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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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21
제47과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
고전 13:5
읽을말씀 : 고전 13:5 | 외울말씀 : 눅 6:45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하여 버림으로 영적인 참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잘사는 친구를 볼 때 시기, 질투가 나고 괜히 뽐내는 것 같아 밉기도 하고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그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친다면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볼 때 하나님 뜻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에 위배되는 악한 생각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경우
첫째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말다툼을 했습니다. 상대가 미운 나머지 ‘가다가 콱 걸려 넘어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사이가 나쁘던 이웃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은근히 ‘잘됐다.’, ‘참 고소하다.’, ‘그럴 줄 알았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은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내심 ‘시험을 못 봤으면’ 바랍니다.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결코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요. 내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항상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마음 안에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며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의 험담에 귀가 솔깃해진다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헐뜯는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으며 당장 나무랄 것입니다. 혹여 상대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사실을 알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데도 남의 말이 궁금하고 솔깃해진다면 대개 험담하고 수군수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합니다. 또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남이 잘될 때 시기,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대가 잘되고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성도가 크리스천으로서 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습니까?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안 좋게 생각합니다. 좀 더 선하다면 ‘왜 저런 곳에 갈까?’ 의아해하다가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좋은 쪽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악한 생각 자체가 들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듣는다 해도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지요.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으로서 판단하시기에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악입니다. 설령 상대가 잘못했을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릴 길을 생각하지요.
영적인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할 뿐 아니라 상대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른길로 가도록 진리를 알려 주고 변화되도록 감동을 줍니다. 허물 많은 사람도 사랑하기에 어찌하든 믿어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하지요. 이처럼 판단 정죄하는 생각 자체가 없어야 누구를 만나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모든 생각입니다.
단순히 상대방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나 악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양심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은 다 악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그러면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악’은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와 같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 열매입니다. 뿌리가 있으므로 줄기와 잎, 열매가 나오듯이 죄는 악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즉 악은 땅속 깊숙이 자리 잡은 뿌리와 같이 마음 안의 ‘속성’입니다. 이 악이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했습니다(눅 6:45).
어떤 사람이 욕을 하며 가시 돋친 말과 함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있는 미움이라는 악이 ‘욕’이나 ‘가시 돋친 말’, ‘폭력’이라는 행함 곧 죄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악이 있다고 반드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교양이 있거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절제한다면 죄를 짓지는 않지요.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 속의 악까지 다 버려야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압축하면 ‘사랑’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죄입니다.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만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악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설령 보거나 들어도 떠올리거나 되새기려 하지 말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 마음먹은 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집요하게 떠오를 때도 있지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기도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시지요. 일부러 보고 듣고 떠올리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하며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악한 일에 결코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이서 1장 10~11절에 보면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했습니다. 철저히 악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지요.
사람은 타고난 죄성과 성장하면서 보고 들은 비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죄성과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죄성과 비진리를 버리는 데에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보다 비진리가 더 익숙하고, 비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버리기는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악은 무익합니다. 우리가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뿐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에게 질병이 오거나 사고를 겪고 가난과 가정불화로 근심 속에 살아가는 등 이런저런 문제들도 결국 자신이 심은 악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을 미워하면서 자신의 영혼에 두 가지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선한 생각,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행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을 수 있지요. 또한 기도하면서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곱씹어볼 때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에 마음의 악을 버릴 수 있지요. 이처럼 말씀과 기도로 신속히 악을 버림으로 마음에 평안을 얻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① 상대가 (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② 상대를 ( ) ( )하는 생각이다.
③ 하나님 ( )에 ( )되는 모든 생각이다.
2.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3.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본성에는 저마다 부모의 기를 통해 받은 악이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다가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드러나게 된다.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장 안 넘을 사람없다”는 속담처럼 온전히 성결을 이루기 전에는 극한 상황에 몰리면 평소 자신도 모르는 악이 드러나는 것이다.
파리 똥이 아무리 작아도 똥인 것처럼 설령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흠도 티도 없으신 온전한 하나님에 비할 때 온전하지 않은 것이 다 악의 모양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신 것이다.
교육목표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하여 버림으로 영적인 참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잘사는 친구를 볼 때 시기, 질투가 나고 괜히 뽐내는 것 같아 밉기도 하고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그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친다면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볼 때 하나님 뜻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에 위배되는 악한 생각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경우
첫째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말다툼을 했습니다. 상대가 미운 나머지 ‘가다가 콱 걸려 넘어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사이가 나쁘던 이웃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은근히 ‘잘됐다.’, ‘참 고소하다.’, ‘그럴 줄 알았어.’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은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내심 ‘시험을 못 봤으면’ 바랍니다.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결코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요. 내 아내가 남편이, 자녀가 항상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마음 안에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며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의 험담에 귀가 솔깃해진다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헐뜯는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으며 당장 나무랄 것입니다. 혹여 상대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사실을 알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데도 남의 말이 궁금하고 솔깃해진다면 대개 험담하고 수군수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합니다. 또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남이 잘될 때 시기,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대가 잘되고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성도가 크리스천으로서 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습니까?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안 좋게 생각합니다. 좀 더 선하다면 ‘왜 저런 곳에 갈까?’ 의아해하다가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좋은 쪽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악한 생각 자체가 들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듣는다 해도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지요.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으로서 판단하시기에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악입니다. 설령 상대가 잘못했을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릴 길을 생각하지요.
영적인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할 뿐 아니라 상대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른길로 가도록 진리를 알려 주고 변화되도록 감동을 줍니다. 허물 많은 사람도 사랑하기에 어찌하든 믿어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하지요. 이처럼 판단 정죄하는 생각 자체가 없어야 누구를 만나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모든 생각입니다.
단순히 상대방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나 악한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양심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은 다 악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그러면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악’은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와 같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 열매입니다. 뿌리가 있으므로 줄기와 잎, 열매가 나오듯이 죄는 악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즉 악은 땅속 깊숙이 자리 잡은 뿌리와 같이 마음 안의 ‘속성’입니다. 이 악이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했습니다(눅 6:45).
어떤 사람이 욕을 하며 가시 돋친 말과 함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있는 미움이라는 악이 ‘욕’이나 ‘가시 돋친 말’, ‘폭력’이라는 행함 곧 죄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악이 있다고 반드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교양이 있거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절제한다면 죄를 짓지는 않지요.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 속의 악까지 다 버려야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압축하면 ‘사랑’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죄입니다.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만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악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설령 보거나 들어도 떠올리거나 되새기려 하지 말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 마음먹은 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집요하게 떠오를 때도 있지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기도하면 성령께서 도와주시지요. 일부러 보고 듣고 떠올리는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하며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악한 일에 결코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이서 1장 10~11절에 보면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했습니다. 철저히 악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지요.
사람은 타고난 죄성과 성장하면서 보고 들은 비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죄성과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죄성과 비진리를 버리는 데에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보다 비진리가 더 익숙하고, 비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버리기는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악은 무익합니다. 우리가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뿐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에게 질병이 오거나 사고를 겪고 가난과 가정불화로 근심 속에 살아가는 등 이런저런 문제들도 결국 자신이 심은 악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을 미워하면서 자신의 영혼에 두 가지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선한 생각,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행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을 수 있지요. 또한 기도하면서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곱씹어볼 때 미처 깨닫지 못하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에 마음의 악을 버릴 수 있지요. 이처럼 말씀과 기도로 신속히 악을 버림으로 마음에 평안을 얻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① 상대가 (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② 상대를 ( ) ( )하는 생각이다.
③ 하나님 ( )에 ( )되는 모든 생각이다.
2.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3.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알고 넘어갑시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본성에는 저마다 부모의 기를 통해 받은 악이 있지만 잘 드러나지 않다가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드러나게 된다.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장 안 넘을 사람없다”는 속담처럼 온전히 성결을 이루기 전에는 극한 상황에 몰리면 평소 자신도 모르는 악이 드러나는 것이다.
파리 똥이 아무리 작아도 똥인 것처럼 설령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흠도 티도 없으신 온전한 하나님에 비할 때 온전하지 않은 것이 다 악의 모양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하신 것이다.
2025-11-14
제46과추수감사제
출애굽기 23:14~17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4~17 | 외울말씀 : 출애굽기 23:16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3.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이러한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승리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경적인 유래와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추수감사제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1.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절기 중의 하나로서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한 해의 마지막 때)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출애굽기 23:14-16을 보면 “너는 매년 삼 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무교병의 절기란 유대 정월인 아빕월(태양력 3-4월) 10일에 어린 양을 취하여 4일 동안 간직하였다가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낸 후, 일주일간 무교병을 먹으며 출애굽하였던 때를 기념하는 절기로서 무교절(신 16:16)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무교병을 먹는 것입니다.
무교절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음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므로 오늘날 신약 시대에 와서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7주가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이므로 칠칠절(출 34:22)이라고도 하며, 날짜로 계산하여 50일이 되므로 오순절(행 2:1)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은 맥추감사절로 지키고 있지요.
마지막으로, 수장절은 가을 추수가 끝난 후 수고하여 거둔 것을 저장함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이며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셔서 광야에 있는 동안 초막에 거하게 하신 줄을 자손 대대로 알게 하기 위해 지켜지며 일주일 동안 집을 떠나 초막에 거하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레 23:42-43).
그러므로 수장절은 광야에서 약 40년간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해방을 기념하고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됩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매년 지켜야 할 절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으며 신년감사주일, 교회창립기념일 등이 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의미
초막절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절기로서 큰 기쁨과 즐거움의 축제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13-17을 보면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일 년간 농사를 지어 일용할 양식과 땅의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일 뿐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하시며, 내세의 소망 가운데 영생의 길로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시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하는 이에게 주시고 찾는 이에게 찾게 하시며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며 상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키는 절기입니다.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역사적으로 성결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를 통해 일어난 영국의 신앙적 대각성 운동이 전 유럽에 출렁일 때에 믿음을 위해 독자적인 길을 나선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땅에 와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처음 수확한 소산들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리며 예배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열심히 땅을 일구며 살아온 청교도들이 심은 대로 거둘 수 있도록 축복하셔서 오늘날 미국이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고, 그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의 믿음을 기리며 뜻깊게 지키고 있습니다.
3. 추수감사제
추수감사절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추수감사제를 드리게 됩니다. 먼저는 생명을 주시고 사망에서 건져 주심에 감사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감사제를 드려야 하며(시 56:12-13), 또한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여 믿음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으니 기쁨으로 감사제를 드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나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감사제를 드림으로 마음의 소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사밧 임금은 모압 연합군의 침입을 당했을 때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고 감사제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세일산 거민을 진멸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대하 20:20 이하).
또한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아니하였으므로 궁핍한 중에도 자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귀한 음식인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야에게 심었습니다. 먹을 것이 금보다 귀한 때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심으니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사르밧 과부와 그의 가족과 엘리야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넘치게 축복해 주셨습니다(왕상 17:8-16).
열왕기하 4:8-17을 보면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수넴 여인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으나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섬겼으므로 소원대로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온 믿음을 통해 드리는 감사제를 기뻐 받으시고 행함이 따르는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즉시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앗을 많이 뿌리면 가을에 많이 거둘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 행함있는 감사를 심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아 영광돌리시기를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3. 올 한 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이러한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여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승리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2025-11-07
제45과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5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5 | 외울말씀 : 약 1:20 | 참고 말씀: 고전 10:31
교육목표 :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성냄을 버리고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희생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갔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합니다. 반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1) 사랑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한 아브라함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범사에 내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한 사람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올 때 조카 롯이 함께했는데, 아브라함과 함께함으로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아 가축이 심히 많아졌지요. 어찌나 많았던지 가축에게 먹일 물이 부족하여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이 깨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롯에게 땅을 택하여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목축업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풀과 물입니다. 가나안 지경은 물과 풀이 넉넉한 곳이 많지 않으니 땅을 양보한다는 것은 생존권을 양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했기에 배려한 것입니다. 이런 삼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롯은 물이 많고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해 떠납니다. 자신의 유익을 좇아 떠나는 롯을 볼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불편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카가 더 좋은 땅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하시며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변 나라 왕들의 예우를 받을 만큼 엄청난 거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으며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그러면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다 참사랑을 이루면 각 상황마다 선의 지혜가 풍성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지요. 이처럼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져서 마음껏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지 않는 이웃이나 가족에게 사랑받게 되지요.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게 되면 화평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나를 힘들게 하고 자신의 유익만 좇는 사람,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 비진리를 행하고 노상 악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지요?
그런 경우에는 피해 버리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희생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될 때 영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들며,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냄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바로 미움과 성냄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표정만 보고 ‘화가 났구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 의분과 성냄의 차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은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지요. 온유하신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고 돌변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지요.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혈기가 대단하시네? 화를 내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이지요.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는 결국 공의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분을 내신 것도 영혼들을 깨우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그만큼 성결되어 죄가 없을 때 의분 또는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2) 성내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성내는 이유는 먼저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저마다 성장한 환경이나 배움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이 다르고 교양이 다르며 판단 기준이 다른데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니 감정이 나지요. 또한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성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앞서거나 나은 위치에 있으면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요. 이 외에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냅니다.
사람들은 성내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나쁜 감정부터 일어납니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먼저 감정을 자극하고 결국 성내는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는 단계가 바로 성냄의 전초 단계입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혈기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3:16).
그러면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절제를 잘해서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력이 생겨 튕겨져 나오듯이 화를 눌러 참는 것이 순간의 위기는 모면한다 해도 언젠가는 폭발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성내지 않으려면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 )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한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 )과 ( )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화가 날 때’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매우 화가 나면 백까지 세라.”는 글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날 때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찬찬히 생각해 보자. 그러면 한순간 참지 못해 후회할 일이나 부끄럼 당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인내하다 보면 나중에는 성나게 하는 감정까지 차츰 버려진다.
예전에는 10번 화내던 것이 9번, 8번 점점 줄어들어 아무리 화가 날 상황이 되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교육목표 :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성냄을 버리고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희생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식당에 갔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합니다. 반면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더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 일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1) 사랑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한 아브라함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범사에 내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한 사람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올 때 조카 롯이 함께했는데, 아브라함과 함께함으로 롯도 더불어 복을 받아 가축이 심히 많아졌지요. 어찌나 많았던지 가축에게 먹일 물이 부족하여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이 깨지기를 원치 않았기에 롯에게 땅을 택하여 떠날 수 있는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목축업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풀과 물입니다. 가나안 지경은 물과 풀이 넉넉한 곳이 많지 않으니 땅을 양보한다는 것은 생존권을 양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롯을 사랑했기에 배려한 것입니다. 이런 삼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롯은 물이 많고 넉넉한 요단 들을 택해 떠납니다. 자신의 유익을 좇아 떠나는 롯을 볼 때 아브라함의 마음이 불편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카가 더 좋은 땅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마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하시며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변 나라 왕들의 예우를 받을 만큼 엄청난 거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으며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그러면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악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다 참사랑을 이루면 각 상황마다 선의 지혜가 풍성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지요. 이처럼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져서 마음껏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지 않는 이웃이나 가족에게 사랑받게 되지요.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게 되면 화평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나를 힘들게 하고 자신의 유익만 좇는 사람, 나에게 피해가 되는 사람, 비진리를 행하고 노상 악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지요?
그런 경우에는 피해 버리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희생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될 때 영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들며,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냄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바로 미움과 성냄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내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표정만 보고 ‘화가 났구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1) 의분과 성냄의 차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은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지요. 온유하신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고 돌변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지요.
주변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이 혈기가 대단하시네? 화를 내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이지요.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는 결국 공의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분을 내신 것도 영혼들을 깨우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그만큼 성결되어 죄가 없을 때 의분 또는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2) 성내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성내는 이유는 먼저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저마다 성장한 환경이나 배움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이 다르고 교양이 다르며 판단 기준이 다른데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니 감정이 나지요. 또한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성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앞서거나 나은 위치에 있으면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요. 이 외에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냅니다.
사람들은 성내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나쁜 감정부터 일어납니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먼저 감정을 자극하고 결국 성내는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는 단계가 바로 성냄의 전초 단계입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성전 삼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혈기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고전 3:16).
그러면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절제를 잘해서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력이 생겨 튕겨져 나오듯이 화를 눌러 참는 것이 순간의 위기는 모면한다 해도 언젠가는 폭발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성내지 않으려면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 )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한다.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 )과 ( )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화가 날 때’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서재에는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매우 화가 나면 백까지 세라.”는 글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날 때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찬찬히 생각해 보자. 그러면 한순간 참지 못해 후회할 일이나 부끄럼 당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인내하다 보면 나중에는 성나게 하는 감정까지 차츰 버려진다.
예전에는 10번 화내던 것이 9번, 8번 점점 줄어들어 아무리 화가 날 상황이 되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 12:16)
2025-11-02
제0과열 재앙(2) - 지팡이가 뱀이 되다
출 7:10-13
읽을말씀 : 출 7:10-13 | 외울말씀 : 이수진 목사
교육목표 : 이 시간은 본격적인 열 재앙을 설명하기에 앞서 “지팡이가 뱀이 된 이적”이 나타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환난, 재앙, 연단, 시험의 차이와 의미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재앙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신앙인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시험이나 환난, 연단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요.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진리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 얼마큼 믿음이 있느냐에 따라 재앙이라 할 수도 있고 연단 혹은 시험, 환난이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이 있는 사람이 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수 없으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환난’이라고 한다면, 더 나아가 믿음마저도 저버리고 비진리 가운데 행할 때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비록 온전히 말씀 가운데 살지 못한다 해도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마음에 있는 죄의 속성을 버리기까지 싸워나가는 과정을 ‘연단’이라고 하지요.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나가는 과정 중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연단입니다. ‘시험’은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영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작업과 같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연단과 시험이 오는 것이요, 하나님을 노엽게 함으로 오는 것이 환난과 재앙입니다. 그중에서도 재앙이란 짐짓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만큼 재앙이 임하지요. 재앙이 임했는데도 여전히 돌이키지 않고 악을 행하면 애굽의 열 재앙처럼 더 큰 재앙이 임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재앙은 신속히 물러가게 됩니다.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재앙을 당한다 해도 사람에 따라 마음과 행함이 다른 것을 봅니다. 바람직한 모습은, 재앙을 당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재앙이 거두어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지요.
그런데 다른 모습은 “나는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는데 왜 이런 재앙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니 더 큰 재앙이 임하게 되지요. 사람의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단단하여 아무리 복음을 전하여도 마음 문을 열지 않지요.
세상 사람만 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할 뿐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서 머리로 알기는 하지만 행함이 없으니 죽은 믿음에 불과하지요. 시간이 지나다가 재앙이라도 만나면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앙이 임했다면 반드시 합당치 못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돌이킴으로 신속히 재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지팡이가 뱀이 된 이적
출애굽기 5장 1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라고 모세는 애굽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지만 바로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출애굽기 5장 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 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지요.
도리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을러서 딴생각을 품는다는 억지 이유를 만들어 더 심한 고역으로 학대합니다. 평소 짚을 주어 벽돌을 만들게 하였으나 이후로는 짚도 주지 않은 채 벽돌을 전과 동일하게 만들라고 명합니다. 짚을 주어도 노동량을 채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짚까지 주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의 성품이 얼마나 완악한지 알 수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고 이적을 베풀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바로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지요. 출애굽기 7장 10절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모세를 통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팡이를 들어 뱀을 만드심으로 바로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신 이유
뱀은 영적으로 사단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신 것일까요? 모세가 서 있는 곳은 애굽 땅 바로의 왕궁이요, 이는 세상, 원수 마귀 사단에 속한 것이므로 이를 상징하기 위해 뱀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사단의 역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지요.
바로 왕은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 없으므로 사단을 의미하는 뱀을 등장시켜 깨우침을 주십니다. 사단의 역사가 따를 것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이후에 피의 재앙이나 개구리의 재앙, 이의 재앙도 모두 사단의 역사로 인함입니다.
여기서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을 우리의 삶에 대입하면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문제가 오는데, 너무 크지 않으므로 느낄 듯 말 듯 우연으로 돌릴 수 있는 일들이 생기는 단계입니다. 아직 재앙의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경고입니다. 이 사건과, 이어지는 이적을 베풀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행한 몇몇 이적을 애굽 술객들도 나타내지요. 모세를 대신하여 아론이 애굽 왕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애굽의 박사와 박수들을 불렀는데 이들도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습니다.
2) 술객들이 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서 그렇게 할 수가 있었는데, 술객들은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음에 설명할 피의 재앙에도 모세가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물이 피로 변했는데 애굽 술객들도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모세가 개구리를 불러들이니 술객들도 그렇게 하였지요. 그들은 특별히 뽑힌 사람들로서 하나의 벼슬이었으며 그 직업은 조상 대대로 물려졌기에 재질을 타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전문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에 그 능력이 대단했고 더구나 그들은 영적으로 자신을 개발하여 악한 영들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것은 그 당시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세계적인 마술사들의 공연을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을 통과하기도합니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이 사라지게 하는 것도 있었지요. 인도의 요가를 오래 수련한 사람 중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자거나 자기 몸보다 심히 작은 통속에 몸을 넣는 묘기를 보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눈속임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수련을 통해 터득한 기법으로 놀라우리만큼 신기한 묘기를 보이지요.
고대는 오늘날 마술하는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한 영들과 접할 수 있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무당 중에 귀신의 영을 접해서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뛰고 춤을 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도 상하지 않지요. 바로 술객들도 악의 영들에 접해서 갖가지 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수련한 것과 악한 영의 도움을 받은 술객들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능력의 한계까지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악한 영의 권세 안에서만 가능하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 전국의 물이 다 피가 되게 했지만, 술객들은 왕궁의 많은 하수 중 하나를 택해서 피로 변하게 했을 뿐입니다. 술객들이 능력이 있다면 모세가 저주한 것을 해결하거나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는 할 수 없었지요. 또한 모세는 티끌로 이를 만들었는데 술객들은 하지 못하고 그 이후에 나타내는 재앙은 따라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3. 신앙 안에서 우연은 없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들자, 바로는 ‘하나님이 정말 있는가 보다.’ 하다가 애굽의 술객들도 뱀을 만드는 것을 보니 다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술객들의 뱀이 아론의 지팡이로 만든 뱀에게 먹혔지만, 우연의 일치로 돌려버리고 마음을 더 강퍅하게 했지요.
신앙 안에서는 우연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초신자들이 이 제단에 나타난 권능의 역사로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사단은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 해결 받은 것이 ‘우연이었나? 다른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았을까?’ 하며 우연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은혜를 받고서도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세상으로 향하면 전에 체험했던 일이나, 굳게 믿었던 믿음이 의심되거나 우연의 일치로 돌리게 됩니다.
축복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도 하셨지만 내 힘, 내 지식, 내 경험도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요.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지 않을 때, 믿음이 조금 남아 있다 할지라도 확고한 믿음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지요.
이렇게 되면 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역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수밖에 없고, 옛날에 해결 받았던 문제가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치료받은 질병이 재발하거나 전보다 더 심한 병이 들 수도 있지요. 사업이 번창하는가 싶더니 더 심하게 망해 버리기도 하지요. 하나님께 응답받은 것을 우연의 일치로 돌림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차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니 문제가 다시 생기고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악한 영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주관자는 원수 마귀요,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쉽고, 유익처럼 보인다 해도 우리는 결코 어둠을 좇을 수 없습니다. 당장 편리를 좇아 악을 행하고 어둠의 길을 가면 결국 재앙이요, 사망이기 때문이지요. 지혜로운 성도들은 참된 복의 길, 빛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크고 놀라운 축복을 항상 받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교육목표 : 이 시간은 본격적인 열 재앙을 설명하기에 앞서 “지팡이가 뱀이 된 이적”이 나타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환난, 재앙, 연단, 시험의 차이와 의미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재앙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신앙인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시험이나 환난, 연단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요. 로마서 5장 3-4절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진리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 얼마큼 믿음이 있느냐에 따라 재앙이라 할 수도 있고 연단 혹은 시험, 환난이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믿음이 있는 사람이 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수 없으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환난’이라고 한다면, 더 나아가 믿음마저도 저버리고 비진리 가운데 행할 때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비록 온전히 말씀 가운데 살지 못한다 해도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마음에 있는 죄의 속성을 버리기까지 싸워나가는 과정을 ‘연단’이라고 하지요. 곧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나가는 과정 중에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연단입니다. ‘시험’은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영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작업과 같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연단과 시험이 오는 것이요, 하나님을 노엽게 함으로 오는 것이 환난과 재앙입니다. 그중에서도 재앙이란 짐짓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니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만큼 재앙이 임하지요. 재앙이 임했는데도 여전히 돌이키지 않고 악을 행하면 애굽의 열 재앙처럼 더 큰 재앙이 임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재앙은 신속히 물러가게 됩니다.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재앙을 당한다 해도 사람에 따라 마음과 행함이 다른 것을 봅니다. 바람직한 모습은, 재앙을 당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재앙이 거두어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지요.
그런데 다른 모습은 “나는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는데 왜 이런 재앙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니 더 큰 재앙이 임하게 되지요. 사람의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단단하여 아무리 복음을 전하여도 마음 문을 열지 않지요.
세상 사람만 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할 뿐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서 머리로 알기는 하지만 행함이 없으니 죽은 믿음에 불과하지요. 시간이 지나다가 재앙이라도 만나면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앙이 임했다면 반드시 합당치 못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돌이킴으로 신속히 재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 지팡이가 뱀이 된 이적
출애굽기 5장 1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라고 모세는 애굽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지만 바로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출애굽기 5장 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 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하지요.
도리어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을러서 딴생각을 품는다는 억지 이유를 만들어 더 심한 고역으로 학대합니다. 평소 짚을 주어 벽돌을 만들게 하였으나 이후로는 짚도 주지 않은 채 벽돌을 전과 동일하게 만들라고 명합니다. 짚을 주어도 노동량을 채우기 어려운 상황에서 짚까지 주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의 성품이 얼마나 완악한지 알 수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고 이적을 베풀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바로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지요. 출애굽기 7장 10절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지라” 모세를 통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팡이를 들어 뱀을 만드심으로 바로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신 이유
뱀은 영적으로 사단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신 것일까요? 모세가 서 있는 곳은 애굽 땅 바로의 왕궁이요, 이는 세상, 원수 마귀 사단에 속한 것이므로 이를 상징하기 위해 뱀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사단의 역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지요.
바로 왕은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 수 없으므로 사단을 의미하는 뱀을 등장시켜 깨우침을 주십니다. 사단의 역사가 따를 것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이후에 피의 재앙이나 개구리의 재앙, 이의 재앙도 모두 사단의 역사로 인함입니다.
여기서 지팡이가 뱀이 된 사건을 우리의 삶에 대입하면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문제가 오는데, 너무 크지 않으므로 느낄 듯 말 듯 우연으로 돌릴 수 있는 일들이 생기는 단계입니다. 아직 재앙의 피해가 있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경고입니다. 이 사건과, 이어지는 이적을 베풀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행한 몇몇 이적을 애굽 술객들도 나타내지요. 모세를 대신하여 아론이 애굽 왕 앞에서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습니다. 이에 왕은 애굽의 박사와 박수들을 불렀는데 이들도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습니다.
2) 술객들이 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서 그렇게 할 수가 있었는데, 술객들은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음에 설명할 피의 재앙에도 모세가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물이 피로 변했는데 애굽 술객들도 그렇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모세가 개구리를 불러들이니 술객들도 그렇게 하였지요. 그들은 특별히 뽑힌 사람들로서 하나의 벼슬이었으며 그 직업은 조상 대대로 물려졌기에 재질을 타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전문적으로 연구했기 때문에 그 능력이 대단했고 더구나 그들은 영적으로 자신을 개발하여 악한 영들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것은 그 당시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세계적인 마술사들의 공연을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을 통과하기도합니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이 사라지게 하는 것도 있었지요. 인도의 요가를 오래 수련한 사람 중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자거나 자기 몸보다 심히 작은 통속에 몸을 넣는 묘기를 보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눈속임뿐만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수련을 통해 터득한 기법으로 놀라우리만큼 신기한 묘기를 보이지요.
고대는 오늘날 마술하는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악한 영들과 접할 수 있었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무당 중에 귀신의 영을 접해서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뛰고 춤을 추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금도 상하지 않지요. 바로 술객들도 악의 영들에 접해서 갖가지 능력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수련한 것과 악한 영의 도움을 받은 술객들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능력의 한계까지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악한 영의 권세 안에서만 가능하지요.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 전국의 물이 다 피가 되게 했지만, 술객들은 왕궁의 많은 하수 중 하나를 택해서 피로 변하게 했을 뿐입니다. 술객들이 능력이 있다면 모세가 저주한 것을 해결하거나 풀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는 할 수 없었지요. 또한 모세는 티끌로 이를 만들었는데 술객들은 하지 못하고 그 이후에 나타내는 재앙은 따라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3. 신앙 안에서 우연은 없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들자, 바로는 ‘하나님이 정말 있는가 보다.’ 하다가 애굽의 술객들도 뱀을 만드는 것을 보니 다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술객들의 뱀이 아론의 지팡이로 만든 뱀에게 먹혔지만, 우연의 일치로 돌려버리고 마음을 더 강퍅하게 했지요.
신앙 안에서는 우연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초신자들이 이 제단에 나타난 권능의 역사로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사단은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 해결 받은 것이 ‘우연이었나? 다른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았을까?’ 하며 우연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은혜를 받고서도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세상으로 향하면 전에 체험했던 일이나, 굳게 믿었던 믿음이 의심되거나 우연의 일치로 돌리게 됩니다.
축복의 역사도 그렇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도 하셨지만 내 힘, 내 지식, 내 경험도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요.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지 않을 때, 믿음이 조금 남아 있다 할지라도 확고한 믿음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지요.
이렇게 되면 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역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수밖에 없고, 옛날에 해결 받았던 문제가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치료받은 질병이 재발하거나 전보다 더 심한 병이 들 수도 있지요. 사업이 번창하는가 싶더니 더 심하게 망해 버리기도 하지요. 하나님께 응답받은 것을 우연의 일치로 돌림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차츰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니 문제가 다시 생기고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악한 영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주관자는 원수 마귀요,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쉽고, 유익처럼 보인다 해도 우리는 결코 어둠을 좇을 수 없습니다. 당장 편리를 좇아 악을 행하고 어둠의 길을 가면 결국 재앙이요, 사망이기 때문이지요. 지혜로운 성도들은 참된 복의 길, 빛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시므로 크고 놀라운 축복을 항상 받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2025-10-31
제44과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잠언 16:18 | 참고 말씀: 야고보서 4:10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과 무례한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철저히 버리게 한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1912년 4월 첫 출항을 하였습니다.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항해사는 해안 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해 버리고 나중에서야 선장에게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이 배가 빙산 따위에 눈 깜짝하겠습니까?”라고 했지요.
이때 선장은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해!”라고 명령했습니다. 얼마 못 가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탑승객 2천2백여 명 중 1천5백여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빚어졌지요.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이 생기고 자기가 옳다며 혈기를 내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데도 잘 모르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의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
교만은 크게 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고 버리기 위해 노력하면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니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寶庫)를 이룹니다. 여러분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지요. 몸가짐이 바르고 때와 장소에 맞는 언행은 상대에게 호감을 주며 분위기를 쇄신시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되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며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게 됩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간에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모르지요.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하는 것일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데 하나님 앞에 존다는 것은 큰 실례이지요. 또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윗사람과 대화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추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성전에서도 무례히 행하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도 무례를 잘 범하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다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또 약속시간에 늦는 것,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서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하지요.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더욱 말과 행실에 본이 되어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체의 결여 속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사이에 무례히 행치는 않는지 자신을 체크해 보세요.
□ 예배시간이나 다니엘철야 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한다.
□ 성전에서 드라마나 연예인, 직장, 사업터 이야기를 한다.
□ 예배시간에 지각하거나 시간에 임박해 헐레벌떡 온다.
□ 헌금봉투의 용도 외에 설교 말씀을 적거나 메모한다.
□ 축도나 주기도문이 끝나기 전에 나간다.
□ 붐비는 식당에서 새치기를 한다.
□ 친하다고 밤늦게 전화를 스스럼없이 한다.
□ 누가 안 보니까 교통법규를 어긴다.
□ 아무에게나 쉽게 반말을 한다.
□ 약속시간을 종종 어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는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하면 지적인 능력, 행동 능력이 결여되거나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동떨어진 감정 상태를 느낀다.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과 무례한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철저히 버리게 한다.
세계 최대의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1912년 4월 첫 출항을 하였습니다.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항해사는 해안 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라는 무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해 버리고 나중에서야 선장에게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이 배가 빙산 따위에 눈 깜짝하겠습니까?”라고 했지요.
이때 선장은 “하나님이라도 이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해!”라고 명령했습니다. 얼마 못 가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탑승객 2천2백여 명 중 1천5백여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빚어졌지요.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며,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이 생기고 자기가 옳다며 혈기를 내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데도 잘 모르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의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
교만은 크게 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고 버리기 위해 노력하면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니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寶庫)를 이룹니다. 여러분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지요. 몸가짐이 바르고 때와 장소에 맞는 언행은 상대에게 호감을 주며 분위기를 쇄신시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되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며 상대에게 무례를 범하게 됩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간에도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모르지요.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하는 것일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데 하나님 앞에 존다는 것은 큰 실례이지요. 또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윗사람과 대화하는데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추는 것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성전에서도 무례히 행하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도 무례를 잘 범하는 이유는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다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또 약속시간에 늦는 것,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서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하지요.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입니다. 따라서 더욱 말과 행실에 본이 되어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육체의 결여 속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사이에 무례히 행치는 않는지 자신을 체크해 보세요.
□ 예배시간이나 다니엘철야 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한다.
□ 성전에서 드라마나 연예인, 직장, 사업터 이야기를 한다.
□ 예배시간에 지각하거나 시간에 임박해 헐레벌떡 온다.
□ 헌금봉투의 용도 외에 설교 말씀을 적거나 메모한다.
□ 축도나 주기도문이 끝나기 전에 나간다.
□ 붐비는 식당에서 새치기를 한다.
□ 친하다고 밤늦게 전화를 스스럼없이 한다.
□ 누가 안 보니까 교통법규를 어긴다.
□ 아무에게나 쉽게 반말을 한다.
□ 약속시간을 종종 어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는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하면 지적인 능력, 행동 능력이 결여되거나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동떨어진 감정 상태를 느낀다.
2025-10-24
제43과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요일 2:15~16 | 참고 말씀: 잠 14:30
교육목표 :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투기하는 세상의 헛된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믿음의 형제 자매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대가 승승장구하면 부러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상대가 밉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아 행복을 짓밟고 싶어 하지요.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늘 이 모양인가?’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대부분 낙심하는 마음은 시기,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상대가 잘될 때에 낙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지요. 낙심하거나 자책하며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自己)’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자아(自我)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투기가 심해지면 상대에게 해를 가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갈 5:19∼21).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죄, 곧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투기의 유형
먼저는, 이성 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투기입니다. 이성에게 더 사랑을 받으려고 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입니다. 이들은 자매 지간이지만 남편 야곱의 사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지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었다면 상대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투기하므로 불행하였으며 자녀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으로, 상대가 나보다 나으므로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대체로 상대가 부유하고 지식이 많으며 외모나 능력 면에서 앞서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고 인정받을 때 투기가 일어납니다. 자신보다 앞서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고 헐뜯습니다. 내가 잘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경쟁자의 약점을 알리기도 하고 누명을 씌워 상사의 눈 밖에 나도록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를 따돌리거나 선생님에게 사랑받는 아이를 괴롭히는 일도 있지요. 부모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형제간에 다투며 헐뜯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형제들 간에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질서나 직분 또는 신앙이 앞서거나 열심히 충성하는 형제, 자매를 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자신과 나이나 직분이 비슷한 상대, 잘 아는 사람에 대해 많이 나타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잘못이나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괜히 불편하고 부글부글합니다. 서로를 잘 알다 보니 자신보다 별로 나은 것도 없고 이런저런 부족함도 많은데 사랑받고 인정받으니 불만스러운 것이지요. 이러한 투기는 주의 종과 성도 사이에, 혹은 교회와 교회 사이, 교단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끼리, 주님의 몸 된 교회 간에 투기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투기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입니다. 충신 다윗이 자신보다 백성들의 사랑을 더 받자 투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오랜 세월 다윗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한 대로 투기는 자신을 상하게 하니 백해무익합니다. 따라서 남보다 앞서고 싶다면 투기함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투기하는 이유는 믿음이 적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적으면 세상 부와 명예, 권세 등을 더 갖기 위해 투기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주 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가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려고 주의 일에 열심을 냅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이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보다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이러한 자랑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이웃에게 자랑한다고 합시다. 함께 기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어떻겠습니까? 대개 자존심이 상하지요. 속이 상한 나머지 괜히 자녀를 나무랍니다.
이웃을 배려하는 선한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자기 자녀가 공부를 잘해도 함부로 자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웃의 자녀도 잘하기를 바라며, 잘되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칭찬해 줄 것입니다.
자랑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찌하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영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스로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 질투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마음 안에 ‘이생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자랑하게 마련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외모를 자랑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자신이 가진 돈과 외모, 명예, 권세 등이 앞선 것입니다.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헛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자랑 중에도 선하고 좋은 자랑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7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하신 대로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주 안에서의 자랑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고 천국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예수님 덕분에 영생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립니다. 그러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생의 자랑을 버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이다.
3.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4. 요한일서 2:15~16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히스기야 왕의 자랑으로 인한 여파
히스기야 왕은 한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였고 성전을 정결케 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기도로 앗수르 제국의 공격을 이겨냈고 죽을병에 걸렸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15년간이나 생명을 연장받았다. 그런데 그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이 외교 사절단을 보냈을 때 그들에게 자신의 보물과 성전의 기물들을 보여 주며 위세를 자랑한다. 결국 그 자랑 때문에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그토록 자랑하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교육목표 :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투기하는 세상의 헛된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자랑하며 믿음의 형제 자매를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한다.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 질투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합니다.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비슷한 조건을 가진 상대가 승승장구하면 부러움을 느낍니다. 심지어 상대가 밉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아 행복을 짓밟고 싶어 하지요. 한편으로는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늘 이 모양인가?’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대부분 낙심하는 마음은 시기,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상대가 잘될 때에 낙심하지 않고 함께 기뻐하지요. 낙심하거나 자책하며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自己)’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자아(自我)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투기가 심해지면 상대에게 해를 가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갈 5:19∼21).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죄, 곧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투기의 유형
먼저는, 이성 간의 사랑에서 비롯된 투기입니다. 이성에게 더 사랑을 받으려고 투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경우입니다. 이들은 자매 지간이지만 남편 야곱의 사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지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었다면 상대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투기하므로 불행하였으며 자녀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으로, 상대가 나보다 나으므로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대체로 상대가 부유하고 지식이 많으며 외모나 능력 면에서 앞서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더 사랑받고 인정받을 때 투기가 일어납니다. 자신보다 앞서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고 헐뜯습니다. 내가 잘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짓밟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경쟁자의 약점을 알리기도 하고 누명을 씌워 상사의 눈 밖에 나도록 합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를 따돌리거나 선생님에게 사랑받는 아이를 괴롭히는 일도 있지요. 부모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형제간에 다투며 헐뜯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형제들 간에 투기하는 경우입니다. 질서나 직분 또는 신앙이 앞서거나 열심히 충성하는 형제, 자매를 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자신과 나이나 직분이 비슷한 상대, 잘 아는 사람에 대해 많이 나타납니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잘못이나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괜히 불편하고 부글부글합니다. 서로를 잘 알다 보니 자신보다 별로 나은 것도 없고 이런저런 부족함도 많은데 사랑받고 인정받으니 불만스러운 것이지요. 이러한 투기는 주의 종과 성도 사이에, 혹은 교회와 교회 사이, 교단 사이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끼리, 주님의 몸 된 교회 간에 투기한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투기로 인생을 허비한 사람입니다. 충신 다윗이 자신보다 백성들의 사랑을 더 받자 투기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오랜 세월 다윗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잠 14:30) 한 대로 투기는 자신을 상하게 하니 백해무익합니다. 따라서 남보다 앞서고 싶다면 투기함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투기하는 이유는 믿음이 적고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적으면 세상 부와 명예, 권세 등을 더 갖기 위해 투기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에 시민권이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으면 주 안에서 맺어진 형제 자매가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않고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려고 주의 일에 열심을 냅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이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남보다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그것을 내세워 인정받고 싶어 하지요. 이러한 자랑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이웃에게 자랑한다고 합시다. 함께 기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어떻겠습니까? 대개 자존심이 상하지요. 속이 상한 나머지 괜히 자녀를 나무랍니다.
이웃을 배려하는 선한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자기 자녀가 공부를 잘해도 함부로 자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웃의 자녀도 잘하기를 바라며, 잘되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칭찬해 줄 것입니다.
자랑을 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찌하든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영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스로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우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시기, 질투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마음 안에 ‘이생의 자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입니다. 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자랑하게 마련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외모를 자랑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자신이 가진 돈과 외모, 명예, 권세 등이 앞선 것입니다.
이처럼 자랑하는 마음은 헛된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자랑 중에도 선하고 좋은 자랑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7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하신 대로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주 안에서의 자랑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간증’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고백한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고 천국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예수님 덕분에 영생을 얻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립니다. 그러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생의 자랑을 버리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2. ( )이란 자기만족과 쾌락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속성이다.
3. 사람들은 왜 자신을 드러내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4. 요한일서 2:15~16을 써 보세요.
● 알고 넘어갑시다!
히스기야 왕의 자랑으로 인한 여파
히스기야 왕은 한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였고 성전을 정결케 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기도로 앗수르 제국의 공격을 이겨냈고 죽을병에 걸렸을 때 눈물로 기도하여 15년간이나 생명을 연장받았다. 그런데 그의 병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이 외교 사절단을 보냈을 때 그들에게 자신의 보물과 성전의 기물들을 보여 주며 위세를 자랑한다. 결국 그 자랑 때문에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그토록 자랑하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2025-10-17
제42과사랑은 온유한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5 | 참고 말씀: 시편 37:11
교육목표 :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사랑과 덕이 있는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천국에서 넓은 땅을 차지하는 권세를 소유할 수 있게 한다.
이솝 우화 가운데 해와 바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해와 바람이 길 가는 사람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를 합니다.
먼저 바람이 “저런 외투쯤이야….” 하고 자신만만해서는 나무도 뽑힐 만큼 강한 바람을 내뿜었습니다. 나그네는 거센 바람에 행여 외투가 날아갈까 봐 더 단단히 옷깃을 여몄지요. 다음으로 해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따스한 햇볕을 내뿜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더위를 느낀 나그네는 얼른 외투를 벗었습니다.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지요. 온유함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혀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혀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뜨거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는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습니다.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악이 없고 선해서 마음이 온유하더라도 그것이 내면에만 머문다면 남을 품고 다스리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합니다.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면의 덕을 겸비해야온전하고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온유한 마음에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므로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이루는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이는 소인배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봐 줍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에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즉,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은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만 했다 하면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는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불량하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화려한 옷을 잘 갖춰 입었다 해도 그 사람의 내면이 훌륭하지 못하면 화려한 외모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섬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 )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 )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2.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
이처럼 ( )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3.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 )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잘 갖추어진 ( )으로 남을 다스리며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는다.
● 알고 넘어갑시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
대인은 행동이 앞서지만 소인은 말이 앞선다.
대인은 말을 아끼고 신중히 하지만 소인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쉽게 낸다.
대인은 지적을 받았을 때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만 소인은 변명하고 불편해하며 삐친다.
대인은 마음의 고통을 받을 때 아무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혼자 묵묵히 안고 가지만 소인은 그 마음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교육목표 :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사랑과 덕이 있는 온유한 마음을 이루어 천국에서 넓은 땅을 차지하는 권세를 소유할 수 있게 한다.
이솝 우화 가운데 해와 바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해와 바람이 길 가는 사람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를 합니다.
먼저 바람이 “저런 외투쯤이야….” 하고 자신만만해서는 나무도 뽑힐 만큼 강한 바람을 내뿜었습니다. 나그네는 거센 바람에 행여 외투가 날아갈까 봐 더 단단히 옷깃을 여몄지요. 다음으로 해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따스한 햇볕을 내뿜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더위를 느낀 나그네는 얼른 외투를 벗었습니다.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지요. 온유함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혀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혀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뜨거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는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습니다.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악이 없고 선해서 마음이 온유하더라도 그것이 내면에만 머문다면 남을 품고 다스리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합니다.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면의 덕을 겸비해야온전하고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요. 온유한 마음에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으므로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온유함을 이루는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이는 소인배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봐 줍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에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즉,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은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만 했다 하면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는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불량하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사람들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보면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화려한 옷을 잘 갖춰 입었다 해도 그 사람의 내면이 훌륭하지 못하면 화려한 외모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섬기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 )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 )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2.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 외투를 벗기려 했지만, 해는 나그네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
이처럼 ( )은 어떤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선과 사랑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3. ( )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 )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잘 갖추어진 ( )으로 남을 다스리며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는다.
● 알고 넘어갑시다!
‘대인과 소인의 차이’
대인은 행동이 앞서지만 소인은 말이 앞선다.
대인은 말을 아끼고 신중히 하지만 소인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쉽게 낸다.
대인은 지적을 받았을 때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만 소인은 변명하고 불편해하며 삐친다.
대인은 마음의 고통을 받을 때 아무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혼자 묵묵히 안고 가지만 소인은 그 마음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2025-10-10
제41과사랑은 오래 참는 것 | 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5:39~40
교육목표 :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항목 중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만일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것은 영적인 사랑의 시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을 주변 사람과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상대를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오히려 내 마음에 상처로 돌아오거나 막대한 손실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사랑스럽기는커녕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하며 애매히 곤경에 빠뜨린다 해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참고 사랑해야 하지요.
영적인 사랑을 이루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래 참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혹여 참긴 참는데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왔습니까? 오래 참았는데도 환경이 달라지지 않으니 그만 낙심되었습니까? 그렇다면 환경이나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을 진리로 온전히 이루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참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비진리,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오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 중의 오래 참음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성령의 열매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보다 작은 범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요즘에는 상대가 자신의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쉽게 고소합니다. 법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 상대가 아내 혹은 남편, 혈육을 나눈 부모, 자녀인 경우도 많지요. 참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어 “바보처럼 산다”고 조롱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했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말고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참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2. 무한대의 오래 참음
어떤 사람들은 미움, 혈기 등의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내성적이어서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소위 ‘화병’이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기도 하지요. 이런 참음은 스프링을 눌러 놓았다가 손을 떼면 다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인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이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검은색 안경을 쓰면 온통 어둡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하면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어떤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싫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악하게 행동한다 해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지요.
오래 참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중보 기도를 올린 스데반 집사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셨을까요?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음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70×7, 즉 490번만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7은 영적으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무한하심을 느낄 수 있지요.
3.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오래 참음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운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화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작음을 나타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혹여 화를 냈다 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즉 오랫동안 분을 품지 말고 털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마음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가지요.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할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과연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도 당연히 오래 참을 일이 없으시지요. 그런데도 굳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고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지만,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오래 참고 사랑하면 장차 천국에서 아름다운 처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8∼9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말씀하신 대로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 )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 )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한다.
2.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억지로 참으며 억울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오래 참음?
1. 자신이 비진리를 버리고 마음을 진리로 개조해 나가기까지의 오래 참음
2.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이해해 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화평함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
3.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 구원 등 주실 약속을 받기 위한 오래 참음
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404장 ---------------------- 다 같이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2.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룻기 3:10 ---------------- 인도자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설 교 ------------------ 행복 찾아 만들기 ------------------ 설교자
2. 설교 예문
‘행복’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행복이란 ‘복된 좋은 운수’ 또는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을 느끼며 염려, 근심 없이 몸과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행복한 길을 찾기 위하여 부를 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학문에 심취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신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번창하여 물질이 넉넉하고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로 남에게 말 못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질병 없이 건강하며 명예와 권세가 있어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부부간의 불화, 고부간의 갈등, 일가친척의 문제 등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보아도 행복한 집이라고 소문이 났던 가정에 불의의 사고나 불행이 찾아들어 하루아침에 웃음과 행복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슬픔의 그림자만 맴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행복이란 항상 기쁨과 감사 속에서 아무런 염려 없이 살아가며 만족을 느끼되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관상이나 손금 등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직 자신의 행함과 마음 중심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행복이란 스스로가 찾아서 만들어 나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에 놓여 있는 ‘룻’이라는 한 여인이 어떻게 행복을 찾아 만들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룻은 모압지방에 사는 여인으로서, 기근을 피해 이주해 온 유다 베들레헴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식도 없이 남편을 잃게 된 룻은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마음과 뜻을 다해 봉양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젊음과 자신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룻의 현숙함을 알고 있었던 부자 보아스는 룻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후 룻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가 됩니다. 결국 룻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한 가정을 꾸몄을 뿐 아니라,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여인 룻은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의 어떤 축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룻처럼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면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며 전화위복이 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룻과 같이 변함없는 중심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면 누구든지 행복을 찾아 만들 수 있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교육목표 :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의 항목 중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만일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것은 영적인 사랑의 시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사랑을 주변 사람과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상대를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오히려 내 마음에 상처로 돌아오거나 막대한 손실과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가 사랑스럽기는커녕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하며 애매히 곤경에 빠뜨린다 해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참고 사랑해야 하지요.
영적인 사랑을 이루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래 참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혹여 참긴 참는데 마음에 불편함이 찾아왔습니까? 오래 참았는데도 환경이 달라지지 않으니 그만 낙심되었습니까? 그렇다면 환경이나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마음을 진리로 온전히 이루면 참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참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비진리,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오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갈 5:22) 중의 오래 참음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요? 성령의 열매에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보다 작은 범주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참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요즘에는 상대가 자신의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쉽게 고소합니다. 법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 상대가 아내 혹은 남편, 혈육을 나눈 부모, 자녀인 경우도 많지요. 참고 가만히 있으면 도리어 “바보처럼 산다”고 조롱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했습니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말고 참아 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이 이러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참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2. 무한대의 오래 참음
어떤 사람들은 미움, 혈기 등의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내성적이어서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다가 소위 ‘화병’이라는 스트레스성 질환을 앓기도 하지요. 이런 참음은 스프링을 눌러 놓았다가 손을 떼면 다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인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이 가득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검은색 안경을 쓰면 온통 어둡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하면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어떤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싫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악하게 행동한다 해도 미운 마음이 들지 않지요.
오래 참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중보 기도를 올린 스데반 집사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셨을까요? 결코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음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70×7, 즉 490번만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7은 영적으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무한하심을 느낄 수 있지요.
3.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오래 참음
물론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운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끊임없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화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작음을 나타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혹여 화를 냈다 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즉 오랫동안 분을 품지 말고 털어 버리라는 말입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마음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가지요.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표현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할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과연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도 당연히 오래 참을 일이 없으시지요. 그런데도 굳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고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에게 악으로 대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지만,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오래 참고 사랑하면 장차 천국에서 아름다운 처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편 37편 8∼9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말씀하신 대로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오래 참는다는 것은 우리가 ( )하는 데 있어 만나는 여러 ( )과 나 자신에 대해 끝까지 참는 것을 말한다.
2.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3.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 억지로 참으며 억울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오래 참음?
1. 자신이 비진리를 버리고 마음을 진리로 개조해 나가기까지의 오래 참음
2.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이해해 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화평함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
3.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 구원 등 주실 약속을 받기 위한 오래 참음
추석 감사예배 순서와 예문
신라 시대부터 내려온 추석은 우리나라 대명절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지요. 여기서 ‘한’은 크다라는 의미이고,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을 뜻합니다.
이 무렵에는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한 가을로 접어들어, 오곡이 무르익고 온갖 과일이 풍성합니다. 추석이 되면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이웃들과 서로 나누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래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속담이 있지요.
1. 추석 감사예배 순서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 송 ------------------------- 404장 ---------------------- 다 같이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2.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기 도 ------------------------------------------------ 가족 중에서
성경 봉독 ---------------- 룻기 3:10 ---------------- 인도자
가로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설 교 ------------------ 행복 찾아 만들기 ------------------ 설교자
2. 설교 예문
‘행복’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행복이란 ‘복된 좋은 운수’ 또는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을 느끼며 염려, 근심 없이 몸과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행복한 길을 찾기 위하여 부를 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학문에 심취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신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번창하여 물질이 넉넉하고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자녀의 문제, 질병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들로 남에게 말 못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겉으로는 질병 없이 건강하며 명예와 권세가 있어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부부간의 불화, 고부간의 갈등, 일가친척의 문제 등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보아도 행복한 집이라고 소문이 났던 가정에 불의의 사고나 불행이 찾아들어 하루아침에 웃음과 행복이 온데간데 없어지고 슬픔의 그림자만 맴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행복이란 항상 기쁨과 감사 속에서 아무런 염려 없이 살아가며 만족을 느끼되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관상이나 손금 등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직 자신의 행함과 마음 중심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행복이란 스스로가 찾아서 만들어 나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에 놓여 있는 ‘룻’이라는 한 여인이 어떻게 행복을 찾아 만들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우리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룻은 모압지방에 사는 여인으로서, 기근을 피해 이주해 온 유다 베들레헴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식도 없이 남편을 잃게 된 룻은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고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이삭을 주워 시어머니를 마음과 뜻을 다해 봉양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젊음과 자신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끝까지 시어머니를 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룻의 현숙함을 알고 있었던 부자 보아스는 룻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후 룻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다윗의 조부가 됩니다. 결국 룻은 하나님의 은혜로 행복한 가정을 꾸몄을 뿐 아니라, 다윗의 증조모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여인 룻은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의 어떤 축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룻처럼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정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중심이 되면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며 전화위복이 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룻과 같이 변함없는 중심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면 누구든지 행복을 찾아 만들 수 있습니다.
추석이 되면 하나님을 믿는 가정은 풍성한 수확을 주심에 감사하며 온 가족이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은 음식과 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와서 그 제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영혼은 구원을 얻어 천국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 천국과 지옥에 대해 밝히 알지는 못했지만,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고 인정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낸 것도 사후 세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사후 세계를 인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긴다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고, 질병, 재앙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며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늘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가정이나 학교, 직장이나 사업터, 일터에서 지켜 주시고 은혜 주시며 평강으로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올해도 풍성한 수확으로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더욱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형제간에 화목하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도 풍성한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 가운데 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 ----------------------------------------------------- 다 같이
주기도문 ------------------------------------------------- 다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25-10-03
제40과영적인 사랑의 중요성
고린도전서 13:1~3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1~3 | 외울말씀 : 골로새서 3:23 |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2:6~8
교육목표 : 범사에 누구를 대하든지 영적인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해 줌으로 생명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답게 해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묵직한 쇠나 구리는 두드려도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구리나 꽹과리가 소리를 낸다면 속이 비었거나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무조건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거슬리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아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을 돌아보아 내 의와 틀 속에 말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목마른 영혼을 시원케 하고 아파하는 영혼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생명의 물이요, 값진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 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큰 믿음을 가졌다고 사랑까지 큰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성령을 받은 것도,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지요.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구제는 생활하는 데 필요한 양식과 의복, 집, 물질 등을 공급해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여 영혼을 살리는 구제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할 때는 성령의 주관을 받아 상대에게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구제는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거나 사망의 길로 가게 만들지요.
가령, 술과 노름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시험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제한다면 더욱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랑으로 구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다음으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올리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에게 모든 수고를 갚아 주시고 위로하시며,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 )를 말한다.
2.‘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 )하는 것을 의미한다.
3. 믿음은 있는데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 )이 없기 때문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
마가복음 12장에는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한 과부가 나온다. 그녀는 비록 두 렙돈에 불과했지만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렙돈은 당시 그리스의 가장 작은 동전 단위이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셨듯이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를 전부 드렸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 전부가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표현이다. 곧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반면 사람을 의식한 예물이나 억지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니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교육목표 : 범사에 누구를 대하든지 영적인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해 줌으로 생명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게 한다.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답게 해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묵직한 쇠나 구리는 두드려도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구리나 꽹과리가 소리를 낸다면 속이 비었거나 가볍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으로 무조건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고 거슬리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아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을 돌아보아 내 의와 틀 속에 말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목마른 영혼을 시원케 하고 아파하는 영혼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생명의 물이요, 값진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 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되실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큰 믿음을 가졌다고 사랑까지 큰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성령을 받은 것도,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지요.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구제는 생활하는 데 필요한 양식과 의복, 집, 물질 등을 공급해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여 영혼을 살리는 구제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할 때는 성령의 주관을 받아 상대에게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구제는 상대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거나 사망의 길로 가게 만들지요.
가령, 술과 노름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시험 환난에 빠진 사람을 구제한다면 더욱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랑으로 구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다음으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이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올리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에게 모든 수고를 갚아 주시고 위로하시며,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 )를 말한다.
2.‘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 )하는 것을 의미한다.
3. 믿음은 있는데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 )이 없기 때문이다.
● 알고 넘어갑시다!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
마가복음 12장에는 중심의 향을 담은 예물을 드림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았던 한 과부가 나온다. 그녀는 비록 두 렙돈에 불과했지만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 렙돈은 당시 그리스의 가장 작은 동전 단위이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하셨듯이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를 전부 드렸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 전부가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는 표현이다. 곧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반면 사람을 의식한 예물이나 억지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니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2025-09-26
제39과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
요한일서 4:7~8
읽을말씀 : 요한일서 4:7~8 | 외울말씀 : 이사야 49:15 | 참고 말씀: 사무엘상 18:1~4
교육목표 :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8장 1~4절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원로목사님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로목사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원로목사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원로목사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삶을 드려 헌신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 되고 점점 부모님에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이 역사하므로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자신의 실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영적인 사랑을 얼마나 깊이 나누고 있나요?
4. 다윗은 사랑하는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자 그의 아들을 어떻게 대해 주었나요?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삼상 17:49).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교육목표 :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
사전에 보면 ‘사랑’을 아끼고 위하며 한없이 베푸는 일 또는 그 마음을 말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이 이런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사무엘상 18장 1~4절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했지요.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그는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 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이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영적인 사랑과 반대되는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 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원로목사님의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로목사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간 계속된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원로목사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원로목사님의 전부가 되셨고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삶을 드려 헌신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이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와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쉽게 변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풀게 됩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이지요.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한번 여쭙는 것도 어렵습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 되고 점점 부모님에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구 간의 사랑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였다면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나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 서는 일을 금하셨는데 불순종할 경우 사단이 역사하므로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상대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자신의 실리를 따지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영적인 사랑을 얼마나 깊이 나누고 있나요?
4. 다윗은 사랑하는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죽자 그의 아들을 어떻게 대해 주었나요?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다(삼상 17:49).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