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의 소식
제목
죽음 같은 산후풍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정든 교단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어요 - 김성순 집사
출처
날짜
2003년 2월 23일 일요일
조회수: 7951
● 김 성 순 집사
(고등학교 교사, 새광주만민교회)
저는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약 15년 간을 교편을 잡으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98년 어느 날, 갑자기 생리통과 변비가 심해지고 쉽게 피로를 느껴 검진을 받은 결과 난소의 혹을 빨리 제거하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난소의 혹은 여성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 여겼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지요.
난소 혹 제거 수술 후유증으로 산후풍 증세가 찾아와
그래서 1999년 1월, 겨울 방학을 이용해 난소 혹 제거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참으로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해 보니 수술 부위가 지혈이 되지 않아 뱃속에 피가 잔뜩 고였다는 것입니다.
곧바로 2차 수술을 받았지만 며칠 후 엄청난 양의 하혈을 하였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되자 병원 측에서는 가족들을 호출하였고, 뜻밖의 소식을 접한 남편과 친정 어머니, 그리고 동생이 병원으로 황급히 달려왔습니다.
얼마 후 다행히 하혈은 멈추었지만 두 번에 걸친 연속적인 수술, 전신마취 등으로 제 몸은 망가지기 시작했고 이어 수술 후유증으로 산후풍 증세가 엄습해 왔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바람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전신의 한기(寒氣)와 통증, 온몸의 마비 증세 등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따랐지요. 그 당시의 고통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한 고통을 받으며 절망 속에 살던 중
결국 산후풍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입원 15일 만에 퇴원하여 한방치료도 해 보고 보살 굿도 여러 번이나 했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마침내 교단에 설 수 없을 정도로 증세가 악화되어 휴직계를 내야만 했고 멀쩡했던 사람이 하는 일없이 병석에 누워만 있어야 하니 이 또한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투병 시간이 1년, 2년이 되니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견딜 수 없어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딸 건하, 아들 주용이,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기에 죽지는 못하였지요.
이처럼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 갇혀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만민중앙소식」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려
2000년 9월 말경,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는 은행 업무가 있어 기력이 쇠잔한 몸으로 오랜만에 외출하였는데 집으로 오는 길에 누군가가 「만민중앙소식」을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받지 않았지만 그날은 갑자기 받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민중앙소식」을 펼쳐 보는 순간 수많은 간증 사례들이 게재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당시 저는 MBC 문화방송의 왜곡 편파 보도로 인해 만민중앙교회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던터라 '정말 그럴까? 속임수가 아닐까?' 라는 의심이 자꾸 생겨났지만 이재록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치료받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을 못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 1주일 동안 망설이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새광주만민교회에 전화를 했지요."제가 밖에 나갈 수가 없는데 대신 심방을 와 주실 수 있어요?"
담임목사 최철진 목사님은 기도원에서 40일 금식중이었기 때문에 임영순 사모님께서 다음 날 즉시 심방해 주셨습니다. 그 후 사모님께서는 이재록 목사님의 설교 테잎과 「2000 이재록 목사 초청 우간다 연합대성회」 비디오 테이프를 건네주시면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해 10월, 새광주만민교회에 등록하였고 마침 40일 금식을 마친 최철진 목사님께서 서울로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뵈러 가는 길에 함께 가서 기도를 받기로 했습니다. 당시 제 몸 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기도를 받으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재록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말씀대로 살고자 힘썼더니
저는 한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두꺼운 옷을 걸쳐 입고 방석과 옷가지 등을 챙겨 서울로 향했습니다. 4시간 이상 걸려 사택에 도착하여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셨지요. 제 상황과 처지를 설명하면서 저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 올랐는데 "모든 질병에서 깨끗케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 주실 때 그동안 제가 맛보지 못했던 진한 사랑이 물밀듯 밀려왔습니다.
그 후 신기하게도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산후풍으로 인해 가장 고통스럽던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기에 저는 각종 예배를 참석하면서 「십자가의 도」, 「십계명」 등의 설교 테이프를 열심히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이재록 목사님의 간증수기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요. 7년이란 긴 병고의 삶 속에서 느낀 고통의 표현 하나하나가 제 심정과 똑같았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교단에 다시 설 수 있도록 축복하신 하나님
저는 만민중앙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 희한한 능을 통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목자임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누가 뭐라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고자 복용해 오던 한약도 끊고, 2001년 1월 초에는 한 끼만 굶어도 견딜 수 없던 제가 3일 금식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 7일 금식기도도 편안히 마치게 되었는데 금식을 기뻐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저를 더욱 강건케 역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성경을 읽고,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 나갔더니 몸이 점점 호전되어 산후풍 증세가 차츰 사라졌으며, 2001년 3월에는 학교에 복직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왜 이제 오셨어요? 다시 뵐 수 없는 줄 알았어요."
그토록 소망했던 교사생활을 다시 시작하니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너무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곳곳에서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으며 학원 선교와 해외성회시 통역요원으로서의 비전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건강해진 모습을 보고 딸 건하, 아들 주용이는 물론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께서도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는 고백을 하시며 새광주만민교회에 출석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니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 되었는지요.
모든 감사와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며, 귀한 생명의 말씀으로 양육하시며 진한 사랑의 기도를 해 주신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고등학교 교사, 새광주만민교회)
저는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약 15년 간을 교편을 잡으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98년 어느 날, 갑자기 생리통과 변비가 심해지고 쉽게 피로를 느껴 검진을 받은 결과 난소의 혹을 빨리 제거하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난소의 혹은 여성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 여겼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지요.
난소 혹 제거 수술 후유증으로 산후풍 증세가 찾아와
그래서 1999년 1월, 겨울 방학을 이용해 난소 혹 제거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참으로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해 보니 수술 부위가 지혈이 되지 않아 뱃속에 피가 잔뜩 고였다는 것입니다.
곧바로 2차 수술을 받았지만 며칠 후 엄청난 양의 하혈을 하였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되자 병원 측에서는 가족들을 호출하였고, 뜻밖의 소식을 접한 남편과 친정 어머니, 그리고 동생이 병원으로 황급히 달려왔습니다.
얼마 후 다행히 하혈은 멈추었지만 두 번에 걸친 연속적인 수술, 전신마취 등으로 제 몸은 망가지기 시작했고 이어 수술 후유증으로 산후풍 증세가 엄습해 왔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바람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전신의 한기(寒氣)와 통증, 온몸의 마비 증세 등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따랐지요. 그 당시의 고통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한 고통을 받으며 절망 속에 살던 중
결국 산후풍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입원 15일 만에 퇴원하여 한방치료도 해 보고 보살 굿도 여러 번이나 했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마침내 교단에 설 수 없을 정도로 증세가 악화되어 휴직계를 내야만 했고 멀쩡했던 사람이 하는 일없이 병석에 누워만 있어야 하니 이 또한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투병 시간이 1년, 2년이 되니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견딜 수 없어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딸 건하, 아들 주용이,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기에 죽지는 못하였지요.
이처럼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 갇혀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만민중앙소식」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려
2000년 9월 말경,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는 은행 업무가 있어 기력이 쇠잔한 몸으로 오랜만에 외출하였는데 집으로 오는 길에 누군가가 「만민중앙소식」을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받지 않았지만 그날은 갑자기 받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민중앙소식」을 펼쳐 보는 순간 수많은 간증 사례들이 게재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당시 저는 MBC 문화방송의 왜곡 편파 보도로 인해 만민중앙교회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던터라 '정말 그럴까? 속임수가 아닐까?' 라는 의심이 자꾸 생겨났지만 이재록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치료받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을 못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 1주일 동안 망설이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새광주만민교회에 전화를 했지요."제가 밖에 나갈 수가 없는데 대신 심방을 와 주실 수 있어요?"
담임목사 최철진 목사님은 기도원에서 40일 금식중이었기 때문에 임영순 사모님께서 다음 날 즉시 심방해 주셨습니다. 그 후 사모님께서는 이재록 목사님의 설교 테잎과 「2000 이재록 목사 초청 우간다 연합대성회」 비디오 테이프를 건네주시면서 전도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해 10월, 새광주만민교회에 등록하였고 마침 40일 금식을 마친 최철진 목사님께서 서울로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뵈러 가는 길에 함께 가서 기도를 받기로 했습니다. 당시 제 몸 상태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기도를 받으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재록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말씀대로 살고자 힘썼더니
저는 한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두꺼운 옷을 걸쳐 입고 방석과 옷가지 등을 챙겨 서울로 향했습니다. 4시간 이상 걸려 사택에 도착하여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셨지요. 제 상황과 처지를 설명하면서 저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 올랐는데 "모든 질병에서 깨끗케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 주실 때 그동안 제가 맛보지 못했던 진한 사랑이 물밀듯 밀려왔습니다.
그 후 신기하게도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산후풍으로 인해 가장 고통스럽던 추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기에 저는 각종 예배를 참석하면서 「십자가의 도」, 「십계명」 등의 설교 테이프를 열심히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이재록 목사님의 간증수기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요. 7년이란 긴 병고의 삶 속에서 느낀 고통의 표현 하나하나가 제 심정과 똑같았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교단에 다시 설 수 있도록 축복하신 하나님
저는 만민중앙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 희한한 능을 통해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고,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목자임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누가 뭐라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고자 복용해 오던 한약도 끊고, 2001년 1월 초에는 한 끼만 굶어도 견딜 수 없던 제가 3일 금식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 7일 금식기도도 편안히 마치게 되었는데 금식을 기뻐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저를 더욱 강건케 역사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성경을 읽고,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 나갔더니 몸이 점점 호전되어 산후풍 증세가 차츰 사라졌으며, 2001년 3월에는 학교에 복직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왜 이제 오셨어요? 다시 뵐 수 없는 줄 알았어요."
그토록 소망했던 교사생활을 다시 시작하니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너무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곳곳에서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으며 학원 선교와 해외성회시 통역요원으로서의 비전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건강해진 모습을 보고 딸 건하, 아들 주용이는 물론 시어머니와 친정 어머니께서도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는 고백을 하시며 새광주만민교회에 출석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니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 되었는지요.
모든 감사와 영광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며, 귀한 생명의 말씀으로 양육하시며 진한 사랑의 기도를 해 주신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