 40일 금식은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에스더는 3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해 민족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고 오히려 대적을 멸함으로써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 그 밖에도 죄를 범하여 멸망할 위기에서 금식을 통해 용서받기도 하는 등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 만큼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응답을 이끌어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약속하셨는데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간절히 구하는 자녀의 기도에 어찌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따라서 질병 치료를 위해 금식했다면 반드시 치료의 응답이 와야 하고, 시험 환난 때문에 금식했다면 그것이 물러가야 합니다. 축복이나 권능을 놓고 금식했다면 축복이 임하고 권능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지요.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첫째, 금식하는 기간이 목적에 맞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40일, 21일, 3일 금식 등이 나오는데 그에 합당한 금식의 제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40일 금식은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며, 개인의 유익이나 사업터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우, 구세주로서 큰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한 금식은 하나님 백성을 위해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큰 사명을 위한 것이었지요.
에스더의 경우, 자기 민족이 멸절될 위기에 처했으니 장기 금식을 해야 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민족과 더불어 단 3일을 금식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응답받을 문제가 있을 때에도 그저 불같이 기도하는 것만으로 족한 경우가 있고, 3일만 금식하거나 길어야 7일 정도면 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회개하여 돌이키면 족한 경우가 있고 금식을 해서라도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기도를 쉬었다 해서 10일이나 21일을 회개 금식 한다면 합당치 않습니다. 앞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면 되지 장기 금식을 할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일을 행한 경우라면 먼저 철저히 통회자복을 한 뒤에 회개 금식을 해야 합니다(갈 5:19~21).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로 인한 담이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에 여전히 죄를 품고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3일을 금식해도 회개하여 완전히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21일 금식을 해도 돌이키려는 마음 없이 금식만 했다면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금식하는 시기도 중요합니다.
특히 장기 금식은 반드시 성령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해야 합니다. 주의 종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자 권능을 사모하는 사람 중에는 장기 금식을 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에 따라 구하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아무리 40일, 그 이상을 드린다 해도 권능을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은사를 구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서 구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물며 권능을 받으려면 합당한 그릇을 준비한 다음에 구해야 합니다. 마음에 악이 없도록 성결한 다음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장기 금식을 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 깨끗한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뜨거움과 열심으로 금식을 작정한 것이라면 공의의 법칙에 맞지 않으므로 응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사모함이 있다 해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그릇을 준비하는 기도와 금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릇이 준비되었을 때에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금식하면 응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셋째,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질서를 좇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니 목적과 기간, 그리고 시기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정한 것이라면 목자도 동일한 주관을 받을 것이니 기꺼이 금식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이며, 그럴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상담해야 하고 또한 교회 측에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 기간에는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므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양 떼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종이 교회 측에 상의도 없이 임의로 장기 금식을 결정해 버린다면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육의 질서를 좇아 행해야 합니다. 몸도 쉬어야 할 때에는 쉬고 과식이나 폭식 등을 삼가야 하듯이 금식도 절제 없이 무리하게 할 때에는 몸을 상하게 하므로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장기 금식의 경우, 마음에 주관이 왔다 해도 먼저 건강을 잘 관리하여 충분히 준비된 상황에서, 또 영적으로도 기도를 잘 쌓은 기반 위에서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금식은 육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곡기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더구나 장기 금식은 실제로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반드시 성령의 주관 가운데 해야 하며, 또 성령의 주관을 받았다 해도 신중히, 하나님 앞에 준비된 자세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영육 간에 합당한 질서를 좇아서 드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온전한 금식이 됩니다.
넷째, 진리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했으니, 비진리의 마음으로 금식한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구할 때에도 믿음이 아니라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금식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 분야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심을 때에 응답받는 것입니다. 또 크게 심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적 축복을 주기 원하므로 때를 기다리시지요.
영적으로 여러 은사를 구한다 해도 먼저 마음에 깨끗한 그릇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안이 열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의 세계를 사모하며 마음을 정결케 하고 기도해야지, 마음의 할례는 하지 않으면서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기 위해 금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중심으로 불같이 기도하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해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금식으로 인해 몸이 상하기도 하고 오히려 금식 후에 교만해져서 사단의 역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식기도 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목으로 금식하며 바른 마음으로 구하는 것인지를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금식하는 기간이 ( )에 맞아야 한다.
2. 금식하는 ( )도 중요하다.
3.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 )를 좇아야 한다.
4. 금식 기도는 ( )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17~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에스더의 금식 기도’
바사 제국의 왕후였던 에스더는 하만이 유다 민족을 멸절시키려 하는 위기 앞에서 잠잠히 있으면 평안할 수 있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자기 민족과 함께하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3일을 금식하고 담대히 왕에게 나아갔다(에 5장).
당시 바사 제국의 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그 앞에 나아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왕이 그를 위해 금홀을 내밀면 살 수 있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걸고 금식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멸절의 위기에서 구하시고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2020-11-20
제47과합심기도의 위력
마태복음 18:19~20
읽을말씀 : 마태복음 18:19~20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8:19 | 참고 말씀: 사도행전 12:5
교육목표 : 성령과 한마음이 되어 기도함으로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합심기도의 영적 의미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란 꼭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각 사람이 기도할 때에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지요(유 1:20).
그렇다면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과 뜻을 가지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기뻐하며 죄 가운데 행하면 애통해하시는 등 독립적인 인성을 가지셨지요. 이러한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성령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합심기도를 드릴 때라야 주님이 우리 기도에 함께하시며 신속히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의 기도를 하려면 성령의 마음을 알아서 성령이 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는 만큼, 곧 세상에서 입력된 비진리와 죄악이 없어진 만큼 성령께서 우리를 밝히 주관하고 음성을 들려 줌으로써 그 뜻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 순종해 나갈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으며 우리 마음과 성령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에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욕심을 따라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에 따라, 또 하나님 방법대로 이룰 수 있도록 진리로 기도하지요. 이렇게 기도할 때에 이것이 영적 의미의 합심기도이며, 그 기도의 위력과 역사하는 힘이 큰 것입니다.
2. 합심기도 방법
하나님께서 합심기도를 기뻐하고 속히 응답하며 크게 역사하시는 까닭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내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한다면 엘리야처럼 불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음껏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어떤 일을 계획하고 의논할 때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하다면 그 일은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혼자든 둘이든 또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과 마음이 하나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응답받는 데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러니 합심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과 충만을 받아 기도해야 합니다(엡 6:18).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녔으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0) 하나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분입니다(롬 8:27). 그러므로 성령께서 마음을 주관하는 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였거나 꾸준한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기도하고자 해도 억지로 생각을 짜내며 힘들어하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 속에서 임의대로 하는 기도는 생각의 기도, 혼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면 성령의 충만함도 없고, 쉽게 잡념이 틈타거나 피곤해져 졸음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없고, 중언부언하며 기도 후에는 자신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혼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낙망하는 까닭은 혼의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외면한다는 것은 아니며, 듣고 계시지만 응답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령의 감동함을 받지 못하니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의 기도라도 열심히 부르짖을 때 기도 문이 열리고, 능력을 받아 영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예 기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혼의 기도라도 하나님이 듣고 계시며, 때가 되어 기도 문이 열리면 성령과 연합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게 되고 예전에 쌓아놓은 것까지 모두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주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여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각 사람이 마음을 모으지 않는다면 목표를 정해 놓고 한다 해도 중심을 다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할 때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사회자는 찬송을 충만히 부르게 하고 회개케 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어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마음에 기쁨이 임하며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영으로 기도하면 조금도 피곤치 않고 졸음이나 잡념도 틈타지 못하며 믿음과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주님이 함께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3. 합심기도의 위력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의 기독교 박해로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야고보가 칼에 목을 베이고 베드로는 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구출하셨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내려 하던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쇠사슬에 매여 잠들었고 파수꾼들은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를 얽어 맨 쇠사슬이 벗겨지고 굳게 잠긴 쇠문이 저절로 열려 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행 12:1~10).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이를 때까지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이 기적의 역사는 합심기도의 위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옥에 갇힌 사도 베드로를 위해 교회가 한 일은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들에게 아픔이 있을 때에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고 마음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심기도를 기쁘게 받고 응답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물론 기도하는 사람의 수만 많다고 해서 합심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 같은 성령의 주관을 받으며 동일한 목적을 갖고 열심으로 기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자리에 모여 있어도 중언부언하고 잡념과 졸음 속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없지요. 합심기도란 말 그대로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으기 위한 구심점은 바로 성령이며, 모든 사람이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나 되어 기도할 때라야 참된 합심기도가 됩니다.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성령 충만함으로써 영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고 마음껏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힘써 함께하여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기도의 능력을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 )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 )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 )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신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05~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합심기도의 위력’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을 비롯하여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에 힘썼는데, 오순절날 모두가 성령을 받고 불같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 각 나라 말로 방언을 하였다(행 2:1~4).
또한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으며(행 2:41) 사도들을 통해 갖가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더해졌고 성도들 삶이 변화되었다(행 2:43~47).
이같이 합심기도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능력이 임하고, 눈먼 사람이나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고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며,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교육목표 : 성령과 한마음이 되어 기도함으로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합심기도의 영적 의미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란 꼭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각 사람이 기도할 때에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지요(유 1:20).
그렇다면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과 뜻을 가지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기뻐하며 죄 가운데 행하면 애통해하시는 등 독립적인 인성을 가지셨지요. 이러한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성령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합심기도를 드릴 때라야 주님이 우리 기도에 함께하시며 신속히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의 기도를 하려면 성령의 마음을 알아서 성령이 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는 만큼, 곧 세상에서 입력된 비진리와 죄악이 없어진 만큼 성령께서 우리를 밝히 주관하고 음성을 들려 줌으로써 그 뜻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 순종해 나갈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으며 우리 마음과 성령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에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욕심을 따라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에 따라, 또 하나님 방법대로 이룰 수 있도록 진리로 기도하지요. 이렇게 기도할 때에 이것이 영적 의미의 합심기도이며, 그 기도의 위력과 역사하는 힘이 큰 것입니다.
2. 합심기도 방법
하나님께서 합심기도를 기뻐하고 속히 응답하며 크게 역사하시는 까닭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내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한다면 엘리야처럼 불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음껏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어떤 일을 계획하고 의논할 때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하다면 그 일은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혼자든 둘이든 또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과 마음이 하나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응답받는 데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러니 합심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과 충만을 받아 기도해야 합니다(엡 6:18).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녔으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0) 하나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분입니다(롬 8:27). 그러므로 성령께서 마음을 주관하는 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였거나 꾸준한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기도하고자 해도 억지로 생각을 짜내며 힘들어하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 속에서 임의대로 하는 기도는 생각의 기도, 혼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면 성령의 충만함도 없고, 쉽게 잡념이 틈타거나 피곤해져 졸음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없고, 중언부언하며 기도 후에는 자신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혼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낙망하는 까닭은 혼의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외면한다는 것은 아니며, 듣고 계시지만 응답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령의 감동함을 받지 못하니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의 기도라도 열심히 부르짖을 때 기도 문이 열리고, 능력을 받아 영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예 기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혼의 기도라도 하나님이 듣고 계시며, 때가 되어 기도 문이 열리면 성령과 연합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게 되고 예전에 쌓아놓은 것까지 모두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주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여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각 사람이 마음을 모으지 않는다면 목표를 정해 놓고 한다 해도 중심을 다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할 때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사회자는 찬송을 충만히 부르게 하고 회개케 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어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마음에 기쁨이 임하며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영으로 기도하면 조금도 피곤치 않고 졸음이나 잡념도 틈타지 못하며 믿음과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주님이 함께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3. 합심기도의 위력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의 기독교 박해로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야고보가 칼에 목을 베이고 베드로는 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구출하셨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내려 하던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쇠사슬에 매여 잠들었고 파수꾼들은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를 얽어 맨 쇠사슬이 벗겨지고 굳게 잠긴 쇠문이 저절로 열려 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행 12:1~10).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이를 때까지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이 기적의 역사는 합심기도의 위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옥에 갇힌 사도 베드로를 위해 교회가 한 일은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들에게 아픔이 있을 때에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고 마음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심기도를 기쁘게 받고 응답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물론 기도하는 사람의 수만 많다고 해서 합심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 같은 성령의 주관을 받으며 동일한 목적을 갖고 열심으로 기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자리에 모여 있어도 중언부언하고 잡념과 졸음 속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없지요. 합심기도란 말 그대로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으기 위한 구심점은 바로 성령이며, 모든 사람이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나 되어 기도할 때라야 참된 합심기도가 됩니다.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성령 충만함으로써 영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고 마음껏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힘써 함께하여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기도의 능력을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 )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 )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 )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신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05~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합심기도의 위력’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을 비롯하여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에 힘썼는데, 오순절날 모두가 성령을 받고 불같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 각 나라 말로 방언을 하였다(행 2:1~4).
또한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으며(행 2:41) 사도들을 통해 갖가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더해졌고 성도들 삶이 변화되었다(행 2:43~47).
이같이 합심기도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능력이 임하고, 눈먼 사람이나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고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며,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