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의 소식
제목
18년간의 무당생활을 청산하니 새인생을 사는 기쁨이 넘쳐납니다 - 한병옥 성도
출처
날짜
2000년 1월 30일 일요일
조회수: 7566
스무 살이 되던 1977년 봄, 저는 당시 잘 팔리던 '아이스 케이크(팥과 단물을 주원료로 한 빙과류)' 공장을 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혼의 단꿈도 잠시 새로운 빙과류가 시장에 나오면서 공장은 하루 아침에 문을 닫게 되었고 결국 떡볶이, 오뎅 장사 등을 하며 힘겨운 살림을 꾸려나가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심한 두통과 무기력 증세가 나타나면서 몸이 항상 무거웠습니다. 마침내 병원에 입원까지 하였으나 정확한 병명은 찾지 못한 채, 65kg이었던 몸무게가 29kg까지 내려가 산송장과 다를 바 없게 되었지요.
원인 모를 질병으로 무당의 길에 들어섰으나
그러자 시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용하다는 무당집에 가서 점을 보았는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기가 있어, 무당을 해야 나을 수 있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이곳저곳 다녀 보았지만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우선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나이 스물 여섯이 되던 1983년, 무당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저는 신령술이라는 신내림을 받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입술로 나오는 대로 줄줄 말하기만 하면 손님들은 '참 용하다.'며 놀라워했지요. 이로 인해 소문에 소문을 더하면서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다 가야 할 팔자인가?
아무리 제가 '쪽집게' 무당이라 해도 정작 제 자신이 아프니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조상신에게 낫게 해 달라고 손바닥이 닳도록 빌어도 보고, 굿판을 벌여보기도 했지만 얼마간은 병이 낫는 것 같다가도 조금 지나고 나면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거나 더욱 상태가 악화되기만 하였습니다.
게다가 무당생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의 불화가 끊이질 않아 1989년 봄, 가족을 떠나 계룡산 밑 암자로 들어갔지요. 그러나 굿을 하고 점을 보면 볼수록 공허감이 찾아오면서 무당생활에 대한 회의가 거세게 밀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산당을 부수고 거처를 옮긴 후, 그 해 가을부터 다방, 칼국수 집 등을 운영해 보았지만, 하는 것마다 불통이었습니다.
만성 신부전증이라는 판정을 받고
"당신은 무당을 계속해야 돼."라는 점쟁이들의 말에 다시 산당을 차렸지만 부채만 늘어 3천여 만 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지난해 11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저는 마침내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지요. 병세가 워낙 중해 충북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만성 신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당생활로 인해 가정을 팽개치다시피 했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오지를 않아 참으로 난감하였습니다. 그 때 오빠인 한병용 장로님이 떠올랐습니다.
한병용 장로님은 어릴 적부터 효심이 남달랐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월남 파병을 자원하는 등 애틋한 정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빠는 저를 도와 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요. 종교적인 문제로 갈등이 많았지만 오빠는 선뜻 힘껏 돌보아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니
그래서 오빠가 경기도 안성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인 만민복지타운과 가까운 단국대병원으로 옮겨 와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만성 신부전증으로 신장 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술비용이 없어서 투석(dialysis)을 하기로 결정을 했지요.
병원측에서는 투석 준비 수술을 완료하였으니 퇴원해도 좋다고 했으나 막상 돌아갈 집이 없었습니다. 그 때 오빠는 함께 살기를 권유하면서 함께 살려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했지요. 결국 저는 오빠의 사랑에 진한 감동을 받고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오빠! 나 오빠한테 가서 하나님 믿으며 살래" 저는 만민복지타운에 있으면서 이재록 목사님의 간증수기인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를 읽게 되었습니다. 7년 간의 병고에 시달리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단번에 모든 질병을 깨끗이 치료받아 권능의 종이 되신 이재록 목사님에게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도 하나님을 믿으면 치료받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 "하나님, 정녕 살아 계시다면 제 병을 고쳐 주세요!" 하고 혼잣말로 되뇌이곤 했지요.
18년간의 무당 생활을 청산하고 신장병을 치료받아
그 후 말씀을 통해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시며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즉시 충북 증평에 있던 산당을 때려 부수고 작년 12월 3일, 드디어 18년 동안의 무당생활을 청산한 후 본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영혼 사랑의 열정이 있기 때문에 오빠는 제게 믿음을 심어 주려고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사와 표적, 희한한 능과 기이한 일들을 소개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제 마음 안에서 우상을 깨끗이 몰아내기 위해 힘쓰셨습니다.
등록 후 저는 이재록 목사님의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를 매일 하루에 세 차례씩 간절히 받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신장 이식 수술을 하지 않고 투석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정기 검진 결과 악화되지 않고 그대로 멈춘 것입니다.
그러던 12월 10일 밤,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제 병을 치료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꿈 속에서 하얀 옷을 입으신 분이 콩팥 두 개를 가져오더니 "너를 살려 주마." 하면서 제 배에 넣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잠을 깬 후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고 몸에 부기나 통증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틀 후 12월 12일 주일에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찾아뵙고 치료받은 간증을 하고 기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 기도받은 후 식사량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병원에 가서 진단해 보았더니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해야 한다던 의사 선생님께서 "투석을 안 해도 되겠네요. 괜찮아졌어요."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할렐루야!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와 [손수건 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그런데 작년 12월 21일 오후에 예기치 않은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무속인 협회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하며 전도를 하던 중, 그들로부터 심한 저주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그 날 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더니 천장이 돌아가면서 방바닥과 천장이 붙는 듯 하였습니다. 밤새 잠을 설친 채 아침에는 심한 구토와 함께 열이 나면서 혈압이 올라 거의 실신 상태가 되고 말았지요.
오빠는 일단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를 받게 한 다음 119 구급차를 불러 천안 단국대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일종의 어지럼증인 '양성 특발성 체위성 현훈증'이었는데, 병원에서는 안쪽 귀의 평형을 유지하는 기관에 찌꺼기가 생겨 발생한다며 특별한 치료방법은 없고 서서히 증상을 완화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저를 방해하는 악한 영의 역사였던 것이지요.
금년 1월 3일,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신 방현호 목사님이 이재록 목사님께 기도받은 손수건을 귀에 대고 간절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초점이 없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부축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었던 제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며 다음 날인 1월 4일,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제는 자녀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교회에 등록하여 얼마나 감사한지요. 지옥으로 향하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오빠와 치료의 역사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신 이재록 목사님, 그 외에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심한 두통과 무기력 증세가 나타나면서 몸이 항상 무거웠습니다. 마침내 병원에 입원까지 하였으나 정확한 병명은 찾지 못한 채, 65kg이었던 몸무게가 29kg까지 내려가 산송장과 다를 바 없게 되었지요.
원인 모를 질병으로 무당의 길에 들어섰으나
그러자 시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용하다는 무당집에 가서 점을 보았는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기가 있어, 무당을 해야 나을 수 있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이곳저곳 다녀 보았지만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우선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나이 스물 여섯이 되던 1983년, 무당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저는 신령술이라는 신내림을 받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입술로 나오는 대로 줄줄 말하기만 하면 손님들은 '참 용하다.'며 놀라워했지요. 이로 인해 소문에 소문을 더하면서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다 가야 할 팔자인가?
아무리 제가 '쪽집게' 무당이라 해도 정작 제 자신이 아프니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조상신에게 낫게 해 달라고 손바닥이 닳도록 빌어도 보고, 굿판을 벌여보기도 했지만 얼마간은 병이 낫는 것 같다가도 조금 지나고 나면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가거나 더욱 상태가 악화되기만 하였습니다.
게다가 무당생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의 불화가 끊이질 않아 1989년 봄, 가족을 떠나 계룡산 밑 암자로 들어갔지요. 그러나 굿을 하고 점을 보면 볼수록 공허감이 찾아오면서 무당생활에 대한 회의가 거세게 밀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산당을 부수고 거처를 옮긴 후, 그 해 가을부터 다방, 칼국수 집 등을 운영해 보았지만, 하는 것마다 불통이었습니다.
만성 신부전증이라는 판정을 받고
"당신은 무당을 계속해야 돼."라는 점쟁이들의 말에 다시 산당을 차렸지만 부채만 늘어 3천여 만 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지난해 11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저는 마침내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지요. 병세가 워낙 중해 충북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만성 신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당생활로 인해 가정을 팽개치다시피 했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오지를 않아 참으로 난감하였습니다. 그 때 오빠인 한병용 장로님이 떠올랐습니다.
한병용 장로님은 어릴 적부터 효심이 남달랐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월남 파병을 자원하는 등 애틋한 정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빠는 저를 도와 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요. 종교적인 문제로 갈등이 많았지만 오빠는 선뜻 힘껏 돌보아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니
그래서 오빠가 경기도 안성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인 만민복지타운과 가까운 단국대병원으로 옮겨 와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만성 신부전증으로 신장 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술비용이 없어서 투석(dialysis)을 하기로 결정을 했지요.
병원측에서는 투석 준비 수술을 완료하였으니 퇴원해도 좋다고 했으나 막상 돌아갈 집이 없었습니다. 그 때 오빠는 함께 살기를 권유하면서 함께 살려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니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했지요. 결국 저는 오빠의 사랑에 진한 감동을 받고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오빠! 나 오빠한테 가서 하나님 믿으며 살래" 저는 만민복지타운에 있으면서 이재록 목사님의 간증수기인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를 읽게 되었습니다. 7년 간의 병고에 시달리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단번에 모든 질병을 깨끗이 치료받아 권능의 종이 되신 이재록 목사님에게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도 하나님을 믿으면 치료받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 "하나님, 정녕 살아 계시다면 제 병을 고쳐 주세요!" 하고 혼잣말로 되뇌이곤 했지요.
18년간의 무당 생활을 청산하고 신장병을 치료받아
그 후 말씀을 통해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시며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즉시 충북 증평에 있던 산당을 때려 부수고 작년 12월 3일, 드디어 18년 동안의 무당생활을 청산한 후 본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뜨거운 영혼 사랑의 열정이 있기 때문에 오빠는 제게 믿음을 심어 주려고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사와 표적, 희한한 능과 기이한 일들을 소개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제 마음 안에서 우상을 깨끗이 몰아내기 위해 힘쓰셨습니다.
등록 후 저는 이재록 목사님의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를 매일 하루에 세 차례씩 간절히 받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신장 이식 수술을 하지 않고 투석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정기 검진 결과 악화되지 않고 그대로 멈춘 것입니다.
그러던 12월 10일 밤,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제 병을 치료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꿈 속에서 하얀 옷을 입으신 분이 콩팥 두 개를 가져오더니 "너를 살려 주마." 하면서 제 배에 넣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잠을 깬 후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고 몸에 부기나 통증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틀 후 12월 12일 주일에 당회장 이재록 목사님을 찾아뵙고 치료받은 간증을 하고 기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 기도받은 후 식사량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병원에 가서 진단해 보았더니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해야 한다던 의사 선생님께서 "투석을 안 해도 되겠네요. 괜찮아졌어요."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할렐루야!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와 [손수건 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그런데 작년 12월 21일 오후에 예기치 않은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무속인 협회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하며 전도를 하던 중, 그들로부터 심한 저주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그 날 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더니 천장이 돌아가면서 방바닥과 천장이 붙는 듯 하였습니다. 밤새 잠을 설친 채 아침에는 심한 구토와 함께 열이 나면서 혈압이 올라 거의 실신 상태가 되고 말았지요.
오빠는 일단 [음성전화사서함 환자기도]를 받게 한 다음 119 구급차를 불러 천안 단국대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일종의 어지럼증인 '양성 특발성 체위성 현훈증'이었는데, 병원에서는 안쪽 귀의 평형을 유지하는 기관에 찌꺼기가 생겨 발생한다며 특별한 치료방법은 없고 서서히 증상을 완화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저를 방해하는 악한 영의 역사였던 것이지요.
금년 1월 3일,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신 방현호 목사님이 이재록 목사님께 기도받은 손수건을 귀에 대고 간절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초점이 없던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부축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었던 제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며 다음 날인 1월 4일,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제는 자녀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교회에 등록하여 얼마나 감사한지요. 지옥으로 향하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오빠와 치료의 역사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신 이재록 목사님, 그 외에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