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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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6
제34과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삿 11:30-35
읽을말씀 : 삿 11:30-35 | 외울말씀 : 삿 11:31
교육목표 : 서원한 것과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 행하는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서로 약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명심하여 반드시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는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하고 서로의 신뢰가 깨어지는 등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약속을 지킬 때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작정하여 서원한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 대통령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 시간이 다 되어 "급한 볼일이 있으니 10분만 늦게 가겠습니다" 한다든가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을 어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지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일방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심히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신뢰나 축복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지요.
오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킨 입다를 통해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축복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입다의 서원과 전쟁에서의 승리
이스라엘 길르앗 지방의 큰 용사로서,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얻은 아들이 입다입니다. 그런데 길르앗의 아들들이 입다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으려고 길르앗에서 내쫓아 버림으로 입다는 돕 땅으로 가서 추종세력을 모아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신 바알을 섬김으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에 의해 크게 학대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심히 곤고해진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회개하고 이방인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삿 10:10). 마침 암몬 자손의 공격을 받자 미스바에 모여 진을 치기는 했으나 군대를 통솔하며 앞서 싸울 장수가 없었지요.
이에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가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화평 속에서 시비를 가리고 전쟁을 그치려 했지만 쉽게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였고 입다는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하였지요. 입다의 간절한 서원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2.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된 입다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입다가 기쁨을 안고 집에 이르렀을 때에 그를 맨 처음 맞이한 사람은 바로 사랑스런 외동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승전이 너무나 기뻐서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입다는 너무나 큰 괴로움에 옷을 찢고 슬퍼하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탄식하였습니다(삿 11:35). 그러나 아무리 무남독녀라 해도 한번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임의로 변개할 수 없었기에 입다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며 감히 하나님과의 약속을 번복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입다의 딸 역시 사연을 알게 된 후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고백하였습니다.
혹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끔찍한 서원을 하게 하셨을까?" 하며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요, 입다에게 그런 서원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전쟁을 앞두고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성급하게 서원했던 것입니다.
입다가 처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은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출 23:19)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 것은 그만큼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너무도 급하고 간절한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 첫 번째 맞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의 무남독녀 외동딸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요.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 서원을 했기 때문에 입다는 그대로 이행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입다가 아직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성급한 서원을 했지만 그 중심만은 바른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선으로 이끄신다면 온전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다른 예를 찾는다면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수양을 준비해 두셔서 이삭이 죽지 않도록 해 주셨는데 왜 입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입다의 진실한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교훈 삼게 하시기 위한 섭리 때문입니다.
그러면 입다의 딸이 너무 억울한 것이 아닐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확실한 신뢰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맞는 죽음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하나님과 아버지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조금도 원망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또 아브라함이나 입다의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번제로 드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대신 불 속으로 뛰어들기가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나 가장 사랑하는 자녀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모두 내어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만일 입다의 딸이 순종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입다의 곧은 성품으로 보아 딸을 강제로라도 번제로 드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입다의 딸은 감동을 주는 인물이기보다는 불순종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약속한 것이고 내가 약속한 것도 아닌데"라는 한 마디 원망도 없이 하나님께 대한 아버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드렸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에 이르기까지 칭송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올바른 서원과 이행의 중요성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할 때 급하다고 말을 함부로 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하신 것처럼 서원이 아니더라도 함부로 말을 내는 일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께 약속했다면 크든 작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성경에도 약속이나 서원의 이행에 대해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3:21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말씀하시며 서원 이행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민수기 30:2을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했고, 시편 15:4에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도 번제로 즉 짐승처럼 잡아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가른 후 불에 태워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입다의 중심을 아셨기에 그의 서원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중심이 중요한 것이며 이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형제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의 약속, 혹은 자기 자신에게 마음으로 한 약속까지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 거짓과 간사함이 없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누구와 약속한 것이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진실한 마음 중심을 이룰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으며 하나님께도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약속 이행에 따르는 축복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그대로 지켜 행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령 서원한 것이 지키기 어렵더라도 마음에 결심하고 신속히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더디 행하면 그만큼 축복도 더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나마 서원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담이 되어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혹자는 "아예 서원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질문할 수도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고린도후서 9:6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말씀한 대로 믿음이 없어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거둘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정성껏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로 넘치도록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기도로, 봉사로, 물질로 심는 사람들은 놀라운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핑계 대지 않고 서원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마음 중심이 되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 중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신명기 2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는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며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으며 머리가 되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으면 모든 저주가 임한다 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리고 저주는 왜 임하는지 밝히 알려 주고 계시지요.
요한삼서 2절에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고 예레미야 33:3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민 23:19), 더욱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마음에 있는 바, 결심한 바, 서원한 바를 반드시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서원한 것과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 행하는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 인정과 사랑을 받으며 범사에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서로 약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약속을 명심하여 반드시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는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하고 서로의 신뢰가 깨어지는 등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약속을 지킬 때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작정하여 서원한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누군가 대통령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 시간이 다 되어 "급한 볼일이 있으니 10분만 늦게 가겠습니다" 한다든가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을 어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지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일방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심히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신뢰나 축복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지요.
오늘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히 지킨 입다를 통해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축복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입다의 서원과 전쟁에서의 승리
이스라엘 길르앗 지방의 큰 용사로서,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얻은 아들이 입다입니다. 그런데 길르앗의 아들들이 입다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으려고 길르앗에서 내쫓아 버림으로 입다는 돕 땅으로 가서 추종세력을 모아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신 바알을 섬김으로 블레셋과 암몬 사람들에 의해 크게 학대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심히 곤고해진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회개하고 이방인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삿 10:10). 마침 암몬 자손의 공격을 받자 미스바에 모여 진을 치기는 했으나 군대를 통솔하며 앞서 싸울 장수가 없었지요.
이에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가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화평 속에서 시비를 가리고 전쟁을 그치려 했지만 쉽게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였고 입다는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하였지요. 입다의 간절한 서원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2. 딸을 번제로 드리게 된 입다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입다가 기쁨을 안고 집에 이르렀을 때에 그를 맨 처음 맞이한 사람은 바로 사랑스런 외동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승전이 너무나 기뻐서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입다는 너무나 큰 괴로움에 옷을 찢고 슬퍼하며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탄식하였습니다(삿 11:35). 그러나 아무리 무남독녀라 해도 한번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임의로 변개할 수 없었기에 입다는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며 감히 하나님과의 약속을 번복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입다의 딸 역시 사연을 알게 된 후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고백하였습니다.
혹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끔찍한 서원을 하게 하셨을까?" 하며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요, 입다에게 그런 서원을 요구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전쟁을 앞두고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성급하게 서원했던 것입니다.
입다가 처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은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출 23:19)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 것은 그만큼 소중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너무도 급하고 간절한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 첫 번째 맞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의 무남독녀 외동딸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요. 그러나 일단 하나님께 서원을 했기 때문에 입다는 그대로 이행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입다가 아직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성급한 서원을 했지만 그 중심만은 바른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선으로 이끄신다면 온전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다른 예를 찾는다면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수양을 준비해 두셔서 이삭이 죽지 않도록 해 주셨는데 왜 입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입다의 진실한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교훈 삼게 하시기 위한 섭리 때문입니다.
그러면 입다의 딸이 너무 억울한 것이 아닐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확실한 신뢰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맞는 죽음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하나님과 아버지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조금도 원망하거나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또 아브라함이나 입다의 입장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녀를 번제로 드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대신 불 속으로 뛰어들기가 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나 가장 사랑하는 자녀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모두 내어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만일 입다의 딸이 순종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입다의 곧은 성품으로 보아 딸을 강제로라도 번제로 드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입다의 딸은 감동을 주는 인물이기보다는 불순종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약속한 것이고 내가 약속한 것도 아닌데"라는 한 마디 원망도 없이 하나님께 대한 아버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드렸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후세에 이르기까지 칭송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올바른 서원과 이행의 중요성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할 때 급하다고 말을 함부로 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하신 것처럼 서원이 아니더라도 함부로 말을 내는 일이 없어야 하고 하나님께 약속했다면 크든 작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성경에도 약속이나 서원의 이행에 대해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3:21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말씀하시며 서원 이행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민수기 30:2을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했고, 시편 15:4에도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말고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도 번제로 즉 짐승처럼 잡아 살은 살대로, 뼈는 뼈대로 가른 후 불에 태워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입다의 중심을 아셨기에 그의 서원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중심이 중요한 것이며 이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형제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의 약속, 혹은 자기 자신에게 마음으로 한 약속까지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 거짓과 간사함이 없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누구와 약속한 것이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진실한 마음 중심을 이룰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으며 하나님께도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약속 이행에 따르는 축복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그대로 지켜 행할 때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설령 서원한 것이 지키기 어렵더라도 마음에 결심하고 신속히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더디 행하면 그만큼 축복도 더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나마 서원해 놓고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담이 되어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혹자는 "아예 서원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질문할 수도 있는데 과연 그럴까요? 고린도후서 9:6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말씀한 대로 믿음이 없어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거둘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정성껏 심으면 하나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로 넘치도록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기도로, 봉사로, 물질로 심는 사람들은 놀라운 축복을 받아 마음껏 영광돌리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핑계 대지 않고 서원과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마음 중심이 되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의 말씀 중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신명기 2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는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며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않으며 머리가 되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으면 모든 저주가 임한다 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면 축복을 누리고 저주는 왜 임하는지 밝히 알려 주고 계시지요.
요한삼서 2절에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고 예레미야 33:3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민 23:19), 더욱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마음에 있는 바, 결심한 바, 서원한 바를 반드시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8-19
제33과주신 자도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욥 1:20-22
읽을말씀 : 욥 1:20-22 | 외울말씀 : 욥 1:21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마음 중심과 온전한 선의 마음을 이루어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보석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는 가공 전에는 하나의 돌에 불과하지만 잘 갈고 다듬으면 가치가 더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직 제 빛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점점 그 빛을 발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돌을 갈고 다듬어야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보석이 되는 것처럼 사람도 연단과정을 잘 거쳐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욥이라는 인물의 연단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선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
욥기 1:1을 보면 욥에 대하여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로서 빈민과 고아를 돌아보는 등 많은 선행을 베푼 사람이었지요.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친히 음성을 들은 적도 없지만 단지 하나님에 대해 전해 듣고 선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욥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의로운 욥에게 시험이 찾아왔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선의 4단계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누가 자신을 욕하고 괴롭힐 때 같이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 단계의 선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고 말하지요.
둘째는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미운 감정 자체를 마음에 품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이해하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낮아지고 섬겨 주는 선으로서 하나님께서 비로소 선이라 인정하시는 가장 낮은 단계의 선입니다.
셋째는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마음에 감정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감동적인 선의 말로써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넷째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선으로서 바로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선, 거룩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인된 인류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 이것이 곧 최고의 선이며 온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선의 차원에 대해 말씀드린 것은 욥의 연단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즉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욥이 아직 생명을 줄 수 있는 온전한 선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행위적으로는 너무도 완벽했지만 마음 안에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의 마음 깊은 곳까지 감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것마저 온전케 하심으로 욥의 마음을 온전한 선에 이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2. 욥에게 찾아온 시험과 하나님께 대한 원망
하루는 사단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으로 인해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송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되 욥의 소유물을 다 거둘지라도 오직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 즉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욥 1:12).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송사하므로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1:13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잘못했을 때 사단이 이를 송사하고 시험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욥의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한 마디로 정신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험이 다가옵니다.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욥은 결코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고백합니다.
욥은 이처럼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였는데, 이번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던 것입니다. 욥이 비참한 모습으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으니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때에도 욥은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하고 타이르며 결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것은 욥이 진리를 온전히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지요.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재앙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처럼 욥이 처음에는 감사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그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욥기 3:1을 보면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는데 이는 자신을 낳은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지요. 생명이 위협받는 시험 앞에서 근본의 악이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원망과 저주는 욥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욥기 27:2을 보면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의로웠고 진실했고, 나는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했거늘 왜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하며 하나님께 따지기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녕 하나님을 믿었다면 또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하였던 고백이 참이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 없습니다. 값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여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무엇이든 전부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을 통해 살펴본 사람의 마음
욥을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은 도리어 욥과의 변론을 통해 자신들도 범죄할 뿐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더더욱 악을 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친구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말합니다(욥 4:7). 즉 죄가 있으니 망한 것이고 정직하지 못하니 끊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이 말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이 말을 하는 엘리바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시험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시오. 당신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겠소!" 말한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찌르는 말이 되고 말지요.
다음으로 친구 소발은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욥 11:10) 하였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누가 막겠느냐 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문제가 왔을 때에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반드시 지켜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욥기를 오해해서 "시험 환난이 와도 욥처럼 참아라. 그러면 나중에는 축복이 온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욥처럼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을 당하는 등 고통이 더해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자복하여 신속히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고 치료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 빌닷은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으며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것이며" 하고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는 욥과의 계속된 변론도 있었고 또한 욥 역시 친구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저주하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위로해 주러 온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큰 악이며 더욱이 빌닷은 전에 욥에 대해 느꼈던 시기심에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으니 더욱 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세 친구의 말을 통해서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이는 극도의 절망 가운데 한 말이니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오늘날 조그만 일에도 감정이 상하거나 혈기를 내는 사람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어 축복받은 욥
드디어 욥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지식적으로만 알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욥에게 친히 음성으로 역사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하나님 앞에 큰소리치며 많은 말로 하나님께 원망 불평해 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대하게 되니 욥은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나와 보라고 하면서 변론하자고 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 면목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물으시고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욥 네가 무엇을 알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시며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고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한 모습이었으니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까요? 바로 철저히 돌이키며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하는 중심의 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욥 42:2).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마음과 중심이 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욥에게 원하셨던 온전한 선의 마음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 후로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생명을 달라고 하신다 해도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그에 따른 행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까지 온전해진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더불어 자녀의 축복도 넘치게 주셔서 아들 일곱과 세 딸을 낳았는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명예, 권세, 자녀의 축복, 건강의 축복, 물질의 축복 등 모든 축복을 넘치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바칠 수 있는 영적인 사랑, 온전한 선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영롱하고 아름다운 선의 빛을 발하며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마음 중심과 온전한 선의 마음을 이루어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보석 중에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는 가공 전에는 하나의 돌에 불과하지만 잘 갈고 다듬으면 가치가 더해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아직 제 빛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점점 그 빛을 발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돌을 갈고 다듬어야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보석이 되는 것처럼 사람도 연단과정을 잘 거쳐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욥이라는 인물의 연단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선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
욥기 1:1을 보면 욥에 대하여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로서 빈민과 고아를 돌아보는 등 많은 선행을 베푼 사람이었지요.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친히 음성을 들은 적도 없지만 단지 하나님에 대해 전해 듣고 선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욥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의로운 욥에게 시험이 찾아왔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선의 4단계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누가 자신을 욕하고 괴롭힐 때 같이 대항하지 않고 눌러 참는 단계의 선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고 말하지요.
둘째는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미운 감정 자체를 마음에 품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이해하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낮아지고 섬겨 주는 선으로서 하나님께서 비로소 선이라 인정하시는 가장 낮은 단계의 선입니다.
셋째는 상대가 악으로 나올 때 마음에 감정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감동적인 선의 말로써 상대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는 선의 차원입니다.
넷째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선으로서 바로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의 선, 거룩하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인된 인류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 이것이 곧 최고의 선이며 온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선의 차원에 대해 말씀드린 것은 욥의 연단을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즉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욥이 아직 생명을 줄 수 있는 온전한 선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행위적으로는 너무도 완벽했지만 마음 안에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욥의 마음 깊은 곳까지 감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것마저 온전케 하심으로 욥의 마음을 온전한 선에 이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2. 욥에게 찾아온 시험과 하나님께 대한 원망
하루는 사단이 욥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으로 인해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송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되 욥의 소유물을 다 거둘지라도 오직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 즉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십니다(욥 1:12).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직접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송사하므로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1:13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잘못했을 때 사단이 이를 송사하고 시험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로 욥의 시험이 시작되었는데, 한 마디로 정신차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험이 다가옵니다. 자신의 몸을 제외한 모든 소유와 자녀들을 순식간에 잃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욥은 결코 어리석은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고백합니다.
욥은 이처럼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였는데, 이번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던 것입니다. 욥이 비참한 모습으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으니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때에도 욥은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하고 타이르며 결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것은 욥이 진리를 온전히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지요.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으면 재앙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처럼 욥이 처음에는 감사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자 그의 행동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욥기 3:1을 보면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였는데 이는 자신을 낳은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지요. 생명이 위협받는 시험 앞에서 근본의 악이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원망과 저주는 욥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욥기 27:2을 보면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는 의로웠고 진실했고, 나는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했거늘 왜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하며 하나님께 따지기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녕 하나님을 믿었다면 또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하였던 고백이 참이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 없습니다. 값없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여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무엇이든 전부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3.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을 통해 살펴본 사람의 마음
욥을 위로하러 왔던 친구들은 도리어 욥과의 변론을 통해 자신들도 범죄할 뿐 아니라 욥으로 하여금 더더욱 악을 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친구 엘리바스는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말합니다(욥 4:7). 즉 죄가 있으니 망한 것이고 정직하지 못하니 끊어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이 말은 분명 맞는 말이지만 이 말을 하는 엘리바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일 시험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시오. 당신에게 죄가 있어서 그런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겠소!" 말한다면 이는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찌르는 말이 되고 말지요.
다음으로 친구 소발은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욥 11:10) 하였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누가 막겠느냐 한 것은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문제가 왔을 때에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때 반드시 지켜 주시고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욥기를 오해해서 "시험 환난이 와도 욥처럼 참아라. 그러면 나중에는 축복이 온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욥처럼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을 당하는 등 고통이 더해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이 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자복하여 신속히 하나님 앞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되고 치료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 빌닷은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으며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것이며" 하고 저주하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기까지는 욥과의 계속된 변론도 있었고 또한 욥 역시 친구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저주하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위로해 주러 온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큰 악이며 더욱이 빌닷은 전에 욥에 대해 느꼈던 시기심에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으니 더욱 악한 것이지요.
이처럼 세 친구의 말을 통해서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욥은 비록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이는 극도의 절망 가운데 한 말이니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오늘날 조그만 일에도 감정이 상하거나 혈기를 내는 사람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루어 축복받은 욥
드디어 욥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지식적으로만 알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욥에게 친히 음성으로 역사하신 것이지요. 그동안 하나님 앞에 큰소리치며 많은 말로 하나님께 원망 불평해 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대하게 되니 욥은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나와 보라고 하면서 변론하자고 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 면목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물으시고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욥 네가 무엇을 알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하시며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고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교만한 모습이었으니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까요? 바로 철저히 돌이키며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하는 중심의 고백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욥 42:2).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을 정금과 같은 마음과 중심이 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욥에게 원하셨던 온전한 선의 마음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 이 후로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생명을 달라고 하신다 해도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그에 따른 행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까지 온전해진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더불어 자녀의 축복도 넘치게 주셔서 아들 일곱과 세 딸을 낳았는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명예, 권세, 자녀의 축복, 건강의 축복, 물질의 축복 등 모든 축복을 넘치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바칠 수 있는 영적인 사랑, 온전한 선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영롱하고 아름다운 선의 빛을 발하며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8-12
제32과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1-9
읽을말씀 : 창 39:1-9 | 외울말씀 : 창 39:9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며 정도를 좇아 성실하고 정직히 행함으로 범사에 형통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만일 메마른 사막에서 꽃을 피워 풍성한 열매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옥토에서 얻은 어떠한 열매보다 참으로 값지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렇게 가치 있는 삶이 된다면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하나님 앞에 오직 정도만을 걸으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은 성경상의 인물로는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꿈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요셉은 어린 시절 이방 나라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만한 행함으로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여 승리의 삶을 산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간 요셉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나 하나님께서 아버지 야곱에게 내리신 복을 함께 누리며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요셉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야곱을 통해 그의 조상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에 관해 들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야곱은 네 명의 부인으로부터 열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 중에서도 자신이 사랑한 라헬의 소생인 요셉을 눈에 드러날 정도로 편애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들과 달리 채색옷을 입히기도 하고 요셉이 다른 형들의 과실을 고하면 그 말을 듣고 형들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인즉 모든 형제와 부모까지도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지요.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의 시기와 미움은 더욱 커졌고 마침내 형들은 요셉을 죽일 궤계를 꾸미게 됩니다. 다행히 요셉은 맏형 르우벤의 제안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애굽의 고위 관료인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2. 오직 성실과 정도의 길을 걸었던 요셉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의 종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요셉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주인을 섬겼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정성들여 관리하니 주인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위임할 정도로 요셉을 신임하게 되었지요.
이와 같이 요셉은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그 마음이 선했기에 요셉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해 주셨고 종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도 범사에 형통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보디발의 집 소유물을 주관하게 된 때부터는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온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까지 복이 넘쳐났습니다. 결국 요셉은 성실함을 주인에게 인정받아 모든 소유를 관할하게 되고 주인이 간섭조차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데 요셉에게 시험이 왔습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요셉을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며 날마다 동침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며 번번이 거절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요셉의 옷을 잡고 유혹하는 주인의 아내를 뿌리치느라 요셉은 자기 옷까지 버려두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요셉에게 앙심을 품고 자기의 남편에게 고하기를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들어왔다가 옷을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전하였지요.
아내의 말을 곧이들은 보디발은 심히 노하여 사실을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요셉을 넣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성실함은 감옥을 관리하는 전옥에게도 인정을 받아 이번에는 옥중의 모든 사무와 죄수들을 다 맡게 되었지요. 전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무슨 일이든 상관하지 않았고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실하고 담대히 정도를 지키는 요셉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길을 항상 형통하게 하셔서 가는 곳마다 인정받아 머리가 되는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어느 날, 감옥에 있던 요셉은 새로 들어온 죄수들, 즉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꾼 꿈을 각각 해석해 주었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요셉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도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 요셉의 해석대로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복직되었으나 복직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린 채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3. 하나님의 축복으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 요셉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축복하시고자 역사하기 시작하셨는데 애굽 왕 바로가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므로 번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꿈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고 있는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를 먹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한 줄기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쇠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쇠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꾼 바로는 마음에 번민하여 이것을 해석해 줄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사 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니 더욱 염려가 커지기만 했지요.
그제서야 꿈의 사람 요셉을 떠올린 술 맡은 관원장은 왕에게 요셉을 추천하였고, 마침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창세기 41:16 이하를 보면 요셉은 이 꿈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는 바로에게 먼저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말한 다음 하나님의 이름으로 꿈을 해석합니다.
즉 일곱 좋은 암소와 좋은 이삭은 일곱 해의 풍년이며 일곱 파리한 암소와 마른 이삭은 풍년 다음에 곧 이어질 일곱 해의 흉년으로 이 동안에 기근이 어찌나 극심한지 그 전의 풍작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이며 동일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꾸었으니 이 일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원하게 꿈을 해석해 준 요셉은 이 일의 대처방법까지도 명쾌하게 제시해 줍니다. 즉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택하여 전 애굽에서 일곱 해 풍년 동안의 소산을 거두고 흉년을 대비하여 그 곡물을 보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왕은 요셉을 택하여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였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요셉은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강대한 나라였던 애굽의 왕 다음 가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말대로 풍년 동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산을 각 성에 거두어들이니 7년의 기근의 때에 이르러 각국에 양식이 떨어졌어도 애굽 왕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각지에서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마다 왕의 양식을 사려고 요셉에게로 왔습니다. 극심한 흉년으로 곡식을 구하러 온 사람 중에는 요셉의 형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을 전혀 탓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여 형들과 그 가족들까지 애굽에 오게 한 후 부양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떠나 타국에 종으로 팔려와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나 진정 감정 하나 없이 형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지요.
이처럼 모든 일에 선한 마음으로 행했던 요셉은 당대에 크게 쓰임받는 의인이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참으로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4. 요셉처럼 득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득죄한 사람까지도 변화시키는 삶
지금까지 우리는 요셉의 신앙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득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성실로 식물을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삼아 요셉처럼 성실히 살고자 노력하면 스스로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득죄하는 사람이라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로서 어느 누구를 만나도 '내가 어떻게 하면 그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으로 이끌어 줄까'를 생각하게 되니 설령 득죄한 사람이 있다 해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헐 수 있도록 도와줄까' 하고 방법을 찾게 됩니다.
또한 혹여 잘못한 사람이라 해도 '어떻게 하면 그에게 힘이 되어 줄까' 하는 마음뿐이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므로 설령 죄인이라도 변화시켜 축복의 반열에 동참시킬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요. 그러니 모난 사람도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등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날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늘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며 살아가니 하나님께서 각종 사고나 어려움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기쁨과 감사의 조건들이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인지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모든 일에 성실히 행하며 자기의 위치 속에서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이 되어 범사에 형통함을 입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며 정도를 좇아 성실하고 정직히 행함으로 범사에 형통케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만일 메마른 사막에서 꽃을 피워 풍성한 열매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옥토에서 얻은 어떠한 열매보다 참으로 값지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렇게 가치 있는 삶이 된다면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하나님 앞에 오직 정도만을 걸으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은 성경상의 인물로는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꿈의 사람이라고 불리는 요셉은 어린 시절 이방 나라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만한 행함으로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여 승리의 삶을 산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간 요셉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나 하나님께서 아버지 야곱에게 내리신 복을 함께 누리며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요셉은 성장하면서 아버지 야곱을 통해 그의 조상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에 관해 들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야곱은 네 명의 부인으로부터 열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들 중에서도 자신이 사랑한 라헬의 소생인 요셉을 눈에 드러날 정도로 편애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들과 달리 채색옷을 입히기도 하고 요셉이 다른 형들의 과실을 고하면 그 말을 듣고 형들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인즉 모든 형제와 부모까지도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지요.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형들의 시기와 미움은 더욱 커졌고 마침내 형들은 요셉을 죽일 궤계를 꾸미게 됩니다. 다행히 요셉은 맏형 르우벤의 제안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애굽의 고위 관료인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2. 오직 성실과 정도의 길을 걸었던 요셉
부유한 가정에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다가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의 종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요셉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성실하게 주인을 섬겼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정성들여 관리하니 주인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위임할 정도로 요셉을 신임하게 되었지요.
이와 같이 요셉은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그 마음이 선했기에 요셉의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해 주셨고 종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도 범사에 형통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보디발의 집 소유물을 주관하게 된 때부터는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의 온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까지 복이 넘쳐났습니다. 결국 요셉은 성실함을 주인에게 인정받아 모든 소유를 관할하게 되고 주인이 간섭조차 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데 요셉에게 시험이 왔습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요셉을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며 날마다 동침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이에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며 번번이 거절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요셉의 옷을 잡고 유혹하는 주인의 아내를 뿌리치느라 요셉은 자기 옷까지 버려두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요셉에게 앙심을 품고 자기의 남편에게 고하기를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들어왔다가 옷을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전하였지요.
아내의 말을 곧이들은 보디발은 심히 노하여 사실을 확인해 보지도 않은 채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요셉을 넣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성실함은 감옥을 관리하는 전옥에게도 인정을 받아 이번에는 옥중의 모든 사무와 죄수들을 다 맡게 되었지요. 전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무슨 일이든 상관하지 않았고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실하고 담대히 정도를 지키는 요셉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길을 항상 형통하게 하셔서 가는 곳마다 인정받아 머리가 되는 축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어느 날, 감옥에 있던 요셉은 새로 들어온 죄수들, 즉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꾼 꿈을 각각 해석해 주었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요셉은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도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후 요셉의 해석대로 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사람은 복직되었으나 복직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어버린 채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3. 하나님의 축복으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 요셉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축복하시고자 역사하기 시작하셨는데 애굽 왕 바로가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므로 번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꿈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고 있는데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를 먹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한 줄기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과 쇠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쇠약한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꾼 바로는 마음에 번민하여 이것을 해석해 줄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애굽의 술객과 박사 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니 더욱 염려가 커지기만 했지요.
그제서야 꿈의 사람 요셉을 떠올린 술 맡은 관원장은 왕에게 요셉을 추천하였고, 마침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창세기 41:16 이하를 보면 요셉은 이 꿈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는 바로에게 먼저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말한 다음 하나님의 이름으로 꿈을 해석합니다.
즉 일곱 좋은 암소와 좋은 이삭은 일곱 해의 풍년이며 일곱 파리한 암소와 마른 이삭은 풍년 다음에 곧 이어질 일곱 해의 흉년으로 이 동안에 기근이 어찌나 극심한지 그 전의 풍작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이며 동일한 꿈을 두 번이나 겹쳐 꾸었으니 이 일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원하게 꿈을 해석해 준 요셉은 이 일의 대처방법까지도 명쾌하게 제시해 줍니다. 즉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택하여 전 애굽에서 일곱 해 풍년 동안의 소산을 거두고 흉년을 대비하여 그 곡물을 보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왕은 요셉을 택하여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였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요셉은 하루아침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당시 강대한 나라였던 애굽의 왕 다음 가는 위치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말대로 풍년 동안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산을 각 성에 거두어들이니 7년의 기근의 때에 이르러 각국에 양식이 떨어졌어도 애굽 왕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각지에서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마다 왕의 양식을 사려고 요셉에게로 왔습니다. 극심한 흉년으로 곡식을 구하러 온 사람 중에는 요셉의 형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을 전혀 탓하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여 형들과 그 가족들까지 애굽에 오게 한 후 부양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떠나 타국에 종으로 팔려와 13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나 진정 감정 하나 없이 형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지요.
이처럼 모든 일에 선한 마음으로 행했던 요셉은 당대에 크게 쓰임받는 의인이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참으로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4. 요셉처럼 득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득죄한 사람까지도 변화시키는 삶
지금까지 우리는 요셉의 신앙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득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도 성실로 식물을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식삼아 요셉처럼 성실히 살고자 노력하면 스스로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득죄하는 사람이라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로서 어느 누구를 만나도 '내가 어떻게 하면 그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으로 이끌어 줄까'를 생각하게 되니 설령 득죄한 사람이 있다 해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헐 수 있도록 도와줄까' 하고 방법을 찾게 됩니다.
또한 혹여 잘못한 사람이라 해도 '어떻게 하면 그에게 힘이 되어 줄까' 하는 마음뿐이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하므로 설령 죄인이라도 변화시켜 축복의 반열에 동참시킬 방법을 모색하게 되지요. 그러니 모난 사람도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등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날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늘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며 살아가니 하나님께서 각종 사고나 어려움으로부터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기쁨과 감사의 조건들이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득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인지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고 모든 일에 성실히 행하며 자기의 위치 속에서 도리를 다하는 선한 사람이 되어 범사에 형통함을 입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8-05
제31과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행 9:36-42
읽을말씀 : 행 9:36-42 | 외울말씀 : 행 9:36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인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시작하여 세계 각지의 고아들과 나병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존경할 만한 인물이나 크게 감동받을 수밖에 없는 선행들은 성경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지요.
특히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희생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과 선으로 가득 찼던 아브라함,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모세, 담대한 믿음과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소유했던 다윗 등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지요.
오늘은 "도르가"라는 성경상의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선행과 구제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은 도르가
다비다라고도 하는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에 대해 큰 핍박이 가해지니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욥바에도 성도들이 정착하여 신앙의 중심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무릎 써야 하는 극심한 핍박 등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할 수 있었지만 도르가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도르가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는데 그러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
이런 도르가가 죽었으니 평소 도르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담대히 나서서 그녀를 살려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사람이요, 큰 권능을 행하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였지요. 도르가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행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혹 "다비다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선한 삶을 살았는데 왜 병들어 죽었습니까?" 하고 의문을 가질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15:26에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을 때 질병이 틈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는 사람이 보기에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도 질병이 틈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니지요.
도르가도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쉬지 않고 옷을 지으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과다하게 몸을 쓸 때도 있었을 것이니 그런 것이 무리가 되어 병이 생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행을 한 도르가였기에 죽음에서 다시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행을 기뻐하시는지 확연히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2. 구제의 대상과 올바른 구제 방법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보여 준 옷들도 많았습니다. 그 선행이 단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중심으로 도르가의 생활 자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역시 변함없는 마음으로 더욱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제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구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어서 구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구제는 갈라디아서 6:10에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될 수 있으면 믿음의 가정들에게 해야 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후서 3:10을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하셨으니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런 사람을 구제하면 오히려 더 나태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자립해야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혹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으로 인해 시험 환난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도 있으니 구제할 때에는 이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도와주면 오히려 도와주는 사람까지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할 때에, 풍랑이 일어 같은 배를 탄 사람들까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구제할 때에는 믿음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나 일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이 어려운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의 경우이지요.
그러면 구제하는 방법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는 교회 앞에 드림으로 교회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헌금 봉투에 드리는 목적을 명시한 후 헌금을 단으로 올리면 축복기도를 받은 후 적절한 곳에 구제로 쓰여지게 됩니다.
다음으로 주의 종이 구제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질서를 좇아 구제하려다 보면 시간이 지체되어 정작 필요할 때 공급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급박한 상황에서는 직접 구제해도 좋습니다.
3. 선행의 여러 가지 예들
선을 행하는 방법에는 구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늘 교회와 주의 종과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중보기도를 올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몸된 제단인 성전을 건축하는 일도 중요한 선행이지요. 학개서 1:8을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말씀했습니다. 시편 37:4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했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성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16-17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성전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에 와서는 세상적인 대화를 한다거나 어떤 분쟁이나 다툼이나 불화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맞이하기 전에 몸도 깨끗이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 마음도 깨끗이 단장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 감과 동시에 우리 마음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마음의 성전 역시 청결하게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차량을 헌물함으로 성도들을 수송하는 일에 큰 보탬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니 참으로 귀한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필요한 각종 기물을 헌물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도르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선행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또한 많은 사람 앞에 칭송받을 만한 것이니 열심히 선행을 쌓아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인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시작하여 세계 각지의 고아들과 나병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존경할 만한 인물이나 크게 감동받을 수밖에 없는 선행들은 성경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지요.
특히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희생의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과 선으로 가득 찼던 아브라함,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던 모세, 담대한 믿음과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소유했던 다윗 등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지요.
오늘은 "도르가"라는 성경상의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선행과 구제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은 도르가
다비다라고도 하는 도르가는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살던 여제자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에 대해 큰 핍박이 가해지니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욥바에도 성도들이 정착하여 신앙의 중심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무릎 써야 하는 극심한 핍박 등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할 수 있었지만 도르가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도르가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는데 그러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습니다.
이런 도르가가 죽었으니 평소 도르가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담대히 나서서 그녀를 살려 줄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능히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사람이요, 큰 권능을 행하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하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였지요. 도르가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선행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혹 "다비다는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선한 삶을 살았는데 왜 병들어 죽었습니까?" 하고 의문을 가질 분도 계실 것입니다. 물론 출애굽기 15:26에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을 때 질병이 틈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는 사람이 보기에 죄를 짓지 않은 것 같은데도 질병이 틈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무절제하게 사용했다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은 아니지요.
도르가도 가난한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쉬지 않고 옷을 지으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과다하게 몸을 쓸 때도 있었을 것이니 그런 것이 무리가 되어 병이 생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행을 한 도르가였기에 죽음에서 다시 살려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행을 기뻐하시는지 확연히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2. 구제의 대상과 올바른 구제 방법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기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보여 준 옷들도 많았습니다. 그 선행이 단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중심으로 도르가의 생활 자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역시 변함없는 마음으로 더욱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제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구제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어서 구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구제는 갈라디아서 6:10에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될 수 있으면 믿음의 가정들에게 해야 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후서 3:10을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말씀하셨으니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런 사람을 구제하면 오히려 더 나태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에게는 자립해야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혹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으로 인해 시험 환난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도 있으니 구제할 때에는 이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도와주면 오히려 도와주는 사람까지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할 때에, 풍랑이 일어 같은 배를 탄 사람들까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구제할 때에는 믿음을 가지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즉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만나 자립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사람이나 일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 생활이 어려운 고아나 과부, 소년소녀 가장 등의 경우이지요.
그러면 구제하는 방법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는 교회 앞에 드림으로 교회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헌금 봉투에 드리는 목적을 명시한 후 헌금을 단으로 올리면 축복기도를 받은 후 적절한 곳에 구제로 쓰여지게 됩니다.
다음으로 주의 종이 구제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질서를 좇아 구제하려다 보면 시간이 지체되어 정작 필요할 때 공급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급박한 상황에서는 직접 구제해도 좋습니다.
3. 선행의 여러 가지 예들
선을 행하는 방법에는 구제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늘 교회와 주의 종과 성도들을 위해 뜨거운 중보기도를 올림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가 하면, 또 어떤 분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전도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몸된 제단인 성전을 건축하는 일도 중요한 선행이지요. 학개서 1:8을 보면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말씀했습니다. 시편 37:4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했으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성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성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16-17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성전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전에 와서는 세상적인 대화를 한다거나 어떤 분쟁이나 다툼이나 불화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맞이하기 전에 몸도 깨끗이 하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우리 마음도 깨끗이 단장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이루어 감과 동시에 우리 마음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마음의 성전 역시 청결하게 이루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어떤 기관이나 개인이 차량을 헌물함으로 성도들을 수송하는 일에 큰 보탬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니 참으로 귀한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필요한 각종 기물을 헌물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도르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선행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또한 많은 사람 앞에 칭송받을 만한 것이니 열심히 선행을 쌓아 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29
제30과네 소견에 선한 대로
삼상 24:4
읽을말씀 : 삼상 24:4 | 외울말씀 : 삼상 24:4
교육목표 :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넘치는 축복과 응답을 받아 누리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생각이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해도 어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여 자신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을 비관하여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 중심이 선악 간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 사람 편에서는 선인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선이 아닌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분명히 선인 것 같아도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다윗의 선(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불순종해감으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하시며 말째인 다윗에게 기름부을 것을 명하셨습니다(삼상 16장).
그러면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이방 족속 블레셋과 서로 대치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때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투구와 갑옷과 놋단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수가 나아와 40일을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 소리를 치는데도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그저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전쟁터에 오게 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단지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리고 외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모든 백성들과 용사들도 두려워 떠는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골리앗은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비록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이렇게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실 때 어찌 기쁘고 사랑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둘째로,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지 않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며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사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더 크게 돌리자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울 왕의 시기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향해 두 번씩이나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지요. 그 후로도 사울 왕의 시기와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 딸을 줄 터이니 결혼 예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를 가져오라고 요구함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하기도 했고,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죽이라 하는가 하면, 라마로 도망간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사울 왕이 군사들과 떨어져 자신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와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때 마음만 먹는다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설령 죽인다 해도 다윗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것은 다윗에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선한 일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은 이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든, 백성의 미움을 받든, 악한 임금이든 간에 이미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기에 죽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가만히 사울 왕의 옷자락만을 베었는데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절대로 사울 왕을 해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요, 다윗 자신이 왕으로 섬긴 사람이었기에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애매히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분별하여 행했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결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다윗의 선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잠이 깨어 갈 길을 갈 때, 다윗이 멀리서 사울을 부르며 땅에 엎드려 절하고는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삼상 24:11)라고 고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없이 쫓겨 다니는 입장에서도 그를 아버지로 여기고 끝까지 자기의 결백한 마음을 전할 정도로 선한 마음을 소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과 대조적이었던 사울 왕은 어떠하였습니까?
사무엘상 24:16 이하를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놓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동도 잠시뿐 시간이 지나자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닙니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아도 마음의 악을 온전히 빼내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순간 사단이 역사하면 또다시 악이 발동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마음 안의 악을 뽑아 버린 선한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우리 안에는 사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사울 왕처럼 내 유익에 맞을 때는 무엇이든 상대에게 주고 싶어 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이내 원수를 맺거나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과거 역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또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이런 악한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악의 종류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는데, 로마서 1:29-31을 보면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거듭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다윗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 왕의 시체를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는 감사를 표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행 13:22).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도 범사에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행했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과 응답을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넘치는 축복과 응답을 받아 누리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생각이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해도 어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하여 자신과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을 비관하여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 중심이 선악 간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 사람 편에서는 선인 것 같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선이 아닌 것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분명히 선인 것 같아도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오늘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다윗의 선(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 불순종해감으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명의 아들 중 말째로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외모가 뛰어난 다윗의 맏형 엘리압을 주목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하시며 말째인 다윗에게 기름부을 것을 명하셨습니다(삼상 16장).
그러면 일개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이방 족속 블레셋과 서로 대치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때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 장수 골리앗으로 인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에 가까운 거인으로 놋투구와 갑옷과 놋단창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수가 나아와 40일을 밤낮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큰 소리를 치는데도 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그저 두려워 떨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전쟁터에 오게 된 소년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단지 물맷돌 다섯 개만 들고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리고 외치기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모든 백성들과 용사들도 두려워 떠는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하여 골리앗은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비록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니 이렇게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실 때 어찌 기쁘고 사랑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둘째로, 다윗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기지 않고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사울 왕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다윗을 처음에는 매우 기뻐하며 군대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사울 왕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환영하러 나온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며 다윗에게 공을 더 크게 돌리자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울 왕의 시기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고 있는 다윗을 향해 두 번씩이나 단창을 던져 죽이려 했지요. 그 후로도 사울 왕의 시기와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 딸을 줄 터이니 결혼 예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를 가져오라고 요구함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을 죽이고자 하기도 했고,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죽이라 하는가 하면, 라마로 도망간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사울 왕이 군사들과 떨어져 자신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와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때 마음만 먹는다면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설령 죽인다 해도 다윗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이곳까지 이끌어 주신 것은 다윗에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자 함이니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이 선한 일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은 이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든, 백성의 미움을 받든, 악한 임금이든 간에 이미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기에 죽이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가만히 사울 왕의 옷자락만을 베었는데 이 일조차도 마음에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절대로 사울 왕을 해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요, 다윗 자신이 왕으로 섬긴 사람이었기에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애매히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자기 감정에 치우쳐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를 분별하여 행했고 오직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결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로 다윗의 선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잠이 깨어 갈 길을 갈 때, 다윗이 멀리서 사울을 부르며 땅에 엎드려 절하고는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삼상 24:11)라고 고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죄없이 쫓겨 다니는 입장에서도 그를 아버지로 여기고 끝까지 자기의 결백한 마음을 전할 정도로 선한 마음을 소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과 대조적이었던 사울 왕은 어떠하였습니까?
사무엘상 24:16 이하를 보면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놓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동도 잠시뿐 시간이 지나자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닙니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 같아도 마음의 악을 온전히 빼내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느 순간 사단이 역사하면 또다시 악이 발동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마음 안의 악을 뽑아 버린 선한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우리 안에는 사울과 같은 마음은 없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사울 왕처럼 내 유익에 맞을 때는 무엇이든 상대에게 주고 싶어 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 유익에 맞지 않으면 이내 원수를 맺거나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과거 역사뿐만 아니라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또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이런 악한 모습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악의 종류에 대해 성경은 여러 곳에 기록하고 있는데, 로마서 1:29-31을 보면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며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거듭 자신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용서하고 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다윗은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피 울며 금식하였고 사울 왕의 시체를 장사 지내 준 길르앗 사람들에게는 감사를 표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선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행 13:22).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도 범사에 자기 소견에 선한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행했던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좇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과 응답을 온전히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22
제29과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뿐이라
열상 17:8-14
읽을말씀 : 열상 17:8-14 | 외울말씀 : 열상 17:12-14
교육목표 : 사르밧 과부처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고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만 급급할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 일들이 알려지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봅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기사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연 어떻게 행해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는 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르밧 과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왕과 온 백성이 심히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함으로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습니다. 이러한 저주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 앞에서 예언케 하셨는데, 회개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전한 엘리야를 미워하여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 명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지요.
얼마 후 가뭄이 극심하여 그릿 시냇물까지 말라 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내가 내 종 엘리야를 너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이렇게 공궤하라" 명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주관하여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마음에 주관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엘리야가 행함 하나까지도 인도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이요,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림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하던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 수백 명을 모으고 단신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단에 번제물을 놓은 후 각자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여 어떤 신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는가 하는 것으로써 참신을 가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불의 응답을 받아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신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엘리야이기에 까마귀를 통해서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르밧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인을 만난 엘리야는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부탁하지요. 순순히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향해 엘리야는 또다시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부탁합니다.
오랜 가뭄으로 물도 구하기 힘든 상황인데 음식까지 달라고 하니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사르밧 과부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감정을 상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민망하게 여기며 설명하였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만일 엘리야가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여인의 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답변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합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금보다도 귀한 양식을 달라고 했으니 엘리야의 요청에 순종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자기 말대로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왜 나처럼 가난한 과부에게 양식을 달라고 청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이로써 그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고 있고 마음이 선한지를 알 수 있지요.
2.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마음 중심을 아셨기에 많은 사람 중에 사르밧 과부를 통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역사하신 것이요, 이 여인에게도 축복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선으로 들어오면, 즉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요삼 2).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대로 기도하니 그대로 역사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15-16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기록된 대로 극심한 가뭄이 다할 때까지 조금도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본교회에도 사르밧 과부와 같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림으로 영적인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르밧 과부의 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베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야 더할 나위 없지만 바로 각자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주의 종들을 섬기는 것을 비롯하여 그 외의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같은 선의 행함을 보일만한 마음이요, 그러한 중심이었지만 상대가 엘리야였기에 축복을 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보장 받는 엘리야를 여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사르밧 과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엘리야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상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순종이 나올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달라는 대로 줄 수 있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으라는 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가 한 쪽뿐인 콩을 다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고 달라 하지 않아도 마음에 주관이 있을 때에는 그대로 순종하여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마지막 양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궤할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의 마음만으로는 축복해 주실 수 없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마음이 선하다 해서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나타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마음에 참된 선을 이루며 그 선을 행함으로 나타내는 빛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사르밧 과부처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이루고 행함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만 급급할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 일들이 알려지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봅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기사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연 어떻게 행해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는 선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르밧 과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지막 남은 음식으로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왕과 온 백성이 심히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범함으로 수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습니다. 이러한 저주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 엘리야를 통해 아합 왕 앞에서 예언케 하셨는데, 회개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전한 엘리야를 미워하여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 명하시고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지요.
얼마 후 가뭄이 극심하여 그릿 시냇물까지 말라 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내가 내 종 엘리야를 너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이렇게 공궤하라" 명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여인의 마음을 주관하여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마음에 주관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엘리야가 행함 하나까지도 인도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이요,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들림을 받을 만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불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숭배하던 이방신인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 수백 명을 모으고 단신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단에 번제물을 놓은 후 각자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여 어떤 신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번제물을 태우는가 하는 것으로써 참신을 가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엘리야는 불의 응답을 받아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참신은 오직 한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엘리야이기에 까마귀를 통해서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고,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르밧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인을 만난 엘리야는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부탁하지요. 순순히 물을 가지러 가는 여인을 향해 엘리야는 또다시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부탁합니다.
오랜 가뭄으로 물도 구하기 힘든 상황인데 음식까지 달라고 하니 참으로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사르밧 과부는 조금도 화를 내거나 감정을 상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도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민망하게 여기며 설명하였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만일 엘리야가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 여인의 선한 마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드러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답변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말합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금보다도 귀한 양식을 달라고 했으니 엘리야의 요청에 순종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생각으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자기 말대로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왜 나처럼 가난한 과부에게 양식을 달라고 청할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어떤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이로써 그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고 있고 마음이 선한지를 알 수 있지요.
2.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선한 마음 중심을 아셨기에 많은 사람 중에 사르밧 과부를 통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역사하신 것이요, 이 여인에게도 축복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선으로 들어오면, 즉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요삼 2).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대로 기도하니 그대로 역사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7:15-16에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기록된 대로 극심한 가뭄이 다할 때까지 조금도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본교회에도 사르밧 과부와 같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림으로 영적인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르밧 과부의 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베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야 더할 나위 없지만 바로 각자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주의 종들을 섬기는 것을 비롯하여 그 외의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어도 충분히 이같은 선의 행함을 보일만한 마음이요, 그러한 중심이었지만 상대가 엘리야였기에 축복을 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엘리야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도 엘리야를 먹이실 수 있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의 보장 받는 엘리야를 여인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만약 사르밧 과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이기적인 욕심이 있었다면 엘리야의 말에 순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상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었기에 순종이 나올 수 있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면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달라는 대로 줄 수 있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으라는 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제가 한 쪽뿐인 콩을 다 달라 해도 기꺼이 줄 수 있고 달라 하지 않아도 마음에 주관이 있을 때에는 그대로 순종하여 줄 수 있는 선한 마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르밧 과부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마지막 양식으로 다른 사람을 공궤할 수 있는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의 마음만으로는 축복해 주실 수 없기에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함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마음이 선하다 해서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나타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마음에 참된 선을 이루며 그 선을 행함으로 나타내는 빛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으며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15
제28과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마 8:5-13
읽을말씀 : 마 8:5-13 | 외울말씀 : 마 8:8
교육목표 :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이를 믿는 선한 마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기쁘시게 했던 백부장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과 그에 따르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이스라엘은 강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가버나움에 파견되어 있던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피지배국 백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만일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사람의 병이 어떻게 기도한다고 치료될 수 있는가?"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했다거나 "나는 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온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데 어떻게 피지배국의 평민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인가?" 하면서 체면을 내세웠다면 결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동족인 유대인 가운데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판단하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믿고 담대히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주기를 간절히 구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답변하셨습니다.
이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고백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고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백부장이 이처럼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만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그 소문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이었기에 그 자체를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선이 얼마나 임해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세가 현저히 달라지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해도 선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선이 임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선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백부장의 말과 행함 속에 나타난 선한 마음
그러면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말과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구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자기 수하에 있는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사회로 계급이 뚜렷했고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면 대부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거나 가난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 구하는 백부장이라면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해 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이렇게 백부장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문제 자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리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즉시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고 응답해 주신 것이지요.
두 번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신하에게 병문안을 온다 해도 황송스러울 일인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며 근본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발걸음을 옮기겠다고 하시니 너무나 민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선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우러러 뵐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으로 여기며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 없이 말씀하시거나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 가운데 가르침과 깨우침을 더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정확한 기한과 때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으니 백부장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백부장을 기뻐하신 것은 단지 하인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는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진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나다나엘을 처음 보시고도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백부장의 마음 중심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물론 위로는 천부장이 있지만 백부장이 그가 거느린 백 명이 있는 곳으로 따로 파송받아 나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최고의 머리입니다. 이럴 때에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아래에 군사가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먼저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 말하고 예수님 앞에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여 완전히 낮춤으로 예수님을 높여 드렸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이토록 낮추니 예수님께서는 감동이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백부장에게는 참된 영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으로도 천하 만물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믿으니 믿은 대로 하인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따르게 됩니다(막 16:17-18).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요, 참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따르는 표적들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본교회에도 개척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중풍병자가 걷고 뛰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 일일이 간증하자면 너무 많지요. 혹자는 "나는 믿는데도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정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것이고 믿음대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2:14-26).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처럼 마음밭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한번 들어선 믿음의 길을 변함없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혹자는 "무조건 선하게만 생각하고 믿어 주기만 한다면 속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만 믿으려 하고 좋은 것만 들으려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속이려는 악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고 또한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것임을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속지도 않을 뿐더러 성령의 주관을 받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녕 선한 것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되고 선한 소식, 복음을 들으면 의심치 않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믿음을 내보이는 사람들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음을 선으로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무엇이든지 믿음대로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선한 소식을 들을 때에 이를 믿는 선한 마음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 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질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 주며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기쁘시게 했던 백부장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백과 그에 따르는 축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 이스라엘은 강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스라엘의 가버나움에 파견되어 있던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피지배국 백성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만일 백부장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때 "사람의 병이 어떻게 기도한다고 치료될 수 있는가?" 하는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했다거나 "나는 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온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데 어떻게 피지배국의 평민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말인가?" 하면서 체면을 내세웠다면 결코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동족인 유대인 가운데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부장은 판단하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믿고 담대히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주기를 간절히 구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답변하셨습니다.
이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고백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기이히 여기시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고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면 백부장이 이처럼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만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고 그 소문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내용이었기에 그 자체를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선이 얼마나 임해 있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자세가 현저히 달라지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해도 선한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선이 임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며 선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백부장의 말과 행함 속에 나타난 선한 마음
그러면 백부장의 선한 마음을 알 수 있는 말과 행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구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자기 수하에 있는 하인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사회로 계급이 뚜렷했고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면 대부분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거나 가난 때문에 팔려온 사람들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 구하는 백부장이라면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해 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이렇게 백부장이 예수님께 가지고 나온 문제 자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리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즉시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고 응답해 주신 것이지요.
두 번째로, 백부장은 예수님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신하에게 병문안을 온다 해도 황송스러울 일인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시며 근본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발걸음을 옮기겠다고 하시니 너무나 민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선한 백부장은 예수님을 감히 우러러 뵐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으로 여기며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 없이 말씀하시거나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 가운데 가르침과 깨우침을 더해 주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정확한 기한과 때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시는 분이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번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으니 백부장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백부장을 기뻐하신 것은 단지 하인의 병이 낫기를 간구하는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진실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나다나엘을 처음 보시고도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처럼 백부장의 마음 중심도 이미 아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백부장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
물론 위로는 천부장이 있지만 백부장이 그가 거느린 백 명이 있는 곳으로 따로 파송받아 나와 있을 때에는 자신이 최고의 머리입니다. 이럴 때에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아래에 군사가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기가 쉽지요. 그런데 백부장은 먼저 자신이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라 말하고 예수님 앞에 자신을 종으로 비유하여 완전히 낮춤으로 예수님을 높여 드렸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신분으로 볼 때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이토록 낮추니 예수님께서는 감동이 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백부장에게는 참된 영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으로도 천하 만물을 주관하실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믿으니 믿은 대로 하인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영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따르게 됩니다(막 16:17-18).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요, 참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따르는 표적들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본교회에도 개척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며 중풍병자가 걷고 뛰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 일일이 간증하자면 너무 많지요. 혹자는 "나는 믿는데도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정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것이고 믿음대로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2:14-26).
하나님께서는 백부장처럼 마음밭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한번 들어선 믿음의 길을 변함없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혹자는 "무조건 선하게만 생각하고 믿어 주기만 한다면 속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만 믿으려 하고 좋은 것만 들으려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속이려는 악한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고 또한 그것이 정도를 벗어나는 것임을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속지도 않을 뿐더러 성령의 주관을 받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녕 선한 것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되고 선한 소식, 복음을 들으면 의심치 않고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믿음을 내보이는 사람들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음을 선으로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무엇이든지 믿음대로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08
제27과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 15:21-28
읽을말씀 : 마 15:21-28 | 외울말씀 : 마 15:27
교육목표 : 항상 상대에게 은혜를 끼치며 감동적인 고백을 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입술의 고백으로 상대에게 감동을 주기 보다는 불필요한 말이나 악하고 미련한 말을 냄으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한 말을 내지 않음은 물론, 스스로 선한 말을 하는 단계를 넘어 설령 상대가 내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는 말을 하더라도 도리어 선한 감동의 말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은혜를 끼치며 오히려 상대가 선한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선의 단계를 이루어야 하지요.
오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감동적이고 선한 입술의 열매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감동시킨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셨는데 북쪽에 있는 두로와 시돈 곧 이방인이 사는 수로보니게 지역에 머무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소경이 눈을 뜨며 각색 질병으로 고통당하거나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요.
가나안 민족의 자손인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귀신 들린 딸로 인해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있던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런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무엇을 간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여인이 모르는 남자 앞에 함부로 설 수 있는 때도 아니었고 더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구할 수 있겠다는 기쁨과 떨림으로 예수님께 달려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방인을 멀리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귀신 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 자존심이나 두려움을 접어 두고 간청하는 이 여인을 모르는 척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고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이 여인은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발아래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고 간청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실 은혜를 이방인들에게 베푸는 것은 마치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져 먹게 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개에 비유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어 돌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먼저 "주여 옳소이다마는"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한 후,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면서 다시 간청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겸비한 태도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이 여인의 선함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디어 응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니 그 즉시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갔지요.
어떤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이 여인처럼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도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어 "아, 이럴 때에는 내가 이러이러한 겸손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 되겠다" 하며 비슷한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거듭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실 때에는 결국 본색이 드러나고 변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미 선한 중심으로 마음에 겸비함이 임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답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다 해도 감정이 나지 않고 다투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자신이 먼저 말로써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지혜를 동원하면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에게 기분 상할 말을 했다 하더라도 아내 편에서 오히려 남편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면 "내가 참으로 잘못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선의 마음입니다. 상대가 내 마음을 비수와 같이 찌르는 말을 한다 할지라도 상대를 먼저 이해하고 품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감동적인 고백을 한 성경상의 인물들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첩경을 평탄케 했던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 전파하기를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막 1:7)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너무나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우실 뿐 아니라 무한한 권능으로 천하 만물을 호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황송하게 여겨졌기에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떠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때와 기한을 바로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다 찼을 때 겸손히 물러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의 고백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낮아진 그의 중심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칭찬하신 것이지요.
사도 바울 역시 자기를 완전히 벗어 버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가 얼마나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좇기 원했는가를 잘 알 수 있지요.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한 번 만난 주님 앞에서 자신이 쌓아 왔던 것들을 철저히 무너뜨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생명 다해 주님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또한 이전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실을 늘 간증하면서 자신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 하였고(고전 15: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고백하며 스스로 낮추었지요.
더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나 컸던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독사에게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신처럼 극진히 접대하는 일도 있었지요.
3. 겸비함으로 지적받는 선한 마음과 그에 따른 축복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여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에 힘쓰며 철야기도와 금식 등으로 늘 충성 봉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아직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라면 저는 그분들을 칭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충성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라는 점을 깨우쳐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한 마디라도 칭찬하고 격려해 주면 더욱 충만해지고 열심을 낼 수도 있겠지만 더 진리의 사람으로 이끌기 위해 칭찬보다 오히려 지적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지적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다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김으로 인해 도리어 기쁨을 잃고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그분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장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깨닫고 더 큰 능력을 얻을 것이기에 말씀해 드리는 것이지요.
두 번째 유형은 지적한 사항에 대해 변명하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변명하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항상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적해 드릴 때는 상대의 발전을 기대하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 변명이 따른다면 받을 그릇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니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기가 어렵지요.
세 번째 유형은 지적받은 말씀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본인을 더 온전케 이끌기 위해 마음 써 주시는 목자의 마음을 전달받아 잘한 것은 뒤로 한 채 무조건 감사함으로 받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무슨 말이든 해 줄 수 있고 본인들은 받은 즉시 개선해 나갈 터이니 신속히 진리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적을 받을 때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지적을 통해 변화될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적받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며, 한 마디의 말을 하더라도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항상 상대에게 은혜를 끼치며 감동적인 고백을 할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게 한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입술의 고백으로 상대에게 감동을 주기 보다는 불필요한 말이나 악하고 미련한 말을 냄으로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한 말을 내지 않음은 물론, 스스로 선한 말을 하는 단계를 넘어 설령 상대가 내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는 말을 하더라도 도리어 선한 감동의 말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은혜를 끼치며 오히려 상대가 선한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선의 단계를 이루어야 하지요.
오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감동적이고 선한 입술의 열매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감동시킨 수로보니게 여인의 고백
예수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하셨는데 북쪽에 있는 두로와 시돈 곧 이방인이 사는 수로보니게 지역에 머무신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고 소경이 눈을 뜨며 각색 질병으로 고통당하거나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요.
가나안 민족의 자손인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귀신 들린 딸로 인해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있던 가나안 여인 곧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런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 무엇을 간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여인이 모르는 남자 앞에 함부로 설 수 있는 때도 아니었고 더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 들린 딸을 구할 수 있겠다는 기쁨과 떨림으로 예수님께 달려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방인을 멀리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귀신 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 자존심이나 두려움을 접어 두고 간청하는 이 여인을 모르는 척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고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이 여인은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욱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발아래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하고 간청하였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실 은혜를 이방인들에게 베푸는 것은 마치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던져 먹게 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개에 비유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어 돌아가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처럼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먼저 "주여 옳소이다마는"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한 후,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면서 다시 간청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겸비한 태도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이 여인의 선함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드디어 응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말씀하시니 그 즉시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갔지요.
어떤 사람은 마음 중심에서 이 여인처럼 겸비한 마음이 아닌데도 순간에 간교한 지혜를 짜내어 "아, 이럴 때에는 내가 이러이러한 겸손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사야 되겠다" 하며 비슷한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진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거듭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실 때에는 결국 본색이 드러나고 변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지요.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미 선한 중심으로 마음에 겸비함이 임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답변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다면 상대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다 해도 감정이 나지 않고 다투지 않을 것이며, 더군다나 자신이 먼저 말로써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겸비한 마음으로 지혜를 동원하면 오히려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에게 기분 상할 말을 했다 하더라도 아내 편에서 오히려 남편의 마음에 감동을 준다면 "내가 참으로 잘못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선의 마음입니다. 상대가 내 마음을 비수와 같이 찌르는 말을 한다 할지라도 상대를 먼저 이해하고 품어 줄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감동적인 고백을 한 성경상의 인물들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첩경을 평탄케 했던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 전파하기를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막 1:7)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너무나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우실 뿐 아니라 무한한 권능으로 천하 만물을 호령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황송하게 여겨졌기에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를 떠나 예수님을 따른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고백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때와 기한을 바로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다 찼을 때 겸손히 물러나는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의 고백들은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낮아진 그의 중심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칭찬하신 것이지요.
사도 바울 역시 자기를 완전히 벗어 버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가 얼마나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만을 좇기 원했는가를 잘 알 수 있지요.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한 번 만난 주님 앞에서 자신이 쌓아 왔던 것들을 철저히 무너뜨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생명 다해 주님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또한 이전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실을 늘 간증하면서 자신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 하였고(고전 15:8)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고백하며 스스로 낮추었지요.
더구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나 컸던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독사에게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신처럼 극진히 접대하는 일도 있었지요.
3. 겸비함으로 지적받는 선한 마음과 그에 따른 축복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여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에 힘쓰며 철야기도와 금식 등으로 늘 충성 봉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아직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라면 저는 그분들을 칭찬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충성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라는 점을 깨우쳐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한 마디라도 칭찬하고 격려해 주면 더욱 충만해지고 열심을 낼 수도 있겠지만 더 진리의 사람으로 이끌기 위해 칭찬보다 오히려 지적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지적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다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김으로 인해 도리어 기쁨을 잃고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그분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장은 감사함으로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깨닫고 더 큰 능력을 얻을 것이기에 말씀해 드리는 것이지요.
두 번째 유형은 지적한 사항에 대해 변명하고자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변명하는 사람들은 발전이 없고 항상 제자리걸음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적해 드릴 때는 상대의 발전을 기대하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 변명이 따른다면 받을 그릇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니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기가 어렵지요.
세 번째 유형은 지적받은 말씀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어떻게든 본인을 더 온전케 이끌기 위해 마음 써 주시는 목자의 마음을 전달받아 잘한 것은 뒤로 한 채 무조건 감사함으로 받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무슨 말이든 해 줄 수 있고 본인들은 받은 즉시 개선해 나갈 터이니 신속히 진리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적을 받을 때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지적을 통해 변화될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적받기를 사모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며, 한 마디의 말을 하더라도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선의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7-01
제26과맥추절을 지키라
출 23:14-18, 신 16:9-12, 행 2:1-4
읽을말씀 : 출 23:14-18, 신 16:9-12, 행 2:1-4 | 외울말씀 : 출 23:16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인 의미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맥추절을 지키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맥추절(麥秋節)은 이스라엘에서 매년 지켜야 할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출애굽기 23:16을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밭에 뿌린 보리의 첫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는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합니다.
칠칠절이란 명칭은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 만에 돌아오는 절기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고, 오순절이란 명칭은 동일한 기간을 날수로 계산하면 50일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신명기 16:9-12을 보면 "칠주(七週)를 계수(計數)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했습니다.
민수기 28:26-31에도 맥추절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매 수송아지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숫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숫염소 하나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에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막 거두어들인 새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의 떡이 소제로서(레 23:17) 특별히 드려지게 됩니다. 또한 이것과 함께 향기로운 냄새로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이 지난 후 첫날에 처음 익은 곡식 단을 하나님께 바친 것은 유월절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 후 50일 되는 날 곧 맥추절에 새 곡식가루로 만든 떡 두 덩이는 예수님의 부활 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지고 구원에 이른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요,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하게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심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성결되어 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고전 12:13).
2. 맥추감사제
맥추감사제는 소제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되 상번제(매일 제단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둘을 드림: 민 28:3-4)와 소제(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빻아낸 기름 힌 사분지 일을 섞은 가루: 민 28:5-6)와 전제(독주: 민 28:7) 외에 그것들을 드리라고 했으니(민 28:26-31)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받으실 수 있도록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며 감사예물을 정성껏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예물을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고 하면 나름대로 마음에 주관이 오거나 깨달음을 받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녀라면 즉시 순종하여 그대로 행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감사함으로 중심을 바쳐 즐거이 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고후 9:6-7). 우리가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며 생명 곧 진리를 심으면 영생을 거두고 비진리를 심으면 사망을 거두게 되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마찬가지로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준은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한 과부의 두 렙돈을 기뻐하신 주님께서는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막 12:44).
옛날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으나 오늘날은 주로 헌금으로 드리게 되는데, 때로 특별히 소유한 값진 물건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릴 수 없는 경우 마음을 다해 성전 청소 등 봉사로 몸을 드리기도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정성을 다해 기쁨과 순전한 마음, 그리고 믿음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각종 시험 환난을 물리쳐 주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영혼이 잘되어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16:10-11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주의 성전에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예물을 준비하고 기쁨으로 성도들과 교제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을 주셔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하시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버리며 성결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심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천국을 약속해 주셨으니 소망이 넘칩니다. 비록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이 있는 이 땅에 살면서 갖가지 일들을 겪는다 해도 하나님 나라가 있으니 언제나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원히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사 어떤 염려, 근심, 걱정거리가 있다 해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가 되어 늘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역대하 20:20-23을 보면 암몬, 모압, 세일산 세 거민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여호사밧 왕은 최선두에 거룩한 옷을 입힌 찬양대를 내보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적들이 자기들끼리 싸워 자멸하게 만드시고 그들의 재물과 양식들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가 깨닫고 더욱 감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맥추절의 유래와 영적인 의미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맥추절을 지키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한다.
1. 맥추절의 유래와 의미
맥추절(麥秋節)은 이스라엘에서 매년 지켜야 할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출애굽기 23:16을 보면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밭에 뿌린 보리의 첫 수확을 감사하여 지키는 맥추절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농경 축하제라 할 수 있는데 칠칠절(七七節) 또는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합니다.
칠칠절이란 명칭은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 만에 돌아오는 절기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고, 오순절이란 명칭은 동일한 기간을 날수로 계산하면 50일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맥추절은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신명기 16:9-12을 보면 "칠주(七週)를 계수(計數)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했습니다.
민수기 28:26-31에도 맥추절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수송아지 둘과 숫양 하나와 일 년 된 숫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매 수송아지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숫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숫염소 하나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에는 일반적으로 드리는 제사 외에 막 거두어들인 새 수확의 결실인 고운 가루에 누룩을 섞어 구운 두 덩어리의 떡이 소제로서(레 23:17) 특별히 드려지게 됩니다. 또한 이것과 함께 향기로운 냄새로 번제를 드리고 속죄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이 지난 후 첫날에 처음 익은 곡식 단을 하나님께 바친 것은 유월절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 후 50일 되는 날 곧 맥추절에 새 곡식가루로 만든 떡 두 덩이는 예수님의 부활 후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지고 구원에 이른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항상 몸과 마음을 바쳐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요,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기념하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더욱 거룩하게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게 됨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성령으로 영을 낳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심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영이 죽어 영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성결되어 나가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고전 12:13).
2. 맥추감사제
맥추감사제는 소제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되 상번제(매일 제단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둘을 드림: 민 28:3-4)와 소제(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빻아낸 기름 힌 사분지 일을 섞은 가루: 민 28:5-6)와 전제(독주: 민 28:7) 외에 그것들을 드리라고 했으니(민 28:26-31)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받으실 수 있도록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며 감사예물을 정성껏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예물을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고 하면 나름대로 마음에 주관이 오거나 깨달음을 받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자녀라면 즉시 순종하여 그대로 행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감사함으로 중심을 바쳐 즐거이 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고후 9:6-7). 우리가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며 생명 곧 진리를 심으면 영생을 거두고 비진리를 심으면 사망을 거두게 되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마찬가지로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준은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한 과부의 두 렙돈을 기뻐하신 주님께서는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막 12:44).
옛날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을 잡아서 제물로 드렸으나 오늘날은 주로 헌금으로 드리게 되는데, 때로 특별히 소유한 값진 물건을 드리거나 물질을 드릴 수 없는 경우 마음을 다해 성전 청소 등 봉사로 몸을 드리기도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정성을 다해 기쁨과 순전한 마음, 그리고 믿음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기뻐받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각종 시험 환난을 물리쳐 주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영혼이 잘되어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16:10-11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말씀하신 대로 주의 성전에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힘을 다하여 자원하는 예물을 준비하고 기쁨으로 성도들과 교제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을 주셔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하시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버리며 성결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심에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천국을 약속해 주셨으니 소망이 넘칩니다. 비록 눈물, 슬픔, 질병, 고통이 있는 이 땅에 살면서 갖가지 일들을 겪는다 해도 하나님 나라가 있으니 언제나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원히 사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사 어떤 염려, 근심, 걱정거리가 있다 해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시니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가 되어 늘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역대하 20:20-23을 보면 암몬, 모압, 세일산 세 거민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여호사밧 왕은 최선두에 거룩한 옷을 입힌 찬양대를 내보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적들이 자기들끼리 싸워 자멸하게 만드시고 그들의 재물과 양식들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가 깨닫고 더욱 감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6-24
제25과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읽을말씀 : 단 3:13-18 | 외울말씀 : 단 3:18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조건 없는 신앙과 선한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조건부적인 모습들이 많습니다.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희생하기보다는 상대가 무엇을 해 주어야 그에 대한 대가를 주겠다는 조건이 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에도 이런 조건들이 붙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돌아와야 부모를 섬기고 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조건부적인 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데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이라고 인정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1. 생명을 걸고 마땅히 행할 바를 지킨 다니엘의 세 친구
남 왕국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있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지요. 왕의 진미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 갔지만 채식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말씀대로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고 왕의 총애를 받게 하셨지요. 결국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우고 방백과 수령 등 각 도 모든 관원들에게 자신이 세운 신상의 낙성예식에 참여하여 절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신상에 절하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노한 왕 앞에 끌려왔고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질 상황이 되었지요. 왕은 이 순간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서 만일 이번에도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겠노라고 엄히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히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하면서 풀무에 던져져서 불에 타 죽는다 해도 우상 앞에 결단코 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에서 건져 내 주시지 않으실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평소에 마땅히 할 바를 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시험이 찾아 온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할 도리를 다하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어찌 풀무불에 던져진 그들의 목숨을 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결국 왕이 노하여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구어진 풀무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신의 아들과 같은 모양의 사람이 함께하며 지켜 주니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으며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다니엘 3:27).
마침내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다니엘 3:28-30). 이처럼 아무 잘못 없이 시험이 왔을 때 믿음으로 이기면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셔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욱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 생명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하려면
여러분은 과연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않고 믿어 드리며 그분의 뜻에 따라 온전히 행하고 있는지요? 혹 하나님 앞에 할 바를 다하지 못하면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 불평하지 않았는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할 바를 어느 정도 했다 해도 그것을 끝까지, 응답될 때까지 했는가 한번 짚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중도에 의심하거나 포기하거나 원망하고 탄식하지 않았는지요. 더욱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걸고 축복이나 문제 해결 받으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거나 "응답받으면 하나님을 믿겠다" 하는 조건적인 마음이 있다면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며 간구해 나갈 때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설령 원하는 것을 응답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끝까지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여 죄의 담을 헐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에 구원받은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영원한 행복이 있는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설령 지금 목숨을 거두어 가신들 무엇을 감사하지 못하겠습니까? 정녕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사업터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이 문제만 해결받을 수 있다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 앞에도 열심히 물질로 심어야지" 하면서 조건부적인 생각과 신앙으로 행한다면 먼저 그러한 생각과 신앙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먼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자 결심하고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대로 심어 나간다면 이런 사람에게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사업터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혹시 나는 하나님 앞에 이런 조건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가정을 지켜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만 감사하며 충만해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런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니라 목숨을 달라 하셔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3.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한 사도 바울
성경상의 또 다른 인물로서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는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한번 주님을 만난 후 죽는 날까지 받은 은혜를 간직하며 살았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변치 않는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죽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만류도 다 뿌리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무슨 일을 만날지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성령께서도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했는데도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백했지요.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 하신 성령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목숨이 아까워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타협치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변함없는 중심과 더불어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같이 조건 없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의 위험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신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며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러한 사도 바울보다 더한 고난을 받으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 앞에서 불평이 나올 수 없고 마음이 변하여 돌아서는 일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신 것을 감당함에 있어서 사람으로 인해 걸리거나 믿음이 부족하여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변개하는 비진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조건 없는 신앙이었기에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말씀하신 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28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힘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 중심이 온전하며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의 행함을 보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행하여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렸습니다(행 19:12).
우리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사도 바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선한 중심과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놀라운 은총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조건 없는 신앙과 선한 마음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조건부적인 모습들이 많습니다.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희생하기보다는 상대가 무엇을 해 주어야 그에 대한 대가를 주겠다는 조건이 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에도 이런 조건들이 붙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돌아와야 부모를 섬기고 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조건부적인 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데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이라고 인정하시며 기뻐하시는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1. 생명을 걸고 마땅히 행할 바를 지킨 다니엘의 세 친구
남 왕국 유다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벨론 왕은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 중에 흠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고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을 데려다가 3년 동안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으며 자라게 했습니다.
그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있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지요. 왕의 진미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 들어있을 수 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 갔지만 채식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오직 말씀대로 행하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셨고 왕의 총애를 받게 하셨지요. 결국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에게 큰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우고 방백과 수령 등 각 도 모든 관원들에게 자신이 세운 신상의 낙성예식에 참여하여 절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상에 경배하지 않는 사람은 즉시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신상에 절하지 아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노한 왕 앞에 끌려왔고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질 상황이 되었지요. 왕은 이 순간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서 만일 이번에도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겠노라고 엄히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히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하면서 풀무에 던져져서 불에 타 죽는다 해도 우상 앞에 결단코 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풀무에서 건져 내 주시지 않으실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비장한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평소에 마땅히 할 바를 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시험이 찾아 온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도 자기의 할 도리를 다하는 아름다운 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니 어찌 풀무불에 던져진 그들의 목숨을 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결국 왕이 노하여 칠 배나 더 뜨겁게 달구어진 풀무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신의 아들과 같은 모양의 사람이 함께하며 지켜 주니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으며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다니엘 3:27).
마침내 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여 주었습니다(다니엘 3:28-30). 이처럼 아무 잘못 없이 시험이 왔을 때 믿음으로 이기면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을 주셔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욱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2. 생명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하려면
여러분은 과연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않고 믿어 드리며 그분의 뜻에 따라 온전히 행하고 있는지요? 혹 하나님 앞에 할 바를 다하지 못하면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 불평하지 않았는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할 바를 어느 정도 했다 해도 그것을 끝까지, 응답될 때까지 했는가 한번 짚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중도에 의심하거나 포기하거나 원망하고 탄식하지 않았는지요. 더욱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걸고 축복이나 문제 해결 받으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거나 "응답받으면 하나님을 믿겠다" 하는 조건적인 마음이 있다면 철저히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며 간구해 나갈 때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설령 원하는 것을 응답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끝까지 감사하며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하여 죄의 담을 헐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에 구원받은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영원한 행복이 있는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설령 지금 목숨을 거두어 가신들 무엇을 감사하지 못하겠습니까? 정녕 이런 중심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사업터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이 문제만 해결받을 수 있다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 앞에도 열심히 물질로 심어야지" 하면서 조건부적인 생각과 신앙으로 행한다면 먼저 그러한 생각과 신앙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먼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자 결심하고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대로 심어 나간다면 이런 사람에게 응답이 오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사업터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혹시 나는 하나님 앞에 이런 조건부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가정을 지켜 주시고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만 감사하며 충만해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런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니라 목숨을 달라 하셔도 기꺼이 줄 수 있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3.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앙을 소유한 사도 바울
성경상의 또 다른 인물로서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는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한번 주님을 만난 후 죽는 날까지 받은 은혜를 간직하며 살았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변치 않는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죽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만류도 다 뿌리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무슨 일을 만날지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성령께서도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했는데도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고백했지요.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 하신 성령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목숨이 아까워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타협치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변함없는 중심과 더불어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같이 조건 없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의 위험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신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며 주리며 목마르며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러한 사도 바울보다 더한 고난을 받으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 앞에서 불평이 나올 수 없고 마음이 변하여 돌아서는 일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신 것을 감당함에 있어서 사람으로 인해 걸리거나 믿음이 부족하여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변개하는 비진리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앞에 조건 없는 신앙이었기에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말씀하신 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28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이 힘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있어서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 중심이 온전하며 조건 없는 희생과 사랑의 행함을 보인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놀라운 권능을 행하여 하나님께 크게 영광돌렸습니다(행 19:12).
우리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사도 바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선한 중심과 조건 없는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놀라운 은총을 받으며 축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