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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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7
제24과범죄치 마옵소서
삼상 19:1-6
읽을말씀 : 삼상 19:1-6 | 외울말씀 : 삼상 19:4
교육목표 : 자기 스스로 범죄치 아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지 않도록 빛 가운데로 인도하며 끝까지 선을 행하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게 한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 여러 가지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어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온갖 응석을 받아 주다가 버릇없는 아이로 만들기도 하는데 본문에는 참된 영적인 사랑의 한 분야가 나와 있습니다. 가족이나 섬기는 임금 등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영적인 사랑을 제시하고 있지요. 만일 임금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진정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는 신하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길로 가도록 진언할 것입니다. 또한 부모를 진정 사랑하는 자녀라면 부모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랑을 소유한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으로 범죄를 막은 요나단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장남으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용사였으며 사무엘상 20:2에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고백한 대로 왕과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는데 곧 아버지인 사울 왕이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이를 막으려는 요나단의 모습이지요. 사무엘상 19:1-3을 보면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 왕이 왜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고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다윗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하에 들어가 고통받을 뿐 아니라 왕인 사울은 생명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형편이었지요.
또한 다윗은 그 후로도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으며, 이미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했던 사울 왕이 악신으로 고통을 받을 때도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생명의 은인이자 훌륭한 신하인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다윗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지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왕과 군대를 맞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크게 돌리자 이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한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집에 군사를 보내 죽이라 명하기도 하며 다윗을 잡으러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니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울 왕이 악이 발동된 상황에서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요나단이 어떻게 사울 왕의 악에 동조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울 왕이 범죄하지 않도록 다윗을 변호하며 간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9:4 이하를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의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물론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다윗의 편을 들어야 하겠지만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된다면 요나단은 자신이 왕위를 얻을 수 없게 되니 다윗이 죽는 것이 유익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분별할 수 있었고 아무리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잘못을 잠시 뉘우치며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맹세까지 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울 왕은 마음 자체가 악했기 때문에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도 마음이 변개하여 계속 다윗을 죽이려 했고, 그때마다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범죄하지 않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울 왕이 노를 발하여 아들 요나단까지 죽이려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 끝까지 선을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 요나단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 왕의 뜻을 알기 위해 '다윗이 베들레헴에 가도록 자신이 허락하였다'고 하며 부친의 반응을 살피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사울 왕이 다윗을 감시하려 하거나 악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면 그 일에 별로 마음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아들인 요나단에게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하며 심히 노를 발하였습니다.
이에 요나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하며 더욱 다윗을 변호하며 사울 왕의 옳지 않은 마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더욱 화가 나서 단창을 들어 자기 아들인 요나단을 치려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고 신뢰하는 요나단이 다윗 편을 드니 그만 분에 못 이겨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어떤 일을 당해도 마음에 두지 않고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면서 아버지가 돌이키도록 권면해 나갔습니다.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범죄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더욱 깊은 차원의 선(善)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람이라면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 역시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렸지만 이 역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선한 행동이었지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결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이나 역사를 통해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면 그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아야 하고 이웃까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의 범죄로 백성 전체가 고통받는 경우도 많으며, 더구나 범죄한 사람이 머리되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피해가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아니하며 더 나아가 범죄하는 사람들을 선한 마음으로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선(善)은 범죄를 막고 진리로 이끄는 것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힘쓰며 앞서 본을 보인 성도의 경우를 잠시 소개하지요. 이분은 가족 중에 누구라도 입술에 부정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하면 권면하여 진리의 말만 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가족의 믿음이 좋았기에 일부러 죄를 짓는다거나 크게 범죄하는 일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조그마한 죄라도 짓지 않도록 막아 주니 가족 전체가 더욱 진리로 변화되어 교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온전한 선은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러한 선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가족들에게 늘 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도록 인도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마음 상할까봐 혹은 화평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육적인 정에 가리워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데, 이는 마치 엘리 제사장과 같이 육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삼상 2-4장).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두 아들이 크게 범죄했을 때 말로만 권면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그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죄라면 그냥 덮어두려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도록 막아 주고 권면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해도 끝까지 선을 행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그 마음이 선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충만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했을지라도 끝까지 그 아비를 배신하지 않고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도 다윗 왕이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자 중의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도록 배려해 주었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사울 왕의 재산을 그대로 가지게 해 주었지요.
이처럼 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요나단과 같이 범죄를 막으려 하고 공평한 추가 되어 정도를 좇으며 영적인 사랑으로 끝까지 선을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자기 스스로 범죄치 아니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지 않도록 빛 가운데로 인도하며 끝까지 선을 행하는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게 한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 여러 가지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요. 어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온갖 응석을 받아 주다가 버릇없는 아이로 만들기도 하는데 본문에는 참된 영적인 사랑의 한 분야가 나와 있습니다. 가족이나 섬기는 임금 등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영적인 사랑을 제시하고 있지요. 만일 임금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진정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는 신하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길로 가도록 진언할 것입니다. 또한 부모를 진정 사랑하는 자녀라면 부모가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한 사랑을 소유한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으로 범죄를 막은 요나단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장남으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용사였으며 사무엘상 20:2에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고백한 대로 왕과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문제가 생겼는데 곧 아버지인 사울 왕이 자신이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과 이를 막으려는 요나단의 모습이지요. 사무엘상 19:1-3을 보면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 왕이 왜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죽이고 어려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다윗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하에 들어가 고통받을 뿐 아니라 왕인 사울은 생명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형편이었지요.
또한 다윗은 그 후로도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으며, 이미 교만과 불순종으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했던 사울 왕이 악신으로 고통을 받을 때도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을 타면 악신이 물러가고 평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생명의 은인이자 훌륭한 신하인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다윗을 시기하는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지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왕과 군대를 맞아 환영하는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크게 돌리자 이때부터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무리한 전쟁에 내보내기도 하고 집에 군사를 보내 죽이라 명하기도 하며 다윗을 잡으러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다니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울 왕이 악이 발동된 상황에서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요나단이 어떻게 사울 왕의 악에 동조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사울 왕이 범죄하지 않도록 다윗을 변호하며 간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9:4 이하를 보면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요나단의 입장이라면 사울 왕과 다윗 중에 누구 편을 드시겠습니까? 물론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다윗의 편을 들어야 하겠지만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면 사울 왕은 요나단의 아버지요, 한 나라의 왕입니다. 더구나 다윗이 왕이 된다면 요나단은 자신이 왕위를 얻을 수 없게 되니 다윗이 죽는 것이 유익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분별할 수 있었고 아무리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범죄하여 멸망으로 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잘못을 잠시 뉘우치며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맹세까지 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울 왕은 마음 자체가 악했기 때문에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도 마음이 변개하여 계속 다윗을 죽이려 했고, 그때마다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범죄하지 않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울 왕이 노를 발하여 아들 요나단까지 죽이려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 끝까지 선을 행하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한 요나단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사울 왕의 뜻을 알기 위해 '다윗이 베들레헴에 가도록 자신이 허락하였다'고 하며 부친의 반응을 살피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사울 왕이 다윗을 감시하려 하거나 악한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면 그 일에 별로 마음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아들인 요나단에게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하며 심히 노를 발하였습니다.
이에 요나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하며 더욱 다윗을 변호하며 사울 왕의 옳지 않은 마음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더욱 화가 나서 단창을 들어 자기 아들인 요나단을 치려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끼고 신뢰하는 요나단이 다윗 편을 드니 그만 분에 못 이겨 아들까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어떤 일을 당해도 마음에 두지 않고 끝까지 다윗을 지켜 주면서 아버지가 돌이키도록 권면해 나갔습니다. 요나단의 선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단지 아버지의 범죄를 막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며 더욱 깊은 차원의 선(善)으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람이라면 누가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 차라리 눈을 돌려 버리고 싶고 악한 사람 곁에 머물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선한 사람은 더욱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 역시 악한 아버지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자녀로서의 도리를 한 번도 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렸지만 이 역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선한 행동이었지요.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신 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악인과 함께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었지만 결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싸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이나 역사를 통해 한 사람이 바로 서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면 그 가족 전체가 고통을 받아야 하고 이웃까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의 범죄로 백성 전체가 고통받는 경우도 많으며, 더구나 범죄한 사람이 머리되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피해가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아니하며 더 나아가 범죄하는 사람들을 선한 마음으로 빛 가운데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3. 진정한 선(善)은 범죄를 막고 진리로 이끄는 것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을 진리로 이끌기 위해 힘쓰며 앞서 본을 보인 성도의 경우를 잠시 소개하지요. 이분은 가족 중에 누구라도 입술에 부정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말을 하면 권면하여 진리의 말만 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가족의 믿음이 좋았기에 일부러 죄를 짓는다거나 크게 범죄하는 일은 없었지만 생활 속에서 조그마한 죄라도 짓지 않도록 막아 주니 가족 전체가 더욱 진리로 변화되어 교회에서도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온전한 선은 어떤 것인지 잘 알았고 그러한 선 속에서 가족들을 사랑했기에 가족들에게 늘 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행하도록 인도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마음 상할까봐 혹은 화평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혹은 육적인 정에 가리워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데, 이는 마치 엘리 제사장과 같이 육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삼상 2-4장).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두 아들이 크게 범죄했을 때 말로만 권면할 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그 집안에 큰 재앙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지 죄라면 그냥 덮어두려 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하도록 막아 주고 권면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이요, 또한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선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해도 끝까지 선을 행해 나가는 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그 마음이 선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충만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했을지라도 끝까지 그 아비를 배신하지 않고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도 다윗 왕이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자 중의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도록 배려해 주었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사울 왕의 재산을 그대로 가지게 해 주었지요.
이처럼 선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요나단과 같이 범죄를 막으려 하고 공평한 추가 되어 정도를 좇으며 영적인 사랑으로 끝까지 선을 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6-10
제23과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단 6:19-23
읽을말씀 : 단 6:19-23 | 외울말씀 : 단 6:22
교육목표 : 다니엘과 같이 비진리의 감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으며 범사에 영광을 돌리게 한다.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에는 무슨 일이 잘못되었을 때 상대의 탓으로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리면 당장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 진실이 밝혀지면 상대의 마음은 물론 더욱 큰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되지요.
반대로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린 경우에 당장은 이익이 되는 것 같지만 결과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끝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쓰거나 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선진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 남을 탓하거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1. 신앙의 정도(正道)를 걸은 다니엘
다니엘은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게 되었을 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다 지파의 왕족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을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왕의 진미 중에는 우상에 절한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생물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런 것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신 14장).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이지만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자 감독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즉 10일 동안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 채식과 물만 먹고 마시게 한 다음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과 비교해 볼 것을 담대히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니엘이 사람의 지식과 이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았더니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왕의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얼굴이 더욱 빛나고 건강하게 역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크게 은총을 더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1:17을 보면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것을 인정하여 그를 바벨론의 모든 도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렸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대를 이은 벨사살 왕과 그 다음 왕인 다리오 왕에게까지 총애를 받았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함을 인정하여 바벨론의 세 총리 중 수석 총리로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지요. 총리들과 방백들은 이를 시기하여 국사에 대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찾고자 했지만 아무 틈, 아무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단 6:4).
이에 다니엘을 시기한 총리와 방백과 관원들은 왕을 위하는 것처럼 계략을 꾸며 왕에게 유리한 한 가지 금령을 정할 것을 요구하였지요.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것을 통해 고소할 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왕은 이러한 궤계를 알지 못하기에 그들의 제안을 흡족히 여기고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반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금령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무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왕에게 고했고 그제서야 왕은 금령이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모략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미 금령이 반포되었으니 왕의 입장에서도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은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하고자 마음을 쓰며 힘을 다했지만 계략을 꾸민 무리들이 왕에게 나와 법대로 행할 것을 재촉함으로 결국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2. 죽음 앞에서도 남을 탓하지 않은 다니엘의 선
이처럼 억울한 죽음을 앞둔 다니엘은 자신이 왕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으니 당당하게 항변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믿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정도를 걸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잃을까 하여 비굴하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생명과 명예와 권세를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조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에게 조금도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았고 자기를 모함한 무리들을 향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는 선한 모습을 볼 수 있지요.
평소에 다니엘을 총애하던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넣은 후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며 기악을 그치고 침수를 폐한 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이 되자 급히 사자굴로 달려가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하며 슬피 소리쳐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놀랍게도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의 생생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다니엘 6:21-22을 보면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긴장된 순간에도 왕을 대하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는 축복의 기원으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을 탓하거나 따지는 것이 옳은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악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설령 윗사람의 실수로 커다란 해를 당할 뻔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해도 윗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말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의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이해하며 윗사람이 조금도 민망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윗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터인데 아랫사람이 대놓고 자기의 무죄함을 강하게 말함으로 윗사람의 실수를 드러내는 것은 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3. 다니엘과 같이 무죄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그러면 누구나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갖고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기 원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다면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염려, 불안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내가 혹 시험을 만난다 해도 피할 길을 열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더 나아가 설령 내게 불이익이 온다 해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고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온전히 믿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은 자신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죄 없는 사람에게 억울함을 당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선함과 정직함을 증거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다리오 왕은 심히 기뻐하며 다니엘을 끌어 올리라 명하고 대신 다니엘을 참소한 무리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도록 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사자가 그들을 움켜서 뼈까지 부숴뜨렸습니다(단 6:24). 이를 목도한 다리오 왕은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알리며 그 앞에 떨며 두려워하도록 함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였습니다(단 6:26-27).
여기서 우리는 죄가 있는 사람은 결국 깨어지고 망하게 되지만 죄가 없는 사람은 다니엘처럼 죽음이라도 피해 갈 뿐만 아니라 상함을 당치 않도록 각종 어려움과 장애가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사자의 밥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독사에 물렸지만 조금도 상함이 없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어도 불이 그들을 그을리지 못하였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속에 들어가면 시험 환난이나 질병이 틈타지 않으며 설령 틈탔다 할지라도 마음을 겸비케 하여 통회자복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가운데 들어가면 어떠한 문제나 질병도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상대와 부딪칠 만한 일을 피해 버림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소극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다니엘이 이러한 소극적인 선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니엘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했다면 30일 동안만 기도를 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기도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창문을 닫고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과 명예와 부와 권세를 잃는다 해도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소유했지요. 즉 조용히 피해 갈 수 있는 일도 적극적으로 진리를 지켜 행했고 차라리 부딪칠지언정 하나님의 뜻이면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금도 원망 불평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딪쳐오는 환경에 감사하며 모든 사람을 선대해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면성을 다 갖추었을 때 진정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은 이렇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 나가며 진리라면 굽히지 않고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진리에 위배되는 감정을 모두 제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마음 속에 그러한 비진리의 감정이나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니엘과 같이 비진리의 감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다니엘과 같이 비진리의 감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으며 범사에 영광을 돌리게 한다.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에는 무슨 일이 잘못되었을 때 상대의 탓으로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리면 당장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흘러 진실이 밝혀지면 상대의 마음은 물론 더욱 큰 신뢰와 존경을 얻게 되지요.
반대로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린 경우에 당장은 이익이 되는 것 같지만 결과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끝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쓰거나 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선진 다니엘의 모습을 통해 남을 탓하거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1. 신앙의 정도(正道)를 걸은 다니엘
다니엘은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게 되었을 때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유다 지파의 왕족이었습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지식을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 만한 소년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왕의 진미 중에는 우상에 절한 음식이나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생물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런 것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신 14장).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이지만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자 감독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즉 10일 동안 왕의 진미와 포도주 대신 채식과 물만 먹고 마시게 한 다음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과 비교해 볼 것을 담대히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니엘이 사람의 지식과 이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좇았더니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왕의 진미를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얼굴이 더욱 빛나고 건강하게 역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크게 은총을 더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 1:17을 보면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것을 인정하여 그를 바벨론의 모든 도를 다스리는 자리에 올렸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대를 이은 벨사살 왕과 그 다음 왕인 다리오 왕에게까지 총애를 받았습니다. 다리오 왕은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함을 인정하여 바벨론의 세 총리 중 수석 총리로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지요. 총리들과 방백들은 이를 시기하여 국사에 대해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찾고자 했지만 아무 틈, 아무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단 6:4).
이에 다니엘을 시기한 총리와 방백과 관원들은 왕을 위하는 것처럼 계략을 꾸며 왕에게 유리한 한 가지 금령을 정할 것을 요구하였지요. 바로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것을 통해 고소할 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왕은 이러한 궤계를 알지 못하기에 그들의 제안을 흡족히 여기고 조서에 어인을 찍어 금령을 반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금령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무리들은 이러한 사실을 왕에게 고했고 그제서야 왕은 금령이 다니엘을 죽이기 위한 모략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미 금령이 반포되었으니 왕의 입장에서도 번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은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하고자 마음을 쓰며 힘을 다했지만 계략을 꾸민 무리들이 왕에게 나와 법대로 행할 것을 재촉함으로 결국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2. 죽음 앞에서도 남을 탓하지 않은 다니엘의 선
이처럼 억울한 죽음을 앞둔 다니엘은 자신이 왕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으니 당당하게 항변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믿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정도를 걸었습니다.
왕의 신임을 잃을까 하여 비굴하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생명과 명예와 권세를 잃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조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은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에게 조금도 서운한 감정을 갖지 않았고 자기를 모함한 무리들을 향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만 맡기는 선한 모습을 볼 수 있지요.
평소에 다니엘을 총애하던 왕은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넣은 후 밤이 다하도록 금식하며 기악을 그치고 침수를 폐한 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새벽이 되자 급히 사자굴로 달려가서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하며 슬피 소리쳐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놀랍게도 사자굴 속에서 다니엘의 생생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다니엘 6:21-22을 보면 "다니엘이 왕에게 고하되 왕이여 원컨대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긴장된 순간에도 왕을 대하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는 축복의 기원으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무고한 자신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을 탓하거나 따지는 것이 옳은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마음에 악이 없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악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은 설령 윗사람의 실수로 커다란 해를 당할 뻔 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해도 윗사람을 민망하게 하는 말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의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이해하며 윗사람이 조금도 민망하지 않게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윗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일 터인데 아랫사람이 대놓고 자기의 무죄함을 강하게 말함으로 윗사람의 실수를 드러내는 것은 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3. 다니엘과 같이 무죄한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그러면 누구나 다니엘과 같은 믿음을 갖고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기 원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다면 아무리 극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염려, 불안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내가 혹 시험을 만난다 해도 피할 길을 열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더 나아가 설령 내게 불이익이 온다 해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고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온전히 믿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은 자신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죄 없는 사람에게 억울함을 당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선함과 정직함을 증거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다리오 왕은 심히 기뻐하며 다니엘을 끌어 올리라 명하고 대신 다니엘을 참소한 무리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도록 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사자가 그들을 움켜서 뼈까지 부숴뜨렸습니다(단 6:24). 이를 목도한 다리오 왕은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알리며 그 앞에 떨며 두려워하도록 함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였습니다(단 6:26-27).
여기서 우리는 죄가 있는 사람은 결국 깨어지고 망하게 되지만 죄가 없는 사람은 다니엘처럼 죽음이라도 피해 갈 뿐만 아니라 상함을 당치 않도록 각종 어려움과 장애가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사자의 밥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독사에 물렸지만 조금도 상함이 없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 던짐을 받았어도 불이 그들을 그을리지 못하였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속에 들어가면 시험 환난이나 질병이 틈타지 않으며 설령 틈탔다 할지라도 마음을 겸비케 하여 통회자복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 가운데 들어가면 어떠한 문제나 질병도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4.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상대와 부딪칠 만한 일을 피해 버림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소극적인 의미만은 아닙니다. 다니엘이 이러한 소극적인 선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니엘이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했다면 30일 동안만 기도를 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기도를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창문을 닫고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과 명예와 부와 권세를 잃는다 해도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확고한 신앙을 소유했지요. 즉 조용히 피해 갈 수 있는 일도 적극적으로 진리를 지켜 행했고 차라리 부딪칠지언정 하나님의 뜻이면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조금도 원망 불평하거나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딪쳐오는 환경에 감사하며 모든 사람을 선대해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양면성을 다 갖추었을 때 진정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은 이렇게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해 나가며 진리라면 굽히지 않고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는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말씀하셨으니 진리에 위배되는 감정을 모두 제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마음 속에 그러한 비진리의 감정이나 악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니엘과 같이 비진리의 감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입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6-03
제22과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룻 1:16-17
읽을말씀 : 룻 1:16-17 | 외울말씀 : 룻 1:16-17
교육목표 :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도리를 다한 룻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깨닫고 온전히 행함으로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오늘날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사회 곳곳에 팽배하여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홀대하고 어린 자녀를 버리거나 사소한 문제로 이웃간에 불목하고 원수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바로 악을 버리고 선한 마음으로 사람의 도리를 지켜 나가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룻이라는 여인은 과연 어떠한 선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은 것일까요?
1.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긴 룻의 선한 행함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에 심한 흉년이 들자 이것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 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니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을 떠나 다시 고향인 유다로 돌아가고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에게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였습니다(룻 1:8).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 소망 없이 지내야 할 며느리들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자신을 떠나가라고 여러 번 강권했던 것입니다.
이때 룻은 자기의 도리를 지키는 선한 마음이었기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호히 고백합니다(룻 1:16-17). 아무 의지할 곳 없고 소망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저버리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이지요.
만약 룻에게 자기의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시어머니가 강권하니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함이 없고 한결같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고향은 낯설기만 한 땅으로 당장 집도 없고 먹고 살 방편도 막막하며,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 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모습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오는가' 하며 자로 재거나 따지지 않고 오로지 정도와 선을 좇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또한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이후로 한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이처럼 선한 중심의 사람은 선을 행할 때 몇 번 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마음이 선이기에 이를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온전하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자기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가 룻과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도 적으며, 더구나 끝까지 선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룻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함으로 멸망에 이른 사람입니다. 세상 지식을 가르쳐 준 스승이라 해도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데, 생명의 지식을 공급해 주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이처럼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마음이었으니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도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으면서도 진정 선한 중심이 아니었기에 사도 바울과 함께하면 많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유익을 좇아 떠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보면 어떤 분들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기쁘고 충만하여 "생명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고백하고는 시간이 지나 은혜가 떨어지면 그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 서원을 해 놓고 막상 응답을 받은 후에는 마음이 변하여 서원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 유익을 좇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는 거리가 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내 편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풀무불에 던져져 생명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중심이 되어야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상대의 유익을 구할 때의 축복
룻처럼 자신의 도리를 지켜 행하면 영육간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한 예로 어느 여성도님은 단칸방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나가버렸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교통사고까지 당해 일일이 수발을 들어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따라 조금도 원망이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가망이 없던 남편의 마음을 주관해 주셔서 가족에게 돌아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단칸방을 떠나 더 좋은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사랑받고 존경받으며 신뢰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서로 믿고 신뢰하며 섬기고 낮아지면 진리로 한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정, 일터, 사업터와 교회를 지켜 주시므로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탈 수도 없고 각종 시험 환난이 물러가며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룻은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도리를 지켜 나갔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의 모양이 있다면 신속하게 회개하고 돌이키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정도를 좇는 선의 단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도리를 다한 룻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깨닫고 온전히 행함으로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오늘날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사회 곳곳에 팽배하여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홀대하고 어린 자녀를 버리거나 사소한 문제로 이웃간에 불목하고 원수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니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겠습니까? 바로 악을 버리고 선한 마음으로 사람의 도리를 지켜 나가는 사람을 기뻐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룻이라는 여인은 과연 어떠한 선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은 것일까요?
1.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긴 룻의 선한 행함
룻은 모압에 살던 이방 여인으로 이스라엘에 심한 흉년이 들자 이것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주해 온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의 남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 버리는 비극을 겪게 되니 남은 사람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동서 오르바, 그리고 룻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을 떠나 다시 고향인 유다로 돌아가고자 며느리인 오르바와 룻에게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하였습니다(룻 1:8). 남자가 없는 집안에서 소망 없이 지내야 할 며느리들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자신을 떠나가라고 여러 번 강권했던 것입니다.
이때 룻은 자기의 도리를 지키는 선한 마음이었기에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호히 고백합니다(룻 1:16-17). 아무 의지할 곳 없고 소망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저버리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사랑의 고백이지요.
만약 룻에게 자기의 유익을 좇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인정상 한두 번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도 시어머니가 강권하니 못 이기는 척하고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선한 마음을 가졌기에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함이 없고 한결같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고향은 낯설기만 한 땅으로 당장 집도 없고 먹고 살 방편도 막막하며, 희망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룻은 앞뒤 상황을 재고 계산한 것이 아니라 단호히 자신의 도리를 좇아 홀로 된 시어머니를 섬기는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의 모습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지요. 이처럼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오는가' 하며 자로 재거나 따지지 않고 오로지 정도와 선을 좇아 자신의 생명을 잃는다 할지라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또한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유대 땅으로 온 이후로 한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섬겼습니다. 이처럼 선한 중심의 사람은 선을 행할 때 몇 번 해 보다가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사람으로서 바른 도리를 좇는 마음이 선이기에 이를 변함없이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온전하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 자기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가 룻과 오늘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선한 사람도 드물거니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사람도 적으며, 더구나 끝까지 선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더욱 많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룻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기 유익을 좇아 악을 행함으로 멸망에 이른 사람입니다. 세상 지식을 가르쳐 준 스승이라 해도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데, 생명의 지식을 공급해 주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스승인 예수님을 배신하여 은 삼십에 팔아넘겼습니다. 이처럼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마저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마음이었으니 어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 중에도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버리고 세상으로 향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함께하시는 증거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으면서도 진정 선한 중심이 아니었기에 사도 바울과 함께하면 많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 유익을 좇아 떠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보면 어떤 분들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기쁘고 충만하여 "생명다해 충성하겠습니다." 고백하고는 시간이 지나 은혜가 떨어지면 그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아주 다급한 상황에서 서원을 해 놓고 막상 응답을 받은 후에는 마음이 변하여 서원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것들이 바로 자기 유익을 좇기 때문에 나오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과는 거리가 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내 편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풀무불에 던져져 생명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끝까지 지키는 중심이 되어야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상대의 유익을 구할 때의 축복
룻처럼 자신의 도리를 지켜 행하면 영육간에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한 예로 어느 여성도님은 단칸방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나가버렸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는 교통사고까지 당해 일일이 수발을 들어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따라 조금도 원망이나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가망이 없던 남편의 마음을 주관해 주셔서 가족에게 돌아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단칸방을 떠나 더 좋은 집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도리를 지키며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사랑받고 존경받으며 신뢰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서로 믿고 신뢰하며 섬기고 낮아지면 진리로 한마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정, 일터, 사업터와 교회를 지켜 주시므로 원수 마귀 사단이 틈탈 수도 없고 각종 시험 환난이 물러가며 문제가 해결되는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룻은 비록 이방 여인이었지만 정도를 좇아 자신의 도리를 지켜 나갔기 때문에 아무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었고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악의 모양이 있다면 신속하게 회개하고 돌이키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정도를 좇는 선의 단계로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5-27
제21과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2
읽을말씀 : 창 12:1-2 | 외울말씀 : 창 12:1-2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변함없는 믿음과 선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을 만났다 할지라도 항상 형통함을 받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고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장수의 축복 등 온갖 복을 다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 18:7에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말씀하신 대로 앞일에 대해서도 알려 주셨으며 아브라함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는 친히 역사해 주심으로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
갈라디아서 3:6-9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수많은 축복을 주셨으며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동일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었을까요?
창세기 12:1-2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자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 주지 않으시고 무조건 떠나라 명하시니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히 믿어 드릴 때 갖가지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참으로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자녀라면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순종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축복하셨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즉 아들을 죽여서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각을 떠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도 않고, "이삭을 통한 약속은 어떻게 하시구요?"라는 이유도 대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순종만 있었지요.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함을 온전한 것으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17-19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 기쁨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함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이의가 나오고 의심이나 원망 불평이 나오는 것이지 정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직 순종만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까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선의 모습이었고, 그 선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면 이러한 축복을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누구나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터에 축복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말라기 3:10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고,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말씀하셨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축복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는 것이며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순종할 때 아브라함처럼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 순종, 행함이 변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 드린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셨고 이 믿음을 순종과 행함을 통해 나타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있지요(롬 12:2).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아들 이삭을 위해 아내를 택할 것을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종은 여자가 혹 자신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따라오려 하지 않을 때에는 이삭을 그 여자가 거하는 땅 하란으로 인도하여 돌아가야 할지를 묻지요.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러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창 24:7)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자를 예비하여 보내 주실 것이므로 너는 가서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금 행해 보다가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이내 변개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면 시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그대로 믿었기에 그런 말을 종에게 했던 것이지요. 과연 아브라함의 고백대로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순적히 만나게 되었지요(창 24:10-6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그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명심하여 믿어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연단을 통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지요.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고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하여 행했으며 그 말씀을 믿어 드리며 행하는 것이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결정체로 나왔기에 야고보서 2:23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100% 신뢰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행함이 있으신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한 번 믿어 드린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진리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선을 행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항상 선을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 대한 양보는 어떠하였습니까?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했을 때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 동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윗사람이면서도 오히려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선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카 롯이 나중에 소돔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소돔과 고모라가 주위의 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게 되었고 그 모든 재물과 양식까지 다 빼앗기게 되었지요. 그 상황에서 조카 롯은 사로잡혀 갔고 그 재물까지 노략질당했던 것입니다. 이때도 아브라함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한 자 318인을 데리고 가서 상대를 쳐서 파하여 조카 롯을 구해 왔습니다(창 14:22-2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 성을 멸하실 것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때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간구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9:29을 보면 "하나님께서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해 주셨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선의 마음으로 대하였으며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선한 마음이 행함을 통해 변함없이 나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선한 중심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변함없는 믿음과 선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성경을 보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을 만났다 할지라도 항상 형통함을 받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중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고 자녀의 축복,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 장수의 축복 등 온갖 복을 다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 18:7에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 말씀하신 대로 앞일에 대해서도 알려 주셨으며 아브라함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는 친히 역사해 주심으로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
갈라디아서 3:6-9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수많은 축복을 주셨으며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동일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었을까요?
창세기 12:1-2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자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 주지 않으시고 무조건 떠나라 명하시니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막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민수기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온전히 믿어 드릴 때 갖가지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참으로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맞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자녀라면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순종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이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축복하셨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즉 아들을 죽여서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각을 떠서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도 않고, "이삭을 통한 약속은 어떻게 하시구요?"라는 이유도 대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순종만 있었지요.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행함을 온전한 것으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1:17-19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더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기에 기쁨으로 이삭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행함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이의가 나오고 의심이나 원망 불평이 나오는 것이지 정녕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직 순종만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까지라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선의 모습이었고, 그 선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면 이러한 축복을 주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누구나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터에 축복받기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말라기 3:10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하셨고,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말씀하셨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축복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마음 중심에서 믿고 행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는 것이며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순종할 때 아브라함처럼 축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믿음, 순종, 행함이 변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 드린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셨고 이 믿음을 순종과 행함을 통해 나타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온전하다고 할 수 있지요(롬 12:2).
창세기 2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기 고향 자기 족속에게로 가서 아들 이삭을 위해 아내를 택할 것을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종은 여자가 혹 자신을 좇아 가나안 땅으로 따라오려 하지 않을 때에는 이삭을 그 여자가 거하는 땅 하란으로 인도하여 돌아가야 할지를 묻지요.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러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창 24:7) 말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여자를 예비하여 보내 주실 것이므로 너는 가서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조금 행해 보다가 응답이 없는 것 같으면 이내 변개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면 시간이 지나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그대로 믿었기에 그런 말을 종에게 했던 것이지요. 과연 아브라함의 고백대로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순적히 만나게 되었지요(창 24:10-6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그 말씀을 마음에 지키고 명심하여 믿어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연단을 통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이지요.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과 행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고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하여 행했으며 그 말씀을 믿어 드리며 행하는 것이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었지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결정체로 나왔기에 야고보서 2:23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100% 신뢰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행함이 있으신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한 번 믿어 드린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진리의 말씀대로 행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할 것이 없는 것이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선을 행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항상 선을 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 대한 양보는 어떠하였습니까?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거했을 때 그들의 소유가 많아져 동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윗사람이면서도 오히려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하도록 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롯에 대한 선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카 롯이 나중에 소돔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소돔과 고모라가 주위의 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게 되었고 그 모든 재물과 양식까지 다 빼앗기게 되었지요. 그 상황에서 조카 롯은 사로잡혀 갔고 그 재물까지 노략질당했던 것입니다. 이때도 아브라함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한 자 318인을 데리고 가서 상대를 쳐서 파하여 조카 롯을 구해 왔습니다(창 14:22-2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 성을 멸하실 것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때도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간구로 그곳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성에는 의인 열 명이 없었고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롯을 구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9:29을 보면 "하나님께서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해 주셨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 대해 끝까지 변함없는 선의 마음으로 대하였으며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선한 마음이 행함을 통해 변함없이 나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선한 중심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5-20
제20과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입맞추니
눅 7:36-38
읽을말씀 : 눅 7:36-38 | 외울말씀 : 눅 7:38
교육목표 : 자신이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갚는 선의 행함과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를 갚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도리를 잊고 아예 모른 체 하거나 어느 정도 갚다가 '내가 할 바는 다 했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번 받은 바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며 그 마음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한 촌에서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나아와 사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인 것이지요.
그러면 구원의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
누가복음 7:36-38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인일까요? '막달라'라는 곳은 갈릴리 호수의 서쪽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곳 주민들은 대부분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음으로 인해 어둠이 완전히 그 마을을 사로잡고 있는 곳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태어났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8:2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역시 귀신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귀신에게 고통받는 경우를 보면 개인적으로 귀신에게 고통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가정이, 또는 마을 전체가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지요. 한 개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상주하여 그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받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찌들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들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환경에서 많은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받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등 아무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며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막달라 마리아는 '나도 그분을 만나면 모든 질병을 고침받고 어둠의 세력에게 시달리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하며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지요.
마침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싶어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시몬의 집으로 갑니다. 너무도 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예수님 앞으로는 나아갈 수 없어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섰는데 복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마리아는 몸을 굽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고 가져온 향유를 그 발에 부어 드렸지요.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함을 보시고 질병을 고쳐 주시며 천국 소망과 참된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고 하루하루가 고통이 아닌 기쁨과 행복의 시간들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은혜를 체험했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한 희생과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하였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마지막 운명하시는 시간까지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이 놓인 무덤으로 간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뵙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보이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영적인 의미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이는 자신의 몸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모두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옥합이라는 것은 향유를 담았던 아주 특별한 그릇입니다. 우리가 평소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나 보물은 아무 데나 담아 두지 않는 것과 같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는 매우 귀하고 값진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담은 옥합 역시 아주 좋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옥합은 영적으로 몸을 상징하며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일지라도 그것은 옥합을 깨뜨려야 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이 동원되어 "이렇게 하면 남이 흉보거나 수군거리지 않을까?" 하는 외식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헌신이 나오지 못합니다. 자기의 몸, 겉껍질, 즉 외식과 가식을 깨뜨려 버릴 때 비로소 마음 중심에서 온전한 사랑과 헌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옥합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더 귀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향유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는데 이는 마음속에 있는 진정과 모든 정성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즉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정성과 사랑도 아름답거니와 당시 여인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체면이나 위신을 전혀 생각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발에 입맞추고 머리카락으로 씻어 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어린아이같이 맑고 깨끗한지요. 더구나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매우 소중한 것인데 그러한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는 것은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기려는 간절한 헌신과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리아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자존심이나 교만 등 모든 육적인 것, 곧 내 안에 있는 모든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림으로 가장 값진 마음과 진정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3. 받은 바 은혜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
사람들 중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도 자기 생각이나 나름대로 닦여진 교양으로 인해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만 있었다면 어찌 예수님의 기쁨이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대면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대하게 표현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영적인 사랑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리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벌써 그의 마음을 아시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깨우쳐 주십니다. "시몬아,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하고 물으시니 시몬이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이를 행했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게 되고 더 나아가 이러한 마음씀과 행함이 변함없어야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질병을 치료받거나 기도에 응답받아 문제가 해결되면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지고 변질되어 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응답받고 치료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구원 문제는 더더욱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악을 발견하여 버리며,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영혼이 행복이 가득한 천국으로 옮기워졌다는 사실은 질병을 치료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은혜인 것입니다.
저도 7년간의 병고 끝에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 주시고 단번에 치료해 주셨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100%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잠언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받기를 원했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온전히 깨우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진리를 좇아 행해 나갔더니 하나님께서는 항상 저를 만나 주시고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시며 모든 분야에 부족한 것이 없도록 채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도 예수님을 향한 영적인 사랑과 정성과 헌신에 대한 진실의 본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한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며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을 받고 어떤 문제라도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는 선의 행함으로 나아온 마리아와 같은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항상 축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자신이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갚는 선의 행함과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이를 갚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도리를 잊고 아예 모른 체 하거나 어느 정도 갚다가 '내가 할 바는 다 했다'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한번 받은 바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며 그 마음이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한 촌에서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료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나아와 사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인 것이지요.
그러면 구원의 은총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
누가복음 7:36-38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뒤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인일까요? '막달라'라는 곳은 갈릴리 호수의 서쪽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곳 주민들은 대부분이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있음으로 인해 어둠이 완전히 그 마을을 사로잡고 있는 곳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태어났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8:2을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역시 귀신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귀신에게 고통받는 경우를 보면 개인적으로 귀신에게 고통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한 가정이, 또는 마을 전체가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지요. 한 개인이 귀신에게 사로잡혔을 경우에는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상주하여 그의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게 고통받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대대로 우상 숭배에 찌들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난 가정에서 태어남으로 그 가정에 임한 저주들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환경에서 많은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받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멸시당하는 등 아무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며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막달라 마리아는 '나도 그분을 만나면 모든 질병을 고침받고 어둠의 세력에게 시달리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생각하며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했지요.
마침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싶어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시몬의 집으로 갑니다. 너무도 귀한 분이시기에 감히 예수님 앞으로는 나아갈 수 없어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섰는데 복받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셨고 마리아는 몸을 굽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고 가져온 향유를 그 발에 부어 드렸지요.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함을 보시고 질병을 고쳐 주시며 천국 소망과 참된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고 하루하루가 고통이 아닌 기쁨과 행복의 시간들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남은 인생을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은혜를 체험했던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지극한 희생과 사랑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무서워 도망하였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마지막 운명하시는 시간까지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시신이 놓인 무덤으로 간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뵙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보이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은 사람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2.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영적인 의미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린 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이는 자신의 몸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예수님께 모두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옥합이라는 것은 향유를 담았던 아주 특별한 그릇입니다. 우리가 평소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나 보물은 아무 데나 담아 두지 않는 것과 같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향유는 매우 귀하고 값진 것이었으므로 그것을 담은 옥합 역시 아주 좋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옥합은 영적으로 몸을 상징하며 옥합을 깨뜨린다는 것은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려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향유일지라도 그것은 옥합을 깨뜨려야 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권위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온전히 자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이러한 헌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생각이 동원되어 "이렇게 하면 남이 흉보거나 수군거리지 않을까?" 하는 외식이 있기 때문에 온전한 헌신이 나오지 못합니다. 자기의 몸, 겉껍질, 즉 외식과 가식을 깨뜨려 버릴 때 비로소 마음 중심에서 온전한 사랑과 헌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옥합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더 귀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향유입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귀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렸는데 이는 마음속에 있는 진정과 모든 정성을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즉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할 때 진정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정성과 사랑도 아름답거니와 당시 여인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체면이나 위신을 전혀 생각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발에 입맞추고 머리카락으로 씻어 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어린아이같이 맑고 깨끗한지요. 더구나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매우 소중한 것인데 그러한 머리털로 발을 씻었다는 것은 온전히 낮아지는 겸손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기려는 간절한 헌신과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리아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며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처럼 자존심이나 교만 등 모든 육적인 것, 곧 내 안에 있는 모든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림으로 가장 값진 마음과 진정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3. 받은 바 은혜를 갚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
사람들 중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도 자기 생각이나 나름대로 닦여진 교양으로 인해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합니다.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만 있었다면 어찌 예수님의 기쁨이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대면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담대하게 표현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영적인 사랑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드리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마음에 이르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눅 7:39)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벌써 그의 마음을 아시고 한 가지 비유를 들어 깨우쳐 주십니다. "시몬아,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하고 물으시니 시몬이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판단이 옳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이를 행했을 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게 되고 더 나아가 이러한 마음씀과 행함이 변함없어야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질병을 치료받거나 기도에 응답받아 문제가 해결되면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지고 변질되어 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응답받고 치료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구원 문제는 더더욱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악을 발견하여 버리며,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영혼이 행복이 가득한 천국으로 옮기워졌다는 사실은 질병을 치료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은혜인 것입니다.
저도 7년간의 병고 끝에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 주시고 단번에 치료해 주셨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100%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잠언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는 말씀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받기를 원했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온전히 깨우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진리를 좇아 행해 나갔더니 하나님께서는 항상 저를 만나 주시고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시며 모든 분야에 부족한 것이 없도록 채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칭찬하신 것도 예수님을 향한 영적인 사랑과 정성과 헌신에 대한 진실의 본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한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며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을 받고 어떤 문제라도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변함없는 선의 행함으로 나아온 마리아와 같은 영적인 사랑을 소유하여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항상 축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5-13
제19과성령강림과 초대교회
행 2:1-4, 2:37-47
읽을말씀 : 행 2:1-4, 2:37-47 | 외울말씀 : 행 2:38
교육목표 :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성령의 역사와 초대교회의 형성에 대해 살펴보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1. 성령강림과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4-5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친히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지요.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행 1:8).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약 120명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지요(행 2:1-4). 이것이 성령강림의 시초로서 곧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욜 2:28-29).
사도행전 2:16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령받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을 말함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각종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권능을 행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절 이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얻은 사람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하며(행 19:2) 성령을 받을 때 위로부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의 형성과 초대교회
주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의 모임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시초이며 초대교회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치리했기 때문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6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했으니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모이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새벽예배 등 각종 예배 및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성전에 모이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2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며,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하시며, 베드로전서 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죄악을 이길 힘이 없으므로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기도로써 영적 교통을 하게 되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게 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진리 안에 살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니 질병이 틈타지 않고 항상 강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모이기를 힘쓰면 자연히 주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좇게 되지만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간증 및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더욱 믿음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며 항상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2:44-47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대로(마 22:37-40, 막 12:30-31)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은 영이 죽어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눈물, 고통, 슬픔, 질병,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고, 로마서 10:13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7을 보면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43을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져 기사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기 때문에(요 4:48) 예수님께서도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표적을 통하여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20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며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서로 교제하고 불같이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날마다 구원받는 수를 더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뿐아니라 성도들이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사와 표적을 많이 나타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육목표 : 성령강림절을 기념하여 성령의 역사와 초대교회의 형성에 대해 살펴보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1. 성령강림과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4-5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친히 살아 계심을 증거하시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지요.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행 1:8).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약 120명의 제자들과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지요(행 2:1-4). 이것이 성령강림의 시초로서 곧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욜 2:28-29).
사도행전 2:16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령받은 사람들은 각종 방언을 말함은 물론, 성령의 역사로 예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각종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권능을 행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이러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절 이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사함을 얻은 사람마다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행 2:38).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하며(행 19:2) 성령을 받을 때 위로부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으며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의 형성과 초대교회
주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기사와 표적을 행하니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의 모임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시초이며 초대교회라고 불리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치리했기 때문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어떠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첫째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6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25에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했으니 우리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모이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예배는 물론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새벽예배 등 각종 예배 및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성전에 모이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도함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2:42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응답의 열쇠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 5:17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며, 마태복음 7:7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씀하시며, 베드로전서 4:7에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죄악을 이길 힘이 없으므로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기도로써 영적 교통을 하게 되면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게 되므로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기고 진리 안에 살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성장하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니 질병이 틈타지 않고 항상 강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모이기를 힘쓰면 자연히 주 안에서 서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좇게 되지만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게 되면 신앙간증 및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더욱 믿음이 견고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서로 사랑하며 항상 기뻐했습니다.
사도행전 2:44-47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대로(마 22:37-40, 막 12:30-31)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 이후 모든 사람은 영이 죽어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으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눈물, 고통, 슬픔, 질병, 사망이 없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전도에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고, 로마서 10:13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구원하는 것이요,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전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7을 보면 성도들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므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43을 보면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져 기사와 표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기 때문에(요 4:48) 예수님께서도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마음 중심에서 믿어지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사와 표적을 통하여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여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4:20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며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고 서로 교제하고 불같이 기도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날마다 구원받는 수를 더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초대교회를 본받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무수한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뿐아니라 성도들이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사와 표적을 많이 나타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05-05-06
제18과하나님의 선하신 뜻
롬 12:2
읽을말씀 : 롬 12:2 | 외울말씀 : 롬 12:2
교육목표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선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대기업에서 사원을 모집할 때는 여러 시험을 거쳐 유능한 사원을 채용하고자 합니다. 단순히 필기시험에 그치지 않고 면접을 통해 지원자의 인성이나 대인 관계, 예의범절, 능력 등 여러 면을 살피게 됩니다. 한 사람의 사원을 채용하는 데 있어서도 기업의 장래를 위해 신중을 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일정한 기준에 따라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자녀로 삼아 주시고 일꾼으로 세우시며 응답과 축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기준에 따라 은혜를 베푸시며 어떤 사람에게 구원과 응답의 축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1.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차별하셔서 어떤 사람은 구원해 주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해 주시지 않으며, 누구는 축복하시고 누구는 축복하시지 않는 일이 없으십니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구원의 문제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말씀하셨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문제는 복음을 듣는 사람 편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머리로만 아는 지식으로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을 말하며(롬 10:9-10) 그러한 사람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하셨으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믿음 안에 들어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 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깨닫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날 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2. 선 가운데 행할 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고자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사람은 이달리야대라 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만나 주시고 그의 일가는 물론 가까운 친구들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 아닌 이방인인데도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며 선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라 해도 누구든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의 군대 장교인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하인을 고쳐 주기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대제국 로마의 백부장이라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 자기의 하인을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와 구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선하고 사랑이 많은지 짐작할 수 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시자 백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들으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시며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그는 큰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비함과 하인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까지 있었으니 응답의 축복을 받을 기준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어 드리면 모든 간구와 기도에 응답해 주시며 질병뿐 아니라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선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양심은 각 사람의 마음의 법으로서 자라온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매우 다르게 형성됩니다.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을 통해 배웠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권면하시는 것입니다(롬 12:2).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선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여 축복된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17-18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 선하지 않은 모습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진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온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기준임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셨지요.
사무엘하 12:9-10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던 다윗 왕이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책망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것은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된다는 것이요, 또한 "어찌하여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라고 말씀하셨으니 바로 하나님께서 선악의 분별 기준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선하신 이는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알아 그 뜻에 따라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하다 말씀하시며 풍성한 열매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면 피아노 교본을 백 번, 천 번 읽는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을 알았으면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행함으로 나타낼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와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것과 더불어 선의 행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성결되어 가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을 리 없지만 더욱 적극적인 행함이 있을 때 신속히 성결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움이란 비진리를 뽑아낼 때 그냥 미움을 뽑아내려는 것보다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행함으로 상대를 품어 버리면 더욱 신속하게 미움을 빼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정해 놓으신 선의 기준과 테두리 안에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 응답과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으며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선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대기업에서 사원을 모집할 때는 여러 시험을 거쳐 유능한 사원을 채용하고자 합니다. 단순히 필기시험에 그치지 않고 면접을 통해 지원자의 인성이나 대인 관계, 예의범절, 능력 등 여러 면을 살피게 됩니다. 한 사람의 사원을 채용하는 데 있어서도 기업의 장래를 위해 신중을 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일정한 기준에 따라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자녀로 삼아 주시고 일꾼으로 세우시며 응답과 축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기준에 따라 은혜를 베푸시며 어떤 사람에게 구원과 응답의 축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1. 사랑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차별하셔서 어떤 사람은 구원해 주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해 주시지 않으며, 누구는 축복하시고 누구는 축복하시지 않는 일이 없으십니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구원의 문제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말씀하셨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문제는 복음을 듣는 사람 편에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머리로만 아는 지식으로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을 말하며(롬 10:9-10) 그러한 사람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하셨으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믿음 안에 들어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 편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깨닫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나타날 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2. 선 가운데 행할 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고자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사람은 이달리야대라 하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만나 주시고 그의 일가는 물론 가까운 친구들까지 구원에 이르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 아닌 이방인인데도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구제하며 선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라 해도 누구든지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면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의 군대 장교인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하인을 고쳐 주기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대제국 로마의 백부장이라는 권세를 가진 사람이 자기의 하인을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와 구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선하고 사랑이 많은지 짐작할 수 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시자 백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들으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시며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그는 큰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비함과 하인을 사랑하는 선한 마음까지 있었으니 응답의 축복을 받을 기준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어 드리면 모든 간구와 기도에 응답해 주시며 질병뿐 아니라 어떠한 문제라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선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의 선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양심은 각 사람의 마음의 법으로서 자라온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매우 다르게 형성됩니다. 어떤 부모, 어떤 스승을 통해 배웠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권면하시는 것입니다(롬 12:2).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과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행함으로 믿음을 온전케 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밝히 분별하여 선 가운데 믿음으로 행하여 축복된 삶을 영위해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17-18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말씀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 선하지 않은 모습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진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온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모든 선의 기준임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셨지요.
사무엘하 12:9-10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던 다윗 왕이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책망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것은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된다는 것이요, 또한 "어찌하여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라고 말씀하셨으니 바로 하나님께서 선악의 분별 기준이 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선하신 이는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알아 그 뜻에 따라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하다 말씀하시며 풍성한 열매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면 피아노 교본을 백 번, 천 번 읽는다고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을 알았으면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행함으로 나타낼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와 비진리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서는 불같은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것과 더불어 선의 행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성결되어 가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을 리 없지만 더욱 적극적인 행함이 있을 때 신속히 성결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움이란 비진리를 뽑아낼 때 그냥 미움을 뽑아내려는 것보다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행함으로 상대를 품어 버리면 더욱 신속하게 미움을 빼낼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정해 놓으신 선의 기준과 테두리 안에 얼마나 들어가느냐에 따라 응답과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으며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4-29
제17과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 1:35-38
읽을말씀 : 눅 1:35-38 | 외울말씀 : 눅 1:35-38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1. 순복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 동정녀 마리아
동정녀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하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녀가 아이를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참으로 기이한 소식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곧 언약하신 메시야를 낳을 것이라는 복된 소식이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복된 소식이라 해도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어느 누가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태를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육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자신에게 임한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지요(눅 1:49-50). 또한 하나님께서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함으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중심에서 믿고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을 기쁨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고백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할 자세를 가진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사람이란 과연 어떠한 사람일까요? 크게 세 가지 분야로 구분하여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하는 사람이 되면
1) 동정녀 마리아의 고백처럼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정혼한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통념으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떤 이유를 대거나 변명하지 않고 오직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는 믿음에는 어떠한 이유나 변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아멘' 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고백대로 보장해 주시며 말씀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라 하시고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7일 동안 돌고 외치라 명하실 때에 인간적인 생각이나 지식을 동원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니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순종할 수 없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행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생각과 일치되어야만 순종하고 순종할 수 있는 것에만 순종하려 하며 심지어는 당연히 순종할 수 있는 것도 게을러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감정과 생각에 맞추어 순종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며 사람의 논리와 이성으로는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것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참된 순종입니다.
이러한 순종이 참으로 값진 것이며 축복받는 길인 줄 알면서도 막상 어떤 상황을 만나면 순종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각자 자기적인 틀이 있기 때문이요, 육신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어 불순종하는 예를 살펴보면 자기 능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불순종하는 경우, 배우면 순종할 수 있는데 굳이 하지 않는 경우, 자기가 하지 못하니 그대로 일을 멈춰 버리는 경우,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으므로 불순종하는 경우, 자기 생각에 맞추어서 일을 엉뚱하게 만들어 놓는 경우, 자기감정에 거스리므로 불순종하는 경우, 순종할 마음 자체가 없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2-23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보면 순종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자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며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적으로 볼 때는 이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 같으나 영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요. 바로 그것이 인류의 구속사업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자신의 방법이나 생각 또는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 행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여 행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참으로 온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라, 원수도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속옷을 달라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 대라" 말씀하십니다. 이런 모든 말씀들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일단 믿음으로 행하게 되면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겸허한 자세로 순종과 질서를 좇아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마리아에게 그대로 임했던 것처럼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행함의 온전함을 위해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중심이 의롭고 행함이 온전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바로 서는 것입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속마음이 온전해야 하고 더불어 믿음과 사랑, 베푸는 마음, 영적인 담대함, 곧고 진실함, 온유함, 열심과 충성됨, 화평함, 책임감, 지식과 지혜 등 모든 면에 온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면을 완벽히 만족시킬 만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평가하실 때에 각 사람의 중심이 어떠한가, 곧 그 사람의 중심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가 하는 것을 봅니다. 즉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 삶 전체를 드려서라도 그것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잠언 11:5을 보면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길이 곧게 되려니와" 말씀한 대로 이렇게 완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결과가 바르고 곧게 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의로 인해 그 길이 곧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마음중심이 온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것을 아셨기에 조금도 막힐 것이 없었고 불가능한 것이 없었으며 종국에는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시는 일까지도 곧게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행함 자체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사랑은 용서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걸리거나 맺힐 일이 없었으며, 이와 더불어 모든 일을 명확하게 행하심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즉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모든 일이 형통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상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믿음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에 굴하지 않고 오직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맡은 본분을 충성되이 감당해 나가니 그 의로 인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기 전에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들으면서 스스로 깨우침을 받아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부르심을 입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끌어 가시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할 자세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그릇을 만들어 가십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라' 하신 것은 버리고 '옳다' 하신 것은 반드시 행하며 조금도 자기의 생각이 없이 오직 진리만을 좇아 나가므로 하나님께서 그 순간순간 역사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행함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한 마음과 더 깊은 차원의 지혜를 받아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깨끗하게 씻겨 주어도 다시 더러운 곳에 가서 뒹구는 것과 같이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한 후 다시 죄를 짓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명심하여 지켜 행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정한 마음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갈고 닦은 사람은 필요한 것을 마음에 새겨 행하니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깨우치고 그 이상을 행할 수 있는 지혜가 오므로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를 깨우쳤으면 스스로 노력하여 뭇 사람의 기대 이상으로 열매를 내니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아 나가는 것입니다.
3) 자신이 목적한 바를 그대로 이루게 됩니다
이사야 7:14을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약의 예언대로 때가 되매 이 땅에 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온전히 행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도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41 이하를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이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아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며 가르침을 베풀고 계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이 얼마나 권세가 있었던지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47)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하시는 것이 다 온전하셨으므로 그 권세가 현저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를 찾던 부모가 이를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이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고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셨을 뿐 아니라 그 행함이 온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그 뜻을 온전히 이루셨고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마다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일을 목적한 바대로 이루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할 자세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자신의 목표로 삼아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목적한 바를 향해 자기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고 닦아 나가면 결국 그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 즉 진리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간구와 기도에 응답으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복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여러분의 삶에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1. 순복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룬 동정녀 마리아
동정녀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하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녀가 아이를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참으로 기이한 소식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곧 언약하신 메시야를 낳을 것이라는 복된 소식이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복된 소식이라 해도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어느 누가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태를 중심에서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육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자신에게 임한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지요(눅 1:49-50). 또한 하나님께서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함으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음을 중심에서 믿고 말씀대로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을 기쁨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고백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할 자세를 가진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사람이란 과연 어떠한 사람일까요? 크게 세 가지 분야로 구분하여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하는 사람이 되면
1) 동정녀 마리아의 고백처럼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정혼한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적 통념으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떤 이유를 대거나 변명하지 않고 오직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순종하는 믿음에는 어떠한 이유나 변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아멘' 하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고백대로 보장해 주시며 말씀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라 하시고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을 7일 동안 돌고 외치라 명하실 때에 인간적인 생각이나 지식을 동원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니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순종할 수 없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행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생각과 일치되어야만 순종하고 순종할 수 있는 것에만 순종하려 하며 심지어는 당연히 순종할 수 있는 것도 게을러서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감정과 생각에 맞추어 순종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며 사람의 논리와 이성으로는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것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참된 순종입니다.
이러한 순종이 참으로 값진 것이며 축복받는 길인 줄 알면서도 막상 어떤 상황을 만나면 순종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각자 자기적인 틀이 있기 때문이요, 육신의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어 불순종하는 예를 살펴보면 자기 능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불순종하는 경우, 배우면 순종할 수 있는데 굳이 하지 않는 경우, 자기가 하지 못하니 그대로 일을 멈춰 버리는 경우,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으므로 불순종하는 경우, 자기 생각에 맞추어서 일을 엉뚱하게 만들어 놓는 경우, 자기감정에 거스리므로 불순종하는 경우, 순종할 마음 자체가 없는 경우 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2-23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보면 순종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자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며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적으로 볼 때는 이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 같으나 영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요. 바로 그것이 인류의 구속사업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면 반드시 자신의 방법이나 생각 또는 이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 행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여 행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참으로 온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라, 원수도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속옷을 달라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 대라" 말씀하십니다. 이런 모든 말씀들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일단 믿음으로 행하게 되면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겸허한 자세로 순종과 질서를 좇아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마리아에게 그대로 임했던 것처럼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행함의 온전함을 위해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중심이 의롭고 행함이 온전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바로 서는 것입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속마음이 온전해야 하고 더불어 믿음과 사랑, 베푸는 마음, 영적인 담대함, 곧고 진실함, 온유함, 열심과 충성됨, 화평함, 책임감, 지식과 지혜 등 모든 면에 온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면을 완벽히 만족시킬 만한 이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평가하실 때에 각 사람의 중심이 어떠한가, 곧 그 사람의 중심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가 하는 것을 봅니다. 즉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 삶 전체를 드려서라도 그것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잠언 11:5을 보면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길이 곧게 되려니와" 말씀한 대로 이렇게 완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결과가 바르고 곧게 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의로 인해 그 길이 곧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 마음중심이 온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것을 아셨기에 조금도 막힐 것이 없었고 불가능한 것이 없었으며 종국에는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시는 일까지도 곧게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행함 자체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사랑은 용서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걸리거나 맺힐 일이 없었으며, 이와 더불어 모든 일을 명확하게 행하심으로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즉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모든 일이 형통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상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믿음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이나 조건에 굴하지 않고 오직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맡은 본분을 충성되이 감당해 나가니 그 의로 인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기 전에는 여러 가지를 보고 들으면서 스스로 깨우침을 받아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부르심을 입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끌어 가시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할 자세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그릇을 만들어 가십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버리라' 하신 것은 버리고 '옳다' 하신 것은 반드시 행하며 조금도 자기의 생각이 없이 오직 진리만을 좇아 나가므로 하나님께서 그 순간순간 역사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행함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한 마음과 더 깊은 차원의 지혜를 받아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깨끗하게 씻겨 주어도 다시 더러운 곳에 가서 뒹구는 것과 같이 우리가 죄를 짓고 회개한 후 다시 죄를 짓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명심하여 지켜 행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정한 마음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갈고 닦은 사람은 필요한 것을 마음에 새겨 행하니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깨우치고 그 이상을 행할 수 있는 지혜가 오므로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를 깨우쳤으면 스스로 노력하여 뭇 사람의 기대 이상으로 열매를 내니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아 나가는 것입니다.
3) 자신이 목적한 바를 그대로 이루게 됩니다
이사야 7:14을 보면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약의 예언대로 때가 되매 이 땅에 오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온전히 행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도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41 이하를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이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아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며 가르침을 베풀고 계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이 얼마나 권세가 있었던지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47)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하시는 것이 다 온전하셨으므로 그 권세가 현저히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를 찾던 부모가 이를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이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고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셨을 뿐 아니라 그 행함이 온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그 뜻을 온전히 이루셨고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마다 영생의 길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일을 목적한 바대로 이루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복할 자세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자신의 목표로 삼아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목적한 바를 향해 자기를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고 닦아 나가면 결국 그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 즉 진리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간구와 기도에 응답으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복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여러분의 삶에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4-22
제16과다투지도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마 12:19-20
읽을말씀 : 마 12:19-20 | 외울말씀 : 마 12:19-20
교육목표 : 주님을 본받아 다투지 아니하고 들레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는 마음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 받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위치에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조직 안에서 머리가 되거나 특별한 직분을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 어떤 사람은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행하여 더욱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잘못 처신하여 오히려 그와 반대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다투거나 들레는 사람들의 결과
본문을 보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순전하신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와도 다투지 아니하시고 들레지도 아니하셨으며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사소한 일로 다투고 들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성경에도 다투거나 들레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이었던 하갈을 들 수 있지요(창 16장).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손의 축복을 약속받은 후 10년이 되어도 자녀를 얻지 못하자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기 여종인 하갈을 통해 자녀를 얻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요청대로 하갈과 동침하여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지요. 여종 하갈이 자신의 잉태 사실을 알고는 주인 사라를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사랑받는 위치에 들어가자 이내 들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라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말하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사라에게 여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하도록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라는 오만한 하갈을 학대하였고 하갈은 이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도망하여야 했습니다.
하갈은 도중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이런 일을 겪은 것은 자신이 올바로 처신하지 못한 결과이지요. 이처럼 다투거나 들레는 사람들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깨달아 주님처럼 다투지도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해야 하겠습니다.
2. 사랑을 받거나 직분을 가진 사람이 주의해야 할 점
우리 주변을 보면 열심히 의를 행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다투고 들레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면에서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 직분이 높아짐에 따라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면이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직분을 가진 사람이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1) 다투거나 들레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 경우가 있는데 에스더 1장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 와스디를 들 수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해 베푼 잔치에서 뭇사람들 앞에 왕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내시들을 명하여 왕후 와스디로 하여금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하고 왕의 앞에 나아오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왕후 와스디가 왕명을 듣고도 잔치 자리에 오기를 싫어하니 왕은 민망한 나머지 진노하여 마음이 불붙는 듯하였고 결국 규례와 법률을 아는 박사들의 의견에 따라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맙니다. 왕의 사랑을 받는다 하여 교만해진 와스디는 왕의 뜻에 순복하지 않다가 이런 불행한 결과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다음에, 직분으로 인한 경우로는 아하수에로 왕의 신하였던 하만을 들 수 있습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의 신임을 받아 지위가 높아지자 누구든지 자기 앞에 꿇어 절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유다인인 모르드개만은 절하지 않자 하만은 심히 노하여 모르드개뿐만 아니라 유다 민족 전체를 몰살시키고자 합니다. 사랑을 입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모든 것을 더 온전케 행해야 될 터인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사랑받는 위치에 있을 때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요? 바로 성경에 나오는 에스더와 같아야 합니다. 에스더는 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왕후의 위치에 있었지만 함부로 들레지 아니하였고 법도를 존중하였을 뿐 아니라 왕 앞에 나아감에 있어서도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 2장을 보면 왕후 와스디가 폐위된 후 아하수에로 왕이 새로운 왕후를 간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후보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힌 에스더는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가 정해 주는 것 외에는 별도로 치장하는 것들을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는 사촌 오빠 모르드개로부터 진리와 율법으로 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왕비로 간택된 에스더는 악한 하만으로 인해 자기 민족이 멸절의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서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습니다. 왕이 부르기 전에 규례를 어기고 함부로 왕 앞에 나갔다가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궁궐 내의 법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모르드개가 간청을 하자 에스더는 3일을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뢰하고 정성을 다하여 의관을 정제한 후 왕 앞에 나아갑니다.
이때 왕은 에스더가 너무 사랑스러우니 오히려 소원이 무엇인지 물으며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에스더는 이때에도 경거망동하지 않고 지혜롭고 신중하게 모든 절차를 밟고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결국은 유다 민족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사랑을 받거나 어느 정도의 위치에 섰을 때 금방 들레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상대의 시기심이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더 낮아지고 섬기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의 도리요, 직분을 가진 사람의 본분인 것입니다.
2)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랑을 받고 직분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낮아지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도 있는데 바로 이런 사람들이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심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욱 몸부림치며 은총을 입는 사람들에 대해서 허물을 잡거나 악을 발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것조차 꺾으려 한다면 이 역시 악한 마음입니다.
진정 영적인 사람이라면 설령 허물을 잡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에 대해 흑백을 가리려하지 않고 또한 옳고 그름을 논쟁하여 그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과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악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양선의 마음이지요.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 역시 그러한 마음을 소유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올 때에 사울 왕은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높여 주니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어떻게든 다윗을 죽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다윗 편에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다윗은 왕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왕에게 알려 조금이라도 왕의 마음을 평안케 해 주려 하였습니다.
사울 왕의 아들이지만 선한 마음을 가졌던 요나단은 다윗의 그런 중심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다윗을 격려하여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되리라" 하며 서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그러한 마음이었기에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심히 통곡하였지요.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죽은 요나단과의 우정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써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도록 배려해 주는 등 극진히 대우해 주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다윗의 마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자인 줄 아시면서 민망하게 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선대하며 품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롭고 고운 마음이 되었을 때에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며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높은 직분을 받고 사랑을 받을수록 더욱 처신을 잘해야 합니다
한편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하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육적인 사람으로 머물렀기에 나중에 엄청난 죄를 범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울의 중심을 아시기에 그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악이 드러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 선지자가 번제를 드려 주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정한 기한 내에 오지 않자 마음이 다급해진 사울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신이 드리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제사가 끝난 후 사무엘이 도착하여 연유를 물을 때에도 회개하기는커녕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했다고 변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남녀노소, 가축들까지 진멸하라고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고 우양의 모든 좋은 것들도 진멸하지 않고 가치 없고 낮은 것만 진멸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사울 왕은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양과 소를 가져왔다고 변명을 하였지요.
그 후에도 사울의 악함은 더하여 자기를 도와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신 것을 알고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다윗을 도와준 제사장들의 성읍을 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육을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누구든지 사울 왕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과 진리로 변화되어야만 사랑을 받고 지위를 얻게 되어도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주님처럼 다투지도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일구어 영의 사람으로서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주님을 본받아 다투지 아니하고 들레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는 마음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 받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위치에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조직 안에서 머리가 되거나 특별한 직분을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 어떤 사람은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행하여 더욱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잘못 처신하여 오히려 그와 반대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다투거나 들레는 사람들의 결과
본문을 보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순전하신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와도 다투지 아니하시고 들레지도 아니하셨으며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사소한 일로 다투고 들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성경에도 다투거나 들레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이었던 하갈을 들 수 있지요(창 16장).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손의 축복을 약속받은 후 10년이 되어도 자녀를 얻지 못하자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자기 여종인 하갈을 통해 자녀를 얻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요청대로 하갈과 동침하여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지요. 여종 하갈이 자신의 잉태 사실을 알고는 주인 사라를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사랑받는 위치에 들어가자 이내 들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라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아브라함에게 말하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사라에게 여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하도록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라는 오만한 하갈을 학대하였고 하갈은 이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도망하여야 했습니다.
하갈은 도중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이런 일을 겪은 것은 자신이 올바로 처신하지 못한 결과이지요. 이처럼 다투거나 들레는 사람들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깨달아 주님처럼 다투지도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해야 하겠습니다.
2. 사랑을 받거나 직분을 가진 사람이 주의해야 할 점
우리 주변을 보면 열심히 의를 행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다투고 들레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면에서 그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 직분이 높아짐에 따라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면이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직분을 가진 사람이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1) 다투거나 들레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 경우가 있는데 에스더 1장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 와스디를 들 수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해 베푼 잔치에서 뭇사람들 앞에 왕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내시들을 명하여 왕후 와스디로 하여금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하고 왕의 앞에 나아오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왕후 와스디가 왕명을 듣고도 잔치 자리에 오기를 싫어하니 왕은 민망한 나머지 진노하여 마음이 불붙는 듯하였고 결국 규례와 법률을 아는 박사들의 의견에 따라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맙니다. 왕의 사랑을 받는다 하여 교만해진 와스디는 왕의 뜻에 순복하지 않다가 이런 불행한 결과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다음에, 직분으로 인한 경우로는 아하수에로 왕의 신하였던 하만을 들 수 있습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의 신임을 받아 지위가 높아지자 누구든지 자기 앞에 꿇어 절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유다인인 모르드개만은 절하지 않자 하만은 심히 노하여 모르드개뿐만 아니라 유다 민족 전체를 몰살시키고자 합니다. 사랑을 입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모든 것을 더 온전케 행해야 될 터인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사랑받는 위치에 있을 때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할까요? 바로 성경에 나오는 에스더와 같아야 합니다. 에스더는 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왕후의 위치에 있었지만 함부로 들레지 아니하였고 법도를 존중하였을 뿐 아니라 왕 앞에 나아감에 있어서도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 2장을 보면 왕후 와스디가 폐위된 후 아하수에로 왕이 새로운 왕후를 간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후보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힌 에스더는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가 정해 주는 것 외에는 별도로 치장하는 것들을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는 사촌 오빠 모르드개로부터 진리와 율법으로 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왕비로 간택된 에스더는 악한 하만으로 인해 자기 민족이 멸절의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서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습니다. 왕이 부르기 전에 규례를 어기고 함부로 왕 앞에 나갔다가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궁궐 내의 법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모르드개가 간청을 하자 에스더는 3일을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뢰하고 정성을 다하여 의관을 정제한 후 왕 앞에 나아갑니다.
이때 왕은 에스더가 너무 사랑스러우니 오히려 소원이 무엇인지 물으며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에스더는 이때에도 경거망동하지 않고 지혜롭고 신중하게 모든 절차를 밟고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결국은 유다 민족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사랑을 받거나 어느 정도의 위치에 섰을 때 금방 들레지만 영적인 사람들은 상대의 시기심이나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더 낮아지고 섬기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의 도리요, 직분을 가진 사람의 본분인 것입니다.
2)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랑을 받고 직분을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낮아지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도 있는데 바로 이런 사람들이 상한 갈대요, 꺼져 가는 심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욱 몸부림치며 은총을 입는 사람들에 대해서 허물을 잡거나 악을 발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것조차 꺾으려 한다면 이 역시 악한 마음입니다.
진정 영적인 사람이라면 설령 허물을 잡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것에 대해 흑백을 가리려하지 않고 또한 옳고 그름을 논쟁하여 그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과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악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양선의 마음이지요.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 역시 그러한 마음을 소유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올 때에 사울 왕은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높여 주니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어떻게든 다윗을 죽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다윗 편에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다윗은 왕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왕에게 알려 조금이라도 왕의 마음을 평안케 해 주려 하였습니다.
사울 왕의 아들이지만 선한 마음을 가졌던 요나단은 다윗의 그런 중심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다윗을 격려하여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되리라" 하며 서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역시 그러한 마음이었기에 요나단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심히 통곡하였지요.
다윗은 왕이 된 후에도 죽은 요나단과의 우정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써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도록 배려해 주는 등 극진히 대우해 주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처럼 다윗의 마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자인 줄 아시면서 민망하게 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선대하며 품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롭고 고운 마음이 되었을 때에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며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3) 높은 직분을 받고 사랑을 받을수록 더욱 처신을 잘해야 합니다
한편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하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육적인 사람으로 머물렀기에 나중에 엄청난 죄를 범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말았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울의 중심을 아시기에 그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악이 드러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 선지자가 번제를 드려 주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정한 기한 내에 오지 않자 마음이 다급해진 사울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신이 드리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제사가 끝난 후 사무엘이 도착하여 연유를 물을 때에도 회개하기는커녕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했다고 변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남녀노소, 가축들까지 진멸하라고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고 우양의 모든 좋은 것들도 진멸하지 않고 가치 없고 낮은 것만 진멸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사울 왕은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양과 소를 가져왔다고 변명을 하였지요.
그 후에도 사울의 악함은 더하여 자기를 도와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신 것을 알고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다윗을 도와준 제사장들의 성읍을 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사울은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육을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누구든지 사울 왕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이 선과 진리로 변화되어야만 사랑을 받고 지위를 얻게 되어도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주님처럼 다투지도 아니하고 들레지도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일구어 영의 사람으로서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4-15
제15과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
히 12:14
읽을말씀 : 히 12:14 | 외울말씀 : 히 12:14
교육목표 :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질서를 좇아 예의를 갖춘 의를 행하고 아무와도 원수맺지 않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을 행치 않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불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런 사람들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무리 지식이 많고 재주가 뛰어나며 권세가 있다 해도 자신의 악으로 인해 범사에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22을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화평의 열매가 있고 마태복음 5:9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지요. 또한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모든 것에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2장에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왕 앞에 나아와 건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솔로몬 왕 때에 과중했던 세금과 노역을 가볍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때 르호보암 왕은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여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이른 악한 말로 백성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화평을 좇지 않고 악한 말에 동조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나 결국 나라가 둘로 분열되는 비극을 낳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을 모략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나라의 총리들과 방백들로서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이 왕의 신임을 받고 높임을 받게 되자 이를 시기하여 다니엘을 없애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사자밥이 되고 말았지요. 큰 나라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악을 행하니 엄청난 화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화평을 이루지 아니하면 분야 분야에 문제가 생기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등 그 결과가 온전치 못한 것을 봅니다. 이는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일터나 사업터 등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2.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애쓰며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들 중에도 화평함의 분야에서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함을 입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화평함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가며 마음의 의를 이룬 만큼 기본적인 화평함은 당연히 임해 가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 곧 큰 그릇이 되기 위한 화평함을 소유해야 온전함을 입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윗사람을 무시하거나 윗사람에게 허물이 되는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신하가 임금의 어떤 잘못을 개선하도록 충언을 드린다면 어떤 방법을 좇아야 할까요? 임금을 개인적으로 찾아 뵙거나 서신을 통해 임금이 깨우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이 바른 의가 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 앞에서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고 임금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아뢰었다면 아무리 충정어린 마음으로 간언했다 할지라도 임금은 신하들 앞에서 너무나 민망할 것입니다. 즉 그 의가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예를 갖추지 못하면 임금에게 누(累)가 되니 옳지 못하지요.
가정에서나 이웃간에도,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 아랫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아무리 자기의 의견이 옳다 해도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 온전한 의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큰 그릇일수록, 큰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일꾼일수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질서 가운데 상대에게 민망함을 주지 않고 이루어 갈 때 진정한 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보기에 아무리 옳은 중심을 가지고 행했다 할지라도 결과가 화평 가운데 이뤄지지 않는다면 육적인 의로 끝나고 맙니다.
믿음 안에서 마음의 의를 많이 이룬 사람일지라도 더 깊은 의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대부분 이러한 분야에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개선해 나가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도 더 큰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5:44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원수 맺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록 의 가운데 행해 나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상대의 감정을 유발시켰을 때에는 일부러 원수를 맺으려 한 것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원수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무슨 원수 맺은 일이 있어서 사자굴이나 풀무불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니엘이 너무나 진실하고 정직했기 때문에 그를 고소하여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도 다니엘에게서 어떠한 허물이나 흠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러자 결국 신앙적인 차원에서 계략을 꾸며 원수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들은 상대의 의가 드러나면 그것을 걸고 넘어짐으로 자신들의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마음에 의를 이룬 사람들도 타의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원수 맺어진 상황에서 어려움을 대처하고 풀어 나가는 데는 각각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만큼 악이 없었으나 돌에 맞아 죽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스데반이 악한 이들의 악을 담대하게 지적하고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데반의 행함은 의로운 것이요 결코 잘못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지혜로써 악한 사람들의 궤계도 피해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언행이 온전하시니 누구에게든지 흠 잡힐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어느 누구에게도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느 누구와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시고 의를 행하시되 주위의 모든 환경을 고요하게 평정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를 이루어 가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나 행동이 온전치 못한 분야 속에서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거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걸려지는 문제 때문에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요, 진정한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상대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무시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에 대해서 눈여겨 보지 않거나 업신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무시당하는 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시하는 마음은 상대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임금이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신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그러하지요. 그는 선왕 느부갓네살의 삶의 여정들을 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대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은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바벨론의 우상들을 찬양하는 등 심히 패역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멸시함으로 강국이었던 바벨론과 벨사살 왕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하룻밤만에 멸망하고 말았지요.
그러면 어떤 경우를 두고 무시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나름대로 의롭고 자기 보기에 옳은 견해를 내세워 주장하며 억지로 상대를 납득시키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상대편에서는 자기 의견이 묵살되었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감정이 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 방법이 옳지 못한 것이지요.
흔히 무시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정상적인 사람이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자격지심이 있어 예민하게 느끼며 무시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고 설령 현저히 무시당했다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악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무시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만큼 고통을 받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약자 편에서는 더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먼저 된 사람이 그 사정을 헤아려 주고 더 신중히 행하여 상대가 힘들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설령 남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상대 편보다 더 낫게 여기다 보면 가르치려는 마음이 생기고 이것을 듣는 상대는 상대적으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깨우침을 주고자 할 때도 가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려 주기 위하여 설명하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상대를 가르치려고 하는 그 자체를 마음에서 온전히 빼내 버리면 무시당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질서를 좇아 예의를 갖춘 의를 행하고 모든 언행을 온전케 하여 아무와도 원수맺지 않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을 행치 아니함으로 하나님 앞에 큰 그릇이 되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질서를 좇아 예의를 갖춘 의를 행하고 아무와도 원수맺지 않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을 행치 않는 영의 사람이 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자녀들이 불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런 사람들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만사형통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무리 지식이 많고 재주가 뛰어나며 권세가 있다 해도 자신의 악으로 인해 범사에 화평을 이루지 못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기를 원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22을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화평의 열매가 있고 마태복음 5:9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지요. 또한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어 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모든 것에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2장에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왕 앞에 나아와 건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솔로몬 왕 때에 과중했던 세금과 노역을 가볍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때 르호보암 왕은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여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이른 악한 말로 백성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화평을 좇지 않고 악한 말에 동조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나 결국 나라가 둘로 분열되는 비극을 낳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을 모략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나라의 총리들과 방백들로서 권세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이 왕의 신임을 받고 높임을 받게 되자 이를 시기하여 다니엘을 없애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들이 사자밥이 되고 말았지요. 큰 나라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악을 행하니 엄청난 화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화평을 이루지 아니하면 분야 분야에 문제가 생기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등 그 결과가 온전치 못한 것을 봅니다. 이는 부부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 일터나 사업터 등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2.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애쓰며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들 중에도 화평함의 분야에서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함을 입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화평함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가며 마음의 의를 이룬 만큼 기본적인 화평함은 당연히 임해 가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 곧 큰 그릇이 되기 위한 화평함을 소유해야 온전함을 입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들을 크게 이루기 위한 화평함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윗사람을 무시하거나 윗사람에게 허물이 되는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신하가 임금의 어떤 잘못을 개선하도록 충언을 드린다면 어떤 방법을 좇아야 할까요? 임금을 개인적으로 찾아 뵙거나 서신을 통해 임금이 깨우치고 돌이킬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이 바른 의가 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 앞에서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고 임금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아뢰었다면 아무리 충정어린 마음으로 간언했다 할지라도 임금은 신하들 앞에서 너무나 민망할 것입니다. 즉 그 의가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예를 갖추지 못하면 임금에게 누(累)가 되니 옳지 못하지요.
가정에서나 이웃간에도,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 아랫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모든 일에 있어서 아무리 자기의 의견이 옳다 해도 무조건 밀고 나가는 것이 온전한 의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큰 그릇일수록, 큰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일꾼일수록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질서 가운데 상대에게 민망함을 주지 않고 이루어 갈 때 진정한 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보기에 아무리 옳은 중심을 가지고 행했다 할지라도 결과가 화평 가운데 이뤄지지 않는다면 육적인 의로 끝나고 맙니다.
믿음 안에서 마음의 의를 많이 이룬 사람일지라도 더 깊은 의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경우는 대부분 이러한 분야에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개선해 나가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도 더 큰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5:44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원수 맺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록 의 가운데 행해 나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상대의 감정을 유발시켰을 때에는 일부러 원수를 맺으려 한 것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원수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무슨 원수 맺은 일이 있어서 사자굴이나 풀무불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니엘이 너무나 진실하고 정직했기 때문에 그를 고소하여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도 다니엘에게서 어떠한 허물이나 흠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러자 결국 신앙적인 차원에서 계략을 꾸며 원수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악한 사람들은 상대의 의가 드러나면 그것을 걸고 넘어짐으로 자신들의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 마음에 의를 이룬 사람들도 타의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원수 맺어진 상황에서 어려움을 대처하고 풀어 나가는 데는 각각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는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줄 만큼 악이 없었으나 돌에 맞아 죽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스데반이 악한 이들의 악을 담대하게 지적하고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데반의 행함은 의로운 것이요 결코 잘못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지혜로써 악한 사람들의 궤계도 피해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언행이 온전하시니 누구에게든지 흠 잡힐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고 어느 누구에게도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느 누구와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시고 의를 행하시되 주위의 모든 환경을 고요하게 평정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를 이루어 가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나 행동이 온전치 못한 분야 속에서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거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걸려지는 문제 때문에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요, 진정한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상대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무시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에 대해서 눈여겨 보지 않거나 업신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도 무시당하는 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시하는 마음은 상대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임금이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신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던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그러하지요. 그는 선왕 느부갓네살의 삶의 여정들을 통하여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목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대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은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바벨론의 우상들을 찬양하는 등 심히 패역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멸시함으로 강국이었던 바벨론과 벨사살 왕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하룻밤만에 멸망하고 말았지요.
그러면 어떤 경우를 두고 무시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나름대로 의롭고 자기 보기에 옳은 견해를 내세워 주장하며 억지로 상대를 납득시키려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상대편에서는 자기 의견이 묵살되었다고 생각하니 감정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는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상대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감정이 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 방법이 옳지 못한 것이지요.
흔히 무시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정상적인 사람이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자격지심이 있어 예민하게 느끼며 무시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고 설령 현저히 무시당했다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그들을 악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무시당하는 입장에서는 얼만큼 고통을 받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약자 편에서는 더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먼저 된 사람이 그 사정을 헤아려 주고 더 신중히 행하여 상대가 힘들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설령 남을 무시하려는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상대 편보다 더 낫게 여기다 보면 가르치려는 마음이 생기고 이것을 듣는 상대는 상대적으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깨우침을 주고자 할 때도 가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려 주기 위하여 설명하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상대를 가르치려고 하는 그 자체를 마음에서 온전히 빼내 버리면 무시당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질서를 좇아 예의를 갖춘 의를 행하고 모든 언행을 온전케 하여 아무와도 원수맺지 않으며 상대를 무시하는 일을 행치 아니함으로 하나님 앞에 큰 그릇이 되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