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501 PAGE : 18/106
2021-10-22
제43과성령의 열매 (9) - 절제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잠언 25:28 | 참고 말씀: 잠언 16:32
교육목표 :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하여 절제함으로 삶의 질을 높이며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려야 하는 육상 경기로 페이스를 잘 조절해야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금방 끝나는 단거리 경기가 아니므로 선수들은 어느 한 구간만 빨리 달리거나 무조건 전력질주를 하지 않습니다. 전 코스 내내 흐트러짐 없이 달려야 하며, 적절한 지점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달리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결같은 성실로 끝까지 달려가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원한 천국에서 받을 영화로운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은 범사에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성령의 열매를 온전케 하는 절제
범사에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어지럽게 하고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도박이나 향락에 빠진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하겠다.”고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니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되어 결국 패가망신하고 말지요.
잠언 16장 32절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절제의 힘이 약하면 자신을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이제는 육을 취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지만, 번번이 세상 유혹에 넘어가 버리지요. 그러나 절제를 잘하면 죄도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죄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온전해지도록 조절해 줍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마지막 ‘절제’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다른 열매에 비해 두드러진 특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함으로 안정되고 단단하게 지탱해 주지요.
절제의 미덕은 삶의 질을 높여 주고 빛나게 하지만, 무절제한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하나님 일을 한다면서 절제하지 못함으로 덕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주부라면 가족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주 안에서의 모임이 충만하고 은혜롭다 하여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집에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온 집에 충성할 수 없지요. 반면에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아무리 사명이 많아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나중에 해야 할지, 앞으로 나가야 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 잠잠히 있어야 할지 분별할 줄 압니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의 미덕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합니다.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가만히 있어야 할 때,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분별하여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니 누구와도 변론하거나 다투지 않고 오해할 일이 없지요.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일이나 분수에 지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절제하지 못하면 질서를 무너뜨리고 월권하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가령, 선교회 회장이 총무에게 어떤 일을 지시했다고 합시다. 총무는 열정이 넘친 나머지 임의로 일을 변경해 버렸습니다. 총무는 일을 더 크게 이루었다는 데에만 의의를 둘 뿐 정작 자신이 질서를 깨뜨렸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지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정, 교회, 학교, 직장, 어디에서든 질서를 좇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진리를 행할 때도 대상과 시기, 장소 등을 고려할 줄 압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라 했다고 해서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나 심방을 할 때도 믿음의 분량에 맞게 말을 해야 합니다. 만일 영적인 깊은 말씀을 초신자나 전도자에게 무분별하게 전한다면 그 영혼을 실족시키거나 판단 정죄하게 만들 수도 있지요.
또한 바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자신이 깨달은 말씀이나 은혜 받은 체험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는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듣고는 있지만 초조하여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지요.
그러므로 항상 상대의 상황을 잘 고려하고 지금 대화를 해도 좋을는지 다음에 해야 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시기에 맞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경솔합니다. 서두르다 보면 분별력이 흐려져서 중요한 일들을 빠뜨리기도 하고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요. 또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고 자신의 생각 속에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을 뿐 아니라 무슨 말을 듣고 쉽게 요동하지도 않습니다. 차분히 상대의 말을 듣고 성령의 역사 속에 진실을 분별할 수 있지요. 매사에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면 잘못 판단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3.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첫째, 변개함 없는 마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거짓이 없고 간사함이 없는 마음, 진실한 마음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할 때 그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훈련을 쌓아가야 하지요.
작은 약속도 어기지 않고 지킬 때라야 큰 약속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지킬 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변개함 없는 마음이 되지요. 한번 마음을 정했다면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지 말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 결국 정한 마음이 되고 절제의 능력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둘째, 범사에 앞서지 말고 성령의 소욕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은 만큼 성령께서는 그 진리를 통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해도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성령의 음성이 먼저 들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 대화로 오해를 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도 당장 내가 보기에 급한 것,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해 나가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늘 성령의 소욕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 나가는 훈련을 할수록 점점 더 세미한 것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될 때 ‘내가 진리대로 지켜야겠다’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힘이 오지요. 기도도 ‘내가 1시간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1시간 하게 되고, 2시간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2시간 하게 됩니다. 하루에 말씀을 한 절씩 암송하고 한 장 이상 읽어야겠다고 결심하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행할 때 늘 질서 가운데 조화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두드러진 특성이 없지만 약방에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모든 약의 성질을 조화롭게 하여 약효를 잘 발휘하게 하는 감초처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를 조절하여 온전케 해 주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범사에 형통하고 보장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둔 세상에서 빛 된 권세와 능력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에 더욱 힘써 아버지 하나님 앞에 탐스럽고 아름다운 최상품의 열매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 )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 ) 조절해 준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날까요?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한다.
둘째, ( )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절제를 의미하는 ‘비취옥’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열 번째 기초석인 비취옥은 반투명의 청록색 빛이 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귀히 여기던 보석 중에 하나로 정숙함과 정결을 상징한다.
비취옥은 영적으로 절제를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서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교육목표 :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하여 절제함으로 삶의 질을 높이며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려야 하는 육상 경기로 페이스를 잘 조절해야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금방 끝나는 단거리 경기가 아니므로 선수들은 어느 한 구간만 빨리 달리거나 무조건 전력질주를 하지 않습니다. 전 코스 내내 흐트러짐 없이 달려야 하며, 적절한 지점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달리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결같은 성실로 끝까지 달려가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원한 천국에서 받을 영화로운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은 범사에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성령의 열매를 온전케 하는 절제
범사에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어지럽게 하고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도박이나 향락에 빠진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하겠다.”고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니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되어 결국 패가망신하고 말지요.
잠언 16장 32절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절제의 힘이 약하면 자신을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이제는 육을 취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지만, 번번이 세상 유혹에 넘어가 버리지요. 그러나 절제를 잘하면 죄도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죄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온전해지도록 조절해 줍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마지막 ‘절제’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다른 열매에 비해 두드러진 특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함으로 안정되고 단단하게 지탱해 주지요.
절제의 미덕은 삶의 질을 높여 주고 빛나게 하지만, 무절제한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하나님 일을 한다면서 절제하지 못함으로 덕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주부라면 가족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주 안에서의 모임이 충만하고 은혜롭다 하여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집에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온 집에 충성할 수 없지요. 반면에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아무리 사명이 많아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나중에 해야 할지, 앞으로 나가야 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 잠잠히 있어야 할지 분별할 줄 압니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의 미덕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합니다.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가만히 있어야 할 때,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분별하여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니 누구와도 변론하거나 다투지 않고 오해할 일이 없지요.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일이나 분수에 지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절제하지 못하면 질서를 무너뜨리고 월권하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가령, 선교회 회장이 총무에게 어떤 일을 지시했다고 합시다. 총무는 열정이 넘친 나머지 임의로 일을 변경해 버렸습니다. 총무는 일을 더 크게 이루었다는 데에만 의의를 둘 뿐 정작 자신이 질서를 깨뜨렸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지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정, 교회, 학교, 직장, 어디에서든 질서를 좇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진리를 행할 때도 대상과 시기, 장소 등을 고려할 줄 압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라 했다고 해서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나 심방을 할 때도 믿음의 분량에 맞게 말을 해야 합니다. 만일 영적인 깊은 말씀을 초신자나 전도자에게 무분별하게 전한다면 그 영혼을 실족시키거나 판단 정죄하게 만들 수도 있지요.
또한 바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자신이 깨달은 말씀이나 은혜 받은 체험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는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듣고는 있지만 초조하여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지요.
그러므로 항상 상대의 상황을 잘 고려하고 지금 대화를 해도 좋을는지 다음에 해야 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시기에 맞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경솔합니다. 서두르다 보면 분별력이 흐려져서 중요한 일들을 빠뜨리기도 하고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요. 또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고 자신의 생각 속에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을 뿐 아니라 무슨 말을 듣고 쉽게 요동하지도 않습니다. 차분히 상대의 말을 듣고 성령의 역사 속에 진실을 분별할 수 있지요. 매사에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면 잘못 판단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3.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첫째, 변개함 없는 마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거짓이 없고 간사함이 없는 마음, 진실한 마음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할 때 그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훈련을 쌓아가야 하지요.
작은 약속도 어기지 않고 지킬 때라야 큰 약속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지킬 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변개함 없는 마음이 되지요. 한번 마음을 정했다면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지 말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 결국 정한 마음이 되고 절제의 능력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둘째, 범사에 앞서지 말고 성령의 소욕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은 만큼 성령께서는 그 진리를 통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해도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성령의 음성이 먼저 들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 대화로 오해를 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도 당장 내가 보기에 급한 것,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해 나가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늘 성령의 소욕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 나가는 훈련을 할수록 점점 더 세미한 것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될 때 ‘내가 진리대로 지켜야겠다’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힘이 오지요. 기도도 ‘내가 1시간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1시간 하게 되고, 2시간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2시간 하게 됩니다. 하루에 말씀을 한 절씩 암송하고 한 장 이상 읽어야겠다고 결심하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행할 때 늘 질서 가운데 조화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두드러진 특성이 없지만 약방에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모든 약의 성질을 조화롭게 하여 약효를 잘 발휘하게 하는 감초처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를 조절하여 온전케 해 주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범사에 형통하고 보장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둔 세상에서 빛 된 권세와 능력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에 더욱 힘써 아버지 하나님 앞에 탐스럽고 아름다운 최상품의 열매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 )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 ) 조절해 준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날까요?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한다.
둘째, ( )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절제를 의미하는 ‘비취옥’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열 번째 기초석인 비취옥은 반투명의 청록색 빛이 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귀히 여기던 보석 중에 하나로 정숙함과 정결을 상징한다.
비취옥은 영적으로 절제를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서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2021-10-15
제42과성령의 열매 (8) - 온유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민수기 12:3 | 참고 말씀: 마태복음 5:5
교육목표 :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란 무엇인지 알아보고, 온유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수 있게 한다.
사전에 ‘온유’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남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선 부글부글하지만 눌러 참으면 “저 사람은 참으로 유(柔)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이 있으면서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1. 많은 사람을 품는 온유의 열매
영적으로 ‘온유’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德)을 겸한 마음이지요. 덕(德)이 있으면 마냥 유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절도 있고 반듯하며 위엄이 흐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의 마음은 솜털같이 포근합니다. 푹신한 솜털에 돌을 던지거나 바늘로 찔러도, 솜털은 소리 없이 감싸 안습니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걸림이 없습니다. 곧 상대로 인해 혈기를 내거나 서운해하지도 않지요. 불편해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 하지 않고 이해하며 감싸 줍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깃들이며 쉼을 얻지요. 마치 우람한 나무에 새들이 깃들여 보금자리를 짓고 쉼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낳지요.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온유함을 인정받았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대로이지요. 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번번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조금만 힘든 상황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했지요. 이러한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것만으로도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마음이 바로 영적인 온유함이며, 성령의 열매 중 온유의 열매에 속합니다.
2.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
사전에 ‘덕(德)’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습니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하지요. 덕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옵니다.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유순한 것만이 아니라 덕을 겸해야 합니다. 내면에 온유한 성품과 외면에 덕스러움을 갖춰야 영적으로 온유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과 같지요.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처럼 덕이 없는 온유는 그 가치를 다하지 못합니다.
덕은 온유함을 빛나게 하는 옷과 같은 것이지만 율법적이거나 외식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마음의 성결을 이루기보다 겉모습을 바르게 하는 데 치우치다 보면 자기 발견을 멈추고 스스로 영적인 성장을 이룬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도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민다 해서 뭇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지 않고 외면에 치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3. 온유한 사람의 특징
첫째, 반듯하고 위엄 있으며 절도 있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분별없이 순하기만 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무시당하고 이용을 당하기 쉽지요. 진정한 온유는 반듯하고 위엄과 절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외식을 책망하실 때에도 단호하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이지만 책망해야 할 때는 호되게 책망하셨지요. 그런 단호함과 의로움이 내면에 있는 사람은 언성을 높이거나 엄하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를 경솔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주의 교양이나 온전한 몸의 행실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덕 있는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무게가 있어 무익한 말이나 헛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복장도 때와 장소에 적합하게 하지요. 표정도 무뚝뚝하거나 차가운 것이 아니라 부드럽습니다. 모든 것을 반듯하게 하되 동시에 상대를 배려하여 편하게 하는 마음 씀씀이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 마음을 넓게 쓰는 긍휼과 자비의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곤고한 사람,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아 위로하고 은혜를 끼칩니다. 그런데 온유함이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핍박받으며 힘들게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기회가 될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고 상황을 살펴 구제합니다. 믿음으로 잘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지요.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안에 담고만 있느냐, 행함으로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느낄 때 큰 차이가 납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상대에게 은혜와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덕으로 인해 나타나는 충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받는다는 것은 상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급은 충성과 관련이 깊지요.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도, 마음이 온유한 것만 가지고 받는 상이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스럽게 표현될 때 결과적으로 충성의 열매를 맺으니 그로 인해 상을 받는 것입니다. 곧 많은 영혼을 덕스럽게 품어서 힘과 위로를 주고 생명을 심어 줄 때 천국의 땅을 상급으로 받게 되지요.
4.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해야 합니다. 혈기, 미움, 시기, 욕심, 다툼, 들렘, 자기 의 이런 것들을 뽑아내야 온유해지지요. 그래서 온유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보다도 성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옥토, 즉 온유한 마음이 되면 구하는 것마다 신속히 응답을 받습니다. 성령의 음성도 밝히 들어 나가므로 범사가 형통하지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땅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 영적인 온유함을 이룬 만큼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안에 깃들였던 모든 영혼을 다 초청하여 함께할 수 있을 만큼 큰 처소를 상급으로 받는다는 말이지요
천국에서 그렇게 큰 처소를 얻었다면 그만큼 영화로운 지위에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했다 해도 그것을 천국에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을 이룬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땅은 세세토록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기업입니다. 그 기업 안에서 주님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마음 밭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온유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 )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 ) 마음을 말한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을 겸한 마음이다.
2.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한다. ( )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온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온유함을 의미하는 ‘자정’
새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열두 번째 기초석이다.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으로, 빛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귀족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도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을 아름답다 하시는데,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바로 ‘온유’이다.
온유는 사랑장이나 팔복,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나온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가는 사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증거로 맺히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교육목표 :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란 무엇인지 알아보고, 온유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수 있게 한다.
사전에 ‘온유’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남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선 부글부글하지만 눌러 참으면 “저 사람은 참으로 유(柔)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이 있으면서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1. 많은 사람을 품는 온유의 열매
영적으로 ‘온유’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德)을 겸한 마음이지요. 덕(德)이 있으면 마냥 유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절도 있고 반듯하며 위엄이 흐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의 마음은 솜털같이 포근합니다. 푹신한 솜털에 돌을 던지거나 바늘로 찔러도, 솜털은 소리 없이 감싸 안습니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걸림이 없습니다. 곧 상대로 인해 혈기를 내거나 서운해하지도 않지요. 불편해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 하지 않고 이해하며 감싸 줍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깃들이며 쉼을 얻지요. 마치 우람한 나무에 새들이 깃들여 보금자리를 짓고 쉼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낳지요.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온유함을 인정받았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대로이지요. 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번번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조금만 힘든 상황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했지요. 이러한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것만으로도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마음이 바로 영적인 온유함이며, 성령의 열매 중 온유의 열매에 속합니다.
2.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
사전에 ‘덕(德)’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습니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하지요. 덕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옵니다.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유순한 것만이 아니라 덕을 겸해야 합니다. 내면에 온유한 성품과 외면에 덕스러움을 갖춰야 영적으로 온유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과 같지요.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처럼 덕이 없는 온유는 그 가치를 다하지 못합니다.
덕은 온유함을 빛나게 하는 옷과 같은 것이지만 율법적이거나 외식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마음의 성결을 이루기보다 겉모습을 바르게 하는 데 치우치다 보면 자기 발견을 멈추고 스스로 영적인 성장을 이룬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도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민다 해서 뭇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지 않고 외면에 치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3. 온유한 사람의 특징
첫째, 반듯하고 위엄 있으며 절도 있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분별없이 순하기만 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무시당하고 이용을 당하기 쉽지요. 진정한 온유는 반듯하고 위엄과 절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외식을 책망하실 때에도 단호하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이지만 책망해야 할 때는 호되게 책망하셨지요. 그런 단호함과 의로움이 내면에 있는 사람은 언성을 높이거나 엄하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를 경솔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주의 교양이나 온전한 몸의 행실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덕 있는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무게가 있어 무익한 말이나 헛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복장도 때와 장소에 적합하게 하지요. 표정도 무뚝뚝하거나 차가운 것이 아니라 부드럽습니다. 모든 것을 반듯하게 하되 동시에 상대를 배려하여 편하게 하는 마음 씀씀이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 마음을 넓게 쓰는 긍휼과 자비의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곤고한 사람,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아 위로하고 은혜를 끼칩니다. 그런데 온유함이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핍박받으며 힘들게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기회가 될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고 상황을 살펴 구제합니다. 믿음으로 잘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지요.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안에 담고만 있느냐, 행함으로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느낄 때 큰 차이가 납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상대에게 은혜와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덕으로 인해 나타나는 충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받는다는 것은 상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급은 충성과 관련이 깊지요.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도, 마음이 온유한 것만 가지고 받는 상이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스럽게 표현될 때 결과적으로 충성의 열매를 맺으니 그로 인해 상을 받는 것입니다. 곧 많은 영혼을 덕스럽게 품어서 힘과 위로를 주고 생명을 심어 줄 때 천국의 땅을 상급으로 받게 되지요.
4.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해야 합니다. 혈기, 미움, 시기, 욕심, 다툼, 들렘, 자기 의 이런 것들을 뽑아내야 온유해지지요. 그래서 온유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보다도 성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옥토, 즉 온유한 마음이 되면 구하는 것마다 신속히 응답을 받습니다. 성령의 음성도 밝히 들어 나가므로 범사가 형통하지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땅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 영적인 온유함을 이룬 만큼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안에 깃들였던 모든 영혼을 다 초청하여 함께할 수 있을 만큼 큰 처소를 상급으로 받는다는 말이지요
천국에서 그렇게 큰 처소를 얻었다면 그만큼 영화로운 지위에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했다 해도 그것을 천국에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을 이룬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땅은 세세토록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기업입니다. 그 기업 안에서 주님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마음 밭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온유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 )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 ) 마음을 말한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을 겸한 마음이다.
2.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한다. ( )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온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온유함을 의미하는 ‘자정’
새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열두 번째 기초석이다.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으로, 빛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귀족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도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을 아름답다 하시는데,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바로 ‘온유’이다.
온유는 사랑장이나 팔복,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나온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가는 사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증거로 맺히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2021-10-08
제41과성령의 열매 (7) - 충성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잠언 25:13 | 참고 말씀: 시편 101:6, 요한계시록 2:10
교육목표 :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을 하여 하나님 나라를 크게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을 보면 ‘충성’은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혹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자신을 바치고 지조를 굽히지 않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도 충성된 사람은 신뢰하고 칭찬할 만한 사람으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충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 해서 그 행위만으로 충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정한 분야에만 생명 다하기까지 열정을 쏟는다 해서 온전한 충성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과 정성을 다해 맡겨진 일 이상 감당해야 충성
급여를 받는 직원이 자신의 업무를 잘 감당했다 해서 그것만으로 ‘충성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책임을 완수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삯을 받은 만큼 한 것이므로 충성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요.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명을 넘치게 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은 만큼은 해야지’ 하는 계산적인 마음이나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자기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넘치도록 감당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또 책임을 지는 분야에 있어서도 마음에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책임을 다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경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는 기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을 전했지만 그들이 불순종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정성을 다해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도 자신이 그런 것처럼 책임을 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해 오던 중 구성원들 때문에 일이 잘못되거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저도 많이 괴로웠습니다.” 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내가 할 바는 다 했기에 떳떳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은 충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이라면 “나는 책임이 없다.” 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셨는지를 먼저 떠올리며 영적인 충성을 하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이란?
어떤 사람이 범죄 조직에 들어가 그 두목에게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충성되다 하실까요? 선과 진리 속에서 충성할 때라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어느 순간 사명을 놓거나 충성이 식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충성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마음의 할례를 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하나님 말씀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충성을 하려면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할례 없이 사명만 감당한다고 충성했다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비진리에 속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죽이고 성결되는 것이 곧 영적인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성결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온전히 성결되기까지 다른 사명은 감당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직분이나 사명을 맡더라도 항상 마음의 할례를 함께 이뤄가야 하지요. 그런 사람은 변함없이 사명 감당도 잘합니다.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오거나 마음의 연단이 있어도 사명을 놓거나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성결된 마음으로 사명 감당할 때 더 많은 상급을 쌓을 수 있습니다.
3. 주인의 마음에 맞게 순종해야 충성
잠언 25장 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해도 자신의 뜻대로 한다면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사장님이 직원에게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까 꼭 사무실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기자 이 직원이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습니다. 사장님이 그에게 잘했다고 할까요? 회사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불순종하였기에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생각과 욕심을 좇아 일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인의 뜻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보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춰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충성한들 어찌 그것이 상급이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비진리가 아닌 이상 윗분의 의중에 맞춰서 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않고, 좋은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4. 온 집에 충성이란?
자신이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두루 충성하는 것을 온 집에 충성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특별한 사명이 없다 해도 성도로서, 각종 모임에 속한 회원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충성의 한 분야이지요. 가정, 직장,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속한 구성원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학생으로서, 직원으로서 모든 본분을 다할 때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한두 가지 분야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좀 소홀히 한다면 온전한 충성이라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몸은 하나인데 어떻게 모든 분야에 충성할 수 있을까요? 영으로 변화되면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A 모임에서는 회장이고 B 모임에서는 회원이라고 합시다. 이때 충성의 열매가 맺히면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습니다. “나는 A 모임의 머리니까, B 모임에 가지 않아도 이해하겠지?” 하지 않습니다. B 모임에 가지 못할 상황이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마음을 쓰며 힘이 되려고 합니다. 이렇게 선이 있는 만큼 온 집에 충성할 수 있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도 이룰 수 있습니다.
혹 예전에는 사명도 사모하고 충성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맡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사명은 그대로라 해도 처음 뜨거웠던 마음이 식지는 않았는지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충성도 승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장차 천국에서는 얼마나 값진 상급으로 받겠습니까?
시편 101편 6절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보좌 가까이 거하는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 )를 하는 작업을 말한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 )을 이루는 것이다.
2.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 )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천국에서 상급으로 받는 면류관
법대로 경기한 자가 받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받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 계 2:10), 이십사 장로들이 쓰는 금면류관(계 4:4, 14:14),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던 의의 면류관(딤후 4:8)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금장식관, 꽃으로 장식된 화관, 영롱한 진주로 만들어진 진주관, 투명한 크리스털 위에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크리스털관 등 다양한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교육목표 :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을 하여 하나님 나라를 크게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을 보면 ‘충성’은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혹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자신을 바치고 지조를 굽히지 않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도 충성된 사람은 신뢰하고 칭찬할 만한 사람으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충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 해서 그 행위만으로 충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정한 분야에만 생명 다하기까지 열정을 쏟는다 해서 온전한 충성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과 정성을 다해 맡겨진 일 이상 감당해야 충성
급여를 받는 직원이 자신의 업무를 잘 감당했다 해서 그것만으로 ‘충성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책임을 완수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삯을 받은 만큼 한 것이므로 충성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요.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명을 넘치게 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은 만큼은 해야지’ 하는 계산적인 마음이나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자기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넘치도록 감당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또 책임을 지는 분야에 있어서도 마음에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책임을 다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경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는 기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을 전했지만 그들이 불순종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정성을 다해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도 자신이 그런 것처럼 책임을 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해 오던 중 구성원들 때문에 일이 잘못되거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저도 많이 괴로웠습니다.” 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내가 할 바는 다 했기에 떳떳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은 충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이라면 “나는 책임이 없다.” 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셨는지를 먼저 떠올리며 영적인 충성을 하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이란?
어떤 사람이 범죄 조직에 들어가 그 두목에게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충성되다 하실까요? 선과 진리 속에서 충성할 때라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어느 순간 사명을 놓거나 충성이 식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충성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마음의 할례를 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하나님 말씀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충성을 하려면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할례 없이 사명만 감당한다고 충성했다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비진리에 속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죽이고 성결되는 것이 곧 영적인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성결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온전히 성결되기까지 다른 사명은 감당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직분이나 사명을 맡더라도 항상 마음의 할례를 함께 이뤄가야 하지요. 그런 사람은 변함없이 사명 감당도 잘합니다.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오거나 마음의 연단이 있어도 사명을 놓거나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성결된 마음으로 사명 감당할 때 더 많은 상급을 쌓을 수 있습니다.
3. 주인의 마음에 맞게 순종해야 충성
잠언 25장 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해도 자신의 뜻대로 한다면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사장님이 직원에게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까 꼭 사무실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기자 이 직원이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습니다. 사장님이 그에게 잘했다고 할까요? 회사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불순종하였기에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생각과 욕심을 좇아 일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인의 뜻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보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춰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충성한들 어찌 그것이 상급이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비진리가 아닌 이상 윗분의 의중에 맞춰서 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않고, 좋은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4. 온 집에 충성이란?
자신이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두루 충성하는 것을 온 집에 충성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특별한 사명이 없다 해도 성도로서, 각종 모임에 속한 회원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충성의 한 분야이지요. 가정, 직장,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속한 구성원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학생으로서, 직원으로서 모든 본분을 다할 때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한두 가지 분야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좀 소홀히 한다면 온전한 충성이라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몸은 하나인데 어떻게 모든 분야에 충성할 수 있을까요? 영으로 변화되면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A 모임에서는 회장이고 B 모임에서는 회원이라고 합시다. 이때 충성의 열매가 맺히면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습니다. “나는 A 모임의 머리니까, B 모임에 가지 않아도 이해하겠지?” 하지 않습니다. B 모임에 가지 못할 상황이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마음을 쓰며 힘이 되려고 합니다. 이렇게 선이 있는 만큼 온 집에 충성할 수 있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도 이룰 수 있습니다.
혹 예전에는 사명도 사모하고 충성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맡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사명은 그대로라 해도 처음 뜨거웠던 마음이 식지는 않았는지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충성도 승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장차 천국에서는 얼마나 값진 상급으로 받겠습니까?
시편 101편 6절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보좌 가까이 거하는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 )를 하는 작업을 말한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 )을 이루는 것이다.
2.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 )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천국에서 상급으로 받는 면류관
법대로 경기한 자가 받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받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 계 2:10), 이십사 장로들이 쓰는 금면류관(계 4:4, 14:14),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던 의의 면류관(딤후 4:8)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금장식관, 꽃으로 장식된 화관, 영롱한 진주로 만들어진 진주관, 투명한 크리스털 위에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크리스털관 등 다양한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2021-10-01
제40과성령의 열매 (6) - 양선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2:19~20 | 참고 말씀: 마태복음 12:35
교육목표 : 성령 안에서 범사에 선을 추구하며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양심이란?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같지는 않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또 40~5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2. 양선의 열매란?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는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마 12:35).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진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그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를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응급조치는 해줄 수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면서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야 할 책임은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선을 추구하며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유가 있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했어야 했는데’ 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범사에 선을 택해 나가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의 열매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2. 양선이란 ( )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 )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3. ( )는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 )는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에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결국 함락된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자연히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목표 : 성령 안에서 범사에 선을 추구하며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양심이란?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같지는 않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또 40~5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2. 양선의 열매란?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는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마 12:35).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진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그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를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응급조치는 해줄 수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면서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야 할 책임은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선을 추구하며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유가 있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했어야 했는데’ 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범사에 선을 택해 나가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의 열매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2. 양선이란 ( )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 )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3. ( )는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 )는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에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결국 함락된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자연히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2021-09-24
제39과성령의 열매 (5) - 자비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누가복음 6:32 , 참고 말씀 / 야고보서 2장
교육목표 : 자비의 영적인 의미와 특징에 대해 밝히 알아보고 자비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거나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 으로 포용할 수 있지요. “누구는 이래서 좋고, 누구는 저래서 싫다.” 하지 않습니다. 싫은 사람도,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도 없고 원수는 더더욱 없지요.
1. 자비의 열매란?
사전에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자비의 영적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또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비의 마음으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시편 130편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고 공의대로만 판결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또한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자비하길 원하십니다(눅 6:36). 자비의 마음은 사랑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영적인 사랑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비는 용서와 포용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오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위로가 되어 줍니다. 상대방을 감싸는 따뜻한 마음이 되면 티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포용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임에도 예수님은 용서함으로써 여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2. 영적인 자비의 특성
1) 편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부유하고 명예 있는 사람을 대할 때와 가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했습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직 재판관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누구도 형제를 정죄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징계받는 이를 볼 때 긍휼히 여기며 그가 힘을 내어 잘 통과하기를 바라고 기도해 주게 되지요.
2)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말로만 “힘내세요!”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실질적으로 힘이 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말씀했습니다.
진실한 구제는 상대가 굶고 있는데 ‘나도 한 끼 먹을 양식뿐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지요. 더구나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갈 영혼들을 본다면 어찌하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곧 자비의 마음입니다.
3)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때로는 지적이나 책망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덮어 주고 용서한다면 상대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이 있다면 징계나 책망, 지적도 쉽게 하지 못합니다. 한마디 지적을 한다 해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지요.
잠언 12장 18절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했습니다. 특히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님에게는 이런 비진리의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집사님은 이러한 결점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사랑받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자기 의와 틀 속에 사랑이 없이 지적할 때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지적을 받고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결코 찌르거나 허물을 들춰내어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필요해서 권면한다 해도 상대의 입장에서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으로 해야 생명과 능력이 되어 변화될 수 있지요.
4) 모든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자비의 마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사랑합니다. 대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 자비의 열매가 맺히지요.
스데반 집사는 악한 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수 갚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사랑의 기도를 올렸지요.
혹여 아직도 내 마음에 싫고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좁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성격과 의견이 맞지 않아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며 이해하게 되지요. 만일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이 있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5) 상대에게 공적을 돌립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잘한 일이 있을 때 상대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허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함께 일해서 열매를 냈는데 상대만 칭찬받는다 해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사실은 내가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저 사람만 칭찬하시네?” 이런 생각으로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분이 칭찬을 받았으니 이제 자신감도 생기고 힘을 내서 더 잘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요.
만일 엄마의 도움으로 자녀가 상을 받았다면 엄마는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자녀뿐 아니라 누구라도, 상대를 앞세울 수 있고 그에게 공적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로를 인정받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자비의 영적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고, 사람으로서는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다.
2.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의 특징을 말해 보세요.
① 편견이 없다. ② ( )
③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는다. ④ ( )
⑤ 상대에게 공적을 돌린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스데반 집사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모함하고 고소하였다. 이에 스데반이
설교를 통해 그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수 있도록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교육목표 : 자비의 영적인 의미와 특징에 대해 밝히 알아보고 자비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한다
사람들은 종종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고 해도 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거나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고 사랑 으로 포용할 수 있지요. “누구는 이래서 좋고, 누구는 저래서 싫다.” 하지 않습니다. 싫은 사람도, 미운 사람도 없습니다.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도 없고 원수는 더더욱 없지요.
1. 자비의 열매란?
사전에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자비의 영적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또 사람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비의 마음으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시편 130편 3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고 공의대로만 판결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또한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까지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자비하길 원하십니다(눅 6:36). 자비의 마음은 사랑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영적인 사랑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비는 용서와 포용의 성격이 더 강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오해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위로가 되어 줍니다. 상대방을 감싸는 따뜻한 마음이 되면 티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포용하여 아름다운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 간음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십니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죄임에도 예수님은 용서함으로써 여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의 마음입니다.
2. 영적인 자비의 특성
1) 편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부유하고 명예 있는 사람을 대할 때와 가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대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거나 마음 자세가 달라지는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나 부족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 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말씀했습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상대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직 재판관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누구도 형제를 정죄할 권한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징계받는 이를 볼 때 긍휼히 여기며 그가 힘을 내어 잘 통과하기를 바라고 기도해 주게 되지요.
2)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즐겨 구제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말로만 “힘내세요!” 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실질적으로 힘이 되도록 돕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6절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말씀했습니다.
진실한 구제는 상대가 굶고 있는데 ‘나도 한 끼 먹을 양식뿐이니 어쩔 수 없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하지요. 더구나 주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갈 영혼들을 본다면 어찌하든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곧 자비의 마음입니다.
3)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한다면 때로는 지적이나 책망도 해야 합니다. 무조건 덮어 주고 용서한다면 상대가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마음이 있다면 징계나 책망, 지적도 쉽게 하지 못합니다. 한마디 지적을 한다 해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하지요.
잠언 12장 18절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했습니다. 특히 성도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님에게는 이런 비진리의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집사님은 이러한 결점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사랑받지 못합니다.” 이런 말을 쉽게 하는 경우가 있지요.
아무리 맞는 말이라 해도 자기 의와 틀 속에 사랑이 없이 지적할 때는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지적을 받고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여 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결코 찌르거나 허물을 들춰내어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필요해서 권면한다 해도 상대의 입장에서 그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으로 해야 생명과 능력이 되어 변화될 수 있지요.
4) 모든 사람에게 관대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자비의 마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사랑합니다. 대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줄 때 자비의 열매가 맺히지요.
스데반 집사는 악한 자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수 갚아 달라고 하지 않았고 사랑의 기도를 올렸지요.
혹여 아직도 내 마음에 싫고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마음이 좁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성격과 의견이 맞지 않아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며 이해하게 되지요. 만일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느낌이 있다면 좋은 느낌으로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5) 상대에게 공적을 돌립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잘한 일이 있을 때 상대의 공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허물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이 있으면 함께 일해서 열매를 냈는데 상대만 칭찬받는다 해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사실은 내가 일을 더 많이 했는데 저 사람만 칭찬하시네?” 이런 생각으로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분이 칭찬을 받았으니 이제 자신감도 생기고 힘을 내서 더 잘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요.
만일 엄마의 도움으로 자녀가 상을 받았다면 엄마는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자비의 열매가 맺히면 자녀뿐 아니라 누구라도, 상대를 앞세울 수 있고 그에게 공적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공로를 인정받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자비의 영적 의미는 단순히 상대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능히 이해하고, 사람으로서는 ( )할 수 없는 사람도 진리 안에서
용서하는 마음이다.
2.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의 특징을 말해 보세요.
① 편견이 없다. ② ( )
③ 상대를 함부로 지적하지 않는다. ④ ( )
⑤ 상대에게 공적을 돌린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스데반 집사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많이
행하고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을 모함하고 고소하였다. 이에 스데반이
설교를 통해 그들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할 수 있도록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오히려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다.
2021-09-21
제0과추석 명절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민수기 6:24~26
읽을말씀 : 민수기 6:24~26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308장 ---------------------- 다 같이
1.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 빛에 향기 진동하도다
2.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심히 적으니
열심 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3. 먼동 틀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4. 거둬 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 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후렴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기회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합시다 아멘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설 교 --------------------- 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전염병으로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사고,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5절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수고하여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경에도 풍성한 수확물로 인해 행복, 기쁨, 감사가 넘치는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린 절기이지요.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도 지키시며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드리겠습니다.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308장 ---------------------- 다 같이
1.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 빛에 향기 진동하도다
2.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심히 적으니
열심 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3. 먼동 틀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4. 거둬 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 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후렴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기회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합시다 아멘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민수기 6:24~26 ------------------- 인도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설 교 --------------------- 복된 가정 --------------------- 설교자
2. 설교 예문
민수기 6장 24~26절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전염병으로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24절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사고, 질병, 재앙이 많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 있고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온 가족이 하나님 뜻대로 행하여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5절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스승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이처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 소망 가운데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주기 원하십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축복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21-09-17
제38과성령의 열매 (4) - 오래 참음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시편 126:5 | 참고 말씀: 마가복음 11:24, 고린도전서 13:4~7
교육목표 :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아 모든 삶 속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삶 속에서 ‘참느냐, 참지 못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자녀 간에, 부부나 형제, 친구 사이에 서로 참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기도 합니다. 또 이에 따라 학업이나 직장생활, 사업 등의 성패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1.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오래 참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래 참음과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참기는 하지만 대부분 육적인 인내를 합니다.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참느라고 얼마나 고통받습니까?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병을 얻기도 하지요.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입니다. 선으로 참을 때는 힘든 일도 소망 중에 감사함으로 이겨내며 결국 더 큰 마음이 됩니다. 하지만 악으로 참으면 감정이 쌓여 병이 되거나 점점 심성이 거칠어지지요.
가령, 누가 애매하게 욕하며 고통을 줄 때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참아야지.” 하면서 억지로 참습니다. 점점 얼굴이 상기되고 숨이 거칠어지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한계에 부딪히면 터지고 말지요. 이는 육적인 참음입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의 열매가 맺히면 어떤 일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애매히 비난받아도 “오해가 있나 보다.” 하며 어찌하든 상대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하지요. 그러니 ‘참는다’거나 ‘용서한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2. 오래 참음의 열매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의 오래 참음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위해서든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애통도 있고 진액을 다하는 수고도 따르지요. 그러나 그 열매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을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많을수록 오래 참기가 어렵습니다. 혈기, 교만, 욕심, 자기 의와 틀이 강하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고 감정과 서운함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오래 참는 것도 더 쉽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지요.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곧 옥토와 같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자기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결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등 부단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나가야 하지요.
예전에 좋아하던 것도 영적으로 유익이 되지 않으면 끊어 버려야 합니다. 힘들다고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되고 몇 번 해 보고 그쳐서도 안 되지요. 성결의 열매를 온전히 거둘 때까지 부단히 수고하고 절제하며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를 뽑기 전까지는 참지 못할 상황이나 억울한 일을 만나면 전과 같은 비진리가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기도하여 버린 줄 알았던 비진리가 또 발견되니 스스로 실망하여 지치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발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또 나오지만 계속 벗기다 보면 완전히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온전히 변화될 자신의 모습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람들은 자라 온 환경, 배움, 성격, 교양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특히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사사건건 걸리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니 상대 탓하며 “저 사람은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이 안 맞아서 도저히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성격, 생활 습관, 취향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서로 양보하고 참으며 맞춰가는 것이지요.
성결을 사모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참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설령 그가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해 줄 수 있어야 하지요.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영혼들을 전도하고 심방할 때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진리로 가르쳐도 변화가 더딘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혹여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변화되리라는 소망으로 참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키울 때도 많은 세월을 참고 인내해야 하지요. 당장 일이 더딘 것 같고 열매가 부족하다 해도 “당신은 안 되겠으니까 그만두세요.” 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능력 있는 사람이 혼자 감당하면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의 씨를 심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래 참으면 결국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이 되고,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지요. 인내의 씨로 심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로 거두게 하십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응답받기까지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합니다. 참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응답받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가령, 학교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이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수업 시간에는 딴청을 부리면 결코 1등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루게 하시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수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오래 참지 못하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편에서는 너무 급한데 바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합당할 때 응답을 주십니다. 만일 기도 제목이 크고 중요하다면 공의에 맞게 그만큼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매달리다가도 금방 응답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응답받았다고 믿고 기도했다면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내가 믿고 기도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응답받을 믿음이 있다면 열매를 얻기까지 변함없이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시편 126편 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에는 수고와 눈물과 애통이 따르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수확의 기쁨이 있음을 믿고 변함없이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2.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 )을 ( )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② ( )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③ ( )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운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덟 번째 기초석인 녹옥은 파란색 혹은 연한 청록색의 보석으로 바다의 물빛을 연상할 수 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 자신을 핍박하고 저주하거나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오래 참는 것을 뜻한다.
교육목표 :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아 모든 삶 속에서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삶 속에서 ‘참느냐, 참지 못하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자녀 간에, 부부나 형제, 친구 사이에 서로 참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낳기도 합니다. 또 이에 따라 학업이나 직장생활, 사업 등의 성패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1.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오래 참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래 참음과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참기는 하지만 대부분 육적인 인내를 합니다. 감정 상할 일이 생기면 참느라고 얼마나 고통받습니까?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병을 얻기도 하지요.
영적인 오래 참음은 악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참는 것입니다. 선으로 참을 때는 힘든 일도 소망 중에 감사함으로 이겨내며 결국 더 큰 마음이 됩니다. 하지만 악으로 참으면 감정이 쌓여 병이 되거나 점점 심성이 거칠어지지요.
가령, 누가 애매하게 욕하며 고통을 줄 때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참아야지.” 하면서 억지로 참습니다. 점점 얼굴이 상기되고 숨이 거칠어지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한계에 부딪히면 터지고 말지요. 이는 육적인 참음입니다.
영적인 오래 참음의 열매가 맺히면 어떤 일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애매히 비난받아도 “오해가 있나 보다.” 하며 어찌하든 상대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하지요. 그러니 ‘참는다’거나 ‘용서한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2. 오래 참음의 열매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 했는데, 이 말씀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참아야 하는 상황들을 만납니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이 사랑장의 오래 참음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오래 참음’은 모든 것에 대한 오래 참음으로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한 차원 더 높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든, 자신의 성결이나 소원을 위해서든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애통도 있고 진액을 다하는 수고도 따르지요. 그러나 그 열매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믿음과 사랑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을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많을수록 오래 참기가 어렵습니다. 혈기, 교만, 욕심, 자기 의와 틀이 강하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고 감정과 서운함이 생깁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오래 참는 것도 더 쉽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지요.
누가복음 8장 15절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곧 옥토와 같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자기 마음 밭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결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등 부단히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나가야 하지요.
예전에 좋아하던 것도 영적으로 유익이 되지 않으면 끊어 버려야 합니다. 힘들다고 중간에 쉬어서는 안 되고 몇 번 해 보고 그쳐서도 안 되지요. 성결의 열매를 온전히 거둘 때까지 부단히 수고하고 절제하며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죄성의 근본 뿌리를 뽑기 전까지는 참지 못할 상황이나 억울한 일을 만나면 전과 같은 비진리가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기도하여 버린 줄 알았던 비진리가 또 발견되니 스스로 실망하여 지치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발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또 나오지만 계속 벗기다 보면 완전히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온전히 변화될 자신의 모습을 소망하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사람들은 자라 온 환경, 배움, 성격, 교양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생각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특히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은 상대와 의견이 안 맞으면 사사건건 걸리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니 상대 탓하며 “저 사람은 사고방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성격이 안 맞아서 도저히 같이 일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성격, 생활 습관, 취향이 맞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서로 양보하고 참으며 맞춰가는 것이지요.
성결을 사모한다면 어떤 상황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참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설령 그가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해 줄 수 있어야 하지요.
특히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영혼들을 전도하고 심방할 때도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랜 세월 진리로 가르쳐도 변화가 더딘 영혼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혹여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변화되리라는 소망으로 참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키울 때도 많은 세월을 참고 인내해야 하지요. 당장 일이 더딘 것 같고 열매가 부족하다 해도 “당신은 안 되겠으니까 그만두세요.” 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능력 있는 사람이 혼자 감당하면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일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실족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의 씨를 심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들이 변화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면서 오래 참으면 결국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이 되고,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지지요. 인내의 씨로 심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의 열매로 거두게 하십니다.
3)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응답받기까지의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합니다. 참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응답받기 위해서는 기도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가령, 학교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이 전교 1등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수업 시간에는 딴청을 부리면 결코 1등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루게 하시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수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오래 참지 못하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편에서는 너무 급한데 바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가장 합당할 때 응답을 주십니다. 만일 기도 제목이 크고 중요하다면 공의에 맞게 그만큼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하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매달리다가도 금방 응답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응답받았다고 믿고 기도했다면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다만 얼마나 내가 믿고 기도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응답받을 믿음이 있다면 열매를 얻기까지 변함없이 기도하며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시편 126편 5절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과정에는 수고와 눈물과 애통이 따르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공의의 법칙에 따라 수확의 기쁨이 있음을 믿고 변함없이 행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오래 참음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2. 성령의 열매 중 오래 참음을 크게 세 분야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 ( )을 ( )하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② ( )에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③ ( )께 대한 오래 참음입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오래 참음을 의미하는 ‘녹옥’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운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여덟 번째 기초석인 녹옥은 파란색 혹은 연한 청록색의 보석으로 바다의 물빛을 연상할 수 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 자신을 핍박하고 저주하거나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오래 참는 것을 뜻한다.
2021-09-10
제37과성령의 열매 (3) - 화평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히브리서 12:14 | 참고 말씀: 로마서 12:18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화평과 그 열매를 맺는 방법에 대해 알려 준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아가 살아 있으면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판단되면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다수가 찬성하여 결정한 일도 자기 유익과 맞지 않으면 원망 불평하지요. 상대의 단점을 보며 깎아내리기도 하고, 안 좋은 말을 전달하여 이간질합니다. 이처럼 화평을 깨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문제가 생기고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1. 화평의 열매를 맺으면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아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했고, 히브리서 12장 14절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모 자녀 간에, 이웃 간에는 물론 모든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과도 마찬가지이지요.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고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거리를 내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여 열매를 냈다 해도 화평이 깨지면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너무나 친밀했던 하나님이 두렵고 멀게만 느껴졌지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이 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진리 안에서 행할 때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화평을 이루려면 마음의 죄악을 다 벗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치 못해도 각자 믿음의 분량 안에서 열심히 진리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이루었다고 봐주십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화평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직장 동료 간에 화평을 이룬다며 정작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려서는 안 되지요. 만일 믿음이 없는 가족과 화평하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한다면 잠시 화평을 이룬 듯하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결혼식 때문에 주일을 어기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하나님과 화평을 깨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과 화평을 이루려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좋지 않은 환경과 맞닥뜨렸을 때 악이 발동하여 마음의 화평이 깨져 버립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화평한 것 같아도, 어떤 환경과 조건이 악과 결부되면 이내 화평이 깨지지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진리를 택할 때 평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진리를 행한다고 하는데도 마음에 참 평안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리 안에서 잘못 만들어진 자기 의와 틀로 인해 자신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자기 의'란 자기 보기에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자기 틀'이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단단히 굳어진 것입니다.
가령, 연단받기 전의 욥처럼 열심히 기도도 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어떤 징계가 올까 두려워서 행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장이 정체하기도 하고, 얼굴에 기쁨이 사라지지요.
결국 자기 의와 틀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이런 경우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깨닫는 만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대로 행하는데도 부정적인 사고의 틀로 인해 자신과의 화평을 깹니다. 진리대로 행하는데 만족할 만한 결과가 없으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낙심하고 자책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믿는 아이들은 잘못해도 주눅 들어 숨지 않습니다. 더 애교를 부리면서 엄마의 품에 안겨 들지요. 내가 아직 부족해도 변화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연단받아 철저히 낮아질 때도 더 높여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장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초조해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과 행함을 계속 쌓아 가면 자신과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영적인 담대함이 오지요.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다음으로,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신과도 화평한 사람이라면 사람들과도 화평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과 교만, 자존심을 버렸을 것이고, 자기 의와 틀도 깨뜨렸을 것이니, 누구와 걸릴 일도 다툴 일도 없지요. 만약 상대가 악하여 화평을 깨려고 해도 섬기고 희생함으로 화평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지요.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기 자신과 화평하며 모든 사람과 화평한 사람은 어둠을 물리치는 권세가 따릅니다. 그래서 주변에도 화평을 이뤄줄 수 있지요.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 빛의 권세가 따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순히 남자만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뜻하지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자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희생하고 화평함을 좇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영적인 권세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움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의 영적인 뜻을 써 보세요.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과 화평해야 합니다.
② ( )과 화평을 이뤄야 합니다.
③ ( )과 화평해야 합니다.
3. 화평의 열매를 맺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선악과와 생명과일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과일 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있다. 두 나무의 열매는 모양이나 빛깔이 달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크기는 둘 다 메론만 하다. 선악과는 복숭아와 비슷한 모양이며 분홍빛을 띤다.
생명과일은 사과와 비슷한 모양에 홍조를 띤다. 아주 빨갛지 않고 약간의 홍조를 띤 아름다운 빛깔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을 먹도록 허락하시되, 단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 명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기고 먹음으로 저주를 받았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인 화평과 그 열매를 맺는 방법에 대해 알려 준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아가 살아 있으면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더 옳다고 판단되면 상대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합니다. 다수가 찬성하여 결정한 일도 자기 유익과 맞지 않으면 원망 불평하지요. 상대의 단점을 보며 깎아내리기도 하고, 안 좋은 말을 전달하여 이간질합니다. 이처럼 화평을 깨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문제가 생기고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1. 화평의 열매를 맺으면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아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했고, 히브리서 12장 14절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화평이란, 비록 내가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맞춰 줄 수 있고, 내 믿음이 크다 하더라도 믿음이 작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곧 진리 안에서 이것도 저것도 가한 융통성 있는 마음이며,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을 수 있고, 편벽되이 치우치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거나 상대의 단점을 보지 않음으로 어느 누구와도 걸리지 않는 마음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모 자녀 간에, 이웃 간에는 물론 모든 사람과도 화평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과도 마찬가지이지요.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고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송사거리를 내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여 열매를 냈다 해도 화평이 깨지면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너무나 친밀했던 하나님이 두렵고 멀게만 느껴졌지요. 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이 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진리 안에서 행할 때는 하나님과 화평하고 무엇이든지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온전한 화평을 이루려면 마음의 죄악을 다 벗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치 못해도 각자 믿음의 분량 안에서 열심히 진리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이루었다고 봐주십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서 화평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직장 동료 간에 화평을 이룬다며 정작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려서는 안 되지요. 만일 믿음이 없는 가족과 화평하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한다면 잠시 화평을 이룬 듯하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결혼식 때문에 주일을 어기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사람과 화평하기 위해 하나님과 화평을 깨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하겠습니다.
2)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과 화평을 이루려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좋지 않은 환경과 맞닥뜨렸을 때 악이 발동하여 마음의 화평이 깨져 버립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릴 때는 화평한 것 같아도, 어떤 환경과 조건이 악과 결부되면 이내 화평이 깨지지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진리를 택할 때 평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진리를 행한다고 하는데도 마음에 참 평안이 없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리 안에서 잘못 만들어진 자기 의와 틀로 인해 자신과 화평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자기 의'란 자기 보기에 옳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고, '자기 틀'이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단단히 굳어진 것입니다.
가령, 연단받기 전의 욥처럼 열심히 기도도 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어떤 징계가 올까 두려워서 행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장이 정체하기도 하고, 얼굴에 기쁨이 사라지지요.
결국 자기 의와 틀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이런 경우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깨닫는 만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대로 행하는데도 부정적인 사고의 틀로 인해 자신과의 화평을 깹니다. 진리대로 행하는데 만족할 만한 결과가 없으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낙심하고 자책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믿는 아이들은 잘못해도 주눅 들어 숨지 않습니다. 더 애교를 부리면서 엄마의 품에 안겨 들지요. 내가 아직 부족해도 변화되려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온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연단받아 철저히 낮아질 때도 더 높여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당장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초조해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과 행함을 계속 쌓아 가면 자신과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영적인 담대함이 오지요.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려면 무엇보다 자기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되 생명까지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것, 내 입장, 내 스타일 등을 고집하는 자아가 없어야 모든 사람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무례히 행치 않고 자신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습니다. 중심에서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며 한쪽으로 편벽되지도 않지요.
다음으로, 자기 의와 틀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자란 환경이 다릅니다. 교육받은 내용도 믿음의 분량도 다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고 좋고 나쁨의 기준도 다릅니다. A는 옳다고 해도 B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해서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 입장, 내 기준에 맞추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섬길 때라야 화평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신과도 화평한 사람이라면 사람들과도 화평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과 교만, 자존심을 버렸을 것이고, 자기 의와 틀도 깨뜨렸을 것이니, 누구와 걸릴 일도 다툴 일도 없지요. 만약 상대가 악하여 화평을 깨려고 해도 섬기고 희생함으로 화평을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화평을 이루는 과정에서 깨우쳐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감정도 없고 화평한데 상대가 나와 화평을 깬다.” 할 때 정말 상대 탓인가 하는 점입니다. 고의는 아닌데 내가 화평을 깨는 원인 제공을 해 놓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부지중에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럴 때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나는 상대에게 감정이 없다.”고 고집한다면 결국 화평이 이뤄질 수가 없지요.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내가 화평을 좇는 사람으로 보이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화평을 이루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고 자기 자신과 화평하며 모든 사람과 화평한 사람은 어둠을 물리치는 권세가 따릅니다. 그래서 주변에도 화평을 이뤄줄 수 있지요.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 빛의 권세가 따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순히 남자만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뜻하지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자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희생하고 화평함을 좇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영적인 권세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움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의 영적인 뜻을 써 보세요.
2. 화평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과 화평해야 합니다.
② ( )과 화평을 이뤄야 합니다.
③ ( )과 화평해야 합니다.
3. 화평의 열매를 맺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선악과와 생명과일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과일 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있다. 두 나무의 열매는 모양이나 빛깔이 달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크기는 둘 다 메론만 하다. 선악과는 복숭아와 비슷한 모양이며 분홍빛을 띤다.
생명과일은 사과와 비슷한 모양에 홍조를 띤다. 아주 빨갛지 않고 약간의 홍조를 띤 아름다운 빛깔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을 먹도록 허락하시되, 단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 명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기고 먹음으로 저주를 받았다.
2021-09-03
제36과성령의 열매 (2) - 희락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6 | 참고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교육목표 : 희락의 열매를 맺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웃음은 스트레스와 분노, 긴장을 완화해 심장마비 같은 돌연사를 예방하며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감기와 같은 감염질환은 물론 암과 성인병까지 예방해 준다고 합니다. 이처럼 웃음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말씀하십니다. 혹자는 “항상 기뻐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과 종국에는 희락이 넘치는 천국으로 인도받을 것을 마음에서 믿기 때문입니다.
1. 희락의 열매를 맺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
‘희락’의 사전적인 의미는 문자 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내 기쁨도 즐거움도 잃어버립니다.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마음에 맺히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한 대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희락입니다. 따라서 희락은 자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쉽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 순간 즐겁고 행복하게 주님의 길을 가는 반면, 열심히 신앙생활은 하지만 정작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순간 마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한번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바로 여러분에게 얼마큼 희락의 열매가 맺혀 있는지 보여 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 하나만 해도 항상 기뻐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영원히 타는 지옥 불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만 생각해도 그 행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2. 첫사랑의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
처음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찬양이 흘러넘치고 설령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도 감사가 넘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주님께 대한 첫사랑이 식어지고 구원의 은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곤고해지고 불평불만이 나오지요. 주를 향한 첫사랑이 왜 식어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마음에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의 대표적인 특징은 변질되는 것이지요. 즉 혈기, 미움, 시기, 질투, 판단과 같은 비진리가 있어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내 근심 걱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붙들려 매를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빌 4:4).
혹여 벼랑 끝에 내몰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믿고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의 행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실 것입니다.
3.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육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마음속에 ‘시기, 질투’라는 속성이 없는 사람은, 상대가 축복받고 칭찬받는 것을 볼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하지만 시기, 질투가 있으면 상대가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마음이 불편해지며 열등감에 싸여 낙심이 됩니다.
이처럼 육의 속성이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은 죄성을 자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기뻐하지 못하게 역사합니다. 또한 근심 걱정 속에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게 하니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지요. 참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마음에 육이 없으면 사업할 때도 성령의 음성을 바로 듣고 나가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하며 축복이 넘칩니다. 그런데 욕심과 조급함이 앞서고 정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불통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안에 육을 벗을수록 영적인 기쁨과 감사가 임하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기뻐하실 때라야 희락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중심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할 때,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기쁨이 샘솟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나가면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우리 안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십니다.
가령,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서로 싸울 때 그 갈등이 계속되면 충만함이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육을 좇아 자기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좋아 보이는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영적인 기쁨은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답답하고 뭔가 꺼림칙하지요.
반면에 마음을 정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내가 손해 본 것처럼 보여도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위로부터 기쁨이 임합니다. 이런 기쁨은 누려 본 사람만이 알지요. 세상 누구도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행복입니다. 이처럼 당장의 이익 때문에 육체의 소욕대로 좇으면 매번 불편하고 다툼이 생기지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중심에서 섬길 때에는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던 사람이 마음을 바꿔 선으로 이해하면 그만큼 평안해집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성격이나 의견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모른 척하거나 피하십니까? 아니면 웃으면서 따뜻하게 인사하시는지요? 세상 사람의 입장에서는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보다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사람은 섬기는 마음으로 웃어 줍니다. 그러니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하지요. ‘누군가와 성격이 안 맞다.’거나 ‘상대가 싫다.’는 느낌조차 아예 없으면 항상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날이 갈수록 희락의 열매가 실하게 영글고 얼굴에서는 영적인 빛이 흘러넘치지요.
3) 기쁨과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농부가 열매를 거두려면 씨를 심고 가꾸는 수고가 따릅니다. 이처럼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기쁨과 감사의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올려야 합니다. 믿음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뻐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또 좋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를 지키시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십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만 온전히 해도 일 년 내내 사고나 재앙을 만나지 않게 하시지요. 범죄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며 충성하는 사람은 축복이 항상 넘쳐납니다.
설령 어떤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문제 해결의 방법이 성경 66권 하나님 말씀 안에 있으니 감사하지요. 만일 나의 잘못으로 어려움이 왔다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음에 감사하고, 책망할 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조건을 찾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주십니다. 그러면 점점 더 감사와 기쁨이 커지고 마침내는 희락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신속히 희락의 열매를 맺어 항상 기쁨과 감사, 행복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희락의 영적인 의미를 써 보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② 범사에 ( )을 좇아야 합니다.
③ ( )과 ( )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로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의 단계
믿음의 1단계나 2단계 초입에서는 누군가 모함했을 때 시시비비를 따진다. 믿음의 2단계 중반에서는 악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크게 혈기 내거나 악을 발하는 것은 웬만큼 절제할 수 있다. 믿음의 3단계에서 반석에 서기 전에는 감정이 요동하기도 하며, 진리를 알기 때문에 참지만 중심의 감사는 나오지 않는다. 믿음의 반석에 서면 불평하기보다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순간 힘들다는 생각이 스쳐도 이내 바꾼다. 믿음의 4단계는 요동함 없이 온전히 기뻐하며 감사한다.
교육목표 : 희락의 열매를 맺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한다.
웃음은 스트레스와 분노, 긴장을 완화해 심장마비 같은 돌연사를 예방하며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감기와 같은 감염질환은 물론 암과 성인병까지 예방해 준다고 합니다. 이처럼 웃음은 건강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데,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말씀하십니다. 혹자는 “항상 기뻐할 일이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과 종국에는 희락이 넘치는 천국으로 인도받을 것을 마음에서 믿기 때문입니다.
1. 희락의 열매를 맺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
‘희락’의 사전적인 의미는 문자 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희락은 단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내 기쁨도 즐거움도 잃어버립니다.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마음에 맺히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한 대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희락입니다. 따라서 희락은 자신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쉽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 순간 즐겁고 행복하게 주님의 길을 가는 반면, 열심히 신앙생활은 하지만 정작 기쁨과 감사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하기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 순간 마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한번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바로 여러분에게 얼마큼 희락의 열매가 맺혀 있는지 보여 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은 은혜 하나만 해도 항상 기뻐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영원히 타는 지옥 불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만 생각해도 그 행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2. 첫사랑의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
처음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찬양이 흘러넘치고 설령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을 받아도 감사가 넘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주님께 대한 첫사랑이 식어지고 구원의 은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곤고해지고 불평불만이 나오지요. 주를 향한 첫사랑이 왜 식어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마음에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의 대표적인 특징은 변질되는 것이지요. 즉 혈기, 미움, 시기, 질투, 판단과 같은 비진리가 있어서,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내 근심 걱정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붙들려 매를 많이 맞고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도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미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빌 4:4).
혹여 벼랑 끝에 내몰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믿고 기쁨과 감사의 기도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의 행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실 것입니다.
3.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1) 육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마음속에 ‘시기, 질투’라는 속성이 없는 사람은, 상대가 축복받고 칭찬받는 것을 볼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합니다. 하지만 시기, 질투가 있으면 상대가 잘되는 것을 보면 배가 아프고, 마음이 불편해지며 열등감에 싸여 낙심이 됩니다.
이처럼 육의 속성이 있으면 원수 마귀 사단은 죄성을 자극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기뻐하지 못하게 역사합니다. 또한 근심 걱정 속에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게 하니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지요. 참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감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마음에 육이 없으면 사업할 때도 성령의 음성을 바로 듣고 나가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하며 축복이 넘칩니다. 그런데 욕심과 조급함이 앞서고 정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불통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안에 육을 벗을수록 영적인 기쁨과 감사가 임하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기뻐하실 때라야 희락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중심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할 때,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기쁨이 샘솟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나가면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우리 안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십니다.
가령,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서로 싸울 때 그 갈등이 계속되면 충만함이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육을 좇아 자기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좋아 보이는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영적인 기쁨은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답답하고 뭔가 꺼림칙하지요.
반면에 마음을 정하여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당장은 내가 손해 본 것처럼 보여도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위로부터 기쁨이 임합니다. 이런 기쁨은 누려 본 사람만이 알지요. 세상 누구도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행복입니다. 이처럼 당장의 이익 때문에 육체의 소욕대로 좇으면 매번 불편하고 다툼이 생기지만, 성령의 소욕을 좇아 중심에서 섬길 때에는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자기 기준에 맞춰 상대를 판단하던 사람이 마음을 바꿔 선으로 이해하면 그만큼 평안해집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성격이나 의견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모른 척하거나 피하십니까? 아니면 웃으면서 따뜻하게 인사하시는지요? 세상 사람의 입장에서는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보다 피하고 외면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성령의 소욕을 좇는 사람은 섬기는 마음으로 웃어 줍니다. 그러니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하지요. ‘누군가와 성격이 안 맞다.’거나 ‘상대가 싫다.’는 느낌조차 아예 없으면 항상 마음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사람은 날이 갈수록 희락의 열매가 실하게 영글고 얼굴에서는 영적인 빛이 흘러넘치지요.
3) 기쁨과 감사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농부가 열매를 거두려면 씨를 심고 가꾸는 수고가 따릅니다. 이처럼 희락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기쁨과 감사의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올려야 합니다. 믿음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기뻐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또 좋으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를 지키시고 구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십니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만 온전히 해도 일 년 내내 사고나 재앙을 만나지 않게 하시지요. 범죄하지 않고 계명을 지키며 충성하는 사람은 축복이 항상 넘쳐납니다.
설령 어떤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문제 해결의 방법이 성경 66권 하나님 말씀 안에 있으니 감사하지요. 만일 나의 잘못으로 어려움이 왔다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음에 감사하고, 책망할 것이 없다면 그것 또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조건을 찾아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주십니다. 그러면 점점 더 감사와 기쁨이 커지고 마침내는 희락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신속히 희락의 열매를 맺어 항상 기쁨과 감사, 행복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희락의 영적인 의미를 써 보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희락의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① ( )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② 범사에 ( )을 좇아야 합니다.
③ ( )과 ( )의 씨를 부지런히 심어야 합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로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의 단계
믿음의 1단계나 2단계 초입에서는 누군가 모함했을 때 시시비비를 따진다. 믿음의 2단계 중반에서는 악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크게 혈기 내거나 악을 발하는 것은 웬만큼 절제할 수 있다. 믿음의 3단계에서 반석에 서기 전에는 감정이 요동하기도 하며, 진리를 알기 때문에 참지만 중심의 감사는 나오지 않는다. 믿음의 반석에 서면 불평하기보다 더 기뻐하고 감사하며, 순간 힘들다는 생각이 스쳐도 이내 바꾼다. 믿음의 4단계는 요동함 없이 온전히 기뻐하며 감사한다.
2021-08-27
제35과성령의 열매 (1) - 사랑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로마서 5:8 | 참고 말씀: 로마서 6:23, 히브리서 9:22
교육목표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첫 번째 열매 곧 자기를 희생하고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열매는 씨를 심었을 때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우면서 맺는 결과물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는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생명의 씨가 성령으로 인해 싹을 틔우고 자라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생명의 씨가 싹이 튼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지요.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하면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최고의 영적인 사랑
결혼할 때 사람들은 영원불변의 사랑의 의미가 담긴 다이아몬드 반지나 금반지를 건네며 사랑을 맹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로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커플도 얼마 못 가 남남이 되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영적인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상대를 섬기며 자기를 희생하므로 갈수록 그 사랑이 승화되지요.
사랑에는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언젠가는 변질됩니다. 반면 영적인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이 있는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는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이지요. 우리가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지요. 나를 미워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생명을 주는 최고의 사랑을 합니다.
2. 대가를 바라며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
진실하고 깊이 있게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은 사람이 세월이 흐르고 내가 원했던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쉽게 변하기도 하고 배신합니다.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지요. 내가 준 만큼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것은 다 육적인 사랑입니다.
남녀가 연애할 때는 서로 “당신 없으면 못 산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면 서로 내 뜻에 맞춰 주기를 바라고, 안 따라 주면 속상해합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도 티격태격 싸우며 거기서 더 금이 가면 결국 이혼까지 이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서로 유익에 맞지 않으면 원수 맺는 일이 허다합니다. 세상이 악해지는 만큼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모습도 드뭅니다. 물론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는 부모도 있지만, 이러한 사랑을 자기 자녀에게만 준다면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같은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또 아무리 의좋던 형제도 돈 문제가 개입되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친구 간에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 쉽게 등을 돌립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자신이 준 만큼 상대로부터 받기 원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뜨거울 때는 조건 없이 줬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식으면 예전에 주었던 것을 후회하지요. 이는 대가를 바라고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3.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
만일 백성 중에 한 사람이 흉악한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는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살인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나라의 왕의 아들뿐이라면 과연 왕이 살인자를 위해 귀한 아들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실 만큼,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하여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아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고 말았지요(롬 6:23).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을 받으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 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갈 3:13).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또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으므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모욕하며 결국엔 십자가에 못 박을 줄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영원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확증해 주셨습니다(롬 5:8).
예수님 또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을 주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을 다한 사랑,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4.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죄악을 버려 성결을 이룬 만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악이 없는 마음에서 참사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으며 항상 평안하게 해 줍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섬기고 기쁨을 주며 하나님 나라를 더 크게 이루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다 해도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출 32:32).
사도 바울도 영혼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대신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혹여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원수도 아니고, 생명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작은 일로 부딪치고 불편해하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감정을 내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시들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도 무관심하지는 않는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당회장님은 어떠셨습니까? “만약 천 명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제가 대신 지옥에 가야 한다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 성도들뿐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듣고 권능의 역사를 늘 보면서도 사망으로 가는 사람과 우리 교회를 오해하고 시기하여 핍박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또한 전쟁과 기근과 가난으로 절망 가운데 빠진 아프리카 오지의 불쌍한 영혼들도 속하지요.
“사랑해야 한다” 하셨으니까 의무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루하루 진액을 다하고 계시지요.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독생자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새겨져 있는지요? 그 사랑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다면 여러분도 하나님과 영혼들을 중심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2.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영적인 사랑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 열매인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3. 사도 바울의 영혼 사랑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로마서 9장 3절을 읽고 쓰고 외워 봅시다.
“나의 형제 곧 ( )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 )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갈 3:13~14)
1.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2.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3.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교육목표 :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첫 번째 열매 곧 자기를 희생하고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열매는 씨를 심었을 때 싹이 나고 자라 꽃을 피우면서 맺는 결과물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는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생명의 씨가 성령으로 인해 싹을 틔우고 자라서 맺히는 열매입니다. 생명의 씨가 싹이 튼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지요.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하면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최고의 영적인 사랑
결혼할 때 사람들은 영원불변의 사랑의 의미가 담긴 다이아몬드 반지나 금반지를 건네며 사랑을 맹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로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커플도 얼마 못 가 남남이 되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쉽게 변질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영적인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상대를 섬기며 자기를 희생하므로 갈수록 그 사랑이 승화되지요.
사랑에는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언젠가는 변질됩니다. 반면 영적인 사랑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이 있는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는 자기 생명까지 줄 수 있는 희생이 포함된 사랑이지요. 우리가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지요. 나를 미워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생명을 주는 최고의 사랑을 합니다.
2. 대가를 바라며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
진실하고 깊이 있게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많은 사람이 세월이 흐르고 내가 원했던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쉽게 변하기도 하고 배신합니다.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지요. 내가 준 만큼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는 것은 다 육적인 사랑입니다.
남녀가 연애할 때는 서로 “당신 없으면 못 산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면 서로 내 뜻에 맞춰 주기를 바라고, 안 따라 주면 속상해합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도 티격태격 싸우며 거기서 더 금이 가면 결국 이혼까지 이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서로 유익에 맞지 않으면 원수 맺는 일이 허다합니다. 세상이 악해지는 만큼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모습도 드뭅니다. 물론 자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주는 부모도 있지만, 이러한 사랑을 자기 자녀에게만 준다면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같은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하지요.
또 아무리 의좋던 형제도 돈 문제가 개입되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하고, 친구 간에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면 쉽게 등을 돌립니다. 이처럼 육적인 사랑은 자신이 준 만큼 상대로부터 받기 원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뜨거울 때는 조건 없이 줬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식으면 예전에 주었던 것을 후회하지요. 이는 대가를 바라고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3. 자신의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
만일 백성 중에 한 사람이 흉악한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는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살인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나라의 왕의 아들뿐이라면 과연 왕이 살인자를 위해 귀한 아들을 내어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내어주실 만큼,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하여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아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고 말았지요(롬 6:23). 이러한 저주에서 속량을 받으려면 영계의 법칙에 따라 저주를 받은 바 되어 나무에 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나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갈 3:13).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또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으므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모욕하며 결국엔 십자가에 못 박을 줄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영원한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지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확증해 주셨습니다(롬 5:8).
예수님 또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을 주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을 다한 사랑,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4.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죄악을 버려 성결을 이룬 만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악이 없는 마음에서 참사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은 상대를 힘들게 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으며 항상 평안하게 해 줍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섬기고 기쁨을 주며 하나님 나라를 더 크게 이루지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다 해도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출 32:32).
사도 바울도 영혼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지요.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은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대신 지옥에라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혹여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지는 않습니까? 원수도 아니고, 생명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작은 일로 부딪치고 불편해하지는 않는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감정을 내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시들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도 무관심하지는 않는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당회장님은 어떠셨습니까? “만약 천 명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제가 대신 지옥에 가야 한다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 성도들뿐 아니라, 진리인 하나님 말씀을 듣고 권능의 역사를 늘 보면서도 사망으로 가는 사람과 우리 교회를 오해하고 시기하여 핍박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또한 전쟁과 기근과 가난으로 절망 가운데 빠진 아프리카 오지의 불쌍한 영혼들도 속하지요.
“사랑해야 한다” 하셨으니까 의무적으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루하루 진액을 다하고 계시지요.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독생자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새겨져 있는지요? 그 사랑이 여러분 안에 가득하다면 여러분도 하나님과 영혼들을 중심으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2.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영적인 사랑과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첫 번째 열매인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3. 사도 바울의 영혼 사랑을 절절히 느낄 수 있는 로마서 9장 3절을 읽고 쓰고 외워 봅시다.
“나의 형제 곧 ( )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 )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갈 3:13~14)
1.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2.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3.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