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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99) 노아의 방주 (2) [창 6:16-1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6.05.01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재료와 크기와 구조까지 알려 주셨는데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노아의 후손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홍수 심판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 명심해야 하는지 방주 곳곳에 의미를 담아 주셨지요. 오늘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의 양식을 알려 주신 후 홍수 심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노아와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방주에 문과 창을 내고 상중하 삼 층으로 짓게 하신 뜻

본문 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 층으로 할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방주에 창도 내고 문도 내도록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수 심판이 끝나면 노아의 자손들로 인류 역사의 계보가 새롭게 시작되지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방주에 창과 문을 낸 것처럼 노아의 자손들이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을 믿는다 하여 세상을 향한 문을 굳게 걸어 잠글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활짝 열어야 합니다. 단, 세상과 섞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역청으로 방주 안팎에 칠하라’는 말씀에도 이와 같은 뜻이 담겨 있었지요. 세상과 철저히 구분되어 물들지 말되 세상을 향해 창과 문을 열고 영적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어둔 세상을 등질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영적인 빛을 비추어 어둠을 물리쳐야 합니다.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곳에서는 소금처럼 정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지요.

교회와 성도가 세상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해서 세상을 등지면 복음은 누가 전합니까? 전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확장하겠는지요. 이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졌던 마음가짐과 자세를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각 사람에게 맞는 모습으로 다가가 복음을 전했지요(고전 9:19~22).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좋은 것이라 하여 강압적인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이 스며들 수 있도록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먼저 이해했습니다. 성도님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교회에서만 빛을 발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교회 안에서는 착하게 말하고 행동하다가 집이나 직장에 가서는 세상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몸을 녹이면서 불을 밝히는 촛불은 어디에서나 빛을 냅니다. 빛의 역할을 하는 성도도 그러합니다. 교회에서 빛을 낸다면 집이나 가정에서도 빛이 꺼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씀하시며 세상의 빛이 되는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보여 주는 ‘착한 행실’이 곧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착한 행실을 보인다면 ‘과연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르구나.’ 하고 인정을 받게 되지요. 결과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방주에 문과 창을 내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음으로 방주를 ‘상중하’ 삼 층으로 짓게 하신 데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늘 마음에 생각하며 그 가운데서 떠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와 함께 인간 경작의 역사가 크게 세 시대로 구분됨을 나타냅니다. 먼저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사역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대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셔서 사역하시는 주님의 시대이지요. 마지막으로 성령의 시대, 곧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부터 인간 경작이 마무리 될 때까지의 기간입니다.

홍수 심판으로 인간 경작의 전환점을 맞는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구조를 통해 역사의 주관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2. 홍수를 땅에 일으켜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제작 양식을 알려 주신 후 다시 천명하십니다. 바로 본문 17절에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장차 홍수 심판이 어떻게 나타날지를 다시 한 번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는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물에 사는 동물을 제외한 모든 육지 동물과 새들까지 포함하지요. 하나님께서 왜 사람과 함께 동물들까지 홍수로 멸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해 드렸습니다. 당시 땅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인간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 했지요. 사람들이 짐승의 형상을 본따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일이 많았던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3절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짐승과 새들이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 곧 사람에게 속한 것들이기 때문에 사람과 함께 멸하신 것이지요. 쉽게 말해 연대 책임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홍수를 ‘땅에 일으키겠다’고 표현하신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단지 당시 땅 위에 살던 사람들과 동물들을 모두 멸하겠다는 의미만 담긴 것이 아니지요. 사람이 살던 삶의 터전 자체를 아예 멸하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당시 홍수로 인해 이 땅에 얼마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됐는지를 상상해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당시 홍수 심판이 컵에 물을 따르면 수면이 점차 높아지듯이 지구가 서서히 물에 잠기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지구는 홍수로 인해 엄청난 지각 변동을 겪었지요. 그 결과 홍수 후의 지구는 그 전과 아주 다른 환경에 처하게 됐습니다. 지형도 완전히 변했고 기후도 바뀌었으며 생태계 환경도 무척 달라졌습니다. 홍수로 인해 지형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좀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7장 24절에 보면 “물이 일백오십 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했습니다. 비가 내린 기간은 40일이지만 지구 전체가 완전히 물에 잠겼던 기간은 150일이지요. 이 물이 다 빠지고 땅이 굳기까지는 또 150일 이상이 걸렸습니다. 지구가 150일 동안 완전히 물에 잠긴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지구 표면이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한 상태였을까요? 아닙니다.

지구는 태양과 달 사이에 끼어 있어서 서로 끌어당기는 힘 곧 인력이 작용하게 됩니다. 태양과 달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지구를 뒤덮은 물이 양쪽으로 불룩하게 나오지요. 여기에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돕니다. 지구는 도는데 인력에 의해 물은 붙잡혀 있으니까 물이 지구를 휩쓸고 돌게 됩니다.
이렇게 지구를 휩쓸고 도는 물은 산과 같이 높은 지대를 허물어뜨립니다. 그리고 무너뜨린 흙을 몰고 가다가 낮고 넓은 곳을 만나면 쭉 쌓아놓습니다. 이 현상이 다섯 달 동안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 결과 홍수 이전에 지구에 있었던 문명이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물이 빠지면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지형이 형성되었지요. 바로 이것이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 자체를 전부 멸하시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3.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이어지는 본문 18절에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신 ‘언약’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홍수 심판에서 구원하고 그들을 통해 인간 경작의 역사를 새롭게 이루어 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말씀하시며 그 뜻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세우신 언약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이루시지요. 민수기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한 대로입니다. 또한 이사야 55장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기 위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공의 가운데 이루시고, 사단이 송사할 수 없도록 공의를 쌓아 가시지요. 뜻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미리 미리 준비하시며 상황과 환경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대홍수 심판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도 오래전부터 역사하셨지요. 노아의 직계 조상들 대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노아는 조상들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노아 자신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악된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았습니다. 노아의 아내와 자녀들과 며느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노아의 가족이라 하여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노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노아가 전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대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이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언약을 하시면 그것을 받는 편에서도 합당한 공의를 채울 때 언약의 효력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시며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들은 출애굽 2세대였지요. 직접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출애굽 1세대 중에서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어기신 것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습니다. 반대로 출애굽 1세대 대부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닥치자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지요.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드렸습니다(민 32:11~12). 결국 갈렙은 첫 번째 가나안 정탐 때 보고 왔던 헤브론 산지를 얻었고 대대손손 그곳을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변개함 없는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실상으로 받을 수 있는 공의를 채웁니다.

물론 모세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지만 그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져야 했지요. 백성들을 가나안 땅의 목전까지 인도하여 자신의 사명을 모두 마쳤을 때 가나안 땅보다 훨씬 좋은 안식처인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면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편에서도 온전히 믿고, 끝까지 기도할 때에 언약하신 말씀이 실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능력과 권능의 인침을 받은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침을 받고도 믿지 않거나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가 안 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는 분들은 기도하면 할수록 능력이 자꾸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능력 인침도 이러한데 온 영으로 들어와서 권능의 인침을 받는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고 소경이 눈을 뜨며, 벙어리가 말하며 앉은뱅이가 걷고 뛰면 얼마나 크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4. 능력과 권능을 받기 위한 공의

성경에 보면 영으로 들어오면 능력이 임하고, 온 영으로 들어오면 권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 후반절에 예수님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하시며 여러 가지 표적이 나타난다고 말씀하지요. 성경에는 ‘믿는 자’라고 표현됐지만 우리는 믿음에도 분량이 있음을 알지요.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영을 이뤄 믿음의 4단계가 되어야 하며, 권능을 받기 위해서는 온 영을 이뤄 믿음의 5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데 영, 온 영을 이뤘다 하여 능력과 권능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 능력과 권능을 받기까지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영으로 들어가면 능력의 티켓을, 온 영으로 들어가면 권능의 티켓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불같이 뜨겁게 기도해야 점점 능력이 향상되며 더 높아집니다. 권능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있기 때문에 항상 불같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이뤄드리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바로 많은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열심을 내다 보면 아버지 하나님께 더 큰 능력을 받아야 함을 확연히 느끼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이 결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되지 않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능력 받기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은 결국 받을 수 있습니다. 주의 종이나 일꾼으로써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능력이 없으면 부흥도, 심령을 변화시키지도 못 합니다. 그러므로 영혼들을 사랑한다면 능력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권능을 받았어도 끊임없이 기도를 합니다. 앞으로 이방인이나 악하고 믿음없는 사람들을 깨뜨리며 응답받게 하고 치료하며 재앙도 물리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도 몇 갑절의 더 큰 권능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절감해서이지요.

5. 능력과 권능의 차이

‘능력’의 영적인 정의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는 힘’입니다. ‘능력’을 받으면 불가능이 없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능력을 받으려면 영으로 들어왔다 해도 불같은 기도를 무수히 쌓아야 합니다. 또한 능력의 인침을 받았다 해도 불같은 기도를 할 때에 능력 행함이 불일 듯 일 수 있습니다. 하물며 능력보다 한 차원 높은 ‘권능’을 행하려면 얼마나 많은 기도를 쌓아야 하겠는지요.

‘권능’은 ‘권세 있는 능력’입니다. 능력과 함께 권세도 따릅니다.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엄위 있고 영광스런 힘이요,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위로부터 난 하나님의 명(命)’입니다. 이 영적인 권세는 예리한 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예리한 칼을 어린아이들에게 줄 수 없듯이 영적인 권세도 아무에게나 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서 악을 뽑아 버리고 성결을 이룬 사람에게 선과 사랑을 채운 만큼 권세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권능 받은 종들은 절대로 변개함이나 배신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연단해서 그만큼 자격이 충분히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배신하거나 죄짓지 않을 것을 아셔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권능을 입히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권능을 주었다가 빼앗아가는 일은 없지요.

그러면 능력과 권세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연로한 아버지와 건장한 아들이 있을 때에 아들은 아버지보다 힘도 세고 지혜가 있지요. 능력 면을 본다면 아들이 더 큽니다. 그러나 권세는 누가 더 큰가요?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권세가 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질서가 파괴되는 가정에서는 아버지를 우습게 여기며 아버지 말에 순종도 안 하지만 질서가 잡힌 가정이라면 아버지 권세가 절대적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 왕정 시대에 대국의 사신이 왕명을 가지고 속국에 가면 왕과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사신’이 가진 권세로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왕의 권세를 가지고 대신 갔기 때문이지요. 단 왕이 사신을 선택하여 보낼 때는 아무나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택하지요.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영적인 권세를 허락해 주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합당한 자격을 가진 이에게 허락하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너나 나나 없이 받을 것입니다. 가끔 성결도 안 되고 말씀도 모르는 사람들이 은사를 받았다고 하다가 교만해져 사단의 역사를 받는 것을 봅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신 게 아니라 사단이 준 것입니다. 그러니 병들고 모든 하는 일이 안 되며 가정이 엉망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영의 세계는 말씀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성결을 이루어야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합당한 자에게 능력이나 권세를 주십니다.

영적인 권세와 능력을 겸한 것이 바로 ‘권능’입니다. 시편 62편 11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 ‘권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공의에 비춰 합당한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 권능을 허락해 주시지요. 참고로 성결되지 않았는데도 병균에 의한 질병을 고치는 역사를 베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영혼을 사랑하여 불같은 기도를 무수히 쌓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신유의 은사를 주신 것이지요.

신유의 은사에 대해 정확히 모르면 능력을 나타내도 신유의 은사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권능을 나타내어도 신유의 은사가 강하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지요. 하지만 신유의 은사는 능력과 권능과는 다릅니다. 신유의 은사는 어떤 질병과 균에 의한 것을 치료하는 것이지만 능력과 권능은 퇴화돼 버린 뼈, 부러진 뼈, 끊어진 힘줄 등을 기도해서 치료해 주는 것이지요.

또한 신유의 은사는 간절한 사랑의 기도로 인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때도 있습니다. 가령 주의 종에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성도가 간절히 믿음으로 기도를 요청하는 경우, 하나님께서 그 성도의 순수한 믿음을 보시고 역사해 주기도 하십니다. 이런 경우들은 하나님의 권능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6. 제자들이 권능을 행할 수 있도록 공의를 쌓으신 예수님

마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에는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산에서 밤이 마치도록 기도하고 내려오신 후 있었다고 기록돼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대신하여 권능을 행할 열두 제자를 택하여 세우시기 위해 먼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쌓으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스스로 권능을 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요. 다만 예수님을 신뢰하여 붙좇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대신 기도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공의를 쌓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누가복음 9장 6절에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6장 12~13절에는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했지요.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스스로 권능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눠 주신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래도 그 열두 사람이 제자로 택함을 받고 예수님을 대신하여 권능을 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지요.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기에 자신의 삶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중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뽑혔지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오직 예수님과 함께함으로 권능을 행했다면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가복음 16장 20절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장 43절에는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 했지요.

이때도 물론 주님께서 영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셨지만 제자들도 믿음이 예전보다 많이 성장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참 믿음을 갖게 되었지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열두 제자 모두가 권능을 행했던 것은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실 때 그들 모두에게 권능을 허락해 주셨다 해도 공의 가운데 합당한 자격을 갖춘 만큼 진정한 권능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026-04-30 오후 3:31:44 Posted
2026-05-02 오전 7:31:0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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