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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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5
제28과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마 8:5-13
읽을말씀 : 마 8:5-13 | 외울말씀 : 마 8:8
교육목표 :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이를 믿는 선한 마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기쁘시게 했던 백부장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과 그에 따르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이스라엘은 강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가버나움에 파견되어 있던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피지배국 백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만일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사람의 병이 어떻게 기도한다고 치료될 수 있는가?"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했다거나 "나는 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온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데 어떻게 피지배국의 평민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인가?" 하면서 체면을 내세웠다면 결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동족인 유대인 가운데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판단하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믿고 담대히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주기를 간절히 구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답변하셨습니다.
이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고백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고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백부장이 이처럼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만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그 소문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이었기에 그 자체를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선이 얼마나 임해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세가 현저히 달라지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해도 선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선이 임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선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백부장의 말과 행함 속에 나타난 선한 마음
그러면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말과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구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자기 수하에 있는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사회로 계급이 뚜렷했고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면 대부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거나 가난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 구하는 백부장이라면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해 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이렇게 백부장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문제 자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리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즉시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고 응답해 주신 것이지요.
두 번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신하에게 병문안을 온다 해도 황송스러울 일인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며 근본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발걸음을 옮기겠다고 하시니 너무나 민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선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우러러 뵐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으로 여기며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 없이 말씀하시거나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 가운데 가르침과 깨우침을 더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정확한 기한과 때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으니 백부장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백부장을 기뻐하신 것은 단지 하인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는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진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나다나엘을 처음 보시고도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백부장의 마음 중심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물론 위로는 천부장이 있지만 백부장이 그가 거느린 백 명이 있는 곳으로 따로 파송받아 나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최고의 머리입니다. 이럴 때에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아래에 군사가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먼저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 말하고 예수님 앞에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여 완전히 낮춤으로 예수님을 높여 드렸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이토록 낮추니 예수님께서는 감동이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백부장에게는 참된 영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으로도 천하 만물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믿으니 믿은 대로 하인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따르게 됩니다(막 16:17-18).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요, 참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따르는 표적들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본교회에도 개척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중풍병자가 걷고 뛰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 일일이 간증하자면 너무 많지요. 혹자는 "나는 믿는데도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정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것이고 믿음대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2:14-26).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처럼 마음밭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한번 들어선 믿음의 길을 변함없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혹자는 "무조건 선하게만 생각하고 믿어 주기만 한다면 속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만 믿으려 하고 좋은 것만 들으려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속이려는 악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고 또한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것임을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속지도 않을 뿐더러 성령의 주관을 받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녕 선한 것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되고 선한 소식, 복음을 들으면 의심치 않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믿음을 내보이는 사람들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음을 선으로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무엇이든지 믿음대로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이를 믿는 선한 마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기쁘시게 했던 백부장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과 그에 따르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이스라엘은 강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가버나움에 파견되어 있던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피지배국 백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만일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사람의 병이 어떻게 기도한다고 치료될 수 있는가?"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했다거나 "나는 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온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데 어떻게 피지배국의 평민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인가?" 하면서 체면을 내세웠다면 결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동족인 유대인 가운데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판단하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믿고 담대히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주기를 간절히 구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답변하셨습니다.
이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고백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고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백부장이 이처럼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만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그 소문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이었기에 그 자체를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선이 얼마나 임해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세가 현저히 달라지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해도 선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선이 임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선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백부장의 말과 행함 속에 나타난 선한 마음
그러면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말과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구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자기 수하에 있는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사회로 계급이 뚜렷했고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면 대부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거나 가난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 구하는 백부장이라면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해 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이렇게 백부장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문제 자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리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즉시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고 응답해 주신 것이지요.
두 번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신하에게 병문안을 온다 해도 황송스러울 일인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며 근본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발걸음을 옮기겠다고 하시니 너무나 민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선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우러러 뵐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으로 여기며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 없이 말씀하시거나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 가운데 가르침과 깨우침을 더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정확한 기한과 때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으니 백부장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백부장을 기뻐하신 것은 단지 하인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는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진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나다나엘을 처음 보시고도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백부장의 마음 중심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물론 위로는 천부장이 있지만 백부장이 그가 거느린 백 명이 있는 곳으로 따로 파송받아 나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최고의 머리입니다. 이럴 때에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아래에 군사가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먼저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 말하고 예수님 앞에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여 완전히 낮춤으로 예수님을 높여 드렸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이토록 낮추니 예수님께서는 감동이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백부장에게는 참된 영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으로도 천하 만물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믿으니 믿은 대로 하인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따르게 됩니다(막 16:17-18).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요, 참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따르는 표적들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본교회에도 개척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중풍병자가 걷고 뛰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 일일이 간증하자면 너무 많지요. 혹자는 "나는 믿는데도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정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것이고 믿음대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2:14-26).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처럼 마음밭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한번 들어선 믿음의 길을 변함없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혹자는 "무조건 선하게만 생각하고 믿어 주기만 한다면 속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만 믿으려 하고 좋은 것만 들으려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속이려는 악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고 또한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것임을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속지도 않을 뿐더러 성령의 주관을 받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녕 선한 것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되고 선한 소식, 복음을 들으면 의심치 않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믿음을 내보이는 사람들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음을 선으로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무엇이든지 믿음대로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08
제27과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 15:21-28
읽을말씀 : 마 15:21-28 | 외울말씀 : 마 15:27
교육목표 : 항상 상대에게 은혜를 끼치며 감동적인 고백을 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입술의 고백으로 상대에게 감동을 주기 보다는 불필요한 말이나 악하고 미련한 말을 냄으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한 말을 내지 않음은 물론, 스스로 선한 말을 하는 단계를 넘어 설령 상대가 내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는 말을 하더라도 도리어 선한 감동의 말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은혜를 끼치며 오히려 상대가 선한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선의 단계를 이루어야 하지요.
오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감동적이고 선한 입술의 열매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감동시킨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셨는데 북쪽에 있는 두로와 시돈 곧 이방인이 사는 수로보니게 지역에 머무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소경이 눈을 뜨며 각색 질병으로 고통당하거나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요.
가나안 민족의 자손인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귀신 들린 딸로 인해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있던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런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무엇을 간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여인이 모르는 남자 앞에 함부로 설 수 있는 때도 아니었고 더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구할 수 있겠다는 기쁨과 떨림으로 예수님께 달려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방인을 멀리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귀신 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 자존심이나 두려움을 접어 두고 간청하는 이 여인을 모르는 척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고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이 여인은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발아래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고 간청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실 은혜를 이방인들에게 베푸는 것은 마치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져 먹게 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개에 비유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어 돌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먼저 "주여 옳소이다마는"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한 후,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면서 다시 간청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겸비한 태도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이 여인의 선함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디어 응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니 그 즉시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갔지요.
어떤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이 여인처럼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도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어 "아, 이럴 때에는 내가 이러이러한 겸손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 되겠다" 하며 비슷한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거듭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실 때에는 결국 본색이 드러나고 변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미 선한 중심으로 마음에 겸비함이 임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답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다 해도 감정이 나지 않고 다투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자신이 먼저 말로써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지혜를 동원하면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에게 기분 상할 말을 했다 하더라도 아내 편에서 오히려 남편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면 "내가 참으로 잘못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선의 마음입니다. 상대가 내 마음을 비수와 같이 찌르는 말을 한다 할지라도 상대를 먼저 이해하고 품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감동적인 고백을 한 성경상의 인물들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첩경을 평탄케 했던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 전파하기를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막 1:7)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너무나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우실 뿐 아니라 무한한 권능으로 천하 만물을 호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황송하게 여겨졌기에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떠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때와 기한을 바로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다 찼을 때 겸손히 물러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의 고백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낮아진 그의 중심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칭찬하신 것이지요.
사도 바울 역시 자기를 완전히 벗어 버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가 얼마나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좇기 원했는가를 잘 알 수 있지요.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한 번 만난 주님 앞에서 자신이 쌓아 왔던 것들을 철저히 무너뜨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생명 다해 주님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또한 이전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실을 늘 간증하면서 자신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 하였고(고전 15: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고백하며 스스로 낮추었지요.
더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나 컸던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독사에게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신처럼 극진히 접대하는 일도 있었지요.
3. 겸비함으로 지적받는 선한 마음과 그에 따른 축복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여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에 힘쓰며 철야기도와 금식 등으로 늘 충성 봉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아직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라면 저는 그분들을 칭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충성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라는 점을 깨우쳐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한 마디라도 칭찬하고 격려해 주면 더욱 충만해지고 열심을 낼 수도 있겠지만 더 진리의 사람으로 이끌기 위해 칭찬보다 오히려 지적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지적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다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김으로 인해 도리어 기쁨을 잃고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그분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장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깨닫고 더 큰 능력을 얻을 것이기에 말씀해 드리는 것이지요.
두 번째 유형은 지적한 사항에 대해 변명하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변명하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항상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적해 드릴 때는 상대의 발전을 기대하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 변명이 따른다면 받을 그릇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니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기가 어렵지요.
세 번째 유형은 지적받은 말씀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본인을 더 온전케 이끌기 위해 마음 써 주시는 목자의 마음을 전달받아 잘한 것은 뒤로 한 채 무조건 감사함으로 받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무슨 말이든 해 줄 수 있고 본인들은 받은 즉시 개선해 나갈 터이니 신속히 진리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적을 받을 때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지적을 통해 변화될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적받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며, 한 마디의 말을 하더라도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항상 상대에게 은혜를 끼치며 감동적인 고백을 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입술의 고백으로 상대에게 감동을 주기 보다는 불필요한 말이나 악하고 미련한 말을 냄으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한 말을 내지 않음은 물론, 스스로 선한 말을 하는 단계를 넘어 설령 상대가 내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는 말을 하더라도 도리어 선한 감동의 말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은혜를 끼치며 오히려 상대가 선한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선의 단계를 이루어야 하지요.
오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감동적이고 선한 입술의 열매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감동시킨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셨는데 북쪽에 있는 두로와 시돈 곧 이방인이 사는 수로보니게 지역에 머무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소경이 눈을 뜨며 각색 질병으로 고통당하거나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요.
가나안 민족의 자손인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귀신 들린 딸로 인해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있던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런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무엇을 간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여인이 모르는 남자 앞에 함부로 설 수 있는 때도 아니었고 더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구할 수 있겠다는 기쁨과 떨림으로 예수님께 달려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방인을 멀리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귀신 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 자존심이나 두려움을 접어 두고 간청하는 이 여인을 모르는 척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고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이 여인은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발아래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고 간청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실 은혜를 이방인들에게 베푸는 것은 마치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져 먹게 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개에 비유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어 돌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먼저 "주여 옳소이다마는"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한 후,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면서 다시 간청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겸비한 태도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이 여인의 선함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디어 응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니 그 즉시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갔지요.
어떤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이 여인처럼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도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어 "아, 이럴 때에는 내가 이러이러한 겸손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 되겠다" 하며 비슷한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거듭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실 때에는 결국 본색이 드러나고 변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미 선한 중심으로 마음에 겸비함이 임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답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다 해도 감정이 나지 않고 다투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자신이 먼저 말로써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지혜를 동원하면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에게 기분 상할 말을 했다 하더라도 아내 편에서 오히려 남편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면 "내가 참으로 잘못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선의 마음입니다. 상대가 내 마음을 비수와 같이 찌르는 말을 한다 할지라도 상대를 먼저 이해하고 품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감동적인 고백을 한 성경상의 인물들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첩경을 평탄케 했던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 전파하기를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막 1:7)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너무나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우실 뿐 아니라 무한한 권능으로 천하 만물을 호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황송하게 여겨졌기에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떠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때와 기한을 바로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다 찼을 때 겸손히 물러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의 고백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낮아진 그의 중심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칭찬하신 것이지요.
사도 바울 역시 자기를 완전히 벗어 버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가 얼마나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좇기 원했는가를 잘 알 수 있지요.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한 번 만난 주님 앞에서 자신이 쌓아 왔던 것들을 철저히 무너뜨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생명 다해 주님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또한 이전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실을 늘 간증하면서 자신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 하였고(고전 15: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고백하며 스스로 낮추었지요.
더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나 컸던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독사에게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신처럼 극진히 접대하는 일도 있었지요.
3. 겸비함으로 지적받는 선한 마음과 그에 따른 축복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여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에 힘쓰며 철야기도와 금식 등으로 늘 충성 봉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아직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라면 저는 그분들을 칭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충성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라는 점을 깨우쳐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한 마디라도 칭찬하고 격려해 주면 더욱 충만해지고 열심을 낼 수도 있겠지만 더 진리의 사람으로 이끌기 위해 칭찬보다 오히려 지적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지적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다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김으로 인해 도리어 기쁨을 잃고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그분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장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깨닫고 더 큰 능력을 얻을 것이기에 말씀해 드리는 것이지요.
두 번째 유형은 지적한 사항에 대해 변명하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변명하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항상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적해 드릴 때는 상대의 발전을 기대하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 변명이 따른다면 받을 그릇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니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기가 어렵지요.
세 번째 유형은 지적받은 말씀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본인을 더 온전케 이끌기 위해 마음 써 주시는 목자의 마음을 전달받아 잘한 것은 뒤로 한 채 무조건 감사함으로 받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무슨 말이든 해 줄 수 있고 본인들은 받은 즉시 개선해 나갈 터이니 신속히 진리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적을 받을 때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지적을 통해 변화될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적받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며, 한 마디의 말을 하더라도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01
제26과맥추절을 지키라
출 23:14-18, 신 16:9-12, 행 2:1-4
읽을말씀 : 출 23:14-18, 신 16:9-12, 행 2:1-4 | 외울말씀 : 출 23:16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인 의미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맥추절을 지키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맥추절(麥秋節)은 이스라엘에서 매년 지켜야 할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출애굽기 23:16을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밭에 뿌린 보리의 첫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는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합니다.
칠칠절이란 명칭은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 만에 돌아오는 절기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고, 오순절이란 명칭은 동일한 기간을 날수로 계산하면 50일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신명기 16:9-12을 보면 "칠주(七週)를 계수(計數)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했습니다.
민수기 28:26-31에도 맥추절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매 수송아지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숫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숫염소 하나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에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막 거두어들인 새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의 떡이 소제로서(레 23:17) 특별히 드려지게 됩니다. 또한 이것과 함께 향기로운 냄새로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이 지난 후 첫날에 처음 익은 곡식 단을 하나님께 바친 것은 유월절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 후 50일 되는 날 곧 맥추절에 새 곡식가루로 만든 떡 두 덩이는 예수님의 부활 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지고 구원에 이른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요,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하게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심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성결되어 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고전 12:13).
2. 맥추감사제
맥추감사제는 소제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되 상번제(매일 제단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둘을 드림: 민 28:3-4)와 소제(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빻아낸 기름 힌 사분지 일을 섞은 가루: 민 28:5-6)와 전제(독주: 민 28:7) 외에 그것들을 드리라고 했으니(민 28:26-31)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받으실 수 있도록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며 감사예물을 정성껏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예물을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고 하면 나름대로 마음에 주관이 오거나 깨달음을 받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녀라면 즉시 순종하여 그대로 행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감사함으로 중심을 바쳐 즐거이 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고후 9:6-7). 우리가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며 생명 곧 진리를 심으면 영생을 거두고 비진리를 심으면 사망을 거두게 되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마찬가지로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준은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한 과부의 두 렙돈을 기뻐하신 주님께서는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막 12:44).
옛날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으나 오늘날은 주로 헌금으로 드리게 되는데, 때로 특별히 소유한 값진 물건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릴 수 없는 경우 마음을 다해 성전 청소 등 봉사로 몸을 드리기도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정성을 다해 기쁨과 순전한 마음, 그리고 믿음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각종 시험 환난을 물리쳐 주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영혼이 잘되어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16:10-11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주의 성전에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예물을 준비하고 기쁨으로 성도들과 교제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을 주셔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하시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버리며 성결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심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천국을 약속해 주셨으니 소망이 넘칩니다. 비록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이 있는 이 땅에 살면서 갖가지 일들을 겪는다 해도 하나님 나라가 있으니 언제나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원히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사 어떤 염려, 근심, 걱정거리가 있다 해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가 되어 늘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역대하 20:20-23을 보면 암몬, 모압, 세일산 세 거민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여호사밧 왕은 최선두에 거룩한 옷을 입힌 찬양대를 내보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적들이 자기들끼리 싸워 자멸하게 만드시고 그들의 재물과 양식들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가 깨닫고 더욱 감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인 의미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맥추절을 지키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맥추절(麥秋節)은 이스라엘에서 매년 지켜야 할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출애굽기 23:16을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밭에 뿌린 보리의 첫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는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합니다.
칠칠절이란 명칭은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 만에 돌아오는 절기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고, 오순절이란 명칭은 동일한 기간을 날수로 계산하면 50일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신명기 16:9-12을 보면 "칠주(七週)를 계수(計數)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했습니다.
민수기 28:26-31에도 맥추절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매 수송아지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숫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숫염소 하나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에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막 거두어들인 새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의 떡이 소제로서(레 23:17) 특별히 드려지게 됩니다. 또한 이것과 함께 향기로운 냄새로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이 지난 후 첫날에 처음 익은 곡식 단을 하나님께 바친 것은 유월절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 후 50일 되는 날 곧 맥추절에 새 곡식가루로 만든 떡 두 덩이는 예수님의 부활 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지고 구원에 이른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요,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하게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심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성결되어 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고전 12:13).
2. 맥추감사제
맥추감사제는 소제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되 상번제(매일 제단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둘을 드림: 민 28:3-4)와 소제(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빻아낸 기름 힌 사분지 일을 섞은 가루: 민 28:5-6)와 전제(독주: 민 28:7) 외에 그것들을 드리라고 했으니(민 28:26-31)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받으실 수 있도록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며 감사예물을 정성껏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예물을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고 하면 나름대로 마음에 주관이 오거나 깨달음을 받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녀라면 즉시 순종하여 그대로 행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감사함으로 중심을 바쳐 즐거이 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고후 9:6-7). 우리가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며 생명 곧 진리를 심으면 영생을 거두고 비진리를 심으면 사망을 거두게 되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마찬가지로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준은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한 과부의 두 렙돈을 기뻐하신 주님께서는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막 12:44).
옛날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으나 오늘날은 주로 헌금으로 드리게 되는데, 때로 특별히 소유한 값진 물건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릴 수 없는 경우 마음을 다해 성전 청소 등 봉사로 몸을 드리기도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정성을 다해 기쁨과 순전한 마음, 그리고 믿음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각종 시험 환난을 물리쳐 주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영혼이 잘되어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16:10-11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주의 성전에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예물을 준비하고 기쁨으로 성도들과 교제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을 주셔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하시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버리며 성결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심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천국을 약속해 주셨으니 소망이 넘칩니다. 비록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이 있는 이 땅에 살면서 갖가지 일들을 겪는다 해도 하나님 나라가 있으니 언제나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원히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사 어떤 염려, 근심, 걱정거리가 있다 해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가 되어 늘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역대하 20:20-23을 보면 암몬, 모압, 세일산 세 거민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여호사밧 왕은 최선두에 거룩한 옷을 입힌 찬양대를 내보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적들이 자기들끼리 싸워 자멸하게 만드시고 그들의 재물과 양식들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가 깨닫고 더욱 감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6-24
제25과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읽을말씀 : 단 3:13-18 | 외울말씀 : 단 3:18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조건 없는 신앙과 선한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조건부적인 모습들이 많습니다.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희생하기보다는 상대가 무엇을 해 주어야 그에 대한 대가를 주겠다는 조건이 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에도 이런 조건들이 붙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돌아와야 부모를 섬기고 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조건부적인 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데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이라고 인정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1. 생명을 걸고 마땅히 행할 바를 지킨 다니엘의 세 친구
남 왕국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있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지요. 왕의 진미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 갔지만 채식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말씀대로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고 왕의 총애를 받게 하셨지요. 결국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우고 방백과 수령 등 각 도 모든 관원들에게 자신이 세운 신상의 낙성예식에 참여하여 절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신상에 절하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노한 왕 앞에 끌려왔고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질 상황이 되었지요. 왕은 이 순간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서 만일 이번에도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겠노라고 엄히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히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하면서 풀무에 던져져서 불에 타 죽는다 해도 우상 앞에 결단코 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에서 건져 내 주시지 않으실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평소에 마땅히 할 바를 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시험이 찾아 온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할 도리를 다하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어찌 풀무불에 던져진 그들의 목숨을 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결국 왕이 노하여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구어진 풀무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신의 아들과 같은 모양의 사람이 함께하며 지켜 주니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으며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다니엘 3:27).
마침내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다니엘 3:28-30). 이처럼 아무 잘못 없이 시험이 왔을 때 믿음으로 이기면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셔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욱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 생명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하려면
여러분은 과연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않고 믿어 드리며 그분의 뜻에 따라 온전히 행하고 있는지요? 혹 하나님 앞에 할 바를 다하지 못하면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 불평하지 않았는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할 바를 어느 정도 했다 해도 그것을 끝까지, 응답될 때까지 했는가 한번 짚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중도에 의심하거나 포기하거나 원망하고 탄식하지 않았는지요. 더욱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걸고 축복이나 문제 해결 받으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거나 "응답받으면 하나님을 믿겠다" 하는 조건적인 마음이 있다면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며 간구해 나갈 때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설령 원하는 것을 응답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끝까지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여 죄의 담을 헐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에 구원받은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영원한 행복이 있는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설령 지금 목숨을 거두어 가신들 무엇을 감사하지 못하겠습니까? 정녕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사업터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이 문제만 해결받을 수 있다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 앞에도 열심히 물질로 심어야지" 하면서 조건부적인 생각과 신앙으로 행한다면 먼저 그러한 생각과 신앙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먼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자 결심하고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대로 심어 나간다면 이런 사람에게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사업터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혹시 나는 하나님 앞에 이런 조건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가정을 지켜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만 감사하며 충만해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런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니라 목숨을 달라 하셔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3.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한 사도 바울
성경상의 또 다른 인물로서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는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한번 주님을 만난 후 죽는 날까지 받은 은혜를 간직하며 살았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변치 않는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죽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만류도 다 뿌리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무슨 일을 만날지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성령께서도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했는데도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백했지요.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 하신 성령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목숨이 아까워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타협치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변함없는 중심과 더불어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같이 조건 없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의 위험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신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며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러한 사도 바울보다 더한 고난을 받으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 앞에서 불평이 나올 수 없고 마음이 변하여 돌아서는 일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신 것을 감당함에 있어서 사람으로 인해 걸리거나 믿음이 부족하여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변개하는 비진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조건 없는 신앙이었기에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말씀하신 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28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힘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 중심이 온전하며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의 행함을 보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행하여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렸습니다(행 19:12).
우리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사도 바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선한 중심과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놀라운 은총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조건 없는 신앙과 선한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조건부적인 모습들이 많습니다.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희생하기보다는 상대가 무엇을 해 주어야 그에 대한 대가를 주겠다는 조건이 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에도 이런 조건들이 붙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돌아와야 부모를 섬기고 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조건부적인 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데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이라고 인정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1. 생명을 걸고 마땅히 행할 바를 지킨 다니엘의 세 친구
남 왕국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있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지요. 왕의 진미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 갔지만 채식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말씀대로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고 왕의 총애를 받게 하셨지요. 결국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우고 방백과 수령 등 각 도 모든 관원들에게 자신이 세운 신상의 낙성예식에 참여하여 절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신상에 절하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노한 왕 앞에 끌려왔고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질 상황이 되었지요. 왕은 이 순간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서 만일 이번에도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겠노라고 엄히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히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하면서 풀무에 던져져서 불에 타 죽는다 해도 우상 앞에 결단코 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에서 건져 내 주시지 않으실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평소에 마땅히 할 바를 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시험이 찾아 온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할 도리를 다하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어찌 풀무불에 던져진 그들의 목숨을 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결국 왕이 노하여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구어진 풀무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신의 아들과 같은 모양의 사람이 함께하며 지켜 주니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으며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다니엘 3:27).
마침내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다니엘 3:28-30). 이처럼 아무 잘못 없이 시험이 왔을 때 믿음으로 이기면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셔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욱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 생명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하려면
여러분은 과연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않고 믿어 드리며 그분의 뜻에 따라 온전히 행하고 있는지요? 혹 하나님 앞에 할 바를 다하지 못하면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 불평하지 않았는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할 바를 어느 정도 했다 해도 그것을 끝까지, 응답될 때까지 했는가 한번 짚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중도에 의심하거나 포기하거나 원망하고 탄식하지 않았는지요. 더욱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걸고 축복이나 문제 해결 받으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거나 "응답받으면 하나님을 믿겠다" 하는 조건적인 마음이 있다면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며 간구해 나갈 때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설령 원하는 것을 응답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끝까지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여 죄의 담을 헐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에 구원받은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영원한 행복이 있는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설령 지금 목숨을 거두어 가신들 무엇을 감사하지 못하겠습니까? 정녕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사업터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이 문제만 해결받을 수 있다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 앞에도 열심히 물질로 심어야지" 하면서 조건부적인 생각과 신앙으로 행한다면 먼저 그러한 생각과 신앙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먼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자 결심하고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대로 심어 나간다면 이런 사람에게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사업터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혹시 나는 하나님 앞에 이런 조건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가정을 지켜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만 감사하며 충만해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런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니라 목숨을 달라 하셔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3.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한 사도 바울
성경상의 또 다른 인물로서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는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한번 주님을 만난 후 죽는 날까지 받은 은혜를 간직하며 살았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변치 않는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죽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만류도 다 뿌리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무슨 일을 만날지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성령께서도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했는데도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백했지요.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 하신 성령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목숨이 아까워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타협치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변함없는 중심과 더불어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같이 조건 없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의 위험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신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며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러한 사도 바울보다 더한 고난을 받으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 앞에서 불평이 나올 수 없고 마음이 변하여 돌아서는 일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신 것을 감당함에 있어서 사람으로 인해 걸리거나 믿음이 부족하여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변개하는 비진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조건 없는 신앙이었기에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말씀하신 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28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힘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 중심이 온전하며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의 행함을 보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행하여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렸습니다(행 19:12).
우리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사도 바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선한 중심과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놀라운 은총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6-17
제24과범죄치 마옵소서
삼상 19:1-6
읽을말씀 : 삼상 19:1-6 | 외울말씀 : 삼상 19:4
교육목표 : 자기 스스로 범죄치 아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지 않도록 빛 가운데로 인도하며 끝까지 선을 행하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게 한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 여러 가지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어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온갖 응석을 받아 주다가 버릇없는 아이로 만들기도 하는데 본문에는 참된 영적인 사랑의 한 분야가 나와 있습니다. 가족이나 섬기는 임금 등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영적인 사랑을 제시하고 있지요. 만일 임금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진정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는 신하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길로 가도록 진언할 것입니다. 또한 부모를 진정 사랑하는 자녀라면 부모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랑을 소유한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으로 범죄를 막은 요나단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장남으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용사였으며 사무엘상 20:2에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고백한 대로 왕과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는데 곧 아버지인 사울 왕이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이를 막으려는 요나단의 모습이지요. 사무엘상 19:1-3을 보면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 왕이 왜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고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다윗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하에 들어가 고통받을 뿐 아니라 왕인 사울은 생명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형편이었지요.
또한 다윗은 그 후로도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으며, 이미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했던 사울 왕이 악신으로 고통을 받을 때도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생명의 은인이자 훌륭한 신하인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다윗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지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왕과 군대를 맞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크게 돌리자 이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한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집에 군사를 보내 죽이라 명하기도 하며 다윗을 잡으러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니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울 왕이 악이 발동된 상황에서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요나단이 어떻게 사울 왕의 악에 동조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울 왕이 범죄하지 않도록 다윗을 변호하며 간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9:4 이하를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의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물론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다윗의 편을 들어야 하겠지만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된다면 요나단은 자신이 왕위를 얻을 수 없게 되니 다윗이 죽는 것이 유익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분별할 수 있었고 아무리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잘못을 잠시 뉘우치며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맹세까지 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울 왕은 마음 자체가 악했기 때문에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도 마음이 변개하여 계속 다윗을 죽이려 했고, 그때마다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범죄하지 않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울 왕이 노를 발하여 아들 요나단까지 죽이려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 끝까지 선을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 요나단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 왕의 뜻을 알기 위해 '다윗이 베들레헴에 가도록 자신이 허락하였다'고 하며 부친의 반응을 살피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사울 왕이 다윗을 감시하려 하거나 악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면 그 일에 별로 마음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아들인 요나단에게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하며 심히 노를 발하였습니다.
이에 요나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하며 더욱 다윗을 변호하며 사울 왕의 옳지 않은 마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더욱 화가 나서 단창을 들어 자기 아들인 요나단을 치려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고 신뢰하는 요나단이 다윗 편을 드니 그만 분에 못 이겨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어떤 일을 당해도 마음에 두지 않고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면서 아버지가 돌이키도록 권면해 나갔습니다.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범죄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더욱 깊은 차원의 선(善)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람이라면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 역시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렸지만 이 역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선한 행동이었지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결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이나 역사를 통해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면 그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아야 하고 이웃까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의 범죄로 백성 전체가 고통받는 경우도 많으며, 더구나 범죄한 사람이 머리되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피해가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아니하며 더 나아가 범죄하는 사람들을 선한 마음으로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선(善)은 범죄를 막고 진리로 이끄는 것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힘쓰며 앞서 본을 보인 성도의 경우를 잠시 소개하지요. 이분은 가족 중에 누구라도 입술에 부정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하면 권면하여 진리의 말만 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가족의 믿음이 좋았기에 일부러 죄를 짓는다거나 크게 범죄하는 일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조그마한 죄라도 짓지 않도록 막아 주니 가족 전체가 더욱 진리로 변화되어 교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온전한 선은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러한 선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가족들에게 늘 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도록 인도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마음 상할까봐 혹은 화평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육적인 정에 가리워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데, 이는 마치 엘리 제사장과 같이 육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삼상 2-4장).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두 아들이 크게 범죄했을 때 말로만 권면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그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죄라면 그냥 덮어두려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도록 막아 주고 권면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해도 끝까지 선을 행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그 마음이 선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충만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했을지라도 끝까지 그 아비를 배신하지 않고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도 다윗 왕이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자 중의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도록 배려해 주었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사울 왕의 재산을 그대로 가지게 해 주었지요.
이처럼 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요나단과 같이 범죄를 막으려 하고 공평한 추가 되어 정도를 좇으며 영적인 사랑으로 끝까지 선을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자기 스스로 범죄치 아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지 않도록 빛 가운데로 인도하며 끝까지 선을 행하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게 한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 여러 가지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어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온갖 응석을 받아 주다가 버릇없는 아이로 만들기도 하는데 본문에는 참된 영적인 사랑의 한 분야가 나와 있습니다. 가족이나 섬기는 임금 등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영적인 사랑을 제시하고 있지요. 만일 임금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진정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는 신하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길로 가도록 진언할 것입니다. 또한 부모를 진정 사랑하는 자녀라면 부모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랑을 소유한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으로 범죄를 막은 요나단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장남으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용사였으며 사무엘상 20:2에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고백한 대로 왕과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는데 곧 아버지인 사울 왕이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이를 막으려는 요나단의 모습이지요. 사무엘상 19:1-3을 보면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 왕이 왜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고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다윗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하에 들어가 고통받을 뿐 아니라 왕인 사울은 생명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형편이었지요.
또한 다윗은 그 후로도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으며, 이미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했던 사울 왕이 악신으로 고통을 받을 때도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생명의 은인이자 훌륭한 신하인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다윗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지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왕과 군대를 맞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크게 돌리자 이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한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집에 군사를 보내 죽이라 명하기도 하며 다윗을 잡으러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니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울 왕이 악이 발동된 상황에서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요나단이 어떻게 사울 왕의 악에 동조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울 왕이 범죄하지 않도록 다윗을 변호하며 간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9:4 이하를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의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물론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다윗의 편을 들어야 하겠지만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된다면 요나단은 자신이 왕위를 얻을 수 없게 되니 다윗이 죽는 것이 유익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분별할 수 있었고 아무리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잘못을 잠시 뉘우치며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맹세까지 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울 왕은 마음 자체가 악했기 때문에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도 마음이 변개하여 계속 다윗을 죽이려 했고, 그때마다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범죄하지 않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울 왕이 노를 발하여 아들 요나단까지 죽이려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 끝까지 선을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 요나단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 왕의 뜻을 알기 위해 '다윗이 베들레헴에 가도록 자신이 허락하였다'고 하며 부친의 반응을 살피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사울 왕이 다윗을 감시하려 하거나 악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면 그 일에 별로 마음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아들인 요나단에게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하며 심히 노를 발하였습니다.
이에 요나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하며 더욱 다윗을 변호하며 사울 왕의 옳지 않은 마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더욱 화가 나서 단창을 들어 자기 아들인 요나단을 치려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고 신뢰하는 요나단이 다윗 편을 드니 그만 분에 못 이겨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어떤 일을 당해도 마음에 두지 않고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면서 아버지가 돌이키도록 권면해 나갔습니다.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범죄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더욱 깊은 차원의 선(善)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람이라면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 역시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렸지만 이 역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선한 행동이었지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결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이나 역사를 통해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면 그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아야 하고 이웃까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의 범죄로 백성 전체가 고통받는 경우도 많으며, 더구나 범죄한 사람이 머리되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피해가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아니하며 더 나아가 범죄하는 사람들을 선한 마음으로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선(善)은 범죄를 막고 진리로 이끄는 것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힘쓰며 앞서 본을 보인 성도의 경우를 잠시 소개하지요. 이분은 가족 중에 누구라도 입술에 부정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하면 권면하여 진리의 말만 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가족의 믿음이 좋았기에 일부러 죄를 짓는다거나 크게 범죄하는 일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조그마한 죄라도 짓지 않도록 막아 주니 가족 전체가 더욱 진리로 변화되어 교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온전한 선은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러한 선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가족들에게 늘 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도록 인도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마음 상할까봐 혹은 화평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육적인 정에 가리워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데, 이는 마치 엘리 제사장과 같이 육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삼상 2-4장).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두 아들이 크게 범죄했을 때 말로만 권면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그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죄라면 그냥 덮어두려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도록 막아 주고 권면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해도 끝까지 선을 행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그 마음이 선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충만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했을지라도 끝까지 그 아비를 배신하지 않고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도 다윗 왕이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자 중의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도록 배려해 주었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사울 왕의 재산을 그대로 가지게 해 주었지요.
이처럼 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요나단과 같이 범죄를 막으려 하고 공평한 추가 되어 정도를 좇으며 영적인 사랑으로 끝까지 선을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6-10
제23과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단 6:19-23
읽을말씀 : 단 6:19-23 | 외울말씀 : 단 6:22
교육목표 : 다니엘과 같이 비진리의 감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으며 범사에 영광을 돌리게 한다.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에는 무슨 일이 잘못되었을 때 상대의 탓으로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리면 당장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 진실이 밝혀지면 상대의 마음은 물론 더욱 큰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되지요.
반대로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린 경우에 당장은 이익이 되는 것 같지만 결과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끝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쓰거나 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선진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 남을 탓하거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1. 신앙의 정도(正道)를 걸은 다니엘
다니엘은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게 되었을 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다 지파의 왕족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을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왕의 진미 중에는 우상에 절한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생물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런 것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신 14장).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이지만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자 감독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즉 10일 동안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 채식과 물만 먹고 마시게 한 다음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과 비교해 볼 것을 담대히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니엘이 사람의 지식과 이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았더니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왕의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얼굴이 더욱 빛나고 건강하게 역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크게 은총을 더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1:17을 보면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것을 인정하여 그를 바벨론의 모든 도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렸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대를 이은 벨사살 왕과 그 다음 왕인 다리오 왕에게까지 총애를 받았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함을 인정하여 바벨론의 세 총리 중 수석 총리로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지요. 총리들과 방백들은 이를 시기하여 국사에 대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찾고자 했지만 아무 틈, 아무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단 6:4).
이에 다니엘을 시기한 총리와 방백과 관원들은 왕을 위하는 것처럼 계략을 꾸며 왕에게 유리한 한 가지 금령을 정할 것을 요구하였지요.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것을 통해 고소할 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왕은 이러한 궤계를 알지 못하기에 그들의 제안을 흡족히 여기고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반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금령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무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왕에게 고했고 그제서야 왕은 금령이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모략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미 금령이 반포되었으니 왕의 입장에서도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은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하고자 마음을 쓰며 힘을 다했지만 계략을 꾸민 무리들이 왕에게 나와 법대로 행할 것을 재촉함으로 결국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2. 죽음 앞에서도 남을 탓하지 않은 다니엘의 선
이처럼 억울한 죽음을 앞둔 다니엘은 자신이 왕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으니 당당하게 항변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믿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정도를 걸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잃을까 하여 비굴하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생명과 명예와 권세를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조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에게 조금도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았고 자기를 모함한 무리들을 향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는 선한 모습을 볼 수 있지요.
평소에 다니엘을 총애하던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넣은 후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며 기악을 그치고 침수를 폐한 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이 되자 급히 사자굴로 달려가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하며 슬피 소리쳐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놀랍게도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의 생생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다니엘 6:21-22을 보면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긴장된 순간에도 왕을 대하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는 축복의 기원으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을 탓하거나 따지는 것이 옳은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악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설령 윗사람의 실수로 커다란 해를 당할 뻔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해도 윗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말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의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이해하며 윗사람이 조금도 민망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윗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터인데 아랫사람이 대놓고 자기의 무죄함을 강하게 말함으로 윗사람의 실수를 드러내는 것은 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3. 다니엘과 같이 무죄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그러면 누구나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갖고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기 원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다면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염려, 불안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내가 혹 시험을 만난다 해도 피할 길을 열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더 나아가 설령 내게 불이익이 온다 해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고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온전히 믿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은 자신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죄 없는 사람에게 억울함을 당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선함과 정직함을 증거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다리오 왕은 심히 기뻐하며 다니엘을 끌어 올리라 명하고 대신 다니엘을 참소한 무리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도록 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사자가 그들을 움켜서 뼈까지 부숴뜨렸습니다(단 6:24). 이를 목도한 다리오 왕은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알리며 그 앞에 떨며 두려워하도록 함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였습니다(단 6:26-27).
여기서 우리는 죄가 있는 사람은 결국 깨어지고 망하게 되지만 죄가 없는 사람은 다니엘처럼 죽음이라도 피해 갈 뿐만 아니라 상함을 당치 않도록 각종 어려움과 장애가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사자의 밥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독사에 물렸지만 조금도 상함이 없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어도 불이 그들을 그을리지 못하였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속에 들어가면 시험 환난이나 질병이 틈타지 않으며 설령 틈탔다 할지라도 마음을 겸비케 하여 통회자복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가운데 들어가면 어떠한 문제나 질병도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상대와 부딪칠 만한 일을 피해 버림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소극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다니엘이 이러한 소극적인 선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니엘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했다면 30일 동안만 기도를 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기도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창문을 닫고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과 명예와 부와 권세를 잃는다 해도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소유했지요. 즉 조용히 피해 갈 수 있는 일도 적극적으로 진리를 지켜 행했고 차라리 부딪칠지언정 하나님의 뜻이면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금도 원망 불평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딪쳐오는 환경에 감사하며 모든 사람을 선대해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면성을 다 갖추었을 때 진정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은 이렇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 나가며 진리라면 굽히지 않고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진리에 위배되는 감정을 모두 제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마음 속에 그러한 비진리의 감정이나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니엘과 같이 비진리의 감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같이 비진리의 감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으며 범사에 영광을 돌리게 한다.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에는 무슨 일이 잘못되었을 때 상대의 탓으로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리면 당장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 진실이 밝혀지면 상대의 마음은 물론 더욱 큰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되지요.
반대로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린 경우에 당장은 이익이 되는 것 같지만 결과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끝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쓰거나 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선진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 남을 탓하거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1. 신앙의 정도(正道)를 걸은 다니엘
다니엘은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게 되었을 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다 지파의 왕족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을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왕의 진미 중에는 우상에 절한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생물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런 것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신 14장).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이지만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자 감독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즉 10일 동안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 채식과 물만 먹고 마시게 한 다음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과 비교해 볼 것을 담대히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니엘이 사람의 지식과 이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았더니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왕의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얼굴이 더욱 빛나고 건강하게 역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크게 은총을 더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1:17을 보면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것을 인정하여 그를 바벨론의 모든 도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렸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대를 이은 벨사살 왕과 그 다음 왕인 다리오 왕에게까지 총애를 받았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함을 인정하여 바벨론의 세 총리 중 수석 총리로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지요. 총리들과 방백들은 이를 시기하여 국사에 대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찾고자 했지만 아무 틈, 아무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단 6:4).
이에 다니엘을 시기한 총리와 방백과 관원들은 왕을 위하는 것처럼 계략을 꾸며 왕에게 유리한 한 가지 금령을 정할 것을 요구하였지요.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것을 통해 고소할 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왕은 이러한 궤계를 알지 못하기에 그들의 제안을 흡족히 여기고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반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금령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무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왕에게 고했고 그제서야 왕은 금령이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모략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미 금령이 반포되었으니 왕의 입장에서도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은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하고자 마음을 쓰며 힘을 다했지만 계략을 꾸민 무리들이 왕에게 나와 법대로 행할 것을 재촉함으로 결국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2. 죽음 앞에서도 남을 탓하지 않은 다니엘의 선
이처럼 억울한 죽음을 앞둔 다니엘은 자신이 왕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으니 당당하게 항변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믿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정도를 걸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잃을까 하여 비굴하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생명과 명예와 권세를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조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에게 조금도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았고 자기를 모함한 무리들을 향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는 선한 모습을 볼 수 있지요.
평소에 다니엘을 총애하던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넣은 후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며 기악을 그치고 침수를 폐한 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이 되자 급히 사자굴로 달려가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하며 슬피 소리쳐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놀랍게도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의 생생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다니엘 6:21-22을 보면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긴장된 순간에도 왕을 대하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는 축복의 기원으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을 탓하거나 따지는 것이 옳은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악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설령 윗사람의 실수로 커다란 해를 당할 뻔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해도 윗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말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의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이해하며 윗사람이 조금도 민망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윗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터인데 아랫사람이 대놓고 자기의 무죄함을 강하게 말함으로 윗사람의 실수를 드러내는 것은 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3. 다니엘과 같이 무죄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그러면 누구나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갖고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기 원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다면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염려, 불안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내가 혹 시험을 만난다 해도 피할 길을 열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더 나아가 설령 내게 불이익이 온다 해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고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온전히 믿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은 자신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죄 없는 사람에게 억울함을 당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선함과 정직함을 증거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다리오 왕은 심히 기뻐하며 다니엘을 끌어 올리라 명하고 대신 다니엘을 참소한 무리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도록 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사자가 그들을 움켜서 뼈까지 부숴뜨렸습니다(단 6:24). 이를 목도한 다리오 왕은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알리며 그 앞에 떨며 두려워하도록 함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였습니다(단 6:26-27).
여기서 우리는 죄가 있는 사람은 결국 깨어지고 망하게 되지만 죄가 없는 사람은 다니엘처럼 죽음이라도 피해 갈 뿐만 아니라 상함을 당치 않도록 각종 어려움과 장애가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사자의 밥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독사에 물렸지만 조금도 상함이 없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어도 불이 그들을 그을리지 못하였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속에 들어가면 시험 환난이나 질병이 틈타지 않으며 설령 틈탔다 할지라도 마음을 겸비케 하여 통회자복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가운데 들어가면 어떠한 문제나 질병도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상대와 부딪칠 만한 일을 피해 버림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소극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다니엘이 이러한 소극적인 선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니엘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했다면 30일 동안만 기도를 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기도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창문을 닫고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과 명예와 부와 권세를 잃는다 해도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소유했지요. 즉 조용히 피해 갈 수 있는 일도 적극적으로 진리를 지켜 행했고 차라리 부딪칠지언정 하나님의 뜻이면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금도 원망 불평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딪쳐오는 환경에 감사하며 모든 사람을 선대해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면성을 다 갖추었을 때 진정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은 이렇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 나가며 진리라면 굽히지 않고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진리에 위배되는 감정을 모두 제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마음 속에 그러한 비진리의 감정이나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니엘과 같이 비진리의 감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6-03
제22과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룻 1:16-17
읽을말씀 : 룻 1:16-17 | 외울말씀 : 룻 1:16-17
교육목표 :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도리를 다한 룻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깨닫고 온전히 행함으로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오늘날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사회 곳곳에 팽배하여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홀대하고 어린 자녀를 버리거나 사소한 문제로 이웃간에 불목하고 원수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바로 악을 버리고 선한 마음으로 사람의 도리를 지켜 나가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룻이라는 여인은 과연 어떠한 선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은 것일까요?
1.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긴 룻의 선한 행함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에 심한 흉년이 들자 이것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 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니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을 떠나 다시 고향인 유다로 돌아가고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에게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였습니다(룻 1:8).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 소망 없이 지내야 할 며느리들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자신을 떠나가라고 여러 번 강권했던 것입니다.
이때 룻은 자기의 도리를 지키는 선한 마음이었기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호히 고백합니다(룻 1:16-17). 아무 의지할 곳 없고 소망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저버리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이지요.
만약 룻에게 자기의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시어머니가 강권하니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함이 없고 한결같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고향은 낯설기만 한 땅으로 당장 집도 없고 먹고 살 방편도 막막하며,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 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모습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오는가' 하며 자로 재거나 따지지 않고 오로지 정도와 선을 좇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또한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이후로 한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이처럼 선한 중심의 사람은 선을 행할 때 몇 번 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마음이 선이기에 이를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온전하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자기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가 룻과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도 적으며, 더구나 끝까지 선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룻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함으로 멸망에 이른 사람입니다. 세상 지식을 가르쳐 준 스승이라 해도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데, 생명의 지식을 공급해 주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이처럼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마음이었으니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도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으면서도 진정 선한 중심이 아니었기에 사도 바울과 함께하면 많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유익을 좇아 떠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보면 어떤 분들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기쁘고 충만하여 "생명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고백하고는 시간이 지나 은혜가 떨어지면 그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 서원을 해 놓고 막상 응답을 받은 후에는 마음이 변하여 서원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 유익을 좇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는 거리가 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내 편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풀무불에 던져져 생명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중심이 되어야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상대의 유익을 구할 때의 축복
룻처럼 자신의 도리를 지켜 행하면 영육간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한 예로 어느 여성도님은 단칸방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나가버렸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교통사고까지 당해 일일이 수발을 들어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따라 조금도 원망이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가망이 없던 남편의 마음을 주관해 주셔서 가족에게 돌아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단칸방을 떠나 더 좋은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사랑받고 존경받으며 신뢰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서로 믿고 신뢰하며 섬기고 낮아지면 진리로 한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정, 일터, 사업터와 교회를 지켜 주시므로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탈 수도 없고 각종 시험 환난이 물러가며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룻은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도리를 지켜 나갔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의 모양이 있다면 신속하게 회개하고 돌이키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정도를 좇는 선의 단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도리를 다한 룻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깨닫고 온전히 행함으로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오늘날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사회 곳곳에 팽배하여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홀대하고 어린 자녀를 버리거나 사소한 문제로 이웃간에 불목하고 원수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바로 악을 버리고 선한 마음으로 사람의 도리를 지켜 나가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룻이라는 여인은 과연 어떠한 선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은 것일까요?
1.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긴 룻의 선한 행함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에 심한 흉년이 들자 이것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 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니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을 떠나 다시 고향인 유다로 돌아가고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에게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였습니다(룻 1:8).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 소망 없이 지내야 할 며느리들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자신을 떠나가라고 여러 번 강권했던 것입니다.
이때 룻은 자기의 도리를 지키는 선한 마음이었기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호히 고백합니다(룻 1:16-17). 아무 의지할 곳 없고 소망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저버리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이지요.
만약 룻에게 자기의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시어머니가 강권하니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함이 없고 한결같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고향은 낯설기만 한 땅으로 당장 집도 없고 먹고 살 방편도 막막하며,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 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모습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오는가' 하며 자로 재거나 따지지 않고 오로지 정도와 선을 좇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또한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이후로 한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이처럼 선한 중심의 사람은 선을 행할 때 몇 번 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마음이 선이기에 이를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온전하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자기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가 룻과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도 적으며, 더구나 끝까지 선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룻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함으로 멸망에 이른 사람입니다. 세상 지식을 가르쳐 준 스승이라 해도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데, 생명의 지식을 공급해 주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이처럼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마음이었으니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도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으면서도 진정 선한 중심이 아니었기에 사도 바울과 함께하면 많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유익을 좇아 떠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보면 어떤 분들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기쁘고 충만하여 "생명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고백하고는 시간이 지나 은혜가 떨어지면 그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 서원을 해 놓고 막상 응답을 받은 후에는 마음이 변하여 서원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 유익을 좇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는 거리가 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내 편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풀무불에 던져져 생명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중심이 되어야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상대의 유익을 구할 때의 축복
룻처럼 자신의 도리를 지켜 행하면 영육간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한 예로 어느 여성도님은 단칸방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나가버렸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교통사고까지 당해 일일이 수발을 들어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따라 조금도 원망이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가망이 없던 남편의 마음을 주관해 주셔서 가족에게 돌아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단칸방을 떠나 더 좋은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사랑받고 존경받으며 신뢰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서로 믿고 신뢰하며 섬기고 낮아지면 진리로 한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정, 일터, 사업터와 교회를 지켜 주시므로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탈 수도 없고 각종 시험 환난이 물러가며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룻은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도리를 지켜 나갔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의 모양이 있다면 신속하게 회개하고 돌이키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정도를 좇는 선의 단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5-27
제21과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2
읽을말씀 : 창 12:1-2 | 외울말씀 : 창 12:1-2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변함없는 믿음과 선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을 만났다 할지라도 항상 형통함을 받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고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장수의 축복 등 온갖 복을 다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 18:7에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말씀하신 대로 앞일에 대해서도 알려 주셨으며 아브라함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는 친히 역사해 주심으로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
갈라디아서 3:6-9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수많은 축복을 주셨으며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동일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었을까요?
창세기 12:1-2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자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 주지 않으시고 무조건 떠나라 명하시니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히 믿어 드릴 때 갖가지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참으로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자녀라면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순종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축복하셨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즉 아들을 죽여서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각을 떠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도 않고, "이삭을 통한 약속은 어떻게 하시구요?"라는 이유도 대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순종만 있었지요.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함을 온전한 것으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17-19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 기쁨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함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이의가 나오고 의심이나 원망 불평이 나오는 것이지 정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직 순종만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까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선의 모습이었고, 그 선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면 이러한 축복을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누구나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터에 축복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말라기 3:10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고,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말씀하셨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축복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는 것이며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순종할 때 아브라함처럼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 순종, 행함이 변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 드린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셨고 이 믿음을 순종과 행함을 통해 나타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있지요(롬 12:2).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아들 이삭을 위해 아내를 택할 것을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종은 여자가 혹 자신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따라오려 하지 않을 때에는 이삭을 그 여자가 거하는 땅 하란으로 인도하여 돌아가야 할지를 묻지요.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러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창 24:7)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자를 예비하여 보내 주실 것이므로 너는 가서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금 행해 보다가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이내 변개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면 시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그대로 믿었기에 그런 말을 종에게 했던 것이지요. 과연 아브라함의 고백대로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순적히 만나게 되었지요(창 24:10-6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그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명심하여 믿어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연단을 통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지요.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고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하여 행했으며 그 말씀을 믿어 드리며 행하는 것이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결정체로 나왔기에 야고보서 2:23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100% 신뢰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행함이 있으신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한 번 믿어 드린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진리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선을 행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항상 선을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 대한 양보는 어떠하였습니까?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했을 때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 동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윗사람이면서도 오히려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선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카 롯이 나중에 소돔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소돔과 고모라가 주위의 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게 되었고 그 모든 재물과 양식까지 다 빼앗기게 되었지요. 그 상황에서 조카 롯은 사로잡혀 갔고 그 재물까지 노략질당했던 것입니다. 이때도 아브라함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한 자 318인을 데리고 가서 상대를 쳐서 파하여 조카 롯을 구해 왔습니다(창 14:22-2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 성을 멸하실 것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때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간구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9:29을 보면 "하나님께서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해 주셨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선의 마음으로 대하였으며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선한 마음이 행함을 통해 변함없이 나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선한 중심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변함없는 믿음과 선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을 만났다 할지라도 항상 형통함을 받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고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장수의 축복 등 온갖 복을 다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 18:7에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말씀하신 대로 앞일에 대해서도 알려 주셨으며 아브라함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는 친히 역사해 주심으로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
갈라디아서 3:6-9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수많은 축복을 주셨으며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동일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었을까요?
창세기 12:1-2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자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 주지 않으시고 무조건 떠나라 명하시니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히 믿어 드릴 때 갖가지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참으로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자녀라면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순종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축복하셨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즉 아들을 죽여서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각을 떠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도 않고, "이삭을 통한 약속은 어떻게 하시구요?"라는 이유도 대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순종만 있었지요.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함을 온전한 것으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17-19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 기쁨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함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이의가 나오고 의심이나 원망 불평이 나오는 것이지 정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직 순종만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까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선의 모습이었고, 그 선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면 이러한 축복을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누구나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터에 축복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말라기 3:10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고,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말씀하셨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축복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는 것이며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순종할 때 아브라함처럼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 순종, 행함이 변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 드린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셨고 이 믿음을 순종과 행함을 통해 나타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있지요(롬 12:2).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아들 이삭을 위해 아내를 택할 것을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종은 여자가 혹 자신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따라오려 하지 않을 때에는 이삭을 그 여자가 거하는 땅 하란으로 인도하여 돌아가야 할지를 묻지요.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러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창 24:7)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자를 예비하여 보내 주실 것이므로 너는 가서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금 행해 보다가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이내 변개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면 시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그대로 믿었기에 그런 말을 종에게 했던 것이지요. 과연 아브라함의 고백대로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순적히 만나게 되었지요(창 24:10-6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그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명심하여 믿어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연단을 통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지요.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고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하여 행했으며 그 말씀을 믿어 드리며 행하는 것이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결정체로 나왔기에 야고보서 2:23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100% 신뢰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행함이 있으신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한 번 믿어 드린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진리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선을 행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항상 선을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 대한 양보는 어떠하였습니까?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했을 때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 동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윗사람이면서도 오히려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선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카 롯이 나중에 소돔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소돔과 고모라가 주위의 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게 되었고 그 모든 재물과 양식까지 다 빼앗기게 되었지요. 그 상황에서 조카 롯은 사로잡혀 갔고 그 재물까지 노략질당했던 것입니다. 이때도 아브라함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한 자 318인을 데리고 가서 상대를 쳐서 파하여 조카 롯을 구해 왔습니다(창 14:22-2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 성을 멸하실 것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때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간구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9:29을 보면 "하나님께서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해 주셨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선의 마음으로 대하였으며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선한 마음이 행함을 통해 변함없이 나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선한 중심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5-20
제20과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입맞추니
눅 7:36-38
읽을말씀 : 눅 7:36-38 | 외울말씀 : 눅 7:38
교육목표 : 자신이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갚는 선의 행함과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를 갚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도리를 잊고 아예 모른 체 하거나 어느 정도 갚다가 '내가 할 바는 다 했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번 받은 바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며 그 마음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한 촌에서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나아와 사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인 것이지요.
그러면 구원의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
누가복음 7:36-38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인일까요? '막달라'라는 곳은 갈릴리 호수의 서쪽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곳 주민들은 대부분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음으로 인해 어둠이 완전히 그 마을을 사로잡고 있는 곳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태어났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8:2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역시 귀신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귀신에게 고통받는 경우를 보면 개인적으로 귀신에게 고통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가정이, 또는 마을 전체가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지요. 한 개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상주하여 그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받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찌들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들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환경에서 많은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받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등 아무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며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막달라 마리아는 '나도 그분을 만나면 모든 질병을 고침받고 어둠의 세력에게 시달리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하며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지요.
마침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싶어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시몬의 집으로 갑니다. 너무도 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예수님 앞으로는 나아갈 수 없어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섰는데 복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마리아는 몸을 굽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고 가져온 향유를 그 발에 부어 드렸지요.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함을 보시고 질병을 고쳐 주시며 천국 소망과 참된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고 하루하루가 고통이 아닌 기쁨과 행복의 시간들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은혜를 체험했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한 희생과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하였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마지막 운명하시는 시간까지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이 놓인 무덤으로 간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뵙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보이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영적인 의미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이는 자신의 몸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모두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옥합이라는 것은 향유를 담았던 아주 특별한 그릇입니다. 우리가 평소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나 보물은 아무 데나 담아 두지 않는 것과 같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는 매우 귀하고 값진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담은 옥합 역시 아주 좋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옥합은 영적으로 몸을 상징하며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일지라도 그것은 옥합을 깨뜨려야 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이 동원되어 "이렇게 하면 남이 흉보거나 수군거리지 않을까?" 하는 외식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헌신이 나오지 못합니다. 자기의 몸, 겉껍질, 즉 외식과 가식을 깨뜨려 버릴 때 비로소 마음 중심에서 온전한 사랑과 헌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옥합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더 귀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향유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는데 이는 마음속에 있는 진정과 모든 정성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즉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정성과 사랑도 아름답거니와 당시 여인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체면이나 위신을 전혀 생각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발에 입맞추고 머리카락으로 씻어 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어린아이같이 맑고 깨끗한지요. 더구나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매우 소중한 것인데 그러한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는 것은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기려는 간절한 헌신과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리아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자존심이나 교만 등 모든 육적인 것, 곧 내 안에 있는 모든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림으로 가장 값진 마음과 진정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3. 받은 바 은혜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
사람들 중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도 자기 생각이나 나름대로 닦여진 교양으로 인해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만 있었다면 어찌 예수님의 기쁨이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대면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대하게 표현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영적인 사랑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리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벌써 그의 마음을 아시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깨우쳐 주십니다. "시몬아,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하고 물으시니 시몬이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이를 행했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게 되고 더 나아가 이러한 마음씀과 행함이 변함없어야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질병을 치료받거나 기도에 응답받아 문제가 해결되면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지고 변질되어 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응답받고 치료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구원 문제는 더더욱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악을 발견하여 버리며,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영혼이 행복이 가득한 천국으로 옮기워졌다는 사실은 질병을 치료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은혜인 것입니다.
저도 7년간의 병고 끝에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 주시고 단번에 치료해 주셨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100%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잠언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받기를 원했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온전히 깨우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진리를 좇아 행해 나갔더니 하나님께서는 항상 저를 만나 주시고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시며 모든 분야에 부족한 것이 없도록 채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도 예수님을 향한 영적인 사랑과 정성과 헌신에 대한 진실의 본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한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며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을 받고 어떤 문제라도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는 선의 행함으로 나아온 마리아와 같은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항상 축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자신이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갚는 선의 행함과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를 갚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도리를 잊고 아예 모른 체 하거나 어느 정도 갚다가 '내가 할 바는 다 했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번 받은 바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며 그 마음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한 촌에서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나아와 사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인 것이지요.
그러면 구원의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
누가복음 7:36-38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인일까요? '막달라'라는 곳은 갈릴리 호수의 서쪽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곳 주민들은 대부분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음으로 인해 어둠이 완전히 그 마을을 사로잡고 있는 곳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태어났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8:2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역시 귀신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귀신에게 고통받는 경우를 보면 개인적으로 귀신에게 고통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가정이, 또는 마을 전체가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지요. 한 개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상주하여 그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받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찌들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들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환경에서 많은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받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등 아무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며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막달라 마리아는 '나도 그분을 만나면 모든 질병을 고침받고 어둠의 세력에게 시달리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하며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지요.
마침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싶어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시몬의 집으로 갑니다. 너무도 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예수님 앞으로는 나아갈 수 없어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섰는데 복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마리아는 몸을 굽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고 가져온 향유를 그 발에 부어 드렸지요.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함을 보시고 질병을 고쳐 주시며 천국 소망과 참된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고 하루하루가 고통이 아닌 기쁨과 행복의 시간들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은혜를 체험했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한 희생과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하였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마지막 운명하시는 시간까지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이 놓인 무덤으로 간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뵙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보이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영적인 의미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이는 자신의 몸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모두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옥합이라는 것은 향유를 담았던 아주 특별한 그릇입니다. 우리가 평소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나 보물은 아무 데나 담아 두지 않는 것과 같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는 매우 귀하고 값진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담은 옥합 역시 아주 좋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옥합은 영적으로 몸을 상징하며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일지라도 그것은 옥합을 깨뜨려야 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이 동원되어 "이렇게 하면 남이 흉보거나 수군거리지 않을까?" 하는 외식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헌신이 나오지 못합니다. 자기의 몸, 겉껍질, 즉 외식과 가식을 깨뜨려 버릴 때 비로소 마음 중심에서 온전한 사랑과 헌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옥합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더 귀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향유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는데 이는 마음속에 있는 진정과 모든 정성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즉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정성과 사랑도 아름답거니와 당시 여인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체면이나 위신을 전혀 생각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발에 입맞추고 머리카락으로 씻어 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어린아이같이 맑고 깨끗한지요. 더구나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매우 소중한 것인데 그러한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는 것은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기려는 간절한 헌신과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리아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자존심이나 교만 등 모든 육적인 것, 곧 내 안에 있는 모든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림으로 가장 값진 마음과 진정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3. 받은 바 은혜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
사람들 중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도 자기 생각이나 나름대로 닦여진 교양으로 인해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만 있었다면 어찌 예수님의 기쁨이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대면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대하게 표현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영적인 사랑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리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벌써 그의 마음을 아시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깨우쳐 주십니다. "시몬아,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하고 물으시니 시몬이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이를 행했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게 되고 더 나아가 이러한 마음씀과 행함이 변함없어야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질병을 치료받거나 기도에 응답받아 문제가 해결되면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지고 변질되어 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응답받고 치료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구원 문제는 더더욱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악을 발견하여 버리며,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영혼이 행복이 가득한 천국으로 옮기워졌다는 사실은 질병을 치료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은혜인 것입니다.
저도 7년간의 병고 끝에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 주시고 단번에 치료해 주셨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100%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잠언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받기를 원했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온전히 깨우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진리를 좇아 행해 나갔더니 하나님께서는 항상 저를 만나 주시고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시며 모든 분야에 부족한 것이 없도록 채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도 예수님을 향한 영적인 사랑과 정성과 헌신에 대한 진실의 본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한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며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을 받고 어떤 문제라도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는 선의 행함으로 나아온 마리아와 같은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항상 축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5-13
제19과성령강림과 초대교회
행 2:1-4, 2:37-47
읽을말씀 : 행 2:1-4, 2:37-47 | 외울말씀 : 행 2:38
교육목표 :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성령의 역사와 초대교회의 형성에 대해 살펴보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1. 성령강림과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4-5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친히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지요.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행 1:8).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약 120명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지요(행 2:1-4). 이것이 성령강림의 시초로서 곧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욜 2:28-29).
사도행전 2:16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령받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을 말함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각종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권능을 행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절 이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얻은 사람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하며(행 19:2) 성령을 받을 때 위로부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의 형성과 초대교회
주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의 모임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시초이며 초대교회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치리했기 때문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6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했으니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모이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새벽예배 등 각종 예배 및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성전에 모이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2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며,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하시며, 베드로전서 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죄악을 이길 힘이 없으므로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기도로써 영적 교통을 하게 되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게 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진리 안에 살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니 질병이 틈타지 않고 항상 강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모이기를 힘쓰면 자연히 주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좇게 되지만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간증 및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더욱 믿음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며 항상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2:44-47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대로(마 22:37-40, 막 12:30-31)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은 영이 죽어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눈물, 고통, 슬픔, 질병,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고, 로마서 10:13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7을 보면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43을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져 기사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기 때문에(요 4:48) 예수님께서도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표적을 통하여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20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며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서로 교제하고 불같이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날마다 구원받는 수를 더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뿐아니라 성도들이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사와 표적을 많이 나타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성령의 역사와 초대교회의 형성에 대해 살펴보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1. 성령강림과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4-5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친히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지요.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행 1:8).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약 120명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지요(행 2:1-4). 이것이 성령강림의 시초로서 곧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욜 2:28-29).
사도행전 2:16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령받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을 말함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각종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권능을 행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절 이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얻은 사람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하며(행 19:2) 성령을 받을 때 위로부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의 형성과 초대교회
주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의 모임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시초이며 초대교회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치리했기 때문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6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했으니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모이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새벽예배 등 각종 예배 및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성전에 모이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2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며,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하시며, 베드로전서 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죄악을 이길 힘이 없으므로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기도로써 영적 교통을 하게 되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게 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진리 안에 살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니 질병이 틈타지 않고 항상 강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모이기를 힘쓰면 자연히 주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좇게 되지만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간증 및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더욱 믿음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며 항상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2:44-47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대로(마 22:37-40, 막 12:30-31)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은 영이 죽어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눈물, 고통, 슬픔, 질병,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고, 로마서 10:13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7을 보면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43을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져 기사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기 때문에(요 4:48) 예수님께서도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표적을 통하여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20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며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서로 교제하고 불같이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날마다 구원받는 수를 더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뿐아니라 성도들이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사와 표적을 많이 나타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