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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 (103) 방주에서의 생활 [창 7:8-1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6.06.05
지난 시간에는 노아의 방주 안에 들어간 짐승의 종류별 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곧 모든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암수 둘씩, 그중에서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쌍씩 종족 보존을 위해 방주에 태웠습니다. 여기에 특별한 용도를 위해 부정한 짐승은 한 쌍씩을 더 태웠고 정결한 짐승은 일곱 마리를 더 태웠지요. 오늘은 홍수 기간 동안 방주 안에서의 생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방주에 탄 수많은 종류의 짐승들은 1년이 넘게 어떻게 그 제한된 공간에서 함께 지낼 수 있었을까요? 힘센 짐승이 약한 짐승들을 공격하거나 서로 싸워서 해를 끼치는 일이 생긴다면 방주 안은 무질서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볼 때 방주 안에서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가 다 끝나기까지 노아의 방주만큼은 근본의 빛으로 둘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짐승들도 다 근본의 빛으로 둘러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사나운 짐승은 없고 다 온순한 짐승들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근본의 빛으로 둘러 버리면 온유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악한 사람도 순간에 변하는 것을 봅니다. 악이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간음하고 음욕을 품었던 사람이 정결한 사람으로,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성경 말씀을 보지 않던 사람이 성경을 보는 사람으로 순간에 변하지요.

노아는 홍수 이후에도 근본의 빛으로 둘린 공간에 살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홍수가 마칠 때까지 근본의 빛으로 둘러 주셨습니다. 이에 짐승들이 방주에서 나올 때까지 근본의 악한 속성을 드러내지 않았고, 노아의 말에도 순순히 따랐지요. 짐승들은 자기에게 할당된 공간에서 얌전하게 지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으면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악성이 나오지 않고 온유하고 사랑과 덕이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를 근본의 빛으로 둘렀기 때문에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짐승이 온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의 한정된 공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각 짐승들의 공간을 배치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16절에 기록된 대로 방주는 상, 중, 하, 3층으로 되어 있지요.

아래층부터 체중이 많이 나가는 순서대로 거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코끼리, 하마, 사자, 호랑이처럼 덩치가 크고 체중도 많이 나가는 짐승들입니다. 이는 방주의 전체적인 안정성을 위해서 필요한 배치였습니다. 아래쪽이 무거워야 방주가 더 안정되고 균형도 잘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층에는 그다음 크기의 짐승들이, 맨 위층에는 새들과 ‘땅에 기는 것들’과 노아의 여덟 식구가 거했습니다.

혹 ‘어떻게 노아와 그의 식구들은 새들과 땅에 기는 것들과 한 층에서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같은 층에 산다 해도 공간이 잘 구분되어 있어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사는 데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 방주 내부는 공간이 매우 효율적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양식을 저장하는 공간이 각층 마다 있었습니다. 만약 어느 한 층에만 양식 창고가 있었다면 짐승들에게 밥을 줄 때마다 오르내리는 수고가 얼마나 크겠는지요.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짐승들의 양식 창고를 각층의 가장 오른쪽 끝에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짐승들에게 하루에 한 번만 양식과 물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배부르다 느낄 만큼 넉넉한 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허기를 느낄 만큼 적은 양도 아니었지요. 방주 안은 하나님의 근본의 빛으로 둘려 있었기에 짐승들은 하루 한 번, 일정량의 섭취만으로도 살아가기에 충분했다는 사실입니다.

노아와 그의 식구들에게 있어 모든 짐승들에게 밥을 주는 일은 하루에 단 한 번 한다 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짐승들에게 밥을 주는 것보다 더 난감한 일은 그들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일이었지요. 아무리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 해도 짐승의 수가 워낙 많아서 배설물도 그 양이 사실 매우 많았을 것입니다. 노아와 가족들이 일일이 짐승의 우리에 있는 배설물을 치워야 한다면 이 얼마나 고역이겠습니까?

그러면 과연 노아와 가족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 미리 아시고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에 배설물 처리 시설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짐승들이 우리 안의 한 지점에서 배설을 하면 그 배설물이 한 곳으로 모이게 돼 있었지요. 노아와 가족들은 한 곳에 모인 배설물만 방주 밖으로 내버리면 되었습니다.

노아와 가족들은 방주 생활 내내 짐승들을 돌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니 사실 심심할 틈도,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지요. 사실 육적으로는 상당히 고된 일을 하며 하루하루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황을 불평하지도,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에 감사했지요. 그러니 자신들이 할 일을 억지로 한 것도 아니었고 대충대충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궂은일들이었지만 방주 생활 내내 감사와 기쁨으로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구원의 은총을 입은 여러분도 이와 같은 마음과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지금은 많은 분들이 신앙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서 그렇게 행하고 계시지요. 각종 예배와 기도도 자발적으로 하시고, 봉사할 것을 스스로 찾아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 청소나, 성전 청소도 자원해서 하시는 분들도 꽤 많은 것을 봅니다. 더울 때나 추울 때나 변함없이 식당 봉사, 교통 봉사, 청소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육으로 볼 때는 힘이 들고 궂은일이지만,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기꺼이 하고 계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 모든 분께 진정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처럼 감사함으로 시작했던 봉사를 혹여 지금은 의무감에서 억지로 하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내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한다.’ 했던 그 마음이 결코 변해서는 안 됩니다. 혹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거나 기분 상하는 일을 당한다 해도 그로 인해 주님께 향한 마음이 변질돼서야 되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힘들게 하신 것이 아닌데 왜 주님께 향한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것은 내 마음의 비진리를 발견하는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잘 붙잡아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으로 더 아름답게 변화되어야 하지요. 노아는 가족들과 함께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결코 녹록지 않은 방주 안의 삶을 묵묵히 성실함으로 지내었습니다.

‘방주’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습니다. 성도님들이 영적인 방주 안에서 살기 원한다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항상 변함없어야 합니다. 이 한 가지만 끝까지 붙잡고 있어도 풍랑 이는 바다와 같은 세상 속에서 능히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지요. 이것을 꼭 기억하여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4절에서도 ‘7일 후에’ 비를 내리기 시작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7일’은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케 하는 유예기간이라 했지요. 하나님 편에서 홍수 심판을 이루실 때에 영계에 정해 놓으신 공의대로 조금의 더함이나 덜함도 없이 정확하게 이루셨음을 나타냅니다. 얼마나 심사숙고하셨는지를 알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칠 일 후에 홍수 심판을 이루겠다.’고 하신 말씀에는 ‘노아와 그의 자손들을 통해 새롭게 인간 경작을 이루겠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도 ‘졸업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란 말이 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대홍수 심판으로 경작의 역사가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본문에 “홍수가 땅에 덮인다.”는 말씀에도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땅’은 ‘어둠’을 뜻하며 ‘홍수’ 즉 ‘물’은 ‘말씀’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홍수가 땅에 덮인다.”는 말씀에는 ‘어둠의 세력으로 인해 물든 이 땅을 하나님의 말씀인 물로 심판하여 새롭게 평정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사람의 마음에 어둠 곧 악을 심음으로써 이 땅에 그들의 세계를 구축하려 하였지요. 오늘날도 여러분은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 원수 마귀 사단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 간음, 음욕, 시기, 질투, 미움, 판단, 정죄, 서운함 등 온갖 비진리와 악들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여서 행하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 심겨지게 됩니다. 이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이 되면 이제 자신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없는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사단이 그 마음과 생각을 불어넣어 주고, 사단이 주관하기 때문에 그때는 자신의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그들의 세계를 구축하려 하고, 어찌하든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속에 비진리와 악을 심어 주어 그들의 세계로 이끌어가려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세상 것을 취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사로잡힐 수 있고, 한두 번 따라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물들어 버립니다. 이런 것들을 지속하면 결국 중독이 되고 늪에 빠진 것처럼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니 세상 것은 과감히 끊어 버리고 결코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11절 전반절을 보시면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 일이라” 했습니다. 성경은 대홍수 심판이 언제 일어났는지 이처럼 날짜까지 정확하게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 노아는 대략 언제쯤 대홍수 심판이 있을지를 알고 있었을까요? 노아는 정확한 날짜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때 즈음’ 정도는 알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역할도 알았지요. 바로 당시 모든 인류는 대홍수로 죽게 되고 자신을 통해 인류가 다시 번성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아는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고 있었지요. 죄로 관영된 세상에서 구분된 삶을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후에 후손을 잇기 위해 아내를 얻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나이 500세가 된 후에야 아들들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노아가 대홍수 심판이 있을 것을 대략 언제 즈음 알았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준비하도록 주신 시간이 불과 몇 십 년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대비하여 방주를 예비할 시간을 충분히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노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노아가 살았던 당시 사람들도 구원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이었지요. 노아는 그 오랜 시간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했습니다.

방주를 짓고 식량을 준비했지요. 또한 사람들에게 대홍수 심판이 다가옴을 열심히 알렸습니다. 그러나 대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뿐이었지요.

성도 여러분, 이 ‘마지막 때’의 상황이 노아의 홍수 때와 참으로 비슷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이미 ‘마지막 때’의 섭리를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비하셨지요.

여기서 잠시 용어 정리를 하겠습니다. ‘마지막 때’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를 의미합니다. ‘말세(末世)’는 ‘예수님께서 탄생한 때부터 재림할 때까지의 세상’이라는 뜻이지요. 이는 사전의 정의와 일치합니다.

또한 ‘세상 끝’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바로 그 시점’과 좀 더 넒은 의미로 ‘그 시점이 포함된 세대’라고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교회와 목자가 있어야 할 것을 아시기에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셨습니다. 노아에게 대략 어느 때 즈음 대홍수 심판이 있을지를 알려 주시고 대비케 하셨던 것과 같지요.

마지막 때에도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시점이 언제인지 ‘날’과 ‘시’까지는 아니어도 대략 어느 때 즈음인지는 알려 주십니다. 공중 혼인 잔치에 참예하기에 합당하도록 신부 단장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하셨듯이 마지막 때에도 수많은 영혼을 구원할 방주를 예비하도록 하셨습니다. 먼저는 영적인 방주인 생명의 말씀을 주셨고, 다음으로는 대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지요.

영적인 신부단장이나 대성전의 건축은 짧은 기간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의 재림의 때를 1년 전에 알게 된다면 단 1년 만에 신부단장을 온전히 할 수 있을까요? 그때까지 꾸준히 신부단장을 한 사람이라면 남은 1년 동안 마무리만 잘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신앙생활을 대충했거나 제대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라면 1년이란 기간은 충분하지 않지요. 마음은 급하지만, 온전하게 준비하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대성전의 건축을 위한 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질적인 성전 건축 공사는 주님의 재림 시점이 가까울 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 물밑 작업은 훨씬 전부터 있어야 하지요. 우선 영적인 준비가 필요합니다. 노아가 당대의 의인으로 인정받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성도들도 대성전을 짓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시간이 필요하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대성전은 성결한 자녀들을 통해 이루시겠다.”고 개척 때부터 말씀하셨지요. 이러한 영적인 조건이 갖춰질 때에 하나님께서도 공의 가운데 큰 재정의 축복을 허락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4월 20일 부활절을 기점으로 성도들이 영의 평준화를 이루기 시작했으니 축복의 때도 그만큼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지난 4년간 혹독한 영의 훈련을 받으며 성도들을 대신하여 90%의 공의를 채웠습니다. 그 결과 수백 명이 영으로 들어왔지요.

영의 평준화 속도는 멈추거나 느려지지 않고,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입니다. 영을, 더 깊은 영을, 그리고 온 영을 침노해 들어가고자 하는 성도님들의 선의의 경쟁이 불붙었지요. 노아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 그대로 준행했던 것처럼 성도님들도 오직 믿음으로 행군하며 말씀대로 신부단장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다 해도 변함없이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의 가운데 참임을 인정받을 때 바라던 바가 실상으로 주어지지요. 이 영의 원리를 꼭 기억하시고 변함없는 믿음을 순전하게 지키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26-06-04 오후 4:51:57 Posted
2026-06-06 오전 1:25:3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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