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TOTAL : 1473 PAGE : 101/105
2005-11-04
제44과빛의 열매
엡 5:8-13
읽을말씀 : 엡 5:8-13 | 외울말씀 : 엡 5:9
교육목표 : 빛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아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망의 길로 가던 사람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무질서와 혼돈에 질서를, 다툼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주시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선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갖게 되고 행복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에베소서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말씀하신 대로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의미
본문 에베소서 5:9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는데, 이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가 곧 빛의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착함이란 선하고 악의가 없는 아름다운 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자신의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불우한 이웃이나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고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은혜를 알아 공경하는 것,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실례를 범치 않는 마음,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마음, 남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 화평하고 양보하는 마음, 욕심이 없는 마음, 자랑하거나 들레지 않는 마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 등이 다 착함에 속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옳은 것을 위해 생명을 다해 전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의 의로움이란 이러한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 드리는 것,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죄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가는 것이나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자기를 깨끗케 하는 것,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반듯하고 절도있는 행함,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것, 옳은 일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 등이 다 의로움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진실함이란 세 가지 속성이 있는데 바로 거짓되지 않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해 놓고는 지키지 않거나 입술로 낸 말을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약속한 바를 지키고 한 번 정한 마음에 변함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는데 왜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흔히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보살펴 주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할 때 "저 사람은 참 착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가 선이 아니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남의 돈을 훔치려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결코 착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지요. 또한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기 싫어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면 그를 더욱 무능하게 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면 정말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단지 일하기가 싫어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조건 돈을 주기보다는 간증 등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해 줌으로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착한 행실이 빛의 열매로 나타나려면 반드시 그 안에 의로움, 즉 하나님의 의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착함과 의로움만 가지고 온전함을 이룰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진실함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가령, 수재민 돕기 모금 등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성금을 냈다면 진실이 아니므로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빛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의 차원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선행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빛 가운데 행해야 참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3. 빛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때의 축복
본문 에베소서 5:10을 보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했는데, 이는 곧 빛의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성경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삶 자체가 빛의 열매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화평함을 좇아 아랫사람인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가 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취하지 않으려는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지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선한 마음뿐만 아니라 의로운 행함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하심에 아브라함은 미처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의심 없이 믿어 드렸지요. 즉 자신이나 아내가 이미 출산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시자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세기 15:6). 이처럼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로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맺힌 진실함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진실함에 해당됩니다. 백세에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갈라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았는데도 아브라함은 조금의 원망이나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중심이 얼마나 진실했던가를 잘 보여 주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벗이라 칭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 어디를 가나 동행해 주시고 범사에 복을 주심으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셨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빛의 열매를 맺어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증거가 확실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본문 에베소서 5:11-13을 보면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책망을 통해 어두움에서 나와 빛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망은 단순히 잘못한 것을 꾸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책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초신자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를 돌아보며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혹시나 잘못한 것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버려 나갔지요. 혹 미움이나 혈기 등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노트에 적어 놓고 철야하고 금식해서라도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도하며 버려 나갔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돌아보아 책망할 것이 있는가를 찾으며 온전히 진리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니 지금은 세계선교를 창대케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 말씀했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축복이 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않을 때 모든 시험 환난이 닥쳐오는 것을 알기에 성도님들을 대할 때에도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고 해서 무조건 위로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 시험 환난이 왔는지 그 이유를 깨우쳐 주고 진리 가운데 살지 못한 것을 책망하기도 하지요.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잘못된 것은 고쳐 주고 바르게 이끌어 줄 때 비로소 빛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필요할 때는 지적하고 책망을 해서라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누가 권면하고 지적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진리에 비추어 어긋났을 때에는 자신을 책망하여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며, 상대를 대함에 있어서도 이해하고 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리로 깨우쳐 빛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게만 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함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안위를 염려하여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육신에 속한 생각이었으므로 호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빛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책망받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책망받을 것이 없으면 더욱 좋겠지만 혹여 부족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있어 책망을 받을 때는 중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며, 책망받는 것마다 즉시 돌이켜야 신속히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드러내어 바로 잡아 주고 온전케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와 어두움을 낱낱이 드러내 주시는 것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훈계나 책망을 받아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며 빛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빛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알아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영위하게 한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망의 길로 가던 사람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무질서와 혼돈에 질서를, 다툼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주시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선하고 아름다운 진리의 마음을 갖게 되고 행복하고 강건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빛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은 에베소서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말씀하신 대로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빛의 열매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의미
본문 에베소서 5:9을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는데, 이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가 곧 빛의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착함이란 선하고 악의가 없는 아름다운 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자신의 유익보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불우한 이웃이나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고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은혜를 알아 공경하는 것,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실례를 범치 않는 마음, 행악자로 인하여 불평하지 않는 마음, 남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 화평하고 양보하는 마음, 욕심이 없는 마음, 자랑하거나 들레지 않는 마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마음 등이 다 착함에 속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일반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옳은 것을 위해 생명을 다해 전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의 의로움이란 이러한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 드리는 것,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죄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온전히 지켜 나가는 것이나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자기를 깨끗케 하는 것,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반듯하고 절도있는 행함,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것, 옳은 일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는 것 등이 다 의로움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다음으로, 진실함이란 세 가지 속성이 있는데 바로 거짓되지 않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해 놓고는 지키지 않거나 입술로 낸 말을 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진실함의 열매가 맺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진실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약속한 바를 지키고 한 번 정한 마음에 변함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했는데 왜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흔히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보살펴 주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솔선수범할 때 "저 사람은 참 착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행위의 목적이나 결과가 선이 아니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남의 돈을 훔치려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므로 결코 착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지요. 또한 능력이 있는데도 일하기 싫어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면 그를 더욱 무능하게 할 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을 보면 정말 힘이 없어서 일을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단지 일하기가 싫어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무조건 돈을 주기보다는 간증 등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해 줌으로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착한 행실이 빛의 열매로 나타나려면 반드시 그 안에 의로움, 즉 하나님의 의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착함과 의로움만 가지고 온전함을 이룰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진실함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가령, 수재민 돕기 모금 등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성금을 냈다면 진실이 아니므로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빛의 열매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고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의 차원에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선행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빛 가운데 행해야 참이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3. 빛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때의 축복
본문 에베소서 5:10을 보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했는데, 이는 곧 빛의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성경상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들 수 있는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삶 자체가 빛의 열매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화평함을 좇아 아랫사람인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는가 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취하지 않으려는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지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선한 마음뿐만 아니라 의로운 행함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명하심에 아브라함은 미처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의심 없이 믿어 드렸지요. 즉 자신이나 아내가 이미 출산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뭇별을 보이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시자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세기 15:6). 이처럼 아브라함이 현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로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맺힌 진실함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진실함에 해당됩니다. 백세에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갈라 번제로 드리라는 명을 받았는데도 아브라함은 조금의 원망이나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중심이 얼마나 진실했던가를 잘 보여 주지요.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가 풍성히 맺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벗이라 칭해 주셨던 것입니다. 또 어디를 가나 동행해 주시고 범사에 복을 주심으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도록 만들어 주셨지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빛의 열매를 맺어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증거가 확실히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4.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본문 에베소서 5:11-13을 보면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책망을 통해 어두움에서 나와 빛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망은 단순히 잘못한 것을 꾸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책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초신자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행하기 위해 제 스스로를 돌아보며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혹시나 잘못한 것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버려 나갔지요. 혹 미움이나 혈기 등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노트에 적어 놓고 철야하고 금식해서라도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도하며 버려 나갔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돌아보아 책망할 것이 있는가를 찾으며 온전히 진리 가운데 행하려고 힘쓰니 지금은 세계선교를 창대케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 말씀했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축복이 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치 않을 때 모든 시험 환난이 닥쳐오는 것을 알기에 성도님들을 대할 때에도 힘들어하고 어려워한다고 해서 무조건 위로해 주지는 않습니다. 왜 시험 환난이 왔는지 그 이유를 깨우쳐 주고 진리 가운데 살지 못한 것을 책망하기도 하지요.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지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잘못된 것은 고쳐 주고 바르게 이끌어 줄 때 비로소 빛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필요할 때는 지적하고 책망을 해서라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누가 권면하고 지적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진리에 비추어 어긋났을 때에는 자신을 책망하여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며, 상대를 대함에 있어서도 이해하고 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진리로 깨우쳐 빛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항상 온유하고 부드럽게만 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셔야 함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안위를 염려하여 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육신에 속한 생각이었으므로 호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빛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책망받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책망받을 것이 없으면 더욱 좋겠지만 혹여 부족한 것이나 잘못한 것이 있어 책망을 받을 때는 중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며, 책망받는 것마다 즉시 돌이켜야 신속히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드러내어 바로 잡아 주고 온전케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와 어두움을 낱낱이 드러내 주시는 것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훈계나 책망을 받아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며 빛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0-28
제43과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나니
요일 5:18
읽을말씀 : 요일 5:18 | 외울말씀 : 요일 5:18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범죄치 아니하며 진리와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자동화된 설비들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정해진 일만 수행하고 자석도 철 이외의 다른 것은 붙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오직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행함 외에는 다른 행함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일은 어떤 유혹이나 위협을 받는다 해도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쉽게 타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범죄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덮을 수 없듯이 빛에는 어떤 어두움도 틈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범죄치 않는 빛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난 자
본문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 14:15, 요일 5:2). 그 계명 안에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21-23을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마음 자체에 죄를 유발할 만한 근본 악이 없어야 죄를 행치 않는 것이므로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곧 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깨끗해 보이는 물건에도 미세한 균들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은 악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이 모르는 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악이 나올 만한 상황이 되면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으려면 근본에 있는 악의 모양이라도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없는 사람은 설령 악으로 관영된 곳에서 산다 할지라도 그 악에 물들 수 없습니다. 이미 육을 체험하여 그것이 무익한 것임을 알고, 그 무익한 육을 벗어 낸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는 썩어지고 변하는 육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이 전혀 없으므로 죄를 행치 않으며, 이러한 모습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의 예
먼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들 수 있습니다. 주전 605년경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다니엘은 젊은 나이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들 중 유능한 인재를 뽑아 나라의 일꾼으로 등용하였는데 이때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고위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 후 벨사살 왕에 이은 다리오 왕은 뛰어나고 민첩한 다니엘을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한 총리들과 방백들은 한 가지 간계를 꾸며 왕께 나아갑니다. 즉 왕으로 하여금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금령을 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는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할 바를 행했고 차라리 사자굴에 들어갈지언정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는 상황에서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하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거나 어려움을 만나면 이내 타협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은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결코 범죄할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요셉도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이복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된 데에는 형제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등 온전하지 못한 모습에도 원인이 있었지요. 물론 요셉은 형들의 불의를 아버지에게 알리는 것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자기가 옳다 여기는 의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의로 바꾸어 갔다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진정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상대의 허물을 발견해도 사랑으로 덮어 주고 더욱이 그것이 윗사람의 허물이라면 마치 자신의 허물처럼 여기며 함께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의 마음이 되어서 상대가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의 권면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요셉을 통해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상대의 시기와 미움을 유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까지도 식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했고 이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혜롭게 행하여 상대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자기 보기에 옳다고 해서 무조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생각해 보고 행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바로 이런 점이 부족해서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얻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남의 종으로 있으면서 낮아지는 법을 배웠고 감옥에 있으면서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웠으며, 또한 자신이 옳다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중심, 그래서 어떤 유혹에도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온전한 마음으로 변화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범할 여지조차도 없도록 철저히 악의 근본까지 마음에서 벗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3:9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씨"란 진리요(눅 8:11),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는 것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임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 머리에 지식으로 쌓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영으로 양식삼은 상태, 즉 영으로 일구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영으로 양식삼았다면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은 변함이 없는 것이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결코 비진리, 악, 불의 등의 어두움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9 후반절에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저"란 바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지니셨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며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씨, 즉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심고 양식삼아야 하며, 그럴 때만이 어두움이 빛 앞에 어찌할 수 없듯이 악한 자가 빛의 자녀된 권세를 가진 우리를 감히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 누리는 축복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다"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아야 합니다. 범죄치 아니하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함께해 주신다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께로부터 지킴을 받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가 있을 수 없지요. 설령 원수 마귀가 시험 환난을 가져오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물리치시고 지켜 주시니 있던 문제도 자연히 떠날 뿐 아니라 빛의 자녀된 권세가 함께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함께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고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그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다니엘 역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해 버리시니 다니엘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요셉 역시 30세의 나이에 왕의 신임받는 애굽의 총리로 세워졌고 요셉의 명철과 지혜에 탄복한 왕은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에게는 바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축복이 넘쳐날 뿐 아니라 생명까지라도 지킴을 받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우주만물과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면 모든 환난을 면하게 됩니다(시 121:1-7). 설령 악한 사람들이 함정을 놓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이며, 또 죽는다 해도 아름다운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행하면 틀림없이 역사하시며 약속대로 지켜 주십니다(마 5:18). 그러므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항상 진리와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범죄치 아니하며 진리와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자동화된 설비들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정해진 일만 수행하고 자석도 철 이외의 다른 것은 붙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오직 빛이신 하나님께 속한 행함 외에는 다른 행함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일은 어떤 유혹이나 위협을 받는다 해도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쉽게 타협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른 사람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범죄할 수 없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덮을 수 없듯이 빛에는 어떤 어두움도 틈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범죄치 않는 빛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난 자
본문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 14:15, 요일 5:2). 그 계명 안에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범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21-23을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즉 마음 자체에 죄를 유발할 만한 근본 악이 없어야 죄를 행치 않는 것이므로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곧 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 깨끗해 보이는 물건에도 미세한 균들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은 악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이 모르는 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 악이 나올 만한 상황이 되면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으려면 근본에 있는 악의 모양이라도 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 없는 사람은 설령 악으로 관영된 곳에서 산다 할지라도 그 악에 물들 수 없습니다. 이미 육을 체험하여 그것이 무익한 것임을 알고, 그 무익한 육을 벗어 낸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는 썩어지고 변하는 육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이 전혀 없으므로 죄를 행치 않으며, 이러한 모습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의 예
먼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들 수 있습니다. 주전 605년경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1차 침입을 받았을 때 다니엘은 젊은 나이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은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포로들 중 유능한 인재를 뽑아 나라의 일꾼으로 등용하였는데 이때 다니엘은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고위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 후 벨사살 왕에 이은 다리오 왕은 뛰어나고 민첩한 다니엘을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시기한 총리들과 방백들은 한 가지 간계를 꾸며 왕께 나아갑니다. 즉 왕으로 하여금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하는 금령을 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는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 자신의 할 바를 행했고 차라리 사자굴에 들어갈지언정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는 상황에서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하면서도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거나 어려움을 만나면 이내 타협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은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였으니 하나님 앞에 결코 범죄할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요셉도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이복 형들의 시기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된 데에는 형제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자신을 자랑하며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등 온전하지 못한 모습에도 원인이 있었지요. 물론 요셉은 형들의 불의를 아버지에게 알리는 것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자기가 옳다 여기는 의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의로 바꾸어 갔다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진정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상대의 허물을 발견해도 사랑으로 덮어 주고 더욱이 그것이 윗사람의 허물이라면 마치 자신의 허물처럼 여기며 함께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오직 용서의 마음이 되어서 상대가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사랑의 권면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요셉을 통해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상대의 시기와 미움을 유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까지도 식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했고 이로 인해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혜롭게 행하여 상대로 하여금 오해케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자기 보기에 옳다고 해서 무조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생각해 보고 행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바로 이런 점이 부족해서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얻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남의 종으로 있으면서 낮아지는 법을 배웠고 감옥에 있으면서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웠으며, 또한 자신이 옳다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을 행하는 중심, 그래서 어떤 유혹에도 범죄하지 않을 수 있는 온전한 마음으로 변화되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를 범할 여지조차도 없도록 철저히 악의 근본까지 마음에서 벗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3:9을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씨"란 진리요(눅 8:11),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한다"는 것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임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말씀이 머리에 지식으로 쌓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영으로 양식삼은 상태, 즉 영으로 일구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영으로 양식삼았다면 반드시 행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영은 변함이 없는 것이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결코 비진리, 악, 불의 등의 어두움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9 후반절에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했는데, 여기서 "저"란 바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지니셨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분이며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씨, 즉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심고 양식삼아야 하며, 그럴 때만이 어두움이 빛 앞에 어찌할 수 없듯이 악한 자가 빛의 자녀된 권세를 가진 우리를 감히 만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 누리는 축복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이다"라는 인정을 받으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범죄치 않아야 합니다. 범죄치 아니하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함께해 주신다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하나님께로부터 지킴을 받는 사람은 어떠한 질병이나 문제가 있을 수 없지요. 설령 원수 마귀가 시험 환난을 가져오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물리치시고 지켜 주시니 있던 문제도 자연히 떠날 뿐 아니라 빛의 자녀된 권세가 함께함으로 놀라운 축복을 받아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들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함께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고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그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했고 다니엘 역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해 버리시니 다니엘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가서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던 요셉 역시 30세의 나이에 왕의 신임받는 애굽의 총리로 세워졌고 요셉의 명철과 지혜에 탄복한 왕은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에게는 바로 이러한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가정과 일터, 사업터에 축복이 넘쳐날 뿐 아니라 생명까지라도 지킴을 받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우주만물과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신다면 모든 환난을 면하게 됩니다(시 121:1-7). 설령 악한 사람들이 함정을 놓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이며, 또 죽는다 해도 아름다운 천국이 예비되어 있으니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진리 가운데, 빛 가운데 행하면 틀림없이 역사하시며 약속대로 지켜 주십니다(마 5:18). 그러므로 정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빛의 자녀가 되어 항상 진리와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0-21
제42과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요일 1:10
읽을말씀 : 요일 1:10 | 외울말씀 : 요일 1:10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미처 자신이 발견치 못했던 분야들을 조명하여 봄으로 더욱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여 범사에 형통함을 입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 세공된 보석과 같이 참으로 존귀하고 값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석이 아름답고 영롱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이물질을 분리해 내는 연마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사람도 죄성과 자아를 버리는 연단을 거쳐야 합니다. 즉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마음을 찢고 통회하는 과정을 통해 이물질과 같은 비진리의 악이 벗어지고 귀한 보석과 같은 사람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1. 말씀대로 사는 것 같으나 응답과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
요한복음 11:40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고 요한복음 14:14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이 내 안에 온전히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온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충성하는 것 같으나 문제가 있는 경우
여호수아 6-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에서 나온 물건을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이 말씀을 어기고 외투 한 벌과 은 금을 탐내어 취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니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습니다. 결국 아간의 범죄가 드러나 아간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이와 같이 사람들이 볼 때에는 열심인 것 같고 충성하는 것 같으나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2) 마음에 소원한 바를 차일피일 미루거나 이행하지 않는 경우
사도행전 4-5장을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로 인해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자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들의 소유를 팔아 바친다고 했으나 남편 아나니아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져갔고,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그 값을 들고 베드로에게 갔을 때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셔서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말하게 하시지요. 이 말을 들은 아나니아는 바로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베드로 앞에 나온 그의 아내 삽비라 역시 육의 욕심을 좇아 사도들을 속였지요. 이는 곧 사도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고, 따라서 그 결과는 사망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을 속이거나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은혜받았을 때나 치료받았을 경우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앞에 갖가지 마음의 소원을 두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두었던 소원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단순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만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들 같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범사에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리고 속이는 경우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 그의 지시대로 순종하여 문둥병이 치료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일이 너무 감사하여 나아만은 준비해 온 많은 예물을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받기를 거절했고 이에 나아만은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오직 여호와께만 드릴 것을 약속하며 떠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지켜보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저를 쫓아가서 엘리사의 이름을 빙자하여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 가지고 집에 감추어 두지요. 밝은 영감 가운데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엘리사가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고 묻자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거짓으로 대답합니다.
그 결과 게하시는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속이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속이는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 하나님과의 모든 막힌 담을 헐고 마음껏 응답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삶의 분야들을 통한 자기 발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에 보이는 죄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온전하진 않지만 그렇게 악하지도 않으니까" 하고 안주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직도 그러한 죄의 찌끼가 남아 있음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과 관련된 네 분야를 통해 범죄치 않았다 함으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미처 자신이 발견치 못했던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족 복음화를 이루는 분야
사도행전 16:31을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셨는데 만일 교회에 나온 지가 수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가족들을 전도하지 못하고 여전히 핍박을 받는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면 원수 마귀 사단은 역사하지 못하며, 정녕 주의 교양으로 옷 입고 평소에도 가족과 일가친척에게 본이 된다면 사랑받고 칭송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핍박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전도하는 말에 귀 기울여 전도가 되어지지요. 그러니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전도함에 있어서 내가 주 예수를 바로 믿고 또한 진리 안에서 지혜롭게 전도한다면 가족 복음화를 신속히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2) 건강에 관한 분야
하나님께서는 요한삼서 2절에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주신다고 하셨고 마가복음 9:23에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질병에 걸렸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질병이 틈타거나 연약한 분야가 있었던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3장을 보면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이 있었고 큰 기사와 표적도 베풀었던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열왕기하 2:23-24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어느 날 길을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했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저희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42명을 찢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심히 악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저주하는 엘리사의 모습은 돌로 쳐서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숨으셨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를 보아도 아무 이유 없이 병에 들거나 비참한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26에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질병이 틈탔다면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아 죄를 자백함으로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3) 사업에 관한 분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신 28:4)라고 했고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는데도 정작 사업터에 늘 어려움을 겪거나 가까스로 어려움을 넘기고 있는 상황이라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먼저, 정도를 걷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돈으로 무엇을 해 보려는 마음을 품은 자체가 정도에서 어긋난 것이며, 수고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근본 중심에서부터 벗어 버려야 합니다. 또한 동업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상대를 힘들게 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런 곳에 축복을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신속히 발견하여 돌이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부흥에 관한 분야
만일 자신이 맡은 분야에 부흥이 되지 않고 오히려 양 떼를 잃고 있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믿는다면 내 가족보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 떼가 더 소중하기에 결코 실족케 하거나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며 모세는 이런 하나님을 믿으므로 지팡이를 내밀어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진리 안에 거하며 이처럼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 줄 수 있다면 양 떼가 실족하거나 떠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일꾼들이 육에 거하여 편견과 이기적인 욕심,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 속에서 일을 처리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된다면 내 안의 성령께서 모든 길을 알려 주시고 주관해 주시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함을 입게 되니 가정, 건강, 사업터의 문제, 부흥 등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위배되는 감정을 벗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다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밝히 자신을 조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더욱 온전히 거하는 빛된 자녀들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미처 자신이 발견치 못했던 분야들을 조명하여 봄으로 더욱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여 범사에 형통함을 입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 세공된 보석과 같이 참으로 존귀하고 값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석이 아름답고 영롱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이물질을 분리해 내는 연마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사람도 죄성과 자아를 버리는 연단을 거쳐야 합니다. 즉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마음을 찢고 통회하는 과정을 통해 이물질과 같은 비진리의 악이 벗어지고 귀한 보석과 같은 사람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1. 말씀대로 사는 것 같으나 응답과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
요한복음 11:40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고 요한복음 14:14에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이 오지 않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이 내 안에 온전히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온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충성하는 것 같으나 문제가 있는 경우
여호수아 6-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에서 나온 물건을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이 말씀을 어기고 외투 한 벌과 은 금을 탐내어 취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니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습니다. 결국 아간의 범죄가 드러나 아간은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요.
이와 같이 사람들이 볼 때에는 열심인 것 같고 충성하는 것 같으나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2) 마음에 소원한 바를 차일피일 미루거나 이행하지 않는 경우
사도행전 4-5장을 보면 초대교회 사도들로 인해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자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당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들의 소유를 팔아 바친다고 했으나 남편 아나니아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져갔고,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그 값을 들고 베드로에게 갔을 때 성령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셔서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말하게 하시지요. 이 말을 들은 아나니아는 바로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세 시간쯤 지나 베드로 앞에 나온 그의 아내 삽비라 역시 육의 욕심을 좇아 사도들을 속였지요. 이는 곧 사도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고, 따라서 그 결과는 사망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을 속이거나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도 은혜받았을 때나 치료받았을 경우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앞에 갖가지 마음의 소원을 두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두었던 소원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단순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만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들 같은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범사에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을 저버리고 속이는 경우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 왕의 군대 장관인 나아만이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가 그의 지시대로 순종하여 문둥병이 치료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일이 너무 감사하여 나아만은 준비해 온 많은 예물을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끝까지 받기를 거절했고 이에 나아만은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오직 여호와께만 드릴 것을 약속하며 떠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을 지켜보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저를 쫓아가서 엘리사의 이름을 빙자하여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 가지고 집에 감추어 두지요. 밝은 영감 가운데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엘리사가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고 묻자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거짓으로 대답합니다.
그 결과 게하시는 저주를 받아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희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속이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속이는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 하나님과의 모든 막힌 담을 헐고 마음껏 응답과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2. 삶의 분야들을 통한 자기 발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에 보이는 죄뿐만 아니라 마음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온전하진 않지만 그렇게 악하지도 않으니까" 하고 안주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직도 그러한 죄의 찌끼가 남아 있음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과 관련된 네 분야를 통해 범죄치 않았다 함으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미처 자신이 발견치 못했던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가족 복음화를 이루는 분야
사도행전 16:31을 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셨는데 만일 교회에 나온 지가 수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가족들을 전도하지 못하고 여전히 핍박을 받는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한다면 원수 마귀 사단은 역사하지 못하며, 정녕 주의 교양으로 옷 입고 평소에도 가족과 일가친척에게 본이 된다면 사랑받고 칭송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핍박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전도하는 말에 귀 기울여 전도가 되어지지요. 그러니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전도함에 있어서 내가 주 예수를 바로 믿고 또한 진리 안에서 지혜롭게 전도한다면 가족 복음화를 신속히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2) 건강에 관한 분야
하나님께서는 요한삼서 2절에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주신다고 하셨고 마가복음 9:23에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질병에 걸렸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질병이 틈타거나 연약한 분야가 있었던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3장을 보면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이 있었고 큰 기사와 표적도 베풀었던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열왕기하 2:23-24을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어느 날 길을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했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저희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42명을 찢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향해 심히 악한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저주하는 엘리사의 모습은 돌로 쳐서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숨으셨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예를 보아도 아무 이유 없이 병에 들거나 비참한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26에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질병이 틈탔다면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아 죄를 자백함으로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3) 사업에 관한 분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신 28:4)라고 했고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하는데도 정작 사업터에 늘 어려움을 겪거나 가까스로 어려움을 넘기고 있는 상황이라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먼저, 정도를 걷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돈으로 무엇을 해 보려는 마음을 품은 자체가 정도에서 어긋난 것이며, 수고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근본 중심에서부터 벗어 버려야 합니다. 또한 동업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상대를 힘들게 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이런 곳에 축복을 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신속히 발견하여 돌이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부흥에 관한 분야
만일 자신이 맡은 분야에 부흥이 되지 않고 오히려 양 떼를 잃고 있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믿는다면 내 가족보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 떼가 더 소중하기에 결코 실족케 하거나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며 모세는 이런 하나님을 믿으므로 지팡이를 내밀어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진리 안에 거하며 이처럼 믿음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여 줄 수 있다면 양 떼가 실족하거나 떠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일꾼들이 육에 거하여 편견과 이기적인 욕심,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 속에서 일을 처리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된다면 내 안의 성령께서 모든 길을 알려 주시고 주관해 주시기 때문에 범사에 형통함을 입게 되니 가정, 건강, 사업터의 문제, 부흥 등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위배되는 감정을 벗어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다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밝히 자신을 조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더욱 온전히 거하는 빛된 자녀들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0-14
제41과빛을 좇아오나니
요일 3:21
읽을말씀 : 요일 3:21 | 외울말씀 : 요일 3:21
교육목표 :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빛을 좇아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어렵고 힘든 환경을 비관하여 탈선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며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는데, 얼마나 선한가 혹은 악한가에 따라 진리를 좇아 빛으로 나오기도 하고 악을 좇아 어두움에 물들어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온전한 빛의 자녀가 되어 가는 곳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능력자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요한복음 3:21을 보면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진리를 좇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을 말하며, 이런 사람은 빛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빛은 영적으로 어두움이 전혀 없는 영원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즉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의 마음이 밖으로 나타난 상태를 빛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5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했고 야고보서 1:17에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1-5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빛"이라 증거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1:19에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란 하나님이시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진리 자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의 속성인 빛이 좋아지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게 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사랑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시편 119:97을 보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왜 주의 법이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일까요? 가령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비진리이며 하나님의 법과 반대가 됩니다. 이렇게 비진리가 있으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므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고통이 따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라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안에 미움을 버리고 사랑의 마음을 품으면 어느 누구하고도 걸리지 않으니 마음이 평안할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따라서 시편 19:9-10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천국에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며, 그럴 때 비로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시 1:3).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뿐 아니라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는 것은 행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은 버리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지켜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도 빛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나 감사예물을 드릴 때에도 억지로나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구제나 봉사를 할 때에도 누가 알아주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체가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기도할 때도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중심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지요. 이렇게 믿음과 사랑으로 기도하면 위로부터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을 힘입어 능히 원수 마귀를 이기고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귀히 여기고 충성되이 감당해 나가는 사람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들로서 자신의 집을 성도들의 모임 장소로 내어 줌으로 사도 바울이 마음껏 복음을 증거하고 그곳에 초대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이때 아굴라 부부가 얼마나 충성되이 사도 바울을 도왔는지는 로마서 16:4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는 말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사도 바울을 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명을 귀히 여기고 충성하는 것을 봅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바치는 사람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알고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온갖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칼로 목베임으로 순교를 당하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헌신함으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로마에 복음의 꽃을 찬란하게 피웠지요.
이처럼 정녕 믿음이 있고 천국에 소망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당해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참된 증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자신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5:11-12).
2.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전에는 어두움에 거하는 우리들을 빛 가운데 들이시기 위해 부르셨고, 이제는 빛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벧전 2:9).
더구나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 처소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진주문과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기초석으로 된 새예루살렘 성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영적으로 12는 빛의 수입니다. 따라서 새예루살렘의 진주문과 기초석이 12개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어 빛으로 나온 사람, 곧 온 집에 충성하고 성결된 사람들만이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빛으로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새예루살렘을 예비하신 것이니 그곳에 들어가려면 먼저 어두움에 속한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열심히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시고 범사에 형통케 하시며,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지요.
3.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천국 복음을 증거해 주셨지만 원수 마귀에게 속하여 어두움을 좇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또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날마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감으로 어두움에서 나와 빛 가운데 행하게 되며, 이러한 사람은 설령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란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빛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고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아 나감으로 범사에 형통한 길로 인도받을 수 있고 하늘의 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17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성결을 이루고 빛으로 들어가면 하늘로서 지혜와 명철이 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빛에 거하면 빌립보서 4:11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한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하나님과 화평함을 이룸으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넘쳐나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니 항상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빛을 좇아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빛을 좇아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하게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어렵고 힘든 환경을 비관하여 탈선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며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는데, 얼마나 선한가 혹은 악한가에 따라 진리를 좇아 빛으로 나오기도 하고 악을 좇아 어두움에 물들어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온전한 빛의 자녀가 되어 가는 곳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능력자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지에 대해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1.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요한복음 3:21을 보면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진리를 좇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을 말하며, 이런 사람은 빛의 행함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빛은 영적으로 어두움이 전혀 없는 영원하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즉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의 마음이 밖으로 나타난 상태를 빛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1:5을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했고 야고보서 1:17에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1-5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빛"이라 증거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1:19에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란 하나님이시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진리 자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이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고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의 속성인 빛이 좋아지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게 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극히 사랑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시편 119:97을 보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면 왜 주의 법이 사랑스럽다고 하는 것일까요? 가령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비진리이며 하나님의 법과 반대가 됩니다. 이렇게 비진리가 있으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므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고통이 따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라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안에 미움을 버리고 사랑의 마음을 품으면 어느 누구하고도 걸리지 않으니 마음이 평안할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따라서 시편 19:9-10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천국에 소망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며, 그럴 때 비로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듯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시 1:3).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뿐 아니라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는 것은 행하고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는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는 것은 버리며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와 지켜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한일서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도 빛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나 감사예물을 드릴 때에도 억지로나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중심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구제나 봉사를 할 때에도 누가 알아주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체가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기도할 때도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중심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지요. 이렇게 믿음과 사랑으로 기도하면 위로부터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을 힘입어 능히 원수 마귀를 이기고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할 수 있게 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귀히 여기고 충성되이 감당해 나가는 사람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들로서 자신의 집을 성도들의 모임 장소로 내어 줌으로 사도 바울이 마음껏 복음을 증거하고 그곳에 초대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이때 아굴라 부부가 얼마나 충성되이 사도 바울을 도왔는지는 로마서 16:4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는 말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사도 바울을 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명을 귀히 여기고 충성하는 것을 봅니다.
4)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바치는 사람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알고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온갖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담대히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칼로 목베임으로 순교를 당하기까지 자신을 온전히 헌신함으로 당시 세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로마에 복음의 꽃을 찬란하게 피웠지요.
이처럼 정녕 믿음이 있고 천국에 소망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당해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참된 증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자신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5:11-12).
2.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전에는 어두움에 거하는 우리들을 빛 가운데 들이시기 위해 부르셨고, 이제는 빛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벧전 2:9).
더구나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 처소가 예비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진주문과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기초석으로 된 새예루살렘 성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영적으로 12는 빛의 수입니다. 따라서 새예루살렘의 진주문과 기초석이 12개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행함으로 온전케 되어 빛으로 나온 사람, 곧 온 집에 충성하고 성결된 사람들만이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빛으로 나온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새예루살렘을 예비하신 것이니 그곳에 들어가려면 먼저 어두움에 속한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열심히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좇아 빛 가운데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시고 범사에 형통케 하시며,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을 이루어 주시지요.
3. 빛을 좇아 나오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천국 복음을 증거해 주셨지만 원수 마귀에게 속하여 어두움을 좇는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사람들은 진리의 빛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또 성령의 소욕을 좇아 날마다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감으로 어두움에서 나와 빛 가운데 행하게 되며, 이러한 사람은 설령 지혜가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란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빛이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고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아 나감으로 범사에 형통한 길로 인도받을 수 있고 하늘의 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3:17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성결을 이루고 빛으로 들어가면 하늘로서 지혜와 명철이 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빛에 거하면 빌립보서 4:11에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한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하나님과 화평함을 이룸으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넘쳐나고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니 항상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빛을 좇아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만사형통한 삶을 영위할 뿐 아니라 아름다운 새예루살렘에서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10-07
제40과우리 죄를 자백하면
요일 1:8-9
읽을말씀 : 요일 1:8-9 | 외울말씀 : 요일 1:9
교육목표 : 우리가 왜 죄 없다 할 수 없는지를 깨달아 진정 빛 앞에 자신을 거짓 없이 비춤으로 흠도 점도 없는 온전한 빛의 자녀들로 나오게 한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작은 어두움이라 해도 결코 숨길 수 없으므로 어두움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하나님 앞에 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설령 죄가 있다 해도 그것을 스스로 자백하며 나오면 죄사함을 주시고 깨끗케 해 주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어두움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마다 양심이나 자라온 환경, 교양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나 죄로 여길 수 있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죄 없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왜 사람이 죄 없다 할 수 없는지, 또한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죄를 자백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리가 죄 없다 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1:8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죄인된 아담의 씨를 받고 태어난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성을 이어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원죄이며,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스스로 지은 자범죄도 많이 있기 때문에 결코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뵐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므로(롬 3:23, 5:12)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약 2천여 년 전에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 1:12, 롬 3:24).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 해도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성결의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근본 죄성이 남아 있는 것이고, 또한 버리지 못한 악의 모양들로 인해 순간적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알지 못하고 죄를 짓기도 하고, 또 알면서도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죄를 짓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 없다" 인정하시는 온전한 성결을 이룰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죄 없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다고 했는데(요일 1:8) 왜 그런 것일까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빛으로 비춰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면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온전한 성결을 이루어 어두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죄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어두움이 있는데도 죄 없다 한다면 이는 그 안에 진리가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모두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요일 1:9), 이미 자백한 것은 더 이상 죄라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법 안에서의 죄란?
국가나 사회가 정해 놓은 법을 어기는 행위를 죄라 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입니다(빌 3:20). 따라서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인 영계의 법이며 이것을 어기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계의 법은 영의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법으로서 곧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3:4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셨으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이 곧 불법이요, 죄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밖에 사는 사람, 즉 믿지 않는 사람은 요한복음 16:9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체가 이미 죄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 안에서 죄가 되는 것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로, 행함으로 지은 죄 곧 육체의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5:10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말씀하신 대로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통해 벌을 받게 되고,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갈 5:19-21).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모든 육체의 일을 단번에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빛 가운데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열심히 기도해 나갈 때 비로소 육체의 일들을 하나하나 버려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버려 나가는 행함이 바로 믿음이요, 신앙생활인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육체의 사람이라 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으로 지은 죄 곧 육신의 일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비록 외관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마음에 품은 온갖 불법도 어두움이며 죄입니다(롬 14:10, 약 4:11-12). 구약 시대에는 행위로 나타난 불법만을 죄라 하였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마음에 품은 불법까지 죄가 됩니다.
구약 시대와는 달리, 신약 시대에는 성령을 의지하여 마음에 할례를 받아 가면 능히 마음의 죄까지도 이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통해 변화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그 안에 거하므로 마음 중심에서부터 온전한 빛의 행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은 곧 용서와 사랑과 자비,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마음, 또한 모든 것을 선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판단, 정죄, 미움, 시기, 질투 등 이러한 어두움의 것을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지 행하지 않았다 해서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어두움 같지 않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두움인 것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어두움들은 발견하여 벗어 버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뜻 보기에는 어두움이 아닌 것 같지만, 근본이 어두움인 분야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남보다 못한 자신에 대해 낙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이러한 모습이 남에게 악을 행하거나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빛에 속한 영적인 사랑은 시기 질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따라서 상대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지는 않는다 해도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빛이 될 수 없고 그만큼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랑은 상대가 나보다 더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을 볼 때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 진리를 좇는다 했는데 결과를 보니 화평함이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전체의 의견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이끌어 갔는데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진정 빛을 좇았다면 반드시 화평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평은 자신이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 맞추어 주는 마음이요, 나를 드러내지 않고 누구와도 걸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빛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다고 해도, 결과는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자기 보기에 옳다 여겨지므로 어두움이라고 생각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사람들이 일을 지시하거나 지시를 받는 경우, 일의 결과가 좋으면 자신의 공로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상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을 온전히 버려야 사랑으로 상대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빛에 속한 모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을 전가하거나 모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탓으로 돌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설령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해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며 "죄 있다" 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죄 없다 할 마음이 아니요, 작은 일에도 스스로 자백할 마음이기 때문에 "죄 없다" 여기시며 축복해 주시지요.
4. 빛 가운데 거하려면 죄를 자백하고 돌이켜야
지금까지 자신이 왜 죄 없다 할 수 없는지 살펴보았는데, 빛으로 비추니 어두움이라고 생각지 못한 분야까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자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로만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돌이킬 때 주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만큼 빛 가운데 행한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흠 없이 온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동하여 그녀를 취한 후 이 사실을 은폐하고자 결국은 죄 없는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하는 엄청난 죄까지 짓게 되었지요.
그런데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그의 죄를 지적하시니 즉시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죄에 대한 보응으로 반역한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다니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연단의 시간이 있었지만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다윗 왕의 자백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연단을 통해 흠 없이 빛에 거할 수 있는 온전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 왕의 연단을 통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사랑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미쁘시다" 한 것은 상대의 단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시고 허물까지도 사해 주신다는 것을 말하며 "의로우시다"는 것은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어려움 가운데서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변화되는 만큼 더한 축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든 죄를 마음껏 자백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며 진정 빛 앞에 자신을 거짓 없이 비추어서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흠 없고 온전한 빛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우리가 왜 죄 없다 할 수 없는지를 깨달아 진정 빛 앞에 자신을 거짓 없이 비춤으로 흠도 점도 없는 온전한 빛의 자녀들로 나오게 한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작은 어두움이라 해도 결코 숨길 수 없으므로 어두움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하나님 앞에 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설령 죄가 있다 해도 그것을 스스로 자백하며 나오면 죄사함을 주시고 깨끗케 해 주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신이 어두움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마다 양심이나 자라온 환경, 교양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나 죄로 여길 수 있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스스로 죄 없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왜 사람이 죄 없다 할 수 없는지, 또한 죄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죄를 자백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리가 죄 없다 할 수 없는 이유
요한일서 1:8을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죄인된 아담의 씨를 받고 태어난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죄성을 이어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원죄이며,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스스로 지은 자범죄도 많이 있기 때문에 결코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을 뵐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면 결국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므로(롬 3:23, 5:12)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약 2천여 년 전에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 1:12, 롬 3:24).
이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 해도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성결의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근본 죄성이 남아 있는 것이고, 또한 버리지 못한 악의 모양들로 인해 순간적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알지 못하고 죄를 짓기도 하고, 또 알면서도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죄를 짓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 없다" 인정하시는 온전한 성결을 이룰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죄 없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다고 했는데(요일 1:8) 왜 그런 것일까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빛으로 비춰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있으면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온전한 성결을 이루어 어두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죄 없다"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어두움이 있는데도 죄 없다 한다면 이는 그 안에 진리가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렇다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모두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요일 1:9), 이미 자백한 것은 더 이상 죄라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법 안에서의 죄란?
국가나 사회가 정해 놓은 법을 어기는 행위를 죄라 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입니다(빌 3:20). 따라서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인 영계의 법이며 이것을 어기는 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계의 법은 영의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법으로서 곧 성경 66권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3:4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하셨으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것이 곧 불법이요, 죄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 밖에 사는 사람, 즉 믿지 않는 사람은 요한복음 16:9에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체가 이미 죄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법 안에서 죄가 되는 것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로, 행함으로 지은 죄 곧 육체의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5:10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말씀하신 대로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통해 벌을 받게 되고,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갈 5:19-21).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처음부터 모든 육체의 일을 단번에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 빛 가운데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열심히 기도해 나갈 때 비로소 육체의 일들을 하나하나 버려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버려 나가는 행함이 바로 믿음이요, 신앙생활인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육체의 사람이라 하지 않으시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으로 지은 죄 곧 육신의 일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비록 외관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마음에 품은 온갖 불법도 어두움이며 죄입니다(롬 14:10, 약 4:11-12). 구약 시대에는 행위로 나타난 불법만을 죄라 하였지만, 신약 시대에 와서는 마음에 품은 불법까지 죄가 됩니다.
구약 시대와는 달리, 신약 시대에는 성령을 의지하여 마음에 할례를 받아 가면 능히 마음의 죄까지도 이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마음의 할례를 통해 변화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그 안에 거하므로 마음 중심에서부터 온전한 빛의 행함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빛은 곧 용서와 사랑과 자비,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마음, 또한 모든 것을 선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판단, 정죄, 미움, 시기, 질투 등 이러한 어두움의 것을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지 행하지 않았다 해서 "죄 없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어두움 같지 않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두움인 것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어두움들은 발견하여 벗어 버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뜻 보기에는 어두움이 아닌 것 같지만, 근본이 어두움인 분야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남보다 못한 자신에 대해 낙망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 이러한 모습이 남에게 악을 행하거나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빛에 속한 영적인 사랑은 시기 질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따라서 상대가 잘 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지는 않는다 해도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빛이 될 수 없고 그만큼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랑은 상대가 나보다 더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을 볼 때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로, 진리를 좇는다 했는데 결과를 보니 화평함이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전체의 의견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이끌어 갔는데 그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나 진정 빛을 좇았다면 반드시 화평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평은 자신이 옳다 하더라도 상대에 맞추어 주는 마음이요, 나를 드러내지 않고 누구와도 걸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빛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다고 해도, 결과는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자기 보기에 옳다 여겨지므로 어두움이라고 생각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사람들이 일을 지시하거나 지시를 받는 경우, 일의 결과가 좋으면 자신의 공로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상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을 온전히 버려야 사랑으로 상대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빛에 속한 모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임을 전가하거나 모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탓으로 돌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설령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해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며 "죄 있다" 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죄 없다 할 마음이 아니요, 작은 일에도 스스로 자백할 마음이기 때문에 "죄 없다" 여기시며 축복해 주시지요.
4. 빛 가운데 거하려면 죄를 자백하고 돌이켜야
지금까지 자신이 왜 죄 없다 할 수 없는지 살펴보았는데, 빛으로 비추니 어두움이라고 생각지 못한 분야까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자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로만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돌이킬 때 주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을 만큼 빛 가운데 행한 사람이지만 처음부터 흠 없이 온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마음이 동하여 그녀를 취한 후 이 사실을 은폐하고자 결국은 죄 없는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하는 엄청난 죄까지 짓게 되었지요.
그런데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그의 죄를 지적하시니 즉시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로도 죄에 대한 보응으로 반역한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다니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연단의 시간이 있었지만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다윗 왕의 자백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연단을 통해 흠 없이 빛에 거할 수 있는 온전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 왕의 연단을 통해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사랑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미쁘시다" 한 것은 상대의 단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보시고 허물까지도 사해 주신다는 것을 말하며 "의로우시다"는 것은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는 사람을 어려움 가운데서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변화되는 만큼 더한 축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모든 죄를 마음껏 자백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를 자백하고 돌이키며 진정 빛 앞에 자신을 거짓 없이 비추어서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흠 없고 온전한 빛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9-30
제39과낮에 다니면 실족지 아니하리라
요 11:9-10
읽을말씀 : 요 11:9-10 | 외울말씀 : 요 11:9-10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함으로 실족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범사에 형통함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낮에 다니는 삶의 영적인 의미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가 귀하다는 이유로 무조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책망할 일에는 책망하고 때로 매를 들어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무조건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는 책망도 하시고 징계를 하셔서라도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지요. 그리하여 우리가 밝은 빛 가운데, 곧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행할 때는 낮에 길을 가는 사람과 같아서 실족하는 일이 없이 평탄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1:9-10을 보면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12라는 숫자는 빛의 수로 낮 12시는 가장 밝은 대낮, 즉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지요. 따라서 낮 12시는 영적으로 어둠이 조금도 없는 온전한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빛은 어둠이 전혀 없으신 영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면 낮에 다니는 것과 같이 실족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실족지 않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려면
그러면 빛 가운데 거함으로 실족지 않고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는 삶은 어떠한 것인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구원에 관한 분야
세상에는 부귀영화와 건강이나 가정의 평안 등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누리고 사는 사람도 드물지만 혹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해도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참으로 허무한 일입니다(약 4:14).
이는 누가복음 16:19 이하에 기록된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해 잘 느껴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죽어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비록 이 땅에서 비천한 삶을 살았지만 죽어서는 구원을 받아 영생복락을 누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 가운데 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전도를 하다 보면 예전에는 교회에 다녔는데 다른 사람과 불목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는 줄로 알았지만 참믿음을 가져 빛 가운데 거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니 실족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요.
성경상에서 빛 가운데 거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룬 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환난과 핍박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으며 희생하고 헌신하였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혹 아직도 작은 일에 불평하고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상대가 잘 되면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여 서운한 마음이 틈타지는 않는지요? 비록 작은 것 같지만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을 얽어매는 어두움이 되어 실족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0:22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하신대로 부지런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씻어 날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질병에 관한 분야
우리가 빛 가운데 나오면 구원은 물론,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질병이 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죄로 인함이며, 둘째는 과로한다거나 당연히 지켜야 할 육의 질서를 어기므로 병이 오게 됩니다. 셋째는 신경성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함이며, 넷째는 원수 마귀에 의한 경우입니다. 곧 모든 질병의 원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과의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이같이 행할 때 비로소 이사야 53:5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하신 대로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질병을 치료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병행되어져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믿음의 행함입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감동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귀신들린 딸을 치료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온 이 여인은 자신을 개에 비유하시는 말씀에도 조금도 자존심 상해 하지 않고 더욱 겸비한 모습으로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는 고백을 합니다(막 7:28). 이처럼 겸비한 고백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기에 즉시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빛 가운데 온전히 거하면 늘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는 빛 가운데 거하였기에 120세의 나이에도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사업터, 일터에 관한 분야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타국에 종으로 팔려 갔지만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형통하였던 것을 봅니다(창 39:2-23). 바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었을 때에는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가정 총무로 세움받습니다. 그 후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감옥에서도 낮에 다니므로 실족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셉은 어느 누구도 해석할 수 없던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빛 가운데 정도를 좇았던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그 길이 형통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빛에 거하는 사람은 사업터, 일터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업을 하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환경이나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큼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잠언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행할 때 그 길을 인도받아 실족지 않고 성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령, 가게를 내기 위해 적합한 장소를 놓고 기도했는데, 기도한 후 좋은 장소가 나타나면 이내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이라 단정 짓고 급히 일을 진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들고 생각에 맞기에 진행해 나간 것이므로 오히려 사단이 송사해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가게를 운영할 때 전혀 제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가게를 계약할 때도 설령 첫눈에 내 마음에 들었을지라도 반드시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내 마음에서 돌이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더 좋은 것으로 역사해 주셨지요.
또한 야고보서 1:6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듯이, 믿고 구한 것은 반드시 받은 줄로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하는 대로 주실 것을 믿고 오래 참음으로 인내할 수 있어야 하지요.
사업터, 일터의 문제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보증을 서 달라 한다든지 또는 믿음의 형제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일은 내 유익을 구하는 일이요 상대를 힘들게 하는 어둠의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은 내 유익보다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내가 손해를 본다 해도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으로 변화되었을 때 비로소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가정의 화목을 이루기 위한 분야
빛 가운데 거하면 가정이 화목해지는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은 나를 희생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생명도 줄 수 있으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영적인 사랑이 임하면 가정이 하나 되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여성도님의 예를 들면, 처음 전도받을 당시에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미움의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 "원수까지 사랑하라, 남편을 섬기되 주께 하듯 하라" 등 하나님의 말씀 곧 빛 앞에 자신을 비춰 보니 온갖 어둠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과, 내가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에 비로소 나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발견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기도와 금식으로 비진리를 벗어 나가니 자신을 힘들게 했던 남편이라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내를 지켜보던 남편도 마음을 돌이킴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미움을 사랑으로,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며 강퍅한 마음을 녹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기에 범사에 실족지 않았음은 물론, 그가 이르는 곳마다 축복이 임했습니다. 낮에 다니므로 실족지 않고 오히려 그의 빛으로 인해 지금도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일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오직 빛의 갑옷을 입음으로 범사에 실족함이 없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함으로 실족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범사에 형통함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낮에 다니는 삶의 영적인 의미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가 귀하다는 이유로 무조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책망할 일에는 책망하고 때로 매를 들어서라도 바른 길로 가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무조건 우리의 소원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는 책망도 하시고 징계를 하셔서라도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지요. 그리하여 우리가 밝은 빛 가운데, 곧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행할 때는 낮에 길을 가는 사람과 같아서 실족하는 일이 없이 평탄하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1:9-10을 보면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12라는 숫자는 빛의 수로 낮 12시는 가장 밝은 대낮, 즉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지요. 따라서 낮 12시는 영적으로 어둠이 조금도 없는 온전한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빛은 어둠이 전혀 없으신 영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낮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는다는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면 낮에 다니는 것과 같이 실족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실족지 않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으려면
그러면 빛 가운데 거함으로 실족지 않고 범사에 형통한 복을 받는 삶은 어떠한 것인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구원에 관한 분야
세상에는 부귀영화와 건강이나 가정의 평안 등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누리고 사는 사람도 드물지만 혹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해도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참으로 허무한 일입니다(약 4:14).
이는 누가복음 16:19 이하에 기록된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해 잘 느껴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며 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죽어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비록 이 땅에서 비천한 삶을 살았지만 죽어서는 구원을 받아 영생복락을 누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 가운데 거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전도를 하다 보면 예전에는 교회에 다녔는데 다른 사람과 불목하여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는 줄로 알았지만 참믿음을 가져 빛 가운데 거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니 실족하여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요.
성경상에서 빛 가운데 거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룬 사람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환난과 핍박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으며 희생하고 헌신하였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혹 아직도 작은 일에 불평하고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상대가 잘 되면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여 서운한 마음이 틈타지는 않는지요? 비록 작은 것 같지만 이러한 것들이 여러분을 얽어매는 어두움이 되어 실족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0:22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하신대로 부지런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씻어 날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질병에 관한 분야
우리가 빛 가운데 나오면 구원은 물론,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질병이 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죄로 인함이며, 둘째는 과로한다거나 당연히 지켜야 할 육의 질서를 어기므로 병이 오게 됩니다. 셋째는 신경성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함이며, 넷째는 원수 마귀에 의한 경우입니다. 곧 모든 질병의 원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과의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이같이 행할 때 비로소 이사야 53:5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하신 대로 위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질병을 치료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병행되어져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믿음의 행함입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감동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귀신들린 딸을 치료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온 이 여인은 자신을 개에 비유하시는 말씀에도 조금도 자존심 상해 하지 않고 더욱 겸비한 모습으로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는 고백을 합니다(막 7:28). 이처럼 겸비한 고백은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기에 즉시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빛 가운데 온전히 거하면 늘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했고 온 집에 충성한 모세는 빛 가운데 거하였기에 120세의 나이에도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사업터, 일터에 관한 분야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타국에 종으로 팔려 갔지만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형통하였던 것을 봅니다(창 39:2-23). 바로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었을 때에는 그 성실함을 인정받아 가정 총무로 세움받습니다. 그 후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감옥에서도 낮에 다니므로 실족지 않았습니다.
결국 요셉은 어느 누구도 해석할 수 없던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빛 가운데 정도를 좇았던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그 길이 형통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빛에 거하는 사람은 사업터, 일터에서도 인정과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어떤 어려움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사업을 하는 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성공과 실패는 환경이나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큼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잠언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말씀하신 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행할 때 그 길을 인도받아 실족지 않고 성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령, 가게를 내기 위해 적합한 장소를 놓고 기도했는데, 기도한 후 좋은 장소가 나타나면 이내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이라 단정 짓고 급히 일을 진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들고 생각에 맞기에 진행해 나간 것이므로 오히려 사단이 송사해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가게를 운영할 때 전혀 제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가게를 계약할 때도 설령 첫눈에 내 마음에 들었을지라도 반드시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내 마음에서 돌이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더 좋은 것으로 역사해 주셨지요.
또한 야고보서 1:6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말씀하셨듯이, 믿고 구한 것은 반드시 받은 줄로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하는 대로 주실 것을 믿고 오래 참음으로 인내할 수 있어야 하지요.
사업터, 일터의 문제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보증을 서 달라 한다든지 또는 믿음의 형제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일은 내 유익을 구하는 일이요 상대를 힘들게 하는 어둠의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은 내 유익보다 먼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내가 손해를 본다 해도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마음으로 변화되었을 때 비로소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가정의 화목을 이루기 위한 분야
빛 가운데 거하면 가정이 화목해지는 축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은 나를 희생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 생명도 줄 수 있으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영적인 사랑이 임하면 가정이 하나 되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여성도님의 예를 들면, 처음 전도받을 당시에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미움의 감정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 "원수까지 사랑하라, 남편을 섬기되 주께 하듯 하라" 등 하나님의 말씀 곧 빛 앞에 자신을 비춰 보니 온갖 어둠으로 물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과, 내가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에 비로소 나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발견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기도와 금식으로 비진리를 벗어 나가니 자신을 힘들게 했던 남편이라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내를 지켜보던 남편도 마음을 돌이킴으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미움을 사랑으로, 악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며 강퍅한 마음을 녹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기에 범사에 실족지 않았음은 물론, 그가 이르는 곳마다 축복이 임했습니다. 낮에 다니므로 실족지 않고 오히려 그의 빛으로 인해 지금도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일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오직 빛의 갑옷을 입음으로 범사에 실족함이 없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9-23
제38과빛 가운데 행하라
요일 1:6-7
읽을말씀 : 요일 1:6-7 | 외울말씀 : 요일 1:6-7
교육목표 :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이 있었던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하나님과 믿음의 선진들의 사귐
성경상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졌던 인물로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셨던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나 전쟁에 나가 싸울 때도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묻듯이 일일이 하나님께 여쭈어 행하였지요.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다윗에게 너무나도 자상하고도 상세하게 알려 주셨으므로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삼하 5:19-25).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과 아름다운 사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거대한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때 소년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에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도록 역사하셨고 이로써 전세가 역전되어 이스라엘은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다윗이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마치 부자간에 대소사를 논하듯이 하나님께 의뢰하여 모든 일들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 역시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친히 대면하여 말하였을(출 33:11) 뿐만 아니라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얼굴 뵈옵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모세의 소원을 들어 주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처럼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고 대신 모세를 통해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며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합니다. 또 민수기 12:3을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행했기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다윗이나 모세처럼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신실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는 누구이시고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등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에 지식으로 담아 놓은 것을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거나 보장받을 수도 없으며 기도의 응답도 더디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육적인 충성과 더불어 영적인 충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감으로 의(義)와 인(人)과 신(信)을 이루는 충성"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3:23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의(義)"란 하나님께로 난 의, 즉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을 좇아 순종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인(人)"이란 사람의 삶 속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信)"이란 믿음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 마음의 할례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율법의 더 중한 바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셨으니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는 등 눈에 나타나는 행함도 기본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되 우선이 무엇이며 차선은 무엇인지, 또 내용은 무엇이고 형식은 무엇인지를 밝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말씀했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와 인과 신을 이루는 마음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한 자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2. 할례의 성경적 배경과 마음의 할례
할례란 남자의 성기 끝을 난 지 팔일 만에 잘라내는 의식을 말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하셨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창 17:9-14). 또한 이 할례에 관한 규례를 대대로 지키라고 명하셨으며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셨으니 구원과 직결되는 중요한 규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0:1에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율법"은 구약이며 "장차 오는 것"은 신약,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된 소식을 뜻합니다. 그림자와 참형상은 하나이며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는 것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육적인 할례가 아닌 영적인 할례로서 바로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신 10:16, 30:6, 롬 2:28-29).
그러면 마음의 할례란 무엇이며 어떻게 행하는 것일까요? 예레미야 4:4에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마음 가죽을 베는 것이 곧 마음의 할례입니다. 여기서 마음 가죽을 벤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할례는 육신의 할례와는 달리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또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받아 나가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함에 있어서 먼저는 육체의 일을 벗어내야 합니다. 즉 행함으로 나타나는 모든 죄를 끊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전에는 술과 담배를 했을지라도 이제는 끊어야 하며, 혈기가 많은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으로 나타나는 죄를 벗은 다음에는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 곧 미움, 시기, 질투 등 육신의 일들을 벗어야 합니다.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한 나의 노력과 더불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근본 기(氣) 속에 있는 죄성까지도 모두 빼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육신 자체를 뿌리째 뽑아낼 때 육신의 생각 또한 깨끗이 사라지게 되니 비로소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다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벗어내야 합니다. 자기 보기에 의, 자기적인 틀 등이 여기에 속하지요. 즉 자신이 보기에는 옳다고 여겨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고 악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린 일이 있습니다. 이는 스승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 보기에 옳아도 하나님께서 옳지 않다 하시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 이런 부분까지 철저히 발견하여 벗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3. 빛 가운데 행해야 하는 이유
본문 7절을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만일 내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원한다면 이는 합당치 못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심으로 죄가 사해졌지만 마음의 근본 죄성은 남아 있기 때문에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양심에서조차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마음의 할례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안에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면 상대가 잘 되는 것이나 칭찬받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불편하고 더 나아가서는 상대를 해하고자 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시기심을 빼낸다면 범죄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빛 가운데 살라 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사망의 길에서 나와 축복받는 길이요,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피가 어떻게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6:53-54을 보면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인자의 살"은 곧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요(요 1:1, 14),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피를 마신다는 것은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을 먹으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알아도 정작 마시지 않으면 여전히 갈증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양식삼고 행해 나갈 때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와 영양분으로 소화 흡수되고 모든 죄악들은 찌꺼기로 배설되므로 진리의 사람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기 질투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이러한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바로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심으며 행해 나가면 이 말씀이 영양분으로 흡수되면서 미움이나 시기, 질투의 마음은 찌꺼기로 배설되고 사랑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악들도 이와 같이 마음에서 빼내어 버리면 추한 마음이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이처럼 죄악이 배설물로 배출되고 차츰 영의 사람,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주님과 사귐이 있다 하는 것이요, 이러한 사귐을 통해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피를 마셔 본 사람만이 참생명을 얻어 소망과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을 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며,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역사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 근심 걱정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며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이 있었던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게 한다.
1. 하나님과 믿음의 선진들의 사귐
성경상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을 가졌던 인물로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셨던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나 전쟁에 나가 싸울 때도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묻듯이 일일이 하나님께 여쭈어 행하였지요.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다윗에게 너무나도 자상하고도 상세하게 알려 주셨으므로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삼하 5:19-25).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과 아름다운 사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거대한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때 소년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에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도록 역사하셨고 이로써 전세가 역전되어 이스라엘은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다윗이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마치 부자간에 대소사를 논하듯이 하나님께 의뢰하여 모든 일들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 역시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친히 대면하여 말하였을(출 33:11) 뿐만 아니라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얼굴 뵈옵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모세의 소원을 들어 주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처럼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고 대신 모세를 통해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며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합니다. 또 민수기 12:3을 보면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큰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행했기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다윗이나 모세처럼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신실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는 누구이시고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등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에 지식으로 담아 놓은 것을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내리거나 보장받을 수도 없으며 기도의 응답도 더디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육적인 충성과 더불어 영적인 충성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충성이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감으로 의(義)와 인(人)과 신(信)을 이루는 충성"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3:23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의(義)"란 하나님께로 난 의, 즉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을 좇아 순종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인(人)"이란 사람의 삶 속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며 "신(信)"이란 믿음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 마음의 할례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율법의 더 중한 바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셨으니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는 등 눈에 나타나는 행함도 기본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되 우선이 무엇이며 차선은 무엇인지, 또 내용은 무엇이고 형식은 무엇인지를 밝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말씀했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과 사귐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와 인과 신을 이루는 마음의 할례를 통해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한 자리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2. 할례의 성경적 배경과 마음의 할례
할례란 남자의 성기 끝을 난 지 팔일 만에 잘라내는 의식을 말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하셨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창 17:9-14). 또한 이 할례에 관한 규례를 대대로 지키라고 명하셨으며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셨으니 구원과 직결되는 중요한 규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0:1에 보면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율법"은 구약이며 "장차 오는 것"은 신약,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된 소식을 뜻합니다. 그림자와 참형상은 하나이며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된다는 것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육적인 할례가 아닌 영적인 할례로서 바로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신 10:16, 30:6, 롬 2:28-29).
그러면 마음의 할례란 무엇이며 어떻게 행하는 것일까요? 예레미야 4:4에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마음 가죽을 베는 것이 곧 마음의 할례입니다. 여기서 마음 가죽을 벤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할례는 육신의 할례와는 달리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또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계속해서 받아 나가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함에 있어서 먼저는 육체의 일을 벗어내야 합니다. 즉 행함으로 나타나는 모든 죄를 끊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전에는 술과 담배를 했을지라도 이제는 끊어야 하며, 혈기가 많은 사람은 혈기를 버리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으로 나타나는 죄를 벗은 다음에는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 곧 미움, 시기, 질투 등 육신의 일들을 벗어야 합니다. 불같은 기도와 금식을 통한 나의 노력과 더불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근본 기(氣) 속에 있는 죄성까지도 모두 빼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육신 자체를 뿌리째 뽑아낼 때 육신의 생각 또한 깨끗이 사라지게 되니 비로소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다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벗어내야 합니다. 자기 보기에 의, 자기적인 틀 등이 여기에 속하지요. 즉 자신이 보기에는 옳다고 여겨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고 악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린 일이 있습니다. 이는 스승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지 않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 보기에 옳아도 하나님께서 옳지 않다 하시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 이런 부분까지 철저히 발견하여 벗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3. 빛 가운데 행해야 하는 이유
본문 7절을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만일 내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원한다면 이는 합당치 못한 모습이지요.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음받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심으로 죄가 사해졌지만 마음의 근본 죄성은 남아 있기 때문에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양심에서조차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마음의 할례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안에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면 상대가 잘 되는 것이나 칭찬받는 것을 볼 때 마음이 불편하고 더 나아가서는 상대를 해하고자 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 시기심을 빼낸다면 범죄할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빛 가운데 살라 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사망의 길에서 나와 축복받는 길이요, 행복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피가 어떻게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6:53-54을 보면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인자의 살"은 곧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요(요 1:1, 14), "인자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피를 마신다는 것은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을 먹으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사실을 알아도 정작 마시지 않으면 여전히 갈증이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양식삼고 행해 나갈 때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와 영양분으로 소화 흡수되고 모든 죄악들은 찌꺼기로 배설되므로 진리의 사람이 되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기 질투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이러한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바로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심으며 행해 나가면 이 말씀이 영양분으로 흡수되면서 미움이나 시기, 질투의 마음은 찌꺼기로 배설되고 사랑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악들도 이와 같이 마음에서 빼내어 버리면 추한 마음이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이처럼 죄악이 배설물로 배출되고 차츰 영의 사람,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주님과 사귐이 있다 하는 것이요, 이러한 사귐을 통해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피를 마셔 본 사람만이 참생명을 얻어 소망과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을 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며,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역사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염려 근심 걱정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며 빛 가운데 행하심으로 믿음의 선진들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복된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9-16
제37과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읽을말씀 : | 외울말씀 :
교육목표 :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연휴를 지내는 것이 가장 합당할까요? 가족과 함께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실 수 있다면 참으로 축복된 가정이지요.
1. 추석의 유래 및 성경적 이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중에 하나인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다른 말로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즉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길쌈"이란 실을 짜는 일을 말합니다. 신라 유리왕 때 한가위 한 달 전에 베 짜는 여자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베를 짜서 한 달 뒤인 한가윗날 그동안 베를 짠 양을 가지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은 것에서 "가배"라는 말이 나왔는데 후에 "가위"라는 말로 변했습니다.
이처럼 신라시대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농사한 햇곡식과 햇과일을 추수하여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추수에 대한 감사절기로 초실절(맥추감사절)과 수장절(추수감사절)을 주셔서 지키게 하신 것처럼 추석은 우리 민족에게 주신 추수감사의 절기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2. 추석 명절 감사예배 순서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은혜 가운데 풍성한 수확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시겠습니다.
묵상기도 : 다같이
기 원 :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아멘 -
찬 송 : 460장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기 도 : 가족 중에서
(예 문)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날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각종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저희 온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가 오늘 이 아침에 함께 모여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지난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했던 모습들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보혈로써 사해 주옵시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추석 명절의 의미를 잘 알아서 더욱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게 하옵시고,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행복한 시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희 모든 가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모든 가족들도 기억하여 주옵시고 늘 주님의 품 안에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모든 시간도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추석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믿고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
성경봉독 : 민 6:24-26 : 인도자
설 교 : 설교자
기 도 : 설교자
찬 송 : 다같이
주기도문 : 다같이
3. 설교 예문
본 문 : 민수기 6 : 24-26 ( 제목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역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날마다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1)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24절)
먼저, 지켜 주시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오늘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오늘 우리 가족은 이렇게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25절)
다음으로,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소년이 되어서는 스승님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한 이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곧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환난과 재앙 많은 세상에서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6절)
마지막으로, 평강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오늘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이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온 가족들을 평강 가운데 지켜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변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추석이면 으레 음식과 과일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도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해의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을 가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동안은 진리를 몰랐기에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였으나,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서 오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형제간에 화목하고 우애 있게 지내며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를 다하는 자녀가 되며 온 가족이 주 하나님을 잘 섬겨 복받는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가족은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연휴를 지내는 것이 가장 합당할까요? 가족과 함께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실 수 있다면 참으로 축복된 가정이지요.
1. 추석의 유래 및 성경적 이해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 중에 하나인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다른 말로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한"이라는 말은 "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즉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길쌈"이란 실을 짜는 일을 말합니다. 신라 유리왕 때 한가위 한 달 전에 베 짜는 여자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베를 짜서 한 달 뒤인 한가윗날 그동안 베를 짠 양을 가지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은 것에서 "가배"라는 말이 나왔는데 후에 "가위"라는 말로 변했습니다.
이처럼 신라시대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농사한 햇곡식과 햇과일을 추수하여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다고 해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추수에 대한 감사절기로 초실절(맥추감사절)과 수장절(추수감사절)을 주셔서 지키게 하신 것처럼 추석은 우리 민족에게 주신 추수감사의 절기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2. 추석 명절 감사예배 순서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한 해 동안 은혜 가운데 풍성한 수확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마음을 모아 예배드리시겠습니다.
묵상기도 : 다같이
기 원 : 인도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아멘 -
찬 송 : 460장 : 다같이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기 도 : 가족 중에서
(예 문)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지난 날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전쟁과 기근, 그리고 각종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저희 온 가족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가 오늘 이 아침에 함께 모여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지난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했던 모습들을 회개하오니 주님의 보혈로써 사해 주옵시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추석 명절의 의미를 잘 알아서 더욱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게 하옵시고,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행복한 시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저희 모든 가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모든 가족들도 기억하여 주옵시고 늘 주님의 품 안에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이후의 모든 시간도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추석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믿고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
성경봉독 : 민 6:24-26 : 인도자
설 교 : 설교자
기 도 : 설교자
찬 송 : 다같이
주기도문 : 다같이
3. 설교 예문
본 문 : 민수기 6 : 24-26 ( 제목 : 하나님의 축복된 가정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오늘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축복하기 원하시는지를 알려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고 있던 광야는 척박하고 위험한 땅으로,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마실 물도 찾기 어렵고 먹을 열매나 곡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독이 있는 불뱀이나 전갈 같은 것들이 도처에 있었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역시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처에 기근과 전쟁, 천재지변으로 인한 각종 사고 등이 일어나며 날마다 혼란이 더해 가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마음 편히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1)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24절)
먼저, 지켜 주시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셨듯이 오늘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가정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셔야 건강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질도 지켜 주셔야 생활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과 직장, 사업터, 일터, 온 가족을 지켜 주셔야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 속담에 "지키는 열 사람의 파수꾼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오늘 우리 가족은 이렇게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25절)
다음으로,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보살피는 은혜 속에 성장하고 소년이 되어서는 스승님의 은혜 속에 성장을 합니다. 그런데 인생 전반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한 이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 곧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환난과 재앙 많은 세상에서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6절)
마지막으로, 평강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편히 쉴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오늘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의 참된 평강은 오직 주 안에서만이 가능합니다. 평강이란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온 가족들을 평강 가운데 지켜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변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추석이면 으레 음식과 과일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조상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감사로 제사를 드려야 할 분은 한 해 동안도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해의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은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기독교는 이 땅에서 주님을 믿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후에는 그 영혼이 천국을 가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동안은 진리를 몰랐기에 죽은 사람을 위해 제사하였으나, 이제는 진리를 바로 알아서 오직 우리를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축복해 주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형제간에 화목하고 우애 있게 지내며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를 다하는 자녀가 되며 온 가족이 주 하나님을 잘 섬겨 복받는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가족은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한 해 동안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히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9-09
제36과육신의 일과 영의 일
롬 8:5-6
읽을말씀 : 롬 8:5-6 | 외울말씀 : 롬 8:5-6
교육목표 :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 육신의 일을 벗고 영을 좇아 빛으로 나옴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므로 우리가 어두움을 버리고 빛으로 들어가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도록 인도하십니다. 빛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생각으로 인해 죄를 지어 어두움에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진리를 행함으로 빛 가운데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로마서 8:5-6에 육신을 좇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함으로 죄를 짓고 결국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영을 좇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우선 "육신"이란 영적으로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죄성과 우리의 몸이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몸"의 사전적인 의미는 "몸뚱이, 신체, 살" 등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몸"이란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에게 심어 주신 영의 지식 곧 생명의 지식이 사라져 버리고 남은 껍질 그 자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콜라가 담긴 컵을 "육신"이라고 한다면 콜라를 제외한 컵만 따로 볼 때는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몸"이라는 컵 안에 원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지식들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죄성이 들어가서 컵 곧 몸과 결합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의 몸이 육신이 되었을까요? 아담의 불순종 이후 그 후손인 인류는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하며 태어나서 세상에서 사는 동안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비진리를 행하면서 지어 가는 죄를 자범죄라고 합니다. 즉 진리가 빠져 나가 버린 사람의 몸에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죄성이 결합되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25을 통하여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백한 대로 육신은 죄 곧 세상과 불의를 좇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육신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어둠에 거하여 결국 영원한 사망인 지옥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육신의 일"이란 아직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비진리의 속성들을 각각 분해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즉 몸과 죄가 결합된 것이 육신이라면, 그 죄성들을 낱낱이 분해해 놓은 것이 육신의 일인 것입니다. 미움, 거짓, 음욕, 교만 등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육신의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움이나 간음 등이 마음 속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하지는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죄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일들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난 것이 곧 육체의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일들을 총칭해서 육체라고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육"이란 영적으로 썩어지고 없어지며 변질되고 추하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즉 육체와 육신,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을 다 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육에 속한 육신의 일, 육체의 일이 있다면 이는 곧 어두움에 거하는 것이므로 어두움의 권세자인 원수 마귀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육과 반대인 "영"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 깨끗한 것, 온전한 것, 참이요 진리이며 생명 자체를 말합니다. 여기서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성령으로 영을 낳아(요 3:6) 성령의 열매가 하나하나 맺히게 됩니다(갈 5:22-23).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영으로 일구어졌는가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치가 됩니다. 가령, 성령의 열매가 10% 맺혀 있다면 10%만큼 내 마음이 변치 않는 영으로 일구어진 것이고, 50% 맺혀 있다면 50%만큼 영으로 일구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영의 일"이란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행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와 전도, 구제, 선행, 봉사 등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영의 일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히면 맺힐수록 영의 일을 더 생각하게 되고 영의 일을 생각하므로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좇는지, 아니면 영을 좇는지를 알려면 행함을 통해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 이유 없이 오른뺨을 때렸을 때 영을 좇는 사람은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왼뺨도 돌려 댑니다. 또한 자신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슬퍼하거나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영을 좇는 사람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과 같이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으며 빛 가운데 행하니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엡 5:9).
2.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의 차이점
1) 하나님을 믿고 만나는 분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후에도 범사에 응답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려면 항상 영을 좇아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좇는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구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도 막상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어둠과 짝하므로 하나님의 지킴을 받지 못하니 시험 환난에 빠지거나 각종 어려움을 만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지요.
반면에 영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대로 천군 천사로,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행하면서 영혼이 점점 잘되어 가니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질병에 관한 분야
질병에 걸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다 병균에 감염되었거나 몸에 무리를 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등 외부적인 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치료 방법도 병원이나 약을 의존하게 되지요. 그런데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렸을 때 세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얻어 나갑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질병은 죄로 인해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질병에 걸렸다면 스스로 돌아보아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물론 질병의 원인에는 죄뿐만 아니라 과식, 무절제, 신경성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한 경우도 있고 원수 마귀가 질병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면 놀라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경을 보면 히스기야 왕은 중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세상 의원에게 의존한 결과 치료받지 못하고 죽고 말았지요.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 사업에 관한 분야
사업을 하는 대부분의 경영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만 영을 좇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 기록된 말씀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 나갑니다. 또한 당장의 손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과연 진리에 맞는 일인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인가?"를 살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슨 결정을 내릴 때는 자기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여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 나갑니다(잠 16:3). 따라서 앞일을 예지하시는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아 나가게 되니 매사에 실수가 없고 형통한 길로 인도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업에 형통함을 입으려면 무엇보다도 불같이 기도하여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영의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성령의 밝은 음성과 인도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입는 방법
첫째, 기도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되고 영의 생각만을 좇게 되어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갈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즉시 돌이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서는 행함으로 산 믿음을 내보여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회개의 역사를 통해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만일 육을 좇았다면 그만큼 하나님과 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힘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불같은 기도를 통해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죄의 담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마음에 평안이 임하게 되며 성령의 불로 죄성을 태움받아 영의 일을 좇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을 좇아 빛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질병이 치료되고 사업터, 일터에 축복이 임하게 되며 불화했던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또한 야고보서 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성경 66권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들이 임하게 됩니다. 즉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아니하며, 머리 되는 축복,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마다 응답받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8:7-8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을 밝히 구분하여 아직 남아 있는 육신의 일을 버리고 항상 영의 일을 생각하며 오직 진리대로 행함으로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며 만사형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 육신의 일을 벗고 영을 좇아 빛으로 나옴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므로 우리가 어두움을 버리고 빛으로 들어가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도록 인도하십니다. 빛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생각으로 인해 죄를 지어 어두움에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진리를 행함으로 빛 가운데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로마서 8:5-6에 육신을 좇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함으로 죄를 짓고 결국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영을 좇는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우선 "육신"이란 영적으로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죄성과 우리의 몸이 결합된 것을 말합니다. "몸"의 사전적인 의미는 "몸뚱이, 신체, 살" 등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의미의 "몸"이란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에게 심어 주신 영의 지식 곧 생명의 지식이 사라져 버리고 남은 껍질 그 자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콜라가 담긴 컵을 "육신"이라고 한다면 콜라를 제외한 컵만 따로 볼 때는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몸"이라는 컵 안에 원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지식들이 들어 있었는데 지금은 죄성이 들어가서 컵 곧 몸과 결합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의 몸이 육신이 되었을까요? 아담의 불순종 이후 그 후손인 인류는 유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를 원죄라 하며 태어나서 세상에서 사는 동안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비진리를 행하면서 지어 가는 죄를 자범죄라고 합니다. 즉 진리가 빠져 나가 버린 사람의 몸에 원수 마귀를 통해 들어온 죄성이 결합되어 육신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25을 통하여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백한 대로 육신은 죄 곧 세상과 불의를 좇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육신을 좇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어둠에 거하여 결국 영원한 사망인 지옥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육신의 일"이란 아직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행함으로 유발될 수 있는 비진리의 속성들을 각각 분해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즉 몸과 죄가 결합된 것이 육신이라면, 그 죄성들을 낱낱이 분해해 놓은 것이 육신의 일인 것입니다. 미움, 거짓, 음욕, 교만 등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육신의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움이나 간음 등이 마음 속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하지는 않으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죄로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일들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난 것이 곧 육체의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5:19-21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일들을 총칭해서 육체라고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육"이란 영적으로 썩어지고 없어지며 변질되고 추하고 더러운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즉 육체와 육신,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을 다 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육에 속한 육신의 일, 육체의 일이 있다면 이는 곧 어두움에 거하는 것이므로 어두움의 권세자인 원수 마귀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육과 반대인 "영"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변하지 않는 것, 영원한 것, 깨끗한 것, 온전한 것, 참이요 진리이며 생명 자체를 말합니다. 여기서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성령으로 영을 낳아(요 3:6) 성령의 열매가 하나하나 맺히게 됩니다(갈 5:22-23).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영으로 일구어졌는가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치가 됩니다. 가령, 성령의 열매가 10% 맺혀 있다면 10%만큼 내 마음이 변치 않는 영으로 일구어진 것이고, 50% 맺혀 있다면 50%만큼 영으로 일구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영의 일"이란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셔서 행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와 전도, 구제, 선행, 봉사 등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영의 일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히면 맺힐수록 영의 일을 더 생각하게 되고 영의 일을 생각하므로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을 좇는지, 아니면 영을 좇는지를 알려면 행함을 통해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 이유 없이 오른뺨을 때렸을 때 영을 좇는 사람은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왼뺨도 돌려 댑니다. 또한 자신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슬퍼하거나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영을 좇는 사람은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과 같이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으며 빛 가운데 행하니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며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아름다운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엡 5:9).
2.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의 차이점
1) 하나님을 믿고 만나는 분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러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후에도 범사에 응답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려면 항상 영을 좇아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좇는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구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도 막상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어둠과 짝하므로 하나님의 지킴을 받지 못하니 시험 환난에 빠지거나 각종 어려움을 만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지요.
반면에 영을 좇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대로 천군 천사로,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또한 말씀을 듣고 행하면서 영혼이 점점 잘되어 가니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질병에 관한 분야
질병에 걸렸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쩌다 병균에 감염되었거나 몸에 무리를 한 탓이라고 생각하는 등 외부적인 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치료 방법도 병원이나 약을 의존하게 되지요. 그런데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렸을 때 세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답을 얻어 나갑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질병은 죄로 인해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질병에 걸렸다면 스스로 돌아보아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물론 질병의 원인에는 죄뿐만 아니라 과식, 무절제, 신경성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한 경우도 있고 원수 마귀가 질병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헐면 놀라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경을 보면 히스기야 왕은 중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세상 의원에게 의존한 결과 치료받지 못하고 죽고 말았지요.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3) 사업에 관한 분야
사업을 하는 대부분의 경영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만 영을 좇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 기록된 말씀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 나갑니다. 또한 당장의 손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과연 진리에 맞는 일인가,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인가?"를 살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슨 결정을 내릴 때는 자기 생각과 이론을 동원하여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 나갑니다(잠 16:3). 따라서 앞일을 예지하시는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받아 나가게 되니 매사에 실수가 없고 형통한 길로 인도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업에 형통함을 입으려면 무엇보다도 불같이 기도하여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영의 생각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성령의 밝은 음성과 인도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입는 방법
첫째, 기도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하면서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되고 영의 생각만을 좇게 되어 성령으로 영을 낳아 갈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즉시 돌이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서는 행함으로 산 믿음을 내보여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회개의 역사를 통해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만일 육을 좇았다면 그만큼 하나님과 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힘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불같은 기도를 통해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죄의 담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마음에 평안이 임하게 되며 성령의 불로 죄성을 태움받아 영의 일을 좇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을 좇아 빛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질병이 치료되고 사업터, 일터에 축복이 임하게 되며 불화했던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또한 야고보서 1:17에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성경 66권에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말씀들이 임하게 됩니다. 즉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꾸어 줄지언정 꾸지 아니하며, 머리 되는 축복,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마다 응답받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8:7-8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을 밝히 구분하여 아직 남아 있는 육신의 일을 버리고 항상 영의 일을 생각하며 오직 진리대로 행함으로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며 만사형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05-09-02
제35과하나님은 빛이시라
요일 1:5
읽을말씀 : 요일 1:5 | 외울말씀 : 요일 1:5
교육목표 : 빛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항상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1. 빛의 영적인 의미
하나님께서는 질병이나 사업터, 가정이나 자녀의 문제든 해결하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각종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이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으니 빛을 따라 나오기만 하면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빛은 영적으로 어두움이 전혀 없는 영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빛 자체가 되시고 빛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는 그림자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야고보서 1:17을 보면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빛이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최고의 완벽함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통해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땅에 보여지는 것으로 나타내 주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빛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2. 믿음, 선(善), 의(義), 영(靈), 빛과의 관계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영생에 이를 수 있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신앙 안에서의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입니다. 육적인 믿음은 단지 말씀을 들어서 아는 지식적인 믿음으로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믿음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을 말씀 그대로 믿는 믿음으로서 산 믿음, 즉 행함이 따르는 참믿음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아담의 범죄 이후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즉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으로서 모든 악의 모양들을 벗어 버리고 오직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선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의입니다. 의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을 좇아 순종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 생각이나 경험, 내 지식에 맞지 아니해도 진리를 좇아 오직 "아멘" 하고 순종하며 변함없이 의를 행해 나가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용서하라 하신 말씀에 은혜를 받아 열심히 용서해 나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는 상황을 만나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내 안에 변하는 속성, 곧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으니 끝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의를 이룬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의 행함이 변함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 바로 "영"입니다. 영이란 성경 안에서의 의미로서 단순히 영, 혼, 육의 구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즉 육의 반대적인 의미로서 썩지 않는 것, 변치 않는 것, 영원한 것, 깨끗한 것, 온전한 것, 진리, 부활, 소망과 사랑, 생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육을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로마서 5:18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의의 행동은 바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의가 사랑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결정체로 나오게 된 것을 영이라 하며,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에 변함없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의 모습이 모든 분야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 이를 가리켜 온 영이라고 말합니다(살전 5:23).
우리가 온 영을 이루게 되면 이때는 행하는 것마다 빛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영이 내면적인 속성을 표현한 것이라면 빛은 내면적인 것이 밖으로 나타났을 때의 속성을 표현해 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 자체를 가리켜 "태양"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우리가 보는 것은 태양빛인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했고, 본문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신 온전한 영으로서 우리에게 빛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이 빛으로 나타나는 과정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온 영의 단계에 이르러야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그 단계에 맞는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빛은 과연 각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착함이란 곧 선을, 의로움은 선의 기준이 되는 의를, 진실함은 곧 변함없는 영을 말합니다. 그러니 빛의 열매에는 반드시 선이 나타나되 의의 행함이 변함없는 영의 모습으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 영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사람에 맞는 선의 단계의 모습이 의의 행함을 통해 나오게 되지만, 육이 있는 만큼 상황에 따라 변할 여지가 있는 것이지요. 즉 '믿습니다' 하고 백 사람이 고백한다고 해도 각 사람의 선이 다르고 의가 다르며, 영이 다르고 빛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단계에 이르면 이때는 상대를 감동시킬 만한 선이 변함없는 의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고, 온 영으로 이루게 되면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선의 마음으로 믿음과 순종과 행함의 의를 변함없이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사람들에게는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어두움을 떠나 빛 가운데로 나와야
이와 같이 빛에 속한 것들이 있는 반면에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에 속한 것들도 있습니다. 어두움은 한 마디로 죄에 속한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육체의 일과 육신의 일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는 의로 여기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인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등의 육신의 일과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 등과 같은 육체의 일들은 듣기만 해도 어두움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자기 보기에는 의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스스로 어두움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빛 앞에는 조금의 어두움도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빛으로 비추면 반드시 어두움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잡히시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만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마 16:21-23). 이는 베드로 편에서는 스승을 위하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어두움이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스스로는 어두움이라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빛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므로 빛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고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이 비추이는 곳에는 어두움인 죄가 떠나고 죄가 떠나면 어려운 문제들이 사라지며 빛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을 떠나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12:46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말씀하셨으니 빛으로 오신 주님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빛 가운데 나올 수 있습니다.
5. 빛 가운데 거하면 응답과 축복
그러면 빛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어둠에 거하면서 어둠을 더 사랑하고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요 3:19-20). 세상의 쾌락과 물질, 자기 유익을 좇아 살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진리와 선을 좇으라는 빛의 말씀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생각에 가려서 오해됨으로 인해 빛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착하게 살면 그만이지 왜 꼭 교회에 나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신은 인정하지만 왜 우리가 죄인이며 또 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실족당해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거짓되고 가식적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사람만이 참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요, 믿는다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도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둠에 거하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 문을 닫으며 영생의 길로 나오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본이 되는 빛의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빛으로 인도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왔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질병이 떠나지 않고 사업터의 문제, 가정의 문제 등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약속하셨고, 또한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말씀하셨는데(마 9:29) 왜 응답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빛 가운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나오는 것과 빛에 거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빛으로 나왔다 해도 다시 어두움으로 되돌아간다면 이는 결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미워하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그 마음을 잠시 돌이켰다가 다시 예전처럼 미워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빛에 거한다 해도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빛으로 더 가까이 나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빛에 거하여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을 수 있습니다(요일 3:21-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니 믿음으로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함으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은 물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빛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항상 빛 가운데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게 한다.
1. 빛의 영적인 의미
하나님께서는 질병이나 사업터, 가정이나 자녀의 문제든 해결하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각종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이것이 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했으니 빛을 따라 나오기만 하면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빛은 영적으로 어두움이 전혀 없는 영원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또한 빛 자체가 되시고 빛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는 그림자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야고보서 1:17을 보면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빛이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최고의 완벽함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통해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 땅에 보여지는 것으로 나타내 주어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빛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2. 믿음, 선(善), 의(義), 영(靈), 빛과의 관계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영생에 이를 수 있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신앙 안에서의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로 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입니다. 육적인 믿음은 단지 말씀을 들어서 아는 지식적인 믿음으로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말합니다. 반면에, 영적인 믿음은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을 말씀 그대로 믿는 믿음으로서 산 믿음, 즉 행함이 따르는 참믿음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여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아담의 범죄 이후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즉 선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으로서 모든 악의 모양들을 벗어 버리고 오직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선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의입니다. 의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며 믿음을 좇아 순종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 생각이나 경험, 내 지식에 맞지 아니해도 진리를 좇아 오직 "아멘" 하고 순종하며 변함없이 의를 행해 나가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용서하라 하신 말씀에 은혜를 받아 열심히 용서해 나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유익에 맞지 않는 상황을 만나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내 안에 변하는 속성, 곧 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으니 끝까지 용서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의를 이룬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의 행함이 변함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 바로 "영"입니다. 영이란 성경 안에서의 의미로서 단순히 영, 혼, 육의 구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즉 육의 반대적인 의미로서 썩지 않는 것, 변치 않는 것, 영원한 것, 깨끗한 것, 온전한 것, 진리, 부활, 소망과 사랑, 생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육을 벗어 버리고 영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로마서 5:18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의의 행동은 바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의가 사랑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결정체로 나오게 된 것을 영이라 하며,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행하는 것에 변함없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의 모습이 모든 분야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 이를 가리켜 온 영이라고 말합니다(살전 5:23).
우리가 온 영을 이루게 되면 이때는 행하는 것마다 빛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영이 내면적인 속성을 표현한 것이라면 빛은 내면적인 것이 밖으로 나타났을 때의 속성을 표현해 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 자체를 가리켜 "태양"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우리가 보는 것은 태양빛인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4:24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했고, 본문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신 온전한 영으로서 우리에게 빛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이 빛으로 나타나는 과정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온 영의 단계에 이르러야만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초신자라 할지라도 그 단계에 맞는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빛은 과연 각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5:9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착함이란 곧 선을, 의로움은 선의 기준이 되는 의를, 진실함은 곧 변함없는 영을 말합니다. 그러니 빛의 열매에는 반드시 선이 나타나되 의의 행함이 변함없는 영의 모습으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 영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사람에 맞는 선의 단계의 모습이 의의 행함을 통해 나오게 되지만, 육이 있는 만큼 상황에 따라 변할 여지가 있는 것이지요. 즉 '믿습니다' 하고 백 사람이 고백한다고 해도 각 사람의 선이 다르고 의가 다르며, 영이 다르고 빛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단계에 이르면 이때는 상대를 감동시킬 만한 선이 변함없는 의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고, 온 영으로 이루게 되면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선의 마음으로 믿음과 순종과 행함의 의를 변함없이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사람들에게는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4. 어두움을 떠나 빛 가운데로 나와야
이와 같이 빛에 속한 것들이 있는 반면에 빛과 반대되는 어두움에 속한 것들도 있습니다. 어두움은 한 마디로 죄에 속한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육체의 일과 육신의 일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는 의로 여기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인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등의 육신의 일과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 등과 같은 육체의 일들은 듣기만 해도 어두움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자기 보기에는 의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스스로 어두움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빛 앞에는 조금의 어두움도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빛으로 비추면 반드시 어두움이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잡히시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만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마 16:21-23). 이는 베드로 편에서는 스승을 위하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어두움이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스스로는 어두움이라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빛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므로 빛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고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이 비추이는 곳에는 어두움인 죄가 떠나고 죄가 떠나면 어려운 문제들이 사라지며 빛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두움을 떠나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12:46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말씀하셨으니 빛으로 오신 주님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빛 가운데 나올 수 있습니다.
5. 빛 가운데 거하면 응답과 축복
그러면 빛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어둠에 거하면서 어둠을 더 사랑하고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요 3:19-20). 세상의 쾌락과 물질, 자기 유익을 좇아 살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진리와 선을 좇으라는 빛의 말씀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생각에 가려서 오해됨으로 인해 빛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착하게 살면 그만이지 왜 꼭 교회에 나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신은 인정하지만 왜 우리가 죄인이며 또 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고 실족당해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거짓되고 가식적이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사람만이 참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요, 믿는다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도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둠에 거하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 문을 닫으며 영생의 길로 나오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본이 되는 빛의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빛으로 인도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왔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질병이 떠나지 않고 사업터의 문제, 가정의 문제 등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약속하셨고, 또한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말씀하셨는데(마 9:29) 왜 응답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는 빛 가운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나오는 것과 빛에 거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빛으로 나왔다 해도 다시 어두움으로 되돌아간다면 이는 결코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미워하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그 마음을 잠시 돌이켰다가 다시 예전처럼 미워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빛에 거한다 해도 온전한 빛의 차원에 이를 때까지 끊임없이 빛으로 더 가까이 나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온전히 빛에 거하여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을 수 있습니다(요일 3:21-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니 믿음으로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함으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은 물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아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