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까지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한 대가로 그에게 내린 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계속 그와 관련된 내용으로 수고를 해야만 열매를 거두게 되고 육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창세기 3장 18절 후반절~19절 전반절에 보면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양식으로 ‘채소’만 먹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밭의 채소’는 사람이 땅에서 수고하여 얻는 소산을 대표하지요. 아담이 양식을 얻으려면 이제는 얼굴에 땀이 흐를 정도로 수고해야 함을 다시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분야에서도 수고해야만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도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주신 대로 해야 하지요.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이처럼 기도하셨지요.
바로 이러한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과 축복을 끌어내립니다. 영의 세계가 뚫어지며 능력이 임하고 마음을 할례해서 성결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3년 6개월의 가뭄을 끝내는 비를 끌어내렸지요.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 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비를 내려 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1절을 보면 “많은 날을 지내고 제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말씀하셨지요. 엘리야는 그저 단순히 “이제 비를 내려 주세요.” 하며 대충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응답이 올 때까지 간절히 믿음으로 간구했지요. 그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 했습니다(왕상 18:42).
엘리야는 왜 이런 자세를 취했을까요?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증거입니다. 생명을 거는 애절한 기도를 할 때에는 창자가 끊어질듯한 아픔이 느껴지므로 자연히 허리를 굽히게 됩니다. 허리가 고꾸라져서 얼굴이 무릎 사이로 들어갈 정도가 되지요. 당시 엘리야 선지자도 그만큼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면 단 한 번의 기도로 응답이 왔을까요? 아닙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기도했어도 응답이 없었지요. 완전수 7, 곧 일곱 차례 기도했을 때 비로소 응답이 왔습니다. 그것도 그 순간 비가 펑펑 쏟아진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났을 뿐이었지요. 엘리야는 그것을 보고 응답을 확신했고 비가 올 것에 대비했습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 5장 17~18절에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말씀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내렸지요. 그 비결은 생명을 내건 기도에 있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이 없어야 합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이 없고 빛 가운데 행해야 무엇이든지 담대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1~22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하셨지요. 이러한 기도 응답의 원리를 잘 활용하여 올해 기도제목을 꼭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2.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창세기 3장 19절 후반절에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이 이제 첫째 하늘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이 지구의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생령이 되었습니다. 첫째 하늘의 공의, 곧 육의 법칙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였지요. 그런데 범죄함으로 인해 영의 기운이 빠져 나가자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육의 사람으로서 육의 법칙을 따르는 처지가 되었지요. 세월이 지날수록 몸이 늙고 쇠약해지다가 마침내 죽으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육의 생명이 끊어지면 껍데기와 같은 몸은 결국 한 줌 흙이 됩니다. 이에 대해 시편 104편 29절 후반절에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 했습니다. 전도서 3장 20절에도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껍데기에 불과한 육의 몸이 아니라 알맹이인 영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결국 썩어서 흙이 될 몸을 위해서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생각하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누가복음 12장 19절에 이런 부류에 속한 한 사람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말했지요. 그런데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동안 모아둔 소유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그 영혼은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말씀했지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주관을 따라서 순종해서 살면 결과는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원수 마귀 사단이 인도하는 대로 가고 결과는 지옥입니다(갈 6:8)
그러면 이제 우리는 마음과 재능, 시간과 물질을 무엇을 위해 심으시겠습니까? 육체를 위해 심겠습니까 아니면 성령을 위해 심겠습니까? 우리는 결국은 썩어 없어질 이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 심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세토록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광과 존귀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선악과를 먹은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뱀, 하와, 아담에게 내리신 저주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계속 보겠습니다.
3.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창세기 3장 20절에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하였습니다. 아담은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는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육적인 의미입니다. 하와는 인류 첫 여성이지요. 에덴동산의 모든 사람이 아담과 하와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도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지요. 따라서 하와는 모든 인류의 어미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와를 ‘모든 산 자의 어미’라고 한 것입니다.
둘째 영적인 의미에서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됩니다. 오늘날 지구의 인구가 약 70억이나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산 자’는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참 생명인 ‘영생’을 소유한 사람만이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해 생명의 씨가 잠자고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영생을 얻어 영적으로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와’가 영적으로 산 자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앞으로 하와의 자손 중에서 영이 살아나 영생에 이를 사람들이 나옴을 예시한 것입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도 구원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서 경작 받으며 자신들의 죄를 철저히 회개했지요. 그 결과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뜻의 ‘하와’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산 자의 어미’가 있듯이 ‘죽은 자의 어미’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란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지요. 그러면 ‘죽은 자의 어미’는 누구일까요? 바로 ‘루시퍼’입니다.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로서 악한 영들의 우두머리이지요. 루시퍼는 그의 사자들과 사단, 마귀, 귀신들을 통해 어찌하든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으로 이끌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악한 영들은 마음이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또 다른 사람들을 사망의 길로 끌어오게 하지요.
이에 대해 마태복음 23장 15절에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루시퍼는 인간 경작이 시작된 이래로 악한 영들을 통해 계속해서 ‘지옥 자식’을 낳고 있지요.
따라서 루시퍼를 ‘죽은 자의 어미’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성별을 따져도 루시퍼는 여성형이지요. 계시록 19장 2절에도 루시퍼에 대해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라고 했습니다. 루시퍼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인 음행을 하게 하지요.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게 하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게 만듭니다. 죄악의 낙을 누리다가 결국 영원한 사망인 지옥에 이르게 하지요.
베드로전서 5장 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근신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계시록 3장에 나오는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혹여 교회는 다니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아니면 중한 죄를 지어 성령이 소멸되어 가는 분이 있는지요. 그런 분은 모든 죄를 주님께 자복하고 죄 사함의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4.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이유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이 땅으로 내려오기 전에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가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벗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므로 하나님께서 그 수치를 가려 주신 것입니다.
생령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발가벗고 살았지만 전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영으로 들어온 분들은 이런 말씀이 잘 이해가 됩니다. 영에서 30%, 50%에 들어간 분들은 어떤 악한 생각이나 비진리를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판단, 정죄가 나오지 않고, 미운 사람을 봐도 미움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미움이나 시기, 질투가 없기 때문에 그냥 사랑만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간음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각 속에서도 간음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만일 대상을 보면 그나마 떠올려질 수도 있겠지만 음욕이 없으니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발가벗고 살았어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이 외에 영으로 들어오고 온 영으로 들어오면 냄새나 소리까지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영으로 50%에 들어가기만 해도 더러운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하면 안 맡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TV 소리를 크게 틀어놓아도 안 들으려고 하면 차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아무리 비진리를 수군거려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저만 해도 금요철야 찬양 시간에 제 옆에서 북을 아무리 쾅쾅 두드려도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시끄럽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소리를 안 듣고자 하면 들리지 않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안 씁니다. 다른 것도 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1단계나 2단계에 있는 분들은 이런 말씀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으로 들어오고, 영에서 30%를 넘어서면 더 이해가 되고 50%를 넘으신 분들은 이것을 100% 공감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렇게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에 모든 비진리는 차단을 하니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비진리가 차단되지 않으니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은 물론, 선악을 알게 되니 자신들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깨닫는 만큼 후회하며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히신 가죽옷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2. 가죽옷에 담긴 영적인 의미
먼저, 가죽옷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떠나 지구로 내려가 살게 될 아담과 하와가 매우 안쓰러우셨습니다. 그들로 인해 마음이 아프셨던 것입니다. 이에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사랑의 표현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지요.
지구의 환경은 에덴동산과 전혀 다르며 그들이 범죄하기 전의 상태와도 달랐지요. 아담이 범죄하니 그에게 속해 있는 모든 만물이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때 지구의 땅도 저주를 받아 여러모로 변질되었습니다. 저주받기 이전에 생령 아담이 지구,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와서 있었던 때와는 전혀 환경이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변질된 땅에서 받게 될 충격과 몸소 겪어야 할 고통이 어떠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몸을 보호하게 하셨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자상하신 인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다음으로, 가죽옷은 ‘구원의 끈’을 의미합니다.
가죽옷은 하나님과 이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구원의 끈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놓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은 은혜의 끈이요, 구원의 끈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이 땅에 내려온 후로는 예전처럼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마치 하나님을 마주 대한 듯 대화할 수 있었지요. 그들을 구성하는 영혼육 중 영이 주체였기에 영이신 하나님과도 밝히 교통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혼이 주체가 되었지요.
그렇다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의 기운이 단번에 모두 빠져나가지 않고 서서히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영의 기운이 남아 있는 만큼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도 하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는 인류 역사의 초기였기 때문에 세상이 악에 물든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지요. 세상에 죄악이 널리 퍼지는 만큼 사람들이 육으로 변질되는 만큼 하나님과의 교통이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지금은 죄악이 심히 관영한 마지막 때로서 하나님과 교통하기가 더 어려워졌지요. 이런 세대 중에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마음이 아주 깨끗해야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볼 때에 송사거리가 전혀 없어야 하고 흠과 티도 없이 깨끗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어둠의 영들이 권세 잡고 있는 공중을 뚫을 수 있는 영적인 권세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악은 모양도 없이 청결해야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나 빌립 집사는 마음이 청결하므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은 세상이 죄로 관영되어 마음이 청결하기가 쉽지 않은 때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청결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만일 죄를 품고 기도한다면 기도가 상달이 안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원수 마귀에 의해 가로막혀서 기도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가 없이 기도하면 원수 마귀가 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천군 천사가 그냥 두지 않고 도와주기 때문에 아버지 보좌까지 뚫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거룩하고 온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바로 안다고 하면 세상 것을 과감히 끊어 버리며 속히 내 안에 있는 비진리, 악은 모양이라도 빼내 버리게 됩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사업터, 일터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먼저는 영이 잘되어야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이 잘되는 것을 택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계시’는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내린 말씀이지요.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사람에게 계시를 주셔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는 반드시 ‘증험’과 ‘성취함’이 따릅니다.
신명기 18장 22절 말씀에 보면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했습니다. 그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가 나타나지요. 곧 말씀 그대로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이 땅으로 내쫓긴 후에도 간간이 하나님과 교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교통의 빈도는 줄어들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될 것을 아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본격적으로 인간 경작을 받게 되면 선악과를 먹은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마음 깊이 깨닫게 됩니다. 선악을 알게 되는 만큼 자신들이 범한 죄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 주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구나. 그렇게 단단히 경계하셨는데 그 말씀을 무시했구나’ 하며 이렇게 후회하며 낙담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가죽옷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끝까지 놓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연결된 끈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금 소망을 가질 수 있었지요.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가죽옷’ 바로 이 사랑의 징표, 구원의 끈이 있었기에 아담과 하와는 이 땅의 삶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회개할 수 있었고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증거하겠습니다. <끝>
2025-11-13 오후 4:06:02 Posted
2025-11-27 오후 4:14:18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