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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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제46과추수감사절
출애굽기 23:14~17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4~17 | 외울말씀 : 출애굽기 23:16 | 참고 말씀: 레위기 23:42~43 ; 신명기 16:13~17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척박한 세상에서 광야 생활을 하며 정처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진리에 뿌리내리고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을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절기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정하시고 대대로 지키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이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내게 하셨지요.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의 명절과 같이 대대로 지켜온 큰 절기들이 있습니다. 그중 유월절,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은 대표적인 절기라 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최고의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유월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7절에 “…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 말씀하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기 전 애굽에 장자의 재앙이 임할 때,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원받은 이날을 기념하여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유월절로 지키게 하셨지요. 그날이 곧 아빕월(니산월-4월) 14일입니다(레 23:5).
유월절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유월절에 잡은 어린 양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무교절이란 어떤 절기일까요? 출애굽기 34장 18절에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을 지키고 그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심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즉 아빕월(니산월-4월) 15일부터 21일까지 지켰지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애굽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떡을 발효시킬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지 않은 맛없는 무교병을 먹었지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무교절을 대신하여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떠한 절기일까요?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지어 얻은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을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는 그 시점이 유월절 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주가 되기 때문에 칠칠절(7x7)이라 하고, 또 날짜로는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유대교 전통대로 하자면 맥추절은 성령강림절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7월 첫 주일을 맥추절로 지키고 있지요. 즉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맥추절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에 감사한다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했습니다.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결실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지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장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 동안 거했지요.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으로 더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로 초막절(수장절)을 드리면서, 동시에 가장 힘들었던 광야 생활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 유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먼저 성경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수장절에서 유래되었습니다(수장절 내용 참고).
이스라엘 백성은 한 해 농사를 마친 후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 시내 버들로 초막을 지어 그곳에서 7일 동안 살았습니다. 농사지은 것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지내던 때를 잊지 않고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1620년 신대륙 미국에 정착하여, 이듬해 11월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마침내 11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그런데 인디언의 습격과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땅을 개척해 나갔지요.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밀과 조, 옥수수 등 경작법을 배워 이듬해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인디언들을 초대해 햇곡식과 칠면조 고기를 요리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지요. 이것이 기원이 되어 그 후 미국에서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의 단을 쌓았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갔고, 결국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감사하며 믿음의 제단을 쌓은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심으로 미국을 세계적인 부강한 국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올 한 해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차게 여문 곡식처럼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탐스럽게 익은 과일처럼 우리 속에 진리를 가득 채워 주셨지요. 사건 사고, 많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고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사랑받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개개인에게 축복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를 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절기로 즐거운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신 16:13~17). 이때 빈손으로 하나님께 보이지 말고 주신 복을 따라 힘을 다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정성 된 예물과 아름다운 마음의 향을 드려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① ( )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 한 것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낸 다음 안식일로부터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다.
② ( )이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로,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 한다.
③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의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로 초막절, 장막절이라 한다.
2. 어떤 일에 대한 열매를 거둘 때 혹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는지요? 올 한 해를 돌아보며 가정, 일터, 사업터에 복합적인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합심으로 기도합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청교도’란?
16세기 후반,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여 생긴 개신교의 한 교파. 캘빈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쾌락을 죄악시하고,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였으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척박한 세상에서 광야 생활을 하며 정처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진리에 뿌리내리고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축복 속에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을 알아보고,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절기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이스라엘의 대표적 절기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정하시고 대대로 지키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이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내게 하셨지요.
이스라엘에는 우리나라의 명절과 같이 대대로 지켜온 큰 절기들이 있습니다. 그중 유월절,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은 대표적인 절기라 할 수 있지요.
여기에서 최고의 명절이라 할 수 있는 유월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7절에 “…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 말씀하지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기 전 애굽에 장자의 재앙이 임할 때,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재앙이 임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원받은 이날을 기념하여 어린 양의 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유월절로 지키게 하셨지요. 그날이 곧 아빕월(니산월-4월) 14일입니다(레 23:5).
유월절은 영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는 유월절에 잡은 어린 양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무교절이란 어떤 절기일까요? 출애굽기 34장 18절에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을 지키고 그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심을 기념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즉 아빕월(니산월-4월) 15일부터 21일까지 지켰지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애굽에서 나와야 했기 때문에 떡을 발효시킬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룩을 넣지 않은 맛없는 무교병을 먹었지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무교절을 대신하여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떠한 절기일까요?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지어 얻은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맥추절을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는 그 시점이 유월절 다음 날인 안식일로부터 7주가 되기 때문에 칠칠절(7x7)이라 하고, 또 날짜로는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유대교 전통대로 하자면 맥추절은 성령강림절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7월 첫 주일을 맥추절로 지키고 있지요. 즉 전반기 동안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후반기에도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맥추절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자녀가 됨에 감사한다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했습니다.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결실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지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하면서 초막(장막)을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장절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 동안 거했지요.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으로 더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로 초막절(수장절)을 드리면서, 동시에 가장 힘들었던 광야 생활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 유래를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먼저 성경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수장절에서 유래되었습니다(수장절 내용 참고).
이스라엘 백성은 한 해 농사를 마친 후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 시내 버들로 초막을 지어 그곳에서 7일 동안 살았습니다. 농사지은 것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출애굽 한 후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지내던 때를 잊지 않고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1620년 신대륙 미국에 정착하여, 이듬해 11월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마침내 117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지요. 그런데 인디언의 습격과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까지 돌아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땅을 개척해 나갔지요.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밀과 조, 옥수수 등 경작법을 배워 이듬해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인디언들을 초대해 햇곡식과 칠면조 고기를 요리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의 첫 추수감사절을 드렸지요. 이것이 기원이 되어 그 후 미국에서 법으로까지 제정하여 지금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의 단을 쌓았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갔고, 결국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감사하며 믿음의 제단을 쌓은 청교도들이 미국을 건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심으로 미국을 세계적인 부강한 국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올 한 해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차게 여문 곡식처럼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탐스럽게 익은 과일처럼 우리 속에 진리를 가득 채워 주셨지요. 사건 사고, 많은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고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사랑받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개개인에게 축복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를 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수장절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절기로 즐거운 축제라 할 수 있습니다(신 16:13~17). 이때 빈손으로 하나님께 보이지 말고 주신 복을 따라 힘을 다하여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 정성 된 예물과 아름다운 마음의 향을 드려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으세요.
① ( )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 한 것을 기념하여 유월절을 지낸 다음 안식일로부터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다.
② ( )이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축복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열매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로,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 한다.
③ ( )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거한 것을 기념하며, 가을의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로 초막절, 장막절이라 한다.
2. 어떤 일에 대한 열매를 거둘 때 혹 자신이 수고한 대가로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는지요? 올 한 해를 돌아보며 가정, 일터, 사업터에 복합적인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합심으로 기도합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청교도’란?
16세기 후반,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여 생긴 개신교의 한 교파. 캘빈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쾌락을 죄악시하고, 사치와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였으며,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2024-11-08
제45과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1
읽을말씀 : 창세기 1:1 | 외울말씀 : 창세기 2:7 | 참고 말씀: 로마서 1:20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가지요.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되지요.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롬 1:20).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그러면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했습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내지요. 텔레비전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의 오장육부와 뼈,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지요.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이지요.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해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 영위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2. ( ) 안에 단어를 써넣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 )를 만들어 주셨다.
여기에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저장되는데 이것이 ( )이다.
이것을 떠올리는 것이 ( )이며, 이것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 )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범죄함으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가지요.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히브리서 11장 3절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되지요.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 선정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롬 1:20).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고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그러면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했습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내지요. 텔레비전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의 오장육부와 뼈,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지요.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이지요.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해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 영위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2. ( ) 안에 단어를 써넣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 )를 만들어 주셨다.
여기에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저장되는데 이것이 ( )이다.
이것을 떠올리는 것이 ( )이며, 이것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 )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생령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범죄함으로 죽은 영이 되었고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2024-11-01
제44과엘리야의 선(3)
요한복음 3:28~30
읽을말씀 : 요한복음 3:28~30 | 외울말씀 : 요한복음 3:30 | 참고 말씀: 누가복음 3:15~16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며 자기의 본분을 다한 세례 요한처럼 마지막 때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본분에 대해 깨닫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믿음으로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사명을 감당한 후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
누가복음 1장 13~17절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일러 줍니다. 즉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지요.
그 후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누가복음 2장 49절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갔지요. 즉 ‘자신이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백성들은 요한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게 됩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눅 3:16).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하였겠습니까.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런데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지요(요 3:28~30).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없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 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 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으며,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즉 각자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비록 특별한 직분이 없어도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지요. 우리가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사심이 있어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세례 요한처럼 소중한 그릇이 되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큰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돼야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지요.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② 세례 요한처럼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③ 요한은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갔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하며, 어떤 사심도, 불의도 없었다.
④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져서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가랴’란 누구인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는 동정녀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으로 그들 부부는 모두 율법을 잘 지킨 선한 사람이었다.
교육목표 : 주의 길을 예비하며 자기의 본분을 다한 세례 요한처럼 마지막 때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본분에 대해 깨닫게 한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자기 의가 없었고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믿음으로 담대히 행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모든 사명을 감당한 후에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지요.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듯하여 엘리야는 이 땅에 다시 내려와 세례 요한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를 당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은 과연 무엇일까요?
1. 자기 본분을 변함없이 지켰던 엘리야의 선
누가복음 1장 13~17절에 보면 가브리엘 천사장이 사가랴에게 장차 아이를 얻게 될 것을 일러 줍니다. 즉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지요.
그 후에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장 80절에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했습니다. 요한이 “빈 들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면서 늘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이루었고 세상에 드러날 때를 정확히 주관받았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줄을 알았을까요? 요한복음 1장 21절에 유대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졌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영 자체가 마음이요 부모의 기를 전혀 받지 않으셨기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있었던 일을 통해 알 수 있지요. 누가복음 2장 49절에,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찾은 육의 부모에게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알고 계셨던 예수님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의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어렴풋이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마음의 주관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분되어 절제된 삶을 살며 늘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해 깨달아 나갔지요. 즉 ‘자신이 오실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주관받아 세상에 드러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지요(마 3:5~6). 백성들은 요한이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게 됩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답했지요(눅 3:16).
세례 요한은 자신의 본분, 곧 자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잘 지켰습니다.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니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장차 오실 분에 대한 사모함이 더하였겠습니까.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세례 요한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하지요(요 3:26).
그런데 요한은 ‘이제 내 시대는 끝났구나!’ 하며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했지요(요 3:28~30). 제자들을 타이르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본분을 되새겼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했지요. 어떠한 사심도, 불의도 없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세례 요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에 대한 마음은 옥에 갇히고 순교하기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킨 점을 참으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2.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본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마지막 때에 사는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분임을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해 그 길을 예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재림의 주님을 함께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 교회에 주신 사명을 한마음으로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요. 세계 선교와 대성전 건축을 이루기까지 모든 과정이 영혼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큰 과업을 이루기 위해 교회 내 각 부서와 조직이 있으며, 각자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결과적으로 교회 사명도 이루는 것이지요. 즉 각자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비록 특별한 직분이 없어도 주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전도의 사명이 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이 있지요. 우리가 어떤 사명을 맡았다 해도 세례 요한처럼 변함없이 자기 본분을 지키면 주의 길을 잘 예비한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본분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높아져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고, 사심이 있어 처음의 순수한 목적에서 이탈되는 경우도 있지요.
세례 요한처럼 소중한 그릇이 되려면 사심이 없고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며 주님만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자신도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사심이 없이 오직 주의 영광만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또한 주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들이 나보다 더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자신의 기득권도 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낼까’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없고 오직 주의 영광만 구하는 사람’의 큰마음이지요. 각 분야에서 새로운 일꾼이 세워질 때도 모든 사람이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모든 분야가 화평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명을 받게 될까’에 연연하기보다 아버지 나라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이 머리로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이 돼야지요. 이것은 주의 일에 대한 열심이 없거나 식어져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설령 나보다 못한 사람이 머리로 세워졌다 해도 그가 충만한 가운데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선이지요. 마음이 선하고 장성한 아비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직 믿음이나 능력,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드러나게 일을 한다 해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다 해도 시기하지 않지요. 아비와 같은 마음이니 그가 사랑받으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행여나 경험이 부족하여 실수하지 않을까 하고 그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의탁하는 기도를 하지요.
정녕 재림의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린다면 엘리야처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의 본분을 변함없이 지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온전히 예비하고 영광스럽게 주님을 맞으며 주님 품에 기쁨으로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세례 요한은 자신이 엘리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② 세례 요한처럼 우리에게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③ 요한은 따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로 갔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진실로 기뻐하며, 어떤 사심도, 불의도 없었다.
④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받았으되 부모의 기로 인해 가려져서 자신이 엘리야인 줄 몰랐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가랴’란 누구인가?
세례 요한의 아버지로서 헤롯 왕 때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다(눅 1:5).
그의 아내는 동정녀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으로 그들 부부는 모두 율법을 잘 지킨 선한 사람이었다.
2024-10-25
제43과엘리야의 선(2)
누가복음 1:17
읽을말씀 : 누가복음 1:17 | 외울말씀 : 누가복음 1:17 | 참고 말씀: 말라기 4:5~6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그리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구약시대의 엘리야가 신약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었을까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심히도 유약한 성품이었던 자신을 큰 권능으로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빠집니다. 혹여 자신은 그렇지 않은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지만,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아합왕에게 제안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으로 태초부터 계신 이, 곧 근본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게 되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칠 뿐 아니라, 심히 사모했습니다. 하물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그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을까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께서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하나님께 “주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는 큰 사명을 주시지요.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했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오직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을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이때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태아는 부모의 기(氣)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답변하시지요(마 17:11~12).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어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가라 하셨을 때 기꺼이 “아멘” 하며 순종했지요. 엘리야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 나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겠습니다. 더구나 엘리야 시대와는 달리 우리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힘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심으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선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아닌 것은?
① 누가복음 1:17 ② 누가복음 3:4
③ 마태복음 17:11~13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18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영이 아닌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다.
② 엘리야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다.
③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하면 5개월째에 영을 보내 주신다.
④ 엘리야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알신’이란?
가나안 및 수리아에서 섬겼던 남성신으로 주(lord) 혹은 소유자라는 뜻이다.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바알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교육목표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하게 되었는지 알아본다.
엘리야는 심히 겸비한 마음을 가졌고, 자기 의가 없어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는 선을 소유했기에 하나님께서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연단을 통해 강하고 담대한 면모를 갖추게 된 후에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지요. 그리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후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구약시대의 엘리야가 신약시대에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어떻게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할 수 있었을까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엘리야의 선
엘리야 선지자는 이 땅에서 사역을 이룰 때 늘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또한 깊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밝히 깨닫기 위해 노력했지요. 유약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기 위해 그만큼 더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고,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능력을 내려 주셔서 엘리야의 심령을 강하게 붙들어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심히도 유약한 성품이었던 자신을 큰 권능으로 입혀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도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그 사랑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온전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는 자신의 성품을 핑계 대며 슬그머니 뒤로 빠집니다. 혹여 자신은 그렇지 않은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진실하게 사랑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뜨거우면 성품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육으로 심히 유약한 성품을 지녔지만, 혈혈단신으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에게 불의 응답을 끌어내리는 대결을 하자고 아합왕에게 제안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담대히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인 아비들의 믿음으로 태초부터 계신 이, 곧 근본 하나님에 대해 깊이 알게 되지요.
엘리야는 이 땅에 있을 때도 하나님에 대해 깊이 깨우칠 뿐 아니라, 심히 사모했습니다. 하물며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친히 뵈었을 때 그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을까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더 밝히 깨닫고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명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성자 하나님께서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종국에는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엘리야는 주를 향한 사모함이 불붙는 것 같아 하나님께 “주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받으시고 그를 다시 이 땅에 보내 주의 길을 예비케 하는 큰 사명을 주시지요.
2. 세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나 주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의 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실 것과 그가 어떤 사명을 감당할 것까지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했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에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했지요.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다시 태어난 일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 오직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산 채로 승천한 엘리야는 어떻게 다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잉태된 지 6개월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영을 보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지요. 이때 엘리야의 영 자체가 온 것이 아니라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태아는 부모의 기(氣)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가장 선하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잉태한 태아에 엘리야의 마음이 담긴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요 1:6).
성경 곳곳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사람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에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3장 4절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사람, 곧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엘리야임을 말씀해 주셨지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상에서 홀연히 변화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예수님이 구세주로 오신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하고 여쭈었지요(마 17:10).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답변하시지요(마 17:11~12).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무 흠도 점도 없으신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영을 이뤄 산 채로 들림 받은 엘리야를 다시 이 땅에 보내어 주의 길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택함 받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엘리야가 주를 향한 불붙는 듯한 사랑 가운데 “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시 이 땅에 내려가라 하셨을 때 기꺼이 “아멘” 하며 순종했지요. 엘리야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주를 위해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을 지극한 선으로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 주님을 만나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고백을 변함없이 행함으로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은 모든 말과 행함에서도 그 사랑이 배어 나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너무도 순전하셔서 “누구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고 길에서 그 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하신 예수님도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은 엄히 책망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자신의 성품이나 환경을 핑계 댈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게 되고 어찌하든 그 뜻을 이뤄 드리고자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선을 통해 진실한 사랑 앞에서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겠습니다. 더구나 엘리야 시대와는 달리 우리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계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힘주시는 성령님을 더욱 의지하심으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선의 단계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왔음을 뒷받침해 주는 말씀이 아닌 것은?
① 누가복음 1:17 ② 누가복음 3:4
③ 마태복음 17:11~13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18
2.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
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 잉태될 때 그에게 보내 주시는 영 안에 엘리야의 영이 아닌 엘리야의 마음을 담아 보내 주셨다.
② 엘리야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을 생각하면 주를 향한 사랑이 불붙는 것 같아 이 죄악의 땅에 다시 내려오는 것이 조금도 꺼려지지 않았다.
③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잉태하면 5개월째에 영을 보내 주신다.
④ 엘리야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알신’이란?
가나안 및 수리아에서 섬겼던 남성신으로 주(lord) 혹은 소유자라는 뜻이다. 땅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정착 초기부터 바알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2024-10-18
제42과엘리야의 선(1)
열왕기하 2:11
읽을말씀 : 열왕기하 2:11 | 외울말씀 : 열왕기하 2:11 |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4:7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는 “두 사람(엘리야, 엘리사)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엘리야가 승천한 장면이 나오지요. 이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것처럼, 사망 곧 죽음은 죄를 지은 대가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이지요.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경작 받은 피조물로서 천국에서 최고의 서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으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은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에는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기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지요.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도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함으로, 바알 신을 섬기며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만연해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면 마침내 하나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왕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지요. 또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서 공궤 받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었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아합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에 임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잡기 위해 온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아합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나아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3년 반 동안 우로가 없었던 이스라엘에 큰비가 내렸지요(약 5:17~18).
이 밖에도 요단강을 가르며,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영적으로 어두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권능의 선지자였습니다.
2. 엘리야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하려면?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에 힘썼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였지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람의 생각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인함이 입혀졌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즉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그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내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쓰시지요. ‘자기’로 꽉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을뿐더러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셔도 ‘자기’와 섞이면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속이 깊은 그릇이지요. 그릇이 깊어야 많이 담길 수 있듯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임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지 않고 욕심과 들레는 악이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택해 쓰임 받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지요. 따라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철저히 깨뜨려 버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서로 부딪치며 불편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은 진리라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가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에녹 ② 엘리야 ③ 모세 ④ 아브라함
2. 엘리야 선지자에 관한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 아합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②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게 했다.
③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음으로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했다.
④ 원래 성격이 담대한 데다 하나님 능력이 입혀지니 더 크게 쓰임 받았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합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힌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 결혼함으로 바알 신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며,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교육목표 : 엘리야와 같이 항상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성도들이 되게 한다.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 11절에는 “두 사람(엘리야, 엘리사)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고 엘리야가 승천한 장면이 나오지요. 이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한 것처럼, 사망 곧 죽음은 죄를 지은 대가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다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뜻이지요.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가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경작 받은 피조물로서 천국에서 최고의 서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는 어떠한 선의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큰 자’라 인정하시고 놀라운 권능으로 함께하신 것일까요?
1. 심히도 겸비한 마음으로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은 엘리야의 선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이 입혀지기 전에는 매우 유약한 성품이었습니다. 자신은 부족하고 내세울 것이 없기에 자신감이 없는 모습이었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기에 그가 있는 곳에는 화평이 깨어지는 일이 없었지요. 이러한 모습이 육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 있으나 영으로 변화된다면 큰 선지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는 마음이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마음의 선을 크게 사시고 연단을 통해 큰 선지자로 쓰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 베드로,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 육적으로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연단을 통해 마음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이 심히도 유약하여 자존심이나 들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도 엘리야는 ‘나는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겸비한 것은 좋으나 한 시대의 큰 선지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그 유약함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 바알을 섬기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함으로, 바알 신을 섬기며 온 나라가 우상숭배로 만연해졌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케 했으면 마침내 하나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을 것을 아합왕에게 전하게 합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숨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시지요. 또 가뭄으로 시내가 마르자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에게로 가서 공궤 받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과부로부터 떡 한 조각을 공궤 받고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었고,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 주었습니다.
3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내릴 것이니 아합왕을 만나라고 하십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에 임한 가뭄이 엘리야 때문이라 생각했기에 그를 잡기 위해 온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붙잡힌다면 생명도 잃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보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유약한 엘리야로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아합왕 앞에 나가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나아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끌어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나타내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기도함으로 3년 반 동안 우로가 없었던 이스라엘에 큰비가 내렸지요(약 5:17~18).
이 밖에도 요단강을 가르며, 앞일에 대해 밝히 예언하는 등 영적으로 어두운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권능의 선지자였습니다.
2. 엘리야처럼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하려면?
엘리야가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담대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기에 하나님과 늘 교통하기에 힘썼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깨달으려 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하였지요.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교통하기를 힘썼습니다. 이를 통해 엘리야는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담대함과 능력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람의 생각으로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능히 된다.”는 믿음이 확고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유약함이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연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의 끈을 놓지 않으니 승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인함이 입혀졌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믿음 안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즉 엘리야가 큰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육의 한계 속에 있는 자신은 할 수 없으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과 그 뜻에 순종만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공간에서 가능한 일들을 육의 공간에 나타내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을 쓰고자 할 때 육적으로 능력이 많은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나타낼 사람을 쓰시지요. ‘자기’로 꽉 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담길 수가 없을뿐더러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 주셔도 ‘자기’와 섞이면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자기’가 온전히 비워지고 깨끗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비워 속이 깊은 그릇이지요. 그릇이 깊어야 많이 담길 수 있듯이 겸비하게 자신을 낮출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임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능력이 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택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입히시고 하나님의 일을 크게 이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고전 1:27~29). 그런데 ‘자기’를 온전히 비우지 않고 욕심과 들레는 악이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님께서 택해 쓰임 받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여 은사가 나타나면 이내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빠지기도 하지요. 따라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한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자기 마음 그릇을 비우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신속히 벗어버리고, 자기 의와 틀을 철저히 깨뜨려 버릴 때 신령한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도 자기를 전혀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꾼들 사이에서 자기 의를 주장함으로 서로 부딪치며 불편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자신은 진리라 생각하고 만들어 놓은 틀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는 진리 말씀으로 죄와 의에 대해서 밝히 분별하되,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죄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처럼 설령 나 보기에 의롭지 못한 상대도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참된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참된 의라 믿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마음 자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택하사 보배를 담는 그릇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겸비하게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가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에녹 ② 엘리야 ③ 모세 ④ 아브라함
2. 엘리야 선지자에 관한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 아합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다.
②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게 했다.
③ 하나님과 교통하는 끈을 놓지 않음으로 자신의 유약함을 극복했다.
④ 원래 성격이 담대한 데다 하나님 능력이 입혀지니 더 크게 쓰임 받았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합왕’은 어떤 인물일까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힌다.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 결혼함으로 바알 신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워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또한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며,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024-10-11
제41과아브라함의 선(2)
히브리서 11:17~19
읽을말씀 : 히브리서 11:17~19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19 | 참고 말씀: 민수기 23:19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절대 의심하지 않았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한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설령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을 때(창 12:1) 즉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장 1~3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채비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 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지요.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지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은 선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를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해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기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5년이 지나고 10년이 다 되어 가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절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은 99세, 아내 사라는 89세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여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 19~21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기록한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됨으로 인해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녔다.
②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출애굽 한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③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
④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다.
2.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 )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 )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 )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모리아 산’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이며, 다윗에게 나타나신 산이기도 하다(대상 21:15~22).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정상부를 말하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샀고,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대하 3:1).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믿었던 아브라함의 선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단 한 번만 말씀하셔도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순종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한 경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셨을 때도 한 번 말씀하셨으면 그대로 믿었고 아무리 상황이 바뀐다 해도 절대 의심하지 않았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하되, 특히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순수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 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의 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한 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설령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을 때(창 12:1) 즉시 순종했지요. 삶의 터전과 가족 및 친척들과의 관계를 뒤로 하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낯선 곳을 향해 무작정 떠나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의 행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의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창세기 22장 1~3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다음 날,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채비한 다음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이때는 “본토를 떠나라” 하신 말씀에 순종했던 차원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순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리 하라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무조건 순종했다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는 능히 그 마음을 헤아려서 순종했지요. 바로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씨이니 아무리 짐승처럼 잡아 번제로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던 것입니다(히 11:17~19).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역사하셔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함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 수년이 되었어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바쁘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님 말씀에 즉시로 순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일단 순종부터 한다면,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꿔 주십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기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해결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짧은 시간에 형통하고 순적하게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들은 결국 우리를 잘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순종하면 복인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나는 왜 복을 받지 못할까?’ 하지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것이 내 생각에 맞든 맞지 않든 무조건 순종하되 즉시로 순종하면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왜 순종하라 말씀하셨는지 그 마음과 뜻이 깨달아지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에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은 선
어떤 자녀는 부모가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때에 되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선한 마음을 지닌 자녀는 잠잠히 부모를 믿고 기다리다가 혹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빨리 주시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이 먼저 “나중에 주셔도 됩니다.” 하면서 오히려 부모의 마음을 편케 해드리지요.
이처럼 육의 부모는 능력이 부족해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다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다면 당연히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비록 자기 생각보다 축복이 더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기다림의 시간도 기쁨과 감사로 보내는 자녀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선하게 여기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5년이 지나고 10년이 다 되어 가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절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오히려 아내 사라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은 99세, 아내 사라는 89세가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1년 후에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주셨지요. 그런데 그때는 이미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상태여서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이 육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 19~21절에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기록한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그처럼 믿음으로 바라보던 것이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로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고,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으며, 영적으로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수한 믿음의 후손을 얻게 되었습니다.
혹여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시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 좋아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는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얼마나 믿음으로 받았으며 선한 마음으로 지켜 오셨는지요? 여러분에게 주실 영광과 축복을 믿음으로 바라보되 여러분 자신도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락된 연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에서 육과 악이 발견됨으로 인해 낙심해 힘을 잃지는 않았는지요? 만일 ‘이런 내 마음과 모습으로 언제 영으로 들어가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포기하고 절망한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뜨겁게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입고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본다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 받았던 아브라함의 선을 본받아 온전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알아 세세토록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거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을 고르세요.
①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녔다.
②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출애굽 한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③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
④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즉시로 순종했다.
2. ( ) 안을 채워 보세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 )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 )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 )치 않으시랴”(민수기 23:19)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모리아 산’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산이며, 다윗에게 나타나신 산이기도 하다(대상 21:15~22).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정상부를 말하며,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샀고,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대하 3:1).
2024-10-04
제40과아브라함의 선(1)
창세기 13:8~9
읽을말씀 : 창세기 13:8~9 | 외울말씀 : 창세기 13:9 | 참고 말씀: 창세기 14:22~23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선이 무엇인지 깨달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며 지극한 선을 느끼며 소유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며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
사람의 마음이 악을 버리고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아브라함은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 느낄 수 있지요.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받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게 되자 더 이상 동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말합니다(창 13:8~9).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으니, 그 마음 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어도 아브라함은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김으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고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전쟁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고백합니다(창 14:22~23).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10절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고 해도 허물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功)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처럼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훗날까지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라함에게 돌렸기 때문에 그가 부해졌다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므로 참된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아비멜렉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야 할 그에게 오히려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이로써 아비멜렉이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되었지요.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했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 선지자의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담긴 성경 구절을 고르세요.
① 창세기 13:9 ② 출애굽기 32:32 ③ 창세기 12:1 ④ 창세기 22:12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은?
①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다.
② 자신이 취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은 취했다.
③ 거저 주겠다는 사라의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정당하게 값을 치렀다.
④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늑탈했을 때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분쟁의 소지가 없게 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막벨라’ 굴이란?
아브라함이 자신과 가족의 묘지로 삼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 소유의 땅을 은 4백 세겔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막벨라 굴이란 그 땅 안에 있던 동굴의 이름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선이 무엇인지 깨달아 범사에 지혜롭게 행하며 지극한 선을 느끼며 소유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믿음의 선진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도 선(善)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아브라함의 지극한 선을 느끼며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1.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닌 아브라함의 선
사람의 마음이 악을 버리고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관용’이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 이도 가하고 저도 가한 마음이되, 그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처럼 양순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선하고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지요.
아브라함은 관용과 양순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취하도록 선택권을 양보하는 행함을 통해 느낄 수 있지요. 하나님 뜻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올 때 조카 롯도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 함께한 롯도 축복받았습니다. 그런데 둘 다 소유가 불어나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게 되자 더 이상 동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말합니다(창 13:8~9).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면서 롯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자 롯은 물도 넉넉하고 더 기름진 땅을 택해 떠났습니다. 도리와 은혜를 안다면 삼촌에게 좋은 땅을 돌려야 했겠지만,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으니, 그 마음 됨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롯이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해 떠났어도 아브라함은 결코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고, 그의 넉넉한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대에게 주고 또 줄 수 있는 관용의 마음과 이것도 저것도 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을 택할 수 있는 양순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김으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리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고 해도 기꺼이 줄 수 있었지요.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입니다.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
아브라함은 본래 마음이 아름답고 고우며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름답고 큰 그릇을 금 그릇으로 온전히 나올 수 있도록 친히 연단과 시험을 허락하셨지요. 아브라함은 연단의 시간을 믿음과 소망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함으로 축복받았던 것입니다.
크고 좋은 그릇이요, 정직하고 성실히 행하는 것을 사모하는 아브라함이었기에 모든 일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처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이루어 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중심에서 인정하는 낮은 마음이되 하나님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온전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 마음에 더하여 정직하고 성실히 행해 나가니 그의 길은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전쟁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아브라함이 앞장서 나아가 조카를 구해온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활약은 롯이 속한 소돔 왕의 편에 승리를 안겨 주었고 소돔 왕은 사례하고자 전쟁에서 얻은 물품을 취하도록 권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고백합니다(창 14:22~23).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요, 소돔 왕에게 큰 은혜를 베푼 은인으로서 전리품을 취한다고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사로운 유익을 취하려는 비진리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사람 편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잘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만 부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아브라함의 선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우선 눈에 보이는 유익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언 28장 10절에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했으니 실제로 여러분을 악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러분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미혹 받아 시험에 들고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취한다고 해도 허물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功)으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반드시 정가를 지불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의 일이지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헷 족속이 장사할 굴을 거저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아브라함은 굳이 그에 해당하는 상당한 값을 치르고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조금도 사심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는 정직과 성실한 마음이 가득함을 보여주지요. 그런데 이처럼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확실히 자신의 소유를 삼은 일은 선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육의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질될 수 있기에 당장은 거저 주겠다 하나 훗날에는 마음이 변하여 다시 땅을 돌려 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훗날까지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기에 근본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앴던 것입니다. 앞서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취하지 않은 것도 선의 지혜 중 하나입니다. 훗날 아브라함이 더 부해졌을 때, 소돔 왕은 그때 자신이 모든 전리품을 아브라함에게 돌렸기 때문에 그가 부해졌다고 말할 수 있기에 소돔 왕의 제의를 단호하게 사양함으로써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지혜롭게 행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는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이 나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책망하면서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우물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실히 했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내 편에서 먼저 화평을 좇고, 이후에는 다시금 우물로 인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명확한 선을 그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상대의 잘못만 꾸짖고 말았다면 아비멜렉은 진심으로 뉘우치기보다는 할 수 없이 물러나는 것이므로 참된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리거나 기회가 되면 아비멜렉이 우물을 늑탈할 수도 있기에 피해를 보상해야 할 그에게 오히려 우물 값을 치렀던 것입니다. 이로써 아비멜렉이 마음 중심에서 아브라함에게 굴복하게 되고, 이후로는 우물을 넘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는 과정에서 항상 선의 지혜로써 그 결과가 깔끔하고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다툴 일도 없어지고, 화평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어떤 문제의 소지도 없도록 잘 마무리되었지요. 이와 같이 선의 지혜를 소유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도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하나님 섭리를 이룰 수 있으며, 혹 나에게 잘못한 상대라도 선의 지혜로써 행하면 나를 돕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의 지혜는 먼저 자신의 것을 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되고 아무런 사심 없이 정직하게 행할 때 임합니다. 야고보서 3장 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말씀했으니 더욱 선을 사모하여 아브라함의 선에 이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아브라함 선지자의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담긴 성경 구절을 고르세요.
① 창세기 13:9 ② 출애굽기 32:32 ③ 창세기 12:1 ④ 창세기 22:12
2. 사심이 없고 정직하며 성실하게 행한 아브라함의 선이 아닌 것은?
① 소돔 왕이 권하는 전리품을 사사로이 취하지 않았다.
② 자신이 취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 것은 취했다.
③ 거저 주겠다는 사라의 매장지인 막벨라 굴을 정당하게 값을 치렀다.
④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물을 늑탈했을 때 보상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암양 새끼 일곱을 주면서 분쟁의 소지가 없게 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막벨라’ 굴이란?
아브라함이 자신과 가족의 묘지로 삼기 위해 헷사람 에브론 소유의 땅을 은 4백 세겔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막벨라 굴이란 그 땅 안에 있던 동굴의 이름이다.
2024-09-27
제39과모세의 선(2)
민수기 12:3, 7
읽을말씀 : 민수기 12:3, 7 | 외울말씀 : 민수기 12:3 | 참고 말씀: 출애굽기 32:31~32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선에 대해 살펴본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으며,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로 일관하는 선(善)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어떠한 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바라봐 주며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거듭거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범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조그만 어려움을 만나기만 해도 원망 불평을 쏟아냈지요.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속에 부르짖던 자신들을 건져 주었는데도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자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하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그러다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홍해가 갈라져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몰되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하자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모세가 기도하여 마시게 하자 잠잠해졌습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니(출 16:3)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자 또 원망 불평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할 기세로 달려들었지요.
그러자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해서 먹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는가’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해 진멸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그리고 진정 온유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한 사건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후 더디 내려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방탕히 먹고 마시며 뛰놀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모세는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 32:32)라고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 곧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됩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백성들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자 자기 생명을 담보해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 하셨던 뜻을 돌이키시지요.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 구원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한 영혼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지요.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 등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지요.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갔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날까지 단 한 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신뢰하시며 큰 권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루며 놀라운 권능을 나타냈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민망했습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음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권능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건만 더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말씀한 대로 모세는 무익한 종의 마음으로 늘 겸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여 ‘내가 맡은 사명이 무겁고 너무 힘들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마음 졸이며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17장 7~8절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했습니다. 여러분도 모세의 선을 닮아 온유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거목이 되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이었을까요?
① 뜨거운 뙤약볕의 광야 ② 먹을 물과 음식이 없는 것
③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④ 우상
2. 범죄한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 주는 내용이 담긴 성경 구절을 찾아 쓰세요. (출애굽기 장 절)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만나’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음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음식이다. 작고 둥글며 희고, 모양은 깟씨(고수씨-미나릿과에 속하는 고수 나물의 종자) 또는 진주처럼 생겼다.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 과자를 만들어 먹었는데 맛은 꿀이나 기름 섞은 과자 맛이다.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선에 대해 살펴본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으며,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도 오직 감사로 일관하는 선(善)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어떠한 선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승했던 모세의 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겸하여 덕(德)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은 사람에게 쉴 만한 그늘을 제공하듯이, 온유함이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고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며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이지요.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와도 걸리지 않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능히 품어 주며 어떤 것도 악으로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며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섬겨 주지요.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편을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 해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될 것을 바라봐 주며 기다려 줍니다. 상대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을 알아서 그 길로 이끌어 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장정만 해도 60만 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40년의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하시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도 거듭거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범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조그만 어려움을 만나기만 해도 원망 불평을 쏟아냈지요.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고통 속에 부르짖던 자신들을 건져 주었는데도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자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하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그러다가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홍해가 갈라져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몰되는 것을 본 후에야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하자 또다시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모세가 기도하여 마시게 하자 잠잠해졌습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니(출 16:3)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만나가 내리기 시작했던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으로 옮겨 장막을 쳤을 때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자 또 원망 불평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하며 모세에게 돌질할 기세로 달려들었지요.
그러자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해서 먹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불평 원망하며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는가’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해 진멸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때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그리고 진정 온유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한 사건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후 더디 내려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어 섬기고 방탕히 먹고 마시며 뛰놀았지요.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모세는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 32:32)라고 간절한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
여기서 ‘주의 기록하신 책’ 곧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됩니다. 모세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백성들이 멸망할 위기에 처한 것을 보자 자기 생명을 담보해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멸하려 하셨던 뜻을 돌이키시지요.
모세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꿔서라도 백성들 구원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한 영혼도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닮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지요. 이처럼 원수를 위해 생명도 내어줄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백성들을 온전히 품고 가려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2. 온 집에 충성한 모세의 선
‘충성’이란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함은 물론이요, 맡겨진 직무 이상을 넉넉히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온 집에 충성’이란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일터, 사업터 등 자기가 속한 모든 분야에서 충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까지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했습니다. 사환이란 잔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맡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모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드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야 했지요.
백성의 지도자가 되면 그만큼 지고 가야 할 짐이 많고 때로는 그 짐이 심중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난관을 뚫어 나갔습니다. 백성들에 대해서도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품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어 갔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낸 날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날까지 단 한 순간도 편히 지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 인해 흘린 눈물과 그들을 위해 절규하며 올렸던 애통의 기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 모세가 늘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은 바로 이 백성들을 저버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해 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마음 중심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도 모세를 신뢰하시며 큰 권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모세 오경을 받아 내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모세와 깊은 교통을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루며 놀라운 권능을 나타냈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민망했습니다.
출애굽 1세대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이 단 2명에 불과했고, 정작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들어간 사람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음도 모세가 잘 인도한 결과이지만 모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권능을 주셨고 많은 것을 보장해 주셨건만 더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말씀한 대로 모세는 무익한 종의 마음으로 늘 겸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여 ‘내가 맡은 사명이 무겁고 너무 힘들다. 사명을 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면서부터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까지 마음 졸이며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모세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고도 열매가 적은 것을 민망히 여기는 모세의 마음을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17장 7~8절에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했습니다. 여러분도 모세의 선을 닮아 온유하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거목이 되시길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이었을까요?
① 뜨거운 뙤약볕의 광야 ② 먹을 물과 음식이 없는 것
③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④ 우상
2. 범죄한 백성들을 향해 모세가 공의를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 주는 내용이 담긴 성경 구절을 찾아 쓰세요. (출애굽기 장 절)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만나’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음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신 음식이다. 작고 둥글며 희고, 모양은 깟씨(고수씨-미나릿과에 속하는 고수 나물의 종자) 또는 진주처럼 생겼다.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아 과자를 만들어 먹었는데 맛은 꿀이나 기름 섞은 과자 맛이다.
2024-09-20
제38과모세의 선(1)
히브리서 11:24~26
읽을말씀 : 히브리서 11:24~26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1:25 | 참고 말씀: 잠언 17:3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이처럼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해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방 민족인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서 더욱 번성하고 강대해지자 위협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심한 강제 노동을 시키고 학대했지요. 그런데도 그들이 더욱 번성하자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나는 남자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후손들을 멸절시키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는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모세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모세를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온 하수로 그 갈대 상자가 떠내려오도록 역사하셨고, 이를 발견한 공주가 모세를 불쌍히 여겨 물에서 건져내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 받으면서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진 일들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공주의 양자가 되게 하여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있는 한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요.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편에는 항상 친어머니에게서 들은 하나님과 애굽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민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말리려 하자, 그들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하며 노를 발했지요. 모세는 자기 나름대로 힘과 지식을 동원해 자기 민족을 도와주고자 했건만 오히려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나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봐 모르는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에,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강대국 왕자로서 누리던 영화도, 기름지고 호화스러운 생활도 사라져 버렸지요.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26절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지요.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해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너무나 비참하고 불안해 자신의 상황에 낙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왕자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지요. 점점 광야 생활이 적응되어 가자, 이제는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는 것이 없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모든 일은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취하고자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실 때도 심히 자신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연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보면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서 너무나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자신감도 있고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요, 민족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기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연단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준비시키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그릇됨을 먼저 갖추게 하십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지요.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내가 왜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혹독한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해 절망하지는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주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큰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혹여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어서 계속해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따라서 연단을 받을 때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모세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밑줄 친 부분에 정답을 써넣어 보세요.
① ___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___받는 것을 택했다.
② ___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___했다.
2. 모세가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사랑의 고백을 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어리석어서 하나님에 대해 깨우치지 못했으나 이제는 정녕 지는 해를 보고도 그곳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나이다. 내가 취하고자 하여도 취하여지지 않고 갖고자 해도 가질 수 없는 이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허무한 자인데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친히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내 마음속에서 믿나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로’란?
고대 애굽 왕들의 일반적인 호칭이다.
애굽어 ‘프로’의 음역으로 본래 ‘커다란 집’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점차 왕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추석 명절 감사 예배 순서와 예문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1. 추석 감사 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설교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독이 있는 불 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듯이 사고와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와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와 같은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귀히 쓰임 받는 그릇으로 나오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모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400년간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이처럼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중심을 지닌 모세를 택해 믿음으로 순종하도록 연단하시고 역사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얼마나 지극한 선(善)을 지니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1.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방 민족인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서 더욱 번성하고 강대해지자 위협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심한 강제 노동을 시키고 학대했지요. 그런데도 그들이 더욱 번성하자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나는 남자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후손들을 멸절시키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암울한 시대에 모세는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석 달간 모세를 숨겨 키우지만(히 11:23)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모세를 넣어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온 하수로 그 갈대 상자가 떠내려오도록 역사하셨고, 이를 발견한 공주가 모세를 불쌍히 여겨 물에서 건져내지요. 이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재빨리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추천합니다.
모세는 친어머니에게 양육 받으면서 민족과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진 일들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공주의 양자가 되게 하여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어머니의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기에 애굽의 왕자라면 그 권세 또한 막강했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공주의 양아들로 있는 한 일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요. 하지만 모세의 마음 한편에는 항상 친어머니에게서 들은 하나님과 애굽에서 고통받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애굽 사람이 자기 민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의분이 일어나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족인 히브리인들끼리 싸움이 일어나 말리려 하자, 그들이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하며 노를 발했지요. 모세는 자기 나름대로 힘과 지식을 동원해 자기 민족을 도와주고자 했건만 오히려 그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그는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나 애굽을 도망쳐 나옵니다.
모세가 자기 안일만 생각했다면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봐 모르는 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기 때문에, 자기 동족이 고통당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선하다’ 인정하시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는 언제 붙잡혀 목숨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강대국 왕자로서 누리던 영화도, 기름지고 호화스러운 생활도 사라져 버렸지요.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 집도 없이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26절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지요.
2. 연단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그곳에서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해 양 무리를 치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계획이나 자기 민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소망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지요. 처음에는 너무나 비참하고 불안해 자신의 상황에 낙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왕자의 자존심이나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저 평범한 양치기로서의 생활에 적응해 갔지요. 점점 광야 생활이 적응되어 가자, 이제는 마음의 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은 가진 자 같았으나 막상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니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지요. 왕궁에 있을 때와는 달리 자기 임의대로 되는 것이 없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으며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눈이 뜨였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부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가 우러나왔습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감사했고, 모든 일은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취하고자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항상 마음 중심에서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실 때도 심히 자신 없는 모습으로 주저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 연단의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가치 없음과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히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자기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서 죽였던 모세가 이처럼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연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보면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있어서 너무나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애굽 왕자로 있을 때는 자신감도 있고 권세가 있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자기 생명조차 위협받는 도망자요, 민족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 왕자로서 당당한 모세가 아니라 광야의 양치기로서 철저히 낮아진 모세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자기 생각을 깨뜨리고 자기를 부인하여 하나님께만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 섭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연단 과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연단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미리 준비시키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그릇됨을 먼저 갖추게 하십니다. 이처럼 모세가 연단 중에도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감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하다고 인정하셨지요. 여러분은 혹여 연단을 받을 때 ‘내가 왜 이런 연단을 받아야 하나? 어떻게 혹독한 이 연단을 견뎌야 하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나마 가졌던 믿음마저 흔들리고 낙심해 절망하지는 않는지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아주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살아간 세월은 무려 40년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상황과 환경에 대해 중심에서 감사했지요.
이처럼 철저히 자기를 비웠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큰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혹여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그릇 준비가 안 되어서 계속해 연단을 허락하시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17장 3절에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따라서 연단을 받을 때 마음 중심에서 감사했던 모세의 선을 기억하여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모든 것에 오직 감사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때에 귀히 쓰임 받는 좋은 그릇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나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모세의 선에 관한 내용입니다. 밑줄 친 부분에 정답을 써넣어 보세요.
① ___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___받는 것을 택했다.
② ___ 중에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것을 중심에서 ___했다.
2. 모세가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사랑의 고백을 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어리석어서 하나님에 대해 깨우치지 못했으나 이제는 정녕 지는 해를 보고도 그곳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나이다. 내가 취하고자 하여도 취하여지지 않고 갖고자 해도 가질 수 없는 이같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허무한 자인데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친히 부르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내 마음속에서 믿나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바로’란?
고대 애굽 왕들의 일반적인 호칭이다.
애굽어 ‘프로’의 음역으로 본래 ‘커다란 집’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점차 왕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추석 명절 감사 예배 순서와 예문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1. 추석 감사 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설교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독이 있는 불 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듯이 사고와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와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24-09-17
제0과추석 명절 감사 예배 순서와 예문
민수기 6:24~26
읽을말씀 : 민수기 6:24~26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1. 추석 감사 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설교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독이 있는 불 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듯이 사고와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와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1. 추석 감사 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 ------------------------- 460장 ---------------------- 다 같이
1.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 주시고
모든 일을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2. 몸도 맘도 연약하나 새 힘 받아 살았네
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사랑 없는 거리에나 험한 산길 헤맬 때
주의 손을 굳게 잡고 찬송하며 가리라
3.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설교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었으며, 독이 있는 불 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혼란이 더해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요.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기를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듯이 사고와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와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