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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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3
제49과팔복(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7
읽을말씀 : 마태복음 5:7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7 | 참고 말씀: 히브리서 12:6
교육목표 : 긍휼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하지요.
이는 성령의 열매 중 양선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양선은 악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이런 양선의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더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입니다.
1. 한없는 용서의 긍휼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준다면 크게 관용을 베푼 것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말씀하시지요. 이는 70번씩 7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완전한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용서의 긍휼에 대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6천 일, 즉 16여 년간을 꼬박 일해서 모은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는 3억 원에 해당하지요.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고 한다면 3조 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을 테니 참아 달라고 사정하지요. 결국 임금이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오던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할 경우 일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 정도의 금액에 불과합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며 감옥에 가두고 말지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작은 잘못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 정죄한다면 얼마나 악한 모습이겠습니까.
혹여 자신이 상대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다 해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포용할 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해도 징계하기보다는 먼저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면할 때에 불편한 마음으로 찌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사랑의 권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2. 사랑을 담은 징계의 긍휼
상황에 따라 긍휼이 징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징계의 긍휼 역시 미움이나 정죄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도 따르고, 그렇게 해서라도 죄에서 돌이켜 진리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이를 바로잡는 이유로 처음부터 매를 들어 때리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자녀가 중심에서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한다면 “용서해 줄 테니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라.” 하고 따뜻하게 안아 주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가 말로는 회개한다 하면서 계속하여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마음 깊이 깨우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빗나가기 전에 징계를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징계라도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이가 물건을 훔쳤을 때, 아이가 중심에서 용서를 빈다면 선한 사람은 긍휼히 여겨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은 혈기를 내며 아이를 책망하거나 심지어 용서를 빌어도 처벌을 요구하지요. 설령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아이의 잘못을 전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이러한 징계는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긍휼이 아닐뿐더러 결코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록 상대가 잘못을 했다 해도 그 사람의 입장과 장래를 생각하여 사랑으로 징계할 때라야 징계의 긍휼에 속하지요.
성경에는 믿음의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진리로 권고하고 징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마 18:15~17).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에게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만일 권면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이 속한 모임의 윗분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해야 하지요.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려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과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3. 올바른 구제의 긍휼
하나님의 자녀라면 구제의 긍휼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일 믿음의 형제가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행함이 없다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약 2:15~16). 진정한 구제는 형제가 어려울 때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혹자는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녀가 굶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에게도 내 자녀와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어렵다고 무턱대고 구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제하거나, 게을러서 놀고 돈만 있으면 도박하고 술 마시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죄를 짓게 도와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구제는 오히려 축복이 막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요. 따라서 잘 분별하여 구제해야 하겠습니다.
4.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설령 자신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 해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 혹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거나 실수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부요하고 강건한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며, 연약함을 강건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한다.
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불순종한 요나를 도왔다가 어려움을 당한 경우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간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랑은 더욱 심해져 모두 죽게될 상황에 이르자 할 수 없이 문제의 원인인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선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요나를 도우려다 풍랑과 싸우며 고생해야 했고, 자신들의 짐까지 바다에 던져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다면 자신도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교육목표 : 긍휼의 향기로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하지요.
이는 성령의 열매 중 양선과 비슷하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양선은 악이 전혀 없으며 오직 선만을 추구하는 마음이지요. 이런 양선의 마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더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긍휼입니다.
1. 한없는 용서의 긍휼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일곱 번씩이나 용서해 준다면 크게 관용을 베푼 것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말씀하시지요. 이는 70번씩 7번, 즉 490번만 용서해 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7은 완전수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완전한 용서,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용서의 긍휼에 대해 깨우쳐 주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갚을 힘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노동자가 6천 일, 즉 16여 년간을 꼬박 일해서 모은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한다면 한 달란트는 3억 원에 해당하지요.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고 한다면 3조 원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종은 엎드려 절하며 갚을 테니 참아 달라고 사정하지요. 결국 임금이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나오던 종이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 단위로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품삯을 5만 원으로 계산할 경우 일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 정도의 금액에 불과합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며 감옥에 가두고 말지요.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작은 잘못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판단 정죄한다면 얼마나 악한 모습이겠습니까.
혹여 자신이 상대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다 해도 싫어하고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포용할 때,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를 미워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해도 징계하기보다는 먼저 사랑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면할 때에 불편한 마음으로 찌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사랑의 권면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진리의 말씀을 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2. 사랑을 담은 징계의 긍휼
상황에 따라 긍휼이 징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징계의 긍휼 역시 미움이나 정죄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징계도 따르고, 그렇게 해서라도 죄에서 돌이켜 진리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이를 바로잡는 이유로 처음부터 매를 들어 때리는 부모는 드물 것입니다. 자녀가 중심에서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한다면 “용서해 줄 테니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라.” 하고 따뜻하게 안아 주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가 말로는 회개한다 하면서 계속하여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마음 깊이 깨우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빗나가기 전에 징계를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징계라도 사랑이 없으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이가 물건을 훔쳤을 때, 아이가 중심에서 용서를 빈다면 선한 사람은 긍휼히 여겨 용서해 줍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은 혈기를 내며 아이를 책망하거나 심지어 용서를 빌어도 처벌을 요구하지요. 설령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아이의 잘못을 전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이러한 징계는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긍휼이 아닐뿐더러 결코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비록 상대가 잘못을 했다 해도 그 사람의 입장과 장래를 생각하여 사랑으로 징계할 때라야 징계의 긍휼에 속하지요.
성경에는 믿음의 형제가 범죄했을 경우 진리로 권고하고 징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마 18:15~17).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에게 사랑으로 권면하여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만일 권면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이 속한 모임의 윗분에게 말하여 돌이키게 해야 하지요. 그래도 듣지 않는다면 교회에 알려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과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3. 올바른 구제의 긍휼
하나님의 자녀라면 구제의 긍휼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일 믿음의 형제가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말로만 안타까워하고 행함이 없다면 긍휼이라 할 수 없습니다(약 2:15~16). 진정한 구제는 형제가 어려울 때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혹자는 “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도와줍니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녀가 굶고 있으면 가만히 있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에게도 내 자녀와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어렵다고 무턱대고 구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범죄하여 징계를 받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제하거나, 게을러서 놀고 돈만 있으면 도박하고 술 마시는 사람을 구제한다면 죄를 짓게 도와주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구제는 오히려 축복이 막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요. 따라서 잘 분별하여 구제해야 하겠습니다.
4.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설령 자신을 힘들게 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라 해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면, 혹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거나 실수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부요하고 강건한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시며, 연약함을 강건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의 영적인 의미는 누가 범죄하거나 자신을 힘들게 할 때, 중심에서 용서하고 기도해 주며 사랑으로 권면해 주는 마음을 뜻한다.
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불순종한 요나를 도왔다가 어려움을 당한 경우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뜻을 외치라고 명하신다. 그런데 요나는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국 앗수르가 망하기를 원했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니느웨와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배를 타고 간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대풍을 내리셨고,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풍랑은 더욱 심해져 모두 죽게될 상황에 이르자 할 수 없이 문제의 원인인 요나를 바다에 던진다.
선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요나를 도우려다 풍랑과 싸우며 고생해야 했고, 자신들의 짐까지 바다에 던져 큰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다면 자신도 함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
2021-11-26
제48과팔복(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6
읽을말씀 : 마태복음 5:6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6 | 참고 말씀: 요한복음 6:35, 55
교육목표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 삼아 행함으로 아비의 믿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을 보면 ‘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옳은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성결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굶주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너무 가난하여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죽을 끓여 겨우 연명한 경우도 있었지요.
그런데 배고픈 것 못지않게 목마른 것도 견디기 힘듭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때 한 모금의 물만 마셔도 살 것 같지요.
하나님께서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갈급히 구하는 것처럼 의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간절히 하나님 뜻을 구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행하라는 것이지요. 성결되기 위해,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 주님 마음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시는지요? 혹여 ‘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말씀 들으니까 배부르고 만족스럽다.’ 하십니까?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내 것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지요. 그런 사람은 항상 먹지 못하여 배고픈 사람과 같고,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목말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55절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지요. 이 말씀은 인자 곧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영적 양식이요, 목마름을 시원케 하는 영적 음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어디서 구하며, 어떻게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예수님의 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 곧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양식 삼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고, 시편 119편 147~148절에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하며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양식 삼는다 고백하지요.
여러분도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들은 설교 말씀을 늘 되새기며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양식 삼고 계신지요? 양식 삼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수분과 함께 섭취하지 않으면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진리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지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하여 악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할 때, 말씀이 소화되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면 체면 불구하고 허겁지겁 먹듯이, 영적인 양식과 음료를 찾은 우리는 생명이 되는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하기 위해 더 간절히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과 위배된 자신의 행동과 마음, 생각을 찾아 부족한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요.
또한 어찌하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릴까 궁구하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하게 의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행해 나갑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의를 이루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성경에 ‘버리라’ 하신 것을 마음과 생각, 행함에서 버리고,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라’ 하신 것을 지켜 행합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의에 주리고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을 양식 삼고 진리대로 순종해 나가면 비진리가 전혀 없는 성결한 영의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이 곧 배부름의 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면 하나님을 쏙 빼닮은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큼 그분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지켜 행하는 아비의 믿음에 관한 말씀이며, 영적으로 배부른 복된 모습입니다.
아비와 같은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고, 믿음이 쑥쑥 자라야 합니다. 육적으로도 아이가 태어나 젖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쑥쑥 자라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힘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행해 나가면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는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비의 믿음이 되어 만사형통한 축복이 임하며, 원수 마귀 사단을 능히 이기고 지배하며 다스립니다. 또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아 순종하지요.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대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여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형통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배부름을 받는 복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시험 환난을 당할 걱정이 없습니다.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 해도 피해 가게 하시고, 어려움을 만나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부를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헐벗은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으로 배불리 먹여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항상 풍성하고 배부른 삶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 )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 )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 )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뜻한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교육목표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 삼아 행함으로 아비의 믿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을 보면 ‘의’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옳은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성결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굶주림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너무 가난하여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죽을 끓여 겨우 연명한 경우도 있었지요.
그런데 배고픈 것 못지않게 목마른 것도 견디기 힘듭니다. 찜통 같은 무더위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때 한 모금의 물만 마셔도 살 것 같지요.
하나님께서는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음식과 물을 갈급히 구하는 것처럼 의를 사모하라 하십니다. 간절히 하나님 뜻을 구하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행하라는 것이지요. 성결되기 위해, 진리 안에 거하기 위해, 주님 마음을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시는지요? 혹여 ‘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말씀 들으니까 배부르고 만족스럽다.’ 하십니까?
말씀을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내 것이 되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이 나의 의가 될 수 없지요. 그런 사람은 항상 먹지 못하여 배고픈 사람과 같고, 물이 있어도 마시지 않아 목말라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 깊이 알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55절에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셨지요. 이 말씀은 인자 곧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영적 양식이요, 목마름을 시원케 하는 영적 음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2천 년 전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의 살과 피를 어디서 구하며, 어떻게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예수님의 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했고,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말씀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 곧 예수님의 살은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양식 삼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했고, 시편 119편 147~148절에는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하며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양식 삼는다 고백하지요.
여러분도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들은 설교 말씀을 늘 되새기며 소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양식 삼고 계신지요? 양식 삼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운 말씀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듣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수분과 함께 섭취하지 않으면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지만 진리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지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순종하여 악을 버리고 빛 가운데 행할 때, 말씀이 소화되어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며칠 굶은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으면 체면 불구하고 허겁지겁 먹듯이, 영적인 양식과 음료를 찾은 우리는 생명이 되는 말씀을 양식 삼고 행하기 위해 더 간절히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과 위배된 자신의 행동과 마음, 생각을 찾아 부족한 부분을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요.
또한 어찌하면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릴까 궁구하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처럼 갈급하게 의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여 죄를 버리고 진리를 행해 나갑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의를 이루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성경에 ‘버리라’ 하신 것을 마음과 생각, 행함에서 버리고,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라’ 하신 것을 지켜 행합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의에 주리고 갈급한 심정으로 말씀을 양식 삼고 진리대로 순종해 나가면 비진리가 전혀 없는 성결한 영의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지요. 이것이 곧 배부름의 복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이루면 하나님을 쏙 빼닮은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닮은 만큼 그분이 가지신 권세와 능력, 권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에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말씀합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지켜 행하는 아비의 믿음에 관한 말씀이며, 영적으로 배부른 복된 모습입니다.
아비와 같은 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영의 양식을 배부르게 먹고, 믿음이 쑥쑥 자라야 합니다. 육적으로도 아이가 태어나 젖을 먹고 밥을 먹으면서 쑥쑥 자라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힘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행해 나가면 믿음이 성장하여 하나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는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비의 믿음이 되어 만사형통한 축복이 임하며, 원수 마귀 사단을 능히 이기고 지배하며 다스립니다. 또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감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까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아 순종하지요.
로마서 8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대로 신령한 차원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여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형통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배부름을 받는 복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시험 환난을 당할 걱정이 없습니다.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 해도 피해 가게 하시고, 어려움을 만나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행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만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부를 것이 아니라, 굶주리고 헐벗은 수많은 영혼에게 복음으로 배불리 먹여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항상 풍성하고 배부른 삶을 누리게 해 주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 )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는 것, 곧 선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 )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되찾기까지 즉 ( )되기까지 거쳐야 할 모든 과정을 뜻한다.
2. 영적으로 배부르고 목마름을 시원케 하려면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는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어떠한 축복이 임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믿음의 분량(요한일서 2:12~14)
◆ 자녀들의 믿음(믿음의 1단계) - 성령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
◆ 아이들의 믿음(믿음의 2단계) -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
◆ 청년들의 믿음(믿음의 3단계) -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믿음
◆ 아비들의 믿음(믿음의 4, 5단계) -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기쁘시게 하는 믿음
2021-11-19
제47과추수감사절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시편 17:8 | 참고 말씀: 레위기 23:42~43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수장절은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 동안 기거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에게 풍성한 소산을 주심은 물론, 사건 사고 많은 세상에서 늘 지키고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 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늘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십니다.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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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더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와 영적 의미를 알아 하나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 영혼을 살찌우며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감사의 예배를 올리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장절은 우리나라 추석처럼 오곡백과가 풍성하여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과실과 곡식을 수확하여 저장을 마치고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수장절은 초막절(레 23:34)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 동안 기거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에 “너희는 칠 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풍성한 수확물로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마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미국의 개척 역사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620년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며 험난한 항해 끝에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잃지 않았지요.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에게 풍성한 소산을 주심은 물론, 사건 사고 많은 세상에서 늘 지키고 보호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랍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병들이 많고, 병명도 모르고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도 허다합니다. 이 중에는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하지요.
더구나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로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특히 마음의 병으로 불리는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알코올과 마약의 굴레 속에 살아갑니다.
이처럼 질병 많고 사고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목자의 공간 안에서 전 세계 만민의 양 떼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셨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조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전할 수가 없습니다.
뉴스를 보면 천재지변으로 하루아침에 집을 잃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지구촌은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지진과 화산폭발, 가뭄, 산불, 태풍, 폭우, 폭설, 홍수 등의 소식이 연일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늘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라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십니다. 혹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돌이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위로하고 치료해 주십니다.
시편 17편 8절에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올해도 만민의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마음에 되새기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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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점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소망이 더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 세계 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합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까지 이끄실 것을 확신하니 믿음이 생긴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많은 축복과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셨고 진리로 가득 채워 주셨지요.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키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라는 중심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사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2021-11-12
제46과팔복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5
읽을말씀 : 마태복음 5:5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5 | 참고 말씀: 시편 37:11
교육목표 : 온유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품음으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의약기술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토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처럼 세종대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덕으로 어진 정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깃들일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후대에까지 이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영적으로 온유한 자에게 어떠한 축복이 임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온유한 자란?
사전을 보면 ‘온유’에 대해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유순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성품이 순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거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또 소극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나 친절하게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는 미움이 있고 불편하여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화가 나지만 꾹꾹 눌러 참고, 따져 묻고 싶지만 겉으론 상대에게 양보하며 부드럽게 대하면 ‘착하다. 온유하다.’ 말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온유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어떤 불편함도, 싫어함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어야 온유하다고 인정해 주시지요.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대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며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고, 내 성격과 취향에 맞지 않아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품습니다.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며 매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는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런 온유한 마음은 ‘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솜에 단단한 물체나 돌멩이를 던지면 소리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줍니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사랑으로 보듬어 주지요.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덕’이란 사전에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 인격이 갖추어져 남을 정복시키는 일’이라 설명합니다. 영적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다 해도 덕이 없으면 온유함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지만 행동이 거칠고 실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남들에게 답답함을 주고, 어떤 이는 말이 많고 농담을 잘하여 신뢰가 떨어집니다.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말할 때에 딴청하거나 경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덕이 없으므로 온유한 마음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마음에 이룬 내면적인 것이라면 덕은 외면적인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저분하고 남루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지요.
덕을 갖춘 온유함은 마음과 함께 말이나 행동, 모습도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신뢰와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을 치리할 때도 물리적인 힘이 아닌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깃들지요. 본인이 선하게 행동하여 상대를 품을 뿐만 아니라, 꽃향기에 나비와 벌이 모여들듯 많은 사람이 그 선과 사랑에 감동을 얻고 깃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내가 있는 곳에 소리가 나고 화평이 깨어지지는 않습니까?
만일 모임에 불평하고 고집스런 사람이 있어서 화평이 깨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온유한 사람이 되어 그에게 감동과 은혜를 끼쳐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때문에 불화하고, 아내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 말고, 내가 가족에게 미소를 주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바라봐 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권면이나 지적을 받을 때는 어떠신지요? 나보다 못한 사람이 권면해도 중심에서 귀히 여기며 감사하게 받으시는지요? 이런 사람은 소자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을 것입니다.
또 능력이 부족하여 실수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지요? 다투지 않고 허탄한 말도 하지 않으며 꼭 필요한 진리의 말만 하고 계신지요? 온전한 온유를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걸리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며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열심히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거친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떨기도 뽑아내야 하지요.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름도 주면서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판단, 정죄, 교만 등 비진리와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면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온유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기업이란 “선대로부터 이어오는 재산과 사업 또는 기초가 되는 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이 세상에 속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의 땅을 주신다는 뜻이지요.
혹자는 “구원받아 천국 가면 그만이지, 개인적으로 땅을 꼭 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충성한 것만큼 개개인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교회만 왔다 갔다 하고, 어떤 이는 전도하고 충성하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애통하며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생명을 잃기까지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기 다르게 충성하였는데 천국에서 똑같은 상급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어찌 ‘공평하시며 공의로우시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자신을 낮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영적인온유함을 이룬 사람은 영혼 구원과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하므로 하늘나라에서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넓은 땅을 주시지요.
온유하여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 이르게 했으니, 천국에서도 그들이 감사하여 함께 사랑을 나누려고 집을 방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많은 사람을 맞을 집터도 넓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음 중심에서 존경하고 깃들이는 것이 천국에서는 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낮아지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기고 희생하였지만, 천국에서는 ‘큰 자’의 권세를 누리며 큰 땅을 소유하게 되지요. 이렇게 주어진 천국땅에 이 세상에서 충성으로, 봉사로, 헌금으로 드린 것들이 재료가 되어 아름다운 내 집이 지어집니다. 우리 주님의 지휘 아래 천사들이 정원과 호수, 수영장 등 각종 시설물을 짓게 되지요. 한번 받은 천국 땅과 상급은 천국에서 더 이상 늘릴 수도, 나누어 줄 수도, 구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덕을 갖춘 온유함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많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 )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이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 )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함을 이룰 수 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옥토란?
땅이 고르고 비옥하여 씨를 뿌리면 싹이 자라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내는 밭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와 틀에 매여 있는 단단한 길가밭과 같지 않고 부드럽다.
또 돌이나 가시떨기, 즉 비진리나 육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며, 하나님 말씀에 오직 아멘과 예로 순종하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
교육목표 : 온유한 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품음으로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성군으로, 찬란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과학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의약기술과 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토 확장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지요. 이처럼 세종대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사랑과 덕으로 어진 정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훌륭한 인재들이 깃들일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후대에까지 이름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영적으로 온유한 자에게 어떠한 축복이 임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온유한 자란?
사전을 보면 ‘온유’에 대해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유순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듦’이라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성품이 순해서 쉽게 화를 내지 않거나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고, 또 소극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나 친절하게 남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마음속에는 미움이 있고 불편하여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화가 나지만 꾹꾹 눌러 참고, 따져 묻고 싶지만 겉으론 상대에게 양보하며 부드럽게 대하면 ‘착하다. 온유하다.’ 말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온유한 것으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에 어떤 불편함도, 싫어함도 없이 선한 마음으로 상대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품어 줄 수 있어야 온유하다고 인정해 주시지요. 악한 감정을 품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대의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며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고 위로가 되어 주는 마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생각과 교양에 맞지 않고, 내 성격과 취향에 맞지 않아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품습니다. 악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며 매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 주는 포근한 마음이지요. 이런 온유한 마음은 ‘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솜에 단단한 물체나 돌멩이를 던지면 소리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줍니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사랑으로 보듬어 주지요.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덕’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덕’이란 사전에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 인격이 갖추어져 남을 정복시키는 일’이라 설명합니다. 영적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다 해도 덕이 없으면 온유함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지만 행동이 거칠고 실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깃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남들에게 답답함을 주고, 어떤 이는 말이 많고 농담을 잘하여 신뢰가 떨어집니다.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지만 상대가 말할 때에 딴청하거나 경청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덕이 없으므로 온유한 마음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마음에 이룬 내면적인 것이라면 덕은 외면적인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저분하고 남루하게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주고 지나칠 수밖에 없지요.
덕을 갖춘 온유함은 마음과 함께 말이나 행동, 모습도 사람들에게 본이 됩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신뢰와 인정을 받으며, 사람들을 치리할 때도 물리적인 힘이 아닌 사랑으로 포용하고 이끌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깃들지요. 본인이 선하게 행동하여 상대를 품을 뿐만 아니라, 꽃향기에 나비와 벌이 모여들듯 많은 사람이 그 선과 사랑에 감동을 얻고 깃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내가 있는 곳에 소리가 나고 화평이 깨어지지는 않습니까?
만일 모임에 불평하고 고집스런 사람이 있어서 화평이 깨진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온유한 사람이 되어 그에게 감동과 은혜를 끼쳐 보시기 바랍니다.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때문에 불화하고, 아내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한다 하지 말고, 내가 가족에게 미소를 주기 위해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어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바라봐 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권면이나 지적을 받을 때는 어떠신지요? 나보다 못한 사람이 권면해도 중심에서 귀히 여기며 감사하게 받으시는지요? 이런 사람은 소자의 말이라도 귀 기울여 들을 것입니다.
또 능력이 부족하여 실수하는 사람이라도 무시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지요? 다투지 않고 허탄한 말도 하지 않으며 꼭 필요한 진리의 말만 하고 계신지요? 온전한 온유를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걸리지 않고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며 변화시켜 나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열심히 마음 밭을 개간해야 합니다. 거친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떨기도 뽑아내야 하지요. 불필요한 것을 걸러내고 거름도 주면서 개간하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서 미움, 시기, 질투, 다툼, 판단, 정죄, 교만 등 비진리와 육신의 생각을 벗어 버리면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온유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기업이란 “선대로부터 이어오는 재산과 사업 또는 기초가 되는 업”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이 세상에 속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의 땅을 주신다는 뜻이지요.
혹자는 “구원받아 천국 가면 그만이지, 개인적으로 땅을 꼭 받아야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충성한 것만큼 개개인에게 상급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교회만 왔다 갔다 하고, 어떤 이는 전도하고 충성하며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애통하며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생명을 잃기까지 헌신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기 다르게 충성하였는데 천국에서 똑같은 상급을 주신다면 하나님을 어찌 ‘공평하시며 공의로우시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자신을 낮추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영적인온유함을 이룬 사람은 영혼 구원과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하므로 하늘나라에서 큰 집을 지을 수 있는 넓은 땅을 주시지요.
온유하여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 이르게 했으니, 천국에서도 그들이 감사하여 함께 사랑을 나누려고 집을 방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많은 사람을 맞을 집터도 넓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음 중심에서 존경하고 깃들이는 것이 천국에서는 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낮아지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섬기고 희생하였지만, 천국에서는 ‘큰 자’의 권세를 누리며 큰 땅을 소유하게 되지요. 이렇게 주어진 천국땅에 이 세상에서 충성으로, 봉사로, 헌금으로 드린 것들이 재료가 되어 아름다운 내 집이 지어집니다. 우리 주님의 지휘 아래 천사들이 정원과 호수, 수영장 등 각종 시설물을 짓게 되지요. 한번 받은 천국 땅과 상급은 천국에서 더 이상 늘릴 수도, 나누어 줄 수도, 구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덕을 갖춘 온유함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 천국에서 큰 자가 되어 많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유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 ) 마음은 솜같이 포근하고 따뜻하여 모든 사람을 품어 주는 마음이다. 악한 사람도, 나를 찌르는 사람도 억지로가 아닌 ( )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이런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에 ( )을 겸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온유함을 이룰 수 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옥토란?
땅이 고르고 비옥하여 씨를 뿌리면 싹이 자라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내는 밭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자기 의와 틀에 매여 있는 단단한 길가밭과 같지 않고 부드럽다.
또 돌이나 가시떨기, 즉 비진리나 육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며, 하나님 말씀에 오직 아멘과 예로 순종하기에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
2021-11-05
제45과팔복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4
읽을말씀 : 마태복음 5: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 | 참고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삶이 버겁고 힘이 들 때 한탄하여 슬피 울며 애통합니다. 이런 육적인 애통은 하나님께 위로받지도 못할뿐더러 복을 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애통할 때 기뻐하시지요.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성결을 위해 애통할 때 위로와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1. 자신의 슬픔 속에서 나오는 육적인 애통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가난해서 서글퍼하고, 병약하고 무능해서 한탄합니다. 또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고, 자녀가 말썽을 부리고, 남편이나 아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불만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니 눈물을 흘리며 속상해하지요. 이는 육의 사람들이 하는 육적인 애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상관없고 위로와 축복이 임하지도 않지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해도 기뻐하고,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슬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감정에서 나오는 슬픔으로 애통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지요.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영적인 애통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
1) 죄에 대한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마음으로 깨우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눈물, 콧물을 흘리며 죄에 대해 통회자복하는 회개의 애통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죄악 가운데 살았던 것을 회개하며 애통해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회개의 애통을 하면 죄의 짐이 벗겨지므로 마음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회개하고 애통하며 은혜받았다 해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또 애통할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성결되어야 하는데,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전까지는 아직 온전치 않으므로 다시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하고 민망하여 “하나님,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하며 통회자복하게 됩니다. 이런 애통함이 있을 때 위로부터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입니다.
2) 사명 감당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만일 내가 직분자요 일꾼인데 기도하지 않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지 못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구역장으로서, 기관장으로서 심방하고 전도하며 맡은 분야에서 열매를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회개의 애통을 해야 하지요.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무서운 책망을 듣습니다.
그렇다고 “사명을 맡으면 책임이 따르고, 열심히 하지 못하면 회개거리가 생기니 사명을 맡지 말고 그냥 교회만 열심히 다녀야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해야 합니다. 만일 사명을 맡고도 충성하지 못했다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중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형제가 사망의 길로 갈 때 사랑으로 애통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애통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말씀하십니다(눅 23:28). 바로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망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범죄하여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내가 대신하여 회개하고, 상대가 진리로 행할 수 있도록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시험에 들어 힘을 잃고 있을 때 권면해 주며 힘을 실어 주되, 자신의 일과 같이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출 32:32). 순종 잘하는 사랑스러운 백성도 아니고, 늘 원망 불평하며 모세를 힘들게 하는 백성이었지만 모세는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애통하였던 것입니다.
4) 영혼 구원을 위해 애통합니다.
가족, 일가친척, 이웃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멸망으로 가는 무수한 영혼을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통, 교계에 대한 애통,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일들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영적인 애통입니다.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핏값을 찾아 드리기 위해 애통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며 하늘나라에서 큰 자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명예와 권세, 건강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며 애통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숱한 고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는 고난으로 인해 힘들어하거나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염려하고 애통해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후 11:28~29). 바로 성도들이 말씀 가운데 서지 못할 때,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때였지요.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셨고, 하늘나라에서도 큰 자로 높이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3. 애통하는 자가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애통을 하면 반드시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마 5:4). 회개의 애통을 하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심으로 위로하시지요.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중심에서 회개할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시는 큰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다시 죄악 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두어지지요. 따라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되 또다시 범죄하였다면 신속히 회개하는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사명 감당을 위해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애통함의 내용에 따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가령, 가르치는 자로서 말씀의 권세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면, 그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많은 영혼을 개종시키고 구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다면 세상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하시고 사명 감당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시지요.
이 외에도 형제가 사망으로 가는 것을 볼 때,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와 세계 선교를 위해 애통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 맞게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 범죄했던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고, 선한 일꾼을 보내 주셔서 교회가 부흥되며, 세계 선교를 활발히 이루게 하시지요. 이처럼 영적인 애통은 하늘에 상급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은 물론 하나님 나라에도 큰 유익이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애통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 죄에 대한 ( )의 애통이 있다.
둘째, ( )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이 있다.
셋째, 믿음의 형제가 ( )의 ( )로 갈 때 사랑의 애통이 있다.
넷째, ( )을 위한 애통이 있다.
2. 마태복음 5장 4절을 외워 봅시다.
“(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를 받을 것임이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할 때 받는 상급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늘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천국 집은 황금 보석 장식 외에도 유난히 크고 빛나는 진주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한 알의 진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조개는 오랜 시간 고통을 참아내며 자신의 진액을 쏟는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는 동안 변화되기 위해 흘린 눈물,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했던 시간들에 대한 위로를 진주로 표현해 주시는 것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람들은 삶이 버겁고 힘이 들 때 한탄하여 슬피 울며 애통합니다. 이런 육적인 애통은 하나님께 위로받지도 못할뿐더러 복을 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애통할 때 기뻐하시지요.
마태복음 5장 4절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성결을 위해 애통할 때 위로와 상급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1. 자신의 슬픔 속에서 나오는 육적인 애통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가난해서 서글퍼하고, 병약하고 무능해서 한탄합니다. 또 내 뜻대로 일이 되지 않고, 자녀가 말썽을 부리고, 남편이나 아내가 맘에 들지 않아서 불만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니 눈물을 흘리며 속상해하지요. 이는 육의 사람들이 하는 육적인 애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상관없고 위로와 축복이 임하지도 않지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해도 기뻐하고,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을 약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슬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감정에서 나오는 슬픔으로 애통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지요.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을 원하십니다.
그러면 영적인 애통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영적인 애통
1) 죄에 대한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마음으로 깨우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느낄 때 눈물, 콧물을 흘리며 죄에 대해 통회자복하는 회개의 애통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죄악 가운데 살았던 것을 회개하며 애통해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회개의 애통을 하면 죄의 짐이 벗겨지므로 마음에서 기쁨이 넘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회개하고 애통하며 은혜받았다 해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또 애통할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성결되어야 하는데, 장성한 믿음으로 성장하기 전까지는 아직 온전치 않으므로 다시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하고 민망하여 “하나님,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하며 통회자복하게 됩니다. 이런 애통함이 있을 때 위로부터 죄를 버릴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입니다.
2) 사명 감당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을 합니다.
만일 내가 직분자요 일꾼인데 기도하지 않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지 못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구역장으로서, 기관장으로서 심방하고 전도하며 맡은 분야에서 열매를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면 회개의 애통을 해야 하지요.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주인에게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무서운 책망을 듣습니다.
그렇다고 “사명을 맡으면 책임이 따르고, 열심히 하지 못하면 회개거리가 생기니 사명을 맡지 말고 그냥 교회만 열심히 다녀야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해야 합니다. 만일 사명을 맡고도 충성하지 못했다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중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형제가 사망의 길로 갈 때 사랑으로 애통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애통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말씀하십니다(눅 23:28). 바로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망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범죄하여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내가 대신하여 회개하고, 상대가 진리로 행할 수 있도록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시험에 들어 힘을 잃고 있을 때 권면해 주며 힘을 실어 주되, 자신의 일과 같이 애통하며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출 32:32). 순종 잘하는 사랑스러운 백성도 아니고, 늘 원망 불평하며 모세를 힘들게 하는 백성이었지만 모세는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하며 애통하였던 것입니다.
4) 영혼 구원을 위해 애통합니다.
가족, 일가친척, 이웃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나아가 멸망으로 가는 무수한 영혼을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애통, 교계에 대한 애통,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는 일들에 대해 애통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영적인 애통입니다.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핏값을 찾아 드리기 위해 애통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며 하늘나라에서 큰 자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명예와 권세, 건강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며 애통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숱한 고난과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는 고난으로 인해 힘들어하거나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염려하고 애통해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후 11:28~29). 바로 성도들이 말씀 가운데 서지 못할 때,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때였지요. 그러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큰 권능을 주셔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하셨고, 하늘나라에서도 큰 자로 높이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3. 애통하는 자가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애통을 하면 반드시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마 5:4). 회개의 애통을 하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심으로 위로하시지요.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중심에서 회개할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시는 큰 은혜가 임합니다. 그러나 다시 죄악 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두어지지요. 따라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되 또다시 범죄하였다면 신속히 회개하는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사명 감당을 위해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애통함의 내용에 따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십니다.
가령, 가르치는 자로서 말씀의 권세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면, 그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많은 영혼을 개종시키고 구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또 지혜와 명철이 필요하다면 세상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하시고 사명 감당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열매 맺게 하시지요.
이 외에도 형제가 사망으로 가는 것을 볼 때, 영혼 구원을 위해, 교회와 세계 선교를 위해 애통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에 맞게 위로와 응답을 주십니다. 범죄했던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고, 선한 일꾼을 보내 주셔서 교회가 부흥되며, 세계 선교를 활발히 이루게 하시지요. 이처럼 영적인 애통은 하늘에 상급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은 물론 하나님 나라에도 큰 유익이 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애통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 죄에 대한 ( )의 애통이 있다.
둘째, ( )을 못했을 때 회개의 애통이 있다.
셋째, 믿음의 형제가 ( )의 ( )로 갈 때 사랑의 애통이 있다.
넷째, ( )을 위한 애통이 있다.
2. 마태복음 5장 4절을 외워 봅시다.
“(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를 받을 것임이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할 때 받는 상급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늘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의 천국 집은 황금 보석 장식 외에도 유난히 크고 빛나는 진주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한 알의 진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조개는 오랜 시간 고통을 참아내며 자신의 진액을 쏟는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는 동안 변화되기 위해 흘린 눈물,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했던 시간들에 대한 위로를 진주로 표현해 주시는 것이다.
2021-10-29
제44과팔복 ( 1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3
읽을말씀 : 마태복음 5: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3 | 참고 말씀: 요한일서 2:15~16
교육목표 :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일터 등 모든 곳에서 만사형통한 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유하고 명예와 권세가 있으며, 자녀들이 효도하고 건강하며 가족이 화목하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모두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질이 많아도 건강을 잃어 걱정하고, 명예 권세가 있지만 가정이 불화하여 속상해합니다. 또 불의의 사고로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해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고,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잘사는 것에만 삶의 목표를 둔다면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고 말지요.
그러면 과연 참된 복은 무엇일까요?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부유한 것이 좋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악이 없고 선한 마음, 아무 욕심이 없어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을 채울 영의 것을 사모하기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전도해도 쉽게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순종하니 구원받기도 쉽지요.
반면 마음이 부유한 사람들은 세상 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어 전도를 하면 거부합니다. “사업이 바빠서요. 공부해야 해요. 돈 벌어야 해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갈게요.”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부, 명예, 권세로 그 눈과 마음이 가득 차 있으니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 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심령이 부유한 부자와 심령이 가난한 거지 나사로가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부자는 호의호식하며 날마다 잔치를 베풀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마음까지 부요해져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비록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그 상처를 개가 핥는 불쌍한 삶을 살았어도 심령이 가난했기에 하나님을 믿었지요.
그런데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형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렸습니다. 반면 부자는 아랫음부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가운데 고통받지요. 그러니 이 땅에서 날마다 잔치를 즐겼던 부자와 비록 구걸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거지 나사로 중에서 진정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이 비유는 거지와 같이 가난한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도 건강의 복, 물질의 복, 머리 되는 복 등 만사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또한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참되고 영원한 복 곧 천국을 주시지요.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려면
1)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세상 것들로 채워 있던 우리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천국의 소망으로 온전히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죄를 지으려는 마음의 속성이지요. 즉 ‘죄를 짓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혈기, 욕심, 음욕, 시기, 교만 등 온갖 악이 있으면 죄를 짓고 싶어지지요.
가령, 초신자가 술을 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직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술자리에 가면 술을 마시고 싶은 강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육신의 정욕이 사람을 충동하여 술을 마시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술을 마시도록 만듭니다. 또 판단 정죄하는 죄성이 있으면 남의 소문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수군수군합니다.
다음으로,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을 말합니다.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들으며 발이 있어 간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으며 어디에 있는지가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 번 스쳐가며 본 것이라 해도, 아무 의미 없이 보고 들었다 해도 그것이 느낌으로 입력되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또 보고 싶고 취하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고 듣고 접한 것들이 죄에 속한 것,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음란물을 한 번 봤는데 그것이 공부를 방해하며 또 보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안목의 정욕은 내 안에 비진리를 발동시킴으로 육신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니면 보거나 듣지도 말고 그런 곳에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 부, 명예, 권세, 재능, 외모, 지식 등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에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이 나옵니다. 이는 가난한 심령인 섬김, 희생, 사랑과는 거리가 먼, 마음이 부유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천국의 아름다움과 소망은 없고 이 세상 것들이 더 좋아 보이고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기도 싫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쭉정이 신앙생활에 머무르지요.
혹여 여러분은 나를 자랑하고 싶고 세상 것에 욕심이 있지는 않은지, 은근히 인정받고 높여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천국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영적인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알려 주면 쉽게 받아들이고 자존심이나 자기 고집이 없어 지적과 권면을 받아도 쉽게 인정하지요. 잘못한 것에 대해 바로 뉘우치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씁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고, 권면을 받아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죄책감도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지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하지요.
또한 영적인 어린아이는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지만 악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마음에서부터 싫어지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성령님을 통해 신속히 변화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가난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 항상 겸손히 낮아지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불같은 기도를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자녀가 되어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 땅에서도 부와 명예, 건강, 물질 등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 )이 가난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 )이 없고 선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이 없어 ( )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한다.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으려면
첫째, ( )의 정욕, ( )의 정욕, ( )의 자랑을 버려야 한다.
둘째, 영적인 ( )가 되어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지옥의 대기 장소인 ‘아랫음부’
창세 이래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 온갖 형벌을 받으며 머무는 장소이다. 누가복음 16장 24절을 보면, 아랫음부에 있던 부자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하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아랫음부에서 대기하던 이들은 인간 경작이 마쳐지고 백보좌 대심판 후에 죄의 경중에 따라 마침내 지옥의 불못이나 유황못으로 떨어진다.
교육목표 :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가정, 학교, 일터 등 모든 곳에서 만사형통한 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부유하고 명예와 권세가 있으며, 자녀들이 효도하고 건강하며 가족이 화목하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모두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질이 많아도 건강을 잃어 걱정하고, 명예 권세가 있지만 가정이 불화하여 속상해합니다. 또 불의의 사고로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해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지 않고, 이 땅에서 먹고 마시며 잘사는 것에만 삶의 목표를 둔다면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고 말지요.
그러면 과연 참된 복은 무엇일까요?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부유한 것이 좋지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악이 없고 선한 마음, 아무 욕심이 없어 자기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을 채울 영의 것을 사모하기에 복음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전도해도 쉽게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으면 그대로 순종하니 구원받기도 쉽지요.
반면 마음이 부유한 사람들은 세상 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어 전도를 하면 거부합니다. “사업이 바빠서요. 공부해야 해요. 돈 벌어야 해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갈게요.”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부, 명예, 권세로 그 눈과 마음이 가득 차 있으니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를 보여 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심령이 부유한 부자와 심령이 가난한 거지 나사로가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부자는 호의호식하며 날마다 잔치를 베풀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마음까지 부요해져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비록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그 상처를 개가 핥는 불쌍한 삶을 살았어도 심령이 가난했기에 하나님을 믿었지요.
그런데 두 사람이 죽은 후에는 형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겨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렸습니다. 반면 부자는 아랫음부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가운데 고통받지요. 그러니 이 땅에서 날마다 잔치를 즐겼던 부자와 비록 구걸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거지 나사로 중에서 진정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이 비유는 거지와 같이 가난한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생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도 건강의 복, 물질의 복, 머리 되는 복 등 만사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또한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참되고 영원한 복 곧 천국을 주시지요.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려면
1)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세상 것들로 채워 있던 우리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천국의 소망으로 온전히 채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의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죄를 지으려는 마음의 속성이지요. 즉 ‘죄를 짓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미움, 혈기, 욕심, 음욕, 시기, 교만 등 온갖 악이 있으면 죄를 짓고 싶어지지요.
가령, 초신자가 술을 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직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술자리에 가면 술을 마시고 싶은 강한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육신의 정욕이 사람을 충동하여 술을 마시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술을 마시도록 만듭니다. 또 판단 정죄하는 죄성이 있으면 남의 소문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수군수군합니다.
다음으로, 안목의 정욕을 차단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을 말합니다.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들으며 발이 있어 간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들으며 어디에 있는지가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 번 스쳐가며 본 것이라 해도, 아무 의미 없이 보고 들었다 해도 그것이 느낌으로 입력되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또 보고 싶고 취하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이렇게 보고 듣고 접한 것들이 죄에 속한 것,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음란물을 한 번 봤는데 그것이 공부를 방해하며 또 보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안목의 정욕은 내 안에 비진리를 발동시킴으로 육신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아니면 보거나 듣지도 말고 그런 곳에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 부, 명예, 권세, 재능, 외모, 지식 등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야고보서 4장 16절에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이생의 자랑이 있으면 자신이 가진 것으로 남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교만이 나옵니다. 이는 가난한 심령인 섬김, 희생, 사랑과는 거리가 먼, 마음이 부유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천국의 아름다움과 소망은 없고 이 세상 것들이 더 좋아 보이고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기도 싫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쭉정이 신앙생활에 머무르지요.
혹여 여러분은 나를 자랑하고 싶고 세상 것에 욕심이 있지는 않은지, 은근히 인정받고 높여 주기를 바라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천국의 소망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2)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영적인 어린아이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영적인 어린아이는 단순하고 순수하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알려 주면 쉽게 받아들이고 자존심이나 자기 고집이 없어 지적과 권면을 받아도 쉽게 인정하지요. 잘못한 것에 대해 바로 뉘우치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힘씁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어 순수함이 사라지면 죄를 범하면서도 무감각해지고, 권면을 받아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죄책감도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지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하지요.
또한 영적인 어린아이는 선악 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선한 것을 보면 쉽게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지만 악은 몸서리치도록 싫어하지요. 하나님께서 악이라 하시면 마음에서부터 싫어지고 어찌하든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성령님을 통해 신속히 변화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가난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 항상 겸손히 낮아지고, 말씀을 통해 자신의 악을 발견하며, 불같은 기도를 통해 죄악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자녀가 되어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 땅에서도 부와 명예, 건강, 물질 등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이 없어 가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 )이 가난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 )이 없고 선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이 없어 ( )를 비울 줄 아는 중심 상태를 말한다.
2. 가난한 심령이 되어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으려면
첫째, ( )의 정욕, ( )의 정욕, ( )의 자랑을 버려야 한다.
둘째, 영적인 ( )가 되어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지옥의 대기 장소인 ‘아랫음부’
창세 이래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 온갖 형벌을 받으며 머무는 장소이다. 누가복음 16장 24절을 보면, 아랫음부에 있던 부자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하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아랫음부에서 대기하던 이들은 인간 경작이 마쳐지고 백보좌 대심판 후에 죄의 경중에 따라 마침내 지옥의 불못이나 유황못으로 떨어진다.
2021-10-22
제43과성령의 열매 (9) - 절제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잠언 25:28 | 참고 말씀: 잠언 16:32
교육목표 :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하여 절제함으로 삶의 질을 높이며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려야 하는 육상 경기로 페이스를 잘 조절해야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금방 끝나는 단거리 경기가 아니므로 선수들은 어느 한 구간만 빨리 달리거나 무조건 전력질주를 하지 않습니다. 전 코스 내내 흐트러짐 없이 달려야 하며, 적절한 지점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달리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결같은 성실로 끝까지 달려가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원한 천국에서 받을 영화로운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은 범사에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성령의 열매를 온전케 하는 절제
범사에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어지럽게 하고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도박이나 향락에 빠진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하겠다.”고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니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되어 결국 패가망신하고 말지요.
잠언 16장 32절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절제의 힘이 약하면 자신을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이제는 육을 취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지만, 번번이 세상 유혹에 넘어가 버리지요. 그러나 절제를 잘하면 죄도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죄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온전해지도록 조절해 줍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마지막 ‘절제’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다른 열매에 비해 두드러진 특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함으로 안정되고 단단하게 지탱해 주지요.
절제의 미덕은 삶의 질을 높여 주고 빛나게 하지만, 무절제한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하나님 일을 한다면서 절제하지 못함으로 덕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주부라면 가족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주 안에서의 모임이 충만하고 은혜롭다 하여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집에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온 집에 충성할 수 없지요. 반면에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아무리 사명이 많아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나중에 해야 할지, 앞으로 나가야 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 잠잠히 있어야 할지 분별할 줄 압니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의 미덕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합니다.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가만히 있어야 할 때,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분별하여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니 누구와도 변론하거나 다투지 않고 오해할 일이 없지요.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일이나 분수에 지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절제하지 못하면 질서를 무너뜨리고 월권하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가령, 선교회 회장이 총무에게 어떤 일을 지시했다고 합시다. 총무는 열정이 넘친 나머지 임의로 일을 변경해 버렸습니다. 총무는 일을 더 크게 이루었다는 데에만 의의를 둘 뿐 정작 자신이 질서를 깨뜨렸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지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정, 교회, 학교, 직장, 어디에서든 질서를 좇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진리를 행할 때도 대상과 시기, 장소 등을 고려할 줄 압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라 했다고 해서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나 심방을 할 때도 믿음의 분량에 맞게 말을 해야 합니다. 만일 영적인 깊은 말씀을 초신자나 전도자에게 무분별하게 전한다면 그 영혼을 실족시키거나 판단 정죄하게 만들 수도 있지요.
또한 바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자신이 깨달은 말씀이나 은혜 받은 체험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는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듣고는 있지만 초조하여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지요.
그러므로 항상 상대의 상황을 잘 고려하고 지금 대화를 해도 좋을는지 다음에 해야 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시기에 맞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경솔합니다. 서두르다 보면 분별력이 흐려져서 중요한 일들을 빠뜨리기도 하고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요. 또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고 자신의 생각 속에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을 뿐 아니라 무슨 말을 듣고 쉽게 요동하지도 않습니다. 차분히 상대의 말을 듣고 성령의 역사 속에 진실을 분별할 수 있지요. 매사에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면 잘못 판단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3.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첫째, 변개함 없는 마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거짓이 없고 간사함이 없는 마음, 진실한 마음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할 때 그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훈련을 쌓아가야 하지요.
작은 약속도 어기지 않고 지킬 때라야 큰 약속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지킬 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변개함 없는 마음이 되지요. 한번 마음을 정했다면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지 말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 결국 정한 마음이 되고 절제의 능력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둘째, 범사에 앞서지 말고 성령의 소욕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은 만큼 성령께서는 그 진리를 통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해도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성령의 음성이 먼저 들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 대화로 오해를 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도 당장 내가 보기에 급한 것,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해 나가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늘 성령의 소욕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 나가는 훈련을 할수록 점점 더 세미한 것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될 때 ‘내가 진리대로 지켜야겠다’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힘이 오지요. 기도도 ‘내가 1시간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1시간 하게 되고, 2시간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2시간 하게 됩니다. 하루에 말씀을 한 절씩 암송하고 한 장 이상 읽어야겠다고 결심하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행할 때 늘 질서 가운데 조화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두드러진 특성이 없지만 약방에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모든 약의 성질을 조화롭게 하여 약효를 잘 발휘하게 하는 감초처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를 조절하여 온전케 해 주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범사에 형통하고 보장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둔 세상에서 빛 된 권세와 능력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에 더욱 힘써 아버지 하나님 앞에 탐스럽고 아름다운 최상품의 열매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 )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 ) 조절해 준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날까요?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한다.
둘째, ( )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절제를 의미하는 ‘비취옥’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열 번째 기초석인 비취옥은 반투명의 청록색 빛이 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귀히 여기던 보석 중에 하나로 정숙함과 정결을 상징한다.
비취옥은 영적으로 절제를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서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교육목표 :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하여 절제함으로 삶의 질을 높이며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려야 하는 육상 경기로 페이스를 잘 조절해야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금방 끝나는 단거리 경기가 아니므로 선수들은 어느 한 구간만 빨리 달리거나 무조건 전력질주를 하지 않습니다. 전 코스 내내 흐트러짐 없이 달려야 하며, 적절한 지점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달리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결같은 성실로 끝까지 달려가면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원한 천국에서 받을 영화로운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은 범사에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성령의 열매를 온전케 하는 절제
범사에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어지럽게 하고 어려움을 자초합니다. 도박이나 향락에 빠진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하겠다.”고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니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되어 결국 패가망신하고 말지요.
잠언 16장 32절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말씀했습니다. 절제의 힘이 약하면 자신을 제어하기가 힘듭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이제는 육을 취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지만, 번번이 세상 유혹에 넘어가 버리지요. 그러나 절제를 잘하면 죄도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죄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온전해지도록 조절해 줍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마지막 ‘절제’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다른 열매에 비해 두드러진 특성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알맞게 조절함으로 안정되고 단단하게 지탱해 주지요.
절제의 미덕은 삶의 질을 높여 주고 빛나게 하지만, 무절제한 행동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듭니다. 하나님 일을 한다면서 절제하지 못함으로 덕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주부라면 가족들을 생각해야 하는데, 주 안에서의 모임이 충만하고 은혜롭다 하여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집에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온 집에 충성할 수 없지요. 반면에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아무리 사명이 많아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나중에 해야 할지, 앞으로 나가야 할지, 뒤로 물러서야 할지, 잠잠히 있어야 할지 분별할 줄 압니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의 미덕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합니다.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가만히 있어야 할 때,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잘 분별하여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니 누구와도 변론하거나 다투지 않고 오해할 일이 없지요.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일이나 분수에 지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절제하지 못하면 질서를 무너뜨리고 월권하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가령, 선교회 회장이 총무에게 어떤 일을 지시했다고 합시다. 총무는 열정이 넘친 나머지 임의로 일을 변경해 버렸습니다. 총무는 일을 더 크게 이루었다는 데에만 의의를 둘 뿐 정작 자신이 질서를 깨뜨렸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지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정, 교회, 학교, 직장, 어디에서든 질서를 좇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화평이 깨지는 곳에는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진리를 행할 때도 대상과 시기, 장소 등을 고려할 줄 압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라 했다고 해서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나 심방을 할 때도 믿음의 분량에 맞게 말을 해야 합니다. 만일 영적인 깊은 말씀을 초신자나 전도자에게 무분별하게 전한다면 그 영혼을 실족시키거나 판단 정죄하게 만들 수도 있지요.
또한 바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자신이 깨달은 말씀이나 은혜 받은 체험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는 실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듣고는 있지만 초조하여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지요.
그러므로 항상 상대의 상황을 잘 고려하고 지금 대화를 해도 좋을는지 다음에 해야 하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시기에 맞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급하고 경솔합니다. 서두르다 보면 분별력이 흐려져서 중요한 일들을 빠뜨리기도 하고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요. 또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고 자신의 생각 속에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을 뿐 아니라 무슨 말을 듣고 쉽게 요동하지도 않습니다. 차분히 상대의 말을 듣고 성령의 역사 속에 진실을 분별할 수 있지요. 매사에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면 잘못 판단하지도 않을뿐더러 실수를 줄일 수 있습니다.
3. 절제의 열매를 맺으려면
첫째, 변개함 없는 마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즉 거짓이 없고 간사함이 없는 마음, 진실한 마음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할 때 그대로 행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훈련을 쌓아가야 하지요.
작은 약속도 어기지 않고 지킬 때라야 큰 약속도 이행할 수 있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지킬 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변개함 없는 마음이 되지요. 한번 마음을 정했다면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지 말고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 결국 정한 마음이 되고 절제의 능력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둘째, 범사에 앞서지 말고 성령의 소욕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은 만큼 성령께서는 그 진리를 통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해도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성령의 음성이 먼저 들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다. 대화로 오해를 풀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도 당장 내가 보기에 급한 것,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해 나가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늘 성령의 소욕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 나가는 훈련을 할수록 점점 더 세미한 것까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될 때 ‘내가 진리대로 지켜야겠다’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힘이 오지요. 기도도 ‘내가 1시간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1시간 하게 되고, 2시간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2시간 하게 됩니다. 하루에 말씀을 한 절씩 암송하고 한 장 이상 읽어야겠다고 결심하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행할 때 늘 질서 가운데 조화롭게 행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절제는 두드러진 특성이 없지만 약방에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모든 약의 성질을 조화롭게 하여 약효를 잘 발휘하게 하는 감초처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의 열매를 조절하여 온전케 해 주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들을 맺으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범사에 형통하고 보장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둔 세상에서 빛 된 권세와 능력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들을 맺기에 더욱 힘써 아버지 하나님 앞에 탐스럽고 아름다운 최상품의 열매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의 열매에 속한 절제는 단순히 ( )를 짓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 ) 조절해 준다.
2.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에게서는 어떠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날까요?
첫째, 항상 질서를 좇아 행한다.
둘째, ( )
셋째, 조급하지 않고 침착하며 일의 전후를 분별하여 대응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절제를 의미하는 ‘비취옥’
새 예루살렘 성곽의 열 번째 기초석인 비취옥은 반투명의 청록색 빛이 난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이 귀히 여기던 보석 중에 하나로 정숙함과 정결을 상징한다.
비취옥은 영적으로 절제를 의미한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절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로서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2021-10-15
제42과성령의 열매 (8) - 온유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민수기 12:3 | 참고 말씀: 마태복음 5:5
교육목표 :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란 무엇인지 알아보고, 온유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수 있게 한다.
사전에 ‘온유’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남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선 부글부글하지만 눌러 참으면 “저 사람은 참으로 유(柔)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이 있으면서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1. 많은 사람을 품는 온유의 열매
영적으로 ‘온유’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德)을 겸한 마음이지요. 덕(德)이 있으면 마냥 유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절도 있고 반듯하며 위엄이 흐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의 마음은 솜털같이 포근합니다. 푹신한 솜털에 돌을 던지거나 바늘로 찔러도, 솜털은 소리 없이 감싸 안습니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걸림이 없습니다. 곧 상대로 인해 혈기를 내거나 서운해하지도 않지요. 불편해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 하지 않고 이해하며 감싸 줍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깃들이며 쉼을 얻지요. 마치 우람한 나무에 새들이 깃들여 보금자리를 짓고 쉼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낳지요.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온유함을 인정받았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대로이지요. 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번번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조금만 힘든 상황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했지요. 이러한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것만으로도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마음이 바로 영적인 온유함이며, 성령의 열매 중 온유의 열매에 속합니다.
2.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
사전에 ‘덕(德)’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습니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하지요. 덕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옵니다.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유순한 것만이 아니라 덕을 겸해야 합니다. 내면에 온유한 성품과 외면에 덕스러움을 갖춰야 영적으로 온유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과 같지요.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처럼 덕이 없는 온유는 그 가치를 다하지 못합니다.
덕은 온유함을 빛나게 하는 옷과 같은 것이지만 율법적이거나 외식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마음의 성결을 이루기보다 겉모습을 바르게 하는 데 치우치다 보면 자기 발견을 멈추고 스스로 영적인 성장을 이룬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도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민다 해서 뭇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지 않고 외면에 치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3. 온유한 사람의 특징
첫째, 반듯하고 위엄 있으며 절도 있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분별없이 순하기만 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무시당하고 이용을 당하기 쉽지요. 진정한 온유는 반듯하고 위엄과 절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외식을 책망하실 때에도 단호하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이지만 책망해야 할 때는 호되게 책망하셨지요. 그런 단호함과 의로움이 내면에 있는 사람은 언성을 높이거나 엄하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를 경솔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주의 교양이나 온전한 몸의 행실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덕 있는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무게가 있어 무익한 말이나 헛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복장도 때와 장소에 적합하게 하지요. 표정도 무뚝뚝하거나 차가운 것이 아니라 부드럽습니다. 모든 것을 반듯하게 하되 동시에 상대를 배려하여 편하게 하는 마음 씀씀이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 마음을 넓게 쓰는 긍휼과 자비의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곤고한 사람,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아 위로하고 은혜를 끼칩니다. 그런데 온유함이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핍박받으며 힘들게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기회가 될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고 상황을 살펴 구제합니다. 믿음으로 잘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지요.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안에 담고만 있느냐, 행함으로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느낄 때 큰 차이가 납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상대에게 은혜와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덕으로 인해 나타나는 충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받는다는 것은 상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급은 충성과 관련이 깊지요.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도, 마음이 온유한 것만 가지고 받는 상이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스럽게 표현될 때 결과적으로 충성의 열매를 맺으니 그로 인해 상을 받는 것입니다. 곧 많은 영혼을 덕스럽게 품어서 힘과 위로를 주고 생명을 심어 줄 때 천국의 땅을 상급으로 받게 되지요.
4.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해야 합니다. 혈기, 미움, 시기, 욕심, 다툼, 들렘, 자기 의 이런 것들을 뽑아내야 온유해지지요. 그래서 온유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보다도 성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옥토, 즉 온유한 마음이 되면 구하는 것마다 신속히 응답을 받습니다. 성령의 음성도 밝히 들어 나가므로 범사가 형통하지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땅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 영적인 온유함을 이룬 만큼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안에 깃들였던 모든 영혼을 다 초청하여 함께할 수 있을 만큼 큰 처소를 상급으로 받는다는 말이지요
천국에서 그렇게 큰 처소를 얻었다면 그만큼 영화로운 지위에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했다 해도 그것을 천국에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을 이룬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땅은 세세토록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기업입니다. 그 기업 안에서 주님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마음 밭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온유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 )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 ) 마음을 말한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을 겸한 마음이다.
2.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한다. ( )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온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온유함을 의미하는 ‘자정’
새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열두 번째 기초석이다.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으로, 빛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귀족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도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을 아름답다 하시는데,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바로 ‘온유’이다.
온유는 사랑장이나 팔복,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나온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가는 사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증거로 맺히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교육목표 :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란 무엇인지 알아보고, 온유의 열매를 온전히 맺을 수 있게 한다.
사전에 ‘온유’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고 합니다.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남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선 부글부글하지만 눌러 참으면 “저 사람은 참으로 유(柔)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이 있으면서 겉으로만 그럴 듯하게 참는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1. 많은 사람을 품는 온유의 열매
영적으로 ‘온유’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부드러운 마음’을 말합니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德)을 겸한 마음이지요. 덕(德)이 있으면 마냥 유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절도 있고 반듯하며 위엄이 흐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의 마음은 솜털같이 포근합니다. 푹신한 솜털에 돌을 던지거나 바늘로 찔러도, 솜털은 소리 없이 감싸 안습니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걸림이 없습니다. 곧 상대로 인해 혈기를 내거나 서운해하지도 않지요. 불편해하거나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 하지 않고 이해하며 감싸 줍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깃들이며 쉼을 얻지요. 마치 우람한 나무에 새들이 깃들여 보금자리를 짓고 쉼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여 생명을 낳지요.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온유함을 인정받았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대로이지요. 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갔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번번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조금만 힘든 상황이 오면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했지요. 이러한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것만으로도 모세의 온유함이 얼마나 승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마음이 바로 영적인 온유함이며, 성령의 열매 중 온유의 열매에 속합니다.
2. 덕을 겸비한 영적인 온유
사전에 ‘덕(德)’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습니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하지요. 덕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옵니다.
영적인 온유함은 부드럽고 유순한 것만이 아니라 덕을 겸해야 합니다. 내면에 온유한 성품과 외면에 덕스러움을 갖춰야 영적으로 온유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과 같지요.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그가 벌거벗고 돌아다닌다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처럼 덕이 없는 온유는 그 가치를 다하지 못합니다.
덕은 온유함을 빛나게 하는 옷과 같은 것이지만 율법적이거나 외식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마음의 성결을 이루기보다 겉모습을 바르게 하는 데 치우치다 보면 자기 발견을 멈추고 스스로 영적인 성장을 이룬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에서도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민다 해서 뭇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지 않고 외면에 치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3. 온유한 사람의 특징
첫째, 반듯하고 위엄 있으며 절도 있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분별없이 순하기만 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무시당하고 이용을 당하기 쉽지요. 진정한 온유는 반듯하고 위엄과 절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외식을 책망하실 때에도 단호하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이지만 책망해야 할 때는 호되게 책망하셨지요. 그런 단호함과 의로움이 내면에 있는 사람은 언성을 높이거나 엄하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를 경솔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주의 교양이나 온전한 몸의 행실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덕 있는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무게가 있어 무익한 말이나 헛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복장도 때와 장소에 적합하게 하지요. 표정도 무뚝뚝하거나 차가운 것이 아니라 부드럽습니다. 모든 것을 반듯하게 하되 동시에 상대를 배려하여 편하게 하는 마음 씀씀이를 갖고 있습니다.
둘째, 마음을 넓게 쓰는 긍휼과 자비의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 곤고한 사람,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아 위로하고 은혜를 끼칩니다. 그런데 온유함이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핍박받으며 힘들게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있다고 합시다. 이때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만 안타까워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기회가 될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고 상황을 살펴 구제합니다. 믿음으로 잘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지요.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안에 담고만 있느냐, 행함으로 나타내느냐 하는 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느낄 때 큰 차이가 납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상대에게 은혜와 생명이 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은 덕으로 인해 나타나는 충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받는다는 것은 상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급은 충성과 관련이 깊지요. 마찬가지로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도, 마음이 온유한 것만 가지고 받는 상이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이 덕스럽게 표현될 때 결과적으로 충성의 열매를 맺으니 그로 인해 상을 받는 것입니다. 곧 많은 영혼을 덕스럽게 품어서 힘과 위로를 주고 생명을 심어 줄 때 천국의 땅을 상급으로 받게 되지요.
4.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가 온유의 열매를 맺으려면 마음 밭을 옥토로 개간해야 합니다. 혈기, 미움, 시기, 욕심, 다툼, 들렘, 자기 의 이런 것들을 뽑아내야 온유해지지요. 그래서 온유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보다도 성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옥토, 즉 온유한 마음이 되면 구하는 것마다 신속히 응답을 받습니다. 성령의 음성도 밝히 들어 나가므로 범사가 형통하지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땅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에 영적인 온유함을 이룬 만큼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안에 깃들였던 모든 영혼을 다 초청하여 함께할 수 있을 만큼 큰 처소를 상급으로 받는다는 말이지요
천국에서 그렇게 큰 처소를 얻었다면 그만큼 영화로운 지위에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넓은 땅을 소유했다 해도 그것을 천국에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마음을 이룬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땅은 세세토록 사라지지 않는 자신의 기업입니다. 그 기업 안에서 주님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마음 밭을 개간하여 아름다운 온유의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 )란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악이 없어 모두를 이해하고 품어 주는 ( ) 마음을 말한다.
곧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에 덕을 겸한 마음이다.
2.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넓고 공정하며 사리사욕이 없다.
언행이 반듯하고 이해심이 깊어 많은 사람을 포용한다. ( )이 있으면 그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흘러나온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온유함을 의미하는 ‘자정’
새 예루살렘 성곽에 있는 열두 번째 기초석이다.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으로, 빛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예로부터 귀족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도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을 아름답다 하시는데, 자정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바로 ‘온유’이다.
온유는 사랑장이나 팔복,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나온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가는 사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증거로 맺히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2021-10-08
제41과성령의 열매 (7) - 충성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잠언 25:13 | 참고 말씀: 시편 101:6, 요한계시록 2:10
교육목표 :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을 하여 하나님 나라를 크게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을 보면 ‘충성’은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혹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자신을 바치고 지조를 굽히지 않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도 충성된 사람은 신뢰하고 칭찬할 만한 사람으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충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 해서 그 행위만으로 충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정한 분야에만 생명 다하기까지 열정을 쏟는다 해서 온전한 충성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과 정성을 다해 맡겨진 일 이상 감당해야 충성
급여를 받는 직원이 자신의 업무를 잘 감당했다 해서 그것만으로 ‘충성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책임을 완수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삯을 받은 만큼 한 것이므로 충성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요.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명을 넘치게 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은 만큼은 해야지’ 하는 계산적인 마음이나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자기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넘치도록 감당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또 책임을 지는 분야에 있어서도 마음에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책임을 다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경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는 기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을 전했지만 그들이 불순종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정성을 다해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도 자신이 그런 것처럼 책임을 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해 오던 중 구성원들 때문에 일이 잘못되거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저도 많이 괴로웠습니다.” 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내가 할 바는 다 했기에 떳떳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은 충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이라면 “나는 책임이 없다.” 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셨는지를 먼저 떠올리며 영적인 충성을 하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이란?
어떤 사람이 범죄 조직에 들어가 그 두목에게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충성되다 하실까요? 선과 진리 속에서 충성할 때라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어느 순간 사명을 놓거나 충성이 식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충성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마음의 할례를 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하나님 말씀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충성을 하려면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할례 없이 사명만 감당한다고 충성했다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비진리에 속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죽이고 성결되는 것이 곧 영적인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성결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온전히 성결되기까지 다른 사명은 감당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직분이나 사명을 맡더라도 항상 마음의 할례를 함께 이뤄가야 하지요. 그런 사람은 변함없이 사명 감당도 잘합니다.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오거나 마음의 연단이 있어도 사명을 놓거나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성결된 마음으로 사명 감당할 때 더 많은 상급을 쌓을 수 있습니다.
3. 주인의 마음에 맞게 순종해야 충성
잠언 25장 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해도 자신의 뜻대로 한다면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사장님이 직원에게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까 꼭 사무실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기자 이 직원이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습니다. 사장님이 그에게 잘했다고 할까요? 회사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불순종하였기에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생각과 욕심을 좇아 일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인의 뜻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보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춰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충성한들 어찌 그것이 상급이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비진리가 아닌 이상 윗분의 의중에 맞춰서 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않고, 좋은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4. 온 집에 충성이란?
자신이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두루 충성하는 것을 온 집에 충성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특별한 사명이 없다 해도 성도로서, 각종 모임에 속한 회원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충성의 한 분야이지요. 가정, 직장,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속한 구성원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학생으로서, 직원으로서 모든 본분을 다할 때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한두 가지 분야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좀 소홀히 한다면 온전한 충성이라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몸은 하나인데 어떻게 모든 분야에 충성할 수 있을까요? 영으로 변화되면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A 모임에서는 회장이고 B 모임에서는 회원이라고 합시다. 이때 충성의 열매가 맺히면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습니다. “나는 A 모임의 머리니까, B 모임에 가지 않아도 이해하겠지?” 하지 않습니다. B 모임에 가지 못할 상황이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마음을 쓰며 힘이 되려고 합니다. 이렇게 선이 있는 만큼 온 집에 충성할 수 있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도 이룰 수 있습니다.
혹 예전에는 사명도 사모하고 충성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맡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사명은 그대로라 해도 처음 뜨거웠던 마음이 식지는 않았는지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충성도 승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장차 천국에서는 얼마나 값진 상급으로 받겠습니까?
시편 101편 6절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보좌 가까이 거하는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 )를 하는 작업을 말한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 )을 이루는 것이다.
2.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 )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천국에서 상급으로 받는 면류관
법대로 경기한 자가 받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받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 계 2:10), 이십사 장로들이 쓰는 금면류관(계 4:4, 14:14),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던 의의 면류관(딤후 4:8)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금장식관, 꽃으로 장식된 화관, 영롱한 진주로 만들어진 진주관, 투명한 크리스털 위에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크리스털관 등 다양한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교육목표 :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을 하여 하나님 나라를 크게 이루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사전을 보면 ‘충성’은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 혹은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자신을 바치고 지조를 굽히지 않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서도 충성된 사람은 신뢰하고 칭찬할 만한 사람으로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충성과는 차이가 납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 해서 그 행위만으로 충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정한 분야에만 생명 다하기까지 열정을 쏟는다 해서 온전한 충성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사랑과 정성을 다해 맡겨진 일 이상 감당해야 충성
급여를 받는 직원이 자신의 업무를 잘 감당했다 해서 그것만으로 ‘충성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책임을 완수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삯을 받은 만큼 한 것이므로 충성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요.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명을 넘치게 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받은 만큼은 해야지’ 하는 계산적인 마음이나 억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자기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넘치도록 감당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또 책임을 지는 분야에 있어서도 마음에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으로 책임을 다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의 경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라는 기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을 전했지만 그들이 불순종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과 정성을 다해 백성을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잘못했을 때도 자신이 그런 것처럼 책임을 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질지라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해 오던 중 구성원들 때문에 일이 잘못되거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저도 많이 괴로웠습니다.” 하며 책임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내가 할 바는 다 했기에 떳떳하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음은 충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충성의 열매가 맺힌 사람이라면 “나는 책임이 없다.” 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것을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사명을 맡기셨는지를 먼저 떠올리며 영적인 충성을 하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인 충성이란?
어떤 사람이 범죄 조직에 들어가 그 두목에게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충성되다 하실까요? 선과 진리 속에서 충성할 때라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가 어느 순간 사명을 놓거나 충성이 식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충성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마음의 할례를 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지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성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하나님 말씀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충성을 하려면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할례 없이 사명만 감당한다고 충성했다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비진리에 속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죽이고 성결되는 것이 곧 영적인 충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성결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온전히 성결되기까지 다른 사명은 감당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직분이나 사명을 맡더라도 항상 마음의 할례를 함께 이뤄가야 하지요. 그런 사람은 변함없이 사명 감당도 잘합니다. 현실에 어떤 어려움이 오거나 마음의 연단이 있어도 사명을 놓거나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성결된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성결된 마음으로 사명 감당할 때 더 많은 상급을 쌓을 수 있습니다.
3. 주인의 마음에 맞게 순종해야 충성
잠언 25장 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 해도 자신의 뜻대로 한다면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사장님이 직원에게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까 꼭 사무실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기자 이 직원이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습니다. 사장님이 그에게 잘했다고 할까요? 회사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불순종하였기에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생각과 욕심을 좇아 일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주인의 뜻을 저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보다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춰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충성한들 어찌 그것이 상급이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비진리가 아닌 이상 윗분의 의중에 맞춰서 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않고, 좋은 결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4. 온 집에 충성이란?
자신이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두루 충성하는 것을 온 집에 충성한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특별한 사명이 없다 해도 성도로서, 각종 모임에 속한 회원으로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충성의 한 분야이지요. 가정, 직장,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속한 구성원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학생으로서, 직원으로서 모든 본분을 다할 때 온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한두 가지 분야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좀 소홀히 한다면 온전한 충성이라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몸은 하나인데 어떻게 모든 분야에 충성할 수 있을까요? 영으로 변화되면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A 모임에서는 회장이고 B 모임에서는 회원이라고 합시다. 이때 충성의 열매가 맺히면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지 않습니다. “나는 A 모임의 머리니까, B 모임에 가지 않아도 이해하겠지?” 하지 않습니다. B 모임에 가지 못할 상황이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마음을 쓰며 힘이 되려고 합니다. 이렇게 선이 있는 만큼 온 집에 충성할 수 있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도 이룰 수 있습니다.
혹 예전에는 사명도 사모하고 충성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맡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사명은 그대로라 해도 처음 뜨거웠던 마음이 식지는 않았는지요?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충성도 승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충성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장차 천국에서는 얼마나 값진 상급으로 받겠습니까?
시편 101편 6절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성결을 이루고 온 집에 충성하여 하나님 보좌 가까이 거하는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충성이란 꾸준히 ( )를 하는 작업을 말한다.
끊임없이 마음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비진리, 악, 불의, 불법 등 모든 죄를 버리고 ( )을 이루는 것이다.
2.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다하기까지 열심히 일하고 충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66권에 담긴 ( )을 생명 다해 이뤄 드린다는 의미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천국에서 상급으로 받는 면류관
법대로 경기한 자가 받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 하나님께 영광 돌림으로 받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 계 2:10), 이십사 장로들이 쓰는 금면류관(계 4:4, 14:14),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던 의의 면류관(딤후 4:8)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금장식관, 꽃으로 장식된 화관, 영롱한 진주로 만들어진 진주관, 투명한 크리스털 위에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크리스털관 등 다양한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2021-10-01
제40과성령의 열매 (6) - 양선
갈라디아서 5:22~23
읽을말씀 : 갈라디아서 5:22~23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2:19~20 | 참고 말씀: 마태복음 12:35
교육목표 : 성령 안에서 범사에 선을 추구하며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양심이란?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같지는 않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또 40~5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2. 양선의 열매란?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는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마 12:35).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진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그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를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응급조치는 해줄 수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면서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야 할 책임은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선을 추구하며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유가 있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했어야 했는데’ 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범사에 선을 택해 나가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의 열매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2. 양선이란 ( )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 )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3. ( )는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 )는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에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결국 함락된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자연히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목표 : 성령 안에서 범사에 선을 추구하며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함으로 어느 곳에서든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령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선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즉 자기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저것은 악하다.” 하지요.
그래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 선하고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는 선하다고 여긴 것이 상대에게는 악할 수 있고, 내게는 악한 것이 남에게는 선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양심이란?
그렇다면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들으며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정직의 중요성을 교육받고 자라는 아이는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거짓말하며 자란 아이는 큰 거짓말을 하면서도 잘못한 줄도 모르지요. 양심이 그만큼 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가치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양심은 달라집니다. 사회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가치관이 같지는 않습니다. 왕정 시대에는 노예를 부리며 학대해도 그것을 잘못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또 40~5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으면 손가락질 받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의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시대의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2. 양선의 열매란?
세상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으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良善)’을 문자대로 풀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이지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는 것처럼,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마 12:35).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선한 마음이 있기에 선행을 베풀지요.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 해서 양선의 열매가 맺히진 않습니다. 선을 보고 듣고 반드시 마음에 이루고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했는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를 보았으나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그 뒤에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그도 외면해 버립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는 행함을 내보이지 못했지요. 그 후 한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바로 상처를 싸매 주며 황급히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 주었지요.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를 부탁하며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와서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 갈 길도 바쁜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과 물질을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응급조치는 해줄 수 있지만 굳이 앞으로의 비용까지 대겠다면서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야 할 책임은 없지요.
그러나 그에게는 선을 추구하며 행하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유가 있어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다친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를 구했어야 했는데’ 하며 내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것처럼, 선을 택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범사에 선을 택해 나가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20절에는 예수님의 양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합니다.
선한 일만 하신 예수님을 악한 사람들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자들이 훼방하여도 다투거나 들레지도 않으셨지요. 육의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좋아합니다. 나를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고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으셨고 겸손하셨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걸음걸이, 몸가짐, 언어에도 흠이 없으셨지요. 오직 그 마음에는 지극한 선과 겸손함, 영적인 사랑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예수님처럼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습니다.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들추어내지 않지요. 자신을 드러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지요.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도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습니다.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악을 발하는 사람이라도 품습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꺾으려고 하지 않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줍니다. 설령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만 참자!”라고 한계를 두고 선을 넘는다고 해서 외면하는 것도 없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지요. 이것이 곧 양선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양선’의 마음과 다른 성령의 열매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가령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자비나 구제와 긍휼이 아닌가?” 또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는 마음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이 아닌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 중점을 두었느냐를 보면 됩니다.
‘양선’의 열매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에 중점을 두었지요. 또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는다는 것은 화평과 겸손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양선에 비유했을 때는 선해서 화평을 깰 수 없는 마음, 인정받으려고 들레기보다는 겸비한 것을 더 좋아하는 선한 마음에 포인트를 둔 것입니다.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으면 주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거나 실족시키지 않으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외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누가 봐도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2. 양선이란 ( )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 )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3. ( )는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 )는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사마리아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그 주변을 일컫는다. 이곳에 바알 당이나 다른 종교의 사당들이 있었기에 선지자들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로 여겼다. 예후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사마리아는 여러 번 앗수르의 공격을 받다가 결국 함락된다.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에 자국민들을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친다. 자연히 사마리아는 혼혈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적대시하며 상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