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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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14
제2과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잠 16:1-3
읽을말씀 : 잠 16:1-3 | 외울말씀 : 잠 16:2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마음의 경영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자가 되어 마음의 경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이 있지만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공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모든 복이 임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모든 저주가 임할 것'도 알려 주셨지요.
또한 사람의 말이나 마음, 또는 행함에 따라 어떻게 응답이 되고 보응을 받는가도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 앞에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며 "예수의 피를 그들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약 11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으며 그 후로 나라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또다시 6백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면 축복이 임하기는커녕 저주가 임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의 경영을 이루며 하나님의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음의 경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야
잠언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 말씀하신 대로 마음의 경영 자체가 하나님과 일치되면 당연히 마음 먹은 대로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공식에 사람의 뜻을 대입해서 풀어나가면 만사형통의 길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세상 사람들도 악으로 여기는 육에 속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살인 등의 육체의 행위로 나타난 바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9 이하를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말씀하시며 이와 같은 육체의 일을 행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응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도 당연히 행하지 말아야 될 악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더구나 행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악으로 여기시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마음에는 담고 있으되 행위로는 보이지 않는 '육신의 일'을 말합니다. 미움이나 간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행위로는 나타내지 않을 수 있으며 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척,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육신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악하다 말하지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악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에 여자나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일은 물론 육신의 일도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자신의 의를 버려야 합니다
육체의 일, 육신의 일까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의인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자기적인 의'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단계를 다 거쳐야만 비로소 온전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가 있으며 그래야만 성경에 약속된 축복들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무리에게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갖고 있던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스승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한 의로운 행동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진리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를 좇아 순복한 것이 아니라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욥바에 있던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 위에 올라가 환상을 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며 먹기를 거절하지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보자기에 들어 있는 것들은 가증스런 동물들로서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음성인 줄 알면서도 자기적인 의 속에서 불순종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말씀하시며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여겼던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2. 자기가 옳다 여기는 자신의 의를 깨뜨려야
1) 진리를 지킨다고 지키지만 자기 생각에 맞춰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해나가며 자기 보기에 자신이 깨끗하다 여기는 분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이 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말씀하셨기에 이에 순종하여 반드시 안식일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열이면 아홉 번은 그대로 지키는데, 한 번 정도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자기 편에 맞추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선한 일이니 이 일을 돌본 후, 다음에 교회에 나가리라" 하며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이 선하다 여기기에 잘못이라 느끼지 아니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옳다 하지 않으시고 타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느 곳에 있든지 불같이 기도할 수 있으니 혼자서 기도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모여서 하는 기도회 모임이 있을 때에는 믿음의 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화합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이지요. 나 홀로 있으면서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면 이것은 벌써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요, 자신을 굽혀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자기 생각으로 잘못된 분야를 감추는 사람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안의 화평을 위해 혹은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해 감추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기둥이 썩어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실상이 드러날까 염려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드릴 고기 중에서 좋은 부분은 먼저 취하기도 하고 성전의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등 여호와를 심히 멸시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이를 엄히 꾸짖어 돌이키게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다고 말씀하시며 대대로 그 집에 저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모든 것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징계해야 할 곳에는 징계를 가할 때 치료가 되고 다시 범죄치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상대가 악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에 눌러 참는 사람
상대가 내 교양이나 생각, 내 마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다툼과 불화를 피하기 위해 억지로 마음에 눌러 참는 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시지 않습니다. 참고 참으니 그것이 쌓이고 쌓여 악이 되고 미움으로 굳혀지게 되지요.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영원한 미움으로 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화를 내거나 마음 속에 쌓아 두고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들을 연단하셨던 이유도 바로 자기 보기에 깨끗한 것들을 올바로 정립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갈라디아서 5장 22-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원수를 갚는 것이 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시는데 사람의 의는 높임을 받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적인 의가 강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저 사람이 죄인들과 식사하니 저 사람도 죄인이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 비추어 보면 "죄인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시는 저 분은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다"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깨끗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 자신의 의를 모두 벗어 버림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마음의 경영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자가 되어 마음의 경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이 있지만 쉽게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공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8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며 모든 복이 임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모든 저주가 임할 것'도 알려 주셨지요.
또한 사람의 말이나 마음, 또는 행함에 따라 어떻게 응답이 되고 보응을 받는가도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하던 대제사장들과 유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 앞에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을 것을 요구하며 "예수의 피를 그들과 그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고백하였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의해 함락되고 약 11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으며 그 후로 나라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또다시 6백만 명이나 학살을 당하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는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면 축복이 임하기는커녕 저주가 임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의 경영을 이루며 하나님의 축복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마음의 경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야
잠언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 말씀하신 대로 마음의 경영 자체가 하나님과 일치되면 당연히 마음 먹은 대로 응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공식에 사람의 뜻을 대입해서 풀어나가면 만사형통의 길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마음의 경영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세상 사람들도 악으로 여기는 육에 속한 악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살인 등의 육체의 행위로 나타난 바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9 이하를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말씀하시며 이와 같은 육체의 일을 행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응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도 당연히 행하지 말아야 될 악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더구나 행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악으로 여기시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마음에는 담고 있으되 행위로는 보이지 않는 '육신의 일'을 말합니다. 미움이나 간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행위로는 나타내지 않을 수 있으며 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척,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육신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악하다 말하지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악하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에 여자나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일은 물론 육신의 일도 버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자신의 의를 버려야 합니다
육체의 일, 육신의 일까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의인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버려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자기적인 의'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단계를 다 거쳐야만 비로소 온전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가 있으며 그래야만 성경에 약속된 축복들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파송한 무리에게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는 갖고 있던 칼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스승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한 의로운 행동인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진리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를 좇아 순복한 것이 아니라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욥바에 있던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 위에 올라가 환상을 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며 먹기를 거절하지요.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보자기에 들어 있는 것들은 가증스런 동물들로서 먹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음성인 줄 알면서도 자기적인 의 속에서 불순종한 것이니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깨끗케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말씀하시며 이방인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여겼던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2. 자기가 옳다 여기는 자신의 의를 깨뜨려야
1) 진리를 지킨다고 지키지만 자기 생각에 맞춰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해나가며 자기 보기에 자신이 깨끗하다 여기는 분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이 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말씀하셨기에 이에 순종하여 반드시 안식일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래서 열이면 아홉 번은 그대로 지키는데, 한 번 정도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자기 편에 맞추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선한 일이니 이 일을 돌본 후, 다음에 교회에 나가리라" 하며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생각이 선하다 여기기에 잘못이라 느끼지 아니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옳다 하지 않으시고 타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느 곳에 있든지 불같이 기도할 수 있으니 혼자서 기도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모여서 하는 기도회 모임이 있을 때에는 믿음의 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 화합해 주는 것이 옳은 것이지요. 나 홀로 있으면서 마음을 모두어 기도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면 이것은 벌써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요, 자신을 굽혀서 하나를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자기 생각으로 잘못된 분야를 감추는 사람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안의 화평을 위해 혹은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해 감추려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기둥이 썩어가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실상이 드러날까 염려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드릴 고기 중에서 좋은 부분은 먼저 취하기도 하고 성전의 회막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등 여호와를 심히 멸시하는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이를 엄히 꾸짖어 돌이키게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다고 말씀하시며 대대로 그 집에 저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모든 것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는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징계해야 할 곳에는 징계를 가할 때 치료가 되고 다시 범죄치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상대가 악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에 눌러 참는 사람
상대가 내 교양이나 생각, 내 마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 다툼과 불화를 피하기 위해 억지로 마음에 눌러 참는 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시지 않습니다. 참고 참으니 그것이 쌓이고 쌓여 악이 되고 미움으로 굳혀지게 되지요.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영원한 미움으로 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화를 내거나 마음 속에 쌓아 두고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진들을 연단하셨던 이유도 바로 자기 보기에 깨끗한 것들을 올바로 정립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갈라디아서 5장 22-23을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했는데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원수를 갚는 것이 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시는데 사람의 의는 높임을 받는 자가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적인 의가 강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저 사람이 죄인들과 식사하니 저 사람도 죄인이다"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 비추어 보면 "죄인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시는 저 분은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다"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깨끗하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깨끗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 세상 사람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은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 자신의 의를 모두 벗어 버림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모든 마음의 경영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1-07
제1과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6
읽을말씀 : 요 3:6 | 외울말씀 : 요 3:6
교육목표 : 육과 영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무익한 육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나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성경을 보면 '육'이나 '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을 벗어 버리고 영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과 영을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을 벗어난 영의 사람이 되면 이 땅에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며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영과 육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영의 차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의 차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나 사업이 잘되기를 원하고 질병으로 고통받으면 온전히 치료받아 강건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일들이 참으로 쉽고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백부장이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 등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질병이 떠나고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등 응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으면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러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과 영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육의 차원'이라 한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를 '영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흙이나 돌처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무차원(無次原), 식물처럼 호흡은 하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1차원, 동물처럼 호흡하며 움직일 수는 있으나 이성이 없는 것은 2차원, 호흡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생각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3차원에 속하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육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세계는 4차원에 속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3차원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는 4차원의 세계를 알 수 없으므로 성령을 보내셔서 4차원의 세계를 알고 들어올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 영의 차원에 들어오면 4차원의 역사 가운데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영육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으며 각색 질병을 치료받는 등 응답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2. 육과 영의 상반되는 차이점
그러면 육과 영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에서 벗어나 영의 차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육과 영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기의 유익을 좇는 것이 육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는 것은 영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룻은 원래 모압이라는 이방 여인으로,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0년 만에 자녀도 없이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는 룻 외에도 일찍 남편을 여읜 오르바라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한두 번 뿌리치다가 결국 시어머니에게 입맞추고 떠나갔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함께 가서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으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기다가 부유한 친족인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요.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 오벳으로,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순전한 마음으로 바른 양심을 좇아 선한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의 마음과 행함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무리 자기에게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룻처럼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과 영을 정확히 구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육이 발견되면 즉시 벗어 버려야 하며 이렇게 육을 벗고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신속히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둘째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 육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의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영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요셉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사자굴에 던짐받은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사자의 입을 봉해 주셨으므로 조금도 상치 않았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조금도 타지 않고 건짐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은 물론, 왕 다음 가는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부탁받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의와 타협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요. 재물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니 바른 길을 떠나 불의와 타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고,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거나 자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는 치우치거나 편견을 가지며 심지어는 거짓 증인까지도 되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서 정도를 좇지 않고 치우치는 것, 편견을 갖는 것,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이나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무조건 좇는 것 등이 타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육의 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으면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낸다 해도 축복받지 못하고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결국 생명이요, 축복이 됩니다.
셋째로, 육이 변하고 사라지며 썩어지는 것이라면 영은 변치 아니하고 사라지지 아니하며 온전하게 완성되는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육의 속성은 자기 유익을 구하며 변질되고 썩어지는 것이므로 육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치 않고 배신하며 대화는 물론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한다 해 놓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내 마음이 변하고, 충성한다 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맞지 않으면 쉽게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상대에게 허물이 있을 때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또 한번 사랑했으면 비록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며 항상 곁에서 권면하고 위로가 되어 주며 끝까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성경상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그에 대한 보응으로 큰 연단을 받습니다. 바로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도 빼앗기고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니 다윗 왕을 따라다녀 봐야 의식주 문제도 해결할 길이 막막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은 비록 섬기는 왕이 그러한 신세가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붙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육의 사람들은 이내 다윗 왕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붙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영과 육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영은 비록 자신에게 손해가 가고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배신하는 마음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좌우로 치우치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간사한 마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요, 참이며 변함없는 진실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에 있는 사람에게는 응답해 주시지 않고 영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유입니다. 변하고 썩어지고 사라질 것을 위해 응답해 주시면 오히려 누룩이 자라 음식 전체를 썩게 하는 것같이 결국 더욱 육으로 치우쳐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영을 좇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조금도 육에 치우치지 않았고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말의 사욕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육과 영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무익한 육은 벗어 버리고 영으로 나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성경을 보면 '육'이나 '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을 벗어 버리고 영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과 영을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을 벗어난 영의 사람이 되면 이 땅에서 진정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며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영과 육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영의 차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의 차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나 사업이 잘되기를 원하고 질병으로 고통받으면 온전히 치료받아 강건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일들이 참으로 쉽고 아름답게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백부장이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 등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질병이 떠나고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등 응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으면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러한 응답과 축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육과 영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중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육의 차원'이라 한다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를 '영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흙이나 돌처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무차원(無次原), 식물처럼 호흡은 하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1차원, 동물처럼 호흡하며 움직일 수는 있으나 이성이 없는 것은 2차원, 호흡하고 움직일 수 있으며 생각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3차원에 속하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육의 차원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세계는 4차원에 속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3차원에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는 4차원의 세계를 알 수 없으므로 성령을 보내셔서 4차원의 세계를 알고 들어올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 영의 차원에 들어오면 4차원의 역사 가운데 믿음으로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됩니다. 영육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으며 각색 질병을 치료받는 등 응답과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2. 육과 영의 상반되는 차이점
그러면 육과 영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육의 차원에서 벗어나 영의 차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육과 영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로, 자기의 유익을 좇는 것이 육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는 것은 영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룻은 원래 모압이라는 이방 여인으로,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10년 만에 자녀도 없이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는 룻 외에도 일찍 남편을 여읜 오르바라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한두 번 뿌리치다가 결국 시어머니에게 입맞추고 떠나갔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결국 룻은 시어머니의 고향인 이스라엘로 함께 가서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으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기다가 부유한 친족인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게 되지요.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 오벳으로, 룻은 이방 여인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은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무익하고 해로울지라도 순전한 마음으로 바른 양심을 좇아 선한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의 마음과 행함을 기뻐하시고 축복으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무리 자기에게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룻처럼 선한 양심의 도리를 좇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과 영을 정확히 구분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육이 발견되면 즉시 벗어 버려야 하며 이렇게 육을 벗고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신속히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둘째로,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 육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의를 굳게 지키는 것이 영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 요셉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 목숨을 걸고라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사자굴에 던짐받은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사자의 입을 봉해 주셨으므로 조금도 상치 않았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조금도 타지 않고 건짐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꿈을 풀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은 물론, 왕 다음 가는 치리자가 되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부탁받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의와 타협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요. 재물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니 바른 길을 떠나 불의와 타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사랑치 못하고,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거나 자신에게 은혜를 끼친 사람에게는 치우치거나 편견을 가지며 심지어는 거짓 증인까지도 되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서 정도를 좇지 않고 치우치는 것, 편견을 갖는 것,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이나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무조건 좇는 것 등이 타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육의 차원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육적인 것에 치우쳐 있으면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낸다 해도 축복받지 못하고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결국 생명이요, 축복이 됩니다.
셋째로, 육이 변하고 사라지며 썩어지는 것이라면 영은 변치 아니하고 사라지지 아니하며 온전하게 완성되는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육의 속성은 자기 유익을 구하며 변질되고 썩어지는 것이므로 육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치 않고 배신하며 대화는 물론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한다 해 놓고도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이내 마음이 변하고, 충성한다 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맞지 않으면 쉽게 떠나 버립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상대에게 허물이 있을 때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또 한번 사랑했으면 비록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사랑하며 항상 곁에서 권면하고 위로가 되어 주며 끝까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성경상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그에 대한 보응으로 큰 연단을 받습니다. 바로 자기 아들 압살롬이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도 빼앗기고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으니 다윗 왕을 따라다녀 봐야 의식주 문제도 해결할 길이 막막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은 비록 섬기는 왕이 그러한 신세가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붙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육의 사람들은 이내 다윗 왕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붙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영과 육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영은 비록 자신에게 손해가 가고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배신하는 마음이 결단코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좌우로 치우치며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간사한 마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요, 참이며 변함없는 진실 자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에 있는 사람에게는 응답해 주시지 않고 영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유입니다. 변하고 썩어지고 사라질 것을 위해 응답해 주시면 오히려 누룩이 자라 음식 전체를 썩게 하는 것같이 결국 더욱 육으로 치우쳐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영을 좇는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조금도 육에 치우치지 않았고 얼마든지 자신의 입장을 내세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일말의 사욕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범사에 감사하며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녔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졌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들어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