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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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4
제5과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예수 그리스도
레위기 25:23~25
읽을말씀 : 레위기 25:23~25 | 외울말씀 : 로마서 5:19 | 참고 말씀 / 요한계시록 5:1~5
교육목표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과 구세주가 되는 자격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영의 세계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영계의 법칙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법칙에 따라 비밀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과연 범죄한 아담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1. 토지를 사고파는 데 적용되는 토지 무르기 법칙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즉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어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다시 무를 수 있는 ‘토지 무르기 법칙’을 설명하였지요.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서에 어떤 경로로 토지를 팔고 사는지 과정과, 나중에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토지 무르기의 내용을 기록하고, 팔고 사는 사람이 도장을 찍고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 후 계약서 1부는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여 성전 창고에 보관하고, 다른 1부는 언제라도 볼 수 있게 성전 입구에 펼쳐 놓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근족이 와서 대신 토지를 무를 수 있고, 무를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부를 쌓아 힘이 있을 때 무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도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천하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주게 되었지만(눅 4:6),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영영히 팔지는 못하며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때가 되자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과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5장 4절에는 하나님과 마귀가 계약한 책이 나옵니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마귀에게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넘겨주었지만, 이것을 무를 힘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다시 그 권세를 넘겨주겠다.’는 계약서이지요.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니 그 책을 일곱 인으로 봉하여 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크게 웁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뿌리인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른 구세주의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19절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즉 누군가 죄를 대속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멸망의 길을 가던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토지 무르기 법칙에 의하면 돈이 없어 토지를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되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습니다. 만일 본인이 무를 힘이 없을 때에는 근족이 대신 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범죄한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되찾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즉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토지 무르기 법칙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으니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사람은 어느 누구도 구세주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아담의 후예가 아닌 사람을 찾고자 하늘 위를 보니 천사만 있고, 땅 위를 살펴보니 아담의 후예인 죄인들만 있고, 땅 아래를 보니 지옥에 속한 것뿐이었기에 심히 애통하였습니다(계 5:1~3).
그러면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법칙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남녀가 결혼하여 잉태된 분이 아닙니다. 단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원죄가 없으시므로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하십니다.
셋째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빚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자신에게 그만한 재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대속해 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므로 원수 마귀에게 빼앗긴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토지 무르기 세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셨을까요?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에 원죄가 없습니다.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33년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셨으니 스스로 짓는 자범죄도 전혀 없으셨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온전한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시므로 세 번째 조건에도 합당하십니다.
넷째로,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성립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이 아무리 부자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동생의 빚을 갚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룻기 4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했던 나오미의 형편을 알고 가장 가까운 근족에게 기업 무르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근족은 자신이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 토지 무르기를 거부하지요. 이렇게 근족이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를 수 없습니다. 결국 나오미의 다음 근족인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고 사랑도 있어서 그를 대신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크신 사랑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 인해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녀로 되찾아 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시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주시며 오직 선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온갖 고난과 멸시를 당하시고 마침내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인간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며,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행 4:12).
● 평가 및 적용하기
1.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구세주의 자격 조건을 써보세요.
첫째, ( )이어야 한다.
둘째, ( )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
셋째,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넷째, 목숨까지 줄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2. ( )이란,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원죄와 자범죄
- 원죄 :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부모의 기를 통해 불순종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한다.
- 자범죄 :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한다.
교육목표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과 구세주가 되는 자격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 가운데 영의 세계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영계의 법칙에는 죄인에게 벌을 가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 죄를 속량할 수 있는 법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법칙에 따라 비밀한 가운데 인간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과연 범죄한 아담이 죄를 속량할 수 있는 영계의 법칙은 무엇일까요?
1. 토지를 사고파는 데 적용되는 토지 무르기 법칙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말씀합니다. 즉 토지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어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다시 무를 수 있는 ‘토지 무르기 법칙’을 설명하였지요.
이스라엘에서는 계약서에 어떤 경로로 토지를 팔고 사는지 과정과, 나중에 되돌려 받을 수 있도록 토지 무르기의 내용을 기록하고, 팔고 사는 사람이 도장을 찍고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 후 계약서 1부는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여 성전 창고에 보관하고, 다른 1부는 언제라도 볼 수 있게 성전 입구에 펼쳐 놓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근족이 와서 대신 토지를 무를 수 있고, 무를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부를 쌓아 힘이 있을 때 무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도 토지 무르기의 법칙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천하 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주게 되었지만(눅 4:6),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라 영영히 팔지는 못하며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때가 되자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간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조건과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5장 4절에는 하나님과 마귀가 계약한 책이 나옵니다. 이는 ‘아담이 불순종하여 마귀에게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넘겨주었지만, 이것을 무를 힘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다시 그 권세를 넘겨주겠다.’는 계약서이지요.
그런데 사도 요한이 보니 그 책을 일곱 인으로 봉하여 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크게 웁니다. 그때 장로 중 하나가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의 뿌리인 예수님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 무르기 법칙에 따른 구세주의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19절에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즉 누군가 죄를 대속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멸망의 길을 가던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토지 무르기 법칙에 의하면 돈이 없어 토지를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되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언제든지 무를 수 있습니다. 만일 본인이 무를 힘이 없을 때에는 근족이 대신 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범죄한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넘겨준 권세를 되찾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담의 근족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즉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토지 무르기 법칙 첫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입니다.
둘째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으니 그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인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사람은 어느 누구도 구세주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아담의 후예가 아닌 사람을 찾고자 하늘 위를 보니 천사만 있고, 땅 위를 살펴보니 아담의 후예인 죄인들만 있고, 땅 아래를 보니 지옥에 속한 것뿐이었기에 심히 애통하였습니다(계 5:1~3).
그러면 예수님은 토지 무르기 법칙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한 분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남녀가 결혼하여 잉태된 분이 아닙니다. 단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에 아담의 후예가 아니며, 원죄가 없으시므로 두 번째 조건에 합당하십니다.
셋째로,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빚을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여도 자신에게 그만한 재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대속해 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이므로 원수 마귀에게 빼앗긴 아담의 권세를 회복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수 마귀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토지 무르기 세 번째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셨을까요? 예수님은 아담의 후예가 아니기 때문에 원죄가 없습니다.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33년 동안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셨으니 스스로 짓는 자범죄도 전혀 없으셨지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온전한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시므로 세 번째 조건에도 합당하십니다.
넷째로,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설명한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성립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형이 아무리 부자라 해도 사랑이 없으면 동생의 빚을 갚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룻기 4장을 보면 보아스가 가난했던 나오미의 형편을 알고 가장 가까운 근족에게 기업 무르기를 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근족은 자신이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 토지 무르기를 거부하지요. 이렇게 근족이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무를 수 없습니다. 결국 나오미의 다음 근족인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수 있는 힘이 있고 사랑도 있어서 그를 대신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크신 사랑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는 희생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범죄한 아담으로 인해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하나님 자녀로 되찾아 올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각색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시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시고,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주시며 오직 선만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온갖 고난과 멸시를 당하시고 마침내는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엄청난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인간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토지 무르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며,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행 4:12).
● 평가 및 적용하기
1. 토지 무르기 법칙에 합당한 구세주의 자격 조건을 써보세요.
첫째, ( )이어야 한다.
둘째, ( )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
셋째, 원수 마귀를 이길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넷째, 목숨까지 줄 수 있는 ( )이 있어야 한다.
2. ( )이란, 토지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며,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합당한 규정에 따라 근족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원죄와 자범죄
- 원죄 :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인류는 부모의 기를 통해 불순종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한다.
- 자범죄 :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스스로 짓는 죄를 말한다.
2022-02-01
제0과< 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
로마서 12:20~21
읽을말씀 : 로마서 12:20~21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 나라들에게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력으로 1월 1일인 설날은 ‘묵은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2022년, 새해에도 늘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1. 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278장 ---------------------- 다 같이
1.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 부르네
내 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2.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온갖 충성 다바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힘써 섬기네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
3.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조차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20~21 -------------------- 인도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설 교 ------------------- 선으로 악을 이기자 ----------------- 설교자
2. 설교 예문
옛날에 아주 성격이 고약한 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아무리 일을 잘해 도 칭찬은커녕 “이건 왜 이렇게 못했냐? 저건 왜 이렇게 해 놨냐?” 하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며느리는 급기야 시어머니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봐도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참다 못해 며느리는 동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어르신을 찾아갔습니다.
“어르신! 시어머님이 빨리 죽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 어르신은 “방법이 있긴 하지만 아주 어려운데 할수 있겠나?” 하고 물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며느리에게 노인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 물었지요. “인절미입니다.”라고 답하자 노인은 “앞으로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인절미를 그날그날 만들어서 어머니께 극진히 대접해 드리게. 단, 조건이 있네. 한 달 동안 절대로 어머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평소에 하던 일은 물론 떡까지 해서 드려야 하니 얼마나 몸이 곤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며느리는 시어머니 마음이 불편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섬겼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 날이 갈수록 마음을 실어서 하게 되었습니다. 혹여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는지, 필요한 건 없으신지, 뭘 더 해 드려야 어머니가 편하실는지, 온종일 어머니께 어떻게 하면 더 잘해 드릴까’ 궁리하였지요.
시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인절미를 정성껏 바치는 며느리의 행함에 마음 문이 열리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며느리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침이 마르도록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하였지요.
한 달이 끝나갈 무렵 이 방법을 알려 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노인은 “이제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은 조짐이 좀 보이는가?”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며느리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어르신,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면 절대 안 돼요. 저한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세상에 저 같은 며느리 없다고 아껴 주세요. 우리 어머니 오래오래 사셔야 돼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0~21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했습니다. 위의 며느리는 진리를 알아서 변화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었지요. 처음부터 어찌하든 마음을 담아서 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니 중심에서 우러나오게 되었고, 결국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진정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먼저 선을 행해 보라고 하면 “왜 맨날 나만 손해 봐야 됩니까? 왜 나만 희생해야 되나요? 왜 나만 져 줘야 됩니까?” 반문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내가 손해 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나만 져 주는 것 같아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결국에는 이기는 비결인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단지 착해서 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변화시키고 살려내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이 바로 선의 힘입니다. 진정 마음 중심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손해 보고 희생해도 내가 손해 본다, 희생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살리고 더 힘이 되어 줄까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내 성격, 내 취향, 내 마음에 맞는 편안한 사람들과만 지낼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도 함께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직장, 학교, 교회 등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 안에서는 내가 싫다고 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자주 부딪히고 걸리는 사람을 통과하기 위해, 그 사람의 집안 애경사와 생일을 챙기고, 때때로 선물도 사 주며, 식사도 함께하는 등 마음을 맞추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대에게 무언가 더 주고 섬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선을 행위적으로만 쌓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다시 말해, 내가 선을 행하는 그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 상대를 섬기는 마음, 상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 평안하고 행복을 느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에는 향기가 있어서 아무리 작은 선의 행함이라도 향이 있는 반면, 아무리 깊고 큰 선이라도 그것이 이론에만 머무르면 향이 나지 않습니다. 선은 생각하고 연구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 안에서부터 나오지요. 또한 선은 쌓으면 쌓을수록 더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작은 선이 쌓이다 보면 다음에 더 큰 선이 나오고, 그렇게 쌓이다 보면 더 깊은 선이 나오게 되지요.
그러므로 작은 선부터 차곡차곡 쌓아가심으로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넉넉하고 포근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이 되면 새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가족의 건강과 마음의 소원을 막연히 신에게 빌었습니다. 또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절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요.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두 갈래로 나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반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우리 조상들은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 세계가 있음을 믿었기에 신을 찾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참 신으로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을 때 만나 주시고, 어떤 사고나 재앙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을 새해에는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의지하심으로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설날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음력을 사용하는 아시아권 나라들에게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력으로 1월 1일인 설날은 ‘묵은해를 떨쳐 버리고 새로 맞이하는 한해의 첫머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2022년, 새해에도 늘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1. 설 명절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278장 ---------------------- 다 같이
1.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 부르네
내 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2.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온갖 충성 다바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힘써 섬기네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
3.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조차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봉독 ---------------- 로마서 12:20~21 -------------------- 인도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설 교 ------------------- 선으로 악을 이기자 ----------------- 설교자
2. 설교 예문
옛날에 아주 성격이 고약한 시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아무리 일을 잘해 도 칭찬은커녕 “이건 왜 이렇게 못했냐? 저건 왜 이렇게 해 놨냐?” 하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며느리는 급기야 시어머니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봐도 숨이 막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참다 못해 며느리는 동네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어르신을 찾아갔습니다.
“어르신! 시어머님이 빨리 죽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 어르신은 “방법이 있긴 하지만 아주 어려운데 할수 있겠나?” 하고 물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며느리에게 노인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가?” 물었지요. “인절미입니다.”라고 답하자 노인은 “앞으로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인절미를 그날그날 만들어서 어머니께 극진히 대접해 드리게. 단, 조건이 있네. 한 달 동안 절대로 어머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평소에 하던 일은 물론 떡까지 해서 드려야 하니 얼마나 몸이 곤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며느리는 시어머니 마음이 불편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고 섬겼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했지만 날이 갈수록 마음을 실어서 하게 되었습니다. 혹여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는지, 필요한 건 없으신지, 뭘 더 해 드려야 어머니가 편하실는지, 온종일 어머니께 어떻게 하면 더 잘해 드릴까’ 궁리하였지요.
시어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인절미를 정성껏 바치는 며느리의 행함에 마음 문이 열리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며느리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침이 마르도록 동네 사람들에게 칭찬하였지요.
한 달이 끝나갈 무렵 이 방법을 알려 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노인은 “이제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은 조짐이 좀 보이는가?”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며느리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어르신,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면 절대 안 돼요. 저한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요. 세상에 저 같은 며느리 없다고 아껴 주세요. 우리 어머니 오래오래 사셔야 돼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20~21절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했습니다. 위의 며느리는 진리를 알아서 변화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었지요. 처음부터 어찌하든 마음을 담아서 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니 중심에서 우러나오게 되었고, 결국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고 진정 사랑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악으로 나오는 상대에게 먼저 선을 행해 보라고 하면 “왜 맨날 나만 손해 봐야 됩니까? 왜 나만 희생해야 되나요? 왜 나만 져 줘야 됩니까?” 반문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내가 손해 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고, 나만 져 주는 것 같아 억울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결국에는 이기는 비결인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단지 착해서 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변화시키고 살려내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이 바로 선의 힘입니다. 진정 마음 중심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리 손해 보고 희생해도 내가 손해 본다, 희생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살리고 더 힘이 되어 줄까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내 성격, 내 취향, 내 마음에 맞는 편안한 사람들과만 지낼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고,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며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도 함께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직장, 학교, 교회 등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 안에서는 내가 싫다고 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자주 부딪히고 걸리는 사람을 통과하기 위해, 그 사람의 집안 애경사와 생일을 챙기고, 때때로 선물도 사 주며, 식사도 함께하는 등 마음을 맞추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대에게 무언가 더 주고 섬기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선을 행위적으로만 쌓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다시 말해, 내가 선을 행하는 그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 상대를 섬기는 마음, 상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 평안하고 행복을 느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에는 향기가 있어서 아무리 작은 선의 행함이라도 향이 있는 반면, 아무리 깊고 큰 선이라도 그것이 이론에만 머무르면 향이 나지 않습니다. 선은 생각하고 연구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 안에서부터 나오지요. 또한 선은 쌓으면 쌓을수록 더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작은 선이 쌓이다 보면 다음에 더 큰 선이 나오고, 그렇게 쌓이다 보면 더 깊은 선이 나오게 되지요.
그러므로 작은 선부터 차곡차곡 쌓아가심으로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넉넉하고 포근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이 되면 새해의 풍요로운 수확과 가족의 건강과 마음의 소원을 막연히 신에게 빌었습니다. 또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절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요.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므로 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두 갈래로 나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반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우리 조상들은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 세계가 있음을 믿었기에 신을 찾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참 신으로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을 때 만나 주시고, 어떤 사고나 재앙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을 새해에는 마음 중심에서 믿고 의지하심으로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 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22-01-28
제4과선악과를 두신 이유
창세기 3:1~7
읽을말씀 : 창세기 3:1~7 | 외울말씀 : 야고보서 1:15 | 참고 말씀: 창세기 2:17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이끌어 들이시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섭리를 알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깊고 오묘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두어 사람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선악과를 두고 사망의 길로 인도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이며, 생령 아담은 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으로 창조하시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로 여자인 하와를 지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18~25). 이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홀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아담의 형편을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었으며 장차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생령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며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었지요. 바로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2. 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아담과 하와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사단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하와를 유혹하니 하와는 물론 결국 아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창 2:16~17).
그런데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창 3:1) 묻습니다. 여자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하나님 말씀을 변질시켜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답변하자 뱀은 더욱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지요(창 3:4~5).
사단이 간교한 뱀을 통해 욕심을 불어넣자 여자는 선악과가 예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여자는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줘서 먹게 했지요.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악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말하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기 전에는 전혀 악이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니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불순종하므로 악이 들어왔습니다. 즉 생령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처음부터 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가운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가 성립되었고, 비로소 악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죄의 삯은 사망
영계의 법칙은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후 곧바로 죽지 않고 오랜 세월 살면서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죽는다”라는 것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니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던 사람의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영이 죽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육의 공간인 이 땅으로 쫓겨났지요.
이때부터 인류의 고난이 시작되어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수고하며 자녀를 낳고, 남편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했습니다(창 3:16). 그리고 아담은 저주받은 이 땅에서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창 3:17).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지요. 또한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도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롬 5:12).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사주를 받아 하와를 미혹한 뱀에게는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말하며(창 2:7), 뱀은 원수 마귀 사단을 뜻합니다(계 20:2).
따라서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하신 말씀에는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므로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의 가장 중앙에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성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령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상대성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많은 것을 누렸지만 스스로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고통, 불행, 죽음 등을 체험한 후에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깨우칩니다. 비로소 에덴동산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되지요. 이처럼 상대성을 체험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사람이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어도 막지 않으시고, 인간 경작을 통해 이 땅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상대성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과 기쁨, 감사가 무엇인지 깨달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을지니라”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3. 많은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 )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자유 의지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한다.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과 특권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이끌어 들이시고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섭리를 알게 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깊고 오묘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두어 사람을 멸망의 길로 가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시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일부러 선악과를 두고 사망의 길로 인도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이며, 생령 아담은 왜 사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1.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으로 창조하시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로 여자인 하와를 지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18~25). 이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홀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아담의 형편을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었으며 장차 인간 경작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생령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며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있었지요. 바로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2. 뱀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아담과 하와
오랜 세월이 흐르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사단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하와를 유혹하니 하와는 물론 결국 아담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창 2:16~17).
그런데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창 3:1) 묻습니다. 여자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하나님 말씀을 변질시켜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답변하자 뱀은 더욱 적극적으로 유혹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지요(창 3:4~5).
사단이 간교한 뱀을 통해 욕심을 불어넣자 여자는 선악과가 예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곧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여자는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줘서 먹게 했지요.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악이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다.”고 말하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하기 전에는 전혀 악이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니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불순종하므로 악이 들어왔습니다. 즉 생령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처음부터 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 가운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가 성립되었고, 비로소 악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죄의 삯은 사망
영계의 법칙은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한 후 곧바로 죽지 않고 오랜 세월 살면서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죽는다”라는 것은 단순히 호흡이 끊어지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의 죽음을 뜻합니다.
원래 사람은 생령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영의 지배를 받는 혼, 그리고 영과 혼의 장막인 육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니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던 사람의 영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의 영이 죽으니 더 이상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서 육의 공간인 이 땅으로 쫓겨났지요.
이때부터 인류의 고난이 시작되어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하여 수고하며 자녀를 낳고, 남편을 사모하며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했습니다(창 3:16). 그리고 아담은 저주받은 이 땅에서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창 3:17).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었지요. 또한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도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삯인 사망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롬 5:12).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사주를 받아 하와를 미혹한 뱀에게는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흙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말하며(창 2:7), 뱀은 원수 마귀 사단을 뜻합니다(계 20:2).
따라서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하신 말씀에는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하므로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 말씀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4.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의 가장 중앙에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성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령으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상대성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풍요로운 에덴동산에서 많은 것을 누렸지만 스스로 땀 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쫓겨나 눈물, 슬픔, 고통, 불행, 죽음 등을 체험한 후에야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깨우칩니다. 비로소 에덴동산에서 누리던 자유와 풍요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알게 되지요. 이처럼 상대성을 체험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사람이 자유 의지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어도 막지 않으시고, 인간 경작을 통해 이 땅에서 모든 희로애락을 경험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상대성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과 기쁨, 감사가 무엇인지 깨달아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며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중앙에 선악과를 두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을지니라” 하신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3. 많은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아주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 )을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 행복과 사랑을 알지 못하였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자유 의지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말한다.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과 특권이다.
2022-01-21
제3과사람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28
읽을말씀 : 창세기 1:28 | 외울말씀 : 마태복음 3:12 | 참고 말씀: 디모데전서 2:4
교육목표 :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섭리를 통해 알곡 성도는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시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로써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로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마 13:34).
특히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밭의 가라지 비유, 포도원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등 경작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이는 농부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를 거두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고 때가 되면 알곡을 거두어 천국으로 들인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작하시는 이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주 공간에 홀로 계셨습니다(요 1:1). 지극히 아름답고 영롱한 빛 안에 맑고 청아한 소리를 머금고 온 우주공간을 다스리셨습니다(요일 1:5).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느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으신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 전부터 계시던 공간을 분리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셨지요.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 되시는 성부 하나님, 구세주가 되실 성자 예수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멈추지 않고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두 자녀가 있는데 큰아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면 작은아이는 부모님을 서운케 할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키며 사랑스럽게 매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어느 자녀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또한 가정에 로봇이 있어 밥도 짓고 청소도 하며 모든 시중을 들어준다고 해서 자녀보다 로봇이 더 사랑스러울까요? 로봇이 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자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도 순종을 잘하는 천군 천사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자유 의지 가운데 즐거이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되 자유 의지를 주시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며, 참 자녀로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를 얻고자 이 땅에 아담과 하와라는 첫 씨를 심으셨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마음밭을 개간하는 경작의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6절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할 줄을 모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만세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창조하여 경작하시는 이유는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입니까? 잉태하여 해산할 때까지 고통이 따르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며 가르치기 위해 밤낮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극진히 섬기고 효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근심할 것을 아셨지만,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나올 것을 믿기에 기꺼이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2.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는 이유는 추수 때에 많은 소산을 거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 보면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섞여 나오지요. 이때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마친 뒤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참 자녀인 알곡은 천국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십니다.
알곡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빛의 자녀들이지요. 반면에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 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쭉정이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방법으로 깨우쳐 주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쭉정이에 속하며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전 3:18). 하지만 사람은 영원불멸하는 영혼을 지닌 존재이기에 영이 없는 짐승처럼 아예 무 상태로 멸할 수도 없고 알곡 성도와 함께 천국에 들일 수도 없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천국과 구별하여 지옥을 두신 것입니다.
농부가 추수 때에 알곡을 거두어 쭉정이와 함께 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죄악이 가득한 쭉정이 같은 존재가 알곡 성도와 영원히 함께 산다면 아름다운 천국이 죄악으로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따로 두신 것도 근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인간 경작과 백보좌 대심판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이 한 해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려 주시며 믿음의 선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주의 종과 일꾼들을 통해 영혼들을 깨우시며 끊임없이 인간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인간 경작도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신 대로 때가 이르면 인간 경작의 섭리가 마쳐집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처럼, 6천 년의 인간 경작이 끝나면 주님의 재림과 함께 안식 기간인 천년왕국이 이어집니다.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는 백보좌 대심판이 있습니다(계 20:11~12). 이때 알곡 성도는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 심판을 받고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천국 처소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쭉정이는 지옥불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알곡 성도가 되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 )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한다.
3. ( )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 )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알파와 오메가
- 문명의 시작과 끝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이다.
◈ 처음과 나중
-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마무리하신다는 뜻이다.
◈ 시작과 끝
- 성령님께서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이다.
교육목표 :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 경작의 섭리를 통해 알곡 성도는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에 던지시는 이유를 깨닫게 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로써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로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마 13:34).
특히 씨 뿌리는 비유, 겨자씨 비유, 밭의 가라지 비유, 포도원 비유, 불의한 농부의 비유 등 경작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이는 농부가 땅을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를 거두듯이,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고 때가 되면 알곡을 거두어 천국으로 들인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작하시는 이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주 공간에 홀로 계셨습니다(요 1:1). 지극히 아름답고 영롱한 빛 안에 맑고 청아한 소리를 머금고 온 우주공간을 다스리셨습니다(요일 1:5).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함께 느끼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을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으신 하나님은 인간 경작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 전부터 계시던 공간을 분리하시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기 시작하셨지요. 인간 경작의 총감독이 되시는 성부 하나님, 구세주가 되실 성자 예수님, 구원을 온전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 역사와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멈추지 않고 사람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아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참 자녀를 얻기 위함입니다.
어떤 부모에게 두 자녀가 있는데 큰아이는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사랑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반면 작은아이는 부모님을 서운케 할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키며 사랑스럽게 매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면 어느 자녀가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또한 가정에 로봇이 있어 밥도 짓고 청소도 하며 모든 시중을 들어준다고 해서 자녀보다 로봇이 더 사랑스러울까요? 로봇이 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자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도 순종을 잘하는 천군 천사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자유 의지 가운데 즐거이 순종하는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되 자유 의지를 주시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며, 참 자녀로 나오기까지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리며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경작이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통해 열매를 얻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경작하는 수고를 통해 참 자녀를 얻고자 이 땅에 아담과 하와라는 첫 씨를 심으셨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마음밭을 개간하는 경작의 과정을 거쳐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6절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범죄할 줄을 모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만세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을 창조하여 경작하시는 이유는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입니까? 잉태하여 해산할 때까지 고통이 따르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며 가르치기 위해 밤낮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이유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대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극진히 섬기고 효도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람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여 근심할 것을 아셨지만,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가 나올 것을 믿기에 기꺼이 경작하시는 것입니다.
2.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는 하나님
농부가 열심히 땅을 갈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짓는 이유는 추수 때에 많은 소산을 거둘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 보면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섞여 나오지요. 이때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마친 뒤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십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참 자녀인 알곡은 천국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십니다.
알곡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빛의 자녀들이지요. 반면에 쭉정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 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세상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쭉정이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지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 방법으로 깨우쳐 주시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으므로 쭉정이에 속하며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전 3:18). 하지만 사람은 영원불멸하는 영혼을 지닌 존재이기에 영이 없는 짐승처럼 아예 무 상태로 멸할 수도 없고 알곡 성도와 함께 천국에 들일 수도 없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천국과 구별하여 지옥을 두신 것입니다.
농부가 추수 때에 알곡을 거두어 쭉정이와 함께 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죄악이 가득한 쭉정이 같은 존재가 알곡 성도와 영원히 함께 산다면 아름다운 천국이 죄악으로 오염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옥을 따로 두신 것도 근본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3. 인간 경작과 백보좌 대심판
농부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이 한 해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려 주시며 믿음의 선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주의 종과 일꾼들을 통해 영혼들을 깨우시며 끊임없이 인간을 경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인간 경작도 한없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신 대로 때가 이르면 인간 경작의 섭리가 마쳐집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창조 사역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처럼, 6천 년의 인간 경작이 끝나면 주님의 재림과 함께 안식 기간인 천년왕국이 이어집니다.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는 백보좌 대심판이 있습니다(계 20:11~12). 이때 알곡 성도는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상급 심판을 받고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천국 처소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쭉정이는 지옥불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습니다.
이러한 인간 경작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알곡 성도가 되어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 )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 ) 안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을 말한다.
3. ( )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거나 입술로는 믿는다하지만 말씀 안에 살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며 ( )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알파와 오메가
- 문명의 시작과 끝이 아버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뜻이다.
◈ 처음과 나중
-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하심으로써 구속 사업을 마무리하신다는 뜻이다.
◈ 시작과 끝
- 성령님께서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이 되신다는 뜻이다.
2022-01-14
제2과창조주 하나님
창세기 1:1
읽을말씀 : 창세기 1:1 | 외울말씀 : 창세기 2:7 | 참고 말씀: 로마서 1:20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시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됩니다.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롬 1:20).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어느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과연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냅니다. 텔레비전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오장육부와 뼈와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하여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내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2.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 )를 만들어 주셨다.
여기에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저장되는데 이것이 ( )이다.
이것을 떠올리는 것이 ( )이며, 이것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 )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생기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풍요롭게 살던 생령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범죄함으로 영이 죽어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목표 : 창조론과 진화론의 차이점을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이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시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신 대략의 과정과 우주 만물을 비롯해 사람을 창조하신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주 만물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의 뜻을 좇아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신본주의 사상이지요.
반면 진화론은 모든 생물이 무생물로부터 자연 발생하여 하등에서 고등으로, 동종에서 이종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인원이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의 근원을 우연의 산물로 보며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합니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이 땅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즐기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여기지만 참된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육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지니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한 인생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은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감에서부터 하늘을 나는 비행기까지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천하 만물도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이 있어 그분의 마음에 맞게 설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성경뿐 아니라 우주 만물 안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동서남북과 사계절이 있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밀물과 썰물의 교차, 바람과 구름의 이동 등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운행됩니다. 이것을 어찌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 모든 동물이 한결같이 눈은 두 개요, 코 하나에 입도 하나, 귀는 두 개요 그 위치까지 똑같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물주 한 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천지 만물을 바라보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롬 1:20).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래 어느 누구도 “나는 창조주 하나님을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도록 지금도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2.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지요(창 1:27~28).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과연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흙이란 진흙을 말합니다. 뛰어난 도공은 진흙을 사용하여 수천만 원 혹은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도자기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사람은 질그릇이나 기왓장, 혹은 값싼 벽돌을 만들어 내지요.
이처럼 누가 어떤 재료로 어떤 물건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빚으셨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영 곧 생령이 되었습니다.
생기란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생령으로 창조된 과정은 형광등이 빛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광등이 빛을 내게 하려면 먼저 잘 조립된 형광등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상태로는 빛을 낼 수 없으며, 전원과 연결되어 전류가 흘러야 비로소 빛을 냅니다. 텔레비전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죽어 있는 듯한 물건인데 전원을 연결하면 갖가지 영상이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은 외관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오밀조밀한 부속품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흙으로 사람의 형상만 빚은 것이 아닙니다. 설계도대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끝에서 근본의 빛이 나갔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오장육부와 뼈와 핏줄과 신경조직이 완벽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전류를 통하게 하듯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피가 돌고 호흡하며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기억 장치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기억 장치에 저장되는데 이것이 지식입니다. 이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며, 지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피조물인 사람도 지혜와 지식이 더하여 문자나 사람의 음성을 인식하여 대화할 수 있는 컴퓨터까지 만들어 내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시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만,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신기하고 측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시 139:14).
3.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생령으로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곳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8~15).
갓 태어난 자녀는 본능적인 생리작용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서 부모, 형제, 교사 등을 통해 각종 교육을 받아야 인간답게 살아갑니다. 아담도 처음 생령이 되었을 때는 몸은 성인의 모습이지만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만물의 영장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천지 만물의 조화와 영계의 법칙, 진리의 말씀 등 필요한 것들을 자상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이런 것은 먹어도 되지만 저런 것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그런데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죄의 삯인 사망’이 임하게 됩니다(롬 6:23). 사람에게 있어 주인의 역할을 하는 영이 죽게 되었고, 결국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하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니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경작을 통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참 자녀를 얻어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풍성한 사랑을 공급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자유 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축복의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증거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2.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뇌세포 안에 ( )를 만들어 주셨다.
여기에 사람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이 저장되는데 이것이 ( )이다.
이것을 떠올리는 것이 ( )이며, 이것을 적절히 배합하여 활용하는 것이 ( )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생기
하나님의 근본 된 능력으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가 아담의 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포핵에 들어가자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풍요롭게 살던 생령 아담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범죄함으로 영이 죽어 더 이상 영의 공간인 에덴동산에 거할 수 없게 되었다.
2022-01-07
제1과새롭게 하소서
누가복음 5:38
읽을말씀 : 누가복음 5:38 | 외울말씀 : 에베소서 5:9 | 참고 말씀: 로마서 2:13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주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를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한다.
대부분 새해가 되면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새롭게 마음을 결단합니다. 특히 성결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이 되리라” 고백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힘쓰며, 하루에 성경을 한 장 이상 읽고 성구를 외우며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고자 하지요. 이렇게 연초에 결심하고 고백한 것을 변개치 않으며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전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며 사람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인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이려 합니다. 진실하지 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을 속였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렇습니다(행 5장). 그들은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지요. 하지만 욕심이 틈타자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재산 중 일부를 감추고 사도들 앞에 내놓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책망합니다.
성령을 속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으며, 하나님의 종을 속이는 것 또한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 베드로를 속였으므로 결국 혼이 떠나 죽고 말았지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거짓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으면서 사모하는 척하고,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외식하지요. 그러다가 남의 눈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까지 속이게 됩니다. 자신이 외식하고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충성하는 일꾼이라고 착각하지요.
이 외에도 자기 공적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 무익한 일을 추진하기도 하고, 누가 지켜볼 때는 성실하게 하고 혼자 있을 때는 불성실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충성함으로 진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를 섬기기 위해서는 내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들여 희생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아무리 상대에게 많은 것을 주고 희생해 주었어도 먼저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하면 빛을 발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직원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더니 열심히 일은 하는데 표정이 딱딱하고 무뚝뚝하다면 어떻겠습니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다음에 일을 부탁하기가 망설여질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아무리 일을 잘해도 “섬기며 일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섭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지요. 따라서 자신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까지 섬김의 기준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서로 간에 얼마나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는 여러 부서 사람들이 함께 쓰는 화장실이나 복도, 계단 등의 공용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화장실이 지저분해도 ‘내 업무가 아니니까’ 하고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치 나의 일처럼 깨끗이 청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부서 안에서도 누가 아침에 일찍 와서 책상을 닦아 주는지, 쓰레기통을 비우며 청소를 도와주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지 낱낱이 지켜보고 계시지요.
또한 자신의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업무도 아닌데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나는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많은데, 이런 사소한 일들은 업무가 적은 사람들이나 직분이 낮은 사람들이 해 줘야 하지 않나?’ 하면서 힘들어하지요.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일했다면 비록 행함으로는 섬겼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해서 결과만 내면 인정을 받지만, 주 안에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행할 때 상급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받는 만큼 자기의 업무만 하면 되지만, 주 안에서는 보직에 해당되는 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하나님의 일이 모두 자신의 업무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씀씀이를 넓혀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어야 하지요.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섬기고 높은 사람이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행위적으로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섬길 때 이 땅에서도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천국에서도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행함이란 ‘하나님 말씀을 흘려버리지 않고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말씀했습니다.
처음부터 진리대로만 행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쉼 없이 노력해 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보시고 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다소 부족하다 할지라도 순종하여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다듬어 일꾼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대개 처음 사명을 받았을 때는 사명 감당을 위해서 반드시 성결되리라 다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직분이 높아지면서 마음의 할례에 대한 간절함이 식어지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진리를 지식으로만 알고 행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덮어 놓고 절제하므로 크게 비진리를 행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은 없습니다. 본인이 할 일은 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 생각하지요.
혹여 자신은 이러한 모습이 있지 않나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배나 기도회에 습관적으로 참석하거나 마지못해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 상태가 지속되면 신앙이 정체되어 성령의 충만함이 식고, 자칫 구원받기 힘든 육체의 일까지 행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으로 충만할 때는 하나님 나라에 열심히 충성 봉사합니다. 예배나 기도회에 늦지 않기 위해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사모함으로 단숨에 달려오지요. 생명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달게 들으며 하나라도 깨우치고 변화되기 위해 금식하며 불같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멈춘다면 영적인 발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행군을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고 진실한 행함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누가복음 5장 38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묵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새롭게 변화되어 진실한 마음과 행함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창대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주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를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는 일꾼이 되게 한다.
대부분 새해가 되면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새롭게 마음을 결단합니다. 특히 성결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이 되리라” 고백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힘쓰며, 하루에 성경을 한 장 이상 읽고 성구를 외우며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고자 하지요. 이렇게 연초에 결심하고 고백한 것을 변개치 않으며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전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며 사람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피조물인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속이려 합니다. 진실하지 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을 속였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렇습니다(행 5장). 그들은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지요. 하지만 욕심이 틈타자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던 재산 중 일부를 감추고 사도들 앞에 내놓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책망합니다.
성령을 속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으며, 하나님의 종을 속이는 것 또한 하나님을 속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 베드로를 속였으므로 결국 혼이 떠나 죽고 말았지요.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거짓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으면서 사모하는 척하고, 믿음이 없으면서 있는 척 외식하지요. 그러다가 남의 눈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까지 속이게 됩니다. 자신이 외식하고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충성하는 일꾼이라고 착각하지요.
이 외에도 자기 공적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 나라에 무익한 일을 추진하기도 하고, 누가 지켜볼 때는 성실하게 하고 혼자 있을 때는 불성실하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충성함으로 진실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를 섬기기 위해서는 내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들여 희생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아무리 상대에게 많은 것을 주고 희생해 주었어도 먼저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지 못하면 빛을 발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직원에게 어떤 일을 부탁했더니 열심히 일은 하는데 표정이 딱딱하고 무뚝뚝하다면 어떻겠습니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다음에 일을 부탁하기가 망설여질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아무리 일을 잘해도 “섬기며 일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무섭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지요. 따라서 자신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까지 섬김의 기준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서로 간에 얼마나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는 여러 부서 사람들이 함께 쓰는 화장실이나 복도, 계단 등의 공용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리 화장실이 지저분해도 ‘내 업무가 아니니까’ 하고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치 나의 일처럼 깨끗이 청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같은 부서 안에서도 누가 아침에 일찍 와서 책상을 닦아 주는지, 쓰레기통을 비우며 청소를 도와주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지 낱낱이 지켜보고 계시지요.
또한 자신의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불편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업무도 아닌데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나는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많은데, 이런 사소한 일들은 업무가 적은 사람들이나 직분이 낮은 사람들이 해 줘야 하지 않나?’ 하면서 힘들어하지요.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일했다면 비록 행함으로는 섬겼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상급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일을 해서 결과만 내면 인정을 받지만, 주 안에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행할 때 상급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받는 만큼 자기의 업무만 하면 되지만, 주 안에서는 보직에 해당되는 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하나님의 일이 모두 자신의 업무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씀씀이를 넓혀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어야 하지요.
세상에서는 낮은 사람이 섬기고 높은 사람이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행위적으로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섬길 때 이 땅에서도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천국에서도 큰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3.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행함이란 ‘하나님 말씀을 흘려버리지 않고 지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말씀했습니다.
처음부터 진리대로만 행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쉼 없이 노력해 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보시고 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다소 부족하다 할지라도 순종하여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다듬어 일꾼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대개 처음 사명을 받았을 때는 사명 감당을 위해서 반드시 성결되리라 다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직분이 높아지면서 마음의 할례에 대한 간절함이 식어지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진리를 지식으로만 알고 행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악을 덮어 놓고 절제하므로 크게 비진리를 행하거나 화평을 깨는 일은 없습니다. 본인이 할 일은 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잘하고 있다 생각하지요.
혹여 자신은 이러한 모습이 있지 않나 항상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배나 기도회에 습관적으로 참석하거나 마지못해 앉아 있지는 않는지요? 그 상태가 지속되면 신앙이 정체되어 성령의 충만함이 식고, 자칫 구원받기 힘든 육체의 일까지 행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하여 첫사랑으로 충만할 때는 하나님 나라에 열심히 충성 봉사합니다. 예배나 기도회에 늦지 않기 위해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사모함으로 단숨에 달려오지요. 생명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달게 들으며 하나라도 깨우치고 변화되기 위해 금식하며 불같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멈춘다면 영적인 발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행군을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고 진실한 행함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누가복음 5장 38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묵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고 새롭게 변화되어 진실한 마음과 행함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창대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2021-12-31
제53과팔복(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0~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5:10~12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10 | 참고 말씀: 마가복음 10:30
교육목표 : 주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늘의 큰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 핍박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복이라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주와 그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에 대해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1.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선과 빛을 좇아 살아갈 때 받는 핍박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애매히 핍박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 것일까요? 이는 물과 기름이 하나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빛에 속합니다(요일 1:5).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주인은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엡 6:12).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빛의 자녀들을 싫어하지요. 빛을 비추면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빛이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아질수록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영역이 줄어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은 자기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을 주관하여, 빛에 속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 주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시작하면 여러 모양으로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친구들과 만나면 술도 마시고 비진리의 말과 행동으로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술도 끊고 거룩하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지요.
주일에 직장에서 친목회가 있으면, 주일을 지키는 성도들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회사생활 하면 승진하기 어렵다.”며 압박을 가하지요.
복음화 되지 않은 가정에서는 제사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또 남들은 적당히 속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대로 정직하게 행하니, 속여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윗사람이 있을 때는 섬기고 비위를 맞추다가도, 자리를 비우면 험담하고 자기 유익에 따라 잘 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진실히 행하고 자기의 유익에 따라 변하지 않지요.
처음에는 이런 경우들이 핍박거리가 될 수 있지만, 결국은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을 봅니다. 선과 사랑으로 승리해 가기 때문에 핍박이 물러갈 수밖에 없지요. 핍박을 이겨 나감으로 믿음이 더 장성해 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니 영육 간에 축복인 것입니다.
2) 자신의 잘못이나 지혜가 부족해서 핍박받는 경우
의를 행함으로 핍박받는 경우 외에 지혜가 부족하거나 본인의 잘못으로 핍박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온 집에 충성하지 못해서, 주변에 덕이 되지 못해 욕을 먹거나 어려움을 겪는 일도 발생하지요.
가령, 여 성도님이 게을러서 집 안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고, 교회 일로 바쁘다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집 안을 돌보지 못한 것이 문제인데 정작 핍박받은 당사자는 하나님 일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도 교회 간다면서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실수를 잘하며 불성실합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전도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요. “교회 갈 시간에 자기 일이나 잘하지.”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면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승리하시되, 혹여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면, 신속히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이나 불법으로 인해 받는 핍박은 복이나 상급이 될 수 없지만,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천국을 소유하는 길이기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믿음이 장성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크게 받아갈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과,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전자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천국을, 후자는 각 사람이 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은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진리로 인내함으로 어린아이 믿음에서 점차 청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으로 장성해 가기 때문이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속 깊이 있는 비진리까지도 발견하여 버리니, 온유함과 화평함을 이루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의를 행하여 마음을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주를 위해 받은 핍박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의를 온전히 이루었다 해도 모든 핍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위해 받는 핍박’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꾼 된 사람들이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시지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흠도 티도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의 형벌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주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고 생명까지 드렸던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담대히 고백하였습니다(딤후 4:7~8).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핍박받은 사람들의 충성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천국에서 큰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 주시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은 물론, 밝히 교통해 주시며 따르는 기사와 표적으로 함께하시지요.
그러므로 혹여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장차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을 바라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고린도전서 15:41)
- 해의 영광 : 아비들의 믿음으로 3천층 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달의 영광 : 청년들의 믿음으로 2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 아이들의 믿음으로 1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이처럼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은 각각 큰 차이가 난다.
또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의 크기나 밝기가 다르듯이 별마다 영광이 다르다.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으므로 상급이 없고 영광이라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교육목표 : 주님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늘의 큰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이 세상에 핍박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이 참되고 영원한 복이라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는 주와 그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가족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에 대해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1.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진리와 선과 빛을 좇아 살아갈 때 받는 핍박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을 당하거나 애매히 핍박을 받기도 하지요.
그러면 왜 주님을 믿으면 고난을 받는 것일까요? 이는 물과 기름이 하나 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은 영적으로 빛에 속합니다(요일 1:5).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주인은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입니다(엡 6:12).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은 빛의 자녀들을 싫어하지요. 빛을 비추면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빛이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많아질수록 어두움의 주관자인 원수 마귀 사단의 영역이 줄어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은 자기에게 속한 세상 사람들을 주관하여, 빛에 속한 성도들을 핍박함으로 주를 믿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2.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경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기 시작하면 여러 모양으로 핍박이 오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친구들과 만나면 술도 마시고 비진리의 말과 행동으로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술도 끊고 거룩하게 행동하려고 하니까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싫은 소리를 듣게 되지요.
주일에 직장에서 친목회가 있으면, 주일을 지키는 성도들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회사생활 하면 승진하기 어렵다.”며 압박을 가하지요.
복음화 되지 않은 가정에서는 제사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핍박을 합니다. 또 남들은 적당히 속이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대로 정직하게 행하니, 속여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싫어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윗사람이 있을 때는 섬기고 비위를 맞추다가도, 자리를 비우면 험담하고 자기 유익에 따라 잘 변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진실히 행하고 자기의 유익에 따라 변하지 않지요.
처음에는 이런 경우들이 핍박거리가 될 수 있지만, 결국은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을 봅니다. 선과 사랑으로 승리해 가기 때문에 핍박이 물러갈 수밖에 없지요. 핍박을 이겨 나감으로 믿음이 더 장성해 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니 영육 간에 축복인 것입니다.
2) 자신의 잘못이나 지혜가 부족해서 핍박받는 경우
의를 행함으로 핍박받는 경우 외에 지혜가 부족하거나 본인의 잘못으로 핍박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온 집에 충성하지 못해서, 주변에 덕이 되지 못해 욕을 먹거나 어려움을 겪는 일도 발생하지요.
가령, 여 성도님이 게을러서 집 안 청소나 식사 준비를 해 놓지 않고, 교회 일로 바쁘다면 핍박을 받게 됩니다. 이때 집 안을 돌보지 못한 것이 문제인데 정작 핍박받은 당사자는 하나님 일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직장에서도 교회 간다면서 자신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실수를 잘하며 불성실합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전도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요. “교회 갈 시간에 자기 일이나 잘하지.”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면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승리하시되, 혹여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다면, 신속히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악이나 불법으로 인해 받는 핍박은 복이나 상급이 될 수 없지만,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천국을 소유하는 길이기에 복되다 하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믿음이 장성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크게 받아갈 뿐만 아니라, 더 좋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팔복의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과, 여덟 번째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전자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천국을, 후자는 각 사람이 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은 만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진리로 인내함으로 어린아이 믿음에서 점차 청년의 믿음으로, 아비의 믿음으로 장성해 가기 때문이지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속 깊이 있는 비진리까지도 발견하여 버리니, 온유함과 화평함을 이루며,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1절에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의를 행하여 마음을 변화시켰느냐에 따라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4. 주를 위해 받은 핍박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의를 온전히 이루었다 해도 모든 핍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를 위해 받는 핍박’ 곧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꾼 된 사람들이 받는 핍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시지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흠도 티도 없는 분이셨지만 죄인들의 형벌을 친히 당하셨습니다.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요.
주님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고 생명까지 드렸던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담대히 고백하였습니다(딤후 4:7~8).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핍박받은 사람들의 충성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천국에서 큰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 주시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 주십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은 물론, 밝히 교통해 주시며 따르는 기사와 표적으로 함께하시지요.
그러므로 혹여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다 할지라도, 장차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급을 바라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2.‘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천국’은 어떻게 다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고린도전서 15:41)
- 해의 영광 : 아비들의 믿음으로 3천층 또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달의 영광 : 청년들의 믿음으로 2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 별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 아이들의 믿음으로 1천층에 들어간 사람의 영광
이처럼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은 각각 큰 차이가 난다.
또한 밤하늘의 무수한 별의 크기나 밝기가 다르듯이 별마다 영광이 다르다.
낙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행한 일이 없으므로 상급이 없고 영광이라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2021-12-24
제52과예수 그리스도
빌립보서 2:8
읽을말씀 : 빌립보서 2:8 | 외울말씀 : 빌립보서 2:8 | 참고 말씀: 베드로전서 2:22, 마태복음 12:19~20
교육목표 :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행함을 닮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탄절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신 복된 날입니다. 그 선물은 바로 ‘구원의 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희생시키심으로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살펴볼까요?
1. 고운 분이셨습니다.
모양이 거칠지 않고 모나지 않은 것, 부드러운 것을 ‘곱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행동, 말씨, 모든 것이 고우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에 예수님의 모습을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라고 표현했습니다(사 42:2).
예수님의 말씀은 지혜롭고 그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놀라운 권능이 있어서 병자에게 손을 얹기만 하셔도, 혹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치료받았고 소경, 귀머거리, 중풍병자 등 중증 환자들이 온전해졌지요. 거친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가 몰려들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거나 칭송받기 원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지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자 길을 걸을 때도 조용히 걸으셨고 요란하게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큰 권세와 능력을 가졌다고 사람들을 제압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남을 해치는 일은 상상도 못하셨습니다. 소자 한 사람을 대하더라도 섬기는 자세로 대하셨고, 오히려 낮아져서 피조물인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시하는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같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틈만 나면 올무를 놓아 잡으려 하고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물론 때로는 책망을 하셨지만 이는 그들과 싸워 이겨서 억지로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진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신 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을 법한 영혼들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신 분이 그 누구에게 거친 말이나 행동을 하셨겠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과 행실이 참으로 거룩하고 온전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면 자연히 고운 말과 행실이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기 원하고, 한마디 말도 믿음의 말, 선한 말만 하려고 하지요. 또 누구를 대하든지 자신의 말과 행실을 꼼꼼히 살핍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기 위해서입니다.
2. 자기를 철저히 희생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날부터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는 날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영혼들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생들을 속량하시려고 ‘짐승의 우리’에서 나셨습니다. 또 이런 인생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시려고 ‘구유’에 누이셨지요.
인생들을 가난의 저주에서 풀어 주려고 부요하신 분임에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모든 질병과 연약함을 온전케 하시려고 채찍에 온몸이 상하셨습니다. 마침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예수님은 무엇을 넉넉하게 누릴 권한도, 자유로이 살 권리도 다 포기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에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영혼들만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셨지요. 빌립보서 2장 8절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신 대로입니다.
이 희생은 ‘내가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니까’ 이런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내가 이렇게 희생했으니 인생들이 내 뜻과 내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군림하고 높임 받기 위해 계산적으로 희생하신 것도 아니었지요. 예수님의 희생은 오직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 다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또 가장 귀한 것 바로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으나 죽기까지 너희를 사랑하노라.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희생을 통해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크고 깊은 사랑을 전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이 희생은 예수님께서 어찌하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픈 마음을 표현하신 사랑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예수님은 그 귀하신 몸을 제물 삼아 인생들에게 구원과 천국을 주시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희생으로 인해 결국 우리에게 구원의 길, 천국 가는 길이 열렸지요. 히브리서 10장 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마음에는 오직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희생을 떠올릴 때 과연 무엇을 느끼십니까? 주님의 희생은 의무가 아니라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으로 느낀다면, 여러분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항상 간구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결이나 사랑을 구하실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을 온전히 닮은 분이셨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바쁜 나날을 보내시면서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셨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케 하여 주시기를, 영혼들을 깨우쳐 주시고 제자들을 붙들어 주시기를 늘 간구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응답이 주어진다는 영계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기에 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더 온전히 헤아려 이루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라셨지요.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따르는 행함입니다. 어떤 분들은 목자를 사랑해서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물론 이 또한 하나님을 사랑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누구 눈치 보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스스로가 하는 것입니다.
뜻깊은 성탄절을 맞아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 구원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심에 감사합니다.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아버지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오직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라는 마음으로 간절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 주님, 목자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마음이 간절하다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삶 가운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결을 위해, 사명 감당을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결단한 바를 이뤄 가는 과정에서 혹여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만난다 해도, ‘역시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하고 낙심하기보다 ‘우리 예수님도 늘 기도하셨지. 나는 더욱 기도해야겠구나.’ 하며 더 간절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영을 향해 달려가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더 신속히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첫째, ( )
둘째, 자기를 철저히 희생하는 분이셨습니다.
셋째,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란?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하며,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서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는 것은, 만의 하나라도 회생 가능한 영혼이 있다면 어찌하든 살 길을 열어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나타낸다.
교육목표 :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행함을 닮는 성도가 되게 한다.
성탄절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선물을 주신 복된 날입니다. 그 선물은 바로 ‘구원의 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희생시키심으로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살펴볼까요?
1. 고운 분이셨습니다.
모양이 거칠지 않고 모나지 않은 것, 부드러운 것을 ‘곱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행동, 말씨, 모든 것이 고우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수백 년 전에 예수님의 모습을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라고 표현했습니다(사 42:2).
예수님의 말씀은 지혜롭고 그 권세가 대단했습니다. 놀라운 권능이 있어서 병자에게 손을 얹기만 하셔도, 혹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치료받았고 소경, 귀머거리, 중풍병자 등 중증 환자들이 온전해졌지요. 거친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큰 무리가 몰려들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전혀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거나 칭송받기 원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지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자 길을 걸을 때도 조용히 걸으셨고 요란하게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큰 권세와 능력을 가졌다고 사람들을 제압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거나 남을 해치는 일은 상상도 못하셨습니다. 소자 한 사람을 대하더라도 섬기는 자세로 대하셨고, 오히려 낮아져서 피조물인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주시하는 이들 중에는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같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부류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틈만 나면 올무를 놓아 잡으려 하고 깎아내리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까지도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물론 때로는 책망을 하셨지만 이는 그들과 싸워 이겨서 억지로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진리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신 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을 법한 영혼들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신 분이 그 누구에게 거친 말이나 행동을 하셨겠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과 행실이 참으로 거룩하고 온전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운 마음을 지니면 자연히 고운 말과 행실이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하기 원하고, 한마디 말도 믿음의 말, 선한 말만 하려고 하지요. 또 누구를 대하든지 자신의 말과 행실을 꼼꼼히 살핍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기 위해서입니다.
2. 자기를 철저히 희생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신 날부터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는 날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영혼들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생들을 속량하시려고 ‘짐승의 우리’에서 나셨습니다. 또 이런 인생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시려고 ‘구유’에 누이셨지요.
인생들을 가난의 저주에서 풀어 주려고 부요하신 분임에도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모든 질병과 연약함을 온전케 하시려고 채찍에 온몸이 상하셨습니다. 마침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요.
예수님은 무엇을 넉넉하게 누릴 권한도, 자유로이 살 권리도 다 포기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에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영혼들만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셨지요. 빌립보서 2장 8절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신 대로입니다.
이 희생은 ‘내가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니까’ 이런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내가 이렇게 희생했으니 인생들이 내 뜻과 내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군림하고 높임 받기 위해 계산적으로 희생하신 것도 아니었지요. 예수님의 희생은 오직 순전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늘 영광 다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또 가장 귀한 것 바로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으나 죽기까지 너희를 사랑하노라.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기를 원하노라.” 예수님은 희생을 통해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크고 깊은 사랑을 전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이 희생은 예수님께서 어찌하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픈 마음을 표현하신 사랑의 행함이기도 했지요. 예수님은 그 귀하신 몸을 제물 삼아 인생들에게 구원과 천국을 주시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희생으로 인해 결국 우리에게 구원의 길, 천국 가는 길이 열렸지요. 히브리서 10장 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마음에는 오직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희생을 떠올릴 때 과연 무엇을 느끼십니까? 주님의 희생은 의무가 아니라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이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으로 느낀다면, 여러분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항상 간구하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결이나 사랑을 구하실 필요가 없을 만큼 하나님을 온전히 닮은 분이셨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바쁜 나날을 보내시면서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셨지요.
구세주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케 하여 주시기를, 영혼들을 깨우쳐 주시고 제자들을 붙들어 주시기를 늘 간구하셨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응답이 주어진다는 영계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기에 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더 온전히 헤아려 이루어 드리기를 간절히 바라셨지요.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따르는 행함입니다. 어떤 분들은 목자를 사랑해서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물론 이 또한 하나님을 사랑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누구 눈치 보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스스로가 하는 것입니다.
뜻깊은 성탄절을 맞아 여러분은 “아버지 하나님, 구원해 주시고 변화시켜 주심에 감사합니다.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아버지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와 오직 하나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라는 마음으로 간절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 주님, 목자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마음이 간절하다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삶 가운데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결을 위해, 사명 감당을 위해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결단한 바를 이뤄 가는 과정에서 혹여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만난다 해도, ‘역시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하고 낙심하기보다 ‘우리 예수님도 늘 기도하셨지. 나는 더욱 기도해야겠구나.’ 하며 더 간절히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영을 향해 달려가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더 신속히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첫째, ( )
둘째, 자기를 철저히 희생하는 분이셨습니다.
셋째,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란?
‘상한 갈대’란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하며,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심히 악으로 물들어서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는 것은, 만의 하나라도 회생 가능한 영혼이 있다면 어찌하든 살 길을 열어 주시려는 주님의 사랑의 마음을 나타낸다.
2021-12-17
제51과팔복(7)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9
읽을말씀 : 마태복음 5:9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9 | 참고 말씀: 히브리서 12:14, 로마서 6:16
교육목표 : 자신을 희생하여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을 닮아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화평’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례히 행치 않고, 설령 내가 옳다 하더라도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에게 맞추어 주지요. 또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으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해 주고 맞추어 주며, 편벽됨이 없고 진리 안에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되 생명까지 내어 주는 것이 영적인 화평이지요.
1. 자신을 희생하여 화평케 하신 예수님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혹자는 “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날에 한번 노예가 되면 자손 대대로 노예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여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진리를 알면 악한 의도로 화평을 깨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평을 깰 수 있습니다.
이는 평소에 내가 상대에게 맞추어 주는가, 아니면 상대가 나에게 맞추어 주는가를 점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반면 남편은 짜게 먹습니다. 이때 아내가 싱겁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고만 한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서로 화평하려면 자신도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조금씩 개선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는가?’, ‘내 생각이 진리라는 이유로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2.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져 화평을 이루게 되지요. 그런데 죄를 사함 받았는데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받아 강건해지고, 물질의 어려움을 해결받아 부요해지는 등 마음의 소원들을 응답받게 되지요.
2)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이 있으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악이 발동하므로 자신과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시기, 질투, 교만, 다툼, 간음 등 마음에 악이 있으면 참 평안을 누릴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니 마음이 곤고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히 12:14).
어떤 사람은 악해서 화평을 깨기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므로 화평을 깨기도 합니다.
가령,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도 본인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와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쪽을 택했으니까’ 하며 계획대로 추진해 갑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떠실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열심은 기특하지만 실족하고 상처받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연약한 믿음도 고려하여 화평을 좇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깨면서 많은 일을 이루는 것보다, 적은 일이라도 화평함 속에 이루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3.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축복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지 남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모든 자녀를 지칭합니다. 단순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납니다.
겨우 구원받을 만한 ‘자녀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아이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또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청년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아비들의 믿음’도 있지요.
‘화평케 하는 자’란 아비들의 믿음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악은 모양도 없고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이룬 자녀, 하나님의 마음을 쏙 빼닮은 자녀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축복받으며 하나님의 권능도 받아 원수 마귀가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로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참 아들로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쏙 닮아서 그분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 영광과 존귀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수종을 받으며, 수많은 천국 백성에게 세세토록 칭송을 받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웅장한 황금보석 집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존귀와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아가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닮아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며 모든 사람과도 화평을 이루어 영원한 새 예루살렘에서 큰 영광 중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써 보세요.
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② 자기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③ 모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2.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비들의 믿음(요한일서 2:14)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까지 아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근본을 알았기에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무수한 비밀을 계시받아 모세 오경을 기록했다.
아브라함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교육목표 : 자신을 희생하여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신 예수님을 닮아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화평’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마음이기 때문에 무례히 행치 않고, 설령 내가 옳다 하더라도 비진리가 아니면 상대에게 맞추어 주지요. 또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좇으며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먼저 생각해 주고 맞추어 주며, 편벽됨이 없고 진리 안에서 양면성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되 생명까지 내어 주는 것이 영적인 화평이지요.
1. 자신을 희생하여 화평케 하신 예수님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막히게 되었습니다.
때가 이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모든 인류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혹자는 “왜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날에 한번 노예가 되면 자손 대대로 노예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대로 첫 사람 아담이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여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평케 하는 직책을 감당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진리를 알면 악한 의도로 화평을 깨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평을 깰 수 있습니다.
이는 평소에 내가 상대에게 맞추어 주는가, 아니면 상대가 나에게 맞추어 주는가를 점검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 반면 남편은 짜게 먹습니다. 이때 아내가 싱겁게 먹는 것이 건강에 좋으니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고만 한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서로 화평하려면 자신도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조금씩 개선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상대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내 유익을 먼저 구하지 않는가?’, ‘내 생각이 진리라는 이유로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이 얼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2.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1)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사이에 죄의 담으로 가로막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가로막혔던 죄의 담이 허물어져 화평을 이루게 되지요. 그런데 죄를 사함 받았는데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질병을 치료받아 강건해지고, 물질의 어려움을 해결받아 부요해지는 등 마음의 소원들을 응답받게 되지요.
2)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등 악이 있으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악이 발동하므로 자신과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받는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시기, 질투, 교만, 다툼, 간음 등 마음에 악이 있으면 참 평안을 누릴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니 마음이 곤고해질 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벗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합니다.
3)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과는 화평을 이루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히 12:14).
어떤 사람은 악해서 화평을 깨기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므로 화평을 깨기도 합니다.
가령,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도 본인은 모릅니다. 반대 의견이 나와도 ‘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쪽을 택했으니까’ 하며 계획대로 추진해 갑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떠실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열심은 기특하지만 실족하고 상처받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연약한 믿음도 고려하여 화평을 좇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화평을 깨면서 많은 일을 이루는 것보다, 적은 일이라도 화평함 속에 이루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3.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축복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지 남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모든 자녀를 지칭합니다. 단순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믿음의 분량은 각 사람마다 차이가 납니다.
겨우 구원받을 만한 ‘자녀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이제 막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아이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또 원수 마귀 사단을 물리칠 수 있는 ‘청년들의 믿음’이 있는가 하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으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아비들의 믿음’도 있지요.
‘화평케 하는 자’란 아비들의 믿음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를 말합니다. 악은 모양도 없고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이룬 자녀, 하나님의 마음을 쏙 빼닮은 자녀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축복받으며 하나님의 권능도 받아 원수 마귀가 두려워 떨며 물러갑니다.
뿐만 아니라 영화로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참 아들로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쏙 닮아서 그분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 영광과 존귀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천군 천사들의 호위와 수종을 받으며, 수많은 천국 백성에게 세세토록 칭송을 받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웅장한 황금보석 집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존귀와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아가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닮아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며 모든 사람과도 화평을 이루어 영원한 새 예루살렘에서 큰 영광 중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한 3가지 조건을 써 보세요.
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② 자기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③ 모든 ( )과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2.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아비들의 믿음(요한일서 2:14)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까지 아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닫고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차원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근본을 알았기에 천지 창조를 비롯하여 무수한 비밀을 계시받아 모세 오경을 기록했다.
아브라함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단계’에 이르렀기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었다.
2021-12-10
제50과팔복(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8
읽을말씀 : 마태복음 5:8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8 | 참고 말씀: 요한일서 3:15, 마태복음 5:28
교육목표 : 육의 행실과 마음의 죄성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뵐 수 있는 성결한 성도가 되게 한다.
‘청결’의 사전적 의미는 ‘맑고 깨끗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죄악이 없어서 성결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악이 없고 깨끗한 마음이 될 때라야 하나님을 뵐 수 있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청결한 사람과 악독한 사람
마음이 청결하여 복을 받은 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 여인으로 자녀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긴 효부였지요.
룻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낯선 땅에서 당장 거할 집도 넉넉히 먹을 양식도 없었고, 살아갈 일이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극진히 섬겼지요.
이처럼 룻이 선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부요하고 선한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다윗왕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악독하여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까지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에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그들은 외식주의자들로서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일례로, 장로의 유전 중에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부정하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장로의 유전을 범한다며 시비하지요. 이때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말씀하십니다.
또한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셨습니다(마 23:27). 무덤은 시체를 보관하기에 아무리 단장해도 속은 부패하여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마음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기에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지요.
2. 마음의 청결을 이루려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는 물론 마음속 죄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고(벧전 1:16),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투고 혈기 내던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낮아지고 섬기며, 미워하던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지요.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진리로 채워 가는 만큼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옷에 오물이 묻었는데 “깨끗이 빨아야지.”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옷을 빨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마음의 더러움을 발견했다면, 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청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
여기서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진리의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란 비진리의 마음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우리 마음 안에는 죄를 행하고자 하는 비진리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결단해 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이 많지요. 이것들이 해로운 줄 알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능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말씀대로 행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변화될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결국 모든 죄를 벗고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습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사기 13장 22절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만 보고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였고,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셨을 때에도 백성들은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뵈었지요(출 20:18~19).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대면하여 보기도 하며 친히 동행하기까지 한 것일까요?
요한삼서 1장 11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한 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지만,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우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천국 중에서도 3천층 이상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하나님을 가까이 뵈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이나 1천층, 2천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주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지요. 얼마큼 성결되었느냐에 따라 각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빛이 다르고, 들어가는 처소 역시 달라집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은 단순히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모든 분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언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고전 12:9~11)을 받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육의 행실은 물론 마음의 더러움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옵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 )이 없어서 ( )된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마태복음 5장 8절을 쓰고 외워 봅시다.
“마음이 ( )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 볼 것임이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에녹 선지자(창세기 5:21~24)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이다. 그는 모나지 않고 순수하며 착한 성품을 지녔다.
하나님에 대해, 영의 세계에 대해 늘 궁구했기에 무엇을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에녹 선지자는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교통하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교육목표 : 육의 행실과 마음의 죄성을 온전히 벗어 버림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뵐 수 있는 성결한 성도가 되게 한다.
‘청결’의 사전적 의미는 ‘맑고 깨끗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죄악이 없어서 성결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악이 없고 깨끗한 마음이 될 때라야 하나님을 뵐 수 있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마음이 청결한 사람과 악독한 사람
마음이 청결하여 복을 받은 룻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룻은 모압 지방 여인으로 자녀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긴 효부였지요.
룻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낯선 땅에서 당장 거할 집도 넉넉히 먹을 양식도 없었고, 살아갈 일이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극진히 섬겼지요.
이처럼 룻이 선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였기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부요하고 선한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다윗왕의 증조모로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악독하여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율법은 물론 장로의 유전까지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자신을 절제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기에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그들은 외식주의자들로서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였습니다.
일례로, 장로의 유전 중에는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부정하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장로의 유전을 범한다며 시비하지요. 이때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말씀하십니다.
또한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셨습니다(마 23:27). 무덤은 시체를 보관하기에 아무리 단장해도 속은 부패하여 썩은 냄새만 진동할 뿐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마음은 온갖 죄악으로 가득했기에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셨지요.
2. 마음의 청결을 이루려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는 물론 마음속 죄까지도 다 벗어 버리고 청결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고(벧전 1:16),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투고 혈기 내던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낮아지고 섬기며, 미워하던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지요. 우리가 마음의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진리로 채워 가는 만큼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옷에 오물이 묻었는데 “깨끗이 빨아야지.”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옷을 빨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마음의 더러움을 발견했다면, 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의 청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의 힘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2~24)
여기서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진리의 마음입니다. 반면에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란 비진리의 마음을 뜻하지요. 다시 말해 우리 마음 안에는 죄를 행하고자 하는 비진리 속성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버릴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결단해 보지만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이 많지요. 이것들이 해로운 줄 알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술과 담배를 단번에 끊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능히 버릴 수 있습니다.
이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두 번 말씀대로 행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변화될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 결국 모든 죄를 벗고 청결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3.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복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습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사기 13장 22절에 보면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만 보고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였고,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3장 11절에는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임재하셨을 때에도 백성들은 감히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뵈었지요(출 20:18~19).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대면하여 보기도 하며 친히 동행하기까지 한 것일까요?
요한삼서 1장 11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한 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 있지만, 죄악으로 마음이 더러우면 하나님을 뵈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면 천국 중에서도 3천층 이상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하나님을 가까이 뵈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원이나 1천층, 2천층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주님을 가까이 뵙지 못하지요. 얼마큼 성결되었느냐에 따라 각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빛이 다르고, 들어가는 처소 역시 달라집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은 단순히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모든 분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언이나 각종 성령의 은사들(고전 12:9~11)을 받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육의 행실은 물론 마음의 더러움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뵈옵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바로 마음에 ( )이 없어서 ( )된 것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여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마태복음 5장 8절을 쓰고 외워 봅시다.
“마음이 ( )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 ) 볼 것임이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에녹 선지자(창세기 5:21~24)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이다. 그는 모나지 않고 순수하며 착한 성품을 지녔다.
하나님에 대해, 영의 세계에 대해 늘 궁구했기에 무엇을 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으려 했다.
예를 들어,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꼈다.
에녹 선지자는 강하거나 자기를 주장하는 성정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찾을 때는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적극적으로 교통하며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