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549 PAGE : 104/109
2005-12-30
제52과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사 60:1-3
읽을말씀 : 사 60:1-3 | 외울말씀 : 사 60:1
교육목표 :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히 비추는 빛의 자녀로 나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밤이 깊고 어두움이 짙어갈수록 사람들은 빛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그 가치는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관영하여 날로 어두워져 가는 이 세대 속에서 비추이는 그리스도의 빛은 수많은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있으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 찬란히 그리스도의 빛을 발함으로 세상의 길잡이와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빛을 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만방에 빛을 발하는 복된 삶
땅에 심겨진 작은 씨앗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 씨앗이 썩어서 싹이 나고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운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한 알의 씨가 썩어져 열매를 맺는 원리는 비단 식물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2:24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사람 또한 주님 안에서 죽어질 때 풍성한 열매를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육을 죽이고 온전히 영으로 새롭게 태어났을 때 이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빌립보서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만방에 빛을 발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
베드로는 본래 평범한 어부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큰 권능을 받아 빛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자 그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생계수단이었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곧 제자로 부름받은 순간부터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렸다는 것을 뜻하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된 길을 가기 시작한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에 관한 한 어느 누구보다도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지 않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지요.
이와 같은 체험은 베드로에게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이론과 경험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 앞에 자신의 모든 어두움이 드러남을 느낀 베드로는 그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이에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3. 육신의 생각을 깨뜨린 베드로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배를 타고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배로 다가오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며 참으로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라" 명하셨고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담대한 믿음을 내보였던 베드로가 바람이 이는 것을 보자 무서워하다가 그만 물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했을 때에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바람을 보고 무섭다는 생각을 하니 이내 의심이 생겨 물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영적인 믿음, 곧 참믿음을 소유하는 데 있어 방해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후 10:5). 베드로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신속히 믿음이 성장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영적인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마 16:16).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축복하셨습니다(마 16:18-19). 그런데 이러한 축복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베드로는 더 빛으로 변화되어야 했습니다. 정녕 육신의 생각은 모두 남김없이 빼내어야 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였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큰 깨우침을 얻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말하지요. 이는 스승을 생각하는 제자의 갸륵한 마음이 담긴 말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지요. 이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는 사단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한 대로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다고 해서 힘들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으로 나아가는 축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4. 믿음과 순종의 차원에 들어간 베드로
어느 날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7:2-5을 보면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산 사건"이라고 말하는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증시키심과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인 사귐을 갖는 시간이었지요. 베드로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한층 더 신속히 변화되어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따를 수 있는 온전한 순종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는다고 시비하는 사람들을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지고 입을 열면 그 안에 돈 한 세겔이 있을 터이니 그것으로 세를 내도록 지시하십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말씀에도 능히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5.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이룬 베드로
믿음과 순종의 차원에 들어간 베드로는 한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의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고 이를 깨뜨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당당히 고백하지만(마 26:31-33) 막상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하자 그 역시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는 더욱 깨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면 시험이 닥쳐오는 순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의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유익 앞에서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100퍼센트 믿고 순복해 나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이룰 수 있고 이러한 의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철저히 깨뜨림으로 후일 주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큰 영광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게 되는데,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말씀의 권세가 따랐고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던 것이지요. 사도행전 5:15을 보면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말씀할 정도로 큰 권능이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 세대는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고 있는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12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말씀한 대로 사랑이 식어진 세대가 되었으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마지막 때가 임박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마 24:7-8). 바로 이러한 때이기에 빛이 더욱 필요한 것이요, 확실한 권세와 능력이 따르는 빛의 갑옷을 입은 빛의 자녀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진리로 일구어 나감으로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히 비추는 빛의 자녀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히 비추는 빛의 자녀로 나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밤이 깊고 어두움이 짙어갈수록 사람들은 빛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그 가치는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관영하여 날로 어두워져 가는 이 세대 속에서 비추이는 그리스도의 빛은 수많은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있으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되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욱 찬란히 그리스도의 빛을 발함으로 세상의 길잡이와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은 빛을 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만방에 빛을 발하는 복된 삶
땅에 심겨진 작은 씨앗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이 씨앗이 썩어서 싹이 나고 자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운 느낌마저 듭니다. 그런데 한 알의 씨가 썩어져 열매를 맺는 원리는 비단 식물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2:24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사람 또한 주님 안에서 죽어질 때 풍성한 열매를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육을 죽이고 온전히 영으로 새롭게 태어났을 때 이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빌립보서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만방에 빛을 발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
베드로는 본래 평범한 어부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큰 권능을 받아 빛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자 그 말씀을 듣고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생계수단이었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곧 제자로 부름받은 순간부터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렸다는 것을 뜻하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된 길을 가기 시작한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에 관한 한 어느 누구보다도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지 않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지요.
이와 같은 체험은 베드로에게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지식과 이론과 경험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 앞에 자신의 모든 어두움이 드러남을 느낀 베드로는 그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이에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둔 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3. 육신의 생각을 깨뜨린 베드로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배를 타고 풍랑 이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배로 다가오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소리를 지르자 예수님께서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며 참으로 담대한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라" 명하셨고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담대한 믿음을 내보였던 베드로가 바람이 이는 것을 보자 무서워하다가 그만 물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했을 때에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나 바람을 보고 무섭다는 생각을 하니 이내 의심이 생겨 물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영적인 믿음, 곧 참믿음을 소유하는 데 있어 방해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고후 10:5). 베드로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신속히 믿음이 성장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영적인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마 16:16).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축복하셨습니다(마 16:18-19). 그런데 이러한 축복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베드로는 더 빛으로 변화되어야 했습니다. 정녕 육신의 생각은 모두 남김없이 빼내어야 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였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큰 깨우침을 얻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말하지요. 이는 스승을 생각하는 제자의 갸륵한 마음이 담긴 말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지요. 이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는 사단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7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말씀한 대로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기 때문에 이러한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다고 해서 힘들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으로 나아가는 축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4. 믿음과 순종의 차원에 들어간 베드로
어느 날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7:2-5을 보면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산 사건"이라고 말하는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증시키심과 동시에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인 사귐을 갖는 시간이었지요. 베드로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한층 더 신속히 변화되어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따를 수 있는 온전한 순종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는다고 시비하는 사람들을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지고 입을 열면 그 안에 돈 한 세겔이 있을 터이니 그것으로 세를 내도록 지시하십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말씀에도 능히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5.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이룬 베드로
믿음과 순종의 차원에 들어간 베드로는 한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의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고 이를 깨뜨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당당히 고백하지만(마 26:31-33) 막상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하자 그 역시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였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듣고는 더욱 깨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면 시험이 닥쳐오는 순간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보기에 의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유익 앞에서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100퍼센트 믿고 순복해 나갈 때 그 안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이룰 수 있고 이러한 의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체험을 통해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철저히 깨뜨림으로 후일 주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큰 영광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게 되는데,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놀라운 말씀의 권세가 따랐고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던 것이지요. 사도행전 5:15을 보면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말씀할 정도로 큰 권능이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 세대는 어두움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고 있는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12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말씀한 대로 사랑이 식어진 세대가 되었으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마지막 때가 임박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마 24:7-8). 바로 이러한 때이기에 빛이 더욱 필요한 것이요, 확실한 권세와 능력이 따르는 빛의 갑옷을 입은 빛의 자녀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진리로 일구어 나감으로 세계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히 비추는 빛의 자녀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어두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2-23
제51과주님은 누구의 구주이신가
마 2:1-12
읽을말씀 : 마 2:1-12 | 외울말씀 : 마 2:11
교육목표 :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왜 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으며 동방박사들이 세 가지 예물을 드린 이유는 무엇인지 영적인 의미를 깨우쳐 알게 한다.
1.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온 인류의 축복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으로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지요(마 1:18-25). 그런데 약 2000여 년 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에도 불구하고 호화로운 곳이 아닌, 아무 보잘것없는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눅 2:3-7). 이는 전도서 3:18에 말씀한 대로 사람들이 짐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심으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으니 혼의 지배를 받는 혼의 사람이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며 죄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혼의 사람이 되어 버린 인류를 다시금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헐기 위해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참된 양식, 곧 영의 양식이 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사람의 죽었던 영이 살아나 영의 사람으로 성장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1-55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이 죽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 사람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자녀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친히 영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영의 양식을 먹는 사람마다 죄사함을 받고 참생명을 얻어 영생하게 하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기쁨으로 담당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머리 숙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마태복음 2:1-12에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으며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고, 헤롯 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 예수를 찾거든 자기에게 고하여 자기도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하는데, 이는 아기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박사들에게 꿈으로 헤롯 왕에게 가지 말 것을 지시하시고,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에게 역사하셔서 애굽으로 피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았던 것처럼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땅에는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 또한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누가복음 2:8-20에 보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주었고 목자들은 이 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양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누가복음 2:25-38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또한 '안나'라는 여선지자 역시 나이 많아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는데, 결국 이들은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속히 오실 주님을 증거하지만(계 22:20),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을 마음 중심에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하나님께서 예언해 놓으신 모든 말씀은 알았어도 막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못했던 외식주의자들처럼, 교회에 다니며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알긴 알아도 속히 오실 주님을 중심에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식주의자들처럼 외모만 경건할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먼저 경건하여지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늘 깨어 기도함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의 의미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세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것,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만물이 썩어 없어질 것들이므로 황금, 유향, 몰약도 결국은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예물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변치 아니하고 썩지 아니할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세 가지 예물을 드린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1) 황금의 의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황금은 재물과 부귀를 뜻합니다. 그런데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고 했으니 황금은 또한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풍족하였으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는 저주를 받아 가난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친히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보잘것없는 짐승의 구유에 누이셨고 오히려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고후 8:9).
또한 부의 상징인 황금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귀히 여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영생을 사모하며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2) 유향의 의미
유향이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주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죄악들을 대속해 주신 것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23:27을 보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했고, 마태복음 15:11에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여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므로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드린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3) 몰약의 의미
몰약은 고대로부터 방향제 및 방부제로 사용되었으며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등에 쓰이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썩지 않게 뿌려지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리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사람이라도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몰약을 예물로 드린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이로써 우리의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 성탄절의 영적인 의미
예수님께 경배하며 예물을 드린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조건 만인의 구주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깨어 있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시는 분이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듯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황금 곧 세상의 부귀, 영화, 명예를 주님 앞에 드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천국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향 곧 우리의 마음을 모두 주님께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또한 몰약, 곧 우리의 썩어 없어질 육체를 주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나갈 뿐 아니라, 오직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과 영생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을 맞아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황금과 유향, 몰약이 뜻하는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받으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고백하시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성탄절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왜 구유에서 태어나셔야 했으며 동방박사들이 세 가지 예물을 드린 이유는 무엇인지 영적인 의미를 깨우쳐 알게 한다.
1.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온 인류의 축복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으로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이지요(마 1:18-25). 그런데 약 2000여 년 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에도 불구하고 호화로운 곳이 아닌, 아무 보잘것없는 짐승의 먹이통인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눅 2:3-7). 이는 전도서 3:18에 말씀한 대로 사람들이 짐승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심으로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첫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으니 혼의 지배를 받는 혼의 사람이 되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며 죄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혼의 사람이 되어 버린 인류를 다시금 영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헐기 위해 친히 대속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참된 양식, 곧 영의 양식이 되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사람의 죽었던 영이 살아나 영의 사람으로 성장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51-55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이 죽어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 사람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자녀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해 친히 영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영의 양식을 먹는 사람마다 죄사함을 받고 참생명을 얻어 영생하게 하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기쁨으로 담당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머리 숙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마태복음 2:1-12에 보면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으며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났고, 헤롯 왕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준 대로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기 예수를 찾거든 자기에게 고하여 자기도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고 하는데, 이는 아기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박사들에게 꿈으로 헤롯 왕에게 가지 말 것을 지시하시고, 예수님의 육의 부친인 요셉에게 역사하셔서 애굽으로 피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았던 것처럼 영안이 열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땅에는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 또한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누가복음 2:8-20에 보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주었고 목자들은 이 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양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누가복음 2:25-38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또한 '안나'라는 여선지자 역시 나이 많아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는데, 결국 이들은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돌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속히 오실 주님을 증거하지만(계 22:20),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을 마음 중심에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당시 하나님께서 예언해 놓으신 모든 말씀은 알았어도 막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못했던 외식주의자들처럼, 교회에 다니며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알긴 알아도 속히 오실 주님을 중심에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식주의자들처럼 외모만 경건할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먼저 경건하여지며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늘 깨어 기도함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의 의미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세 가지 예물을 드렸습니다.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것,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만물이 썩어 없어질 것들이므로 황금, 유향, 몰약도 결국은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예물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변치 아니하고 썩지 아니할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세 가지 예물을 드린 영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1) 황금의 의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귀히 여기는 황금은 재물과 부귀를 뜻합니다. 그런데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고 했으니 황금은 또한 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에는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풍족하였으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는 저주를 받아 가난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가난을 대속해 주시기 위해 친히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보잘것없는 짐승의 구유에 누이셨고 오히려 우리를 부요케 하셨습니다(고후 8:9).
또한 부의 상징인 황금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귀히 여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영생을 사모하며 아름다운 천국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2) 유향의 의미
유향이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주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죄악들을 대속해 주신 것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23:27을 보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했고, 마태복음 15:11에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여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므로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드린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3) 몰약의 의미
몰약은 고대로부터 방향제 및 방부제로 사용되었으며 즙액은 향수, 의료품, 구강 소독 등에 쓰이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썩지 않게 뿌려지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리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사람이라도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몰약을 예물로 드린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이로써 우리의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4. 성탄절의 영적인 의미
예수님께 경배하며 예물을 드린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조건 만인의 구주가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깨어 있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시는 분이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 몰약을 예물로 드렸듯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황금 곧 세상의 부귀, 영화, 명예를 주님 앞에 드리고 영원히 썩지 아니할 천국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향 곧 우리의 마음을 모두 주님께 드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또한 몰약, 곧 우리의 썩어 없어질 육체를 주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나갈 뿐 아니라, 오직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과 영생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절을 맞아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황금과 유향, 몰약이 뜻하는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넘치게 받으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고백하시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2-16
제50과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4
읽을말씀 : 롬 13:11-14 | 외울말씀 : 롬 13:12
교육목표 :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온전히 빛의 갑옷을 입음으로 항상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삶을 영위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고가의 옷을 입으며 만족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이러한 모습이 조금도 부럽지 않지요. 잠시 잠깐인 이 땅의 삶보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특별히 입으라 하신 옷이 있는데 바로 빛의 갑옷입니다. 빛의 갑옷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의 광채를 두른 너무나 아름다운 옷으로, 바로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짜인 옷이지요.
그러면 빛의 갑옷을 입으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며,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세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첫장을 열면 천지만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천지를 조성하시고 그 안에 만물을 이루시며, 또한 사람을 살게 하셨을까요? 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고하여 경작하신 후에 하나님의 뜻에 합한 참자녀들을 찾아 천국에서 함께 영원히 사랑을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알곡된 성도들을 언제 추수하시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1:11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하셨으니 주님께서 공중 재림하실 때가 바로 추수 때이지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천국에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면 알곡된 성도들을 추수하고자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따라서 본문을 보면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말씀하시며 항상 깨어 빛 가운데 거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할 것을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2. 항상 깨어 빛 가운데 거하려면
항상 깨어 있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것이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잠언 4:23을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씀했고 잠언 10:19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훈하셨으며, 베드로전서 1:15에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권면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입술, 행실 등이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와 자신의 본분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 등 여러 가지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선이 임한 만큼 성령의 소욕을 좇게 되지만 악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비진리를 좇아 행하므로 범사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어두움의 일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방탕이란 무절제하고 방종한 생활로 정돈되지 못한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본능대로 행동하는 동물과 달리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를 지키는 것이 단정한 삶이라면 자신의 욕망을 좇아 원하는 것을 취하려고 정돈된 삶을 저버리는 것이 방탕입니다. 색욕을 좇아 음란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나 술에 취해 살아가는 등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술 취함 또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입니다.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도 혹자는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합리화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대로 오직 성령의 충만함 속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호색과 음란이 있는데, 이는 사람이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무절제하게 음욕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연애나 동물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수간(獸姦)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음란의 사전적 의미는 "음탕하고 난잡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런 일들은 세상 도덕이나 윤리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이러한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 호색 등이 정욕을 좇아 행하는 어두움의 일이라면 쟁투와 시기 등은 물질이나 명예 등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좇아 나오는 어두움의 일들이지요. 야고보서 4:1-2을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거나 상대가 자신보다 나을 때 생기는 시기도 이와 같은 맥락이지요.
이처럼 어두움의 일들을 행하는 사람은 단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고 말과 행실도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신속히 어두움의 일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빛의 갑옷을 입으려면
빛의 갑옷을 입기 위해서는 정욕을 좇아 육신의 일을 도모하려는 속성을 모두 벗어 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니(요 1:14) 말씀 자체가 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66권 말씀을 배우는 대로 지켜 행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말씀의 빛으로 옷을 입으면 이전에 정욕을 좇아 행하던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반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을 걸고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영적인 장수의 수준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신 5:8-9)으로 옷을 입었기에 풀무불에 던져질 위협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빛의 갑옷을 입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범사에 지킴을 받으며 진리로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을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인 전투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는 말씀같이 원수 마귀 사단은 한 영혼이라도 더 사망으로 이끌기 위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같이 치열한 영계의 전투에서 우리가 항상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직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함
먼저,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5:24 말씀과 같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의지도 감정도 오직 하나님께 맡겨 진리대로만 행하는 사람들이지요.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에스더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 두려움과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욕심을 끊고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행함으로 결국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요한계시록 2:10의 말씀이 임해 있습니다. 즉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러한 마음이 사도 바울에게는 빛의 갑옷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초대교회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을 열심으로 핍박했던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한 번 주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은 이후 돌변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다하였습니다. 때로는 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으며 강도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굶주림에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또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갔어도 주님을 증거했지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상급을 생각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마음이 사도 바울의 빛의 갑옷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음 중심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가 최고의 선으로, 온전히 빛에 거한 것이니 어두움의 세력이 감히 만지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빛의 갑옷을 입고 영적 장수들이 되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것처럼 명철을 통해 바른 길로 나가며, 사단의 회를 깨뜨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5. 빛의 갑옷을 입어 축복받은 믿음의 선진들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은 일국의 왕까지 그 앞에 머리를 숙일 정도로 온전한 빛의 갑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선한 도리를 좇기를 즐거워하므로 빛의 갑옷을 입었던 룻은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지요. 그런가 하면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가 감히 해칠 수 없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건짐받았지요. 또한 불의와 타협지 않는 빛의 갑옷을 입은 요셉은 결국 왕 다음 가는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시편 91:14에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알아 그분의 뜻을 좇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말씀하신 대로 설령 시험과 환난이 왔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고 지키시니 오히려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온전히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받으며 이 땅의 모든 싸움이 마치는 날까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온전히 빛의 갑옷을 입음으로 항상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삶을 영위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고가의 옷을 입으며 만족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이러한 모습이 조금도 부럽지 않지요. 잠시 잠깐인 이 땅의 삶보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특별히 입으라 하신 옷이 있는데 바로 빛의 갑옷입니다. 빛의 갑옷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의 광채를 두른 너무나 아름다운 옷으로, 바로 성경 66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짜인 옷이지요.
그러면 빛의 갑옷을 입으려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며,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은 과연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세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첫장을 열면 천지만물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천지를 조성하시고 그 안에 만물을 이루시며, 또한 사람을 살게 하셨을까요? 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고하여 경작하신 후에 하나님의 뜻에 합한 참자녀들을 찾아 천국에서 함께 영원히 사랑을 나누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알곡된 성도들을 언제 추수하시는 것일까요? 사도행전 1:11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말씀하셨으니 주님께서 공중 재림하실 때가 바로 추수 때이지요.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천국에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고 때가 이르면 알곡된 성도들을 추수하고자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따라서 본문을 보면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말씀하시며 항상 깨어 빛 가운데 거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려야 할 것을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2. 항상 깨어 빛 가운데 거하려면
항상 깨어 있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것이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잠언 4:23을 보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말씀했고 잠언 10:19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훈하셨으며, 베드로전서 1:15에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권면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입술, 행실 등이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와 자신의 본분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방탕과 술 취함, 음란과 호색, 쟁투와 시기 등 여러 가지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선이 임한 만큼 성령의 소욕을 좇게 되지만 악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비진리를 좇아 행하므로 범사에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어두움의 일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방탕이란 무절제하고 방종한 생활로 정돈되지 못한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본능대로 행동하는 동물과 달리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를 지키는 것이 단정한 삶이라면 자신의 욕망을 좇아 원하는 것을 취하려고 정돈된 삶을 저버리는 것이 방탕입니다. 색욕을 좇아 음란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나 술에 취해 살아가는 등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술 취함 또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입니다.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도 혹자는 취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합리화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대로 오직 성령의 충만함 속에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호색과 음란이 있는데, 이는 사람이 지켜야 할 선을 넘어 무절제하게 음욕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성연애나 동물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수간(獸姦)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또한 음란의 사전적 의미는 "음탕하고 난잡함"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런 일들은 세상 도덕이나 윤리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이러한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 호색 등이 정욕을 좇아 행하는 어두움의 일이라면 쟁투와 시기 등은 물질이나 명예 등을 얻고자 하는 욕심을 좇아 나오는 어두움의 일들이지요. 야고보서 4:1-2을 보면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거나 상대가 자신보다 나을 때 생기는 시기도 이와 같은 맥락이지요.
이처럼 어두움의 일들을 행하는 사람은 단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고 말과 행실도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 신속히 어두움의 일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빛의 갑옷을 입으려면
빛의 갑옷을 입기 위해서는 정욕을 좇아 육신의 일을 도모하려는 속성을 모두 벗어 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니(요 1:14) 말씀 자체가 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66권 말씀을 배우는 대로 지켜 행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말씀의 빛으로 옷을 입으면 이전에 정욕을 좇아 행하던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반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인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을 걸고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영적인 장수의 수준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신 5:8-9)으로 옷을 입었기에 풀무불에 던져질 위협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빛의 갑옷을 입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범사에 지킴을 받으며 진리로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12을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인 전투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는 말씀같이 원수 마귀 사단은 한 영혼이라도 더 사망으로 이끌기 위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같이 치열한 영계의 전투에서 우리가 항상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직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의 행함
먼저,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5:24 말씀과 같이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의지도 감정도 오직 하나님께 맡겨 진리대로만 행하는 사람들이지요. 구약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에스더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 두려움과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욕심을 끊고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행함으로 결국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요한계시록 2:10의 말씀이 임해 있습니다. 즉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을 당한다 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러한 마음이 사도 바울에게는 빛의 갑옷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초대교회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을 열심으로 핍박했던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한 번 주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은 이후 돌변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다하였습니다. 때로는 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으며 강도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굶주림에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또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갔어도 주님을 증거했지요.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상급을 생각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마음이 사도 바울의 빛의 갑옷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마음 중심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가 최고의 선으로, 온전히 빛에 거한 것이니 어두움의 세력이 감히 만지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빛의 갑옷을 입고 영적 장수들이 되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것처럼 명철을 통해 바른 길로 나가며, 사단의 회를 깨뜨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5. 빛의 갑옷을 입어 축복받은 믿음의 선진들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은 아브라함은 일국의 왕까지 그 앞에 머리를 숙일 정도로 온전한 빛의 갑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선한 도리를 좇기를 즐거워하므로 빛의 갑옷을 입었던 룻은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지요. 그런가 하면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가 감히 해칠 수 없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머리털 하나 그슬리지 않고 건짐받았지요. 또한 불의와 타협지 않는 빛의 갑옷을 입은 요셉은 결국 왕 다음 가는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시편 91:14에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알아 그분의 뜻을 좇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말씀하신 대로 설령 시험과 환난이 왔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고 지키시니 오히려 영화롭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라도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여 온전히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받으며 이 땅의 모든 싸움이 마치는 날까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2-09
제49과네 의와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시 37:4-6
읽을말씀 : 시 37:4-6 | 외울말씀 : 시 37:4-6
교육목표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므로 응답받고 축복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시편 37:4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빛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을 모두 벗어 버리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빛과 어두움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아직 벗어 버리지 못한 어두움은 과연 무엇인지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에 대해 몇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로 인해 투기하지 말아야
시편 37:1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어두움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행악자들의 불의를 목격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되는 것 같아 보이면 불평하거나 내심 투기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어두움에 속한 일입니다.
물론 여호와를 기뻐하기 위한 더욱 적극적인 신앙 자세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차원을 넘어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는 것입니다(시편 37:3).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실한 보상이 주어지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성실한 은혜에 자족함으로 진정 여호와를 기뻐하는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37:2에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말씀한 대로 악인이 잘되는 것은 풀이 곧 베임을 당하고 푸른 채소가 쇠잔하여짐과 같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4:19-20에도 보면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말씀했지요. 악인의 종국이 멀지 않지만 의인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할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2. 여호와를 기뻐하는 방법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이성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만 "믿습니다" 고백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 생명도 드릴 수 있는 믿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이러한 참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선한 중심을 보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하였습니다. 당시 지배국가의 권세 있는 백부장이 육적으로 볼 때는 피지배국의 한 사람에 불과한 예수님께 나아와 이와 같은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 마음이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한 백부장은 이어 말하기를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기이히 여기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시며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 말씀을 통해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분야는 시편 37:7에 기록되어 있듯이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으로 인해 불평하지 않으며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이란, 자신의 방식에 따라 번영하는 사람으로, 앞서 시편 37:1을 통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거듭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4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 앞에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은 바로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앞서 행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의 행함이기에 가장 적극적이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하며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이 얻는 결과
앞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마음가짐은 행악자들이 누리는 일시적인 형통함을 불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인이 잘 되는 것을 투기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성숙한 단계는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는 신앙입니다(시편 37:5). 바로 이러한 신앙이 되면 그 의가 빛같이 나타나며 그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드러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을 알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행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셔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간섭하셔서 그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의가 빛으로 비유된다면 공의는 태양이 가장 작열하는 정오의 빛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나 보기에 의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맞대응하여 이겨야 할 경우도 있겠으나 때로 피해야 할 때는 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숨어야 할 때는 숨으시고 피해야 할 때는 피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따라서 우리가 의를 행하되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하시는 의를 행해야 하며, 바로 이러한 의가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빛으로 드러나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나름대로 의를 추구하며 산다 하면서도 자신의 악을 발견하지 못하여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해를 가하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금방 불편해지고 분하여 견디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이 속한 조직의 화평이 깨어지고 상대가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이 자기 보기에 아무리 의로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감정과 악을 이기지 못하는 어두움임을 본문을 통해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받은들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다 보고 계시니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티와 허물이 보이는 만큼 상대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도 불의가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3-5을 보면 형제의 티가 보이는 사람의 눈 속에는 그 티보다 훨씬 큰 들보가 있다는 말씀의 비유로 자신은 의로운 양 남을 비판하고 헤아리는 것은 외식이요, 더 큰 악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4. 여호와를 기대하는 사람의 기업
시편 37:9-11을 보면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진정한 축복인 줄을 알고 그분만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이 운행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생사화복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맡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름 낀 하늘 아래서도 햇빛을 기대하듯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의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정도가 달라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또한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동일하시지만 사람들 편에서 얼마큼 여호와를 기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응답하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밀한 분야까지 하나님의 간섭을 받아 더 온전하게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는다 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기대하고 모든 문제를 맡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5.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의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면서 과연 그들의 중심과 마음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헌신적이었는지 우리 자신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룻이라는 여인을 상고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은 성경상에 소개된 룻의 단면적인 모습을 통해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룻과 흡사한 점들이 있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룻과 비교해 보며 "나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 대한 섬김과 예우가 각별하며, 여러 모로 선하며 지혜롭고 현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하나님께서 룻을 높이시고 기뻐하셨던 데에는 룻의 단면적인 착함이나 의로움, 진실함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좋은 심성을 룻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않는 시어머니에 대한 헌신이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었지만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룻의 행함이나 마음 됨됨이와 인물 됨됨이를 빛되신 하나님께서는 다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표면적인 장점만 볼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됨에 관해 그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가를 깨닫고 종합하여 분별할 줄 알아 우리 자신을 온전케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며 정도를 좇아 행하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므로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향한 의로움이 큰 빛을 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서도 넓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므로 응답받고 축복받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시편 37:4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빛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을 모두 벗어 버리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빛과 어두움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아직 벗어 버리지 못한 어두움은 과연 무엇인지를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에 대해 몇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지 말며 불의한 자로 인해 투기하지 말아야
시편 37:1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어두움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행악자들의 불의를 목격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잘되는 것 같아 보이면 불평하거나 내심 투기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어두움에 속한 일입니다.
물론 여호와를 기뻐하기 위한 더욱 적극적인 신앙 자세는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차원을 넘어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는 것입니다(시편 37:3).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실한 보상이 주어지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성실한 은혜에 자족함으로 진정 여호와를 기뻐하는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편 37:2에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말씀한 대로 악인이 잘되는 것은 풀이 곧 베임을 당하고 푸른 채소가 쇠잔하여짐과 같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4:19-20에도 보면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말씀했지요. 악인의 종국이 멀지 않지만 의인의 영광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악자로 인해 불평하거나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할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2. 여호와를 기뻐하는 방법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이성적으로 믿을 수 있을 때만 "믿습니다" 고백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 생명도 드릴 수 있는 믿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이러한 참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백부장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선한 중심을 보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하였습니다. 당시 지배국가의 권세 있는 백부장이 육적으로 볼 때는 피지배국의 한 사람에 불과한 예수님께 나아와 이와 같은 고백을 했다는 것은 그 마음이 참으로 선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또한 백부장은 이어 말하기를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기이히 여기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고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시며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 말씀을 통해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분야는 시편 37:7에 기록되어 있듯이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으로 인해 불평하지 않으며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자기 길이 형통한 사람이란, 자신의 방식에 따라 번영하는 사람으로, 앞서 시편 37:1을 통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거듭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4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 앞에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은 바로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시고 앞서 행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는 믿음의 행함이기에 가장 적극적이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하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하며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이 얻는 결과
앞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마음가짐은 행악자들이 누리는 일시적인 형통함을 불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악인이 잘 되는 것을 투기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성숙한 단계는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는 신앙입니다(시편 37:5). 바로 이러한 신앙이 되면 그 의가 빛같이 나타나며 그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드러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흔히 사람들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을 알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행치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셔서 마음의 소원에 응답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간섭하셔서 그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의가 빛으로 비유된다면 공의는 태양이 가장 작열하는 정오의 빛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나 보기에 의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맞대응하여 이겨야 할 경우도 있겠으나 때로 피해야 할 때는 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숨어야 할 때는 숨으시고 피해야 할 때는 피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요.
따라서 우리가 의를 행하되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하시는 의를 행해야 하며, 바로 이러한 의가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빛으로 드러나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나름대로 의를 추구하며 산다 하면서도 자신의 악을 발견하지 못하여 자기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해를 가하거나 악을 행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금방 불편해지고 분하여 견디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이 속한 조직의 화평이 깨어지고 상대가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이 자기 보기에 아무리 의로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감정과 악을 이기지 못하는 어두움임을 본문을 통해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받은들 그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다 보고 계시니 하나님께 맡기고 잠잠히 참아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티와 허물이 보이는 만큼 상대적으로 자신의 마음속에도 불의가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이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3-5을 보면 형제의 티가 보이는 사람의 눈 속에는 그 티보다 훨씬 큰 들보가 있다는 말씀의 비유로 자신은 의로운 양 남을 비판하고 헤아리는 것은 외식이요, 더 큰 악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4. 여호와를 기대하는 사람의 기업
시편 37:9-11을 보면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진정한 축복인 줄을 알고 그분만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이 운행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생사화복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맡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름 낀 하늘 아래서도 햇빛을 기대하듯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의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정도가 달라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또한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동일하시지만 사람들 편에서 얼마큼 여호와를 기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응답하심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밀한 분야까지 하나님의 간섭을 받아 더 온전하게 변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는다 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기대하고 모든 문제를 맡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하겠습니다.
5. 여호와를 기뻐하는 신앙의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면서 과연 그들의 중심과 마음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헌신적이었는지 우리 자신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룻이라는 여인을 상고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은 성경상에 소개된 룻의 단면적인 모습을 통해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룻과 흡사한 점들이 있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룻과 비교해 보며 "나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 대한 섬김과 예우가 각별하며, 여러 모로 선하며 지혜롭고 현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하나님께서 룻을 높이시고 기뻐하셨던 데에는 룻의 단면적인 착함이나 의로움, 진실함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좋은 심성을 룻이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 않는 시어머니에 대한 헌신이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었지만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룻의 행함이나 마음 됨됨이와 인물 됨됨이를 빛되신 하나님께서는 다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표면적인 장점만 볼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됨에 관해 그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가를 깨닫고 종합하여 분별할 줄 알아 우리 자신을 온전케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며 정도를 좇아 행하되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므로 잠잠히 참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향한 의로움이 큰 빛을 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서도 넓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2-02
제48과빛들로 나타내며
빌 2:14-18
읽을말씀 : 빌 2:14-18 | 외울말씀 : 빌 2:14-16
교육목표 :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으로 빛을 밝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태양에서부터 등대나 가로등, 집안의 작은 조명에 이르기까지 빛을 발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모든 것들의 빛의 밝기는 다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삶 가운데 이처럼 빛을 발한다면 가로등 불빛보다는 태양처럼 만방에 비출 수 있는 빛이 되길 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빛을 발하되 밝은 태양처럼 어두운 세상 가운데 진리의 빛으로 환하게 비추기를 바라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 관영된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빛을 밝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내려면 범사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빌립보서 2:14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원망과 시비가 없이 화평함을 이룰 때라야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사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려면 어떤 마음을 소유해야 할까요?
1) 흠이 없고 순전한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5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하신 말씀처럼 우리 마음이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흠이 없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흠이 없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에 흉터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만일 흉터가 전혀 없다면 자기 몸을 잘 돌보았다는 것이니 그만큼 온유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뿐만 아니라 성격도 마찬가지여서 만일 '저 사람은 참 좋은데 끊고 맺을 줄 모르는 게 흠이야'라는 등의 말을 듣는다면, 이는 바로 성격에 흠이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아무 흠이 없었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다니엘 선지자입니다. 다니엘 6:4을 보면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다' 했지요. 그는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처지에서도 왕이 지정한 음식 중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의 제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러한 것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고 대신 채소와 물을 먹고 마셨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소년 시절부터 하나님 앞에서 조금의 흠도 없이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성하여 국사를 돌아볼 때에도 명철과 총명함으로 슬기롭게 행했으며, 마음이 민첩하여 왕에게도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우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다니엘에 대하여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아무런 틈이나 허물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순전"에 대해 살펴보지요. '순전'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하고 완전함"인데 영적으로는 "온유함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을 뜻하며 흠이 없으면서 또한 옳은 것에 대해 완전히 행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순전한 사람은 그 행함에 덕이 있으므로 설령 해로운 일을 만날지라도 그것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으로 생각하면서 마음에 수용하여 모든 면에서 스스로 삼가 지켜 행합니다. 또한 험한 말이나 악한 행동은 물론 악한 생각조차도 아니하며 오직 밝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성경상에서 순전했던 사람의 예로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욥기 1:1을 보면 욥에 대해 이르기를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말씀했습니다. 또한 욥은 그 소유가 많아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사람으로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많은 선행을 베풀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욥 29:12, 31:18). 단지 물질이 많아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며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큰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욥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욥의 순전한 행함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속 중심까지 완전케 하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욥에게 시험이 시작되자 한마디로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험들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게 되었지요.
이때 욥은 결코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고백함으로 자신의 순전을 굳게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욥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던 것이지요. 욥이 비참한 모습으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때에도 욥은 오히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며 타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재앙도 겸하여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바로 욥이 진리를 잘 알지 못하고 했던 말이지만, 욥은 하나님께 대해 결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후로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욥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악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연단하셔서 더욱 온전케 하셨습니다.
오늘날처럼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이런 시험이 왔을 때 욥처럼 순전을 굳게 지키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욥처럼 말과 행실에 순전함을 지킨다면 원망과 시비할 일은 당연히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어그러지지 않고 거스리지 않는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어그러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기본적인 틀에서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교만, 자랑, 다투고 들레는 것, 혈기내는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기본적인 틀에서 이탈된 것으로, 이를 가리켜 "어그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매스컴에 보도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얼마나 어그러져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사용하는 말만 보아도 저속하고 듣기 민망한 말들이 너무 많지요.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만들게 하신 언어는 우리가 서로 아름답게 교통함을 이루게 하기 위함인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근본 의도에 많이 빗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스린다는 것은 바로 자기 위치를 떠나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순종치 아니하거나 자녀가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는 부모답게, 자녀는 자녀답게 행해야 할 텐데 이런 도리를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중요하게 여겨왔지만 오늘날은 병든 부모를 돌보지 않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를 학대하기까지 하는 참으로 자기의 본분과 위치에서 떠나 부모를 거스리는 차원을 넘어 버린 세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는 말씀의 의미와 그 방법
본문 빌립보서 2:15-16을 보면 이처럼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 안에서 이루는 모든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비춰 줌으로 그로 하여금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전도해서 성령을 받게 하기까지는 많은 수고와 인내가 필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한 사람이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하나님을 떠나간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헛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 주어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밝혀 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밝혀서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기뻐하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며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밝혀서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밝혀 줌으로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천국에 가기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그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그중에 믿음 있는 사람이 "세상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깁시다" 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들을 간증하고 가족에게 기도를 하게 하고 믿음을 심어 주었다면 바로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게 되니 가족의 믿음이 자라게 될 뿐 아니라, 주위의 일가친척이나 이웃들까지 믿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3.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생명의 말씀을 밝힌 사도 바울
본문 빌립보서 2:17-18을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주 안에서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는 차원을 넘어,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으로 곧 무익한 종의 마음을 가진 고백이지요.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참으로 넘치도록 수고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고난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마음뿐이었으니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전 세계로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뛰어난 지식이나 가문 등이 있었지만,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사도라 칭함받기에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낮춰 고백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그가 가는 길이 엄청난 가시밭길이요, 종국에는 참수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삶 전체가 오직 생명의 말씀을 밝혀 달음질하며 달려온 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많은 수고와 고생을 했지만 장차 그에게 주어질 하늘의 상급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딤후 4:7-8).
그러므로 오늘 증거된 말씀이 은혜와 능력이 되어 참으로 생명과 빛으로 나타나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으로 빛을 밝히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 주변에는 태양에서부터 등대나 가로등, 집안의 작은 조명에 이르기까지 빛을 발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모든 것들의 빛의 밝기는 다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삶 가운데 이처럼 빛을 발한다면 가로등 불빛보다는 태양처럼 만방에 비출 수 있는 빛이 되길 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빛을 발하되 밝은 태양처럼 어두운 세상 가운데 진리의 빛으로 환하게 비추기를 바라시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 관영된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빛을 밝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내려면 범사에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빌립보서 2:14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원망과 시비가 없이 화평함을 이룰 때라야 세상 사람들에게 빛들로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사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려면 어떤 마음을 소유해야 할까요?
1) 흠이 없고 순전한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15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하신 말씀처럼 우리 마음이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흠이 없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흠이 없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에 흉터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인데 만일 흉터가 전혀 없다면 자기 몸을 잘 돌보았다는 것이니 그만큼 온유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체뿐만 아니라 성격도 마찬가지여서 만일 '저 사람은 참 좋은데 끊고 맺을 줄 모르는 게 흠이야'라는 등의 말을 듣는다면, 이는 바로 성격에 흠이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아무 흠이 없었던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다니엘 선지자입니다. 다니엘 6:4을 보면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다' 했지요. 그는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처지에서도 왕이 지정한 음식 중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우상의 제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러한 것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고 대신 채소와 물을 먹고 마셨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소년 시절부터 하나님 앞에서 조금의 흠도 없이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성하여 국사를 돌아볼 때에도 명철과 총명함으로 슬기롭게 행했으며, 마음이 민첩하여 왕에게도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우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다니엘에 대하여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아무런 틈이나 허물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순전"에 대해 살펴보지요. '순전'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하고 완전함"인데 영적으로는 "온유함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을 뜻하며 흠이 없으면서 또한 옳은 것에 대해 완전히 행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순전한 사람은 그 행함에 덕이 있으므로 설령 해로운 일을 만날지라도 그것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으로 생각하면서 마음에 수용하여 모든 면에서 스스로 삼가 지켜 행합니다. 또한 험한 말이나 악한 행동은 물론 악한 생각조차도 아니하며 오직 밝은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성경상에서 순전했던 사람의 예로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을 들 수 있습니다. 욥기 1:1을 보면 욥에 대해 이르기를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말씀했습니다. 또한 욥은 그 소유가 많아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사람으로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많은 선행을 베풀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욥 29:12, 31:18). 단지 물질이 많아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며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큰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욥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욥의 순전한 행함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의 속 중심까지 완전케 하시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욥에게 시험이 시작되자 한마디로 정신 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험들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게 되었지요.
이때 욥은 결코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고백함으로 자신의 순전을 굳게 지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욥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던 것이지요. 욥이 비참한 모습으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때에도 욥은 오히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며 타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재앙도 겸하여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바로 욥이 진리를 잘 알지 못하고 했던 말이지만, 욥은 하나님께 대해 결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후로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욥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악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연단하셔서 더욱 온전케 하셨습니다.
오늘날처럼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이런 시험이 왔을 때 욥처럼 순전을 굳게 지키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욥처럼 말과 행실에 순전함을 지킨다면 원망과 시비할 일은 당연히 없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어그러지지 않고 거스리지 않는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어그러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기본적인 틀에서 빗나간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교만, 자랑, 다투고 들레는 것, 혈기내는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기본적인 틀에서 이탈된 것으로, 이를 가리켜 "어그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매스컴에 보도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얼마나 어그러져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사용하는 말만 보아도 저속하고 듣기 민망한 말들이 너무 많지요.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만들게 하신 언어는 우리가 서로 아름답게 교통함을 이루게 하기 위함인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근본 의도에 많이 빗나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스린다는 것은 바로 자기 위치를 떠나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순종치 아니하거나 자녀가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는 부모답게, 자녀는 자녀답게 행해야 할 텐데 이런 도리를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중요하게 여겨왔지만 오늘날은 병든 부모를 돌보지 않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를 학대하기까지 하는 참으로 자기의 본분과 위치에서 떠나 부모를 거스리는 차원을 넘어 버린 세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는 말씀의 의미와 그 방법
본문 빌립보서 2:15-16을 보면 이처럼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 안에서 이루는 모든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고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생명의 말씀을 밝힌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비춰 줌으로 그로 하여금 빛으로 나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전도해서 성령을 받게 하기까지는 많은 수고와 인내가 필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한 사람이 어떤 문제에 부딪혀서 하나님을 떠나간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헛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 주어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밝혀 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밝혀서 어떤 문제에 부딪혀도 기뻐하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며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밝혀서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밝혀 줌으로 모든 것을 용납하면서 천국에 가기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그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을 때 그중에 믿음 있는 사람이 "세상 방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깁시다" 하며 하나님의 살아 계신 증거들을 간증하고 가족에게 기도를 하게 하고 믿음을 심어 주었다면 바로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게 되니 가족의 믿음이 자라게 될 뿐 아니라, 주위의 일가친척이나 이웃들까지 믿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3.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생명의 말씀을 밝힌 사도 바울
본문 빌립보서 2:17-18을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말씀했습니다. 이는 주 안에서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여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는 차원을 넘어, 최고의 헌신을 고백하는 것으로 곧 무익한 종의 마음을 가진 고백이지요.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참으로 넘치도록 수고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고난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오히려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마음뿐이었으니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전 세계로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뛰어난 지식이나 가문 등이 있었지만,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요, 사도라 칭함받기에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낮춰 고백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그가 가는 길이 엄청난 가시밭길이요, 종국에는 참수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삶 전체가 오직 생명의 말씀을 밝혀 달음질하며 달려온 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많은 수고와 고생을 했지만 장차 그에게 주어질 하늘의 상급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딤후 4:7-8).
그러므로 오늘 증거된 말씀이 은혜와 능력이 되어 참으로 생명과 빛으로 나타나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1-25
제47과주의 말씀은 등이요 빛이라
시 119:100-105
읽을말씀 : 시 119:100-105 | 외울말씀 : 시 119:105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으로, 길에 빛으로 삼아 인생길을 밝히 인도받으며 항상 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오늘날과는 달리 가로등이 없던 옛날에는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밤길을 다닐 때면 환하게 비춰 주는 달빛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앞길을 환히 비춰 주는 빛이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모든 문제의 해답과 방법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등이요 빛이 된다면 아무 막힘이나 힘들 것이 없고, 지름길을 찾아 신속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인생길을 밝히 인도받아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1. 주의 말씀을 등과 빛으로 삼는 명철한 사람
시편 119:100을 보면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했습니다. 명철이란 영적으로 길이 환히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의 법도를 지키는 사람은 길이 환히 보이므로 노인보다 명철함이 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노인은 단순히 나이만 많은 연장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통해 사리를 밝히 분별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연륜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분별할 줄 알므로 그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 삶의 전반에 많은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긴다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지하시는 분으로 인생의 처음과 끝을 성경에 모두 담아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행해 나갈 때 확실하고 완전한 길로 가게 되며 결코 무너지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지요. 또한 인생을 값지고 소중하게 사용하는 길은 바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삼는 데 있는 것입니다.
2. 주의 말씀이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 되려면
1)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시편 119:101에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발을 지칭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겠다고 결정하면 그대로 움직여 주는 지체가 발이기 때문입니다.
발은 영적으로 세월의 흐름과 사람이 무엇을 추구해 가느냐를 비롯하여 삶의 전반적인 과정을 의미하므로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악한 일을 도모하거나 동참하지 않고 오직 선한 일에 힘썼다는 말씀입니다.
발을 금하여 악한 길로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걸었던 사람으로는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성실히 일한 덕분에 주인의 은총을 받아 가정 총무로서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준수한 용모를 보고 날마다 유혹을 해 오지요. 이때 요셉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하며 죄와 타협지 않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요.
이와 같이 요셉은 정도를 지킴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고, 단번에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라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지요. 이처럼 악에서 떠나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할 때 하늘로부터 지혜와 명철이 오고 형통한 길로 인도받게 됩니다.
2)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시편 119:102에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주의 규례"란 대대로 지키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들로서 일정한 규칙과 법과 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정하신 규례를 대대로 지킬 것을 명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했던 의식을 그대로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구약에서는 육의 할례를 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마음의 할례를 하듯이 규례 역시 그 영적인 의미를 계승하여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규례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지킬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명심할 수 있으며 죄와 불의에서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은 이방신들을 숭배하여 심히 하나님을 격노케 했던 악한 왕이었으나 같은 시대의 남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지요. 한번은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을 도와 아람과의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아합 왕은 혹시 적군이 자신이 왕임을 알아보고 죽일까 하여 변장까지 하고 군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전쟁 가운데 죽은 사람은 바로 아합 왕이었으며 죽은 후에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 피를 개들이 핥는 수치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과 지혜를 동원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견고한 산성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떠나지 말아야 하며, 그럴 때 주의 말씀이 등이요 빛이 되어 앞일을 내다 볼 수 있고 범사에 형통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3) 주의 말씀을 꿀을 먹는 것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인물로 다니엘을 들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유다 지파에 속한 왕족으로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 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이 융화정책으로 포로들 중에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뽑을 때 다니엘도 그중에 하나로 뽑혀 왕궁에 들어가게 되지요.
어느 날 다니엘에게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바벨론 왕에게 나아갈 때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3년 동안 왕이 지정해 준 진미와 포도주를 먹어야 하는데 그중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열흘 동안 채식과 물만 먹게 해 달라고 환관장에게 구하지요. 그 후 10일 동안 채식과 물만 먹은 결과 다니엘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아름답고 윤택하여 결국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보다 더 달고 맛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채식과 물을 먹으며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케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에게도 왕의 진미와 같은 유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의 부나 명예가, 어떤 사람에게는 학문이나 지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정과 욕심이 왕의 진미같이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같이 달게 먹었기에 그 삶이 참으로 가치 있고 형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포로의 신분에서 한 나라의 총리가 되었는가 하면,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을지라도 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들 앞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해야 합니다
시편 119:104에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주의 법도로 명철한 사람이 되면 왜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되는 것일까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하고 선과 악, 생명과 사망이 구별되면 진리를 굽게 하고 멸망으로 이끄는 악이 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일 때는 옷이나 몸에 오물이 묻어도 별로 상관치 않고 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오물이 더러운 것인 줄 알게 되면 씻거나 닦아내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무엇이며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지 모를 때는 내 안에 죄가 있어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되면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힘써 달려 나가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주님과 같이 흠도 티도 없는 성결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거짓 행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거짓 행위에 해당되는 입술의 말에는 악한 말, 망령된 말, 진실치 못한 말, 거스리는 말, 속이는 말, 패려한 말, 비방하는 말, 헛된 말, 원망하는 말 등이 있습니다.
둘째로, 남을 속이는 것 곧 물건값을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거나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등이 있지요.
셋째로,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한 것 이상의 것을 얻으려 한다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 허황된 것을 바라는 것 등이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결국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거짓 행위를 미워하라"는 것은 감정을 가지고 분을 내며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악을 미워한다는 것은 곧 악을 버리는 것이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며,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죄는 미워하되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며, 고아와 과부 등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일 등이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19:165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삼으셔서 참으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뿐 아니라 가는 길에 늘 형통함을 입어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돌려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으로, 길에 빛으로 삼아 인생길을 밝히 인도받으며 항상 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오늘날과는 달리 가로등이 없던 옛날에는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밤길을 다닐 때면 환하게 비춰 주는 달빛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되지요. 이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앞길을 환히 비춰 주는 빛이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모든 문제의 해답과 방법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등이요 빛이 된다면 아무 막힘이나 힘들 것이 없고, 지름길을 찾아 신속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인생길을 밝히 인도받아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요?
1. 주의 말씀을 등과 빛으로 삼는 명철한 사람
시편 119:100을 보면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했습니다. 명철이란 영적으로 길이 환히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의 법도를 지키는 사람은 길이 환히 보이므로 노인보다 명철함이 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노인은 단순히 나이만 많은 연장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통해 사리를 밝히 분별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연륜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분별할 줄 알므로 그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 삶의 전반에 많은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긴다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지하시는 분으로 인생의 처음과 끝을 성경에 모두 담아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행해 나갈 때 확실하고 완전한 길로 가게 되며 결코 무너지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지요. 또한 인생을 값지고 소중하게 사용하는 길은 바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삼는 데 있는 것입니다.
2. 주의 말씀이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 되려면
1)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시편 119:101에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발을 지칭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겠다고 결정하면 그대로 움직여 주는 지체가 발이기 때문입니다.
발은 영적으로 세월의 흐름과 사람이 무엇을 추구해 가느냐를 비롯하여 삶의 전반적인 과정을 의미하므로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악한 일을 도모하거나 동참하지 않고 오직 선한 일에 힘썼다는 말씀입니다.
발을 금하여 악한 길로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걸었던 사람으로는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성실히 일한 덕분에 주인의 은총을 받아 가정 총무로서 주인의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준수한 용모를 보고 날마다 유혹을 해 오지요. 이때 요셉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하며 죄와 타협지 않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요.
이와 같이 요셉은 정도를 지킴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었고, 단번에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라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지요. 이처럼 악에서 떠나 오직 주의 말씀대로 행할 때 하늘로부터 지혜와 명철이 오고 형통한 길로 인도받게 됩니다.
2)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시편 119:102에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습니다. "주의 규례"란 대대로 지키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들로서 일정한 규칙과 법과 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정하신 규례를 대대로 지킬 것을 명하셨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했던 의식을 그대로 따라 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구약에서는 육의 할례를 했지만 신약에 와서는 마음의 할례를 하듯이 규례 역시 그 영적인 의미를 계승하여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규례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지킬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명심할 수 있으며 죄와 불의에서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왕 아합은 이방신들을 숭배하여 심히 하나님을 격노케 했던 악한 왕이었으나 같은 시대의 남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지요. 한번은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을 도와 아람과의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아합 왕은 혹시 적군이 자신이 왕임을 알아보고 죽일까 하여 변장까지 하고 군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전쟁 가운데 죽은 사람은 바로 아합 왕이었으며 죽은 후에는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 피를 개들이 핥는 수치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과 지혜를 동원해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견고한 산성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떠나지 말아야 하며, 그럴 때 주의 말씀이 등이요 빛이 되어 앞일을 내다 볼 수 있고 범사에 형통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3) 주의 말씀을 꿀을 먹는 것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던 인물로 다니엘을 들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유다 지파에 속한 왕족으로 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 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이 융화정책으로 포로들 중에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들을 뽑을 때 다니엘도 그중에 하나로 뽑혀 왕궁에 들어가게 되지요.
어느 날 다니엘에게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바벨론 왕에게 나아갈 때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3년 동안 왕이 지정해 준 진미와 포도주를 먹어야 하는데 그중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열흘 동안 채식과 물만 먹게 해 달라고 환관장에게 구하지요. 그 후 10일 동안 채식과 물만 먹은 결과 다니엘의 얼굴은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아름답고 윤택하여 결국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보다 더 달고 맛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채식과 물을 먹으며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케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에게도 왕의 진미와 같은 유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의 부나 명예가, 어떤 사람에게는 학문이나 지식이, 어떤 사람에게는 정과 욕심이 왕의 진미같이 느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같이 달게 먹었기에 그 삶이 참으로 가치 있고 형통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포로의 신분에서 한 나라의 총리가 되었는가 하면,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을지라도 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들 앞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해야 합니다
시편 119:104에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주의 법도로 명철한 사람이 되면 왜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되는 것일까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하고 선과 악, 생명과 사망이 구별되면 진리를 굽게 하고 멸망으로 이끄는 악이 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일 때는 옷이나 몸에 오물이 묻어도 별로 상관치 않고 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오물이 더러운 것인 줄 알게 되면 씻거나 닦아내지요.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무엇이며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지 모를 때는 내 안에 죄가 있어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나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되면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불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힘써 달려 나가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주님과 같이 흠도 티도 없는 성결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거짓 행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거짓 행위에 해당되는 입술의 말에는 악한 말, 망령된 말, 진실치 못한 말, 거스리는 말, 속이는 말, 패려한 말, 비방하는 말, 헛된 말, 원망하는 말 등이 있습니다.
둘째로, 남을 속이는 것 곧 물건값을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한다거나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 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등이 있지요.
셋째로,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한 것 이상의 것을 얻으려 한다거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 허황된 것을 바라는 것 등이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결국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거짓 행위를 미워하라"는 것은 감정을 가지고 분을 내며 미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악을 미워한다는 것은 곧 악을 버리는 것이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며, 친히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죄는 미워하되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며, 고아와 과부 등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는 일 등이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19:165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을 발에 등이요 길에 빛으로 삼으셔서 참으로 환난 날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뿐 아니라 가는 길에 늘 형통함을 입어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돌려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1-18
제46과추수감사제
출 23:14-17
읽을말씀 : 출 23:14-17 | 외울말씀 : 출 23:16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이러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오늘날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지금도 추수감사절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추수감사제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는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역사해 주심으로 전쟁애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대하 20:20 이하).
열왕기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먹을 것이 금보다도 귀한 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마지막 양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에게 심었더니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축복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에도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이 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기니 그녀의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구원받아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믿음과 영적인 생명을 주심에 감사드리며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시대에는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이러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오늘날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지금도 추수감사절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추수감사제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는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시고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역사해 주심으로 전쟁애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대하 20:20 이하).
열왕기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먹을 것이 금보다도 귀한 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마지막 양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에게 심었더니 가뭄이 끝날 때까지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축복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에도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이 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기니 그녀의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구원받아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믿음과 영적인 생명을 주심에 감사드리며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고 마음의 소원까지도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1-11
제45과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마 5:14-16
읽을말씀 : 마 5:14-16 | 외울말씀 : 마 5:16
교육목표 : 항상 정도를 좇아 행하며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빛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모든 만물이 드러나며, 그 빛으로 말미암아 식물은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고 꽃을 피우며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또한 어두움 가운데서는 방향을 잡기 어렵고 때로 실족할 수도 있지만 밝은 빛 가운데서는 쉽게 길을 찾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곳을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진리의 등불이 되어 주고 따스한 빛이 되어 준다면 참으로 가치 있고 고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빚어져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
요한복음 8:12을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죄로 물들어 혼탁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악함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사랑과 용서로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 곧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인류를 빛으로 인도해 주셨지요. 우리도 죄악이 관영된 이 세대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 주관자인 마귀가 주관하는 대로 진리를 거스려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이 세상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빛 되신 주님을 만나 마음과 행함이 빛으로 변화된 사람이 구원의 도를 전할 때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주님께로 나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세상의 빛이 된 룻의 행함
마태복음 5:15을 보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했습니다. 즉 내가 진리의 등불이 되면 나로 인해 그 빛이 온 세상에 비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상에서 이러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룻을 들 수 있는데, 룻은 과연 어떻게 행하였기에 그 행함이 빛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어머니를 끝까지 붙좇은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에 심한 흉년이 들자 이것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 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니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뿐이었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을 떠나 귀향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에 큰 며느리 오르바는 울며 시어머니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베들레헴이 자신의 고향도 아니요, 오히려 룻의 입장에서는 모국과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하며 애원을 하지요.
뿐만 아니라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면서 자신의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습니다.
룻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먼 곳까지 홀로 가야 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하는 시어머니를 생각했기에 자신을 위한 편안한 삶을 찾아 떠나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함없는 참사랑이요 영적인 사랑이지요.
그런데 요즘 세대는 나이든 부모님을 모시기 싫어하는 등 자신의 유익만을 좇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중한 병이나 장애를 하나님 앞에 나와 치료받은 사람이 당시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고백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가는 것을 봅니다. 또 은혜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도 처음 감사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룻은 마음이 의로우니 자신에게 해로울지라도 끝까지 선을 좇아 섬김의 도리를 다하였던 것입니다.
2) 현숙한 언행과 마음가짐을 소유한 룻
모압 지방을 떠나 베들레헴에 이른 룻은 시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 이삭줍기를 하였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부유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룻에게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여인이 홀로 살아가다 보면 매일 곳이 없으므로 말이나 행동, 마음가짐 등이 단정치 못할 수도 있으나 룻은 그 모든 것이 참으로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룻기 2:10을 보면 룻은 좋은 배려를 해 준 보아스에게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했고 13절에는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어 지극히 겸비한 마음으로 보아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룻의 고백을 통해 룻이 얼마나 거룩한 입술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룻이 거룩한 입술을 가지며 진실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돈된 생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생각하는 것이 정돈되어 있으니 그 행함도 한편으로 치우침이 없이 참으로 선하고 온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이 정돈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서 분야 분야마다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3) 순종과 섬김의 본을 보여 축복받은 룻
그 당시에는 모세의 율법에 "기업 무르기 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팔았던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회복시키거나 자식 없이 죽은 사람의 대를 잇도록 해 주기 위해 죽은 사람의 미망인을 그 사망자의 친척이 취하여 대를 이을 수 있게 하는 법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바로 그 집안에 기업 무를 자 중의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하여 줌으로 복된 삶을 살게 하려고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지시했습니다(룻 3:3-4).
룻은 항상 시어머니에게 순종했고 그 말씀대로 다 지켜 행할 마음이었습니다. 다만 시어머니가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만나 평안하게 살라는 말씀에만 순종하지 않았을 뿐 그 외에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모두 순종했지요. 부모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룻이 시어머니에게 순종을 잘 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도 순종을 잘 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품을 떠나 지옥에 가라고 말씀하셔도 어찌하든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천국에 가야 하는 것처럼, 룻은 자기를 떠나라는 시어머니의 권고를 끝까지 거절하고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이는 곧 룻이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중심이니 어찌 하나님께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룻은 나오미가 시킨 대로 가만히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누운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밤중에 여인을 발견하고 "네가 누구뇨"라고 묻는 보아스에게 룻은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 라고 상대의 마음을 살 만한 지혜로운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보아스도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하고 복을 빌어 주며 룻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을 약속하였지요.
또 룻기 2:11-12을 보면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아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 룻의 행함이 어찌나 곱고 아리따운지 그 현숙함을 온 성읍이 다 안다 할 만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현숙한 여인이 되면 남편과 부모, 친구와 주위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지만, 실없는 사람이란 말을 들으면 그만큼 신뢰를 잃어 존중받지 못하고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되지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온전하고 거룩한 입술이 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심히 마음을 개조하면 깨끗하고 단물만 내는 입술이 되며 온전치 못하던 행함까지도 고쳐지게 됩니다. 걸음걸이나 앉고 서고 인사하고 대화하는 각종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정돈된 생각과 의로운 마음과 거룩한 입술이 되어지면 행함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보아스는 결국 룻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다윗 왕의 조부인 오벳입니다. 결국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게 되었으며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이 선을 좇아 정도를 행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이방 여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빛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해 주심으로 만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말씀을 통해 빛의 갑옷을 입으셔서 다툼과 절망,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와 소망, 그리고 사랑의 빛을 비추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항상 정도를 좇아 행하며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빛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모든 만물이 드러나며, 그 빛으로 말미암아 식물은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되고 꽃을 피우며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또한 어두움 가운데서는 방향을 잡기 어렵고 때로 실족할 수도 있지만 밝은 빛 가운데서는 쉽게 길을 찾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곳을 피해갈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진리의 등불이 되어 주고 따스한 빛이 되어 준다면 참으로 가치 있고 고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빚어져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
요한복음 8:12을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죄로 물들어 혼탁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악함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을 사랑과 용서로 밝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 곧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인류를 빛으로 인도해 주셨지요. 우리도 죄악이 관영된 이 세대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 주관자인 마귀가 주관하는 대로 진리를 거스려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이 세상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빛 되신 주님을 만나 마음과 행함이 빛으로 변화된 사람이 구원의 도를 전할 때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주님께로 나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세상의 빛이 된 룻의 행함
마태복음 5:15을 보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했습니다. 즉 내가 진리의 등불이 되면 나로 인해 그 빛이 온 세상에 비취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상에서 이러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로 룻을 들 수 있는데, 룻은 과연 어떻게 행하였기에 그 행함이 빛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시어머니를 끝까지 붙좇은 룻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에 심한 흉년이 들자 이것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 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니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뿐이었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을 떠나 귀향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남편도 없는 두 며느리를 불쌍히 여겨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 평안히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에 큰 며느리 오르바는 울며 시어머니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베들레헴이 자신의 고향도 아니요, 오히려 룻의 입장에서는 모국과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하며 애원을 하지요.
뿐만 아니라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면서 자신의 굳은 결심을 표명하였습니다.
룻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 먼 곳까지 홀로 가야 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하는 시어머니를 생각했기에 자신을 위한 편안한 삶을 찾아 떠나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함없는 참사랑이요 영적인 사랑이지요.
그런데 요즘 세대는 나이든 부모님을 모시기 싫어하는 등 자신의 유익만을 좇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의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중한 병이나 장애를 하나님 앞에 나와 치료받은 사람이 당시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고백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가는 것을 봅니다. 또 은혜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도 처음 감사했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룻은 마음이 의로우니 자신에게 해로울지라도 끝까지 선을 좇아 섬김의 도리를 다하였던 것입니다.
2) 현숙한 언행과 마음가짐을 소유한 룻
모압 지방을 떠나 베들레헴에 이른 룻은 시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 이삭줍기를 하였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부유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룻에게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 주었습니다.
여인이 홀로 살아가다 보면 매일 곳이 없으므로 말이나 행동, 마음가짐 등이 단정치 못할 수도 있으나 룻은 그 모든 것이 참으로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룻기 2:10을 보면 룻은 좋은 배려를 해 준 보아스에게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했고 13절에는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어 지극히 겸비한 마음으로 보아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룻의 고백을 통해 룻이 얼마나 거룩한 입술을 지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룻이 거룩한 입술을 가지며 진실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돈된 생각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생각하는 것이 정돈되어 있으니 그 행함도 한편으로 치우침이 없이 참으로 선하고 온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생각이 정돈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에서 분야 분야마다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3) 순종과 섬김의 본을 보여 축복받은 룻
그 당시에는 모세의 율법에 "기업 무르기 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팔았던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회복시키거나 자식 없이 죽은 사람의 대를 잇도록 해 주기 위해 죽은 사람의 미망인을 그 사망자의 친척이 취하여 대를 이을 수 있게 하는 법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바로 그 집안에 기업 무를 자 중의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하여 줌으로 복된 삶을 살게 하려고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고하리라" 지시했습니다(룻 3:3-4).
룻은 항상 시어머니에게 순종했고 그 말씀대로 다 지켜 행할 마음이었습니다. 다만 시어머니가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만나 평안하게 살라는 말씀에만 순종하지 않았을 뿐 그 외에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모두 순종했지요. 부모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룻이 시어머니에게 순종을 잘 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도 순종을 잘 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품을 떠나 지옥에 가라고 말씀하셔도 어찌하든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 천국에 가야 하는 것처럼, 룻은 자기를 떠나라는 시어머니의 권고를 끝까지 거절하고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이는 곧 룻이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중심이니 어찌 하나님께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룻은 나오미가 시킨 대로 가만히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누운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밤중에 여인을 발견하고 "네가 누구뇨"라고 묻는 보아스에게 룻은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 라고 상대의 마음을 살 만한 지혜로운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보아스도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하고 복을 빌어 주며 룻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을 약속하였지요.
또 룻기 2:11-12을 보면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아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 룻의 행함이 어찌나 곱고 아리따운지 그 현숙함을 온 성읍이 다 안다 할 만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현숙한 여인이 되면 남편과 부모, 친구와 주위의 사랑을 한몸에 받게 되지만, 실없는 사람이란 말을 들으면 그만큼 신뢰를 잃어 존중받지 못하고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되지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사람이 되기 원한다면 온전하고 거룩한 입술이 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심히 마음을 개조하면 깨끗하고 단물만 내는 입술이 되며 온전치 못하던 행함까지도 고쳐지게 됩니다. 걸음걸이나 앉고 서고 인사하고 대화하는 각종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정돈된 생각과 의로운 마음과 거룩한 입술이 되어지면 행함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보아스는 결국 룻을 취하여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다윗 왕의 조부인 오벳입니다. 결국 룻은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되었고 이방 여인으로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게 되었으며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이 선을 좇아 정도를 행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이방 여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빛으로 들어오면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해 주심으로 만사가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말씀을 통해 빛의 갑옷을 입으셔서 다툼과 절망,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와 소망, 그리고 사랑의 빛을 비추어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1-04
제44과빛의 열매
엡 5:8-13
읽을말씀 : 엡 5:8-13 | 외울말씀 : 엡 5:9
교육목표 : 빛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아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망의 길로 가던 사람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무질서와 혼돈에 질서를, 다툼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주시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선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갖게 되고 행복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에베소서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말씀하신 대로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의미
본문 에베소서 5:9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는데, 이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가 곧 빛의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착함이란 선하고 악의가 없는 아름다운 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자신의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불우한 이웃이나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고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은혜를 알아 공경하는 것,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실례를 범치 않는 마음,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마음, 남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 화평하고 양보하는 마음, 욕심이 없는 마음, 자랑하거나 들레지 않는 마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 등이 다 착함에 속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옳은 것을 위해 생명을 다해 전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의 의로움이란 이러한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 드리는 것,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죄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가는 것이나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자기를 깨끗케 하는 것,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반듯하고 절도있는 행함,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것, 옳은 일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 등이 다 의로움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진실함이란 세 가지 속성이 있는데 바로 거짓되지 않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해 놓고는 지키지 않거나 입술로 낸 말을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약속한 바를 지키고 한 번 정한 마음에 변함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는데 왜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흔히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보살펴 주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할 때 "저 사람은 참 착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가 선이 아니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남의 돈을 훔치려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결코 착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지요. 또한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기 싫어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면 그를 더욱 무능하게 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면 정말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단지 일하기가 싫어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조건 돈을 주기보다는 간증 등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해 줌으로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착한 행실이 빛의 열매로 나타나려면 반드시 그 안에 의로움, 즉 하나님의 의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착함과 의로움만 가지고 온전함을 이룰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진실함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가령, 수재민 돕기 모금 등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성금을 냈다면 진실이 아니므로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빛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의 차원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선행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빛 가운데 행해야 참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3. 빛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때의 축복
본문 에베소서 5:10을 보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했는데, 이는 곧 빛의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성경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삶 자체가 빛의 열매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화평함을 좇아 아랫사람인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가 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취하지 않으려는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지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선한 마음뿐만 아니라 의로운 행함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하심에 아브라함은 미처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의심 없이 믿어 드렸지요. 즉 자신이나 아내가 이미 출산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시자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세기 15:6). 이처럼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로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맺힌 진실함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진실함에 해당됩니다. 백세에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갈라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았는데도 아브라함은 조금의 원망이나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중심이 얼마나 진실했던가를 잘 보여 주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벗이라 칭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 어디를 가나 동행해 주시고 범사에 복을 주심으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셨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빛의 열매를 맺어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증거가 확실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본문 에베소서 5:11-13을 보면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책망을 통해 어두움에서 나와 빛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망은 단순히 잘못한 것을 꾸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책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초신자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를 돌아보며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혹시나 잘못한 것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버려 나갔지요. 혹 미움이나 혈기 등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노트에 적어 놓고 철야하고 금식해서라도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도하며 버려 나갔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돌아보아 책망할 것이 있는가를 찾으며 온전히 진리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니 지금은 세계선교를 창대케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 말씀했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축복이 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않을 때 모든 시험 환난이 닥쳐오는 것을 알기에 성도님들을 대할 때에도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고 해서 무조건 위로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 시험 환난이 왔는지 그 이유를 깨우쳐 주고 진리 가운데 살지 못한 것을 책망하기도 하지요.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잘못된 것은 고쳐 주고 바르게 이끌어 줄 때 비로소 빛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필요할 때는 지적하고 책망을 해서라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누가 권면하고 지적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진리에 비추어 어긋났을 때에는 자신을 책망하여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며, 상대를 대함에 있어서도 이해하고 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리로 깨우쳐 빛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게만 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함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안위를 염려하여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육신에 속한 생각이었으므로 호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빛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책망받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책망받을 것이 없으면 더욱 좋겠지만 혹여 부족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있어 책망을 받을 때는 중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며, 책망받는 것마다 즉시 돌이켜야 신속히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드러내어 바로 잡아 주고 온전케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와 어두움을 낱낱이 드러내 주시는 것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훈계나 책망을 받아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며 빛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빛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아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망의 길로 가던 사람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무질서와 혼돈에 질서를, 다툼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주시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선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갖게 되고 행복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에베소서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말씀하신 대로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의미
본문 에베소서 5:9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는데, 이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가 곧 빛의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착함이란 선하고 악의가 없는 아름다운 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자신의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불우한 이웃이나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고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은혜를 알아 공경하는 것,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실례를 범치 않는 마음,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마음, 남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 화평하고 양보하는 마음, 욕심이 없는 마음, 자랑하거나 들레지 않는 마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 등이 다 착함에 속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옳은 것을 위해 생명을 다해 전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의 의로움이란 이러한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 드리는 것,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죄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가는 것이나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자기를 깨끗케 하는 것,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반듯하고 절도있는 행함,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것, 옳은 일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 등이 다 의로움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진실함이란 세 가지 속성이 있는데 바로 거짓되지 않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해 놓고는 지키지 않거나 입술로 낸 말을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약속한 바를 지키고 한 번 정한 마음에 변함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는데 왜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흔히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보살펴 주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할 때 "저 사람은 참 착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가 선이 아니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남의 돈을 훔치려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결코 착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지요. 또한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기 싫어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면 그를 더욱 무능하게 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면 정말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단지 일하기가 싫어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조건 돈을 주기보다는 간증 등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해 줌으로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착한 행실이 빛의 열매로 나타나려면 반드시 그 안에 의로움, 즉 하나님의 의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착함과 의로움만 가지고 온전함을 이룰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진실함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가령, 수재민 돕기 모금 등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성금을 냈다면 진실이 아니므로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빛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의 차원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선행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빛 가운데 행해야 참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3. 빛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때의 축복
본문 에베소서 5:10을 보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했는데, 이는 곧 빛의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성경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삶 자체가 빛의 열매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화평함을 좇아 아랫사람인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가 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취하지 않으려는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지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선한 마음뿐만 아니라 의로운 행함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하심에 아브라함은 미처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의심 없이 믿어 드렸지요. 즉 자신이나 아내가 이미 출산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시자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세기 15:6). 이처럼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로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맺힌 진실함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진실함에 해당됩니다. 백세에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갈라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았는데도 아브라함은 조금의 원망이나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중심이 얼마나 진실했던가를 잘 보여 주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벗이라 칭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 어디를 가나 동행해 주시고 범사에 복을 주심으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셨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빛의 열매를 맺어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증거가 확실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본문 에베소서 5:11-13을 보면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책망을 통해 어두움에서 나와 빛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망은 단순히 잘못한 것을 꾸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책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초신자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를 돌아보며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혹시나 잘못한 것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버려 나갔지요. 혹 미움이나 혈기 등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노트에 적어 놓고 철야하고 금식해서라도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도하며 버려 나갔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돌아보아 책망할 것이 있는가를 찾으며 온전히 진리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니 지금은 세계선교를 창대케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 말씀했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축복이 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않을 때 모든 시험 환난이 닥쳐오는 것을 알기에 성도님들을 대할 때에도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고 해서 무조건 위로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 시험 환난이 왔는지 그 이유를 깨우쳐 주고 진리 가운데 살지 못한 것을 책망하기도 하지요.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잘못된 것은 고쳐 주고 바르게 이끌어 줄 때 비로소 빛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필요할 때는 지적하고 책망을 해서라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누가 권면하고 지적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진리에 비추어 어긋났을 때에는 자신을 책망하여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며, 상대를 대함에 있어서도 이해하고 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리로 깨우쳐 빛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게만 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함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안위를 염려하여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육신에 속한 생각이었으므로 호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빛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책망받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책망받을 것이 없으면 더욱 좋겠지만 혹여 부족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있어 책망을 받을 때는 중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며, 책망받는 것마다 즉시 돌이켜야 신속히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드러내어 바로 잡아 주고 온전케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와 어두움을 낱낱이 드러내 주시는 것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훈계나 책망을 받아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며 빛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0-28
제43과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나니
요일 5:18
읽을말씀 : 요일 5:18 | 외울말씀 : 요일 5:18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범죄치 아니하며 진리와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자동화된 설비들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정해진 일만 수행하고 자석도 철 이외의 다른 것은 붙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오직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행함 외에는 다른 행함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일은 어떤 유혹이나 위협을 받는다 해도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쉽게 타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범죄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덮을 수 없듯이 빛에는 어떤 어두움도 틈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범죄치 않는 빛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난 자
본문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 14:15, 요일 5:2). 그 계명 안에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21-23을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마음 자체에 죄를 유발할 만한 근본 악이 없어야 죄를 행치 않는 것이므로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곧 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깨끗해 보이는 물건에도 미세한 균들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은 악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이 모르는 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악이 나올 만한 상황이 되면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으려면 근본에 있는 악의 모양이라도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없는 사람은 설령 악으로 관영된 곳에서 산다 할지라도 그 악에 물들 수 없습니다. 이미 육을 체험하여 그것이 무익한 것임을 알고, 그 무익한 육을 벗어 낸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는 썩어지고 변하는 육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이 전혀 없으므로 죄를 행치 않으며, 이러한 모습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의 예
먼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들 수 있습니다. 주전 605년경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다니엘은 젊은 나이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들 중 유능한 인재를 뽑아 나라의 일꾼으로 등용하였는데 이때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고위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 후 벨사살 왕에 이은 다리오 왕은 뛰어나고 민첩한 다니엘을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한 총리들과 방백들은 한 가지 간계를 꾸며 왕께 나아갑니다. 즉 왕으로 하여금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금령을 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는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할 바를 행했고 차라리 사자굴에 들어갈지언정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는 상황에서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하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거나 어려움을 만나면 이내 타협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은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결코 범죄할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요셉도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이복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된 데에는 형제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등 온전하지 못한 모습에도 원인이 있었지요. 물론 요셉은 형들의 불의를 아버지에게 알리는 것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자기가 옳다 여기는 의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의로 바꾸어 갔다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진정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상대의 허물을 발견해도 사랑으로 덮어 주고 더욱이 그것이 윗사람의 허물이라면 마치 자신의 허물처럼 여기며 함께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의 마음이 되어서 상대가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의 권면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요셉을 통해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상대의 시기와 미움을 유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까지도 식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했고 이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혜롭게 행하여 상대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자기 보기에 옳다고 해서 무조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생각해 보고 행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바로 이런 점이 부족해서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얻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남의 종으로 있으면서 낮아지는 법을 배웠고 감옥에 있으면서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웠으며, 또한 자신이 옳다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중심, 그래서 어떤 유혹에도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온전한 마음으로 변화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범할 여지조차도 없도록 철저히 악의 근본까지 마음에서 벗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3:9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씨"란 진리요(눅 8:11),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는 것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임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 머리에 지식으로 쌓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영으로 양식삼은 상태, 즉 영으로 일구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영으로 양식삼았다면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은 변함이 없는 것이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결코 비진리, 악, 불의 등의 어두움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9 후반절에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저"란 바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지니셨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며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씨, 즉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심고 양식삼아야 하며, 그럴 때만이 어두움이 빛 앞에 어찌할 수 없듯이 악한 자가 빛의 자녀된 권세를 가진 우리를 감히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 누리는 축복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다"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아야 합니다. 범죄치 아니하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함께해 주신다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께로부터 지킴을 받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가 있을 수 없지요. 설령 원수 마귀가 시험 환난을 가져오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물리치시고 지켜 주시니 있던 문제도 자연히 떠날 뿐 아니라 빛의 자녀된 권세가 함께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함께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고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그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다니엘 역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해 버리시니 다니엘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요셉 역시 30세의 나이에 왕의 신임받는 애굽의 총리로 세워졌고 요셉의 명철과 지혜에 탄복한 왕은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에게는 바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축복이 넘쳐날 뿐 아니라 생명까지라도 지킴을 받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우주만물과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면 모든 환난을 면하게 됩니다(시 121:1-7). 설령 악한 사람들이 함정을 놓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이며, 또 죽는다 해도 아름다운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행하면 틀림없이 역사하시며 약속대로 지켜 주십니다(마 5:18). 그러므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항상 진리와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범죄치 아니하며 진리와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자동화된 설비들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정해진 일만 수행하고 자석도 철 이외의 다른 것은 붙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오직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행함 외에는 다른 행함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일은 어떤 유혹이나 위협을 받는다 해도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쉽게 타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범죄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덮을 수 없듯이 빛에는 어떤 어두움도 틈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범죄치 않는 빛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난 자
본문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 14:15, 요일 5:2). 그 계명 안에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21-23을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마음 자체에 죄를 유발할 만한 근본 악이 없어야 죄를 행치 않는 것이므로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곧 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깨끗해 보이는 물건에도 미세한 균들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은 악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이 모르는 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악이 나올 만한 상황이 되면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으려면 근본에 있는 악의 모양이라도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없는 사람은 설령 악으로 관영된 곳에서 산다 할지라도 그 악에 물들 수 없습니다. 이미 육을 체험하여 그것이 무익한 것임을 알고, 그 무익한 육을 벗어 낸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는 썩어지고 변하는 육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이 전혀 없으므로 죄를 행치 않으며, 이러한 모습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의 예
먼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들 수 있습니다. 주전 605년경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다니엘은 젊은 나이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들 중 유능한 인재를 뽑아 나라의 일꾼으로 등용하였는데 이때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고위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 후 벨사살 왕에 이은 다리오 왕은 뛰어나고 민첩한 다니엘을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한 총리들과 방백들은 한 가지 간계를 꾸며 왕께 나아갑니다. 즉 왕으로 하여금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금령을 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는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할 바를 행했고 차라리 사자굴에 들어갈지언정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는 상황에서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하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거나 어려움을 만나면 이내 타협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은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결코 범죄할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요셉도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이복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된 데에는 형제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등 온전하지 못한 모습에도 원인이 있었지요. 물론 요셉은 형들의 불의를 아버지에게 알리는 것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자기가 옳다 여기는 의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의로 바꾸어 갔다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진정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상대의 허물을 발견해도 사랑으로 덮어 주고 더욱이 그것이 윗사람의 허물이라면 마치 자신의 허물처럼 여기며 함께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의 마음이 되어서 상대가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의 권면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요셉을 통해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상대의 시기와 미움을 유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까지도 식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했고 이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혜롭게 행하여 상대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자기 보기에 옳다고 해서 무조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생각해 보고 행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바로 이런 점이 부족해서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얻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남의 종으로 있으면서 낮아지는 법을 배웠고 감옥에 있으면서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웠으며, 또한 자신이 옳다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중심, 그래서 어떤 유혹에도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온전한 마음으로 변화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범할 여지조차도 없도록 철저히 악의 근본까지 마음에서 벗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3:9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씨"란 진리요(눅 8:11),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는 것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임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 머리에 지식으로 쌓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영으로 양식삼은 상태, 즉 영으로 일구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영으로 양식삼았다면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은 변함이 없는 것이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결코 비진리, 악, 불의 등의 어두움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9 후반절에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저"란 바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지니셨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며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씨, 즉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심고 양식삼아야 하며, 그럴 때만이 어두움이 빛 앞에 어찌할 수 없듯이 악한 자가 빛의 자녀된 권세를 가진 우리를 감히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 누리는 축복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다"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아야 합니다. 범죄치 아니하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함께해 주신다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께로부터 지킴을 받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가 있을 수 없지요. 설령 원수 마귀가 시험 환난을 가져오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물리치시고 지켜 주시니 있던 문제도 자연히 떠날 뿐 아니라 빛의 자녀된 권세가 함께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함께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고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그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다니엘 역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해 버리시니 다니엘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요셉 역시 30세의 나이에 왕의 신임받는 애굽의 총리로 세워졌고 요셉의 명철과 지혜에 탄복한 왕은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에게는 바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축복이 넘쳐날 뿐 아니라 생명까지라도 지킴을 받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우주만물과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면 모든 환난을 면하게 됩니다(시 121:1-7). 설령 악한 사람들이 함정을 놓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이며, 또 죽는다 해도 아름다운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행하면 틀림없이 역사하시며 약속대로 지켜 주십니다(마 5:18). 그러므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항상 진리와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