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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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4
제5과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리라
마 13:49-50
읽을말씀 : 마 13:49-50 | 외울말씀 : 마 13:49-50
교육목표 :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과 악인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하여 영과 육을 구분함으로 육을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야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듯이 주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후에는 악을 버리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49-50을 통하여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과 악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혹여 내가 의인인줄 알았는데 악인은 아닌가?' 점검하면서 영과 육을 구분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의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온 분이나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분이라 할지라도 '내 속에도 이런 악이 있었구나!' 깨우치며 철저히 육을 발견하여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 결코 소인배의 행동을 하지 않는 의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결코 소인배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과 우리아의 경우를 살펴보지요. 어느 날 저녁, 다윗 왕은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이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이 동하여 데려와 동침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드러날까봐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 쉬었다가 전쟁터로 가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전쟁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니 혼자 집에 가서 편히 쉴 수 없다는 이유로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왕의 신복들과 더불어 잠을 잤지요.
다윗 왕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우리아 편으로 전쟁터에 있는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었지요. 우리아를 전선의 최전방에 앞세워 전사하도록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만한 중심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으니 이를 감추기 위해 소인배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아는 왕을 섬기는 신하로서 도리를 다해 충성하고자 육적인 정과 욕심을 끊고 마음을 지킴으로써 대인의 모습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아가 다윗 왕보다 낫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 분야에 있어 죄를 범하니 그 죄로 인해 다윗 왕이 소인배의 마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죄가 없으면 대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그 뜻을 크게 이룰 수 있습니다. 진리로 비춰 보아 내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으면, 즉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살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3:21-22).
결국 다윗 왕은 자신의 죄에 대한 보응으로 엄청난 연단을 받게 됩니다. 밧세바를 통해 얻은 아들이 죽고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떠나 쫓겨다니며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죽어 가는 등 철저한 연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큰사람일수록 티끌 같은 죄라도 결단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연단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큰사람에게는 티끌 같은 죄라도 무서운 것이요, 아주 작은 허물이라도 괴로운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소인배의 여러 가지 유형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무고한 백성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악한 궤계를 꾸몄지요. 바로 비류들을 거짓 증인으로 세워 나봇에게 누명을 씌운 다음 돌에 쳐 죽이게 하였던 것입니다.
비류란 악한 일을 일삼는 무뢰한이나 깡패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받고 거짓 증인이 되어 주기도 하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높은 직책의 사람 등과 가까이 하려고 힘쓰며 그들의 모임에 함께하여 은근히 자기를 과시하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르호보암 왕의 친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왕을 등에 업고 모든 것을 함께 누리며 즐거움을 취하고자 했던 이들은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에게 나아와 과중한 세금과 노역을 경감시켜 주기를 청할 때에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라는 악한 말로 대응하도록 사주합니다(왕상 12:10-11). 그 결과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나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비극을 낳고 말았지요.
반면에 대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공직하고 정당하며 자신의 자리를 변함없이 지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자신의 행한 일에 대해 돌아오는 분깃대로 복을 누리며 그 속에서 의의 행동을 취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일터, 사업터 등 각종 조직 안에서 각각 자기의 본분을 알고 맡겨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즉 나와 가까운 사람이 권세나 명예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덕을 입으려 한다거나 더불어 높임을 받으려 해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주인의 명예나 권세를 등에 업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러한 예는 성경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사라의 여종 하갈을 들 수 있습니다. 한낱 몸종에 지나지 않았던 하갈은 주인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함으로 인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으로 인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 행하지 못함으로 결국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복조차 누리지 못한 채 아들과 함께 쫓겨나고 말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이러한 악을 행해서는 아니 되며, 무엇보다 먼저 마음의 변화를 입음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질서와 순리를 좇아 모든 일을 정당하게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큰 인물들의 수하에서 아랫 사람들 간에 "누구 상전이 높으냐" 하며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윗사람에게 심히 누를 끼치는 행동으로 대인의 마음이 아닌 소인의 모습이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윗사람을 섬길 때는 자기 위치 속에서 정도를 좇아 행해야 하며, 소인의 마음으로 유명 인사나 권세가들 사이를 오가면서 함께 높은 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나 권세가 사이에서 그들의 품위를 닮고 교양을 배워 자신을 덧입힌다 해도 그 마음이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영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을 섬기다 보면 말하고 듣고 행하는 모든 것이 자연히 그 사람의 행함을 닮게 됩니다. 그러나 외모와 행함을 닮아 겉으로는 온전한 것 같아도 그 중심이 변화되지 않으면 마음속에 여전히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의인 중에 악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지식이 있고 의인의 행동을 할지라도 그 마음에 의를 이루지 않으면 참된 의인이라 할 수 없으니 항상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 자신에게 소인의 모습이 있다면 신속히 그 마음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3. 의인 중에 악인이라는 증거는 소인배의 행동
그러면 의인 중에 악인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소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욱 대인답게 보이려고 행동하기 때문에 혹 눈에 보기에는 모양새가 좋고 큰사람같이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때에 따라 악함이 드러나게 됨으로 그 결과가 소인배임을 증거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누가 자기에게 해를 끼치거나 감정을 건드리면 용납하지 아니하고 바로 진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 또는 유익에 맞지 않거나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근본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룩한 의인인 체, 온유하고 교양 있는 체했는데 극한 상황이 되면 혈기를 내거나 악을 발함으로 소인배의 그릇됨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성경상에서도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그는 왕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이 백성들의 칭송을 받자 이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근본 마음이 소인이었으므로 사울 왕은 계속해서 악을 행하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지요.
이처럼 악한 사람은 상대에 대해 미움을 갖게 되면 마음에 품고 있다가 계획을 세워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스스로 악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의인인 것처럼 꾸미고 행할지라도 실상은 의인이 아닐 경우, 말씀으로 조명해 보면 낱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의인 중에 악인이란 어떤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경우의 사람은 말이나 행동이나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제삼자가 볼 때 겉모양새는 참으로 좋은 대인의 모습이요, 훌륭한 귀인의 상으로 보여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인들과 함께 오갈 수 있는 관계의 중간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상황 속에서 또 다른 대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고위급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친분을 유지하면서 매개체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대인이나 귀인들과 함께 있으니 본인도 심중에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위치에서 의인과 만나고 함께하는 가운데 자신이 참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자기 계획 속에서 일들을 이루어 내고 그것에 대해 칭찬 듣기를 원하며, 자기의 유익을 좇아 무엇인가 바라는 마음을 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같지만 진정한 의인이 되지 못하며, 삯을 바라는 사람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삯을 바라다가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발하였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바로 그런 예로서, 이런 소인배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은혜를 저버리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의인의 모습과 악인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분별하기 어려운 몇 가지 예를 들었으니 잘 양식삼고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또한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온전한 의인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태복음 7:16-18에 말씀한 대로 아무리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고 거룩해 보일지라도 그 열매가 악하고 추하다면 의인의 옷을 입은 악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소인배의 감정을 벗어 내고 큰마음과 의롭고 진실한 모습으로 참된 의인에 대열에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과 악인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하여 영과 육을 구분함으로 육을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야 사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듯이 주 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후에는 악을 버리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49-50을 통하여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인과 악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혹여 내가 의인인줄 알았는데 악인은 아닌가?' 점검하면서 영과 육을 구분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고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동안 의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온 분이나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는 분이라 할지라도 '내 속에도 이런 악이 있었구나!' 깨우치며 철저히 육을 발견하여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 결코 소인배의 행동을 하지 않는 의인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은 결코 소인배의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과 우리아의 경우를 살펴보지요. 어느 날 저녁, 다윗 왕은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이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이 동하여 데려와 동침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드러날까봐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집으로 돌아가 쉬었다가 전쟁터로 가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전쟁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니 혼자 집에 가서 편히 쉴 수 없다는 이유로 집으로 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왕의 신복들과 더불어 잠을 잤지요.
다윗 왕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우리아 편으로 전쟁터에 있는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었지요. 우리아를 전선의 최전방에 앞세워 전사하도록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만한 중심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으니 이를 감추기 위해 소인배의 모습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아는 왕을 섬기는 신하로서 도리를 다해 충성하고자 육적인 정과 욕심을 끊고 마음을 지킴으로써 대인의 모습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아가 다윗 왕보다 낫다는 것은 아닙니다. 한 분야에 있어 죄를 범하니 그 죄로 인해 다윗 왕이 소인배의 마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죄가 없으면 대인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그 뜻을 크게 이룰 수 있습니다. 진리로 비춰 보아 내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으면, 즉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살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3:21-22).
결국 다윗 왕은 자신의 죄에 대한 보응으로 엄청난 연단을 받게 됩니다. 밧세바를 통해 얻은 아들이 죽고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떠나 쫓겨다니며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죽어 가는 등 철저한 연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큰사람일수록 티끌 같은 죄라도 결단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연단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큰사람에게는 티끌 같은 죄라도 무서운 것이요, 아주 작은 허물이라도 괴로운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소인배의 여러 가지 유형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무고한 백성에 대해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사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악한 궤계를 꾸몄지요. 바로 비류들을 거짓 증인으로 세워 나봇에게 누명을 씌운 다음 돌에 쳐 죽이게 하였던 것입니다.
비류란 악한 일을 일삼는 무뢰한이나 깡패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받고 거짓 증인이 되어 주기도 하고 자기를 드러내고자 높은 직책의 사람 등과 가까이 하려고 힘쓰며 그들의 모임에 함께하여 은근히 자기를 과시하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르호보암 왕의 친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왕을 등에 업고 모든 것을 함께 누리며 즐거움을 취하고자 했던 이들은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에게 나아와 과중한 세금과 노역을 경감시켜 주기를 청할 때에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겠다'라는 악한 말로 대응하도록 사주합니다(왕상 12:10-11). 그 결과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나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비극을 낳고 말았지요.
반면에 대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모든 크고 작은 일에 공직하고 정당하며 자신의 자리를 변함없이 지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또한 자신의 행한 일에 대해 돌아오는 분깃대로 복을 누리며 그 속에서 의의 행동을 취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일터, 사업터 등 각종 조직 안에서 각각 자기의 본분을 알고 맡겨진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즉 나와 가까운 사람이 권세나 명예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덕을 입으려 한다거나 더불어 높임을 받으려 해서는 결코 아니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도 주인의 명예나 권세를 등에 업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지요. 이러한 예는 성경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사라의 여종 하갈을 들 수 있습니다. 한낱 몸종에 지나지 않았던 하갈은 주인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함으로 인해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여주인 사라를 멸시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만으로 인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 행하지 못함으로 결국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복조차 누리지 못한 채 아들과 함께 쫓겨나고 말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결코 이러한 악을 행해서는 아니 되며, 무엇보다 먼저 마음의 변화를 입음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질서와 순리를 좇아 모든 일을 정당하게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큰 인물들의 수하에서 아랫 사람들 간에 "누구 상전이 높으냐" 하며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는 윗사람에게 심히 누를 끼치는 행동으로 대인의 마음이 아닌 소인의 모습이지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윗사람을 섬길 때는 자기 위치 속에서 정도를 좇아 행해야 하며, 소인의 마음으로 유명 인사나 권세가들 사이를 오가면서 함께 높은 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이나 권세가 사이에서 그들의 품위를 닮고 교양을 배워 자신을 덧입힌다 해도 그 마음이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영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을 섬기다 보면 말하고 듣고 행하는 모든 것이 자연히 그 사람의 행함을 닮게 됩니다. 그러나 외모와 행함을 닮아 겉으로는 온전한 것 같아도 그 중심이 변화되지 않으면 마음속에 여전히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니, 이와 같은 사람을 의인 중에 악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지식이 있고 의인의 행동을 할지라도 그 마음에 의를 이루지 않으면 참된 의인이라 할 수 없으니 항상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 자신에게 소인의 모습이 있다면 신속히 그 마음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3. 의인 중에 악인이라는 증거는 소인배의 행동
그러면 의인 중에 악인이라는 것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소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더욱 대인답게 보이려고 행동하기 때문에 혹 눈에 보기에는 모양새가 좋고 큰사람같이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때에 따라 악함이 드러나게 됨으로 그 결과가 소인배임을 증거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누가 자기에게 해를 끼치거나 감정을 건드리면 용납하지 아니하고 바로 진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 또는 유익에 맞지 않거나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근본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거룩한 의인인 체, 온유하고 교양 있는 체했는데 극한 상황이 되면 혈기를 내거나 악을 발함으로 소인배의 그릇됨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성경상에서도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그는 왕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걸고 싸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이 백성들의 칭송을 받자 이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쫓아다닙니다. 근본 마음이 소인이었으므로 사울 왕은 계속해서 악을 행하다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지요.
이처럼 악한 사람은 상대에 대해 미움을 갖게 되면 마음에 품고 있다가 계획을 세워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스스로 악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의인인 것처럼 꾸미고 행할지라도 실상은 의인이 아닐 경우, 말씀으로 조명해 보면 낱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의인 중에 악인이란 어떤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경우의 사람은 말이나 행동이나 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제삼자가 볼 때 겉모양새는 참으로 좋은 대인의 모습이요, 훌륭한 귀인의 상으로 보여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인들과 함께 오갈 수 있는 관계의 중간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상황 속에서 또 다른 대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고위급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친분을 유지하면서 매개체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대인이나 귀인들과 함께 있으니 본인도 심중에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기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위치에서 의인과 만나고 함께하는 가운데 자신이 참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자기 계획 속에서 일들을 이루어 내고 그것에 대해 칭찬 듣기를 원하며, 자기의 유익을 좇아 무엇인가 바라는 마음을 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같지만 진정한 의인이 되지 못하며, 삯을 바라는 사람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삯을 바라다가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발하였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바로 그런 예로서, 이런 소인배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은혜를 저버리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의인의 모습과 악인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분별하기 어려운 몇 가지 예를 들었으니 잘 양식삼고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해, 또한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온전한 의인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태복음 7:16-18에 말씀한 대로 아무리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고 거룩해 보일지라도 그 열매가 악하고 추하다면 의인의 옷을 입은 악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소인배의 감정을 벗어 내고 큰마음과 의롭고 진실한 모습으로 참된 의인에 대열에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28
제4과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읽을말씀 : 사 55:8-9 | 외울말씀 : 사 55:8-9
교육목표 :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깨달아 영과 육을 분별하고 하나님 안에서 꿈을 이루며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이 되어야 만사형통
이 세상에는 나름대로 지식이나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도 많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에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때에 맞게 바로 활용되지 못하거나 사람됨이 바르지 못해 쓰임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면 무가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의 모사 아히도벨은 그 모략이 뛰어나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 16:23)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아들인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여 모반을 일으켰을 때 그도 함께 배반하여 압살롬에게 가담하였습니다. 이에 다윗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아히도벨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게 됩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목을 매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지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미 하나님께서 압살롬과 함께하시지 않으며, 결국 압살롬이 싸움에 패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윗에게 잡혀 죽느니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앞일을 예측할 줄 아는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선 가운데 행하지 않음으로 형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열왕기상·하에도 보면 자신의 지혜나 힘을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왕권을 탈취한 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결말은 한결같이 좋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지식이나 경험, 힘이 많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힘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으며 각종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경우, 애굽의 왕자로서 많은 문물과 지식을 익혔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40년간 광야에서 연단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것은 자기의 힘이나 능력, 지혜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이었지요.
2. 하나님 안에서 꿈을 이루려면
세상에는 나름대로 경험도 있고 지식도 뛰어나지만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세상에서는 자신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고 그 방법을 가르침받기도 쉽지 않지요. 단순히 경험 또는 연단을 통해 '이것이 옳았구나' 아니면 '실수였구나' 하는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해결받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분별치 못할 것이 없고 그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개선하면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자신의 그릇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자'(마 23:11)요,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자'(마 18:4)라고 말씀하시며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교만치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주위 사람이나 환경을 탓한다면 이는 큰 그릇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낮추지도 못하고 상대를 포용하지도 못하므로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도 없지요. 반면에 섬기는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큰 그릇이기에 마음먹은 대로 큰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20-21을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말씀하고 있지요.
금그릇이나 은그릇처럼 귀한 손님이 오거나 특별한 날에 내어놓는 귀한 그릇이 있는 반면, 늘 편하게 쓰는 그릇이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케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존귀하게 여김받는 금그릇이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금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첫째로, 변하지 않는 그릇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변개함 없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금처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람들, 곧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빛의 열매, 그리고 팔복, 영적인 사랑이 온전히 맺힌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둘째로, 소중한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성령으로 아기 예수님이 잉태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동정녀 마리아,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어 드렸던 막달라 마리아, 위대한 영도자인 모세 등은 하나님께서 소중한 그릇으로 여기셨습니다.
셋째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사람은 그 마음이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며 옥토와도 같아서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줍니다. 그 마음이 선하여 아무 일에든지 다투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 안에서 품어 주고, 상대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도 있으니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갔던 에스더, 사는 날 동안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했던 아브라함 등이 이에 속합니다.
넷째로, 귀한 그릇입니다.
귀한 그릇은 쉽게 만들 수 없고 흔치 않으며 한결같이 고유의 품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의 정도를 걸었던 요셉이나 하나님께로부터 크신 은총을 입었던 다니엘은 정직, 진실, 곧은 절개, 바른 신앙을 소유했던 참으로 귀한 그릇이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정한 마음을 갖고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영적인 사랑으로 헌신할 뿐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정도를 걸음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는 금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지혜의 유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잠언 10:1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비란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온전함을 이룰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순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능히 모든 것을 온전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비'란 육의 아버지나 조직의 상사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랫사람으로서 머리 되는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지혜로운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윗사람이 비진리로 나아가면 권면하고 눈물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이 정녕 윗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윗사람이 진리 안에 있다면 오직 윗사람을 기쁘게 하며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잠언 12:15에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면이나 지적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며, 훈계받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훈계는 먼저 겪어 보아 깨달은 경험자가 아직 경험이 없는 아랫사람에게 깨우침을 줌으로 삶에 빛과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상대가 실수를 범치 않도록 하며 사전에 바로잡아 주어 사단의 송사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웃어른이나 앞선 경험자들이 가르침을 베풀어 줄 때 마음에 새겨서 즉시 개선한다면 값진 교양과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잠언 6:6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개미에게 가서라도 배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존심을 내세워 주저할 것이 아니라 칭찬받고 열매를 낸 사람에게 가서 배우는 것이 선이요, 유익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용서하라 하시면 기도하고 용서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그 법을 떠나지 않지요. 나라의 법을 잘 지킬 때 질서 안에서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평안히 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3) 발견한 것을 개선하는 명철이 있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명철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자기에게서 발견된 잘못된 점을 개선해 나갈 때에 명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명철'이란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는 길이 환하게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명철은 이미 앞서 가는 사람들이 보여 주고 있으므로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누가 기도하고 사랑하며 용서했더니, 또한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영육간에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며 이런저런 명철의 길을 보여 주면 그대로 좇아 행함으로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늘 보다 나은 상대를 비교해 가며 자신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힘이나 권세, 지식 등이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렇게 자신을 발견한 후에는 부족한 것을 깨우쳐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개선하여 발전시키려면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에 명심해야 하고 또한 주의깊게 살펴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라도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서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이사야 55:8-9 말씀대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높고 넓으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생각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은 그 깊이의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열심히 일구어가면 더 아름답고 큰 사람으로, 더 사랑받는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그릇됨을 발견하고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명철을 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깨달아 영과 육을 분별하고 하나님 안에서 꿈을 이루며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이 되어야 만사형통
이 세상에는 나름대로 지식이나 부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도 많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에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있어도 때에 맞게 바로 활용되지 못하거나 사람됨이 바르지 못해 쓰임받을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면 무가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 왕의 모사 아히도벨은 그 모략이 뛰어나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삼하 16:23)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아들인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여 모반을 일으켰을 때 그도 함께 배반하여 압살롬에게 가담하였습니다. 이에 다윗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아히도벨의 모략이 채택되지 않게 됩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목을 매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지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미 하나님께서 압살롬과 함께하시지 않으며, 결국 압살롬이 싸움에 패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윗에게 잡혀 죽느니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앞일을 예측할 줄 아는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선 가운데 행하지 않음으로 형통한 삶을 영위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열왕기상·하에도 보면 자신의 지혜나 힘을 의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왕권을 탈취한 이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결말은 한결같이 좋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지식이나 경험, 힘이 많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힘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으며 각종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경우, 애굽의 왕자로서 많은 문물과 지식을 익혔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40년간 광야에서 연단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이끄는 것은 자기의 힘이나 능력, 지혜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이었지요.
2. 하나님 안에서 꿈을 이루려면
세상에는 나름대로 경험도 있고 지식도 뛰어나지만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세상에서는 자신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고 그 방법을 가르침받기도 쉽지 않지요. 단순히 경험 또는 연단을 통해 '이것이 옳았구나' 아니면 '실수였구나' 하는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해결받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분별치 못할 것이 없고 그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개선하면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자신의 그릇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자가 큰자'(마 23:11)요,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자'(마 18:4)라고 말씀하시며 영적인 어린아이가 되어 교만치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주위 사람이나 환경을 탓한다면 이는 큰 그릇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낮추지도 못하고 상대를 포용하지도 못하므로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도 없지요. 반면에 섬기는 사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큰 그릇이기에 마음먹은 대로 큰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20-21을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말씀하고 있지요.
금그릇이나 은그릇처럼 귀한 손님이 오거나 특별한 날에 내어놓는 귀한 그릇이 있는 반면, 늘 편하게 쓰는 그릇이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케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존귀하게 여김받는 금그릇이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금그릇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첫째로, 변하지 않는 그릇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변개함 없이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사람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금처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람들, 곧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빛의 열매, 그리고 팔복, 영적인 사랑이 온전히 맺힌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둘째로, 소중한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지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성령으로 아기 예수님이 잉태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동정녀 마리아,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부어 드렸던 막달라 마리아, 위대한 영도자인 모세 등은 하나님께서 소중한 그릇으로 여기셨습니다.
셋째로, 아름다운 그릇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 사람은 그 마음이 솜털같이 부드럽고 포근하며 옥토와도 같아서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줍니다. 그 마음이 선하여 아무 일에든지 다투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 안에서 품어 주고, 상대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도 있으니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 앞에 나아갔던 에스더, 사는 날 동안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했던 아브라함 등이 이에 속합니다.
넷째로, 귀한 그릇입니다.
귀한 그릇은 쉽게 만들 수 없고 흔치 않으며 한결같이 고유의 품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믿음의 정도를 걸었던 요셉이나 하나님께로부터 크신 은총을 입었던 다니엘은 정직, 진실, 곧은 절개, 바른 신앙을 소유했던 참으로 귀한 그릇이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정한 마음을 갖고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영적인 사랑으로 헌신할 뿐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정도를 걸음으로 하나님께 귀히 쓰임을 받는 금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지혜의 유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잠언 10:1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비란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온전함을 이룰 수 없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순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능히 모든 것을 온전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아비'란 육의 아버지나 조직의 상사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랫사람으로서 머리 되는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지혜로운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윗사람이 비진리로 나아가면 권면하고 눈물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이 정녕 윗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윗사람이 진리 안에 있다면 오직 윗사람을 기쁘게 하며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잠언 12:15에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면이나 지적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며, 훈계받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훈계는 먼저 겪어 보아 깨달은 경험자가 아직 경험이 없는 아랫사람에게 깨우침을 줌으로 삶에 빛과 길잡이가 되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상대가 실수를 범치 않도록 하며 사전에 바로잡아 주어 사단의 송사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웃어른이나 앞선 경험자들이 가르침을 베풀어 줄 때 마음에 새겨서 즉시 개선한다면 값진 교양과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잠언 6:6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개미에게 가서라도 배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존심을 내세워 주저할 것이 아니라 칭찬받고 열매를 낸 사람에게 가서 배우는 것이 선이요, 유익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 용서하라 하시면 기도하고 용서하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그 법을 떠나지 않지요. 나라의 법을 잘 지킬 때 질서 안에서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평안히 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길이 되는 것입니다.
3) 발견한 것을 개선하는 명철이 있어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명철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자기에게서 발견된 잘못된 점을 개선해 나갈 때에 명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명철'이란 무슨 일이든지 이룰 수 있는 길이 환하게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명철은 이미 앞서 가는 사람들이 보여 주고 있으므로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누가 기도하고 사랑하며 용서했더니, 또한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영육간에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하며 이런저런 명철의 길을 보여 주면 그대로 좇아 행함으로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늘 보다 나은 상대를 비교해 가며 자신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힘이나 권세, 지식 등이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렇게 자신을 발견한 후에는 부족한 것을 깨우쳐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개선하여 발전시키려면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에 명심해야 하고 또한 주의깊게 살펴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라도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서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이사야 55:8-9 말씀대로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은 높고 넓으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의 생각과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은 그 깊이의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열심히 일구어가면 더 아름답고 큰 사람으로, 더 사랑받는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그릇됨을 발견하고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명철을 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21
제3과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롬 3:19-22
읽을말씀 : 롬 3:19-22 | 외울말씀 : 롬 3:20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고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서 영과 육을 분별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1. 율법의 행위로 외식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23:13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시며 연이어 일곱 번이나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엄히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5-7에는 외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외식주의자들은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며서 사람들에게 높임받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미워하며 끌어내리려고 하는 등의 악을 행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겉모양은 행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나 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모습들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그들은 겉모양은 거룩한 것 같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 같지만 중심에서는 행치 아니했고 그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꾼이나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여전히 미워하고 죄 가운데 살며 불순종하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므로 오히려 진리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실망시키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2. 율법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
마태복음 3:7 이하에는 세례 요한이 외식주의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엄히 책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무리 겉이 깨끗한 그릇이라도 그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면 아름답다고 할 수 없으며 음식을 담아 먹을 수도 없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거의 흠잡을 것이 없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는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행함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와 인과 신을 이루는 것이란 곧 마음의 할례를 말하며 이것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사랑과 희생, 섬김의 마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단지 행위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마 7:21).
3. 율법을 잘 지키는 것 같은데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
그러면 행위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육과 영을 구분할 수 있도록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입술에는 원망 불평 탄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되었을 때에는 춤추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이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써 전도하고 충성 봉사하며 각종 예배에 참석하면 열심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아무리 행위적으로 잘 지킨다 해도 중요한 것은 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믿음을 잘 지켜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원망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직 영이 아닌 육에 거하고 있으며,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행위적인 발전일 뿐 정작 중요한 마음의 의는 이루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고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육은 언젠가는 변하는 것이며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다 해도 그 기쁨과 감사는 순간일 뿐,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때문에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2)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데 반해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 상대를 판단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되므로 혹 누가 주일을 지키지 못하거나 기도하지 않거나 문제를 일으킨 것을 보면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이웃에게 알리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을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약 4:11-12), 스스로 어기면서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행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되 용서할 사람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마 18:21-22) 원수라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44).
그러니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보면 악한 말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말로 권면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율법을 행위적으로는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쉽게 분내고 다투며 원수를 맺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분내지 말라, 다투지 말라, 원수 맺지 말라"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주일을 지키고 기도하는 등 자기 위치를 지켰다고 해서 온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요, 그것은 율법적인 행위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분냄과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서도 자신은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하는 사람이란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다우나 속에는 썩어 냄새나는 시체가 들어 있고, 또한 겉모습은 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데, 죄를 품고 하는 기도에 응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시 66:18).
마태복음 5:39 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고 자신이 불이익을 당했다고 해서 분내고 다툰다면 이는 영이 아니라 육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1에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율법은 오히려 긍휼과 사랑과 용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하고 분내고 다툰다면 아니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비록 행위적으로는 기도나 봉사, 충성이 있다 해도 근본 마음이 개선되지 않으면 응답이 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함의 의는 마음이 개선되어야 나올 수 있으므로 먼저는 마음의 할례를 하되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마음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정한 의를 이루어야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무슨 특별한 악을 행한다거나 언뜻 보기에 별로 위배된 것이 없으므로 자신은 온전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진리로 비추어 보면 그 속에는 율법과 자기 중심으로 차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개조도 안 된 채 다만 습관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미지근한 신앙과 같아서 차라리 차가운 신앙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계 3:16). 왜냐하면 차가운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철저히 돌이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미지근하면 아예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도 마음이 개선되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는 가운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 문제가 생겨난다 해도 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입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문제를 이웃에게 알리고 판단 정죄했을 터인데, 이제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마음이 선한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하고 서로 몸을 가까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사람에게 알리려 한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차원으로 대입해 들어가니 어떤 옳지 못한 일을 보았다 해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상대를 해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영으로 일군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섬기고 낮아지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로 개간된 마음으로 기도할 때 곧 응답이 오며, 이미 쌓아 놓은 기도도 신속히 응답이 되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빛 가운데 행하는 영의 사람들이 되어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고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면서 영과 육을 분별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1. 율법의 행위로 외식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23:13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시며 연이어 일곱 번이나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엄히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5-7에는 외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는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외식주의자들은 외모를 그럴 듯하게 꾸며서 사람들에게 높임받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잘되는 사람들을 보면 미워하며 끌어내리려고 하는 등의 악을 행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행위만 앞세우는 외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겉모양은 행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으나 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모습들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그들은 겉모양은 거룩한 것 같고 말씀대로 행하는 것 같지만 중심에서는 행치 아니했고 그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와 같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일꾼이나 직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여전히 미워하고 죄 가운데 살며 불순종하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므로 오히려 진리 가운데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실망시키고 낙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2. 율법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
마태복음 3:7 이하에는 세례 요한이 외식주의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엄히 책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무리 겉이 깨끗한 그릇이라도 그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면 아름답다고 할 수 없으며 음식을 담아 먹을 수도 없는 것처럼 율법의 행위로는 거의 흠잡을 것이 없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23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는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행함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의와 인과 신을 이루는 것이란 곧 마음의 할례를 말하며 이것이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진정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사랑과 희생, 섬김의 마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단지 행위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마 7:21).
3. 율법을 잘 지키는 것 같은데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
그러면 행위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켰을지라도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육과 영을 구분할 수 있도록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입술에는 원망 불평 탄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되었을 때에는 춤추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칠 때에는 이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써 전도하고 충성 봉사하며 각종 예배에 참석하면 열심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아무리 행위적으로 잘 지킨다 해도 중요한 것은 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믿음을 잘 지켜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고 원망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아직 영이 아닌 육에 거하고 있으며,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행위적인 발전일 뿐 정작 중요한 마음의 의는 이루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고 기도해도 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육은 언젠가는 변하는 것이며 결국 안개와 같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신다 해도 그 기쁨과 감사는 순간일 뿐,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때문에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2)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 데 반해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 상대를 판단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되므로 혹 누가 주일을 지키지 못하거나 기도하지 않거나 문제를 일으킨 것을 보면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여 이웃에게 알리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을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약 4:11-12), 스스로 어기면서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행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되 용서할 사람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마 18:21-22) 원수라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44).
그러니 자신이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을 보면 악한 말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말로 권면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3) 율법을 행위적으로는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으면 쉽게 분내고 다투며 원수를 맺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분내지 말라, 다투지 말라, 원수 맺지 말라"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씀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주일을 지키고 기도하는 등 자기 위치를 지켰다고 해서 온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요, 그것은 율법적인 행위에 그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에는 분냄과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서도 자신은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하는 사람이란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다우나 속에는 썩어 냄새나는 시체가 들어 있고, 또한 겉모습은 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데, 죄를 품고 하는 기도에 응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시 66:18).
마태복음 5:39 이하를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고 자신이 불이익을 당했다고 해서 분내고 다툰다면 이는 영이 아니라 육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1에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는 것이 아니요, 영적인 율법은 오히려 긍휼과 사랑과 용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용서하지 못하고 분내고 다툰다면 아니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비록 행위적으로는 기도나 봉사, 충성이 있다 해도 근본 마음이 개선되지 않으면 응답이 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함의 의는 마음이 개선되어야 나올 수 있으므로 먼저는 마음의 할례를 하되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마음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정한 의를 이루어야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무슨 특별한 악을 행한다거나 언뜻 보기에 별로 위배된 것이 없으므로 자신은 온전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진리로 비추어 보면 그 속에는 율법과 자기 중심으로 차 있기 때문에 마음의 개조도 안 된 채 다만 습관적인 신앙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미지근한 신앙과 같아서 차라리 차가운 신앙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계 3:16). 왜냐하면 차가운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철저히 돌이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올 수도 있지만 미지근하면 아예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도 마음이 개선되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는 가운데 자기 마음과 생각에 맞지 않는 문제가 생겨난다 해도 이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입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문제를 이웃에게 알리고 판단 정죄했을 터인데, 이제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마음이 선한 요셉은 마리아와 정혼하고 서로 몸을 가까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사람에게 알리려 한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차원으로 대입해 들어가니 어떤 옳지 못한 일을 보았다 해도 사람들에게 알리고 상대를 해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끊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영으로 일군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섬기고 낮아지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진리로 개간된 마음으로 기도할 때 곧 응답이 오며, 이미 쌓아 놓은 기도도 신속히 응답이 되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빛 가운데 행하는 영의 사람들이 되어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14
제2과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잠 16:1-3
읽을말씀 : 잠 16:1-3 | 외울말씀 : 잠 16:2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마음의 경영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자가 되어 마음의 경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이 있지만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공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모든 복이 임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모든 저주가 임할 것'도 알려 주셨지요.
또한 사람의 말이나 마음, 또는 행함에 따라 어떻게 응답이 되고 보응을 받는가도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 앞에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며 "예수의 피를 그들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약 11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으며 그 후로 나라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또다시 6백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면 축복이 임하기는커녕 저주가 임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의 경영을 이루며 하나님의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음의 경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야
잠언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 말씀하신 대로 마음의 경영 자체가 하나님과 일치되면 당연히 마음 먹은 대로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공식에 사람의 뜻을 대입해서 풀어나가면 만사형통의 길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세상 사람들도 악으로 여기는 육에 속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살인 등의 육체의 행위로 나타난 바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9 이하를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말씀하시며 이와 같은 육체의 일을 행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응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도 당연히 행하지 말아야 될 악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더구나 행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악으로 여기시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마음에는 담고 있으되 행위로는 보이지 않는 '육신의 일'을 말합니다. 미움이나 간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행위로는 나타내지 않을 수 있으며 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척,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육신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악하다 말하지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악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에 여자나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일은 물론 육신의 일도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자신의 의를 버려야 합니다
육체의 일, 육신의 일까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의인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자기적인 의'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단계를 다 거쳐야만 비로소 온전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가 있으며 그래야만 성경에 약속된 축복들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무리에게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갖고 있던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스승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한 의로운 행동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진리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를 좇아 순복한 것이 아니라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욥바에 있던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 위에 올라가 환상을 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며 먹기를 거절하지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보자기에 들어 있는 것들은 가증스런 동물들로서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음성인 줄 알면서도 자기적인 의 속에서 불순종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말씀하시며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여겼던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2. 자기가 옳다 여기는 자신의 의를 깨뜨려야
1) 진리를 지킨다고 지키지만 자기 생각에 맞춰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해나가며 자기 보기에 자신이 깨끗하다 여기는 분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이 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말씀하셨기에 이에 순종하여 반드시 안식일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열이면 아홉 번은 그대로 지키는데, 한 번 정도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자기 편에 맞추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선한 일이니 이 일을 돌본 후, 다음에 교회에 나가리라" 하며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이 선하다 여기기에 잘못이라 느끼지 아니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옳다 하지 않으시고 타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느 곳에 있든지 불같이 기도할 수 있으니 혼자서 기도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모여서 하는 기도회 모임이 있을 때에는 믿음의 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화합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이지요. 나 홀로 있으면서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면 이것은 벌써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요, 자신을 굽혀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자기 생각으로 잘못된 분야를 감추는 사람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안의 화평을 위해 혹은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해 감추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기둥이 썩어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실상이 드러날까 염려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드릴 고기 중에서 좋은 부분은 먼저 취하기도 하고 성전의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등 여호와를 심히 멸시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이를 엄히 꾸짖어 돌이키게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다고 말씀하시며 대대로 그 집에 저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모든 것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징계해야 할 곳에는 징계를 가할 때 치료가 되고 다시 범죄치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상대가 악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에 눌러 참는 사람
상대가 내 교양이나 생각, 내 마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다툼과 불화를 피하기 위해 억지로 마음에 눌러 참는 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시지 않습니다. 참고 참으니 그것이 쌓이고 쌓여 악이 되고 미움으로 굳혀지게 되지요.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영원한 미움으로 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화를 내거나 마음 속에 쌓아 두고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들을 연단하셨던 이유도 바로 자기 보기에 깨끗한 것들을 올바로 정립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갈라디아서 5장 22-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원수를 갚는 것이 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시는데 사람의 의는 높임을 받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적인 의가 강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저 사람이 죄인들과 식사하니 저 사람도 죄인이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 비추어 보면 "죄인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시는 저 분은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다"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깨끗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 자신의 의를 모두 벗어 버림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마음의 경영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자가 되어 마음의 경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이 있지만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공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모든 복이 임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모든 저주가 임할 것'도 알려 주셨지요.
또한 사람의 말이나 마음, 또는 행함에 따라 어떻게 응답이 되고 보응을 받는가도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 앞에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며 "예수의 피를 그들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약 11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으며 그 후로 나라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또다시 6백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면 축복이 임하기는커녕 저주가 임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의 경영을 이루며 하나님의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음의 경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야
잠언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 말씀하신 대로 마음의 경영 자체가 하나님과 일치되면 당연히 마음 먹은 대로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공식에 사람의 뜻을 대입해서 풀어나가면 만사형통의 길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세상 사람들도 악으로 여기는 육에 속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살인 등의 육체의 행위로 나타난 바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9 이하를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말씀하시며 이와 같은 육체의 일을 행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응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도 당연히 행하지 말아야 될 악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더구나 행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악으로 여기시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마음에는 담고 있으되 행위로는 보이지 않는 '육신의 일'을 말합니다. 미움이나 간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행위로는 나타내지 않을 수 있으며 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척,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육신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악하다 말하지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악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에 여자나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일은 물론 육신의 일도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자신의 의를 버려야 합니다
육체의 일, 육신의 일까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의인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자기적인 의'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단계를 다 거쳐야만 비로소 온전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가 있으며 그래야만 성경에 약속된 축복들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무리에게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갖고 있던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스승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한 의로운 행동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진리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를 좇아 순복한 것이 아니라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욥바에 있던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 위에 올라가 환상을 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며 먹기를 거절하지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보자기에 들어 있는 것들은 가증스런 동물들로서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음성인 줄 알면서도 자기적인 의 속에서 불순종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말씀하시며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여겼던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2. 자기가 옳다 여기는 자신의 의를 깨뜨려야
1) 진리를 지킨다고 지키지만 자기 생각에 맞춰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해나가며 자기 보기에 자신이 깨끗하다 여기는 분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이 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말씀하셨기에 이에 순종하여 반드시 안식일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열이면 아홉 번은 그대로 지키는데, 한 번 정도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자기 편에 맞추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선한 일이니 이 일을 돌본 후, 다음에 교회에 나가리라" 하며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이 선하다 여기기에 잘못이라 느끼지 아니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옳다 하지 않으시고 타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느 곳에 있든지 불같이 기도할 수 있으니 혼자서 기도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모여서 하는 기도회 모임이 있을 때에는 믿음의 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화합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이지요. 나 홀로 있으면서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면 이것은 벌써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요, 자신을 굽혀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자기 생각으로 잘못된 분야를 감추는 사람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안의 화평을 위해 혹은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해 감추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기둥이 썩어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실상이 드러날까 염려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드릴 고기 중에서 좋은 부분은 먼저 취하기도 하고 성전의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등 여호와를 심히 멸시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이를 엄히 꾸짖어 돌이키게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다고 말씀하시며 대대로 그 집에 저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모든 것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징계해야 할 곳에는 징계를 가할 때 치료가 되고 다시 범죄치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상대가 악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에 눌러 참는 사람
상대가 내 교양이나 생각, 내 마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다툼과 불화를 피하기 위해 억지로 마음에 눌러 참는 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시지 않습니다. 참고 참으니 그것이 쌓이고 쌓여 악이 되고 미움으로 굳혀지게 되지요.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영원한 미움으로 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화를 내거나 마음 속에 쌓아 두고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들을 연단하셨던 이유도 바로 자기 보기에 깨끗한 것들을 올바로 정립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갈라디아서 5장 22-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원수를 갚는 것이 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시는데 사람의 의는 높임을 받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적인 의가 강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저 사람이 죄인들과 식사하니 저 사람도 죄인이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 비추어 보면 "죄인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시는 저 분은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다"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깨끗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 자신의 의를 모두 벗어 버림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07
제1과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6
읽을말씀 : 요 3:6 | 외울말씀 : 요 3:6
교육목표 : 육과 영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무익한 육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나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성경을 보면 '육'이나 '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을 벗어 버리고 영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과 영을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을 벗어난 영의 사람이 되면 이 땅에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며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영과 육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영의 차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의 차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나 사업이 잘되기를 원하고 질병으로 고통받으면 온전히 치료받아 강건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일들이 참으로 쉽고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백부장이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 등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질병이 떠나고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등 응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으면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러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과 영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육의 차원'이라 한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를 '영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흙이나 돌처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무차원(無次原), 식물처럼 호흡은 하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1차원, 동물처럼 호흡하며 움직일 수는 있으나 이성이 없는 것은 2차원, 호흡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생각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3차원에 속하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육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세계는 4차원에 속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3차원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는 4차원의 세계를 알 수 없으므로 성령을 보내셔서 4차원의 세계를 알고 들어올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 영의 차원에 들어오면 4차원의 역사 가운데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영육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으며 각색 질병을 치료받는 등 응답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2. 육과 영의 상반되는 차이점
그러면 육과 영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에서 벗어나 영의 차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육과 영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기의 유익을 좇는 것이 육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는 것은 영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룻은 원래 모압이라는 이방 여인으로,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0년 만에 자녀도 없이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는 룻 외에도 일찍 남편을 여읜 오르바라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한두 번 뿌리치다가 결국 시어머니에게 입맞추고 떠나갔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함께 가서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으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기다가 부유한 친족인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요.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 오벳으로,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순전한 마음으로 바른 양심을 좇아 선한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의 마음과 행함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무리 자기에게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룻처럼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과 영을 정확히 구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육이 발견되면 즉시 벗어 버려야 하며 이렇게 육을 벗고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신속히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둘째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 육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의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영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요셉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사자굴에 던짐받은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사자의 입을 봉해 주셨으므로 조금도 상치 않았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조금도 타지 않고 건짐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은 물론, 왕 다음 가는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부탁받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의와 타협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요. 재물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니 바른 길을 떠나 불의와 타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고,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거나 자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는 치우치거나 편견을 가지며 심지어는 거짓 증인까지도 되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서 정도를 좇지 않고 치우치는 것, 편견을 갖는 것,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이나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무조건 좇는 것 등이 타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육의 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으면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낸다 해도 축복받지 못하고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결국 생명이요, 축복이 됩니다.
셋째로, 육이 변하고 사라지며 썩어지는 것이라면 영은 변치 아니하고 사라지지 아니하며 온전하게 완성되는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육의 속성은 자기 유익을 구하며 변질되고 썩어지는 것이므로 육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치 않고 배신하며 대화는 물론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한다 해 놓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내 마음이 변하고, 충성한다 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맞지 않으면 쉽게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상대에게 허물이 있을 때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또 한번 사랑했으면 비록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며 항상 곁에서 권면하고 위로가 되어 주며 끝까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성경상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그에 대한 보응으로 큰 연단을 받습니다. 바로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도 빼앗기고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니 다윗 왕을 따라다녀 봐야 의식주 문제도 해결할 길이 막막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은 비록 섬기는 왕이 그러한 신세가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붙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육의 사람들은 이내 다윗 왕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붙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영과 육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영은 비록 자신에게 손해가 가고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배신하는 마음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좌우로 치우치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간사한 마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요, 참이며 변함없는 진실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에 있는 사람에게는 응답해 주시지 않고 영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유입니다. 변하고 썩어지고 사라질 것을 위해 응답해 주시면 오히려 누룩이 자라 음식 전체를 썩게 하는 것같이 결국 더욱 육으로 치우쳐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영을 좇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조금도 육에 치우치지 않았고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말의 사욕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육과 영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무익한 육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나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성경을 보면 '육'이나 '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을 벗어 버리고 영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과 영을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을 벗어난 영의 사람이 되면 이 땅에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며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영과 육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영의 차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의 차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나 사업이 잘되기를 원하고 질병으로 고통받으면 온전히 치료받아 강건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일들이 참으로 쉽고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백부장이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 등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질병이 떠나고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등 응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으면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러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과 영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육의 차원'이라 한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를 '영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흙이나 돌처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무차원(無次原), 식물처럼 호흡은 하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1차원, 동물처럼 호흡하며 움직일 수는 있으나 이성이 없는 것은 2차원, 호흡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생각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3차원에 속하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육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세계는 4차원에 속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3차원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는 4차원의 세계를 알 수 없으므로 성령을 보내셔서 4차원의 세계를 알고 들어올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 영의 차원에 들어오면 4차원의 역사 가운데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영육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으며 각색 질병을 치료받는 등 응답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2. 육과 영의 상반되는 차이점
그러면 육과 영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에서 벗어나 영의 차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육과 영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기의 유익을 좇는 것이 육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는 것은 영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룻은 원래 모압이라는 이방 여인으로,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0년 만에 자녀도 없이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는 룻 외에도 일찍 남편을 여읜 오르바라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한두 번 뿌리치다가 결국 시어머니에게 입맞추고 떠나갔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함께 가서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으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기다가 부유한 친족인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요.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 오벳으로,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순전한 마음으로 바른 양심을 좇아 선한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의 마음과 행함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무리 자기에게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룻처럼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과 영을 정확히 구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육이 발견되면 즉시 벗어 버려야 하며 이렇게 육을 벗고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신속히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둘째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 육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의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영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요셉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사자굴에 던짐받은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사자의 입을 봉해 주셨으므로 조금도 상치 않았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조금도 타지 않고 건짐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은 물론, 왕 다음 가는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부탁받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의와 타협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요. 재물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니 바른 길을 떠나 불의와 타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고,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거나 자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는 치우치거나 편견을 가지며 심지어는 거짓 증인까지도 되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서 정도를 좇지 않고 치우치는 것, 편견을 갖는 것,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이나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무조건 좇는 것 등이 타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육의 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으면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낸다 해도 축복받지 못하고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결국 생명이요, 축복이 됩니다.
셋째로, 육이 변하고 사라지며 썩어지는 것이라면 영은 변치 아니하고 사라지지 아니하며 온전하게 완성되는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육의 속성은 자기 유익을 구하며 변질되고 썩어지는 것이므로 육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치 않고 배신하며 대화는 물론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한다 해 놓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내 마음이 변하고, 충성한다 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맞지 않으면 쉽게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상대에게 허물이 있을 때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또 한번 사랑했으면 비록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며 항상 곁에서 권면하고 위로가 되어 주며 끝까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성경상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그에 대한 보응으로 큰 연단을 받습니다. 바로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도 빼앗기고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니 다윗 왕을 따라다녀 봐야 의식주 문제도 해결할 길이 막막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은 비록 섬기는 왕이 그러한 신세가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붙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육의 사람들은 이내 다윗 왕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붙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영과 육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영은 비록 자신에게 손해가 가고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배신하는 마음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좌우로 치우치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간사한 마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요, 참이며 변함없는 진실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에 있는 사람에게는 응답해 주시지 않고 영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유입니다. 변하고 썩어지고 사라질 것을 위해 응답해 주시면 오히려 누룩이 자라 음식 전체를 썩게 하는 것같이 결국 더욱 육으로 치우쳐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영을 좇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조금도 육에 치우치지 않았고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말의 사욕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