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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 방송사건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 홍영식 집사
출처
만민뉴스 제3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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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05년 10월 9일 일요일
조회수: 15805
- 홍영식 집사 ( 이학박사, 대전만민교회 남선교회 회장)
1997년 6월, 저는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목전에 두고 학교에서 밤샘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내 김현주 집사는 임신 중이었는데, 교사 생활과 집안살림에 무리를 했던지 약 8개월 만에 조산(早産)하게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었으나 50여 일을 인큐베이터에서 살아야 했지요.
조산(早産)으로 태어난 아들에게 뇌발육 부진 증상이 나타났지만
갓난아이를 병원에 두고 상심한 마음으로 퇴원한 아내는 처제 김현숙 집사를 통하여 이재록 목사님의 간증수기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를 읽게 되었습니다.
간증수기를 읽고난 후 큰 은혜를 받은 아내는 이재록 목사님을 꼭 만나야겠다는 마음에 본교회 금요철야예배를 참석하였고 말씀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지요.
그 해 10월,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수과정(포스트 닥터)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생후 7, 8개월이 되었음에도 아들 준수의 발육이 더딘 것 같아 병원 진단을 받았지요. 그 결과 출생시 뇌손상으로 인한 후유장애 증세가 나타나고 있으며 심각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1. 간증수기를 읽는 아내 김현주 집사 2. 어릴 적 아들 대범이
2주연속 특별 부흥성회에 참석하여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고
1998년 4월, <제6회 이재록 목사 2주연속 특별 부흥성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는 믿음으로 기도 받으면 아들이 치료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녀들과 함께 귀국했고 저도 5월 초에 귀국하였습니다.
부흥성회 기간 중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 기도를 받은 후 뇌발육 부진으로 인한 장애로 울면서 자랐던 준수가 울음이 그쳤을 뿐 아니라 초점이 흐렸던 눈동자가 정상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가족들의 믿음이 날로 성장하게 되었고, 아들은 차츰 건강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요.
저희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연수과정을 마치고 그 해 10월에 귀국하여 본교회에 등록하였습니다.
임신의 축복과 함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을 깨달아
1999년 1월, 하나님께서는 아내에게 임신의 축복을 주셨고 얼마 후 아들 준수의 기력이 점점 약해지더니 결국 하늘나라로 데려 가셨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로서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있었지만 이내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을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축복을 주신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마음 중심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부모님께서도 '너희들이 어떻게든 아들을 치료하려고 부흥성회 참석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구나.'라고 하시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준수를 통하여 영적인 믿음을 주신 하나님! 치료의 역사를 체험하며 잘 성장하게 하셔서 행복한 추억을 남기신 후에 더 이상 준수로 인해 가족들이 고통 받지 않도록 새 생명을 주시고 천국으로 데려 가시는 섬세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니 참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아들에 대한 모 방송의 거짓 보도로 애통하며 오직 믿음과 선으로 기도하니
그런데 1999년 4월말 경, 아내는 특별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언니 아들이 뇌성마비라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병상련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집에 방문하겠다는 요청을 쾌히 승낙했지요.
뇌성마비 아이의 이모라고 신분을 밝힌 여인은 한 시간 정도 대화하면서 아내가 전하는 간증에는 관심이 없고 제 아들이 정말로 치료를 받았는지, 천국에 간 아들을 만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자극하면서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니 잠시 슬퍼졌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간증하고자 했지요.
그러자 그분은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바삐 자리를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전하고 싶어 뇌성마비 아이의 엄마에게 직접 연락하여 돕고 싶다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극구 사양하다가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에 전화를 해 보니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였습니다. 순간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전혀 다른 의도로 접근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더구나 몰래 카메라를 소지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지요.
모 방송 「PD 수첩」 본교회 관련 왜곡보도 직후 「제7회 이재록 목사 2주연속 특별 부흥성회」시 무수히 나타난 치료의 역사를 취재하기 위해 본교회에 몰려든 언론사 취재진들
그러던 1999년 5월, 모 방송에서 본교회 관련 내용이 보도된다기에 관심 있게 보고 있다가 얼마나 놀랐는지요. "1998년 11월, 뇌성마비 아들이 깨끗이 나았다고 증언을 했던 신도를 찾아가 보니…"하는 멘트와 함께 아들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축복은 일체 삭제된 채 사실을 왜곡한 장면이 방영되는 것이 아닙니까.
당시 아내와 저는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아내의 얼굴이 방송에 나오고 신분을 위장하고 몰래 카메라를 소지하는 등 일방적이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취재당한 배신감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평소 이재록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 상대를 용서하며 치료의 하나님을 만난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고자 힘썼지요.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부부를 마치 곤경에 처한 것처럼 거짓 보도한 방송으로 인하여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기를 바라며, 모 방송국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조산의 위기에서 지켜 주시고, 그 해 10월 5일 정상적이고 건강한 아들 대범이를 분만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함께 순산의 축복, 직장의 축복 등이 넘쳐나
하나님께서는 IMF로 인해 취직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고려대학교에서 연구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고 2001년 3월에는 대덕연구단지의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최상의 조건으로 근무하게 되었지요.
직장 관계로 대전에 내려가 살면서도 대전만민교회에서 남선교회 기관장 사명을 시작으로 열심히 기도하며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 노력하자, 2005년에는 남선교회 회장이라는 큰 사명으로 축복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소원이셨기에 근무 시간에는 전적으로 전공분야인 무기화학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순간순간 '연구시간을 더 가져야 하는데…'하면서도 제 마음에는 영혼구원이 자리잡고 있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했습니다.
연구에 최선을 다하면서 교회 부흥을 위하여 봉사와 심방에 주력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지혜와 명철을 주심으로 많은 연구 실적을 올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대학 교수 임용의 축복과 함께 모든 마음의 소원도 응답받아
2005년 6월,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서 교수채용 공고가 있었는데 제 전공은 무기화학으로, 2-3년에 한 번 정도 교수를 채용하기 때문에 매우 경쟁률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8월 초에 14명 중 5명을 뽑는 1차 서류전형에 선발된 후, 3명을 선발하는 2차 전형에 합격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지요.
얼마 후 공개 전형 테스트를 무난히 통과하고 마지막 면접시 교육 철학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도를 좇아 인내할 때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는 말씀을 예로 들며 참진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8월 말에 최종합격자로 선정되어 대학 교수 임용의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더불어 온 가족이 더욱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큰 축복의 길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니 모든 감사와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올립니다.
1997년 6월, 저는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목전에 두고 학교에서 밤샘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아내 김현주 집사는 임신 중이었는데, 교사 생활과 집안살림에 무리를 했던지 약 8개월 만에 조산(早産)하게 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었으나 50여 일을 인큐베이터에서 살아야 했지요.
조산(早産)으로 태어난 아들에게 뇌발육 부진 증상이 나타났지만
갓난아이를 병원에 두고 상심한 마음으로 퇴원한 아내는 처제 김현숙 집사를 통하여 이재록 목사님의 간증수기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를 읽게 되었습니다.
간증수기를 읽고난 후 큰 은혜를 받은 아내는 이재록 목사님을 꼭 만나야겠다는 마음에 본교회 금요철야예배를 참석하였고 말씀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지요.
그 해 10월,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수과정(포스트 닥터)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바뀌고 생후 7, 8개월이 되었음에도 아들 준수의 발육이 더딘 것 같아 병원 진단을 받았지요. 그 결과 출생시 뇌손상으로 인한 후유장애 증세가 나타나고 있으며 심각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1. 간증수기를 읽는 아내 김현주 집사 2. 어릴 적 아들 대범이
2주연속 특별 부흥성회에 참석하여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고
1998년 4월, <제6회 이재록 목사 2주연속 특별 부흥성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는 믿음으로 기도 받으면 아들이 치료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녀들과 함께 귀국했고 저도 5월 초에 귀국하였습니다.
부흥성회 기간 중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 기도를 받은 후 뇌발육 부진으로 인한 장애로 울면서 자랐던 준수가 울음이 그쳤을 뿐 아니라 초점이 흐렸던 눈동자가 정상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가족들의 믿음이 날로 성장하게 되었고, 아들은 차츰 건강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요.
저희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연수과정을 마치고 그 해 10월에 귀국하여 본교회에 등록하였습니다.
임신의 축복과 함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을 깨달아
1999년 1월, 하나님께서는 아내에게 임신의 축복을 주셨고 얼마 후 아들 준수의 기력이 점점 약해지더니 결국 하늘나라로 데려 가셨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로서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있었지만 이내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을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축복을 주신 놀라운 섭리를 깨닫고 마음 중심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부모님께서도 '너희들이 어떻게든 아들을 치료하려고 부흥성회 참석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구나.'라고 하시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난 준수를 통하여 영적인 믿음을 주신 하나님! 치료의 역사를 체험하며 잘 성장하게 하셔서 행복한 추억을 남기신 후에 더 이상 준수로 인해 가족들이 고통 받지 않도록 새 생명을 주시고 천국으로 데려 가시는 섬세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니 참으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아들에 대한 모 방송의 거짓 보도로 애통하며 오직 믿음과 선으로 기도하니
그런데 1999년 4월말 경, 아내는 특별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언니 아들이 뇌성마비라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병상련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집에 방문하겠다는 요청을 쾌히 승낙했지요.
뇌성마비 아이의 이모라고 신분을 밝힌 여인은 한 시간 정도 대화하면서 아내가 전하는 간증에는 관심이 없고 제 아들이 정말로 치료를 받았는지, 천국에 간 아들을 만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자극하면서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니 잠시 슬퍼졌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간증하고자 했지요.
그러자 그분은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바삐 자리를 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전하고 싶어 뇌성마비 아이의 엄마에게 직접 연락하여 돕고 싶다며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극구 사양하다가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에 전화를 해 보니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였습니다. 순간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전혀 다른 의도로 접근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더구나 몰래 카메라를 소지하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지요.
모 방송 「PD 수첩」 본교회 관련 왜곡보도 직후 「제7회 이재록 목사 2주연속 특별 부흥성회」시 무수히 나타난 치료의 역사를 취재하기 위해 본교회에 몰려든 언론사 취재진들
그러던 1999년 5월, 모 방송에서 본교회 관련 내용이 보도된다기에 관심 있게 보고 있다가 얼마나 놀랐는지요. "1998년 11월, 뇌성마비 아들이 깨끗이 나았다고 증언을 했던 신도를 찾아가 보니…"하는 멘트와 함께 아들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축복은 일체 삭제된 채 사실을 왜곡한 장면이 방영되는 것이 아닙니까.
당시 아내와 저는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아내의 얼굴이 방송에 나오고 신분을 위장하고 몰래 카메라를 소지하는 등 일방적이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취재당한 배신감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평소 이재록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 상대를 용서하며 치료의 하나님을 만난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고자 힘썼지요.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부부를 마치 곤경에 처한 것처럼 거짓 보도한 방송으로 인하여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기를 바라며, 모 방송국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를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조산의 위기에서 지켜 주시고, 그 해 10월 5일 정상적이고 건강한 아들 대범이를 분만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함께 순산의 축복, 직장의 축복 등이 넘쳐나
하나님께서는 IMF로 인해 취직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고려대학교에서 연구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고 2001년 3월에는 대덕연구단지의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최상의 조건으로 근무하게 되었지요.
직장 관계로 대전에 내려가 살면서도 대전만민교회에서 남선교회 기관장 사명을 시작으로 열심히 기도하며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 노력하자, 2005년에는 남선교회 회장이라는 큰 사명으로 축복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소원이셨기에 근무 시간에는 전적으로 전공분야인 무기화학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순간순간 '연구시간을 더 가져야 하는데…'하면서도 제 마음에는 영혼구원이 자리잡고 있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했습니다.
연구에 최선을 다하면서 교회 부흥을 위하여 봉사와 심방에 주력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지혜와 명철을 주심으로 많은 연구 실적을 올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대학 교수 임용의 축복과 함께 모든 마음의 소원도 응답받아
2005년 6월,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서 교수채용 공고가 있었는데 제 전공은 무기화학으로, 2-3년에 한 번 정도 교수를 채용하기 때문에 매우 경쟁률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8월 초에 14명 중 5명을 뽑는 1차 서류전형에 선발된 후, 3명을 선발하는 2차 전형에 합격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지요.
얼마 후 공개 전형 테스트를 무난히 통과하고 마지막 면접시 교육 철학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도를 좇아 인내할 때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는 말씀을 예로 들며 참진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8월 말에 최종합격자로 선정되어 대학 교수 임용의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더불어 온 가족이 더욱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큰 축복의 길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니 모든 감사와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