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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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제53과팔복(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0~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5:10~12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10 | 참고 말씀: 마가복음 10:30
교육목표 : 주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늘의 큰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 핍박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복이라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주와 그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에 대해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1.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선과 빛을 좇아 살아갈 때 받는 핍박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애매히 핍박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 것일까요? 이는 물과 기름이 하나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빛에 속합니다(요일 1:5).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주인은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엡 6:12).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빛의 자녀들을 싫어하지요. 빛을 비추면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빛이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아질수록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영역이 줄어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은 자기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을 주관하여, 빛에 속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 주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시작하면 여러 모양으로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친구들과 만나면 술도 마시고 비진리의 말과 행동으로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술도 끊고 거룩하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지요.
주일에 직장에서 친목회가 있으면, 주일을 지키는 성도들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회사생활 하면 승진하기 어렵다.”며 압박을 가하지요.
복음화 되지 않은 가정에서는 제사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또 남들은 적당히 속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대로 정직하게 행하니, 속여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윗사람이 있을 때는 섬기고 비위를 맞추다가도, 자리를 비우면 험담하고 자기 유익에 따라 잘 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진실히 행하고 자기의 유익에 따라 변하지 않지요.
처음에는 이런 경우들이 핍박거리가 될 수 있지만, 결국은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을 봅니다. 선과 사랑으로 승리해 가기 때문에 핍박이 물러갈 수밖에 없지요. 핍박을 이겨 나감으로 믿음이 더 장성해 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니 영육 간에 축복인 것입니다.
2) 자신의 잘못이나 지혜가 부족해서 핍박받는 경우
의를 행함으로 핍박받는 경우 외에 지혜가 부족하거나 본인의 잘못으로 핍박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온 집에 충성하지 못해서, 주변에 덕이 되지 못해 욕을 먹거나 어려움을 겪는 일도 발생하지요.
가령, 여 성도님이 게을러서 집 안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고, 교회 일로 바쁘다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집 안을 돌보지 못한 것이 문제인데 정작 핍박받은 당사자는 하나님 일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도 교회 간다면서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실수를 잘하며 불성실합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전도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요. “교회 갈 시간에 자기 일이나 잘하지.”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면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승리하시되, 혹여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면, 신속히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이나 불법으로 인해 받는 핍박은 복이나 상급이 될 수 없지만,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천국을 소유하는 길이기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믿음이 장성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크게 받아갈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과,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전자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천국을, 후자는 각 사람이 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은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진리로 인내함으로 어린아이 믿음에서 점차 청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으로 장성해 가기 때문이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속 깊이 있는 비진리까지도 발견하여 버리니, 온유함과 화평함을 이루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의를 행하여 마음을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주를 위해 받은 핍박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의를 온전히 이루었다 해도 모든 핍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위해 받는 핍박’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꾼 된 사람들이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시지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흠도 티도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의 형벌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주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고 생명까지 드렸던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담대히 고백하였습니다(딤후 4:7~8).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핍박받은 사람들의 충성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천국에서 큰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 주시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은 물론, 밝히 교통해 주시며 따르는 기사와 표적으로 함께하시지요.
그러므로 혹여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장차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을 바라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고린도전서 15:41)
- 해의 영광 : 아비들의 믿음으로 3천층 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달의 영광 : 청년들의 믿음으로 2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 아이들의 믿음으로 1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이처럼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은 각각 큰 차이가 난다.
또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의 크기나 밝기가 다르듯이 별마다 영광이 다르다.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으므로 상급이 없고 영광이라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교육목표 : 주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늘의 큰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 핍박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복이라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주와 그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에 대해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1.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선과 빛을 좇아 살아갈 때 받는 핍박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애매히 핍박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 것일까요? 이는 물과 기름이 하나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빛에 속합니다(요일 1:5).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주인은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엡 6:12).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빛의 자녀들을 싫어하지요. 빛을 비추면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빛이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아질수록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영역이 줄어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은 자기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을 주관하여, 빛에 속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 주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시작하면 여러 모양으로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친구들과 만나면 술도 마시고 비진리의 말과 행동으로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술도 끊고 거룩하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지요.
주일에 직장에서 친목회가 있으면, 주일을 지키는 성도들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회사생활 하면 승진하기 어렵다.”며 압박을 가하지요.
복음화 되지 않은 가정에서는 제사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또 남들은 적당히 속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대로 정직하게 행하니, 속여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윗사람이 있을 때는 섬기고 비위를 맞추다가도, 자리를 비우면 험담하고 자기 유익에 따라 잘 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진실히 행하고 자기의 유익에 따라 변하지 않지요.
처음에는 이런 경우들이 핍박거리가 될 수 있지만, 결국은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을 봅니다. 선과 사랑으로 승리해 가기 때문에 핍박이 물러갈 수밖에 없지요. 핍박을 이겨 나감으로 믿음이 더 장성해 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니 영육 간에 축복인 것입니다.
2) 자신의 잘못이나 지혜가 부족해서 핍박받는 경우
의를 행함으로 핍박받는 경우 외에 지혜가 부족하거나 본인의 잘못으로 핍박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온 집에 충성하지 못해서, 주변에 덕이 되지 못해 욕을 먹거나 어려움을 겪는 일도 발생하지요.
가령, 여 성도님이 게을러서 집 안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고, 교회 일로 바쁘다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집 안을 돌보지 못한 것이 문제인데 정작 핍박받은 당사자는 하나님 일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도 교회 간다면서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실수를 잘하며 불성실합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전도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요. “교회 갈 시간에 자기 일이나 잘하지.”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면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승리하시되, 혹여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면, 신속히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이나 불법으로 인해 받는 핍박은 복이나 상급이 될 수 없지만,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천국을 소유하는 길이기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믿음이 장성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크게 받아갈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과,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전자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천국을, 후자는 각 사람이 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은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진리로 인내함으로 어린아이 믿음에서 점차 청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으로 장성해 가기 때문이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속 깊이 있는 비진리까지도 발견하여 버리니, 온유함과 화평함을 이루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의를 행하여 마음을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주를 위해 받은 핍박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의를 온전히 이루었다 해도 모든 핍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위해 받는 핍박’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꾼 된 사람들이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시지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흠도 티도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의 형벌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주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고 생명까지 드렸던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담대히 고백하였습니다(딤후 4:7~8).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핍박받은 사람들의 충성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천국에서 큰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 주시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은 물론, 밝히 교통해 주시며 따르는 기사와 표적으로 함께하시지요.
그러므로 혹여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장차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을 바라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고린도전서 15:41)
- 해의 영광 : 아비들의 믿음으로 3천층 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달의 영광 : 청년들의 믿음으로 2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 아이들의 믿음으로 1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이처럼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은 각각 큰 차이가 난다.
또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의 크기나 밝기가 다르듯이 별마다 영광이 다르다.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으므로 상급이 없고 영광이라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2021-12-24
제52과예수 그리스도
빌립보서 2:8
읽을말씀 : 빌립보서 2:8 | 외울말씀 : 빌립보서 2:8 | 참고 말씀: 베드로전서 2:22, 마태복음 12:19~20
교육목표 :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행함을 닮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탄절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신 복된 날입니다. 그 선물은 바로 ‘구원의 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희생시키심으로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살펴볼까요?
1. 고운 분이셨습니다.
모양이 거칠지 않고 모나지 않은 것, 부드러운 것을 ‘곱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행동, 말씨, 모든 것이 고우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에 예수님의 모습을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라고 표현했습니다(사 42:2).
예수님의 말씀은 지혜롭고 그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놀라운 권능이 있어서 병자에게 손을 얹기만 하셔도, 혹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치료받았고 소경, 귀머거리, 중풍병자 등 중증 환자들이 온전해졌지요. 거친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가 몰려들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거나 칭송받기 원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지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자 길을 걸을 때도 조용히 걸으셨고 요란하게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큰 권세와 능력을 가졌다고 사람들을 제압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남을 해치는 일은 상상도 못하셨습니다. 소자 한 사람을 대하더라도 섬기는 자세로 대하셨고, 오히려 낮아져서 피조물인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시하는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같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틈만 나면 올무를 놓아 잡으려 하고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물론 때로는 책망을 하셨지만 이는 그들과 싸워 이겨서 억지로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진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신 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을 법한 영혼들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신 분이 그 누구에게 거친 말이나 행동을 하셨겠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과 행실이 참으로 거룩하고 온전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면 자연히 고운 말과 행실이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기 원하고, 한마디 말도 믿음의 말, 선한 말만 하려고 하지요. 또 누구를 대하든지 자신의 말과 행실을 꼼꼼히 살핍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기 위해서입니다.
2. 자기를 철저히 희생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날부터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는 날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영혼들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생들을 속량하시려고 ‘짐승의 우리’에서 나셨습니다. 또 이런 인생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시려고 ‘구유’에 누이셨지요.
인생들을 가난의 저주에서 풀어 주려고 부요하신 분임에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모든 질병과 연약함을 온전케 하시려고 채찍에 온몸이 상하셨습니다. 마침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예수님은 무엇을 넉넉하게 누릴 권한도, 자유로이 살 권리도 다 포기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에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영혼들만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셨지요. 빌립보서 2장 8절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신 대로입니다.
이 희생은 ‘내가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니까’ 이런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내가 이렇게 희생했으니 인생들이 내 뜻과 내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군림하고 높임 받기 위해 계산적으로 희생하신 것도 아니었지요. 예수님의 희생은 오직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 다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또 가장 귀한 것 바로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으나 죽기까지 너희를 사랑하노라.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희생을 통해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크고 깊은 사랑을 전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이 희생은 예수님께서 어찌하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픈 마음을 표현하신 사랑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예수님은 그 귀하신 몸을 제물 삼아 인생들에게 구원과 천국을 주시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희생으로 인해 결국 우리에게 구원의 길, 천국 가는 길이 열렸지요. 히브리서 10장 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마음에는 오직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희생을 떠올릴 때 과연 무엇을 느끼십니까? 주님의 희생은 의무가 아니라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으로 느낀다면, 여러분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항상 간구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결이나 사랑을 구하실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을 온전히 닮은 분이셨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바쁜 나날을 보내시면서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셨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케 하여 주시기를, 영혼들을 깨우쳐 주시고 제자들을 붙들어 주시기를 늘 간구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응답이 주어진다는 영계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기에 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더 온전히 헤아려 이루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라셨지요.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따르는 행함입니다. 어떤 분들은 목자를 사랑해서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물론 이 또한 하나님을 사랑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누구 눈치 보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스스로가 하는 것입니다.
뜻깊은 성탄절을 맞아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 구원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심에 감사합니다.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아버지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오직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라는 마음으로 간절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 주님, 목자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마음이 간절하다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삶 가운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결을 위해, 사명 감당을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결단한 바를 이뤄 가는 과정에서 혹여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만난다 해도, ‘역시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하고 낙심하기보다 ‘우리 예수님도 늘 기도하셨지. 나는 더욱 기도해야겠구나.’ 하며 더 간절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영을 향해 달려가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더 신속히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첫째, ( )
둘째, 자기를 철저히 희생하는 분이셨습니다.
셋째,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란?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하며,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서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는 것은, 만의 하나라도 회생 가능한 영혼이 있다면 어찌하든 살 길을 열어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나타낸다.
교육목표 :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행함을 닮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탄절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신 복된 날입니다. 그 선물은 바로 ‘구원의 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희생시키심으로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살펴볼까요?
1. 고운 분이셨습니다.
모양이 거칠지 않고 모나지 않은 것, 부드러운 것을 ‘곱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행동, 말씨, 모든 것이 고우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에 예수님의 모습을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라고 표현했습니다(사 42:2).
예수님의 말씀은 지혜롭고 그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놀라운 권능이 있어서 병자에게 손을 얹기만 하셔도, 혹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치료받았고 소경, 귀머거리, 중풍병자 등 중증 환자들이 온전해졌지요. 거친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가 몰려들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거나 칭송받기 원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지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자 길을 걸을 때도 조용히 걸으셨고 요란하게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큰 권세와 능력을 가졌다고 사람들을 제압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남을 해치는 일은 상상도 못하셨습니다. 소자 한 사람을 대하더라도 섬기는 자세로 대하셨고, 오히려 낮아져서 피조물인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시하는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같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틈만 나면 올무를 놓아 잡으려 하고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물론 때로는 책망을 하셨지만 이는 그들과 싸워 이겨서 억지로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진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신 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을 법한 영혼들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신 분이 그 누구에게 거친 말이나 행동을 하셨겠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과 행실이 참으로 거룩하고 온전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면 자연히 고운 말과 행실이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기 원하고, 한마디 말도 믿음의 말, 선한 말만 하려고 하지요. 또 누구를 대하든지 자신의 말과 행실을 꼼꼼히 살핍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기 위해서입니다.
2. 자기를 철저히 희생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날부터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는 날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영혼들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생들을 속량하시려고 ‘짐승의 우리’에서 나셨습니다. 또 이런 인생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시려고 ‘구유’에 누이셨지요.
인생들을 가난의 저주에서 풀어 주려고 부요하신 분임에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모든 질병과 연약함을 온전케 하시려고 채찍에 온몸이 상하셨습니다. 마침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예수님은 무엇을 넉넉하게 누릴 권한도, 자유로이 살 권리도 다 포기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에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영혼들만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셨지요. 빌립보서 2장 8절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신 대로입니다.
이 희생은 ‘내가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니까’ 이런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내가 이렇게 희생했으니 인생들이 내 뜻과 내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군림하고 높임 받기 위해 계산적으로 희생하신 것도 아니었지요. 예수님의 희생은 오직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 다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또 가장 귀한 것 바로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으나 죽기까지 너희를 사랑하노라.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희생을 통해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크고 깊은 사랑을 전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이 희생은 예수님께서 어찌하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픈 마음을 표현하신 사랑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예수님은 그 귀하신 몸을 제물 삼아 인생들에게 구원과 천국을 주시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희생으로 인해 결국 우리에게 구원의 길, 천국 가는 길이 열렸지요. 히브리서 10장 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마음에는 오직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희생을 떠올릴 때 과연 무엇을 느끼십니까? 주님의 희생은 의무가 아니라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으로 느낀다면, 여러분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항상 간구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결이나 사랑을 구하실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을 온전히 닮은 분이셨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바쁜 나날을 보내시면서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셨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케 하여 주시기를, 영혼들을 깨우쳐 주시고 제자들을 붙들어 주시기를 늘 간구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응답이 주어진다는 영계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기에 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더 온전히 헤아려 이루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라셨지요.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따르는 행함입니다. 어떤 분들은 목자를 사랑해서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물론 이 또한 하나님을 사랑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누구 눈치 보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스스로가 하는 것입니다.
뜻깊은 성탄절을 맞아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 구원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심에 감사합니다.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아버지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오직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라는 마음으로 간절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 주님, 목자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마음이 간절하다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삶 가운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결을 위해, 사명 감당을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결단한 바를 이뤄 가는 과정에서 혹여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만난다 해도, ‘역시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하고 낙심하기보다 ‘우리 예수님도 늘 기도하셨지. 나는 더욱 기도해야겠구나.’ 하며 더 간절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영을 향해 달려가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더 신속히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첫째, ( )
둘째, 자기를 철저히 희생하는 분이셨습니다.
셋째,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란?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하며,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서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는 것은, 만의 하나라도 회생 가능한 영혼이 있다면 어찌하든 살 길을 열어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나타낸다.
2021-12-17
제51과팔복(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9
읽을말씀 : 마태복음 5: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9 | 참고 말씀: 히브리서 12:14, 로마서 6:16
교육목표 : 자신을 희생하여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을 닮아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화평’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례히 행치 않고, 설령 내가 옳다 하더라도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에게 맞추어 주지요. 또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으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해 주고 맞추어 주며, 편벽됨이 없고 진리 안에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되 생명까지 내어 주는 것이 영적인 화평이지요.
1. 자신을 희생하여 화평케 하신 예수님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혹자는 “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날에 한번 노예가 되면 자손 대대로 노예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여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진리를 알면 악한 의도로 화평을 깨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평을 깰 수 있습니다.
이는 평소에 내가 상대에게 맞추어 주는가, 아니면 상대가 나에게 맞추어 주는가를 점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반면 남편은 짜게 먹습니다. 이때 아내가 싱겁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고만 한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서로 화평하려면 자신도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조금씩 개선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는가?’, ‘내 생각이 진리라는 이유로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2.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져 화평을 이루게 되지요. 그런데 죄를 사함 받았는데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받아 강건해지고, 물질의 어려움을 해결받아 부요해지는 등 마음의 소원들을 응답받게 되지요.
2)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이 있으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악이 발동하므로 자신과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시기, 질투, 교만, 다툼, 간음 등 마음에 악이 있으면 참 평안을 누릴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니 마음이 곤고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히 12:14).
어떤 사람은 악해서 화평을 깨기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므로 화평을 깨기도 합니다.
가령,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도 본인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와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쪽을 택했으니까’ 하며 계획대로 추진해 갑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떠실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열심은 기특하지만 실족하고 상처받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연약한 믿음도 고려하여 화평을 좇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깨면서 많은 일을 이루는 것보다, 적은 일이라도 화평함 속에 이루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3.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축복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지 남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모든 자녀를 지칭합니다. 단순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납니다.
겨우 구원받을 만한 ‘자녀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아이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또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청년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아비들의 믿음’도 있지요.
‘화평케 하는 자’란 아비들의 믿음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악은 모양도 없고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이룬 자녀, 하나님의 마음을 쏙 빼닮은 자녀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축복받으며 하나님의 권능도 받아 원수 마귀가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로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참 아들로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쏙 닮아서 그분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 영광과 존귀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수종을 받으며, 수많은 천국 백성에게 세세토록 칭송을 받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웅장한 황금보석 집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존귀와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아가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닮아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며 모든 사람과도 화평을 이루어 영원한 새 예루살렘에서 큰 영광 중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써 보세요.
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② 자기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③ 모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2.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비들의 믿음(요한일서 2:14)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까지 아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근본을 알았기에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무수한 비밀을 계시받아 모세 오경을 기록했다.
아브라함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교육목표 : 자신을 희생하여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을 닮아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화평’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례히 행치 않고, 설령 내가 옳다 하더라도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에게 맞추어 주지요. 또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으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해 주고 맞추어 주며, 편벽됨이 없고 진리 안에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되 생명까지 내어 주는 것이 영적인 화평이지요.
1. 자신을 희생하여 화평케 하신 예수님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혹자는 “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날에 한번 노예가 되면 자손 대대로 노예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여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진리를 알면 악한 의도로 화평을 깨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평을 깰 수 있습니다.
이는 평소에 내가 상대에게 맞추어 주는가, 아니면 상대가 나에게 맞추어 주는가를 점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반면 남편은 짜게 먹습니다. 이때 아내가 싱겁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고만 한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서로 화평하려면 자신도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조금씩 개선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는가?’, ‘내 생각이 진리라는 이유로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2.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져 화평을 이루게 되지요. 그런데 죄를 사함 받았는데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받아 강건해지고, 물질의 어려움을 해결받아 부요해지는 등 마음의 소원들을 응답받게 되지요.
2)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이 있으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악이 발동하므로 자신과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시기, 질투, 교만, 다툼, 간음 등 마음에 악이 있으면 참 평안을 누릴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니 마음이 곤고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히 12:14).
어떤 사람은 악해서 화평을 깨기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므로 화평을 깨기도 합니다.
가령,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도 본인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와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쪽을 택했으니까’ 하며 계획대로 추진해 갑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떠실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열심은 기특하지만 실족하고 상처받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연약한 믿음도 고려하여 화평을 좇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깨면서 많은 일을 이루는 것보다, 적은 일이라도 화평함 속에 이루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3.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축복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지 남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모든 자녀를 지칭합니다. 단순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납니다.
겨우 구원받을 만한 ‘자녀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아이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또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청년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아비들의 믿음’도 있지요.
‘화평케 하는 자’란 아비들의 믿음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악은 모양도 없고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이룬 자녀, 하나님의 마음을 쏙 빼닮은 자녀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축복받으며 하나님의 권능도 받아 원수 마귀가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로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참 아들로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쏙 닮아서 그분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 영광과 존귀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수종을 받으며, 수많은 천국 백성에게 세세토록 칭송을 받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웅장한 황금보석 집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존귀와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아가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닮아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며 모든 사람과도 화평을 이루어 영원한 새 예루살렘에서 큰 영광 중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써 보세요.
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② 자기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③ 모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2.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비들의 믿음(요한일서 2:14)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까지 아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근본을 알았기에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무수한 비밀을 계시받아 모세 오경을 기록했다.
아브라함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2021-12-10
제50과팔복(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8
읽을말씀 : 마태복음 5:8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8 | 참고 말씀: 요한일서 3:15, 마태복음 5:28
교육목표 : 육의 행실과 마음의 죄성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뵐 수 있는 성결한 성도가 되게 한다.
‘청결’의 사전적 의미는 ‘맑고 깨끗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죄악이 없어서 성결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악이 없고 깨끗한 마음이 될 때라야 하나님을 뵐 수 있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청결한 사람과 악독한 사람
마음이 청결하여 복을 받은 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 여인으로 자녀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긴 효부였지요.
룻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낯선 땅에서 당장 거할 집도 넉넉히 먹을 양식도 없었고, 살아갈 일이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극진히 섬겼지요.
이처럼 룻이 선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부요하고 선한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다윗왕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악독하여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까지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에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그들은 외식주의자들로서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일례로, 장로의 유전 중에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부정하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장로의 유전을 범한다며 시비하지요. 이때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말씀하십니다.
또한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셨습니다(마 23:27). 무덤은 시체를 보관하기에 아무리 단장해도 속은 부패하여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마음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기에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지요.
2. 마음의 청결을 이루려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는 물론 마음속 죄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고(벧전 1:16),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투고 혈기 내던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낮아지고 섬기며, 미워하던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지요.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진리로 채워 가는 만큼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옷에 오물이 묻었는데 “깨끗이 빨아야지.”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옷을 빨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마음의 더러움을 발견했다면, 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청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
여기서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진리의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란 비진리의 마음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우리 마음 안에는 죄를 행하고자 하는 비진리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결단해 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이 많지요. 이것들이 해로운 줄 알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능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말씀대로 행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변화될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결국 모든 죄를 벗고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습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사기 13장 22절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만 보고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였고,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셨을 때에도 백성들은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뵈었지요(출 20:18~19).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대면하여 보기도 하며 친히 동행하기까지 한 것일까요?
요한삼서 1장 11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한 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지만,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우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천국 중에서도 3천층 이상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하나님을 가까이 뵈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이나 1천층, 2천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주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지요. 얼마큼 성결되었느냐에 따라 각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빛이 다르고, 들어가는 처소 역시 달라집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은 단순히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모든 분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언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고전 12:9~11)을 받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육의 행실은 물론 마음의 더러움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옵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 )이 없어서 ( )된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마태복음 5장 8절을 쓰고 외워 봅시다.
“마음이 ( )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 볼 것임이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에녹 선지자(창세기 5:21~24)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이다. 그는 모나지 않고 순수하며 착한 성품을 지녔다.
하나님에 대해, 영의 세계에 대해 늘 궁구했기에 무엇을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에녹 선지자는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교통하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교육목표 : 육의 행실과 마음의 죄성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뵐 수 있는 성결한 성도가 되게 한다.
‘청결’의 사전적 의미는 ‘맑고 깨끗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죄악이 없어서 성결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악이 없고 깨끗한 마음이 될 때라야 하나님을 뵐 수 있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청결한 사람과 악독한 사람
마음이 청결하여 복을 받은 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 여인으로 자녀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긴 효부였지요.
룻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낯선 땅에서 당장 거할 집도 넉넉히 먹을 양식도 없었고, 살아갈 일이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극진히 섬겼지요.
이처럼 룻이 선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부요하고 선한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다윗왕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악독하여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까지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에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그들은 외식주의자들로서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일례로, 장로의 유전 중에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부정하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장로의 유전을 범한다며 시비하지요. 이때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말씀하십니다.
또한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셨습니다(마 23:27). 무덤은 시체를 보관하기에 아무리 단장해도 속은 부패하여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마음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기에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지요.
2. 마음의 청결을 이루려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는 물론 마음속 죄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고(벧전 1:16),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투고 혈기 내던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낮아지고 섬기며, 미워하던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지요.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진리로 채워 가는 만큼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옷에 오물이 묻었는데 “깨끗이 빨아야지.”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옷을 빨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마음의 더러움을 발견했다면, 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청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
여기서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진리의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란 비진리의 마음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우리 마음 안에는 죄를 행하고자 하는 비진리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결단해 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이 많지요. 이것들이 해로운 줄 알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능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말씀대로 행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변화될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결국 모든 죄를 벗고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습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사기 13장 22절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만 보고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였고,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셨을 때에도 백성들은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뵈었지요(출 20:18~19).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대면하여 보기도 하며 친히 동행하기까지 한 것일까요?
요한삼서 1장 11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한 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지만,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우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천국 중에서도 3천층 이상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하나님을 가까이 뵈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이나 1천층, 2천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주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지요. 얼마큼 성결되었느냐에 따라 각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빛이 다르고, 들어가는 처소 역시 달라집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은 단순히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모든 분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언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고전 12:9~11)을 받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육의 행실은 물론 마음의 더러움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옵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 )이 없어서 ( )된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마태복음 5장 8절을 쓰고 외워 봅시다.
“마음이 ( )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 볼 것임이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에녹 선지자(창세기 5:21~24)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이다. 그는 모나지 않고 순수하며 착한 성품을 지녔다.
하나님에 대해, 영의 세계에 대해 늘 궁구했기에 무엇을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에녹 선지자는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교통하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2021-12-03
제49과팔복(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7
읽을말씀 : 마태복음 5:7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7 | 참고 말씀: 히브리서 12:6
교육목표 : 긍휼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하지요.
이는 성령의 열매 중 양선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양선은 악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이런 양선의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더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입니다.
1. 한없는 용서의 긍휼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준다면 크게 관용을 베푼 것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말씀하시지요. 이는 70번씩 7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완전한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용서의 긍휼에 대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6천 일, 즉 16여 년간을 꼬박 일해서 모은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는 3억 원에 해당하지요.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고 한다면 3조 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을 테니 참아 달라고 사정하지요. 결국 임금이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오던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할 경우 일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 정도의 금액에 불과합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며 감옥에 가두고 말지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작은 잘못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 정죄한다면 얼마나 악한 모습이겠습니까.
혹여 자신이 상대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다 해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포용할 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해도 징계하기보다는 먼저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면할 때에 불편한 마음으로 찌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사랑의 권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2. 사랑을 담은 징계의 긍휼
상황에 따라 긍휼이 징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징계의 긍휼 역시 미움이나 정죄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도 따르고, 그렇게 해서라도 죄에서 돌이켜 진리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이를 바로잡는 이유로 처음부터 매를 들어 때리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자녀가 중심에서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한다면 “용서해 줄 테니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라.” 하고 따뜻하게 안아 주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가 말로는 회개한다 하면서 계속하여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마음 깊이 깨우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빗나가기 전에 징계를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징계라도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이가 물건을 훔쳤을 때, 아이가 중심에서 용서를 빈다면 선한 사람은 긍휼히 여겨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은 혈기를 내며 아이를 책망하거나 심지어 용서를 빌어도 처벌을 요구하지요. 설령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아이의 잘못을 전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이러한 징계는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긍휼이 아닐뿐더러 결코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록 상대가 잘못을 했다 해도 그 사람의 입장과 장래를 생각하여 사랑으로 징계할 때라야 징계의 긍휼에 속하지요.
성경에는 믿음의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진리로 권고하고 징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마 18:15~17).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에게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만일 권면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이 속한 모임의 윗분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해야 하지요.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려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과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3. 올바른 구제의 긍휼
하나님의 자녀라면 구제의 긍휼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일 믿음의 형제가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행함이 없다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약 2:15~16). 진정한 구제는 형제가 어려울 때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혹자는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녀가 굶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에게도 내 자녀와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어렵다고 무턱대고 구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제하거나, 게을러서 놀고 돈만 있으면 도박하고 술 마시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죄를 짓게 도와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구제는 오히려 축복이 막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요. 따라서 잘 분별하여 구제해야 하겠습니다.
4.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설령 자신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 해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 혹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거나 실수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부요하고 강건한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며, 연약함을 강건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한다.
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불순종한 요나를 도왔다가 어려움을 당한 경우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간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랑은 더욱 심해져 모두 죽게될 상황에 이르자 할 수 없이 문제의 원인인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선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요나를 도우려다 풍랑과 싸우며 고생해야 했고, 자신들의 짐까지 바다에 던져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다면 자신도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교육목표 : 긍휼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하지요.
이는 성령의 열매 중 양선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양선은 악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이런 양선의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더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입니다.
1. 한없는 용서의 긍휼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준다면 크게 관용을 베푼 것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말씀하시지요. 이는 70번씩 7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완전한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용서의 긍휼에 대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6천 일, 즉 16여 년간을 꼬박 일해서 모은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는 3억 원에 해당하지요.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고 한다면 3조 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을 테니 참아 달라고 사정하지요. 결국 임금이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오던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할 경우 일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 정도의 금액에 불과합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며 감옥에 가두고 말지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작은 잘못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 정죄한다면 얼마나 악한 모습이겠습니까.
혹여 자신이 상대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다 해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포용할 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해도 징계하기보다는 먼저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면할 때에 불편한 마음으로 찌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사랑의 권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2. 사랑을 담은 징계의 긍휼
상황에 따라 긍휼이 징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징계의 긍휼 역시 미움이나 정죄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도 따르고, 그렇게 해서라도 죄에서 돌이켜 진리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이를 바로잡는 이유로 처음부터 매를 들어 때리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자녀가 중심에서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한다면 “용서해 줄 테니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라.” 하고 따뜻하게 안아 주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가 말로는 회개한다 하면서 계속하여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마음 깊이 깨우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빗나가기 전에 징계를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징계라도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이가 물건을 훔쳤을 때, 아이가 중심에서 용서를 빈다면 선한 사람은 긍휼히 여겨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은 혈기를 내며 아이를 책망하거나 심지어 용서를 빌어도 처벌을 요구하지요. 설령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아이의 잘못을 전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이러한 징계는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긍휼이 아닐뿐더러 결코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록 상대가 잘못을 했다 해도 그 사람의 입장과 장래를 생각하여 사랑으로 징계할 때라야 징계의 긍휼에 속하지요.
성경에는 믿음의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진리로 권고하고 징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마 18:15~17).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에게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만일 권면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이 속한 모임의 윗분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해야 하지요.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려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과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3. 올바른 구제의 긍휼
하나님의 자녀라면 구제의 긍휼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일 믿음의 형제가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행함이 없다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약 2:15~16). 진정한 구제는 형제가 어려울 때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혹자는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녀가 굶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에게도 내 자녀와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어렵다고 무턱대고 구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제하거나, 게을러서 놀고 돈만 있으면 도박하고 술 마시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죄를 짓게 도와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구제는 오히려 축복이 막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요. 따라서 잘 분별하여 구제해야 하겠습니다.
4.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설령 자신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 해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 혹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거나 실수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부요하고 강건한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며, 연약함을 강건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한다.
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불순종한 요나를 도왔다가 어려움을 당한 경우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간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랑은 더욱 심해져 모두 죽게될 상황에 이르자 할 수 없이 문제의 원인인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선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요나를 도우려다 풍랑과 싸우며 고생해야 했고, 자신들의 짐까지 바다에 던져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다면 자신도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2021-11-26
제48과팔복(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6
읽을말씀 : 마태복음 5:6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6 | 참고 말씀: 요한복음 6:35, 55
교육목표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 삼아 행함으로 아비의 믿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을 보면 ‘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옳은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성결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굶주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너무 가난하여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죽을 끓여 겨우 연명한 경우도 있었지요.
그런데 배고픈 것 못지않게 목마른 것도 견디기 힘듭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때 한 모금의 물만 마셔도 살 것 같지요.
하나님께서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갈급히 구하는 것처럼 의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간절히 하나님 뜻을 구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행하라는 것이지요. 성결되기 위해,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 주님 마음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시는지요? 혹여 ‘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말씀 들으니까 배부르고 만족스럽다.’ 하십니까?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내 것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지요. 그런 사람은 항상 먹지 못하여 배고픈 사람과 같고,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목말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55절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지요. 이 말씀은 인자 곧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영적 양식이요, 목마름을 시원케 하는 영적 음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어디서 구하며, 어떻게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예수님의 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 곧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양식 삼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고, 시편 119편 147~148절에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하며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양식 삼는다 고백하지요.
여러분도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들은 설교 말씀을 늘 되새기며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양식 삼고 계신지요? 양식 삼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수분과 함께 섭취하지 않으면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진리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지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하여 악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할 때, 말씀이 소화되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면 체면 불구하고 허겁지겁 먹듯이, 영적인 양식과 음료를 찾은 우리는 생명이 되는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하기 위해 더 간절히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과 위배된 자신의 행동과 마음, 생각을 찾아 부족한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요.
또한 어찌하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릴까 궁구하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하게 의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행해 나갑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의를 이루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성경에 ‘버리라’ 하신 것을 마음과 생각, 행함에서 버리고,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라’ 하신 것을 지켜 행합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의에 주리고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을 양식 삼고 진리대로 순종해 나가면 비진리가 전혀 없는 성결한 영의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이 곧 배부름의 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면 하나님을 쏙 빼닮은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큼 그분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지켜 행하는 아비의 믿음에 관한 말씀이며, 영적으로 배부른 복된 모습입니다.
아비와 같은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고, 믿음이 쑥쑥 자라야 합니다. 육적으로도 아이가 태어나 젖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쑥쑥 자라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힘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행해 나가면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는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비의 믿음이 되어 만사형통한 축복이 임하며, 원수 마귀 사단을 능히 이기고 지배하며 다스립니다. 또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아 순종하지요.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대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여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형통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배부름을 받는 복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시험 환난을 당할 걱정이 없습니다.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 해도 피해 가게 하시고, 어려움을 만나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부를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헐벗은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으로 배불리 먹여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항상 풍성하고 배부른 삶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 )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 )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 )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뜻한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교육목표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 삼아 행함으로 아비의 믿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을 보면 ‘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옳은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성결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굶주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너무 가난하여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죽을 끓여 겨우 연명한 경우도 있었지요.
그런데 배고픈 것 못지않게 목마른 것도 견디기 힘듭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때 한 모금의 물만 마셔도 살 것 같지요.
하나님께서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갈급히 구하는 것처럼 의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간절히 하나님 뜻을 구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행하라는 것이지요. 성결되기 위해,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 주님 마음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시는지요? 혹여 ‘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말씀 들으니까 배부르고 만족스럽다.’ 하십니까?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내 것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지요. 그런 사람은 항상 먹지 못하여 배고픈 사람과 같고,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목말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55절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지요. 이 말씀은 인자 곧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영적 양식이요, 목마름을 시원케 하는 영적 음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어디서 구하며, 어떻게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예수님의 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 곧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양식 삼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고, 시편 119편 147~148절에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하며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양식 삼는다 고백하지요.
여러분도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들은 설교 말씀을 늘 되새기며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양식 삼고 계신지요? 양식 삼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수분과 함께 섭취하지 않으면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진리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지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하여 악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할 때, 말씀이 소화되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면 체면 불구하고 허겁지겁 먹듯이, 영적인 양식과 음료를 찾은 우리는 생명이 되는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하기 위해 더 간절히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과 위배된 자신의 행동과 마음, 생각을 찾아 부족한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요.
또한 어찌하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릴까 궁구하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하게 의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행해 나갑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의를 이루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성경에 ‘버리라’ 하신 것을 마음과 생각, 행함에서 버리고,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라’ 하신 것을 지켜 행합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의에 주리고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을 양식 삼고 진리대로 순종해 나가면 비진리가 전혀 없는 성결한 영의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이 곧 배부름의 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면 하나님을 쏙 빼닮은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큼 그분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지켜 행하는 아비의 믿음에 관한 말씀이며, 영적으로 배부른 복된 모습입니다.
아비와 같은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고, 믿음이 쑥쑥 자라야 합니다. 육적으로도 아이가 태어나 젖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쑥쑥 자라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힘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행해 나가면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는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비의 믿음이 되어 만사형통한 축복이 임하며, 원수 마귀 사단을 능히 이기고 지배하며 다스립니다. 또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아 순종하지요.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대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여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형통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배부름을 받는 복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시험 환난을 당할 걱정이 없습니다.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 해도 피해 가게 하시고, 어려움을 만나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부를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헐벗은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으로 배불리 먹여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항상 풍성하고 배부른 삶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 )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 )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 )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뜻한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2021-11-19
제47과추수감사절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시편 17:8 | 참고 말씀: 레위기 23:42~43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수장절은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 동안 기거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에게 풍성한 소산을 주심은 물론, 사건 사고 많은 세상에서 늘 지키고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 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늘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십니다.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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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더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수장절은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 동안 기거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에게 풍성한 소산을 주심은 물론, 사건 사고 많은 세상에서 늘 지키고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 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늘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십니다.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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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더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2021-11-12
제46과팔복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5
읽을말씀 : 마태복음 5:5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5 | 참고 말씀: 시편 37:11
교육목표 : 온유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품음으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의약기술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토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처럼 세종대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덕으로 어진 정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깃들일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후대에까지 이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영적으로 온유한 자에게 어떠한 축복이 임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온유한 자란?
사전을 보면 ‘온유’에 대해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유순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성품이 순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거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또 소극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나 친절하게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는 미움이 있고 불편하여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화가 나지만 꾹꾹 눌러 참고, 따져 묻고 싶지만 겉으론 상대에게 양보하며 부드럽게 대하면 ‘착하다. 온유하다.’ 말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온유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어떤 불편함도, 싫어함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어야 온유하다고 인정해 주시지요.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대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며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고, 내 성격과 취향에 맞지 않아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품습니다.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며 매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는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런 온유한 마음은 ‘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솜에 단단한 물체나 돌멩이를 던지면 소리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줍니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사랑으로 보듬어 주지요.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덕’이란 사전에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 인격이 갖추어져 남을 정복시키는 일’이라 설명합니다. 영적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다 해도 덕이 없으면 온유함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지만 행동이 거칠고 실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남들에게 답답함을 주고, 어떤 이는 말이 많고 농담을 잘하여 신뢰가 떨어집니다.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말할 때에 딴청하거나 경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덕이 없으므로 온유한 마음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마음에 이룬 내면적인 것이라면 덕은 외면적인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저분하고 남루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지요.
덕을 갖춘 온유함은 마음과 함께 말이나 행동, 모습도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신뢰와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을 치리할 때도 물리적인 힘이 아닌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깃들지요. 본인이 선하게 행동하여 상대를 품을 뿐만 아니라, 꽃향기에 나비와 벌이 모여들듯 많은 사람이 그 선과 사랑에 감동을 얻고 깃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내가 있는 곳에 소리가 나고 화평이 깨어지지는 않습니까?
만일 모임에 불평하고 고집스런 사람이 있어서 화평이 깨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온유한 사람이 되어 그에게 감동과 은혜를 끼쳐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때문에 불화하고, 아내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 말고, 내가 가족에게 미소를 주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바라봐 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권면이나 지적을 받을 때는 어떠신지요? 나보다 못한 사람이 권면해도 중심에서 귀히 여기며 감사하게 받으시는지요? 이런 사람은 소자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을 것입니다.
또 능력이 부족하여 실수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지요? 다투지 않고 허탄한 말도 하지 않으며 꼭 필요한 진리의 말만 하고 계신지요? 온전한 온유를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걸리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며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열심히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거친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떨기도 뽑아내야 하지요.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름도 주면서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판단, 정죄, 교만 등 비진리와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면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온유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기업이란 “선대로부터 이어오는 재산과 사업 또는 기초가 되는 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이 세상에 속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의 땅을 주신다는 뜻이지요.
혹자는 “구원받아 천국 가면 그만이지, 개인적으로 땅을 꼭 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충성한 것만큼 개개인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교회만 왔다 갔다 하고, 어떤 이는 전도하고 충성하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애통하며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생명을 잃기까지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기 다르게 충성하였는데 천국에서 똑같은 상급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어찌 ‘공평하시며 공의로우시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자신을 낮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영적인온유함을 이룬 사람은 영혼 구원과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하므로 하늘나라에서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넓은 땅을 주시지요.
온유하여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 이르게 했으니, 천국에서도 그들이 감사하여 함께 사랑을 나누려고 집을 방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많은 사람을 맞을 집터도 넓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음 중심에서 존경하고 깃들이는 것이 천국에서는 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낮아지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기고 희생하였지만, 천국에서는 ‘큰 자’의 권세를 누리며 큰 땅을 소유하게 되지요. 이렇게 주어진 천국땅에 이 세상에서 충성으로, 봉사로, 헌금으로 드린 것들이 재료가 되어 아름다운 내 집이 지어집니다. 우리 주님의 지휘 아래 천사들이 정원과 호수, 수영장 등 각종 시설물을 짓게 되지요. 한번 받은 천국 땅과 상급은 천국에서 더 이상 늘릴 수도, 나누어 줄 수도, 구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덕을 갖춘 온유함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많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 )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이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 )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함을 이룰 수 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옥토란?
땅이 고르고 비옥하여 씨를 뿌리면 싹이 자라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내는 밭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와 틀에 매여 있는 단단한 길가밭과 같지 않고 부드럽다.
또 돌이나 가시떨기, 즉 비진리나 육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며, 하나님 말씀에 오직 아멘과 예로 순종하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
교육목표 : 온유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품음으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의약기술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토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처럼 세종대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덕으로 어진 정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깃들일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후대에까지 이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영적으로 온유한 자에게 어떠한 축복이 임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온유한 자란?
사전을 보면 ‘온유’에 대해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유순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성품이 순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거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또 소극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나 친절하게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는 미움이 있고 불편하여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화가 나지만 꾹꾹 눌러 참고, 따져 묻고 싶지만 겉으론 상대에게 양보하며 부드럽게 대하면 ‘착하다. 온유하다.’ 말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온유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어떤 불편함도, 싫어함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어야 온유하다고 인정해 주시지요.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대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며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고, 내 성격과 취향에 맞지 않아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품습니다.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며 매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는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런 온유한 마음은 ‘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솜에 단단한 물체나 돌멩이를 던지면 소리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줍니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사랑으로 보듬어 주지요.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덕’이란 사전에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 인격이 갖추어져 남을 정복시키는 일’이라 설명합니다. 영적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다 해도 덕이 없으면 온유함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지만 행동이 거칠고 실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남들에게 답답함을 주고, 어떤 이는 말이 많고 농담을 잘하여 신뢰가 떨어집니다.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말할 때에 딴청하거나 경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덕이 없으므로 온유한 마음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마음에 이룬 내면적인 것이라면 덕은 외면적인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저분하고 남루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지요.
덕을 갖춘 온유함은 마음과 함께 말이나 행동, 모습도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신뢰와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을 치리할 때도 물리적인 힘이 아닌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깃들지요. 본인이 선하게 행동하여 상대를 품을 뿐만 아니라, 꽃향기에 나비와 벌이 모여들듯 많은 사람이 그 선과 사랑에 감동을 얻고 깃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내가 있는 곳에 소리가 나고 화평이 깨어지지는 않습니까?
만일 모임에 불평하고 고집스런 사람이 있어서 화평이 깨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온유한 사람이 되어 그에게 감동과 은혜를 끼쳐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때문에 불화하고, 아내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 말고, 내가 가족에게 미소를 주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바라봐 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권면이나 지적을 받을 때는 어떠신지요? 나보다 못한 사람이 권면해도 중심에서 귀히 여기며 감사하게 받으시는지요? 이런 사람은 소자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을 것입니다.
또 능력이 부족하여 실수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지요? 다투지 않고 허탄한 말도 하지 않으며 꼭 필요한 진리의 말만 하고 계신지요? 온전한 온유를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걸리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며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열심히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거친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떨기도 뽑아내야 하지요.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름도 주면서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판단, 정죄, 교만 등 비진리와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면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온유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기업이란 “선대로부터 이어오는 재산과 사업 또는 기초가 되는 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이 세상에 속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의 땅을 주신다는 뜻이지요.
혹자는 “구원받아 천국 가면 그만이지, 개인적으로 땅을 꼭 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충성한 것만큼 개개인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교회만 왔다 갔다 하고, 어떤 이는 전도하고 충성하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애통하며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생명을 잃기까지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기 다르게 충성하였는데 천국에서 똑같은 상급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어찌 ‘공평하시며 공의로우시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자신을 낮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영적인온유함을 이룬 사람은 영혼 구원과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하므로 하늘나라에서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넓은 땅을 주시지요.
온유하여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 이르게 했으니, 천국에서도 그들이 감사하여 함께 사랑을 나누려고 집을 방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많은 사람을 맞을 집터도 넓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음 중심에서 존경하고 깃들이는 것이 천국에서는 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낮아지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기고 희생하였지만, 천국에서는 ‘큰 자’의 권세를 누리며 큰 땅을 소유하게 되지요. 이렇게 주어진 천국땅에 이 세상에서 충성으로, 봉사로, 헌금으로 드린 것들이 재료가 되어 아름다운 내 집이 지어집니다. 우리 주님의 지휘 아래 천사들이 정원과 호수, 수영장 등 각종 시설물을 짓게 되지요. 한번 받은 천국 땅과 상급은 천국에서 더 이상 늘릴 수도, 나누어 줄 수도, 구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덕을 갖춘 온유함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많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 )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이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 )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함을 이룰 수 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옥토란?
땅이 고르고 비옥하여 씨를 뿌리면 싹이 자라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내는 밭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와 틀에 매여 있는 단단한 길가밭과 같지 않고 부드럽다.
또 돌이나 가시떨기, 즉 비진리나 육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며, 하나님 말씀에 오직 아멘과 예로 순종하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
2021-11-05
제45과팔복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4
읽을말씀 : 마태복음 5: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 | 참고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삶이 버겁고 힘이 들 때 한탄하여 슬피 울며 애통합니다. 이런 육적인 애통은 하나님께 위로받지도 못할뿐더러 복을 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애통할 때 기뻐하시지요.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성결을 위해 애통할 때 위로와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1. 자신의 슬픔 속에서 나오는 육적인 애통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가난해서 서글퍼하고, 병약하고 무능해서 한탄합니다. 또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고, 자녀가 말썽을 부리고, 남편이나 아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불만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니 눈물을 흘리며 속상해하지요. 이는 육의 사람들이 하는 육적인 애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상관없고 위로와 축복이 임하지도 않지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해도 기뻐하고,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슬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감정에서 나오는 슬픔으로 애통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지요.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영적인 애통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
1) 죄에 대한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마음으로 깨우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눈물, 콧물을 흘리며 죄에 대해 통회자복하는 회개의 애통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죄악 가운데 살았던 것을 회개하며 애통해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회개의 애통을 하면 죄의 짐이 벗겨지므로 마음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회개하고 애통하며 은혜받았다 해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또 애통할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성결되어야 하는데,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전까지는 아직 온전치 않으므로 다시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하고 민망하여 “하나님,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하며 통회자복하게 됩니다. 이런 애통함이 있을 때 위로부터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입니다.
2) 사명 감당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만일 내가 직분자요 일꾼인데 기도하지 않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지 못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구역장으로서, 기관장으로서 심방하고 전도하며 맡은 분야에서 열매를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회개의 애통을 해야 하지요.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무서운 책망을 듣습니다.
그렇다고 “사명을 맡으면 책임이 따르고, 열심히 하지 못하면 회개거리가 생기니 사명을 맡지 말고 그냥 교회만 열심히 다녀야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해야 합니다. 만일 사명을 맡고도 충성하지 못했다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중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형제가 사망의 길로 갈 때 사랑으로 애통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애통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말씀하십니다(눅 23:28). 바로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망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범죄하여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내가 대신하여 회개하고, 상대가 진리로 행할 수 있도록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시험에 들어 힘을 잃고 있을 때 권면해 주며 힘을 실어 주되, 자신의 일과 같이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출 32:32). 순종 잘하는 사랑스러운 백성도 아니고, 늘 원망 불평하며 모세를 힘들게 하는 백성이었지만 모세는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애통하였던 것입니다.
4) 영혼 구원을 위해 애통합니다.
가족, 일가친척, 이웃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멸망으로 가는 무수한 영혼을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통, 교계에 대한 애통,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일들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영적인 애통입니다.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핏값을 찾아 드리기 위해 애통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며 하늘나라에서 큰 자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명예와 권세, 건강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며 애통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숱한 고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는 고난으로 인해 힘들어하거나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염려하고 애통해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후 11:28~29). 바로 성도들이 말씀 가운데 서지 못할 때,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때였지요.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셨고, 하늘나라에서도 큰 자로 높이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3. 애통하는 자가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애통을 하면 반드시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마 5:4). 회개의 애통을 하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심으로 위로하시지요.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중심에서 회개할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시는 큰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다시 죄악 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두어지지요. 따라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되 또다시 범죄하였다면 신속히 회개하는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사명 감당을 위해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애통함의 내용에 따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가령, 가르치는 자로서 말씀의 권세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면, 그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많은 영혼을 개종시키고 구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다면 세상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하시고 사명 감당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시지요.
이 외에도 형제가 사망으로 가는 것을 볼 때,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와 세계 선교를 위해 애통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 맞게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 범죄했던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고, 선한 일꾼을 보내 주셔서 교회가 부흥되며, 세계 선교를 활발히 이루게 하시지요. 이처럼 영적인 애통은 하늘에 상급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은 물론 하나님 나라에도 큰 유익이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애통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 죄에 대한 ( )의 애통이 있다.
둘째, ( )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이 있다.
셋째, 믿음의 형제가 ( )의 ( )로 갈 때 사랑의 애통이 있다.
넷째, ( )을 위한 애통이 있다.
2. 마태복음 5장 4절을 외워 봅시다.
“(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를 받을 것임이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할 때 받는 상급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늘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천국 집은 황금 보석 장식 외에도 유난히 크고 빛나는 진주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한 알의 진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조개는 오랜 시간 고통을 참아내며 자신의 진액을 쏟는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는 동안 변화되기 위해 흘린 눈물,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했던 시간들에 대한 위로를 진주로 표현해 주시는 것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삶이 버겁고 힘이 들 때 한탄하여 슬피 울며 애통합니다. 이런 육적인 애통은 하나님께 위로받지도 못할뿐더러 복을 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애통할 때 기뻐하시지요.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성결을 위해 애통할 때 위로와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1. 자신의 슬픔 속에서 나오는 육적인 애통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가난해서 서글퍼하고, 병약하고 무능해서 한탄합니다. 또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고, 자녀가 말썽을 부리고, 남편이나 아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불만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니 눈물을 흘리며 속상해하지요. 이는 육의 사람들이 하는 육적인 애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상관없고 위로와 축복이 임하지도 않지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해도 기뻐하고,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슬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감정에서 나오는 슬픔으로 애통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지요.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영적인 애통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
1) 죄에 대한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마음으로 깨우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눈물, 콧물을 흘리며 죄에 대해 통회자복하는 회개의 애통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죄악 가운데 살았던 것을 회개하며 애통해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회개의 애통을 하면 죄의 짐이 벗겨지므로 마음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회개하고 애통하며 은혜받았다 해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또 애통할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성결되어야 하는데,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전까지는 아직 온전치 않으므로 다시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하고 민망하여 “하나님,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하며 통회자복하게 됩니다. 이런 애통함이 있을 때 위로부터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입니다.
2) 사명 감당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만일 내가 직분자요 일꾼인데 기도하지 않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지 못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구역장으로서, 기관장으로서 심방하고 전도하며 맡은 분야에서 열매를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회개의 애통을 해야 하지요.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무서운 책망을 듣습니다.
그렇다고 “사명을 맡으면 책임이 따르고, 열심히 하지 못하면 회개거리가 생기니 사명을 맡지 말고 그냥 교회만 열심히 다녀야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해야 합니다. 만일 사명을 맡고도 충성하지 못했다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중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형제가 사망의 길로 갈 때 사랑으로 애통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애통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말씀하십니다(눅 23:28). 바로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망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범죄하여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내가 대신하여 회개하고, 상대가 진리로 행할 수 있도록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시험에 들어 힘을 잃고 있을 때 권면해 주며 힘을 실어 주되, 자신의 일과 같이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출 32:32). 순종 잘하는 사랑스러운 백성도 아니고, 늘 원망 불평하며 모세를 힘들게 하는 백성이었지만 모세는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애통하였던 것입니다.
4) 영혼 구원을 위해 애통합니다.
가족, 일가친척, 이웃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멸망으로 가는 무수한 영혼을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통, 교계에 대한 애통,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일들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영적인 애통입니다.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핏값을 찾아 드리기 위해 애통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며 하늘나라에서 큰 자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명예와 권세, 건강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며 애통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숱한 고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는 고난으로 인해 힘들어하거나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염려하고 애통해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후 11:28~29). 바로 성도들이 말씀 가운데 서지 못할 때,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때였지요.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셨고, 하늘나라에서도 큰 자로 높이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3. 애통하는 자가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애통을 하면 반드시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마 5:4). 회개의 애통을 하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심으로 위로하시지요.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중심에서 회개할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시는 큰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다시 죄악 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두어지지요. 따라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되 또다시 범죄하였다면 신속히 회개하는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사명 감당을 위해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애통함의 내용에 따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가령, 가르치는 자로서 말씀의 권세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면, 그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많은 영혼을 개종시키고 구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다면 세상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하시고 사명 감당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시지요.
이 외에도 형제가 사망으로 가는 것을 볼 때,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와 세계 선교를 위해 애통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 맞게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 범죄했던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고, 선한 일꾼을 보내 주셔서 교회가 부흥되며, 세계 선교를 활발히 이루게 하시지요. 이처럼 영적인 애통은 하늘에 상급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은 물론 하나님 나라에도 큰 유익이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애통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 죄에 대한 ( )의 애통이 있다.
둘째, ( )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이 있다.
셋째, 믿음의 형제가 ( )의 ( )로 갈 때 사랑의 애통이 있다.
넷째, ( )을 위한 애통이 있다.
2. 마태복음 5장 4절을 외워 봅시다.
“(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를 받을 것임이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할 때 받는 상급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늘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천국 집은 황금 보석 장식 외에도 유난히 크고 빛나는 진주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한 알의 진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조개는 오랜 시간 고통을 참아내며 자신의 진액을 쏟는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는 동안 변화되기 위해 흘린 눈물,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했던 시간들에 대한 위로를 진주로 표현해 주시는 것이다.
2021-10-29
제44과팔복 ( 1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3
읽을말씀 : 마태복음 5: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3 | 참고 말씀: 요한일서 2:15~16
교육목표 :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일터 등 모든 곳에서 만사형통한 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유하고 명예와 권세가 있으며, 자녀들이 효도하고 건강하며 가족이 화목하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모두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질이 많아도 건강을 잃어 걱정하고, 명예 권세가 있지만 가정이 불화하여 속상해합니다. 또 불의의 사고로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해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고,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잘사는 것에만 삶의 목표를 둔다면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고 말지요.
그러면 과연 참된 복은 무엇일까요?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부유한 것이 좋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악이 없고 선한 마음, 아무 욕심이 없어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을 채울 영의 것을 사모하기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전도해도 쉽게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순종하니 구원받기도 쉽지요.
반면 마음이 부유한 사람들은 세상 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어 전도를 하면 거부합니다. “사업이 바빠서요. 공부해야 해요. 돈 벌어야 해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갈게요.”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부, 명예, 권세로 그 눈과 마음이 가득 차 있으니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 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심령이 부유한 부자와 심령이 가난한 거지 나사로가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부자는 호의호식하며 날마다 잔치를 베풀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마음까지 부요해져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비록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그 상처를 개가 핥는 불쌍한 삶을 살았어도 심령이 가난했기에 하나님을 믿었지요.
그런데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형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렸습니다. 반면 부자는 아랫음부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가운데 고통받지요. 그러니 이 땅에서 날마다 잔치를 즐겼던 부자와 비록 구걸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거지 나사로 중에서 진정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이 비유는 거지와 같이 가난한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도 건강의 복, 물질의 복, 머리 되는 복 등 만사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또한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참되고 영원한 복 곧 천국을 주시지요.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려면
1)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세상 것들로 채워 있던 우리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천국의 소망으로 온전히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죄를 지으려는 마음의 속성이지요. 즉 ‘죄를 짓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혈기, 욕심, 음욕, 시기, 교만 등 온갖 악이 있으면 죄를 짓고 싶어지지요.
가령, 초신자가 술을 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직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술자리에 가면 술을 마시고 싶은 강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육신의 정욕이 사람을 충동하여 술을 마시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술을 마시도록 만듭니다. 또 판단 정죄하는 죄성이 있으면 남의 소문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수군수군합니다.
다음으로,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을 말합니다.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들으며 발이 있어 간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으며 어디에 있는지가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 번 스쳐가며 본 것이라 해도, 아무 의미 없이 보고 들었다 해도 그것이 느낌으로 입력되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또 보고 싶고 취하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고 듣고 접한 것들이 죄에 속한 것,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음란물을 한 번 봤는데 그것이 공부를 방해하며 또 보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안목의 정욕은 내 안에 비진리를 발동시킴으로 육신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니면 보거나 듣지도 말고 그런 곳에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 부, 명예, 권세, 재능, 외모, 지식 등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에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이 나옵니다. 이는 가난한 심령인 섬김, 희생, 사랑과는 거리가 먼, 마음이 부유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천국의 아름다움과 소망은 없고 이 세상 것들이 더 좋아 보이고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기도 싫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쭉정이 신앙생활에 머무르지요.
혹여 여러분은 나를 자랑하고 싶고 세상 것에 욕심이 있지는 않은지, 은근히 인정받고 높여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천국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영적인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알려 주면 쉽게 받아들이고 자존심이나 자기 고집이 없어 지적과 권면을 받아도 쉽게 인정하지요. 잘못한 것에 대해 바로 뉘우치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씁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고, 권면을 받아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죄책감도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지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하지요.
또한 영적인 어린아이는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지만 악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마음에서부터 싫어지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성령님을 통해 신속히 변화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가난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 항상 겸손히 낮아지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불같은 기도를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자녀가 되어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 땅에서도 부와 명예, 건강, 물질 등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 )이 가난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 )이 없고 선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이 없어 ( )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한다.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으려면
첫째, ( )의 정욕, ( )의 정욕, ( )의 자랑을 버려야 한다.
둘째, 영적인 ( )가 되어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지옥의 대기 장소인 ‘아랫음부’
창세 이래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 온갖 형벌을 받으며 머무는 장소이다. 누가복음 16장 24절을 보면, 아랫음부에 있던 부자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하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아랫음부에서 대기하던 이들은 인간 경작이 마쳐지고 백보좌 대심판 후에 죄의 경중에 따라 마침내 지옥의 불못이나 유황못으로 떨어진다.
교육목표 :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일터 등 모든 곳에서 만사형통한 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유하고 명예와 권세가 있으며, 자녀들이 효도하고 건강하며 가족이 화목하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모두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질이 많아도 건강을 잃어 걱정하고, 명예 권세가 있지만 가정이 불화하여 속상해합니다. 또 불의의 사고로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해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고,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잘사는 것에만 삶의 목표를 둔다면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고 말지요.
그러면 과연 참된 복은 무엇일까요?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부유한 것이 좋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악이 없고 선한 마음, 아무 욕심이 없어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을 채울 영의 것을 사모하기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전도해도 쉽게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순종하니 구원받기도 쉽지요.
반면 마음이 부유한 사람들은 세상 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어 전도를 하면 거부합니다. “사업이 바빠서요. 공부해야 해요. 돈 벌어야 해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갈게요.”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부, 명예, 권세로 그 눈과 마음이 가득 차 있으니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 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심령이 부유한 부자와 심령이 가난한 거지 나사로가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부자는 호의호식하며 날마다 잔치를 베풀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마음까지 부요해져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비록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그 상처를 개가 핥는 불쌍한 삶을 살았어도 심령이 가난했기에 하나님을 믿었지요.
그런데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형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렸습니다. 반면 부자는 아랫음부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가운데 고통받지요. 그러니 이 땅에서 날마다 잔치를 즐겼던 부자와 비록 구걸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거지 나사로 중에서 진정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이 비유는 거지와 같이 가난한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도 건강의 복, 물질의 복, 머리 되는 복 등 만사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또한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참되고 영원한 복 곧 천국을 주시지요.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려면
1)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세상 것들로 채워 있던 우리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천국의 소망으로 온전히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죄를 지으려는 마음의 속성이지요. 즉 ‘죄를 짓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혈기, 욕심, 음욕, 시기, 교만 등 온갖 악이 있으면 죄를 짓고 싶어지지요.
가령, 초신자가 술을 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직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술자리에 가면 술을 마시고 싶은 강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육신의 정욕이 사람을 충동하여 술을 마시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술을 마시도록 만듭니다. 또 판단 정죄하는 죄성이 있으면 남의 소문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수군수군합니다.
다음으로,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을 말합니다.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들으며 발이 있어 간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으며 어디에 있는지가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 번 스쳐가며 본 것이라 해도, 아무 의미 없이 보고 들었다 해도 그것이 느낌으로 입력되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또 보고 싶고 취하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고 듣고 접한 것들이 죄에 속한 것,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음란물을 한 번 봤는데 그것이 공부를 방해하며 또 보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안목의 정욕은 내 안에 비진리를 발동시킴으로 육신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니면 보거나 듣지도 말고 그런 곳에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 부, 명예, 권세, 재능, 외모, 지식 등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에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이 나옵니다. 이는 가난한 심령인 섬김, 희생, 사랑과는 거리가 먼, 마음이 부유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천국의 아름다움과 소망은 없고 이 세상 것들이 더 좋아 보이고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기도 싫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쭉정이 신앙생활에 머무르지요.
혹여 여러분은 나를 자랑하고 싶고 세상 것에 욕심이 있지는 않은지, 은근히 인정받고 높여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천국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영적인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알려 주면 쉽게 받아들이고 자존심이나 자기 고집이 없어 지적과 권면을 받아도 쉽게 인정하지요. 잘못한 것에 대해 바로 뉘우치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씁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고, 권면을 받아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죄책감도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지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하지요.
또한 영적인 어린아이는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지만 악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마음에서부터 싫어지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성령님을 통해 신속히 변화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가난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 항상 겸손히 낮아지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불같은 기도를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자녀가 되어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 땅에서도 부와 명예, 건강, 물질 등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 )이 가난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 )이 없고 선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이 없어 ( )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한다.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으려면
첫째, ( )의 정욕, ( )의 정욕, ( )의 자랑을 버려야 한다.
둘째, 영적인 ( )가 되어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지옥의 대기 장소인 ‘아랫음부’
창세 이래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 온갖 형벌을 받으며 머무는 장소이다. 누가복음 16장 24절을 보면, 아랫음부에 있던 부자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하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아랫음부에서 대기하던 이들은 인간 경작이 마쳐지고 백보좌 대심판 후에 죄의 경중에 따라 마침내 지옥의 불못이나 유황못으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