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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 (100) 노아의 방주 (3) [창 6:19-2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6.05.08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대홍수 심판을 계획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노아가 어떻게 많은 종류의 짐승을 방주로 이끌어 들여 생명을 보존하며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많은 동물을 방주로 이끌어 들이게 된 과정

창세기 6장 19~20절에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종족 보존’의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모든 짐승의 암수 한 쌍씩을 방주에 태우게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창세기 7장 2~3절에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특정 동물들을 지명하여 종족 보존을 위한 암수 한 쌍 외에 암수 일곱씩 또는 암수 둘씩을 더 태우게 하셨습니다. 이는 종족 보존 이 외의 다른 목적이 있었는데 7장 강해 설교때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면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어떻게 수많은 종류의 동물을 빠짐없이 방주로 이끌어 들일 수 있었을까요?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직접 돌아다니며 모든 종류의 동물을 일일이 잡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당시 동물들은 지금보다 온순해서 잡고자 하면 쉽게 잡을 수 있었지요. 그렇다 해도 수많은 종류의 동물을 일일이 붙잡아서 방주로 이끌어 들이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과연 어떻게 이끌어 들였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가 발해짐으로 가능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자 ‘선택받은 동물들’이 그 소리에 순종하여 스스로 방주로 나아왔지요. 여기서 선택받은 동물이란 한 종류 안에서 악성이 덜한 동물들입니다. 예를 들어 사자 중에서도 난폭한 성질을 가진 사자가 있는가 하면 비교적 온순한 성질을 가진 사자도 있지요. 이때 온순한 성질을 가진 사자 한 쌍이 근본의 소리를 듣게 하셨고 방주로 이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2. 근본의 소리에 순종하는 천하 만물

하나님께서는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때 ‘말씀’을 발하신 그 소리가 바로 ‘근본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고 창조의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자 그대로 빛이 창조되었지요(창 1:3).

이처럼 천하 만물은 근본의 소리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의 소리에 반응합니다. 생물들은 물론 무생물이라도 하나님 근본의 소리를 알아듣고 본능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근본의 소리에 자동으로 반응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요. 노아 시대 방주로 나아온 동물들도 하나님 근본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태초 이전, 곧 하나님께서 근본의 우주 공간에 홀로 계실 때에는 빛 가운데 소리를 머금은 상태로 계셨지요. 이때의 빛이 바로 창조의 근본의 빛이며 이때의 소리가 바로 창조의 근본의 소리입니다. 이 빛 안에는 온갖 영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이 담겨 있는데 이런 것들이 소리를 통해 발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의 빛과 소리는 결국 하나요, 항상 함께 존재합니다. 근본의 빛으로부터 근본의 소리가 발해지고 근본의 소리가 발해지는 곳에 근본의 빛도 임하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기 위해 근본의 소리를 발하실 때에 먼저 근본의 빛을 두르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근본의 소리와 함께 근본의 빛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근본의 소리와 함께 근본의 빛도 만물에 입력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했지요. 여기서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바로 ‘근본의 빛’을 가리킵니다. 창조 역사 중 하나님께서 근본의 소리를 발하실 때 만물에 입력된 근본의 빛이지요.

이처럼 천하 만물은 근본의 빛이 둘린 상황에서 근본의 소리로 창조됐습니다. 따라서 창조 때의 상황과 동일한 조건이 형성되면 근본의 소리에 100% 순종합니다. 그런데 대홍수 심판 전까지는 천지창조 시 하나님께서 둘러 주신 근본의 빛이 지구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담이 이 땅에 정착한 후 인구가 늘어나면서 세상이 점점 죄악으로 관영함에 따라 근본의 빛도 점차 거두어졌지요.

그래도 대홍수 전까지는 근본의 빛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동물들에게 근본의 소리를 발하시니 그 동물들이 100%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대홍수가 시작될 때에는 근본의 빛이 거두어졌습니다. 근본의 빛이 땅을 두르고 있다가 사람들의 죄악이 더해짐에 따라 그 빛이 엷어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 땅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근본의 소리’를 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요.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를 베푸실 때에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도 함께하셨습니다(요 1:2~3). 그래서 사복음서 곳곳에 우리 예수님의 말씀에 피조물이 순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무생물인 바람과 물결도 그 소리를 알아듣고 즉시 순종했지요(눅 8:24).

마태복음 17장에는 갈릴리 호수의 물고기가 순종한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성전세로 낼 돈을 마련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일러 주셨지요. 27절에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입에서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갈릴리 호수의 물고기가 순종하여 호수 속에 떨어진 동전을 입에 물고 낚시에 걸릴 준비를 했겠지요.

이 밖에 예수님께서 근본의 소리로써 병자를 고치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을 말씀으로 명하여 낫게 하셨고(마 8장),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도 다만 말씀으로 고쳐 주셨지요(마 15장). 근본의 소리의 역사는 이처럼 즉각적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납니다(시 19:4 ; 사 55:11).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그 마음에 합한 사람들에게 근본의 소리의 역사를 베풀어 주기 원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아니 될 일이 되며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과 유사한 재창조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질병의 치료 같은 각종 문제 해결도 근본의 소리로 역사될 수 있지요. 무엇보다도 근본의 소리로써 악의 쓴 뿌리가 뽑혀지며 의가 꺾이고 단단한 틀도 녹아질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한 노아

창세기 6장 21~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생명을 보존시킬 동물들을 방주에 태울 것을 말씀하신데 이어 식물 곧 식량도 저축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노아는 장차 홍수가 얼마나 지속될지, 방주 안에서 얼마나 살아야 할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방주에 타는 동물은 총 몇 마리인지, 그 동물들의 식량을 얼마나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지요.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일일이 동물의 수를 계수하거나 날수를 계산해서 식량을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방주를 어디에 지어야 하는지, 작업 속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임의로 정하지 않았지요. 오로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마음에 주관 받은 대로 준비해 나갔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노아는 어떻게 그 많은 식량을 준비하고, 저장했을까?’ 의아할 수도 있지요.

이처럼 육신의 생각은 육의 한계에만 머물기 때문에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노아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식물을 저축하라 하시면 저축했고, 방주를 지으라 하시면 지었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었기에 모든 것이 형통하였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시니 방주를 짓는 과정이 어렵지 않았지요.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당시 문명이 매우 발달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삶이 원시적이지 않았고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적인 기계와 같지는 않더라도 거대한 방주를 능히 지을 수 있는 기계적인 장치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노아가 이런 지식과 지혜가 있었기에 순종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기에 그분을 온전히 의뢰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아멘”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하기까지 한두 달이 아닌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는 조급하게 오늘일까 내일일까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따라 순종만 할 뿐이었지요. 늘 하나님과 교통하니 아버지께서 행하실 줄을 믿고 말씀대로 이뤄짐을 믿으니 모든 준비와 실행이 가능했고,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보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세세한 것까지도 주관하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반면에 순종할 마음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은 축복을 손에 쥐어 주어도 결국 자기 뜻대로 가다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사업할 때에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계산 속에서 모든 계획을 세워 놓고 하나님께 인도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해 주시려 해도 자기 마음에 정한 대로, 자기 보기에 더 좋은 길로 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 풀어 엉뚱한 길로 가면서 자신은 말씀에 순종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려줘도 수긍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의견과 뜻을 상대에게 납득시키려고 하지요.

이처럼 자기적인 생각이나 이론, 지식의 틀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너무 쉽지만 이런 ‘자기’를 고집하면 순종이 어렵습니다. 순종한다고 하지만 불순종이 되기도 하고 불순종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고 양식을 준비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시는 대로 순종했지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었기에 모든 것에 형통했고 ‘여호와 이레’의 역사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온전한 순종을 함에 있어서 경험이나 지식, 기술 등이 아예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첫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지만 노아는 그만한 지식과 기술도 활용할 줄 알았지요. 이처럼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지식과 경험, 기술과 재능이 기본적으로 바탕이 돼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음식점을 차리려고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본인은 요리에 대해서 잘 모르고 가게 터도 외진 곳에 잡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음식점이 잘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한다면 과연 잘 되겠습니까?

물론 영적인 믿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받으면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속에서도 형통한 복을 받을 수 있지요. 하지만 사람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조차 전혀 하지 않고 복 주시라고 기도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복 받을 ‘그릇’은 준비하지 않고 무조건 받기만 바라는 것과 같지요.

이와 반대로 아무리 풍부한 경험과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복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자신의 육적인 능력과 한계 안에서 성실히 노력한 만큼만 성과를 낼 수 있지요. 이런 사람은 자신의 육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을 만나면 결국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 기술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지요.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의 길을 인도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노아의 순종을 통해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온전한 순종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변함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기간이 성경에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방주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몇 달 혹은 몇 년 안에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따라서 노아가 방주를 짓는 오랜 기간 동안 세상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노아의 하는 일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으니 그를 어리석다 놀려대기도 했지요.

여러분이 만약 이런 상황 속에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이 생기지 않겠는지요? 그런데 노아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수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지요.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며 조바심을 내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묵묵히 방주 짓는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순종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디게 성취되는 것 같아도 한 번 하신 말씀을 끝까지 믿고 변함없이 순종의 행함을 보여야 하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장 정확한 때에 맞추어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벧후 3:9에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당장 이뤄지지 않으면 의심을 합니다. 충만함이 떨어지고 시험에 들기도 하지요.
노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조바심 내지 않았고 굳건한 믿음으로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순종했습니다. 노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왜 하나님께서 대홍수 심판을 이루려 하시는지, 자신과 가족들은 구원을 받아 장차 어떤 삶을 이어가게 되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 심판의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므로 노아는 홍수로 멸망당할 사람들로 인해 늘 마음이 애탔지요. 방주가 완성되면 곧 홍수가 닥칠 텐데 이를 알지도 믿지도 못하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사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이 노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이에 노아는 열심히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없었지요. 이럴 때에 노아가 하나님께 고백했던 내용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저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여, 지금 짓는 이 방주로 인하여 그날이 임박함을 느끼고 있으되 이 방주로 인해 기쁜 것이 아니요 오히려 안타깝고 심히 안타까울 뿐이니이다.

내가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고, 때를 좇아 아버지의 말씀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만들어 나갔으며, 또한 모든 분야에 있어서 밤낮 충성하였으나 이렇게 하나가 지어지고 하나가 완성되면 될수록 그날이 임박함으로 인하여 안타까울 뿐이니이다.

저는 아버지의 주신 명령 가운데서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명심하여 하나하나를 이루어 옴으로 날이 갈수록 방주의 모양이 드러나고 정확하게 준비되어 가는 만큼 세상의 사람들을 볼 때에 심히 안타깝고 안타까울 뿐이니이다.

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제가 앎이니이다. 그들에게 전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그들에게 말한다 할지라도 듣지 못함이니이다. 그들은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고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며 정녕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날들을 보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곳에 저와 저의 가족들이 들어가며 아버지의 말씀하신 대로 정해진 것들이 들어가게 되어졌으되 세상에 있는 저들은 어찌할까 생각할 때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욱 진해질 뿐이니이다.

그러나 이처럼 안타까워한들 어찌 아버지의 마음과 같을 수 있으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겠나이까? 저는 정녕 아버지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의 모든 것을 다 버릴 수가 있음이나니 아버지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며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왜 아버지께서 방주를 내게 만들라 하셨고 내게 하나하나 이루시는지를 내가 느끼나이다.

그러나 저의 마음이 이토록 안타까운 것은 그날이 임박함을 느낌이나니 저들을 향한 저의 이 안타까운 마음을 아버지여 이해하여 주소서. 아버지여, 어찌하리이까? 그들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며,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고 있나이다. 아버지의 계획하심 속에서 이처럼 모든 것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저들이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저들을 돌이킬 수가 있겠나이까.

아버지여,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께서 명하시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하리니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 가운데 이루어짐이니이다. 이 아들이 하나도 실수하지 아니하고 정확하게 이룰 수 있도록 늘 주관하시고 인도하여 주소서.”

성도 여러분, 노아의 애타는 심정이 느껴지시는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의인 노아는 그만큼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혼들을 바라보시며 애타하시고, 아파하시는 것을 노아도 함께 느끼고 있었지요.

성도님들도 마음을 영으로 일구는 만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집니다. 이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보다 더한 상황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마 24:37-39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원하셔서 영적으로 ‘노아의 방주’와 같은 말씀 곧 ‘십자가의 도’를 밝히 알려 주셨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일로 보였듯이 고전 1:18 전반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후반절에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와 같은 심정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열심히 전파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참임을 확증하는 권능의 역사와 함께 외치고 외쳐야 하지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때 섭리를 우리 성도님들이 함께 이뤄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2026-05-07 오후 6:32:43 Posted
2026-05-09 오전 1:14:09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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